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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08강. 안위(安慰)의 아들 (창 5:25-32)

by coroa 2020. 9. 8.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08강. 안위(安慰)의 아들 (창 5:25-32)-

 

-.정낙원 목사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우리의 뜻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무엇을 말씀해주고 계시는지를 듣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기독교와 이방 종교의 차이를 말씀드렸습니다.

 

이방 종교는 내가 가서 신에게 자기 안에 있는 이야기를 아뢰는 것이라면,

기독교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요구할 입장이 못 됩니다.

 

우리는 이미 죄 아래 저주 받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릴 뿐이지

내가 그 처분에 대해서 이런 저런 말할 입장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아는 자가 신자입니다.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는 자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꾸 말을 합니다.

할 말이 아직 있다는 것은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 모른다는 얘기입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이사야가 높이 들린 하나님의 보좌를 보고 뭐라고 합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하지요?

이게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면 나타나는 실존적 고백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면 할 말이 없구나…

내가 저주받아 마땅한 자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저주받아야 마땅한 자라는 것이 기초로 깔려 있어야 그 다음의 모든 것이 은혜가 됩니다.

감사가 됩니다.

 

내가 죄인인 줄 모르고,

내가 저주받은 자인 줄 모르고, 하나님 앞에 나오면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섭섭합니다.

왜? 하나님은 내 마음을 몰라줄까?

왜? 하나님은 내 소원을 안 들어 주실까 라는 섭섭함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내가 마땅히 저주받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복은 고사하고 저주받아 마땅한 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 내가 산다는 것 자체가 은혜가 됩니다.

천국생활이라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뭘 가져다 드리고 하나님 앞에 뭘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기 위해서는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깨달음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들으라!

내 말에 귀를 좀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말씀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믿음은 들으면서 나옵니다.

말씀을 안 들으면 결국 자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모르면 지식으로 밖에 알 수가 없습니다.

 

죄인은 죄인이 가지고 있는 죄가 주는 정보로 주는 하나님이 있잖아요.

타고난 본성 속에 하나님이 있단 말입니다.

마치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하나님으로 섬긴 것처럼 말이에요.

그런데 엘리야가 증거하는 하나님은 바알의 하나님이 아니고 여호와의 하나님이란 말이지요.

 

바알의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입니다.

내 욕구를 들어주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제시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욕구를 들어주는 하나님이 아니고 언약을 주시는 하나님이니 이 언약의 하나님을 알라는 것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을 모르면 결국 그 사람은 비 언약의 백성으로 저주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자체가 언약으로 난 자라는 것입니다.

 

언약으로 낳았다는 얘기는 너희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어떤 근거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너희를 불렀고 하나님의 언약으로 선민이 되었으면 너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그 언약이 너희를 지켜내고 있는데,

왜? 그 언약을 모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그 언약으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 시대 시대마다 선지자를 보내면서 언약 안으로 불러오게 하십니다.

그러면 지금 이 시대의 언약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 안에서 주어지는 새 언약입니다.

계속해서 선지자들을 보내 하시는 말씀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왜요?

만물이 그리스도로 부터 말미암고 그리스도로 인하고 그리스도로 돌아가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 분이 여러분의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 분을 찾으세요.

그 분을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29절을 봅시다.

 

29절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安慰)하리라 하였더라”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나서 이 세상을,

이 땅을, 저주해 버렸습니다.

그 저주의 소식을 에녹을 통해서 알려주십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5장은 종말장입니다.

 

창세기 5장 이후는 없다고 생각하세요.

이 창세기 5장이 끝이라면 종말이 온다는 것을 이미 에녹을 통해서 알려준 것이죠?

에녹은 하나님께서 간섭을 하기 전에는 이 세상의 종말을 모르고 살았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다가 오셔서 알려줍니다.

 

이 세상은 종말이 임할 것이다 하고 그 종말의 징조로 므두셀라 라는 아이를 줍니다.

그 므두셀라 라는 아이의 이름이 ‘이 아이가 죽으면 심판이 임하고 새 세상이 열린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에녹에게 이 므두셀라 자체가 계시인 것입니다.

이 녀석이 일 년 있다가 죽을런지, 십 년 있다가 죽을런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녹은 그 때부터 과거에 하나님을 모르고 살던 삶에서 이제는 ‘종말을 아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종말론적 삶’ 이라고 합니다.

므두셀라가 태어나면서부터 ‘종말론적 모드’가 된 것입니다.

 

이 므두셀라가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내가 다시 온다 그랬지요?

그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날을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내일 오실지 아니면 모레 오실지 일 년 후에 오실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말론적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오실 그 날을 이 땅에서 사모하면서 사는 것을 다른 말로 나그네와 행인 같은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이 세상의 분깃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아셔야 해요.

지금 여러분과 제가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세상의 분깃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늘의 것을 주십니다.

