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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1~3 강해

15강. 에덴동산의 두 과실 & 독과 약 이야기

by coroa 2020. 10. 30.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15강. 에덴동산의 두 과실 & 독과 약 이야기

-.정낙원 목사

 

 

 

만물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펼쳐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이라는 만물을 가지고 펼쳐 가시는 것은 창세전에 예정하신 언약입니다.

이를 창세전 언약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창세기의 구조를 살펴볼 때 1장은 역사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7일 창조 속에 담아 놓았다는 것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은 성경 전체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의 목차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3장은 역사 속에서 펼쳐지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구속사를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와 뱀을 가지고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 속에서 하와가 나와서 뱀의 미혹으로 죄 아래 가두어지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한 수치를 가리기 위하여 흠 없는 짐승을 잡아서 가죽 옷을 입혀주신 이야기는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은 모티브로 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에덴동산도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창세전 언약과 연관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에덴동산에 있는 네 강이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도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는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오늘은 에덴동산의 두 과실에 대하여 살펴볼까 합니다.

 

에덴동산에는 두 과실이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맺는 나무와 영생을 주는 과실을 맺는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두 과실은 성질이 전혀 다릅니다.

 

선악과는 죽음을 담고 있고, 생명과는 영생을 담고 있습니다.

선악과는 먹으면 죽고, 생명과는 먹으면 영생을 합니다.

죽음과 영생은 극과 극입니다.

하나님은 왜 성질이 전혀 다른 두 나무의 과실을 아담 앞에 두었을까요?

 

하나님은 갓 창조가 된 아담에게 두 나무의 과실에 대한 정보를 상세하게 알려 주십니다.

선악과는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되고 생명과는 반드시 먹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난 후에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아담 속에 있던 갈비뼈 하나를 빼내서 사람을 만드시고 그를 여자라 하고 그 이름을 하와라고 부르십니다.

 

아담은 남자가 되고 하와는 여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곤 이 둘을 한 몸이 되게 하십니다.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을 혼인이라고 합니다.

혼인이란 원래 하나였는데 잠시 떨어져 있다가 다시 한 몸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벌리는 일은 장차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실 일들을 내포하고 있음이 됩니다.

 

우리는 흔히 창세기를 실낙원이라고 하고 요한계시록을 복낙원이라고 합니다.

창세기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을 당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과 그의 신부인 성도들이 에덴동산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것을 예수그리스도와 성도들이 회복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럼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에덴동산을 잃어버리게 되는지를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와 생명과에 대한 정보를 소상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생명과는 반드시 먹고 선악과는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 안에서 나온 여자가 그만 뱀의 미혹에 넘어가서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고 맙니다.

 

그리고 여자는 선악과를 아담에게도 줍니다.

이에 아담은 여자가 준 선악과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먹습니다.

그리하여 둘 다 죽은 자가 되고 맙니다.

 

이에 하나님은 흠 없는 짐승을 잡아서 가죽으로 옷을 해 입히시고 죽은 자와 산 자는 함께 살 수가 없다고 하시면서 두 사람을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합니다.

추방하시면서 장차 여자의 후손을 보내 주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여자의 후손이 와서 너희로 미혹케 한 뱀의 권세를 깨트리고 너희를 이곳으로 다시 데리고 올 것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너희들은 에덴동산 바깥에 살면서 내가 보내줄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으로 내 보내시고 에덴동산의 문을 걸어 잠그고 맙니다.

이 모습이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인류 전체의 역사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속에서 하실 일을 담아 놓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에덴동산에서의 일어난 일을 확대 시켜 놓은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이 세상 역사를 축소하면 에덴동산 이야기가 됩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와 생명과 이야기 속에는 인류 전체가 죄로 인하여 죽었다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살아나는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었다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살아나는 이야기가 창세전 언약의 내용입니다.

창세전 언약 속에 담긴 구원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수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두 과실 속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두 과실을 가지고 창세전 언약을 펼쳐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펼쳐 가실 창세전 언약을 에덴동산에서 씨눈처럼 담아 놓은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마치 드라마의 예고편과 같은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모티브로 보여주는 그림인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창세전부터 철저하게 계획이 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인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 속에서 펼쳐 가실 일인 그 아들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을 에덴동산에서 예고편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잠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살펴보고 갑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측량 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인간들의 지혜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라고 탄복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말은 인간들의 지혜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섣불리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깨닫게 하시려고 자기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시는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성령을 온 세상으로 보내심을 입은 일곱 눈이라고 합니다.

성령을 일곱 눈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께서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안목으로 이 세상 역사를 바라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 세상 속에서 하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하늘과 땅처럼 달라집니다.

그래서 성경을 사사로이 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사사로이 풀지 말라는 것은 인간들 입장에서 해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볼 때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입장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선악과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 아들을 통하여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동원된 민족이 구약의 이스라엘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신약으로 말하면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을 가지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에게 선택을 입은 자들을 말합니다.

