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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09강. 노아의 때 (창 6:1-8)

by coroa 2020. 9. 23.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09강. 노아의 때 (창 6:1-8).-

 

-.정낙원 목사

 

 

 

우리가 창세기 강해를 해오면서 계속 살펴보고 있는 것은 언약입니다.

이 세상이 창조된 목적이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라는 것으로 계속하여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창조라는 것은 어떤 원인에 의한 결과물로 나타난 것이라고 했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저와 여러분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우리를 존재케 한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왜 창조 했느냐 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그 원인이 무엇이냐를 우리가 찾아야 합니다.

성경을 그걸 말해주고 있어요.

 

죄가 뭐냐?

그 원인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을 이탈하고 사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는 구원의 목적을 이탈하는 것이 죄에요.

 

하나님이 왜? 나를 창조 했나요?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왜 구원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원을 했습니다.

 

여기에서 이탈한 것이 죄입니다.

죄란? 나로 하여금 이 땅에 존재케 하는 원인을 상실하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죄인들은 항상 무슨 일을 해도 나라는 존재를 지키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게 됩니다.

 

‘나 있음’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나 있음으로 출발하게 되면 하나님도 나를 위해 필요한 도구가 되어 버립니다.

예수도 나를 위하여 믿게 되어요.

 

세상에 종교가 많이 있지만 모두 자기를 위한 신을 믿어요.

성경에서는 이것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우상숭배라는 것을 어디 절간에 가거나 무당 푸닥거리하고 점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내 필요에 의해서 예수 믿으면 우상숭배에요.

 

내 유익을 위해서 신을 찾는 행위를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예수를 믿으면서 그 예수를 우상 숭배 식으로 섬길 수가 있단 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나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나의 이용대상이 됩니다.

 

모든 사람들은 신을 이용해요.

신을 사랑하는게 아니고 좋아해요.

마치 고양이가 쥐를 좋아하듯이 말이에요.

이게 세상 사람들의 신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잘못된 신관들을 깨우쳐 주는 일들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고 나서 제일 먼저 가르친 것이 신관이에요.

 

십계명의 제 일 계명이 뭔가요?

나 이외 다른 신을 두지 말지니라 이지요.

시내산에서 모세를 불러 가르쳐 준 것이 너희들이 섬기는 신은 다른 신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어요.

너희들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신이 다른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눈만 뜨면 하나님 하나님 하는 자들에게 너희들이 말하는 그 하나님이 가짜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는 말을 하나님 말고 부처나 다른 신을 섬기면 안 되는구나 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너희들이 하나님이라고 섬기는 신이 바로 ‘다른 신이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 다른 신인가 하면 너희들이 애굽이라는 죄의 동네에서 알았던 그 신이라는 말입니다.

애굽에서 알았던 그 신은 자기를 위한 신입니다.

내 소원을 들어 주는 신입니다.

내 소원을 들어주는 신은 결국 떡 주는 신입니다.

 

애굽은 떡에 가치로 사는 곳이에요.

그러므로 애굽에서의 신은 떡 주는 신이에요.

이게 광야에 나와서 그대로 나타났어요.

애굽에 음식을 달라는 식으로 나타났어요.

 

쉽게 말합니다.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떡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고,

말씀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이 주리실 때 마귀가 찾아와서 그러잖아요.

‘떡 줄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뭐라 그러십니까?

‘아니, 난 말씀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다’ 라고 합니다.

내가 이 땅에 떡 먹으려고 온 사람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왔다라고 하잖아요.

 

예수님의 그 말씀 한마디가 우리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날마다 눈만 뜨면 자기 몸뚱이를 챙깁니다.

우리는 그래요.

우리에게는 나 외에 다른 신이 없어요.

 

내가 신이라니까요.

그러니까 나도 나를 위해 존재하고 신도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것이 고발되어 지는 것입니다.

아…이게 죄이구나 라고요.

 

여러분 죄라는 것을 밖에 나가서 나쁜 짓 하고 하는 것으로 죄의 개념으로 갖지 마세요.

물론 그것은 죄가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마치 감기가 걸리면 기침이 나오고 몸이 으슬거리는 것처럼 죄의 현상이 어떤 비윤리 비도덕 이런 것들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건 드러난 죄의 모습이고 감추어진 원인이 있어요.

성경이 말하는 근본적인 죄는 하나님과 관계가 어그러진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진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에요.