땅의 백성은 땅의 것을 주십니다.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을 창세기 4장 5장에서 말할 때 저주받은 가인의 후손들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줘서 거기에서 승승장구하고 영웅호걸이 일어나더란 말입니다.

반면에 셋의 후손은 단 한 사람도 이름 낸 사람이 없습니다.

그냥 오래 살고 죽었더라 죽었더라 입니다.

 

그런데 그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하는 백성들 속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안위하기 위해 마지막 한 아들을 보내줬는데 그가 노아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분깃이 없는 셋의 후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의 그 수고로움을 안식하게 하기 위해서 안위의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그가 노아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셋의 분깃같이 이 땅에 분깃이 없어요.

아무리 여러분들이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이 땅에서 영웅호걸 되게 해 주시고,

이 땅에서 잘 살게 해주시고,

모든 것을 소유하고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하는 기도를 해 보십시오.

 

그건 여러분들의 소망일뿐입니다.

저도 그런 소망이 있어요.

그러나 소망은 내 마음이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마음대로 하십니다.

 

아무리 여러분들이 꿈을 꿔도 그 꿈을 실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그렇게 헛 공사하는 겁니다.

눈만 뜨면 땅의 것 달라 그러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뭐라 그래요?

너희가 구할 것은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라고 자꾸 간섭을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 하늘의 것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유익이 됩니까?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하늘의 것은 땅에 사람들에게 조금도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화를 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어서 영생 받습니다.

 

천국 갑니다, 라고 하면,

죽어서 천국 가는 것 보다 지금 당장 죽겠는데 뭘 나중에 천국 간다,

그래 지금 당장 뭘 좀 해 주지…라고 불평을 합니다.

 

이런 얘기들을 조** 목사가 동국대 스님을 앉혀놓고 했잖아요.

죽어서 가는 천국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죽겠는데 죽어서 가는 천국이 왜 필요하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땅의 천국을 말한 것입니다.

스스로 가인의 후손입니다 를 드러낸 것입니다.

돈 모으는 목회를 한 겁니다.

그렇게 땅의 것을 추구한 것입니다.

 

여러분 병 낫는다고 그 사람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문둥병자 열 명 사건 중에서 아홉은 병 낫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건 일반 은총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다 떠나가고 하나만 돌아오잖아요.

그 하나가 누구에게로 돌아옵니까?

예수에게로 옵니다.

 

구약에서 보면 문둥병자가 그 병의 고쳐짐을 알기 위해서 의사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에게 갑니다.

이것은 제사장은 죄 문제를 위해서 존재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남은 한 문둥병자는 자기의 병을 그냥 병으로 보지 않고 죄 문제로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제사장이신 예수님에게로 간 것입니다.

이 문둥병자는 예수를 제사장으로 알고 모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만 구원받은 것입니다.

나머지는 그냥 병만 고쳐진 겁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기적을 쫓아가지 말란 말입니다.

기적은 미혹의 수단입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2장에 뭐라 그래요?

하나님의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은 자들을 유혹하기 위해서 거짓 것을 믿게 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유혹을 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진리에 속하지 않는 자들은 혹해서 전부 따라갑니다.

병 고쳐도 그 사람은 결국 죽습니다.

 

여러분 히스기야가 기도해서 십오 년 더 살았지만 결국 죽었잖아요.

차라리 일찍 죽었으면 예루살렘 성전이 망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십오 년 더 산 것을 자랑하면서 바벨론 특사로 온 이방 민족에게 성전 곡간을 다 열어 줬잖아요.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교만을 벌하시면서 바벨론 포로로 보내버리십니다.

 

제가 지금 미국에 가서 이 이사야서 40장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중심 주제를 가지고 설교할 것인데

거기 내용을 보면 히스기야는 그 때 세상 힘을 힘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벨론은 그 당시 강대국이었는데 들리는 말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살아났다 하니까 그 나라에서 특사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우리도 이렇게 힘이 있다고 자랑하고 싶어진 겁니다.

 

그래서 이방민족에게 곳간을 다 열어 보이며 과시를 한 것입니다.

결국 힘은 힘으로 망합니다.

그럴 때 이사야 40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합니다.

이제는 복역의 때가 끝났다!

히스기야 시대와 이사야 40장에 나오는 시대와 백 년 정도 갭(틈새)을 주면서 말씀을 해주시는 겁니다.

 

이제 복역의 때가 끝났다!

왜? 이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느냐?

히스기야가 세상 힘을 믿고 까불다가 요즘 식으로 말하면 교회 크다고 자랑하고 교인 수(數) 많다고 자랑하고 돈 많다고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다가 포로 생활을 하게 하셨는데 이제 복역의 때가 끝났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사야를 보내서 내 백성에게 외치라 합니다.

이사야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라고 물으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 인생은 풀이요 너희 인생의 영광은 들의 꽃과 같으니까 그 위에 하나님의 기운이 붊이라’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의 너희 인생을 끝내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인생의 영화로움을 꿈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름다운 소식이라면서 예루살렘에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게 환장하는 겁니다.

