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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1~3 강해

♣14강. 아담, 흙과 생기 그리고 생령

by coroa 2020. 10. 29.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14강. 아담, 흙과 생기 그리고 생령

-.정낙원 목사

 

 

 

지난 시간 창세기 1장의 사람과 창세기 2장의 사람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창세기 1장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하늘에 속한 사람이고,

창세기 2장의 사람은 흙과 생기로 지어진 땅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성경의 순서로는 창세기 1장의 사람이 앞서서 등장합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창세기 2장의 사람이 먼저이고 1장의 사람은 나중인 것입니다.

창세기 2장의 사람이 창세기 1장의 사람이 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은 어떻게 창세기 2장의 흙에서 난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는 사람이 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창세기 2장의 사람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창세기 2장의 아담을 어떤 존재로 보느냐 입니다.

아담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성경 해석이 달라지게 되므로 굉장히 중요한 시간입니다.

 

아담을 어떤 존재로 보느냐 에는 두 해석 있습니다.

 

아담을 완전한 사람으로 보느냐?

아담을 불완전한 사람으로 보느냐?

여기서 완전하다 불완전하다 라는 말은 영적인 존재이냐 육적인 존재이냐를 말합니다.

 

대부분의 해석이 아담을 영적인 존재로서 완전한 자로 보고 있습니다.

과연 그러한가?

결론적으로 말해서 아담은 영적 존재도 아니고 완전한 자도 아닙니다.

 

아담은 영적 존재가 되기 위하여 창조가 된 자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해석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지금까지는 아담을 영적 존재로 보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서로의 해석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이걸 어떻게 해소 할 수가 있을까요?

어느 것이 맞느냐 라는 정답을 찾는 것으로 따진다면 어느 한 쪽은 틀림이 됩니다.

 

저는 과거의 해석이 틀렸다고 보지 않습니다.

다만 과거에는 희미하던 것이 지금은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뿐입니다.

이는 계시의 점진성과 복합성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계시의 점진성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계시가 점점 더 확대가 되면서 심층적으로 구체화 되어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계시의 복합성이란? 동일한 내용 속에 계시가 이중 삼중으로 중첩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야기 속에는 인류의 이야기도 담겨져 있지만,

또한 예수그리스도와 성도의 이야기도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성경의 이야기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 사건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육적인 출애굽을 말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예수님의 초림 때 일어나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빠져 나오는 영적인 출애굽 이야기도 담겨져 있고 또한 예수님의 재림 때 이 세상을 떠나는 완전한 출애굽이 동시적으로 담겨져 있습니다.

 

구약 시대는 실제적으로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죽음에서 살아나서 출애굽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초림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율법이라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 때는 이 세상에서 공중으로 빼내심을 입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출애굽 속에는 예수님의 초림 때 일어나는 영적 출애굽과 예수님의 재림 때 일어나는 실제적 출애굽이 삼중 계시로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단순하게 이스라엘의 출애굽으로만 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그리스도에 의한 자기 백성들 구원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구약에서는 아브라함 언약으로 생겨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곳에서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건 장차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자기 백성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 지를 미리 그림자 적으로 보여주는 예표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을 그림자이고 신약을 실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은 구약의 예표적 사건 속에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실제적으로 하시는 일의 내용들을 담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이중 계시 또는 삼중 계시를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는 단순하게 그 사건만 보았지만 이제는 그 사건 속에 담겨져 있는 실제적 의미를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성경의 진의를 온전하게 해석 할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역사의 시간 속에서 점진적으로 완성 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씨눈처럼 희미하게 보이던 것들이 역사의 종말을 다해가면서 그 정체가 온전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펼쳐지는 창세전 언약은 마치 어린아이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른으로 점점 자라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를 계시의 점진성과 심층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는 안목도 과거에는 희미하게 보던 것들이 이제는 심층적으로 더 깊어지고 더욱 선명하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해석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땐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 때는 어린아이 같이 생각하고 말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어린아이 때가 틀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땐 그게 맞았습니다.

그러나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하고 어린아이 같이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른은 어른으로서의 언행심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보다는 계시의 폭이 점점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높아져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너무 단편적이면서 단선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역사성에만 너무 치우쳐서 봅니다.

그러다 보니까 영적 의미를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하늘의 이야기를 풀어 가십니다.

 

하늘의 이야기를 영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육적 이야기 속에서 영적 이야기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성경의 더 깊은 맛을 느끼게 됩니다.

성경의 해석을 “옳다” “그르다” 라는 이분법적으로 보는 것은 어린아이 수준의 발상입니다.

 

어린아이와 어른은 생명이라는 본질적 면에서는 동일합니다.

어린아이는 뇌가 하나이고 어른은 뇌가 두 개가 아닙니다.

어린아이는 심장이 하나이고 어른은 둘이 아닙니다.

다 동일합니다.

 

어린아이나 어른은 사람이라는 가치에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생명의 가치에는 동일하고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고 삶을 살아가는 삶에 깊이를 이해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인생을 이해하는 것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생명을 자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라가는 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의 신앙을 어린아이에 머물지 말고 장성한 자로 자라가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고 보는 눈이 더 깊어지고 넓어지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하심은 한없이 넓고도 깊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는 너무도 깊고 넓어서 우리 인간의 지혜로는 도무지 측량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아가는 일에 있어는 어린아이로 머물지 말고 어른으로 자라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편의상 어린아이와 어른의 차이를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차이라고 봅시다.

그럼 어린아이 신앙 일 때는 어린아이 수준의 해석이 필요하고, 어른의 신앙은 어른의 수준에 맞는 해석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 안다고 하던 것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온전하지 않음으로 드러날 때가옵니다.

 

저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과거에 설교를 보면 왜 이렇게 밖에 이해를 못하였지 라고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물론 그 때는 엄청난 깨달음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까 너무도 얕은 것입니다.

