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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124강. 예수님의 빈 무덤 (요 20:1-10)

by coroa 2022. 2. 12.

 

하늘빛사랑 https://blog.daum.net/day7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24강. 예수님의 빈 무덤 (요 20:1-10)

-.정낙원 목사

 

요 20:1-10절 “안식 후 첫 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2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쌔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 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이 세상은 죄 아래 가두어져 있습니다.

죄 아래 가두어진 자들을 죽은 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죽은 자들이 살아가는 무덤이라고 합니다.

 

무덤은 시신을 가두어 두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죽자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은 무덤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안식 후 첫 날에 와서 보니까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무덤에 들어가서 보니까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한 세마포와 수건만 가지런히 개켜서 놓여 있고 예수님은 없는 것입니다.

마치 자고 일어난 자리에 사람만 쏙 빠져 나가고 이부자리만 덩그러니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들 세상에서 보면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을 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일컬어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합니다.

 

무덤이 뭔가요?

죽은 자를 가두어 놓는 곳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을 가두어 놓은 무덤은 빈 무덤인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부활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망이 예수님을 감당치 못하고 토해낸 것입니다.

사망이 예수를 삼켰는데 소화하지 못하고 토해 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망은 예수님 앞에서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힘을 쓰지 못합니다.

이건 엄청난 사건입니다.

사망이 예수님만 삼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자들도 삼키지 못합니다.

 

성도는 산 자에요.

산 자는 죽음에 가두어지지 않아요.

그러므로 산 자에게는 죽음이란? 거짓인 것입니다.

 

마귀는 죄인들의 왕입니다.

죽음을 가지고 죄인들을 다스립니다.

죄인들은 죽음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죽음 앞에서 벌벌 떠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인이므로 죽음 앞에 벌벌 떨어요.

마귀가 예수님도 모든 인간들처럼 죽음으로 가두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죽음에 끈들을 풀어내고 무덤에서 저벅 저벅 걸어 나오셨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마귀의 권세가 허구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과 한 몸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서는 죽음은 허구인 것입니다.

허구란? 죽음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성도에게는 죽음이 힘을 쓰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마귀의 사망 권세는 예수님 앞에서는 죽은 권력과 같아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마귀의 사망 권세를 깨트렸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행사하는 최고의 권세가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을 예수님이 무참히 박살을 냈습니다.

 

이건 마치 철옹성과 같은 여리고 성이 제사장의 나팔 소리에 무너져 내린 것과 같아요.

절대로 무너지지 않게 보이던 여리고 성이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의 나팔 소리에 힘없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렸어요.

 

마귀의 사망 권세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단단한 바위와 같던 사망 권세가 예수님 앞에서 무참히 부서지고 만 것입니다.

사단이 바위로 가두어 놓은 예수님의 무덤이 빈 무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들어간 것은 무덤의 권세를 무장해제 시키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고 그 속에 있던 자기 백성들을 끌고 나왔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브라함이 포로로 잡혀 갔던 조카 롯을 전쟁에서 이기고 찾아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망이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을 죽음으로 가둘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 속한 성도들도 죽음이 가둘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건 엄청난 사건입니다.

이게 믿어지는 사람은 죽음을 이기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애들아!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아울러 멸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곧 마귀를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라는 말입니다.

 

영(靈)과 육(肉)은 하늘과 땅처럼 다릅니다.

 

이는 살아가는 방식이나 이해하는 것이 전혀 다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영의 세계라고 합니다.

반대로 세상 나라를 육이라고 합니다.

영은 하늘이고 육은 땅입니다.

 

영은 육을 알아도,

육은 영을 알 수가 없어요.

이는 영이 육을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육은 영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이건 마치 창조주인 하나님은 피조물의 속성들을 다 알아도, 피조물은 창조주인 하나님을 알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알 수 있는 길을 창조주가 스스로를 계시 해 줄 때만 가능합니다.

그것도 계시 해 준 것만큼만 알 수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영에 속한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영에 속한 것은 성령을 받아야지만 믿을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들 입장에서는 미련하게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일을 받지 못한다고 했어요.

 

이러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이 세상에서는 비밀(秘密)일 수밖에 없습니다.

감추어져서 비밀이 아니라 세상이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비밀인 것입니다.

알려 줘도 모르니까 비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인간들이 예수님을 빤히 보고도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과 같아요.

 

왜? 예수님을 보고도 그가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몰라볼까요?

이는 예수를 육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육은 육으로서 판단하는 기준이 있어요.

그러니까 육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인 영에 일도 육으로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의 판단은 땅 차원입니다.

땅의 가치로 판단을 합니다.

육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곧 인간들의 이성과 상식으로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복(福)을 주신다고 합시다.

그럼 인간들은 인간들의 기준으로 복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복은 이 땅에서 잘되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들입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신령한 복이란? 영적인 것입니다.

신령하다는 말은 육적인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땅에 복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성경이 말하는 복을 세상 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기독교는 세상 종교와 똑 같아졌어요.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을 쫓아가고 있어요.

 

육에 속한 사람들은 하늘에 복을 몰라요.

땅에 복만 알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준다고 하여도 그것이 어떤 것인 줄 모르기 때문에 그냥 복이라는 문자에 매몰되어서 땅에 복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복을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요?

땅에서 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세상에서 부자 되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을 복이라고 하잖아요.

성경의 복을 현세적인 복으로 이해하고 있잖아요.

 

교회에서 목사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교인들은 그러한 목사들의 말에 아멘이라고 합니다.

