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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아가서 강해

♣(아가서 강해) 3강. 사랑의 콩깍지 (아가 1:5-6)

by coroa 2022. 9. 16.

3강. 사랑의 콩깍지 (아가 1:5-6) 아 1:5-7절.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3강. 사랑의 콩깍지 (아가 1:5-6)

아 1:5-7절.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6.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정낙원 목사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의 감동이 종을 감싸서 술람미가 되게 하시고 솔로몬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 아가서 강해가 이 시대 주님과 성도 간에 사랑으로 강설(講說) 되어 지게 하옵소서, 종에게 술람미에게 주셨던 심정을 주사 주님에 대한 그 간절함을 주시고, 그 사모함을 주시고, 그 기쁨을 주시고, 그 울음을 주옵소서, 종에게 술람미를 사랑했던 솔로몬의 마음을 주시사 주의 성도들에게 주님의 사랑으로 위무토록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글을 읽는 주의 성도들의 마음속에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시고, 죽었던 심령들이 살아나게 하시고, 처음 사랑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의 피 뿌림에 은혜가 저들을 보호하사 악한 자의 손에서 건져주시옵소서. 글로 읽지 말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들려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늘 아가서를 세 번째 상고하는 시간인데 참으로 맛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맛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지요.

아가서를 쓰면서 황홀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솔로몬과 술람미의 격정적인 사랑을 통하여서 나의 무디었던 주님에 대한 사랑의 감성들이 깨어나는 것 같아서 참 좋아요.

 

하나님의 사랑을 새로운 안목으로 이해 할 수가 있어서도 좋아요.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눈으로 보여지고,

맛으로 느껴지고,

귀로도 듣고,

손으로 만진 바가 되어요.

 

사도 바울이 그랬지요.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넒이와 그 길이의 풍성함을 알아가라고,

지금 제가 그런 것 같아요.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하고 있답니다.

제가 경험하고 느끼는 이런 사랑을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과 공유하고 싶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내가 만난 그 주님을 리얼하게 표현할까 생각하게 되어요.

 

저녁을 먹고 교회로 아가서를 생각하면서 걸어오는데 갑자기 성령의 위로가 덮쳐오는 겁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겁니다.

오면서 한참을 울었어요.

누가 보았으면 실성한 사람 아닌가 했을 겁니다.

혼자 중얼 거리면서 울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잖아요.

혹여라도 신비주의라고 오해 할 수기 있어서 말하기가 참 어려운데,

암튼 오면서 위에 내용과 같이 기도했거든요.

 

어떤 분이 아가서를 보고 댓글을 달아주셨는데 그 내용이 내 마음을 감동케 했어요.

우리는 우리의 구원만 생각했지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서 낮아진 것에 대하여는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다고 하면서 아가서를 통해서 그 마음을 깨닫게 해 준 것이 너무 감사하다는 겁니다.

또 어떤 분은 지금까지 복음을 안다고 촐랑 댄 것이 부끄럽다고 해요.

 

전 그 댓글을 보면서 예수님이 절 책망하는 것 같았어요.

복음을 증거하면서도 복음 증거를 위한 복음을 증거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복음이 나를 장악하여 복음이 뱉어져야 하는데 내가 복음을 안다는 것을 증거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게 되더라고요.

 

복음 전하는 내 자신이 낮아지신 그 주님 안에 감싸져야 하는데,

그래서 내가 술람미가 되어서 이 아가서를 풀어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송구하더라고요.

내가 혹시라도 십자가의 피 뿌림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이 지식으로 남아서 화석화 되어 립서비스를 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되더군요.

 

그래서 기도한 겁니다.

하나님, 제가 먼저 술람미가 되게 해 달라고,

제 안에 솔로몬의 마음을 품게 해 달라고,

그래야 솔로몬의 사랑이 전이(轉移)가 되고 술람미의 사모함이 전이 될 것이 아니냐고,

한참 감동이 되어서 하늘을 쳐다보면서 기쁨과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 걸어왔어요.

 

참으로 감사 한 것은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은 주님을 의식하지 못하였지만,

저는 주님의 숨결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감사한 겁니다.

내가 주안에 주가 내 안에 계심이 다시 한 번 확인 되어지는 것 같아서 좋았어요.

내가 참으로 귀한 축복을 받은 자구나 라고 생각하니 행복하기도 하고요.

 

왜 갑자기 아가서를 강해하고 싶은 마음을 주셨을까?

나 같이 무식하고 단순한 사람에게 무슨 말을 토해내게 하려고 그러는가?

내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는가?

내가 심령이 싸늘하게 죽어서 그런가?

 

그래서 술람미의 애끓는 사랑이야기로 내 심장을 깨우시고자 하는가,

주님 보시기에 내가 에스겔의 해골골짜기의 마른 뼈와 같았나 보다,

그러니 갑자기 이런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하셨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우리는 자칫하면 타성에 젖어요.

스스로 된 줄로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한 겁니다.

 

난 복음 아는데,

난 예수 믿는데,

믿는데, 아는데, 만 있고,,

 

그 믿는 데와 아는 데가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지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남을 가볍게 여기고 고린도교회 교인들처럼 이미 다 된 것 같이 생각하여서 스스로 왕 노릇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그렇기 때문에 내 신앙의 교만함과 매너리즘을 깨트리려고 이런 감동을 주시는구나.