 

과거에 설교가 틀렸나요?

아닙니다.

그 땐 그렇게 보였고 지금은 더 깊이 보이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자람과 함께 계시의 폭을 넓혀 주신 것입니다.

 

신앙의 자람에 따라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달라지듯이 하나님의 계시 또한 역사 속에서 펼쳐지는 것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더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경을 해석하는 깊이는 역사의 시간표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계시가 과거보다 이 시대가 더 많이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의 역사를 사계절로 본다면,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신약의 교회 시대가 시작이 된 것은 봄이라 할 수 있고,

중세와 종교 개혁 시대는 여름이라 할 수 있고,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이 시대는 가을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 하여서 천년왕국이 이루어지면 그곳은 안식하는 곳이므로 가을 추수를 다 끝내고 푹 쉬는 겨울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역사가 그 끝을 다해가는 종말의 때입니다.

그럼 봄과 여름에 성경을 이해하던 때와는 다르게 됩니다.

과거에는 희미하던 것들이 이제는 분명하게 드러나는 때입니다.

그럼 이 시대는 과거에 우리의 믿음에 선배들이 성경을 이해하던 것 보다는 더 깊은 해석들을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과거에 우리 선배들이 보아왔던 성경의 해석이 지금 우리가 보는 것과 다른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틀렸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는 그게 맞았고 지금은 이게 맞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의 해석이 과거 보다 조금 더 깊기 때문에 앞선 신앙의 선배들의 해석이 다 틀렸다고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건 지식의 교만입니다.

 

현재는 과거의 바탕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과거가 없는 현재는 없습니다.

그럼 과거의 해석이 조금 부족하다고 해서 틀렸다고 부정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 해석도 그러합니다.

지금의 해석은 과거에 믿음의 선배들이 해석한 것을 바탕으로 해서 더 깊은 것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방 속에서 창조가 나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과거의 해석이 미흡하다고 해서 다 틀렸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른이 되었다고 하여서 어린아이의 시절이 다 틀렸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을 정답 문제풀이 하는 식으로 접근을 하니까 과거는 다 틀렸다고 망발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들과 부대끼는 삶의 흔적들입니다.

성경 속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희노애락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걸 얼마나 우리 이야기로 웅숭깊게 누리느냐가 중요합니다.

 

인생에는 정형화 된 정답이 없습니다.

각자 어떤 인생을 살아가느냐만 있을 뿐입니다.

모든 인생은 다름의 문제이지 정답의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다르다고 해서 틀렸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리고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어서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을 때 그 모습을 보고서 제자들이 마리아에게 그 귀한 것을 허비한다고 나무랄 때 예수님께서는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건 많고 적음이라는 량(量)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구는 많이 탕감해 주고 누구는 적게 탕감 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모두에게 골고루 동일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많이 깨닫고 어떤 사람은 적게 깨닫습니다.

깨닫는 만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농도도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많이 깨닫는 사람은 마리아처럼 향유가 든 옥합을 깨트려서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길 것이고 적게 깨닫는 사람은 제자들처럼 마리아의 행위가 허비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펼쳐가는 창세전 언약은 계시의 특성상 과거에는 감추어진 것들이 지금은 점진적으로 심층적으로 열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요한계시록과 같은 예언서는 과거에는 상징으로 보았지만 지금은 실상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과거처럼 상징으로만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시대 목사님들은 과거의 목사님들보다 더 깊은 영적 비밀들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상상도 하지 못하던 것들을 이 시대 목사님들은 밝히 풀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아담을 이해하고 풀어보면 과거에 맛보지 못하던 아담 속에 담겨진 엄청난 비밀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담 속에는 어떤 비밀이 담겨져 있을까요?

 

우수개 소리 한번 하고 갑시다.

언중유골이니 참고로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을 어떤 수준의 사람으로 만드셨나요?

어린아이일까요?

어른일까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령을 하시는 것을 보아서는 어린아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요.

아담이 각종 짐승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을 보아서는 어른임에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모든 사물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판단한다는 것은 지혜에 있어서 장성하다는 증거가 되므로 어른이라고 하여도 틀린 것은 아니라고 보입니다.

 

알다시피 모든 생명은 자람이라는 매카니즘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어린아이로 태어나서 어른으로 자라가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처음 창조가 된 아담은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라가는 과정이 없이 곧 바로 어른으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므로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공생에를 시작 하실 때의 모습이 아담의 창조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셨으니 아담도 30세로 창조가 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담 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들의 창조가 그러합니다.

처음 창조가 된 만물들은 다 성장한 것으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생명을 낳을 수 있는 모습으로 창조가 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담이 아내와 한 몸을 이루어 가정을 만든 것처럼 만물들도 각각 자기의 생명들을 낼 수 있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짐승들도 새끼를 낳을 수 있는 어른으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지 마세요.

 

왜 아담의 모습을 어른이라고 하느냐 하면 그 속에 복음의 비밀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사귐은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어른이 되어야 예수님과 한 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이 된 것은 어른의 일입니다.

한 몸이 되면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 이야기는 예수님과 성도 이야기입니다.

 

그럼 우리가 언제 예수님과 한 몸이 됩니까?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님과 한 몸이 되어야 하나님의 비밀들을 알 수가 있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아담처럼 어른이 되어야 비로소 시작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포도나무 비유를 하시고 난 후에 내가 이제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께 들은 모든 비밀들을 알려 주신다고 합니다.

 

요 15:15절.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이 일이 언제 일어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후에 부활하시고 승천을 하시고 난 후에 성령이 오시면 일어납니다.

이 말을 잘 음미하여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는 제자들은 종이라는 뜻입니다.