선택을 입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택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이 시간이라는 역사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표에 따라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때와 기한은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이걸 예수님은 포도원 품꾼 비유로 말씀 하셨습니다.

 

어떤 이는 아침 일찍 부르심을 입고,

어떤 이는 한 낮에 부르심을 입고,

어떤 이는 저녁에 부르심을 입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주인의 부르심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품꾼들의 원함이 아니라 주인의 원하심입니다.

주인이 한 사람 한 사람 불러서 들어간 것입니다.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라는 방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이 은혜가 우리 인간들에게는 낯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몸이 내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몸뚱이는 분명히 내 몸인데 내 마음대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분명히 내 인생 같은데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간섭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이 자꾸만 삐걱 거리는 것입니다.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이 된 컴퓨터와 같이 이상 징후들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은 컴퓨터의 바이러스처럼 우리 안에서 육신의 소욕들을 제어하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 인생이 자꾸만 꼬여가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살아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를 복된 인생이라고 합니다.

동의하기 어렵지만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비껴가는 식으로 하십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와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동의를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인간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격한 어조로 구원을 하나님의 폭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폭력이란? 강한 자가 힘으로 약자를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넌 내 꺼야” 라고 하면서 우리 인생을 간섭하는 것입니다.

이걸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의 동의 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일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일일이 우리에게 동의를 받아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간다고 하면 이 세상에는 단 한 사람도 구원 받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우리의 인생을 차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구원으로 가는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고 멸망으로 가는 길은 넓어서 찾는 이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넓은 길을 가고 싶어 하지 좁은 길을 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편한 길을 좋아하지 불편한 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폭력적인 방법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구원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걸 “주께서 나를 이기었사오니” 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강함이 우리의 약함을 이기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우리는 은혜라고 하면 ‘아 좋다’ 감상적으로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오면 우리 인생은 끝장이 납니다.

 

최초로 하나님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 이름을 노아라고 합니다.

노아는 남들이 하지 않는 방주 짓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노아의 인생을 차압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노아를 남들과 다른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인생을 차압하여서 방주 짓는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데 노아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 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노아의 인생을 간섭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간섭당하는 인생은 인간들 입장에서는 아픔이고 고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 속에는 육신의 소욕과 이 세상에서의 일락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죽이게 하십니다.

세상에 정과 욕심을 이루고자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인간의 본성과 정반대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인간의 본성과 다른 가치관으로 산다는 것은 한숨이었고 아픔입니다.

그런데 이 아픔이 잠시 후에는 홍수 속에서 살아나게 하는 기쁨으로 변하게 됩니다.

홍수가 오기 전까지는 노아의 삶이 어리석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홍수가 임하자 지혜로움으로 드러납니다.

노아가 한 일이 복 된 일이라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를 두고서 눈물로 씨를 뿌리고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고 합니다.

 

노아도 다른 사람들처럼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도록 간섭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노아에게는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폭력적인 은혜가 노아의 인생을 강권적으로 차압하여서 홍수 속에서 살아나게 하는 구원을 이루어낸 것입니다.

만약에 노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았다면 노아도 홍수 속에서 멸망당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노아의 인생을 차압하지 않았다면 노아 역시 홍수 속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천만다행이 하나님께서 노아의 인생을 강제로 차압을 해 주었기 때문에 죽음에서 살아 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세상 사람들처럼 살지 못하게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살려고 하면 자꾸만 태클을 거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멋진 계획을 세워 놓아도 일이 헝클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처럼 살면 하나님께서 간섭해서 너는 세상 사람이 아니고 하늘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왠지 찜찜하게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손해 보고 말자’ 라는 식으로 세상을 멀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요만큼이라도 괜히 하고서 마음이 불편한 것보다 안하고서 마음이 편한 쪽으로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는 손해가 되지만 마음으로는 쉼을 누리게 됩니다.

마음에 쉼이 훨씬 유익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까 육신의 원하는 대로 살지 않고 절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이긴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 실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린 예수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이 자리에 있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원함에 의한 것이든지 아니면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된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일컬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간다고 합니다.

 

선을 이루어 가는 것은 옳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옳음은 사람들 눈에는 그름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옳음으로 사는 우리를 틀렸다고 수군거리는 것입니다.

저 사람 예수 믿더니 인생을 망쳤다고 합니다.

 

바울이 이런 인생을 살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미쳤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바울은 전도가 유망한 사람이었습니다.

대제사장으로부터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맙니다.

다른 사람은 천둥소리로 들었는데 바울만 예수님 음성을 들었습니다.

모두가 천둥소리로 들었는데 바울 혼자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니 함께 한 동무들이 동의 할 리가 없습니다.

동무들이 바울에게 네가 환청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보고 들었기 때문에 말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을 말해야 하는 바울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을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바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어 버립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이단이라고 합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울도 예수는 이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쟁이들을 잡으러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중에서 하늘에서 나는 천둥소리 같은 것을 듣더니만 돌변해 버립니다.

갑자기 돌변하고서 예수는 이단이 아니고 유대인을 구원하는 메시야라고 합니다.

