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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1~3 강해

20강.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아담 이야기

by coroa 2020. 11. 20.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0강.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아담 이야기.-

-.정낙원 목사

 

 

 

오늘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이야기를 상고해 봅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이야기이면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부모를 떠나는 이야기와 우리가 부모를 떠나는 이야기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릅니다.

 

아담이 부모를 떠나는 이야기 속에는 이중적(二重的) 게시가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의 타락 이야기이고,

둘째는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구원 받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이야기로 풀면 죄인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되고,

우리 이야기로 풀면 범죄하여 타락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신 남자이기 때문에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을 이루어서 가정을 꾸리는 것은 자기 백성들과 연합하여 구원을 이루는 이야기가 되지만, 아담이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을 이루어서 가정을 꾸리는 것은 타락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하여서 생명을 낳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남자는 생명을 주는 자이고 여자는 생명을 받는 자입니다.

남자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여자는 피조물을 상징합니다.

그럼 남자에게 있어야 하는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영생하는 것인데 그 생명이 생명과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생명과를 먹기 전에는 하나님의 생명을 여자에게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럼 남자가 아니고 여자입니다.

 

생명과를 먹기 전의 아담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

하와와 동등한 생명인 네페쉬 하야 라는 생령입니다.

그럼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하는 여자의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아담이 여자와 하나가 되는 것은 여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는 동성애와 같은 것입니다.

 

먼저 오늘은 아담이 부모를 떠나는 것을 아담(우리) 이야기로 살펴봅시다.

 

성도는 여자이면서 남자이고,

남자이면서 여자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남자는 씨를 주는 자이고, 여자는 남자로부터 씨를 받아야 하는 자입니다.

 

성경에서 여자는 수에 치지 않는 것은 죽은 자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은 여자로서 죽은 자들인 것입니다.

구원은 여자가 남자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죄인이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린 모두가 생명이 없는 죽은 자들입니다.

 

생명은 예수님에게만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면 남자가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여자는 해산함으로 구원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구원 받은 성도를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도 다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들의 생명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씨를 가진 남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남자의 씨를 가졌다고 해서 다 남자의 구실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남자 구실을 하여야 한다는 말은 자기 앞가림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앞가림을 할 줄 모르면 어린 아이라고 하지 남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남자 구실을 하려면 강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강한 남자였습니다.

그럼 성도도 예수님처럼 강한 남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에게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으로 자라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처럼 강건한 어른이 될 때 남자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 속에는 성도의 신앙은 자람을 전제로 주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어린아이일 때는 어린아이 같이 생각을 하고 어린 아이처럼 행동을 하다가도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 일을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신앙의 여정은 어린아이로 출발하여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음이 됩니다.

 

성도는 존재론적으로는 아들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인 남자입니다.

그러나 뱀이라는 놈과 영적 전투를 하는 수준론적으로는 여전히 죄의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이므로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끊임없이 받아야 하는 여자인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여전히 예수로부터 끊임없이 생명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창조주로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고 우리는 피조물로서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이 관계가 연결되어 있으면 순리이고, 이 관계가 끊어지면 역리가 됩니다.

죄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이 된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진 상태로서 역리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끊어진 것을 연결시켜주었습니다.

역리를 순리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관계가 복원이 된 자들은 순리로 살아가게 됩니다.

성도가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독자적으로 살아 갈 수가 없고 계속하여서 예수그리스도가 공급해 주는 생명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란? 살아 있는 것을 말합니다.

죽은 것은 생명이 아닙니다.

생명은 항상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이를 영생이라고 합니다.

그러자면 영생하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속하여서 생명을 공급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요한복음 15장에서는 포도나무와 가지로 비유해 주고 있습니다.

 

요 15:1-6절.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예수님은 나무이고 우리는 가지입니다.

가지는 독자적으로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가지는 나무가 공급해 주는 진액으로 살아갑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을 땐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나무에서 떨어진 가지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무라고 하였으니 가지인 우리들은 예수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지인 성도가 나무인 예수로부터 떨어져 독자적으로 살고자 하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농부가 되셔서 예수라는 나무에서 떨어져서 독자적으로 열매를 맺고자 하는 가지들은 모두 다 모아서 불에 태우십니다.

 

예수라는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예수의 의의 생명을 맺지만 예수라는 나무에서 떨어진 가지는 자기 의를 맺습니다.

하나님은 예수의 의가 없는 가지들은 불에 태우십니다.

예수의 의는 예수라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지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잠시라도 예수라는 나무에서 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이 뭐냐?

예수 믿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예수 믿음으로부터 출발을 하여야 합니다.

내가 사는 것도 예수 때문이고 내가 행하는 일도 예수 때문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아무리 구원을 받았다고 하여도 예수님 앞에서는 도움을 받는 여자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그늘 아래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게 믿음이고 신앙입니다.

 

부모란?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생명으로부터 단절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낳아준 부모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낳아준 의미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같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예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영존하는 아버지라고 하였습니다.

 

사 9: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또한 영존 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아버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는 예수님과 아버지는 동등한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로 보아도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아버지)을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낳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담이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성도가 예수를 떠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담이 부모를 떠나 죽게 된 것은 성도가 예수님을 떠나서 남자로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것을 아담을 통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이 부모를 떠나 하와와 함께 살면서 뱀의 미혹으로 죽은 자가 된 것은 성도가 하나님(예수님) 떠나면 어떻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필연적으로 뱀의 미혹으로 죽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담은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그럼 부모를 떠나 독자적으로 살고자 하면 어떤 저주의 아픔을 겪게 되는지를 살펴봅시다.