종에게는 주인이 하는 일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받기 전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멋진 신앙고백을 하였음에도 죽음에 맞닥뜨리자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도리어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핍박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는 예수님과 한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어린아이였지만 성령이 임하자 어른이 된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자기를 지키기 위하여 예수를 죽이지만,

어른은 예수를 지키기 위하여 자신을 죽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의 신앙을 두 과정으로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갈 4:1-11절.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두 과정을 겪게 하신다고 합니다.

분명히 유업을 아들임에도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같이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두었다고 합니다.

후견인과 청지기를 율법이라고 합니다.

 

율법을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고 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것을 어린아이라고 합니다.

어린아이에게는 집안의 일을 상의하지도 않을 뿐 더러 알려주지도 않습니다.

어린아이는 상의 할 대상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을 때는 하나님에 대하여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것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성령이 임하기 전의 제자들의 모습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이야기 하자 베드로가 앞장서서 하는 말이 자기가 죽더라도 예수님은 막아 주겠다고 하자 예수님은 도리어 네가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 번을 부인하고 난 후 닭소리를 듣고 통곡을 하였습니다.

통곡을 하였다는 것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진심으로 예수님을 위하여 대신 죽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각오와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이는 아직까지 성령이 오시기 전이므로 베드로의 각오는 어린아이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담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일이 닥치기 전에는 호언장담을 하였지만 막상 사건이 닥치자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의 모습이 바로 어린아이들과 같은 모습인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우리가 율법 아래 있을 때의 모습입니다.

율법 아래서는 각오한 것을 지킬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결국 그림의 떡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각오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믿어지게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신 상태를 한 몸이라고 합니다.

한 몸은 부부가 하나가 된 것을 말합니다.

한 몸이 되면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을 때는 종이라고 하고 성령이 오시고 난 후에는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아들이라고 하는가요?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시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예수그리스도가 믿어지는 일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다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으신 것을 다 통달을 하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어른이 되어야 아담이 짐승들에게 각각의 이름을 지어준 것처럼 모든 것을 판단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담이 왜 장성한 자로 창조가 되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창세기 2장의 아담이 어쩐 존재인지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창세기 1장은 성경 전체의 내용을 담아 놓은 목차와 같습니다.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의 창조가 역사 전반에 걸쳐서 일어나게 됩니다.

이미 일어난 것도 있고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있고 장차 이루어질 것도 있습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창조의 첫째 날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라고 한다면 일곱째 날은 예수님이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지금은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직전에 있으니 여섯째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역사 속에서 여섯째 날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겠지요.

 

그것이 짐승의 창조와 사람의 창조인 것입니다.

짐승이 사람이 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짐승 같은 죄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아담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럼 인류 역사의 시작을 봅시다.

창세기 1장의 실제 내용은 창세기 2장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창세기 2장에서부터 인간의 역사는 시작이 되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 2장 4절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대략(大略)”이라는 말은 “톨도트”라고 하는데,

이는 “후예”, “자손”, “계보”, “역사” 등 다양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약성경 마태복음 1장 1절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족보로 나타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를 “비블로스 게네세오스” 라고 합니다.

“비블로스 게네세오스”는 “예수그리스도의 세계” 라고 할 때 세계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는 말은 예수그리스도의 “족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창세기 2장의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라는 말은 인류의 족보라는 말입니다.

창세기 2장 이후로는 아담의 후예들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인간의 “대(代, generation)”를 이어가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럼 인류의 시작을 여는 사람의 창조 모습을 살펴봅시다.

 

창 2:7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십니다.

그리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십니다.

그러자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흙(사람) + 생기 = 생령

 

잘 보시면 사람과 생령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흙으로 지어진 자는 사람이라고 하고,

흙 속에 생기가 들어간 사람은 생령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광의적으로는 생령도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는 사람과 생령은 완전히 다릅니다.

사람은 흙이지만 생령은 흙 속에 생기가 담겨진 생령으로서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냥 흙인 사람과 흙 속에 생기가 담긴 생령은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생기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사람과 생령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생령인 아담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생령인 아담을 어떤 존재로 보느냐에 따라서 성경의 해석이 달라집니다.

그럼 창세기 2장 7절의 생령인 아담을 어떻게 보는지 각각의 성경 번역본으로 살펴봅시다.

 

(한글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표준새번역)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원어번역성경)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서 취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된지라”

 

(공동번역)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현대인성경) “그때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티끌로 사람을 만들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자 ‘산 존재’가 되었다”

 

(킹제임스성경)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다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니라”

 

각 번역본들을 보면 조금씩 다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성경을 보는 안목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왜 동일한 내용을 서로 다르게 볼까요?

이는 깨닫는 차이 때문입니다.

 

한글개역 성경은 아담을 “생령(生靈)”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령은 영적인 존재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한글개역본을 텍스트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교회 대부분은 한글개역본 영향을 받아서 생령인 아담을 영적 존재로 보고 있습니다.

이건 애석하게도 오역한 것입니다.

 

다른 번역들은 어떤 한가요?

 

공동번역은 “그냥 사람”으로 보고 있으며,

현대인의 성경과 “산 존재”로 보고 있으며,

표준새번역과 원어번역은도 “생명체”로 묘사하고 있으며,

개정개역에서는 각주를 통해서 생령을 “그냥 생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킹제임스버전은 “살아 있는 혼”이라고 합니다.

 

종합하여서 보면 한글개역 성경은 아담을 영적인 존재로 보고 있는 반면에 여타 다른 번역본들은 그냥 “살아있는 존재” 정도로 보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다른 번역본들은 생령을 살아 있는 존재는 육적인 존재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영적인 존재와 육적인 존재는 완전히 다릅니다.

 

영적인 존재는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육적인 존재는 구원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영적인 존재와 육적인 존재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납니다.