사람이 갑자기 돌변하면 무섭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귀신들렸다고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함께 하던 동무들이 “너 미쳤구나” 라고 합니다.

“너 돌아도 단단히 돌았구나” 라고 하면서 배척하는 것입니다.

배척 정도가 아니라 원수시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자기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사람의 판단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자신이 만난 예수를 증거 하였습니다.

이게 예수를 만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사람의 동의를 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동의가 옳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옳음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하면 옳음이 됩니다.

 

하나님이 심판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친히 모본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왜 그런가요?

예수님은 사람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인간들의 동의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인정을 하면 하나님 아들이 되고,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 아들이 안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들의 판단에 희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도 그러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인정이 중요합니다.

성경 속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믿음의 선진들이 있습니다.

믿음에 선진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간섭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일컬어 하늘에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모두가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증인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성도는 앞서간 성도들의 길을 걸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건 필수 코스입니다.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에 관하여는 남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의 믿음이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 안에 증거를 가지고 있으면 남의 판단에 신경 쓸 이유가 없습니다.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를 만난 증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어떤 협박과 핍박에도 그 예수의 증거를 끝까지 붙잡고 살았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유대인들이 겁박을 해도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가 없노라 라고 하면서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신앙이 풍조에 따라서 흔들리는 것은 예수를 만난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일어난 사건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럼 에덴동산에 있는 두 과실에 담긴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속에 생기를 불어 넣어서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생령인 아담을 동산에 두십니다.

동산 안에는 두 과실나무가 있습니다.

하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나무입니다.

 

하나님께서 ‘네페쉬 하야’ 라는 생령인 아담을 생명과와 선악과 앞으로 인도 하시고 생명과는 반드시 먹고 선악과는 절대로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한 생명과를 먹으면 영생을 하고,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으면 죽습니다.

이건 극과 극입니다.

 

우리는 후천적 지식에 의하여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죽은 것을 압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들어 놓았느냐고 따집니다.

따진다는 것은 책임을 전가시키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먹으라는 것은 안 먹고 먹지 말라는 것은 왜 먹었느냐고 합니다.

 

선악과를 두신 하나님이 잘못인가요?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했는데도 따 먹은 인간이 잘못인가요?

인간이 잘못이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인간의 잘못을 하나님에게 전가 시킵니다.

왜 그런 것을 거기 두었느냐고 합니다.

두시려면 인간들 눈에 안 보이도록 감추어 두시던가 하지,

왜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두어서 이런 사단을 일으키느냐고 따집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에게 전가 시켜야 속이 시원합니다.

이 버릇이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잘못을 하면 우린 본능적으로 핑계를 먼저 댑니다.

 

핑계를 대는 것은 난 잘못이 없다는 것입니다.

잘못을 꼭 남에게 전가를 시켜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두가 죄성이 우리 몸 속에 배여 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이 잘못이지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신 하나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선악과는 하나님이 필요해서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데에는 선악과와 생명과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두신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 속에는 죄 아래 가두는 언약과 죄에서 구원하는 언약이 있습니다.

이것이 두 과실로 나타났습니다.

 

두 과실은 두 언약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선악과는 먹으면 죽고, 생명과는 먹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두 과실을 언약으로 말하면 선악과는 죽이는 언약이고, 생명과는 살리는 언약입니다.

선악과는 율법을 상징하고, 생명과는 은혜를 상징합니다.

 

율법은 죽이는 것이고, 은혜는 살리는 것입니다.

선악과는 율법을 의미하고, 생명과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율법을 옛 언약이라고 하고, 은혜를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순서상 옛 것이 먼저이고 새 것이 나중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율법이 먼저 주어지고 은혜가 나중에 주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죄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구속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담도 이 원리에 따라서 다스려집니다.

아담도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아야 하는 자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이를 지난 시간에 생령인 아담은 영적 존재가 아니고 생명과를 먹고 영적 존재가 되도록 창조가 된 자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은 죄에서 건져냄을 입는 것입니다.

구원이 되려면 먼저 죄 아래 가두어짐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구속을 받게 됩니다.

아담도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기 때문에 죄 아래 가두어짐이 먼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죄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죄가 형성 되려면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갓 창조가 된 아담에게 생명과는 먹고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담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먹어서는 안 될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만 것입니다.

죄가 인간을 장악하게 된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아담은 죄의 결과로 죽음으로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혹자들은 하나님이 죄를 조성하였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유발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걸 먹으면 반드시 죽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아담은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은 것이지 하나님이 아담을 죄를 짓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죄를 조성하신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구원이 은혜일 수가 없습니다.

죄를 짓게 하였으니 당연히 죄에서 건져 주어야 합니다.

당연한 것을 가지고 은혜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인간들이 잘못한 것을 하나님이 그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서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죽이시는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고 수습을 하기 때문에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인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내어 보냅니다.

그리고 여자의 후손을 보내서 살려내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죄인이 구원을 받게 되는 이 일을 창세전 언약이라고 합니다.

