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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125강.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요 20:1-18)

by coroa 2022. 2. 13.

 

하늘빛사랑 https://blog.daum.net/day7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25강.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요 20:1-18)

-.정낙원 목사

 

요 20:1-18절 “안식 후 첫 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2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쌔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 인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 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여 하니(이는 선생님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마리아가 울고 있습니다.

그토록 믿고 따르던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시신이라도 보고 싶은데 그것마저도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왜? 시신이라도 보고 싶을까요?

이는 인간은 눈에 보이고 손에 붙잡히는 것이 있어야 안심이 되는 우상성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보이는 것을 믿고자 합니다.

인간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으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이 없으니까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 사는 인간들은 물질적 가치로 살아갑니다.

물질적 가치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혀야 있다고 하는 사고입니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뭔가 만져져야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기적 신앙으로 나타납니다.

 

기적 신앙은 인간들의 호기심을 유발만 시킬 뿐입니다.

믿음은 기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속의 기적은 믿지 않음을 고발하는 차원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기적과 상반된 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이 표적을 구하자 요나의 표적을 말합니다.

요나의 표적은 십자가를 말합니다.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입니다.

 

인간들이 바라는 기적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로마의 힘을 단번에 꺾는 것입니다.

영웅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힘없이 죽었습니다.

 

군중들은 물위를 걷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던 그러한 능력 행하는 예수를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힘없이 십자가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따르던 제자들마저도 다 떠나가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소문에 예수님이 살아났다고 합니다.

과연 그러한가 싶어서 무덤에 달음질하여서 갔습니다.

그런데 시신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면 더 불안한 것입니다.

 

육은 보이는 세계이고,

영은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영은 육을 볼 수가 있는데 육은 영을 볼 수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묵시라고 합니다.

 

묵시는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보이는 역사를 육이라 하고 보이지 않는 묵시를 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영의 나라입니다.

피조물의 세계를 육이라 하고 창조주가 사는 세계를 영이라고 합니다.

 

신앙이란?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려면 믿음이라는 안경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눈을 받으면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가 보입니다.

 

인간들이 예수를 믿는 것은 기적에 속한 일입니다.

어째서 기적인가 하면 예수가 주외 그리스도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시지 않으면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영적인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영적인 일입니다.

육으로서는 도무지 이해 불가한 사건입니다.

 

마리아와 제자들은 육입니다.

육 앞에 영의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육으로 영을 이해하려고 하니까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을 믿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육인 마리아를 영으로 만들어 가시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마리아는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우리가 곧 마리아입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우리의 현실을 보고 울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바다를 항해하고 있습니다.

바다는 날마다 크고 작은 파도가 넘실거립니다.

때론 배에 물이 가득 들어와서 배가 침몰할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사건들을 자꾸만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는 사건만 보이지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답답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도 영 개운치가 않습니다.

기도하면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수종을 들어야 하는데 감감합니다.

그렇다고 천국이 믿어지지도 않고 하나님이 손에 잡히는 것도 아니고 답답한 것입니다.

믿음 믿음 하는데 믿어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없다고 하기엔 불신앙 같고,

그렇다고 있다고 하기에는 영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일을 하신다고 하는데 믿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일을 하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지 못할 뿐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고 육의 눈으로 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속에서 일을 하실 때는 항상 사건을 통해서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곧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시건들 속에 영적 메시지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린 그 영적 메시지를 읽어 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갈하십니다.

야~ 이놈들아!

너희가 천기는 분별 할 줄 알면서도 어찌 시대의 징조는 보지 못하느냐고 하십니다.

 

예를 들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게 징계를 하십니다.

징계하는 것은 아들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징계는 아버지의 사랑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징계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왜? 날 고난 가운데 두느냐고 따집니다.

아무리 성경을 달달 외우면 뭣합니까?

조금만 어려운 일을 당하면 당황하는데,,,,

 

우리는 입술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고 합니다.

그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예수야 시간 날 때 믿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보다 보이는 이 세상을 더 좋아 합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처럼 예수가 부활을 하든 말든 그건 이제 자기들하고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고 고기 잡으러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우리들도 먹고 살기 위해서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제자들이나 울고 있는 마리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누가 누구를 비판하고 나무랄 군번이 아닙니다.

내가 곧 베드로이고 내가 곧 마리아인데 누가 누굴 나무라겠어요.

우린 이 말씀 앞에 나무람을 들어야 할 자들입니다.

믿음 없음을 폭로당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여 불쌍히 여겨 주세요!

내게 믿음을 더하소서!

소경 거지 바디매오 처럼 곁에서 누가 뭐라고 하든지 상관치 말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하여야 합니다.

 

뭘 열심히 해서 얻어 내라는 말이 아니고!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우리의 실존을 좀 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서 우리의 신앙이 허구라는 것이 드러나야 합니다.

믿음 없음이 폭로당하고 애통하고 상한 심령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망과 슬픔으로 울고 있던 마리아에게 소망과 기쁨을 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는 마리아 앞에 나타나서 다정하게 마리아를 부르십니다.

“마리아야!” 라고 하니까 마리아의 눈이 번쩍 뜨인 것입니다.

갑자기 보이지 않던 예수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일어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면 마리아의 울음이 기쁨으로 변했듯이 우리의 울음이 기쁨으로 변할 것입니다.

 

우리가 낙망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주께서 우리에게도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오셔서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주십니다.

그럼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절망 속에 희망을 담아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절망 가운데 두고서 소망을 갖게 하십니다.

지옥에 던져 놓고 천국을 사모하게 하신단 말입니다.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를 몰라 본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된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눈을 감기게 할 때가 있고, 눈을 뜨게 해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조급해 하지 마세요.

 

신앙이란? 단거리 경주가 아니고 장거리 경주입니다.

우리가 조급해 한다고 해서 없던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의 조급함과 상관없이 때가 되면 주어집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시기 전에 울게 하세요.

울게 하시곤 열어 주십니다.

눈이 떠지고 나면 비로서 “나의 난 된 것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받아 내시고자 울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불신 속에서도 용서와 긍휼을 부어주십니다.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주께서 일으킨 사건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좋은 일이든 좋지 않은 일이든 다 주께서 일으킨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지고 합력하여서 선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니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관상”이라는 영화를 보면 이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송강호가 관상쟁이인데,,

영화의 끝 부분에 가면 멎진 대사가 나옵니다.

아주 복음적인 대사라서 인용합니다.