그러므로 “흙”과 “생기”로 지어진 생령인 아담의 존재가 어떠한지를 아는 것은 앞으로 성경을 해석해 가는 데에는 엄청난 차이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처음부터 영적인 존재였느냐,

아니면 육적인 존재이냐의 차이는 성경의 중심 주제인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와 바로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영적인 존재라고 한다면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와는 상관이 없는 자가 됩니다.

영적인 존재에게는 더 이상 영적 존재로서의 구원이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아담이 육적인 존재라고 한다면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와 직접적인 상관이 있어지게 됩니다.

아담이 육적 존재라고 한다면 아담도 구원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아담이 어떤 존재인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것도 성경을 통해서 알아야 합니다.

인간들 상식으로 유추해서는 안 되고 성경 속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성경 속에는 답이 있습니다.

 

그럼 바울은 아담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살펴봅시다.

 

고전 15:45절. “기록 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New KJV) “And so it is written, “the first man Adam became a living being.” 

                   The last Adam became a life-giving spirit.”

 

(헬라어원문) “ou{tw" kai; gevgraptai, Egevneto oJ prw'to" a[nqrwpo" Ada;m eij"

                    yuch;n zw'san, oJ e[scato" Ada;m eij" pneu'ma zw/opoiou'n.”

 

바울은 생령인 첫 아담은 “산 영”이라 하고,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첫 아담은 창세기 2장의 흙 속에 생기가 담긴 생령인 아담을 말하고,

마지막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산 영”은 어떤 것이고,

“살려주는 영”은 어떤 것인가요?

 

“산 영”은 그냥 살아 있는 존재이고,

“살려주는 영”은 생명을 주시는 창조주라는 뜻입니다.

 

이를 킹제임스 버전에서 잘 번역하고 있습니다.

첫 아담은 “a living being” 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살아 있는 존재”라는 뜻이고,

마지막 아담은 “a life-giving spirit” 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생명을 주는 영”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첫 아담을 그냥 살아 있는 육적인 존재로 해석하고 있고, 마지막 아담인 예수그리스도는 영적 존재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생령을 히브리어로 “네페쉬 하야” 라고 합니다.

 

“네페쉬 하야”는 “네페쉬”와 “하야” 라는 두 단어가 합해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이것은 “숨” “호흡”이라는 “네페쉬”와, “생존” “존재”를 의미하는 “하야”가 합해서 된 말로서 그대로 합성하면 “숨을 쉬면서 살아 있는 존재” 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킹제임스 버전은 “a living being(리빙 빙)”이라고 하였습니다.

“리빙 빙”은 살아 있는 존재를 말합니다.

이걸 바울은 “산 영”이라고 하였습니다.

산 영이란? 영적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살아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최초로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을 한 70인 역에서는 히브리어 “네페쉬 하야”를 헬라어로는 “푸쉬켄 조산(yuch;n zw'san)”으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히브리어 “네페쉬 하야”를 헬라어로 번역한 “푸쉬켄 조산(yuch;n zw'san)”은 영을 말하는 “프뉴마(pneu'ma)”와는 다른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이 70인 역의 번역을 그대로 인용한 것은 자신이 보기에 첫 아담은 영적인 존재가 아니고 그냥 “살아 있는 존재” 라는 것입니다.

“리빙 빙”(a living being)의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생령” 즉 “네페쉬 하야” 라는 히브리어의 뜻도 영적인 개념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이 단어는 창세기 1장 20절과 창세기 2장 19절에서 말하는 하늘과 땅과 바다에 있는 각종 짐승들을 뜻하는 “생물(生物)”을 말할 때도 동일하게 “네페쉬 하야” 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생물들을‘ 네페쉬 하야’ 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2장의 흙으로 만든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도 ‘네페쉬 하야’ ‘생령’인 것입니다.

“네페쉬 하야”는 사람에게만 사용된 것이 아니고 모든 땅의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두루 사용되었습니다.

 

만약 “네페쉬 하야”인 생령의 사람을 영적인 존재로 본다면 동일한 “네페쉬 하야”인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도 영적인 존재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보아도 짐승을 영적인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아담과 짐승이 다른 점은 아담에게는 “생기”가 주어졌지만,

짐승들에게는 생기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생기가 담긴 아담도 생령이라고 하고 생기가 담기지 않은 생물들로 생령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아담 속에 담겨진 생기 역시 영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자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라고 한 것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로보건데 창세기 2장의 흙으로 지음을 받은 아담은 영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자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 존재란? 하나님과 같이 영생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런 뜻에서 “네페쉬 하야”인 아담은 영생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게 입증이 되었습니다.

아담이 영생 하는 자가 되려면 생명과를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반드시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라고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사람과 짐승은 동등하게 살아 있는 존재라는 뜻으로는 동일하지만 그 속에 담겨진 생명의 내용을 보아서는 다른 존재입니다.

사람 속에는 생기가 담겨져 있고 짐승에겐 생기가 담겨져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동일하게 생령이라고 하는 것은 앞으로 인류 역사 속에서 풀어 가는 창세전 언약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동일한 사람인데 두 부류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람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담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생명이 담기지 않은 사람은 마귀의 자녀로서 짐승이라고 합니다.

 

이건 마치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지만 둘은 다른 아들이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스마엘은 가문을 이어가는 약속이 주어지지 않았고,

이삭에게는 가문을 이어가는 약속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새 언약적인 관점에서 갈라디아서에서 해석을 해 주었는데,

이삭은 성령으로 난 약속의 아들이라고 하고, 이스마엘은 육으로 난 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걸 창세기 식으로 표현하면 이삭은 생기를 담은 생령이라는 사람이고,

이스마엘은 생기가 담겨지지 않은 생물(짐승)이라는 생령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생기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럼 생기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불어 넣어준 “생기(生氣)”는 히브리어로 “니스마트 하임”이라고 합니다.