 

잠시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봅시다.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엡 1:3-7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神靈)한 복(福)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創世前)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豫定)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계획 하신 일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택하신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십니다.

이것을 죄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는 것으로 말씀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받은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을 창세전에 미리 예정을 하신 것입니다.

 

잘 보시면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라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알다시피 ‘예수’ 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 주어진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라는 이름이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선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라는 이름으로 오신 성자 하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입니다.

 

요한복음 1장입니다.

 

요 1:1-3,14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도 곧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으로 계시는 하나님은 누구일까요?

 

요한일서 1장을 봅시다.

 

요일 1:1-2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 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요한복음을 쓴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졌다는 것은 태초에 생명의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이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태초에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진 말씀이신 하나님이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바 되었다고 합니다.

 

말씀이신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고 하는 것은 말씀이신 하나님이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이 증거하는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이 바로 성자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말씀이신 아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태초라는 하나님 나라에 말씀으로 계시던 성자 하나님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이미 그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보내서 자기 백성들의 죄사함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희생케 하시기로 작정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을 봅시다.

 

벧전 1:18-21절.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구속된 것은 은과 금으로 된 것이 아니고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되었다고 합니다.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것이 이 말세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이 말세입니다.

말세는 추수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일컬어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내는 일을 하신다고 증거를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타작마당은 광의적인 면에서는 온 세상이지만 언약적인 관점에서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은혜 아래로 불러내는 것입니다.

이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건져냈다고 합니다.

 

죄와 사망에서 건져 내려면 먼저 죄와 사망 안에 가두어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죄 아래 가두는 율법이 먼저 주어져야 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옛 언약인 율법을 먼저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선악과와 같이 인간들을 죄 아래 가두는 일을 합니다.

 

율법을 범법함으로 더한 것이라고 합니다.

 

갈 3:19절.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는 말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추가로 주어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율법은 죄를 안 지었으면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서 율법이 주어진 것입니다.

율법이 주어졌다는 말은 넌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죄를 안 지었으면 율법은 필요가 없었는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는 말은 율법이 하는 일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은 죄를 고발하고자 함입니다.

 

왜 죄를 고발을 할까요?

이는 인간들이 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 아래서 태어난 인간들은 죄가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죄를 모르니까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죄를 모르면 죄를 용서해 준다는 말을 알 리가 없는 것입니다.

잘못을 모르는데 어찌 용서를 알 수가 있나요?

그래서 하나님이 ‘죄가 이런 것이다’ 라고 알려 주기 위하여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들은 다 죄인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죄인 인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 백성들에게만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자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구원을 베풀고자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건 엄청난 복인 것입니다.

율법이 주어졌다는 말은 구원을 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만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은 율법을 통해서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율법을 받고 보니 우린 죽은 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모든 입을 막고 죄인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가두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롬 3:19-20절.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너는 구원을 받아야 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하여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는 율법을 상징합니다.

율법을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럼 선악과도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의 의미를 알면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에덴동산에 두신 것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율법을 상징하는 선악과를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독(毒)이 되기도 하고 약(藥)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선악과는 나쁜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면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선악과도 아름답고 생명과도 아름답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마음을 소유하였을 때의 일입니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지 않고 피조물의 마음으로 본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피조물 입장에서 보게 되면 피조물 입장으로만 이해를 합니다.

내게 유익이 되면 좋은 것이라고 하고 내게 유익 되지 않으면 나쁜 것이라고 여깁니다.

 

“네페쉬 하야”인 생령인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자기들 입장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 눈에 보니까 먹으면 죽을 것 같지 않고 도리어 영생 할 것처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먹기 좋았기 때문에 따 먹은 것입니다.

이게 죄입니다.

 

죄가 뭐냐?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가지고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서 살아가게 되면 늘 하나님과 충돌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만물을 창조주로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피조물 입장에서는 좋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하나님 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자기 법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들 세상에서는 모든 것을 자기 입장에서 좋고 나쁨을 이해하기 때문에 모두에게 옳고 그름은 없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선악관이 다르고 호불호(好不好)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들은 모두가 자기만의 법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선(善)이 될 수 있는 것도 어떤 사람에게는 악(惡)이 될 수가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입장에서 선(善)이 인간 입장에선 악(惡)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선악과는 아담의 생명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 선(善)이 되기도 하고 악(惡)이 되기도 합니다.

 

선악과나 생명과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모두가 선한 것입니다.

하지만 “네페쉬 하야”인 아담에게 있어서는 먹으면 영생하는 생명과는 선(善)이 되지만, 먹으면 죽게 되는 선악과는 악(惡)이 되는 것입니다.

 

“네페쉬 하야” 인 아담이 선악과를 먹으면 치명적인 독(毒)이 됩니다.

하지만 만약에 아담이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었으면 선악과는 독(毒)이 아니라 약(藥)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는 선악과도 생명과도 보시기에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지 못한 아담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페쉬 하야” 라는 생령인 아담에게는 선악과는 치명적인 독(毒)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고 금하신 것입니다.

