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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128강. 예수 그 이름과 영생 (요 20:30-31)

by coroa 2022. 2. 16.

하늘빛사랑 https://blog.daum.net/day7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28강. 예수 그 이름과 영생 (요 20:30-31)

-.정낙원 목사

 

요 20:30-31절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오늘 본문을 보면 성경의 기록 목적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냐?

바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예수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낸 것은 자기 백성을 구원코자 함입니다.

구원이란? 건져냄을 입는다는 뜻입니다.

이는 자기 백성들이 지금 어딘가에 갇혀 있다는 말입니다.

 

어디에 갇혀 있나요?

죄와 사망입니다.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습니다.

 

우린 독자적으로 그 갇힘 속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외부에서 누군가가 건져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서 건져내게 하셨습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철저하게 외부의 영향 아래 있게 됩니다.

건져 주시는 분 안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에서 건져짐을 당한 것을 영생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라는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서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주어진다” 는 말은 예수님의 공로를 근거로 해서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구원 하십니다.

어떻게 구원하는가?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근거를 가지고 하십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수를 만유의 주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를 예수 안에서 섰다고 합니다.

 

예수 안에서 살게 한다는 뜻입니다.

성도를 예수님의 것으로 두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복속된 자로 두시고자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근거로 구원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일을 했나요?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서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근거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냥 아버지와 아들이 다 하셨습니다.

자기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계획하고 결정하셨습니다.

 

구원을 위하여서는 우리가 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을 했으면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십니다.

그래서 은혜인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을 봅시다.

 

렘 33:1-3절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다시 임하니라 가라사대 2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예레미야 33장은 유다의 회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유다가 지금 어디에 있나요?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갔습니다.

 

2절을 보면,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 일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라고 하지요.

이 말은 여호와께서 일을 계획 하시고 그 계획한 일을 여호와께서 성취하신다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무슨 일을 했나요?

남쪽 유다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곤 해방을 시키십니다.

 

포로 잡히게 하신 분도 여호와이고 포로애서 해방 시키신 분도 여호와입니다

이건 마치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신 분도 여호와이시고 애굽에서 해방시키신 분도 여호와이신 것과도 같습니다.

이를 우리의 구원에 적용하면 우리를 죄와 사망 아래 태어나게 하신 분도 여호와이시고 죄와 사망에서 건져 내시는 분도 여호와이십니다.

 

바벨론에서 해방되는 것이나,

출애굽 하는 것이나,

우리가 죄에서 구원 받는 것이나,

모두가 가두어 두었다가 정한 때가 되어서 빼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녁에서 아침으로 일하십니다.

구원을 하기 위해서 죄 아래 나게 하셨고,

해방시키기 위해서 포로로 잡혀가게 하셨고,

출애굽을 시키기 위해서 종살이 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러한 방식으로 일을 하실까요?

우리 몸에 하나님의 은혜를 남기고자 하심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를 남기고자 하십니다.

 

천국을 알게 하려고 지옥을 먼저 주신 것입니다.

영생을 알게 하려고 죽음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하시려고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라는 겁니다.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포로 되게 하셨는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기도를 하다가 보면 자신들이 포로로 잡혀 갔다가 회복 되는 것이 하나님의 큰 사랑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에게 적용해 보세요.

지금 우리가 죄 아래 가두어져 있습니다.

이걸 누가 했나요?

하나님이 하셨어요.

 

하나님이 왜? 우리를 죄 아래 가두어 두었나요?

이는 그 아들을 보내서 빼내게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왜? 그래야만 하나요?

그래야 구원 받음 속에 그 아들의 영광만 오롯이 담겨지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1장을 봅시다.

 

롬 11:32-33절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하나님이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하지요.

이는 죄 아래 가두어 두었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요?

 

긍휼을 베풀기 위함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긍휼로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불순종이라는 죄 아래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구원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 오롯이 남겨두려고 말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이 주어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이 주어진다는 이 말은 모든 인간들의 입을 막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구원관은 인간들의 열심과 노력과 정성으로 영생을 얻어 낸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만든 세상의 모든 종교는 자력 구원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고자 합니다.

