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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129강.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 (요 21:1-14)

by coroa 2022. 2. 17.

 

하늘빛사랑 https://blog.daum.net/day7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29강.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 (요 21:1-14)

-.정낙원 목사

 

요 21:1-14절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구원을 목자가 잃은 양을 찾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잃은 것을 다시 찾는다는 말은 원래 주인의 소유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찾아 나선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은 목자의 몫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구원도 목자이신 예수님의 몫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다 찾아내십니다.

 

잃어버려진 자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목자가 찾아 주실 때까지 잃어버려진 대로 있을 뿐입니다.

양이 스스로 아! 나는 잃어버려진 자이구나! 라고 하면서 목자를 찾아가는 구원은 없습니다.

목자가 양을 찾아 가서 찾김을 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잃어버려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을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란? 거저 주심입니다.

목자가 양을 찾아 주는 것입니다.

우린 목자를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목자가 찾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은혜인 것입니다.

 

우린 구원에 필요성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구원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구원을 받고 보니 아~! 구원이 이런 것이구나! 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하심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도 제자들을 찾아 갔습니다.

12제자들 하나 하나 찾아가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셔서도 도망간 제자들을 찾아 가십니다.

도망 간 제자들을 찾아 가신 것은 그 제자들이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자기 백성들을 찾아가십니다.

그리하여 기어코 그를 천국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이렇게 찾김 받아서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간 성도들은 자기를 찾아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여서 예수님을 세세토록 찬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은 것은 목자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목자의 기쁨을 위해서입니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그 기쁨은 오롯이 목자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속에는 구원해 주신 분의 기쁨과 영광만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과 이사야 43장을 봅시다.

 

엡 1:4-6절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사 43: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신 것은 거저 주시는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케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다고 합니다.

왜? 지었는가 하면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이 백성을 누가 지었다구요?

하나님이 지었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지었다고 합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지었다고 합니다.

 

뭘 하고자 지었다고 합니까?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고 지었다고 합니다.

누구의 찬송이라고 하나요?

하나님의 찬송입니다.

 

찬송이 뭐냐?

구원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찬송입니다.

그 은혜를 기리고 감사하는 것이 찬송입니다.

 

예수님이 왜? 오셨나요?

자기 백성을 찾기 위함입니다.

왜? 찾으십니까?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 받고 싶어서입니다.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실 분입니다.

그래서 이 역사 속에다가 찬양 받기 위한 시건을 벌리신 것입니다.

그 사건이 바로 그 아들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이 죄에서 구원받는 일들입니다.

 

자기 백성을 역사 속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역사가 필요했고!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죄 아래 가두어짐이 필요했고!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받기 위해서 찾아냄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이신 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자기 백성을 찾아주는 구원자로 오신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는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 하신 후에도 여전히 제자들을 찾으십니다.

 

물론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앞으로도 찾으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다 찾아내십니다.

한 알갱이도 잃어버리지 않고,,,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세 번째라는 말은 이미 만난 경험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알고 있음에도 제자들은 다 각기 제 길로 가서 각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또 잃어버려진 모습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또 찾으러 가신 것입니다.

 

앞서서 살펴보았듯이 예수님은 안식 후 첫 날에 부활 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곤 하늘에 평강을 주십니다.

내가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 있다고 알려 줍니다.

안심하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여드레 후에 다시 나타납니다.

도마에게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게 합니다.

만져 보게 한 것은 유령이 아니고 실제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실제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각기 집으로 돌아가서 고기 잡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의 부활은 남의 일로 여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자기들과 상관이 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각각 제 살 궁리를 하려고 떠나간 것입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고기 잡던 베드로를 찾아가서 내가 이제는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건 예수님이 베드로를 사용하겠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에게 공통된 말입니다.

 

그래서 부활 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아버지가 나를 이 세상에 보내서 너희를 구원케 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내서 내 백성을 구원케 하는 일을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말씀을 다 흘러 듣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니까 부활 하신 예수님을 두 번씩이나 만나고서도 고기 잡으러 간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귀에 담아 두지 않았다는 반증입니다.

이들의 행동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없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에 안 보이니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활 하신 예수님을 두 번씩이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았지만 자기들과 함께 한다는 것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의미를 모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니다.

내가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한다는 것을 알려주시고자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봐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지 않느냐!

너희 눈에 안 보인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 항상 너희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그러니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의 부활을 관념으로 알고 예수와 상관없이 살고자 하는 자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예수님과 상관있는 자로 만들어 가시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는 예수를 떠날 수가 있어도 예수님은 우리를 절대로 떠나지 않고 기어코 당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를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걸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포기되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자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이기적인 것입니다.

상대를 자기 안으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상대를 자기 안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겉으로는 상대를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결혼을 가지고 설명합니다.

아담 안에서 하와가 나왔습니다.

하와가 빠져나간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아담은 허전합니다.

