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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127강. 보지 못하고 믿는 자의 복 (요 20:24-31)

by coroa 2022. 2. 15.

 

하늘빛사랑 https://blog.daum.net/day7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27강. 보지 못하고 믿는 자의 복 (요 20:24-31)

-.정낙원 목사

 

요 20:24-31절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오늘 본문은 좀 난해 합니다.

표피적으로 보면 도마의 불신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도마의 불신을 지적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복을 주어서 예수를 보지 않고서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케 하신다는 복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극적인 면에서는 도마의 불신을 책망하는 것이지만 적극적인 면에서는 이렇게 책망 받아야 할 자들을 하나님은 기어코 복에 자리로 끌고 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을 통해서 두 가지 의미를 다 보아야 합니다.

 

모든 성경이 다 그러해요.

죄 가운데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소극적으로 책망 받는 일에 머물지 말고 적극적으로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세요.

맨 날 배도하다가 얻어터지고 다시 회복하는 수순을 밟고 있지요.

이는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떠나고자 하는데 하나님은 끝까지 자기 백성을 끌어안고 챙긴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애끓는 사랑 이야기가 성경 이야기에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 하나님의 자기 백성 사랑이야기에요.

십자가 도가 바로 자기를 죽인 자를 용서하는 것으로 담고 있잖아요.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이야기를 보면서 먼저 우리의 악함을 고발당하고 거기에 머물지 말고 이러한 죄인을 주의 긍휼로 용서 받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신앙은 자기를 자학하거나 비하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그 은혜에 압도당하고 감사하여야 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뭘 안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더 열심히 모이고!

더 열심히 충성하고!

더 열심히 봉사하고!

더 열심히 사랑하여야 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에 어떤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은 안하는 것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이건 복음이 아니에요.

탐심으로 인하여 공교하게 지은 말이에요.

그러니 처음 형편이 나중 형편보다 더 나빠지는 것입니다.

 

차라리 율법 아래 있는 것이 나을 뻔 했어요.

어쭙잖게 복음을 안답시고 해서 영적 깡패가 되고 말잖아요.

여기저기서 베껴서 편집하여 그럴 듯한 논리를 만들어 말장난하는 것을 복음이라고 들으니까 마음은 얼음장같이 차갑고 기쁨도 없고 웃음도 상실하고 말았잖아요.

 

제가 스스로 진단하는 시약(試藥)을 하나 알려 드릴게요.

내가 지금 듣고 있는 것이 참 복음인지 아니면 공교하게 지은 말인지 판단하는 팁입니다.

그 복음이 나로 하여금 따뜻하게 하고 있는지 아니면 차갑게 하고 있는지 분별해 보세요.

내가 부정적인 사람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긍정적인 사람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판단해 보세요.

 

부정적으로 나아간다면 거짓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감사가 나오지 않고 정죄와 비판과 악독과 독설이 나온다고 한다면 그건 뱀의 독을 마시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지 죽이는 것이 아니에요.

부정적인 사람을 긍정적으로 만들고 감사하게 하는 것이에요.

우린 죄 아래 있었어요.

죄는 부정적이고 죽이는 자들이었어요.

 

그런데 예수그리스도 인하여 살리심을 입었어요.

부정에서 긍정으로 옮겨짐을 당하였어요.

법에서 은혜로 옮겨졌어요.

죽은 세상에서 산 세상으로 옮겨짐을 당했어요.

예수그리스도가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 놓았단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천국으로 사는 것이지 지옥으로 사는 것이 아니에요.

천국은 따듯하고 사랑이 넘치는 곳이에요.

반대로 지옥은 차갑고 서로 물어뜯고 미워하는 곳이에요.

내 마음이 따뜻하면 천국이고 차가우면 지옥인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천국을 몰고 왔어요.

그러므로 그 안에 천국이 임한 사람은 따뜻한 것입니다.

하지만 지옥인 사람은 차가워요.

 

제가 이번에 미국 집회를 다녀오고 나서 듣는 소문이 참으로 감사한 소문이에요.

많은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동안 자기들은 너무 차가웠다고 해요.

 

복음 안다는 것으로 주변에 사람들을 다 밀쳐냈다고 합니다.

속된 말로 복음도 모르는 것들이 하면서 자신은 그들과 다름으로 있다고 하면서 가까이는 가족과 담을 쌓고 이웃과 친구와 친척과 형제들에게도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 집회에 참석하고 복음을 듣고는 차가움이 사라지고 온기(溫氣)가 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놀란다는 거에요.

이상하게 눈물이 많이 나오고 조그마한 일에도 감동을 많이 받으며 감사가 나온다고 해요.