“니스마트 하임”이란 말은 히브리어로는 두 단어가 합해진 것입니다.

생명을 뜻하는 ‘생(生)’을 ‘하임’이라고 하고, 기운을 뜻하는 ‘기(氣)’를 ‘니스마트’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생기는 “생명”을 의미하는 “하임”이라는 말과, “바람, 호흡, 입김, 숨, 기운”을 의미하는 “네솨마”를 연결해 놓은 합성어입니다.

 

“니스마트”는 “네솨마”의 구성형(연계형)으로서 하나의 명사가 구성형이 되면 그 뒤에 오는 단어에 소유격 개념이 붙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런 경우에는 “생명의 바람”이나, “생명의 기운”이라는 개념이 됩니다.

그러므로 생기인 “니스마트 하임”은 “생명을 감지하는 어떤 능력”은 되지만 생명 그 자체는 아닌 것입니다.

 

아담에게 불어넣어진 생기 즉 “니스마트 하임”은 에스겔 37장 5-9절에서 해골골짜기에 나오는 “생기(루아흐)”와도 다른 것입니다.

에스겔 37장의 무덤 속에 있는 해골들을 살리는 생기는 “루아흐” 로서 이는 성령을 말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 2절의 수면 위에 운행하는 신(루아흐)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면 에스겔 37장의 모습과 팡세기 1장 2절의 모습이 영적인 의미에서는 동일한 것입니다.

에스겔 37장과 창세기 1장 2절의 “루아흐”는 창조의 영이신 성령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에게 주어진 생기는 창조의 영인 “루아흐”가 아닙니다.

그냥 생명을 감지하는 어떤 능력인 것입니다.

만약에 아담에게 주신 생기가 “루아흐” 라고 한다면 아담은 성령으로 거듭난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2장에서 아담에게 주어진 생기는 성령(루아흐)이 아닌 “니스마트 하임”으로서 영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참고적으로, 한글개역에서는 안타깝게도 창세기 2장의 아담에게 넣어준 생기(니스마트 하임)와 에스겔 37장의 생기(루하흐)를 동일한 의미로 본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한글개역에서는 생령인 아담을 영적인 존재로 오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자도 아닙니다.

영적 존재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를 말합니다.

아담이 영적 존재가 되려면 하나님의 생명이 담겨져 있는 생명과를 먹어야 합니다.

생명과 속에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으라고 한 것은 너는 영적 존재가 아니므로 생명과를 먹고서 영적 존재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 속에 생명을 담고자 하신 것입니다.



아담도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창세전 언약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는 것입니다.

그럼 아담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아야 하는 자인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담은 빈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그 속에 선악과를 담으면 죽은 자가 되고 생명과를 담으면 산 자가 됩니다.

그래서 아담을 지으시고 난 후 제일 먼저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을 것이고 생명과를 먹으면 영생 할 것이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죽은 자가 되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을 당하고,

산 자가 되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아담은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한 생명과는 먹지 않고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고서 죽은 자가 되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왜 아담이 생명과를 먹고 영적인 존재로 거듭나야 하는가요?

이는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같이 살아가려면 아담이 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생명과를 먹고 영적 존재가 되어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것이 아담을 창조한 목적입니다.

 

그래서 아담을 에덴에 두지 않고 동산에 두신 것입니다.

동산에 있는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어서 에덴으로 올라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그림이 바로 창세전 언약 속에 담겨져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라는 그림인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흙(죄인)에 속한 사람 속에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담아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여서 하나님 나라에서 그 은혜의 연광을 세세토록 찬미하는 것입니다.

 

에덴과 동산은 다른 곳입니다.

동산은 에덴에서 공급되는 생명수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에덴에서 강이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 시간 “네 강 이야기” 때 상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고 오늘은 패스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기를 주신 것은 그 생기로 무언가 하실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받은 생기가 에스겔서 37장에 쓰인 “루아흐” 였다고 한다면 아담의 본질이 영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담은 아직 영적 존재가 아닙니다.

영적 존재가 되려면 “루아흐”가 들어와야 합니다.

 

히브리어 “루아흐”를 헬라어로는 “프뉴마(pneu'ma)” 라고 하고,

영어로는 “스피릿(spirit)”이라고 하고,

우리말로는 “영(靈)”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신”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 “루아흐” 입니다.

그러나 아담에게 넣어진 생기는 창세기 1장 2절의 하나님의 신인 “루아흐”와는 전혀 다른 “네솨마” 즉 “니스마트 하임”인 것입니다.

 

생명의 기운인 생기(니스마트 하임)는 생명 그 자체는 아니고 생명으로부터 나온 어떤 기운을 말합니다.

이는 “생명을 감지하고 알아볼 수 있는 어떤 능력”을 의미합니다.

 

잠 20:27절. "사람의 영혼(니스마트)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잠언은 사람 속에 있는 “니스마트”는 여호와의 등불로서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니스마트가 생명을 알아보는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 속에 생명을 알아보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사람과 짐승은 동일한 생령이지만 사람에게는 생명을 알아보는 능력이 주어졌지만 짐승에게는 생명을 알아보는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는 생물학적으로 사람과 짐승을 판단하지만 성경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아느냐 모르느냐로 판단을 합니다.

이게 비밀입니다.

 

짐승과 사람이 다른 점은 짐승은 생기가 없으므로 생명을 감지할 능력이 없고, 사람은 생기가 있어서 생명을 감지할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생을 알아보는 능력을 가진 자는 사람이라는 생령이고, 영생을 알아보는 능력이 없는 자는 짐승인 것입니다.

 

이걸 신약적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는 분을 보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에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고자 오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알아보는 사람은 생기를 가진 사람이고, 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생기가 없는 짐승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입니다.

 

53-6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근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자 수많은 사람들이 따릅니다.

