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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05강. 죄를 들추어내는 하나님(창 4:1-15)

by coroa 2020. 8. 15.

-.05강. 죄를 들추어내는 하나님(창 4:1-15).-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정낙원 목사

 

 

신자가 구원을 받는 것은 신자의 어떤 잘난 것이나 착한 일,

그 사람의 의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신자를 구원하실 때에는 신자의 행함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 신자들이 신앙생활 하는 데 있어서 기본 베이스로 깔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은 내 의지에 의한 것도 아니고,

내 뜻에 따른 것도 아니고,

내 노력에 의해 된 것도 아닌,

오로지 일방적인 하나님의 선택하심, 부르심,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그 선택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잖아요.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아브라함을 뭐라 그럽니까.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씨가 믿음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선택했듯이,

그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갔듯이 하나님의 백성도 오고 오는 세대 속에 아브라함처럼 만드신다는 얘기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은 자기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자기 공로가 요만큼이라도 들어간 것이 없습니다.

온전히 백프로 하나님의 은혜란 말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그 구원에 있어서는 내가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내가 이 정도는 되었으니까 하나님이 나 구원해줬지…

자기의 잘남 때문에 구원되었다는 이런 생각이 은연중에 있는 사람은 만약에 자기 생각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되면

‘맞아 저 사람은 당연히 지옥가야 돼…저러니까 지옥가지…’라는 식의 편견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 사람을 천국에 보내 놓으면 자기 자랑하기 바빠집니다.

천국에도 등급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조금 더 못난 사람, 이런 식으로 등급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이 아니죠.

은혜의 나라가 아니지요.

 

믿음이라는 것은 내 주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저 주신 것입니다.

이걸 선물이라고 합니다.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너, 나 할 것 없이 공통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해서 구원을 시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시키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해서 구원을 시킨다는 말이지 우리더러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것은 우리 능력으로 됩니까?

안 된다 그랬지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한 것이 아니라 그 고백은 하나님이 하게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이를 알게 하신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내 아버지라는 겁니다.

 

신앙생활 하는데 있어서 기본은 항상 내가 구원받는 것은 내 공로가 없고 하나님께서 그냥 불러줬구나를 아는 것입니다.

불러줘서 구원을 받는다면 지금 예수를 안 믿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한 번 보세요.

지금 현재로서 우리 주변에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요?

그런 사람에게 우리가 손가락질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관한 비유를 하시면서 이런 비유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입니다.

아침 일찍 나가서 놀고 있는 품꾼을 보고 포도원에 들어와 일을 하게 하고

그 다음에 9시에 나가보니 노는 사람이 있어 또 그 사람을 데려와 일 시키고

12시에 갔는데 또 노는 사람 있어 데려와 일 시키고

3시에 가도 있고 5시에 가도 노는 사람이 있어 데리고 와서 일을 시킨 겁니다.

마지막 사람은 한 시간 일을 하고 나서 6시가 돼서 일을 마치고 전부 하루 일당을 받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품삯을 줄 때 똑같이 줍니다.

 

아침 일찍 포도원품 꾼으로 받은 사람은 쉽게 말해 모태 신앙으로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엄마 아빠 따라서 교회에 나온 환경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중학교 다니다가 교회 나올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청년 시기에 예수를 믿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사업에 실패해서 오십 대가 되서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우편 강도처럼 죽기 전에 예수 믿을 수 있는 사람도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예수를 믿는지 안 믿는지는 우리가 알 수가 없습니다.

왜요?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은 우리 능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해 찾아가 믿게 해주시면 믿는 겁니다.

여러분들 주변에 비록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손가락질 하면 안 됩니다.

손가락질 한다는 것 자체가 나는 잘나서 믿었다는 내 행위가 됩니다.

 

여러분들 가정에서 남편이나 아내든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마음으로 무시하거나 하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이 언제 예수를 믿을 지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내가 예수를 믿으리라 어떻게 생각을 했냐 말이에요.

놀랍지 않아요?

내가 왜 이 시간에 교회에 와서 하나님 말씀을 듣는지 생각을 해보세요.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이었습니까?

십 년 전에 여러분이 이런 생각을 했습니까?

이십 년 전에 여러분이 이런 생각을 했겠냐 말이에요.

 

저는 목사가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2008년도 3월 2일에 여러분과 만나고 또한 저기 저 태양이를 만나서 예배를 함께 드린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가 다 누가 간섭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간섭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게 한 것이 내 의지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불러서 구원시켰다는 것을 기초로 깔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 행위로 이러다 지옥가지…이러면 안 되는데…하는 염려가 없어집니다.

