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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아가서 강해

♣ (아가서강해)4강. 사랑과 고난 (아가 1:7-8)

by coroa 2023. 1. 13.

 

 

4강. 사랑과 고난 (아가 1:7-8)
아 1:7-8절.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

창세기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4강. 사랑과 고난 (아가 1:7-8)

아 1:7-8절.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 8.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정낙원 목사

 

지난 시간에 사랑이란? 눈에 콩깍지가 씌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솔로몬 눈에 콩깍지가 씌워서 술람미의 모든 것이 다 예뻐 보인다고 했습니다.

남들은 게달의 장막이라고 비웃지만 솔로몬 눈에는 왕궁의 휘장 보다도 더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왜 솔로몬의 눈에는 게달의 장막과 같은 술람미가 솔로몬의 왕궁에 휘장처럼 보였을까요?

이는 술람미 속에 솔로몬의 것이 가득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식을 바라보는 것과도 같아요.

엄마가 자식을 바라보는 그 눈빛은 그렇게 행복하고 흐뭇할 수가 없어요.

 

어린아이들 발표회에 가보세요.

남의 아이는 눈에 안 들어와요.

오로지 자기 새끼만 눈에 들어와요.

아이들 눈에도 자기 엄마만 보여요.

엄마의 모습만 보이면 자기가 어떤 지와는 상관없이 든든해요.

 

사랑은 구원과 같아요.

구원은 하나님 쪽에서 오케이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걸 하나님의 의라고 합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좋아해야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는 것이지 술람미가 솔로몬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술람미가 솔로몬을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솔로몬이 싫어하면 소용이 없어요.

 

술람미는 주권이 없어요.

술람미는 솔로몬의 결정에 따를 뿐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면 술람미는 그 사랑에 따라 반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사랑을 예표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에 종속이 되어 있기 때문에 창조주의 결정에 무조건적으로 따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창조주 입장이고 술람미는 피조물 입장입니다.

우린 술람미이고 예수님은 솔로몬입니다.

그러므로 좋고 나쁨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지려고 애쓸 필요가 없어요.

사랑은 예수님이 날 좋아해야지 내가 좋아해서는 소용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눈에 콩깍지가 씌워야지 우리 눈에 콩깍지가 씌워보아야 소용없어요.

 

사랑을 구원이라고 봅시다.

어차피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야기는 신약에선 예수님과 성도의 구원이야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조건과 상관없어요.

 

하나님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결정이 되어요.

죄인이라도 하나님이 의인이라고 하면 의인이 되는 것이에요.

아무리 의인이라고 하여도 하나님이 죄인이라 하면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러지요.

하나님이 의롭다 하는데 누가 정죄하리요, 라고 하지요.

이 말을 잘 음미해 보세요.

인간들 눈에는 아무리 보아도 정죄 할 수밖에 없어요.

선악의 법으로 보면 다 틀려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죄하는 겁니다.

 

하지만 바울은 율법으로 정죄하는 자들에게 소리칩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잖아,

그런데 왜 니들이 난리를 치느냐,

너희들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하나님이 괜찮다고 하잖아,

하나님이 괜찮다고 하는데 너희가 왜 지랄을 떨고 있느냐,

이 싸가지 없는 것들아, 그러고 있어요.

 

얼마 전에 목사님들과 같이 점심 식사를 하는데 전화가 왔어요.

어떤 분이 주차를 하다가 제 차를 긁었다고 하는 겁니다.

교회 앞에 세워 놓았으니 이 분은 당연히 교회에 제가 있는 줄 알고 전화를 한 겁니다.

차에 경보장치가 있으니 시끄럽게 울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제가 그 소리를 듣고 나올 줄 알았는지 자진해서 전화를 한 겁니다.

보통 보면 다 그냥 가는데 전화를 해주어서 고맙더라고요.

 

그런데 그 때 제가 약 500m 밖에 식당에 있었어요.

전화를 받고 헐레벌떡 뛰어 왔어요.

와서 보니 왼 쪽 앞 범퍼가 허였게 흠집이 가 있는 겁니다.

이게 만약에 길 가다가 접촉사고가 나면 50만원은 견적이 나올 사고에요.

 

그런데 그땐 제가 무슨 아량으로 괜찮다고 했는지 모르겠어요.

왁스로 닥아 내면 되겠지 하고 그냥 가시라고 했어요.

전화를 준 것이 고마워서 에요.

그 분은 전화 한 통에 50만원 번 셈입니다.

 

그런데 보내어 놓고 닦으니 안 딱히는 겁니다.

심하게 긁혀서 안에 까지 흠이 생긴 겁니다.

그런데 어쩝니까.

제가 괜찮다고 보냈는데,

지금도 그대로 있어요.

차만 보면 거기가 흠투성이니 짜증이 나요.

하지만 어쩌지 못해요.

내가 괜찮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속이 상해도 내가 상해요.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괜찮다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의로운 겁니다.

죄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 입장에선 손해 보는 것 같고 속이 상하더라도 하나님이 괜찮다고 했으니 더 이상 우리더러 정죄하지 않아요.

아니 못해요.

하나님은 식언치 않는 분이에요.

식언치 않는다는 말은 괜찮다고 했다가 취소 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랬어요.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정죄치 않는다고 했어요.

그러니 예수를 믿는 성도는 자기 꼬라지로 인하여 희비하면 안 되어요.

자기 행실을 신앙과 결부시키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만 믿고 나의 조건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걸 믿음이라고 합니다.

 

지난 시간 술람미가 이 믿음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이 검둥이라고 놀려도 그래 난 검둥이 맞거든,

그런데 우리 애인이 날 최고로 예쁘다고 했어,

그래서 난 검둥이라는 것을 신경 안 써,

우리 애인이 날 예쁘다고 하면 됐지 뭐,

 

술람미가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솔로몬이 사랑한다는 말이 자기 안에 잘 박힌 못처럼 콱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신약에선 믿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다 예수를 믿지요.

그럼 이제 구원 문제는 신경 쓰지 마세요.

구원 문제는 신경 쓰지 말고 신랑하고 연애만 하면 됩니다.

신랑하고 사랑만 하면 되어요.

 

신앙생활이란? 주님과 사랑하는 거예요.

그런데도 우리는 주님과 사랑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몇 자락 지킨 것을 가지고 옳으니 그르니 도토리 키 재기를 하고 있어요.

엉뚱한 싸움을 하고 있어요.

 

아가서의 주제는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야기 입니다.

이걸 우리들 이야기로 풀어가야 해요.

그래야 술람미의 간절함이 나의 간절함이 되고,

술람미의 사모함이 나의 사모함이 되고,

술람미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는 겁니다.