살려고 하는 곳에 가서 뜨거운 물 끼얹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위로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데 생각을 한 번 해 보세요.

포로로 잡혀 있던 사람이 돌아왔는데 그 사람들은 어떤 위로를 바랄까요?

여러분들 이제부터 예수 믿고 승승장구 잘 사세요!

이래야 위로잖아요.

 

그런데 포로 생활 힘들게 하고 온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너희는 풀이다 죽어라! 하는데,

이게 무슨 위로 입니까?

결국 세상엔 소망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세상에 소망을 갖습니다.

마귀는 자꾸 세상에 소망을 두게 한단 말입니다.

화려한 것을 가지고 미혹을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이 세상의 화려함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세상을 멸망시킬 이유가 없습니다.

이 세상을 심판한다는 것 자체가 이 세상에 희망을 두지 말고 살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녹에게 계시를 해주는 겁니다.

 

에녹은 그 때부터 하나님의 종말을 외치고 살았잖아요.

아~ 이 세상 끝난다,

이 세상은 끝나고 다른 세상이 올 것이다,

그 세상 바라보고 살자…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노아라는 한 사람을 보내서 안위(安慰)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는 이렇게 한 남자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라는 말을 그 한 남자의 이야기라 해서 ‘History’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역사 자체가 그 한 남자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주 받은 세상 속에 한 남자를 보내서 안위(安慰)하게 하는데,

그 남자를 알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은 세상의 것 듣기 위해서 온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주 받은 이 세상에 저와 여러분들에게 진정한 안위자,

안식을 주실 그 분,

예수 그리스도를 알으라는 것입니다.

힘써 예수를 알자!

 

호세아서에서 뭐라 그래요?

‘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그러지요?

그래서 ‘힘써 여호와를 알자’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여호와가 신약엔 예수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를 모르는 이 아이러니의 세대를 어떻게 얘기할까요?

예수를 말하나 예수를 모르고,

하나님을 말하나 하나님을 모릅니다.

교회를 왔으나 교회가 뭔지를 모릅니다.

 

이게 정말 답답한 노릇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창세기 4장 5장을 보면서 이것이 끝이라 생각하세요.

그 이후로는 없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봤을 때 창세기 4장 5장의 내용은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인 두 족보를 보여주더란 말입니다.

가인의 후손은 영웅호걸이 돼서 땅을 지배하고 삽니다.

하는 것 마다 잘되고,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아무튼 잘됩니다.

 


그런데 셋의 후손은 들어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는데 그들에게 위로자를 보내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분깃이 없고 나그네와 행인같이 사는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메시야를 보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제가 이사야서 40장을 얘기할 때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라는 복역의 때를 끝나고 돌아 온 그들에게 외치기를 ‘너희 인생은 풀이요 너희 인생의 영광은 들의 꽃’과 같은 것이다,

nothing이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면서 장차 하나님께서 강한 자를 임하셔서 흩어진 자기 양 떼를 끌어안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초림으로 이 땅에 탄생하실 때에 온 천하만국에 호적 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그 호적 하는 일들이 일어날 때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들에 있는 목자들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들에 있는 목자들은 다 흩어진 자들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 아들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창세전 언약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뭐에요?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예수님의 피로 구원해서 하나님의 아들 되게 만드는 거잖아요.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된 자들이 영원토록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으로 나가는 거잖아요.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지금 자기 백성들의 실존의 모습은 아들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부 종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종들은 안식이 없어요.

뼈 빠지게 고생만 하는 게 종입니다.

 

그것을 언약식으로 말하면 율법 아래에선 종노릇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종노릇 하고 있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셨어요.

유대 신앙의 율법이 난무할 때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온 세계가 율법 신앙으로 뒤덮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율법 아래에서 종노릇 하고 있는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내시는 것입니다.

 

끄집어 낸 후 하나님의 아들 삼는 이 일을 합니다.

비로소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종의 자리에 있던 자기 백성들을 아들의 자리에 입적시키는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는 것을 표적이라 그랬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누가 누구에게 고지합니까?

천사들이 들의 목자에게 고지합니다.

 

보세요.

천사는 묵시에 속한 자입니까?

역사에 속한 자입니까?

묵시에 속한 자이잖아요.

 

하나님께서 묵시에 속한 그 천사들을 지금 들의 목자들에게 보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기를 예루살렘과 들은 서로 상대적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세상의 타락된 것을 말하고 들은 반대로 묵시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묵시에 속한 사람이 지금 들에 있습니다.

쉬운 얘기로 지금 들에서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인데도 지금 종으로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뭐라 그랬나요?

봅시다.

 

 

갈 4:1-7=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잘 보세요.

아들인데 종으로 있다고 하지요.

분명히 유업을 얻을 자이지만 어렸을 때는 종으로 두었다가 때가 차매 그 아들을 보내서 율법에서 꺼내어 아들의 영을 보내 아들의 명분을 삼는다 하잖아요.