이건 스스로 나는 육입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복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땅에 복을 주신 적이 없어요.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하자 땅을 저주하셨어요.

죄인이 살아가는 땅은 저주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어요.

이는 땅에 것으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땅에서 아무리 잘되고 많이 소유하였다고 하여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것으로 살아가는 어떤 부자에게 죽음 앞에 재물이 무슨 힘이 되느냐?

네가 죽으면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네가 소유한 것들이 너의 생명을 지켜 줄 수가 있느냐?

없지 않느냐?

 

네 생명은 하나님에게 있는데,

그럼 하나님과 화목하여야지 세상 것으로 만족하면 되겠느냐?

이 어리석은 놈아!

예수님은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고 이 세상 것을 의지하고 만족해하는 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이란? 땅에서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하늘에 신령한 복을 주신 것입니다.

하늘에 신령한 복이 세상 것으로부터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늘에 신령한 복을 주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들은 땅에서 승승장구해서 뿌리를 내리는 복을 주겠다고 합니다.

이는 목사들이 땅에 속하였다는 뜻입니다.

육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성경이 말하는 복을 아전인수(我田引水) 식으로 곡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것을 복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도적질 한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십 일을 주리실 때 마귀가 찾아와서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무엇으로 시험을 하였나요?

떡이고, 세상의 부귀영화이고, 영웅호걸이 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준다는 것은 전부 세상 것입니다.

이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합니다.

이를 전부 이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고 마귀적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일 2:15-16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시대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 산다고 하는 말은 전부가 사단의 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 산다는 것은 자기들 생각으로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걸 인간의 생각으로 이해하는 인본주의 해석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거짓 선지자들이 이렇게 해석했어요.

그래서 구약의 참 선지자들은 이러한 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도적질하는 자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을 하였던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인본주의로 성경을 해석하는 본문을 하나 인용합니다.

 

5월 가정의 달만 되면 단골 메뉴로 써 먹는 설교가 있지요.

 

에베소서 6장을 봅시다.

 

엡 6:1-3절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5월 가정의 달이 되면 이 본문을 가지고 부모님께 효도하라고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는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걸 육에 속한 목사들은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부모를 공경하면 땅에서 장수하고 하는 일이 잘되고 복을 받는다는 식으로 설교를 합니다.

 

성경이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목청을 높이면서 말합니다.

이게 육으로 영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고 했어요.

너희 아비는 하늘에 있다고 했어요.

이것은 땅에 있는 아비는 가짜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참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육적 아버지는 하늘의 아버지를 예표하는 그림자인 것입니다.

육적 아버지를 통해서 하늘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결국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계시 전달자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을 하고 난 후 율법을 받을 때의 부모님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출애굽 시켰는지 아는 자들입니다.

경험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의 피로 죽음의 재앙에서 살아난 자들입니다.

그리고 홍해 바다는 마른 땅처럼 건너서 온 자들입니다.

애굽에서의 열 가지 재앙을 본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지켜 주셨는지를 아는 자들입니다.

이 사실을 자녀들에게 대대로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부모의 말을 들으라고 하면서 공경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부모의 의미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잘 가르치는 자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부모가 아니에요.

육적으로는 낳아준 부모 일 수는 있지만 영적으로는 아닌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지금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부부 관계도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비밀이라고 하잖아요.

남편은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아내는 교회를 상징한다고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가정의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나 부부 관계나 모두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보여주는 영적인 예표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지 않고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어(主語)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주 안에” 서에요.

왜? 주 안에서라고 합니까?

이는 성경이 말하는 부모는 “계시 전달자”이기 때문이에요.

 

주 안에서 부모는 하나님을 대리하는 자에요.

하나님을 대리하는 부모라고 한다면 자식들에게 당연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떻게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는지에 대하여 알려 주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구약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고서 광야에 나와서 태어난 자식들에게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애굽에 가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애굽에서 건져 내 주었는지를 자식들에게 알려 주는 역할을 부모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하고 그의 말에 순종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경이란? 효도의 개념보다 부모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에는 부모의 말을 거역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돌로 쳐 죽이는 죄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에게 내리는 형벌이에요.

 

부모의 말을 거역하는 자에게 돌로 쳐 죽이라는 말은 곧 부모가 곧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부모의 말을 거역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에게 가하는 형벌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에 속한 목사들은 성경에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니까 성경이 말하는 부모의 참 의미도 모른 채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면 복을 받는다고 가르친단 말입니다.

결국 영에 속한 하나님 말씀이 땅에 속한 인간들의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는 지침서가 되고 만 것입니다.

 

또 보세요.

땅에서 장수한다고 하지요.

여러분 땅에서 장수하는 것이 복인가요?

아니에요.

 

성도는 땅에서 떠나는 것이 복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기 백성들을 저주를 머금고 있는 땅에서 장수하는 복을 주었겠어요?

아니에요.

 

시편에 주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하지요.

여기서 잠이란 죽음을 말해요.

그런데 그 죽음을 누구에게 준다고 했나요?

사랑하는 자에게 준다고 했어요.

 

그래서 성경은 주 안에서 일찍 죽은 자를 복되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땅에서 오래 사는 것을 복이라 한 적이 없어요.

그건 구약적 의미에요.

 

구약은 그림자에요.

신약의 실체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에요.

구약이 말하는 땅이란 언약의 후손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약속의 땅인 천국을 말해요.

결코 이 땅이 아니에요.

 

히브리서 11장을 봅시다.

 

히 11:8-10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을 준다고 빼냈어요.