 

아담은 여자를 보고 한 눈이 반하고 맙니다.

아담은 여자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합니다.

아담이 여자를 보고 한 눈에 반한 이유는 아담이 여자를 보고서 한 고백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이는 아담은 여자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본 것입니다.

아담에게 있어 여자는 또 다른 아담 자신인 것입니다.

아담은 자기 자신에게 빠져들고 만 것입니다.

이걸 신약식으로 말하면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다고 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한 모든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자기가 행한 것 속에는 자기 의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행한 일을 누가 부정이라도 하면 자기 자신의 부정당함으로 여기게 되어서 화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여자를 보고 한 눈에 반한 것도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암튼 아담은 여자를 보고 첫 눈에 반하고 한 몸을 이룹니다.

아담이 여자와 한 몸을 이룬 것은 자기 안에서 빠져 나간 것이 채워짐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아담은 빈자리가 채워지자 만족을 합니다.

그리고는 기뻐하면서 부모를 떠나고 맙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것은 자신이 부모가 되기 위함입니다.

 

창 2: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남자가 부모를 떠난다는 말은 곧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남자가 부모를 떠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먼저 스스로가 독립하여 살 수 있는 자라야 합니다.

남자 구실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자 구실이란? 가정을 책임질 능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자식들을 자기 힘으로 먹여 살릴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가정을 꾸려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남자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자 구실을 할 수 있을 때만 부모를 떠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스스로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의존해야 하는 자라고 한다면 성별(性別)로는 남자일 수는 있어도 아직 온전한 남자가 아닌 것입니다.

장가가서도 맨날 부모에게 손을 벌려서 도움을 청하여야 할 것 같으면 부모를 떠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모를 떠남이 아니고 계속하여서 부모에게 머물러 있음이 됩니다.

이것은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불효인 것입니다.

장가가서 자기 가정도 제대로 꾸리지 못하는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미어집니다.

 

남자란? 스스로 살 수 있는 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령인 아담은 부모를 떠나 스스로 살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생령으로서는 뱀이 있는 세상에서 처자식을 지켜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럼 독립해서는 안 됩니다.

독립을 하게 되면 모두가 불행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령인 아담은 부모를 떠나 분가를 할 것이 아니라 부모 아래서 남자 구실을 할 수 있도록 생명과를 먹고서 뱀을 이길 수 있는 강건한 사내로 더욱 더 자라가야 했습니다.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어린아이이지 남자가 아닙니다.

어린 아이로서는 뱀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뱀을 이길 수 있는 자가 될 때까지 부모가 주는 양식을 먹고 강건한 남자로 자라가야 합니다.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또 다른 부모가 되는 일입니다.

내가 부모가 되고자 부모를 떠나는 것입니다.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란? 가정을 위하여 희생하는 분입니다.

처자식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버리는 분이십니다.

자식은 아버지의 생명을 먹고 강건한 남자로 자라가고 나중에는 그도 장가가서 부모를 떠나 또 다른 부모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부모가 죽고 부모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죽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생겨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죽음을 바탕으로 생겨났습니다.

구원 자체가 예수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가정 속에 담아 놓은 것입니다.

 

부모의 희생으로 자라난 자들이 나중에 부모가 되어서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는 자로 살아가듯이,

예수라는 하나님 아들의 희생으로 살아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자들은 이 땅에서 예수라는 하나님 아들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희생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역설은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자는 아들의 상태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떠나 아내를 맞이하는 것은 아들의 지위를 버리고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부모를 떠나서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남자는 아들의 상태를 버려야만 합니다.

아들의 상태란 아버지에게 의존해서 살아가는 자를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의 생명을 얻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아담의 생명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애굽을 떠나지 않고 가나안으로 갈 수가 없고,

땅을 떠나지 않고서는 하늘로 갈 수가 없습니다.

율법의 세계를 떠나지 않고서는 은혜의 세계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옛 것을 버림이 없이는 새 것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땅의 장막이 무너져야 하늘로부터 오는 장막을 입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 속에 두신 생명의 법칙은 먼저 나온 것들은 모두가 죽어서 새것으로 낳아지는 것으로 두신 것입니다.

 

씨가 죽어서 또 다른 생명을 낳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두신 생명의 법칙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서 죽어야지만 또 다른 밀알을 낳게 되어 있습니다.

밀이 죽이 않으면 밀을 생산해 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밀 속에 있는 생명을 끄집어내고자 밀을 죽음에 넘겨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이신 것은 예수님 속에 있는 생명을 끄집어내기 위함입니다.

밀이 죽어서 밀을 낳듯이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낳은 것입니다.

 

아담이 부모를 떠나서 부모가 되자면 아들을 죽여야지만 합니다.

부모에게 의존하여서 살아가는 아들이 죽임을 당하고 독립하여 스스로 살 수 있는 강건한 남자가 되어야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의존적으로 살던 아들이 죽어야 더 이상 부모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비를 만들기 위해서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옴으로서 열국의 아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부모를 떠남인 것입니다.

 

부모를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 아버지같이 되겠다는 것과,

육신의 생명을 버림 없이 영원히 살려고 하는 것은 참람이며 곧 불경인 것입니다.

 

육신적인 결혼 생활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남자가 장가를 갔어도 부모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문제는 말할 것도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닥치는 이러저러한 일들을 처리하는 것에서도 스스로 해결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나 인격적으로도 부모로부터 온전히 독립된 개체여야 할 남자가 이런 저런 문제로 부모에게 의존하여야 한다고 하면 이는 아직 결혼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자립심이 없는 미숙한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되면 모두가 불행해집니다.