 

관상쟁이가 남의 관상을 봐주고서 흥하기도 하고 관상을 본 것 때문에 망하기도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종국에는 망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유배지에서 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바다에서 일렁이는 파도를 바라보면서 하는 말이 자기는 파도만 보았지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을 보지 못하였다고 고백을 합니다.

파도는 바람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인 줄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의 얼굴에 나타난 관상만 보았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였고 합니다.

파도 속에 감추어진 내면을 모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원인도 모르면서 껍데기만 가지고 아는 척 해온 자신의 무지함을 토로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쥐뿔도 모르면서 다 아는 척 하면서 인생을 헛살았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삶 속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파도라는 고난들이 있습니다.

우린 그 파도라는 고난만 보고 있습니다.

 

고난이라는 파도를 일으킨 하나님의 뜻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니까 고난 앞에서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것입니다.

하나님 너무 합니다! 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고난이라는 파도를 일으켰는지는 생각지 않습니다.

 

저도 과거엔 하나님을 엄청 원망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러나 과거와 지금은 원망이 다릅니다.

과거엔 왜? 날 몰라주느냐고 원망했습니다.

내가 한 것만큼 안돌아 오니까 화가 나서 원망했습니다.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금 했으면 뭔가 주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받아 잡숫고는 입 싹 닦아 버리는 것입니다.

모르는 척 한단 말입니다.

 

그토록 열심과 충성으로 부려 먹었으면 뭔가 보답을 해 주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없어요.

그래서 밤마다 이슬 맞아 가면서 하나님 이러실 겁니까 라고 씨름을 했습니다.

내 몸을 학대하면서 따졌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지나고 보니 반응 없음이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꺼져 가는 심지가 꺼지지 않듯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듯이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 주셨어요.

 

하나님은 조급한 나에게 기다림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기다림이라는 산전수전을 겪어 오다가 보니까 이젠 하나님의 일하심을 조금 알겠어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다루어 가는지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아요.

지나고 나면 아! 이래서 이러한 일들을 일으켰구나! 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은 원망의 내용이 다릅니다.

옛 날에 울분의 원망이라고 한다면 지금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아파서 울어요.

좀 살살 다루어 달라고 울어요.

 

그래서 저는 503장 찬송을 참 즐겨 부릅니다.

 

1.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 합니다.

 

2.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3. 이 세상 고락간 주 뜻을 본 받고

내 몸이 의지 없을 때 큰 믿음 주소서.

 

가사를 보세요.

특히 2절이 압권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늘 허밍으로 흥얼거려요.

 

누가 뭐라고 하면 흥얼거리고!

힘든 일이 생기면 흥얼거려요.

저절로 나와요.

다 주의 뜻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평안으로 인도하시고, 때로는 고난으로 인도 하세요.

평안이든 고난이든 다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모든 것이 사랑이듯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것이 사랑이에요.

죽여도 사랑이고 살려도 사랑이에요.

흥하게 하는 것도 사랑이고 망하게 하는 것도 사랑이에요.

평안도 사랑이고 고난도 사랑이에요.

 

울고 싶으면 우세요.

웃고 싶으면 웃으세요.

울다가 웃다가 하다 보면 고난 바깥에 계시는 주님을 볼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 된 것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라 는 고백을 하게 되어요.

바울만 그러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그런 고백을 하게 되어 있어요.

때가 되면 다 한다니까요.

 

우리에게 일어나는 고난도 하나님이 주셨고 평안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마리아의 울음도 주께서 허락하신 것이고,

마리아의 웃음도 주께서 허락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울음을 통해서 웃음을 알게 하시고, 웃음을 통해서 울음을 알게 하십니다.

울음을 통해서 웃음을 소망케 하시고, 웃음을 통해서 울음에서 건져 주심에 감사케 하십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괴로우면 주를 보라고 하고 즐거우면 찬송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요?성도는 괴로우나 즐거우나 결국 주 만 바라보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울면서 바라보고, 웃으면서 바라보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짓궂게도 울려서 바라보게 하시고 웃게 해서 바라보게 하세요.

 

울고 웃는 가운데서도 우리의 구원의 시계는 멈추지 않고 돌아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조건이나 행위와 상관없이 은혜로 구원을 하셨어요.

그러므로 은혜로 주신 구원을 반드시 이루어 가세요.

왜냐하면! 중간에 포기 되면 은혜가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막말로 우리가 잘못했다고 구원에서 잘라 낸다고 하면 그건 은혜가 아니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은혜로 구원을 한 자기 백성들은 잘못을 해도 잘라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가 손상되기 때문입니다.

 

예수와 성도는 연합이 되었어요.

연합이란? 본드로 붙여 놓은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와 하나로 본드로 붙여 놓았어요.

 

본드로 붙여진 것을 뜯으면 둘 다 손상을 입어요.

그러니 분리하고 뜯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뜯으면 예수님이 다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을 안 들으면 두들겨 패서라도 구원만큼은 지켜 내세요.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건 사도 바울만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가 동일하게 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성령으로 이러한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럼 성령을 받은 성도도 그런 고백을 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도 바울과 동일한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받은 성령이나 우리가 받은 성령은 동일해요.

그럼 사도 바울이 그 모진 고난을 지나오면서 “나의 나 된 것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고 고백을 하였듯이 우리도 그 어떤 아픔을 당한다 할지라도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곧 바울이고, 바울이 곧 우리에요.

베드로가 곧 우리이고, 우리가 곧 베드로입니다.

마리아가 곧 나이고, 내가 곧 마리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가 한 성령으로 예수를 믿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예수를 죽인 원수 노릇을 하였다고 한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원수 노릇을 합니다.

예수님이 바울에게 성령을 주었듯이, 우리에게도 성령을 주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 하였듯이, 우리도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가서 용서 해 주셨어요.

 

그럼 우리도 용서 해 주세요.

베드로는 용서 하고 우리는 용서하지 않는 것은 없어요.

바울이나 베드로를 용서 하셨으면 우리도 용서 해 주세요.

마리아가 울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웃었다면, 우리도 울다가 웃는 일이 일어납니다.

 

성경은 모두가 예수님의 자기 백성 사랑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곧 예수님의 자기 백성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속에 나와 있는 베드로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곧 나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베드로와 마리아가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다가도 종국에는 믿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럼 우리에게도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한 때가 되면 다 보이고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급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급하세요.

자식이 공부 못하면 누가 더 속이 타나요?

부모에요.

그래서 부모가 설쳐서 기어코 자식을 공부하게 하시잖아요.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에요.