이런 염려를 하는 그 사람은 지금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이 저한테 ‘목사님, 제가 이래서 천당 가겠어요?’ 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럼 제가 뭐라고 대답하겠어요?

맞네요, 집사님 천당 못가겠네요 라고 답할 겁니다.

 

아니, 본인이 천국 갈 지 안 갈지 모르는 사람한테

제가 아니에요, 가실 수 있습니다 라고 하겠습니까?

본인이 믿음이 없어서 갈지 안 갈지 모르겠다는데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맞네요, 믿음 없으시네요 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날 좀 불러줘서 하나님 자녀 시켜주세요 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찾아가 ‘너 내 꺼!’ 라고 해버리신 것입니다.

수많은 인류 속에, 지금 식으로 말하면 육십 억 인구가 있는데 하나님이 지나가시면서 ‘너 내 꺼!’ 하고 주머니 속에 넣고 오신 것입니다.

 

제가 이 비유를 정자 바닷가 몽돌 얘기로 많이 했는데 그 바닷가에 가면 자갈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자갈을 한웅큼 쥐고 주머니에 넣고 와서 보니 그 자갈 마다 이름이 박혀 그 때부터 내 것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자랑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게 기뻐야 하는데 안기쁘시지요?

선택이 되서 오히려 재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이걸 기뻐하지 못하는 줄 아세요?

예수 믿는 것이 재미가 없어서 입니다.

세상 사는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는 재미는 모두 하나님이 뺏어 가 버리시고

그러니까 재미가 없고 감격이 없는 것입니다. 왜요?

머리 속에는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내가 좀 성공하고 잘살까 하는 생각이 가득차 있으니 하나도 기쁘지 않은 겁니다.

 

하나님은 그걸 점차적으로 빼내 가십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죽기 전에 헛되고 헛되고 헛되구나,

결국 주님 밖에 없구나 라는 고백을 반드시 만들어 내십니다.

그렇게 구원시켜 가십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지금 여러분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데요.

한 고집 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고집 센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실패하는 분이 아닙니다.

‘저 거 내꺼!’ 하시면 벗어나질 못합니다.

집요한 스토커이십니다.

그걸 ‘지독한 사랑’ 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게 부모가 자식을 놓지 못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신자는 일방적인 하나님의 선택의 구원을 받았는데 그 구원받은 것이 얼마나 크고 중한 축복인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신자를 그 때부터 어떤 방식으로 다스려 가는지를 알아봅시다.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인간이 못됐다는 것을 고발하는 식으로 하십니다.

이걸 다른 말로 죄를 고발하는 차원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볼 것 같으면 가인과 아벨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을 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고 가인의 제사는 안 받았어요.

그러니 가인은 화가 나서 아벨을 죽이잖아요.

이걸 반대로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고 아벨의 제사를 안 받았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아벨 역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건 아벨은 착하고 가인은 못됐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 다 아담의 후손으로 죄인의 자식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아벨을 선택했을 뿐이지 가인의 제사는 아니고 아벨의 제사는 좋다 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양고기를 좋아해서 아벨의 제사만 받았다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약에 가인의 제사를 받았으면 아벨 역시 화가 났을 겁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똑같이 밥 상 차려놨는데 내가 준비한 건 안 먹고 다른 음식 먹으면 화가 납니다. 

 

교회에 부페식으로 각 자 음식을 하나씩 해 와서 차려 놨는데 다른 음식은 전부 잘 먹는데 내가 해 온 음식에는 손도 안댈 것 같으면 화가 나지요.

왜 그래요?

왜 내 건 거들떠보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러고 하는 말이 뭡니까?

내가 다시는 안 해온다 아닙니까?

만약 내 것이 선호된다면?

그건 또 좋아하지요.

 

집에서 여자들이 자기가 한 음식에 대해 늘 묻지요?

맛이 있는지 없는지 매 번 물어 옵니다.

왜 그래요?

그 음식 속에 자기의 정성과 사랑이 녹아 있기 때문이잖아요.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그렇게 간섭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하나님의 정성과 사랑과 모든 것이 녹아져 있기 때문에 한시라도 우리를 미워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한 엄청난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인간의 죄를 고발하는 차원으로 일을 전개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가인이 아벨을 죽이려고 할 때 하나님이 말려 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안 말리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네 제사를 안 받았다고 해서 그렇게 화를 내는 이유가 뭐냐?’

 

가인은 자기가 소외되는 것을 못 견디는 겁니다.

왜 내 것 안 받느냐는 거죠.