그래서 자기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운동하고 있음을 깨닫는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복음을 머리로 받아서 지식으로만 알았는데!

이번엔 가슴으로 받아서 삶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너무 감사하다고 해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이건 마치 엘리야가 죽은 수넴 여자의 아들의 몸에 올라가서 입과 입을 맞대고 눈과 눈을 맞대고 손과 손을 맞대고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의 온기를 죽은 아이에게 다운로드하여서 살려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죽어서 차갑던 아이가 엘리야의 살아 있는 생명의 따뜻한 기운을 받아서 차가움에서 따뜻함으로 살아난 것과 같아요.

 

이게 복음이 주는 능력인 것입니다.

이건 미국에 계신 분들에게만 듣는 것이 아니에요.

서울이고 전라도이고 함께 성경을 배우고 제 블로그에 글을 보시는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고백하는 말씀들이에요.

이런 전화를 수없이 받아요.

참 감사하지요.

 

우린 죽은 자들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 죽은 몸을 엘리야가 죽은 아이를 감싸 안듯이 안아 주어서 따뜻한 생명의 기운을 공급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난 사람들은 말이 따뜻하고 손과 발이 행하는 선행이 따뜻하고 마음이 따뜻해요.

이게 예수 안에서 살아난 산 자들의 모습이에요.

 

스스로를 진단해 보세요.

나는 지금 따뜻합니까?

차갑습니까?

사도들이 서신서에서 왜? 부정과 불의와 악독을 버리고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하는지 아세요.

 

우린 그런 자리에 있다가 옮겨짐을 당했기 때문이에요.

신분이 달라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달라진 신분으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해 보세요.

 

내가 지금 천국으로 사는지,

아니면 지옥으로 사는지,

부정적인 사람인지 긍정적인 사람인지,

따뜻한 사람인지 차가운 사람인지,

 

이건 윤리 도덕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바리새인들같이 법으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사는지 아니면 예수그리스도와 같이 은혜와 긍휼과 용서로 사는지 달아 보시란 말입니다.

 

아무리 크고 비밀한 복음을 안다고 하여도 그 속에 사랑이 없으면 광이에요.

내 마음이 무관 지옥인데 복음을 안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요.

그 복음은 생명이 없는 죽은 귀신의 말인 것입니다.

인간들이 공교하게 지어서 만든 말이란 말입니다.

나 하나도 살리지 못하는데 그깟 복음 알면 무슨 소용이 있나요.

 

복음에도 두 가지가 있어요.

은사로 알아진 성령의 감동으로 주어지는 복음과,

인본주의 학문으로 배워서 만든 복음이 있어요.

성령의 감동으로 주어지는 복음 속에는 예수의 생명에 따뜻함이 묻어나요.

 

그러나 설교 잘하여서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좀 끌어 보려고 여기저기서 좋은 글들을 짜깁기 하듯이 편집하여서 흉내 내는 복음 속에는 성경적 지식은 얻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곳에서 생명이 나오지 않아요.

이런 설교를 들으면 십중팔구 부정적이 되고 비판적이고 마음이 차가워져요.

 

성령의 감동으로 쏟아내는 복음 속에는 예수님의 마음이 배태되어 아비의 심정으로 다가가지만 학문적 지식으로 뱉어내는 복음에는 선생과 같이 가르치기만 하였지 그 속에 아비의 마음이 없어요.

선생과 같이 가르치는 자들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자기도 선생과 같이 말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동일한 내용의 복음이라도 극명하게 달라요.

이건 마치 유정란(有精卵)과 무정란(無精卵)과 같아요.

계란 속에 생명을 낳는 유정란과 생명이 없는 무정란이 있듯이,

이 시대 전해지는 복음 속에도 생명을 살리는 유정란의 복음이 있고, 생명이 없는 무정란의 복음이 있어요.

 

유정란의 복음을 들으면 그 사람의 심령이 살아나고 생기가 돌지만,

무정란의 복음을 들으면 마음이 싸늘해지고 스스로 죽어가게 되어요.

스스로 잘 분별해 보세요.

 

바울은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버리운 자라고 하였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으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오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마귀가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를 만났으나 못 만났느냐 라는 만남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가 오늘 본문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도마는 보지 못하고 못 믿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보지 않고는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고 하던 도마를 예수님께서 어떻게 보지 않고 믿는 자로 만들어 가는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봅시다.

이건 죽은 자를 살려내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후 첫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 때에는 도마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도마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여서 자신들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도마는 나는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만져보지 않고서는 못 믿겠다고 합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여드레 후에 예수님이 두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납니다.