부모처럼 구원 하세요.

우리는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구원을 해 주셨습니다.

구원을 해 주신 하나님이 그 구원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해선 우리가 할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요.

 

속된 말로 우린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어요.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원함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원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안식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자기 백성들은 한 알갱이라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다 찾아내시고 이루십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사세요.

환경 때문에 낙심하지 마세요.

 

없으면 없는 대로 살고!

있으면 있는 대로 살고!

환경을 거역하고 내가 바꾸고자 하니 힘이 들고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그 환경도 바꾸어 주세요.

 

바울이 내게 능력 주는 자 안에서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하잖아요.

내가 풍부에 처하기도 하고 비천에 처하기도 하였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풍부 할 때는 풍부를 누리고, 비천 할 때는 비천하게 사세요.

 

믿음으로 받으면 다 이겨 낼 수 있어요.

하나님은 시험 당할 즈음에는 반드시 그것을 이겨 내는 믿음도 주세요.

물론 과정을 지나오는 아픔이 있지만 말이에요.

 

예수님이 부활 하셨습니다.

이건 우리가 원해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에요.

모두가 하나님이 원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원하심으로 일으키신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우리에게도 어떻게든 적용을 시켜 나가실 것입니다.

반드시,,,

 

지금부터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베드로와 우는 마리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간섭해 가는지를 살펴봅시다.

 

먼저 부활이 뭔가 살펴봅시다.

부활이란? 하늘나라의 몸으로 살아남을 말합니다.

이건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과는 다릅니다.

 

나사로는 소생 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어요.

부활은 소생과 달라요.

 

부활은 하늘에 몸으로 살아나는 것이지만, 소생은 땅에 몸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몸은 다시 죽음이 없지만, 소생은 다시 죽음이 있어요.

소생한 자는 다시 죽지만, 부활 하신 예수님은 다시 죽음이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소생의 사건이 몇 군데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수넴 여자의 아들이 죽었다가 엘리사를 통하여서 살아난 사건이 있습니다.

또한 엘리사의 시체와 접촉한 도적이 살아난 사건도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인 성 과부의 딸을 살린 것이나 나사로를 살린 일도 있습니다.

또한 바울이 창문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살린 사건도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소생하였다가 다시 죽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예수님에 의하여 자기 백성들이 부활의 몸으로 살아날 것을 예표(豫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들입니다.

 

성경 속에서 일어난 소생이란? 육신의 연장이라고 보면 됩니다.

언젠가는 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다릅니다.

역사 바깥의 몸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역사 바깥의 묵시의 몸으로 부활을 하셨습니다.

 

소생은 역사에 속한 일이지만,

부활은 묵시에 속한 일입니다.

묵시에 속한 일은 역사가 감지하지 못합니다.

읽어 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역사에 속한 소생을 가지고 묵시에 속한 부활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 세상에서는 부활은 낯선 것입니다.

부활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언어로서는 부활을 소생으로 설명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을 설명하기 위하여 영과 정 반대인 육을 만드신 것입니다.

육을 가지고 영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역설적이지요.

 

육에게는 영은 없는 세계입니다.

왜냐하면! 영은 육에게 감지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이 영이 되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육이 영이 되게 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시고 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어요.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도마는 나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지 않고서는 못 믿겠다고 합니다.

 

요 20:25-29절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나중에 예수님이 나타나서 도마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게 합니다.

도마가 예수님을 만져보고 나서 이제 믿겠다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이는 보고 믿는 자는 믿는 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자 도마가 자기 믿음 없음을 감추고자 오버합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웃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고 하십니다.

직역하면 보고 믿는 것이 무슨 믿음이냐?

그건 믿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음이란? 보지 않고 믿는 것이지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란 말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은 믿음이 동반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이 동반되지 않으면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믿는 척은 할 수가 있어도 믿을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믿어져야지만 믿는 것입니다.

육은 기껏해야 믿어야지! 믿어야지만 해요.

믿어야지는 믿음이 아니에요.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믿어야지! 라는 자기 행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 척 하는 것은 안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 일과 나는 타자(他者)라는 말입니다.

너의 일은 너의 일이고 나의 일은 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것은 그와 내가 하나일 때 가능합니다.

이러할 때 그가 한 일이 내가 한 일이 됩니다.

이걸 하나 됨이라고 합니다.

 

이건 인간들 세계에선 불가능합니다.

영의 세계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영의 세계에서는 믿음으로 살고 육의 세계에서는 자기가 접촉하여서 알아진 것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육은 자기가 경험된 것 이외는 인정하지 못합니다.

부활도 내가 경험하여야 인정합니다.

남이 부활을 하여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의 부활이지 내 부활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육이 비록 부활을 안다고 하여도 그건 관념이지 실제가 아닙니다.

 

마르다가 이러한 부활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님이 부활을 말씀 하시자 나도 안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를 못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는 예수님이 행한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내가 한 일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 아닌 다른 사람인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육적으로 보면 예수님과 나는 타자에요.

남남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오면 타자가 아니고 하나라는 것으로 믿어져요.

하나로 믿어지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일이 곧 내가 한 일처럼 믿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지요.

보혜사 곧 성령이 오시면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지요.

이걸 연합이라고 합니다.

이럴 때 육이 영이 되는 것입니다.

 

육을 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육적 죽음을 나의 영적 죽음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성령이 예수님과 우리가 한 몸이라는 것으로 믿어지게 해 주세요.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손으로 만지지 않아도 믿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다.

이는 주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왜? 믿으라고 합니까?

그건 예수님이 구원을 일으키는 사건을 발생하였기 때문입니다.

 

믿음 앞에서는 육에 한계성이 나타나요.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구조는 타인이 한 것을 내 것으로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는 믿어야지 하는데 마음으로는 믿어지지가 않아요.

안 믿어지니까 믿는 척 하는 것입니다.

 

육의 세계에서 믿음이란? 관념이고 추상적입니다.

 

이게 오늘 본문 6절에서 13절까지를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안식 후 첫 날에 마리아가 향품을 들고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무덤이 열린 것을 보고서 제자들에게 쫓아가서 알려 줍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제자들이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베드로가 먼저 도착하여서 무덤 속에 광경을 보았어요.

예수님을 쌌던 세마포와 수건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겁니다.

마치 밤에 잠을 자고 아침에 이불을 개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고 몸만 쏙 빠져 나간 것처럼 예수님의 몸만 쏙 빠져 나가고 세마포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에게 마리아가 한 말이 맞다고 알려 줍니다.