자기 안에서 하와가 빠져 나갔기 때문에 빈공간이 하나 생긴 겁니다.

이걸 채워야 만족이 됩니다.

 

아담은 하와가 있어야 충만합니다.

그래서 자기 몸에서 빠져 나간 하와를 다시 자기 안으로 끌어당기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나갔던 하와가 다시 자기 안으로 들어 올 때 만족하고 행복해 집니다.

이렇게 나갔던 하와를 자기 안으로 끌어당기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우리가 나왔습니다.

허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옆구리에서 나온 자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충만이라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 이야기가 바로 우리와 예수그리스도 이야기입니다.

 

그럼 묻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사랑한 것은 하와를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자기를 위한 것입니까?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이걸 우리 구원에 적용해 보세요.

하나님은 안식하셔야 하는 분입니다.

안식이 되려면 모든 일이 완성 되어야 합니다.

이게 창조 사건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창세전 언약이 완성 되려면 자기 백성들이 죄에서 건짐 받고 천국으로 와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백성들이 죄 아래 가두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안식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역사 속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죄 아래서 건져 오라고 예수라는 이름으로 역사 속으로 보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에 오셔서 자기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십니다.

누구를 위하여 구원 합니까?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을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안식을 위하여 구원 받는 것을 성경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럼 묻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구원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를 구원한 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를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살도록 내 버려두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증거하는 사랑이란? 내 맘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부르신 분의 종으로 사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폭력적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누구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람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나를 위해서입니까?

나를 위해서이지요.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에겐 폭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합니다.

말이 좋아서 은혜이지 실상은 폭력입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한 눈 파는 것을 용납을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감찰하시는 것입니다.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통촉하시고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감찰하시는 것입니다.

 

감찰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죽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감찰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우린 죽겠는데 말이죠.

 

하나님께 찜 당하는 순간 우리 인생을 종 쳤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종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 맘대로 사는 인생은 끝난 것입니다.

이제부터 철저하게 간섭 당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 받은 성도를 자기 맘대로 살도록 내 버려두지 않습니다.

끝까지 간섭하여서 기어코 하나님 뜻대로 살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날마다 자기 뜻을 차압당하는 삶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고난입니다.

 

고난이란? 내 인생이 날마다 차압당하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이 차압당하고!

내 꿈이 차압당하고!

내 모든 것들이 하나씩 둘씩 빼앗기는 것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린 우리 인생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은 우리 인생을 차압하고자 함입니다.

기어코 자기의 소유로 삼으시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유 된 것을 종이라고 합니다.

종은 주인의 소유물이에요.

성도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소유물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종들이 도망을 갔어요.

자기를 위하여 살고자 다 고기 잡으러 갔어요.

그냥 둘 수는 없지요.

 

예수님은 이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서 죽는 값을 치렀는데 어떻게 자기들 맘대로 살도록 그냥 둡니까?

그럴 순 없지요.

끝까지 찾아 가서 자기 종으로 살게 하여야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 간 것입니다.

찾아가서 기어코 자기 소유로 만들고 마십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 걸려들면 그 누구도 빠져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어떤 것으로도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끊어질 수가 없는가 하면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안 빼앗긴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8장을 봅시다.

 

롬 8:29-3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뇨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이 우리를 미리 아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르셨다고 합니다.

부르신 것은 의롭다 하시기 위함입니다.

 

어떻게 의롭게 하셨는가 하면 그 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고 그 아들의 죽음을 근거로 아들 삼아 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내어주고 우리를 아들 삼으셨습니다.

이걸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로도 끊어지지 않고!

또한 하늘이나 땅에나 그 어떤 권세로도 끊어 낼 수가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만유의 권세를 가지신 아버지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아버지 손 안에 있는 것을 빼앗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도망을 간 제자들을 찾아 간 것도 다 이 지독한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과 맞바꾸어서 자기 소유로 삼으셨기 때문에 찾아 가신 것입니다.

너희는 날 떠나도 나는 너희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구원을 고래심줄보다 더 질긴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니듯이!

끊어지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걸 믿으세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우리를 위로케 하는 말씀입니다.

반면에 너희는 도망갈래야 도망 갈 수 없는 인생이라고 알려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우리 인생은 종 쳤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좋으면서도 싫은 말씀입니다.

또한 싫으면서도 좋은 말씀입니다.

구원 속에는 복과 고난이 동시에 들어가 있습니다.

천국에 가는 것은 복이지만 이 세상에서 내 맘대로 살 수 없기 때문에 고난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두 가지 의미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인간은 미꾸라지 마냥 틈만 나면 하나님 손을 빠져 나가고자 하는 족속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이런 미꾸라지 같은 자들을 하나님은 끝까지 추적하여 찾아내서 기어코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간과치 말아야 할 것은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님께서 홀로 다 이루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완료이고 완성이고 완전하고 영원하고 안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원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위해서는 인간들은 할 일이 하나도 없어요.