창조 목적에서 이탈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도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부터 보면, 실제 인류의 시작은 4장부터 시작되는 거에요.

아담 안에서 가인과 아벨이 나왔는데,

이들은 이 땅의 두 부류의 사람을 상징한다 했습니다.

 

가인은 땅에 속한 사람이고,

아벨은 하늘의 사람으로 상징적으로 나타났단 말이지요.

그런데 그 하늘에 속한 사람이 땅에 속한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하더란 말이지요.

이 구조는 세상 끝 날까지 갑니다.

 

지금도 똑같이 이 구조로 가고 있습니다.

한 아담 안에서 가인과 아벨이 나왔듯이 한 예수 안에서 가인과 아벨 같은 자가 나오게 됩니다.

한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의 집 안 속에서 이스마엘과 이삭이 나왔듯이 한 교회 안에서도 항상 두 부류가 있습니다.

 

같은 교회 안에 육에 속한 자가 있고,

영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떡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고,

말씀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단 말이지요.

 

이 둘 사이는 항상 투쟁이 있는데,

육에 속한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을 죽이는 일들로 나타납니다.

이것을 양과 염소 비유로 말합니다.

염소들은 늘 양들을 뿔로 들이 받고 내 쫓고 합니다.

그러면 양들은 대적하지 않고 당하고 만 있어요.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힘 쓰는 자가 아닙니다.

그냥 무력하게 당합니다.

힘이 없어 당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죽임당하도록 구조적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독자적으로 안 되니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날마다 우리 안에 오셔서 나를 부정하고 죽이는 쪽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아픈 겁니다.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 죽이고 나서 아벨 대신 셋의 후손을 줬잖아요?

4장 5장을 보면 가인의 후손은 이 땅에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아벨을 대신해서 준 셋의 후손들은 이 땅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사라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다 그림을 펼쳐 놓으셨는데 그 그림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인 역설로 펼쳐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가인의 후손들은 이 땅에서 못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잘 살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승승장구하고 영웅호걸들로 만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땅을 기업으로 줘 버렸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주리실 때 마귀가 와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천하만국의 권세와 영광을 보여 주면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넘겨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에게 절만 하면 이것을 주겠다고 한단 말이지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저주받은 이 땅을 마귀에게 준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땅을 가인의 후손들에게 주었어요.

그러니까 가인의 후손들은 이 땅에서 잘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잘 사는 것이 저주란 말입니다.

제가 늘 그러잖아요.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곳라고요.

 

자, 그림을 봅시다. (그림 설명)

위는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이곳은 생명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아래에 역사가 있습니다.

여기는 죽음의 나라입니다.

위는 생명이고, 아래는 죽음입니다.

 

이 역사 자체가 죽음이니까 역사 속에서 아무리 승승장구하고 영웅호걸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죽음이고 저주란 말입니다.

반대로 하늘은 복입니다.

 

하늘나라 자체가 생명이라고 하잖아요.

생명의 세계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비록 이 땅에서 죽임당하더라도 하늘에 속한 사람들에겐 복이란 말입니다.

 

우리의 이런 정체성들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있으니까 날마다 육신의 사고에 사로 잡혀서 내 육신이 고통당하면 하나님이 왜 날 이렇게 저주합니까? 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4장과 5장을 보니까 이제 나름대로 가인의 후손도 번성하기 시작하고 셋의 후손도 번성하기 시작하는데

6장에 보니 하나님께서 에녹에게 예언하셨던 그 심판의 때가 가까이 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심판의 때에 맞추어 번성을 합니다.

그 때 그 모습이 노아 시대의 모습입니다.

 

노아시대의 모습은 종말의 모습입니다.

제가 늘 이 이야기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묵시에 속한 것을 역사 속에서 펼칠 때는 사건 중심으로 펼친다고 했습니다.

그 얘기는 노아 시대의 모습이나 예수님 초림 때의 모습이나 지금 재림 때 모습이 영적으로는 다 똑같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노아 시대를 보면 예수님의 초림 때를 알 수 있고 예수님의 초림 때를 보면 예수님의 재림을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상태는 똑같단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노아 시대상을 지금 이 시대 영적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단 말입니다.

 

그럼 노아 시대의 모습이 어땠습니까?

한마디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취하여 결혼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해석이 분분한데 여러분 쉽게 생각하세요.

성경을 가지고 논리를 만들어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성경 자체에 흐르는 맥으로 이해하세요.