자신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까 예수님의 시신이 없더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요한이 무덤 속에 들어가서 확인을 합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의 말을 믿습니다.

이에 마리아도 무덤 속에 광경을 보고 예수님이 없음을 확인합니다.

그리곤 웁니다.

 

마리아와 제자들의 이러한 모습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 시신이 없네!

어디로 치웠지!

시신 찾아 주세요!

그러고는 끝입니다.

 

부활을 믿었다고 한다면 시신이 없음을 보면 환호성을 질러야 합니다.

야! 진짜 예수님이 부활 하셨구나!

봐라! 예수님을 쌌던 세마포만 남겨두고 예수님이 살아났잖아!

그래야 옳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이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날 것을 알지 못하더라고 합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해 주듯이 마리아는 울고 제자들은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이는 아직까지 성령이 이들에게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육은 아무리 하나님께서 영적인 일을 이 땅에 벌리셔도 믿어지지가 않아요.

예수가 하는 일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기는 알겠는데 믿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영의 세계는 믿음의 세계입니다.

영의 세계를 믿음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믿어야 하는 대상이 따로 존재하는 세계라는 말입니다.

 

영의 세계에서는 우리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것으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영의 세계에서는 우리의 행함은 필요가 없고 오직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만 통용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우리의 행함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만을 앞세우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 안에 이러한 믿음이 생겨요.

그래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주 예수를 믿음으로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럼 성령이 언제 오십니까?

이는 예수님이 가셔야 오세요.

 

요한복음 15장 16장을 봅시다.

 

요 15:26절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 16:7-8절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성령이 오시는 것도 다 정한 수순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면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보내 주신다고 하지요.

그러면 그 성령이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오시자면 먼저 예수님의 죽으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이 승천하여서 아버지께로 가십니다.

가셔서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자기 백성들에게 보내 주십니다.

 

이걸 다른 보혜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보낸다고 하니까 예수님은 강하고 성령은 약하다고 생각하면 안 되어요.

성부나 성자나 성령 모두가 하나님입니다.

이 세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세요.

 

아버지가 계획하시고!

아들은 아버지가 세운 그 계획을 성취 하세요.

그럼 성령이 아들이 이룬 것을 가지고 자기 백성들에게 적용을 시키고 믿어지게 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진두지휘하시는 분이 아버지에요.

아버지가 먼저 묵시에 계시던 예수님을 역사라는 이 세상에 보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십니다.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는 일을 하십니다.

 

이를 대속제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몸을 값으로 주고 자기 백성들을 죄 아래서 건져 내신 것입니다.

이걸 대신 속량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이에요.

이제 예수님은 역사 속에서 아버지께 받은 사명을 다 감당 하시고 원래 계시던 묵시 안으로 원대 복귀를 하셨어요.

 

그리고 성령과 임무 교대를 하십니다.

성령을 자신의 이름으로 보내십니다.

이제 성령이 오셔서 성도들에게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하신 일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하신 것이라는 것이 믿어지게 하십니다.

 

사도행전 2장을 봅시다.

 

행 2:33절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 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하나님이 죽었던 예수를 부활시킵니다.

이는 승리했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자기 이름으로 보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습니다.

 

그리곤 성령에게 당부 합니다.

가서 자기가 피 뿌려 놓은 자들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인간의 행함을 가지고 참소하기 때문입니다.

그 참소로부터 지켜 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무슨 일을 하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서 죽으신 것을 믿어지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성령님이 하실 일이 다른 겁니다.

예수님이 앞서서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 냈어요.

그럼 성령이 오셔서 그들에게 생명을 공급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의와 거룩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 아래서 태어났어요.

율법 아래서 태어났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 대신 율법의 요구인 죄와 사망의 요구를 십자가에 죽어주심으로 처리하셨어요.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이라는 동네에 살고 있던 자들을 의와 거룩이라는 동네로 옮겨 주신 것입니다.

즉 율법의 나라에서 은혜의 나라로 옮겨 주셨어요.

 

이제 성령이 오셔서 의와 거룩으로 살게 하세요.

은혜로 살게 하십니다.

성령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것을 믿어지게 하여서 다시는 율법에 종으로 살지 않게 하세요.

 

그래서 성경은 성령의 오심을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보내 주셨다는 식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성령이 오셔서 독자적으로 일을 하시지 않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성도들에게 믿어지는 일을 하시기 위하여 보내심을 입었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걸 새로운 피조물로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옛 사람은 아담 안에서 난 사람이에요.

아담 안에서 난 사람은 율법으로 살아요.

율법은 사망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 아래 있던 자들을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어요.

그리고 예수가 부활 할 때 함께 부활 시켰어요.

성령이 오셔서 이제부터 율법 아래서 죽었다가 살아난 자들에게 하늘에 것으로 채웁니다.

의와 거룩을 채우고 은혜를 채웁니다.

이걸 옛 것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 옷 입는다고 해요.

 

성령이 우리 안에 율법을 빼내고 은혜로 채우는 일을 하세요.

땅에 것을 빼내고 하늘에 것으로 채웁니다.

마귀의 것을 빼내고 예수님의 것으로 채웁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것으로 하늘에 것으로 채움을 입는 것을 새 사람을 입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간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구원을 이룬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구원을 삼 시제로 말하지요.

이미 얻은 과거 구원과 지금 이루어 가는 현재 구원과 장차 받을 미래 구원이 있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 냈어요.

이건 과거 구원이에요.

 

그리고 성령이 오셔서 우리 안에 옛 것을 제하고 새 것을 채우는 일을 하십니다.

땅에 지체를 죽이고 하늘에 것으로 살리는 일을 하세요.

이게 현재 이루어가는 구원이에요.

 

그럼 장차 예수님이 재림으로 오시면 우리는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걸 미래 구원이라고 해요.

그렇다고 구원이 세 개란 말이 아니에요.

 

구원은 하나이고 완료 된 것이지만 시작과 끝이 있는 역사세계에서 펼쳐 보이는 것이라서 역사에서 쓰는 시제(時制)로 과거 현재 미래라는 미완료의 시제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 구원을 받은 자는 현재와 미래 구원도 받은 것이에요.

이 모두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지켜내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중간에 짤려 나갈 일은 없어요.

안심하고 사세요.

성령이 이 사실이 믿어지게 하시고 안심하고 살게 해 주십니다.

그럼 마리아처럼 울 일도 없어요.

 

이제 예수님께서 마리아가 자신을 만지지 말라고 하신 것을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우는 마리아에게 나타나십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고 하십니다.

