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126강. 죄사함을 받으라 (요 20:19-23)

by coroa 2022. 2. 14.

하늘빛사랑 https://blog.daum.net/day7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26강. 죄사함을 받으라 (요 20:19-23)

-.정낙원 목사

 

요 20:19-23절 “이 날 곧 안식 후 첫 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부활 하셔서 제자들에게 첫 번째 나타난 이야기입니다.

이 날은 안식 후 첫 날입니다.

안식 후 첫 날이라는 말은 기존의 안식의 세계를 넘어선 날이라는 뜻입니다.

이 날은 첫 창조에 속한 일곱째 날 안식일을 지나서 묵시 안에서의 여덟째 날 안식일로 모이는 날입니다.

 

부활 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 온 것은 부활의 세계를 몰고 온 것입니다.

묵시가 역사를 침노해 온 것입니다.

이를 천국이 침노했다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 온 것은 제자들에게 묵시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역사는 묵시를 찬모 할 수가 없지만 묵시는 역사를 침노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모습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모습으로서의 나타나심입니다.

 

묵시가 역사를 침노 할 때는 역사의 질서를 넘어서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제자들이 두려워서 문들을 꼭꼭 닫아 놓았는데 예수님이 문을 열지도 않고 벽을 뚫고 들어온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인간의 상식은 문을 열고 들어오지 벽을 뚫고 들어 올 수가 없습니다.

왜? 예수님의 부활 후 첫 사건을 이러한 모습으로 이야기로 하고 있을까요?

이는 부활하신 주께서 이러한 식으로 일을 하신다는 것을 계시(啓示)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장차 성령이 우리 속으로 침노해 오실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오늘 본문이 실제적인 사건으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속으로 뚫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자 오늘 본문에서처럼 하나님의 평강이 제자들 속에 임하였고 제자들은 죄사함의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 속에서 일을 하시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건 이성적으로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이성적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일을 기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하시는 일은 모두가 기적입니다.

 

묵시를 일컬어 형이상학(形而上學)이라고 하고,

역사를 일컬어 형이하학(形而下學)이라고 합니다.

형이상학을 다른 말로 영(靈)이라고 하고, 형이하학을 육(肉)이라고 합니다.

영을 묵시라 하고, 육을 역사라고 합니다.

 

영과 육은 존재하는 양식이 다릅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릅니다.

역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역사 바깥의 영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이 초월된 세계입니다.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수평적으로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묵시는 역사과 다른 존재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묵시는 영원한 세계이므로 시작과 끝이 없습니다.

묵시는 항상 오늘 날로 존재합니다.

오늘 날로 살아가는 것은 늘 사건의 연속인 것입니다.

 

성경은 묵시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역사적인 시간 순으로 나열하지 않고 사건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역사의 연대기(年代記)는 의미가 없어요.

 

하나님 앞에서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아요.

이건 영원하시고 영생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시작과 끝이 있는 시간에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과거 일이 현제가 될 수가 있고 현제 일이 과거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미래 일이 과거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을 보면 잘 나타났습니다.

 

계 11:8절.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소돔 고모라 사람들이 롯을 핍박한 것이나,

애굽인들이 이스라엘을 핍박한 일이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일이나,

종말에 두 증인들이 죽은 곳이나 영적으로 하면 동일하다고 합니다.

 

이 시대 새 언약을 증거하는 종들을 옛 언약에 속한 자들로부터 이단이라고 핍박을 받는 것이나 모두가 동일하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소돔 고모라에서 일어난 일이나,

애굽에서 일어난 일이나,

예수님의 초림 때 일어난 일이나,

지금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영적인 의미에선 다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역사는 이걸 몰라요.

왜냐하면! 역사가 움직이는 방법 자체가 수평적으로 길게 드러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과거는 과거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묵시가 역사 속에서 벌리는 일은 전부가 기적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은 영이 하는 일을 감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2천 년 전에 죽은 예수가 지금도 살아서 일을 할 수가 있느냐?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서 일을 한단 말입니까?

이건 해석이 불가해요.

 

그러므로 역사 속에서 묵시를 감지하고 읽어내려면 묵시적 안목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묵시적 안목을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이 와야 예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일하는 묵시적인 일들을 해석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하는 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천상에 성령이 계시는데 일곱 눈이라고 합니다.

이 일곱 눈이 이 땅으로 보내심을 입었어요.

누구에게 보내심을 입는가 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해요.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역사를 통해서 묵시를 읽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을 봅시다.

 

고전 2:9-14절 “기록 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벌이는 일을 인간들이 알 수가 없게 하셨다고 하지요.

왜? 그런가요?

이는 자기 백성들만 알아보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자기 백성들은 어떻게 알아보는가 하면 성령으로 알아보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천국에 비밀을 말씀하시면서 너희 눈은 봄으로 복이 있고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이 믿어지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진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복음이 믿어지고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여진다는 것은 복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오직 성령으로라야만 알 수가 있어요.

그래서 성령이 없는 육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미련하게 보여요.

한마디로 납득이 가지 않는단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숨을 내 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합니다.

이는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려주시고자 함입니다.

죽었던 예수가 살아서 일하고 있음을 알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나중에 오순절 날 성령을 받고 난 후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기적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요.

하지만 지금 예수님께서 벽을 뚫고 들어와서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은 처음 접해보는 아주 생경한 일이에요.

 

아직 성령이 임하기 전이므로 낯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표적이라고 합니다.

 

기적과 표적은 달라요.

 

성경을 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합니다.