그렇다면 주께서 주신 감동이라고 생각하고 성령께서 감동하시는 대로 풀어보자.

그래서 쓰고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물결처럼 막 밀려오는 겁니다.

야, 이거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케 하려고 그랬구나,

내 마음이 너무 삭막해 있어서 그렇구나,

결국 나를 위하여 아가서를 쓰게 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내 안에 일어나는 감동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겁니다.

울고 싶을 때 울고,

격한 감동이 몰아칠 땐 그 감동을 표현하고,

간절한 주님을 향한 사모함이 일어나면 간절함으로 토해내고 있는 겁니다.

 

언어가 거칠고 때론 적나라한 말들을 쏟아 내는 것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벅찬 감동을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고자 해서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 이해하고 들으세요.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을 내 사랑으로 표현해 내는 겁니다.

지금 여기서 예수님과 내가 사랑하는 이야기로 실타래에 실을 풀어내듯이 풀어내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이 글을 읽으면서 기도해 주세요.

제 마음이 성신에 감동이 되어 사랑에 미친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제가 주님의 사랑에 미쳐야 그 감동을 토해 낼 수가 있어지잖아요.

글을 쓰는 사람이 미친 글로 토해내어야 보는 이도 미쳐서 보게 될 것 아닙니까?

 

설교는 지식 전달이 아니에요.

살아서 역사하는 하나님을 만나는 겁니다.

말씀이 살아서 저와 여러분들의 심령 골수를 해부하여서 통회 할 땐 통회하게 하고,

상한 심령이 일어날 땐 상한 심령이 일어나게 하고,

벅찬 감동과 사랑이 물결처럼 밀려와 감사와 기쁨이 솟구칠 땐 찬양케 하여야 하는 거예요.

 

우린 너무도 화석화된 하나님을 알고 있었어요.

설교를 들어도 그저 그런가보다,

그렇겠지,

그냥 개념 없이 습관처럼 교회 문턱을 드나들고 있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무덤덤한 겁니다.

 

마치 에스겔의 해골골짜기 같이 다 죽어서 감동이 메말라 있어요.

여기에 성령이 몰아쳐야 합니다.

말씀이 생기를 머금고 심령을 후비고 다녀서 깨워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기뻐야 합니다.

내가 술람미가 되어야 해요.

저와 여러분이 술람미가 되어서 주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들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하면 행복하고 기쁘고 황홀하다고만 생각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이 주신 사랑엔 양면성이 있어요.

달콤함이 있으면서도 그 이면엔 엄청난 아픔도 있어요.

 

복음은 고난과 함께 주어져요.

 

예수님이 몰고 오신 천국이 지옥 속에서 주어지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은 분명히 제자들을 천국으로 불러 드렸어요.

그러나 현실은 지옥과 같아요.

 

바울의 고백처럼,,,,


우겨쌈을 당하고,

꺼꾸러뜨림을 당하고,

매맞음을 당하고,

헐벗음을 당하고,

정처가 없이 헤메고,

먹지 못함과 자지 못함과 갖가지 고난을 당한단 말입니다.

 

현재 천국은 지옥으로 와 있어요.

그러니 육적으로 천국을 이해하다간 다 실족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하나님께로 나지 않는 자는 절대로 천국을 알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은폐를 시켜 놓은 겁니다.

 

제자들이 그 혹독한 환란 속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약속 때문이에요.

그 약속이 제자들을 붙잡아 준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약속을 받았어요.

그 성령을 받았어요.

 

그러므로 제자들과 동일한 환경 속으로 밀침바 되어요.

제자들이 울었던 그 울음이 나의 울음이 되고,

제자들이 당한 그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고,

제자들이 소망 했던 그 소망이 우리의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은 아픔을 동반하여서 주어졌어요.

 

요 15:18-19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보세요.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었기 때문에 미움을 받는다고 하잖아요.

제자들이 누구로부터 미움을 받았습니까?

유대인들로부터 미움을 받았어요.

이방인들에게는 미움을 받지 않았어요.

 

이게 무지무지하게 중요한 말이에요.

예수님이 자기백성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셨듯이,

제자들도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당했어요.

바울을 핍박한 자들은 예전에 바울과 동문수학한 바리새인들이였어요.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술람미도 예루살렘 여자들로부터 핍박을 받아요.

이러한 맥(脈)은 지금도 동일하게 이어지고 있어요.

예수께서 다 이루심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교회가 싫어해요.

인간의 행함에는 의가 없다고 하면 이단이라고 하고 핍박해요.

성화주의는 비복음이라고 하면 교인들이 싫어해요.

 

우리가 복음을 받은 것은 술람미가 솔로몬 왕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것과 같아요.

그래서 복음은 고난과 함께 주어진다고 한 겁니다.

주님의 사랑은 아픔을 동반해서 주어져요.

주님의 사랑을 받으면 원수로부터 미움을 받게 됩니다.

사랑은 반드시 방해꾼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교회에서도 누가 목사의 사랑을 받아 보세요.

뒤에서 온갖 말을 다 하잖아요.

