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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06강. 두 족보 (창 5:1-20)

by coroa 2020. 9. 5.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06강. 두 족보 (창 5:1-20)-

 

-.정낙원 목사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일을 해나가실 때 예수 그리스도를 만유의 주가 되게 일을 하십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세상 자체가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창조되었고,

그 언약의 내용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만유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려면 반드시 심판성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그 심판성이라는 것은 갈라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너희와 저희로 갈라내는 일을 하신 겁니다.

 

창세전 언약 자체가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로 되어 있듯이 이 세상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 아닌 자,

다시 말해서 세상 사람들도 예수님께 속한 자와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자로 나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세상의 잡다한 인종이 있다고 하겠지만 성경이 볼 때는 큰 틀에서 둘 밖에 없습니다.

뱀의 후손이냐!

여자의 후손이냐! 입니다.

 

이걸 아담 집안에 담아 놓았습니다.

그래서 아담을 통해서 두 아들이 나왔는데 가인과 아벨이 나온 것입니다.

가인은 뱀의 후손에 서 있고, 아벨은 여자의 후손에 서 있습니다.

 

아담을 예수님으로 보세요.

아담 안에서 전혀 다른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이 나왔듯이

예수 안에서도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이 나오는 것입니다.

신앙이 결국에는 형제 싸움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육으로 난 자가 있고, 영으로 난 자가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우리를 공격한다고 생각하시 마세요.

형제가 공격해요.

 

항상 육으로 난 자들이 기득권을 형성해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힘을 가지고 영에 속한 자들을 밀어냅니다.

그것이 구약이든 신약이든 모든 인류 역사를 통해서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지금도 교회 속에 그대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인정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냉정해지셔야 해요.

 

여러분들이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성경을 보는 안목이 넓어지셔야 합니다.

왜 제가 자꾸 성경에서 창세전 언약에 올인 해서 설명하는가 하면 여러분들의 신앙은 성경을 서울대 입시생처럼 달달 외우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한 것에 대해서 깨닫고 거기에 대하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예배는 두 예배가 있다고 했습니다.

율법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있고, 은혜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있습니다.

율법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우리가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일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 받은 것에 대하여 찬미하고 감사하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모였을 때 어떤 일로 인하여 반목과 갈등이 생기면 안 됩니다.

그러면 여기가 제사를 지내는 곳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제사를 지나 온 사람들입니다.

 

 

성막을 비유할 것 같으면 성도는 뜰을 지나서 성소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뜰에서는 맨 날 피 튀기며 싸움도 하고 그러지요.

하지만 성소 안에는 진설된 떡을 먹으며 일곱 등대에 비친 조명을 받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제사장적 사명을 가지고 서로 화목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신앙생활은 예수님 마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한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제발 성경 말씀 많이 아는 것으로 신앙적이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물론 성경 많이 알면 좋겠지요.

 

 

십자가 십자가 한다고 십자가 아는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가 나오면 안 되고 십자가 정신으로서의 삶이 나와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것이지 십자가를 주술적으로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주기도문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주기도문으로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경은 외우는 주술 종교가 아니에요.

예수 정신으로 사는 거에요.

죄인이 예수 죽음 때문에 용서 받고 사는 것이 감사하는 모습으로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하나 물어 볼게요?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옆의 우편 강도가 성경 알았을까요?

성경 몇 독을 했을까요?

그리고 초대 교회 당시에 그들이 성경을 알았을까요?

 

그 당시는 성경이 지금처럼 이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파피루스에 기록된 것은 지극히 적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는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읽어 주었습니다.

 

이것을 흉내 낸 것이 중세 카톨릭입니다.

신부들이 라틴어로 된 성경을 그냥 읽은 것입니다.

교인들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 당시에도 그랬어요.

 

그러나 그들에게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그들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인해서 용서 받았다는 것이 믿어지고,

이 믿어짐이 너무나 고맙고 감사해서 날마다 모여서 찬미한 것입니다.

