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강해/창세기 강해

04강. 죄의 종 (창 4:1-15)

by coroa 2020. 8. 8.

-.04강. 죄의 종 (창 4:1-15).-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정낙원 목사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만드셨습니다.

이 말은 곧 야곱과 에서처럼 천국에 갈 사람도 만들고, 지옥에 갈 사람도 동시에 만드셨다는 겁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할 때 천국 가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고, 지옥 가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닌 마귀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귀도 하나님께서 부리는 영이지 마귀가 독단적으로 무엇을 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한 범주 내에서 하는 것이지 마귀 스스로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고 하나님처럼 행사하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천국과 지옥을 만드시면서 거기에 갈 사람들도 만드셨는데

지옥 갈 사람들을 지옥으로 착실히 보내기 위해서 마귀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마귀는 하나님 하시는 일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입니다.

없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마귀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이 특정한 날에 전국적으로 모여 구국 기도회 같은 상투적인 일들을 할 때 이 땅의 마귀를 없애 달라고들 하는데 아닙니다!

이 땅에 마귀가 없어지면 안 됩니다.

마귀가 있어야 누가 진짜 하나님께로 난 자들인지

그리고 누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은 자들인지 구분이 됩니다.

 

만약 마귀가 역사하지 않으면 죄가 드러나지 않아요.

인간이란 존재는 겉 다르고 속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마음으로 없는 것들을 얼마든지 표현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지도 않은데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인간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이들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한 번 보세요.

아무리 기분 나쁘고 속으로는 죽이고 싶은 상대가 있어도 필요에 따라서는 겉으로 그냥 웃기도 하지 않습니까?

저만 느끼는 건가요?

인간이란 것은 모두 그렇습니다.

이렇게 겉 다르고 속 다른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내가 이제부터는 하나님께 충성하고 열심히 해서 뭔가 달라질거야!

우리가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다짐을 했을 때 그것을 지킨 적이 있습니까?

그 맹세를 지킨 적이 있습니까?

 

 

우린 그것을 지켜내지 못해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에 항상 유념해야 할 것은 내가 어떻게 변하고 어떤 식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로 접근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의 결과를 가지고 신앙이 있다 없다를 점검하시 마시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도대체 나에게 하신 일이 무엇이고 나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이 하신 일에 관심을 가져야지 거기엔 관심을 갖지 않고 자꾸 내가 무엇을 할까.

내가 무엇이 변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라는 자기중심의 관심을 가지게 되면 신앙의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자기 육신의 유익을 따라서 조석지변으로 변하는 존재인데 거기에 어떤 일로 장단을 맞추실 것입니까?

 

 

어떻게 우리가 살아야 할까요?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옳은 삶이고,

어떻게 살아야 그릇된 삶입니까?

성경 어디에 인간의 행동을 가지고서 판단을 해 준 곳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일컬어 죄의 종이라고 하잖아요.

죄 아래서 났다고 하십니다.

 

 

다윗이 시편 51편에 보면 나는 죄악 중에 출생했다고 합니다.

모친이 나를 죄악 중에 잉태했다고 하지요?

이건 다윗이 죄를 이겨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죄를 못 이겨냅니다.

이렇게 죄를 못 이겨낸다는 것을 성경에서는 종이라고 합니다.

죄의 종인 것입니다.

 

종은 자기가 무엇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 종은 주인에게 복속이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주인의 명령을 거스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일컬어서 죄의 종이라 하는 것은 인간은 죄를 거역할 수 잆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인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기는 자기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라 생각하는데 아니에요.

죄인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죄를 짓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과 같은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태어난 죄인입니다.

 

 

그러면 죄인인 우리가 죄를 안 짓겟다는 말이 성립이 됩니까?

안되죠.

죄를 안 짓겠다는 말이 가상하긴 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말입니다.

내가 이제 죄 안 짓겠습니다! 하면 하나님께서 ‘오냐 너 참 착하구나 대단하구나’ 이렇게 보지 않습니다.

 

도리어 ‘인간아! 인간아! 니가 어떤 존재인지 아느냐?