자신들의 왕이 되어서 맨날 기적의 떡을 먹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내 살과 피를 마시면 그 속에 생명이 있고 영생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두 반응들이 나타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슨 말 같지 않은 말을 하느냐 라고 하면서 떠나갑니다.

군중들은 기적의 떡을 먹었으면서도 그 기적을 일으키신 분이 바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몰라 본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신데 우리가 뉘게로 간단 말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떠난 간 사람은 왜 떠나갔고,

남아 있는 사람은 왜 남았습니까.

 

떠나간 사람은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능력이 없었고,

남아 있는 사람은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길을 가다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이에 제자들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도 하고 선지자라고 하더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고 묻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바요나 시몬에 네가 복이 있도다’ 라고 하시면서 네가 나를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려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보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을 구원하실 메시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려주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능력이 바로 믿음이고 그 믿음이 아담에게 주신 생기와 같은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예수그리스도를 알아보는 믿음이 주어졌지만,

불신자들에게는 예수그리스도를 알아보는 믿음이 주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되지만,

불신자들은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생기를 받은 사람과 생기를 받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임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생기를 받은 사람이고,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생기를 받지 않은 짐승인 것입니다.

 

그 속에 생기가 없는 사람(짐승)들은 떡 주는 예수로 보고 따르지만,

그 속에 생기가 있는 사람(생령)들은 예수님을 생명을 주는 메시야로 보고 따르게 됩니다.

 

예수를 알아본다는 것은 그 속에 생기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눈을 봄으로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고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어서 영생하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아담은 영생하는 자가 아니라 생명과를 통해서 영생하는 자가 되도록 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2장의 흙에서 난 아담이 생명과를 먹게 되면 창세기 1장의 말씀으로 난 아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흙에 속한 사람이 생명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먹고 영생하는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중심 이야기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흙에 속한 아담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 하늘에 속한 아담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두 아담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땅에 속한 아담들의 이야기와,

흙에서 났지만 예수라는 생명과를 먹고 하늘로 돌아가는 아담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두 족보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흙의 기운으로 살다가 죽은 자들의 족보가 있고,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땅에서는 죽었지만 하늘에서 살아난 자들의 족보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두 족보 가운데 어느 곳에 이름이 올라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흙에서 나서 흙의 기운으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아담인지,

비록 흙에서 낫지만 생기의 도움으로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을 먹고 하늘의 기운으로 살다가 하늘로 돌아가는 아담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생령과 짐승이 있습니다.

예수를 눈앞에 두고도 그 속에 생명을 보지 못하고 표적의 떡만 얻어먹고 돌아가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을 보고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쫓아간 제자들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생기” 즉 “니스마트 하임”의 도움으로 예수님이 영생을 주는 분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를 따라다닌다는 것은 생령인 제자들이나 짐승인 군중들은 동일하지만 그들이 가야 할 길은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로 내려간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생기로 영생을 알아보는 능력을 가진 생령인 아담은 당연히 생명과를 먹고 영생의 세계로 나아가는 쪽으로 삶의 방향을 잡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자기 몸에서 나온 여자의 말을 듣고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아담은 여자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여자에게 넋을 빼앗길 것이 아니라 “니스마트 하임”인 생기(生氣)를 통하여서 인지한 생명과를 먹고 자신이 먼저 영적인 존재가 되는 일에 삶의 우선순위를 두었어야 했습니다.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사람이 먼저 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리할 때 자기 몸에서 나온 여자를 영생의 세계로 이끌어 줄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아담은 생명과를 먹기도 전에 여자의 말을 듣고 말았습니다.

아담이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은 그것 자체로 이미 타락인 것입니다.

생명과를 먹지 않은 아담에게는 여자가 주는 선악과를 받아먹은 것은 필연적인 수순일 뿐입니다.

결국 둘 다 죽고 맙니다.

 

아담은 흙의 세계에 머물러 앉고 만 것입니다.

결국 아담은 흙의 기운으로 살아가는 조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은 흙의 기운으로 살아가는 자와는 함께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떠나가는 아담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뱀의 머리를 깨트릴 여자의 후손을 보내주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이가 뱀의 권세를 깨트릴 뿐만 아니라 아담으로 하여금 에덴동산으로 돌아가게 하는 일을 하실 것입니다.

 

아담은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받고 정든 고향인 에덴동산을 떠나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에덴동산을 떠나자 천사들로 하여금 에덴동산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라고 하시고는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십니다.

 

혹시라도 아담이 월담을 하여서 생명나무 과실을 따 먹으면 큰 일이 나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아담이 만약에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게 되면 죄인으로서 영생을 하게 되는데 이건 재앙 중에서도 아주 큰 재앙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아담의 눈에서 보이지 않도록 감추어 버린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은 고아가 되어서 죽음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의 목숨은 한 번 죽으면 끝나는 목숨입니다.

죽으면 끝나는 목숨으로 살아가는 아담은 이제부터 죽음이라는 놈에게 일평생 쫓기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죽음이야말로 아담에게 가장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죽음에 쫓기는 아담들은 역설적으로 죽지 않고자 죽음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죽음을 안고 살아가는 아담들은 불로장생하는 불로초를 구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인간들은 생명공학이라는 것으로 불로장생하는 불로초를 구하고자 연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그림자처럼 항상 아담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히고 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를 끊어 낼 수 있는 길을 오직 하나 죽음으로부터 해방 되는 것입니다.

아담을 죽음에서 해방 시켜주실 분은 여자의 후손 밖에 없습니다.

 

아담의 소망은 죽음으로부터 해방 시켜 주실 여자의 후손뿐입니다.

 

하나님은 아담 속에서 두 민족을 끄집어냅니다.

가인과 아벨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인류의 두 조상으로 나타납니다.