제일 말이 많은 곳이 교회에요.

제일 못난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서 그래요.

 

우리는 사랑만 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사랑을 허락하지 않았어요.

술람미가 솔로몬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어요.

그러나 그 사랑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예루살렘 여자들이 얼마나 핍박을 했는데요,

 

무시하고,

조롱하고,

업신여기고,

경멸하고, 그랬어요.

 

오늘 본문이 이를 말해주고 있어요.

예루살렘 여자들이 술람미를 검둥이라고 조롱하고 있어요.

멸시하고 천대 했어요.

그럼에도 술람미가 솔로몬에 대한 사랑을 접지 못하는 것은 솔로몬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끊어지지 않는 사랑이야기를 오늘 할까 합니다.

 

사랑은 방해꾼이 있기 때문에 더 절실해 지는 것입니다.

저는 사랑을 간절함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간절함이 강할수록 사랑의 깊이는 더 깊어지고 강해지는 겁니다.

 

아가서의 결론은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겁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그 어떤 환란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겁니다.

아가서도 성경이기 때문에 결국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야기이고 사랑이야기에요.

믿음을 지키게 하는 것이 간절한 사랑이에요.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고 했나요.,

아니에요.

사랑은 아파요.

그것도 많이 아파요.

엄청 아파요.

 

아픔이 있기 때문에 사랑이에요.

엔조이는 아픔이 없어요.

그냥 즐기면 돼요.

마치 남자들이 술집에 가서 쾌락을 즐기는 것과 같아요.

필요하면 가고 필요하지 않으면 안가요.

 

사랑은 육신의 즐거움이 아니고 영혼의 간절함이에요.

영혼의 갈함이기 때문에 아파도 해야 하고 안 아파도 해야만 해요.

사랑은 있으면 떨어지기 싫고 떨어지면 보고 싶어지는 겁니다.

밤새도록 함께 있어도 돌아서고 나면 또 다시 그리운 것이 사랑이에요.

 

엔조이는 육신이 쾌락을 쫓아가는 것이고, 사랑은 영혼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아파도 해야 하는 겁니다.

아프기 때문에 사랑인 겁니다.

아프기 때문에 사랑이 간절한 겁니다.

 

늘 행복하면 그건 불행이에요.

행복은 반드시 불행을 통하여서 주어져요.

아주 역설적이지요.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왜, 하나님은 성도를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도록 하는가?

그냥 여기서 천국같이 살게 해 주면 안 되는가?

여기서도 행복하고 천국에 가서도 행복하면 되잖아요.

 

이 시대 대부분의 교인들이 이런 천국관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이 땅에서 고난이 없이 잘 살다가 천국에 가겠다고 합니다.

목사들이 그렇게 가르쳐요.

 

그런데 말이죠.

천국은 눈물과 고통을 모르는 자는 갈수가 없어요.

천국은 지옥의 상대적이에요.

천국이 천국 되려면 반드시 지옥이 있어야 해요.

지옥 없는 천국은 천국이 아니에요.

그건 종교꾼들이 만든 감언이설(甘言利說)이에요.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으로 천국을 보았어요.

 

계 21:1-2절.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21: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고 하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이 성도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겁니다.

이는 곧 예수로 인하여 눈물을 흘린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눈물을 닦아 준다는 것은 위로해 준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의 삶은 눈물 흘리는 삶이었다는 거예요.

그걸 저는 처음 시간에 한(恨)이라고 했어요.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들에게 한을 심어준 겁니다.

눈물과 고통과 아픔이라는 한 말이에요.

이런 한이 눈물 없고 고통 없고 아픔이 없는 천국을 사모하게 만드는 겁니다.

간절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하나님의 사랑은 아픔이라고 하는 겁니다.

 

행복과 불행은 상대를 드러내게 합니다.

늘 행복한 것은 없어요.

하나님은 그런 행복을 준 적이 없어요.

천국을 천국 되게 하려고 이 땅에서는 지옥을 경험하게 하신 겁니다.

지옥을 주어서 천국을 사모하게 하는 겁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합니다.

왜, 복음과 함께 행복을 주지 않고 고난을 받으라고 할까요?

이는 복음은 고난을 통하여서 복음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아픔이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에요.

아픔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듯이,,,

 

사람들은 불행을 싫어합니다.

저도 불행은 싫어요.

그러나 행복이든 불행이든 하나님께서 주세요.

어떤 이는 긍휼의 그릇으로 사용하고,

어떤 이는 진노의 그릇으로 사용합니다.

 

구약에 보면 사울 왕과 다윗이 있어요.

그런데 사울은 악신(惡神)이 들고 다윗은 성신(聖神)이 임합니다.

이건 그들이 원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일으킨 사건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에 따라 움직일 뿐입니다.

악신을 주면 악신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고 성신을 주면 성신이 이끄는 대로 움직여요.

 

악신이든 성신이든 우리가 결정하지 못해요.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악신과 성신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위해서 악신 줄 자에게 악신을 주고 성신을 줄 자에게는 성신을 주는 겁니다.

이건 마치 솔로몬이 술람미는 사랑하고 예루살렘 여자들은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아요.