그게 죄에요.

가인은 자기가 죄인인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죄인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가인의 것을 의도적으로 안 받으시는 겁니다.

한 쪽은 미워하고 한쪽은 사랑을 하니까 그 속에 있는 미움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사람 속에 미움이 있는데 모두들 난 착한 사람이야…내 안에 미움은 없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 미움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 미움을 끄집어내야 인간은 자기가 미워하는 인간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가인은 지금까지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동생하고 별 일없이 잘 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가인 속에 죄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반기를 들고 싶어하는 죄가 있는데 한 번도 노출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아 너는 죄인이다 너는 나 미워하는 죄인이다’ 라고 알려주십니다.

가인은 뭐라 그래요?

‘아닌데요, 하나님 저 그러지 않는데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가인 속에 있는 그 미움을,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것을 폭발시키기 위해서 아벨 것을 받으시고 가인 것은 안 받으시는 겁니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법 없이도 산다는 말 많이 들어 보셨죠?

하지만 그 사람한테 어떤 손해를 끼쳐 보세요.

그 안에 화나는 마음이 막 일어납니다. 

 

숭례문 불 지른 그 사람은 왜 질렀겠어요?

그 사람이 토지 보상을 잘 받았으면 안 그랬겠지요.

자기는 보상을 잘 받았는데 만약 토지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한 다른 사람이 불을 질렀으면 아마 그 사람을 보고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나쁜 놈…’ 이랬을 거에요.

그런데 본인에게 그런 불이익이 생기니까 사회에 대한 적개심이 숭례문 불태우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숭례문 불태우는 그 사람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은 또 그 사람을 욕하겠지요?

그렇게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이 여러분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일이 여러분에게 발생했다고 하면 뭐라 그러겠어요?

당연히 적개심이 생기지요. 

 

만약 하나님께서 소리 없는 총을 한 자루씩 주면 제일 먼저 누굴 죽일 것 같습니까?

한 번 생각을 해 보세요.

제일 미운 사람이 있잖아요.

우린 남의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누가 어떤 적개심을 풀어서 분노를 발하고 하는 것을 그 사람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요즘 보면 자칭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언론을 힘입어 자기가 속했던 회사에 대한 비리를 고발하기도 하고 정의 사회 구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같은 소속의 단체를 고발하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말로는 자기도 죄를 지었으니 죄값을 치룰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하지요.  

 

언론도 그런 것에 현혹되어서 누가 하나 입만 벙긋하면 혹세무민시키려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

전 그런 언론의 모습을 혹세무민이라고 봐요.

더구나 한꺼번에 터뜨리면 재미가 없으니 조금씩 조금씩 기사를 씁니다.

그래야 자기 존재를 드러낼 수 있거든요.

사회자체가 그렇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그 마음속에 의를 가장한 미움이 가득차 있습니다.

적개심이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다만 내게 일어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가인이 죄인이었으면 우리도 동일한 죄인입니다.

여러분 가인을 미워하지 마세요.

 

과거에 제가 이 은혜를 몰랐을 때는 성경에 나와 있는 불순종하는 인간들을 볼 때 뭐 이런 인간들이 다 있나 생각을 했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얼마나 욕을 했는지 몰라요.

아니, 하나님께서 만나 주고 반석에서 물 주면 고맙습니다… 하고 먹으면 되는데 먹고도 원망하는 모습을 보고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나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알고 나서 보니 그 인간이 바로 나입니다.

 

교인들이 다 나오면 기분이 좋고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속이 상합니다.

자식이 말 잘 들으면 기분 좋고 말 안 들으면 속 상해서 저걸 왜 낳았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내가 내게 잘해 주면 내가 세상에서 최고의 행운아지… 고맙고 감사하다… 그러다가도 내 뜻대로 안 해주고 속 썩이면 잘못 만나 고생한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항상 자기 유익에 따라서 천사가 됐다 마귀가 됐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성경이 보이면서 성경에 나와 있는 그 나쁜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알고 나니까 누구 정죄를 못하는 겁니다.

내가 그런 인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세요.

자기 백성들을 구원을 했는데 어떤 모습에서 구원이 됐는지를 알아야 그 구원이 감사가 될 것 아니에요.

그렇잖아요?

 

죄인을 구원했는데 본인이 죄인인 줄 모르는 사람한테 구원했다 하면 뭐라 그럴까요?