천지라는 역사가 생기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천지 바깥인 묵시에 계신 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시간 바깥에 계시던 하나님이 시간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게 역사에서는 기적이에요.

묵시 속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임에도 역사는 이걸 기이한 일로 받을 수밖에 없어요.

 

천지는 천지에서만 일어나는 방식으로의 일만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천지의 지혜뿐이기 때문입니다.

천지 바깥에서 오신 하나님을 알려면 천지 바깥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천지 바깥을 묵시라고 합니다.

 

천지 안에서 묵시가 벌이는 사건을 이해하려면 묵시를 읽어내는 지혜가 있어야 해요.

묵시를 읽어내는 지혜를 영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묵시가 역사 속에서 일으킨 사건들을 역사 바깥의 지혜인 영으로 읽어내게 하십니다.

묵시가 역사에서 일으키는 사건을 기적이라고 합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는 묵시가 역사 속에서 일으킨 사건들을 기적으로 보지 않고 아하~!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을 하고 계시는구나! 로 이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적으로 보지 않고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이해한단 말입니다.

 

묵시적 관점에서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과 다시 오심을 이야기해 봅시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습니다.

이게 세상 바깥인 묵시 세계에서 생명을 낳는 원리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성령으로 생명을 낳습니다.

이를 창조라고 합니다.

 

역사는 어떻게 생명을 잉태 합니까?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어서 아이를 잉태합니다.

세상에서는 몸을 통하여서 생명을 낳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몸을 통하여서 아이를 낳는 세상에,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 법칙인 성령으로 아이를 낳는 일을 벌이셨습니다.

동정녀인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케 하여서 예수님을 낳게 하였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몸이 하나 되어서 잉태한 것이 아니고!

성령이 여자의 몸 속으로 침노해 들어옴으로서 잉태한 것입니다.

이건 역사에서는 일어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기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성령이 인간의 몸에 침노해 들어옴으로서 예수라는 생명을 낳게 하는 일을 기적이라 하지 않고 표적이라고 합니다.

 

표적이란? 싸인입니다.

일종의 계시인 것입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하늘나라 백성들을 낳는다는 것을 세상에다가 알려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도 기적이 아니라 표적인 것입니다.

 

기적과 표적은 달라요.

기적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말하지만,

표적은 장차 이러한 모습과 같은 의미의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2장을 봅시다.

 

눅 2:1-14절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表迹)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예수님의 탄생시기에 천하에 호적하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탄생 하실 때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때 천하에 호적 하는 일이 일어난 것은 하나의 표적이고 계시인 것입니다.

 

역사는 묵시를 드러내기 위하여 창조가 된 곳이에요.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이 된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모두가 묵시에 관한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서 묵시를 읽어내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을 묵시로 읽어내는 것을 표상학이라고 해요.

표상학이란?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서 영적 의미를 찾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이 탄생 할 때 천하에 호적 하러 가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 속에는 영적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낳아지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역사 속에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이 무슨 일인고 하니 온 세상에 호적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요.

호적이란? 아들이 아버지 족보에 올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족보에 올려지기 전에는 아들은 아들이지만 법적 구속력이 없어요.

호적에 올려져야 아들로서의 지위를 누리는 법적 구속력을 갖게 됩니다.

아버지 유업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이게 엄청 중요해요.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갈 4:1-7절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하나님께서 유업을 이을 아들을 잠시 종의 자리에 두셨다고 합니다.

분명히 아들은 아들인데 아직까지 아들의 신분을 허락하지 않고 정한 때까지 종노릇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때가 차면 예수님이 오셔서 아들의 명분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아들의 명분을 줍니까?

아들의 영을 보내 주어서 아들의 명분을 준다고 합니다.

아들의 명분을 준다는 말은 이제부터 법적 효력을 갖는 아들로 인정해 주겠다는 말입니다.

법적 효력을 갖게 되어야 아버지의 유업을 상속을 받을 수가 있어요.

그러니 아들의 명분을 얻는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인 것입니다.

 

이 아들의 명문을 어떻게 주어집니까?“아들의 영”을 보내서 주어져요.

그러니까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아들은 아들임에도 법적 아들이 아니에요.

성령이 오면 법적 아들로 하나님의 호적에 올려지는 것입니다.

법적 아들이 되면 유업을 이어 받을 수가 있어집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오셔서 뭘 준다고 합니까?

성령을 받으라고 하지요.

성령은 아들의 영이므로 성령을 받으면 아들로서 호적에 올려져요.

 

지금까지 제자들은 분명하게 예수님의 제자들임에도 법적으로는 제자의 명분이 없어요.

법적으로 제자의 명분이 되려면 성령이 와야 해요.

그래서 예수님이 성령을 주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비로소 합법적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법적이 되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하나가 되어요.

이걸 연합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예수님과 하나로 연합을 시켜 주세요.

 

이렇게 연합이 되면 제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곧 예수님에게 행하는 것이 되어요.

즉 제자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되어요.

또한 제자들을 욕하면 예수님을 욕하는 것이 된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엄청나게 중요한 사건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일을 하세요.

하나님이 세상에 벌리는 일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십니다.

예수님이 하실 일을 만물을 가지고 시청각교제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탄생 할 때 일어나는 일들이 하나의 계시가 되고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리지요.

가이사 아구스도란 말은 황제란 말입니다.

황제란? 큰 임금을 뜻합니다.

 

큰 임금이 온 세상에 칙령을 내립니다.

무슨 칙령입니까?

호적하라는 칙령입니다.

 

아들을 아버지 족보에 올리라는 칙령입니다.

