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강해/창세기 1~3 강해

18강. 남자와 여자이야기 1 (창 2:21-25)

by coroa 2020. 11. 14.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18강. 남자와 여자이야기 1 (창 2:21-25)

-.정낙원 목사

 

 

 

아담과 돕는 배필 이야기는 예수님과 자기 백성들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자기 백성들 이야기는 또한 남자와 여자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구속사 이야기인 것입니다.

 

오늘은 아담과 돕는 배필 이야기를 남자와 여자 이야기로 풀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시고자 하셨는가요?

이는 아담이 영생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에 방해꾼이 있기 때문입니다.

뱀이라는 악의 원흉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세전에 하나님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는 것으로 예정을 하셨습니다.

아담도 예정하심에 따라서 구원을 받기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동산에 있는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아담을 동산에 두신 것입니다.

생명수 강의 근원을 보면 에덴과 동산은 다른 세계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에덴이 하늘이라고 한다면 동산은 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동산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동산에 있는 아담이 생명과를 먹고 에덴으로 나아오기를 바라셨습니다.

아담은 땅을 상징하는 동산에서 생명과를 먹고서 영생하는 자가 되어서 하늘을 상징하는 에덴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아담이 이루어야 하는 구원인 것입니다.

이를 신약적으로 말하면 흙에 속한 자가 예수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떡을 먹고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담은 독자적으로 구원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동산에 사는 아담에게는 동산 윗동네인 에덴은 낯선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아담이 독자적인 힘으로 영생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면 굳이 돕는 배필을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담이 동산에서 에덴으로 나아가려면 아담을 도울 수 있는 돕는 배필은 반드시 에덴으로 가는 길을 아는 에덴에서 오신 분이라야 합니다.

그럼에도 아담은 자기 몸에서 나온 여자를 돕는 배필로 맞이함으로서 인류는 타락의 역사가 시작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시고자 한 그림 속에는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자기 백성들이 구원을 받는 구속사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창세전 언약을 펼쳐 가십니다.

창세전 언약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 받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그리스도를 돕는 배필로 주어서 하늘나라로 데리고 오는 그림을 아담과 돕는 배필을 가지고 설명코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늘로서 내려온 인자 이외는 하늘로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하였습니다.

산 떡이란 생명과와 같은 뜻입니다.

생명과를 먹으면 영생을 하듯이 예수라는 산 떡을 먹어도 영생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먹으면 영생을 얻고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하셨습니다.

 

아담의 이야기는 곧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아담에게 돕는 배필은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돕는 배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돕는 배필을 보혜사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돕는 배필이고 성령님도 돕는 배필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체적인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내가 가면 또 다른 보혜사(돕는 배필)를 제자들에게 보내 주어서 너희들과 영원히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도 보혜사라는 뜻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에서 가나안 입성까지 여정을 보면 두 지도자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애굽에 있던 언약의 후손들을 가나안 입구까지 인도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으로 인도할 새로운 지도자를 주십니다.

그가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출애굽 하여서 가나안 입구까지 인도한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를 일컬어 모세에게 속하였다고 합니다.

모세에게 속하였다는 말은 모세와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과 성령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 두 돕는 배필이 있습니다.

 

첫째는, 죄에서 구원하는 돕는 배필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사함을 주시는 일에 돕는 배필입니다.

이는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 하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는, 죄사함 받은 자를 영생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돕는 배필입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성도 안에 오셔서 이루어내십니다.

이는 가나안 땅으로 입성하여서 살아가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에서 구원을 받는 것도 돕는 배필에 의하여 이루어졌듯이,

구원 받은 자로서 살아가는 데에도 돕는 배필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은 여호수아처럼 우리 안에서 옛 사람이라는 가나안 족속들을 몰아내는 전쟁을 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구조는 역사 속에서 그대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일들이 온 세상에 확대되어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뱀이 선악과로 미혹하였듯이 마귀도 미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들짐승들 중에서 뱀이 가장 간교하다고 하였습니다.

“간교하다”는 말은 “아룸”이라고 하는데 이는 “지혜롭다” 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 중에 뱀이 가장 지혜롭다는 뜻입니다.