이 때는 도마도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의 마음을 훤히 아시고는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 보게 합니다.

그리곤 이제는 믿겠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도마가 예수님은 “나의 주시여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 되다” 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요한복음은 마치 왜? 이런 말을 하는지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하듯이 예수님께서 많은 표적을 행하셨지만 기록하지 않고 이 부분만 기록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하고 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생명이 주어진다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육적으로 문자적으로 보게 되면 마치 우리의 의지를 동원해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육에 속한 자들은 의지를 발동해서 믿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더러 믿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예수는 우리더러 믿으라고 해서 믿을 수 있는 분이 아니에요.

복음은 우리의 각오로 믿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셔야지만 믿을 수가 있어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도마에게 제발 날 좀 믿어 달라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반대에요.

인간들이 믿지 못하는 것을 믿어지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의심 많은 도마를 어떻게 주께서 간섭을 하여서 믿음에 사람으로 세워 가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이는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 라는 말입니다.

이는 인간들의 의식구조를 잘 말해주고 있는 말입니다.

인간들의 의식구조는 자기 눈으로 보아야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를 거부합니다.

성경은 보지 않고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믿음이란?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본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게 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믿음은 보지 못한 것을 믿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게 인간의 상식으로는 말이 안 되어요.

인간의 상식은 본 것을 믿어요.

인간은 자기가 경험 된 것을 믿음으로 내어 놓아요.

 

인간들에게는 보지 못한 것은 없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보지 못한 것은 못 믿는 것입니다.

아니~ 믿고 싶어도 안 믿어져요.

 

어떻게 보지 못한 것을 믿는단 말입니까?

이건 인간의 이성으로는 불가능해요.

그러므로 인간들이 믿는다고 할 때는 자기가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고 본 것을 믿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이 아니고 자기가 경험한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라고 합니다.

이는 “너는 나를 보지 못하고는 못 믿는 자” 라는 말입니다.

그건 믿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음이 뭐냐?

나를 보지 않고 믿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 되도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들은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도마는 지금 보지 않고 믿어지는 복을 받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예수님이 나타났다고 하니까 거짓말 하지마!

나는 보지 않고는 안 믿어!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여드레 후에 도마에게 나타나서 네가 나를 보지 못하고는 못 믿겠다고 하는 것은 곧 아버지로부터 보지 않고 믿는 복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복을 받은 자들은 예수를 보지 않고서도 믿어요.

이게 믿음이에요.

 

오늘은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봅시다.

 

믿음이 뭐냐?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말이 어렵지요.

 

아니~ 믿을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우리의 이성은 믿을 수 없는 것은 믿을 수가 없어요.

이게 인간의 상식이에요.

 

그런데 성경을 열면 성도들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다고 해요.

어떻게 믿느냐?

믿음으로 믿어요.

 

아까 예수님이 도마에게 복이 뭐라고 했나요?

보지 않고 믿는 것이라고 했잖아요.

아버지께 복을 받은 자는 보지 않고 믿는다고 했잖아요.

 

복이 무엇이냐?

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이에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게 하려고 믿음이라는 복을 주었어요.

 

자 보세요.

예수님이 부활했어요.

이건 인간의 상식으로는 믿을 수 없는 사건이에요.

 

인간의 상식에는 부활이란 없어요.

죽으면 끝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에서 살아났어요.

 

이건 인간들에게는 황당한 사건입니다.

이 황당한 사건을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펼치셨어요.

인간들은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 하신 것은 엄연한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사실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벌리신 황당한 사건들을 인정하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 입장에서 창조주가 하는 일은 황당 그 자체에요.

피조물은 창조주가 하는 일을 이해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피조물이 창조주를 인식하고 보는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의 인식론은 유(有)에서 유(有)가 나오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창조주는 무(無)에서 유(有)로 일하세요.

피조물은 있음에서 없음으로 나아가요.

산 자에서 죽은 자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창조주는 없음에서 있음으로 일을 합니다.

죽은 것을 살려 내는 식으로 일을 하세요.

피조물에겐 죽음은 끝이지만 창조주에겐 죽음은 시작인 것입니다.

 

죽으면 끝이라는 인식론으로 살아가는 피조물 입장에선 죽음에서 부활이라는 생명으로 나아오는 창조의 매카니즘은 아주 낯설고 생경해요.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아요.

그러니까 도마처럼 난 예수가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것을 못 믿겠어! 라고 하는 것입니다.