그런데 막상 가나안 땅에 들어가니까 내가 거할 땅은 이 세상에 없고 하늘에 있다고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가나안 땅에서 곧 떠나야 하는 나그네처럼 장막 생활을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성(城)을 바라고 살았다고 합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성도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땅에서 빼내심을 입는 것이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약은 성도들에게도 땅에 있는 것을 버리라고 합니다.

 

골로새서 3장을 봅시다.

 

골 3:1-7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너희가 전에 그 가운데서 살 때 행하던 것들인데!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사람으로 살리심을 입었으니 땅에 것을 생각지 말고 하늘에 것을 찾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땅 사람이 아니고 하늘에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 소속이 하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봐라!

이 땅을 떠나서 하늘이 계시지 않느냐!

그러니 너희들도 하늘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땅에 것에 미련두지 말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는 주께서 그렇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가나안에서 나그네로 살게 하였듯이 지금도 믿음이 우리를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게 하세요.

 

그럼에도 목사들이 부모를 공경하면 땅에서 장수하고 복을 받는다고 하니 이를 어찌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없어요.

전부 뱀 새끼들인 것입니다.

 

뱀 새끼들이니까 성경을 땅 차원인 육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게 육이 영을 해석하는 해석법이에요.

그러니 목사들이 아무리 점잖고 고상하게 말을 한다고 하여도 틀린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건 뱀에 말이에요.

 

그렇다고 땅에 있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부모 공경은 인간의 도리에요.

다만 인간의 도리이지 하늘에 진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땅에 있는 부모를 통해서 하늘에 있는 부모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땅에 있는 부모를 통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어요.

성도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시청각 교제로 이해하게 되므로 더 효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성경도 육으로 이해 하지만!

영에 속한 사람은 땅에 것을 가지고서도 영으로 이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동일한 사건을 가지고서도 영과 육은 해석 자체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르게 해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으로 오늘 본문도 이해해 보세요.

그럼 예수님의 빈 무덤 속에는 엄청난 영적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영적 비밀을 알아야 죽음의 권세를 이길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내용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건 아주 생경한 모습니다.

인간들 세계에서는 경험되지 않은 일이라 믿어지지가 않아요.

 

인간들은 과거의 경험을 가지고 현재를 해석해요.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들을 지나온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을 해석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거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역사가 거울이 되는가요?

이는 인간의 본질은 어느 시대 사람이나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2천 년 전에 인간이나 지금의 인간이나 동일해요.

그 속에 죄가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성은 변하지 않아요.

그러므로 예전에 하던 일을 지금도 자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쥐꼬리 삼년 땅에 묻어 두어도 쥐꼬리라는 말이 있듯이,

개는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행사 머리는 같아요.

2000년 전에도 개 행사 머리를 했고 지금도 개 행사머리를 해요.

그 이유는 유전 인자가 같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그러해요.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해요.

하나도 바뀌지 않았어요.

아니 바뀔 수가 없어요.

이게 죄인의 운명이에요.

 

2천 년 전에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성경 해석법으로 예수를 이단이라고 몰아서 죽였어요.

그럼 지금도 교회들이 자기들의 해석법으로 예수님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신자들을 이단이라고 몰아서 죽이고 있어요.

 

2천 년 전에 교회가 하나님 말씀을 곡해하여서 예수를 이단으로 몰아서 죽였다고 한다면 지금도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 하여서 참 복음을 전하는 예수의 종들을 이단으로 몰아서 죽이고 있어요.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했나요?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고 구원은 오직 예수그리스의 피 뿌림으로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인자가 광야의 놋 뱀처럼 높이 달리면 자기 백성들을 하늘로 이끈다고 하셨어요.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구원이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쉬운 말로 구원은 인간의 행함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이 사실을 알고 자기 동족들에게 율법의 의로는 안 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의로 구원을 받는다고 외쳤어요.

그러다가 동족들로부터 이단으로 매도당하여서 핍박을 받았어요.

 

이 시대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누가 싫어하나요?

인본주의 성화주의자들이에요.

성화주의자들은 인간의 행함에도 의가 있다고 해요.

그래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거룩하고 의로워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인간의 행함을 부정하면 화를 내요.

화를 낸다는 것은 그것에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신머리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두지 않고 인간들이 교회에 헌금하고 봉사하고 충성하면서 목사에게 순종하는 것에 두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들에겐 예수님의 십자가는 교인들의 충성을 이끌어내는 수단에 불과해요.

수단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보다 신앙의 본질을 교회에 충성하고 고상한 인품의 인간들을 만들기에 분주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가 교인들에게 먹혀들어요.

결국 초록은 동색으로 그 나물에 그 밥이란 말입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에요.

 

이 시대 교회들은 대부분이 ‘예수교’가 아니고 ‘인간교’에요.

교회 안에 인간들의 목소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잠재우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다수가 모이는 것이 마치 진리인냥 가르치고 있어요.

교회들이 사람의 숫자로 진리를 왜곡시키고 있어요.

 

과거에도 가짜들은 힘이 있었고 진짜 예수를 믿는 자들이 작았고 지리멸멸하게 보였어요.

항상 가짜들은 선악과처럼 화려하고, 진짜들은 생명과처럼 볼품이 없었어요.

가짜가 진짜 같고, 진짜가 가짜처럼 보였어요.

이게 역사가 말하고 있는 진실이에요.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현재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를 가지고 현재를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으니 지금도 유대인이 예수 믿는 자를 죽이겠구나 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인간은 과거를 가지고 현재를 해석한다고 했지요.