 

뱀이 “가장 지혜롭다” 라는 말은 그 어떤 피조물도 뱀의 지혜를 능가 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뱀의 지배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을 일컬어 세상 임금이라고 합니다.

세상 임금을 이 세상 신이라고 합니다.

 

뱀은 아담보다 더 지혜롭습니다.

그럼 아담을 도울 돕는 배필은 뱀 보다 더 지혜로워야 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뱀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지혜롭다고 하였으니까 피조물 중에서는 아담을 도울 수 있는 돕는 배필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담을 도울 수 있는 돕는 배필이 되려면 뱀의 지혜를 능가하는 분이어야 합니다.

뱀의 지혜를 능가하는 분은 피조물 중에는 없다고 하였으니 당연히 창조주라야 합니다.

그 분이 누구인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아담을 도울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아담을 뱀으로부터 지켜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자기 수준인 여자를 돕는 배필로 두지 말고 뱀의 지혜보다 더 출중한 지혜를 가지신 분인 여호와 하나님을 돕는 배필로 달라고 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자기 몸에서 나온 여자에게 정신이 팔려서 여자를 돕는 배필로 두고 말았습니다.

아담의 몸에서 나온 여자는 아담과 동등한 수준이므로 돕는 배필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아담이나 여자 모두 뱀의 지혜를 능가하는 분을 돕는 배필을 두어야 할 형편입니다.

그럼에도 아담은 자기 수준의 여자를 돕는 배필로 맞아들이고 만 것입니다.

 

인류의 비극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아담의 타락은 선악과를 먹어서가 아니라 여호와를 돕는 배필로 두지 않은 것 때문에 나타난 결과일 뿐입니다.

돕는 배필이 없는 상태에서의 아담은 뱀의 미혹에 넘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뱀의 미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고 죽음으로 나가가는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뱀은 선악과와 생명과의 정보를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뱀이 하는 일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케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악과는 절대로 먹지 말고 생명과는 반드시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뱀은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먹어야 하는 생명과는 먹지 못하게 하고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되는 선악과로 여자를 미혹을 하였습니다.

 

여자는 뱀의 미혹을 이기지 못하고 선악과를 먹고 맙니다.

그리고 여자는 자기와 함께 한 아담에게도 선악과를 주어서 먹게 합니다.

둘 다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여자는 아담을 죽는 길로 인도한 돕는 배필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된 인간을 더 이상 에덴동산에 둘 수가 없습니다.

에덴동산은 생명의 세계로서 산 자들만이 살아 갈 수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함께 살 수가 없으므로 하나님은 부득불 죽은 자가 된 인간과 인간을 선악과로 미혹케 한 뱀을 동시에 에덴동산 밖으로 추방을 해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떠나는 아담에게 흠 없는 짐승을 잡아서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서 입혀서 수치를 가리게 하시고는 동산 밖으로 내어 보내십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동산 밖으로 내어 보내면서 약속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여자의 후손을 보내 줄 터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그가 너희를 미혹케 한 뱀의 머리를 깨트릴 것이라고 합니다.

뱀의 머리를 깨트린다는 말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린다는 말입니다.

즉 여자의 후손이 너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너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어 구원을 해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해 주신다는 것을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구원의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아담에게 있어 유일한 소망은 자신들을 뱀에게서 구원을 해서 에덴동산으로 데리고 갈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돕는 배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소망은 이 땅에서 성공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의 영웅호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 자신들을 이 땅에서 에덴동산으로 데리고 가실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린 아담처럼 구원을 받아야 할 자들입니다.

우리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루어야 할 구원은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영적인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마귀 아래서 죄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기 피로 우리를 마귀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죄의 종에서 의에 종이 된 것입니다.

 

죄 아래서 의 아래로 옮겨진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이 죄의 종으로 살지 말고 의에 종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의에 종으로 사는 자들이 육신의 장막을 벗고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구원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몸의 구속이라고 합니다.

 

그러자면 우리를 구원 하실 구원자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잡은 뱀의 머리를 깨트릴 분이어야 하고, 또한 우리를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실 분이어야 합니다.