내가 죄도 없는데 뭘 구원한다 말이야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시켜 놓고,

니가 얼마나 나쁜 인간인 줄 알게 하기 위해서 그 때 부터 하나씩 하나씩 터트려 가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세요.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꺼내서 하나님 백성 만들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백성이기 때문에 꺼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끄집어 낸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됨이 얼마나 축복된 것이고 너희가 어떤 인간인데 하나님이 끄집어 내 주셨는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게 아니라 물 없고 먹을 것 없는 광야로 인도하시는 겁니다.

거기에 데려다 놓고 너희들은 나쁜 인간이라는 것을 고발시키기 위해서 그들이 원망하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손에 잡히고 주머니에 넣어놔야 든든한 생각이 듭니다.

통장에 돈이 있어야 안심이 되고, 돈이 없으면 불안합니다.

주머니에 돈 없는데 지나가다 친구 만나면 도망가고 싶죠.

만약에 여러분이 돈이 아주 많다면 아는 척 안하는 친구 찾아가 오히려 자기 과시하려 하겠지요?

그런데 만약 사업에 실패하고 실직자가 되어 있을 때 누굴 만나면 기분이 좋겠어요?

피하려고 하겠지요.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 자존감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내 손에 뭔가 잡혀 있을 때 안심이 되는데 광야에 끄집어 내놓고 만나를 주시는데 꼭 하루치만 주십니다.

이틀 치 쟁여 두면 꼭 썩게 만들지요.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안하게 만들어 원망을 토설하게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봐라 너희들이 이런 인간이야… 라고 하십니다.

 

어저께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게 됐습니다.

거기에 보면 여주인공의 자칭 하나님에게 은혜를 받아서 자기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 하려고 교도소에 면회를 갑니다.

가서 범인에게 용서 해 주려고 하는데,

그 범인이 하는 말이 나는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뚜껑이 열리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지가 뭔데!

용서를 해도 내가 해야지

내가 피해자인데,

내가 용서해야지 왜? 하나님이 용서 하느냐에요.

그래서 하나님께 복수하려고 장로를 꼬셔서 간음을 하잖아요.

간음하면서 하늘을 쳐다보면서 봐! 보란 말이야 라고 악악거리잖아요.

이게 인간이에요. 

 

영화에선 목사도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그 말씀 중에서도 제일 힘든 게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다.

그 쉽지 않은 일도 자꾸 노력해서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고 내일 안 되면 모레하고 자꾸 갈고 닦아서 점진적으로 나아지고 거룩해지는 걸로 목사가 가르칩니다.

그러자 여주인공이 일시적으로 은혜를 받아서 처음엔 교회 부흥회에 가서 자기 안에 응어리진 것을 울면서 토해내어 놓습니다.

그럴 때 목사는 가서 머리에 손을 얹고 위로를 해주지요.

 

그게 뭡니까?

여러분들이 서러워서 울며 매달릴 때 거기에 동조만 해줘도 은혜를 받는 겁니다.

예수 안 믿어도 은혜를 받는 거예요.

내 어려운 사정을 누가 와서 알아주고 힘내라고 위로해 주면 자기 서러움이지만 눈물이 확 쏟아지는 겁니다. 

 

그 영화에서 여주인공은 그 울음이 자기가 하나님을 영접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뻐서 좋아라 하고 역전에 가서 찬양도 하고 그러지요.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으니까 내 맘에 평화가 넘칩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내 원수도 사랑해 줄 겁니다, 하고 교도소에 그 범인을 찾아 갑니다

 

그 때 그 아들을 죽인 살인자가 자기는 이미 용서받았다고 합니다.

나도 하나님 영접해서 용서받았다고 하는데 그 엄마는 화가 납니다.

내가 용서를 안했는데 하나님이 무슨 권리로 용서를 하냐는 겁니다.

그리고 그 때 부터 하나님과 겨루잖아요.

오히려 더 나쁜 일을 행하면서 하늘을 보고 자기 분노를 폭발해 버립니다.

자기는 이제 원수까지 용서하고 착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그게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영화는 자기 속의 그런 적개심을 분출하도록 만들어 가잖아요.

 

나중에 그 여주인공인 아이 엄마는 정신병원에 갇힙니다.

영화는 정신병원에 갇힌 그 여주인공을 보여 주면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다 정신병자라는 것을 고발하는 것 같습니다.

그 영화를 감독한 사람이 그걸 의도했는지 모르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그래요.

 

영화 속에 약국 아줌마로 나온 사람을 보세요.

교회 열심히 다니면서 아이 죽은 엄마한테 전도한다고 온갖 얘기를 하지만 만약에 그런 일이 자기에게 닥쳤다면 어떻게 할까요?

똑같지요.



거기에 나와 있는 기독교 신자는 전부 허상이요 허구입니다.

