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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1~3 강해

16강. 에덴동산의 네 강 (창 2:8-14)

by coroa 2020. 11. 5.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16강. 에덴동산의 네 강 (창 2:8-14)

-.정낙원 목사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이는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서 나온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 세상에 복사본으로 두신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이 세상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두셨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입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 나라를 모형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은 또한 이 세상 나라를 모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의 구조 속에 보이는 이 세상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미니어처처럼 계시해 두었습니다.

 

에덴동산을 보면 “에덴”과 “동산”이라는 두 구조로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에덴에서 강이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네 근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에덴과 동산은 구조적으로 다른 세계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럼 에덴에서 강이 발원하여 동산으로 흐른다는 것은 에덴은 동산 위에 있는 세계가 됩니다.

편의상 에덴동산 밖은 1층이고, 동산은 2층이고, 에덴은 3층이 되는 것입니다.

 

동산에 거하는 아담에게는 에덴은 하늘 위에 있는 곳으로서 감추어진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덴에서 흐르는 물이 생명수이므로 동산에 있는 아담은 에덴에서 공급해 주는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담 입장에서는 동산은 보이는 세계이고 에덴은 보이지 않는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 말미암았다고 하였으니,

아담이 살아가는 보이는 동산은 보이지 않는 에덴으로부터 말미암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에덴동산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축소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흙으로 만드시고 난 후에 깊이 잠들게 하시고 아담 속에서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서 여자를 만드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고 하나님의 아들들을 낳는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담과 하와 이야기는 예수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야기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에덴동산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은 예수그리스도와 교회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을 말해주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들여다보면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비록 희미하지만 그 내용을 어렴풋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일이 실상으로 나타난 것이 예수그리스도와 교회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오늘은 에덴과 동산 그리고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사방으로 흘러가는 네 강에 대하여 살펴볼까 합니다.

이 그림이 잘 이해가 되면 우리의 구원이 어떠한 식으로 이루어지게 되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자기가 경험한 것을 믿음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이 말하는 믿음과 다른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보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내어 놓는 믿음은 자신이 보고 경험된 것을 믿음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보지 않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보아야지 믿는다고 합니다.

보지 않고 어떻게 믿느냐 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고가 신(神)을 판단하는 것에도 적용이 됩니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인간들의 신관이 잘 투영되어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모두가 인간들입니다.

인간을 영웅화 한 것이 신입니다.

이는 보이지 않는 신을 형상화 한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형상화 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감지되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아담이 하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하나님을 형상화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함께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형상화 한 것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부터입니다.

하나님을 볼 수가 없으니까 하나님은 형상화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기 생각에 ‘신은 이럴 것이다’ 라는 이미지를 형상화 시킨 것입니다.

이를 신의 개념화 라고 합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들 생각으로 하나님을 이미지화하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형상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생겼을 것이야!

하나님은 이런 분이실거야!

하나님은 이런 걸 좋아하시고 저런 건 싫어하실 거야!

 

각자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들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하였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우상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간들은 저 마다의 생각으로 갖가지 형상의 하나님을 만들어서 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수(數) 만큼이나 신도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우상으로 가득하다고 말하는 것도 사람마다 각자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이미지화 하여서 섬기기 때문입니다.

이 모두가 자기가 보아야지만 믿는다고 하는 인간들의 믿음체계 때문입니다.

 

인간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신은 신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섬김의 대상에서 제외를 시킵니다.

보이지 않는 신은 인간들의 신관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을 믿음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을 형상화 하여서 섬기는 우상숭배 신앙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허공에다 섬길 수는 없으니까 뭔가 형상이라도 만들어 놓고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만든 조각물을 신이라고 섬기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게 죄인의 어리석음입니다.

 

이러한 사고가 교회 안에 그대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성전을 신전화 하는 신앙으로 발전을 한 것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구원 받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인간들이 만든 건축물을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대체하여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형상화한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불자들이 절간을 신성시 하여서 섬기는 것처럼 이 시대 교인들은 교회를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신성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교회 자랑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자랑하였듯이 지금도 교인들이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하나님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누구라도 성전을 더럽히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건 성전이 아니라고 하면서 뒤집어엎어 버립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십자가에 달아서 죽인 것입니다.

 

스데반도 성전을 모욕하였다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성전에 이방인들을 데리고 들어갔다는 죄목으로 참소를 당하여서 로마로 압송 당한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지금 이 시대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수십억 수백억 수천억을 들여서 교회를 성전이라고 하면서 미석으로 꾸미고 화려하게 짓는 것은 믿음 없는 교인들의 우상성을 채워주기 위한 것입니다.

 

거짓 목사들이 예배당을 성전으로 둔갑을 시켜서 육에 속한 교인들로 하여금 우상숭배 신앙을 조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헐어 버린 것을 다시 짓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역사는 늘 순환을 합니다.

 

전도서 1장을 봅시다.

 

전 1:8-11절.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 하는도다 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11.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습니다.

돌고 돌아서 늘 그 자리입니다.

특히 영적인 일은 항상 동일합니다.

그러니 과거에 하던 것들이 무늬만 바꾸어서 나타나고 자행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돌고 돌아서 옛적 사람들이 하던 짓을 지금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그 조상에 그 후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2천 년 전에 일어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지금도 교회 안에서 그대로 재현이 되어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늘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늘은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이야기는 비밀에 속하였습니다.

보이는 세계를 육(肉)이라고 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영(靈)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이야기를 보이는 세계의 언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록 보이는 세계의 언어로 기록을 하였다 할지라도 그 본 의미는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 이야기인 것입니다.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은 육의 언어 속에 영의 이야기를 담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일어나는 일 속에 하늘나라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께서 육적인 사건 속에서 영적인 의미들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땅의 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하늘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내가 하는 말이 하늘의 이야기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천국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허락이 되었으나 저희에게는 비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동일한 말을 하여도 알아듣는 사람이 있고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세계인 하늘나라에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모두가 하늘나라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늘나라 이야기로 들어야 합니다.

하늘나라 이야기로 들으려면 하늘의 말을 듣는 귀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들에게는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성령이 예수님의 말씀을 하늘나라 이야기로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이 하늘나라 이야기이니까 성령께서는 모든 성경을 하늘나라 이야기로 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에덴동산의 네 강 이야기도 성령께서는 하늘나라 이야기로 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지고 역사 속에서 펼쳐가는 자기 백성들의 구원이야기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에덴동산의 네 강을 살펴봅시다.

 

본문을 봅시다.

 

창 2:10-14절.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12.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14.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먼저 에덴동산의 구조부터 봅니다.

강의 발원지인 에덴이 있고 그 강물을 받아서 생명을 피우는 동산이 있습니다.

