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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07강. 에녹의 승천 (창 5:21-32)

by coroa 2020. 9. 6.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07강. 에녹의 승천 (창 5:21-32).-

 

-.정낙원 목사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는 분명한 창조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이 지금 이 시대 이 땅에 존재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기 위해 존재케 하신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생명’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살으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게 ‘너희들 살아라!’ 하면, 그것이 곧 생명인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자체가 창조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흙으로 돌아가라’ 하시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아들과 언약한 그 일들, 묵시 안에서 이루어진 그 일들을 역사를 통해서 구현해 내십니다.

그래서 역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하나의 필드가 됩니다.

 

그래서 이 땅에는 창세전 언약에 따라서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 이 두 사람이 있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아담 한 집안 속에 성질이 전혀 다른 가인과 아벨이 있듯이 하늘에 속한 사람과 땅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갈라집니다.

예수님은 마치 재활용 분리 하듯이 하늘에 속한 사람과 땅에 속한 사람으로 분리하십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우리는 이 두 사람에 대해서 이미 공부를 했습니다.

1장의 사람과 2장의 사람은 다르다고 했습니다.

1장의 사람은 말씀으로 지어진 사람이고,

2장의 사람은 흙으로 지어진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1장은 역사가 아닙니다.

1장은 묵시 속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을 할 것이라는 플랜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실제 일은 2장에서부터 하십니다.

 

2장에서 지어진 인간은 흙에서 지음을 받은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 흙에서 지음 받은 인간들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두 부류로 나눕니다.

왜요?

창세전 언약에 보면 예수님의 자기 백성이 있고, 자기 백성 아닌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흙에서 난 자들 중에서도 어떤 부류는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게 만들었고, 어떤 부류는 흙에서 나서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서 하늘로 돌아가게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두 족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 아담 속에서 가인과 아벨이라는 전혀 다른 인간이 나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했으니까 그 장차 오실 자는 예수님이죠?

그러니까 예수님 안에서 두 부류가 나왔단 말입니다.

 

 

마치 아브라함 안에서 이스마엘과 이삭이 나왔고,

이삭 안에서 에서와 야곱이 나온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에서와 야곱은 전혀 다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당신의 뜻을 어떻게 펼쳐 가는지에만 관심이 있지 어떤 인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아들 중에 가인과 아벨이 나왔는데 그것은 두 계통을 얘기해줍니다.

 

 

그래서 이 땅에는 가인의 계통도 있고 아벨의 계통도 있는 겁니다.

가인은 땅에 계통이고 아벨은 하늘에 계통입니다.

그런데 그 아벨이 가인을 통해서 죽임을 당합니다.

아벨의 계통이 예수의 계통이에요.

 

결국 이 땅에서 예수 믿는 아벨의 계통은 죽임당하는 모습으로 두셨다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가 원치 않아도 하나님께서 가인의 후손을 통해서 우리를 죽도록 만드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죽임 당하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흙을 떠나게 한다는 말입니다.

죽음은 땅을 떠나 하늘로 가는 거에요.

그래서 성경은 죽음을 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절대 저주가 아닙니다.

 

영생,

우리의 가야 할 묵시의 세계가 있는 사람에게 이 땅에서 떠나는 것은 축복이지 절대 저주가 아닙니다.

반대로 이 땅이 전부인 사람에게는 죽음이 저주가 되겠지요.

이 땅이 전부인 사람은 어떡하든지 여기서 오래 정착하고 잘 살려고 하겠지요.

 

그래서 지금 창세기 4장 5장에 나오는 두 족보 중에 가인의 후손으로 난 에녹은 이 땅에 성(城)을 구축해서 잘 사는 모습으로 나오고, 셋의 후손으로 나온 같은 이름의 에녹은 하나님께서 데려 가시더란 말이지요.

 

 

가인의 후손 에녹은 땅에서 승승장구하다가 땅의 저주로 살아가는 사람이고,

셋의 후손 에녹은 흙에서 났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해서 하늘로 데려가더란 말입니다.

그러고 가인의 후손들 중에 또 한 사람이 나오는데 라멕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4장 24절에 보면 가인을 위해서는 벌이 칠 배지만 라멕을 위해서는 벌이 칠십 칠배일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가인에게 누가 잘못했으면 뺨을 일곱 대 맞지만, 라멕에게 잘못하면 칠의 칠십 칠배를 맞는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응징을 한다는 얘기입니다.

조폭 문화가 이때부터 있었던 것 같아요.

라멕은 복수의 화신인 것입니다.

 

 

그런데 셋의 후손 중에 라멕이 또 있습니다.

그 라멕을 통해서 노아가 나옵니다.

이 노아가 하나님의 백성을 안위하더라! 고 합니다.

보세요.

가인의 후손에게도 에녹도 있고 라멕도 있습니다.

이들은 이 땅에서 정착해서 힘으로 사람을 죽이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셋의 후손인 에녹과 라멕은 모두 이 땅의 하나님의 백성을 안위하는 자로 나타납니다.