아들을 족보에 올린다는 말은 법적 구속력을 갖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족보에 아무나 올려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정실부인을 통해서 낳은 자식만 올려요.

족보에 올려지는 아들은 정실부인을 통해서 얻은 아들만 올려져요.

 

이게 또 엄청 중요한데,,,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들이 있어요.

종교마다 다 구원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은 오직 예수라는 이름 이외는 주신 적이 없어요.

예수를 통해서 낳아진 자들만 구원을 주어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법적 구속력을 갖는 정실부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은 세상에 예수 이외 구원 얻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내란 말이 아니고,,,

영적인 의미로 보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세요.

 

사도행전 4장을 봅시다.

 

행 4장 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사도들이 왜? 이 말을 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구원 받은 길이 여럿이 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도들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길은 예수님으로부터 낳아진 자들만 하나님 아버지의 호적에 올려 질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정실부인은 예수님뿐이에요.

나머지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모두가 첩이 되는 것입니다.

말이 이상한데!

잘 이해하세요.

말꼬리 잡고 늘어지지 말고 그 의미를 건지세요.

 

첩이란? 종이에요.

종에게서 낳아진 자는 다 종이에요.

그러므로 첩으로 낳아진 서자는 족보에 올려지지 못해요.

그래서 서자를 일컬어 사생아(私生兒)라고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살아 있음에도 죽은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집안에 이스마엘이 그러했어요.

이스마엘은 분명히 아브라함의 아들이에요.

그럼에도 아브라함의 족보에 올려지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어미가 정실부인이 아니고 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유업을 받지 못하고 쫓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어 좇으라고 했어요.

왜? 그런가요?

아버지의 족보에 올려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탄생 기점으로 호적하는 일이 일어났다는 말은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호적에 올려지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모든 성경은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에요.

예수그리스도가 무슨 일을 하는지 세상 역사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로지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어요.

그러니 성경에 나온 이야기들을 역사적으로 맞느냐 안 맞느냐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역사학자들 간에 호적하는 일이 두 번이냐 세 번이냐 아니면 한번이냐 라는 것으로 논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호적 하는 일이 몇 번이냐는 관심 주제가 아니에요.

본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호적하는 숫자 가지고 다투지 마세요.

 

그건 비 언약 백성들이 성경을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고자 학문으로 끌어내려서 자기들 밥 빌어먹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자들이 하는 짓들이에요.

그러니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리가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성경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입니다.

알다시피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였어요.

성령은 하늘나라 영이에요.

그러니까 성령께서 하늘나라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을 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천하에 호적하라는 일을 한번으로 말하고 있어요.

 

이는 곧 호적을 통해서 뭔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심심해서 죄인들이 아들 낳고 호적하는 일을 성경에 기록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는 아들을 아버지의 족보에 올리는 일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버지 족보에 올려지는 일들을 예수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탄생을 할 때 온 천하에 호적하는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황제에 마음을 움직여서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예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가이사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이여 들으라!

이제 너희들을 하늘 아버지의 족보에 올리는 일을 하기 위하여 예수가 왔다!

이제부터 이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생겨나게 될 것이다!

 

이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하여서 태어났듯이 하나님의 아들들도 성령으로 생겨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을 표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표적이 뭐라고 했나요?

싸인이라고 했잖아요.

하나님이 싸인을 준 것입니다.

 

무슨 싸인입니까?하나님의 아들들이 태어나는 싸인이에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어떻게 생겨난다구요?

성령으로 생겨나요.

 

그 일을 누가 하십니까?

예수님이 하세요.

예수님이 역사 속으로 성령으로 잉태하여서 오셨듯이 이 역사 속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성령으로 만들어 내실 것을 말씀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속으로 침노해 들어오셔서 역사에 속한 사람을 묵시에 속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 주세요.

 

이런 말씀을 들으면 전율이 오지 않나요!

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장난이 아니구나!

내가 예수가 믿어지고 이러한 말씀들이 깨달아진다는 것은 엄청난 은혜이구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을 가지고 묵시에 속한 일들로 읽혀진다는 것은 기적이구나!

이런 기적을 내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가 너무도 크고 감사하다는 것을 고백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하늘 아버지의 족보에 올려졌다구요.

어린 양의 피로 구원받은 하나님 아들이라고,,,

이렇게 올려졌어요.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누가 누구에게 전해 주는지 살펴봅시다.

 

천사들이 들에 있는 목자들에게 전해주지요.

천사는 묵시에 속한 자들이에요.

묵시에 속한 천사가 역사에 속한 목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을 알려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역사 속에 있는 자들 중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만드는 일을 할 것임을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어디에 있는 누구에게 알려주나요?

들에 있는 목자들이지요.

들이란? 인간들이 사는 성을 상대적으로 하는 말이에요.

 

성경은 들(광야)을 묵시적 의미로 말해요.

 

모세가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지요.

에스겔도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지요.

세례요한도 광야에서 하나님을 증거하지요.

바울도 아라비아 광야에서 계시를 받지요.

 

광야란?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는 곳이에요.

이 광야를 다른 말로 골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과 떨어진 광야에 홀로 외롭게 서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기득권층으로부터 밀려난 자들이에요.

 

쉬운 말로 예수 때문에 힘의 논리로 다스려지는 조직으로부터 쫓겨난 자들입니다.

복음 하나 지키고자 교단이나 교회로부터 축출 당한 자들이에요.

성경은 이들은 흩어진 들에 양들이라고 합니다.

고아와 과부 나그네라고 해요.