 

솔로몬은 온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왕입니다.

만왕의 왕이에요.

그러나 술람미는 시골 포도원에서 일하는 노예와 같은 볼품없는 여자입니다.

당시 노예제도를 보면 노예는 물건과 같이 취급을 하였어요.

그러니 술람미는 인간취급도 받지 못하는 사람인겁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개같이 취급하던 세리와 창기들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왕의 왕이신 솔로몬이 사랑을 했어요.

솔로몬이 한 눈에 반했어요.

그래서 최고의 노래로 프러포즈를 한 것입니다.

 

솔로몬 왕궁에는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하는 절세미인(美人)들이 천명이나 후궁으로 있었어요.

이런 절세미인들을 다 제처 두고 왕이 무엇이 아쉬워서 노예에게 모든 사랑을 쏟고 있을까요?

이건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과 술람미를 가지고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구원하지 않고 죄인을 구원하십니다.

말씀대로 살았다고 시건방 떨던 바리새인들을 구원한 것이 아니고 말씀 지킴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간 세리와 창기들을 구원했어요.

이건 왕이 노예를 사랑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왕과 노예의 사랑은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이루어 질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것도 세계 최고의 왕이 가장 비천한 검둥이 노예를 사랑했어요.

세상엔 이런 사랑이 없어요.

그런데 그런 불가능한 사랑이야기를 성경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요?

세상 사랑이야기가 아니고 하늘나라 사랑이야기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 낮아져서 인간의 모습으로 와서 죄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모든 성경은 나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했어요.

그렇다면 아가서도 모든 성경 중에서의 한 부분이므로 아가서 역시도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물이나 사건은 모두가 예수님의 죄인 구원이야기입니다.

그럼 아가서에 나와 있는 솔로몬 왕과 시골의 노예인 술람미라는 여인과의 사랑이야기는 곧 예수님과 죄인의 구원이야기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 받은 성도는 모두가 술람미인 것입니다.

우리는 술람미처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평생 동안 죄와 사망 가운데서 살다가 죽어가야 할 죄인입니다.

그런데 술람미에게 솔로몬왕의 사랑이 쏟아진 것처럼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임한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가서를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이야기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방인을 개로 취급합니다.

우린 이방인입니다.

우리는 개 같은 자들인 것입니다.

이런 개 같은 자가 지금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고 있어요.

이건 놀라고, 놀라고, 또 놀라야 할 일입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사랑이 일어날 수가 있을까요?

그런데 일어났어요.

지금 우리에게 말이에요.

그런데도 우린 놀라지 않아요.

왜 그럴까요?

 

왜 우린 이 엄청난 불가사의한 사랑을 받고도 무덤덤할까요?

이건 우리가 구원 이야기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가치를 너무 모르고 있다고 밖에 할 말이 없어요.

아니면 구원을 받지 않았던가 둘 중에 하나에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를 믿고 있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이야기가 무덤덤한 겁니다.

구원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로 들려지는 겁니다.

 

저는 아가서를 강해하면서 주체 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립니다.

가슴 속에서부터 울컥 울컥하는 울음이 수시로 터져 나와요.

왠 은혜인지,

감동이 물결처럼 밀려오면 잠시 손을 놓고 멍하니 하늘을 쳐다봐요.

그리곤 아버지 고맙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말 이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요.

감사하다는 말 이외 그 어떤 말도 뱉을 수가 없어요.

 

부디 이 아가서가 우리의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기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쓰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첫 사랑을 회복하셔야 합니다.

에스겔 해골골짜기에 불었던 그 생기가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불어지길 바래요.

그래서 앉은뱅이 같던 신앙이 일어나 뛰며 걸으며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기도해요.

 

엠마오로 내려가던 신앙이 십자가 사건이 발생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를 바래요.

모든 심령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밝히 보여지기를 소원해요.

땅만 바라보고 살던 신자들이 하늘을 향하여 할렐루야를 외치는 삶으로 바꾸길 바래요.

하나님의 사랑이 강권하기를 기도해 봅니다.

 

세상에서 가장 흔한 이야기가 사랑이야기입니다.

 

사랑이야기를 많이 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사랑을 갈망한다는 반증이지요.

여기서도 사랑해 주세요,

저기서도 사랑해 주세요,

온통 다 사랑해 달라는 사람들뿐입니다.

 

인간들이 추구하는 사랑은 자기 안에 공허함을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아서 허전함을 채우고자 해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랑에 목말라하고 갈망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너도 나도 사랑을 갈망하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에서 끊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진짜 사랑이 없어요.

그러니 사랑이 그립고, 사랑이 고픈 겁니다.

술람미가 솔로몬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것만이 자신의 공허를 채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사랑을 경험했어요.

그 경험함이 사무치도록 그리워하는 상사병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맛을 모르면 찾지 않은 텐데,,

맛을 보았어요.

그래서 그 맛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왜 명작인가 하면 사랑이 미완료로 남았기 때문이에요.

만약에 두 사람이 결혼을 했다면 명작이 되지 않아요.

그럼 갈망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뭔가 미완료로 남은 것이 있어야 살아가는 의미를 느껴요.

소망하고 기다리는 것이 있어야 그걸 잡으려고 나아가는 겁니다.

 

산악인들을 보면 산을 정복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그 험한 길을 가는 겁니다.

하나를 정복하면 그 다음 것을 정복하고,

나중에 다 정복하고 나면 의욕을 잃어버린다고 합니다.

더 소망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가서를 쓰면서 솔로몬 왕이 술람미에게 사랑을 주고 떠나 간 것이 큰 축복임을 알았어요.

만약에 함께 있었다면 술람미가 솔로몬을 향한 사랑이 이처럼 사무치지 않았을 것이에요.

없어보아야 귀한 것을 알아요.

 

아파 보아야 건강의 소중함을 알고,

가난해 보아야 돈의 소중함도 알아요.

부부간에도 한 번씩 떠나 있어 보아야 서로 소중함을 알아요.

 

사랑도 떠나보내 보아야 그 사랑이 귀한 것인 줄 알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다 첫 사랑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첫 사랑이 그리운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첫 사랑이 왜 그리운가 하면 그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땐 사랑이 뭔 줄 모르고 사랑했어요.

그래서 그리운 겁니다.

 

지금 살고 있는 아내나 남편이 훨씬 나은데도 만족하지 못해요.

왜냐하면, 살다가 보면 신선감이 떨어지기 때문이에요.

소유하고 있으니 아쉬움도 없고 간절함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쓰다가 보면 싫증이 나요.

아무리 죽고 없이 못산다고 하던 사람과도 오래 살다가보면 무미건조해지고 싫증이 나요.