이걸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행하는 것을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자력 구원이란? 자기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펴면 구원은 인간들이 힘으로 얻어내는 “자력 구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타력 구원”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타력 구원이란? 다른 분의 힘으로 구원이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자력으로 얻는 구원을 “행위 구원”이라고 하고!

타력으로 얻는 구원을 “은혜 구원”이라고 합니다.

 

자력 구원 속에는 내 영광이 있지만!

타력 구원 속에는 구원을 해 주신 분인 예수님의 영광만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에게 매력적인 것은 자력 구원이에요.

왜냐하면! 자력 구원 속에는 자기 영광과 자기 가치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무슨 일을 해도 자기 영광과 자기 가치를 챙깁니다.

자기 이름을 남기고자 합니다.

그러나 타력 구원 속에는 인간의 가치나 영광이 없어요.

오로지 구원을 해 주신 분만의 영광과 가치만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끝에는 예수님의 이름만 남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이름을 남기고자 해요.

나도 영광 좀 받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자기 이름을 끼워 넣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에도 내가 알아서 믿었다는 것을 남기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예수 믿어서 구원을 받으세요” 라고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을 자기 공로로 두겠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고 싶은데,

성경을 보니까 인간의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고 예수를 믿어서 받는다고 하니까,

그럼 내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아야겠구나 하면서 예수 믿는 것을 자기 실력으로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예수 믿어서 구원 받았다 그러는 것입니다.

이게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과 똑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 것을 자기 행위에 두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자기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우리더러 예수 믿는 것을 동의하고 결정을 해서 받아 들여서 구원을 받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을 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말하는 것이지 우리더러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런데 예수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믿을 수가 없으므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를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선물로 주어서 예수를 믿게 하여서 구원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들에게 들려 질 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는 식으로 들려지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무엇이든지 자기가 행하고자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주체를 자기에게 두고자 해요.

그래서 구원도 자기의 노력으로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라는 이름으로 갖가지 열심과 노력을 경주하는 것입니다.

이게 지성이면 감천 한다는 사상이에요.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다는 고지론인 것입니다.

 

TV에 보면 인도나 티벳과 같은 곳에서 승려들이 고행하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지요.

흔히들 삼보일배(3번 걷고 1 번 절하고) 같은 것을 하잖아요.

자기 몸을 학대하지요.

 

이들은 고행을 통해서 죄로부터 해탈을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하면 신도 그 정성을 가상히 보아서 용서해 준다고 믿는 것입니다.

용서를 자기 쪽에서 따 내는 것입니다.

이걸 행위 종교라고 합니다.

 

행위 종교와 은혜 신앙은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의 갈멜산 대결을 보면 잘 나타나 있어요.

 

열왕기상 18장을 봅시다.

 

왕상 18:21-39절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인이로다 23 그런즉 두 송아지를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저희는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며 나도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고 24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25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한 송아지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놓지 말라 26 저희가 그 받는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29 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지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30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31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 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32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 만한 도랑을 만들고 33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위에 부으라 하고 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번 그리하라 하여 세 번 그리하니 35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에게 내기를 신청합니다.

너희가 믿는 바알이 참 하나님인지,

내가 믿는 여호와가 참 하나님인지 내기를 하자고 합니다.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에게 너희는 너희 방식대로 신을 찾고,

나는 내 방식대로 신을 찾자고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누구의 신이 참 하나님인지를 결정해 달라고 합니다.

 

먼저 바알 선지자들이 신에게 빕니다.

그런데도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자기 몸에 피를 내기 시작합니다.

이는 내 정성을 보아서라도 응답을 해 달라는 것입니다.

몸에 피를 낸다는 것은 자신이 제물이 되겠다는 뜻입니다.

 

이 모습이 지금 우리 모습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하고 있어요.

우리의 본성 속에 이러한 사고가 자리 잡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언제 기도합니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기도하잖아요.

그럼 그 때 기도를 어떻게 합니까?

평소에 안하던 열심으로 하지요.

새벽기도를 한다거나 철야를 한다거나 아니면 금식을 하면서 기도하잖아요.

 

이건 자기 정성을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내 정성을 보아서라도 기도 응답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게 우상성이에요.

이건 죄인에겐 본성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욕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바로 나 라는 것을 아셔야 해요.