본인뿐만 아니라 부모나 아내나 자식까지도 불행해집니다.

심지어 주변에 사람들까지도 피해를 주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립하여 독자적으로 가정을 꾸릴 수가 있다고 한다면 고부간의 갈등이나,

부모의 재산 때문에 생기는 형제간의 다툼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고부간의 갈등이나 돈 때문에 일어나는 형제들 간에 원망과 불평이 쌓이는 것도 스스로 독립할 수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혼할 정도의 나이가 된 남자라면 부모의 돈에 미련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부모의 도움 없이도 가정을 꾸릴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수고하여 준비하고 자신의 이마에 땀을 흘려서 밥그릇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럼 형제간에 재산 다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고부간의 갈등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부간의 갈등 가운데 거의 십중팔구는 남자가 그의 어머니를 떠나지 못하는 데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고부간의 갈등의 원인은 대다수가 두 여자가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서 일어납니다.

시어머니와 아내라는 두 여자가 한 남자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자 하는 갈등에서 벌어지는 일들인 것입니다.

 

우리나라 남자들의 대부분은 이 경우 아내는 버리더라도 어머니는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부모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 역시 자식을 붙잡고 있으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고부간의 갈등은 남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책임의 절반은 부모에게도 있습니다.

자식을 장가보내려면 부모로부터 자식을 떠나보내야 합니다.

품 안에 있을 때 자식이지 장성하여서 아내를 맞아 가정을 꾸릴 정도가 되면 품 안에서 자식을 놓아 주어야 합니다.

 

부모에게 있어 자식은 언제까지나 품안에 자식이어야 합니다.

자식을 떠나보내지 못할 것 같으면 장가를 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장가가서도 아들의 소유권을 주장하려면 장가를 보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들을 다른 여자에게 장가를 보냈으면 소유권까지 그 여자에게 양도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는 남자인 아버지는 비교적 매정한 편입니다.

이는 씨의 속성상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남자의 속성은 씨를 밖으로 토하여 내지만 여자의 속성은 씨를 자기 품으로 품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남자인 아버지들은 자식이 장가를 가고 나면 너 알아서 하라고 놓아 줍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렇지 못합니다.

어머니는 항상 자식을 자기 품안에 두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엄마는 장가간 자식을 일일이 간섭을 하면서 아들을 스스로 부모가 되어서 살게 하지 않고 자기 자식으로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미는 아들에 대한 끈을 놓고자 하지 않습니다.

아들이 장가를 가도 자식으로 붙잡아 두고자 합니다.

탯줄을 끊어주어야 하는데 끝까지 붙잡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미는 아들을 자기 뱃속에서 하나로 함께 살았고, 태어나서도 젖을 물리고 키우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누이면서 정성을 다해서 키웠기 때문에 하나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자식이 떠나려고 하면 본능적으로 뱉어내는 말들이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 라고 항변을 합니다.

 

이는 너는 나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계속하여서 아들로 살으라는 것입니다.

이럴 때 강건치 못한 남자들은 어머니 그늘 아래 머물게 됩니다.

장가를 갔어도 여전히 어머니 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결혼을 하여서도 아들은 어머니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고,

어머니 또한 아들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일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의 불화는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여자는 남자로부터 받은 씨를 자신의 모든 진액을 다 쏟아 부어 장성한 자로 살려내는 것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다 키웠으면 품안에서 빼내서 독립을 시켜야 합니다.

 

아들 스스로 가정을 꾸리고 자기 아내와 자식을 낳고 키우면서 부모가 되는 삶을 살아가도록 분가를 시켜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머니는 아들을 놓게 되고 아들은 어머니를 놓게 됩니다.

이러 할 때 비로소 어머니도 남자가 되고 아들도 남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에선 그러하지를 못합니다.

대다수의 어머니들은 아들이 장성하여서 결혼을 해도 떠나보내지 않고 붙잡아 두고자 합니다.

이러면 남자는 어머니에게 있어 여전히 여자이고 맙니다.

자식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어머니나, 어머니를 떠나지 못하는 자식이나 둘 다 여자로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놓지 못하는 것이나 자식이 부모 그늘에 있는 것이나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어머니는 장성한 자식을 자기 품에서 놓을 때 어머니 스스로가 남자가 부모를 떠나게 되는 것이 됩니다.

즉 어머니는 자식을 자기 품에서 과감하게 끊어서 독립된 존재로 출가를 시킴으로서 자신은 자식이라는 끈(부모)으로부터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장성하여서 아내를 맞이하여서 새로운 가정을 꾸미고 어머니를 떠나는 자식이나,

장성하여서 아내를 맞이하여서 가정을 꾸리는 자식을 떠나보내는 어머니는 모습만 서로 다를 뿐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내용과 의미는 각자에게서 떠나 독립적인 개체가 된다는 것은 동일하므로 모두가 부모를 떠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들도 부모를 떠남이 되고, 어머니도 부모를 떠남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를 떠나는 것의 기준은 내가 의지하던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자식이 남자로서 강건하게 장성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장성하지 못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창세기 2장의 아담은 이런 의미로서 부모를 떠나서는 안 될 자가 부모를 떠남으로서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입니다.

 

생명과를 먹지 못한 아담은 아직까지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여자인 것입니다.

장가 갈 입장이 못 됩니다.

여자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담은 먼저 여호와 하나님을 남편으로 맞아들여 하나님의 씨를 잉태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낳아야 할 여자로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담은 부모를 떠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받을 때까지는 부모 아래서 여자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담은 하나님의 씨를 받아야 할 여자인 주제에 자기 갈비뼈에서 만들어진 여자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 하며 빠져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지도 못한 생령인 아담이 동일한 “네페쉬 하야” 인 여자에게 빠져들었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죽음을 의미합니다.