전혀 다릅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는 두 부류가 있어요.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말씀을 통해서 확인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합니다.

가인은 가인의 길이 있고, 셋은 셋의 길이 있습니다.

가인이 열심히 빌고 빌면 셋이 되는 게 아닙니다.

반대로 셋이 나쁜 짓 한다고 가인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이 땅에 보내실 때는 어차피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해서 보내십니다.

그래서 야곱과 에서처럼 엄마 뱃 속에 있을 때부터 야곱은 구원받기로 되어 있고, 에서는 저주받기로 되어 있단 말입니다.

 

이것은 후천적인 어떤 행위 때문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주기로 작정된 야곱은 계속 구원받는 식으로 간섭을 해 가고, 에서는 저주받는 식으로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차이 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이 이야기도 동행에 대해서 얘기했는데 제가 늘 얘기합니다만

여러분들은 성경을 우리 인간적 관점에서 보지 마세요.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묵시라는 것이 이 세상에 펼쳐질 때는 이 역사 자체가 묵시를 담아내지 못합니다.

성경은 묵시적 사건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것일 뿐입니다.

인간들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 이야기란 말입니다.

즉 땅에 이야기가 아니고 하늘에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을 할 때 성령이 개입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인간의 언어 속에 하나님의 뜻을 담아 놓았어요.

성령께서 비록 역사적인 언어로 기록했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을 성령의 감동으로 담아놓았습니다.

 

이것을 ‘레마’라고 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보면 문자 속에서 영이 나와요.

이게 생명이고,

이 생명을 ‘레마’라고 해요.

 

문자는 ‘로고스’에요.

‘로고스’ 속에 담겨져 있는 전정한 뜻이 있는데 그것이 생명이거든요.

그것을 ‘레마’라고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은 문자적으로 해석을 해요.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영으로 해석해요.

하늘에 이야기로 해석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성경도 두 해석이 있는 겁니다.

육적 해석과 영적 해석이 있어요.

하늘로 해석하는 것과 땅으로 해석하는 것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을 했다 하면 우리는 문자적으로 인간적인 입장으로 생각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찾아 동행하는구나 하겠지만 그런 뜻이 아닙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은 ‘여러분,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해서 천국을 갔으니까 여러분도 하나님과 동행해서 천국 갑시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신앙의 주체는 결국 내가 가지는 것이 됩니다.

이게 세상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들이 사용하는 이 동행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이것은 너희가 나를 구하고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찾아간다! 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항상 하나님께서 누구를 찾아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세요.

아브라함을 믿음에 조상이라고 하지요.

이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이 간섭한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언제 하나님을 부른 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찾아가서 아브라함을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빼내 버립니다.

야! 가자, 그랬어요.

이것은 지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다 다른 세상으로 돌아간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갈대아 우루는 아브라함이 자기가 태어나고 살던 곳입니다.

거기서만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겐 거기 밖에 없습니다.

갈대아 우르가 전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 있는 자를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빼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약속의 땅으로 어떻게 갑니까?

말씀을 좇아서 갔지요?

여기서 또 아브라함 스스로 말씀을 좇아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말씀이 아브라함을 끌고 간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이 아브라함을 모가지를 잡고 끌고 가니까 약속의 땅으로 가더란 말입니다.

 

 

지금 에녹 사건과 같은 얘기입니다.

성경은 다 같은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에녹을 찾아가니까 그 때부터 에녹이 달라지는 삶을 살게 되더란 말입니다.

 

이건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예수가 찾아오니까 우리 삶이 달라지는 겁니다.

천국을 향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찾아오기 전에는 천국을 모르고 살았어요.

근데 예수를 만나고 나니까 자꾸만 천국이 끌어당기는 겁니다.

이상하게 끌어 당겨요.

그래서 이렇게 끌려가고 있는 거에요.

 

이건 우리 실력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앞에서 끌어당기니까 끌려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끌려가는 거에요.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주체가 되는 것은 세상 종교입니다.

주체는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이 땅에 뒀는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도 없는 인간입니다.

그러한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었어요.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묵시 속에 예정되었던 그 삶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끌고 가는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몰랐는데 믿음이 덮쳐 오고 나니까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그 믿음이 자꾸만 보지 못한 것들을 증거케 하더란 말이지요.

그 보지 못한 것이 어디에요?

묵시지요.

지금 우리가 이 묵시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묵시 공동체고 언약 공동체고 은혜 공동체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지 마세요.

 

 

교회는 반드시 묵시성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창세전 언약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약 공동체란? 언약에 의하여 세워져 가는 곳이란 말입니다.

언약을 행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언약을 하셨지요.

그래서 그 언약을 지키는 주체는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 언약을 지킨 공로로서 생성된 자들인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낳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언약은 내가 지키는 게 아니라 언약을 하신 당사자,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이 지켜내는 것입니다.