그럼 구원자는 죄와 사망의 권세 잡은 자보다 더 강하여야 하고 반드시 하늘나라에서 오신 분이어야 합니다.

그 구원자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뱀의 머리를 깨트릴 여자의 후손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붙잡혀 있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죄와 사망에서 해방을 맞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령을 돕는 배필로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을 돕는 배필로 주신 것은 사단이 여전히 성도들을 참소하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성도들을 법 아래 머물게 하고자 합니다.

사단의 참소에 걸려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은 성도들 안에서 사단의 참소를 이기도록 돕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율법의 요구로부터 자유케 되었음을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너희는 이제 죄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성령은 성도를 도우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아들의 영이라고 합니다.

 

왜 성령을 아들의 영이라고 할까요?

이는 성령이 성도를 아들로 만들어 내시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남자입니다.

그럼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남자가 아니고 여자라는 뜻입니다.

 

여자는 뱀을 이기지 못합니다.

남자라야 이깁니다.

그래서 성령이 아들의 영으로 오셔서 여자를 남자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 이야기는 흙에서 난 사람과 하늘로서 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럼 아담과 돕는 배필 이야기를 남자와 여자이야기로 살펴봅시다.

 

성경이 말하는 남자는 하늘의 생명을 주는 자이고 여자는 생명을 받는 자입니다.

흙에서 난 아담에게는 하늘의 생명이 없습니다.

그런 아담은 남자가 아닌 것입니다.

여자입니다.

 

아담이나 여자는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여자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담과 하와는 여자의 자리"에 있고, "성령이 남자의 자리"에 서 있게 되는 그림이 그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그림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그리고자 하신 남자와 여자인 것입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자여야 합니다.

그리고 여자를 생명의 세계로 인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아담이 먼저 여자를 생명의 세계인 에덴으로 인도 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남자 구실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생령인 아담은 영적 존재가 아닙니다.

아담이 영적 존재가 되려면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생명과를 먹기 전에는 아담은 생령으로서 그냥 산 존재입니다.

 

생령을 “네페쉬 하야” 라고 하는데 이는 그냥 살아 있는 존재를 말합니다.

생령인 아담은 여자를 생명의 세계를 인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아담 자신도 도움을 입어야 합니다.

 

네페쉬 하야는 그릇과 같습니다.

그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그 본질이 결정이 됩니다.

그 속에 선악과를 담으면 죽은 자가 되고,

그 속에 생명과를 담으면 영생하는 사람이 됩니다.

 

아담은 영생하는 자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절대로 먹어선 안 되고 생명과는 반드시 먹으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생명과를 먹기 전에 아담은 남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기 전에 아담은 생물학적으로는 남자이지만 영적으로는 여자인 것입니다.

 

그럼 아담은 여자 앞에서 남자 행세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아담은 여자 앞에서 남자 노릇을 하고자 하다가 망하고 만 것입니다

인류의 타락은 남자도 아닌 자가 남자 구실을 하다가 시작이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야기는 단순한 남자와 여자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 구원하는 이야기를 남자와 여자 이야기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예수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이 되는 것 속에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을 봅시다.

 

엡 5:22-33절.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사도 바울은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는데 주께 하듯이 하라고 합니다.

남편들은 아내 사랑하기를 주께서 자기 몸을 버리신 것처럼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예수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설정을 해 놓으신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를 가지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과 여자가 창조되는 모습 속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아담과 하와의 창조 과정을 살펴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창조 모습이 다릅니다.

 

먼저 아담의 창조 모습을 봅시다.

 

창 2:7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십니다.

그리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십니다.

그러자 사람이 생령이 됩니다.

 

남자와 여자는 창조의 시점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먼저 창조 하십니다.

그리고 난 후에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럼 여자의 창조 모습을 봅시다.

 

창 2:21-23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합니다.

그리고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서 여자를 만드십니다.

아담이 깊이 잠든 것은 죽음과 같습니다.

그럼 여자는 아담의 죽음에서 나온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창조하는 방식과 동일합니다.