니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아느냐?

너는 니가 말한 것도 책임질 수 없는 인간이야…

그런 인간이 무슨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맹세를 하고 서원을 하고 죄 안 짓겠다고 하느냐?’ 라고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 안 짓겠다고 맹세해도 그걸 기뻐하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부모에게 와서 하는 약속을 그 말을 부모가 믿습니까?

안 믿잖아요.

엄마, 내가 이제 열심히 공부하고 TV도 안보고 핸드폰으로 장난도 안 할께요 라고 하지만 몇 분이나 갑니까?

돌아서면 또 금방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아이가 죄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자기 맘대로 하고 싶은 게 죄 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라 할 때 뭐라고 말하면서 접근합니까?

이걸 먹으면 하나님같이 된다고 하지요?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말을 아주 쉽게 설명하면 지 맘대로 된다는 얘깁니다.

내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인데 누가 부모 말을 듣겠습니까?

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겁니다.

 

어느 인간도 부모가 하지 말란다고 안하는 인간 없습니다.

또 부모가 하란다고 해서 그것 하는 인간도 없습니다.

자기 마음에 내켜야 합니다.

아무리 목사가 교회 오라 해도 소용없습니다.

자기 마음에 내켜야 오고 오기 싫으면 안 오는 겁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우린 이 한계 아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TV 같은데 보면 잔인한 살인을 행하고, 어린 학생을 성추행하고 하는 일들을 보잖아요. 

그런 것들을 보면 우린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 나쁜 놈! 하면서 욕을 합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보고 손가락질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잖아요. 

그 손가락질 하는 이유는 나는 저 사람하고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은 자기 의지가 약해서 그런 죄를 저질렀고 나는 그렇지 않아서 죄를 안 지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라는 것은 내가 의지를 가진다고 해서 안 지어지고 의지를 안 가진다고 해서 지어지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 환경만 조성되면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생각을 했거든요

그들은 겉으로 나타나는 죄만 죄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살인하지 않았다,

도둑질 하지 않았다,

간음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안 한 것을 자랑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가 있습니다.

그 여자는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고 먹고 살려니 그렇게라도 해서 살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진 사람들은 다 형편이 좋으니까 돌을 던질 수 있었던 겁니다. 

만약에 본인이 그런 환경에 처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도 똑같이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만약에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나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죄 없는 자는 돌로 치라 하신 것은 너희들 중에 이런 짓을 안 한 인간은 돌로 치라는 말이 아니고 누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느냐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도둑질을 했느냐 안했느냐,

간음을 했느냐 안 했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이런 존재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일 것 같으면 마땅히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저주받은 너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라는 것입니다.

왜 그걸 모르냐는 겁니다.

죄인인 자가 살고 있다는 자체가 은혜잖아요.

 

오늘 분문에 보니까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나서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 유리할 때 자기 죄 벌이 너무 중해서 다른 사람이 저를 죽이면 어떻게 하냐고 묻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뭐라 하십니까?

이 나쁜 놈! 하고 뭐라 하시는 게 아니라 가인이 죽지 않도록 어떤 조치를 취해 주십니다.

표를 줍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가인이 사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는 겁니다.

가인은 나는 동생을 죽인 놈인데

그런 내가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라는 것을 알고 그 사실을 업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지금 가인 사건이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 제가 말씀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인간을 천국 갈 자와 지옥 갈 자를 구분해서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건 이미 결정이 된 사실입니다.

후천적으로 인간들의 행실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천국백성 지옥백성으로 작정을 하고 지었어요.

마치 토기장이가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으로 만든 것과 같이 말이에요.

그러므로 가인은 나쁜 놈이고 아벨은 착하다는 그런 관점으로 보지 마세요.

하나님은 가인을 단지 지옥 갈 자로 사용하시는 것이고 아벨은 천국 가는 자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에서는 얼마나 원통하겠습니까?

에서가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적으로 볼 때는 에서가 훨씬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지옥에 가고 야곱은 천국에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인간들의 행동을 가지고 천국과 지옥 갈 자를 나누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왜요?