즉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가지고 지금의 사건을 이해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건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누가 누구를 판단 할 때 그 사람의 지나온 행적을 가지고 판단해요.

 

쉽게 말할게요.

여러분들이 저를 어떻게 이해합니까?

지금까지 저와의 사귐을 가진 경험을 바탕으로 나를 이해하잖아요.

 

제가 성도님들을 판단 할 때도 마찬가지에요.

이러 저러한 신앙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알아진 것으로 판단해요.

여러분들에 대한 축적된 과거를 가지고 아~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구나! 라고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사람을 판단하는 것만 아니고 모든 일을 판단하는 것에도 동일해요.

이게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해석법이에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무슨 일이든지 과거에 경험된 것을 바탕으로 현재를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마리아나 제자들도 이러한 해석법으로 예수님을 부활 사건을 판단했어요.

마리아가 그러지요.

누가 예수의 시체를 치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에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시체가 없자 제자들이 숨겼다고 했어요.

이 모두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자신들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역사적 경험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부활 하였다고 하여도 믿지 않고 누가 숨겼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하여서 무덤이 비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이런 경우는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에서는 없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 사건은 인간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석하는 그 틀을 완전히 깨트리는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사고에 틀을 완전히 깨트려 버렸어요.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도 완전히 깨트려 버렸어요.

이게 예수님의 빈 무덤과 부활 사건입니다.

 

인간들에겐 부활이 없어요.

낯설어요.

인간들이 알고 있는 부활은 고작하여서 마르다의 관념적인 부활관이에요.

마르다의 부활관이란? 나중에 이 세상이 사라질 때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관념이에요.

현실이 아니고 상상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버렸어요.

관념을 실제화 하셨어요.

 

이는 우리가 알고 있던 과거를 부정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상식은 과거를 바탕으로 알고 있는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죽은 자의 부활은 없었어요.

그러므로 인간들에게는 죽은 자의 부활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을 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말이에요.

이건 인간들의 사고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육이 틀렸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 앞에 서면 모든 것이 틀린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 만이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사람이 죽으면 썩어서 흙으로 돌아간다고 믿습니다.

이게 상식입니다.

이건 인류 역사를 통해서 보아왔고 경험되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들 세계에서는 죽으면 끝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을 하셨어요.

알다시피 안식일 전 날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서 무덤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분명하게 장사를 지냈어요.

 

그런데 안식 후 첫 날에 무덤에 가보니까 예수님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상식으로는 죽은 지 사흘이 지나면 예수님의 시신은 당연히 썩어가고 냄새가 나야 합니다.

예전에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무덤에 갔을 때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썩어서 냄새가 난다고 하였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시체를 쌓던 세마포만 덩그러니 남고 예수님의 시신은 없는 것입니다.

죽었던 예수님이 부활을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현장을 직접 보고서도 믿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왜? 안 믿어집니까?

인간의 상식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험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빈 무덤을 목격하였음에도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고 말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미 성경에 예언이 되어 있었어요.

 

시편 16편을 봅시다.

 

시 16:10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시편 16편은 다윗의 시에요.

표피적으로 보면 다윗 개인의 장래에 대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사도들이 오순절 날 성령을 받고 난 후 다윗의 이 이야기를 예수님의 부활이야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을 봅시다.

 

행 2:29-32절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베드로가 지금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설교를 합니다.

설교를 “케리그마” 라고 하는데 이는 되어 진 일을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더러 믿어달라고 읍소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이렇게 일을 하셨다고 일방적으로 통고 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베드로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보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이 이미 다윗을 통하여서 예언이 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최고의 왕이라고 지칭하는 다윗이 이미 예언하였어요.

 

그래서 베드로는 다윗을 선지자(先知者)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선지자가 되어서 장차 예수님께서 하실 일들을 미리 예언을 한 것입니다.

 

31절에 다윗이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였다” 고 합니다.

그 예언이 바로 “주의 거룩한 자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한다” 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아직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지 않았어요.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육이에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고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육으로는 다윗이 미리 예언한 것을 기록해 놓은 성경이라 할지라도 예수님 이야기로 보여지지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성경을 보아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지 않으면 소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이 사실을 예견하고 “이 백성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고 예언을 하였던 것입니다.

 

눈 뜬 소경이란 말입니다.

분명히 보고 있음에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일을 보고 깨닫는 것이 그러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으로 보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깨달아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성령이 임하였을 때에나 가능한 일입니다.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눈뜬 소경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은 비록 성경에 기록을 해 놓은 이야기이지만 그것은 장차 다윗이 마지막 때에 부활하는 것으로만 이해한 것입니다.

다윗이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 하였다고 믿지 않은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나중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나자 다윗의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 이야기로 재해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육으로만 이해하여 다윗의 이야기인 줄만 알았는데!

성령이 임하고 난 후 영으로 보니까 다윗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 이야기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왜? 중요한가 하면 성경에서는 비단 다윗의 이야기만을 예수님 이야기로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이야기가 곧 예수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러면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이야기를 예수님 이야기로 보아야 해요.

아벨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여서 사가랴의 죽음까지 즉 모든 선지자들의 죽음도 예수님의 이야기로 보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럴 때 육을 통하여서 영으로 이해 할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빈 무덤이 주는 영적 의미가 있겠지요.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의 빈 무덤이 주는 영적인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빈 무덤이 주는 영적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우리 상식으로는 무덤 속에 시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 속에는 시체가 없어요.

왜? 없을까요?

이는 무덤이 예수님을 가두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무덤 속에 시체가 없다는 것은 무덤이 예수님의 시체를 감당 할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알다시피 무덤은 죽은 자를 장사(葬事)하여 가두는 곳입니다.