그리고 동산에서 네 동네로 갈라져 갑니다.

 

네 동네는 동산과는 또 다른 동네인 것입니다.

하윌라와 구스와 앗수르와 유브라데는 동산 바깥에 있는 동네들입니다.

이렇게 되면 제일 위에 에덴이 있고, 중간에 동산이 있고, 맨 아래에 각각의 이름을 가진 네 동네들이 있는 것입니다.

 

3층 에덴 - 2층 동산 - 1층 네 동네

 

이건 마치 창세기 1장의 세 하늘과 같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궁창 위 동네와 궁창 아래 동네가 있습니다.

궁창 윗 동네와 궁창 아랫 동네를 구분하는 것도 궁창이라는 동네입니다.

윗 동네와 아랫 동네를 구분 짓는 궁창을 하늘이라고 합니다.

 

궁창이라는 말은 하늘이라는 뜻입니다.

 

가운데 궁창도 하늘이고,

위에 있는 궁창도 하늘이고,

아래 있는 궁창도 하늘입니다.

 

맨 아래 하늘을 첫째 하늘이라고 하고,

중간에 있는 하늘을 둘째 하늘이라고 하고,

맨 위에 있는 하늘을 셋째 하늘이라고 합니다.

 

구원이 뭐냐?

아랫 동네에 있던 사람이 윗 동네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려면 그 중간에 있는 동네를 지나가야 합니다.

중간에 있는 동네에서 길을 열어주지 않으면 올라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중간에 있는 궁창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위에 있는 하늘로 가는 일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를 하늘이 열렸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은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있는 하늘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이를 새롭고 산 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육체로 새롭고 산 길을 내신 것입니다.

누구라도 예수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늘로 나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가운데 궁창의 하늘 길을 열어 주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위에 있는 하늘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이외는 구원의 길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시면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럼 무명(無名)의 세계와 유명(有名)의 세계를 살펴봅시다.

 

무명(無名)이란? 이름이 없는 세계를 말하고,

유명(有名)이란? 이름이 있는 세계를 말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무명의 세계이고, 보이는 세상은 유명의 세계입니다.

 

잘 보시면 강이 에덴동산에서 흐를 때는 이름이 없었는데,

에덴동산 밖으로 나와서는 각각의 이름을 갖고 흐르게 됩니다.

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와 보이는 이 세상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의 나라는 창조의 세계입니다.

신이 살아가는 창조의 세계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이름은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지어 주어지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신은 이름이 없고, 피조물은 이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강의 발원지인 에덴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고,

반면에 이름을 가지고 흐르는 동산은 이 세상을 상징하고 있음이 됩니다.

 

이름이 있는 것과 이름이 없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이름 속에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이름을 지어 줄 때는 피조물의 특성을 이름 속에 담아 놓았습니다.

 

이름은 고유명사입니다.

이는 그 이름만이 갖고 있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이름이 담고 있는 속성을 품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각자의 삶이 있다는 뜻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게 되면 제일 먼저 이름을 지어줍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이 개똥이니 소똥이니 라고 짖지 않습니다.

이름 속에 부모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이름을 지어 줄 때 너는 장차 이러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지어주게 됩니다. 이처럼 이름 속에는 부모님이 바라는 것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로부터 이름을 받아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을 봅시다.

 

요 1:1-3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사도 요한은 태초의 하나님 나라를 보았습니다.

태초라는 말은 피조 세계 밖을 말합니다.

흔히들 말하는 신들(삼위 하나님)이 사는 나라입니다.

이를 영적 세계라고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도 하나님이십니다.

 

잘 보시면 복수의 하나님들이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하나님과,

말씀이라고 하는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증거 하시는 하나님도 계시는데 이를 성령님이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의 다른 성경인 요한일서에서는 이 부분을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1장을 봅시다.

 

요일 1:1-3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사도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보았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그냥 말씀이라고 하였는데 요한일서에서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생명의 말씀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졌다고 합니다.

 

이 말은 생명의 말씀이신 하나님이 인간들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으로도 만지고 그의 말을 귀로도 듣고 눈으로도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진 그 생명의 말씀이신 하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예수는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그가 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의 직임입니다.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이 ‘예수’ 라는 이름을 아버지로부터 받아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이라 하고,

생명의 말씀이신 하나님을 ‘성자 하나님’이라고 하고,

이러한 사실을 증거하는 하나님을 ‘성령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태초라는 하나님 나라에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이를 창세기 1장에서 ‘우리’ 라고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고 하시면서 피조물인 사람을 창조 하신 것입니다.

사람 속에는 성부 성자 성령의 형상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과 서신서와 요한계시록을 썼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태초에 관한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요한서신서는 그 말씀이신 하나님의 생명의 속성을 이야기 하는데 그것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생명의 말씀이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과 사랑의 사귐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말씀이신 하나님과 사귐을 가진 사람들은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서 형제를 사랑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생명의 말씀이신 하나님과 사랑의 사귐을 가진 자들이 장차 천국에서 그의 신부로 살아가게 되는 것을 요한계시록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 나라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 12 제자 중에서 유일하게 사도 요한에게만 태초에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을 알려주셨을까요?

이는 사도 요한이 유일하게 예수님의 품에 안긴 사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만이 유일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간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어머니를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를 잉태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로 낳아지고 그 속에 예수를 품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바로 태초라는 하나님 나라에 가서 예수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을 어린 양의 혼인잔치 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품에 안겼다는 것은 신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신부인 사도 요한에게 태초라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들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두 부류가 있습니다.

 

순교를 당한 제자와 살아서 천국으로 올라간 제자가 있습니다.

11제자는 모두가 일찍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순교 당하지 않고 천국에 올라갔습니다.

사도 요한이 안 죽었다는 말이 아니고 살아서 성령의 감동으로 천국에 올라가서 그 모습들을 보았기 때문에 살아서 천국에 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살아서 천국에 올라가서 본 것을 기록한 상경이 요한계시록입니다.

하나님은 사도 요한에게 천국으로 올라오게 하여서 천국의 모습들을 보여 주시고는 이 세상에 있는 교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태초라는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의 교회들에게 알려주는 메신저인 것입니다.

메신저는 자가가 경험한 것을 증거 하는 자입니다.

이를 증인이라고 합니다.

 

진짜 천국의 증인은 사도 요한인 것입니다.

바울도 삼층천을 다녀왔지만 증거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다 증거 하였습니다.

 

그럼 사도 요한이 본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십시다.

 

요한계시록 5장을 봅시다.

 

계 5:1-7절.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2.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4.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7.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사도 요한이 천국에 가서 보니까 하나님 보좌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계시는데 그 오른 손에 안팎으로 가득이 적힌 책이 있는데 일곱 인으로 봉하여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책을 아무나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엉엉 웁니다.