솔로몬의 사랑은 여자들의 조건에 있지 않고 솔로몬의 마음에 있어요.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가 믿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어서 믿는 겁니다.

못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못 믿게 해서 못 믿는 겁니다.

사랑은 사랑을 주는 사람 마음이에요.

 

그래서 솔로몬은 술람미에게 사랑을 준 겁니다.

술람미는 아무 조건 없이 사랑을 받았어요.

이게 성도의 구원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이 하는 대로 이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사랑도 이와 같아요.

하나님이 일방적이에요.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은 일방적인 사랑이에요.

술람미는 솔로몬에게 사랑을 달라고 한 적이 없어요.

그냥 솔로몬이 일방적으로 주었어요.

 

중요한 말이니 잘 새겨서 들으세요.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받는 자는 주는 자 쪽으로 흡수가 되어요.

하나님의 사랑이 일방적으로 밀려오면 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수용하고 말아요.

싫어요, 안 할래요, 가 성립이 안 되어요.

왜냐하면, 사랑의 주체가 하나님이기 때문이에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야, 정낙원이 내 사랑 받아,

그러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준 사랑이 날 장악해요.

난 하나님이 주신 사랑에 장악 당하고 말아요.

 

그러면 이 사랑이 그 때부터 나를 갖고 노는 겁니다.

어떻게 갖고 노느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갖고 놀아요.

이상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요.

 

이건 마치 책받침 위에 쇠붙이를 놓고 밑에서 자석을 가지고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면 위에 쇠가 자석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과 같아요.

겉으론 쇠가 돌아다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쇠를 조정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자석이에요.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오면 그 사랑이 우리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겁니다.

예수님만 졸졸 따라 다니도록 해요.

예수님을 사랑하게 만든단 말입니다.

 

술람미가 지금 여기에 걸려든 겁니다.

솔로몬이 준 사람의 덫에 걸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의 사랑에 목이 말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구요.

그래서 이나마도 예수를 믿고 있는 겁니다.

 

원래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없거든요.

우리 안에는 내가 사랑을 선택해요.

내가 고른다고요.

마치 마트에서 물건 고르듯이 자, 어디보자, 어느 게 좋을까,

그러면서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이게 안 되어요.

내가 고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세요.

하나님이 그 기쁜 뜻대로 예정한 자들에게 너, 너, 지목하면서 사랑을 주어요.

 

술람미는 솔로몬을 사랑할 마음이 없었어요.

그런데 솔로몬의 사랑이 술람미에게 덮쳐오니 어찌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걸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불가항력적 사랑이에요.

내가 거부 할 수 없는 사랑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오면 전기에 감전 되듯이 꼼짝을 못해요.

 

예수님의 부르심이 그래요.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를 부르잖아요.

그러니 베드로가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지요.

쇠붙이가 자석에 끌리듯이 따라간 것입니다.

 

이게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요.

속된 말로 주판알을 좀 퉁겨보고 따르든지 말든지 계산을 해야 합니다.

배와 그물을 버린다는 말은 자기를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른 것은 그냥 쇠붙이가 자석에 불가항력적으로 달라붙듯이 베드로도 거부하지 못하고 예, 하고 따르게 된다고요.

 

이게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에요.

하나님 말씀은 창조에요.

말씀이 떨어지면 즉시로 창조가 되어요.

 

야, 귀신 너 나가,

그러면 귀신이 예, 하고 나가요.

야, 바람, 잔잔해,

그러면 바람이 예, 하고 잠잠해져요.

중풍 병자를 보고도 예수님이 야, 일어나 걸어가,

그러면 벌떡 일어나서 걸어가요.

 

이처럼 야, 정낙원이 너, 나 사랑해,

그러면 나는 하나님을 사랑 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창조사역을 하기 때문이에요.

 

사라야, 너 내 아이를 낳아, 그러면 낳아야 되요.

하나님 난 애기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에요.

난 경수가 끊어져서 안 되어요.

그래도 소용없어요.

그냥 낳아야 해요.

 

마리아에게 야, 너 예수 낳아, 그러면 끝이에요.

아니, 하나님 난 아직 남자를 모르는 처녀인데요,

필요 없어요.

하나님 앞에서는 처녀든 할머니든 하나님의 아이를 낳는 데에는 걸림돌이 안 되어요.

 

솔로몬이 술람미야, 내 사랑 받아,

그러면 술람미는 종용하게 예, 서방님 그래요.

저도 서방님을 사랑해요,

그런다구요.

 

아브라함아, 너 이제부터 복의 조상이 돼,

그러면 복의 조상이 되고 말아요.

정낙원이 너 예수 믿어,

그러면 난 믿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지금 제가 예수 믿고 있어요.

 

이게 히브리서 11장에선 믿음인 겁니다.

전부 싫다고 하면서도 질질 끌려가요.

믿음이 모가지를 목줄로 잡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로 끌고 다녀요.

 

가시밭길로도 끌고 가고,

진창으로도 끌고 가고,

자갈길로도 끌고 가고,

홍해 속으로도 끌고 가고,

마치 고장난 차를 견인차가 견인을 해 가듯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끌고 다녀요.

그러니 우린 죽겠다고 하는 겁니다.