 

교회는 반드시 이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교회에 모이는 회중들은 모두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한 것이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이 고백으로 반드시 예수님 십자가의 피를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 사람 끌어 모아 으쌰~ 으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세상 종교입니다.

기독교를 빙자한 세상 종교인 것입니다.

 

미국의 로버트 슐러라는 목사가 외친 것이 무엇입니까?

적극적 사고입니다.

그게 인간에겐 너무 좋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적극적 사고는 인간의 가능성을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가능성을 부추김 받을 때 살아가는 존재의 의미를 느낀다니까요!

 

제가 여러분들을 칭찬해주면 여러분 기분이 좋다니까요.

그런데 성경을 열면 하나님이 칭찬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 말은 이 땅에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을 만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칭찬해주세요 라고 합니다.

그럴 때 성경은 너는 칭찬받을 인간이 아니라 저주받을 자이니라 라고 합니다.

 

그 저주받을 자인 것을 깨닫고 이런 저주받을 자가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그 언약 때문에 내가 이렇게 복의 자리로 와 있구나 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걸 깨닫고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번에 예배는 두 예배가 있다고 했습니다.

역사에 속한 예배와 묵시에 속한 예배 입니다.

역사에 속한 예배는 율법적 예배로 계속해서 짐승 잡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적 예배를 드리는 게 아니라 묵시적 예배를 드리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피로 구속 받은 것에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덞째 날 안식으로 모인 우리는 오순절 성령 강림이 일어나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 나타났던 모습 그대로 날마다 모여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며 떡을 때며 교제하며 서로 서로 너 나 할 것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성령 안에서 한 패밀리가 된 것입니다.

그 때는 유무상통이 되는 겁니다.

 

이걸 우리더러 하라는 얘기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 오면,

그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게 되고,

그 때 세상에 내가 이런 은혜를 받았구나를 고백하게 되고,

그 은혜가 내어놓게 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베풀게 하고 사랑하게 하고 내가 먼저 손 내밀게 하는 것입니다.

 

 

이걸 여러분들 하세요! 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라 하면 인간들은 또 합니다.

그렇게 해 놓고 나중에 자기 가치를 챙깁니다.

나 했잖아요…라고

성경은 우리 인간들의 가능성을 제기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을 이 땅에서 두 계통으로 보여주는 데 가인의 후손들은 항상 자기 힘을 근거로 해서 자기들의 요구하는 것을 성취해 나갑니다.

인간적으로 봤을 때는 가인의 후손이 멋집니다.

여러분들 자식을 키울 때 어떤 자식으로 키웁니까?

잘난 자식으로 키우잖아요.

저도 제 자식이 잘난 자식으로 자라면 좋지요.

 

 

제가 손주 녀석의 이름을 요셉으로 지어놨는데 말이 요셉이지 그 요셉의 운명이 어떤 운명입니까?

팔려가는 운명이잖아요.

그런데 바라는 운명은 정반대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우리는 말로는 ‘하나님, 제 아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게 해주십시요’ 라고 하지만 믿음의 사람으로 큰다는 것은 아벨처럼 살고 셋 처럼 살고 에녹이나 노아같이 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부 그 시대 가치로 봤을 때 버림당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노아 때를 어떤 때라고 했습니까?

먹고 마시고 장가간다고 했지요?

그건 육을 좇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노아의 식구들은 밥 숟가락만 놓으면 방주를 짓는 것입니다.

이건 본능대로 못사는 것입니다

노아도 고기 좋아하고 술 좋아해요.

포도주 먹고 취하고 그러잖아요.

노아도 노는 거 좋아하는데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나니까 전혀 다른 삶을 살잖아요.

 

 

여러분, 노아가 룰루랄라 하면서 방주 지었을까요?

불평하며 방주지었을까요?

불평하며 지었지요.

신앙이라는 것은 룰루랄라가 안돼요.

왜냐? 우리 인간들의 욕구가 안 들어지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룰루랄라가 나오는 게 맞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는 그렇게 안 되더란 말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자꾸만 땅의 것을 뽑아내는 식으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만 뜨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끝까지 추구하는데,

하나님은 그것 안 돼!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화가 납니다.

그런 우리를 보고 하나님께서 찾아와서 종용히 ‘너 왜 성질내는데?’ 라고 물으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아, 내가 죄인이구나.

난 결국 나 밖에 모르는구나,

난 하나님 하나님이라고 말만 했지 결국 나 밖에 모르는 인간이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이런 죄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와서,

예수님의 피뿌림이 덮쳐 와서 구원됐구나 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사람은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와서 할 일을 찾고 할렐루야 찬양이 나오고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에녹을 한 번 보세요.

 

 

21-23 절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23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365세를 향수했지요?

365일이 일 년이잖아요.

여기서 일 년이라는 사이클을 이렇게 이해하세요.

 

이 일 년이라는 것은 인류 전체 역사를 상징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에녹이 인류 전체를 살은 것입니다.

이 에녹 속에 누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자기 백성인 모든 인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에녹이 65세 동안은 하나님은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65세 때 므두셀라를 낳고 나서부터 에녹의 삶이 달라집니다.