“하삐루”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들에 있는 목자들은 유대교로부터 쫓겨나온 자들을 상징해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계시가 떨어진 것입니다.

 

예수라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만들어 내기 위함이에요.

어떻게 만들어 내는가 하면 자신의 죽음으로 만들어 내세요.

이게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으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밀알 한 알이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듯이 하나님의 참 아들이신 예수님이 죽어서 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생산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도 표적이라고 하고 십자가에 죽으심을 표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을 봅시다.

 

마 16:1-4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마 12:40절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말하는 표적이란? 예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증명을 해 보이란 말입니다.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요나의 표적을 말해줍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요나가 죽어서 다른 사람들이 살아난 것입니다.

요나가 선원들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이 바다에 빠졌어요.

 

그리고 고기 뱃속에서 사흘간 있다가 토해냄을 당하였습니다.

토해짐을 당하고 난 후 니느웨 성에 가서 복음을 전했어요.

그리하여 저주 받아야 할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고 살아났어요.

 

이 이야기는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동안 무덤 속에 있다가 살아난 사건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가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뱉어냄을 당한 것을 표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표적인가요?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살아날 것을 말하는 표적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죄인들이 살아날 것을 말하는 표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요나를 통해서 예표적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실 일을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선취적으로 하신 것입니다.

선취적이란? 미리 앞당겨서 보여 주었다는 말입니다.

이 선취적 사건이 출애굽 사건 속에 담겨 있어요.

 

출애굽기 12장을 봅시다.

 

출 12:13절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출애굽기 12장은 유월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유월절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린 양의 피 뿌림으로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살아난 날입니다.

어떻게 죽음에서 살아납니까?

어린 양의 피 뿌림으로 살아났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살아났을 뿐만 아니라!

바로 왕의 종에서 해방이 되고!

죽음의 땅인 애굽에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걸 표적이라고 합니다.

무슨 표적입니까?장차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자기 백성들이 죄에서 구원받는 표적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은 성도가 구원 받는 사건을 예표하고 있어요.

그럼 바로는 마귀를 상징하고 애굽은 이 세상을 상징하는 것이 되겠지요.

우리는 애굽이라는 이 세상에서 태어났어요.

그리곤 마귀라는 바로 왕의 권세에 억압받고 종노릇하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예수라는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으로 마귀의 권세로부터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태어나게 한 본토친척 아비 집인 이 세상으로부터 교회로 빼내심을 입었습니다.

이 일을 누가 하셨나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셨어요.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죽음으로부터 살아나고 바로의 권세로부터 해방이 되고 애굽을 떠난 것을 표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장차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일을 세상 속에서 행하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실 일을 미리 보여 주었다는 뜻에서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를 증거했어요.

 

이사야 19장을 봅시다.

 

사 19:18-22절 “그 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그 중 하나를 장망성이라 칭하리라 19 그 날에 애굽 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겠고 그 변경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기둥이 있을 것이요 20 이것이 애굽 땅에서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표적과 증거가 되리니 이는 그들이 그 압박하는 자의 연고로 여호와께 부르짖겠고 여호와께서는 한 구원자, 보호자를 보내사 그들을 건지실 것임이라 21 여호와께서 자기를 애굽에 알게 하시리니 그 날에 애굽인이 여호와를 알고 제물과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경배할 것이요 여호와께 서원하고 그대로 행하리라 22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 것이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인고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를 고쳐주시리라”

 

이사야 19장은 하나님께서 애굽을 징벌하고 그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그 날에” 라고 하지요.

이는 창세전에 이미 정한 그 날을 말해요.

구약에서는 예표적으로 보여 주었던 그 날이에요.

 

구약에서 예표적으로 보여 주셨던 그 날이 바로 출애굽 때 보여 주셨던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서 자기 백성들이 구원받는 그 날인 것입니다.

그 날에 하나님이 애굽 땅에서 가나안 방언을 말한다고 하지요.

 

애굽은 죄악 된 세상을 상징한다면 가나안은 약속에 땅인 천국을 상징해요.

그러니까 세상 속에 천국 복음이 증거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걸 가나안 방언이라고 합니다.

 

방언이란? 생소한 말이란 뜻입니다.

애굽 사람 입장에서는 가나안 말은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마치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과 같아요.

다른 말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새 언약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과 같아요.

 

애굽을 뭐라고 합니까?

장망성이라고 하지요.

장망성이란? 무덤이란 말입니다.

 

애굽이라는 무덤 속에 가나안 방언이 들려지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죽은 자들에게 천국에 소리가 들려진다는 말입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무덤 속에 있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질 때가 온다고 했어요.

 

요한복음 5장을 보고 갑시다.

 

요 5:25-29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무덤 속에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에 음성이 들린다고 하지요.

이게 애굽에 가나안 방언으로 말하는 것과 같아요.

다른 말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들려지는 것을 말해요.

 

그러니까 율법이라는 무덤 속에 있던 자들 중에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 복음을 듣고 살아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무덤 속에 있는 자라는 것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란 말이에요.

지금 예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고 계신 것입니다.

율법주의가 애굽이 되고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 가나안 방언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이사야를 봅시다.

 

애굽 땅 중앙에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제단을 세우고 그곳을 기둥으로 삼는다고 하지요.

애굽은 이 세상을 상징한다고 했어요.

하나님께서 이런 장망성에 여호와께 예배하는 제단을 세운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 화목하는 교회를 세운다는 말입니다.

이 교회가 하늘나라의 기둥이에요.

 

디모데전서 3장입니다.