인간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무조건 죄로 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기도하는 것도 그것에 우리의 의미를 부여하면 죄가 됩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감사의 행위이지 인간의 행위가 아닙니다.

만약에 이러한 일들에 우리의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 우리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 때문에 우리가 천국간다고 한다면 열심을 내기만 하면 됩니다.

주일 빠지지 않고 열심히 다니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 믿을 필요도 없어요.

 

그런데 이런 것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해 주셔서 천국 가는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예배 잘 드리고 예수 잘 믿어서 가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이건 성도가 이러한 것을 안 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것이 우리를 구원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예수를 믿은 것이 우리의 능력입니까?

아니에요.

예수를 믿는 것도 하나님이 믿게 해주셔야 믿어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아버지께서 내게로 이끌지 않으면 내게 올 수 없다(요6:65)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에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것은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자꾸 가인과 아벨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합니까?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 보고 하나님은 양고기를 좋아하는가 보다 하고서 자꾸 고기를 바쳐야 겠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데 필요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시죠?

 

 

창세전에 이미 천국과 지옥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럼 천국 갈 자와 지옥 갈 자가 있다는 겁니다.

천국 갈 자는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선택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아벨은 천국 가기로 작정된 자이고 가인은 지옥가기로 작정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가인을 통해서 지옥 갈 자들은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 앞에 반발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이 하는 일에 반기를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뷔페 집에 가면 자기의 식성대로 먹지요?

고기 좋아하는 사람은 고기 먹고 회 좋아하는 사람은 회를 먹고 샐러드 좋아하는 사람은 샐러드를 먹습니다.

각자 자기 취향에 따라 먹습니다.

 

 

지금 아벨은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고 가인은 곡식을 가지고 드렸습니다.

곡식은 천하고 고기는 값이 비싸 좋은 거다 이런 차원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벨 거는 받으시고 가인 것은 안 받으신 것입니다.

쉽게 말해 뷔페 집에 가면 자기 식성대로 먹듯이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이 여기에 반발을 합니다.

이게 죄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따지는 것입니다.

왜 아벨의 제사는 받고 내 제사는 안 받습니까,

제가 무슨 정성이 부족합니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아벨 것 받으셨구나 하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가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가인을 지금 죄가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세요.

아주 재밌습니다.

5절 6절에 보세요.

 

 

5-6=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무슨 얘기입니까?

쉬운 말로 하나님께서는 내가 곡식 싫고 양고기 좋아서 먹는데 왜 니가 화를 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니가 내 식성까지 좌지우지 하려고 하느냐는 말입니다.

이건 가인 속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7절을 봅시다.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니가 지금 내 앞에서 반기를 드는 것은 니 속에 죄가 너를 다스리고 있기 때문이야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죄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하나님 앞에 반항할 것이 생기면 즉시 덤벼든다는 것입니다.

 

이게 죄가 노리는 노림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죄를 들춰내기 위해서 이런 저런 일들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신경질 나는 일을 일으키시면 우리 안에 있던 그 신경질이 겉으로 드러나 화를 냅니다.

평상시에 우리는 화 안내는 척 하고 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엔 저 녀석 속엔 미움과 시기가 가득차 있는데 그것 숨기고 있구나…하시고 이 숨기고 있는 암 덩어리 같은 마음을 드러내라고 미움과 질투와 신경질 나는 일들을 발생 시키시는 겁니다.

 

 

지금 가인 속에 이런 것들이 가득차 있는데 가인은 그것도 모르고 숨기고 있습니다.

가인 자신도 제 안에 그런 것이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아벨 것만 받으시고 가인의 것을 받지 않으셔서 가인 속에 있는 미움과 질투와 시기하는 마음의 보따리를 풀게 하시는 겁니다.

 

컴퓨터에서 알집이라는 프로그램을 풀면 그 안에 있던 파일들이 쏟아져 나오잖아요.

우리 속에 이런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분냄이 가득차 있는데 하나님이 어떤 사건을 통해 그런 것들을 튀어 나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에 스스로를 주장해서 가인으로 하여금 아벨을 죽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참 재밌는 것이 7-8절을 보세요.