 

강건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룸으로 자기의 생명을 여자에게 주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하나가 되는 것은 자기도 죽고 상대방도 죽이는 엄청난 불행을 초래하게 됩니다.

 

이건 수영도 못하는 자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고 물에 뛰어 들었다가 둘 다 익사하고 마는 것과도 같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면 내가 먼저 물에 빠지지 않을 수영 실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수영 실력을 갖추기 전에는 물에 뛰어 들어서는 안 됩니다.

 

아담이 지금 그러합니다.

자기도 생령인 주제에 생령인 여자를 맞아 들여서 가정을 꾸리고 있는 것입니다.

생령으로서는 뱀을 이기지 못합니다.

결국 둘 다 예상대로 뱀에게 잡아먹히고 만 것입니다.

 

아담이 만약에 온전한 남자였다면,

선악과를 먹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온전한 남자는 절대로 먹으면 죽을 선악과를 먹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여자라 할지라도 독약을 받아먹을 남자는 없습니다.

 

아담이 생명의 사람으로 강건하였다고 한다면 설령 자기와 함께 한 여자가 선악과를 먹고 그걸 자신에게 가지고 와서 함께 먹자고 권유하더라도 먹지 않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여자를 잃어버릴지라도 그는 선악과의 길로 빠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냉엄함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와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생명 속에 담겨져 있는 속성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세계는 때로는 냉정함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는 생명은 속성상 죽음이 닥치면 스스로 방어기재를 발동하여서 자기를 죽음으로부터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여자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은 것은 아직 아담이 그만큼 성숙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에 생명의 속성이 그 안에서 발동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담은 여자가 주는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남자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이끄는 대로 끌려간 것입니다.

 

믿음이 강건한 남자는 아무리 사랑하는 여자의 말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생명을 해치는 비진리라고 한다면 듣지 않고 따르지 않습니다.

그것이 강건한 남자의 생명의 속성입니다.

 

인정과 생명을 다릅니다.

 

아프리카의 동물의 세계를 보면 어미가 사자에게 잡혀서 죽어가는 새끼를 보고서도 달려가서 구하지 못하는 것은 인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생명의 가치 때문입니다.

새끼를 구하려다가 자기도 죽기 때문임을 알기 때문에 죽어가는 새끼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단을 따르면 절교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생명과 신앙은 동일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이단은 집에 들이지 말라고 하는 것은 진리와 비진리는 하나 될 수가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가진 성도는 비진리를 전하는 사람이 비록 부모 형제라 할지라도 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냉엄함입니다.

 

신앙은 생명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신앙도 자람의 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자라가야 할 때가 있고 다 자라서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일은 자람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믿음 안에서 남자답게 강건하게 자라가야 하는데, 전도를 한다거나 구제하며 봉사하는 일에 빠져버리는 것은 아담이 여자를 만나서 부모를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성도는 먼저 말씀을 듣고 강건해져야 합니다.

먼저 강건해지고 난 후에 구제도 하고 봉사도 하고 전도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믿음도 없는 상태에서 열심과 충성에 미치는 것은 마치 아담이 여자를 보고 빠져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건 어린 아이가 공부하지 않고 돈 벌이를 하겠다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일들이 이 시대 교회 안에서 횡행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믿음이 없음에도 일하는 것은 그 일을 통하여서 얻어지는 영광 때문입니다.

일 속에 자기 영광 즉 보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행하는 열심과 충성 속에는 자기 사랑과 자기 보람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쉽사리 놓치를 못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자기 갈비뼈로 만들어진 여자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 하여 여자에게 빠져드는 것 자체를 가지고 나쁘다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즉 성도가 열심과 충성을 한다고 해서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담이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는 것도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자기 옆에 여자가 하나 생겼다고 해서 그것으로 자신이 온전한 남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남자로 자라가는 것은 남자로 자라가는 것이고,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은 또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이 둘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아담이 강건한 남자로 자라가는 것과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다릅니다.

강건한 남자로 자라가는 것은 부모 아래서 하는 일이지만,

강건한 남자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은 부모를 떠나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부모 아래서 강건한 남자로 있을 때와,

부모를 떠나 강건한 남자로 살아가는 것은 아버지의 일과 내 일을 차이입니다.

아버지 아래 있을 때는 아버지의 일이었지만 부모를 떠나오면 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 일에는 책임이 없지만 내 일에는 책임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재벌이라고 해서 내가 재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버지가 재벌이면 자신도 재벌이라고 여깁니다.

세상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여기시지 않습니다.

 

신앙의 세계는 냉정합니다.

아버지와 나는 별개입니다.

아버지의 신앙은 아버지의 신앙이고 내 신앙은 내 신앙입니다.

내가 아버지와 같은 신앙이 될 때 아버지의 신앙이 내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아버지의 신분이 자기의 신분인줄 착각하는 현상을 일으킵니다.