이는 성도의 구원 계획을 하나님이 창세전에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계획 하신 분이 이루어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고!

하나님이 성취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사실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도망을 간 제자들을 예수님이 찾아 가십니까?

이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구원해 주어야 하는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면 제자들은 구원과 상관없는 모습으로 있어야 합니다.

도망을 가 주어야 합니다.

잃어버린 모습으로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땅 끝까지라도 찾아가서 구원을 해 내십니다.

이럴 때 구원이 예수님의 공로만 오롯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함이나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이 세상의 종교에서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종교는 인간의 가능성을 바탕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종교는 인간이 구원의 주체가 되어서 이루어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인용을 합니다.

 

때 마침 어제 밤 TV. EBS에서 “아제 아제 바라아제” 라는 한국 특선 영화를 방영하는 것을 감상하였습니다.

임권택 감독 작품으로서 강수연씨가 주연을 하면서 당시 삭발 연기로 이목을 끌고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女優) 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한 유명한 영화입니다.

 

영화 제목인 “아제 아제 바라아제”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의 마지막 구절인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 아제 모지사바하’에서 따온 것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불교의 모든 사상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이라는 말은 “지혜의 책”이라는 뜻입니다.

원 제목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입니다.

 

“마하(摩訶)”란? 초월하다는 뜻입니다

“반야(般若)”란? 지혜와 깨달음을 말합니다.

“바라밀다(波羅蜜多)”란? 피안(彼岸)에 이르다는 뜻입니다.

“심경(心經)”이란? 일체를 초월하는 지혜로 피안(극락)의 세계에 이르게 하는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종합하여 한 마디로 해석을 하면 득도해서 부처(신)가 되라는 말입니다.

불교는 인간을 신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의 맨 마지막 주문을 득도해서 신의 자리로 나아가라는 뜻으로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 아제 모지사바하”로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근본 사상은 인간이 득도를 해서 피안의 세계인 극락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걸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성화주의자들과 같이 열심히 해서 구원을 이루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 시대 교회들이 이걸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의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가서 구원을 이루어 내는 것과는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니까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관과 인간들의 구원관이 얼마나 다른지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 속지 않지요.

뭘 알아야 할 것 아니에요.

 

이 시대 기독교는 불교가 되었어요.

그 경계가 무너졌어요.

껍데기만 교회이지 그 속은 절간입니다.

책만 성경이지 그 속에 내용을 가르치는 것은 반야심경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화주의 사고가 반야심경과 같아요.

인간의 가능성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이 말은 은혜이고 믿음이라고 하는데 실상은 행위를 가르치고 있어요.

긍휼이 아니고 제사를 가르치고 있단 말입니다.

 

마치 예수님 초림 때 예루살렘 성전이 강도의 굴혈이 되었듯이 이 시대 교회들도 열심과 정성을 드리고 복을 따내라고 하고 있어요.

결국 신과 거래하기 위하여 모인 무리들의 도적놈 소굴이 되고 만 것입니다.

복도 행위로 따 내고자 하고,

구원도 행위로 얻어 내고자 하고 있어요.

 

이건 기독교가 아니고 불교에요.

교회가 종교로 전락을 하면 불교가 되어 버려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교회를 일컬어 많은 물 위에 앉은 음녀라고 하고 각종 개구리 영들이 모인 귀신의 처소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영화의 내용을 간단하게 리뷰 해 봅니다.

 

영화의 내용은 두 비구니(여승)를 주인공으로 하여서 전개가 됩니다.

소승(小乘) 불교를 꿈꾸는 진성이라는 여승과, 대승(大乘) 불교를 꿈꾸는 청화(진녀)라는 여승이 서로 도(道)를 깨달아가는 과정을 대조하면서 영화의 줄거리가 전개 됩니다.

 

소승불교((小乘佛敎)는 개인을 구원하는 데에 중점을 둔 것이라고 한다면,

대승불교(大乘佛敎)는 대중을 구원하는 데에 중점을 둔 것으로 보면 됩니다.

 

진성이라는 여승(女僧)은 기도하면서 깨달음을 얻고 초월적인 이상(신) 세계를 좇아가는 반면에,

청화(진녀)라는 여승은 파계(破戒)하고 맨 몸으로 세속을 떠돌면서 인생의 참 이치를 깨달아가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소승불교를 추구하는 진성은 큰 스님인 은선 스님으로부터 속세(俗世)에 나가서 도(道)를 깨우쳐 보라는 뜻에서 대학에 진학케 합니다.

그리하여 진성 스님은 대학을 갑니다.

 

막상 대학을 가 보니까 학생들의 본분인 학문 정진을 뒤로 한 채 사회적인 이슈에 매몰이 되어서 맨날 데모를 일삼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남학생이 진성을 연모하여서 집요하게 따라다닙니다.