그게 남의 일이니까 평심으로 위로를 해대지만 자기 일로 닥쳐 보세요.

난리가 납니다.

그런 허상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영화를 감독한 사람은 기독교 신자는 전부 정신병자 같은 사람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없는데 하나님 있는 것처럼 속이고 스스로 속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 신자들이 그래요!

뭔가 자기는 착하고 믿음이 있는 줄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착한 존재도 아니고 믿음 없는 자라는 것을 고발하기 위해서 우리의 믿음 없음을 자꾸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저는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늘 하나님이 저 같은 것을 긍휼을 베풀어 구원해 주신 것이 감사할 뿐이지 제가 여러분보다 월등히 믿음이 좋다? 아니에요.  

 

목사이기 때문에 주일 빠지지 않고 설교하고 그러는 것이지,

저도 목사 아니었으면 예배 많이 빠졌을 것 같아요.

핑계대고 빠질 수 있지요.

그러니 내가 하나님 앞에 받은 은혜가 억지로라도 끌고 오는 것입니다.

제가 빠질 수 없으니까 말씀을 보게 되고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안 봐도 저는 설교 준비를 하려면 말씀을 봐야 하잖아요.

이게 하나님의 은혜고 복이지요.

감사이지요.

 

그러니 제가 여러분보다 더 낫다고 생각해 본 적은 추호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입장일 것 같으면 저도 예배를 빠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야간 일하고 올 것 같으면 안 오고 피곤해서 쉬고 싶을 겁니다.

누굴 탓할 생각이 없어요.

그 모습이 곧 내 모습입니다.

밀양이라는 영화에 그 여주인공에게 일어난 일들이 내게 일어났을 것 같으면 나도 하나님을 원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지금 그렇게 다스려 가시는 것입니다.

‘너 나 미워해라, 미워해라’

그러면서 미워할 일을 자꾸 벌이시는 겁니다.

‘봐라~ 너 정말 나 미워하잖아…’

 

하나님은 지금도 의도적으로 신자들에게 분노할 일,

하나님 원망할 일들을 자꾸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보세요.

아니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면 더 좋잖아요.

그런데 꼭 전쟁을 일으켜 싸우게 하십니다.

요셉 같은 경우도 애초 형제들에게 팔리지 않고 애굽의 종노릇도 하지 않고 옥에도 갇히지 않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애초부터 국무총리를 시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형제들에게 미움 받고 팔려가고 감옥에 갇히게 하고 거기서 꿈을 해몽하게 하시고 결국에는 총리가 되게 만듭니다.

왜 그렇게 복잡하게 일하십니까?

 

다윗도 마찬가지 입니다.

기름 부었을 것 같으면 처음부터 사울 폐하고 다윗 앉히면 되잖아요.

그런데 쫓기게 하고,

매 맞고 다니게 하고,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실까요?

 

꼭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은 무슨 사건을 벌여 놓고 나중에 처리를 해주시는데 그 사건을 벌이는 목적이 ‘너는 이런 죄인이고 넌 나를 사랑하지 않고 원망할 자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할 일들을 자꾸 벌리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교회 개척해서 이제 좀 부흥시켜 볼까 하고 안하던 금식기도를 기도원에 가서 해봤습니다.

금식기도라는 것을 처음으로 해봤던 겁니다.

그 때 교인들이 한 삼십 명 정도 모였었는데 교회 부흥 시키겠다고 좋은 땅 얘기도 하고 그러니까 제 마음 속에 이게 뭔 일이 되려나 보다 한 것입니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랬다고 이럴 때 일수록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겠다 싶어서 안하던 금식까지 하며 기도원엘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를 하고 내려 왔더니 교회가 부흥되려는 게 아니라 자기들끼리 싸움이 나서 급기야 전부 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 무슨 이런 일이 이러냐고 원망 많이 했습니다.



내가 잘되자고 한 것도 아니고 안하던 금식까지 사흘을 하고 왔는데

그러면 더 잘되게 해 줘야 할 텐데,

그러기는커녕 있는 사람도 싸움이 나서 다 떠나게 만들어 버리시면 어떻게 하냐고 하나님께 원망 많이 했었습니다.

뭐 이런 하나님이 다 있나 싶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전 제게 그런 일이 없었다면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인 줄 알았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하나님 미워해도 전 정말 하나님 사랑하는 자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생기고 나니까 나는 하나님이 좋은 게 아니었습니다.

내가 하나님 일 하는 것도 아니고 교회라는 덩어리를 내 밥 벌어 먹을 직장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인들이 나가는 게 왜 안타깝겠습니까?