 

도마는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도마에게 믿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바라보도록 인식의 전환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는 말씀은 우리더러 믿으란 말이 아니에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주와 그리스도 되심은 우리가 믿겠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이건 믿음을 선물로 받아야지만 믿어져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도마에게 믿는 자가 되라는 것은 도마 더러 이성을 발동해서 믿으라는 말이 아니고 너희가 믿음을 받으면 나의 죽음과 부활이 믿어지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결과론적으로 말하면 나중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나자 이 사실들이 믿어져서 증거하기 시작을 하였어요.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 입장에서는 창조주를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이해한다고 하여도 기껏해야 피조물 수준으로 이해합니다.

 

이건 이해가 아니에요.

몰이해에요.

왜냐하면! 창조주를 피조물 수준으로 이해하는 잘못된 이해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이해 할 수 있는 길은 창조주의 마음을 주실 때입니다.

하나님은 이 창조주의 마음을 주시는 일을 합니다.

그것도 자기 백성들에게 국한해서 성령을 주어서 믿어지게 해 주세요.

 

성경은 성령을 일컬어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는 분이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을 봅시다.

 

고전 2:1-1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 하였으리라 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지금 십자가 도를 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 도를 지혜의 권하는 말로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즉 인간의 상식으로 전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도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 불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식에 반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자기 백성들 손에 죽게 하시고는 자기 백성들을 살려내는 방식으로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9절에 보면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눈과 귀와 마음을 감기게 해 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예수를 몰라보고 죽이게 하였습니다.

 

그래 놓고서는 성령을 보내서 이 사실을 알게 합니다.

성령이 오고 나니까 자기들이 예수를 죽인 것은 곧 하나님을 죽인 것임을 알게 되었어요.

자기들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원수들이 용서를 받았어요.

세상에!

그러니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장본인이에요.

바울은 스스로를 예수를 핍박하고 죽인 포행자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악당이 용서를 받았다고 했어요.

이걸 어찌 인간들의 지혜로 알 수가 있겠어요.

없어요.

 

하나님은 왜? 이러한 식으로 일을 하실까요?

이는 곧 창세전 언약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용서의 언약이에요.

 

죄 아래 가두어진 자들을 그 아들이 죽어서 살려내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의 피로 살아난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서 세상에 감당치 못할 그 은혜를 깨닫고 영원토록 찬미케 하는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를 보내서 죽임 당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세상의 관원들의 지혜로 몰라보았다고 합니다.

즉 우리가 몰라보고 죽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알았으면 안 죽였어요.

예수를 몰라서 죽인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몰라보게 하셨어요.

왜? 그런가요?

예수를 죽여서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용서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려고 죄 아래 가둔 것입니다.

이 역설을 알아야 해요.

그래야 예수님의 십자가 도가 구원의 도라는 것을 알게 되어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뭡니까?

자기 백성들이 자기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을 죽인 사건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예수의 죽음을 근거로 자기 백성들을 살려내세요.

살리심을 받은 자들은 놀라서 입을 가리고 주여 감사합니다만 외치게 되어 있어요.

이걸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한다고 합니다.

 

성령이 오고 나니까 이러한 사실들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고 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깨닫게 해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도 성령을 받고 나서 이 사실을 알았어요.

 

우리도 성령이 오고 나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성령을 받고 보니 하나님께서 왜? 이런 방식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지 그 깊은 것을 통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도마에게 자신의 죽음에 근거를 보여주지요.

십자가에서 받았던 그 상처 자국을 보여주잖아요.

그리고는 믿으라고 합니다.

이에 도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였지만 그러한 것은 기록하지 않고 오직 도마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이 사건 하나만을 기록케 한 것은 너희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예수의 이름으로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라고 하잖아요.

 

본문을 다시 한 번 봅시다.

 

요 20:24-31절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 이야기를 전개하는 과정을 잘 보세요.

언뜻 보면 도마의 불신을 책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에요.

책망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떻게 복음이 믿어지게 해주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를 하는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어요.

동의가 되면 따르시고 안 되면 버리세요.

저도 처음엔 표피적으로 도마의 불신을 책망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어요.

그런데 요한복음을 강해해 오면서 다른 각도로 이해 할 수가 있다는 여지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알다시피 도마 이야기는 나사로의 죽음에서 한번 언급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 지체하다가 사나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었다고 하자 도마가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어요.

도마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는 일을 직접 목도했어요.

그럼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였어요.

 

앞서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보고 제자들에게 알려 주었을 때 제자들은 마리아의 말을 믿지 않았어요.

그러니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은 것은 제자들이나 도마나 마찬가지에요.

그럼에도 오늘 본문에서는 유독 도마만 예수님의 부활을 안 믿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도마를 통해서 말해주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요?