그 정신을 보세요.

그럼 이해가 쉬워져요.

 

세상에는 두 부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이 있습니다.

가인의 후손은 땅에 속한 사람이고,

셋의 후손은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자연히 셋의 후손이 되고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셋의 후손인 하늘 백성이 땅의 사람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왜 하늘의 사람이 땅의 사람을 좋아할까요?

그것은 땅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우니까 좋아하는 겁니다.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여기 이 땅에서 살 때는 육신적인 것이 필요하지 하늘의 것이 필요하지 않아요.

몸뚱이는 떡을 먹어야 살지 말씀 먹고는 못 살아요.

 

우리 몸뚱이는 눈만 뜨면 떡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는 떡이 없는 겁니다.

그럼 떡 있는 곳을 찾아야지요.

 

예를 들어 말합니다.

옆 집의 영희는 떡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벌이에요.

영희는 가인의 후손입니다.

상징적으로 그렇게 보자는 겁니다.

그 집에 가면 곳간마다 양식이 풍성합니다.

 

그런데 셋의 후손인 철수네 집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난해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여러분의 자식들을 누구에게 시집보내고 장가를 보내겠습니까?

 

여러분이 부모라고 생각해 보세요.

철수 부모이고 영희 부모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철수를 영희 한데 장가를 보내겠지요.

부잣 집으로 보낼 것이 아닙니까?

 

셋의 후손인 철수네 집은 땅의 분복이 없어 가난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인의 후손인 영희네 집에는 곳간마다 쌓여 있습니다.

저 같아도 내 아들을 이 집에 장가 보내겠어요.

왜 그래요?

 

세상에 살려면 힘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돈이 있어야 해요.

돈이 없으면 못 삽니다.

왜요?

 

물질만능 시대에 물질이 없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만 뜨면 돈 주세요, 돈 주세요 하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잘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고 하잖아요.

우린 늘 그것을 추구 한다니까요.

 

여러분들,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니 진짜 떡도 필요 없고 말씀대로 살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우린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성경이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생각지 말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지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답으로 준 것입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정답을 주셨어요.

 

그런데 우린 그 정답대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 아래서 난 육신으로는 살 수가 없어요,

마음은 원이라도 육신은 안 되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 말씀 앞에 내 연약함을 알고 긍휼을 구하고 내 죄가 토설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의 이 얘기를 가지고 아이구~ 이 나쁜 놈들!

나 같으면 그렇게 안 살아 라고 하지 마세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우린 그렇게 못살아요.

 

노아 시대 사람이 우리보다 못나서 그렇게 산 것 아닙니다.

똑같아요.

노아 시대의 인간이나 지금 우리나 그 유전자는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노아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 라고 하지요?

다른 것 없어요.

노아나 우리나 똑 같은데 단 하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세상 사람과 우리와의 차이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똑같은 인간인데 단 하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저들은 은혜를 입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또 이것을 착각하지 마세요.

아,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이제는 떡을 위해 살지 않는다?

아니라니까요!

여전히 떡을 위해 살고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왔기 때문에 용서받고 사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기독교 신앙은 내가 죄 안 짓고 착하게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사세요.

그러나 그렇게 안 되더란 말이에요.

목적이 그 의미가 아니란 말입니다.

 

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이 아니면 내가 살 수가 없는지,

왜? 내가 하나님의 용서가 아니면 살아 갈수가 없는 지를 배워나가는 것이지,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자꾸만 사람들이 곡해를 해서 내 맘대로 살아도 된다 라고 하는데 아니에요!

전 이번에 미국 집회를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곡해가 되면 아주 참담한 현실이 나타난다는 것을 똑똑히 보고 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이 사욕으로 쓰면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지를 봤습니다.

목사가 말씀을 사욕으로 이용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다친다는 것을 보았어요.

너무 마음이 아파요.

많이 울었습니다.

지금도 가슴이 너무 너무 아파서 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난도질을 해놔가지구 말이지요.

 

지식으로 말씀을 안 사람은 자기 유익을 위해 말씀을 사용해요.

자기 유익을 구하게 되어요.

그럼 교인들은 자기 사욕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해요.

 

말씀을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말씀은 우리 사욕을 위해서 이용되는 도구가 아닙니다.

우리가 말씀을 가지고 놀지 못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장악해야 합니다.