그러자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예수님을 만지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만지지 못하게 합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이제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고 제자들에게 알려주라고 하십니다.

 

이에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이러한 사실들을 알려 줍니다.

그리곤 예수님께서 그 날 저녁때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이게 안식 후 첫째 날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여기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지고자 하니까 왜? 만지지 말라고 하셨는가?

그리고 왜?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올라갔다가 와야 하는지를 살펴봅시다.

 

먼저 예수님의 몸을 만지지 말라는 것이 무슨 뜻인 지부터 살펴봅시다.

 

만진다는 것은 접촉을 말합니다.

접촉이란? 그냥 단순하게 몸을 터치 한다는 개념보다는 사귐을 뜻합니다.

이건 사랑의 행위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신 것은 마리아에게 사귐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왜? 허락하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시고 아직까지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무슨 말인가요?

왜?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으면 사귐이 이루어질 수가 없는가요?

이는 육과 영은 하나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육이에요.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이세요.

육인 마리아와 영이신 예수님은 온전한 사귐이 일어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육은 영을 이해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껏해야 육으로만 이해해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부활은 그냥 육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 밖에 되지 않아요.

마치 나사로의 소생과 같아진단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으로서의 소생이 아니라 영으로서 부활을 하셨어요.

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육과는 단절이 된 상태입니다.

전혀 새로운 존재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귐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귐이 되려면 마리아가 예수님처럼 영이 되어야 합니다.

육인 마리아가 어떻게 영이 됩니까?

이는 영이신 성령이 와야 합니다.

성령이 마리아에게 와야 영이 되어요.

 

이게 엄청 중요해요.

성령이 오면 예수를 이제 육체로 이해하지 않아요.

성도의 인생도 육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영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인생은 나그네와 행인 같은 인생이에요.

이걸 육적으로 이해하면 저주 받은 인생이에요.

그러나 영으로 이해하면 복 된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동일한 사건을 가지고서도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른 해석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럼 성령이 언제 옵니까?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올라 가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서 성령을 보내 주셔야지 만 하는 것입니다.

아까 성령이 오시는 수순이 있다고 하였잖아요.

 

이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올라가는 의미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에요.

첫 열매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걸 알려면 여호와의 절기를 알아야 해요.

하나님께서 절기를 통해서 자기 백성들이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게 있어 절기란 그냥 먹고 마시는 명절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구원이야기인 것입니다.

 

레위기 23장을 봅시다.

 

레 23:1-4, 44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를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3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라 너희는 무슨 일이든지 하지 말라 이는 너희 거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 4 기한에 미쳐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로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 ~ ~ 44 모세가 여호와의 절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공포하였더라”

 

레위기 23장 전체가 절기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의 율법에 나타나는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먹고 마시는 것들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그림자라고 하였어요.

 

골 2:16-17절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평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절기를 가지고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하실 일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절기는 어떤 것이 있는지 봅시다.

 

절기는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이 있어요.

이름 하여 7대 절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구분하면 봄 절기와 여름 절기와 가을절기가 있어요.

 

봄 절기로는 유월절과 무교절과 초실절이 있고!

여름 절기로는 칠칠절이 있고!

가을절기로는 나팔절과 속죄일과 초막절이 있습니다.

 

이 7대 절기는 예수님의 사역을 내포하고 있어요.

 

예수님을 일컬어 그리스도라고 하지요.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을 입은 자란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사역을 위임받은 자를 말해요.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세 가지 직분자에게 기름을 부어서 성별하였어요.

기름을 붓는다는 말은 성별한다는 말입니다.

구별한다는 뜻이에요.

 

누구에게 기름을 부었는가 하면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은 선지자이고 제사장이고 왕이란 말입니다.

이걸 예수님이 탄생 하실 때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에게 드리는 예물 속에서도 나타나 있어요.

 

동방박사들이 드린 예물이 뭔가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지요.

 

황금은, 왕을 상징하고!

유향은, 제사장을 상징하고!

몰약은, 선지자를 상징해요.

 

왕이 황금 옷을 입는 것은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하나님께 향을 피우는데 이는 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의미해요.

몰약은 시신이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인데 이는 선지자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 가지 예물을 받으신 것은 예수님이 선지자이고, 제사장이고, 왕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선지자이고 제사장이고 왕이세요.

그런데 이 세 가지 직임을 7대 절기 속에 담아 놓았어요.

 

예수님의 이 삼직을 절기로 표현하면 봄 절기와 여름 절기와 가을 절기로 말할 수 있습니다.

봄 절기는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선지자 사역을 말하고!

여름 절기는 성령으로 오셔서 성도들 안에서 제사장으로 일하시는 것을 말하고!

가을 절기는 장치 재림을 하여서 만왕의 왕으로 통치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무교절이 무덤에 게셨습니다.

그러다가 안식 후 첫 날인 초실절에 부활을 하셨어요.

 

그 초실절에 행하여지는 일을 보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아버지께 올라가야 하니까 나를 만지지 말라는 의미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초실절 속에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먼저 올라가야하는 이유가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초실절에 대하여 봅시다.

 

예수님은 알다시피 유월절 이후 사흘째 되는 날에 부활하셨어요.

이 날이 안식 후 첫 날이라고 했습니다.

첫 날이란 새로운 날이란 뜻입니다.

 

첫 창조에 속한 일곱째 날인 안식일이 지난 후 첫 날은 예수님이 부활을 한 날입니다.

이 날은 일곱째라는 첫 창조에 속한 세계를 넘어선 날입니다.

이를 여덟째 날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절기의 맨 마지막에 있는 초막절에 일곱째 안식일을 지난 후 첫 날인 여덟째 날을 대 성회 안식일이라고 해요.

이 날을 여덟째 날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여덟째 날은 첫 창조인 일곱째 날을 넘어선 날이에요.

첫 창조 바깥의 날이란 말입니다.

이를 묵시라고 합니다.

 

이는 곧 초막절을 끝으로 역사는 끝이 나고 묵시로 나아가는 것을 말해요.

세상 바깥에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해요.

이름하여 천국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일날에 모이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 하신 날을 기념하는 것으로 모이는 것이에요.

일곱째 날 안식일과 달라요.

일곱째 날 안식일은 율법 아래서의 안식일이라서 제사를 지냈어요.

 

그러나 여덟째 날 안식일은 제사 지내려고 모인 것이 아니고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모인 날이에요.