죽은 자는 다 무덤에 가두어져 있어요.

사망이 죽은 자들을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덤이 가두질 못했어요.

토해내고 말았어요.

이는 예수님은 죽은 자가 아니고 산 자란 말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안 죽었다는 것이 아니고 사망이 예수님을 가둘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덤은 죽은 자를 가두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묻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죄인에게 주어지지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인 아담 안에서 나온 자들은 다 죽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에게 죄인을 넘겨주었어요.

그래서 죽음이 죄인들에게서 왕 노릇해 온 것입니다.

이게 지금까지 인류가 걸어온 길입니다.

 

마귀는 죄인이 죽으면 무덤에 가두어 버렸어요.

너는 절대로 죽음을 이길 수 없다는 뜻으로 죽은 시체를 꽁꽁 묶고 관에 못질을 하여서 열지 못하게 하고 그래도 못 미더워서 무덤을 바위로 꽝 꽝 막아 버린 것입니다.

 

보세요.

죽은 자를 꽁꽁 묶어요.

그리고는 꽁꽁 묶인 자를 관 속에 집어넣고 못 나오도록 못질을 합니다.

그것도 못 믿어서 무덤의 문을 바위로 틀어막아 버립니다.

삼중으로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역사 이래로 이 삼중의 방어벽을 풀고 열고 뚫고 나온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어요.

모든 인간들도 이걸 부정하지 않아요.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동여맨 끈을 풀고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사상 초유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건 마귀의 권세가 박살이 난 것입니다.

마귀의 나라가 붕괴 된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최고 무기가 죽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참히 깨트려 버린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무덤이 예수를 감당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소화를 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뱉어 내 버린 것입니다.

 

이건 마치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다가 뱉어낸 것과 같아요.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요나의 비유로 말씀해 주셨어요.

요나가 밤낮 사흘간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뱉어짐을 당한 것처럼 예수님도 사흘 동안 무덤에 있다가 토해냄을 당한 것입니다.

사망이 더 이상 예수님을 무덤에 가두어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무덤 속에 들어가셔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살펴봅시다.

 

죄 없는 예수님은 왜? 죽고 무덤 속에 들어 가셨는가요?

먼저 예수님의 죽으심을 봅시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의인으로서 죄인을 대신하는 죽음입니다.

이걸 대속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대속주라고 합니다.

대속주(代贖主)란? 대신 죽어 주신 분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대속주 라는 말은 나를 대신 하는 분이란 말입니다.

 

쉬운 말로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는 “대신 맨”이에요.

예수님이 흑기사처럼 우리가 할 일을 대신 하신 것입니다.

이걸 주(主)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죽지 않아도 되는데 우리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에요.

죄가 없으면 죽을 수가 없어요.

사망이 가둘 수가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죽었어요.

이 죽음은 자기 백성을 대신하는 죽음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죽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묻혀야 할 무덤 속으로 예수님이 들어갔어요.

 

무덤이란? 죽음의 세력이 행할 수 있는 최후의 무기에요.

마귀의 최고 권세에요.

마귀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에요.

마귀는 죄와 사망을 가지고 죄인에게 왕 노릇하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 죄와 사망의 권세가 있는 본거지(本據地)로 들어간 것입니다.

무덤 속에 들어갔어요.

이 무덤이 얼마나 단단한가 하면 바위처럼 단단해요.

 

그래서 무덤의 문을 바위로 막아 버린 것입니다.

이는 죄와 사망 권세가 바위처럼 단단하다는 말입니다.

역사 이래로 이 무덤을 깨트리고 살아나온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마귀는 인간들에게 보란 듯이 당당하게 예수님을 무덤 속에 가두었어요.

마귀는 예수를 무덤 속에 가둠으로서 이겼다고 생각하였어요.

그런데 그 단단한 것이 예수님 앞에 산산조각이 나서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자 보세요.

예수님은 죽을 수 없는 분임에도 죽었어요.

우리를 대신하여서 말이에요.

이는 우리가 겪어야 할 것은 대신 겪으신 것입니다.

이걸 체휼이라고 합니다.

 

체휼이란? 우리가 당하는 모든 것을 다 겪어보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이 겪어야 할 것을 그대로 다 겪으시는 것입니다.

왜? 그러신가요?

 

그래야 우리를 대신하는 대속주가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우리가 겪는 일을 겪어보지 않으면 대속주가 될 수가 없어요.

대속주는 우리와 한 몸으로서 담당을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론적으로만 죄인의 죽음에 동참 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동참하셨어요.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들이 겪을 모든 일에 동참 하셨다는 것은 곧 역설적으로 우리 성도들도 예수님의 일에 동참하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이걸 연합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연합이 되면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들이 우리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수순(手順)을 밟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왜? 무덤 속에 들어갔나요?

이는 우리가 무덤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무덤 속에 들어간 것은 무덤 속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내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 2장을 봅시다.

 

히 2:9-18절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예수님의 오심은 일평생 사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기 백성들을 놓아주고자 하심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사망에서 놓아 주는가 하면 자신이 대신 죽음으로 놓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어요.

여기서 모든 사람은 선택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말합니다.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에요.

그래서 모두를 놓아 주려는 것이 아니고 오직 아브라함의 후손만 놓아 준다고 합니다.

 

이들이 지금 어디에 가두어져 있는가 하면 사망 가운데 가두어져 있어요.

흙에 가두어져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범죄하자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였지요.