 

가인은 땅의 기운으로 살아가는 조상이고,

아벨은 자신을 죄에서 구해 줄 희생 제물인 양을 치는 조상으로 나타납니다.

 

가인과 아벨은 각자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사 하였고,

아벨은 양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거부하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십니다.

그러자 가인은 하나님의 처사가 틀렸다고 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아벨을 죽임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분풀이를 합니다.

 

하나님은 아벨 대신 셋을 줍니다.

셋은 아벨의 죽음으로 낳아진 자입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낳아진 성도들을 예표합니다.

 

이렇게 되면서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와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로 구분이 됩니다.

엄밀히 말하면 가인처럼 하나님께 사랑 받는 아벨들을 죽이는 자와,

아벨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 때문에 가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자로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처럼 하나님께 속한 자들에게 여자의 후손이 와서 구원해 준다는 약속을 심어 주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와서 뱀의 머리를 깨트리고 죄와 사망에서 구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속한 아벨과 같은 아담들 속에 여자의 후손을 알아보는 믿음을 생기처럼 담아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라는 생기를 주어서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도록 하였습니다.

그 속에 약속과 믿음이라는 생기를 받은 자들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구주로 영접을 하게 되고 생기가 없는 사람들은 배척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을 봅시다.

 

롬 1: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 속에는 하나님의 의가 담겨져 있습니다.

복음이 뭔가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자기 구원이야기로 받아들이는가요?

이는 그 속에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이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복음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이를 알아보고 믿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심어 주신 믿음이 생기가 되어서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하신 것입니다.

이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이 세상에 구원자로 보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러자 두 부류의 반응들이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영접하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배척을 합니다.

영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영접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은 왜 배척할까요?

이는 그 속에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게 되고, 그 속에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지 못한 사람은 예수를 그냥 사람으로 보고서 배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믿습니다 라는 믿음을 낳게 한 것입니다.

이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고 합니다.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영접하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생기인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생기를 받은 성도들은 흙에 생기를 담은 생령인 아담이고,

믿음을 받지 못한 자들은 짐승이라는 생물로서의 생령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그 속에 생기를 담고 있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어서 에덴동산으로 데리고 가고자 함입니다.

에덴동산에 데리고 가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천년왕국이라고 합니다.

 

천년왕국에 들어가려면 수순(手順)을 밟아야 합니다.

그것은 흙에서 난 사람은 죽고 하늘로서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이를 옛 사람은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난다고 합니다.

 

그럼 선악과를 먹고 죽은 아담이 어떻게 에덴동산으로 돌아 올 수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새 사람은 옛 사람의 죽음으로 주어집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은 아담을 산 자들이 살아가는 에덴동산에서 내어 보낸 것입니다.

 

선악과의 죽음을 담고 있는 아담은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 들어가려면 선악과의 죽음을 담고 있는 아담이 죽고 선악과가 없는 아담이 되어야 합니다.

죽은 자로서는 산 자들이 살아가는 에덴동산으로 들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산 자가 되어야지만 들어 갈 수가 있습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산 자가 됩니까?

살려주는 영으로 오신 분에 의하여서만 됩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을 먼저 죽이고 나중에 살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아담을 죄로부터 해방을 시켜주고자 여자의 후손을 보내주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을 아담을 죽이는 분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육체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히 2:14-16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죄인인 아담을 죽이고자 오셨습니다.

아담을 죽이는 것은 아담을 죄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함입니다.

죽음에 쫓기는 아담을 살리는 길은 역설적으로 죽음에 쫓기는 아담을 죽이고 죽음에 쫓기지 않는 아담으로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실 때 자기 백성들을 몽땅 안고 죽으신 것입니다.

이걸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 하시고 하늘나라로 승천 하신 후에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우리도 함께 죽었고 예수님이 부활 하실 때 우리도 함께 부활 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고 믿어지게 해 주십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성령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셨기 때문에 살려주는 영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가 오신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네페쉬 하야”인 인간에게 있어 소망은 살려 주실 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살려주는 영”으로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속에 영생을 발견한 사람은 구주로 영접 할 것이고,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영접하지 않을 것입니다.

 

소경 거지 바디메오는 예수님이 자신을 살려주실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만류에도 나사렛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합니다.

바디메오 속에 믿음이 생기의 역할을 하여서 살려주는 영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알아보게 하였고 영접하게 한 것입니다.

 

그 속에 믿음이라는 생기를 받은 자는 자신의 모든 삶을 예수그리스도를 쫓아가는 데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 속에 믿음이라는 생기가 없는 자들은 짐승처럼 땅의 기운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결국 그 속에 생기가 담겼느냐 안 담겼느냐는 그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지향성을 보면 알 수가 있어집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땅에 것을 생각지 말고 하늘에 것만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땅에 지체를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육신의 소욕대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는 자들을 땅에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하면서 이들은 십자가의 원수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땅에 것을 쫓아가는 것을 십자가의 원수라고 할까요?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된 것으로 돌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땅의 기운으로 살아가는 아담을 죽이고 하늘의 기운으로 살아가는 아담으로 살려내기 위한 것입니다.

세상 것을 쫓아가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의 전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소욕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모두가 흙의 기운입니다.

흙의 기운으로 살아가는 자들을 짐승이라고 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짐승들 세계에서의 가치입니다.

 

예수님은 종말의 모습을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생기를 품고 사는 사람은 생명과를 먹고 영생의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생기를 품은 사람은 짐승들처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만 매여서 살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노아처럼 방주를 짓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 은혜가 세상 사람들과 다름으로 살게 한 것입니다.