 

지금 들에 있는 그들이 하는 일인 목동 노릇이 아들이 할 일입니까?

종이 할 일입니까?

종이 할 짓입니다.

 

지금 들에서 종노릇하고 있는데 분명히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묵시에 속한 천사를 그들에게 보내서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게 별이 인도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묵시에 속한 천사들이 들에 목동들에게 나타나서,

묵시적인 아이가 나타났다!

너희들을 종에서 아들로 만들어 줄 묵시의 인물이 나타났다!

그가 예수다!

 

그 예수를 통해서 너희들이 이제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 되는 것이다 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목자들이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라고 합니다.

아! 비로소 하늘의 평강이 왔구나!

그 동안에는 우리가 땅의 평강만 추구했는데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오심으로 비로소 하늘의 평강이 왔구나!

 

그 하늘의 평강이 어디에서부터 나온 것입니까?

요한복음 20장에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뭐라 그랬나요?

자기 옆구리를 보여주면서 여기에서 평강이 나온다고 하시지요?

하나님의 평강은 예수님의 옆구리,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들이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평강은 반드시 예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주는 평안은 세상과 다르다고 하잖아요.

그 평안을 우리가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평안을 입은 사람들은 비록 세상에서 삶이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다 이겨냅니다,

왜요?

하늘에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로 모인 것은 세상 것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세상 것은 줘 봐야 또 사라질 것들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날마다 우리의 존재를 알려줍니다.

 

너희 정체성이 뭐냐 하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와서도 여전히 육신 아래 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땅의 것을 구합니다.

 

그럴 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너희는 풀이요 너희 인생은 이 풀의 꽃과 같은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니다,

그냥 시들어 버린다 라고 하십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기껏 해봐야 잠깐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40장을 한 번 봅시다.

6절부터 9절까지 봅니다.

 


6-9=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보세요.

지금 인간은 들의 꽃과 같고 풀과 같아서 다 시드는데 결국 하나 남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8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고 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우뚝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민의 기호가 된다고 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 안에 있는 자들만 남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금 예루살렘에 가서 전하고

유다 성읍에 가서 전하라고 하는데

이 소리가 얼마나 듣기 싫은 소리가 될지 아시는 하나님이 이사야를 보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면 매 맞는다는 겁니다.

 

여러분 항상 이렇게 생각하세요.

내 소원과 내 뜻이 어떠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잠시 접어 두시고 생각하세요.

 

예전에 모 탤런트가 선전한 핸드폰 광고에 그런 말이 있었지요?

대나무 숲에 들어가면서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됩니다’ 라고 하잖아요.

그렇듯이 여러분들도 여기 교회에 와서는 여러분의 생각을 잠시 꺼두셔도 됩니다.

잠시 꺼두시고 이제부터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 말입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이 울산 목양 교회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진정한 위로가 무엇인가?

변하는 세상 것인가,

변하지 않는 하늘의 것이냐?

 

 

여러분 보세요.

세상은 다 쓸어버리는데 마지막 그 쓸어버림 속에서도 안위 받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 한 사람 속에서 자기 백성들이 안위 받고 사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 그 저주의 비가 쏟아질 때 누가 그 비를 홀로 다 맞습니까?

방주가 다 맞잖아요.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마 재밌게 지냈을 거예요.

 

방주 바깥은?

모든 저주의 비가 쏟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호흡의 기식 있는 것들은 전부 죽여 버렸잖아요.

이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관심이 있지 언약 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왜?

이 세상 자체가 언약 때문에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사야가 그러는 겁니다.

들의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결국 하나 남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만 영영히 서리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장 10절에도 보면 만물은 철거가 되지만 결국 하나님 말씀만 남는다고 하지요?

그 말씀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저와 여러분들에게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 누가 무슨 소리를 하든지 너희는 흔들리지 말고 내가 너에게 피 뿌려 준 그 구속의 은혜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은 계속해서 마귀의 참소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마귀가 무엇으로 참소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참소합니다.

 

검사가 죄인들을 구속할 때 법전을 가지고 하잖아요.

법의 조문을 근거로 몇 항 몇 조에 의해 죄를 정하잖아요.

마귀도 지금 말씀을 가지고 참소를 합니다.

이 말씀은 곧 법입니다.

 

마귀는 계속해서 이 법을 가지고 우리에게 갖다 대는 겁니다.

너 이거 했어 안했어?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 앞에 전부 죄인으로 드러나 구속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속된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구속당하셨습니다.

‘저 아이를 잡아 넣으려면 나를 잡아라’ 하시고 예수님이 구속당하신 것입니다.

‘저 아이는 잘못이 없느니라’

 

보통 그러잖아요.

자식을 키울 때 부모는 그 자식이 무슨 잘못을 하면 사람들 앞에서 부모인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잖아요.