 

그런데 엘리야는 전혀 다른 모습의 기도를 합니다.

자기 몸을 학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근거로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제단에 불을 내려서 제물을 태우고 엘리야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엘리야가 하신 일을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오셔서 하셨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과 예수님을 엘리야의 능력과 심령으로 오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자기 백성들이 전부 하나님을 우상식으로 섬기고 있었어요.

율법 지킴으로 복도 따내고 구원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건 엘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습과 동일해요.

엘리야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 모습이 어떠하였나요?

백성들은 하나님을 바알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어요.

바알의 하나님이란? 인간들이 열심히 빌고 빌면 복을 주는 그런 신이에요.

 

그러나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여호와 하나님이란? 언약으로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언약으로 일을 하신다 함은 인간의 조건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정해 주신 언약을 근거로 해서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 왜곡된 하나님 관을 심어 놓은 것입니다.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백성들이 두 사이에서 어느 것이 맞는지 헷갈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엘리야는 바알과 하나님 두 사이에 머뭇거린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너희가 섬기는 그 바알이 참 하나님인지 아니면 내가 섬기는 여호와가 참 하나님인지 갈멜산에서 제사를 지내서 누구의 제사에 불이 내리는지 내기를 하자고 한 것입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벌려 놓은 제단에 불이 내리면 바알 선지자들이 말하는 그 신이 진짜 하나님이고, 엘리야의 제단에 불이 내리면 엘리야가 말하는 그 여호와가 진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이 누구인가요?

아브라함 언약으로 생겨난 민족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에게 복을 준다는 은혜 언약이에요.

그러면 이들 속에 아브라함의 은혜 언약이 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에 넘어가서 언약을 다 잊어버리고 인간의 행위를 근거로 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그대로 예수님의 초림 당시에도 나타나고 있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위에 근거한 신앙생활을 하였고!

예수님 초림 당시에 유대인들이 율법신앙이라는 행위를 붙잡고 있었듯이!

지금도 교인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행위 신앙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말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그 속을 탁~ 깨 보면 여전히 유대인들의 율법 신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은 이방인들처럼 자기 조건에 의해서 복이 주어지기도 하고 화가 주어지기도 한다고 믿고 있어요.

목사들이 바알 선지자들처럼 왜곡된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충성하면 복을 받는다는 말에 훅~ 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성도의 충성은 무얼 얻기 위한 것이 아니에요.

받은 은혜가 감사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얻고자 충성하는 것은 거래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뇌물을 받지 않아요.

인간들과 거래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니 열심히 충성하면 복을 받는다는 말은 거짓선지자의 말이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해서 복 받으라는 말은 이방 종교에서 지성이면 감천한다는 말과 같아요.

그런데 이런 신앙이 교회 안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교인들이 신앙이 무엇을 믿을까 는 없고 무엇을 할 것인가만 난무하는 것입니다.

내어 놓는 것이 자기가 행한 일들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이건 신앙이 아니고 종교에요.

 

종교와 신앙은 달라요.

종교는 내 것을 들고 나가는 것이지만!

신앙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들고 나아가는 것이에요.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에 관심을 갖는 것이지 우리가 무엇을 할까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스려 왔는지를 깨달아가는 것이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스라엘처럼 실패를 하지 않고 복을 받고 성공 할 수 있을까 방법론을 배우는 것이 아니에요.

 

구약 이스라엘이나 우리나 똑 같아요.

그 인간이 그 인간이에요.

한 치도 다르지 않아요.

우리도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짓거리를 그대로 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우리가 이렇게 버젓이 살고 있는 것은 우리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을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바탕에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면서 사는 것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다름이라면 다름이에요.

 

종교생활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하는 것이지만!

신앙생활은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지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이 어떻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완성이 되었으며 그 혜택이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졌는지를 깨닫고 감사하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열심과 노력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근거로 무엇을 얻어내고자 한다면 그 때는 그 열심과 노력은 우리에게 짐이 되고 말아요.

우리가 열심을 내는 것은 구원 얻음에 대한 감사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지 열심을 통해서 복이나 구원을 얻어 내고자 함이 아니에요.

만약에 예수를 믿어서 복을 따내고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그 예수 믿는다는 것조차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아요.

