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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1~3 강해

17강. 돕는 배필이야기 (창 2:18-25)

by coroa 2020. 11. 6.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17강. 돕는 배필이야기 (창 2:18-25)

-.정낙원 목사

 

 

 

만물의 창조 목적은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서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는 것으로 예정을 하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 받은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아들들만이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낳아진 자를 말합니다.

그래서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낳고자 함입니다.

 

이를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말은 인간 쪽에서는 구원을 얻을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도 하고 하나님의 은혜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구원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아담도 구원을 받아야 하는 자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럼 아담도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가 없고 누군가가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시고자 하였습니다.

 

아담을 도울 수 있으려면 아담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어야 하는 분이라야 합니다.

아담과 같거나 아담보다 못하거나 하면 도울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시고자 한 돕는 배필에 대하여 살펴볼까 합니다.

 

창세기 1장의 사람과 창세기 2장의 사람의 창조 모습을 보면 조금 다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사람은 남자와 여자가 동시적으로 창조가 되었지만,

창세기 2장의 사람은 남자가 먼저 창조가 된 후에 여자가 나중에 남자의 몸에서 나오는 것으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의 사람은 남자와 여자가 차별이 없지만,

창세기 2장의 사람은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이 되어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사람은 말씀으로 창조가 되었지만,

창세기 2장의 사람은 흙과 생기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의 사람은 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 온전한 사람인데 반하여,

창세기 2장의 사람은 생명과를 먹어서 영생의 사람으로 한 번의 변화를 거쳐야 하는 사람으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성경의 순서는 창세기 1장아 먼저이고 창세기 2장은 나중이지만 실제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것은 창세기 2장의 사람이 먼저이고 창세기 1장의 사람은 나중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2장의 흙으로 창조가 된 사람은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난 사람을 겨냥하여서 창조가 된 사람인 것입니다.

 

이를 순서적으로 말하면 창세기 2장의 흙으로 난 사람이 먼저 창조가 되어서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사람이 될 때 비로소 창세기 1장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의 사람과 창세기 2장의 사람은 다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흙으로 난 사람이 생명과를 먹고 한번은 거듭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를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이 뭔가요?

흙에 속한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흙으로 난 사람이 먼저이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듭난 사람은 나중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은 인류의 조상입니다.

아담을 존재케 한 것은 창세전 언약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먼저이고 아담의 창조가 나중인 것입니다.

 

창조라는 말은 어떤 원인에 의하여 나타난 결과라는 뜻입니다.

 

원인이 먼저 있고 결과가 나중에 있는 것입니다.

창조가 있기 전의 원인이 창세전 언약이고 결과가 천지창조인 것입니다.

 

언약이 먼저이고 창조가 나중인 것입니다.

창조는 언약을 위한 것입니다.

만물의 존재 목적은 창세전 언약을 위한 것입니다.

 

아담의 창조 목적도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다스려 가십니다.

창세전 언약을 알면 아담이 왜 버려짐을 당하였다가 다시 찾아짐을 당하게 되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아담의 길을 걷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모든 사람의 대표가 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길을 민족적으로 보여준 것이 구약의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을 일컬어 언약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후손(後孫)이라는 말은 나중에 태어난 자손이라는 뜻입니다.

후손을 존재케 한 것은 조상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15장을 봅시다.

 

창 15:1-21절.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8.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11.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12.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 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9.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20.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21.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람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십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언약을 하십니다.

 

언약의 내용은 그 후손과 땅에 관한 것입니다.

 

아브람이 언약을 맺을 때 자식이 하나도 없을 때입니다.

그런데 네 후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후손들이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4대만에 이곳으로 돌아 올 것이라고 합니다.

400년 동안 이방나라에서 고난을 당하다가 돌아오게 된다고 합니다.

 

이 일을 보증으로 하나님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십니다.

하나님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간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 약속은 하나님 홀로 지켜내시겠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 내시겠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이라는 큰 민족이 되어서 400년 후에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으로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살아나서 출애굽을 하게 됩니다.

언약이 먼저이고 구원이 나중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에 의하여 생겨난 민족입니다.

그래서 언약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언약의 후손이라는 말은 아브라함 언약이 먼저이고 이스라엘이 나중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에 종속이 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존재케 된 것은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언약이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사대 만에 돌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되찾아짐을 당하는 수순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수순대로 이스라엘을 다루어가십니다.

이를 언약적 구속사라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구원 하는 구속사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창세기 1장에 담아 놓았습니다.