이는 하나님께서는 믿을 수 없는 일들을 제자들에게 믿음을 주어서 믿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는 도마처럼 믿을 수 없는 일임에도 믿음의 복을 주어서 반드시 믿어지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혹자들의 말처럼 도마의 비관론적 신앙이나 회의론적 신앙을 고발하고자 함이 아니고 이렇게 반 이성적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믿어지게 해 주시는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해석하고 싶어요.

 

그럼 제가 깨달은 것으로 해석합니다.

오늘 본문을 끌어오면서 도마를 그냥 도마라 하지 않고 12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 라는 도마라고 하지요.

 

디두모란? “쌍둥이” 라는 말이에요.

쌍둥이란? 똑 같은 또 다른 하나가 있다는 말입니다.

디두모 라는 말은 “둘”이라는 뜻도 있지만 “이중적인” 이라는 의미도 있어요.

 

이중적이란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도마가 하는 일에는 쌍둥이처럼 둘이면서도 두 가지 의미가 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쌍둥이라고 한다면 또 다른 그가 있겠지요.

또 다른 그가 누구인가요?

오늘 본문에 앞서서 등장한 제자들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12 제자와 도마를 하나로 연결하듯이 12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 라는 도마 라고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12 제자와 도마를 하나로 묶어두고자 하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앞서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난 사건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동일한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앞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 날에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첫 번째 나타난 사건입니다.

 

이건 지난 시간에 살펴본 이야기입니다.

지난 시간 본문을 한 번 볼까요.

 

요 20:19-23절 “이 날 곧 안식 후 첫 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 앞서 지난 시간에도 동일한 사건을 보게 되지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자기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고 평강을 주시잖아요.

이 때는 도마가 없었고 지금은 도마가 있어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앞에서 말한 이야기와 같으면서도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는 앞에서 말한 것을 재해석을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쌍둥이 도마라고 하지 않고 12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 라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 제자들이 예수를 만난 것과 도마가 예수를 만난 사건이 언제 일어납니까?

“여드레” 후라고 하지요.

8일!

 

무슨 8일입니까?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후 8일입니다.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은 부활하신 그 날입니다.

안식 후 첫 날이었어요.

 

안식 후 첫 날도 8일이에요.

안식 후 첫 날인 처음 8일째는 도마가 없는 날이었어요.

이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자신의 손과 옆구리는 보여주시면서 평강을 주십니다.

그리곤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면서 숨을 내 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성령이 실제적으로는 오순절 날에 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도를 증거하기 시작을 합니다.

십자가 도가 증거 되자 자기 백성들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하게 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영생이 주어지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에 예수를 나의 주시오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누가 했나요?

도마가 했지요.

도마가 이 고백을 언제 합니까?

두 번째 8일 째에요.

 

잘 보세요.

첫 번째 8일 째인 안식 후 첫 날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숨을 내 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그 성령은 오순절 날에 왔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안식 후 첫 날에 나타나서 하신 것은 잠시 후 오순절 날에 일어나는 일들을 약속으로 주신 것입니다.

약속한 것이 실제로 일어난 것은 오순절 날이에요.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자 부활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의 사고가 역사에서 묵시로 바뀌게 되었어요.

이 날이 바로 8일 안식일이에요.

 

역사 속에는 8일 안식일이 없어요.

7일 안식일만 있어요.

역사는 7이라는 싸이클로 돌아가요.

 

그러니까 8은 역사 바깥에 있는 묵시에 속한 날인 겁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찾아온 날이 역사 속에 7이라는 안식 후 첫 날이잖아요.

8일 째잖아요.

 

성경이 안식 후 첫 날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날이란 말이에요.

세상은 1에서 7이라는 싸이클로 순환하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후에 8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러니 8은 부활의 세계 즉 묵시에 속한 날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첫 번째 8일 째 나타났을 때는 도마가 없었고!

두 번째 8일 째에는 도마가 있는 것입니다.

 

도마를 뭐라고 했나요?

디두모 즉 쌍둥이 도마라고 하지요.

그냥 쌍둥이가 아니고 12 제자 중에 하나인 쌍둥이라고 합니다.

이는 12 제자와 같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앞선 안식 후 첫 날에 도마가 없을 때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제자들이나 두 번째 8일인 여드레 만에 도마가 있을 때 예수님이 나타난 것은 쌍둥이처럼 같은 이야기란 말입니다.

같은 사건을 재 해석 해 주고 있다는 말이에요.

 

알다시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 날인 8일째 나타나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면서 숨을 내 쉬었지만 실제로 성령을 받지 않았어요.

문을 잠가 놓고 두려움에 떨었어요.

