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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1~3 강해

19강. 남자와 여자 이야기 2

by coroa 2020. 11. 18.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19강. 남자와 여자 이야기 2.-

-.정낙원 목사

 

 

 

이번 시간에는 아담과 하와 속에 담겨져 있는 영적인 의미를 앞선 남자와 여자 이야기를 보충하는 의미에서 살펴볼까 합니다.

앞선 시간에 설명이 미진한 부분이 있어서 보충하는 것이므로 다소 중복되는 것도 있어도 다시 한 번 더 웅숭깊게 나눈다 생각하시고 은혜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아담은 영생의 세계를 모르는 여자를 결코 돕는 배필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남자와 여자의 의미는 돕는 자와 도움을 입는 자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이는 남자와 여자 속에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설정해 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돕는 배필은 하나님 자신이 되고자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담이 여자의 자리"에 있고, "하나님이 남자의 자리"에 서 있는 그림이 그려지게 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의 그림으로 본다면 아담이 남자가 되어 여자를 돕는 자가 됩니다.

남자와 여자가 창조가 되어진 순서를 보아서도 남자가 여자를 도울 수는 있어도 여자는 남자를 도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아담과 하와가 동산에서 생령으로 살아가는 것을 전재로 할 때의 일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동산에서 에덴으로 나아가기로 작정을 하고 창조가 된 자입니다.

그럼 아담은 동산을 떠나 에덴으로 나아가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을 돕는 배필로 두어야 했습니다.

 

아담보다 더 나은 분이라야 도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아담을 에덴으로 나아가는 길에 도울 수 있는 돕는 배필은 동산의 차원에 속한 분이 아니라 에덴에 속한 분이어야 합니다.

에덴에 속한 분이 동산으로 내려 와서 아담을 에덴으로 데리고 가야 합니다.

 

동산에서 에덴은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그럼 동산 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한 보이지 않는 에덴은 하늘나라와 같습니다.

이러면 보이는 동산은 이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이는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계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오셔야 합니다.

 

그것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이러면 아담에게 주시고자 하신 돕는 배필이 누구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시고자 하신 돕는 배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이를 에덴동산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아담이 만약 이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면 여자를 돕는 배필로 맞이할 것이 아니라 다소 곳이 앉아서 에덴에서 오시는 돕는 배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자기 몸에서 나온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돕는 배필로 맞이함으로서 인류에 타락을 몰고 오게 된 것입니다.

 

아담이 생령에서 영생하는 사람이 되어서 영생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면 아담 역시 남자가 아니라 여자의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영생의 세계로 끌어줄 남자"를 기다려야 합니다.

아담은 선 줄로 생각하다가 넘어진 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의 넘어짐 속에 인류의 구속사를 담아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육신으로 보내서 어떻게 죄인을 구원해 내는지를 씨눈처럼 담아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는 단순하게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와 성도간의 구원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라는 말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로 그리스도와 성도간의 구원 이야기로 들을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알아 볼 줄 아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아는 것이 아니고 특정한 사람들만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정한 사람들이 누구인가요?

바로 창세전에 영생 받기로 작정이 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입니다.

성경은 이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 속에 예수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로 담아 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에게만 알려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를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예수그리스도와 자신들의 이야기로 해석을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은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남자와 여자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먼저 남자와 여자의 창조부터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 남자에게서 여자를 빼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처음 창조가 된 아담 속에는 “남성” 성(性)과, “여성” 성(性)이 함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 속에 있던 “여자(이솨)”를 빼 내면서부터 아담이 “남자(이쉬)”가 되었습니다.

 

엄마 뱃속에서 갓 태어난 어린아이들은 남자와 여자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냥 아이들이라고 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자라가면서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구분이 됩니다.

자아에 대하여 눈을 뜨고 자기 정체성을 알면서 서로 구분하게 됩니다.

 

자신이 남자이고 여자인 것을 알았다고 해서 모든 게 끝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부터 남자는 남자로서 여자는 여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삶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각 자 남자와 여자로서 살아가려면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남자는 “남자다움”이 있어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움”이 있어야 합니다.

남자의 구실이 있고 여자의 구실이 있습니다.