제사 지내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덮쳐 오면 내가 비록 성경적 지식은 잘 모를지라도 그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들이 믿어지고 깨달아지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눈물이 뚝뚝 떨어지면서 감사합니다! 라는 고백이 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운동 못하는 선수들이 보면 경기에 앞서 머리 박박 깎고 힘주잖아요.

눈에 힘준다고 좋은 선수가 돼서 훌륭한 경기를 하나요?

메이저 리그에 보면 잘 뛰는 타자들이 어떻게 하든가요?

한국 사람들은 경직되어 있는데 그들은 껌 질겅질겅 씹으면서도 홈런 치고 그러잖아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으로 하면 경직됩니다.

은혜로 하면 여유가 생깁니다.

자유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자유를 우리에게 주셨는데 왜 우리가 그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까?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해 가시고,

어떻게 그 은혜들이 우리에 혜택을 주는지 배워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항상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을 같은 구조 안에 집어넣어 놓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속에서 하나님만 의뢰하는 자들이 있고 자기 힘만 의지하는 자들이 극명하게 보여지게 합니다.

그래서 가인 옆에 아벨을 두는 것입니다.

가인은 힘 있는 자고, 아벨은 힘없는 자입니다.

힘 있는 자가 항상 힘을 가지고 힘없는 아벨을 공격합니다.

그러면 아벨은 다른 것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도와주세요! 라고 말하는 겁니다.

 

아벨의 핏 소리가 하나님에게 호소한다.

그러지요?

아벨이 죽어서 호소한다는 말도 맞지만 그것이 실제 아벨의 후손들이 지금도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 앞에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왜요?

내가 힘 있으면 도와 달라고 하지 않지요.

힘이 없기 때문에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23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나중에 원수 앞에서 상을 베푸십니다.

여러분들이 원수를 이기려고 하지 마세요.

우리는 원수를 이기라고 이 땅에 보내진 자가 아닙니다.

원수에게 죽임당해야 합니다.

이 창세기 5장의 이 이야기가 이런 맥락에서 보면 굉장히 은혜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전부 족보 이야기를 하는데 잘 보면 재밌는 것이 4장에 보면 가인의 후손들이 전부 이 땅을 정복하고 땅에서 유명한 자들이 되지요?

 

창세기 4장 20절에 봅시다.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 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 이었더라

 

여러분들 보세요.

이 당시에 벌써 철기 문화가 꽃피웠다는 것은 엄청난 것입니다

그들이 대단한 능력자였다는 것입니다.

이게 가인의 후손입니다.

가인의 후손은 이 땅에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분명 저주를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은 가인의 후손을 이 땅에서 승승장구하게 합니다.

이것은 육적으로 봤을 때는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일하시는지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언약적인 차원에서 한 번 접근해 보세요.

이 땅은 하나님의 저주를 머금고 있는 곳입니다.

그렇게 저주를 머금고 있는 땅에서 승승장구하게 내버려 둔 그것이 저주입니다.

지금 이 말을 잘 이해하세요.

 

이 땅은 저주 받은 곳이잖아요.

그러면 이 땅에서 아무리 승승장구하고 오래 살아도 그것은 곧 저주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땅에서 성공하고 잘 살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 그거잖아요.

그래서 신자들이 교회에 와서 전부 이 땅에서 잘되고 잘되고 잘되는 것을 구합니다.

그 잘 되고 잘되고 잘되는 것이 저주인데 말입니다.

 

축복은?

아벨처럼 땅에서 뽑혀져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걸 아셔야 하는데…

아벨처럼 저주받은 이 땅에서 뽑혀 나가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죽을 수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 땅에서 뽑혀져 나가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가인입니다.

이해되세요?

 

얼마나 고맙습니까?

가인의 족속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하는데 반드시 핍박하는 사람이 옆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꾸 이걸 없애 달라고 하지요.

원수를 없애 달라고 합니다.

여러분! 원수가 없으면 우리가 여기서 붙박이가 됩니다.

오늘 참 재밌는 것이 4장은 가인의 후손들을 얘기하는데

그 가인의 후손을 얘기할 때 라멕의 후손을 위해서는 뭐라고 합니까?