그래서 인간은 평생 동안 채울 것을 찾아 헤매는 겁니다.

 

저 사람이면 날 행복하게 해 줄까,

아니 저 사람이면 날 행복하게 해 줄거야,

신기루 같은 허상을 쫓아서 살아가는게 인간이에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린 솔로몬이 인간은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고 했어요.

이것이라고 잡았다 싶어도 지나고 나면 헛되고,

저것이라고 생각하고 잡았는데도 지나고 나면 헛되다고 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세상의 것은 다 변하기 때문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 뿐이에요.

 

이걸 아가서를 통해서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솔로몬은 왕이에요.

이스라엘에선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에요.

그러니 솔로몬은 하나님 입장에 서 있어요.

반대로 술람미는 노예에요.

이는 가장 밑바닥 인생이라는 겁니다.

땅에 기운으로 사는 저주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한 것은 하늘에 변하지 않는 사랑을 한 겁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조건을 보지 않고 사랑을 베푼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존귀한 왕이 천하디 천한 검둥이 노예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술람미라는 한 여인을 통해서 죄인을 사랑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술람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겁니다.

그러니 예루살렘 여자들의 조롱과 핍박 속에서도 기쁨으로 지켜낸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세상을 이기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모습으로 살았어요.

그게 하나님 사랑이에요.

 

그것도 사랑을 주고 떠나간 그리운 사랑이에요.

사랑을 주고 떠나갔기 때문에 간절한 겁니다.

사랑이 언제 가장 그리운지 아세요.

만나지 못하였을 때가 그리워요.

이루지 못한 것이 그리워요.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을 완료이면서 미래시제인 사랑을 주셨어요.

 

그게 첫 시간에 살펴보았던 두 번 입맞춤이에요.

이미 입을 맞추었어요.

완성되었어요.

부족함이 없어요.

 

그런데 사랑하는 님께서 떠나갔어요.

사랑을 맛본 사람은 이미 경험된 사랑을 또 다시 얻기 위해서 떠난 님을 그리워하고 사모하게 되는 겁니다.

경험이 또 다른 경험을 갈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과거 70년대 한창 중동지역 건설 붐이 일 때 사우디에서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저녁 하늘에 달만 보면 왜? 그리 집이 그립든지요.

괜히 눈물이 나요.

 

향수병이라고 있잖아요.

그러면 밥맛도 없고 만사가 귀찮아요.

그럴 때 벌떡 일어나게 하는게 뭔 줄 아세요.

아내의 편지에요.

 

그때 참 편지를 많아 썼어요.

제가 일 년을 있었는데 편지를 90통을 써서 보냈더라고요.

거의 사흘에 한 통씩 썼어요.

물론 아내도 그렇게 보냈어요.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구구절절 보고 싶다,

그립다 에요.

 

그 때 편지들을 몇 년 전까지만 보관했는데 그만 이사를 하면서 분실하고 말았어요.

귀국해서 그 편지를 보니 낯간지러워서 못 읽겠더라고요.

그래서 에이~ 이젠 어딜 가더라도 이런 편지는 안 쓸거야, 라고 다짐을 했어요.

 

그러다가 몇 년이 지난 후 다시 인도로 또 근무하게 되어 나갔어요.

다시는 편지 안 쓴다고 한 다짐도 공염불이에요.

보고 싶은데 어쩌겠어요.

그러니 또 유치한 말로 사랑한다, 보고싶다, 를 연발하는 겁니다.

그리움엔 장사가 없어요.

 

떨어지면 다 착한 남편 착한 아내가 되어요.

떨어져 보세요.

못 해준 것만 생각나요.

아, 그때 왜? 잘해주지 못했을까? 구구절절이 후회해요.

귀국하면 잘해줄거야,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하지요.

 

그런데 막상 귀국해 보세요.

며칠이나 가나,

며칠 안가서 언제 그랬느냐, 하고 예전 그대로로 복원이 되어 있어요.

이건 남편이나 아내나 마찬가지에요.

그러니 부부간에 사랑도 완전치 못하는 겁니다.

 

그리워지면 미쳐요.

그리움이 깊어지면 상사병이 되어요.

보고 싶어지면 안절부절못하고 일이 손에 안 잡혀요.

이 병에 걸리면 자나 깨나 오매불망 그 사람만 그리는 겁니다.

 

사진만 들고 혼잣말을 하잖아요.

자기야 뭐하고 있어,

어디에 있어,

내가 보고 싶지도 않아,

그리워 죽겠어,

빨리와,

 

혼자 사진 붙잡고 대화하는 겁니다.

아가서에선 이런 대화를 기도라고 해요.

 

오늘 본문은 술람미와 솔로몬의 대화에요.

 

7절은 술람미가 솔로몬에게 기도하는 거예요.

간청하는 겁니다.

그럼 술람미가 솔로몬에게 뭘 간청하는지 살펴봅시다.

 

아 1:7절.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

 

술람미는 나쁜 오빠들 때문에 포도원에서 노역을 하고 있었어요.

노역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솔로몬에게 기도하는 겁니다.

왜 기도하는가 하면 오빠들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님에게 묻는 겁니다.

님이시여,

당신의 양떼들이 있는 목장은 어디에 있나요?

날 거기로 데려가 주세요,

나도 거기서 쉬게 해 주세요,

그러는 겁니다.

 

자기를 오빠들의 포도원에 두지 말고 솔로몬의 양들이 있는 목장으로 인도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어디서 양을 치는지 알려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정(午正)에 양들을 쉬게 하는 곳을 말해 달라고 합니다.

 

자 보세요.

술람미가 지금 솔로몬으로부터 첫 번째 입맞춤을 당하였어요.

그리곤 솔로몬은 먼 길을 떠났어요.

솔로몬이 떠나자 주변에 있던 자들이 핍박을 합니다.

 

왜 핍박을 합니까?

검둥이 주제에 왕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시기가 나서 조롱하고 핍박하는 겁니다.

기집애 자기가 뭔데,

솔로몬의 사랑을 받느냐 에요.

우리같이 예쁜 사람도 사랑 받지 못하고 있는데,

 

술람미의 오빠들이나 예루살렘 여자들이나 똑같은 자들이에요.

그러니 남자다 여자다 의미를 두지 마세요.

중요한 것은 솔로몬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들이 핍박을 한다는 겁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구원받지 못한 놈들이 핍박하는 겁니다.

 

술람미의 오빠들을 이 시대 목사라고 하고 예루살렘 여자들을 교인으로 보세요.

여러분들이 십자가 이야기를 하면 목사이든 교인이든 화를 냅니다.

이는 여러분과 그들이 다르기 때문이에요.