 

은사로 깨달아진 말씀에 장악당한 사람은 말씀이 그 사람을 끌고 다녀요.

이런 사람들은 말씀 가지고 허튼 짓을 할 수가 없어요.

말씀이 그렇게 할 수 없게 해요.

이게 육과 영의 차이입니다.

 

여러분이 이 분별을 잘하셔야 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말씀 전한다고 해서 다 하나님 말씀이라 생각하지 마세요.

그 말씀을 가지고 무얼 하는지를 보셔야 합니다.

 

히브리서 13장을 봅시다.

 

히 13: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 받으라"

 

롬 16:18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어떤 열매를 맺는지 보라고 하지요.

저희 행실을 보라고 합니다.

어떤 행실입니까?

 

거짓 선지자들처럼 자기 사욕을 채우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스스로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정화 능력이 있습니다.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를 갈라내고 진짜와 가짜들을 갈라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속된 말로 불신자들도 전할 수가 있어요.

 

제가 집회 마지막 날 ‘에피 성령’과 ‘엔 성령’에 관해 설명을 했지요?

'엔 성령'은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이고,

'에피 성령'은 밖에서 일하는 성령입니다.

 

'엔 성령'은 성도에게만 주어지는 구원하는 성령이고,

'에피 성령'은 신자와 불신자를 따지지 않고 일하는 성령입니다.

하나님은 불신자에게도 '에피 성령'으로 복음 전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 아니라도 복음 전할 수 있어요.

 

이 세상 자체를 보세요.

창세기 1장 2장을 보니까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했는데 창조된 이 세상이 흑암과 혼돈과 공허 속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 흑암과 혼돈과 공허 속에 있는데 그 위를 하나님의 신이 운행합니다.

 

그렇다면 이 역사 자체를 하나님의 신이 덮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자든 불신자든 성령의 장중에 붙잡혀 있다는 거에요.

신자는 신자대로 사용하시고 불신자는 불신자 대로 사용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성신이 임하면 그 순간에는 예언도 하고 복음도 전하는 것입니다.

지금식으로 말할 것 같으면요.

 

마태복음 7장을 봅시다,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먼저 21절부터 봅시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주 앞에 와서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었다고 하지요.

이건 주의 이름으로 복음도 전하고 주의 이름으로 목사도 하고 주의 이름으로 장로도 하고 다 했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십니다.

그들은 분명히 예수 이름으로 복음 전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모른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왜? 합니까?

이 말씀에 앞서서 뭘 말하던가요?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이런 자들이라고 말해주고 있어요.

양의 탈을 쓴 자들이라고 하지요.

 

왜 이리가 양을 탈을 쓰고 나오는가요?

이느 사기 치기 위함입니다.

겉으론 목사인데 그 속은 사기꾼인거에요.

 

그런 사람들의 특징이 ‘에피 성령’으로 선지자 노릇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성령의 감동을 잠깐 잠깐 주는 거예요.

그렇게 했을 때 그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들의 한 일을 근거로 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게 불법입니다.

 

가룟 유다도 분명 저주받은 백성이에요.

그런데 파송됐을 떄 그도 귀신 쫓아내고 천국 복음 전했어요.

하나님께서 그 때 가롯 유다에게 성령의 감동을 입혀 줘서 한 것입니다.

 

이것이 ‘에피 성령’입니다.

그런데 이 ‘에피 성령’은 왔다 갔다 합니다.

마치 옷을 입고 벗듯이 왔다 갔다 해요.

그래서 “성령을 입어” 라고 말하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데 성령으로 일을 하세요.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생겨난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필요할 때는 신자든 불신자든 가리지 않고 성령으로 쓰십니다.

 

바벨론 포로생활 할 때는 이방나라 왕인 고레스를 통해서 해방을 시키잖아요.

발람 선지자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고 싶은데 성령께서 그를 장악하자 저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하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절간의 중들을 통해서도 말씀 전하실 수 있어요.

극단적인 비유로 애기하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에피 성령’이 아닌 ‘엔 성령’이 오십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는 성령입니다.

이 내주하는 성령을 아들의 영이라 하고 한 번 오시면 영원히 떠나지 않습니다.

이건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성도들에게만 오세요.

하지만 ‘에피 성령’은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따지지 않고 필요에 따라서 왔다 갔다 해요.

 

그러나 이 내주하는 ‘엔 성령’은 성도들 안에 오시면 절대로 떠나지 않아요.