그러자 장로 중 하나가 그 봉인은 어린 양이 뗄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어린 양 곁에 일곱 눈이 있는데 이는 온 세상으로 보내심을 입은 일곱 영이라고 합니다.

일곱 영은 어린 양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일곱 인으로 봉한 책들을 하나씩 뜯어서 그 안에 있는 내용들을 온 세상에 알려주는 전령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림을 잘 보시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고,

성부 하나님 손에 있는 책을 취하여서 하나씩 오픈 하는 어린 양은 성자 하나님이시고,

성자 하나님이 오픈한 책의 내용들을 온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일곱 교회에 전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이 모습은 이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자기 백성들에게 영생 주시기로 작정을 하시고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을 하셨습니다.

그 책이 하나님의 오른 손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계획한 일을 이 역사 속에서 펼쳐 가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 바로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성자 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예수라는 이름이 담고 있는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이미 창세전에 계획이 된 이름입니다.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엡 1:3-7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

 

4절을 보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기로 하였습니다.

창세전에 선택을 입은 우리가 바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죄 아래 있는 자들을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느냐 하면 그 아들을 예수라는 이름으로 보내서 그리스도의 일을 하게 함으로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예수는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예수님이 육체로서 이 땅에서 하시는 일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입은 자라는 뜻인데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자기 백성들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죽임을 당하기로 위임을 받아서 일을 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에서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성자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증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 일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창조되기 이전에 이미 창세전에 계획이 된 것입니다.

 

창세전에 예정이 된 것들을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이루어 가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자기 백성들에게 믿어지게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들을 위한 구속 사역을 다 이루시고 난 후에 부활 하시고 승천하십니다.

 

승천하여서 아버지 하나님께 보고를 드립니다.

그리고 난 후에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자신이 역사 속에서 이룬 일들을 자기 백성들에게 알려주고 믿어지게 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야겠다는 결제를 받고 자신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일컬어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잠깐 성령에 대하여 알고 갑시다.

 

태초에 하나님과 말씀이신 하나님과 일곱 영이신 성령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이신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이라고 하시고,

말씀이신 하나님을 성자 하나님이라고 하시고,

일곱 영으로 계시는 성령님을 성령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성령님은 하늘나라에서 일곱 영으로 계십니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을 성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성취하신 일들을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서 적용케 하시는 분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일을 하실 때는 하나님의 영이라고 하고,

성자 하나님의 일을 하실 때는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합니다.

성령하나님은 누구의 이름으로 보내심을 입느냐에 따라서 그 이름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내심을 입는 분은 보내시는 분에게 종속이 됩니다.

보내심을 입는 분은 특사와 같은 것입니다.

특사는 보낸 일 이외는 할 수가 없습니다.

 

성자 하나님이나 성령 하나님이나 모두가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무슨 일이라도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역사 속에 보내심을 입을 때는 보내신 분이 주신 임무만 수행하시는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입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을 하시면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성령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그럼에도 예수그리스도에게 종속된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성도들 안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하셨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도 예수그리스도에게 종속이 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보내심을 입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여서 보내심을 입은 성령님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이루신 구속 사역을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이루시는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신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봅시다.

 

요 14: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5:26절.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 16:13-14절.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성령이 오면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가르쳐 주신다고 하십니다.

성령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예수님에게 들은 것만 말하신다고 합니다.

성령이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성령은 철저히 예수님에게 종속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예수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 하실 자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원자가 아니고 오직 자기 백성들만의 구원자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주신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성령님을 자기 백성들에게 보내서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믿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말을 증거하자 그 증거를 받는 자들과 받지 않는 자들로 나누어지게 된 것입니다.

증거를 받는 자들은 성령께서 그들 속에서 믿어지게 하신 것이고 증거를 받지 않는 자들은 성령이 그들 속에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영으로 보내심을 입은 성령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에게만 들어가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지게 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성령의 보증이라고 합니다.

 

성도에게는 성령의 보증이 있습니다.

자기 안에 믿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 믿음이 바로 성령의 보증인 것입니다.

 

정리하면,

성부 하나님은 계획을 세우시고,

성자 하나님은 그 계획을 이루시고,

성령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자기 백성들 속에서 집행을 하시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합력하여서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 사람을 창조 하실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고 하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천국에서 세 분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고,

일곱 인으로 봉한 책을 취하신 어린 양은 성자 하나님이고,

어린 양이 이루신 일들을 자기 백성들에게 믿어지게 하시는 일을 하시기 위하여 온 세상으로 보내심을 입은 일곱 영은 성령 하나님입니다.

 

이를 우리는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삼위일체 라는 말은 성경적 용어가 아닙니다.

헬라 철학에서 유래가 된 말입니다.

 

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 말이 없습니다.

인간들이 세 분 하나님을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철학적인 언어로 세 분 하나님은 모두가 동일한 하나님으로서 각자 인격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삼위일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 분 하나님 모두가 인격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삼위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하나의 뜻을 이루어간다는 의미에서 일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 하나님 속에 세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세 하나님이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한 뜻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그냥 사도 요한이 보고 증거 한 것처럼 천국에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이해하면 됩니다.

삼위일체를 설명 하려고 하면 더 복잡해집니다.

그러므로 가급적이면 삼위일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분석하려고 하지 말고 사도 요한이 본 것처럼 하늘나라에는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과 성령하나님이 계시는구나 라고 성경대로 믿으시면 됩니다.

 

예수님이 기도 하실 때 위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에게 하셨습니다.

이 일을 성령 하나님이 곁에서 도우셨습니다.

성자는 기도 하고 성부를 들으시고 성령은 도우시고 세 하나님은 각자 할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보혜사가 오면 그 때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을 하고 계심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믿어져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입니다.  

이게 안 믿어지면 신앙생활이 미친 여자 널뛰듯이 조석(朝夕)으로 변하게 됩니다.

아침에는 구원 받은 것 같은데 저녁이 되면 난 아무리 생각해도 가짜인가 봐 라고 우울증에 걸려서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축 쳐져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안 믿어지니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자신의 구원의 확신을 묻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받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내 안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이론적으로 설명을 할 수는 있어도 그 증거는 본인만 알 수가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성령이 임하면 자연적으로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예전에 TV에서 신구가 게맛살을 광고 할 때 ‘니들이 게 맛을 알어’ 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게 맛은 먹어 본 사람만이 알 수가 있는 것처럼 구원도 성령이 임하여 구원을 받은 사람은 설명이 필요가 없이 그냥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름 속에는 각각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하였습니다.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사방으로 흘러가는 네 강의 이름 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네 근원으로 갈라져 각각의 이름으로 흐르는 강도 각각의 이름이 담고 있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수 강이니까 각자의 이름이 품고 있는 생명을 낳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음식이 사람의 성격을 만든다고 합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말하면 사람은 성격에 맞는 음식을 먹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초식 동물들은 온순하고 육식 동물은 사나운 것입니다.