육욕을 탐미하는 연애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성은 남녀 간의 연애는 육욕의 쾌락을 탐미하는 악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진성 스님은 속세에서는 도(道)를 깨우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수도정진하기 위하여 사찰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리곤 자기 몸을 금욕하면서 더 깊은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동굴로 들어가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어떤 파계한 땡중(마구니)이 불 일듯 하는 음욕으로 자기 하체를 보이면서 쾌락을 쫓자고 진성 스님을 유혹 합니다.

진성은 주문(呪文)을 외우면서 끝끝내 그 유혹으로부터 벗어납니다.

일명 거룩을 지켜낸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사찰로 돌아옵니다.

 

반면에 청화(순녀) 스님은 사찰에서 수도정진 하다가 사찰로 자살을 하려는 온 한 남자를 구해주는 사건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절간에서 살다가 세상으로 나가서 강도와 강간과 폭력과 같은 온갖 범죄를 일삼고 살다가 자살하고자 자기가 살던 절간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청화(순녀) 스님이 그 남자를 살려냅니다.

이 남자는 자기를 살려준 청화(순녀) 스님에게 왜? 자신을 구해주었느냐고 하면서 자신을 책임지라고 합니다.

청화(순녀) 스님에게 구애를 하면서 자기와 함께 살지 않으면 다시 죽겠다고 협박을 가합니다.

청화(순녀) 스님은 그 남자를 달래려고 집으로 찾아 갔다가 도리어 겁탈을 당하고 맙니다.

 

청화 스님은 큰 상심을 합니다.

이 모습을 알게 된 큰 스님인 은선 스님은 청화(순녀) 스님에게 죽고자 하는 사람을 살리는 것도 수행이니 그 사람과 결혼을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파계승(破戒僧)이라는 의미로 머리에 모자를 쓰고 다니라고 합니다.

 

결국 순녀는 속세가 싫다고 하면서 절로 들어가서 청화가 되었다가,

다시 절에서 나와 속세로 돌아와서는 순녀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청화 스님에서 파계승 순녀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 삶도 잠시 뿐 또 다시 먹구름이 끼어옵니다.

남편은 탄광에서 갱도가 매몰되는 사고를 당하고 죽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뱃속에 있는 아이까지 사산(死産)을 하고 맙니다.

그리곤 방황하다가 다른 남자와 살다가 그도 비명횡사를 하고 혼자가 됩니다.

 

순녀는 모든 것을 잊기 위하여 섬으로 갑니다.

섬에서 대학 시절에 배웠던 간호사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병원의 운전사와 눈이 맞아서 또 다시 결혼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남편도 이름 모를 병으로 급사를 하고 맙니다.

결혼하는 족족 남편이 죽어서 졸지에 남편 잡아먹은 여인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순녀가 스님이 되기 전의 속세 인생도 수많은 업보를 짊어진 인생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베트남 전쟁에서 얻은 상처로 승려의 길을 나섰고 어머니는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육욕에 눈이 멀어 서방질을 하고 그 어미의 서방인 자는 급기야 순녀를 겁탈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의지하고 존경하던 선생님과 맺지도 못하는 사랑으로 괜한 오해만 불러일으키게 되어서 급기야 선생님은 사표를 내고 떠나보내는 아픔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순녀는 속세를 떠나 비구니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비구니가 된 창화(순녀)는 그 생활도 순탄치 않고 다시 파계(破戒)를 하고 세속으로 돌아오고 만 것입니다.

그럼에도 세속의 인생도 평탄치 않고 굴곡진 모진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결국 순녀는 큰 스님이 보고 싶어서 다시 사찰로 돌아가게 됩니다.

스승인 은선 스님은 순녀가 돌아 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은선 스님은 순녀가 속세에서의 부대낌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은선 스님은 임종을 앞두고서도 순녀의 소식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순녀가 돌아왔습니다.

은선 스님은 수많은 업보(業報)를 안고 돌아온 순녀(청화)를 자애롭게 맞이하고서는 마음 깊은 사랑을 줍니다.

 

이 모습을 본 진성 스님은 스승의 사랑이 진녀에게로 쏠리는 것을 보고 불안과 분노를 느낍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그 많은 유혹으로부터 벗어나 고결하게 수도정진을 한 반면에 순녀는 온갖 세상의 쾌락을 탐미하다가 돌아온 타락한 중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은선 스님이 순녀를 자애하니 화가 나는 것입니다.

 

큰 스님인 은선은 마지막 임종을 하면서 진성에게 너희 둘 다 내겐 소중한 제자들이니 순녀를 잘 보듬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성은 큰 스님인 은선 스님이 열반에 들자 은선 스님의 부탁은 아랑곳하지 않고 세속에 찌들어 육욕으로 타락한 중생에 불과한 순녀를 멸시하고 천대하기 시작합니다.