이 내주하는 ‘엔 성령’은 복음을 자기 사욕에 의해 쓰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 분이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세요.

 

그 차이가 있어요.

우리는 연약해서 넘어질 수밖에 없음에도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그 넘어짐 속에서도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게끔 간섭을 하십니다.

그 차이에요.

 

오늘 본문 내용을 가만히 보니까 이 노아의 때가 우연히 온 것입니까?

아니면 이미 예언된 것이 온 겁니까?

이미 에녹을 통해서 예언된 때이잖아요.

 

하나님께서 에녹에게 예언할 때에 이 세상에 심판이 일어나고 다른 세상을 열어 줄 것이라는 것을 예언을 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는 세상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않은 모습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타락이 되어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잘 되는데 심판하면 안 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 자체가 타락으로 흘러가게 만들어 놨다니까요.

여기서 타락이란? 하나님을 떠난단 말입니다.

하나님을 잊고 산단 말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푹 빠져 있다는 말이에요.

 

여러분, 앞으로 이 세상이 육신적으로는 엄청 좋아져요.

그러나 영적으로는 암흑기가 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재림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잘 믿는 것 같지요?

아니에요.

우리 스스로는 잘 믿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맨 마지막에 나타나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인데,

그 모습이 스스로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 라고 합니다.

스스로는 예수 잘 믿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눈에는 발가벗고 눈 멀고 가련하고 곤고하고 하다는 겁니다.

 

지금 혹시나 내가 이 정도 믿음이면 됐지…라고 생각하세요?

착각하지 마세요.

진짜 믿음 있는 사람들은 늘 자기가 연약한 것을 압니다.

믿음 없음을 알아요.

그래서 늘 상한 심령이 일어나고 긍휼을 구할 수밖에 없어지는 것입니다.

 

무엇이 타락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타락이 어떤 겁니까?

그건 창조의 반대에요.

구원의 반대에요.

 

타락을 이렇게 생각하세요.

창조에 반대되는 모습을 타락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창조는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것에서 갈라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을 ‘분리’라고 하는데,

이 분리를 다른 말로 ‘거룩’이라 합니다.

 

타락된 속에서 분리를 시키는 이것이 창세기 1장의 창조입니다.

그러면 타락은 분리시킨 것을 다시 합하면 타락이 되는 것입니다.

창조라는 말은 구원과 같은 동의어에요.

창조를 갈라내는 것으로 말하지요.

그럼 타락은 갈라놓은 것을 다시 합하면 되는 거에요.

이해되시죠?

 

창조는 분리입니다.

구원은 분리에요.

내 백성아 거기에서 나와라! 했단 말이지요.

아브라함아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라!

그러면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이 일단 분리가 되었지요?

 

그러면 그 때부터 아브라함은 자기가 살던 갈대아 우르의 사고방식에서 자꾸 별리(別離)가 되어야 합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살던 방식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단 말입니다.

이걸 옛 사람을 벗는다고 해요.

 

아브라함은 말로는 말씀을 좇아 가나안 땅으로 갔다지만 기근이 들자 결국엔 갈대아 우르의 사고를 못 벗고 애급으로 내려가지요.

그래서 결국에 떡 찾아 가잖아요.

그게 타락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장소적인 의미에서는 분명 갈대아 우르가 세속이고 떠난 것이 섭리인데

그래서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왔지만 결국 그 사고를 버리지 못하고 육신을 위해 아내까지 팔아넘기는 일들이 일어나잖아요.

 

그것이 노아시대와 똑같이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지만 그 애굽의 사고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니까 광야에 나와서도 애굽의 떡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나이라니까요!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예수를 믿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왜 이 자리에 왔느냐 이 말입니다.

여기서도 여전히 세상 것을 탐하면 세상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자꾸만 마귀는 내가 여기 와 있다는 것으로 내가 신앙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끔 속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나 교회 다니거든요…

여러분 교회 백 날 다녀봐야 소용없어요.

예수 믿으세요.

 

신앙생활들을 착각하지 마세요.

내가 여기 와 있잖아요,

내가 그래도 성경을 보고 예수를 믿잖아요! 라고 하지 마세요.

무엇을 위해 믿으시냐?

이 말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타락이라는 것은 분리 시켜놓은 것을 다시 합할 때 타락이라고 합니다.

이걸 다른 말로 혼합주의 입니다.