노아는 다름의 삶을 방주 짓는 것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노아 안에서 생기가 되어서 장차 일어날 홍수 심판 속에서 살아나는 방주를 짓는 삶을 살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노아의 때를 악한 때라고 한 것은 그들이 흙에만 정신을 팔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이 무슨 큰 잘못을 저질러서 천벌(天罰)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즉 도적질을 하고, 살인을 하고, 나쁜 짓만 일삼고 산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윤리적이고 지극히 도덕적으로 살았습니다.

성실하게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땅에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몹쓸 짓을 하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땅의 기운으로 살아가는 것을 악한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하늘의 기운으로 살지 않은 것을 악한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땅에 일은 죄가 됩니다.

 

사람마다 존재 양식이 다릅니다.

 

하늘의 사람이 살아가는 존재양식이 있고,

땅의 짐승이 살아가는 존재양식이 있습니다.

 

사람은 하늘의 기운으로 살아가고,

짐승은 땅의 기운으로 살아갑니다.

 

하늘의 기운은 그의 나라와 그이 의를 구하는 것이고,

땅의 기운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사람의 영광을 구하고 살아갔던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겉으로는 한없이 깨끗하고 거룩한 척 하지만 그 속에는 죽은 자들이 먹고 살아가는 땅의 것들로 가득 채워진 평토장한 무덤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정의하기를 그들은 돈을 좋아 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돈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줍니다.

이러한 것들은 땅의 기운입니다.

 

요일 2:15-17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새상 것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아버지께로 온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전부 이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흙의 기운이라는 것입니다.

 

짐승은 흙의 기운으로 살아갑니다.

짐승들은 오직 흙의 세계만 알고 있습니다.

물론 생기를 담고 있는 사람도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짐승처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들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점은 밥을 먹어도 하늘을 위하여 먹었고 일을 해도 하늘을 위하여 하고 살아도 하늘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생기를 담고 있는 사람이나 생기가 없는 짐승이나 먹고 살아가는 것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하여서 살아가는가 에서는 다릅니다.

살아가는 의미가 다릅니다.

 

사람이니 짐승이나 다 밥을 먹습니다.

누구나 먹었고 누구나 마셨습니다.

지극히 인간다운 삶을 살았습니다.

 

노아도 장가갔고 노아의 아들들도 결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살았고 다른 사람들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왜 그런가요?

문제는 그들은 흙에 속한 생활 밖에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는 삶만 살았지만, 노아는 먹고 마시면서도 방주 짓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도 먹고 마셨고 바리새인들도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은 내 나라가 아니요” 라고 살았고, 바리새인들은 “이 세상은 내 나라요” 라고 살았던 것입니다.

 

신앙은 흙에 속한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은 예수그리스도를 양식으로 먹고서 흙에서 영으로, 땅에서 하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땅에 기운을 벗어버리고 하늘에 기운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짐승들에게 생명을 주려고 예수님을 짐승들의 밥통인 구유에 낳게 하신 것입니다.

짐승들에게 예수를 먹여서 사람이 되게 하여서 천국에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담의 구원은 생령의 위치에서 “니스마트 하임”의 도움으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흙으로 난 사람이 생기의 도움으로 살려주는 영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먹어서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니스마트 하임’의 도움으로 살려주는 영으로 오신 짐승의 밥인 예수그리스도를 먹은 사람은 더 이상 흙에 매여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죽을 지언정,,,,

 

까마귀처럼 썩은 시체를 뜯어 먹고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비둘기처럼 공중을 날면서 새로운 신천신지를 향해서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일컬어 히브리서 기자는 하늘에 있는 본향을 향해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와 행인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시집가고 장가가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너희는 땅의 기운으로 살아가는 짐승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사람이 왜 짐승처럼 흙의 세계에만 머물러 있고자 하느냐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너희는 하늘의 기운으로 살아야 하는 자들이 왜 땅의 기운을 쫓아가느냐에 대한 책망인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 즉 하늘의 삶에는 무지했다는 책망인 것입니다.

어디를 지향하고 살아가고 있느냐에 대한 책망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는 지금 어디를 지향하고 살아가느냐 묻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무슨 그림을 그리고 사느냐?

가이사의 화상을 그리고 살아가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화상을 그리고 살아가느냐!

 

가이사의 화상이 그려져 있으면 흙의 기운으로 살아가는 생령인 짐승이고,

하나님의 화상이 그려져 있으면 하늘 기운으로 살아가는 생령인 사람인 것입니다.

 

가이사의 화상이 그려져 있으면 마귀를 섬기는 것이고,

하나님의 화상이 그려져 있으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가이사가 왕이면 가이사의 종으로 살 것이고,

하나님이 왕이면 하나님의 종으로 살 것입니다.

 

가이사의 화상이 그려져 있는 자들은 짐승이 주는 666표는 필연적으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흙의 기운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삶에 의미이고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흙이 전부인 사람은 절대로 흙을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너는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고 저주하셨습니다.

땅을 떠날 수 없도록 배로 기어 다니도록 하였습니다.

뱀은 저주의 기운을 먹고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뱀의 후손은 종신토록 흙을 떠날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먹거리가 다릅니다.

흙에 속한 짐승은 떡이 양식이지만,

하늘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 말씀이 양식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의 먹거리는 무엇인가?

떡인가?

하나님 말씀인가?

 

떡이 좋은 사람은 떡이 있는 곳을 기웃 거릴 것이고,

하나님 말씀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있는 곳을 기웃 거릴 것입니다.

 

내가 노는 동네가 어디인가요?

 

떡이 있는 동네인가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동네인가요?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묻고 있습니다.

 

나에게 예수는 어떤 존재인가?

세상의 떡을 주는 분인가!

아니면 하늘의 생명을 주는 분인가!

 

나는

사람인가?

짐승인가?



나는

지금 짐승으로 살고 있는가?

사람으로 살고 있는가?

 

답은 살아가는 삶으로 쓰시길 바랍니다.

신앙은 말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가는 삶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엿새가 차 가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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