 

딤전 3:15절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교회를 일컬어 기둥이라고 하지요.

교회는 장망성 가운데 세워진 하나님의 제단이에요.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구원자를 보내서 장망성 중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교회로 불러내세요.

그리고는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애굽에 알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걸 표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세상에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의 표적인 것입니다.

교회는 하늘나라에 속한 곳이에요.

세상 속에 있는 하나님나라에요.

 

애굽이라는 장망성 중앙에 서 있는 여호와의 제단이란 말입니다.

세상에 교회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곧 하늘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교회가 세상을 떠받들고 있는 기둥이에요.

교회가 사라지면 이 세상도 끝장나요.

 

이 세상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창세전 언약 때문인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없으면 세상도 날아가요.

 

나중에 창세전 언약의 내용인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이 다 끝나면 이 세상은 철거가 되어요.

그러므로 창세전 언약을 증거하는 교회는 이 세상을 떠받들고 있는 기둥이 되는 것입니다.

기둥이 사라지만 집은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언약이 완성 되면 세상은 무너져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묵시 공동체라고 하고 언약 공동체라고 합니다.

 

이 묵시가 역사 속에서 일을 할 때는 어떻게 한다고 했나요?

성령으로 한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역사를 뚫고 들어오는 식으로 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 일이 오늘 본문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는 죽었습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는 우리 속을 뚫고 들어 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신 후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로 오신 것입니다.

묵시적 방법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이걸 벽을 뚫고 들어오는 것으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 후 첫 날에 예수님이 저녁 때 제자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하늘에 평강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봅시다.

 

요 20:19-23절 “이 날 곧 안식 후 첫 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잘 보세요.

예수님이 언제 오십니까?

저녁때이지요.

 

성경은 저녁을 종말로 이야기해요.

종말이란? 기존의 질서가 붕괴되는 사건을 말합니다.

 

창세기 1장의 하나님께서 하시는 창조 사역을 보면 “저녁에서 ~ 아침으로” 나아가는 식으로 일을 하시지요.

이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는 식으로 일을 하신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오심을 죽은 자 가운데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 산 자가 오셨어요.

그럼 죽은 자들이 산 자를 통해서 살아납니다.

그 동안 죽은 자로 살았는데 예수님을 통해서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죽은 자로서의 세계는 종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 동안 죽음의 법칙으로 살았는데 이젠 생명의 법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의 법에 생명의 법이 뚫고 들어옴으로서 죽음의 법이 붕괴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걸 종말이라고 해요.

다른 말로 저녁이라고 합니다.

 

자 보세요.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을 육체로만 알고 있던 자들이에요.

성령으로 오신 예수를 몰라요.

 

제자들이 육(肉)의 법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영(靈)으로 오셨어요.

새로운 예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건 제자들이 기존에 육체로 알고 있던 예수님에 대하여 붕괴가 일어난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창조 즉 구원의 일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땅에 속한 자들에게 하늘에 사건이 덮쳐 온 것입니다.

땅에 평강을 쫓던 자들에게 하늘에 평강을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까지의 가치관은 다 날아가요.

이제 새로운 가치관이 생겨난 것입니다.

땅 강아지처럼 땅에 것만 쫓아가던 자들이 하늘에 것을 좇아가는 것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일어난다고 합니까?

성령이 주어지면 일어나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가면 너희에게 오실 성령이 숨처럼 너희 속으로 뚫고 들어갈 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고자 숨을 내 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너희가 다른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되는가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신 일들이 자기 백성들에게 죄사함을 주는 일을 하셨다는 것을 증거케 하는 사람이 될 것이란 말입니다.

이걸 증인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오면 다 증인이 된다고 하셨어요.

이러한 일들이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즉시로 일어났어요.

죽음에 벌벌 떨던 자들이 죽음을 이기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세상 권세에 벌벌 떨던 자들이 세상 권세를 이긴 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제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 난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었던 예수가 부활하여서 살아서 일을 한다고 앉은뱅이를 고치는 사건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제일 먼저 한 일이 앉은뱅이를 고치는 일을 하지요.

이게 하나의 계시사적 의미가 있어요.

앉은뱅이를 뭐라고 하나요.

 

나면서부터 된 자라고 하지요.

이는 한 번도 땅을 벗어나 보지 못한 자란 말입니다.

땅은 죽음을 상징해요.

 

아담이 범죄하자 하나님이 땅을 저주하지요.

그러니까 땅은 저주의 곳입니다.

이걸 이사야는 장망성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지금 나면서부터 된 앉은뱅이는 죽은 자란 말입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살아나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이 구시 기도 시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구시에 일으킨 사건이 있어요.

무슨 사건인가요?

 

마태복음 27장을 봅시다.

 

마 27:46-53절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에 한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예수님이 구시에 십자가에 죽으시자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사건들이 일어났어요.

그리고 이들이 거룩한 성으로 들어갑니다.

이건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천국 가는 사건이에요.

 

그런데 그 일을 지금 사도들이 하고 있어요.

무엇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하고 있어요.

묵시적인 방법인 성령이 오셔서 죽은 자들을 살려내서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서 호적에 올리는 일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전 미문에 앉아서 땅 강아지처럼 금과 은을 달라고 하던 자가 사도들이 주신 예수의 이름으로 하늘에 사람으로 살아나서 한 번도 성전 안에 들어가 보지 못한 자가 이제는 성전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그 은혜의 영광을 돌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율법 아래 있던 자들이 은혜 안으로 들어와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함께 교제하면서 떡을 떼는 모습이에요.