 

강물이 음식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물을 마시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성품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성품이 물을 찾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에덴동산의 네 강물을 살펴보면 영적인 의미를 읽어 낼 수가 있습니다.

 

먼저 각각의 이름이 담고 있는 의미를 간단하게 문자적으로 살펴봅니다.

 

첫째 강의 이름은 “비손”이라고 합니다.

 

이는 “풍성하다” 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비손이라는 강물을 마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풍성하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해도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는 합니다.

 

이는 “터져 나간다” 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기혼 강물을 마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활발합니다.

무슨 일을 해도 추진력이 강해서 진취적으로 일을 하게 됩니다.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는 합니다.

 

이는 “화살처럼 빠르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힛데겔 강물을 마시는 사람들은 빠릅니다.

무슨 일을 하면 굼뜨지 않고 즉각적으로 추진하고 실행을 합니다.

 

넷째 강의 이름은 “유브라데”라고 합니다.

 

이는 “달콤하다” 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유브라데 강물을 마시는 사람들은 달콤합니다.

무슨 일을 해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사람들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이것은 교훈적인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는 신약에서 강물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알 수가 있습니다.

 

구약은 표상이고 신약은 실상입니다.

에덴동산의 강물은 표상입니다.

실상은 신약에 따로 있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기록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 얻을 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은 모두 나에게 대하여 기록한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에덴동산의 강 이야기도 당연히 예수님과 관련되어진 이야기로 풀어가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후대에 성도들이 이런 의문을 품게 될 것들을 하나님께선 미리 아시고 앞선 선지자들을 통하여서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럼 성경에서 강물을 어떻게 말해주고 있는지를 구약에서부터 시작해서 신약으로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에스겔 선지자에게 에덴동산의 강을 보여 주셨습니다.

 

에스겔은 성령에 감동으로 에덴동산에 흐르던 그 강물을 보았습니다.

 

에스겔 47장을 봅시다.

 

겔 47:1-12절.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2.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3.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4.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5.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6.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7.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 9.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 또 이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11.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에스겔은 성령으로 세워진 성전을 보았습니다.

그 성전을 여호와 삼마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성전 문지방에서 강물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 물이 처음에는 발목에 잠길 정도로 흐릅니다.

그러다가 차츰 무릎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온 몸을 잠그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창일하게 덮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강물이 가는 곳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강가에 각종 실과나무들을 자라게 하면서 달마다 새로운 실과들을 맺히게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본 물의 발원지가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성전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삼마라는 말은 여호와께서 그 가운데 계심이라는 말입니다.

에스겔이 본 강물이 에덴에서 흐르는 그 강물인 것입니다.

이러면 여호와 삼마 라고 하는 성전이 곧 에덴이 되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흐르는 강물이 가는 곳마다 생명을 살리고 치료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에덴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그 강물이 이 세상에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한다는 것을 설명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본 그 강물을 신약 시대에 밧모 섬에서 사도 요한이 보았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을 봅시다.

 

계 22:1-2절.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사도 요한이 천국에서 한 강물을 봅니다.

그 강물은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내리는 생명수 강인 것입니다.

생명수 강의 발원지가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보좌이기도 하고 어린 양의 보좌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 양의 보좌는 같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성전이고 어린 양이 계신 곳이 성전인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는 에덴이었고,

에스겔에서는 성전이었고,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입니다.

 

에덴동산의 강물이나,

에스겔이 본 강물이나,

사도 요한이 본 강물은 같은 것입니다.

다르게 말을 할 뿐 영적의미는 다 동일한 것입니다.

 

에덴이 성전이고,

성전이 에덴이고,

에덴이 어린 양의 보좌이고,

성전이 어린 양의 보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생명수 강 이야기를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을 봅시다.

 

요 4:3-14절. “예수께서 ~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 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 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가는 도중에 사마리아를 가십니다.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동네의 한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온 한 여자를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생수에 관한 이야기를 해 줍니다.

 

예수님이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여인이 그런 물이 있으면 자기에게 좀 달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은 사람들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물이라고 합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물을 요한복음 7장 초막절 설교에서는 생수의 강이라고 합니다.

 

요 7:37-39절.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사람의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의 강이 있습니다.

이를 성령이라고 합니다.

 

창세기에서는 에덴에서 흐르는 강이고,

에스겔에서는 성전에서 흐르는 물이고,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강이고,

요한복음에서는 성도들 속에서 솟아나는 강입니다.

 

예수님은 생수의 강을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이라고 하였습니다.

수가성 여인에게 주신다고 하신 샘물은 성령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사방으로 흐르는 강물에 실체가 밝혀졌습니다.

생수가 성령임이 밝혀졌습니다.

 

강물의 근원지로 본다면 에덴이나, 성전이나, 어린 양의 보좌나, 성도의 심령이나 동일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창조 시대에 에덴에서 흐르는 물이나,

구약의 에스겔 시대에 성전에서 흐르는 물이나,

예수님의 초림 때 성도들 속에서 흐르는 물이나,

예수님의 재림 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흐르는 물이나 다 동일한 물입니다.

 

강물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물입니다.

다만 시대에 따라서 다르게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곧 에덴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강물이 동산을 적시고 사방으로 흐르면서 지역에 따라 각각의 이름으로 흐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네 근원으로 흐르는 물은 그 근원은 같습니다.

다만 흐르는 동네에 따라서 이름만 다를 뿐입니다.

각 동네마다 “힛데겔”이나, “유브라데”나, “기혼”이나, “비손”이라는 이름으로 흐른다 할지라도 그 본질을 다 같은 물입니다.

 

장소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식으로 말하면 에덴이고,

에스겔 식으로 말하면 성전이고,

요한계시록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이고,

요한복음 식으로 말하면 성도들의 심령인 것입니다.

 

생수의 강의 발원지는 에덴이나 성전이나 하나님의 보좌나 성도의 심령이나 동일합니다.

성령이 임한 성도의 심령이 바로 에덴이고 성전이고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인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는 강물로 흘렀는데, 지금은 성도의 심령 속에서 성령으로 흘러넘칩니다.

 

이렇게 되면 에덴동산의 강 이야기는 먼 나라 이웃나라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네 강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네 강의 이름이 각각 다르듯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하심도 이름만큼이나 다르게 역사를 하십니다.