교인 나가면 돈이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럼 전 뭐 먹고 삽니까?

그런 것이 복합적으로 오니까 원망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내가 목회를 한 것이 주님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목회를 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야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과거에는 그런 생각도 못했습니다.

원망만 했지요.

열심이 보통 열심이 아니었어요. 

 

일 년 열 두 달 중에 집에서 자본 적이 거의 없었어요.

명절 때 외에는 이 강대상에 책 갖다 놓고 여기서 기도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저에게 잘해 줘야 하잖아요.

다른 교회 갈 신자들도 마음에 감동을 줘서 우리 교회로 보내 줘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모든 일을 지난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복음을 알고 보니 하나님께서 그렇게 저를 간섭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을 이용하려 했던 내 죄성을 폭발시켜 깨닫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에는 내가 이런 죄인이었구나를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 때 그 죄인이 지금 달라졌을 것 같아요?

아닙니다.

똑갔습니다.

우린 달라지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의도대로 여러분의 인생사가 살아지지 않도록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좋은 일 만날 것 같으면 하나님 열심히 사랑하고 잘 할게요 라는 다짐을 합니다.

그런데 막상 어려운 일 당하면 교회도 안 나오고 그럽니다.

여러분들 마음속에 주님 사랑하는 마음? 없어요!

지금은 그래도 뭔가 환경이 나올 만 하니까 나오는 것이지 어려워지면 다 안 나옵니다.

그만큼 우리는 나 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한 것이 우리의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자꾸만 힘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때로는 가난하게 만들고,때로는 병들게도 만들고,

실패하게도 만들어서 그 와중에 내가 이런 인간이었구나를 토해내게 만드십니다. 

 

상한 심령이 되게 만드십니다.

그렇게 해서 나중엔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신 이것만이 참 은혜이구나!

내 뜻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나를 구원해주신 이것이 놀랍고 놀라운 은혜이구나를 알게 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자꾸만 우리의 삶속에 내 생각대로 내 계획대로 안 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우린 대뜸 하나님께 원망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살기 어려워져 보세요.

제일 먼저 긴축을 어디부터 합니까?

헌금부터 줄이잖아요.

 

우리가 그렇습니다.

평상시에 잘 되고 할 땐 열심히 잘하는 것 같은데 한 번 어려워져 보세요.

그게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십니다.

‘봐라, 너 원래 그런 인간이야.

니가 나를 사랑한다고?

그 사랑 며칠이나 가더냐?’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그런 죄 때문에 아벨을 죽이는 환경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애꿎은 아벨이 죽었습니다.

그게 지금 저와 여러분이 가인과 같은 모습으로 우리 욕심 때문에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욕심 때문에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결국에는 가인 때문에 아벨이 죽은 것처럼 유대인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의로운 분이 희생당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가인은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이 죄 때문에 의로운 내 동생 아벨이 죽었구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인 나라는 존재가 살고 있는 이 배경에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깔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것이 주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을 고백하셔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더욱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의 삶에 여러분의 뜻대로 살아지지 않게끔 하나님이 일부러 태클을 거시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바꿔치기 당하는 인생이라는 설교 글을 올려놨었습니다.

그 글을 읽고 어떤 목사님이 전화를 하셨습니다.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였는데 그 글을 통해 저를 알고 은혜를 많이 받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네 교회에 와서 집회를 해달라고 부탁을 해 오셨습니다.

그 분도 저를 모르고 저도 그 분을 모르는데 그 글 하나를 보고 이런 귀한 복음을 알게 해주셨다고 부탁을 해 오신 것입니다.

흔쾌히 승낙을 하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바꿔치기 당하는 인생, 이런 것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왜 바꿔치기 당합니까?

야곱은 야곱대로 거부가 되어서 영웅이 되어 보려는데 하나님은 얍복강에서 그를 완전히 박살내어 버립니다.

그리고 다리를 절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어요?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일을 해나가십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 우린 모두는 나름대로 영웅시대를 꿈꾸고 있어요.

그런데 그 영웅시대를 꿈꾸는 것이 하나님 앞에 죄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자꾸 태클을 거십니다.

내 인생이 왜 내 뜻대로 안 되는지 아십니까?

그게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왜요?

그것을 통해서 나라는 인간은 내 소망이나 잘되는 것만 꿈꾸고 사는 죄인이었구나를 알게 하시려고 그러신 것입니다.

하나님도 내가 잘되는 것에 이용만 하려는 거였구나,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은 거짓말이었구나를 알게 하기 위해서 나에게 어려운 일을 자꾸만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애기를 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제 기도를 안 들어 주신 것에 감사한다고.