 

예수는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믿는 것이지 구원을 받기 위하여 믿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안에 들어온 자들은 예수를 믿는 것이 기쁨이고 감사이고 쉼이 되지만,

구원 바깥에 있는 자들에게는 예수 믿는 것은 수고와 슬픔과 아픔이 됩니다.

 

이러한 면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영생이 값없이 거저 주어진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구원을 얻은 자기 백성들에게는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이 주어진다는 이 말씀이 왜? 복음이 되는지를 상고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말씀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도대체 누구냐?

왜? 예수의 이름으로 영생이 주어지는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요?

하나님이에요.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그 하나님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봅시다.

 

요 1:1-4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또 다른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러면 하나님이 두 분이란 말이 됩니다.

그럼 말씀이신 하나님과 함께 계신 또 다른 하나님은 누구이시고 말씀이신 하나님은 누구이신가를 알아야겠지요?

 

말씀이신 하나님이 누구인지 요한일서에 보면 잘 나타나 있어요.

요한일서와 요한복음은 사도 요한이 쓴 책이에요.

그러니까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에서 말하던 말씀이신 하나님을 요한일서에서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바로 이 분이다 라고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을 봅시다.

 

요일 1:1-4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 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 내신 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태초에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이야기 합니다.

그 생명의 말씀이신 하나님이 누구인고 하니 아버지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누구와 함께 계셨다고 하나요?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고 하지요.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고 한다면 그 말씀이신 하나님은 바로 아들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1장 1절에 말씀으로 계신 그 하나님이 바로 아들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 아들 하나님이 누구신고 하니 육신을 입고 역사 속으로 보내심을 입은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라고 말하는데!

이건 하나, 둘, 셋,,, 이러한 숫자 개념의 한 분이란 말이 아니에요.

본질 면에서 같다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예수님과 우리 성도들과 같아요.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와 한 몸이라고 하지요.

우리는 분명히 다른 몸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 안에서는 하나에요.

 

모든 성도는 한 성령을 마셨어요.

한 성령을 마셨다는 말은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누구의 생명인가요?

하나님의 생명이에요.

 

그래서 한 성령을 마신 성도를 “우리”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라는 말은 여럿이 모여서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해요.

창세전 언약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우리”를 구원했어요.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엡 1:3-7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에베소서 1장 3절에서 7절까지 내용이 창세전 언약이에요.

그런데 그 내용 속에 “우리”가 있지요.

“우리” 라는 말이 일곱 번 나옵니다.

 

“우리”가 뭔가요?

다수가 모여서 하나가 된 것을 말하잖아요.

“우리” 안에서는 “너”와 “나”가 아니고 “하나”에요.

이걸 “우리”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우리”를 구원했어요.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은 “우리”가 바로 하나님 아들들이에요.

“우리” 라는 하나님 아들들은 모두가 하나의 본질을 가지고 있어요.

그 안에 동일한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하나라는 개념이에요.

 

“우리”에 대하여 더 설명을 합니다.

 

두 태초가 있습니다.

역사 바깥에 있는 태초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를 “하나님 나라” 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 바깥에 있는 나라입니다.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를 일컬어 “신(神)들이 사는 나라” 라고 합니다.

 

왜? 신이라고 단수로 말하지 않고 신들이라고 복수로 말하는가 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사시는 나라를 ‘하나님 나라’ 라고 합니다.

 

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창세기 1장에 보면 “우리”가 되어서 사람을 창조 하십니다.

 

창 1:26-27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지요.

우리란 복수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말합니다.

 

사람이 누구이냐?

성부 성자 성령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자들이에요.

창세전 언약에 의한 “우리” 라는 성도는 “우리” 라는 하나님이 만드셨어요.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우리” 속에서 에베소서 1장에서 말하는 “우리” 라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왔어요.

그러니까 성부 성자 성령도 “우리” 이고,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된 하나님의 백성들도 “우리” 인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 “우리”가 나온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이 세 분이 사시던 세계를 요한복음 1장 1절과 요한일서 1장 1절에서 태초라고 합니다.

그런데 태초에 계시던 이 세 하나님이 뭔가 하실 일이 있어서 만물을 창조 하십니다.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깨닫고 이야기 했습니다.