24절을 봅시다.

 

 

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이 말은 그들이 힘을 가지고서 자기들을 괴롭히는 자들은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철저히 응징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세상입니다.

이게 세상의 법이고 힘이고 가인의 후손들이 하는 짓입니다.

뱀의 후손들은 반드시 힘을 의지해서 철저하게 응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이게 우리 속에 다 있지요?

속 썩일 것 같으면 가서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소리 없는 총이 있다면 저도 사고 많이 냈을 겁니다.

우리 안에 이런 가인 같은 마음이 다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는 생래적으로 이 땅의 법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에 법이 가깝습니다.

법이 쉽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법이 먼저 튀어나오지 은혜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먼저 법이 튀어 나오면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십니다.

‘너 왜 용서받아 놓고 용서가 안 나오고 응징이 나오냐?’

그럴 때 우린 ‘주여 이런 죄인이…주여 용서해 주십시오’ 라는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오른쪽 뺨 때리면 왼쪽 뺨도 때리세요! 하고 내어놓는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한 대 때리면 두 대 때리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그렇게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항상 우리는 우리 안에 법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 법의 사람이 은혜의 사람을 핍박하는 쪽으로 나옵니다.

우리는 새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 살고 싶어요.

하지만 우리의 엣 사람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단번에 화가 나지요.

내가 부당한 일을 당할 것 같으면 발끈해서 화부터 나옵니다.

 

그게 우리가 은혜를 안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냥 이상이요 지식인 것입니다.

은혜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고 법으로 살아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 앞에 설 것 같으면,

‘주여 제가 아무리 해도 안 되네요…

그래서 하나님 은혜가 아니면 안 됩니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마음으로 많이 우셔야 해요.

 

 

기도는 다른 게 없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가 전부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기도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 기도는 전부 설득하는 기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6하 원칙 들고 나와서 사실은 이만저만하고…이러 식으로 자기 설명을 합니다.

 

 

뭘 하나님을 설득시키려 하세요?

그냥 하나님 앞에 아뢰세요.

도와달라고.

하나님 도와주시지 않으면 못산다고 하시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가인의 후손과 아벨의 후손들을 가지고 서로 대조적으로 극명하게 보여주시는데 4장은 가인의 족보를 가지고 얘기를 했다가 5장에 와서는 셋의 후손이 나옵니다.

5장을 봅시다.

 

 

1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 아담이 일백 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1절에서 2절은 이건 창조의 모습을 말하는 겁니다.

아담의 족보인데,

그렇다면 응당히 아담의 장손인 가인이 올라가야지요?

그런데 가인은 빼버립니다.

 

장자인 가인을 빼 버리고 아벨 대신에 주어진 셋을 올립니다.

여기서 셋은 아벨이라고 보셔야 합니다.

결국 아담의 족보에는 장자가 제외를 당하고 차자가 올려진 것입니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항상 성경을 보면 장자는 타락으로 나타나고 차자가 장자권을 계승받는 것으로 나타나지요?

지금 아담의 족보에 그렇게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아담의 족보에서 빼버린 것입니다.

 

결국 가인은 가인으로서 독자적인 족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아벨을 대신해 셋의 후손으로 족보를 기록한 것이고,

그 아담의 후손을 하나님의 계통으로 보는 것입니다.

반대로 가인의 족보는 하나님의 계통이 아닌 마귀의 계통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되세요?

 

 

굉장히 중요한 얘기니까 잘 이해를 하세요.

 

창세기 5장과 4장을 비교를 해 보세요.

가인의 후손은 죽었다는 얘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후손은 전부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라고 합니다.

가인의 후손이 죽었더라는 말이 없다는 것은 전부 이 땅에 붙박이하고 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후손,

그러니까 셋의 후손들은 이 땅에서 뽑혀짐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 아벨의 계통입니다.

그 아벨의 계통은 하나님께서 가인의 계통을 통해서 뽑혀짐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내가 죽는 것이 아니고,

‘죽임당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자살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런가요?