에녹의 삶은 나누면 두 부분으로 나눠지지요?

 

하나님을 모르고 살던 시절이 있고 하나님을 알고서 이제부터는 이 세상은 끝나고 하나님이 준비한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려면 신약 성경의 유다서를 가봅시다.

 

유다서 1장 14, 15절입니다.

 

유 1:14-15= “14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라고 그러지요?

이것을 영적으로 봐야 합니다.

천지창조의 구조가 뭡니까?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묵시를 펼쳐 내는 것이 일곱째 날로 통하잖아요?

지금 아담이 인류의 시작인데 그 시작부터 일곱째, 칠대 손 에녹은 하나님이 데려가는 삶을 살았지요?

 

그러니까 이 아담과 에녹 속에는 모든 인류가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녹이 나타났다는 것은 종말이라는 것입니다

그 에녹이 나타남으로서 이제부터 이 세상 자체는 종말 모드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그 시대 사람들은 죄를 지어가는 일들을 하는데 에녹 자체도 므두셀라를 낳기 전에는 이 세상을 고발하는 삶을 살지 않았어요.

그 속에서 즐기며 살았는데 므두셀라를 낳고 나서부터는 이 세상이 끝난다는 것을 알고 그 때부터 죄를 얘기하더란 말입니다.

이렇게 한 번 생각을 해 보세요.

에녹은 하나님께서 흙에서 난 인간 속에서 최초로 하늘로 데려간 사람입니다.

그럼 이 에녹 속에는 예수님이 계시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 인생을 볼 것 같으면 삼십 세 되기 전에는 공생애 활동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육으로 있다가 하나님이 개입해서 달라지는 삶이 나타납니다.

에녹도 마찬가지에요.

에녹도 65년 동안은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어요.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았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므두셀라를 낳게 하신 겁니다.

 

므두셀라는 에녹에게 하나의 징조가 되고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 므두셀라를 통해서 에녹에게 계시를 했는데 에녹이 믿음으로 므두셀라를 낳고 보니까 이 아이가 죽으면 다른 세상이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므두셀라라는 말 자체가 ‘이 아이가 죽으면 심판이 쏟아진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을 신약으로 와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면 심판이 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해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이해되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육체적인 세상에 대한 죽음이지요?

그런데 부활하셨습니다.

이제는 성령으로 오셔서 세상 사람이 아닌 세상 바깥사람으로 계시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들도 에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우리 마음대로 살았는데 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옴으로 인해서 그 때부터 삶이 바뀌어지잖아요.

역사적인 사람에서 묵시적인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에녹이 그렇잖아요.

므두셀라를 낳기 전에는 그냥 땅강아지처럼 땅 파먹고 살았어요.

육신의 소욕을 쫓아 살았는데 므두셀라를 낳고 나서 부터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면 에녹의 관심사는 어디일까요?

세상 바깥이지요.

그래서 유다서에서 에녹은 이 세상의 선지자적 입장에서 이 세상의 심판을 알리는 삶을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에 에녹이 므두셀라를 통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듯이 저와 여러분들도 므두셀라와 같은 어떤 인물을 통해서 인생의 전환기를 갖게 됩니다

그게 누구인가 하면 예수님이에요.

예수를 만나면 인생이 바뀌어요.

 

인간 중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은 969세를 산 므두셀라입니다.

이 므두셀라가 옴으로 인해서 에녹의 인생이 바꼈듯이 이 땅의 영생하시는 분이 오셨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서 우리 인생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땅의 사람이 하늘의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이 두 쪽으로 나뉘어져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을 Before Christ(B.C.) 라고 해서 ‘주전(主前)’ 이라 하고,

예수님 오시고 난 이후를 Anno Domini(A.D.) 라고 하면서 ‘주후(主後)’라고 합니다.

 

결국 이 역사 자체가 누구를 기점으로 구약과 신약이 나뉘었습니까?

예수님으로 인해 나뉘어 졌지요?

그래서 이 역사 자체를 History(His Story), 그 분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구약은 예수님 오시기 전입니다.

구약에선 전부 복이 땅의 복을 말합니다.

구약에선 무조건 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자식 많이 낳고 재물 많이 쌓는 땅의 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고 난 이후로 복의 개념이 하늘의 복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산상보훈에서 비로소 예수님께서 산 위에 올라 앉아 입을 열어 말씀하시는데…

잘 보세요.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서 이 땅의 복을 줍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복 받고 땅에서 장수하고 이렇게 했는데

그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오셔서 산에 올라가서 비로소 땅의 복이 아닌 하늘의 복으로 얘기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고…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고…

이건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속에 이 복을 주니까 심령이 가난해지고 애통함이 일어나고 긍휼이 여김이 일어나고 하는 것입니다.

이 복을 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가 되는데 그런 모임에서 무슨 다툼이 있고 시기가 있고 질투가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교독문 읽을 때 하나님 나라가 어떤 모습이라고 했습니까?