 

아담이 깊이 잠들고 아담의 몸에서 여자가 나온 모습 속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옆구리를 찢으시고 물과 피를 쏟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여섯째 날에 깊이 잠들게 하신 것은 예수님이 여섯째 날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는 아담의 죽음 속에서 여자를 창조하였고,

신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 속에서 성도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께서 아담의 생명을 여자에게 주었고,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성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여자는 아담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성도의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남자와 여자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로부터 생명을 받은 자입니다.

 

남자는 생명을 주는 위치에 있고,

여자는 생명을 받는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이를 천지 창조로 보면 남자는 하늘이 되고 여자는 땅이 되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예수그리스도와 교회를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남자이고, 교회는 여자인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를 상징하므로 우리 모두가 여자인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로부터 생명을 수여 받았듯이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수여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에게서 나왔고,

예수그리스도 말미암아 살아가다가,

예수그리스도에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롬 11: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성도의 생명에 근원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공급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천국에서는 어린 양의 신부가 되어서 예수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존재 양식은 물의 흐름과 같습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생명도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주는 것입니다.

생명은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생명의 자람도 강함이 약함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돌보는 것이고,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인간에게 주어지고,

부모의 사랑이 자식에게로 흐르고,

도움이 남자에게서 여자에게로 흐르는 것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것이 창조 세계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창조주이신 예수님이 죄인을 위하여 대속제물이 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비움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몸을 입은 것은 창조주로서의 비움입니다.

이를 신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구원은 신의 죽음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자기 백성을 낳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죄사함이 피 흘리심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물과 피를 쏟고 자식을 낳듯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고 성도를 낳으신 것입니다.

 

교회와 가정은 이러한 원리로 세워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위하여 희생하는 것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가정은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으로 세워지고 지켜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살아가는 죄의 세계는 하나님의 세계와 반대입니다.

세상의 법칙은 강한 자는 섬김을 받고 약한 자가 섬기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시절을 쫓아서 선물이 낮은 사람들에게서 높은 사람들에게로 주어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철저하게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다스려지고 있습니다.

약육강식의 법칙에서는 강함이 선이고 약함은 악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서로가 강자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서로 강자가 되려고 치열하게 경쟁을 하는 것입니다.

서로 높은 자리에 앉고자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의 존재 양식은 모두가 전쟁인 것입니다.

 

학교에서도 서로 더 높은 점수를 얻고자 경쟁이라는 전쟁을 하고,

직장에서는 남보다 더 높은 직급으로 올라가고자 전쟁을 하고,

스포츠에서도 상대를 이기려는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서로 서로가 상대방보다 더 높아지려는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그 자체가 전쟁입니다.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긴 자는 왕으로 군림하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이긴 자에게는 부와 명예가 주어집니다.

이긴 자에게는 상좌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이긴 자가 강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법칙은 승리한 자의 자리가 섬김을 받는 자리인 것입니다.

 

이런 세상의 법칙이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횡행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물질의 가치로 세워지면서부터 교회의 직분이 서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집사와 장로가 서열 경쟁이 되고 만 것입니다.

목사들이 행함이라는 보상을 장로와 권사의 직분을 댓가로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장로와 권사가 벼슬이 되고 만 것입니다.

 

장로와 권사의 직분이 교회 안에서 벼슬이 되다가 보니까 급기야 돈을 주고 사고 파는 매관매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과 상관없이 돈 많은 자들이 상석에 앉고 돈 없는 자들은 한직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교회 안에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는 것입니다.

돈 있는 자는 상좌에 앉아서 섬김을 받고 있으며,

돈 없는 자는 말석에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가 교인들의 신앙 속에 그대로 녹아져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닐수록 섬기는 자리에서 섬김 받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것이 마일리지로 쌓여서 대접받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요?

이는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섬김을 받은 경험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섬김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히 4:10절.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 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섬김이란? 마치 부모가 자식을 돌아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로부터 나와서 부모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이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께서 이미 해 주셨고, 지금도 해 주시고 계시며, 장차도 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시제로 주어지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를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하나님의 섬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은 불의치 아니하는 분으로서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 세계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어미가 새끼를 섬기는 것으로 새끼들을 자라가는 것입니다.