이건 자살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예수님의 죽음을 자살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아니에요.

예수님은 자살 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때가 되매 죽음의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죽임당한 것입니다.

자살을 미화시키려하지 마세요!

생명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대로 내 생명을 버릴 권세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살을 저주로 봅니다.

자살하는 자는 신자로 보지 않아요.

성경 속에 자살한 사람은 다섯 명이 있는데 단 한 사람도 구원받은 사람이 없어요.

 

지금 보세요.

가인과 아벨의 후손을 보면 가인의 후손들은 이 땅에서 뽑혀짐을 당하지 않고 승승장구합니다.

다시 4장 16-17절을 보세요.

 

16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17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가인이 지금 에녹을 낳고 성을 쌓지요?

성을 쌓는다는 것은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기 위해서입니다.

중요한 얘기이니 잘 들으세요.

가인이 낳은 자식에 에녹이 있지요?

그런데 아담의 후손 속에도 에녹이 나옵니다.

그렇지요?

똑같은 에녹인데 가인의 아들 에녹은 이 땅의 붙박이로 성을 쌓고 셋의 후손으로 나오는 에녹은 이 세상에서 데려감을 당하잖아요.

 

똑같은 에녹인데 가인의 후손들은 이 땅에서 살고 하나님의 후손인 에녹은 빼내심을 당하더라는 것입니다.

에녹이 스스로 갔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빼냈습니까?

하나님이 빼내시지요.

 

 

구원이 뭡니까?

빼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의 출애굽기입니다.

우리는 떠날 생각이 없는데 빼내시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떠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 빼내신 것입니다.

 

그 모세가 신약적 의미에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면 자기 백성을 빼내시는데 어떤 식으로 빼내는가 하면 반드시 가인의 후손의 힘을 빌려 죽임당하는 식으로 빼내시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모두 순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을 보세요.

 

 

계 6:9-11=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구원 얻은 선배들이 하나님 앞에 가서 탄원하지요?

하나님 언제까지 이 세상을 그대로 두실 겁니까?

빨리 끝을 내서 우리 원수 좀 갚아 주세요! 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뭐라 답하십니까?

기다려라 너희들처럼 죽어야 할 네 동무들의 수가 차기까지 조금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죽임을 당하여야 하는 동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순 번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저와 여러분들이 원치 않아도 어떤 세력들이 우리를 죽이는 길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말이 목숨을 끊는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와서 그냥 죽일 수 없으니까 말로 죽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단으로 우리를 모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초림으로 오셨을 때 유대교는 거대한 세력으로 하나의 국가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유대교의 율법 신앙을 거부하면 출교를 당하는 데 이게 죽음인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그걸 지금으로 당겨 말하면 큰 무리의 기독교 종파에서 축출을 당하는 것은 유대교에서 출교당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죽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은 죽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단 소리 듣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단 짓을 안 해도 그냥 여러분들이 복음을 이야기하면 그 사람들이 못 받아들여요.

 

복음이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제사가 아니고 은혜입니다 잖아요.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모두 뭘 하고 있습니까?

제사 지내고 있잖아요.

그 사람들에게 그거 제사 아닙니까? 라고 말하면,

너 어디서 배운 이단이냐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듣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 땅에 보낸 것은 빼내기 위해서 보낸 것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말할 것 같으면 살리기 위해서 죽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어떤 곳입니까?

 

(그림 설명)

위가 하나님 나라, 영생의 나라가 있지요?

영생의 나라에서 나온 아래는 죽음의 나라입니다.

영생의 나라에서 죽음의 나라로 보내놨습니다.

 

그렇게 보낸 것은 죽음의 나라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영생해서 위의 나라인 영생의 나라로 오게끔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하나님께서 조치를 해놓은 것이 창세전 언약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죽었다니까요.

죽은 세상에 와 있는 것입니다.

죽은 세상에서 예수님의 생명으로 산 세상으로 빼내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그런데 가인의 후손들은 죽은 세상에서 말뚝 받고 잘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를 일컬어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이라 그러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그네와 행인의 삶은 고달픕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고생스러운 이 땅에 집어넣어 놓고 믿음을 주시는 겁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지요?