그 누구도 나가서 예수를 증거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안식 후 첫 날인 8일에 일어난 사건은 성령을 주시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는 그 날이 바로 진짜 8일째 안식일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서 제자들이 역사에서 묵시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8일째 날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오순절 날이 8일째 날이 되고 이 때가 되면 예수님이 첫 번째 안식 후 첫 날인 8일에 나타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그 약속이 실제로 성취가 된 것입니다.

 

처음 8일 째인 안식 후 첫 날에 제자들의 모습과 나중에 여드레 만에 나타난 두 번째 8일 째인 오늘 본문에 제자들의 모습을 달라요.

첫 번째 나타났을 땐 “나의 주시오 나의 하나님” 이라는 신앙 고백이 없었어요.

그러나 두 번 째는 “나의 주시오 나의 하나님” 이라는 신앙 고백을 도마가 대표로 하게 됩니다.

 

“나의 주시오 나의 하나님” 이라는 말은 곧 “예수는 주와 그리스도” 라는 말과 같아요.

 

“나의 주시오 나의 하나님” 이라는 고백이 언제 실제로 일어나는가요?

오순절 성령 강림하신 날에 일어났어요.

오순절 날이 이르러 성령이 강림하자 여기저기서 예수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어요.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기 전에 이 신앙 고백을 누가 했나요?

도마가 했어요.

언제 했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후 두 번째 8일 째에요.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 날에 부활 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제자들은 도마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지 않았어요.

그땐 놀라서 그저 꿀 먹은 벙어리 마냥 가만히 있었어요.

 

성경을 건성 건성으로 보지 말고 잘 보세요.

오늘 본문 앞에 있는 내용을 보세요.

 

요 20:19-23절 “이 날 곧 안식 후 첫 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보세요.

그 누구도 도마처럼 예수님을 “나의 주시오 나의 하나님” 이라고 고백한 자가 없지요.

왜? 그런가요?

이는 성령이 아직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성령은 예수님이 승천하셔야 오시게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 15장에서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주신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은 아직까지 승천하여 아버지께 가시지 않았어요.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아버지께 가시면 다른 보혜사인 성령이 오세요.

그 성령이 오시면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나 일어날 그 고백을 예수님이 두 번째 8일 째 나타났을 때에 도마가 미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번 째 8일 째 나타난 예수님은 성령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가 하실 일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성령으로 오시면 제자들이 도마처럼 나의 주시오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나의 주시오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그 날이 바로 실제적으로 성령 강림으로 이루어지는 여드레 날인 8일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묵시에 속한 8일이 되어요.

 

지난 시간에 8일 안식일에 대하여 살펴보았지요.

예수님이 부활하신 안식 후 첫 날인 8일은 묵시에 속한 안식일을 예표(豫表)한다고 했어요.

이건 2 주 전에 강해한 요한복음 “125강.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에서 상세하게 설명을 해 놓았으니 참고 하세요.

 

8일 안식일이 되면 성령을 통해서 영으로 오신 예수를 알게 됩니다.

성령으로 알아진 영의 예수가 바로 “나의 주시고 나의 하나님”이에요.

성령을 받으면 예수를 도마처럼 “나의 주시오 나의 하나님” 이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지만 오직 하나 도마가 행한 이 사건만을 기록한 것은 성령이 오시면 도마가 행한 이 신앙고백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는 도마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도마가 행한 신앙 고백이 창세전에 언약을 한 자기 백성들이 예수님에게 하실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되어요.

 

지금 이 시대 우리는 예수를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도마처럼 예수를 “나의 주시오 나의 하나님” 이라고 고백을 하고 있어요.

누가 이런 고백을 하게 합니까?

성령이에요.

 

율법 아래서는 육으로 예수를 믿고자 합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서는 성령으로 예수를 믿어요.

율법 아래서는 보고 믿고자 했어요.

그러나 은혜 아래서는 보지 않고 믿어요.

성령이 믿어지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서는 보지 못한 것을 믿고 싶어도 못 믿었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율법 아래서는 자기가 경험 된 것을 믿는다고 하는 믿음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경험된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했어요.

 

믿음은 경험되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율법 아래서의 인식론으로는 예수를 절대로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마처럼 난 절대로 예수를 보고 만져보지 않고는 믿을 수가 없어! 라고 해요.

도마의 이 모습은 성령을 받기 전에 제자들의 모습이에요.

 

그러나 성령이 오고 나면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되어요.

예수를 보지 않고서도 “나의 주시오 나의 하나님” 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어요.

이건 성령이 믿어지게 해 주시는 믿음으로 하는 고백이에요.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자들은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어디에서 계획된 사건입니까?