새들이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것을 보세요.

그 속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섬기는 것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으로부터 섬김 받은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힘의 원천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으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가 행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사랑도 하나님의 것이고,

은혜도 하나님의 것이고,

감사도 하나님의 것이고,

섬김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가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자가 은혜를 토하여 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섬김을 받은 자가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신앙의 원리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 교회는 이러한 원리로 세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섬기지 않고 자기 것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섬김 받은 것이 없이 자기 것으로 섬기니까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자기 의가 쌓여서 상좌에 앉게 되고 섬김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드리는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만 받으십니다.

그것이 여호와 이레입니다.

 

여호와 이레란?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것만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것을 주었습니다.

이를 성령의 은사라고 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모두가 예수님의 것들입니다.

 

성령의 은사에는 성품적인 것과 사역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행하는 일도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고 성도가 토해내는 각양의 성품들도 예수님의 것인 것입니다.

 

은혜 받음이 먼저이고 일은 나중입니다.

이것을 믿음이 일으킨 행함이라고 합니다.

행함은 믿음이 일으킨 현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행함이 함께 일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토해내게 되어 있습니다.

행함은 살아 있다는 자기 증거입니다.

행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으면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죽은 믿음을 일컬어 마귀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창조세계의 법칙은 창조주가 피조물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이 땅에게 비를 내려서 땅이 산물을 내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땅은 하늘이 주는 비를 받아서 산물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이 낸 산물은 땅에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순리로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런데 마귀가 이러한 순리를 역리로 바꿔놓았습니다.

인간들이 신을 섬기는 것으로 바꿔 놓은 것입니다.

이를 죄라고 합니다.

 

그래서 죄 아래 있는 인간들의 신앙은 인간들이 신을 섬기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지성이면 감천한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아덴에 갔을 때 모든 인간들은 이러한 신 섬김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만유를 창조하신 분이 무엇이 아쉬워서 피조물에게 도움을 받겠느냐고 하면서 창조주는 피조물에게 모든 것을 공급하는 분이라고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마귀가 순리를 역리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순리는 창조주가 피조물을 섬기는 것이고,

역리는 피조물이 창조주를 섬기는 것입니다.

 

순리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것이고,

역리는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섬김을 받는 것입니다.

 

순리에 속한 성도들은 자기가 살아가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 감사하고 찬송을 합니다.

그러나 역리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은 응당 자기에 소원을 들어 주어야 한다고 하면서 섬김 것에 대한 청구서를 제출하는 것입니다.

이를 지성이면 감천한다고 합니다.

 

받아먹었으면 내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이걸 뇌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뇌물을 받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피조물의 섬김을 받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섬기겠다고 하는 것은 교만이고 불의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를 먹여 살리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의 도움을 거절하고 부모를 돕겠다고 하는 것은 악이고 죄입니다.

그건 부모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망신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자들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없고 마르다만 가득합니다.

 

교회 안에 탕자 비유에서의 맏아들만 가득한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은혜는 사라지고 법만 난무하는 것입니다.

인간들 자랑거리들만 가득한 것입니다.

 

교회마다 바리새인들을 양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로 큰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법칙으로 세워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와 긍휼과 사랑이 강물처럼 흘러야 하는 자비의 집이 인간의 힘(행위)으로 우열과 서열이 정해진 강도의 소굴이 되고 만 것입니다.

 

창조의 세계는 심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납니다.

쌓은 선에서 선이 나오고, 쌓은 악에서 악이 나오는 것입니다.

쌓은 은혜에서 은혜가 나오고, 쌓은 법에서 법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야 은혜도 나오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사랑도 나오고,

하나님으로부터 섬김을 받아야 섬김도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을 봅시다.

 

벧전 4:7-10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열심히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우리의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하려면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것을 주셨습니다.

이를 은사라고 합니다.

 

성도가 행하는 사랑도 대접고 섬김도 봉사도 가르치는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그럼 먼저 무엇을 하기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하면 쉽고 기쁘고 감사가 됩니다.