이런 착시 현상이 사기행각을 벌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대통령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대통령인 것을 가지고 마치 자기가 대통령이라도 되는 줄을 알고 대통령 행세를 하다가 감옥에 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건 아담처럼 남자 구실도 못하는 자가 남자 행세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들은 약육강식의 법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에 사람의 숫자로 모든 것을 판단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숫자를 가지고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세상은 정치이든 문화이든 예술이든 종교이든 참과 거짓을 사람의 다수를 가지고 판단을 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많은 사람을 모으는 일에 혈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도 다수가 모이면 진리이고 소수가 모이면 비진리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교인들은 다수가 모인 곳에 있으면 안심이 되고 소수가 모인 곳에 있으면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목사들은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이 많으면 진리를 전한다고 큰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르자 불안해 한 것도 그들은 사람의 수에 가치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수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진리는 사람의 수와 상관없이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세계는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유유상종이라 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한 수준을 찾아서 모여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집단을 이루어서 그 속에서 안위를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 진리가 없는 자들은 큰 무리들을 거느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단들이 사람의 숫자를 힘으로 삼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힘을 믿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자신이 곧 진리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군중들이 자신의 말에 아멘 한다고 해서 그것을 진리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자기 안에 진리를 품은 사람은 사람에게 동의를 구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사람들이 추종한다고 해서 좋아하고 떠난다고 해서 낙망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사람들의 평가로 살지 않고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사람의 수에 따라 흔들리지 않습니다.

따르는 무리가 많다고 우쭐하지 않고 반대로 따르는 무리가 적다고 해서 기가 죽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의 힘은 믿음이기 때문에 외부의 조건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믿음은 외부의 조건과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는 내 안에서 믿어지는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믿어지면 믿는 것이고 안 믿어지면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어지는 사람은 믿어지는 것으로 살고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은 안에서 밀려오는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다수가 모인 곳을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숫자의 논리로 살기 때문에 숫자 많은 곳에 가면 안심을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불안감은 다수 속에 있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에 믿어지는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숫자가 많이 따른다고 하여도 원초적으로 밀려오는 불안감은 해소하지를 못합니다.

 

그 안에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는 믿음이 없으면 진리를 말하지만 정작 본인은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안으로부터 엄습하는 불안감을 없애고자 각양의 방법으로 애를 쓰게 됩니다.

그러나 그 불안감은 해소되지 않습니다.

외부적인 조건으로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하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수를 진리의 증거로 내어 놓는 자들은 모두가 진리에 속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성도는 자기 안에 증거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외부적인 환경에 희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담은 여자를 보고 첫 눈에 빠져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기를 알아주는 자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짐승들 속에 살고 있던 아담이 어느 날 자기를 이해하고 자기 말을 알아듣는 여자를 만났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니 첫 눈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을 만나면 기쁘고 신이 나서 사귐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만남도 때에 따라서는 독(毒)이 되어 자신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그 말이 진리가 아닐 때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독이 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이단과 이단이 만나서 사귐을 가진다고 해서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같음이 도리어 비진리를 진리로 둔갑을 시키는 것이 되므로 서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러합니다.

둘 다 생령의 생명으로 만남을 가졌습니다.

생령과 생령이 만나서 한 몸을 이룬다고 해서 하나님의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의 만남은 이단과 이단의 만남과 같은 것입니다.

그 속에 생명이 없는 자끼리 만났으니 결국 둘 다 죽고 만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이 복음을 전한다고 하다가 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으로 알아진 말씀 몇 자락을 가지고 마치 복음을 다 아는 냥 남을 가르치는 선생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극은 항상 선 줄로 생각하는 자들로 인하여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선 줄로 생각 하다가 망한 것처럼 지금도 교회 안에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들 때문에 망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은 아내를 사랑하지 않아서 망한 것이 아니라, 아내를 사랑한 것 때문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목사를 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 목사를 해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 복음을 전한 것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더욱 더 강건해 가야 할 사람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느라고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등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아담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강건하게 자라야 함에도 아내를 사랑하느라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일을 놓쳐버리고 만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말 한 마디를 전하여서 상대방이 그 말을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복음이 전해지는 줄 압니다.

그렇다고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이 복음이 아니란 얘기가 아닙니다.

그건 아주 중요한 내용이고 반드시 이해하고 믿어야 할 대목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신앙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예수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믿음과 지식이 자라가야 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를 더 많이 알아 가야 하는 것이고,

부르심에 소망이 무엇인지를 더 깊게 더 풍성하게 많이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삶에 의미이며 가치의 전부이어야 하는 수준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처럼 남자답게 강건해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아들의 생명을 튼튼하게 키워 가야 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간사한 궤술과 사단의 유혹과 갖가지 밀려오는 교훈의 풍조로부터 든든히 서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든든히 서 가야하는 것입니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공교하게 지은 말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화려한 언변이나 미사여구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말이 산 위의 말인지 산 아래의 말인지,

그 말이 사람의 유전에서 나온 말인지 성령의 감동으로 주어진 말인지,

그 말이 학습으로 배워서 알아진 것인지 하나님의 은혜로 깨달아서 주어진 말인지 분별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과정을 버리고 지식으로 습득이 된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복음을 전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더 알아 가야 하는 사람이 예수를 전한다는 일에 한 평생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전도와 봉사, 복음을 전하는 것)”에 파묻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짜 “하나님의 일(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은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아담이 생명과를 먹어야 하는 일은 놓쳐버리고 여자와 노는 일에 빠져들고 만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와보니 유대인들의 모습이 그러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특심한데 그 속에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사람의 유전으로 계명을 삼아서 가르치니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것은 모두가 썩을 양식을 위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을 하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요 6:27-29절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인간들이 생각하는 일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일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인 예수를 믿는 것과, 그를 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복음 전하는 일을 하나님의 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자기 식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교인들은 전도나 교회에 대한 열심과 충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과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은 다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인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을 충실히 한 사람들이 누리는 복이지 결코 일일 수는 없습니다.

 

복음 전하는 것은 예수를 믿으면 자연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일들은 예수를 믿으면 저절로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 속에 생명이 일을 합니다.