 

7-8절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하나님이 그러십니다.

‘가인아 잘 들어봐라.

죄가 니 안에서 어떻게 하든지 죄를 짓도록 역사를 하니까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단다.

그런 죄가 나타나면 안 나타나도록 한 번 해봐라’ 라고 하십니다.

그랬을 때 가인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으면

‘아, 하나님께서 내 속에 죄 지을 것이 있는 걸 미리 아셨구나,

나는 이 죄를 안 짓도록 해야겠다’ 하고 마음을 먹겠지요. 

그렇게 해 놔놓고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 둘을 들판에서 일을 하는 환경을 만들어 놓으십니다.

그러자 가인이 갑자기 아벨이 미워져 돌로 쳐 죽이는 것입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이 7절을 뒤에 나오는 8절하고 바꿔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8절을 앞장 세워 가인이 아벨을 먼저 죽인 다음에 7절의 말씀을 하셨다면 가인이 잘못한 것을 잘 알게 될 텐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먼저 가인에게 가셔서 죄가 너를 주장하니 죄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가인이 네 죄 안 짓겠습니다 하고 다짐을 했지만 막상 어떤 환경에 다다르니 그 맹세를 지켜내지 못하더란 말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죄 짓지 말라고 해도 아벨이 미운데 어떡합니까?

그래서 죽이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가인으로 하여금 죄를 안 짓게 할 작정이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합니다.

그런데 일부러 하나님께서는 그런 환경에 가인을 집어넣어 놓고

봐라 가인아 너는 죄를 이길 수 없는 인간이야

니가 아무리 다짐을 한다 해도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야 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죄는 인간의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의지가 약해서 죄 짓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각오가 모자라고 능력이 모자르거나

아니면 여러분 마음이 원래 악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여러분들의 의지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노래가 있잖아요.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우리 인간들의 심리를 잘 묘사한 노래잖아요.

이런 노래를 언제 합니까?

 

일을 하기 전에 이런 노래를 합니까,

일 저지르고 나서 합니까?

일 저지르고 나서입니다.

그래서 우린 늘 일 저지르고 나서 후회하고 반성하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진짜 만약에 인간들을 우리 식으로 생각할 것 같으면 그런 죄를 안 짓도록 하셔야죠.

가인이 아벨을 죽이려 할 때 ‘네 이놈! 왜 또 아벨을 없애려고 하느냐

이 나쁜 놈~!’

이렇게 해줘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일 하지 않으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부인할 때 예수님이 베드로와 눈 마주치셨을 때 그 마음을 아시고 ‘네 이놈~!” 해야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아무 말 안하십니다.

베드로는 뭐라고 그랬습니까?

주님이 죽는 데까지 쫓아가 절대 예수님 죽게 안할 겁니다, 라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오늘밤 니가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라고 하시면서 이미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아셨습니다.

 

 

너는 나를 부인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아시고 베드로에게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미리 말해 놓고 나중에 베드로가 그런 일을 저지르고 나니까 그제서야 아는 겁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라는 인간은 결국 예수님도 부인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아셨구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그제서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기억나 베드로는 통곡했잖아요.

통곡했다는 것은 베드로가 회개했다는 얘기가 아니라 이게 내 모습이구나

이런 인간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셨다는 그 사실에 놀란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착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용서해 주셔서 가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이 세상을 두 종류로 대하시는데 하나는 미움으로 대하고 하나는 사랑으로 대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대하니 이게 무슨 은헤입니까 를 고백하는 자입니다.

사랑으로 대하면 그 사람이 하는 것은 전부 사랑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성경에서는 의의 종이라고 합니다.

 

죄의 종이 있고, 의의 종이 있습니다.

죄의 종은 죄가 시키는대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죄인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의의 종을 만드셨습니다.

그럼 이 의의 종은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조건 의가 그 사람을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하잖아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그 일이 성도에게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늘 나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는 모든 일들이 의가 됩니다.