어린 양과 사자가 같이 노는 곳입니다.

여러분 어린 양과 사자는 이 땅에서는 같이 놀 수가 없습니다.

양은 사자의 먹잇감입니다.

 

그런데 천국은 힘의 원리로 사는 곳이 아니고 공생의 원리, 생명의 원리로 사니까 서로가 서로를 용납이 되고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힘의 논리로 세워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미국에 가는 것은 그들을 분열시키기 위해서 가는 게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일을 한다는 것을 믿어요.

그것을 믿기 때문에 이 말씀이 하나님의 백성을 다 하나로 묶는다는 것을 알아요.

육과 영은 갈라내는 일을 하지만 영과 영은 또 하나로 모이는 일을 합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 가보면 하나님께서 홀로 하나님도 모르고 살고 있는 에녹에게 어느 날 므두셀라를 줘버렸습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고 나서 정신이 번쩍 든 것입니다.

 

이거 큰일 났구나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구나…

그 때부터 에녹은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합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과 동행이라고 하면 자꾸 내가 죄도 안 짓고 혼자서 아주 천사같이 사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런 거 아닙니다.

비록 내가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런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용서받고 살고 있다는 이 사실이 믿어지기 때문에 똑같이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죄를 넘어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용서받고 산다는 것에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쪽으로 나아가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은 똑같은 죄를 짓고서 그 죄에 오히려 눌려 버리는 것입니다.

 

신자는 죄를 안 짓는 자가 아니라 그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뿌림으로 용서받았음을 알고 그 죄를 넘어서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감사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하는 데 있어서 마귀는 항상 여러분들에게 달콤한 말로 유혹을 합니다.

신자가 그렇게 해서 되겠니?

이 소리를 또 곡해하지 마세요.

신자는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 자기 합리화를 해서 안 됩니다.

 

 

마귀는 항상 우리를 참소합니다.

그 마귀가 참소할 때 무엇을 근거로 합니까?

말씀으로 참소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안보니까 하나님께서 마귀를 보내서 말씀으로 너 했어, 안했어 하고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말씀 앞에서 아 내가 이런 인간인가? 잘못됐구나 생각할 때 마귀는 가차없이 우리를 옥에 가두려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놔둬라! 놔둬라! 내가 그 애 때문에 죽었다.

내 옆구리 피를 한 번 봐라!’

그러면 신자는 예수님 뒤에 숨어서 마귀에게 약오르지롱~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조금 극단적이지만 그런 말을 하잖아요.

누가 ‘그 따위로 살아서 천당 가겠니?’ 라고 하면

‘요따우로 살아도 얼마든지 갑니다’ 이러라고 했잖아요.

이런 담대함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세상 사람들에게 뻔뻔스러워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죄는 세상 사람들이 참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마귀가 참소합니다.

제 말은 그 마귀를 뻔뻔스럽게 이겨내라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그래서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욕되게 하지 마세요.

지금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무엇을 외쳤다고 합니까?

경건치 않는 자들에게 죄 정하는 것을 말하잖아요.

 

 

그럼 경건치 않는 게 뭡니까?

경건한 자 안에 거하지 않는 것이 경건치 않은 것입니다.

경건한 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 경건한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경건한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말라기 2:15에 보면 “여호와는 영이 유여(有餘)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이 말은 하나님은 여러가지 잡다한 종족들을 만들 수 있는데 하나만 지으셨다고 합니다.

그 한 영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이 땅에 영으로 오신 분은 오로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이거 중요한 얘기인데 잘 들으세요.

하나님의 나라인 묵시 세계에서 생명을 낳는 매커니즘은 성령으로 생명을 낳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역사는 남자와 여자가 합궁을 해서 자식을 낳잖아요.

육체와 육체가 만나서 자식을 낳는 것이 역사적 방법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인 영의 나라는 성령으로 자식을 낳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해서 이 땅에 보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나신 분은 이 땅에 딱 한 사람,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이 예수님을 낳는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낳는 것입니다.

이걸 성령으로 거듭나게 한다고 합니다.

이해되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십니다.

아버지가 성령의 능력으로 나를 이 땅에 보냈듯이 너희도 내가 성령의 능력으로 보낸다 하시면서 숨을 내쉬고 성령을 받으라 했습니다.

그러고는 예루살렘 떠나지 말고 약속을 기다리라 했습니다.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로 거듭나지요?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새로운 민족이 하나 생긴 것입니다.

그 민족이 어떻게 태어났어요?

성령의 거듭남으로 태어난 겁니다.

 

이렇게 묵시의 사건이 역사 속에서 일어날 때는 반드시 성령이 동원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겁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이제 땅의 사람이 아니고 하늘의 사람인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하늘의 정보를 줍니다.

그래서 이 교회를 묵시 공동체고 언약 공동체라고 했죠?

이 묵시 공동체요 언약 공동체에 하나님께서는 위에 있는 것을 계속 부어주는 것입니다.