창세기 1장은 성경 전체의 순서를 말해주는 목차와 같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구원이 이루어지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목차 속에는 책의 모든 내용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책 속의 내용은 목차의 순서대로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목차는 언약과 같은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언약과 같고 창세기 2장은 후손과 같은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설계도와 같고 창세기 2장은 설계도를 현실 속에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을 만물이 주로 말미암아 나왔고 주로 인하여 살다가 주께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일곱째 날을 구조적으로 말하면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이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 이후부터 요한계시록 22장까지의 내용들은 창조의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일곱째 날 안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엿새 속에 속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을 하시면 모든 창조가 완성이 되고 일곱째 날이 되어서 하나님의 안식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역사도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로 진행되는 것으로 나아가지만,

성도들이 구원도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로 나아가는 것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각각의 구원이 차이가 있습니다.

 

성도의 구원도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심층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첫째 날을 지나고 있고,

어떤 사람은 둘째, 셋째 날을 지나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넷째, 다섯째 날을 지나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여섯째 날을 지나 일곱째 날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일곱째 날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도 일곱째 날 안식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안식을 하려면 모든 일을 다 마쳐야 합니다.

 

구원을 자동차가 완성되는 것으로 비유를 해 봅니다.

 

자동차가 완성품으로 나오기까지는 각각의 공정을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맨 처음 컨베여 벨트에 후레임(틀)이 쭈욱 올려집니다.

그리고 각각의 공정을 지나면서 하나 둘씩 부속품들이 채워지게 됩니다.

공정을 지나면서 희미하던 것이 점점 그 모습을 드러내고 급기야 완성품으로 나오게 됩니다.

 

아담은 동산에 있고 하나님은 에덴에 계십니다.

아담이 동산에서 해야 하는 일은 흙으로 난 사람이 동산에서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사람으로 거듭나서 하늘을 상징하는 에덴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아담은 동산에 주소지를 두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럼 동산에 있는 아담은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어서 하나님이 계신 아버지 집으로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서 영원히 일곱째 날 안식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에덴과 동산은 구별된 다른 세계임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 8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라고 합니다.

그리고 10절에서는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8절을 보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만드셨다고 합니다.

10절에서는 에덴에서 생명수 강을 동산으로 흘러 보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동산 보다 에덴이 더 풍성한 세계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동산은 에덴에서 흘러 보내 주는 생명수 강으로 각종 생명을 풍성하게 자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동산은 에덴에서 흘러 보내 주는 물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이는 동산은 에덴 보다 낮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에덴에서 발원한 물이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네 근원으로 갈라져서 동산 바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위치적으로 보면 에덴이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있고,

아담이 살아가는 동산이 중간에 있고,

세상은 맨 아래가 되는 것입니다.

이 구조를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그대로 세팅을 해 놓았습니다.

 

에덴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고,

선악과와 생명과가 있는 동산은 교회를 상징하고,

동산 바깥은 교회 밖 세상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이 3층이고,

동산은 2층이고,

세상은 1층인 것입니다.

 

3층에서 2층으로 생명수를 흘러주면 2층은 1층으로 흘러 보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2층이나 1층은 3층에서 흘러오는 생명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1층은 2층에 종속이 되어 있고 2층은 3층에 종속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은 3층인 것입니다.

 

구원이란? 1층에서 2층을 거쳐서 3층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중간에 있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을 세상에 흘러 보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일컬어 만대로부터 감추인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곳이라고 합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워진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교회에 주셨고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비밀들을 세상에 알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에덴에서 강이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사방으로 흘러가는 것으로 말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2장의 에덴과 동산과 동산 바깥 사방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하나님께서 역사 세계 속에서 펼쳐가는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창세전 언약을 보여주는 그림 언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우리가 무슨 일을 하여야 하는지 알려달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영생하는 양식을 얻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예수 믿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가 하나님 나라로 갑니다.

아담도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아야 할 자입니다.

 

아담은 동산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과를 먹는 것입니다.

아담이 동산에서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는 것은 신약적으로 말하면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아담이 동산에서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어서 영생하시는 하나님이 계신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이나, 제자들이 하늘로서 온 생명의 떡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영생하는 자가 되어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올라가는 것이나 동일한 것입니다.

 

동산을 히브리어로 "간" 이라고 합니다.

이는 "울타리"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동그라미 양궁의 점수판 그림으로 그리면 맨 가운데가 에덴이고, 에덴을 둘러싼 중간 동네가 동산이고, 동산 바깥은 이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 동산이 있고,

동산 속에 에덴이 있는 것입니다.

에덴이 핵으로 있는 것입니다.

마치 과일 속에 씨처럼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구원의 서정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던 자들을 교회로 부르시고,

교회 안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하여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데리고 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고자 함입니다.

 

우리는 독자적으로 하나님 나라로 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에서 오신 분의 인도에 의해서만 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나님 나라에서 말씀으로 계시던 그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그림으로 보면 동산에 있는 아담은 에덴으로 가려면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에덴에서 오신 누군가를 통해서만이 동산에서 에덴으로 올라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그려놓은 구원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그려 놓은 구원의 비밀들을 이 세상에 확대하여서 펼쳐 가십니다.