 

성경 이야기들이 성도들 속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 이야기가 우리 안에서 예수그리스도와 우리의 이야기로 들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의 성신으로 지어진 여호와 삼마의 이야기가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에서 흘러 나와서 달마다 열두 가지 과실을 맺고 만국을 소성케 하는 일들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성경의 이야기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예정이 된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이야기가 지금 현재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은 우리의 구원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 질 때 우리의 구원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고 창세전부터 예정이 된 것임을 알 수가 있어집니다.

이것이 믿어져야 이 세상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 안에 임한 성도는 이 사실이 믿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야~! 우리의 구원이 장난이 아니구나!

엄청난 사건이구나!

죽었다가 부활 하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동화 속 이야기만 같던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 이야기가 바로 우리의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지금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재림 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한다는 이야기가 소설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과거에는 막연하게 느껴지던 것들이 이제는 사실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동화 속 이야기인줄만 알았는데 이제는 사실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죽어도 다시 산다는 것이 실제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성령께서 성도들의 심령 속에서 생수의 강처럼 흘러넘치기 때문입니다.

 

그럼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사방으로 흐르는 강물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를 통해서 지금 우리 안에 오신 성령께서 무슨 일을 하시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강물이 네 곳으로 갈라져 흐른다는 말은 동서남북 온 세상으로 흐른다는 말입니다.

장소적으로 말하면 오대양 육대주로 흐른다는 뜻입니다.

인종과 민족으로 말하면 온 세계 모든 나라와 민족에게 흐른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모든 나라와 모든 민족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아프리카에 증거 되는 예수나,

유럽에서 증거 되는 예수나,

아시아에서 증거 되는 예수나,

오세아니아에서 증거 되는 예수나,

아메리카에서 증거 되는 예수나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구원자이십니다.

 

흑인도 예수로 구원을 받고,

백인도 예수로 구원을 받고,

황인종도 예수로 구원을 받습니다.

 

성령은 국가와 민족과 인종을 따지지 않고 예수가 믿어지게 하는 일을 하십니다.

성경은 온 세상에 증거 되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난 후 베드로가 하나의 언어로 설교를 하였는데 온 세상 사람들의 각국의 언어로 들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강물이 각각의 이름으로 흐른다는 것은 성령의 다양한 사역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특징을 여러 가지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불” 같다느니,

“바람” 같다느니,

“기름” 같다느니,

“비둘기” 같다느니,

“인” 같다느니,,,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령이 각 사람에게 일하시는 특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불같이 일하고,

어떤 이는 바람처럼 일하고,

어떤 이는 기름처럼 일하고,

어떤 이는 비둘기처럼 임한다.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서 각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들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이를 성령의 은사라고 합니다.

바울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은사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은사에도 직임적인 것과 직분적인 것과 사역적인 것과 성품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을 봅시다.

 

엡 4:8-12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승천을 하신 후에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선물은 은사입니다.

선물의 내용이 교회 안에 각양의 사역자를 주셨습니다.

이는 직분적인 은사입니다.

 

목사나 교사나 장로나 집사나 권사나 모두가 직분의 은사인 것입니다.

모두가 예수님께서 각 사람에 선물로 주신 은사이므로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 가르치는 은사를 주신 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온전하게 하고 교회를 돌아보아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자 함입니다.

 

로마서 12장을 봅시다.

 

롬 12:3-9절.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9.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몸에 많은 지체가 있듯이 교회 안에도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다양한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각각 받은 은사들이 다릅니다.

 

어떤 이에게는 예언의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섬기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가르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위로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구제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다스리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긍휼을 베푸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봅시다.

 

고전 12:3-11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

 

어떤 이에게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주셨고,

어떤 이에게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주셨고,

다른 이에게는 믿음의 은사를 주셨고,

어떤 이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를 주셨고,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의 으느사를 주셨고,

어떤 이에게는 예언의 은사를 주셨고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의 은사를 주셨고,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의 은사를 주셨고,

어떤 이에게는 각종 방언들 통역함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은사는 교회 안에 직분적인 은사들이라고 한다면,

로마서의 은사들을 교회 안에 성도를 돌아보는 사역적인 은사들이고,

고린도서의 은사들은 각 성도들이 신앙의 유익을 위한 은사들인 것입니다.

 

한 성령이지만 그 역사는 다양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자 사역은 다르지만 모두가 한 성령으로 봉사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나타나는 현상은 다양하지만 그 근원은 같은 것입니다.

근원이 같기 때문에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차별이 없으므로 다툴 일이 없는 것입니다.

각자 받은 은사로 감사함으로 섬기면 됩니다.

 

에덴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는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각자 사는 동네는 다르지만 그 강물의 발원지는 같은 것입니다.

어느 물을 마셨듯이 그 근원은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름을 가지고 다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름이라는 명분에 매이게 되면 자기하고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다투게 됩니다.

 

“비손”이라는 강가에 사는 사람들은 그 강물을 비손이라고 부르고,

“기혼”이라는 강가에 사는 사람들은 그 강물을 기혼이라고 부르고,

“힛데겔”이라는 강가에 사는 사람들은 그 강물을 힛데겔이라고 부르고,

“유브라데”라는 강가에 사는 사람들은 그 강물을 유브라데 라고 부를 것입니다.

 

에를 들어서 비손이라는 강가에 살던 사람이 기혼이라는 동네에 방문을 하였다가 강을 보고서 자기 동네에 있는 흐르는 물과 같아서 아 여기도 비손 강물이 흐르네 라고 하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기혼이라는 동네 사람들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

이 물은 기혼이라고 반발을 할 것입니다.

 

또한 그 옆에 힛데겔이라는 동네에 살던 사람이 지나가다가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이 물은 힛데겔 물인데 라고 할 것이고,

유브라데 사람이 무슨 소리야 이 물은 유브라데 물이구만 이라고 할 것입니다.

각자 자기 동네 이름으로 싸우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이름이라는 명분에 매이게 되면 동일한 물을 가지고 분쟁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이름에 집착을 하면 자기와 이름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배척하게 됩니다.

같은 근원의 물을 가지고 이름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이단이라고 할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입니다.

 

그럼 이런 분쟁을 무마 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이름(명분)에 매일 것이 아니라 물의 근원을 찾아가면 됩니다.

그 물의 근원을 찾아가면 서로 같은 발원지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발원지가 같다고 하면 이름 때문에 다툴 이유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발원지가 같은 것은 본질이 같다는 뜻입니다.

요즘 말로 DNA가 같다는 뜻입니다.

에덴에서 흐르는 생명수를 마신 사람들은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흐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인 성도들은 한 성령을 마셨다고 하였습니다.

 

고전 12:12-31절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왜 성령을 마셨다고 할까요?

마신다는 것은 물을 마셨다는 뜻입니다.