그러듯이 지금 예수님이 우리 앞에 가로 막고 서서 이 아이 잘못이 아니라 내가 잘못한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아이의 모든 죄를 내가 짊어지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오케이 하고 허락하셔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것은 마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죽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어요?

흑암이 덮였다고 했지요?

깜깜해진 겁니다.

하나님이 외면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뭐라 외치십니까?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아버지가 버렸다니까요!

왜요?

그걸 버려야 예수 안에 있는 이 올망졸망한 창세전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기 백성들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을 내가 이제 영광 받을 때가 되었구나.

아들아 고맙다!

니가 한 알의 밀알로 떨어져 죽어야 니 속에서 수많은 생명들이 나타날 것 아니야 잘 죽어라… 하신 것입니다.

이게 기독교입니다.

이게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얼마나 그 사랑이 감내하기 힘들었으면 예수님조차도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 옮겨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했겠어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너무 너무 잔인하시게도 그렇게 기도하는 아들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저 같으면 천사들 보내서 십자가 안지는 쪽으로 도와줬을 거에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서 예수님을 달랩니다.

 

예수님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하늘나라에 계시던 분이 여기에 왜 오셨습니까?

천하디 천한 육신의 몸을 입고 왜 오셨습니까?

당신의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기 위해서 왔는데 지금 이러면 안 됩니다…하고

 

예수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하잖아요.

그러자 예수님이 순응하시면서 그래 내가 온 것은 내 뜻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왔다 라고 하시면서 가잖아요.

 

아버지여 이제 내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라고 하자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면서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영광을 받았고 이미 영광 또 받았구나 고맙다 아들아 잘 죽으라 그랬다니까요.

그 예수의 죽음으로 우리는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노아 한 사람이 심판에서 자기 가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홀로 희생을 했습니다.

노아의 희생으로 인해서 노아의 가족이 살아났습니다.

노아 가족 여덟 명이 살아났죠?

이 여덟이라는 숫자는 새로운 피조물을 상징합니다.

 

그 여덟 속에 우리가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여덟 명이 들어갔다고 그것을 숫자적인 개념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그 여덟 속에 묵시 안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 여덟을 살려내기 위해서 노아가 지금 방주 짓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 다 살려내기 위해서 예수님 홀로 십자가를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그것을 믿는 겁니다.

그것을 보고 주여, 이런 무지랭이 같은 인간을 위해서 주께서 죽어주셨다니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우리가 그 안에서 할 말이 없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이 깊어지면 길수록 유구무언이 됩니다.

그저 감사 밖에 없는 것입니다.

죽이든 살리든 고맙습니다 가 나오는 겁니다.

이게 안 믿어지니까 산다는 것이 맨 날 악악거리는 겁니다.

 


예전에 교회 개척했을 때 일입니다.

참 웃지 못할 일인데,

생전에 새벽기도 안 나오던 사람이 어느 날 나와서 기도를 하는 겁니다.

 

그 내용이 얼마나 재밌는지

‘하나님 그 사람이 내 돈 빌려간 거 기억하게 해주세요’ 라는 겁니다.

전 본의 아니게 강단에서 그것을 듣게 됐습니다.

생전 안 오던 사람이 오니까 가슴이 철렁했는데 말입니다.

 

여러분,

목사 입장에서는 평상시에 안 나오던 사람이 어느 날 나와서 기도를 하면 그 집에 무슨 문제가 생겼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문제가 생기니까 나와서 하는 기도가 자기가 보험을 들어 돈을 줬는데 그 사람이 안 받았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돈 받은 거 기억나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게 우리 인간입니다.

5만원을 그 사람이 기억했으면 교회 기도하러 안 왔겠지요?

그러니까 5만원을 기억이 안 나게 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니까요.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그 사람이 그렇게 기도를 한 거에요.

나중에 그런 유치한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기도했구나를 알고 부끄러워지겠지요.

 

그만큼 우리가 결국엔 세상의 것을 구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으라는 겁니다.

그 한계성을 아시라구요.

이런 인간이 천국 간다는 것은 정말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니까 천국가면 놀라는 겁니다.

세상에 나 같은 인간이 천국에 왔다니…

말도 안되는 겁니다.

그 말도 안되는 것이 하나님 하시는 일입니다.

 


지금 한 번 생각을 해 보세요.

우리가 지금 말도 안 되는 사람들이니까 여기에 모였지,

여기 말 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어요.

 

저는 제가 지금 복음 전하는 목사가 됐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놀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일을 해 가실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우리의 생각을 비껴가게 하시니까 우리는 감도 못잡는 겁니다.

뭔가 감(感)을 잡아야 예측이 나올 텐데 감을 못잡는 겁니다.

 


인간은 그래요.

자기가 살아온 과거를 가지고 뭔가 예측을 하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하면 되겠다! 저렇게 하면 되겠다! 라는 이 예측 시스템이 곧 법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타고 나기를 법을 만드는 전문가로 납니다.