그것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이 세상이 창조가 된 것입니다.

세상 역사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구속사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만물이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고 증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골 1:13-17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서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그가 누구인고 하니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고 합니다.

그가 바로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그 아들 안에서 구속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짧은 구절 속에 “그” 를 아홉 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가 인간을 만드신 분이고,

“그” 가 생명을 주신 분이고,

“그” 안에서 만물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는 그가 만물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를 품은 사람은 산 사람이고,

그를 품지 않은 사람은 죽은 자입니다.

 

신앙이란? 그를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가 빠진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고,

그를 소유한 인생은 성공한 인생인 것입니다.

그 안에는 생명이고, 그 밖에는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흙인 아담에게 그(생명과, 예수님)를 먹고 영생의 사람이 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아담에게 있어 구원이란? 동산에 있는 그(생명과)를 먹어서 영생하는 사람이 되어서 에덴으로 올라가서 영생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안식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모든 인간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그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 이신 예수님의 인도하심 없이는 아무라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나아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이 사실은 영원토록 변치 않을 “진리이며”,

이렇게 그 예수를 통하여서 얻어진 생명만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참 “생명”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동산에 두신 목적은 그(생명과)를 먹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제일 먼저 생명과를 먹을 것을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아담은 제일 먼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었어야 합니다.

 

창 2:16-17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히브리어 동사(動詞)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형태의 칼(Qal) 동사와,

강조형의 피엘(Piel) 동사와,

사역형의 히필(Hiphil) 동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령한 “명하여” 라는 동사는 강세형인 “피엘 명령법”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생명과는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먹어야 하고,

반대로 선악과는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명하여”는 아담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의무사항입니다.

이것은 후대에 율법으로 “하라”와 “하지 말라”는 명령법으로 나타납니다.

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강세형으로 말씀 하셨을까요?

이는 죽고 사는 문제로 직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령인 아담에게 두 나무의 속성을 알려 준 것은 너는 "생령"으로 있어서는 안 되고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사람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려 준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이 영생하는 사람이 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돕는 배필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창 2:18절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명과와 선악과에 대한 정보를 알려 준 뒤에 돕는 배필을 주고자 하십니다.

“돕는 배필”이란? 히브리어로 "에제르 네게드"라는 하는데 이 말은 곁에서 도와주는 조력자를 뜻합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보혜사(another helper)"라고 합니다.

보혜사는 "돕는 자"(helper)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시겠다고 한 것은 아담이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영생의 세계로 나아갈 만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아직까지 영생하는 자가 아닙니다.

영생 하려면 생명과를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동산에는 뱀도 있습니다.

 

아담 속에서 나온 여자가 뱀의 미혹에 넘어간 것을 보면 아담 역시 뱀으로부터 자유로운 몸이 아닌 것입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지혜롭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뱀이 피조물 중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뜻입니다.

그럼 뱀은 아담보다도 더 지혜롭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고자 하신 것은 뱀의 미혹으로부터 지켜주고자 하심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아담을 뱀으로부터 지켜줄 돕는 배필은 뱀보다 더 지혜로운 자라야 합니다.

 

알다시피 아담은 동산에서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어서 에덴으로 나아가야 할 자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생명과를 먹기 전의 아담은 아직까지 영생에 관하여는 미숙한 자입니다.

이는 아담이 여자가 들고 온 선악과를 먹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아담의 곁에서 도와주어야 영생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담은 아직까지 영생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죽음의 심각성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은 아담에게 무미건조한 말씀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벼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부모가 공부해라 그래야 나중에 고생하지 않는다고 하면 아이들은 고생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부모의 말을 경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경험되어지지 않는 것은 가볍게 여깁니다.

그러나 경험이 될 때는 이미 늦은 때입니다.

 

아담이 그러합니다.

영생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를 경험이 되어진 지식이 없으므로 아담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은 가벼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들고 온 선악과를 주저함 없이 먹은 것입니다.

 

진정으로 아담이 영생에 관하여 죽음에 관하여 아는 자였다고 한다면 아무리 자기 갈비뼈로 만든 여자이지만 그 여자가 주는 선악과를 먹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아담이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게 된다는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도 여자가 주는 선악과를 망설임 없이 먹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죽는 것과 영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돕는 배필"을 주시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담은 스스로의 판단에 돕는 배필이라고 생각하였던 자기 몸에서 나온 여자 때문에 반드시 먹어야 하는 생명과는 먹지 않고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되는 선악과는 먹고 죽은 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결과론으로 따진다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준 여자는 아담에게 돕는 배필이 아니라 죽음으로 이끄는 저승 사자였던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준 것이 아니라 저승사자를 준 것일까요?