이는 흙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아담을 흙에 가두려고 창조하지 않았어요.

생명과를 먹여서 산 자가 되어서 영생하는 하늘나라에 앉히고자 창조했어요.

그런데 뱀의 미혹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어서 흙에 가두어지고 말았어요.

그 흙(무덤) 속에 자기 백성들이 가두어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흙에 속한 자를 하늘에 속한 자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흙에 속한 자를 하늘에 속한 자로 만들려면 먼저 흙 속에서 끄집어내야 하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 흙(무덤)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내고자 함입니다.

 

이걸 옥(獄)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 하였다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을 봅시다.

 

벧전 3:18-19절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예수님은 죄가 없는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대신 죽었다고 하지요.

이는 죽을 수 없는 분이 죽었다는 말입니다.

왜? 죽었나요?

이는 불의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고자 함입니다.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하면 불의한 자의 죽음을 예수님이 대신하여 죽어서 자신은 죽음에 가두어지고 죽음에 가두어진 불의한 자를 죽음에서 빼내서 하나님 앞으로 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리바꿈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귀에게 가서 내가 내 아이들을 대신하여서 죽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마귀가 콜 한 거에요.

예수님이 무덤 안에 우리의 자리에 들어오시고는 우리를 무덤에서 밀어 낸 것입니다.

 

자 보세요.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을 마귀가 모두 무덤에 가두지요.

아담 안에서 난 자들은 자기 뜻과는 무관하게 무덤에 가두어지는 신세가 되었어요.

 

이제 이걸 예수님은 역(逆)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죽음에 가두어졌습니다.

이제는 예수그리스도로 한 사람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이 살아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을 봅시다.

 

롬 5:12-19절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한 사람이 나오지요.

그 한 사람이 누구인가요?

아담이에요.

 

아담 한 사람 때문에 죄가 모든 사람들에게 들어 왔어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죽습니다.

사망이 모든 사람 위에서 왕 노릇했어요.

이걸 대표원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한 사람이 왔어요.

하나님이 보낸 것입니다.

누구입니까?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아담이 죄인이어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라는 의인을 보냈어요.

그리고는 예수를 아담처럼 대표자로 세운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나온 자들이 다 죄인이듯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나온 자들은 다 의인이에요.

 

이는 예수그리스도가 의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모두가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의인은 사망이 가둘 수가 없어요.

 

의인이신 예수가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서 죄를 뒤집어쓰고 죽었어요.

그리고 무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무덤 속에 들어가 보니 거기에 자기 백성들이 죄로 인하여 사망에 가두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귀에게 내가 저들을 대신하여서 죽었으니 자기 백성들을 풀어 주라고 합니다.

 

내 아이들을 내어 놓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볼모로 잡고 예수님의 백성들을 놓아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을 봅니다.

 

마 27:50-53절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지요.

그러자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무덤 속에서 자던 성도들이 일어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부활 후에 이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으로 들어갑니다.

이는 천국에 간 것입니다.

 

다시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무덤 속에 들어가니 거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겁니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말하면 구약의 백성들이에요.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온 세상의 하나님 백성들입니다.

 

구약에는 죽으면 신자나 불신자나 스올에 갔어요.

스올은 신약에서의 지옥 개념이 아니고 모든 죽은 자들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대기하는 장소와 같아요.

예수님이 오시고 난 후에 천국백성과 지옥백성으로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스올에 가신 것입니다.

가셔서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내시는 것입니다.

이게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씨가 죽어서 새싹이 되어서 땅을 뚫고 나오는 것과 같아요.

 

이걸 옥에 영들에게 복음이 전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 자체가 복음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무덤에 들어간 것은 곧 무덤 속에 복음이 전파 된 것과 같은 이야기인 것입니다.

 

예수라는 복음을 듣고 무덤에서 나온 자들은 예수님이 열어 놓은 천국 문을 통하여서 아버지께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히브리서에서는 “새롭고 산 길”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0장을 봅시다.

 

히 10:19-20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자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지요.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천국의 문이 열린 것을 말합니다.

그동안 굳게 닫혀 있던 에덴동산의 문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활짝 열린 것입니다.

 

잘 보세요.

성막에 보면 성소와 지성소가 있어요.

여기에 휘장이 쳐져 있습니다.

 

휘장 너머를 지성소라고 하고 휘장 이쪽을 성소라고 합니다.

지성소에 하나님이 계세요.

그러니 지성소는 천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지성소를 누가 가로막고 있나요?

휘장이에요.

 

하나님을 만나려면 반드시 휘장을 지나가야 해요.

그런데 이 휘장 안으로는 아무나 못 들어가요.

오로지 대 제사장만이 들어가요.

들어 갈 때 그냥 들어가지 못하고 반드시 피를 앞세우고 들어갈 수가 있어요.

 

히브리서는 이 휘장은 곧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휘장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찢으셨어요.

자기 몸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하나 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육체를 휘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문인 것입니다.

그 문을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으로 여신 것입니다.

성소를 가로 막고 있는 휘장은 곧 에덴동산에 굳게 걸어 잠긴 문과 같은 것입니다.

이 문을 예수가 자기 몸을 쪼갬으로 열어 주셨어요.

 

이렇게 되면 휘장 너머에 있는 지성소는 에덴동산과 같고 휘장 이 쪽인 성소는 이 세상과 같아지지요.

이제 지성소로 들어갈 길이 열린 것입니다.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오직 대 제사장이 피를 앞 세우고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대 제사장이 되어서 자기 피로 휘장에 뿌린 것입니다.