다르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말하면 이단이니 삼단이니 핍박하는 겁니다.

 

그래서 술람미가 솔로몬의 양들이 있는 목장을 알려 달라고 하는 겁니다.

나도 그리로 데려가 달라는 거예요.

오정 불볕더위에 쉴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의역(意譯)하면 생명의 말씀과 안식이 있는 곳으로 인도해 주세요, 라는 말이에요.

조금 더 나아가면 십자가 복음이 증거되는 교회로 안내해 달라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목사나 성도들을 만나게 해 달라는 겁니다.

더 깊이 나아가면 님이 있는 십자가 안으로 인도해 달라는 겁니다.

 

솔로몬의 목장은 양떼들이 정오에 쉼을 얻고 있어요.

안식한다는 겁니다.

정오란?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고난과 안식입니다.

노예인 술람미에게는 고난의 시간이고 솔로몬의 양떼들에게는 안식의 시간이에요.

 

술람미는 이복 오빠들에게 시달리면서 오정에도 뜨거운 햇빛에서 일을 했어요.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하지만 솔로몬의 양떼들은 쉼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람미는 솔로몬의 양떼가 있는 그곳으로 자신을 대려다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양떼들은 은혜 안에 있는 성도들을 상징합니다.

이들은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다가 예수님(솔로몬)에 의하여 은혜 안으로 안식하는 곳으로 인도가 된 것입니다.

솔로몬의 양떼들은 고난을 지나서 온 것입니다.

 

고난을 이기고 쉼을 얻는다는 것은 십자가 안을 말해요.

술람미의 탄원을 신약식으로 말하면 율법이라는 남편을 벗어나 예수라는 남편 안에서 쉬고 싶다는 겁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정오에는 너무 뜨거워서 일을 못해요.

모두가 쉬어요.

제가 과거 사우디아라비아에 근무 할 때도 점심시간 12시부터 2시까지는 일을 못하고 내무반에서 취침했어요.

그때 나가서 일하면 더위를 먹어요.

 

그런데 술람미는 고약한 오빠들을 만나서 쉬는 시간도 없이 가장 뜨거운 정오에도 일을 하다가 그만 검둥이가 되고 만 겁니다.

지금도 율법 아래 있는 목사를 만나면 죽도록 고생하는 겁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개 고생하는 겁니다.

이걸 제가 과거 약 40여 년간 했어요.

 

그래서 저도 술람미처럼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주여, 십자가 도가 증거되는 곳으로 인도해 주세요.

주여, 진리를 알게 하소서, 라고 수없이 기도 했어요.

 

왜 기도했겠어요.

갈급하니 하는 겁니다.

제가 율법아래 있을 땐 모두가 신앙이 최고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 마음엔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 겁니다.

내가 쉼을 누리지 못해요.

죽도록 충성을 해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러니 기도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갈급함을 느끼는 사람은 곧 진리를 만날 수 있다고 믿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곁에 우물을 두고서 목이 마르게 만든 겁니다.

마치 하갈이 광야에서 목말라 죽겠다고 할 때 곁에 있는 샘물을 발견하게 하듯이 그래요.

진리에 대하여 갈급해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복음을 찾아 나서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지 않은 사람은 진리에 대한 갈급함이 없어요.

이런 사람에겐 아무리 좋은 복음을 갖다 주어도 차 버려요.

본인이 율법으로 만족하고 있다는데 서야 어찌하겠어요.

목이 말라 할 때까지 기다려야지요.

 

택한 백성이라고 한다면 언젠가는 진리에 대한 갈급함을 일으킬 것입니다.

전 약 40여년 걸려서 만났어요.

그러니 지금 여러분의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너무 닦달하지 마세요.

 

포도원 품꾼의 비유처럼 어떤 사람은 교회 오자 말자 만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10년 믿다가 만난 사람도 있고 ,

어떤 사람은 30년 믿다가 만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60년 믿다가 만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죽기 직전에 만난 사람도 있어요.

어떤 사람은 평생 가도 못 만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니 누가 예수 안 믿는다고 해서 쯧~쯧 하지 마세요.

기다려 주세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언약이 믿어지게 해 준신 것을 감사하세요.

구원은 자기 자랑하라고 시켜준 것이 아니고 감사하라고 시켜주었어요.

 

제가 가장 싫어하는게 복음을 자기 실력인 냥 자랑하는 자들이에요.

이런 자들의 특징이 시건방져요.

남을 정죄하고 다녀요.

자기는 처음부터 알았다고 생각하는지 남을 깔보고 우습게 여겨요.

도무지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이 믿어졌다는 것에 감사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이런 사람들은 예수를 만난 사람이 아니고 구경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의 마음이 생겨요.

완전하다는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요.

이런 죄인이 아무 댓가 없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아요.

이 용서 받음이 타인에겐 관대함으로 나타나요.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자기 자랑이 없어요.

믿는다는 것조차 자랑하지 않아요.

복음을 안다는 것조차도 자랑치 못해요.

 

그러나 예수님을 구경하면 신앙이 지식이 되어요.

예수님을 자기 안에 모시고 살지 않고 구경만 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이 묻어져 나오지 않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 안에 없으니 강포와 시기와 미움과 독한 말들이 서슴없이 나오는 겁니다.

 

참 중요한 말을 하나 할게요.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알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감사하는 겁니다.

남에 신앙을 간섭할 이유가 없어요.

하나님께 받은 사랑으로 사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감사로 나타나지 않고 남을 가르치려고 해요.

남에게 자랑하려고 해요.

난 아는데, 넌 모르지, 하면서 꼴깞을 떨어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가난한 겁니다.

아는 것은 많은데 속이 허해요.

빈 쭉정이에요.

 

그러니 교회나 사람에게 거치는 자가 되는 겁니다.

남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겁니다.

이게 다 복음이 지식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런 사람들은 몇 번 말을 들어보거나 글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글을 써도 선생이 되어서 가르치려고 써요.

난 이렇게 많이 알어,

그러니 나에게 한수 배워 그런 식이라고요.

자기 지식 자랑 하느라고 글에 교만이 느껴져요.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고 있어요.

 

바리새인들이 그랬어요.

이 시대 복음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 다 되었어요.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보고 난 저들과 다르다고 멸시하고 있어요.

자기만 복음을 아는 냥 거드름을 피워요.

 

이건 복음을 은혜로 아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에요.

자기가 깨달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말과 행동을 하는 겁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가 소유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관해요.

 

저도 복음을 안 것은 하나님이 알게 해 주신 거예요.

지금이라도 거두어 가면 나도 저들과 다를 바 없어요.

나도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저들 중에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임하여 복음을 알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아니라고 하는 저들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우리처럼 알게 되어요.