 

만약에 하나님이 여자를 아담의 돕는 배필로 주셨다면 하나님이 아담이 범죄하도록 도와준 장본인이 되고 맙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책임을 추궁 당할 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여자 때문에 먹었다고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는 내용을 보면 기실 아담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시고자 한 돕는 배필이 여자가 아니고 따로 준비해 두셨는데 아담 스스로가 여자를 돕는 배필로 받아 들였다면 이는 아담의 범죄는 아담에게 있는 것이지 하나님에게 원인을 물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 가운데 인간이 먹어서는 안 될 독버섯도 있고 식용 버섯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버섯을 인간이 먹도록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먹고 죽었다고 하여서 그 죽음을 하나님께 돌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피조물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들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인간을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에 의한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 세계에 필요하여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피조물 중에는 인간에게 해악을 주는 것들이 수없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독버섯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인간이 먹어서는 안 될 독버섯을 먹고 죽으면서 하나님은 왜? 이런 독버섯을 만들어 놓았느냐고 원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나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한 것을 왜? 먹었느냐! 라고 책망하신 것을 보면 아담에게 선악과는 먹어서는 안 되는 독버섯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선악과라는 독버섯을 먹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왜? 먹지 말라는 것을 먹어 가지고 속을 섞이느냐!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창 3:11절.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선악과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치명적인 독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고 경고한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은 결과는 참혹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죽음의 세계로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긴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죽음에 떨어지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것은 모두가 아담의 잘못으로 인하여 기인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저지른 죄를 하나님께 전가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돕는 배필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담이 누구를 돕는 배필로 삼느냐에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기도 하고 땅으로 내려가기도 합니다.

아담이 하늘로 올라 가고자 한다면 하늘로서 온 사람을 돕는 배필로 두어야 할 것이고,

아담이 땅에 머물고 살려면 땅에서 난 사람을 돕는 배필로 두어야 할 것입니다.

아담이 어디를 지향하느냐에 따라서 돕는 배필이 달라집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시고자 한 돕는 배필을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짐승을 만드시고 아담 앞으로 데리고 옵니다.

그러자 아담이 각 짐승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면서 그 속에서 돕는 배필을 정하지 않습니다.

 

이에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는 아담의 갈비뼈를 하나 취하여서 여자를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 여자를 아담 앞으로 이끌어 오십니다.

그러자 아담은 앞서 짐승을 대하는 것과는 다르게 대합니다.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하면서 끌어당깁니다.

아담은 자기 몸에서 나온 여자를 돕는 배필로 정하고 맙니다.

 

아담이 여자를 돕는 배필로 정하자 하나님은 더 이상 주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담에게서 나온 여자는 뱀의 미혹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먹고서 그것을 아담에게 주어서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고 맙니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아담은 여자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일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고자 한 것은 하늘로 데리고 오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자면 아담은 하늘로서 오신 분을 돕는 배필로 맞이하여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아담은 자기 몸에서 나온 여자를 돕는 배필로 맞이함으로서 죽은 자가 되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흙에 가두어지는 일을 당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산에서 살아가는 아담에게 주고자 하신 돕는 배필은 하늘로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한 돕는 배필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담이 자기 몸에서 나온 여자를 돕는 배필로 맞아 하였습니다.

아담이 자기 몸에서 나온 여자를 돕는 배필로 맞이하여서 망한 것이라면 그것은 어디까지 아담의 잘못이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여자를 돕는 배필로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스스로 여자를 돕는 배필로 맞아들인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시고자 한 돕는 배필은 과연 누구였는지를 아담과 여자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들을 탐사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과연 그러한가를 성경을 통하여서 살펴봅시다.

 

창 2:18-23절.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신다고 하고선 흙으로 각종 짐승들을 만들어서 아담에게 끌고 왔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짐승들을 돕는 배필로 맞이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나중에 하나님이 데리고 온 여자를 보고서 "이는 배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반가워 한 것과는 너무도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아담은 짐승들을 보고 대뜸 그들의 본질을 알아차리고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아담이 짐승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말은 아담이 짐승들보다 높은 차원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흙으로 만든 짐승들을 아담의 돕는 배필이 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담이 짐승을 척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담의 본질이 짐승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짐승들은 흙이라는 재료로만 지음을 받았지만,

아담은 흙과 생기라는 재료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흙이 재료의 전부인 짐승은 흙 밖에 모르지만 아담은 흙에다 생기를 부여받았습니다.