달리 고난이 아니고 내 마음대로 못사니 고난인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믿음이 덮쳐 오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믿어져요.

예수를 믿는데 일체의 노력이 필요가 없어요.

수십 년 동안 믿고자 할 땐 못 믿었는데,

어느 날 이상하게 믿어져요.

믿어지니 믿고자 하는 것을 포기하게 되는 겁니다.

 

오늘 오전에 미국에서 어떤 분이 전화를 했어요.

아주 적절할 때 이런 전화를 하게 하셨어요.

아마 이 설교를 쓰는데 참고가 되라고 하신 것 같아요.

 

남편이 30년 전에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을 했대요.

아마 청년 시절에 은혜를 받아서 그랬던 모양이에요.

그리고는 까마득히 잊고 살았대요.

 

그런데 결혼을 하고 지금까지 살면서 되는 일이 없다는 겁니다.

뭘 좀 해 보려고 하면 틀어지고, 틀어지고 한다는 거예요.

왜? 그런가 원인 규명을 해 보니 30년 전에 서원한 것이 떠오르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서원을 갚아야 한다고 신학교를 가야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이 분이 몇 년 전에 호주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대요.

목사님 다섯 명이 그냥 눌러 준 모양이에요.

속된 말로 야매로 받았어요.

 

그런데도 찝찝한 겁니다.

목사 되겠다고 서원했다가 안 지켜서 일이 안 풀리는 거라고 생각해서 안수를 받았는데,

목사 안수 받았으면 일이 잘 풀려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안 풀리니 이젠 야, 이거 신학교 정규코스를 밟지 않고 야매로 받아서 그런가?

이거 신학교 가서 제대로 된 안수를 받아야 하는가?

 

그래서 지금 연세가 60세가 다 되어 가는데 한국에 들어와서 신학교에 가야하는지,

아니면 신학교 가지 말고 장로가 되어서 교회에 열심히 충성하면 안 되겠느냐고,

저한데 상담을 하는 겁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보기엔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하든지 예수를 믿어 보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하나님은 우리 서원을 받지 않으니 신학교 가지 말라고 했어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 믿지 말라고 했어요.

아니 믿어지지도 않는 예수를 왜? 그렇게 믿고자 하느냐고,

 

그러니 깜짝 놀라는 겁니다.

아니 왜 예수 믿지 말라고 하느냐 라고 묻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인간은 예수를 못 믿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믿게 해 주어야지만 믿어집니다.

내가 믿어서 믿는 예수는 가짜입니다.

 

그러니 자기 행함으로 믿었다 안 믿었다 왔다 갔다 하고 마음이 불안한 겁니다.

서원 지킬 거라고 야매든 뭐든 목사가 되었는데도 불안하고,

그 불안을 떨치려고 신학교 가겠다고 하는 것도 그 속에 예수가 없으니 그런 거라고 했어요.

만약에 제가 예수 믿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안 믿으면 그건 애초부터 예수 안 믿는 사람이고,

제가 예수 믿지 말라고 했는데도 아니야, 난 예수 믿을래, 그러면 예수 믿으라고 했어요.

 

이 분은 인간이 예수도 믿고 믿음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아마도 실망을 많이 하셨을 거예요.

하지만 제 말이 그분들에게 약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제 블로그 글을 보느냐고 물으니 제 블로그를 모른대요.

 

그럼 어떻게 알고 저 한데 전화 했느냐고 하니 누가 울산 목양교회 정낙원 목사한데 상담해 보라고 해서 전화 했다고 해요.

제가 좀 용한가봐요???

 

그래서 교회 가지 말고 제 블로그에 글을 좀 보시고 믿음이 뭔지 확인을 먼저 하라고 했어요.

제발 그랬으면 좋을 텐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셔서 예수가 믿어졌으면 좋겠어요.

이런 상담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래도 이런 분들이 한국교회 대다수이니 참고하라고 말하는 겁니다.

혹시라도 그 분이 보시면 죄송해서 그냥 지명은 밝히지 않는 겁니다.

그 분들에게 예수기 믿어지는 주의 은혜가 임하길 기도합니다.

 

죄인들은 모든 주체를 인간에게 두고자 합니다.

그래서 일의 결과를 인간의 행함과 결부를 시키려고 해요.

누가 불행한 일을 당하면 거 봐,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러니 서원 갚으면 복을 받고 안 갚으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는 자기가 아는 법으로 이미 예측했다는 말입니다.

이 예측은 인간의 선악의 법에서 나온 겁니다.

선악의 법에서 나온 예측은 착한 자는 상을 받고 악한 자는 벌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식들에게도 벌 받을 짓은 하지 말고 복 받을 짓을 하라고 하고 합니다.

목사들도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을 펴면 이러한 사고가 죄임이 드러납니다.

인간은 머리털 하나라도 검게나 희게 할 수 없는 자라고 합니다.

이는 인간 쪽에서 뭘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당연히 복과 저주도 인간 쪽에서 행할 수가 없어요.

 

인간은 그냥 살아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뭔가 일을 벌리세요.

사울과 다윗처럼 하나님이 악신(惡神)이든 성신(聖神)이든 뒤집어 씌워서 사건을 일으켜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건을 일으키면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 사건 속으로 휘말려드는 겁니다.