죽음의 나라인 이 땅에서 땅 밖에 모르고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거기 세계를 증거하고 살더란 말입니다.

 

우리는 위의 세계를 보고 사는 것입니다.

영생의 나라인 위의 세계가 보이기 때문에 죽음의 나라인 이곳을 미련 없이 떠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염세주의처럼 포기하고 살라는 건 아닙니다.

열심히 사세요.

열심히 사시되 이곳이 전부가 아니고 내가 가야할 곳이 따로 있다는 것을 보고 사시라는 겁니다.

 

지난주에 제가 저희 교회 어느 집사님의 글을 보고 눈물이 났어요.

그 분의 솔직한 고뇌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 너무 힘들다는 겁니다.

글이라는 것은 미사여구로 포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보면 압니다.

 

그런데 마음속의 것을 그냥 토해낸 글은 다릅니다.

그 글을 보고서 그 집사님 마음속에서 많이 요동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 분의 마음속에서 법과 은혜가 요동치는 것을 본 것입니다.

너무 고맙고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이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육신은 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인정받고 싶고 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 속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 욕심대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자꾸 집어넣으시는 겁니다.

 

그래서 에녹 앞에는 전부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하는데,

그 끝의 에녹이라는 사람은 세상 바깥으로 빼냄을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에녹이 뭐했다고 합니까?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합니다.

 

제가 동행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걸 또 내가 하나님과 동행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린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싫어해요.

하나님께서 에녹을 동행한 것입니다.

이해되세요?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동행을 하시잖아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니까 그 제자들은 끝났구나 하고 낙심돼서 엠마오로 내려갑니다.

예수님 살아 계실 때는 으쌰으쌰하면서 뭘 해보려다가 막상 돌아가시고 나니까 우리가 속았구나, 끝났구나 하고 예루살렘에서 내려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내려가는 것은 항상 신앙의 낙망을 얘기합니다.

지금 제자들은 시험 들어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동행’을 하시지요.

그런데 못 알아봅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서 줄 때 비로소 그들의 눈이 떠집니다.

그 떡이 오늘날에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은 한 번도 저와 여러분들을 떨어지게 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 곁에서 늘 동행을 했는데 우리가 눈이 어두워 못보고 있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데 우린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깨닫게 하시면 하나님께서 한 번도 나를 버리시지 않았구나,

나와 동행을 하셨구나가 알아지는 것입니다.

시편 139편을 보세요.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3 나의 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10 곧 거기서도 주의 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께서 지금 자기 백성들을 감찰하신다고 합니다.

감찰이 뭡니까?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살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말뿐만이 아니라 생각까지 다 아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냐?

 

 

이 저주받은 세상에 자기 자식을 던져 놓고 니 알아서 하라 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저주받은 세상에 던져 놨을 때는 그 속에서 하나님이 그 저주를 이겨내도록 지켜 주시기 위해서 보낸 것입니다.

홀로 던져 놓은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자꾸 혼자라고 생각하는데,

아니에요!

여러분이 지금까지 온 것을 한 번 뒤돌아보세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길이잖아요.

그 간섭이 깨달아지잖아요.

이걸 많이 깨닫는 사람은 많이 감사하고,

이게 안 깨달아지는 사람은 맨 날 불평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게 많이 깨달아지는 사람은 늘 찬송하고 감사해서 모이기를 힘쓰고,

이게 안 깨달아 지는 사람은 ‘아이고 주일이 또 왔네’,

이러면서 도망 다니는 겁니다.

쉬운 말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시편기자가 뭐라고 하던가요?

니가 하늘에 가 있을지라도 거기서 끄집어내고,

음부에 자리를 튼다 할지라도 거기 계신다잖아요.

음부에 자리를 튼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지옥 구덩이에 가 있어도 너 왜 거기 있니 하면서 끄집어내신다는 겁니다.

 

절대 우린 지옥을 갈 수 없어요.

우리는 지옥을 갈 수 없는 몸으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이해되세요?