그 구실을 충분히 할 때 우리는 “남자답다” 혹은 “여자답다” 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이성에 눈을 떴다고 하여서 초등학생이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와서 결혼한다고 하면 난감해집니다.

남자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남자 구실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장의 아담 역시 이런 점에서 아담이 과연 남자 구실을 제대로 하는 남자이냐 입니다.

 

아담의 남자 구실이란? 여자를 영생의 세계로 끌고 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아담 역시 자신을 영생의 세계로 끌고 갈 돕는 배필을 필요로 하는 미숙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럼 아담이 남자로 살 것이 아니라 자기도 도움을 받아야 할 여자로 다소곳이 있어야 합니다.

 

남자란? “씨(생명)”를 가진 자를 말합니다.

아담이 가지고 있어야 할 “씨(생명)”는 당연히 “하나님의 생명”을 말합니다.

아담이 남자 구실을 한다는 말은 여자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줄 수 있는 상태를 두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아담은 아직 여자에게 “하나님의 생명”(씨)을 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닌 것입니다.

아담이 여자에게 줄 수 있는 씨란 고작해야 “네페쉬 하야” 라는 “생령”이라는 씨뿐입니다.

생령의 씨는 아무리 많이 주어도 그 속에 생명이 없기 때문에 뱀의 노리개감밖에 안 됩니다.

뱀을 이기려면 뱀보다 더 나은 생명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씨(생명)”를 가진 자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씨가 들어 있는 “생명과를 먹으라” 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아담이 생명과를 먹었으면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여 “생명의 씨”(하나님의 생명)를 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생명과를 먹기 전의 아담은 하나님의 씨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여자와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담은 남자 구실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아담은 지금 여자를 맞아들여 가정을 꾸릴 수 있을 만큼 강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상태로서의 아담이 남자로서 살고자 한 것은 결국 아담 자신이나 여자에게나 커다란 불행이 되고 만 것입니다.

 

아담의 이러한 모습은 이 시대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가장 크게 속고 있는 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먹어서 믿음이 남자답게 강건하게 자라가야 하는 데에도, 자라기도 전에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는 맹목적인 충성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설쳐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을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문제는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존재이냐 라는 것입니다.

남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인지 아니면 복음을 들어야 할 자인지 구분 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정의하기를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 6:27-29절.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일하는 것은 양식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주시고자 한 양식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온 것은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를 먹는 자는 그 속에 생명이 있고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요 6:51절.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구약의 에덴동산에서는 생명과를 먹으면 영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과가 신약에서는 예수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보내신 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정의하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생명과로 주신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생명과를 먹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생명과를 먹지 않은 생태에서의 일은 선악과의 일 밖에 안 됩니다.

이를 율법의 의라고 합니다.

 

율법의 의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영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영생은 예수그리스도의 의로만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예수라는 생명과를 주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인간들은 알지를 못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을 돕는 배필로 주어서 예수그리스도가 바로 영생을 주는 생명과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 예수가 바로 하늘로서 온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 아무리 큰 일을 하여도 영생을 받지 못합니다.

율법의 일로는 영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율법의 일은 선악과와 같습니다.

 

마귀는 신앙의 관심사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생명과에서 눈을 돌리게 하여 율법지킴이라는 선악과에 고정을 시키고자 합니다.

율법이라는 선악과에 눈을 고정시키는 한 예수라는 생명과를 먹을 수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열심히 율법의 일을 하느라 예수라는 생명의 떡을 먹지 못하였습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느라고 예수를 믿지 못하였습니다.

전도하고 봉사 하느라고 예수를 믿을 시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화한다고 예수 믿는 일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성화가 하나님의 일이라도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성화는 인간의 일이고 예수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마귀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로 생명과를 가리는 일을 하였듯이 지금도 성화라는 것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잊게 만듭니다.

마귀가 신앙의 본질을 믿음에서 행위로 바꿔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새벽부터 밤까지 교회의 일을 열심히 하는데 예수를 믿는 믿음이 없습니다.