일곱째 날 안식일은 피 냄새가 진동하지만 여덟째 날 안식일은 찬양 소리가 진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주일 날 교회로 모이는 것이 짐스럽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지금 율법 아래 있는 일곱째 날 안식일로 모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에요.

그러나 반대로 주일 날 모이는 것이 기쁘고 감사함으로 모이는 것이라고 한다면 여덟째 날 안식일로서 천국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가슴이 벌렁 벌렁 하지 않나요!

 

이사야가 뭐라고 하던가요?

다시는 헛 된 제물을 다시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하잖아요.

성전 마당만 밟을 뿐이라고,,,

이는 일곱째 날 안식일로 모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확증해 보세요.

나는 지금 일곱째 날 안식일로 모이는가?

아니면 여덟째 날 안식일로 모이는가?

 

성경에서 8 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거듭남의 의미가 있어요.

아이가 태어나면 8일 만에 할례를 행하지요.

할례란 육적 몸을 벗는 것입니다.

즉 새로운 몸으로 살아나는 것을 말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일곱째 날 안식 후 첫 날에 부활 하신 것은 다른 몸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역사 바깥의 묵시의 몸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최초의 묵시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를 첫 열매라고 합니다.

이 첫 열매는 하나님 것이므로 하나님께 드려야 해요.

 

출애굽기 13장을 보세요.

 

출 13장 2절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첫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지요.

출애굽을 할 때 애굽에 장자들이 다 죽었어요.

그런데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은 단 한 사람도 죽지 않았어요.

이는 어린 양이 그들 대신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을 일컬어 나의 장자라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모두가 죽음에서 살아 난 첫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은 나의 장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출 4장 22절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장자란? 죽음에서 살아난 자들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이니까 장자가 되는 것입니다.

장자가 되어서 하나님께 바쳐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을 했으니 이제 아버지께 올라가서 첫 열매로 드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을 절기로 치면 초실절이라고 하였지요.

초실절이란? 첫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절기에요.

 

레위기 23장을 봅시다.

 

레 23:9-14절?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0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11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12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날에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13 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이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를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제로는 포도주 힌 사분 일을 쓸 것이며 14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오는 그 날까지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찌니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잘 보세요.

초실절이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마리아가 왜? 예수님을 만져서는 안 되는지를,,,

 

절기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킬 규례들이에요.

봄 절기인 유월절을 지나고 무교절을 지나서 초실절이 되면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 가져가서 하나님 앞에 흔들어 바치는 제사를 드려요.

 

이것을 요제라고 합니다.

요제란? 흔들어 바치는 제사란 말입니다.

 

제사하는 방법을 보면 다양해요.

 

제물을 불에 태우는 제사를 화제(火祭)라고 하고,

포도주나 기름을 붓는 제사를 전제(奠祭)라고 하고,

제물을 높이 쳐들고 드리는 제사를 거제(擧祭)라고 하고,

곡식 단을 흔들어 드리는 제사를 요제(搖祭)라고 합니다.

다 영적 의미가 있어요.

 

초실절에 드려지는 요제는 안식 후 첫 날에 첫 이삭 한 단을 흔들어서 드려요.

흔든다는 것은 살아난다는 뜻입니다.

부활을 상징해요.

 

이건 예수님께서 부활 하실 때 함께 한 무리가 살아났다는 말입니다.

이걸 첫 곡식의 이삭 한 단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으로 성취 되었어요.

 

마태복음 27장을 봅시다.

 

마 27:50-53절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자 성소 휘장이 찢어지지요.

이건 에덴동산의 문이 열린 것과 같아요.

그리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고 자던 성도들이 일어나지요.

 

땅이 진동한다는 말은 세상 권세의 근원이 흔들린다는 말입니다.

세상 권세는 죄의 권세이고,

죄의 권세는 죽음의 권세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의 권세가 깨어진 것입니다.

마치 모래 한 삽을 떠서 확 흔들어 버리면 다 흩어지는 것과 같아요.

그러자 죽음이 붙잡고 있던 성도들이 무덤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왜? 성도들만 무덤에서 나오는가요?

이는 예수님의 죽음은 자기 백성들을 위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은 여전히 죽음의 권세가 지배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음으로 성도들만 무덤에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시고 난 후에 예수님과 함께 거룩한 성으로 들어갔어요.

여기서 거룩한 성이란? 천국을 말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부활 하여서 구약에 자던 성도들을 몽땅 데리고 천국으로 간 것입니다.

이게 첫 이삭의 한 단이에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백성들은 첫 이삭이 하나님께 드려질 때까지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을 먹어서는 안 되어요.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이 첫 이삭을 받기 전에 먹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밥상을 차려 놓았는데 아버지가 먼저 수저를 들기 전에 자식들이 먹으면 안 되는 것과 같아요.

아버지가 먼저 수저를 들고 식사를 하면 그 다음에 자식들이 먹잖아요.

 

이걸 다른 말로 첫 이삭으로 살아난 예수님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인간들이 먼저 만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지금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는 것은 내가 지금 아버지에게 가지 않았으니 잠시 후에 내가 아버지께 갔다가 오면 그 때 만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에게 먼저 가서 보고를 하고 난 후에 와서 널 만나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지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죄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자기 피로 씻겨서 천국으로 데려 가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서 구약의 성도들의 죄를 다 씻겨서 한 단으로 묶어서 아버지께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가셔서 아버지에게 아버지 제가 세상에 가서 이 놈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는 거에요.

 

이제 첫 이삭을 수확 했으니 나머지 것들은 서서히 수확을 할 것입니다.

세상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피를 뿌려 찜을 해 놓았습니다.

그러니 성령이 가셔서 다 찾아서 데리고 오세요 라고 하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봅시다.

 

고전 15:23절?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고린도전서 15장을 부활을 이야기 하는 장이에요.

예수님의 부활을 첫 열매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일컬어 처음 익은 곡식이라고 합니다.

 

첫 열매라고 하는 것은 다음 열매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누구인가요?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들이에요.

즉 예수 안에 있는 성도를 말해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시고서는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런 말을 알려 주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잘 보세요.

이게 엄청난 이야기에요.

예수님의 아버지가 곧 우리 아버지라고 하고 예수님의 하나님이 곧 우리 하나님이라고 하지요.

예수님과 우리를 하나로 말하지요.

 

이걸 연합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나 됨이에요.

이 하나 됨을 누가 하게 하는가 하면 성령이 하세요.

 

성령이 오시면 이제 하나님을 밖에서 찾지 않아요.

우리 안에 와 계심이 믿어져요.