 

진성은 스승인 은선 스님의 죽자 다비식을 거대하게 치릅니다.

이는 은선 스님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은 터이라 스승의 죽음을 고결하게 남기고 싶어서입니다.

진성은 큰 스님의 죽음으로 자기 가치 챙기기를 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를 지켜본 순녀는 도리어 진성을 측은하게 여깁니다.

순녀의 눈에는 이러한 진성 스님의 모습이 진정한 깨달음으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한 “마하반야밀다”의 깨달음을 얻고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 아제 모지사바하”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런 행동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비식이 끝나고 순녀는 큰 스님의 사리를 수습합니다.

이는 평상시에 큰 스님이 진정한 깨달음은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라는 유지를 받들기 위함입니다.

순녀는 큰 스님의 사리를 가지고 중생들이 북적거리며 사는 시장통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영화는 진성과 순녀 라는 두 비구니의 서로 다른 수행(修行) 방법을 통해서 참다운 깨달음이 무엇이고 또한 무엇이 진정한 자유인가를 관객들에게 던져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제 아제 바라아제’ 라는 영화 제목으로 관객들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아제 아제 바라아제’ 라는 영화 제목이 담고 있는 의미를 다시 살펴봅시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의 맨 마지막 구절인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 아제 모지사바하’를 주문(呪文)으로 축약한 말이라고 했습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薩婆訶)

 

가테 가테 바라가테 바라삼 가테 보디 스바하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 아제 모지사바하’는 ‘건너가자 건너가자 넘어서 건너가자 모든 것을 넘어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자 그 곳에서 깨달음을 얻으리라’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제’ 라는 말은 ‘건너가자’ 라는 의미이고,

‘바라’ 라는 말은 ‘저 언덕’을 의미합니다.

 

반야심경에서 언덕이란? 인간이 살아가면서 당하는 모든 번뇌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주는 번뇌입니다.

그러니까 그 번뇌를 넘어가자는 말입니다.

 

어떻게 넘어 가느냐 하면 도(道)를 깨달음으로 넘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도(道)는 순녀와 같이 삶 속에서 부대끼면서 깨우쳐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버리고 비우는 무아(無我) 지경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 아제 모지사바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생로병사를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면 인간은 태어나면 늙고 늙으면 병들고 병들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건 필연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번 태어난 인간은 죽는 것이 아니고 억겁의 세월을 윤회(輪廻)하면서 영생불사 하는 것이기 때문에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생로병사(生老病死)는 필연적인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마하반야밀다” 즉 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생의 삶으로부터 자유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도(道)를 깨달은 사람을 부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불교의 교리는 내가 도(道)를 닦고 깨달으면 부처(신)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도(道)가 뭔가요?

이치(理致)이고 순리(順理)입니다.

여기에 내가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에 대한 근원이 없습니다.

그냥 공(空)이에요.

결국 허무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존재 목적은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라고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은 어떤 도리를 깨닫고 이치를 알아가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은 죄인이고 이러한 죄인이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 믿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를 위한 구원이지만,

불교는 자기를 위한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구원은 예수님이 이루어 가시는 것으로 나타나고, 불교는 자기가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타력(他力) 구원이고,

불교는 자력(自力) 구원입니다.

기독교 구원에는 구원자가 따로 있지만,

불교에서는 구원자가 따로 있지 않고 자기가 구원을 이루어 가는 주체인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는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불교에 구원은 자기 행위로 따 내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구원 해 주신 분을 찬송하는 것으로 신앙이 나타나지만,

불교에서는 구원을 이룬 자기 자신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의 도움으로 구원을 받는 기독교를 신본주의라고 하고,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이루는 불교를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기독교와 불교는 극과 극인 구원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제’ 라는 말은 ‘건너가자’ 라는 의미이고, ‘바라’ 라는 말은 ‘저 언덕’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저 언덕’의 상대되는 말은 ‘이 언덕’ 이라는 말입니다.

‘저 언덕 너머’를 ‘피안(彼岸)’ 이라고 하고, ‘이 언덕’을 ‘차안(此岸)’ 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저 언덕 너머’ 란? 일체의 번뇌를 버린 열반(涅槃)의 세계인 부처님의 세계 즉 신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아제 아제 바라 아제 바라승 아제 모지사바하’ 는 ‘이생의 것에 매여서 사는 중생의 세계에서 이생을 넘어서 해탈을 이룬 부처님 세계로 나아갑시다’ 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걸 성경식으로 말한다면 ‘차안(此岸)’이라는 ‘이 언덕’은 육(肉)을 말하고,

‘피안(彼岸)’이라는 ‘저 언덕 너머’는 영(靈)으로 말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제 아제 바라 아제 바라승 아제 모지사바하’를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을 배워서 예수가 되고 진리가 되자 라는 말과 같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이지요.