아담은 생기라는 "니스마트 하임"이 제공해 주는 정보로 생명의 기운을 알아보는 능력은 짐승보다 월등하게 나았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하나님이 데리고 온 짐승들을 돕는 배필로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20절.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0절의 말씀을 보면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라고 하곤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담이 짐승에게서 돕는 배필을 찾지 못하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돕는 배필을 주시겠다고 하시곤 흙으로 짐승들을 만들어 아담에게 가지고 왔지만 아담은 짐승들 속에서 돕는 배필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아담의 눈에는 짐승들은 한 수 아래 열등하게 보였기 때문에 거부한 것입니다.

아담이 짐승을 돕는 배필로 받아들이지 않자 하나님은 이번엔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는 여자를 아담 앞으로 데리고 옵니다.

 

21-23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아담이 하와를 보자 대뜸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 하며 반색을 합니다.

앞서 짐승을 데리고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나타냅니다.

아담은 짐승들을 볼 때는 소 닭 보듯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자를 보고선 한 눈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아담은 주저함도 없이 대뜸 여자를 돕는 배필로 맞이하였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보고 기뻐한 것은 하와 자신이 곧 아담의 뼈와 살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빠지고 만 것입니다.

 

아담이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은 결국 자기 수준에 만족한 것입니다.

아담이 여자가 주는 선악과를 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유유상종이라 합니다.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시고자 한 것은 아담이 자기 수준을 벗어나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심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여자에게 넋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아담은 생명과를 먹고 더 완전한데로 나아가야 할 자입니다.

그럼 아담의 몸에서 나온 여자는 아담의 수준이므로 아담에게 돕는 배필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담은 자기가 가야할 길은 망각하고 여자 속에 비췬 자기 모습을 보고 나르시즘에 빠져서 갈 바를 잊고 만 것입니다.

 

아담이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두어서 자신은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어 에덴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였다면 자기 몸에서 나온 여자 역시 돕는 배필로서는 합당치 않은 자로 여겨야 했었습니다.

아담이 만약 여자마저도 돕는 배필로 인정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다른 돕는 배필을 보내 주셨을 것입니다.

 

돕는 배필이란? 글자 그대로 돕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아담이 어느 길로 가느냐에 따라서 돕는 배필이 달라지게 됩니다.

여자가 창조 될 때의 시점을 보면 여자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와 생명과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난 후에 만들어졌습니다.

 

창조의 순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먼저 만드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와 생명과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난 후 돕는 배필을 주시겠다고 하시고는 흙으로 짐승을 만드십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만든 짐승을 아담에게 데리고 오자 아담이 거절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십니다.

 

그리고 앞서 짐승을 아담 앞으로 데리고 왔듯이 여자를 아담 앞으로 데리고 옵니다.

여자를 본 아담은 짐승을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기뻐하면서 너는 내 짝이라고 하면서 끌어당깁니다.

아담이 여자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하면서 끌어당기니까 하나님은 물끄러미 바라만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담이 좋다고 하는데서야 하나님도 어찌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아담은 여자를 만나고서는 하나님을 떠나버립니다.

하나님도 그래 그럼 너희들끼리 잘 잘아보라고 하시고 떠나십니다.

 

생명과를 먹고 영생해야 하는 아담에게 있어서는 아담보다 늦게 창조된 여자는 선악과와 생명과에 대한 정보를 아담보다 더 알지를 못합니다.

하와가 선악과와 생명과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은 기껏해야 아담으로부터 들어서 알게 된 정보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선악과와 생명과에 대하여서는 아담이 하와에게 돕는 자이지 하와가 아담에게 돕는 자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자가 돕는 자가 되려면 아담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담 몸에서 나온 여자는 아담 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아담에게 배워야 할 자입니다.

그럼에도 아담은 자기 몸에서 나온 여자를 돕는 배필로 맞이하고서는 하나님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인류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돕는 배필은 글자 그대로 돕는 자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로 돕느냐 입니다.

하늘로 가는데 돕느냐?

아니면 땅으로 가는데 돕느냐 입니다.

 

아담이 어디를 지향하느냐에 따라서 하와가 돕는 배필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담이 만약 "네페쉬 하야" 라는 "생령"으로 흙에 머물러서 살고자 한다면 하와는 아담과 동격이므로 얼마든지 말동무가 되며 돕는 배필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어서 하나님이 계신 에덴(하늘)으로 나아가야 한다면 여자는 돕는 배필이 될 수가 없습니다.

여자는 에덴으로 가는 길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에덴으로 가려면 에덴의 길을 아는 사람을 돕는 배필로 두어야 합니다.

 

이것은 지금도 성도들에게 유효하여 나타납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생명과를 먹고 하늘이라는 에덴으로 나아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럼 하늘로서 온 사람이라야 돕는 배필이 될 수가 있습니다.

땅에서 난 자들에게는 돕는 배필이 없습니다.