 

목사 입장에서 내가 기도를 이렇게 했더니 이번에 새로운 신자가 몇 명 왔더라…

그럼 조금 더 세게 하면 하나님께서 더 주겠구나 하고 기도를 하는 겁니다.

그런 심뽀로 기도하면 있는 인간도 다 나갑니다.

이해되세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법을 만들어 우리가 예측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십니다.

예측할 수 없는 그 세계를 사는 것이 그냥 묵시를 사는 겁니다.

역사는 예측이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역사는 흔적을 남기기 때문에 그 흔적이 쌓이면 하나의 법칙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우발적 사건으로 나타나니까 감을 못 잡는 겁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합니까?’ 라고 물으면

‘그건 니가 신경 쓰지 마라 내가 알아서 한다’ 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못사는 겁니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살라고 하십니다.

그 믿음을 우리가 행사할 수 없기 때문에 믿음조차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셔서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그 일하심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게 끌려 들어갈수록 많이 아픕니다.

그 아픔을 우리는 기도로 토설하는 것입니다.

 


시편 보세요.

다윗이 평상시에 기도했어요?

아니에요.

사울에게 쫓겨 다니면서 기도가 터져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이 아직 살아가시면서 ‘여호와는 나의 산성이시요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라는 기도가 실제적으로 내 것과 같은 기도로 안 나왔다는 것은 아직까지 여러분은 하나님을 관념적으로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멀리 있는 하나님,

책 속에 있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어느 날 여러분의 삶 속에서 피와 살을 뚫고 들어 왔을 때 여러분의 입에서는 다윗과 같이 ‘여호와는 나의 산성이시요’가 터져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경험된 그 하나님을 만나야 여러분들의 믿음이 추상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경험된 사람과 지식으로 아는 사람은 이 증거 자체가 다릅니다.

우리는 모두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하는 증인들이란 말이죠.

그 증인들을 예수님께서 우리가 독자적으로 할 수 없으니까 성령을 보내줘서 우리를 그 증인 자리에 집어넣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당하신 그 아픔들을 고스란히 그대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버림당하는 돌이 되는 것입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되어요.

 

그런데 우리의 꿈은 버림당하지 않고 이 땅에서 잘 살고 싶은 겁니다.

그 꿈이 날마다 말씀 속에서 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허상이었구나를 잘못이었구나를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 40장을 집에 가서 다시 한 번 곰곰히 읽어 보세요.

너무 잔인합니다.

이제 복역의 때가 끝났다!

이제부터는 고생 끝 행복 시작~

이렇게 하는 줄 알았는데

더 힘든 모습으로 간섭하시니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중요한 얘기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

‘하나님께서 땅을 저주하심으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했다’ 하지요?

‘안위’가 되려면, 그 전제가 ‘수고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는데 이 안식이 될려면 바탕에 먼저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4절부터 9절을 봅시다.

 

4-9=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으리니 6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9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수고로운 그들을 위해서 안위하는 노아를 보냈다고 하지요?

노아를 통해서 그들에게 안식을 주잖아요.

여기 데살로니가 후서에서는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을 하시는데 이 땅에서 복음으로 인하여 고난받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늘의 안식을 주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는 겁니다.

하늘로 부터 오셔서 우리에게 하늘의 안식을 주는 것입니다.

안식은 땅에 없어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저주해 버렸습니다.

그러면 저주한 세상엔 안식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저주이기 때문에 아무리 잘 살아도 저주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생각하기를 세상의 물질이 부요하면 그 사람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물질로서 행복을 주는 게 없습니다.

 

도리어 이 역사가 증명하기를 많이 가진 사람은 더 많은 근심 걱정이 온다고 합니다.

사람은 없을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그런데 없는 그 사람에게 가서 그 얘기를 하면 그 사람은 동의하지 않겠지요.

 

진정한 안식을 이 땅에 없습니다.

하늘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안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을 했습니까?

재림을 하실 것입니까?

 

이미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재림을 하셨습니다.

역사적인 재림은 장차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우리 안에 이미 오셨습니다,

 

그 영적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안식이 어떤 안식입니까?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했단 말입니다.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주시는 안식은 세상의 먹고 마시는 것으로 주는 것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주신다니까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그 언약의 말씀이 내 안에서 믿어질 때 그 말씀이 세상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적 가치를 초월하게 만든단 말입니다.

 

이미 성령으로 오신 주님은 지금 자기 백성들 속에서 하늘의 안식을 주십니다.

그것이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했지요?

그래서 우리가 진짜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면 비록 세상적으로 가진 것이 없지만 마음에 평강이 있습니다.

물론 물질 만능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물질이 없으면 조금 힘들고 불편하겠지요.

그러나 예수가 그 안에 있는 성도는 그 불편함이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 속의 평안은 누구도 빼앗지 못합니다.

 

제가 왜 큰소리치겠어요?

다른 것 없어요.