 

히브리서 1장을 봅시다.

 

히 1:2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셨다고 합니다.

또 이를 위해서 모든 세계를 만드셨다고 합니다.

만유란? 천지 만물을 말합니다.

 

천지 만물 속에는 하늘에 속한 것들과 땅에 속한 모든 것들이 있어요.

하늘에 속한 것은 영이라고 하고, 땅에 속한 것은 육이라고 합니다.

하늘에 속한 영물(靈物)인 천사도 만들고,

땅에 속한 육물(肉物)인 사람도 만든 것입니다.

 

이 둘을 통틀어 만물이라고 합니다.

이 만물을 예수님이 만드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만물의 주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물이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고 예수님이 창조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골 1:16-17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셨다고 하지요.

여기서 그란?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만물보다 먼저 계셨지요.

이는 곧 예수님이 창조주란 말입니다.

 

그래서 만물이 예수님에 의하여 창조가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물 속에 하늘과 땅에 것들이 있지요.

예수님이 왜? 만물을 창조하셨나요?

이는 예수님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주인입니다.

이러면 만물이 예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천국을 ‘아들의 나라’ 라고 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일컬어 피조 세계라고 합니다.

피조 세계라 함은 창조주에게 종속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피조 세계의 생명의 주인이 말씀이신 그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피조 세계는 말씀이신 그 하나님인 예수님에 의하여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피조 세계에는 생명이 없어요.

생명은 오직 예수님 안에만 있어요.

 

다시 요한복음 1장을 봅시다.

 

요 1:1-4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4절을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하지요.

이 생명은 영생하는 하나님의 생명이에요.

피조물의 생명은 유한한 생명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은 무한하신 영생하는 생명입니다.

역사 바깥 즉 무한이라는 태초에서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이 역사 즉 유한이라는 만물 속으로 들어오신 것은 무한이라는 하늘의 생명인 영생을 주시고자 하심입니다.

 

두 태초가 있다고 했지요.

요한복음 1장에서 말하는 태초는 이 세상 바깥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세상 바깥에 계시던 하나님이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이걸 창세기 1장의 태초라고 합니다.

 

창세기 1장의 태초는 역사 바깥에 계시던 하나님이 역사를 가지고 뭔가 일을 하시고자 시작을 하신 태초를 말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태초를 시간의 시작을 말하는 태초라고 하고, 요한복음 1장의 태초는 시간 바깥에 있는 공간적 태초라고 하는 것입니다.

 

공간적 태초에 계시던 하나님은 이름이 없어요.

거긴 무명의 세계에요.

거기에서는 그냥 말씀으로 계셨어요.

 

이름이 없다는 말은 할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거긴 완료의 세계이고 안식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하고 완성의 세계로서 미흡함이나 부족함이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거기서는 그냥 하나님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이 역사 속으로 오셨어요.

역사 속으로 오신 것은 뭔가 하실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이름은 내용을 품고 있어요.

이름이라는 고유명사가 역사 속에서는 사역동사로 나타나요.

그럼 이름이 함유하고 있는 일들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름을 가졌다는 말은 이름을 주신 분에 종속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름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그 하나님을 아들이라고 하고 그 아들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름을 주어서 이 세상에 보냈다는 것은 이름이 담고 있는 일을 하고 오라는 말이에요.

 

이름을 주신 것은 일종의 명령이에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주면서 역사에 파송하면서 너는 예수라는 이름이 담고 있는 이런 일을 하고 와! 라는 명령을 한 것과 같아요.

 

다시 요한일서 1장을 봅시다.

 

요일 1:1-4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 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 내신 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잘 보세요.

태초에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하지요.

 

이 생명의 말씀이 누구라고 합니까?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바 된 자라고 하지요.

그가 누구인가요?

예수님이에요.

 

사도요한은 예수님과 동고동락을 했어요.

그래서 자신들은 태초에 역사 바깥에 계시던 그 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역사 속으로 오신 분과 사귐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에게 창조주는 추상이에요.

이해 불가에요.

만날 수도 없어요.