이게 천국의 모습이에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이러한 무리들이 일어나지요.

날마다 모여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떡을 떼며 교제하는 자들이 일어났잖아요.

이게 바로 교회에요.

 

교회는 율법으로 적막강산처럼 화석화 된 죽은 자들이 모인 곳이 아니에요.

예수 이름으로 살아난 자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교제하는 곳이에요.

이 일을 누가 한다구요?

성령이 하세요.

 

그럼 이제부터 오늘 본문 속에서 오해 할 만한 것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오늘 본문을 잘못 해석하면 천주교처럼 고해성사 하는 것이 나타나게 됩니다.

또한 이단의 교주들처럼 자기가 죄사함을 준다고 하는 자들이 일어납니다.

모두가 23절을 근거로 하는 말들입니다.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천주교에서는 오늘 본문을 가지고 신부들이 행하는 고해성사를 정당화하고 있어요.

그 이유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죄사함의 권세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천주교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교회란 역사 안에서 항상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속성을 유지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교회는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까지 역사 안에 늘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죄사함의 일들이 일어나게 하였으니 그 죄사함의 활동의 연속성도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예수님께서 죄사함의 권세를 12제자에게 위임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2 제자들에게 위임한 위임권도 역사 안에서 계속하여서 연속되어 이어져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러한 권세를 행사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럼 역사 속에서 이러한 정통성을 가지고 연속성으로 유지되는 교회가 어디에 있느냐?

그 교회가 바로 천주교라는 것입니다.

개신교는 천주교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기 때문에 정통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개신교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아요.

개신교는 일종의 집나간 서자들이라고 봐요.

그래서 다시 자기들 품으로 돌아와야 된다고 해요.

자기들은 항상 큰 집처럼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린다고 합니다.

 

천주교의 주장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나의 교회만을 세우셨다고 해요.

그 하나의 교회가 바로 베드로가 세운 천주교라는 것입니다.

천주교는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천주교만이 유일한 교회라고 해요.

신부들이 제자들을 계승하기 때문에 신부들에게 죄사함을 주는 사죄권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논리가 그럴듯하지 않나요.

만약에 오늘 본문이 천주교가 주장하는 것처럼 신부들에게 사죄권을 주신 것이라고 한다면 따라야 해요.

그러나 오늘 본문이 주는 의미가 천주교의 주장과 다르다고 한다면 천주교의 교리는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성경을 상고해 보아야겠지요.

과연 그러한가?

천주교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의 교회만 세웠다고 하잖아요.

그러면서 그 교회를 세운 자가 바로 베드로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세요.

 

요 20:19-23절 “이 날 곧 안식 후 첫 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잘 따라 가보세요.

안식 후 첫 날 저녁때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지요.

그리고는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평강을 주십니다.

 

그리곤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숨을 훅~ 하고 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죄사함 이야기를 하십니다.

 

왜? 먼저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는가요?

이는 내가 너희에게 행하는 모든 것이 십자가에서 나온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받고 세상에 나가서 이 사실을 증거하라는 말씀이에요.

 

예수님께서 성령을 누구에게 줍니까?

제자들에게 주시지요.

베드로에게만 준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그 자리에 모인 모두에게 성령을 주었어요.

그리고 이 성령이 나중에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집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수많은 무리들이 일어나잖아요.

 

그리고 지금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은 오순절 날에 오신 성령과 달라요.

예수님께서 숨을 내 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지요.

이건 잠시 후면 성령이 숨처럼 제자들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일어날 일을 보증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걸 잘 이해하세요.

 

자 보세요.

예수님은 성령을 다른 보혜사라고 했어요.

이 다른 보혜사인 성령은 예수님이 가시면 보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시지 않았어요.

 

성령이 오실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성령은 오순절 날에 오시기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고 난 후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과 2장을 봅시다.

 

행 1:3-9절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 ~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당부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은 성령이에요.

그 성령이 오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된다고 하셨어요.

 

잘 보세요.

예수님이 성령을 이미 주셨다고 한다면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할 필요가 없어요.

이미 주어졌는데 뭘 기다리라고 합니까?

기다리라고 하는 것은 아직 안 왔다는 말이에요.

 

언제 오느냐?

예수님이 가셔야 와요.

이제 예수님이 때가 되어서 아버지께로 가십니다.

그리곤 약속대로 성령을 받아서 보내 주신 것입니다.

 

행 2:33절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성령이 오시자 제자들이 뭘 증거하던가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지요.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이 주어진다는 것을 증거하잖아요.

 

이걸 베드로만 했나요?

아니에요.

성령 받은 모든 자들이 했어요.

그리고 이 성령을 받은 자들이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어요.

 

바울도 성령으로 교회를 세웠어요.

베드로보다 바울이 더 많이 했어요.

베드로만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고 12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어요.

그러니까 12 제자들이 나가서 세운 교회들은 천주교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의 교회만 세운 것이 아니고 수많은 교회를 세웠어요.

 

그러니까 천주교에서 말하는 베드로가 세운 교회만이 참 교회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이런 교리를 주장하는 한은 천주교는 이단이에요.

그리고 신부들에게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것도 이단 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죄사함의 권세를 주신 적이 없어요.

성령이 오시면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죄사함이 주어진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지 어느 특정인들이 죄사함을 주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이루신 창세전 언약의 사건을 증거하는 것이지 어느 특정 인간을 교주 만드는 일을 하시지 않아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교주 만들고자 성령을 주시지 않았어요.

성령 또한 어느 특정한 인간을 드러내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만이 죄사함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증거하려고 오셨어요.