성령을 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생명이 생수처럼 부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는 사람들은 서로가 알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이건 마치 피는 서로 끌어당기듯이 한 성령을 마신 성도들은 성령이 성령을 서로 알아보고 끌어당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영이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이 같은 사람들은 이상하게 끌림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덴에서 발원하는 생명수를 마신 사람들은 한 성령을 마신 자들이므로 서로 다투지를 않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은 상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난 후에는 한 성령을 마신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차별이 사라졌습니다.

 

성령을 마시고 나니까 동일한 성령을 마신 사람들은 한 형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 교회인 마게도냐 교회가 일면식도 없는 유대인이 모인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으로 어려움을 당하자 자신들도 가난 한데 그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 성령을 마셨다는 것은 조상이 같다는 뜻입니다.

한 성령을 마셨다는 말은 한 생명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한 성령을 마셨다는 것은 한 사상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각 지체마다 사랑하는 방법이 조금씩은 다를 수는 있어도 그 본질은 같습니다.

모두가 그 속에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살아가는 것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신앙에는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단으로 다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근본 사상이 같다고 한다면 교단 가지고 싸울 일이 없습니다.

교단은 마치 네 강과 같습니다.

 

강의 이름이 다르듯이 교단마다 신앙의 모습이 서로 다를 수가 있습니다.

12 제자의 성격을 보면 다 다릅니다.

베드로는 급하고 요한은 온순합니다.

 

교회 안에는 급한 사람도 필요하고 온순한 사람도 필요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몸에는 많은 지체들이 있습니다.

지체마다 기능이 다릅니다.

 

어떤 이는 성령이 “기름같이” 부드러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어떤 이는 성령이 “바람같이”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케 하고,

어떤 이는 성령이 “불같은 모습으로” 열정적으로 일을 추진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어떤 이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온유하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12제자의 성격이 다 다르듯이 성도 개개인이 받은 은사 또한 다 다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급하고,

어떤 이는 느리고,

어떤 이는 차분하고,

어떤 이는 열정적일 수가 있습니다.

 

성격을 가지고 탓하면 안 됩니다.

또한 내 성격과 다르다고 배척해서도 안 됩니다.

나를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면 안 됩니다.

 

바울은 교회 안에 어떤 형제라고 하는 자들이 자신이 전해 준 교훈을 받지 않으면 사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원수 같이는 대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연약하여서 그럴 수가 있으니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마치 어린아이에서부터 어른처럼 신앙의 능력이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기를 먹을 만하고 어떤 사람은 아직까지 채소만 먹는다고 합니다.

고기 먹는다고 채소 먹는 사람을 가볍게 보지 말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채소를 먹고 어떤 사람은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와 다르다고 하여서 넌 틀렸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지체는 몸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체마다 다른 일을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몸을 위하여 일을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을 봅시다.

 

롬 12:3-12절.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권위 하는 자면 권위 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사도 바울은 각 사람에게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

즉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는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라고 합니다.

 

이는 각 사람마다 분량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따라서 은사가 각각 다르다고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같습니다.

본질적인 면이 같으면 비본질적인 것으로 타투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합창단과 같습니다.

합창단은 소프라노도 필요하고 알토도 필요하고 테너도 필요하고 베이스도 필요합니다.

모두가 연합하여서 하모니를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합창단원은 스스로를 뽐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팀을 위하여 스스로를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라고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자신이 못하는 것을 남이 잘한다고 해서 시기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잘한다면 박수를 쳐주어야 합니다.

그게 팀웍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를 섬기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대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섬기는 것을 은사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이 은사를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하였습니다.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하기 때문에 자랑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간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이해하고 참아주고 안아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그리스도의 몸을 헤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는 한 성령을 마신 자가 아니므로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작은 누룩이 온 몸을 퍼지게 하므로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이방인의 사고로 살아가는 자들을 쫓아내라고 강력하게 경고를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땅은 거룩한 땅이므로 땅이 비거룩 한 자들은 토하여 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만약에 가나안 사람들처럼 애굽의 풍속을 쫓아가면 그 땅에서 토하여 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쳐 준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예수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와 같습니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들의 모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가나안 땅처럼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 아닌 다른 생명을 가진 자들은 거부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생명과 다른 생명으로 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헤치는 자들이므로 사귀지 말로 쫓아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교회 안에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가진 자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는지 영 분별을 하라고 한 것입니다.

영 분별을 하라는 말은 에덴동산의 네 강으로 말하면 그 근원이 같은지 알아보라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영인지,

아니면 마귀의 거짓말하는 영인지 불별 하라는 뜻입니다.

 

구약의 아합 왕 시절에 천상에서 하나님께서 아합을 죽이고자 하는 회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아합을 죽일까 말씀 하시니까 이 때 하나님 앞에 서 있던 한 영이 나아와서 자신이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서 거짓 선지자들의 입에 들어가서 아합 왕을 미혹하겠다고 합니다.

거짓말 하는 영이 거짓 선지자들의 입에 거짓말을 넣어 주었습니다.

 

거짓말 하는 영을 받은 거짓 선지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번 전쟁은 대승한다고 왕에게 아룁니다.

이 때 참 선지자인 미가야는 이번 전쟁에서 아합 왕이 죽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거짓 선지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무슨 말을 하느냐?

자기들도 계시를 받았는데 이번 전쟁에서 대승을 할 것이라고 하면서 참 선지자인 미가야를 향하여 네가 바로 거짓 선지자라고 핍박하는 것입니다.

아합 왕은 거짓 선지자들이 말을 듣고 미가야를 옥에 가두고 전쟁에 나갔다가 미가야 선지자의 말대로 죽고 맙니다.

 

이 일은 지금도 교회 안에서 횡행하고 있습니다.

거짓 목사들이 하늘에 복음을 땅에 것으로 전락시켜서 교인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기복신앙으로 세상 것을 쫓아가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세상 것으로 부자 되는 것이 하나님께 복을 받은 증거라도 되는 냥 교인들로 하여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좇아가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에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이 있다고 하면서 잘 분별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다른 복음이고,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예수가 다른 예수이고,

인간들의 길흉화복을 점쳐주는 영이 다른 영인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보낸 영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 합니다.

성령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성령은 하늘에 신령한 복을 말합니다.

그러나 거짓 영은 인간을 자랑합니다.

이 세상에 것을 주겠다고 합니다.

땅에 물질의 복을 말합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를 보면 그 영의 출처를 알 수가 있습니다.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 나오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고,

크고 비밀한 것을 말할지라도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 나오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고.

자기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줄지라도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 나오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고,

산을 옮길만한 큰 일을 하고, 내게 있는 것으로 구제를 하였다 할지라도,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 나오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만 증거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만 자랑합니다.