은혜를 부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받음으로 인해서 땅 사람이 아닌 하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했을 그 당시에 천하만국에 호적하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바탕 화면으로 까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할 떄 하늘의 천사들이 누구에게 가서 이 사실을 고지해줍니까?

들의 목자들에게 가지요?

성경을 보세요.

항상 들을 얘기하고 광야를 얘기할 땐 기존의 성(城)을 고발하는 차원으로 합니다.

그래서 광야는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는 곳이고 광야는 항상 상징적으로 묵시를 말합니다.

 

양 떼를 지키는 들의 목자가 있다는 얘기는 세속 교회에 버림받아 떠나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지금 하나님의 메세지가 떨어집니다.

그 메세지가 뭡니까?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구할 메시야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역사 자체를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일을 하는데 바탕 화면으로 그 때 당시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만국에 호적하는 일을 명으로 내린 것입니다.

 

그 호적은 아들을 아버지 족보에 올리는 것입니다.

아들은 분명히 아들인데 아직까지 호적에 올려지기 전까지는 아들의 명분이 없습니다.

여러분들 보세요.

자식이 부모의 호적에 올려지는 것과 안 올려지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호적에 올려질 때는 법적 구속력이 생기게 됩니다.

그 말은 아버지의 유업을 받을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적에는 정실부인을 통해서 낳아진 아들만 올려지는 것입니다.

아~ 이 얘기가 참 중요한데…

 

하나님은 이 우주 만물을 운행하고 다스리는 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모든 우주 만물 속에 있는 것들은 전부 하나님과 관계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종교들이 있는데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도 다 구원입니다

모든 종교가 주장하는 것이 자기들 나름의 구원인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극락가고 하는 것처럼 다 구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예수라는 이름 외에는 구원 얻을 이름을 안줬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예수라는 이름을 통해서만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은 예수에게서 낳아진 자들만 하나님의 아들로 입적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모든 종교에서 낳아진 자들은 첩의 자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이 이해돼야 하는데…

 

하나님 입장에선 이방 종교가 있고 하나님의 종교인 기독교가 있잖아요.

하나님 입장에서는 기독교를 통해서 낳아진 자들만이 천국으로 갑니다.

이것이 아버지 족보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방 종교에서 낳아진 자들은 서자(庶子)입니다.

이것을 사생아(私生兒)라고 합니다.

사생이라는 말 뜻이 무엇입니까?

살이 있기는 분명히 살아 있는데 죽은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집 안에서도 그것을 보여주잖아요.

아브라함이 첩을 통해서 낳아진 자는 종이 됩니다.

그러나 정실 부인을 통해서 낳아진 자는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첩의 아들인 이스마엘, 종의 자식은 내어 쫓으라고 하십니다.

사라의 자식만 아브라함의 아들인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정실 부인으로 낳아진 자는 계속 해서 자기 어미를 증거합니다.

 

여러분 보세요.

유대인들 사회에서는 아버지가 이방인하고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그것은 비유대인이 됩니다.

한국은 아버지가 박 씨면 김 씨 여인에게 낳았든 이 씨 여인에게 낳았든 상관없이 그 아이는 박 씨가 되잖아요.

 

그런데 유대인은 아버지가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이방 여인에게서 자식을 낳으면 그 아이는 이방인 취급합니다.

엄마가 유대인일 때 유대인이 됩니다.

이것이 모두 계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입장에서 자식을 낳는 엄마 입장은 누가 됩니까?

예수님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정실 부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참 이상한데 잘 이해하세요.

어디 가서 이 부분만 말해서 이단 소리 듣게 하지 마시구요!

 

하나님 입장에서는 예수에게서 낳아진 자만이 족보에 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탄생할 때 천하만국에 아들을 족보 올리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태어날 때 성령으로 태어났는데 예수님으로 인해 낳아진 자는 모두 예수님과 같은 원리인 성령으로 잉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저도 성령의 능력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꼬라지가 이래도 하나님의 호적에 올라 있는 자들입니다.

호적에 올라 있기 때문에 천국을 유업으로 받은 것입니다.

천국을 이미 유업으로 받았기 때문에 자꾸만 거기에 관한 소식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도 예수라는 정실부인을 통해서 세워진 목사는 계속해서 산 위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고 저 하갈과 같이 첩으로 난 목사들은 자꾸만 땅의 것을 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복 받고 잘 살라고 하면 그건 첩이 낳은 목사이고,

반면에 여러분 이 땅은 전부가 아닙니다, 이 땅은 장차 멸망할 곳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저기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신령한 것을 줬으니 땅의 것 없더라도 염려하지 마십시요, 어차피 우리는 나그네와 행인 같은 인생이고 가야할 곳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여기 땅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늘에 소망 두고 삽시다, 라고 하면 그 사람은 예수라는 정실부인을 통해서 낳아진 목사들이란 말입니다.

 

 

그런 것들을 분별을 하세요!

그래서 목사를 분별할 때도 교단에서 안수 받아 세운 목사하고, 성령의 기름부어 세운 목사는 다르다니까요!