예수 안에서는 여러분이 비록 술 한잔을 해도 하나님 보시기엔 의가 됩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여러분 보세요.

하나님은 보실 때에 내가 술을 먹어서 나쁜 놈이고 안 먹어서 착한 놈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술을 먹든 안 먹든 나쁜 놈 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나쁜 놈 속에 하나님의 은혜성을 남기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그 사람을 선택해서 의의 종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술 먹는 것을 잘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비록 술을 먹으면서도 주여 내가 이런 자임에도 용서함을 받아서 천국갑니다 라는 이 얘기를 잊지 말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뭘 잘못했다는 것 때문에 자책만 하고 있는 것도 건방진 것입니다.

만약에 그 일 안했으면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나오려 했겠죠.

하나님 앞에 자기 행위를 근거로 해서 떳떳하게 나오는 것은 결국 자기 의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나온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우리 죄 때문이지요?

그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를 지배한다는 얘기는 그 저변에 우리는 범죄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것이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지배하는 사람들은

‘아~ 나는 이렇게 범죄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용서해 주셔서 구원을 받는구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내게 은혜를 베푸신 것을 아는지를 물으십니다.

예수님의 용서 때문에 네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느냐?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에 네가 산다는 것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남기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동생 죽인 자를 맞아 죽도록 내버려 둬야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맞아 죽지 않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가인이 살 때 마다 그 사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보편적인 모든 인간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란 말입니다.

북한의 김정일 정권이 저렇게 유지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절에 다니는 불교 신자도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에 홍수로 세상을 다 쓸어버리시고 노아와 다시 언약을 세웁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왜요?

인간은 원래부터 악한 자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들의 행실을 보고 심판할 것 같으면 매 번 쓸어 버려야 하는데 원래 악한 저 인간들은 내가 이제 생각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정결한 제물을 잡아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낼 때 하나님께서는 그 제물을 흠향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이 땅이 유지가 되는 것은 의로운 제물의 희생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저기 절간에 있는 스님들도 누구 은혜로 사는가 하면 하나님이 노아에게 한 약속을 근거로 해서 의로운 제물의 희생 때문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지옥가는 것입니다.

 

그 의로운 제물의 희생이 신약에 오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모두 사람들이 예수님의 은혜로 사는데 그걸 모르는 사람은 지옥가는 겁니다.

그럼 신자는요?

예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천국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 가는 것은 그 사람이 절간에 갔는지 교회에 왔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의 피 때문에 용서받고 사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로 판별이 납니다.

하나님은 그 사실을 아는지 물으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를 아는 사람은 예수의 의가 그 속에서 다스리는 사람이고 그 예수의 의가 다스리는 그 사람은 세상에 나가 무슨 짓을 한다 할지라도 예수의 의가 덮고 있기 때문에 천국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건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의에 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꼭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니 목사님,

그래도 신자가 돼서 밖에 나가 너무 엉망으로 살려고 하면 되겠습니까? 하고 물으시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지만 성령이 여러분의 속에 와 계십니다.

그러면 그 성령이 자꾸 간섭을 하겠지요.

우리 맘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우리 마음 속에 와 계셔서 우리 마음대로 살지 못하도록 간섭을 하겠지요.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얼마나 악한지 그 성령의 간섭하심도 거역하며 살잖아요.

그런 게 인간입니다.

 

사람한테 여러분 기대 걸지 마세요.

우리 목사님은 복음도 알고 예수님의 은혜도 진짜 많이 아니까 절대로 내가 뭐라 그래도 화도 안내고 그러실거야…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저도 화납니다.

짜증도 내고 그래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셨는데 우리 목사님은 저런 것 다 아시니까 절대 그러시지 않을 거야…

천만의 말씀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돈 좋아해요.

 

그런데 신자는 무엇입니까?

성경엔 그렇게 돈 좋아하지 말라 그랬는데 나는 돈을 좋아하면서도 천국가는 것은 이런 인간인데도 내가 구원을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 때문이구나를 아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가면 오로지 예수님만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 천국에 가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금 이 땅에서 하세요.