옛날에는 하나님을 성전에서만 만날 수 있었어요.

그러나 성령이 임하고 난 후에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셨어요.

 

수가성 여인에게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때가 온다고 하였지요.

그 때가 언제인가 하면 성령이 오실 때에요.

성령이 오셔서 아버지와 아들과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세요.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시간과 장소가 사라져요.

역사적 예배는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역사적 예배는 시간과 장소가 있어요.

 

수가성 여자가 어디서 예배 할까요 라고 묻지요.

 

요한복음 4장을 봅시다.

 

요 4:19-26절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과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여인이 예수님을 보고 당신은 선지자입니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배에 대하여 물어봅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해야 합니까?

아니면 그리심 산에 가서 해야 합니까?

시간과 장소를 말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첫 창조에 속한 성전이에요.

첫 창조에 속한 이 역사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있어요.

하나님이 아무데나 계시지 않고 오직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계셨어요.

그러니까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안식일에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예배를 드렸어요.

 

그러나 성령이 임하고 나면 역사적 예배는 사라져요.

왜냐하면! 성령이 묵시에서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묵시 안으로 끌어 당겨요.

 

그러면 이제부터 묵시적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묵시적 예배란? 하나님과 하나 되어 사는 것입니다.

이걸 교제라고 합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고 이웃과 화목하게 교제하는 것이 곧 예배에요.

 

이렇게 모인 무리를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가 그렇게 중요해요.

성도의 모임이 그렇게 중요하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요즈음 복음 안다고 하면서 집에서 혼자 인터넷으로 예배 한다고 하는 자들이 있어요.

이건 예배가 아니고 설교 듣는 것이에요.

예배가 되려면 그리스도의 몸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회중이 있어야 해요.

거기에 예수님의 피로서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지고 형제간의 화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복음 안다고 하면서 집구석에 혼자 놀지 말고 복음 아는 성도들끼리 함께 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할 일이 없어서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는지 아세요.

이게 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역사에 속한 자기 백성들을 여덟째 날 안식으로 불러 모으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부활하신 그 첫째 날을 안식일로 삼아서 모이라고 한 것입니다.

 

다시 수가성 여인의 대화를 봅시다.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에게 예배의 장소를 묻자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는다고 하자 이 여인이 그것은 그리스도가 와야 하지 않느냐 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그래 맞다.

그 그리스도가 바로 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생수를 주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주는 물이 있는데 그것이 곧 성령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육적으로 예배하지 않고 영적으로 예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육적 예배와 영적 예배를 아셔야 해요.

육적 예배는 역사에 속한 것이고 영적 예배는 묵시에 속한 것이에요.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두 예배가 있어요.

 

역사에 속한 예배가 있고 묵시에 속한 예배가 있어요.

역사적 예배는 짐승의 피를 뿌리는 예배이고,

묵시적 예배는 예수 안에서 감사와 찬송이 드려지는 예배에요.

 

역사적 예배는 죄사함을 받는 예배이고!

묵시적 예배는 죄사함 받은 자가 그 은혜와 영광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구원하심에 감사하는 것이에요.

 

역사적 예배는 우리가 드리는 것이 아니고 받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는 거에요.

예수의 피를 받는 거에요.

구원을 받는 것이에요.

 

그러나 묵시적 예배는 우리가 드리는 것이에요.

죄사함을 받은 자가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에요.

주신 구원과 은혜에 감사 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되 돌려 드리는 것이에요.

그래서 영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광이란? 받은 것을 되돌려 드리는 것을 말해요.

 

이걸 다른 말로 감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감사가 뭔가요?

받은 것에 대한 반응이잖아요.

그래서 안식일 날 성전에 모일 때 빈손으로 그냥 오지 말고 감사의 예물을 가지고 오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온 백성들이 먹고 마시면서 춤추라고 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천국에서 24장로들이 어린양에게 세세토록 찬미하는 것으로 보여 주셨어요.

성령이 오시면 이 일을 우리가 역사 속에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 받은 자들이 삶인 것입니다.

 

초대교회를 보세요.

성령이 임하고 나자 이상한 무리들이 나타나지요.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갖다 바치고 날마다 모여서 주를 찬송하고 떡을 떼면서 교제하는 무리들이 나타났잖아요.

 

이건 그 당시의 교회인 율법 교회와 전혀 다른 교회 모습이에요.

율법 교회에서는 절대로 보여 질 수 없는 모습이에요.

율법 아래서는 내어 놓지 못해요.

도리어 움켜잡아요.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 영광을 드러내고 자아 확장을 꿈꾸는 자들인데 어찌 움켜잡은 것을 내어 놓는단 말입니까?

불가능해요.

 

그런데 성령이 세운 교회는 그와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동안 움켜잡았던 것을 성도를 위하여 내어 놓고 있어요.

이건 성령으로 인하여 물질적 가치를 초월하였다는 말입니다.

영적 가치가 주장을 하니까 형제들을 위하여 모아 두었던 것들을 내어 놓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것을 일컬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당시 천하각국에서 올라온 유대인들 중에 개종한 자들이 있었어요.

그들에게 자기의 것으로 베푸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에 갖가지 이름의 예물을 가지고 와서 고아나 과부들이나 나그네들에게 나누어 주고서 함께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이게 천국의 모습이에요.

 

구약의 율법에서의 안식일은 일곱째 날 안식일에만 모였지만 성령이 임하고 난 후에는 날마다 모였어요.

이는 묵시로 모인 것입니다.

묵시 안에서는 시간과 공간 개념이 사라지고 예수 안에서 날마다 모였어요.

이걸 오늘날이라고 해요.

이렇게 날마다 모이는 것이 바로 묵시 안에서의 여덟째 날 안식일인 것입니다.

 

이건 누가 시켜서 모인 것이 아니에요.

성령이 임하고 나니 죄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 너무도 기쁘고 감사함을 주체 할 수가 없으니 자발적으로 날마다 모인 것입니다.

모여서 남을 정죄하고 허물을 드러내고 심판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해하고 용서하고 덮어주면서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였어요.

 

주께 용서 받은 것을 형제에게 베풀었던 것입니다.

주를 칭송하고 찬미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막혔던 인종과 신분의 벽이 허물어져서 이젠 모두가 한 형제들로서 화목 된 모습으로 천국을 누렸던 것입니다.

 

요즈음 짝퉁 교인들이 많아요.

특히 영지주의자들이 많이 있어요.

어떤 집단들은 마치 교회에 모이고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을 무가치하게 여겨요.