 

혹자들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명하신 것은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 안하는지 그 여부를 알아보려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우리를 시험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리고 생령인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시험 받을 상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받은 자들을 참 아들로서 연단케 하시려고 시험을 하시지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을 넘어지게 하려는 시험을 하시진 않습니다.

 

아담은 구원을 받아야 할 자이지 구원 받은 자가 아닙니다.

생명과를 먹기 전에는 아직까지 구원을 받아야 하는 자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아담은 생명과를 먹고서 영생하는 구원을 받아야 하는 자입니다.

아담은 생명과를 먹기 전까지는 짐승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네페쉬 하야”인 생령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하신 것은 생령인 아담이 선악과를 먹게 되면 하나님 차원의 선에 이르기 전에 “네페쉬 하야”인 아담 수준에서 선악을 판단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면 자신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판단하게 됩니다.

“네페쉬 하야”의 눈으로 바라본 선악으로 하나님의 선악을 판단하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

 

생명과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담겨 있습니다.

아담이 만약에 생명과를 먹었다면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가 됩니다.

그럼 하나님의 생명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을 소유하게 되므로 모든 일을 예수그리스도의 안목으로 선악을 판단하였을 것입니다.

 

아담이 생명과를 먹고 예수그리스도처럼 강건한 남자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때는 선악과를 먹더라도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건 예수님이 율법에 영향을 받지 않으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율법에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아버지의 마음으로 율법을 행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은 자기도 좋게 보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은 것을 자신도 좋지 않게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눈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병자를 병든채로 안식일이라는 날을 지키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에게 있어 안식일은 병든 자를 병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병든 자를 안식일에 고친 것이 예수님은 율법을 지킨 것이 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예수님의 행동은 율법을 어긴 것으로 보였습니다.

 

율법적 안식일은 선악과처럼 어기면 죽게 되지만,

예수님의 안식일은 생명과처럼 살아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율법이라는 선악과를 생명을 살리는데 사용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은 그 속에 생명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은 율법으로 죽이는 일을 하였지만,

예수님은 율법으로 살리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붕어빵 틀에서는 붕어빵이 나오고,

국화빵 틀에서는 국화빵이 나옵니다.

결국 어떤 틀이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생명과의 생명에서는 생명이 나오고,

선악과의 생명에서는 죽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과의 생명을 가진 예수님은 하는 일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였고,

선악과의 생명을 가진 바리새인들은 하는 일마다 죽이는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같이 생명과를 먹은 생명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헬라인에겐 헬라인처럼, 이방인에겐 이방인처럼 대하였습니다.

바울이 율법 아래 있었을 때는 선악과의 생명으로 살았기 때문에 유대인과 이방인은 상종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생명과의 생명을 소유한 후에는 사람들을 인종과 민족의 벽을 넘어서 대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라는 생명과를 먹고 강건한 남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는 율법을 상징한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율법이 독(毒)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사람들을 정죄하고 죽이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율법을 약(藥)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율법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서기관은 옛 것과 새 것을 적절하게 사용 한다고 하였습니다.

 

옛 것은 율법을 말하고,

새 것은 믿음을 말합니다.

바울은 천국의 서기관이 되어서 옛 것과 새 것을 자유자재로 사용을 하였습니다.

바울에게는 옛 언약도 복음이고 새 언약도 복음이었습니다.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율법은 독(毒)이 되기도 하고 약(藥)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어떤 생명이냐의 문제입니다.

율법을 탓할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생명을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내가 천국의 서기관처럼 옛 것과 새 것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사람이냐 입니다.

 

한국교회에서 처음 예수를 믿으면서 겪게 되는 두 가지 딜레마가 있습니다.

 

첫째는, 제사 문제입니다.

제사를 지내야 합니까? 안 지내야 합니까?

제사 음식은 먹어도 됩니까? 안 됩니까? 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술과 담배 문제입니다.

술을 먹어도 됩니까? 안 됩니까?

담배를 피우도 됩니까? 안 됩니까? 라는 것으로 고민을 합니다.

 

고민의 내용이 “해도 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 입니다.

이것은 마치 선악과를 먹어도 되느냐? 안 먹어야 하느냐? 와 같은 것입니다.

먹느냐 안 먹느냐는 중요치 않습니다.

다만 이걸 담아 낼 수 있는 그릇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믿음이 강건한 남자가 되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해야 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의 문제는 각자의 생명의 분량에 따라서 어떤 이는 받을 만하고 어떤 이는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가 고린도 교회 안에서도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되느냐’ ‘먹으면 안 되느냐’ 라는 것으로 성도들 간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어떤 이는 받을 만하고 어떤 이는 받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이는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어떤 이는 아직 연약하여 먹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먹는다고 해서 강한 것도 아니고 못 먹는다고 해서 약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먹는 것도 자랑 할 것이 아니고 안 먹는다고 해서 기 죽을 일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먹고 마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뜨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먹고 마시는 것으로 신앙의 본질을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먹고 마시는 것보다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면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지옥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지옥도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지옥도 하나님의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진 곳입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 입장에서는 지옥도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귀를 위하여 지옥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마귀와 그 세력들이 지옥에 들어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이건 마치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집어넣는 것과 같습니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보세요.