원리적으로 본다면 돈을 마음껏 좋아하세요.

좋아하시되 이런 인간임에도 내가 예수님의 은혜 때문에 산다는 것, 주님의 은혜, 그 용서하심 때문에 산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나의 행한 것들을 보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내게 덮어 쒸운 그 용서를 보고 나를 구원시켜 주는 것이니 이 얼마나 놀랍고 놀라운 일인가를 아셔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이 지금 이 자리에 서서 설교하는 자체가 놀랍고 놀랍고 놀라운 기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같은 악당들이 여기 모여서 뻔뻔스러운 얼굴로 말씀 듣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고 놀랍고 놀라운 사건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자식들을 한 번 보세요.

법대로 할 것 같으면 벌써 매 맞고 혼나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모는 아이를 법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지요.

자식들은 뭐라 합니까?

그래도 난 다른 애들 보단 낫다고 우깁니다.

예수님하고 비교를 해보세요.

비교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자식들의 입에서 나와야 할 고백은

첫 째는 아침마다 눈을 뜨면 이런 죄인을 오늘도 살게 해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두번 째는 이런 자식을 위해 매일 먹여주시고 키워주시는 부모님 고맙습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자식들은 뭐라고 합니까?

아침 일찍 깨우면 깨운다고 투덜대고

밥 차려 주면 먹기 싫은데 먹으라 한다고 투덜대고

그런데도 버릴 수 없는 것이 부모의 사랑이고 그 사랑이 자식을 끌고 갑니다.

 

이걸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로 알게 하시려는 겁니다.

우리가 뭐 잘나서 지금 이렇게 있는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용서해 주신 그 용서가 계속 우리에게 덮치기 때문입니다.

제발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들과 비교하지 마세요.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라는 말 하지 마세요.

저 사람은 죄를 지었는데 난 안 지었네 이런 소리도 하지 마세요.

죄 아래 태어난 사람은 모두 한통속입니다.

그저 어떤 사람은 일찍 폈고 어떤 사람은 늦게 핀 것입니다.

 

여기 근처의 공원에 가보면 요즘 코스모스가 한창입니다.

옛날 같으면 지금 코스모스가 필 때가 아닙니다.

코스모스는 가을에 피잖아요.

그런데 지금 봄에 코스모스가 핀 것입니다.

공원에 산책하던 분의 말이 ‘저것들이 미쳤지…’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저 꽃이 미친 게 아니라 인간들이 미쳐서 그렇습니다.

인간이 자기 살자고 자연환경을 다 바꿔 놓은 거에요.

코스모스가 일찍 핀다는 애기는 그 코스모스는 이 날씨를 가을로 인지하기 때문에 핀 것입니다.

그만큼 기후의 변화가 왔다는 겁니다.

 

우리 나라는 옛날엔 삼한사온이 뚜렷했는데 이젠 없어졌습니다.

우리나라 기후가 아열대로 바뀐다는 겁니다.

왜 그래요?

인간들이 먹고 살겠다고 굴뚝 만들어서 매연을 뿜어내니 그게 다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러니까 온실 효과가 되어서 우리나라가 삼한사온 같은 건 이제 없어지고 열대지방의 기후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귤이 제주도에만 자랐는데 이젠 강원도에서도 자라잖아요.

이게 왜 그래요?

옛날엔 오징어가 동해 바다에서만 잡혔는데 이젠 서해바다에서도 잡혀요.

이건 말이 안 되는 소립니다.

명태가 예전에는 북방한계선이 있는 동해의 주문진이나 속초 앞바다에서 잡혔는데 이제는 명태가 미쳐서 서산 앞바다까지 가 있는 것입니다.

다 변했어요.

기후도 변하고 뭐든 다 변해 버렸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 코스모스가 지금 피었어요.

그렇다면 그 옆의 아직 피지 않은 꽃몽오리도 곧 피겠지요?

그걸 지금 우리에게 적용을 해보세요.

예를 들어 지금 A라는 사람이 나타나 보이는 죄를 지었어요.