그것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도가 행하는 일들은 예수가 믿어지는 것이 너무도 기쁘고 신이 나서 그만 주체를 못하고 전도나 봉사로 섬김으로 표현을 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이 번식하게 되는 것을 기쁨으로 하게 하였습니다.

생명을 생산하는 짝짓기를 고통스러운 것으로 해 놓았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은 이미 멸종이 되고 없었을 것입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은 결코 의무가 아니며 고통이 아닙니다.

만약에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어 자식을 낳는 일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한다면 인류는 벌써 멸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번식을 위한 짝짓기 행위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해 놓았습니다.

 

짐승이나 사람이나 발정기가 일어나서 짝짓기를 한다는 것은 장성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른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신체의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강건한 남자와 장성한 여자가 되면 본능적으로 짝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이건 건강한 생명의 활동입니다.

그래서 동물이든 사람이든 발정기가 되면 열심히 기쁨으로 짝 짓기를 하여서 종족을 번성시키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가 예수를 믿는 일을 충실히 하면 믿음이 그 안에서 주체할 수 없는 일들을 일어나게 하는데 그것이 봉사나 충성이나 전도나 헌금과 같은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일에 장성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것들은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억지가 아니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아담이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이 되는 것도 아담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고 튼튼한 어른이 되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에 여자를 감당할 수 없는 남자라면 부모를 떠나 그 여자와 한 몸이 되는 것은 자신도 죽고 여자도 죽이는 것이 됩니다.

 

창세기 3장의 아담이 여자가 들고 온 선악과를 받아먹었다는 것은 그가 아직 그 여자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강건한 남자로 자라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요구와 여자의 요구를 선별할 능력이 없는 아담에게 여자는 치명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건장한 남자가 될 수가 있는 것인가요?

 

아담의 예로 보면 우선은 생명과를 먹고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야 하고, 그 다음은 강건한 남자로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더라도 그에게 알맞은 양식의 공급이 적절치 않으면 건장한 남자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씨와 양식은 동일한 무게로 중요한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가는 것도 중요한 것입니다.

둘 다 비중은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말씀을 듣고 자라가는 일을 게을리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거듭난 사람으로서의 양식을 먹고 자라가는 삶이 없으면 그는 불원간 말라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서 새사람이 되었다고 하면 이제부터는 새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말씀을 먹고 강건해져 가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마 뱃속에서 나온 아이가 엄마 젖을 먹고 건강하게 자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갓난아이의 일은 엄마의 젖을 열심히 먹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먹음)에서 나고 그 들음(먹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양식)에서 납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말씀을 먹고 강건한 자로 자라가면 봉사의 일은 자연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먹지도 않고 또한 먹은 말씀을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하고 일을 하게 되면 반드시 그 일로 인하여 부작용이 생기게 되고 급기야는 후회하게 됩니다.

 

이건 마치 어린 아이들이 용돈으로 수재의연금을 내는 것과 같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용돈을 받고 세뱃돈을 받으면 쓰지 않고 나중이 장난감을 사려고 돼지 저금통에 저금을 해 놓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홍수가 나서 TV 방송국에서 수재민 돕기 성금 모금을 하는데 엄마가 돼지 배를 갈라서 아이에게 재해 성금으로 내라고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믿음도 없는 사람이 분위기에 휩쓸려 헌금을 냈다가 아까워서 후회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나니아 삽비라”가 이들입니다.

이들은 헌금을 안 해서 망한 것이 아니라 헌금을 해서 망했습니다.

 

봉사와 충성도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이 있는 사람이 하여야지 믿음도 없는 사람이 누가 시킨다고 해서 하게 되면 반드시 후회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남이 한다고 해서 공명심으로 하게 되어도 후회하게 됩니다.

 

교회에 오기 싫은 것을 목사가 강요해서 온다고 해서 그걸 예배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 교회에 와야 하고!

왜 봉사를 하여야 하고!

왜 헌금을 하여야 하고!

왜 성도를 섬겨야 하는지를 알기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일을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행할 수 있는 강건한 남자로 자라가야 합니다.

 

섬김을 받아야 할 때는 섬김 받는 것이 신앙입니다.

반면에 섬겨야 할 때는 섬기는 것이 신앙입니다.

섬김을 받아야 할 자가 섬기겠다고 하는 것도 참람이고,

반대로 섬겨야 하는 자가 빈둥거리면서 노는 것도 참람입니다.

 

공부해야 할 아이가 학교에 가서 공부는 하지 않고 살림에 보태겠다고 돈 벌러 나가는 것도 참람이며, 회사에 출근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어른이 집 안에서 빈둥거리고 노는 것도 참람입니다.

생명의 자람에는 섬김을 받을 때가 있고 섬겨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 순서가 바뀌면 아담처럼 자신도 죽고 여자도 죽게 됩니다.

 

먼저 강건해져야 합니다.  

바울처럼 우상의 제물을 먹든 안 먹든 자유 할 수 있는 강건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가(可)하나 모든 것이 유익(有益)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할 때 자유를 자기를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여자를 다스릴 수 있으려면 여자와 차원이 달라야 합니다.

여자 앞에서 남자 구실을 하려면 여자보다 월등해야 합니다.

여자가 그 어떤 무기를 들고 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만큼 냉정해야 합니다.

더더욱 생명에 관한 문제에는 냉정하여야 합니다.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무기는 눈물입니다.

하지만 신앙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여자의 눈물을 이겨낼 수 있는 냉정함이 있어야 합니다.