 

예수님이 말씀으로 계시면 우리는 만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말씀으로 계실 때는 창조주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 창조주가 이름을 가지고 역사 속으로 오실 때 우리가 비로소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태초에 창조주로 계시던 말씀이신 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역사 속으로 오시자 자기 백성들과의 만남의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비로소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진 바가 된 것입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와 사귐을 갖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이 예수님과의 사귐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귐이란? 삶이에요.

 

예수님께서 역사 속으로 오신 것은 곧 우리 안에 오신 것이에요.

예수라는 이름으로 역사 속에 오신 그 하나님이 이제는 부활의 주님으로서 우리 안에 성령으로 그리스도가 되어서 오셨어요.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생활은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신앙생활은 성경적 지식을 주술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고 누누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왜? 묵시라는 무명의 세계에 계시던 말씀이신 하나님이 역사라는 유명의 세계로 오실 때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셔야만 했는지 살펴봅시다.

 

이름이란? 부모가 자식에게 지어주는 것입니다.

이름 속에는 부모가 바라는 것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름은 부모님이 바라는 하나의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의 이름 속에도 다 영적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담고 있는 뜻이 무엇인가요?

아버지께서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아들을 역사 속에 예수라는 이름을 주어서 보내실 때는 다 뜻이 있어서 보내실 것이 아닙니까?

역사 속에서 해야 할 일이 예수라는 이름 속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을 봅시다.

 

마 1:20-23절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함이라”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마리아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 대하여 알려 줍니다.

그 아이는 아들인데 이는 성령으로 잉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아이는 장차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라고 알려 줍니다.

그러면서 이 아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오셨나요?

이는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말이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이는 애초부터 우리의 죄는 우리가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죄를 대신 담당해 주신다는 말은 우리 힘으로 죄를 씻을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힘으로 죄 문제를 해결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아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 오셔서 대신 담당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이렇게 질문 할 수가 있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라고,,,

성경은 죄인은 영원한 불 못인 지옥에 던져진다고 합니다.

 

자기 백성들이 지옥에 던져지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 지옥에 오신 것입니다.

창조 세계에 계셔야 하실 하나님이 피조 세계 오신 것은 곧 지옥에 오신 것이나 같아요.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 자체가 지옥에 오신 것입니다.

 

땅을 뭐라고 하나요?

천지(天地) 중에 지(地)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지옥(地獄)이란 문자적 의미로 “땅에 감옥”이란 말입니다.

이 세상이 지옥이에요.

 

이 세상은 죄 아래 가두어져 있지요.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세상은 사망 권세 아래 있어요.

그러니 지옥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이 죄와 사망 안에 가두어져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이들을 붙잡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대신 삯으로 주시고 건져 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이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시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 백성들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3장을 봅시다.

 

사 53:5-10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라고 하고!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합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우리”를 바꿔치기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것을 “그”에게 대신 담당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속건 제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속전이라고 합니다.

 

속건 제물이란? 일종의 배상에 성격을 담고 있어요.

예를 들어서 사람과 사람을 맞 바꿔치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들을 사로잡고 있는 마귀에게 예수님을 대신 주고 자기 백성들을 빼내 오신 것입니다.

 

7대 절기 중에 속죄일에 보면 두 마리 염소가 있어요.

한 마리를 하나님에게 바치고,

한 마리는 마귀에게 바쳐요.

 

레위기 16장을 봅시다.

 

레 16:6-16절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대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 ~ ~ 15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 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지니 16 곧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 범한 모든 죄를 인하여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그같이 할 것이요”

 

두 염소가 나오지요.

하나는 “여호와를 위하여” 이고!

또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하여” 입니다.

 

여호와를 위한 염소는 대 제사장이 잡아서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법궤에 뿌립니다.

그럼 하나님은 그 피를 보시고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용서 해 주십니다.

이건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화목케 하는 속죄 제물이에요.

 

그리고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산 채로 광야로 보냅니다.

아사셀이란? 악령을 말하는데 이는 곧 마귀를 상징합니다.

아사셀 염소는 마귀에게 속건 제물로 보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속죄일에 드려지는 두 염소는 두 가지 의미의 제물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제물은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 하는 속죄 제물이고!

아사셀에게 바쳐지는 제물은 자기 백성을 찾아오는 속건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속건 제물은 변상해 주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내가 남에 차를 망가뜨렸어요.