지옥에 가도 하나님께서 ‘이런,

니가 여기 왜 있니,

여기 있음 안 돼지’ 하면서 끄집어내시는 겁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는 음부에 자리를 틀고 있어도 나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무덤에 있던 자들이 나왔잖아요.

그 무덤에 있던 자들이 어디에 자리를 펴고 있었습니까?

음부에 자리 펴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음부 속에 있던 자들을 끄집어내서 거룩한 성으로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왜요?

 

너희들은 여기 있을 자가 아니고 위의 나라, 천국에 있을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빠져 나오지 못한 자들은 그대로 이 땅에 가둬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 세상은 멍석말이 하듯이 둘둘 말아서 불태워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한 사람이라도 이 땅에서 버려짐을 당하도록 허용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기 백성이 한 사람이라도 버려지면 그건 하나님 잘못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버려짐을 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보세요.

가인의 후손들은 이 땅에서 철기문화를 꽃피우고 퉁수와 수금을 켭니다.

요즘말로 오락문화입니다.

 

인간이 즐기고 살 수 있는 것은 모두 즐기고 사는데,

셋의 후손들은 뭐했더라고 합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보세요.

‘셋의 후손들은 에노스을 낳고 나서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에노스’ 라는 아들의 이름이 뭡니까?

‘티끌’입니다.

 

이 땅의 티끌 같은 존재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나님 살려 주세요!’ 라고,

 

가인의 후손들은 너무도 힘이 막강해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해도 자기들끼리 알아서 하겠다고 합니다.

셋의 후손들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셋의 후손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아벨 대신 주신 거지요?

셋은 자기가 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낳아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낳아지게 해 주셨으니까

이제부터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관리를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낳아지게 한 셋의 후손들은 이 땅의 티끌 같은 존재입니다.

아무 것도 볼품이 없고 힘없는 존재입니다.

그럴 때 누구를 찾습니까?

아이가 아프고 힘들면 누구 찾습니까?

엄마 찾지요.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힘들고 곤고할 때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고 하나님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은 다른 것 없어요.

늘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사는 자들입니다.

이게 상한 심령이고 애통하는 마음 입니다.

 

 

산상보훈에 보면 복을 받았기 때문에 애통함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애통해서 복을 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복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 안에 애통함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복을 받았기 때문에 심령의 가난함이 일어나는 것이지 심령이 가난해지자고 해서 가난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복을 받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심령의 가난함과 애통함이나 화평은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 받은 사람은 자기도 모르고 긍휼이 나오고 화평이 나오고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덮쳐올 것 같으면 반드시 우리를 비우는 자리로 가게 됩니다.

섬기고 봉사하고 낮아지는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이름을 높이고 내 욕구를 채워주는 식으로 일을 하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우리를 비우는 삶으로 가게 합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사람은 잘 섬기고 잘 나누고 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보고 교회에서 잘 섬기세요.

열심히 봉사하세요.

이렇게 가르칠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게 가르치게 되면 인간은 특유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섬기게 됩니다.

그 섬김은 법으로 섬기는 것이 때문에 나중에 반드시 댓가를 받아내려 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뭘 해놓고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하다느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니 하고 불평들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법으로 섬겼다는 증거입니다.

자기가 한 것을 반드시 기록해 놓고 댓가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은혜로 한 사람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다가오면 날마다 우리를 무장해제 시킵니다.

모든 것이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베드로서는 하나님의 공급하는 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힘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억지로 하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알코올중독자를 나무랄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중독되어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중독된 사람입니다.

내가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양해하고 들으세요.

가상의 말이니까

예를 들어 교회에 출석을 뜸해지는 어느 집사님께 제가 전화를 해서 많이 나무랐습니다.

집 안이 편안하시냐고요.

하나님이 곧 찾아가실 거라고 했습니다.

 

그런 소리 들을 때 목사가 얼마나 밉겠습니까?

무슨 목사가 그런 저주를 하냐고 하시겠지만 이건 저주가 아니고 사랑입니다.