그 평강을 저는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제가 큰소리 칠 것 하나 없지만 하나!

하나님 주신 그 평강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기 때문에 당당한 겁니다.

 

그래서 제가 늘 그러는 겁니다.

힘들면 목사 안하면 되고 교회 접으면 됩니다.

주님이 나를 알고 내가 주님을 알면 그것으로 족한데 뭐 사람에게 구할 것이 있냐 말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를 통해서 지금도 일을 해가십니다.

 

나같이 율법 아래 있던 그 백성들을 만나게 하시고 그 백성들을 위로하게 하기 위해서 도구로 쓰시니까 그냥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뭐 잘났다고 미국에서 집회를 초청하고 하겠어요?

 

제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에 보면 내가 로마로 그렇게 가고 싶은 것은 내가 너희에게 줄 신령한 은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너희들에게 줘야 할 것이 있고 나도 외로우니까 너희들에게 위로 받아야 겠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나도 힐링 받아야 하고 여러분도 힐링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주는 것은 없습니다.

서로 서로 주고 받는 것입니다.

 

성도도 마찬가지 입니다.

다 각각 받은 은혜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각자 받은 은혜를 서로 나는 것입니다.

 

집사님 세상 살기 힘들지…

그래도 이겨내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있잖아…

그러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한 주간 살면서 받은 은혜를 나누고 간증하는 겁니다.

 

성경 구절 몇 개 더 외우는 거 아닙니다.

성경 구절을 외우려 하지 말고 성경 속에 있는 그 내용을 잡수시란 말입니다.

그 말씀 그 내용,

그 생명을 우리가 먹는 거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수고로이 수고하고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한 아들을 보내서 그 아들이 우리의 수고를 대신 다 걸머지는 것으로 일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나 내게로 오라 하지요?

그러면서 뭘 배우라 합니까?

그냥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가기만 하면 다 해결이 됩니까?

아니지요.

 

내 멍에를 메고 배우라 합니다.

예수님의 멍에가 뭡니까?

죽음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통해 결국 우리에게 말씀하고 하시는 것은

얘들아 이 몸은 땅에서 난 것은 땅에 돌려 주면 된다.

이것을 붙잡고 있으려니까 니가 힘든 것이지…

이거 내놔라 이 말이거든요.

 

이게 우리 독자적으로 안 되니까

성령을 보내줘서

성령이 오고 나니까 제자들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성령 받기 전에는 제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했는데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이 목숨 가져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를 위하여 능욕을 받는 것을 합당히 여기잖아요.

이거 가져가 이거 필요 없어!

그러는 거에요.

 

왜 그러겠어요?

예수님이 보이거든요.

부활하신 주님이 보이는 겁니다.

예수님도 이 목숨 주고 나니까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되잖아요.

그 걸 보니까,

 

그 예수가 그들 속에 들어오고 나니까

‘이 목숨 아무것도 아니야,

이거 줘 버려, 줘 버려…

이거 주고 나면 내 목숨 있어,

저 거 가져’

그게 보이고 나니까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담대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건 제자들에게만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에게 동일한 성령이 오셨고 그 동일한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일해 가십니다.

어떤 사람은 실제적으로 경험하며 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아직 경험이 안 되서 막연히 아는 사람도 있지만 언젠가는 그것이 실상으로 깨달아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 심어지면 하루아침에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게 아닙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떨어져 있다가 그 말씀이 싹이 나고 열매를 맺을 때는 우리 몸을 토양 삼아 그 말씀을 만개시킵니다.

희미하게 알던 말씀들이 점차 점차 실제적으로 다가 옵니다.

 

여러분 그렇잖아요 말씀이…

어떤 때는 말씀을 들을 때 그런 게 있는 가보다 하고 희미하게 들립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셔서 너희 죄를 도말했다는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지만 지식적으로 알고 있던 그 말씀이 내 삶에서 적용이 되는 것은 한참이 걸린단 말입니다.

 

그 세월을 주께서 우리 속에서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씨 뿌리는 비유를 보면 우리는 다 가시밭이고 돌짝밭이고 나쁜 밭인데 좋은 밭은 뭐지요?

좋은 밭은 우리에게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니고 농부가 관리하는 밭이 좋은 밭인 겁니다.

 

하나님이 참 농부가 되어서 자기 밭을 관리를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서 당신이 뿌려 놓은 그 씨는 반드시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받은 사람들은 그 말씀이 예전엔 추상과 관념이었는데 그것이 점점 더 일상이 되어서 말씀이 육신화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그냥 말씀으로 남으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이 내 삶에 양식이 되고 내 육신화로 나타난다니까요.

우리가 원치 않아도 예수님이 그렇게 하세요!

그렇게 끌고 가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이 점점 후폐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지요?

겉 사람은 후폐해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스스로 내 신앙은 왜 이럴까 낙망하지 마세요.

 

농부가 뿌려 놨으면 농부가 알아서 다 관리를 해 나가십니다.