이 시대가 혼합주의 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세요.

 

2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자기 좋은 대로 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지요.

언약을 위해서 살아야 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자기 좋은 대로 삽니다.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 좋은 대로 살지요?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이 무슨 아름다움입니까?

세상의 아름다움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사는 사람에게 세상의 것 이상 좋은 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먹으면 죽을 것을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게 해 놓으셨습니다.

우린 그것을 못 벗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나 이거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우리 인간들이 이길 수 없는 그것을 다 이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다 이겼단 말이지요.

마귀의 시험으로부터 예수님이 이겼잖아요.

 

예수님께서 떡으로부터,

부귀와 권세로부터,

천하만국의 영광으로부터,

이런 것들을 다 이겨냈단 말이지요.

 

마귀가 준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거절을 하고 언약을 위해서 이겨내셨단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그 예수님께서 이겨주신 것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이겨 주신 것을 가지고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항상 우리는 말씀 앞에서 우리는 이것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것을 발각당해야 한다니까요.

 

아! 나는 안 되는구나…

안 되니까 어떻게 해야 되나요?

그럼 저주받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저주받아야 할 이 사람이 지금 살고 있어요.

그럼 우리는 내가 살고 있는 것은 여전히 예수님께서 대신 이겨주신 것 때문에 살고 있다는 고백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는 내가 이 세상 것을 이기느냐? 안 이기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긴들 안 이긴들 관계없이 예수님께서 대신 이겨주심 때문에 살고 있는 것을 알고 주님 감사합니다…

이게 나와야 한다니까요.

 

3절에 보면

 

3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육체가 된다는 말이 뭡니까?

이게 또 중요한 이야기인데 잘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고 나신 후에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짐승이나 사람이나 처음엔 다 동일하게 생물입니다.

이것을 ‘네페쉬 하야’ 라고 합니다.

‘네페쉬 하야’는 그냥 산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하나를 더 주셨습니다.

‘생기(生氣)’를 불어 넣어주셨습니다.

이 생기를 ‘니스마트 하임’이라고 하는데,

이 생기는 생명을 알아보는 어떤 능력을 말합니다.

 

이것이 신약으로 와서 보면 믿음으로 나타납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오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어야 할 대상을 보내주셨는데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그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믿음은 누가 주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게 생기와 같은 것입니다.

아담에게는 생기를 줬고 신약적으로 자기 백성들에겐 믿음을 주신 겁니다.

그 믿음이 믿을 대상을 보고 믿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로마서에서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이 땅에 보냈습니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알아보더란 말이지요.

그 얘기는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알아보는 믿음을 줘서 그 믿음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하게 한 것입니다.

 

그 차이입니다.

사람과 짐승의 차이는 다른 게 아니고 성경이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감지할 수 있는 생명을 감지(感知)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 생기를 통해서 자기들의 생명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을 취해야 하잖아요.

 

그게 뭐에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시기로 한 그 생명이 어디에 있었나요?

생명과 속에 있었지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유혹에 빠져서 생명과를 먹지 못하고 선악과를 먹어 버린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난 인간들은 모두가 그 속에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셋의 후손들에게 ‘네페쉬 하야’ 같은 생기를 그들에게 공급을 해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3절에서 말하는 ‘신(神)’이 ‘생기(生氣)’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생기와 같은 신을 그들에게 부어 줬는데

이 셋의 후손들이 그 생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알아보고 언약을 쫓아가야 하는데

이들은 아담처럼 또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는 일들을 하더란 말이지요.

 

사람의 딸들을 쫓아가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신을 걷어 가 버리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흙이 되어 버립니다.

이해되세요?

 

시편 104편 29-30절을 봅시다.

 

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30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주께서 저희의 호흡을 취하니 본 흙으로 돌아갔다.

그러지요?

하나님께서 흙으로 아담과 하와를 빚으시고 그 속에 호흡을 집어넣었지요?

그것을 생기라 그랬습니다.

거기서 생기를 빼내버리면 그대로 다시 흙이 되는 겁니다.

 

노아 시대가 지금 그 모습입니다.

그것을 ‘육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보고 하나님의 생명을 알아보는 능력인데

이것이 상실되어 버리니까 그냥 본능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본능적으로 사는 것이 뭐냐 하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종말의 때를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노아의 때는 본능적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창세기 6장에서 자기들이 좋아하는 사람을 취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셋의 후손인 그들을 통해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이 세상 것을 바라보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고 살아야 된다 하고 말했는데,

이들의 눈에는 세상 사람들의 화려한 모습이 보이니까,

그 육신을 쫓아가는 일들을 하더란 말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고 세상을 쓸어버리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자 보세요.