 

마귀는 예수 믿는 것을 교회 다니는 것으로 둔갑을 시켜 놓은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교인들이 교회를 다니면 당연히 예수를 믿는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도 모르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마귀는 예수그리스도가 무슨 일을 하셨고 무엇을 믿어야 하는 지에는 눈을 돌리고 대신 성도다운 삶에 관심을 갖도록 합니다.

신앙의 초점을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로 옮겨지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열심히 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열심과 충성으로 일을 해도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사람의 일인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의이지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아닙니다.

 

신앙의 초점을 무엇을 할 것인가로 맞추게 되면 평생 헛 싸움만 하게 되고 맙니다.

의(義)의 말씀에 대해서는 아직 젖도 못 떼면서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마리아처럼 예수의 발아래서 의에 말씀을 들어야 할 자들이 마르다처럼 예수를 섬기겠다고 분주합니다.

 

예수를 섬기고자 하는 일 때문에 정작 예수를 믿는 일은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일은 많이 하는데 정작 예수 믿는 일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도 모르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모르면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복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면서 남을 가르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성경 구절 몇 개 외워 가지고 전도를 한다고 해서 그걸 어찌 충성이라고 하겠습니까?

그것이 어찌 하나님이 영광을 받고 기뻐하실 일이라고 할까요?

이건 마치 열심히 공부할 아이가 껌 팔아서 아버지 집 짓는데 보태겠다고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신앙의 심각성은 아버지가 원하지도 않는 일을 아들이 한다고 해도 아버지가 막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를 탕자 비유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아들이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껌 팔러 나간다고 하면 두들겨 패서라도 막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자비로운 하나님 아버지는 막지를 않고 그대로 지켜 볼 뿐입니다.

왜?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유산을 상속해 달라는 것을 막지 않고 원하는 대로 들어주셨을까요?

 

아버지 집을 떠나 사는 것이 얼마나 저주스러운 것인가를 아들 스스로가 체득하여서 깨달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세상의 악함을 알고 자기 주제를 알게 하기 위하여 막지 않은 것입니다.

스스로가 아버지 집의 귀함을 알아야 집을 나간다는 소리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귀한 축복인지를 알아야 집 떠난다는 소리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스로가 아버지의 보호에서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 집을 나가 강도를 만나고 사기꾼을 만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자기 주제를 알게 된 것입니다.

집을 나갈 땐 아들로 나아갔지만 돌아 올 땐 스스로 종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 종으로 사는 것이 훨씬 더 큰 축복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품꾼의 자리로 돌아온 것입니다.

 

아버지는 스스로 종이 되겠다고 돌아온 아들을 비로소 진정한 아들로 받아들입니다.

아버지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올바로 아는 자가 바로 아버지의 아들 됨인 것입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자기 능력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비싼 수업료를 치른 것입니다.

 

아담이 이와 같습니다.

아담은 자기 주제를 모르고 남자 행세를 하다가 여자에게 설득을 당하고 급기야 뱀에게 사기를 당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개고생을 하면서 유리방황을 하게 된 것입니다.

급기야는 하나님의 아들이 죽임을 당하는 죄값을 치루고서는 다시 에덴동산으로 돌아오게 되는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집에 있는 큰아들은 아직까지 자기 주제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은 아버지 명(命)에 순종하였기 때문에 아버지가 기뻐하는 아들인줄 알고 있는 것입니다.

큰 아들의 문제는 아버지는 열심히 일만 하면 기뻐 할 것이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한 충성심은 있었지만 정작 맏아들에게 있어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없었던 것입니다.

맏아들은 아버지를 대신하여서 가문을 이어갈 자입니다.

그럼 당연히 그 속에 아버지처럼 못난 동생도 감싸 안는 아버지의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아들이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은 종들에게 시키면 됩니다.

맏아들은 온 집안 식구들에게 아버지처럼 사랑으로 잘 돌아 볼 수가 있는 넉넉한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탕자 비유에서의 큰 아들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사랑과 은혜의 마음은 없고 아버지 재산을 말아 먹은 못난 놈은 동생의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집밖으로 내치라고 하는 비정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법으로 죄인을 기소하여서 감옥에 가두려고 검사의 심정인 것입니다.