성숙한 남자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냉정함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생명의 섭리에서 벗어나는 일에 대하여는 지극히 냉정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에게는 혈연도 인정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일명 수(首) 제자라고 하는 베드로도 일순간에 사탄의 자리로 내려 보낼 만큼 냉정하고 단호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인간들이 선악과를 먹자 에덴동산에서 내어칠 정도로 냉정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신앙은 인정에 매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여자가 들고 온 선악과를 먹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여자의 말에 더 귀를 기우렸기 때문입니다.

아담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여자의 말이 더 강력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여자를 다스릴 수 있으려면 여자의 눈물에 냉정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아담은 여자가 선악과를 들고 오자 그냥 먹어버리고 맙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지만 여자를 향한 인정을 끊지 못했습니다.

보통 보면 여자들이 남편을 설득할 때 눈물을 동원합니다.

여자에게 있어 눈물은 남자를 설득시키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여자가 눈물 흘리면서 말을 할 때는 여자의 주장을 들어 줍니다.

 

아담 역시 여자의 눈물에 넘어가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들고 온 선악과를 먹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이 강건한 남자가 아니라 여자와 동등한 자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아담은 여자와 함께 죽음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이 시대 교회 안에서 그대로 자행되어지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가 이렇게 타락하게 된 것은 하나님 말씀 앞에서 냉정한 남자로 살았어야 할 목사들이 여자와 같은 교인들의 눈물에 현혹되어 신앙의 기준과 원칙을 인간적인 차원으로 양보한데서 기인한 것입니다.

 

바른 말을 하면 교인들이 떠나 갈까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목사들 눈에 하나님이 보여야 하는데 교인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인본주의로 흐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말씀을 하늘에 말과 땅의 말을 혼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뱀의 말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 모두가 예수님이나 바울같이 건장한 남자가 아닌 자들이 아담처럼 남자(가르치는 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는 여자(성도)들의 발언권이 목사보다 강합니다.

여자의 발언권이 강해지고 나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이 설자리가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바울의 말을 빌리면 여자(성도)들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성도(여자)가 목사(남자)를 가르치고 다스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선악과를 먹게 되는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가 예수님처럼 강한 남자로서 가르치고 다스리려면 먼저 자신이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강하고 냉정한 남자로 자라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상을 다릅니다.   

대부분의 목사들이 교인들보다 복음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모르는 목사는 여자이지 남자가 아닙니다.

그럼 성도들을 가르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복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난 후에 강건한 남자로서 여자인 성도들을 돌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남자답게 강건해져 가는 것”과, “남자답게 사는 것”은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남자답게 사는 것은 남자답게 강건한 결과로 나타나는 일입니다.

먼저 남자답게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강건해지려면 예수님에게 붙어서 양분을 많이 섭취하여야 합니다.

생명은 먹는 것으로부터 주어집니다.

산 사람은 먹고 사는 일을 생명과 동등한 중수로 여깁니다.

강건한 남자는 그리스도에게 떨어지면 죽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을 공급 받는 일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남자답게 강건하게 사는 것만큼 남자답게 강건해지는 일을 지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세워진 초대교회를 보면 이러한 사실을 잘 볼 수가 있습니다.

교회에 성도가 많아지자 구제하는 일로 다툼이 일어나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이 때 사도들이 자신들이 해야 하는 일은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일곱 집사를 세웁니다.

 

초대교회가 구제하는 일로 다툼을 일으켰다는 것은 일하는 자들이 강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구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여서 강건한 자로 세워가는 것이 우선임을 알고 자신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기도하는 일에만 전념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교인들을 남자답게 강건한 자로 세워가고자 사도 자신들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하는 일에 올인을 한 것입니다.

사도들은 강건한 남자였기 때문에 일보다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더 사모하였던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로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공급받았던 것입니다.

 

강건한 남자는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어야지만 살아 갈 수가 있는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육신이라는 몸에 소욕을 이길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처럼 부모를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도가 지나쳐 자신이 곧 예수님처럼 산다고 합니다.

신앙을 예수처럼 살아가는 것에 맞추고 있습니다.

날마다 성령 충만을 받아서 예수님처럼 살라고 합니다.

이게 마귀의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믿을 것은 날아가 버리고 살아야(행함) 할 것만 남게 됩니다.

“행함(선악과)”에 관심을 가지면, “믿음(생명과)”에서는 눈이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귀가 노리는 노림수가 바로 이것입니다.

믿을 것(예수의 의)을 잊게 하고, 살아야 할 것(자기 의)을 붙잡게 하는 것입니다.

 

선악과가 눈에 보이면 생명과는 감추어지게 됩니다.

그럼 노는 동네가 산 아래가 됩니다.

선악과는 산 아래 있는 것입니다.

산 아래서는 생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내가 예수처럼 사는 것도 아니고 천사처럼 변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를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알고 예수님에게 붙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는 어저께 한 번 믿었으니 오늘은 안 믿어도 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죄 아래서 난 몸을 가지고 사는 한 예수는 항상 믿어야 합니다.

 

예수는 우리가 믿어야할 구주이지 본받을 스승이 아닙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은 죄인의 몸으로는 예수님처럼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 곧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확정을 해 주신 것입니다.

 

첫째도 믿음이고,

둘째도 믿음이고,

셋째도 믿음입니다.

 

생명은 생명과(예수 믿음) 속에만 있지, 선악과(성도의 행함) 속에는 없습니다.

선악과를 아무리 많이 먹었다 할지라도 영생 할 수가 없습니다.

영생은 예수라는 생명과를 먹을 때에만 얻어집니다.

 

예수님은 나는 하늘로서 내려 온 “산 떡(양식, 밥)”이라고 하셨습니다.

떡을 다른 말로 밥이라고 합니다.

밥은 날마다 먹는 것입니다.