그래서 새 차로 변상해 주고 망가뜨린 차를 가지고 오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이 예수를 주고 우리를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속건 제물은 보상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에서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하지요.

그가 우리 대신 맞았어요.

그래서 속건 제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속죄 제물 있고 속건 제물이 있어요.

속죄 제물은 하나님하고 죄 문제를 해결 할 때 바쳐지는 제물이고!

속건 제물은 사람하고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바쳐지는 제물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과 자기 백성들을 화목케 하는 속죄 제물로서의 죽음이고!

두 번째는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 바쳐지는 속건 제물로서의 죽음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두 가지가 회복이 된 것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하고의 관계가 회복이 된 것이고!

두 번째는, 마귀가 잡고 있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이 되어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뭐라고 하던가요?

예수라는 그 이름으로 영생이 주어진다고 하지요.

왜? 예수라는 그 이름으로 영생이 주어집니까?

 

이는 예수님이 자기 생명을 주고 우리 생명을 찾아 왔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죄와 사망에 사로잡혀 있던 우리를 구원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으로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하 인간에 예수라는 이름 이외는 구원 얻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어요.

 

행 4: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왜? 예수라는 이름으로만 구원이 주어집니까?

이는 그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속죄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일컬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이라고 세상에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저 예수가 바로 너희 죄를 대신 속량해 주실 하나님이 보내신 속죄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어떻게 얻는다고 합니까?

 

그 이름을 힘입어 주신다고 하지요.

이건 영생을 우리가 따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 쪽에서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고 하여도 영생 얻을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말씀을 하실까요?이는 인간들의 본성은 영생을 얻고자 어떤 방법론을 추구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러했어요.

자기들의 힘으로 영생을 얻고자 했어요.

 

마태복음 19장을 봅시다.

 

마 19:16-26절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2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어떤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건 방법론을 좀 알려 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영생을 얻고 싶은데!

그 방법을 몰라서 못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건 인간 쪽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명을 지키라고 합니다.

청년이 무슨 계명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말해 줍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자기는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합니다.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런 건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가지고 있는 제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리고 난 후에 예수님을 좇으라고 하십니다.

이는 율법을 지켜서 영생을 따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근심하고 떠나갔습니다.

 

이 사람은 모든 인간들을 대표하고 있어요.

인간은 법 아래 있어요.

법은 거래에요.

지키면 이익을 얻고 어기면 해를 받아요.

 

그래서 인간들은 무엇이든지 자기 쪽에서 해결하고자 합니다.

이게 죄인의 본성이에요.

이 본성이 영생도 자기 쪽에서 얻어내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 아래서 태어난 인간들에게는 자력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 본능 속에 있어요.

 

구원의 욕망이란? 영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죽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죽기 싫은 것은 본능이에요.

이 본능은 죄가 주는 본능입니다.

죄가 죽음을 몰고 왔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그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반발력이 죽지 않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죽음과 영생은 상대적인 거예요.

죽음이 없으면 영생도 없어요.

영생은 죽음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죽음에 가두어졌어요.

이 죽음이 영생을 찾고자 하는 본능을 몰고 온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본능적으로 영생하고자 하는 일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 쪽에서 영생의 길을 모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영생을 얻고자 노력하는 그 자체가 교만이고 불경입니다.

 

이름이 주는 의미를 더 살펴봅시다.

 

이름을 가졌다는 말은 육체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름은 역사에서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은 이름이 없습니다.

거긴 이름이 없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이란? 이름이 있는 세상에서 활동 할 때만 필요해요.

하나님이 이름을 가지고 오셨다는 것은 이 땅에 오셔서 어떤 일을 하시고 흔적을 남겼다는 말입니다.

 

흔적이란? 일을 한 결과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뭔가 일을 하시고 그 결과물을 남겼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물이 곧 예수라는 이름이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담고 있는 내용이 뭐라고 했나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을 한다는 말이라고 했지요.

그럼 예수님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한 일이 뭔가요?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곧 예수라는 이름이 함유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근거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 이름을 힘입어 영생이 주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태초에 말씀이던 하나님이 역사 속에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오셨다는 것은 곧 추상인 말씀이 역사 속에 실상으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추상적으로 계시지 않고 실상으로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말씀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그럼 우리 몸은 추상인 말씀을 실상으로 표현하게 됩니다.