그런데 보세요.

정실부인으로 낳아진 자들은 수가 많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야곱을 보세요.

레아는 자식을 많이 낳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진짜 사랑한 라헬은 그렇지 않습니다.

 

 

참 재밌는 것이 야곱은 라반 집에 가서 라헬을 위해서 봉사를 했습니다.

라헬을 연애하는 마음으로 봉사를 하니까 7년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7년이 지나서 합방을 할 때 보니 라헬이 아닌 레아가 들어옵니다.

 

그러자 야곱이 따집니다.

그 때 라반이 뭐라 그래요?

‘여기 풍습이 그렇지 않다.

일주일 자고 나면 라헬을 줄께’ 라고 합니다.

 

중요한 얘기입니다.

잘 보세요.

쉬운 말로 야곱이 레아를 얻기 위해서 7년을 머슴살이 했지요?

잘 이해 안 되시는 것 같은데,

 

 

원래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서 종살이를 했어요.

그런데 그 나라의 풍습이 언니가 먼저 가야지 동생 먼저 주는 법이 없다고 해서 세상 풍습에 따라 야곱은 자신이 원치 않는 언니를 얻었습니다.

 

결국 언니를 얻기 위해서 7년 동안 죽도록 종살이를 한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라헬은 이미 얻고 난 후 7년을 삽니다.

이게 엄청난 비밀입니다.

 

쉬운 말로 저와 여러분들이 율법 아래 있을 때에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주여! 주여! 했는데,

은혜 아래 들어 온 사람은 이미 구원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구약에선 쉬운 말로 천국 가기 위해 신앙생활 했고, 신약에서는 천국이 왔기 때문에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 자체가 어떻게 되겠어요?

달라지지요.

이미 우리는 야곱이 라헬을 얻고 7년 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천국을 줬어요.

그 주신 천국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중에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에게 천국이 와 있다니까요!

그 천국의 삶이 이 땅에서 에녹처럼 세상 사람과 다른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천국 백성들은 믿음을 줘서 세상 사람과 다른 모습으로 살도록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지금 간섭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간섭 당함을 ‘동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지금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한다 할 것 같으면 우리 인생은 썩 좋은 인생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의 관심사는 아무리 하나님이 동행해도 마치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처럼 땅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늘 하나님과 동행해도 맨 날 징징거리잫아요.

우리도 똑같습니다.

 

 

에녹이 하나님 기절시키게 멋진 신앙생활을 했다고 보지 마세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에녹도 죄인이고 우리도 죄인입니다.

다를 것이 없어요.

그런 죄인을 하나님이 동행하니까 데려가더란 말입니다.

 

그럼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 와서 우리와 동행하니까 우리가 하늘로 옮겨지더란 말이지요.

우린 이미 옮겨졌어요!

옮겨질 것이 아니고!

 

 

여러분 구원을 얘기할 때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과거(過去) 시제가 있고, 구원을 이루라는 현재(現在) 시제가 있고, 구원을 이룰 것이다 라는 미래(未來) 시제가 있습니다.

왜 성경에서 그렇게 얘기하는 가 하면 구원 자체는 완료 품인데, 이 세상의 역사는 시간 자체가 과거, 현재, 미래로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구원’을 이루어 가기 때문에 과거 구원, 현재 구원, 미래 구원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지 그 구원 자체가 미흡해서 나중에 조금 나아지면 또 해주고 해주고 그러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미 우린 구원받은 자에요!

구원받은 자이기 때문에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고, 구원을 이룰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을 28절부터 30절까지 봅시다.

 

롬 8:28-30=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9절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라고 하지요?

이게 언제 안 것입니까?

창세전입니다.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을 한 것입니다.

그 미리 아신 자들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하여 미리 정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역사 속에서 오실 때는 성령으로 잉태해서 왔다고 했지요?

그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로 나아지는 자들도 예수님과 같은 과정을 통해서 낳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의 형상을 입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상을 입는다고 하니까 또 예수님을 닮는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런 자들이 30절에 보니까 미리 정하진 그들을 부르신다고 합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에서 ‘부르시고’는 과거지요?

이미 불렀다는 것입니다.

부르신 그들을 지금 의롭다 하지요?

그럼 현재라는 겁니다.

의롭다 한 이들을 영화롭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영화롭게 되는 것은 언제 됩니까?

장차 주님이 오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게 전부 창세전 언약 속에 포함되어 있지요?

그래서 구원을 창세전에 받은 사람은 이 땅에서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과거 구원받았고, 현재 구원받고, 미래에 구원받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우리의 구원은 이미 완료된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미완성품을 주지 않았어요.

완성품을 줬는데 다만 이 완성품이 역사라는 곳에 살고 있기 때문에 미완성품으로 보일 뿐입니다.

이해되세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늘의 것을 줬는데 그 하늘의 것이 오면 나중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 사건이 완료되어 완성되는 것입니다.