성령은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사랑하고 예수그리스도만 자랑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흐르는 생명수 강은 예수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에덴에서 흘러오는 강물을 마신 자들은 예수그리스도만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만 자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만을 증거 하게 됩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말 할 수밖에 없습니다.

쌓은 선에서 선을 내어 놓고 쌓은 악에서 악을 내어 놓습니다.

선은 하늘의 말이고 악은 땅의 말입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하늘에 신령한 것을 말하고, 땅에 속한 자는 땅에 속한 육신적인 것들을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도 하늘에 소망을 두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증거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자랑한다고 하면 에덴에서 흐르는 한 성령을 마신 형제로서 사귐을 가져야 하지만,

인간의 의를 자랑하거나 이 땅에 소망을 두고서 세상 것을 쫓아가는 자들은 근원이 다른 물을 마신 자들이므로 멀리 해야 하는 것입니다.

 

유유상종입니다.

예수님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으로 짓는 집에는 은혜라는 예수는 합당치가 않습니다.

그래서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를 이단이라고 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율법주의자들로부터 버림당한 그 예수를 가지고 새로운 집을 짓습니다.

예수님을 모퉁이 돌로 삼아서 은혜와 사랑과 긍휼이라는 집을 집는 것입니다.

자비의 집을 짓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으로 세워진 신약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를 하늘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에덴동산의 강물이 흐르면서 어떤 일들을 일으키는지를 살펴봅시다.

 

창 2:10-14절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12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14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에덴에서 발원하여 흐르고 동산을 적시고 네 근원으로 갈라져서 흐릅니다.

“근원”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짜, yatsa {yaw-tsaw'} 라고 하는데 이는 ”시작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양육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이를 직역하면 시작도 하고 양육도 한다는 뜻입니다.

알다시피 에덴에서 발원하여서 흐르는 강은 성령을 상징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성령도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도 하시지만 거듭난 자들을 양육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다른 보혜사라고 하였습니다.

보혜사란 돕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다른 보혜사로 보내시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자기 백성들 속에서 이루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죄 아래서 난 자들을 죽이는 일을 하시고, 성령은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가는 것이 있습니다.

이 일을 성령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살려면 천국 백성으로 자라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일을 성령께서 성도 안에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 안에서 착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1장을 봅시다.

 

빌 1:6-11절.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한다고 합니다.

착한 일이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서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언제까지 이룬다고 합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를 말합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까지 성도들을 예수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충만해 진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한 것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함입니다.

 

롬 8:29-30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마리 아신 자들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려고 미리 정하셨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백성들을 만들고자 작정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한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이를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서 이루는 착한 일입니다.

이 일을 성령께서 성도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십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은 어린 양의 신부로 갑니다.

신부라는 말은 신랑과 동질이라는 뜻입니다.

신랑과 살려면 신부도 신랑과 같아야 합니다.

 

신랑이 사람이면 신부도 사람이어야 합니다.

신랑이 신이면 신부도 신이어야 합니다.

신랑이 사람이 몸으로 오신 것은 신부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신부가 하늘로부터 성령으로 거듭나서 영적 존재가 되는 것은 신랑이 하늘에 속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천국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계 4:2-3절.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하늘에 보좌가 있는 것입니다.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의 모습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녹보석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석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보석이면 아들도 보석입니다.

 

신랑이 보석이면 신부도 보석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흙에 속한 자들을 보석으로 만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 아들의 형상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를 에덴에서 흐르는 강이 가는 곳마다 보석을 생산해 내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첫째 강이 금이 있는 하윌라 땅으로 흐릅니다.

그 땅의 금은 정금입니다.

그리고 그 땅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가 보석들입니다.

 

이를 히브리어 스트롱코드 사전을 빌려서 이해해 봅니다.

 

“정금”이라는 말은 “토브” 라고 하는데,

이는 “좋은, 선하다, 선한 것, 기쁘게, 친절, 사랑하는, 값진, 준비된” 이라는 형용사입니다.

이것은 “선하다, 잘되다, 선을 행하다, 선하게 하다, 더 낫다, 기쁘게 하다” 라는 동사에서 유래가 된 말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에서 천지와 만물을 창조 하시고 난 후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이 “보기 좋게 창조를 하시고 난 후에 보시기에 좋았더라” 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베델리엄”은 히브리어로 “베도라흐{bed-o'-lakh}” 라고 하는데,

“조각들, 베델리엄(향기로운), 수지, 호박, 진주” 라는 뜻입니다.

“호마노”는 “쇼함{sho'-ham}”이라고 하는데,

이는 “희게 하다” 라는 어의(語義)를 가진 “얼룩마노, 호마노, 녹주석” 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에덴에서 흐르는 강이 사방으로 흘러가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보석들을 만들어낸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에덴동산에서 발원된 물을 마시는 자는 보석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을 받은 성도는 보석이란 말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보석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8장을 봅시다.

 

출 28:1-14절.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 곧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 2.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지니 3.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4. 그들의 지을 옷은 이러하니 곧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 속옷과, 관과, 띠라 그들이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아론으로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할지며 5. 그들의 쓸 것은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이니라 6. 그들이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공교히 짜서 에봇을 짓되 7. 그것에 견대 둘을 달아 그 두 끝을 연하게 하고 8. 에봇 위에 매는 띠는 에봇 짜는 법으로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에봇에 공교히 붙여 짤지며 9. 호마노 두개를 취하여 그 위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기되 10. 그들의 연치대로 여섯 이름을 한 보석에 나머지 여섯 이름은 다른 보석에 11. 보석을 새기는 자가 인에 새김 같이 너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그 두 보석에 새겨 금테에 물리고 12. 그 두 보석을 에봇 두 견대에 붙여 이스라엘 아들들의 기념 보석을 삼되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그 두 어깨에 메어서 기념이 되게 할지며 13. 너는 금으로 테를 만들고 14. 정금으로 노끈처럼 두 사슬을 땋고 그 땋은 사슬을 그 테에 달지니라”

 

하나님께서 출애굽 한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성막을 짓게 합니다.

그리고 아론의 가문을 제사장 가문으로 선택을 합니다.

아론은 대 제사장으로 삼고 그의 아들들은 일반 제사장으로 삼습니다.

 

제사장은 매일 성소에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대 제사장은 일 년에 단 한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립니다.

이 때 대 제사장이 입는 옷 위에 12가지 보석으로 만든 흉패를 입고 들어갑니다.

12가지 보석을 12 지파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대 제사장이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뜻합니다.

 

대 제사장은 예수님을 예표 합니다.

예수님께서 12 사도를 선택하십니다.

12 사도는 12 지파를 예표 하고 있습니다.

그럼 대 제사장이 12 지파를 안고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은 신약 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대 제사장이 되어서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아내서 하늘나라로 데려가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나라를 아버지께 바친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봅시다.