이걸 안다면 지금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어야 해요.

그래야 복음을 은혜로 받은 사람이에요.

그렇지 않고 선생자리에 앉아서 이래라 저래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틀린 겁니다.

 

복음으로 사는 것하고 복음을 아는 것은 달라요.

아는 것은 판단으로 나타나지만 사는 것은 사랑으로 감사로 나타나요.

그래서 자랑하지 말고 감사하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복음을 가지고 남을 죽이지 않아요.

죽일 수가 없어요.

자기 실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을 난도질하는 겁니다.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용납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나도 그들 종에 있었던 자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바울이 유대인들을 대적하지 않은 것은 그도 과거엔 그들 속에 있다가 주님의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다리는 겁니다.

혹시 저들도 나처럼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 중에서 긍휼이 임하지 않겠느냐, 라는 심정으로 기다린 겁니다.

스데반도 죽어가면서 저들이 몰라서 그러니 용서해 달라고 하잖아요.

우린 누굴 정죄할 자격이 없어요.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살 뿐이에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왕 노릇하여야지 정죄가 왕 노릇 하면 안 되어요.

저도 과거에 처음 복음을 깨닫고 혼자 잘난 척하면서 엄청 나댔거든요.

 

그런데 지나고 보면 그렇게 할 일이 아니었다, 라는 것이 깨달아지더라고요.

철없이 나대던 것이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복음은 이런 것이다, 라고 알려는 주되 정죄하진 마세요.

싸우지도 말고 다르면 그냥 아, 그러냐고, 하세요.

 

십자가 도가 설득하고 싸워서 믿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야 밤새도록 해야지요.

그러나 예수는 설득한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도 처음엔 친척들에게 복음을 증거할거라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을 했어요.

상대방은 전혀 답답해하지 않는데 저만 답답해하는 겁니다.

 

상대방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하는데 저만 문제가 되어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 설치는 겁니다.

그러다가 괜히 미워지고 그래요.

 

처음 복음을 깨닫고는 명절날 가족들과 만나면 혼자 복음 아는 척을 했어요.

그러다가 괜히 명절날 분위기 다 깨버리고 그랬어요.

그럼 서먹서먹하게 있다가 오곤 했어요.

나중에 이건 옳은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이젠 말을 안 합니다.

고스톱이나 치고 놀아요.

노래방을 가자고 그러면 싫은 척하고 뒤 따라가고선 놀면 제가 독무대로 놀아요.

 

암튼 신앙생활은 자기가 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사는 것이지 남의 제사상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기가 받은 것에 감사하기 보단 남의 집에 돌아다니면서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는 일로 소일하고 있어요.

 

이건 신앙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신앙이 가난 한 겁니다.

여유로움이 없고 조급한 겁니다.

누가 조금만 뭐라고 하면 파르르 해서 따따부따 하잖아요.

 

그게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에 대한 풍성함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빈 깡통처럼 소리만 요란한 겁니다.

겉은 번지르르 한데 막상 먹으려고 한 입 물면 땡감인 겁니다.

에이~ 퉤~ 빛 좋은 개살구잖아,

에이~ 재수 없어,

그런단 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겉을 치장하는 것이 아니고 속을 단장하는 겁니다.

우리 안에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겁니다.

은혜를 알면 여유가 생겨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더 참아주고,

더 용서하고,

더 이해하고,

더 안아주고 보듬어주는 겁니다.

 

사랑을 받고 사는 여자는 너그러움이 있고 여유가 있어요.

그러나 사랑을 받지 못한 여자는 까탈스럽고 깽깽 거려요.

겉으론 아닌 척해도 겉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사랑을 하면 행복해져요.

이 험한 세상도 예수라는 신랑의 사랑만 받으면 다 이겨 낼 수가 있어요.

층층시하 시집살이도 신랑의 품속에서 하룻밤 자고나면 봄 눈 녹듯이 다 사라져요.

이게 사랑의 힘이에요.

술람미가 그 모진 아픔을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솔로몬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보세요.

그러면 너그러워져요.

너그러워 져라, 너그러워 져라, 훈련한다고 해서 되는게 아니고 사랑을 받으면 너그러워져요.

사랑은 훈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주님으로부터 받으면 나와요.

 

신혼 시절을 떠올려 보세요.

그땐 신랑만 있으면 행복했어요.

그때 최고의 가치는 신랑의 사랑이었어요.

서로 바라만 보아도 밥을 안 먹어도 배고픈 줄 몰라요.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 자체가 좋아요.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냄새도 좋고,

웃는 모습도 예쁘고,

걷는 모습도 멋있고,

다 좋아 보여요.

웃으면 웃어서 좋고,

찡그리면 찡그려서 좋고,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아요.

이게 사랑이에요.

 

사랑이 모든 것을 별것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사랑은 사람을 흐물흐물하게 해요.

다 이해가 되고 용인이 되어요.

그러다가 살면서 이 사랑이 퇴색되어 돈으로 옮겨가면 그 땐 마음이 삭막해져요.

그러니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늘고 우울해지는 겁니다.

 

이런 모습이 지금 우리 모습이에요.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땐 그렇게 설레이고 기뻤잖아요.

그런데 이젠 싸늘한 시체에요.

몸뚱이만 좀비처럼 움직이고 있어요.

교회에 가도 몸뚱이만 가 있고 마음은 온갖 근심걱정을 다 짊어지고 있으니 천근만근이에요.

그러니 무슨 말씀이 귀에 들어오고 기쁨이 있겠어요.

 

이게 모두가 첫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영적 실어증 걸린 사람들이 되고 말았어요.

그러니 아멘, 소리가 낯설고 할렐루야, 소리가 생경하게 들리는 겁니다.

 

성경지식으로는 둘째가라고 하면 서러운데 마음을 전부 불 꺼진 냉방이에요.

찬바람이 불어요.

그러니 자신도 춥고 남도 추운 겁니다.

성경엔 이런 예수, 이런 믿음은 없어요.

 

술람미는 그러지 않았어요.

술람미는 자기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욕하지 않았어요.

자신은 그들이 갖지 못한 솔로몬의 사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관용이 나오는 겁니다.

솔로몬의 사랑을 먹고 살기 때문에 그 모진 고난 속에서도 소망가운데 살았어요.

비록 몸은 고난에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신랑에 대한 그리움이 있기 때문에 기쁨으로 살았어요.

 

아가서를 통하여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여야 해요.

앞서서 하나님의 사랑을 메아리처럼 주어진다고 했지요.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면 우리는 거기에 반응을 한다고 하였잖아요.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당연히 반응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반응을 하면 야, 너 어쩜 그렇게 믿음이 좋으냐, 라고 해요.