그러자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걸 막힌 담이 허물어 졌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지금 에덴동산의 문에다가 자기 피를 뿌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의 문은 예수의 피로 열려지는 것입니다.

이게 출애굽 때 장자들이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으로 보여 주셨어요.

 

구약 이스라엘의 장자들이 죽어가는 죽음의 재앙에서 어떻게 살아났나요?

문에다 어린 양의 피를 뿌려서 살아났지요.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것은 무덤에서 나온 것과 같아요.

 

죽음에서 어떻게 살아났습니까?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났어요.

문에다 어린 양의 피를 뿌리고 살아났잖아요.

 

문을 보세요.

마치 천사 둘이서 지키고 있는 모습이지요.

성소의 휘장에도 두 그룹이 그려져 있어요.

에덴동산의 문도 천사들이 지키지요.

그런데 문에 피가 뿌려지니까 천사들이 열어줍니다.

 

천사들은 예수님의 피를 보고 문을 열어 주어요.

이걸 예수님이 들어간 무덤 속으로 끌어 당겨서 보세요.

무덤에 누가 지키고 있나요?

죽음의 세력들이 지키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마귀의 종들이 지키고 있는 무덤 문에다가 자기 피를 확 뿌린 것입니다.

그러자 닫혀 있던 무덤 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무덤 문을 열고 보니 그 안에 자기 백성들이 올망졸망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가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무덤 속에 있던 우리에게 야~~ 빨리 나가!

나가서 아버지께로 가!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덤에서 나온 자들이 거룩한 성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거룩한 성이란? 천국을 말해요.

이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천국이 우리 안에 와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해가 되지요.

 

자 그럼 이제부터 조금 어려운 공부를 해 봅시다.

 

죄인이 무덤 속에 갇히게 되는 것은 율법의 요구 때문입니다.

율법의 요구가 죄인은 반드시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즉 율법을 지키지 못한 자는 다 무덤 속에 갇힐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을 다 끄집어내 주셨습니다.

 

무덤에서 나왔다는 말은 율법의 요구로부터 해방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죄인은 무덤에서 나올 수가 없어요.

무덤은 죄가 없어야 내어 보내주어요.

 

그런데 그 무덤을 지키고 있는 마귀의 종들이 무엇을 보고 무덤 문을 열어주고 나가라고 한다고 했나요?

예수님의 피이지요.

예수님의 피가 발려진 사람들은 무덤 속에 가둘 수가 없으니 무덤 바깥으로 나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인하여 무덤 속에서 나온 성도들은 더 이상 율법의 요구와는 상관이 없는 자가 되었다는 말이 되겠지요.

아니~!

사망이 율법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에 요구를 다 이루셨어요.

율법에 요구가 죽음이에요.

그 죽음을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어 주심으로서 율법에 요구를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지켜야 할 율법의 요구를 다 완성 하였으니 사망이 더 이상 가두어 둘 수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자 무덤에 있던 성도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인 천국으로 들어 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면서 우리가 어떤 신분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연합이 되었어요.

그럼 우리는 예수님이 율법의 요구를 자신의 죽음으로 완성하였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우리가 지켜야 할 율법의 요구를 대신 하여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에 대하여서도 죽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마귀는 더 이상 율법의 요구를 가지고 성도를 죄인이라고 몰아붙일 수가 없어요.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계명을 못 지켜도 정죄함이 없고 말씀에 순종치 못하여도 정죄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대신 다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보면서도 아직도 지켜야 할 것이 남아 있다고 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헛되이 하게 하는 악당들이에요.

이런 자들을 일컬어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을 봅시다.

 

갈 3:10절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보세요.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하지요.

왜? 저주인가 하면 항상 뭔가 행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안 하면 불안해요.

그래서 저주아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을 보면 본능적으로 율법을 지켜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안에 법이 살아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에요.

법이 말씀을 보면 자꾸만 자기가 지켜야하는 것으로 붙잡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마음속에 예수님의 피 뿌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 뿌림이 없으니까 율법이 살아서 기승을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항상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을 지켜야 안심이 되어요.

말씀을 어기면 불안해서 못 살아요.

그 안에 법이 살아서 자꾸만 자기 행위를 참소하기 때문입니다.

 

법 아래 있는 자들은 종이에요.

종은 자기가 뭔가 해야 안심이 되어요.

종에게 쉬라고 하면 불안해요.

일을 해야 안심이 되어요.

 

성도는 은혜 아래 있는 자에요.

은혜 아래 있는 자는 종이 아니고 아들이에요.

아들이기 때문에 일과 상관없이 자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들은 일로부터 자유 한 자에요.

일을 하나 안 하나 자유해요.

종처럼 이것 안하면 혼나는데 이러한 것이 없어요.

아들은 아버지와 사랑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일 때문에 끊어지지 않아요.

 

그러나 종은 법적 관계에 있어요.

일을 시키기 위해서 값을 주고 종으로 사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하지 않는 종은 쫓겨나요.

 

성도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아들에 영을 받았어요.

그러므로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부터 자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거듭난 자에겐 더 이상 지켜야 할 것이 없어요.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갈 4:1-11절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우리는 원래 아들이었어요.

그런데 잠시 정한 때까지 율법 아래 맡겨 두신 것입니다.

왜? 율법 아래 맡겨 두셨는가 하면 예수그리스도로 해방시키기 위함입니다.

 

우린 모두가 율법 아래서 태어났어요.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율법 아래서 시작을 해요.

저도 수십 년간 율법 아래서 종처럼 살았어요.

그러다가 예수님이 오셔서 종에서 해방 시켜 주었습니다.