그러나 내 것으로 하면 힘이 들고 기쁨도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자기 것으로 행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존재들이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은혜로 하지 않고 법으로 하기 때문에 법적 행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법으로 행하게 되면 반드시 그 행한 것을 힘으로 삼게 되어 있습니다.

실력행사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것으로 하였으니까 당연히 보상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행한 헌금과 열심과 봉사와 헌신이라는 자기 지분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러쿵 저러쿵 발언권을 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을 하지 말아야 할 자들이 일을 하여서 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역리라고 합니다.

파리한 소가 살찐 소를 잡아먹는다고 합니다.

 

인간의 의로 하나님의 의를 배척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이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파리한 소들인 바리새인들이 율법 지킴을 힘으로 삼아서,

생명이 풍성한 살찐 소인 예수그리스도를 잡아먹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죽이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의로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는 자들을 향하여 독사(살모사) 새끼들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살모사란? 어미를 잡아먹는 뱀이라는 뜻입니다.

죄인이 바로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잡아먹는 살모사들인 것입니다.

 

죄가 뭐냐?

하나님의 것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의가 뭐냐?

하나님의 것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받지 않는 것을 불순종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것을 받는 것을 순종이라고 합니다.

 

불순종을 제사라고 하고,

순종을 긍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하십니다.

 

지혜로움이란? 자기가 누구인지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얻어먹어야 할 자인지,

아니면 하나님께 갖다 바쳐야 할 자인지 아는 것입니다.

 

얻어먹어야 할 자가 바치겠다고 하는 것은 불경이고 참람입니다.

반대로 섬김을 받아야 할 자가 섬기고자 하는 것도 불경이고 참람이며, 또한 섬겨야 할 자가 섬김을 받겠다고 하는 것도 불경이고 참람입니다.

 

쉬운 말로 어린 아이가 부모를 돕겠다고 해야 할 공부는 하지 않고 껌 팔러 다니는 것도 불경이고 참람이며, 반대로 부모가 어린 자식을 공부시키지 않고 껌 팔아서 돈 벌어 오라고 하는 것도 불경이고 참람입니다.

 

어린 아이와 어른은 각자의 자리가 있습니다.

어린 아이 때는 부모로부터 섬김을 받고,

어른일 때는 자식들을 섬겨야 합니다.

각자 자기 위치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의 도움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부모를 대접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부모의 도움을 입고 열심히 어른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어른으로 자라면 이제부터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을 자기 자식에게 쏟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치사랑은 없고 내리사랑만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아야 할 때가 있고,

받은 섬김으로 섬겨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어린 아이 때는 섬김을 받아야 하고 어른이 되어서는 섬겨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동일합니다.

금방 교회에 온 자는 섬김을 받아야 하고, 오래된 성도들은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초신자는 섬김을 받아서 빨리 믿음이 장성한 어른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어른의 되면 과거 초신자 때 섬김을 받은 것을 새로 들어온 신자들에게 그대로 토해내면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해 놓은 생명의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누굴 섬기려면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섬김을 받아야 합니다.

성도가 행하는 섬김은 내 것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으로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오래 될수록 은혜의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더욱 더 은혜를 사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입어서 강한 자로 자라가야 할 자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여서 생긴 일들입니다.

속된 말로 장가가지 말아야 할 자가 장가를 간 것이 화근이 된 것입니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자가 남을 돌본다고 하면서 인류가 저주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도움을 입어야만 살 수 있도록 해 놓으셨습니다.

 

이를 천지창조를 통하여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은 존재 양식이 다릅니다.

하늘은 주는 위치에 두셨고, 땅은 받는 위치에 두셨습니다.

하늘은 주는 양식으로 존재하게 하셨고, 땅은 하늘로부터 받아서 산물을 내는 존재 양식으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하늘은 하나님을 상징하고, 땅은 피조물을 상징합니다.

땅은 하늘에 것을 받지 않으면 고사되어 죽어 버립니다.

땅은 늘 하늘로부터 도움을 입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예수님과 성도 이야기입니다.

하늘은 남자이고, 땅은 여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남자이고, 성도는 여자입니다.

 

남자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를 말합니다.