만약에 제가 교회 개척해서 지금까지 하는 기도를 다 들어주셨을 것 같으면 지금 교회가 이런 식으로 있지 않습니다.

울산 제일의 교회가 되어 있겠지요.

그것뿐이겠습니까? 

 

그 때 제가 기도할 때 ‘하나님 베드로가 한 번 외칠 때 오천 명이 회개를 했습니다.

구름 떼 같이 벌 떼 같이 하나님 우리 교회로 보내 주세요’ 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한 번 외칠 때 마다 오천 명이 회개를 했을 것 같으면 제가 수없이 설교를 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회개를 했겠어요?

만약에 그 기도대로 됐을 것 같으면 여러분들 지금 이렇게 저 못 봅니다.

 

그 기도를 안 들어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만약에 그 기도 들어 주셨으면 전 주님의 십자가 은혜의 고마움을 몰라요.

내가 죄인인 줄 모르는데 은혜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 안의 나라는 이 죄성,

하나님을 이용해서 입신양명하려는 이 죄성을 폭로시키고 고발하고 너 나 사랑하지 않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내가 계획하고 꿈꾸는 세상을 완전히 초토화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집 막내가 지난번에 그런 말을 했습니다.

참 하나님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겁니다.

제가 왜 그러냐고 물으니

아빠가 그렇게 할 것 같으면 교회가 부흥 되서 고생도 좀 안하게 되고 그러면 안 되냐는 겁니다.

얼마나 사실적입니까?

 

우리는 다 그런 생각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애들도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생각 가지고 있지 않겠어요?

아빠가 목회를 하는 목사일 것 같으면 최소한 먹고 살게는 해줘야 하지 않나 라는 생각을 기본으로 가지고 있지 않겠어요?

 

제가 목회를 하면서 제일 가슴 아픈 것이 저의 자식들입니다.

저 아이들은 아직 하나님의 이런 다스림의 방법을 모릅니다.

제가 아무리 하나님의 그런 일하심을 말해도 아이들 눈에는 아빠가 합리화 시키는 것으로만 보이겠지요.

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이 하나님이 얼마나 얄궂습니까?

그냥 가인의 제사 받아주면 어때요?

받아주지 않고 아벨을 죽이게 만들고 죄가 그를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것입니다.

너 죄인이야,

나 사랑하지 않고 너만 아는 죄인이야 라고 보여 주십니다.

 

지금 우린 전부 나만 아는 자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건 형편 좋을 때 하는 얘기고 어려우면 금방 본색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그 밀양의 여주인공처럼 금방 얼굴이 변합니다.

그 영화를 한 번 보세요.


기독교 안에서 가장 무서운 게 뭐냐면 믿음이라곤 전혀 없으면서 있는 척 하는 것입니다.

밀양이라는 영화에서 고발하듯이 지금 기독교인들입니다.

우린 다 그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믿음 없다는 것을 고발하기 위해서 사랑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안 되는 일들이 자꾸 일어나게 만들어서 이 속에 있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그 죄를 드러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원망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원망하는 그 때 하나님은 ‘봐라, 너 나 원망하는 나쁜 인간이잖아’

이런 나쁜 인간이 천국 간다는 것이 놀라운 일 아니냐?’ 라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맞구나…이런 인간이 천국 간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랑으로 불러준 것이구나’ 를 비로소 깨닫는 것입니다

그 것 하나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너 때문에 예수가 죽었다는 이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인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베드로를 한 번 보세요.

찾아 가셔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세 번 대답을 하지요. 

 

그러면 주님은 뭐라 그러셔야 해요?

니가 나를 사랑하니 너를 으뜸이 되고 머리가 되게 하고 니가 잘되게 해줄게 라고 해야 하는데 니가 원치 않는 길로 가게 할 것이다 라고 합니다.

그 후의 베드로의 삶과 죽음을 보세요.

그게 베드로가 원한 것입니까?

아니에요.

그게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사랑한다 할 수 있습니까? 

 

오늘 이 주보에 ‘죄를 들추어내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저주하라’ 이렇게 쓰고 싶었는데 너무 도발적인 것 같아 차마 쓰지 못했습니다.

누가 보면 완전 이단이라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설교 제목을 ‘하나님을 저주하라’ 라고 해야 합니다.

 

우린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해요.