천국에 간 나사로나 지옥에 간 부자나 하나님은 동일하게 아버지입니다.

창조주로서의 아버지인 것입니다.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이고 이삭도 아브라함의 아들인 것과 같습니다.

다만 서로가 누려야 하는 유업이 다를 뿐입니다.

이스마엘은 악한 자들이 받을 유업을 받았고,

이삭은 선한 자들이 받을 유업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귀와 그를 따른 자들에게는 부자처럼 지옥에서 영벌 받는 것을 유업으로 주셨고,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성도들에게는 나사로처럼 천국에서 영생하는 유업을 주신 것입니다.

마귀도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마귀를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하는데 사용하십니다.

 

욥기를 보세요.

하나님께서 마귀를 가지고 욥을 훈련시키셨습니다.

욥은 마귀로부터 시험을 당하면서 그가 나를 단련하시는데 이는 나로 하여금 정금같이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선악과도 선이고 생명과도 선입니다.

다만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각 사람의 생명과 분량에 따라서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장성한 사람에게는 선악과도 선이 되지만, “네페쉬 하야”인 생령인 아담에게는 선악과는 악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자란 고향에 가면 집 옆에 한 뼘밖에 안 되는 도랑이 흐르고 있습니다.

지금도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렸을 때는 그 도랑을 건너는데 엄청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도랑을 건널 때면 뒤로 멀리 가서 종종걸음으로 달려와서 뛰어서 건너곤 하였습니다.

어떤 때는 뛰어 오면서 디딤 발을 너무 멀리 짚어서 도랑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때도 있었습니다.

도랑에 빠지면 엉엉 울곤 했습니다.

 

그 때는 왜? 도랑이 여기에 있어서 날 괴롭히느냐? 라고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서 그 도랑을 건너는데 전혀 힘들어하지를 않습니다.

도랑은 변하지 않고 있는데 내가 장성한 것입니다.

내가 장성하고 나니까 과거에는 그렇게 문제가 되었던 도랑이 지금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내가 그것을 수용하느냐 못하느냐의 능력의 차이인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선악과는 아담에게는 죽고 사는 문제를 담고 있는 치명적인 것으로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에덴동산에 예수님하고 아담이 있었다고 합시다.

예수님에게는 선악과나 생명과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데 아담에게는 큰 문제인 것입니다.

왜? 그런가?

 

서로가 가지고 있는 생명의 차이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계셨고,

아담은 “네페쉬 하야”인 생령의 생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이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은 펄쩍 뛰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을 보고서 어떻게 저런 죄인들과 함께 어울릴 수가 있느냐 고 탄핵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바리새인들의 생명과 예수님의 생명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생명이 다르다 보니까 서로가 바라보는 선악의 기준도 달랐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려도 되는데 바리새인들은 안 되는가요?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창기들을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정해 놓은 율법으로 정해 놓은 선악의 규정이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리는 것은 악에 속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세리와 창기들을 상종 하지 못한 것은 그들이 정해 놓은 법이 그들과 어울리는 것은 악이라고 규정을 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세리나 창기나 바리새인과 모든 유대인들도 구원을 받아야 할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리는 것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세리나 창기나 바리새인이나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할 죄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갓 창조가 된 아담이 생명의 사람으로 자라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하여 에덴동산을 하나님의 생명으로 잘 다스려 가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위임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있어 죄란 무엇인가요?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인가요?

생명과를 먹지 않은 것인가요?

 

정답은 생명과를 먹지 않은 것입니다.

 

생명과를 먹지 않은 상태에서는 선악과를 따 먹는 것은 정해진 수순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담은 먼저 생명과를 먹었어야 했습니다.

아담이 생명과를 먹지 않으면 그냥 흙에 속한 “네페쉬 하야” 라는 생령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네페쉬 하야” 라는 생령의 생명으로는 선악과를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아담이 생령으로 머무는 것은 창조 목적에서 이탈한 죄가 됩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도록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생명과를 먹지 않으면 아담이 아무리 선악과를 안 먹고 착하게 산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창조의 목적에서 이탈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바라는 것은 생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강성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 할 때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마음 껏 다스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뱀조차도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과를 먹지 않은 상태에서는 백약이 무효입니다.

 

에덴동산의 생명과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먹으면 그 속에 생명이 있고 영생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먹으면 영생하는 생명과가 예수님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 앞에 예수라는 생명과를 두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를 거부합니다.

예수를 거부하는 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생명과를 먹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생명과를 먹지 않으면 사망으로 나아가게 되었듯이 예수를 믿지 않으면 멸망으로 나아갑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안 믿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생명과를 먹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리 고상한 인격을 가지고 착하게 살아도 생령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수의 생명이 담겨지지 않은 것은 죄인입니다.

 

죄가 뭐냐?