사단의 마음인 것입니다.

 

사단의 마음을 품고서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아버지의 집을 유업으로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가산을 탕진하고 돌아와서 아버지 앞에서 감히 아들이라고 하지 못하고 품꾼의 하나라고 하는 둘째 아들에게 가문을 이어가라고 인감도장을 맡긴 것입니다.

 

아들의 조건은 일에 있지 않습니다.

아들의 조건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고서는 자기가 한 일을 근거로 늘 아버지가 하는 일에 못 마땅히 여기고 부딪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맏아들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처사에 반발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게 죄입니다.

 

탕자 이야기를 에덴동산의 아담이야기로 그려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아담과 하와가 뱀의 꾐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따먹는 것을 말리지 않고 물끄러미 보고 계셔야만 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것을 막지 않았습니다.

또한 앞서서 아담이 여자를 보고 돕는 배필로 맞이할 때도 막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는 생령인 아담이 왜 남자 구실을 해서는 안 되는지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네페쉬 하야인 생령이 남자 구실을 할 때 어떤 저주를 당하게 되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지혜로움이란 자기 주제를 아는 것입니다.

나는 남자다! 나는 여자다! 라는 것은 말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나 자신이 도움을 받을 존재냐! 아니면 도와줄 존재냐! 를 아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의 생령인 아담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려고 하여야지 남을 도와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도 생명과를 먹고 생명의 사람이 되어야 할 처지입니다.

여자나 아담이나 동등하게 네페쉬 하야이기 때문입니다.

 

둘 다 누가 누굴 돕고 할 처지가 안 되는 것입니다.

둘 다 영생에 관하여서는 소경들이기 때문입니다.

둘 다 영생에 관하여 잘 아시는 분의 도움을 입어야 할 자들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마치 어린 아이들이 너는 아빠 나는 엄마라고 소꿉놀이를 하면서 집에 돌아가는 일을 잊은 것처럼 부모를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부모를 떠나면 뱀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뱀이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부모를 떠나자 즉시로 뱀은 여자에게 다가가 선악과로 미혹하였습니다.

이건 마치 탕지가 아버지 집 문을 나서자 사기꾼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어느 시대이고 항상 자기 지위를 떠나면 타락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주제를 모르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망한 것은 자기 주제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부모님 밑에서 어른으로 자라가야 할 놈이 남자 행세를 한다고 여자를 돕는 배필로 맞이하고서는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아담은 아직 남자가 아닙니다.

남자 구실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구분이 될 때는 자아가 깨어나서 성의 정체성을 알 때입니다.

 

어렸을 때는 그냥 사람으로 지냅니다.

어릴 때는 남자와 여자로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사내 아이가 엄마를 따라서 여자 목욕탕에 가기도 하고 여자 아이가 아빠 손잡고 남자 목욕탕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남자와 여자의 성징이 나타나면서 서로 다름을 알게 되고 비로소 남자와 여자로 구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의 정체성을 알 때까지는 그냥 아이로 살아가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러합니다.

둘 다 네페쉬 하야라는 생령입니다.

어린 아이들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구분 할 때가 아닙니다.

그냥 부모 아래서 사람으로 자라가야 할 때입니다.

 

영생에 관하여서는 어린 아이인 아담에게서 피어나야 할 “성”(性)은 당연히 하나님께 씨를 받아야 할 “여성”(女性)인 것입니다.

그럼 아담은 남자로 살고자 해서는 안 되고 여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하나님이 세 번째로 제시하는 돕는 배필을 만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돕는 배필은 그에게 “남성”(男性)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랬으면 아담은 남자로 나타난 돕는 배필을 통해서 강건한 남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담이 남자로 나타난 돕는 배필을 통해서 남자가 되면 그 때 여자에게 자기 씨를 주어서 그 여자도 남자로 만들어 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 아담과 하와 모두가 강건한 남자가 되어서 아버지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담은 어린 아이가 남자 구실을 하다가 망하고 만 것입니다.

 

바울 역시 어린아이가 남자 구실을 하다가 망하였습니다.