불행한 사건이든 행복한 사건이든 휘말려요.

이렇게 되면 결국 내가 하나님에게 장악당하고 만 겁니다.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에게 흡수되고 만 거예요.

 

지금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이 일을 벌였어요.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무슨 일을 벌였는가 하면 솔로몬을 사랑하게 하는 일을 벌린 겁니다.

그러니 술람미가 솔로몬에 대한 상사병이 나는 거예요.

솔로몬이 술람미 속에 솔로몬을 사랑하라는 칩을 심어 놓은 겁니다.

그리니 그 칩에 따라서 술람미는 사랑에 목말라서 애를 태우는 겁니다.

 

결국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해서 갖고 노는 겁니다.

한마디로 술람미는 솔로몬의 노리개에요.

술람미는 솔로몬의 움직임에 끌려갈 뿐이에요.

이걸 아가서에서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성도의 구원이 이와 같아요.

그냥 예수님이 끌고 가는 겁니다.

우리가 발버둥 친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아요.

일을 행하시고 성취하사는 분은 하나님이세요.

 

렘 33:2절.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여호와가 시작하고 여호와가 일을 하고 여호와가 성취해요.

온통 여호와,

여호와,

여호와에요.

우린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어요.

 

사랑이 뭐냐,

가만히 있는 겁니다.

 

남진이 그랬잖아요.

둥지라는 노래로 그랬잖아요.

 

󰁟 넌 그냥 가만히 있어,

다 내가 해줄게,

내 품에 둥지를 틀어, 󰁟

 

둥지만 틀면 된대요.

 

그냥 살포시 안기세요.

앙탈 부리지 말고,

남자들은 여자가 앙탈 부리면 싫어해요.

그냥 서방님 하고 안기세요.

난 서방님 없으면 못삽니다, 라고 하세요.

 

그래야 남자가 자긍심이 생겨서 지켜주지요.

난 당신 없이도 살 수 있어,

그러면 당장 나가,

그런다고요.

남자들이 집 바깥으로 겉도는 것은 대부분이 여자들 책임이에요.

집안에서 왕 노릇하게 해 주어야 하는데 쥐 잡듯이 하니 누가 집구석에 들어가고 싶겠어요.

 

애교가 없는 여자는 여자가 아니라 괴물이에요.

오죽했으면 여우하고는 살아도 곰탱이 하고는 못산다고 했겠어요.

이건 인류 역사가 경험하고 뱉어낸 진리의 고사입니다.

 

술람미처럼 고분 고분하면 솔로몬이 다 주잖아요.

얼마나 좋아요.

졸지에 왕비가 되는데,

가만히 주는 것만 받으니 어느 날 왕비가 되어 있어요.

 

술람미는 앙탈 부리지 못하는 것은 솔로몬의 사랑을 먹고 사는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냥 솔로몬이 하는 대로 따랐어요.

이는 자신이 솔로몬 속으로 흡수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뭐냐?

사랑을 주는 쪽으로 흡수되는 겁니다.

사랑 받는 쪽에선 골라서 받으면 되어요.

주는 대로 받으세요.

그게 사랑이에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게 있잖아요.

하나님이 지금도 계속해서 던져주세요.

 

자, 은혜 여기 있다,

자, 긍휼 여기 있다,

자, 사랑 여기 있다,

 

그럼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되어요.

 

생명이 뭡니까?

생명(生命)이란? “날” 생(生)이고. “명할” 명(命)이에요.

이는 하나님께서 살라고 명하신 겁니다.

창조주가 살으라고 명령을 했으니까 피조물들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우리가 살고 싶다고 해서 살아지는 것이 아니에요.

다 하나님이 살게 해 주셔서 살고 있어요.

지금이라도 호흡을 취하시면 그냥 흙으로 돌아가요.

 

인생 별거 아니에요.

그냥 한방에 훅~ 가요.

야, 정낙원이 너 죽어,

그러면 죽어야 되어요.

반대로 야, 정낙원이 너 살어,

그러면 예, 하고 살고 있는 겁니다.

 

창조를 뭐로 했나요.

말씀으로 했지요.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그러니 빛이 생겼잖아요.

 

이처럼 하나님이 정낙원이 있으라,

그러니 내가 있는 겁니다.

날 붙잡고 있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에요.

그럼 하나님이 야, 정낙원이 너 죽어,

그러면 난 죽어요.

안 돼요, 싫어요, 해도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인생을 죽은 인생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있지요.

예수님이지요.

그럼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은 말씀에서 떠나 있으니 죽은 자이지요.

 

예수님이 말씀을 주시고 가셨어요.

예수님이 주신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누구든지 내 살과 피를 마시면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이지요.

한마디로 예수 믿으래요.

그러면 영생을 주신대요.

 

성화하라는 말이 없어요.

열심히 뭘 해서 구원을 얻으라고 한 말이 없어요.

예수님은 자기를 믿으래요.

내 피가 너희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해 준대요.

그럼 믿으세요.

 

이 말을 믿으면 그 사람은 말씀과 연결이 되어서 산 사람이지만 안 믿으면 죽은 자에요.

이 말에 토를 달지 마세요.