말씀을 생명으로 풀어낸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생활이 관념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또한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 자체도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지만 그 말씀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당신의 삶을 살아내게 하시는 것도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몸을 가지고 말씀을 실체로 그려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막연하게 믿어서는 안 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그냥 주술적으로 이름을 부른다는 말이 아니에요.

주님의 운명에 동참하여 하나로 사는 것을 말해요.

그래서 시온산에 선 144000명은 어린 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동행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4장을 보면 시온산에 서 있는 144000명인 구원 받은 성도들의 이마에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이름이 써져 있다고 하지요.

누가 이름을 써 놓았나요?

예수님이 써 놓았어요.

 

이는 예수님의 소유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마에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이름이 써진 성도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으로 존재케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과 14장을 봅시다.

 

계 7:1-17절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2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3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4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 ~ ~ 16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계 14:1-5절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하나님이 자기백성들 이마에 인을 치지요.

인이란? 도장이에요.

주인의 이름을 말해요.

 

이 사람들은 내 소유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라 하고,,,

저희는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소유권을 밝힙니까?

이는 탐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탐하는 자들로부터 지키기 위함입니다.

 

탐하는 자가 누구인가요?

마귀에요.

하나님이 마귀에게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이 써져 있는 자는 손대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구원은 교회에 다닌다고 주어지지 않아요.

구원은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주의 이름을 믿어야 해요.

 

그런데 어떻게 주의 이름을 부릅니까?

이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부를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구원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받고 싶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나온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낳아준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예수가 낳아준 자들에게 예수님이 이름을 주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주의 이름만 남기는 일을 하십니다.

그 이마에 주의 이름이 없는 자는 다 죽임을 당합니다.

이것이 출애굽 시에는 문에 피를 바르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문에 발라진 피가 곧 주님의 것이란 표시에요.

피가 곧 이름과 같은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피를 바르면 구원을 받았고!

신약에서는 주의 이름을 불러야 구원이 주어져요.

 

주의 이름은 누가 부르느냐?

주의 백성들만 부를 수가 있어요.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써져 있는 자만이 부를 수가 있어요.

 

마치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듯이 어린 양의 이름이 써진 자들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주시오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서 자기 백성들에게 이름을 주시는 일을 벌리신 것입니다.

자기 소유를 삼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마에 인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끝내면서 하는 말이 내가 지금까지 여러 가지 말을 하였지만 결국은 하나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곧 영생은 예수의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고 한다면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을 할까요?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겠지요.

 

맞아요.

신앙생활이란? 그 은혜에 감사하고 사는 것입니다.

교회란?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 부르심을 입었어요.

지체는 몸을 위하여 존재해요.

 

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는 “나” 라는 존재는 죽이고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가 되어서 “우리”로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인 곳을 천국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을 보면 천국에 모습이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구원 받은 성도들이 모두가 보석이 되어서 예루살렘 성의 벽돌이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보석으로 지어진 그 성에 예수님이 들어오십니다.

그리하여 예수 안에서 “우리”로 존재케 되는 것입니다.

너와 나가 예수 안에서 우리가 되어서 영원토록 살게 되는 것입니다.

비로서 창세전 언약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교회에요.

성령은 성도로 하여금 교회로 모일 때 이 모습으로 모이게 하세요.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고 나자 이 모습의 교회가 세워졌어요.

너와 나가 아닌 예수 안에서 우리가 되어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고 한 떡을 떼고 서로 교제하며 우리로 살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란 이런 곳이다!” 라고 샘플로 잠깐 보여 주시곤 역사 속에 사라지게 하였어요.

우린 늘 초대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들을 마치 거울로 보듯이 우리의 신앙을 비춘바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가 얼마나 잘못 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버젓이 살고 있다는 것은 주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여야 합니다.

부디 오늘이란 날 동안 교회로 모일 때 내가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로 모여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일들이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그 아들을 예수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 그 이름으로 영생을 주시고 또한 너는 내 것이라 인(印) 쳐 주심도 감사합니다. 오늘이라는 날 동안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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