제가 정말 그런 기도를 하겠습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그냥 강권하는 것입니다.

 

 

복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망하더라도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것이 복이고

내가 흥하여서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 저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늘 가까이 보듬는 일을 하시는데 만약 우리에게 힘이 있다면 하나님을 안 찾는 겁니다.

그래서 자꾸만 하나님께서 힘을 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자기 백성들을 간섭해 가시는데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반대로 간섭해 가십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승승장구하는 방향으로 가고 싶은데 그렇게 놔두시지 않습니다.

마귀가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 와서 뭐라고 합니까?

니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렇게 힘이 없어서 되겠냐?

한 번 성전에서 뛰어 내려서 영웅이 되면 사람들이 모이지 않겠냐?

그게 하나님 아들다운 거 아니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그걸 하나님 시험한다고 합니다.

그럼 우리가 기도하는 게 무슨 기도를 하고 있는 겁니까?

복권 사놓고 주여 믿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우리는 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전부 그런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항상 달콤한 말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나를 긍정해주고 이 땅에서 승승장구하는 것이 복인 줄 알게 만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복과 이 세상의 복은 역설적으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은 이 땅에서 우리 눈에는 저주로 보이지만 아니에요!

 

이것만 기억하세요.

우리는 위에 있는 영원한 나라,

묵시 세계에 있다가 이 아래 역사 세계로 잠시 파견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빨리 졸업하고 돌아가야 되잖아요.

회사에 일하러 가면 제일 기다려지는 시간이 언제입니까?

퇴근시간이지요.

여기서 나는 회사 생활이 너무 재미있어서 퇴근 시간아 오지 마라 하는 사람 있어요?

없습니다.

출근하는 순간 퇴근하고 싶잖아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전 그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언제 오시렵니까?

언제 저를 데리고 가시렵니까?

여기에서 사는 것만큼 고생입니다.

여러분 드라마를 보면 그 주인공이 오래 살면 살수록 고생스럽습니다.

특히 사극 같은 것을 보면 끝까지 고생합니다.

 

그러면 한 번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 땅을 만드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흠이 없고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라고 했는데,

그러면 자기 백성들이 이 땅에서 주인공이겠지요?

그래서 이 땅에서 신자들의 삶이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고달픈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만 두지 않으시는 겁니다.

그 주인공을 괴롭히기 위해서 악당들도 투입시키고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우린 이런 삶을 통해서 여기가 싫어야 됩니다.

하나님 아파요…

그렇게 기도를 하세요.

너무 아픕니다.

좀 어루만져 주세요.

힘이 듭니다.

이렇게 기도하세요.

 

여러분 쫓겨나오고 버림당하고 밀쳐 나오는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어요?

저는 지금 미국의 그 분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를 하겠어요.

제가 그런 삶을 살아 왔기 때문에 너무 아픕니다.

우리 다 그래요.

밀려서 밀려서 볼 것 하나 없는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이렇게 모인 것은 너무 힘든 세월 속에서 남한테 무시당하고 욕먹고 쫓겨나오고 이단 소리 들으면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몰고 가세요.

그런 얘기를 들으면 남의 일 같지 않고 내 일 같아서 너무 아픈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게끔 해 준 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통해서 자꾸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셋의 후손인 에녹을 하나님께서 동행하셔서 결국 이 땅에서 빼낸 것입니다.

에녹이 부럽지요?

이 빼냄이 부러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빼내주시잖아요.

내가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제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저 번에 얼음골에 갈 때 보면 사과 많은 곳에 그물을 쳐놨지요?

까치가 와서 자꾸 따먹어서 그런 것을 쳐놓은 겁니다.

이 까치는 기가 막히게 맛있는 것을 압니다.

 

 

까치가 쪼아 먹는 것은 제일 맛 잇는 겁니다.

그래서 주인이 덮어 놨잖아요.

농부는 그 과일이 잘 익으면 빨리 따야 합니다.

 

놔두면 나중에 까치들이 와서 먹으니까 따 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하나님 언제 오실거에요 라고 묻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보시고 다 익었으면 따 내십니다.