 

피 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습니다.

그 피 흘림은 곧 예수님의 피 흘리심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적 제사를 통해서 죄사함이 주어진다고 믿고 있어요.

 

유대인들은 예수 믿으면 죄사함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요.

죄사함이 짐승의 피에서 예수님의 피로 바뀐 것을 믿지 않아요.

짐승의 피로 죄사함 받는 것을 옛 언약이라고 하고!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는 것을 새 언약이라고 해요.

 

언약이 바뀌었어요.

하지만 유대인들은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바뀐 것을 인정하지 않아요.

유대인들이 새 언약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새 언약을 인정하게 되면 자기들이 지켜온 율법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사라지면 율법을 지킨 자기가 부정당해야 합니다.

이걸 용납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신앙을 고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자기가 믿고 따르던 것이 부정당하면 극력하게 반대해요.

이는 자기들이 부정당하기 때문에 그걸 용납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무리들이 있어요.

 

예수님 앞에서는 유대교는 이단이에요.

지금도 예수님의 피 앞에서 짐승의 피로 나아오는 자는 이단이에요.

짐승의 피란? 다름 아닌 인간의 행함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고수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율법 속에 자기들이 종교적인 특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서는 제사장이 있어요.

제사장은 유대인들에겐 특권층이에요.

 

율법적 제사가 사라지면 제사장이라는 특권도 사라지게 되어요.

제사 제도가 없어지면 제사장 제도도 없어지므로 자신들은 실직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을 버리면 자신들의 존재가 사라지기 때문에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게 하나님의 뜻이냐 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들의 존재에 의미가 더 중요했어요.

 

예수님이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탄핵 당한 것은 그들이 발 디디고 있는 근원을 흔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율법적 제도를 없애 버렸기 때문이에요.

만약에 예수님이 그들을 인정하고 율법과 적당히 타협하였으면 죽임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타협하지 않고 짐승의 제사로는 온전해 질수가 없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10장을 봅시다.

 

히 10:1-10절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이고 참 형상이 아니라고 하지요.

그림자란 표적이란 말입니다.

장차 오는 좋은 일이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이 주어지는 것을 말해요.

그러니 짐승의 제사로는 온전해 질수가 없어요.

짐승의 제사는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짐승의 제사를 지내면서 이것은 진짜가 아니고 모형이야!

진짜는 장차 의로운 한 분이 오실 거야!

그 분이 오시면 짐승으로 제사 지내는 것은 폐하여 질 것이야!

그 분께서 새로운 법을 세울 것이야 라고 하잖아요.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피로 죄사함을 받는 다는 언약이 바로 새 언약이에요.

하나님께서 어린 양이 죽는 옛 언약에서, 예수님이 죽는 새 언약으로 바뀌게 하신 것입니다.

 

이걸 성령이 증거해 주세요.

성령이 오셔서 이 사실을 증거하세요.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여기저기서 이구동성으로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이 주어진다고 증거하였어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가지고 천주교처럼 신부들이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고 말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그건 성경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는 것이에요.

성경은 그 어떤 인간도 온전한 인간이 없다고 합니다.

 

죄사함은 죄 없는 분만이 행사 할 수 있는 것이에요.

 

신부도 죄인이에요.

교황도 죄인이구요.

목사도 죄인이에요.

 

자기도 죄인이면서 어떻게 남의 죄를 사해준다고 할 수가 있습니까?

없어요.

그건 사기에요.

 

오늘 본문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소개하는 말씀이지 인간에게 죄사함의 권세를 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을 받으면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는 죄사함 받으려고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하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성령이 예수의 피로서만 죄사함 받는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장을 봅시다.

 

요일 2:27-28절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너희는 주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하지요.

그러면서 그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신다고 합니다.

기름부음이란? 성령을 말해요.

 

성령이 우리 안에 와 계세요.

성령이 그 안에 와 있는 성도는 성령께서 의지하게 하는 것이 있어요.

성령의 의지하게 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에요.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만 죄사함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성령께서 이 사실을 알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 안에서 거하는 사람은 다른 제사를 드릴 수가 없어요.

신부나 목사들이 죄사함을 준다는 것을 믿지 않아요.

 

만약에 성령이 제자들에게만 주어진다면 제자들에게만 사죄권이 있음이 맞아요.

그러나 오순절 날 성령이 모든 성도들에게 부어졌어요.

성령이 부어지자 여기저기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합니다.

예수 이외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고 증거합니다.

초대교회 수많은 성도들에게도 성령이 부어짐으로 이 사실을 증거하여 주었어요.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평안하라고 하지요.

이건 십자가에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평강은 하나님과 화목 되는 일입니다.

이 화목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음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의 평강을 주신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은 것은 아버지와 너희를 내 피로 화목케 하고 하늘에 평강을 주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로 죄사함이 주어지면 하나님과 화목이 일어나요.

 

하나님과 화목이 일어나면 평강이 와요.

평강의 근거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부어주시면서 죄사함에 관한 권한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아버지가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낸 것과 같이 예수님이 이제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아버지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이 세상으로 파송하셨듯이 예수님도 성령으로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이 올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쉬운 말로 성령 받기 전에는 나갈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와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증거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두려워요.

오늘 본문 이후에도 여전히 제자들은 두려워했어요.

그러다가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두려움이 사라졌어요.

담대하기 시작합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이는 성령이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들에겐 더 이상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해요.

 

마태복음 16장을 봅니다.

 

마 16:13-20절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한 번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하더냐?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지자 중 하나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어떻게 보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여기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합니다.