 

‘내가 진리다’

‘내가 예수다’

‘내가 하늘이다’

‘내가 말씀이다’

 

요즈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이러한 자들은 늘 있어 왔습니다.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에요.

마귀는 항상 어느 시대고 본질을 흐리는 일을 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관이에요.

불교의 진리관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신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는 말씀을 많이 깨달아서 자기가 진리가 되고 예수가 되겠다고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내가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믿고 사느냐 이지만,

불교는 내가 무엇이 되느냐 입니다.

기독교는 내 존재의 부정을 말하는데 반하여, 불교는 자기 존재의 긍정을 추구합니다.

기독교는 가지 가치를 부정하는데, 불교는 자기 가치 챙기기를 한단 말입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종교는 불교적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종교는 인본주의를 기초하여서 인간의 가치를 상승시켜주고 종국적으로는 자기 가치를 챙기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건 창조 목적에서 이탈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만든 모든 종교는 하나님 앞에 악이고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자칭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이 예수를 넘어서 자기가 진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예수라고 합니다.

 

이건 아주 무서운 이단 사상이에요.

왜? 이러한 사상들이 교회 안에서 진리처럼 증거되고 있는가 하면 뱀이 신본과 인본이라는 혼합주의의 물을 교회 안에 쏟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자기 주체 챙기기를 죄라고 규정합니다.

신앙은 내가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을 구원하고자 함입니다.

이러면 구원하는 자와 구원 받는 자 간에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로 설정되게 됩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주체가 되고, 우린 그 예수님에게 끌려가는 객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주체 안에 복속 된 객체를 일컬어 그리스도 몸의 지체라고 합니다.

 

몸의 지체는 몸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지체를 유지케 하는 것은 몸이지 지체 스스로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몸이 지체를 유지케 하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이 은혜를 걷어내면 안 되어요.

그래서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걷어내는 것은 무조건 이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예수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린 예수를 통하여 구원을 받아야만 하는 자로 늘 남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약함 속에서 예수의 강함이 드러나야 합니다.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그 은혜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예수그리스도에게 종속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됩니다!

주여 도와주세요! 라고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다 하셨고!

우린 그 예수 안에서 혜택을 입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의 그 은혜의 영광만 찬미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존재케 하는 창세전 언약이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에베소서 1장과 이사야 43장을 봅시다.

 

엡 1:4-6절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사 43: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인간은 하나님의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고자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천국에 모습을 보면 구원 받은 모든 성도들과 만물들이 세세토록 어린 양에게 찬송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잊지 마세요.

이걸 잊는 것은 말씀을 더하거나 빼는 것이 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마지막 당부가 뭔가요?

 

요한계시록 22장입니다.

 

계 22:18-21절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20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고 하지요.

가감하는 자는 심판하겠다고 합니다.

이는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나친 악인도 되지 말고 지나친 의인도 되지 마세요.

 

우린 그저 죄인일 뿐입니다.

이런 죄인이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서 용서 받은 것입니다.

그 용서 받음을 안고 감사하고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내가 예수가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진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 뿌림 안에서 감사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불교에서처럼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 아제 모지사바하” 하여 이 언덕이라는 차안에서 저 언덕 너머인 피안의 세계로 넘어가 신이 되어 사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염세주의처럼 현실을 도피하는 것도 아니고!

영지주의자처럼 머리로 아는 것 따로 몸으로 사는 것 따로 사는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성경적 지식을 주술적으로 외우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구원 받음에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하나님의 그 은혜에 영광을 찬미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죄 아래서 태어난 죄의 몸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이 몸은 바뀌지 않습니다.

여전히 죄의 소욕이 우리 몸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 한 죄의 소욕으로부터 자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몸뚱이를 가지고 사는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대속에 은혜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이 사실들을 알려 주십니다.

비록 육신은 죄 아래 팔렸지만 너희 영혼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 받은 자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뭐라고 하던가요?

 

롬 7:22-8:2절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바울은 자기 안에 두 법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것과 그 뜻에 반하고자 하는 법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두 법이 싸우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법이 이기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하나님 뜻대로 살기 싫어하는 법이 이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해 줄꼬!” 라고 탄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내 몸을 구원해 달라고 합니다.

왜? 몸을 구원해 달라고 합니까?

이 몸이 말을 안 들어 먹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몸은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상한 심령이 일어나고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성령께서 알려 줍니다.

바울아! 바울아!

네가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가 너 대신에 죽었다고 합니다.

네 몸이 하나님의 뜻을 담아 내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너의 죄 값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었다고 알려 줍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누가 네 몸을 가지고 너 왜?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아! 라고 하면 예수님의 피를 내 보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런 나 때문에 대신 죽었다고 알려 주라고 합니다.

 

이에 바울이 기뻐하고 감탄하면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고 찬송을 부릅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정죄 당할 처지에 놓여 있다는 말입니다.