아니 하나님이 주셔 놓고 우리 더러 믿음이 좋다고 한다구요.

 

이건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공부를 잘하도록 모든 것을 다 해주고 공부를 잘하면 칭찬해 주는 것과 같아요.

나 참 대단하다,

너 같은 아이는 없을거야,

역시 내 새끼가 최고야,

그러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우리가 누리고사는 것이 어디서 주어진 것인지 아는지 묻고 계신 겁니다.

너 누구 때문에 사는지 아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감사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내가 누리는 그것의 출처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라는 겁니다.

 

중요하니 잘 들으세요.

하나님께서 먼저 성도에게 은혜를 주세요.

그럼 성도는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야 해요.

 

지난 시간 입맞춤에 대하여 살펴 볼 때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려냈다고 했지요.

이 사건이 바로 성도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아는가 모르는가 시험하는 내용이에요.

수넴 여인은 원래 아들이 없었어요.

없었던 아이를 엘리사가 수넴 여자에게 주었어요.

여기서 엘리사는 주의 사자이므로 곧 하나님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아들을 낳고선 이 아들이 누구에게서 온 것인가를 잊고 살았어요.

그만 그 아이에게 취하고 말았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 아이의 출처를 알려주려고 죽인 겁니다.

 

아이가 죽고 나자 수넴 여인은 비로서 아이의 출처가 엘리사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아이를 엘리사 침상에 눕히고 엘리사를 찾아간 겁니다.

이에 엘리사가 와서 죽은 아이를 살려냅니다.

이는 아이를 보되 이 아이는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이런 일은 아이를 가지고 은혜의 출처를 알게 하려함입니다.

감사는 주께로 온 것이란 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나의 나 된 것이 모든 것이 주의 은혜이기 때문에 감사가 되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시간 시간마다 신앙은 종교적인 일 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알아가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일은 은혜를 깨달은 것으로 나타나는 산물이어야 해요.

 

하나님이 성도에게 고난을 주는 것은 그 고난으로 하나님을 찾으라는 겁니다.

솔로몬은 왕에요.

술람미는 그 왕으로부터 사랑을 한 몸에 받았어요.

그런 그를 왜 왕궁으로 데려가지 않고 고난 속에 두었을까요?

그리고 왜 함께 있지 않고 떠나갔을까요?

 

이는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를 말해주고자 함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맏은 성도는 어떤 반응이 나타나는지 말해주고자 함이에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는 반드시 그 사랑을 찾게 되어 있어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거예요.

그러니 자연히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이건 마치 만물이 주께로 나와서 주께로 돌아가는 이치와 같아요.

그러니 술람미는 자기가 받은 사랑의 출처인 솔로몬을 찾게 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술람미가 받은 사랑이 자기 주인을 찾아 가도록 이끄는 겁니다.

그것이 고난 속에서 기도로 나타나는 겁니다.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못 잊어서 기도하는 겁니다.

마치 수넴 여인이 아들을 잃자 그 아들을 준 엘리사를 찾는 것과 같아요.

 

술람미는 솔로몬의 사랑이 머무는 곳을 알려 달라는 겁니다.

 

솔로몬의 사랑이 머무는 곳은 술람미와 같이 잃어버리진 자들을 찾아서 보관해둔 솔로몬의 앙 떼들이 있는 목장이에요.

그래서 술람미는 그 목장을 알려 달라고 하는 겁니다.

나도 거기에 머물고 싶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목자가 되셔서 양들을 찾아냅니다.

우리에 있던 양들을 자기 우리로 불러내잖아요.

율법이라는 우리에서 은혜라는 우리로 불러들인 겁니다.

그러면서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도 찾아내서 함께 둔다고 하잖아요.

이방인인 우리가 다른 양인 겁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했어요.

그러면 목자이신 예수님은 자기 음성을 아는 양들을 다른 우리에 보관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의 양떼들이 있는 목장이에요.

다른 말로 천국이에요.

 

이 땅에서는 교회로 나타나 있어요.

이 시대 교회가 타락해서 그렇지 교회는 원래 그리스도의 몸이에요.

성도 한 사람도 교회이지만 여럿이 모여도 교회인 겁니다.

이 교회는 모두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온 양들이 모인 곳이에요.

 

지금식으로 말하면 술람미는 이런 교회를 알려 달라는 거예요.

이런 모임이 있는 곳을 알려 달라고 하는 겁니다.

이건 어느 특정한 장소 개념이 아니에요.

 

그러자 솔로몬이 술람미의 기도를 듣고 최상의 찬사를 보냅니다.

여인 중에서 최고로 어여쁜 여인이여, 라고 합니다.

세상에 어떻게 저토록 예쁘단 말인가,

정녕 그대가 내 여인이란 말인가,

내 사랑이란 말인가,

너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너무도 황홀하구나,

당신은 나의 애굽에 준마 같고,

당신은 내 품속에 몰약 향낭 같고,

당신은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 같다고 찬사를 보냅니다.

 

그러면서 솔로몬이 양떼들이 있는 곳을 알려 줍니다.

 

아 1:8절.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가면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양떼가 다니는 길을 따라가면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양들은 자기가 다니는 길이 있어요.

양은 목자의 뒤를 따라다녀요.

 

여기서 솔로몬의 목자를 살펴봅시다.

목자란? 솔로몬을 대신하여서 양을 치는 자들입니다.

솔로몬이 예수님을 상징하니 목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겠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셨으니 제자들도 십자가의 길로 갔어요.

그럼 제자들의 가르침을 받은 성도들도 제자들과 같이 십자가의 길로 가겠지요.

 

십자가의 길이란? 십자가 도로 살아가는 겁니다.

주 안에서 사는 겁니다.

주 안에서 산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내가 없어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어요.

 

중요하니 귀담아 들으세요.

술람미가 고난 속에서 기도하지요.

안식이 있는 곳으로 날 데려다 달라고 했잖아요.

그러자 솔로몬이 솔로몬의 양떼들이 다니는 발자취를 따라 가라고 하잖아요.

 

이걸 예수님과 제자들로 비유했지요.

예수님과 제자들은 모두가 죽임 당했어요.

이걸 십자가의 길이라고 해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했잖아요.

이는 예수를 증거하다가 죽으라는 말입니다.

지금은 종교의 자유가 있어서 괜찮지만,

그 당시에는 예수를 믿으면 죽였어요.

 

지금은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교단에서 제명해요.

이단이라고 쫓아내요.

이건 죽이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십자가 안에 있으면 이단이라고 하고 제명을 당하여도 두렵지 않아요.

왜냐하면, 십자가 안이 안식의 세계이기 때문이에요.