바울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탕자 비유에서의 맏아들처럼 율법에 특심한 것을 가지고 못난 동생들을 죽이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참 남자인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의 생명을 받고서 강건한 남자가 되어서 율법 아래 있는 많은 여자들에게 예수로부터 받은 생명을 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은 한 남자인 예수그리스도에게 여자들을 소개하는 중매쟁이 노릇을 하고 있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고후 11:2절.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바울이 본 것처럼 아담은 정결한 처녀로 예수그리스도를 남편으로 맞아들였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아담은 스스로 남자가 되어서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부모를 떠나고 맙니다.

부모를 떠나자 뱀은 배시시 미소를 지으면서 그들을 정겹게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눈 앞에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선악과를 둡니다.

 

여자는 첫 눈에 반하고 맙니다.

반하면 따 먹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자는 선악과를 맛나게 따먹고 맙니다.

그리고는 신랑에게도 줍니다.

아담도 여자가 주는 선악과를 먹고 맙니다.

인류의 타락에 비극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이 부모를 떠난 결과는 참담하였습니다.

죽음으로 돌아 왔습니다.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아담은 에덴동산 밖을 유리하는 죽은 아담들의 조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교회 라는 하나님의 동산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아담과 여자처럼 네페쉬 하야가 있고 선악과도 있고 생명과도 있습니다.

물론 돕는 배필도 있고 뱀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의하는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와 생명을 받아야 하는 자로 구분을 합니다.

남자는 생명을 줄 수 있는 자이고,

여자는 생명을 받아야 하는 자입니다.

 

아담은 아직 생명의 씨를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이므로 당연히 여자로 있어야 합니다.

아담은 여자의 위치에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남자가 주는 생명의 씨를 자기 안에 받아서 생명을 꽃피워야 할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아담이 받아야 할 씨는 누구인가요?

아담이 받아야 할 “씨(생명)”는 당연히 “하나님의 씨(생명)”입니다.

그 생명이 바로 생명과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아담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기 전에 먼저 생명과를 먹고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남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리 할 때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수가 있습니다.

 

생명과를 먹기 전의 아담은 여자입니다.

돕는 배필을 통해서 생명과 속에 담긴 비밀을 알고 먹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시고자 한 것은 아담으로 하여금 생명과를 먹게 하여서 강건한 남자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스스로 씨를 가진 남자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의가 마치 하나님의 의가 되는 줄 알고 자랑한 것과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는 의는 고작하여서 네페쉬 하야의 의인 것입니다.

이건 마치 아담의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의를 준다고 하여도 바리새인들은 거부 하였습니다.

자신들은 의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자랑한 율법의 의가 바로 선악과인 것입니다.

의가 있다고 여긴 것이 결국에는 예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고 지옥에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아담은 스스로 남자라고 착각하다가 에덴동산 바깥으로 쫓겨나는 저주를 받았고,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하다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들어간 지옥이 바로 아담이 쫓겨난 죽은 자들이 살아가는 에덴동산 바깥과 같은 것입니다.


스스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동산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죽은 자들을 생산하는 조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아담이 낳은 모든 후손들은 죽은 자로 태어납니다.

 

하나님은 산 자이고 아담은 죽은 자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생명의 동산에서 죽음의 세계로 쫓아내고 말았습니다.

 

아담은 죽은 자의 조상이 되어서 죽은 자를 낳게 됩니다.

아담에게 있어 유일한 희망은 뱀의 머리를 깨트릴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입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는 남자로 오실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마치 등불을 켜고 신랑을 기다리는 여자들의 심정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한 남자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모든 인간은 죽은 자인 아담을 조상으로 두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여자인 것입니다.

그 속에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다 죽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려면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죽음을 이기는 백신이 되어서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을 시켜주십니다.

그 하나님의 생명을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한 남자가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덴동산 밖으로 떠나가는 아담에게 한 남자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 남자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목적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씨”를 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씨”를 성도라는 밭에 뿌려서 그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 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씨를 심기 위해서 먼저 밭을 개간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선악과를 먹고 죄와 사망에 가두어진 자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농부가 씨를 뿌리기 위하여 밭에 있는 가시와 엉겅퀴를 제거하고 돌들을 캐내고 옥토를 만드는 일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선악과를 먹은 아담을 죽이는 일을 하였습니다.