죄 아래서 난 몸을 가지고 사는 한 늘 정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귀는 늘 하나님 말씀을 우리에게 들이밀면서 너 그 따위로 살아서 되겠느냐는 식으로 우리 행실을 가지고 참소를 합니다.

 

이 마귀의 참소를 이기는 것은 오직 하나 예수님의 피 뿌림뿐입니다.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을 가지고 마귀의 참소로부터 자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늘 예수님의 대신 죽어 주심이라는 그 은혜 안에 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걸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슨 내가 진리이고,

내가 예수라고 말 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린 예수가 될 수도 없고, 진리가 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아야 할 자들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사는 것이 진리로 사는 것입니다.

 

당장 오늘 본문에서 일어나는 모습들을 보세요.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다 도망을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갑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간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구원을 끝까지 지켜내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의 행적들을 잘 보시면 창세전 언약이 구현되는 모습이라는 것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창세전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선택을 하시지요.

야곱아 내가 너를 지명하고 부르셨다고 합니다.

넌 내 것이라고 창세전에 지명하셨습니다.

이게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뭘 합니까?

먼저 제자들을 선택하지요.

그리곤 3년 동안 제자들과 동고동락하면서 하나님 나라에 비밀들을 다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죽음으로서 세상에서의 일을 다 마치시고 아버지께로 가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다 도망을 갑니다.

예전에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자기 살 궁리를 합니다.

 

그러자 부활하신 예수님이 도망간 제자들을 찾아갑니다.

찾아 가서 사명을 맡깁니다.

고기 잡던 어부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십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만 바라보고 살아가려면 반드시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믿음은 우리가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야지 만합니다.

 

세상에서는 내가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보다 내가 무엇을 해야 되는지가 우선입니다.

우린 이러한 구조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런 버릇이 교회에 와서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이 되어 여전히 행하여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무슨 일을 하셨고,

지금은 무슨 일을 하시고 계시고 있으며,

장차는 어떻게 하시겠지 를 믿기보다는 내가 무엇을 할까요 에만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무엇을 하기보다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 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활 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뿔뿔이 흩어져서 자기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입니다.

항상 살아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십니다.

 

과거에도 구원을 하셨고,

지금도 구원을 이루어 가시고 있고,

장차도 구원을 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었으니 이제는 세상에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도 예수님이 자신들을 버리고 멀리 떠난 것으로 생각하고 뿔뿔이 다 떠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가서 애들아!~ 나는 너희를 떠난 것이 아니라 항상 너희와 함께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살아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꿈꾸는 것이 있습니다.

그 꿈을 이루고자 합니다.

자기가 바라던 꿈이 이루어지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쫓아다닐 때 다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을 이루고자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고기 잡던 배와 그물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입니다.

 

베드로에겐 예수님은 자기 꿈을 이루고자 하는 하나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배와 그물을 예수님과 맞바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 생각과는 달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것도 자기 동족으로부터 이단으로 몰리면서 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와 같은 패당으로 몰려서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하지만 자기 꼬라지를 보면 마치 닭 쫓던 개 지붕 처다 보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꿈이 완전히 깨어지고 만 것입니다.

 

이제 살 궁리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태어나서 배운 것이라곤 고기 잡는 일 밖에 없으니 다시 3년 전에 버렸던 배와 그물을 다시 찾아서 고기를 잡기 시작합니다.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고기들이 베드로의 그물에는 걸리지 말자고 작당을 하고 잠적을 하였는지 한 마리도 잡히지 않습니다.

밤새 헛고생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새벽 미명에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가서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고 합니다.

그러자 큰 고기가 그물에 가득하게 잡혔습니다.

여기에 큰 비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고기 잡는 것은 단순히 고기 잡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건 예수님이 베드로를 그렇게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사람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잡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하셔서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은 이 약속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가고자 찾아오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은 예수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구원하는 일은 우리들 몫이 아닙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우린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어요.

또 할 수도 없습니다.

 

이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밤이 맞도록 그물을 내리고 고기를 잡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알다시피 베드로의 전직이 고기 잡는 선수였습니다.

고기 잡는데 달인입니다.

 

베드로는 타고난 뱃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어디에 고기가 있는지 너무도 잘 알아요.

그런 그가 밤이 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밤새 헛수고만 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이 찾아와서 묻습니다.

 

애들아! 고기 좀 잡았니!

아니요!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요.

 

그래!

그럼 그물을 배 오른 편에 한번 던져 볼래!

 

에이~ 거긴 고기가 없어요.

우리가 잘 알아요.

 

아니!

내 말대로 오른 편에 한 번 던져 봐!

 

그러자 베드로 곁에 있던 요한에게 야! 저 사람이 누구냐! 묻습니다.

요한이 모르겠어요.

아마도 이 바다에 대해서 잘 아는 분인가 보지!