남자는 생명을 주는 자이고, 여자는 생명을 받는 자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의미는 돕는 자와 도움을 입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피조물인 아담은 여전히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하는 여자인 것입니다.

 

피조물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하늘에서 오신 분에게만 있습니다.

하늘에서 오신 분이 누구인가요?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서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남자이고 자기 백성은 여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를 예수님의 신부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신부들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면 하늘에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이를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땅에 사람이 하늘에 사람으로 새로운 창조가 된 것입니다.

받는 사람에게서 주는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여자에게서 남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성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막 창조가 된 아담은 아직까지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으면 여자입니다.

아담은 남자 구실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생물학적으로는 아담은 하와와 비교하면 남자가 맞지만 영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는 아담 역시 하와가 같은 “네페쉬 하야” 로서의 생령인 것입니다.

 

남자의 구실이 있고,

여자의 구실이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생명을 줄 수 있을 때 남자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을 때까지는 생령이므로 남자 구실을 해서는 안 됩니다.

아담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자신이 먼저 영생을 소유한 남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여자에게 생명을 주고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담은 스스로 남자의 위치에 서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 것이 타락의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생령인 아담으로서는 여자를 지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에는 아담보다 월등한 지혜를 가진 뱀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뱀을 이기려면 뱀 보다 더 똑똑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똑똑합니다.

하나님은 뱀을 아담 보다 더 똑똑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담이 뱀을 이기려면 뱀 보다 더 지혜로운 분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뱀 보다 더 지혜로운 분을 아담에게 돕는 배필로 주시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자기 몸에서 나온 여자를 돕는 배필로 맞이하자 하나님이 준비한 돕는 배필은 저만치서 지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담은 자기 몸에서 나온 여자로 인하여서 뱀의 미혹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아담은 여자를 지켜내지 못하였습니다.

이 모두가 남자도 아닌 것이 남자 구실을 하다가 결국에는 둘 다 뱀의 미혹에 넘어가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에덴동산에 먹으면 죽은 과실과 먹으면 영생하는 과실이 있었습니다.

 

두 과실은 두 말씀과 같습니다.

 

먹으면 죽는 말씀이 있고,

먹으면 영생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늘의 말과 땅의 말이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말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고,

땅의 말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입니다.

하늘의 말씀을 먹으면 하늘로 나아가고 땅의 말을 먹으면 땅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두 과실은 두 의와 같습니다.

 

붙잡으면 죽는 의가 있고, 붙잡으면 사는 의가 있습니다.

율법의 의를 붙잡으면 죽고, 예수그리스도의 믿음의 의를 붙잡으면 삽니다.

율법의 의는 선악과이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는 생명과입니다.

 

이를 남자와 여자로 비유하면 율법의 의를 가진 자는 여자이고, 믿음의 의를 가진 자는 남자인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여자이고, 은혜 아래 있는 자는 남자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목사는 여자이고, 은혜 아래 있는 목사는 남자입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가르치려하지 말고 잠잠하라는 말은 율법 아래 있는 자는 가르치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타락은 예수의 생명이 없는 목사들이 가르치는 자로 서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가르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이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받아서 강건한 남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을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복음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하나님으로부터 복음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복음은 인간들의 지혜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셔야지만 알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이 없이는 성경을 알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오셔야지만 하늘에 말로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가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 주실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을 먼저 남자가 되게 하여야 합니다.

일을 시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면 반드시 그 일 때문에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이 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는지 복음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복음이 먼저이고 일은 나중입니다.

율법 아래서는 종으로 살았고, 은혜 아래서는 아들로 살아갑니다.

종은 여자이고, 아들은 남자입니다.

먼저는 여자이고, 나중이 남자입니다.

성도의 신앙은 이 과정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도 이 과정을 겪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던 바울은 여자였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특심을 가지고 죽이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담이 남자 구실을 한 것과 같습니다.

 

여자인 바울이 남자 구실을 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이 바울을 찾아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울 속에 예수님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이 남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자가 된 바울을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 동안 강건한 남자고 만들어 가십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복음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바울은 강건한 남자가 되어서 하늘의 말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전하기 전에 먼저 예수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기 전에 십자가가 담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말하기 이전에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이 있습니다.