 

보세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율법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내게 하셨다고 하잖아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셨다고 하지요.

이게 중요해요.

 

속량이란? 대신 값을 치루었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치러야 할 값을 예수님이 대신 치렀어요.

어떻게 치렀는가요?

우리가 율법의 요구대로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신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가 뭔가요?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는 사망이라고 하잖아요.

우리는 죄 아래 태어났어요.

본질적으로 죄인이에요.

 

죄인이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없는 자란 말입니다.

너희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게 하려고 율법을 주었어요.

그럼 우리는 율법 앞에 나는 죄인입니다!

주여 죽여주시옵소서! 라고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 고백을 했어요.

 

로마서 7장입니다.

 

롬 7:14-25절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율법은 흠이 없어요.

완벽한 하나님 말씀이에요.

이걸 신령하다고 합니다.

신령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이 들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율법으로 주어졌어요.

누구에게 주어졌나요?

죄인에게 주어졌어요.

왜? 율법을 주었느냐 하면 너는 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율법을 지키고자 하니 안 되는 것입니다.

왜? 안 되는가 보니 자기 안에 죄가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놈의 죄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하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이 놈에 죄를 못 이기겠는 겁니다.

마음으로는 지켜야지 지켜야지 하는데 몸이 말은 안 들어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해 줄꼬!” 라고 하면서 우~앙! 하고 우는 것입니다.

 

그러자 성령이 바울에게 알려 주는 것입니다.

야~! 바울아!

네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이 하셨는데!

어떻게 했는가 하면 네가 해야 할 일을 그 아들을 보내서 해 치웠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 치웠는가 하면 바울이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를 죽임으로 하셨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믿으라고 합니다.

이걸 영으로 산다고 해요.

한마디로 예수 믿는 것이 영으로 사는 것이에요.

 

로마서 8장을 봅시다.

 

롬 8:1-1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지요.

이는 더 이상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고 해서 정죄당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대신 예수님이 율법의 요구를 다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어지게 하시려고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너희는 이제 율법의 요구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고 알려 줍니다.

이러한 사실을 믿음으로 사는 것을 일컬어 영을 쫓는다고 합니다.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은 내가 비록 몸뚱이로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죄인이지만 이런 죄인을 위하여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 대신 율법의 요구를 다 완성 하셨다는 것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시는 것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영을 쫓는다.

혹은 영으로 산다고 합니다.

 

성령은 아들에 영이에요.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유 한 것입니다.

말씀의 요구로부터 자유해요.

왜냐하면! 모든 말씀은 예수님께서 대신 다 지켜주셨다는 것이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 믿음으로 살아요.

누가 너 왜? 하나님 말씀대로 안 살아! 라고 하면 예수님이 나 대신 다 사셨는데요! 라고 하란 말입니다.

이게 믿음이에요.

 

그럼에도 아직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신앙을 증명 받으려는 자들은 그 속에 성령이 없는 자들이에요.

성령이 없으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이 안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를 안 믿는 자들이에요.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이에요.

예수님의 죽음을 헛것으로 돌리는 자들이에요.

 

갈라디아서 4장을 다시 봅시다.

 

갈 4:8-11절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우리는 원래 아들인데 잠시 동안 종처럼 두셨다고 하지요.

율법 아래 두었다고 했잖아요.

그러다가 때가 되어서 율법 아래서 빼내 주었어요.

종노릇하던 것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어요.

 

어디에 종노릇했다고 합니까?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켰다고 하지요.

이게 율법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 요구를 다 도말하셨어요.

 

골로새서 2장입니다.

 

골 2:14-16절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평론하지 못하게 하라”

 

우리를 거스리고 대적하던 것이 뭔가요?

율법이지요.

이걸 “의문에 쓴 증서” 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 의문에 쓴 증서를 다 도말해 버렸어요.

즉 예수님의 죽음과 의문에 쓴 증서를 바꿔치기 했어요.

예수님이 의문에 쓴 증서에 적힌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다 도말했어요.

 

도말이란? 벽에 낙서 된 것을 페인트로 다 칠해 버린 것을 말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율법을 자기 피로 다 칠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율법을 다 덮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보려고 하니까 율법은 안 보이고 예수님의 피만 보이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가 뭐라고 했나요?

사망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율법의 요구대로 예수님의 죽음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곧 율법의 요구에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더 이상 율법이 추궁하지를 못해요.

무덤에 가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만 빈 무덤이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빈 무덤이 되는 것입니다.

 

무덤이 우리를 가둘 수가 없어요.

주께서 다시 오시면 다 토해내요.

그 땐 우리는 무덤에서 자다가 일어나게 되어요.

성도는 죽은 것이 아니고 자는 거예요.

 

그러므로 죽음 앞에 벌벌 떨지 말고 당당하세요.

성도는 죽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죽음이라 하지 않고 잔다고 하는 것입니다.

 

실컷 주무세요.

그럼 주께서 깨울 날이 곧 올 것입니다.

그 때 일어나서 천국에서 어린 양과 혼인 잔치 하면 되어요.

그 때를 기약하면서 오늘이라는 날 동안 우리를 얽어매는 갖가지의 무덤에서 나와서 담대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무덤 속에 있는 우리를 꺼내시려고 무덤 안으로 들어오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망의 권세를 깨트려 주신 찬양합니다. 그 주님 안에 우리를 거하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세상에서 죽음을 이긴 자로서 담대히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관념이 아니라 실상으로 믿어져서 그 믿음으로 죽음에 세력들을 이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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