창세전이라는 묵시에서 계획된 일이지요.

묵시에서 계획된 일을 예수님이 오셔서 역사 속에서 펼치셨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묵시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는 묵시적인 사건은 비밀이에요.

역사가 감지하지 못해요.

육이 깨닫지 못한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이 깨닫지 못하는 사건을 벌리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고린도전서 2장에서 세상의 관원에 지혜로는 예수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했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셔서 이런 사실을 자기 백성들에게 깨닫게 해 주세요.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로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깨달아지도록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이 믿음을 선물로 받아요.

그럼 성도는 성령이 주신 그 믿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자기를 위한 구원 이야기로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로마서에서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고 합니다.

 

로마서 1장을 봅시다.

 

롬 1:16-17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이 뭐냐?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에요.

그런데 이 복음은 육에게는 비밀이에요.

왜냐하면! 묵시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비밀을 알게 하시려고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셨어요.

이 믿음이 오면 복음 속에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그럼 이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는 믿음이 알게 해 주는 것을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고 합니다.

 

앞에서 말하는 “믿음으로” 라는 그 믿음은 예수를 알아보게 하는 선물로 주신 믿음이에요.

이 믿음이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하여 고백하게 하고 영접하게 하세요.

이걸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믿어야 할 것을 붙잡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 실력이 아니고 믿음이 일으켜준 은혜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은혜이지 우리 행위가 아니에요.

그러므로 자랑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자랑 할 일이 아니고 감사하여야 하는 일이에요.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이 뭔가요?

예수님의 십자가 도에요.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뭘 믿으라고 합니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에요.

그래서 도마에게 자기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게 하신 것입니다.

이는 너희를 구원하는 능력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걸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누가 믿느냐?

성령을 받은 자가 믿어요.

성령이 오시면 보지 않고 믿어지게 해 주세요.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예수님을 직접 죽이지 않는 자들이 내가 예수를 죽인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보지 않고 믿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을 아버지께 복을 받은 자라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가 믿어지나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를 위한 것임이 믿어지나요.

내가 예수를 죽인 죄인이라는 사실이 믿어지면 그 사람은 믿음이라는 복을 받은 성도입니다.

 

믿음이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속에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담겨져 있어요.

그러므로 믿음이 오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믿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도 속에 구원의 길을 담아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자들은 사도 바울같이 오직 하나 예수님의 십자가 도만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나와 예수님을 연합케 하세요.

하나 되게 한단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하신 일이 전부 나의 일로 믿어져요.

 

예수 죽음이 나의 죽음으로 믿어지고!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로 믿어지고!

예수님의 천국이 나의 천국으로 믿어져요.

 

예수님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자신의 이야기로 믿어지게 되어요.

이러한 사람들은 성경을 흘러간 옛 역사 이야기로 보지 않아요.

지금도 역사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고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2천 년 전에 유대 땅에서 일어난 사건이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으로 보여요.

복음을 전하면 지금도 내 주변에서 2천 년 전 유대 땅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행하였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오순절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하다가 율법주의자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죽임 당한 사건들이 지금도 복음이 증거되는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도들이 성령으로 복음을 전한 것이나!

지금 제가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나 동일해요.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령으로 예수를 믿다가 핍박을 받은 것이나!

지금 이 시대 성도들이 복음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나 동일해요.

 

사도들이 이곳 저곳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나!

제가 미국으로 서울로 전라도로 이곳 저곳으로 복음 전하러 다니는 것이나 동일해요.

제가 이번에 미국에 다녀오면서 참 많은 것을 보았고 깨달았어요.

 

마치 2 천 년 전에 바울이 복음을 전하러 다니면서 믿음에 사람들을 만나서 교제한 것처럼 저도 똑 같이 했어요.

성도들이 바울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유숙케 하여 복음을 들었듯이 저 또한 처음 보는 집사님 댁에 머물면서 복음을 증거케 한 것이나 동일해요.

 

그러니까 성경의 이야기가 책 속에 가두어진 문자가 아니라 실제 생명으로 이 시대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2 천 년 전에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만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부부들이 있어요.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가 복음 때문에 바울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고 유숙케 하였듯이 지금도 복음 때문에 복음 증거하는 종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고 유숙케 하는 분들이 있어요.

바울도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를 복음 때문에 만났어요.

저도 집사님들을 복음 때문에 만났어요.

 

생면부지 초면인데도 복음이 증거 되니 한 형제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인하여 역사적 가치와 사고를 초월하고 묵시적 가치와 사고로 만나서 형제애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예수는 우리 삶에서 살아서 경험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예수로 사는 신앙생활이라고 해요.