이는 베드로의 이 신앙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을 누가 했나요?

베드로가 했나요?

아니에요.

 

베드로가 한 신앙고백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하신 것입니다.

누구의 아버지인가요?베드로의 아버지가 아니고 예수님의 아버지에요.

 

이 때까지는 아직 베드로의 아버지가 될 수 없어요.

왜? 그런가요?이는 아직까지 성령이 오시지 않았고 호적에 올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호적에 언제 올려지는가요?

아들에 영인 성령이 오셔야 해요.

 

성령이 오시면 거듭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아들에 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요.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자들에게는 천국에 열쇠가 주어져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해요.

왜냐하면! 성령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는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고백케 되어요.

이렇게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자가 교회에요.

이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해요.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이 두려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담대하게 예수님의 부활의 도를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제자들의 배신을 다 용납하셨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힘으로 사단의 권세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고 나면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것과 천국 백성으로서의 삶이 실제로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을 받은 성도들이 그렇게 살았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초대교회 성도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지금도 성령을 받은 성도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이 그 안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에요.

죄의 종이 아니기 때문에 죄의 삯인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이 실제화 하게 해 주세요.

예수 믿는다고 한다면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세상의 실패를 두려워한다고 한다면 그 믿음은 뭔가 수상한 믿음이에요.

 

요한일서 1장을 봅시다.

 

요일 1:7절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2:1절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빛이신 예수님과 사귐이 있으면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신다고 하지요.

무슨 말인고 하면 예수가 믿어지면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 믿어진다는 말입니다.

결코 정죄함이 믿어지는 사람은 죄로부터 자유하게 살아요.

마귀의 참소로부터 자유해요.

 

2장에서 뭐라고 하는가요?

내가 너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죄 안 짓기를 바라지만 인간의 몸뚱이가 죄 아래서 난 것이 때문에 어떻게 죄를 안 짓고 살겠느냐!

그렇더라도 낙심하지 말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변호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는 사람이 바로 성령이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이에요.

성령이 그 안에 거하면 죄로부터 자유해요.

죄로부터 자유하면 음부의 권세를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권세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권세가 죄사함을 주는 권세에요.

성령이 임하면 이 권세가 생겨요.

그럼 성령 받은 성도는 이 권세를 행사하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권세를 받았어요.

그러니 죄 문제이든지 사망의 문제이든지 주눅 들지 말고 사세요.

신앙이란? 예수 믿는 거예요.

우리가 갈고 닦아서 천사 되는 것이 아니에요.

 

천국에는 예수 피만 있으면 무사통과에요.

예수님이 자기 피로 천국 문을 활짝 열어 놓았어요.

예수의 피만 있으면 당당하게 들어갈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누가 하나님 말씀대로 안 산다고 뭐라고 하더라도 씨익~ 웃으세요.

 

복음을 머릿속에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복음으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예수의 피를 액자에 담아서 거실에 걸어놓으라고 준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예수를 믿어도 제사상 차려 놓듯이 믿고 있어요.

예수는 제사상 저쪽에 계시게 하고 나는 이쪽에서 뭘 갖다 드리는 것으로 생각해요.

그러니 예수님하고 우리하고 중간에 요단강이 가로막혀서 건너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단강을 법궤로 가르고 건너가세요.

법궤는 언약을 상징하니까.

언약을 믿고 건너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주셨어요.

성령이 오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죄사함이 주어진다는 것이 믿어져요.

마음에 새 언약이 믿어지잖아요.

 

믿어지는 자는 그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아요.

쉽다니까요.

 

믿어지니까 쉬운 겁니다.

그러니 그 믿음으로 사시면 됩니다.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제자들도 이게 믿어지니까 이 믿음으로 산 것입니다.

제자들이 받은 그 성령을 우리도 받았어요.

제자들에겐 고급 성령을 주고 우리에게는 저급한 성령을 주시지 않았어요.

 

제자들이 받은 그 성령을 지금 우리도 받았어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성령으로 담대하게 예수의 피로 죄사함이 주어진다는 것을 증거 하였듯이 우리도 예수의 피로 죄사함이 주어진다는 것을 증거하고 살면 되어요.

 

그러다가 누가 때리면 맞고!

욕하면 욕을 먹고!

죽이면 죽어야지요.

어떡하겠어요.

그게 우리 운명인데,,,

 

하나님이 그렇게 다루어 가시는데!!

욕하는 놈도 하나님이 일으켜 세웠고!

때리는 놈도 하나님이 일으켜 세웠어요.

 

누가 욕하고 때리면 하나님께 일러바치세요.

그럼 하나님이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찾아가서 싸우지 말고!

성도는 싸우는 자가 아니에요.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신 것을 잊지 마세요.

이건 싸우라고 보낸 것이 아니고 죽으라고 보낸 것이에요.

성령은 복음 아는 것으로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심판하는 깡패짓거리 하라고 오신 분이 아니에요.

 

예수님처럼 법 아래 있는 놈들에게 맞아 죽으라고 오신 분이에요.

우리는 안 죽고자 하니까 성령을 보내서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6장에 일찍 죽임 당한 영혼들이 하나님께 신원하자 너희들처럼 죽임당하여야 할 동무들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을 순번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 날을 기다리고 살아가십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 주셔서 무한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살아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담대함도 주시고 읹은뱅이처럼 흙만 퍼 먹고 살던 자에게 하늘에 떡을 주어서 아버지의 호적에 올려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이 감사함이 이 세상을 이기는 힘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