그 사랑이 지금 여러분에게서 벌어진다면 그건 여러분의 실력이 아니라 주께서 그나마 그 시간에 성령이 간섭해주시니까 그런 고백이 나오는 것이에요

실존 속에 우리가 들어 가 보면 우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을 Love 하지 않고 Like합니다.

고양이는 쥐를 잡아먹으려고 Like 하잖아요.

우리도 하나님을 이용해먹으려고 Like 하지 Love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의 삶 속에 여러분의 뜻대로 안 되는 것을 복으로 여기세요.

왜 그게 복입니까?

내가 이런 죄인이고 이런 나쁜 인간이구나 를 알게 하고 이런 인간이 천국 간다는 애기가 너무 너무 고맙고 감사한 것이구나 를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보 뒷 편을 한 번 보세요.

믿음에 잊지 말아야 할 다섯 가지!

여러분들이 꼭 한 번 보고 아셔야 합니다.

 

첫째,

‘내가 할 것이 없으니 마음 편하게 살아라’

여러분들 우리가 천국 가는데 있어서 할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건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마음 편하게 사십시요.

성도가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것 때문에 받은 것이니까 구원 얻기 위해서 할 게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셨다는 얘기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일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도 취소가 안 되는 것입니다. 

 

둘째,

‘신앙에 하나님은 요구하시는 것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것만 받으세요.

우리 것 안 받으세요.

 

셋째,

‘내 인생은 하나님 것이라 내 마음대로 살아지지 않는다’

이게 중요합니다.

내 맘대로 살아지지 않는 이 인생에 왜 여러분이 책임지고 힘들어 하십니까?

그냥 안 되면 그냥 내 것 아니니 하나님 알아서 하시는구나 하세요.

자기 인생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인생이 고달픈 것은 그것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차가 내 차다 생각하면 누가 와서 박는 것이 화가 납니다.

남의 차는요?

화 안 납니다.

지나가다 차들이 사고가 나서 서로 박은 것을 보고 여러분은 화가 나십니까?

아니지요.

구경거리가 생겨 오히려 재미있어 하지요.

내 차라고 생각하면 화가 나지요.

내 거면 모든 것이 화가 나고 남의 것은 화가 안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선 내 인생을 피로 값 주고 샀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내 인생은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마귀가 우리에게 심어주는 생각입니다.

 

넷째,

‘성도의 인생은 끌려가는 인생이므로 성도가 책임질 것이 없다’

여러분 견인되어 가는 차 보셨어요?

그 차가 끌려가면서 안 갈려고 요동치고 그러던가요?

그렇게 끌려가는 것은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천국 가는 것은 예수님께 견인되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차가 되셔서 끌고 가시는 겁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그 속에서 뭐라 그래도 천국 가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행위 때문에 지옥 갈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구원은 내 행위와 상관이 없어요.

그렇다고 이것을 두고 여러분 마음대로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부차적인 문제에요.

그러니까 성도가 책임질 것이 없습니다.

 

다섯째,

‘구원이란 견인이므로 안심하고 살아라’

이 말은 방금 한 것과 같은 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하고 감사한 것입니까?

이걸 놓치지 마세요.

마귀는 우리가 뭘 조금 잘못한 게 있으면 당장에 우리에게 달려 와서 ‘너 그러고도 천국 간다 그러냐’ 고 속삭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내가 언제 나 잘 나서 천국 가는 거냐?

예수님의 피흘림 때문에, 용서 때문에 천국가는 것이지…’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마귀는 우리안의 믿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 안 돼… 내가 이러면 안 돼’ 라고 하면 마귀는 점점 달라붙습니다

속지 마세요.

이 다섯 가지를 눈에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두고 아침 저녁으로 읽으세요.

이게 참 복음이요.

내가 책임질 인생이 아니구나 를 되새기세요.

 

어느 TV광고에 보면 차가 사고가 났는데 그 모델이 하는 말이 뭡니까?

‘몰라,

하이카가 와서 다 알아서 해줘’

차 사고가 났을 때 보험회사에서 제공하는 긴급 출동 서비스를 선전하는 문구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들은 우리가 어떤 모습이든지 예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신다니까요

예수님에게 넘기세요.

이게 믿음입니다.

 

안심하고 제발 당당하게 사세요!

사이비 기독교인들은 이러면 어쩔까 저러면 어쩔까 염려하고 하는데 아니에요.

그런 모습이 오히려 정통같이 여겨지지만 구원받은 성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죄를 저지르도록 방치했는지 이제 아시겠지요?

가인 속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 가인을 간섭하시던 하나님이 지금 현재 우리도 간섭하고 계시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디 주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 구원받았다는 이 사실이 여러분들에게 감사로 남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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