예수 안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자들은 짐승으로 보십니다.

 

짐승은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의 생명을 담고 있는 자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생명을 담은 사람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예수의 생명이 없는 짐승의 혼은 아래로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사람이 가는 곳입니다.

짐승이 가는 곳은 지옥입니다.

천국은 위에 있고 지옥은 아래에 있습니다.

 

죄란? 바리새인들과 같이 선악의 관점으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선악의 관점에서 아무리 좋은 선을 내어놓아도 생명의 하나님 앞에서는 악인 것입니다.

영생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생명만이 선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들의 선을 들고 나오는 것은 마치 강아지가 뼈다귀 하나를 몰고 와서 주인님 이것 잡수세요! 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강아지가 주는 것을 가지고 그래 고맙다! 라고 받아먹을 사람은 없습니다.

강아지는 자기 딴에는 최고로 주인에게 대접을 한다고 한 것이지만 사람에겐 쓰레기일 뿐입니다.

이는 서로의 생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차이가 그러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대로 이방인과 교제하지 않는 것이 가장 거룩한 신앙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거룩이라고 하는 것을 비 거룩으로 인정해 버리십니다.

바리새인들이 의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 앞에서는 불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부정하고 속되다고 하는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릴 수가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 중에서도 골수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나중에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생명을 얻고 나서 보니 이건 죄도 아니고 의도 아니란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따지지 않고 대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율법이라는 선악의 생명으로 살았습니다.

그 때는 율법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았습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 선악과가 주는 생명으로 이방인을 바라보았을 때는 저주 받은 죄인이라고 생각하여서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고 난 후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이방인을 보니까 그들도 예수를 통해서 구원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배척할 것이 아니라 가까이 하여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영화를 보면 "19세 이상 관람가" 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19세 미만의 사람은 이 영화를 소화하기엔 부족하니 보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회적인 통념으로 19세 미만은 허구와 사실을 분별할 수 없는 연령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과 허구를 분별할 수 없는 아이들이 과도한 폭력물이나 음란물들을 보게 되면 정신 건강에 치명적인 독이 될 수가 있기 때문에 금지케 하는 것입니다.

 

영화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그냥 허구를 재미로 만든 오락일 뿐입니다.

하지만 현실과 이상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이 그 영화를 보았을 때는 정신적으로 치명적인 오류를 범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를 등급제로 나누어서 허가를 해 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선악과는 보아서는 안 되는 19금 제한 불가 영화와 같은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아직까지 선악과를 소화 할 능력이 없습니다.

선악과를 소화 하려면 생명과를 먹고 어른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아담과 하와는 뱀의 미혹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따 먹고 맙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나자 하나님은 이들을 에덴동산 밖으로 추방을 시킵니다.

이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는 함께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을까요?

그것은 선악과가 아담과 하와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을 만큼 매우 유혹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워 보였기 때문입니다.

죄가 그러합니다.

 

인간의 눈에 비친 선악과의 모습을 봅시다.

 

창 3:6-7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였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여자의 관점에서 바라 본 것입니다.

왜? 여자에게 선악과가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게 보였을까요?

이는 선악과 속에는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뱀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건 마치 어린 아이들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왜 빨리 어른이 되고자 하는가요?

이는 어른이 되면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 속에도 죄성이 있습니다.

죄성은 하나님이 같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와는 하나님 같이 된다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어른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른이 되면 부모의 간섭으로부터 자유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담과 하와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고 하는 뱀의 꼬임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따 먹고 만 것입니다.

 

그 결과는 엄청난 재앙을 몰고 왔습니다.

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한 것은 그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는 함께 할 수 없는 성질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랑의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죽은 자와는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들이 살아가는 에덴동산 바깥으로 좇아낸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두 과실이 있습니다.

 

두 과실이 두 의(義)로 나타나 있습니다.

붙잡으면 죽을 의와 붙잡으면 살 의가 있습니다.

율법의 의를 붙잡으면 죽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으면 삽니다.

율법의 의는 선악과이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는 생명과입니다.

 

선악과는 율법신앙을 상징합니다.

율법 신앙이 인간들 눈에는 선악과처럼 매력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 신앙은 인간의 가치를 상승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율법 신앙에는 인간의 영광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이 영광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장터에서 사람들에게 문안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상좌에 앉아서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것을 왕노릇 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율법신앙을 선호하는 것은 그 자체가 심판 성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 신앙은 지킨 자에게는 영광이 있고, 지키지 못한 자에게는 정죄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킨 자는 하나님 같이 되어서 사람들을 판단하는 권세를 부여받게 됩니다.

법은 지킨 사람은 발언권이 생기고 지키지 못한 사람은 발언권이 사라집니다.

 

율법 신앙이 그러합니다.

율법을 지키면 난 지켰는데! 당신은 왜? 안 지켰습니까? 라고 비판하고 정죄 할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남들과 다른 대접을 받고자 합니다.

그 근거를 자기 행위를 앞세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교회 안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를 위하여 한 일이 많은 사람은 그 행한 일을 근거로 높은 자리에 앉고자 합니다.