아니 그래도 신자가 되어서 뭔가 해야 하지 않습니까?

성화되어야 안 됩니까?

 

예수님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요.

그냥 날 믿으래요.

내가 너희 죄를 다 사했다고 믿으래요.

예수 믿는 게 뭐가 그리 복잡합니까?

그냥 믿으라고 하잖아요.

 

술람미는 솔로몬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한 말을 믿고 살았어요.

솔로몬이 사랑한다는 말이 믿어지니 믿고 산 겁니다.

그 믿음이 사모하게 만든 거구요.

지난 시간 솔로몬이 술람미를 왜 예뻐한다고 했나요?

그건 술람미에게 솔로몬의 것이 몽땅 담겨져 있어서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자 중요한 말입니다.

예뻐한다는 것은 누가 해야 합니까?

자기입니까?

상대방입니까?

 

상대방이 예뻐해야지 예쁜 거예요.

자기가 백날 거울아, 거울아, 누가 예쁘니 그래보아야 밖에 나가면 남이 알아주지 않아요.

거울 앞에선 아이, 예뻐라, 해도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예뻐하는 기준이 달라요.

 

우리가 아무리 신앙이 좋다고 하여도 소용없어요.

신앙을 요구하는 예수님이 좋다고 하여야 해요.

 

오늘 본문이 이를 말해주고 있어요.

 

5절.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이 술람미를 놀리는 겁니다.

질투하는 거예요.

검둥이 주제에 왕을 사랑한다고 비아냥거리는 겁니다.

 

술람미도 자기가 못생겼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스스로를 게달의 장막이라고 합니다.

 

게달의 장막이란? 유목생활을 할 때 이리저리 이동할 때 야영(野營)하려고 치는 염소 가죽으로 만든 검정색 천막이에요.

풍상으로 너덜거리고 다 떨어진 천막 말이에요.

이건 볼품없다는 겁니다.

 

술람미 스스로가 보아도 볼품이 없어요.

왜, 스스로 볼품이 없다고 생각합니까?

예루살렘 여자와 비교해서 그래요.

예루살렘 여자들은 요즘말로 다 S 라인에 쭉쭉 빵빵이에요.

 

그런데 자신은 까맣고 노동에 시달려서 볼품이 없어요.

그러니 스스로도 못났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말이죠.

 

술람미가 아주 자신만만하게 결정적인 말을 하고 있어요.

내가 비록 이래도 내 낭군님은 내가 제일 예쁘다고 한단다,

내가 비록 게달의 장막 같지만 내 님은 나를 왕궁의 휘장처럼 화려하고 예쁘다고 한다는 겁니다.

이 말을 놓치지 마세요.

 

이게 무지무지하게 중요해요.

 

예쁘다는 기준이 뭡니까?

사람마다 달라요.

다 예뻐요.

그런데 본인이 타인을 통해서 각인된 이미지와 비교하는 겁니다.

 

저 사람은 콧날이 오뚝해서 좋다,

저 사람은 키가 커서 좋다,

우리는 남과 비교해서 자꾸만 예쁨을 조합을 해 내요.

그래서 남과 비교해서 못하면 밉다고 우울해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예루살렘 여자들이 술람미를 검둥이라고 놀리지요.

얼레리~ 꼴레리~검둥이래요~

놀리는 것은 자신은 흰둥이인데 술람미는 검둥이란 말이에요.

자기들과 다르니까 놀리는 겁니다.

만약 같은 검둥이라고 한다면 놀릴 수가 없겠지요.

자기도 검둥이인데 어떻게 검둥이라고 놀리겠어요.

술람미를 검둥이라고 놀리는 자들은 전부 흰둥이들인 겁니다.

 

그런데 솔로몬 왕이 검둥이를 좋아해요.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그랬어요.

애, 술람미야,

넌 어쩜 그렇게 아름답니,

야, 넌 내 왕궁에 휘장보다 더 아름답단다,

이 말은 궁에 있는 그 어떤 여자들보다도 더 아름답다는 말이에요.

 

지금 예루살렘 여자들은 술람미를 검둥이라고 놀리는데,

솔로몬 왕은 검둥이인 술람미를 최고로 아름답다고 하는 겁니다.

솔로몬의 취향이 검둥이에요.

그러면 되었지요.

왕이 예쁘다고 하잖아요.

 

아니, 같이 연애하는 왕이 예쁘다고 하는데 무슨 문제입니까?

그래서 오늘 제목이 콩깍지 사랑이에요.

내 눈에 예쁘게 보이면 어쩔 수 없어요.

제일 예뻐요.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이 예쁘다고 하면 기뻐하세요.

사랑하는 사람 마음에 쏙 드니까 예쁘다고 하는 겁니다.

아니에요,

난 못 생겼어요,

그러지 마세요.

 

솔로몬이 술람미 보고 따봉!,,,

엄지손가락 치켜들고 최고라고 하고 있어요.

여자는 한 남자의 사랑을 받으면 최고로 행복해요.

 

인간은 여럿을 좋아 할 수는 있어도 여럿을 사랑할 수는 없어요.

사랑은 단 한 사람에게만 가요.

솔로몬 주변엔 수많은 절세미인들이 있었어요.