이렇게 해 놓고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신약에 올 것 같으면 이렇게 죽은 자들에게 뭘 보내주십니까?

 

29절과 30절을 그냥 구약과 신약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29절은 하나님의 신이 거둬가 버리니까 인간들은 모두 흙으로 돌아가 버리지요.

그 흙으로 돌아 간 자들 속에 신약으로 와서 예수님께서 그 흙들 속에 무엇을 집어 넣어주세요?

성령이잖아요!

 

30절을 보세요.

우린 다 죽은 자였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 속에 성령을 보내주시죠?

그래서 우리가 살아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게 구약과 신약의 차이입니다.

 

에스겔 37장을 보면 해골 골짜기가 나옵니다.

이 해골들이 누구입니까?

자기 백성들입니다.

 

그 죽어 있는 자기 백성들의 상태에 생기가 운행합니다.

생기가 운행하며 그들 속에 들어가니까 뼈에 살이 붙고 살이 돋아나잖아요.

그게 신약의 의미입니다.

 

구약은 다 죽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예수님의 생명인 성령을 그들 속에 보내 주시니까 흙인 사람들이 전부 생령의 사람으로 살아나더란 말입니다.

노아 시대를 통해서 장차 예수님께서 아 땅에 오셔서 하실 일들을 예표(豫表)적으로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체’는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없이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것은 우리의 살아가는 존재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나를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에 있지요.

그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에 있나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가 존재를 해야 하는데

마귀는 이 육신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와서 항상 미혹을 합니다.

떡을 위해 살도록 자꾸 유혹을 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그 유혹으로부터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그 유혹에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몸의 한계입니다.

이 몸의 한계를 가지고 여전히 우리는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어요.

이걸 알기 때문에 날마다 예수님께서 대신 이겨주신 그 은혜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온전할 수 없기 때문에 온전하신 그 분 안에 귀속하는 것입니다.

 

귀속(歸屬)이란? 내가 그 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란 말입니다.

다른 말로 주만 의지하고 예수로 옷 입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를 믿어요?

내가 안 되니까 믿잖아요.

안 되니까.

 

아빠가 아이와 함께 가다가 그 아이를 보고 ‘아빠 믿어’ 라고 하는 것은 너 보지 말고 나 보란 얘기잖아요.

그게 믿음이라니까요.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우리 꼬라지 보지 말고 예수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시대 우리가 노아시대와 똑같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잖아요.

내가 다시 올 때 노아의 때와 같다고 했잖아요.

 

이 이야기는 결국 우리도 노아 시대의 사람과 같다는 애기입니다.

똑 같은데 노아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있다니까요.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우리입니다.

 

우리는 노아시대의 사람과 똑같이 살고 있는데,

그럼에도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노아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보니까 내가 저주받아야 할 자인데 이 저주받을 자가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용서받고 산다는 것에 고맙고 감사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항상 감사와 감격과 기쁨과 찬양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미국 갔더니 그 분들의 고백이 그래요.

목사님, 우리는 그동안 너무 너무 가학과 피학 사이에 머물러 있었다는 겁니다.

너무 주눅이 들어서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조금 잘 사는 것도 죄로 느껴졌다는 겁니다.

맨 날 고난! 고난! 고난! 하니까 기를 못 펴고 살았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데 재미가 없는 겁니다.

 

미국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자 미국에 계시는 어떤 분이 전화를 하셨는데 어떤 목사가 묵시와 역사를 가지고 사람들을 개판 쳐놨는데

그걸 또 와서 얘기를 한다고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모릅니다.

이 분은 그 목사로부터 우리는 묵시적인 존재니까 역사는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는 식으로 설교를 들은 모양이에요.

 

상처를 받아가지고서 말이지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아니에요!

성도는 존귀한 자입니다.

 

그 목사가 말 끝마다 똥 걸레다 똥 걸레다 라고 해댔으니 전부 그렇게 주눅이 들어 있는 겁니다.

여러분 그 의미를 바로 아셔야 해요.

우리에게서 나오는 의는 똥 걸레가 맞아요.

우리에겐 의가 없다니까요.