 

고전 15:22-24절.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모든 성도들을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십니다.

이것을 바울은 예수께서 나라를 아버지께 바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성도를 일컬어 하나님 나라라고 하였습니다.

 

벧전 2:9절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대 제사장이 12가지 보석 달린 옷을 입고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님이 12 사도들의 신앙 고백을 가진 성도들을 아버지에게로 데리고 가는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에선 예수님에 의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도가 곧 보석인 것입니다.

 

보석은 흙이나 돌이 큰 열에 의하여 만들어집니다.

이것은 흙에서 난 자가 불같은 성령의 말씀으로 거듭난 자들을 말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성령의 모습을 불의 혀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성령의 말씀이 불처럼 우리를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을 봅시다.

 

벧전 1:23-25절.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우리가 거듭난 것은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흙이었던 우리를 하늘의 보석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는 이 세상의 흙에 속한 자기 백성들을 하늘에 속한 보석으로 만들고자 함입니다.

이는 하늘 예루살렘의 성을 짓고자 함입니다.

 

하늘 예루살렘 성의 모습을 모형으로 주신 것이 성막입니다.

그래서 성막을 일컬어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성막을 어떻게 만드는지를 보면 하늘 예루살렘이 어떻게 만드시는지를 알 수가 있어질 것입니다.

 

그럼 성막을 만드는 일을 봅시다.

 

성막은 세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뜰과 성소와 지성소입니다.

뜰에는 60개의 기둥을 세우고 포장을 칩니다.

이것은 성막의 울타리 입니다.

 

그리고 울타리 안에 집을 짓습니다.

이를 성소라고 합니다.

성소를 짓는데 48개의 널판을 세워서 짓습니다.

 

성소의 널판은 조각목(아카시아) 나무에 정금을 입혀서 만듭니다.

조각목은 죄인을 상징하고 정금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죄인을 예수님이 감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감싸고 있는 죄인으로 하나님이 거하는 집을 지은 것입니다.

 

조각목에 정금을 입힌 것은 죄인이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옷을 입게 되면 죄인이 의로움을 입게 됩니다.

이것은 흙이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죄인이 보석이 될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이 감싸주실 때입니다.

예수님이 감싸주시면 세리나 창기도 보석이 됩니다.

 

이 일을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무가치한 흙에 속한 죄인이 하늘나라의 존귀한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를 보석으로 만들어서 하늘나라로 데려가시는 것은 하늘 예루살렘 성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하였습니다.

 

벧전 2:4-10절.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6.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배로운 돌이라고 합니다.

이는 보석이라는 뜻입니다.

보석도 돌입니다.

 

그러니까 보배로운 돌이신 예수님도 보석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의 보석인 예수라는 돌이 이 세상에 건축자들에게 버림을 당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인간의 의인 이 세상의 의로 하나님의 집을 짓는 자들입니다.

 

인간의 의로 집을 짓는 자들에게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집은 짓는 자들은 이단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집을 짓는 자들도 예수님처럼 버림받는 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버려진 돌들을 주어서 예수라는 모퉁이 돌 옆에 벽돌들을 삼아서 하나님이 거할 신령한 집을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하는 신령한 집이 바로 하늘 예루살렘 성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을 봅시다.

 

계 21:10-23절.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14.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15.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17.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 사십 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 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 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세째는 옥수요, 네째는 녹보석이요, 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 한 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정이라 21. 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22.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성령이 사도 요한을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 성은 12 가지 각종 보석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12 가지 보석으로 지어진 성이 바로 어린 양의 신부들인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예수님의 신부들인 것입니다.

성령이 죄인을 예수의 의로 감싸서 하늘나라 성전에 사용되어질 보석으로 만든 것입니다.

 

천국에 지어지는 성전에 보석의 종류들은 한 가지가 아니고 12 가지로 다양합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보석으로 성전을 지으시는 것입니다.

성도를 일컬어 한 성령을 마신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보석으로 말하면 서로가 다른 빛깔을 띠고 있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12 지파는 아브라함에게서 나왔습니다.

신약의 12 사도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근원은 하나입니다.

근원은 하나이지만 12 가지 색깔로 나타납니다.

 

이 땅의 교회는 하늘나라의 모형입니다.

교회 안 성도들의 신앙 색깔은 12 가지 보석들의 빛깔처럼 조금씩은 다를 수가 있습니다.

나와 색깔이 조금 다르다고 해서 배척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 사람도 주께서 부르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을에 단풍이 물든 산에 가보세요.

각각의 나무들 마다 색을 토해내어서 형형색색으로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풍경을 볼 때 탄성을 자아냅니다.

만약 단풍이 모두 하나의 색깔로만 되어 있다면 무미건조해서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양한 것들을 하나의 조화로 만들어서 멋진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란 이와 같습니다.

각양의 인간들이 모여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마치 합창단과 같이 모든 성도가 각각의 파트로 노래를 하여 웅장한 하모니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보면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는 천국에는 천하 만물이 각자의 방법으로 다 주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다양함 속에서 일치를 만들어 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근원이 같은 에덴에서 흐른 강물을 마신 자들은 차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비손이라는 물을 마신 사람이든

힛데겔이라는 물을 마신 사람이든,

기혼이라는 물을 마신 사람이든,

유브라데 물을 마신 사람이든지 그 이름 때문에 싸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한 근원으로부터 나온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피 안에서 화목 된 자들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서 하나님과 화목 된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모두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화목 된 자들이기 때문에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화목 된 자들은 예수그리스도만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만 증거 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분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만을 자랑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난 자는 예수그리스도만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에 간 24 장로들이 면류관을 벗어서 어린 양에게 던집니다.

이것은 자신들이 쓴 면류관은 어린 양으로부터 주어진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걸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홀로 다 이루신 것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사는 자가 에덴에서 발원한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수 강물을 마신 자들입니다.

이들이 하늘 나라 보석들입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자랑하는 자들이 보석인 것입니다.

이러한 보석들이 모인 곳이 하늘 예루살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를 일컬어 질그릇 속에 보화를 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보화입니다.

 

신랑이 보석입니다.

그럼 신부도 보석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셔서 예수의 신부가 될 자들을 보석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보석으로 만들어진 자들로 지어진 하늘 예루살렘 성에 예수그리스도는 신랑으로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강가에서 생산되는 보석이고,

하늘 예루살렘 성의 보석이고,

어린 양의 신부인 것입니다.

 

보석은 빛을 받고 빛을 발하여야 합니다.

참 빛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서 각자 아름다운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리 할 때 주변에 생명의 역사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빛을 밤 하늘에 별들처럼 어두운 세상에 비추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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