그럼 옆의 B라는 사람도 똑같은 죄의 성향을 가진 사람인데 그 사람도 나중에 때가 되면 죄가 나타날까요? 안 나타날까요?

나타나겠지요.

‘나는 죄 안 지을거야’ 라고 하면 그런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이 꼭 죄를 짓도록 만들어 버린단 말입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내가 범죄해야 범죄한 사람이 용서가 됩니다.

내가 도둑질을 해 봐야 도둑질 한 사람을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용서를 합니다.

도둑질 안한 사람은 맨날 도둑질한 사람을 나무라지만 정작 자기가 해 보면 ‘그럴 수 있지…’라는 말이 나올 수 있습니다.

용서하라는 애기는 우리더러 관대해지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하나가 되라는 말입니다

내가 죄인인 줄 알아야 만이 그 사람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은 내가 선심 쓰듯 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내가 가졌으니 베풀어줄께 라는 식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형제 사랑의 개념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너나 나나 다 똑같은 인간이다.

나도 범죄할 수 밖에 없고, 너도 범죄할 수 밖에 없고

그러니까 동병상련의 입장이 되어 이해하고 보듬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것으로 논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누구의 의에 복속이 되었는지, 누구의 종인지를 보십니다.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공자나 부처라 할지라도 죄가 그 사람을 지배하기 때문에 지옥으로 가고, 살인범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받은 자는 천국 가는 것입니다.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면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여주인공의 아이를 죽인 범인이 교도소에 가서 예수를 믿었어요.

그리고는 자신은 용서받고 구원받았다고 해요.

아이의 엄마는 그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살인한 놈과 살인을 당한 사람과 같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해를 못합니다.

그 어미의 생각에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은 착한 사람이고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나타난 행위로 평가하는 이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나서 죄의 종이라고 하는데

모두 죄의 종일 것 같으면 어떤 사람은 죄가 일찍 드러났고 어떤 사람은 늦게 드러나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죄를 드러내는 스크린과 같습니다.

언제든지 필름만 돌리면 죄가 발산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이 땅에서 마음껏 불평하고 원망하는 환경을 만들어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확인 시킵니다.

그게 광야에요.

 

 

광야로 몰아 넣은 것은 하나님 원망하라는 것입니다.

원망할 장소에 몰아 놓고 원망해라 원망해라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봐라 너희들 마음속에는 나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이 가득 들어 있어

그래서 그런 환경에 집어넣은 거야’ 하고 그들의 죄를 고발하는 겁니다.

이런 너희들이 사는 것이 누구의 은혜냐?

내 용서가 아니냐 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엄청난 업적을 이루고 그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의 은혜, 사랑, 용서, 이것을 얼마나 많이 아는 가가 신앙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어떤 환경에 지배 받을 필요가 없지요.

내 주변에 사람이 많으냐 적으냐는 전혀 문제가 안돼요.

 

이것을 깨달으면 됩니다.

혼자라도 이걸 깨달으면 그게 신자입니다.

그런데 이게 안 깨달아 지니까 군중심리에 이끌려 많은 사람 속에 같이 모이면 그걸로 안심 삼으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자기 마음에서 우러나는 위로나 평안은 없습니다.

 

평안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믿어질 때 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만 명이 있는 그 자리에 가 있어도 여전히 마음은 곤고합니다.

수 천 수 만 명이 있는 곳에 가서 으샤으샤 할 때는 내가 하나님의 백성 맞는 것 같은데 돌아오면 그 마음이 다 사라집니다.

집 안에 우환이 있거나 자식들이 말 안 들으면 그럼 또 짜증이 나고 신경질 나고 그런 자기를 보고 이게 무슨 하나님 백성인가 하는 자기 의심이 되고 그런 겁니다.

이게 왜 그래요?

 

어디 있는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진짜 신자는 절간에서 비빔밥 얻어먹으면서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스님이 시주하러 오면 시주도 하세요.

그러면서 예수 믿으세요 하고 부드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신자지

우리 집 앞에 교패 안보여요?