 

만약에 성도가 세상을 지향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돕는 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이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이 세상에 대하여 더 잘 안다는 뜻입니다.

 

내가 만약 세상에서 성공하여서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둔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이 돕는 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세상을 떠나 하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인생의 목적을 두고 살아간다고 하면 하늘로서 오신 분을 돕는 자로 두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본다면 세상 사람들은 흙에서 난 짐승이고 성도는 하늘로서 난 사람입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합니다.

어떤 친구들과 사귀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도가 세상 사람들과 사귐을 가진다고 하면 그 마음에는 세상 왕인 가이사의 화상이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화상이 그려진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사귐을 가지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으로 끌고 가지 하늘로 끌고 가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놓쳤기 때문에 아담과 같이 망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면서 그 땅 사람들처럼 애굽의 풍속을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애굽의 풍속으로 살면 그 땅에서 토하여짐을 당할 것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 거민들의 풍속을 쫓아가고 맙니다.

그 땅 거민들의 풍속을 본 받고서는 그 땅도 그들을 용납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여도 그 땅의 속성에 맞지 않으면 토해 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을 당하였듯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남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 살던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빼내십니다.

그리곤 가나안에서 하늘에 있는 한 성을 보여주십니다.

 

히 11:8-16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시고자 약속하신 땅이 바로 저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그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조상 아브라함처럼 가나안 땅에서 하늘에 있는 본향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건 마치 아담이 동산에서 에덴으로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가나안 원주민들과 어울리면서 살아갑니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만 바라보고 살아가고자 하였다면 가나안 원주민들은 얼마든지 돕는 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보이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살 자들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본향을 바라보고 살아야 할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가나안이라는 땅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가나안 원주민들을 돕는 자로 두었던 것입니다.

 

뱀의 후손들은 땅의 기운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므로 땅에 대하여는 전문가들입니다.

이스라엘은 땅에 대하여 전문가인 가나안 거민들을 돕는 자로 두었기 때문에 땅을 벗어나지 못하고 만 것입니다.

결국 가나안 원주민들이 이스라엘을 땅에 붙잡아 두는데 돕는 배필이 되어서 땅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만 것입니다.

 

가나안 원주민은 우상을 섬기게 하는 데에는 돕는 자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는 해로운 존재들이고 옆구리의 가시와 같은 발목을 잡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가나안에 들어가거든 가나안 백성들을 한 사람도 살려두지 말고 다 쫓아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가나안 거민들을 자기 집 머슴으로 삼아서 그들의 도움을 받고 살았습니다.

결국 그들의 도움으로 살다가 약속의 땅에서 토해냄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지금도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땅에 것은 버리고 위엣 것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땅의 지체를 죽이라고 합니다.

땅에 속한 자들과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교회 안에서도 잘 보시면 교인들은 믿음이 좋은 사람들의 말을 듣기보다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말을 듣기를 좋아합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의 말을 듣기 보다는 세상적인 매력을 가진 자들의 말을 듣습니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쉬운 예로 짝 가정이 있다고 합시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남편이나 혹은 믿지 않는 아내와 산다고 합시다.

그러면 당연히 예수를 믿는 자는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 앞에서 천국으로 인도하는 돕는 자 노릇을 하여야 합니다.

 

신앙적인 면에서는 믿지 않는 자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그들을 예수 앞으로 인도하는 돕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상에선 정반대로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남편이나 아내의 말을 듣고 세상에 푹 빠져서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례들을 수없이 볼 수가 있습니다.

믿음에 퇴보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담이 여자의 말을 듣고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과 같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냉정함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는 인정이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인정이라는 무기로 나오더라도 신자는 신앙적인 면에서는 냉정하여야 합니다.

 

죄인은 생명의 길을 가기보다는 사망의 길을 좋아합니다.

생명의 길은 좁고 협착하기 때문에 싫어하고 사망의 길을 크고 넓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많은 사람이 간다고 하여서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그리 하면 안 됩니다.

 

아담이 만약 하나님의 명령을 귀담아 두어 자신은 영생하는 자로 한 번의 거듭남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면 여자가 들고 온 선악과를 먹지 말았어야 합니다.

비록 자기 몸에서 나온 자라 할지라도 돕는 배필로 두어서는 안 되고 앞서서 짐승들을 대하듯이 대했어야 했습니다.

 

그랬으면 하나님이 다른 돕는 배필을 주셨을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영생을 아는 자를 돕는 배필로 달라고 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시고자 했던 돕는 배필은 아담 "앞에서 돕는" 존재였습니다.

동산에서 살아가는 아담에게 있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곳은 에덴을 말합니다.

 

짐승이나 여자는 아담 보다 한 수 아래입니다.