죄 아래서 난 아담을 죽이는 것은 밭을 개간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아들의 영으로 보내서 그들 속에 아들의 씨를 심어 주십니다.

이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아들이 된 것입니다.

성령이 예수의 씨를 성도라는 밭에 심은 것입니다.

이건 마치 여자가 남자의 씨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여자가 남자의 씨를 받으면 이제부터 자기 안에 심겨진 남자의 씨를 강건하게 키워가는 일을 합니다.

이제 연약한 여자가 아니라 강건한 남자로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씨를 받음과 동시에 자신도 그 씨를 잘 키워내기 위해서 강건한 남자로 바뀌어져 가는 것입니다.

 

남자의 씨를 받아 잉태한 여자는 남편의 도움으로 자기 안에 심겨진 아이를 강건한 생명으로 키워가는 남자의 일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여자는 남편 앞에서는 여전히 남편의 도움을 입어야 하는 여자이지만 자기 안에 심겨진 아이를 키워가는 일에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도 예수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모인 교회를 “여성 명사”로 쓰는 이유도 예수 앞에서는 여전히 예수로부터 하늘에 신령한 은혜를 공급 받아야 하는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남자이면서 여자이고, 여자이면서 남자입니다.

성도는 생명이 없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로서는 남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먹고 살아가야 하는 입장에서는 여전히 여자인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도는 세상에 대하여서는 분명히 남자이지만 예수님 앞에서는 여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분명히 남자가 맞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라는 생명을 공급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여자입니다.

그러므로 남자로 살 것이 아니라 여자의 자리를 떠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받으면 분명히 남자가 됩니다.

그러나 남자처럼 사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은 잠시라도 예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살 수가 없는 여자로서 사는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붙어 있으면서 마치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항상 뿌리가 공급해 주는 생명이라는 진액을 받아야 합니다.

가지는 뿌리에서 전해주는 생명의 진액을 받지 않으면 시름 시름 말라져 죽게 됩니다.

 

여자 역시 만찬가지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사랑을 먹고 살아가게 되어 있는 존재들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사랑을 받지 않으면 심령이 시름시름 죽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땅은 하늘의 비를 받지 않으면 사막이 되듯이 여자는 남자의 사랑을 받지 않으면 심령이 메말라가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는 남자의 사랑을 받는 여자입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여자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자입니다.

남자의 사랑은 여자를 살게 하는 생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의 사랑을 먹고 사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남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죽습니다.

신랑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마음이 강퍅해져갑니다.

그럼 심령이 가뭄에 논바닥 갈라지듯이 갈라지게 됩니다.

 

신랑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마음속에 가시와 엉컹퀴가 자라서 자신을 삼켜버립니다.

그러면 마음이 우울해지고 성격이 포악해져서 신경질 적으로 변하고 매사에 짜증을 내면서 부정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사망의 냄새를 풍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 받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잠시라도 은혜의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비록 예수의 생명을 받아서 남자가 되었다 할지라도 육신으로 살아가는 날 동안은 항상 여자의 자리에서 남편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사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의 사랑은 여자로 하여금 빛을 줍니다.

따뜻함을 줍니다.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사는 여자들의 얼굴에는 빛이 납니다.

이는 남자의 사랑이 여자에게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사랑을 하면 예뻐지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입니다.

왜? 아무리 못 생긴 여자라도 사랑을 하면은 예뻐진다고 하는가요?

이는 여자의 속성은 남자의 사랑을 받으면 생명이 피어나는 자로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여자에게 있어 남자의 사랑은 생명이고 기쁨이고 행복인 것입니다.

 

성도가 신랑인 예수님의 사랑을 받게 되면 소망이 생기고 기쁨이 생깁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여자입니다.

늘 예수님의 사랑에 배고파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늘 사모하여야 합니다.

 

몸은 마음에 지배를 당하게 되고,

마음은 영에 지배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안에 아들의 영으로 오신 성령이 계신 성도는 몸도 마음도 예수그리스도를 쫓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가 되어서 예수라는 신랑에 대한 관심이 없는 자는 필히 다른 애인을 두고 간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세상을 사랑하는 자를 간음하는 여자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누구인가요?