 

자 보세요.

예수 안은 안식의 세계에요.

십자가 너머가 안식의 세계에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저주로 보였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 너머의 영생의 세계로 나아갔어요.

마치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은 죽어가는 스데반을 참 안 되었다고 했어요.

 

불쌍해서 어쩌나,

얼마나 아프나,

참 가련하다고 생각을 해요.

 

이런 일이 구약의 다니엘의 세 친구 사건에서도 볼 수가 있어요.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금신상에 절을 하지 않는다고 풀무불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건 마치 스데반이 예수님의 십자가 도를 증거하다가 돌에 맞아 죽는 것이나 같아요.

물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것과도 동일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를 풀무불 속에 집어넣는 사람 입장에선 얼마나 불쌍하겠습니까?

타 죽잖아요.

그냥 금신상에 절을 한번 하고 말지,

괜히 신앙 지킨다고 하다가 불에 타 죽게 생겼으니 안타깝지요.

 

그런데 그 불 속에 누가 기다리고 계신가 하면 예수님이 기다리고 계신 겁니다.

마치 스데반이 죽을 때 예수님이 기다리고 계신 것과 같아요.

그러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너무 황홀한 겁니다.

불 속이 천국인 겁니다.

 

세 친구를 불에다 집어넣는 사람 입장에선 불 속은 지옥인데,

불 속에 있는 세 친구 입장에서 불 바깥에 있는 사람이 지옥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불 바깥에선 아이구~ 이 친구들아, 불쌍해서 어쩌나 그러는데,

불 안에 들어간 세 친구는 불 바깥에 있는 사람들 보고 아이구, 이 친구들아 우리만 천국에 와서 미안하다 그러는 겁니다.

 

스데반이 죽으면서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은 용서 할 수가 있었던 것은 자기는 지금 천국에 가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들이 불쌍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저희들이 뭘 몰라서 그러니 용서 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이걸 예수님도 십자가에 죽어가면서 그러셨어요.

그러니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나 스데반이나 예수님은 동일한 사건인 겁니다.

고난을 통하여서 천국으로 간 겁니다.

 

지금 술람미가 그러고 있어요.

오빠들의 핍박과 예루살렘 여자들의 조롱으로 솔로몬에게 기도를 했잖아요.

그러니 솔로몬이 자기 양들이 안식하는 목장을 알려주고 그리로 가라고 하잖아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만약에 술람미가 핍박을 당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았으면 솔로몬 왕을 찾지 않았을 겁니다.

내가 몸이 편한데 뭘 찾겠어요.

그냥 편안하게 살면 되지,

 

사는게 너무도 힘들고 고통스러우니 솔로몬의 품이 그리운 겁니다.

외부에 핍박이 올 때마다 솔로몬에 대한 사랑은 간절해지는 겁니다.

 

여보, 날 좀 데리고 가,

당신이 있는 곳에 날 좀 데려가 달란 말이야,

여보, 언제와,

여보, 빨리와,

여보, 보고 싶어,

당신 품이 그리워, 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찾게 만들어요..

천국을 사모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성경은 고난을 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건 육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제일 무서운게 고난 없는 신앙입니다.

고난은 감추어진 축복이에요.

이 안목을 가지셔야 해요.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하나 같이 고난 속으로 떠밀려가는 겁니다.

 

그게 히브리서 11장 사람들이에요.

12제자들이고,

초대교회 성도들이고,

지금 십자가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에요.

 

초대교회 성도들이 수백 년 동안 지하 무덤인 카타콤에서 룰루랄라 하고 살지 않았어요.

나오느니 한숨이고 아픔이었어요.

그러나 그 아픔을 통하여서 천국을 더욱 더 사모하게 만든 겁니다.

 

환경이 편할수록 예수님과 멀어지고 나쁠수록 가까워져요.

저도 복음 전하면서 늘 깨닫는 겁니다만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겐 고난을 주지 좋은 환경을 주지 않아요.

 

목사에게 좋은 환경이란 교회 부흥이에요.

교회가 부흥되어 보세요.

이렇게 밥숟가락 빼면 책상머리에 앉아서 이런 아가서를 쓰지 않아요.

또한 이러한 감동도 일어나지 않구요.

 

짐승은 배부르면 사냥하지 않아요.

인간의 육신은 편한 것을 맛들이면 감당을 못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달콤한 것을 안주고 쓰디쓴 아픔을 주는 겁니다.

술람미 식으로 말하면 외로움과 그리움과 사모함과 간절함을 주는 겁니다.

 

술람미는 지금 자신의 아픔을 토설하는 겁니다.

 

너무 아파요,

너무 힘이 들어요,

당신이 보고 싶어요,

빨리 좀 데려가 주세요,

애원하는 겁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저만 아름답게 보이는가요.

상상을 해 보세요.

 

설교를 들을 때 그 현장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고 보세요.

내가 술람미라고 보세요.

그러면 감동이 되지요.

저는 지금 제가 술람미가 되어서 설교하고 있는 겁니다.

 

저도 외로워요.

힘들어요.

목회 그만 하고 싶어요.

육적으로는 우겨쌈을 당하고 있어요.

안팎으로 고통이에요.

그래서 전 하나님께 늘 기도하는게 언제 제대 시켜 줄 겁니까?

빨리 좀 데려가면 안 됩니까?

그런다구요.

그런데 하나님은 꿈쩍하지 않고 못들은 척 해요.

 

못들은 척 하고 글만 쓰게 한다구요.

성령의 감동이라도 안 되면 핑계김에 안 쓰지만 자꾸만 안에서 밀어내거든요.

잠을 못 자게 해요.

온통 머릿속에 아가서가 달음질해요.

 

아가서의 그 현장이 눈에 선하게 보이니 안 쓸 수가 없잖아요.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 나의 것으로 보여요.

난 지금 술람미처럼 주님과 사랑하고 있어요.

 

그러니 제가 아프다고 하면 하나님은 말씀을 깨닫게 하세요.

이상하게 힘들고 어려우면 말씀 속으로 밀어 넣어요.

그리고는 종처럼 부려 먹는다구요.

누가?

하나님이 그래요.

 

하나님 참 나빠요,

하지만 행복해요.

아가서를 통해서 날 위로해 주시니까 행복하지요.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니 토해 내는 겁니다.

아멘으로 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노멘으로 받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받은 은혜가 이러하니 이렇게 쓰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환경이 힘들고 어렵다고 낙망치 마세요.

그 어려움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 필요하니 주시는 겁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창세전에 맺었던 그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겁니다.

 

우린 창세전에 언약을 위해서 배우로 캐스팅이 되었어요.