아담이 만약에 동산에 머물러 살거나 흙의 기운으로 살고자 하였으면 짐승이나 여자가 돕는 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생명의 세계인 에덴으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자라고 한다면 이것은 돕는 배필이 아니라 해악을 주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짐승은 아담의 "뒤에서" 도울 수 있는 존재이고,

아담의 "옆에서" 아담을 도울 수 있는 존재입니다.

둘 다 아담이 에덴으로 나아가는 데에는 걸림돌인 자들입니다.

아담이 여자를 돕는 배필로 둔 이상은 아담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 갈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생령인 "네페쉬 하야" 수준에 머물게 될 뿐입니다.

 

아담에게 필요한 돕는 배필은 흙으로 살기 위한 짐승도 아니고, 동산에서 생령으로 살기 위한 여자도 아닙니다.

아담에겐 오직 아담의 앞에서 영생의 세계로 이끌어줄 돕는 배필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하여 준비해 둔 돕는 배필은 어떤 분일까요?

 

구약의 시편 기자는 여호와가 돕는 배필이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115:9-11절.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10.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11.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에게 들으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라고 합니다.

그가 너희를 도우실 분이라고 합니다.

시편은 여호와가 아담의 돕는 배필이라는 사실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를 말합니다.

네페쉬 하야인 아담을 생명의 세계로 이끌어 줄 돕는 자는 구원자라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생령인 아담은 한 번의 거듭남을 통하여 구원을 받아야 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담은 여자를 돕는 자로 둔 결과 여호와의 도움을 입지 못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내 보내면서 돕는 자를 보내주시기로 약속을 합니다.

 

그가 바로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데리고 올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담이 에덴동산으로 돌아오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이끌고 갈 도울 분을 보내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주실 보혜사는 누구인가요?

 

요 15:26절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요 14:16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혜사를 보내주신다고 합니다.

그 분이 누구인가 하면 진리의 성령이십니다.

진리의 성령은 아버지에게 나오시는 분인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내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합니다.

 

신약에 와서 보니까 하나님이 아담을 위하여 준비하신 "돕는 배필"은 바로 "진리의 성령"이셨던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만이 아담을 영생의 세계로 인도할 돕는 배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림을 잘 그려보세요.

 

창 2:7-8절.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8. 야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이라는 곳에 동산을 마련하시고 당신께서 빚어 만드신 사람을 그리로 데려다가 살게 하셨다.”(공동번역)

 

하나님이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십니다.

그리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니까 사람이 숨을 쉬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진흙으로 빚은 사람을 동쪽에 있는 에덴이라는 곳에 동산을 마련하시고는 사람을 그리로 데려다가 살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지음을 받은 곳은 에덴동산 밖입니다.

에덴동산 밖에서 사람을 지으시고 에덴이라는 곳의 동산으로 데리고 와서 살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면 구조적으로 보면 3 동네가 됩니다.

 

에덴동산 바깥 동네와, 동산과, 에덴이 있는 것입니다.

 

이걸 신약적으로 해석을 하면 에덴동산 바깥 동네는 이 세상을 말합니다.

그리고 선악과와 생명과가 있는 동산은 교회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교회로 부르시고 예수라는 생명의 떡을 먹게 하여서 하늘나라로 데려 가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동산에 뱀이 있었듯이 교회 안에도 마귀의 종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두 과실이 있습니다.

두 과실은 두 언약으로 나타납니다.

교회 안에는 붙잡으면 죽은 율법이라는 옛 언약과 붙잡으면 영생하는 은혜라는 새 언약이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라는 새 언약을 붙잡으면 산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새 언약을 붙잡을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를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돕는 베필인 보혜사로 보내서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믿음으로 살도록 돕게 하셨습니다.

 

성령이 보혜사가 되어서 창세로부터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어서 영생 받기로 작정이 된 자들 안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믿어지게 하십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은 하늘나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누구라도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 시인 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어지게 해 주지 않으면 인간은 예수를 믿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을 보혜사로 보내서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게 하는 일을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성령이 돕는 배필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흙에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나서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나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이 동산에서 생명과를 먹고 에덴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아담에 에덴으로 나아가려면 에덴에서 오신 돕는 분에 의해서만이 갈 수가 있습니다.

 

하늘로서 온 자 이외는 하늘로 가는 길을 아는 자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로 가셔서 성령을 자기 백성들에게 보혜사로 보내 주신 것은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로 가는데 "길잡이"(돕는 배필)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흙에서 지음을 받은 짐승이나 아담 안에서 나온 여자는 에덴으로 가는 길을 모릅니다.

에덴으로 가는 길을 알 수가 없으므로 당연히 짐승과 여자는 아담의 길잡이가 될 수가 없습니다.

에덴의 길은 오직 에덴에서 오신 분만이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분이 누구인가?

바로 “진리의 성령”인 것입니다.