자기들만 복음 안다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혀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있어요.

 

입술로는 복음 복음하는데 정작 복음이 담고 있는 삶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복음을 지적유희를 즐기고 있는 영지주의자들이에요.

이러한 것을 성경에서는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그 어리석음을 드러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복음을 정죄하는 법으로 사용하여서 복음을 가리는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하는 짓들을 보세요.

초대교회의 모습과 비교 해 보세요.

얼마나 다른가요.

 

그렇다고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면 안 되어요.

이건 우리더러 노력해서 이런 교회를 만들라는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이런 교회를 세워 가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세워진 교회는 이런 곳이다 라고 보여주신 것입니다.

역사 속에 “교회란? 이런 곳이다!” 라는 것을 표본으로 제시하고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자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두 가지 성격이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는 이런 곳이다” 라고 보여주신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은 이러한 교회를 원하신다” 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는 고발당하여야 합니다.

이 시대 교회는 초대교회와 정반대의 모습으로 세워지고 잇어요.

또한 교인들의 모습도 초대교회 성도들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요.

결국 하나님은 초대교회를 통해서 이 시대 교회와 교인들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늘나라 대사관과 같아요.

천국의 모형인 겁니다.

성령이 천국을 역사 속에 옮겨 놓은 것입니다.

묵시에 속한 자기 백성들을 불러서 천국의 모습으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깨달아지고 그 깨달아지는 은혜가 이런 예배를 하게 하세요.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모습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이 깨달아지니까 기쁜 마음으로 모이고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미미하지만 말이에요.

그러나 이러한 지향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이 성도의 정체성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름의 모습으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은혜에 감사하여서 교회로 모여서 서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깨닫게 하고 감사케 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을 봅니다.

 

고전 2:9-12절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영적인 일들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게 감추어 놓았어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셨어요.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깨닫게 해 주세요.

아!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셨구나!

아!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어요.

 

이 깨달음이 감사와 찬송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에 가면 뭐 하나요?

감사하고 찬송하지요.

 

그러니까 성령이 우리 안에 천국을 몰고 오신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는 천국 안에 있는 거에요.

하나님이 계신 곳이 천국이에요.

 

아까 예수님이 나의 아버지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했잖아요.

성령이 오시면 예수가 우리 안에 우리가 예수 안에 하나가 되어요.

이걸 천국이라고 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서 드려지는 묵시적 예배는 성령이 임하면 드려진다고 한 것입니다.

 

천국은 예수의 피를 뿌리는 곳이 아니고 이미 피 뿌림으로 살아난 자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찬양하고 감사하는 곳이에요.

성령이 이 천국을 우리 안에 몰고 오셨어요.

 

그래서 성령의 오심을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예비 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성도는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주어진 구원을 누리고 그 은혜에 감사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봅시다.

 

요 14:1-3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내가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지요.

처소가 예비 되면 내가 다시 너희에게로 온다고 합니다.

처소란? 거하는 집을 말해요.

누가 거하는 집인가 하면 하나님이 거하는 집이에요.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를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이제부터 예수를 육체로 알지 않아요.

세상적으로 알지 않아요.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하였어요.

그래서 덥석 잡고자 한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만지는 것을 교제라고 하였지요.

그러니까 성령이 임하고 나면 육적 가치로 예수를 만나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제 영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시신이 없다고 울면서 징징 짜던 것에서 그 사라진 예수가 자기 안에 온 것을 깨닫고 할렐루야 감사하고 찬송하면서 예수님과 교제하게 된단 말입니다.

차원이 다른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도 예수 한 분의 죽음으로 보지 않고 나와 한 몸으로서의 죽음으로 이해가 되고,

예수님의 부활도 예수님 한 분의 부활이 아니라 우리와 연합한 것으로서의 부활로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새로운 피조물로서 알아진 예수에요.

 

고후 5:16-17절?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을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다고 하지요.

역사는 끝이 났다는 말입니다.

율법은 끝이 났다는 말이에요.

 

새로운 피조물은 묵시에 속한 사람이에요.

 

묵시 속에는 눈물이 없어요.

고통도 없어요.

아픔도 없어요.

사망도 없어요.

 

이걸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린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어요.

분명히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삶을 주셨어요.

그런데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다 놓치고 있어요.

그러니 얼마나 가난하고 불쌍합니까?

 

묵시 속에서 나를 보면 이겨 내는데 우린 자꾸만 역사에서 나를 보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물질적 가치를 이기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적 가치를 이기지 못하면 마리아처럼 울게 되어요.

 

그래서 성령이 우리 안에서 탄식함으로 간구하는 것입니다.

얘야! 정신 좀 차리라고!

그러면서 우리의 눈을 삼층천으로 끌어 올리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라는 묵시 속에서 나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울지 않고 웃게 됩니다.

이 웃음을 되찾아야 해요.

이걸 요한계시록에서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 하나인 에베소 교회에게 잃어버린 첫 사랑을 회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말씀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묵시적 안목으로 보세요.

그러면 주께서 일으키신 사건이라는 것이 보여질 것입니다.

이게 믿어지고 보여지면 넉넉히 이겨 낼 수가 있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넉넉히 이겨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편하면 불편한데로 사세요.

풍부하면 풍부한대로 사세요.

주신 자도 여호와고 취하시는 자도 여호와세요.

 

가난도 여호와께서 주신 것이고 부요도 여호와께서 주신 것입니다.

가난이나 부요라는 것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이 모든 것이 주께로 온 것이라 생각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이겨내세요.

있다고 마음을 높은데 두지 말고, 없다고 마음을 낮은데 두어서 기죽지 말고 사세요.

 

눈을 뜨고 하늘을 보세요.

주님이 곧 오십니다.

만물이 주님이 오신다고 싸인을 하고 있잖아요.

 

천기를 보고 징조를 보세요.

곧 오십니다.

잠시잠간 후면 오실이가 오시리니 그러니 너희는 근신하고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울고 있는 마리아의 곁에 서 있습니다.

마리아가 다만 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은 항상 우리 곁에 함께 동행하는데 우리가 그걸 보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니 조금만 어려운 일을 당하면 징징거리고 우는 것입니다.

 

울지 말고 웃으세요.

주님이 곁에 서 계시니까요.

부디 이 눈들이 열려지는 은혜가 임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눈을 열어 주어서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보게 하소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하소서! 내가 고아가 아니라 주가 내 안에 아버지와 함께 하고 있음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세상을 넉넉히 이기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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