예수인가요?

세상인가요?

 

스스로가 점검해 보시길 바랍니다.

나는 지금 여자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남자로 살고 있는가?

 

지금부터 아담 속에 담겨진 두 가지 영적의미를 잠간 살펴보고 마칩시다.

 

아담 속에는 두 가지 모형이 있습니다.

 

첫째 모형은 예수그리스도이고,

둘째 모형은 죄인의 모습입니다.

 

아담이 깊이 잠들고 그 몸에서 여자를 빼내신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이고,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된 것은 죄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면서 또한 모든 죄인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하여 죄가 들어 왔고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그리스도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모든 사람들이 살아나게 되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롬 5:19절.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고전 15:22절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아담은 여자가 주는 선악과를 먹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선악과를 먹은 것은 여자의 운명에 동참하고자 함입니다.

아담이 여자가 주는 선악과를 먹고 죽음에 넘겨진 것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어 주신 것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은 죽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죽음을 담당 하였습니다.

이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대속제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신 것입니다.

 

사 53:5-6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림을 당하셨습니다.

그가 우리의 죄악으로 징계를 당하셨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아서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그가 죽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하는 자리에 그가 죽은 것입니다.

아담이 여자를 위해서 죽을 수 있었던 것은 여자가 아담의 몸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아담과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임당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저들은 너에게서 나온 너의 백성이니 네가 책임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치 아담 안에서 나온 여자가 잘못한 것을 하나님께서 아담 네 안에서 나온 여자이니까 네가 죽음으로 책임을 지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구원은 누군가가 대신 해 주어야 합니다.

죄 아래 가두어진 자는 스스로 그 죄로부터 나올 수가 없습니다.

죄 밖에 있는 분이 건져 주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이건 우리에게 결정권이 없습니다.

죄인이라는 조상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조상은 우리가 결정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결정권이 없기 때문에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우리의 결정권이 없는 것입니다.

결정권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부를 구원하시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을 해 놓았습니다.

그 작정된 녹명 속에 성도들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들을 일컬어 창세전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이 된 자들이라고 합니다.

 

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을 해 놓았을까요?

이는 어린 양이 그들을 위하여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이 그들에게 생명을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생명의 죽음으로 낳아지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어린 양의 죽음으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양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살리려고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난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난 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성도의 생명이 예수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로부터 간섭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생명이 예수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지켜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도 안에 주인으로 와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구원은 구원을 시작하신 이가 이루어 내십니다.

구원을 창조와 동의어로 말하는 이유도 철저하게 창조주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은혜라고 하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결박하고 늑탈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구원은 강하신 분에 의하여 강제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이걸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감사와 찬양으로 나타나야 하는 이유도 구원해 주신 그 은혜가 너무도 크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주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직역하면 저주 받은 자이기 때문에 예수를 사랑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예수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되돌려 드리는 것뿐입니다.

이를 영광이라고 합니다.

 

영광이란? 농부가 열심히 농사를 지어서 추수하는 것과 같습니다.

곡식은 농부의 보살핌에 대한 보답으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열매는 농부가 흘린 피와 땀의 결실입니다.

겉으로는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보이지민 실상은 농부가 맺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매는 농부에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드리는 감사와 찬송이 바로 열매인 것입니다.

하나님 잘 키워 주어서 고맙습니다.

하나님 열심히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나로 하여금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라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 신앙의 열매인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4장을 보면 24 장로가 자기의 면류관을 벗어서 하나님에게 던지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열매를 바라고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스스로 살 수 없습니다.

창조주가 살려주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계의 흐름은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 속에 그대로 녹아져 있습니다.

구원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위하여 희생하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가정 속에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으로 담아 놓았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희생으로 살아가듯이 죄인은 자기를 낳아준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죄사함을 받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누구 때문에 속이 상한가요?

내 가족 내 자식들 때문입니다.

 

남의 자식들 때문에는 속을 썩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내 자식 때문에 죽네 사네 하는 것입니다.