 

교회 안에서 왜 장로가 되고 싶어 하고 권사가 되고 싶어 하는가요?

장로와 권사가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을 다스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직분은 높고 낮음이 아닌데도 인간들이 그렇게 정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초림 때 오셔서 보니 유대인들이 이러한 모습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지킨 자들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여서 선생 노릇을 하면서 영광을 받고 있었고 율법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은 죄인이 되어서 다스림을 받고 있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율법을 지킨) 인간들 속에는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본성이 들어가 있습니다.

누가 이런 왕 노릇 할 수 있는 행함(율법신앙)을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당당하게 기도하는 것을 들어 보세요.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전도를 하고,

헌금을 하고,

새벽기도 철야기도를 하고,

봉사를 하고 착하게 살았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나는 저기 있는 세리와 같이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자신을 행위로 차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는 옳고 세리와 창기들의 행위는 그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저들을 판단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저들과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거기에 알맞은 대접을 해 달라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들의 행위가 무기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기도 속에는 나는 저들과 다르기 때문에 세리와 창기 같은 자들을 마땅히 판단하고 심판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힘이 자기 행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시대 일부 복음을 지식으로 알고 있는 자들이 잘난 척 하는 것도 복음 아는 것이 무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 안다는 것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는 힘으로 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나로 하여금 상석에 앉지 말고 도리어 말석에 앉게 하는 것인데도 이들은 복음 아는 것을 힘으로 삼고 상석을 차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단들의 특징을 보세요.

하나님 말씀을 안다는 것을 가지고 권세 놀음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만 복음의 비밀을 안다고 생각하니까 ‘우리는 너희와는 달라’ 라고 하면서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서 모른다고 하는 교인들을 깔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가 복음을 모르고 있다는 반증인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안다고 하는 복음도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이단들은 스스로를 나는 이단이라는 짓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하는 짓이 이단들의 짓인데도 그걸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것을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단들이 사람의 숫자를 힘으로 삼고 실력 행사를 하는 것은 스스로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의 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어디 권세 놀음 하는 것인가요?

복음을 제대로 안다고 하면 잘난 척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로서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 더욱 더 낮은 자세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게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육에 속한 자들은 복음을 가지고도 생명과(복음)가 담고 있는 것과는 정 반대의 정죄하고 심판하는 선악과의 짓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너희와 달라 라고 잘난 척 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고 있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아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남을 판단하는 무기가 되면 차라리 모르는 것만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안다고 하는 자들 때문에 훼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양날 가진 칼과 같습니다.

잘 사용하면 서로를 살리는 도구가 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둘 다 죽이는 기계가 됩니다.

어린아이처럼 칼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이 사용하게 되면 그 칼에 자기도 다치고 남도 다치게 합니다.

 

칼 자체는 좋은 것이로되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무기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그러합니다.

 

어떤 사람은 율법을 약(藥)으로 사용하고 어떤 사람은 독(毒)으로 사용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생명을 살리는데 사용하였지만,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에덴동산은 온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역사 속에서 펼쳐 가시는 자기 백성들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일어나는 일이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두 행함이 있습니다.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일으킨 행함과,

믿음이 주체가 되어서 일으킨 행함이 있습니다.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일으킨 행함 속에는 인간의 자랑이 있지만

믿음이 주체가 되어서 일으킨 행함 속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자랑이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의 실존을 바라보게 하는 거울과 같습니다.

 

율법이라는 거울 앞에서 자신이 벌거벗음을 보는 자는 복 받은 자이고,

율법이라는 거울 앞에서 아름답다고 여기는 자는 저주받은 자입니다.

 

나는 율법을 독(毒)으로 사용하고 있는가요?

아니면 약(藥)으로 사용하고 있는가요?

 

율법을 가지고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서 “주여 도와주십시오” 라고 한 사람은 율법을 보약(補藥)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내가 열심히 율법을 지켜서 영광 돌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은 독약(毒藥)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시작과 끝은 옷 입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 옷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입혀 주는 흠 없는 제물의 피 흘림으로 만든 가죽 옷이 있고,

인간들이 피와 땀으로 만든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만든 옷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을 봅시다.

 

계 19:7-8절.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예할 어린 양의 신부들에게 빛나고 흰 세마포 옷을 입혀 주십니다.

수치는 내가 가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가려주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치마를 만들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준비한 치마를 달라고 해야 합니다.

옛 사람은 자기가 만든 옷을 입고 살아가고,

새 사람은 예수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살아갑니다.

 

왜 성경의 결론을 하나님께서 옷을 입혀 주는 것으로 말을 할까요?

이는 구원이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옷을 입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세기의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흠 없는 짐승의 죽음으로 얻어진 가죽 옷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신앙은 옷 입는 것입니다.

 

자기가 만든 옷을 입고 살 것인가?

하나님이 입혀주신 옷을 입고 살아갈 것인가?

 

나는 어떤 옷을 입고 있나요?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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