이제는 "진리의 성령"이 성도들을 영생의 세계로 인도할 "돕는 배필"로 계신 것입니다.

 

교회는 동산과 같습니다.

교회 안에는 에덴동산에서와 같이 먹으면 죽을 과실이 있고, 먹으면 영생할 과실이 있습니다.

과실이 의로 나타났습니다.

언약으로 나타났습니다.

 

붙잡으면 "죽을 의"가 있고,

붙잡으면 "살아나는 의"가 있습니다.

“인간의 의”를 붙잡으면 죽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으면 삽니다.

 

붙잡으면 죽는 언약이 있고, 붙잡으면 살 언약이 있습니다.

붙잡으면 죽는 언약은 율법으로서 옛 언약이고,

붙잡으면 살 언약은 은혜로서 새 언약입니다.

 

인간의 의가 가득한 “옛 언약”을 붙잡으면 죽고,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가득한 “새 언약”을 붙잡으면 삽니다.

 

동산에서는 뱀이 선악과로 미혹하였지만,

지금은 마귀가 교회 안에서 율법으로 미혹을 합니다.

인간의 의로 미혹합니다.

 

율법 속에는 인간의 의가 있습니다.

인간의 의는 선악과처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로울 만큼 탐스럽습니다.

율법 신앙은 인간의 가치를 챙겨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입니다.

 

율법 신앙은 인간의 자랑거리로 가득합니다.

자기 영광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율법 신앙을 쉽게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 입장에서 인간의 자랑거리로 가득 찬 율법 신앙을 버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속성상 본능적으로 율법 신앙을 선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 신앙에는 내 피와 땀과 노력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자기 백성들에게 돕는 배필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성도들 앞에서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믿어지게 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신이 되고자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하늘나라로 올라가고자 합니다.

그것이 바벨탑 사건으로 나타났습니다.

인간의 의가 바벨탑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바벨탑을 허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물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들 안에서 인간의 의를 허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인간의 의를 기각시키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붙잡도록 돕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와 인간의 의는 빛과 어둠처럼 하나 될 수가 없습니다.

서로 충돌을 일으킵니다.

인간의 의와 예수그리스도의 의는 서로 배척하고 밀어내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를 붙잡으면 예수그리스도의 의는 사라지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으면 인간의 의는 사라지게 됩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의를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자기 몸에서 나온 여자를 보고 한 눈에 반해 버렸듯이 인간들도 자기가 만들어낸 행함이라는 의를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사랑으로 가득한 인간들은 자기가 한 일은 모두 선이라 생각하고 옳다고 정당성을 주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한 일에는 자기 영광이 가득하기 때문에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성도들에게 성령을 돕는 배필을 주시지 않으면 성도 역시 자기 것에 빠지고 맙니다.

성령이 아니면 자기 의를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성령이라는 돕는 배필을 주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성도들의 돕는 배필이 되어서 인간의 의를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붙잡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영원토록 성도 안에서 함께 하시면서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든든한 돕는 배필이 계시므로 성도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을 우리 안에 돕는 배필로 내주케 하신 것은 인간은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아담은 돕는 배필을 잘못 두어서 실패 하였지만,

신약의 아담인 성도들은 진리의 성령이신 하나님을 돕는 배필로 두어서 실패하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을 봅시다.

 

롬 8:33-39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고 증거해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간구하고 계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이 성도들 안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선악의 법으로 늘 참소합니다.

인간의 행함을 가지고 참소합니다.

선악이라는 프레임에 걸려들면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하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로 정죄합니다.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라는 선악의 프레임에 걸려들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정죄함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성도 안에 성령이 돕는 배필로 계시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으냐 안 살았느냐 라는 선악의 프레임에 걸려들어서 자기 행위로 인한 정죄함에 빠져서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성도 안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으냐 안 살았느냐 라는 선악의 프레임에 빠지지 말고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 안에 머물게 하는 일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인류의 저주는 돕는 배필을 잘못 두어서 일어났습니다.

또한 죄인의 구원은 돕는 배필을 통하여서 주어지고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돕는 배필 때문에 망한 것을 돕는 배필로 인하여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이 끊어질 수 없는 것은 진리의 성령을 돕는 배필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진리의 성령이 돕는 배필로 와 계신 성도는 자기 의로 살지 않고 예수그리스도 의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 의를 붙잡고자 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쫓아가고자 합니다.

보이는 세상의 것을 쫓아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보혜사가 되어서 자기 의를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게 하시고,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못 박게 하십니다.

하늘에 신령한 것을 쫓아가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실패할 수 없는 것은 성령이 보혜사가 되어서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어떠함을 보지 마시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믿음으로 감사하면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나는 누구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는가요?

 

고후 13:5절.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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