각자 맡은 배역이 있어요.

드라마를 보세요.

지나가는 행인 하나도 감독이 다 캐스팅해요.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이야기에 캐스팅 되었다는 게 놀랍지 않습니까.

 

저는 복음 전하는 목사로 캐스팅 되었다는 것에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거짓 선지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 종으로 픽업 되었다는 것이 놀라워요.

여러분들도 그래요.

예루살렘 여자가 아니라 술람미로 캐스팅 되었다는 것에 놀라워해야 해요.

행인 1 도 아니고 단역 카메오도 아니고 솔로몬의 사랑을 입은 여주인공인 술람미로 되었어요.

그러니 조금 힘들다고 낙심하지 마세요.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은 고난이 엄청 많아요.

그런데 끝까지 살아남아요.

예수님은 남자 주인공이고 우리는 여자 주인공입니다.

엑스트라는 중간에 등장했다 사라지지만 남자 주인공과 함께 하는 여자 주인공도 끝까지 살아남는 것입니다.

동일한 영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뻐하세요.

 

사도바울이 그러잖아요.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간 후에 의에 면류관을 받는다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영광이기 때문에 고난도 감사하였던 겁니다.

 

바울의 고백을 한번 들어보고 마칩시다.

 

히 12:1-2절.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보고 있다고 하지요.

거기엔 예수님도 계시지요.

솔로몬이 술람미가 탄원하니 자기 양떼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라고 하잖아요.

그들이 바로 지금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인 겁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이 증인들에요.

이 사람들은 모두가 술람미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고난가운데 살다가 천국에 간 사람들이에요.

천국이 솔로몬의 양떼들이 있는 곳이에요.

 

천국 가는 길은 외통수에요.

좁은 길이에요.

좁고 협착해요.

아무도 그리로 들어가고자 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랑을 부어주고 들어가게 만든 겁니다.

 

롬 5:3-5절.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보세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니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고 인내하고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술람미에게 주어진 솔로몬의 사랑은 고난과 함께 주어진 겁니다.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고난도 넉넉히 이기는 겁니다.

사랑이 고난을 이기게 하는 능력인 겁니다.

 

우리는 모두가 술람미와 같은 사랑을 받았어요.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살고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안으로 밀어 넣은 겁니다.

그리곤 십자가 안에서 이미 승리한 자로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겁니다.

 

우린 2002년 월드컵 4강 때 이긴 경기를 비디오로 보는 것과 같아요.

처음에 몇 골을 먹어도 낙심할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나중엔 우리가 1골 차이로 이긴 경기였거든요.

 

우린 이미 창세전에 이긴 게임을 비디오로 보고 있는 거예요.

술람미가 예루살렘 여자로부터 그 어떤 방해를 받아도 결국엔 솔로몬 품에서 살아요.

아가서는 이미 완성 되었어요.

이미 결론이 났어요.

그러니 지금 어떠함에 흔들릴 이유가 없는 겁니다.

 

우린 구원 받을 수밖에 없고,

우린 천국에서 예수님의 신부로 혼인잔치를 하게 되어 있어요.

이 사실은 취소되지 않아요.

술람미를 통해서 미리 보여주고 있잖아요.

 

아가서는 우리에게 약속으로 준 겁니다.

야, 정낙원이 너 아가서 받아라, 하면서 던져 준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 이게 뭔데요, 물으니,

응, 거기 니 이야기가 들어있어, 그러는 겁니다.

 

아가서에서 내가 누군데요,

어~ 술람미,

예,~에~

 

왜, 뭐 기분 나쁘냐,

그럼 예루살렘 여자로 바꿔줄까,

아~ 아니요,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합니까,

그냥 술람미 할게요.

 

너 그거 엄청 고생한다,

그래도 날 원망하지 말아라,

언제든지 싫으면 말해라 예루살렘 여자로 바뀌 줄게~

 

아니요,

그냥 술람미 할랍니다,

그럼 고생 좀 해라,

그럼 나 간다,

나중에 천국에서 보자,

 

그리고 예수님은 손을 흔들고 마치 솔로몬이 술람미를 두고 떠나듯이 떠났어요,

하지만 항상 우리 곁에서 감독이 배우들을 지켜보고 있듯이 지켜 보고 계세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면서 말이에요.

 

이런 말 들으면 감동 되지 않습니까?

전 가슴이 벌렁 벌렁 하는데,

느끼는 사람은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린 이미 창세전에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기로 작정이 되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피 뿌린 사건 속으로 밀려드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 속으로 강권해서 밀어 넣어요.

 

우린 그렇게 되게 되어 있어요.

그게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한 목적이거든요.

그러니 어떤 일이 닥친다 할지라도,

어떤 환경에 처한다고 할지라도 모두가 창세전에 하신 언약 때문에 예정된 수순이라고 생각하시고 감사하고 사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곧 오십니다.

오시는 소리가 안 들립니까?

처처에 기근과 지진과 온역이 일어나고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고 나라와 나라가 싸우면 적그리스도들이 많이 일어나면 곧 온다고 했잖아요.

아이티에 지진이 난 것도 예수님이 곧 온다는 싸인이에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가 예수님과의 언약을 위해서 일어나는 것이에요.

그러니 세상을 창세전 언약 차원에서 볼 수 있어야 해요.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세상이 살기 힘든 것도 다 창세전 언약 때문이에요.

만물이 주님 오실 때가 되었다고 싸인을 보내잖아요.

제발 예수님이 보낸 싸인을 좀 보세요.

 

누가복음 21장 25절을 보면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바다와 파도가 우는 소리로 사람들이 곤고할 것이라고 했어요.

과거에 전 이 말씀이 에이~ 바다가 어떻게 울고 파도가 어떻게 울어 그랬어요.

그런데 쓰나미를 통해서 사실로 말해 줄 줄이야 몰랐어요.

전에는 상징이라고만 치부 했는데 지금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곤 28절에 보면 이런 일이 일어나거든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다고 했어요.

머리를 들라는 말은 정신 차리라는 말입니다.

만물이 정신 차리라고 하잖아요.

만물이 말하는 소리가 안 들리세요.

 

귀는 세상 말 들으라고 주지 않고 하나님 말씀 들으라고 주셨어요.

제발 만물이 우는 소리를 들으세요.

만물이 우는 소리를 듣는 제가 잘못되었는가요?

 

그렇다고 종말론 신자들 같이 산 속으로 들어가라는 말이 아니에요.

이런 일이 사실로 일어난다면 술람미가 솔로몬 왕의 품에 안기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품에 안겨요.

예수님이 곧 데리러 오세요.

 

이 약속을 굳게 믿고 사세요.

이 약속이 믿어지는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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