예수는 날마다 먹어야 할 우리의 밥입니다.

 

밥은 한 끼 먹어서 평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은 날마다 끼니마다 밥을 먹어야지만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사람은 밥 먹는 것을 최고의 일로 여기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고 건강한 몸이 되어야 일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밥 먹는 것이 먼저이고 일은 나중입니다.


죄사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단번에 받은 죄사함도 있지만,

날마다 받아야 할 죄사함도 있습니다.

 

이미 이루어진 구원도 있고,

현재 이루어가야 하는 구원도 있고,

장차 이루어야 할 구원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뒤에 지난 것은 다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쫓아간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는 한 번만 믿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태어났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먹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태어남이 기쁨이고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과거 현재 미래 삼 시제로 말하는 것은 생명의 자람과 같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부모로부터 단번에 얻은 생명을 날마다 밥을 먹고 유지하며 살아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생명으로 말하는 것은 날마다 살아서 자라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갓 태어난 어린아이와 어른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아이의 몸과 어른의 몸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다릅니다.

 

어른으로 자라간다는 것은 몸이 성숙해지고 튼튼해져 간다는 말입니다.

몸이 튼튼해지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오로지 밥을 잘 먹는 것 밖에 없습니다.

 

부모는 이를 잘 알기 때문에 아이에게 밥 먹이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아서 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밥 먹는 일보다 노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여기에 부모와 아이 간에 전쟁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먹이고자 합니다.

 

산 자에게 가장 큰 일은 양식을 잘 챙겨 먹는 것입니다.

항우장사라도 굶으면 죽게 됩니다.

먹는 것이 싫고 귀찮다고 한다면 그는 중병에 걸린 증거입니다.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저께 믿음이 좋았으니 내일도 좋을 것이란 법이 없습니다.

믿음은 날마다 예수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명은 정지되지 않습니다.

정지된 생명은 죽은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정지되면 고사(枯死)하고 맙니다.

어저께 아무리 믿음이 좋았다고 하더라도 오늘 정지되면 죽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산 사람들은 믿음이 정지되지 않도록 열심히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살았기 때문에 살고자 움직이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글자 그대로 예수를 잘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예수라는 하늘에서 온 양식을 잘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광야 길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 길에 만나를 일주일 치를 한꺼번에 주시지 않고 매일매일 주십니다.

그 이유는 날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음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한꺼번에 왕창 받아 쌓아두고서 곶감 빼내먹듯이 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은혜는 저축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때를 따라 받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고 말씀 듣기를 사모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생명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성령은 성도를 독단적으로 예수님처럼 살게 하기 위하여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도리어 예수님에게 붙잡아 두고자 오셨습니다.

너희는 예수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령은 인간은 왜 예수님처럼 살 수가 없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왜 예수를 믿어야만 하는지를 알게 해 주십니다.

인간이 예수님처럼 살 수 없는 것은 죄를 이길 수 없는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살고 싶어도 살아 갈 수가 없는 것이 죄 아래서 난 몸의 한계입니다.

 

죄인은 정답을 제시해 주셔도 정답대로 살 수 없는 자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아는 자는 절대로 아담처럼 부모를 떠나서 독립하겠다고 하지를 않습니다.

아버지를 떠나는 순간 탕자처럼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남자답게 강건한 자는 야곱처럼 마마보이가 되어 부모 곁에 붙어서 살아갑니다.

에서처럼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그늘 아래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귀의 미혹에 넘어가면 남자답게 강건한 것을 마치 에서처럼 부모를 떠나 스스로의 능력으로 들에서 사냥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둔갑을 시켜서 말하게 됩니다.

 

육적으로 보면 야곱은 유약한 믿음으로 보이고 에서는 강건한 믿음으로 보입니다.

에서의 인생은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선악과와 같은 인생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와 같은 생령에게는 이게 함정입니다.

 

스스로 예수처럼 살고자 하는 자는 에서와 같고,

나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아는 자는 야곱과 같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잘 알았기에 수많은 성경을 기록하였음에도 날마다 주의 은혜를 사모하며 날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간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도 정작 자신은 버림을 받을까 염려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이건 두려워서가 아니고 자기 주제를 분명히 알기 때문에 토해낸 고백인 것입니다.

 

최고의 남자 같은 신앙을 가진 바울도 부모를 떠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늘 부모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게 강건한 남자입니다.

바울이 남자답게 강건 하라는 말은 예수님처럼 독립하여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잠시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자가 남자답게 강건한 자인 것입니다.  

 

강건한 남자는 자기 주제를 올바로 아는 자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야말로 남자답게 강건한 사람으로 자라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이고 자기에게서는 죄만 쏟아져 나온다는 것을 아는 자는 절대로 예수를 떠나고자 하지를 않습니다.

 

인간은 아담의 수준을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항상 돕는 자 안에서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인간의 본래의 자리는 마리아처럼 예수님 발 앞에 앉아서 예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을 받아먹는 것입니다.

 

죄란? 피조물이 하나님같이 되려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였습니다.

선악과의 아름다움이 주는 미혹은 피조물의 위치를 뛰어 넘어서 하나님같이 되려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빠져 들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아름다움이란? 각자의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피조물의 위치에 있고,

하나님은 하나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름다움입니다.

자기의 위치를 벗어남이 타락이고 죄입니다.  

 

바울은 안다고 하는 자는 아직까지 다 알지 못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진짜 아는 사람은 나는 아는 게 너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안다는 말을 못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강건한 남자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먹고 살아가는 종의 자리에 서서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복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부모를 떠남이 아니라 부모 아래 머물면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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