결국 부모는 자기가 낳은 자식들 때문에 속 푹푹 끓여가면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죽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자식이 커서 부모가 되면 알게 됩니다.

내가 부모의 희생으로 부모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을 자기 자식을 위하여 쏟게 됩니다.

자신을 부모처럼 죽음에 내어주면서 자식을 키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모 자식 관계를 가지고 우리의 구원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름합니다.

 

우리는 남자이면서 여자입니다.

세상에 대하여서는 남자이지만 예수그리스도 앞에서는 여자로 살아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예수로부터 받은 사랑을 나누어주어야 하는 남자로 살아야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야만 하는 입장에서는 여자로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남자답게 강건하라는 말은 예수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랑을 성도들에게 나누어주는 자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성도의 신앙은 생명의 자람과 같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부모로부터 섬김을 받아야 할 때가 있고,

커서 부모처럼 어른이 되어서 섬겨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어른으로 자라가는 것은 부모의 희생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부모의 희생으로 자라고 나면 어른의 자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어른이 되어서 어린 아이들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라야 할 자가 자라지 않으면 부모의 근심거리가 됩니다.

그래서 은혜 받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자리를 떠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른이 되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있어집니다.

왜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서 십자가에 죽게 하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왜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인지를 알게 됩니다.

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서 자신을 대속물로 주시면서 성도들을 섬겼는지를 알게 됩니다.

 

은혜 받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그 사랑을 다 알게 될 즈음이면 우린 하늘의 본향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 때가 이 세상을 퇴근하는 날입니다.

안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날입니다.

 

퇴근하고 돌아가면 아버지께서 수고하였다고 잔치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 날을 소망하면서 여자의 일생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여자의 일생은 한 남자를 그리워하면서 믿음의 정절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술람미처럼 한 남자의 사랑을 간절한 마음으로 그리워하면서 부르는 한 여자의 노래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애모’ 라는 노래의 가사 중에서 복음적인 것이 있어서 인용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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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때문에 침묵해야 할 나는 당신의 여자

그리고 추억이 있는 한 당신은 나의 남자요

당신은 나의 남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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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 있는 한 당신은 나의 남자입니다.

맞습니다.

성도에게는 예수그리스도와의 추억이 있습니다.

사랑한 추억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사랑의 추억을 새겨 주었습니다.

그 사랑의 추억이 있는 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여자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자기가 사랑한 여자는 목숨을 걸고서 끝까지 지켜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사랑한 여자들에게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습니다.

 

우리 안에는 성령이 보증으로 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하나님 보좌에 나아가서 예수그리스도를 향하여 큰 소리로 “당신은 나의 남자” 라고 외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사랑을 달라고 청구권을 행사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나의 남자이기 때문에 당신이 나를 책임져야 한다고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남자는 자기 씨를 잉태한 여자는 끝까지 책임을 집니다.

 

우리의 남자이신 예수님은 우리 몸에 새겨놓은 그 추억을 기억하시고 반드시 우리를 끝까지 책임을 져 주십니다.

그러니 그 사랑 안에서 담대하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애모 속에 담긴 가사를 우리의 기도라 여기시고 불러 보시길 바랍니다.

 

 

애모(愛慕)

www.youtube.com/watch?v=SmpDR17iwCk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늘은 울고 싶어라

세월의 강 넘어 우리 사랑은 눈물 속에 흔들리는데

얼 만큼 나 더 살아야 그대를 잊을 수 있나

한마디 말이 모자라서 다가설 수 없는 사람아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그대 등 뒤에 서면 내 눈은 젖어 드는데

사랑 때문에 침묵해야 할 나는 당신의 여자

그리고 추억이 있는 한 당신은 나의 남자여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그대 등 뒤에 서면 내 눈은 젖어 드는데

사랑 때문에 침묵해야 할 나는 당신의 여자

그리고 추억이 있는 한 당신은 나의 남자요

당신은 나의 남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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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그리스도 당신은 나의 남자입니다.

나는 당신의 여자입니다.

당신의 사랑 없이는 하루도 살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그 사랑을 사모합니다.

그 사랑을 주세요.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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