흑암의 나라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겼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옮겨놔 놓고 그 때 부터 하늘의 사람으로 간섭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 간섭당하는 것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육신을 가진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 땅에 정착하고 싶고 이 땅과 친하게 살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셨으니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땅의 사람으로 간섭하는 게 아니고 하늘의 사람으로 간섭하다 보니까 땅을 자연적으로 떠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기부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니까 자신이 십자가를 지겠다고 하는데 그런 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은 반드시 예수님의 운명 속으로 우리를 끼워 넣어 동참을 시킵니다.

이것을 연합이라고 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한 그 삶을 우리 신자들도 그대로 재현되어 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한 것이 뭡니까?

버림당하는 거였잖아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잖아요.

 

유대교는 인간의 열심과 가능성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만들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 나라는 너희들의 가능성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 부터 주어지는 것이라고 하니까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종교와 다르다고 욕하면서 내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예수를 하늘 예루살렘 성을 짓는데 모퉁이 돌로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자기 백성들을 그 구조 속에 투입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에게 낳아진 자들은 예수님과 똑같은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여러분들 성화해야 하고 율법 열심히 지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구원받습니다! 라고 할 때 여러분들이 구원은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성화와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다! 라고 하면 그 사람들이 우리를 이딘이라고 내어 쫓습니다.

교단으로부터 버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단이라고 버려진 자들을 원래 이단이라고 똑같이 버려진 예수 옆에다 갖다 붙이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 이단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단이라는 말이 듣기 싫지만 우리의 싫고 좋음을 떠나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가십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되어야 구원이 되는 것이지, 내가 스스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반드시 나를 버려지게 하는 세력이 필요한 것이라니까요!

그렇게 나를 버려지게 하는 세력으로 가인의 후손을 주신 것입니다.

가인의 후손을 고맙게 생각하셔야 해요.

 

여러분들은 이단이라고 하는 그 사람들에게 짜장면이라도 사주시면서 고맙다고 해야 한다니까요.

가서 왜 이단이라고 그러냐고 싸우면 안 됩니다.

그들에게 맞습니다.

내가 이단인 걸 어떻게 알아 봤습니까?

 

그래서 이 땅에는 예수의 피를 전하면 이단 소리를 반드시 듣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의 가능성을 부정하니까 인간들은 그게 싫은 것입니다.

 

 

에녹처럼 예수님을 예표하는 므두셀라를 낳고 나서 세상을 다르게 보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까 세상에 대해 부정적이 되는 것입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기 전엔 세상 사람과 어울렸기 때문에 세상 사람을 긍정적으로 봤습니다.

그런데 므두셀라를 낳고 나서 보니 바뀌는 겁니다.

 

 

유다서에서 뭐라 그래요?

그들에게 죄를 지적하고 경고했다고 하지요?

므두셀라를 낳고 나서 에녹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이 세상을 보는 안목이 부정적으로 달라졌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전에는 그냥 율법아래에서 너도 좋고 나도 좋고 했는데,

복음이 깨달아 지고 나니까 이건 으쌰 으쌰 할 일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부정적으로 얘기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부정적으로 얘기하는 것을 사람들은 용납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너 꺼져!’ 한다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버림당하는 것입니다.

 

 

버림당한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을 성경에서는 ‘광야’라고 하고 ‘들’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 ‘들’에 늘 하나님의 천사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성탄절에 노래하지요?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이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기뻐하자 가 아니에요.

 

오늘날의 성탄절은 어때요?

예수가 탄생했다 우리 기뻐하자 하는데 그건 아니에요.

그건 이방인들이 하는 짓입니다.

진짜 성탄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이 주여 감사합니다!

왠 은혜입니까! 왠 사랑입니까! 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들의 목자들이 편안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고난은 다른 게 고난이 아니고 현실 속에서 이 현실의 땅의 가치로 살아야 하는 사람이 땅의 가치로 살지 않고 하늘의 가치로 사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날마다 어디 가서 얻어맞고 하는 그런 것이 고난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들 복음 전한다고 해서 감옥에 집어넣고 그런 것 없어요.

지금의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다 보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혼자 살아 보세요.

그게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선지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에녹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를 해 주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에녹입니다.

예수 안에 나온 사람이 다 예수이듯이 말입니다.

 

 

계시록 14장에 시온산의 어린양들이 있는데 그 이마에 누구의 이름이 있다 그랬어요?

전부 어린양의 이름이 있다 했잖아요.

그럼 에녹에게서 나온 사람은 전부 에녹이라니까요.

그러니 에녹끼리 화목하게 모이는 무리 속에서 감사하며 재밌게 지내세요.

 

 

신앙생활은 교회에서 싸우는 게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서로 서로 용납하고 이해하고 하나가 되어 서로가 위로하며 그런 모습으로 세워져 가야합니다.

그것이 천국입니다.

 

세상과 다른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에녹 안에 놓여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바랍니다.

그리하여 나 같은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므두셀라가 오셔서 하나님과 동행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고백을 하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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