예수를 말하지만 다른 예수일 수가 있습니다.

복음을 말하지만 다른 복음일 수가 있습니다.

성령을 말하지만 다른 영일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지식으로 아는 예수와 성령께서 알려주신 예수가 다릅니다.

인간의 지혜로 아는 복음과 성령께서 알려주신 복음은 다릅니다.

복음을 전하기 이전에 내가 아는 예수가 참 예수인지 다른 예수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아는 복음이 참 복음인지 다른 복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사보다 먼저 긍휼을 배우라고 합니다.

제사를 왜 지내는지도 모르면서 제사를 지내면 그 제사 지낸 것 때문에 망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제사를 안 지내서 망한 것이 아니고 제사를 지낸 것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은 교회 일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정작 해야 하는 하나님의 일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교회 일 때문에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일을 게을리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는데 마르다처럼 섬기고자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마르다를 섬기려고 갔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주고자 갔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자기 것으로 예수님을 섬기겠다고 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섬기겠다고 하다가 보니까 정작 예수님으로부터 섬김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것을 받지 않으십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도 없이 자기 것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게 참람입니다.

 

신앙의 순서는 먼저 받는 것입니다.

땅은 하늘로부터 받아서 산물을 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땅인 우리는 하늘이신 예수님의 것을 받아서 산물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잠시라도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알고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먼저 먹고 배불러야 합니다.

배가 부르면 각종 일들이 은혜의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발 잘난 척 나대지 마십시오.

선생이 되어서 가르치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누굴 가르치려고 나대는 순간 아담처럼 망하고 맙니다.

마리아처럼 예수님 발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예수님 입술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듣고자 하십시오.

 

초등학생이 나 장가가겠다고 하면 우짭니까?

남자 구실도 못하면서 여자를 데리고 오면 어찌합니까?

씨알이 영글 때까지 제발 잠잠히 부모님 아래서 정성한 자로 자라가십시오.

남자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 자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그럼 자연히 여자도 생기고 장가도 가고 아버지 집을 떠나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남자 되기는 쉬워도 남자로 살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섣불리 나 장가 갈래 하지 마세요.

 

어줍잖게 남을 가르치려 하지 말란 말입니다.

항아리 아구까지 물이 가득 채워질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아구까지 다 차면 저절로 철철 넘쳐흘러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집에서 남편에게 배우라고 합니다.

여자가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목사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을 모르면 잠잠하라는 말입니다.

목사는 남자 여자 성별로 따지지 않습니다.

여자라도 복음 알면 남자이고, 남자라도 복음 모르면 여자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좋은 자가 남자이고 믿음이 연약한 자가 여자입니다.

예를 들어서 남편이 복음을 모르고 아내가 복음을 알면 신앙적인 질서에서는 아내가 남자이고 남편은 여자인 것입니다.

그럼 남편은 아내 말을 들어야 합니다.

반대로 남편이 복음을 알고 아내가 모르면 남편이 남자이고 아내는 여자입니다.

그럼 아내는 남편 말을 들어야 합니다.

이게 순리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복음을 알고 성도가 복음을 모르면 목사는 남자이고 성도는 여자입니다.

이럴 때는 성도는 목사에게 순종하여야 합니다.

반대로 성도가 복음을 알고 목사가 복음을 모르면 성도가 남자이고 목사는 여자입니다.

이럴 때는 목사가 성도에게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질서입니다.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은 수치가 아닙니다.

자존심 상할 일이 아니고 도리어 지혜로움입니다.

모르면서 아는 척 하는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목사와 성도는 직분의 다름이지 높고 낮음이 아닙니다.

목사가 복음을 모르면 성도에게 배우는 것은 수치가 아닙니다.

성령의 사람은 복음을 배우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습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것이 능력입니다.

 

신앙은 구원 받음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족합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하루하루 살게 해 주시는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아가시면 됩니다.

 

예수 믿는 것이 행복하셔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기쁨이고 감사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날마다 천국을 누리게 됩니다.

그 천국을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스스로에게 물어 보세요.

 

나는 누구인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모두가 강건한 남자로 자라가시길 기도합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