이사야 57장 1-2절을 한 번 찾아봅시다.

 

1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지라도 그들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2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

 

의인이 죽는 것을 침상에서 쉬는 것이라고 합니다.

회사일 다 마치고 집에서 잠옷 입고 누워서 텔레비전 보면서 쉬는 것입니다.

이것 안 부러우세요?

저는 복음을 알고 나서 제일 먼저 정복된 것이 이 죽음의 신앙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복인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옛날에 율법 아래 있을 때에는 말로는 천국가면 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죽기 싫어했습니다.

죽음이 두려웠어요.

그러나 은혜를 받고 복음을 알고 나니 죽음이 이렇게 큰 복이구나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장례식 설교할 때 굉장히 기분이 좋습니다.

지난번에 김 집사님 누님 장례식을 하면서 설교를 하였는데 그 때 거기 있는 모든 분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 집사님들 가족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장례식 과정에서 그 말씀을 통해서 이 분들이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방어진 화장터에 가보면 좁아요.

분향소가 한 방에 있는데 거기에 네 팀이 같이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제일 먼저 가서 구석에 있었어요.

잠시 후에 우리 옆으로 분향소가 차려지는 겁니다.

 

저 쪽에 한 팀은 원불교,

또 한 팀은 유교 팀이 있었습니다.

그 유교 팀은 제가 아직도 기억하는 것이 ‘xx 아버지요…xx 아버지요…’하고 통곡을 합니다.

 

그러자 우리 집사님들이 ‘저 사람들 왜 저래요?’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 분들은 자기 동생이 죽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천국에 가 있구나를 아신 것입니다.

제가 그 때 지금 이 본문으로 설교를 했거든요.

거기 가 계신다고…

그랬을 때 전부 좋아하셨습니다.

나중에 하시는 말씀이 여태껏 이렇게 기쁘게 장례를 치러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성도에게는 위로입니다.

죽음은 절대 저주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세기 5장에서 셋의 후손들은 전부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하는 것입니다.

그 죽음이 다른 말로 빼내심을 입었더라, 빼내심을 입었더라, 빼내심을 입었더라,

그 뜻인 것입니다.

 

가인의 후손은 안 빼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만 빼내십니다.

그 빼내심이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세상에서 교회로 빼냄을 입은 것과 같은 것이고 이 세상에서 또 다시 하늘나라로 빼내심을 입는 것입니다.

 

 

이미 우린 빼내심을 입었어요.

이미 흑암의 아들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그 성령이 온 사람은 이미 그 안에 천국이 이뤄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천국이 이뤄진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얼마큼 많이 느끼고 깨닫느냐 맛보느냐 그 차이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 이런 것들을 보는 폭들이 좀 넓어지셔야 합니다.

넓고 깊어지고 좀 높아지고 그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기도하잖아요.

내가 온 족속을 위해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그 은혜의 풍성함을 더 알기 위해서라고.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그 풍성함을 많이 알기 원해서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하나님, 만유 가운데 하나님 은혜 아닌 것이 없는데 모든 것이 하나님 은혜인데 이 은혜를 볼 수 있는 눈들이 더 넓어지고 더 깊어지고 더 놓아질 수 있도록 주여 도와주세요,

눈을 열어 주세요 라고 하셔야 합니다.

 

그 세계가 보일 때 여러분의 삶 속에서 어렵고 힘든 속에서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신양생활입니다.

그게 에녹입니다.

 

 

에녹이 착하게 살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에녹을 동행했으니 그리 가는 것이지 에녹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지금 에녹처럼 우리를 간섭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간섭 당하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이 그냥 저절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그 애끓는 마음이 나를 간섭해서 여기까지 왔구나,

주여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이 여러분들 마음속에 일어나셔야 합니다.

 

불고기 양념할 때 양념 베듯이 그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삶 속에 양념처럼 푹 베어져서 옆에서 그냥 쿡 찌르면 하나님의 은혜가 튀어나오고

감사가 나오고

찬송이 나오고

그런 모습으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 푹 잠겨서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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