 

그러나 성도는 똥 걸레가 아니에요.

질그릇 속에 보화를 담고 있어요.

우리는 존귀한 자에요.

 

우리 안에 뭐가 있나요?

예수라는 보화가 있잖아요!

질그릇 속에 예수라는 보화가 담겨져 있잖아요.

그래서 존귀한 자인 거예요.

 

쉬운 얘기로 조선 시대에 왕의 은혜를 입은 궁녀가 그 속에 임금의 씨인 용정(龍精)을 품게 되면 그 때부터 이 여자의 신분은 존귀한 자로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 아이 때문에요.

 

지금 우리 안에 누가 있어요?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속에 있다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존귀한 자에요.

징징거리지 마세요.

 

세상 사람들은 징징거리더라도 여러분은 그러지 마세요.

신앙은 항상 기쁨과 감사와 찬양과 영광이 드러나야지 맨 날 주눅 들어 이것도 죄고 저것도 죄고…

그러고 있으면 안 됩니다.

그건 염세주의입니다.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음껏 기뻐하시고,

마음껏 행복하시고,

마음껏 감사하세요.

 

무엇으로?

그 은혜의 영광으로 말입니다.

나같이 무능한 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용서받고 산다는 이 사실을 깨닫고 감사하세요.

 

내가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진짜 내 의가 없는 인간이 맞는데,

술람미 같은 이런 자에게 왕의 은혜가 덮치고 보니까

똥 걸레가 아니고 존귀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꼬라지가 이래도 우리가 왕비라니까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성도를 일컬어 하늘 예루살렘의 보석이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다 보석이라니까요.

절대 여러분들 기죽지 마세요.

어떤 설교를 듣던지 여러분들 기죽게 하고 비하하게 하고 자책하게 하는 것은 올바른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 자체가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이 덮쳐 왔잖아요.

그 피 뿌림 때문에 비록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 피가 넉넉히 우리를 덮어주고 있단 말이지요.

 

다시 말합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이 이렇게 살았는데 우리는 그렇게 안 산다?

천만의 말씀이에요!

만약에 노아시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고 이 시대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내가 다시 올 때 노아의 때와 같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겠지요.

 

노아 시대 사람들은 ‘에피 성령’으로 간섭해서 그렇게 안됐고 지금은 ‘엔 성령’이 와서 되는가요?

그렇게 ‘엔 성령’이 왔다면 우리는 노아 시대와 같지 않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살아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너희들 믿음 잘 지키고 있었구나 라고! 해야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실 때 우리가 노아시대와 똑같은 모습이어서 믿음을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다른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노아처럼 입혀왔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노아시대와 같이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본능적으로 구한다 말이지요.

그럼에도 우리가 저주받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왔기 때문에…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덮쳐 왔기 때문에…

그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창세기 6장의 노아시대 모습은 지금 우리와 똑 같은데 다만 지금은 예수님의 대신 죽어주심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이 사실을 놓치지 말란 말이지요.

그래서 감사하십시오.

 

내가 비록 예수님의 말씀대로 시집가고 장가가고 이렇게 살아도 그럼에도 내가 용서받고 산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 때문이구나…

그래서 여러분들의 삶의 끝자락엔 항상 예수님의 피 흘려주심에 대한 감사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주여 고맙습니다’

‘주님의 그 은혜 때문에 내가 지금 살고 있습니다’

이 고백이 나타나는 것을 신앙생활이라 그러고 그것을 찬미의 제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찬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의 삶 속에서 비록 여러분들이 뜻한 바대로 인생이 안 살아진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시고 그 낙심 속에서 나를 보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세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면서 비록 똥 걸레 같은 인간일지라도 예수님의 피 뿌림이 내게 덥쳐 오니까

똥 걸레가 아닌 하늘의 존귀한 자로 대접해주시는구나 하는 사실에 놀라고 놀라고 또 놀라야 해요.

 

그래서 살아가는 삶 속에서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환경을 탓하지 마시고

주여, 어차피 이 세상은 허상이니까 잠시 있다가 지나가는 것이니까

저 세상 바라보면서 언약을 바라보면서 맞습니다…

 

비록 내가 이 세상에 소망이 없을지라도 하늘의 영원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그 소망 붙잡고 삽니다! 라는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부디 그 소망 잃어버리지 마시고,

빼앗기지 마시고

그 소망 안에서 하루 하루 감사하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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