그러니 이 새벽에 바닷가에 나와서 이야기하지!

 

베드로 형님!

속는 셈 치고 한번 던져 봅시다!

그럴까?

 

그리고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집니다.

그러자 세상에 큰 고기들이 그물에 가득한 것입니다.

얼마나 고기가 컸던지 153마리밖에 안 되는데 그물을 들 수가 없을 지경이라고 합니다.

 

야! 세상에 이럴 수가!

아니 저 분이 누구시기에 배 오른 편에 고기가 있는 걸 알았지!

그리고는 요한이 그 사람을 보는데,,,

 

아니~ 이럴 수가!

예수님인 겁니다.

아니!

 

주님!

주님 아니세요!

주님이 어떻게 여기에 오셨습니까!

 

베드로 형님!

주님이 오셨어요!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리라고 하신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란 말입니다.

 

뭐라고!

비로소 베드로가 예수님인줄 알아보고 곁에 작은 배를 타고 있던 다른 제자들에게 야! 너희들 이 그물을 걷어라!

그리고는 배에서 뛰어 내려 예수님 앞으로 첨벙거리고 뛰어 옵니다.

 

뭍으로 나와 보니 예수님이 숯불을 피워놓고 계신 것입니다.

그 위에 떡도 있고 고기도 구워 놓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조반을 차려 놓았던 것입니다.

그리곤 조반을 먹이십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만 살펴보기로 합시다.)

(그물 속에 잡힌 153마리 고기와 조반이니 숯불에 구운 떡과 생선은 엄청 큰 영적 비밀이 있으니까 다음 시간에 살펴보기로 합니다.)

 

그럼 고기 잡는 달인들인 제자들이 어째서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도 못 잡았을까요?

또한 예수님이 그물을 던지게 하여서 잡힌 고기들을 뭡니까?

이러한 사건이 무얼 말해주고 있습니까?

 

이는 제자들의 고기 잡는 것을 통해서 앞으로 제자들이 하실 일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예수님을 떠난 제자들을 헛수고 하게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이건 단순한 고기잡이가 아니고 사람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부러 제자들이 밤새도록 허탕을 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도움 없이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고기를 잡는 것은 사람을 낚는 것의 모형적인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떠나서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구원하는 일은 예수님이 하십니다.

제자들은 도구로 사용되어질 뿐입니다.

 

제자들이 비록 바다에서 잔뼈가 굵었지만 고기 한 마리도 자기 실력으로 잡지 못한 것은 그건 단순하게 물고기 잡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던지라고 한 그곳에 그물을 내렸더니 고기가 가득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곧 너희들은 스스로 사람을 낚을 수가 없고,

내가 낚게 해주어야 된다는 것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제자들 속에 오셔야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오십니까?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오셨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제자들은 가는 곳마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는 예수님이 제자들 속에서 사람 낚는 어부의 일을 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기 잡는데 제자들의 경험이나 실력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은 이는 사람을 구원하는 일은 인간의 기술이나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지 인간의 테크닉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 시대 교회들이 전도 방법론을 말하는 것은 넌센스인 겁니다.

이건 예수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교회로 불러들이는 것이 전도인줄 아는데,,,

아니에요.

그건 교인 하나 얻기 위한 포교하는 것입니다.

 

전도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 속에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면 그 복음이 구원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를 해서 복음이 믿어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자 구원의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복음을 믿게 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전도에 어떤 방법론이 있다거나 어떤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럼에도 이 시대 교회마다 어떤 방법론을 가르치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일하심애 대하여 무지하다는 뜻입니다.

복음이 뭔지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교인들로 하여금 이러 저러한 방법론을 가르쳐서 인간의 가능성을 부추기는 일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복음을 믿도록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셔야만 가능합니다.

우린 그냥 복음만 전하면 됩니다.

그 이후는 신경 쓰지 마세요.

믿어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처럼 예수님이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예수님이 안 계신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고 있어요.

우리 안에 여전히 살아서 자기 백성 구원하는 일을 하시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진다고 한다면 세상이 두렵지가 않습니다.

성도는 묵시적 사고로 사는 자들입니다.

묵시적 사고란? 여전히 예수님은 역사 속에서 살아서 일을 하신다는 사고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연합 된 자로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눈에 안 보인다고 제자들처럼 도망가지 마세요.

도망간다고 숨겨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결국 우리는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손에 붙잡혀서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띠 띠고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 그 증거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복음을 알고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은 다 주께서 우리를 간섭한 결과입니다.

주님의 열심이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해 오신 것입니다.

앞으로도 인도 해 가실 것입니다.

 

일을 시작하신 이가 끝 날까지 이루실 것이니까 안심하고 살아가십시오.

하루 하루 감사하며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그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늘 동행하고 있다는 이 사실들이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믿어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범사 속에서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진바 된 것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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