어디 재수 없게 들어옵니까! 라고 화를 내면 신자 아닙니다.

 

무슨 신자가 그래요?

그런 사람을 보면 주여 어찌 나 같은 사람에게 은혜를 주셔서 구원시켜 주셨습니까?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믿어지게 해주셨습니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고백이 나와야지요.

 

지금은 이상하게 교회가 자기’의’ 축적하고 자랑하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면 자기가 어떻게 착하게 살았고 하는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서로 서로 누가 누가 잘하나 하고 경쟁을 시킵니다.

거기에 무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뿌림에 대한 감사가 나오겠습니까?

무슨 은혜가 나오고 사랑이 나오겠어요?

자기가 많이 한 것, 헌금이나 봉사 이런 것에 대한 자랑만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자꾸만 인간들의 어떤 틀에 맞춰서 하지 마세요.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현재 이 자리에 왔든 집이 있든 간에 여러분들 마음 속에 나는 마땅히 저주받아야 할 사람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용서하심 때문에 살고 있구나를 아시면 됩니다

예수님의 피가 여러분 조금 나쁜 짓하고 도둑질하고 그런 것도 용서 못할 핀 줄 아세요?

교회 몇 번 빠진 것 그런 거 용서 못할 핀 줄 아세요?

예수님의 피는 십자가 옆에 달려 있는 그 강도까지 구원해 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갔던 베드로까지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에요.

실제 예수 믿는 자들을 죽였던 사도 바울 같은 자도 용서해 줄 수 있는 능력이라니까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삶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소한 잘못들 때문에 자책하고 스스로를 판단하지 마세요.

그 정도도 커버할 수 없는 피 같으면 그걸 왜 믿습니까?

 

인도네시아에 쓰나미가 덮쳤었지요?

그 물이 위력을 가지고 몰려 올 때 여기는 아파트가 있고 여기는 자동차가 있고 여기는 과수원이 있으니 이건 비켜가자 그러고 왔어요?

쓰나미가 밀려 올 때는 그런 것 보지 않고 그냥 다 쓸고 밀려옵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이 땅에 밀려 올 때는 그 사람이 살인자든 강도이든지 그 사람이 도둑질 한 자이든지 간음한 자이든지 어떤 사람인지 관여치 않고 그냥 덮어 버립니다.

 

겨울철에 눈이 한 번 내려 보세요.

눈이 오기 전엔 너무 보기 싫던 세상도 밤새 눈이 내려 아침에 보면 그 하얀 눈이 온 세계를 다 덮어버리잖아요.

그 눈이 다 덮어 버리니까 그 속에 뭐가 있는지 우린 모른단 말입니다,

더럽고 추한 오물도 있을 것이고 별 희한한 것들이 다 있겠지만 다 덮여진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피흘려 주신 그 피가 지금 쓰나미같이 자기 백성들을 확 덮어 버렸다니까요.

하나님 그것 보시고 우리를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의의 종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랑할 것은 입만 열면 주님의 용서함이 자랑되어야지요.

이런 인간이 용서받았습니다를 고백하셔야지요.

앞으로 우리가 어떤 죄를 더 지을지 모릅니다.

무궁무진할 거에요.

 

여러분 땅에서 고구마를 한 번 당겨 보세요.

고구마 한 개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가 달려서 같이 나오죠?

지금 현재 우리가 살아오면서 나타난 죄는 빙산의 일각일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살면서 나올 죄들은 그 고구마 줄기같이 매달려 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열심히 그것을 당겨 내실 것입니다.

지금 그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희희낙낙 거리지 마세요.

우린 다 죄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가인과 같은 자들입니다.

우린 죄를 못 이깁니다.

그래서 요한 1서에서는 가인을 악한 자에게 속하였다고 합니다.

 

 

악한 자에 속했다는 것은 결국엔 악을 드러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린 모두 가인 같은 자들인데 왠 일인가 왠 은혜인가 주의 그 십자가의 피가 우리를 덮어줘서 우리가 용서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디 그 십자가의 용서함을 그 은혜를 자랑하시면서 살아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