어느 시점이 되면 주께서 일을 해 오셨구나하는 것이 믿어지고 가시적으로 나타난다니까요.

그 때 사도 바울의 고백같이 나의 나된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죽을 고비를 얼마나 많이 겪었습니까?

사도 바울같이 고난 많이 받은 사람이 없잖아요.

그 사도 바울이 우리의 표상입니다.

 

그럼 사도 바울을 그렇게 끌고 다닌 분이 누구인가요?

주님이잖아요.

그 사도 바울을 관리했던 주님이 지금 저와 여러분도 관리하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지금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이렇게 끌려 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십 미터 앞에 가는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오 미터 뒤에 오는 사람도 있는 겁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라는 컨베어 벨트에 올려졌으면 그 벨트가 우리를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그 끌려온 증거들이 지금 저와 여러분이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신앙을 뭔가 환상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 믿으면 가슴에 사이다가 튑니까?

그렇지 않아요.

도리어 우겨쌈을 당하고 곤고함을 당하고 아픔을 당합니다.

 

왜요?

여러분 속에 참 생명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마귀의 세력들은 자꾸 그 참 생명을 혜치려 하기때문에 신자들의 삶이 고달픈 겁니다.

그래서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하지요?

 

이 얘기는 결국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간섭하시는 게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으니까

너는 꼼짝 말고 그냥 오라는 개념이 아니고,

‘예수 죽었잖아 ‘

‘네’

‘너 예수 안에 있지?’

‘네’

그 예수의 운명에 그대로 연합되어 우리는 그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런 길이 있다 할지라도 오늘 본문의 말씀을 상기하시면서

비록 내가 이 땅의 삶이 지치고 힘들고 고통 속에 있다 할지라도 이 고통으로부터 나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구나,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주셨구나,

 

그 아들이 내 안에서 믿어진다는 것 자체가 결국 나는 안위받은 자이구나를 아시란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세상 살기 조금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것 때문에 낙망하지 마세요.

 

여러분, 예녹이 편안하게 살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노아가 편안하게 살았다고 생각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묵시에 속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치고 역사 속에서 편안하게 산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편하게 살지 못하면 다 도망가야 하는게 정상인데 도망가서도 결국엔 붙잡혀 오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더란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들을 선택했기 때문에 절대로 너희들은 내 손에서 벋어나지 못한다고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만약 예수님을 선택했을 것 같으면 우리의 조건에 따라서 얼마든지 붙잡고 놓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선택했다니까요.

 

이사야서 43장에 보면

‘야곱아 내가 너를 조성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라고 하면서

그 다음에 나오는 대목이 뭐에요?

‘니가 불 가운데 갈지라도 불꽃이 너를 사르지 못하고

니가 물 가운데 갈지라도 물이 너를 엄몰치 못하리라’

 

결국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고 내가 너를 조성했다 해놔놓고 뒤에 돌아오는 말은 항상 우리의 생각과는 반대의 것이 돌아온다니까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해놓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이 역설들을 어떻게 이해하냐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사랑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이는 이 역설적인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냔 말이지요?

성령께서 오시면 그것이 이해가 됩니다.

 

내가 결국 죽어야 사는 구나

살아서 사는 법은 없구나

죽어서 사는 것이 영생이구나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래서 신자들은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내가 이런 얘기를 할 것 같으면 핍박 받고 욕 먹는다는 것을 뻔히 알아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길이 곧 영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나 이러다 구원에서 짤리면 어쩌지 겁 먹지 마세요.

절대로 하나님은 한 알갱이라도 버리지 않습니다.

구원은 내가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신다니까요.

 

어차피 창세전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서 찾아내십니다.

결국 찾아 내셔서 우리를 둘러 메고 가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잃은 양 비유가 나오지요?

 

우리는 잃어버린 양인데 그 사실도 모르고 살고 있을 때 목자 되신 예수님께서 찾아 오셔서 우리를 둘러 메고 그 나라 가신다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업혀 가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신발 벗으란 말 많이 나온다고 했지요?

목자가 양을 둘러 메고 갑니다.

우리도 주님의 등에 업혀서 갑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시내산에 당도했을 때 하나님이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왔다고 하잖아요.

이걸 오해해서 진짜 업어 왔습니까 하고 묻지 마세요.

걸어 왔어요.

걸어 왔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해서 왔다는 얘기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이 다 업고 오셨습니다.

지금 내가 예수를 믿고 있고 지금 이 자리에서 복음을 듣고 함께 예배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주님이 업고 온 증거입니다.

다른 거 찾지 말고 내가 예수가 믿어진다는 이 사실을 여러분들이 증거로 갖고 계시란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해도 내가 예수가 믿어지는 걸 어떡합니까?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부디 한 주간 살면서 여러분의 삶의 환경이나 여러분의 조건을 보지 마시고 내 조건과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그 평안 속에서 한주간도 승리하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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