 

신앙생활이란? 성경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에요.

성령이 우리 가운데서 예수의 생명으로 살게 하세요.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삶 속에서 살아서 역사하는 예수를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증거가 없는 자들은 가짜에요.

제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많은 분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책 속에 가두어진 예수를 믿고 있어요.

 

이들에겐 성경이 지나간 역사 책이에요.

그러니까 신앙이 지나간 옛날이야기를 읊조리는 식으로 관념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죽은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에 관하여서는 아는 것이 엄청 많은데 정작 예수로 살아내는 삶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적 지식은 많은데 그것이 자기 삶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복음으로 사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엄청 믿음이 좋다고 하지만 실상은 믿음으로 살지 않아요.

이 모두가 예수가 책을 통해서 학습으로 알아진 지식의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복음을 책 속에 가두어진 것으로 만들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지나간 과거 이야기로 전락케 만들어요.

그러니까 예수에 관하여서는 옛날이야기 하듯이 말은 잘 하지만 예수로 살아내는 삶이 없고 마음이 차갑고 가난한 것입니다.

이걸 귀신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앎이 관념이다 보니까 신앙이 가난한 것입니다.

마음이 냉골인 거에요.

죽은 자들처럼 온기가 없어요.

삶에 따스함이 없어요.

 

복음은 생명이고 기쁜 것이에요.

복음을 들으면 소망이 생기고 감사와 기쁨과 찬송이 나와요.

현실을 이기게 하는 능력이 생겨요.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고!

절망에서 소망으로 나아가고!

탄식이 변하여 찬송케 하여요.

죽은 자를 산 자로 만든단 말입니다.

 

오순절 성령을 받고 난 후 제자들의 모습을 보세요.

그들 속에 어디 슬픔이 있나요.

날마다 모여서 복음으로 교제하고 사랑을 나누었어요.

 

율법 아래서는 움켜잡았던 손이 성령이 임하고 난 후 은혜를 받으니까 펴지게 된 것입니다.

지식으로 알아진 복음은 화석화 되어서 손발을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 놓지만,

성령의 은사로 알아진 복음은 생명이 되어서 묶여 있던 손발을 풀어 놓고 다니게 만들어요.

 

왜? 그런가요?

복음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가두어 둘 수가 없어요.

 

물이 방축을 뚫고 흘러넘치듯이 흘러넘치게 되어 있어요.

그리하여 주변에 생명을 낳는 일을 해요.

그러므로 그 안에 살아 있는 예수를 소유한 성도들은 가만있지를 못하고 예수의 생명을 유출시키는 일들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를 금지 할 수 없는 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금지 할 수 없는 법이란? 성령께서 예수가 함유하고 있는 것들을 성도의 삶 속에서 터져 나오게 한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예수의 생명이므로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는 반드시 예수의 생명을 낳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살아서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세요.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령을 받고 나니까 그 극심한 핍박 속에서도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가 성령이 그 안에서 생명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을 보세요.

 

유대인들이 그토록 예수를 전하지 말라고 공갈을 치고 협박을 하고 옥에 가두는 일을 하지만 우리가 듣고 본 것을 이야기 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증거 하잖아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으냐 판단하라고 하잖아요.

그러면서 복음으로 인하여 핍박 받는 것을 합당한 것으로 여겼어요.

 

이 모두가 복음이 그들 속에서 살아서 생명으로 꿈틀거렸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을 예수님은 새 포도주가 발효하면서 가죽 부대를 터치게 하듯이 예수의 생명이 터져 나오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정말 복음으로 인한 기쁨이 있나요?

예수 믿는 것이 행복하신가요?

스스로 진단해 보세요.

 

복음은 기쁨이고!

감사이고!

찬송이에요.

 

이 기쁨을 억제하지 말고 누리세요.

맛 보세요.

그리고 행복해 하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주신 그 구원의 맛을 좀 보시란 말입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서 땅에 것을 구걸 하던 자가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고 뛰면서 주를 찬미 하듯이 하세요.

그 동안 한 번도 성전 안에 들어가 보지 못한 자가 이제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고 주를 찬미하듯이 우리의 신앙도 그리하여야 해요.

 

예수가 주신 그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이 즐겁고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이 되어야 해요.

부디 잃어버린 첫 사랑을 회복하시고 잃어버린 구원의 즐거움들이 일어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도 도마처럼 보지 않고는 못 믿겠다고 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믿음을 주어서 보지 않고 믿어지게 해 주신 그 은혜를 감사합니다. 예수 믿음이 기쁨이 되게 하시고 감사가 되어지게 하옵소서. 날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 거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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