궁녀로 들인 것은 다 이쁘고 좋아서 들였어요.

그러나 사랑하지 않았어요.

사랑은 오직 술람미에게만 주었어요.

그러니 예루살렘 여자들이 솔로몬의 마음을 돌리고자 온갖 교태를 다 부리는 겁니다.

 

요즘 말로,

성형수술도 하고,

주름살 없애려고 팩도 하고,

다이어트도 하고 해요.

 

그러나 솔로몬은 술람미만 사랑했어요.

솔로몬의 마음속엔 오직 술람미만 담겨져 있어요.

그러니 술람미만 찾는 겁니다.

 

사랑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찜 당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찜하니 온갖 것을 다 주는 겁니다.

 

게달의 장막이면 어떻습니까?

솔로몬이 게달의 장막이 좋다는데,

그럼 끝이에요.

 

저는 파스타에 나오는 공효진이를 좋아해요.

귀여워요.

그런데 옆에서 목사님은 왜? 공효진이를 좋아합니까? 라고 물으면 제가 뭐라고 할까요.

내가 좋아,

 

이걸 우리 구원 이야기로 합시다.

예수님이 우리가 좋대요.

예수님이 예루살렘 여자와 같은 바리새인들보다 술람미 같은 세리와 창기가 좋대요.

 

예수님이 좋아서 그 피를 우리에게 뿌려 주셨어요.

우린 예수님이 뿌려준 피로 죄사함 받았어요.

그 피가 우리의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한대요.

 

믿음이 뭐냐?

예수님 피로 용서 해 준다잖아요.

우리가 어떻든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 용서 해준다잖아요.

이걸 믿는 겁니다.

뭐가 문제에요.

 

우리가 언제 구원을 위해서 무엇을 한 게 있나요?

없어요.

어느 날 하나님이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셨어요.

믿어지게 해 주시니 믿는 겁니다.

구원시켜 주시니 구원받는 겁니다.

천국에 가라고 하니 가는 거예요.

 

참 쉽죠.

뭐가 문제에요.

문제 될게 아무도 없어요.

 

죄가 뭐냐?

하나님의 이런 처사에 반발하는 겁니다.

뭘 자꾸 보태려고 하는 겁니다.

가만있지를 못해요.

 

자기 것을 자꾸만 섞으려고 해요.

그냥 예수님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자기가 자꾸 설쳐요.

설친다고 되는 것이 아닌데도 설쳐요.

 

성령이 그 안에 계신 성도는 술람미처럼 자신이 게달의 장막처럼 볼품없는 죄인인줄 알아요.

하지만 예수님의 피로 모든 죄에서 깨끗함을 받았다는 것을 믿어요.

믿어지기 때문에 자기 꼬라지 보지 않고 감사하고 사는 겁니다.

왕과 연애하고 사는 거예요.

 

죄가 뭐냐?

자기 꼬라지에 의미를 두는 겁니다.

자기 꼬라지에 의미를 두니 자꾸만 성화해야 한다고 지랄을 떠는 겁니다.

내 꼬라지가 이러면 왕이 싫어 할 텐데,

괜히 자기 혼자 상상해서 예수님이 좋아 할 것이라는 메뉴를 만드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대요.

이게 믿어지십니까?

이게 믿어지는 사람은 복을 받은 분이에요.

복을 받았기 때문에 이게 믿어지는 겁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물고기 비유가 나오지요.

세상 끝이 되면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골라낸다고 하지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의 기준이 어디에 있나요.

주인에게 있어요.

 

주인이 피라미를 좋아하면 피라미가 좋은 고기에요.

피라미를 잡으려고 그물을 친 겁니다.

주인이 이거 좋다,

그러면 좋은 거예요,

본인이 아무리 난 좋은 고기인데요, 라고 해도 소용없어요.

고기가 좋고 나쁨을 결정하지 않고 주인이 해요.

좋고 나쁨은 주인이 하지 고기가 하지 못해요.

고기는 그냥 주인의 처분만 기다리면 되어요.

 

중국집에 가서 음식을 시킵니다.

아내는 짜장면을 시키고, 나는 짬뽕을 시켜요.

그럼 아내가 그래요.

맨 날 짬뽕만 시키느냐고,

그럼 전 그래요.

난 짬뽕이 좋아,

 

솔로몬은 검둥이를 좋아해요,

가만히 보니 흰둥이들 사이에 검둥이가 있는 겁니다.

모두 허여멀건 흰둥이들만 있는데 술람미만 검둥이인 겁니다.

그래서 얼른 왕궁으로 데리고 가서 사랑을 하였어요.

 

흰둥이들이 난리입니다.

왜 우리를 버리셨나요.

솔로몬 왕이 그럽니다.

난 검둥이가 좋거든,

 

술람미는 원래는 검둥이가 아니에요.

포도원에서 일을 하다가 태양에 그을려서 검어요.

 

아 1:6절.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술람미가 검둥이가 된 것은 햇볕에 타서 그렇다고 하지요.

포도원에서 일을 하다가 보니 이렇게 검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빠들이 밉다고 하면서 자기를 포도원에서 일을 시켜서 그렇다고 합니다.

 

술람미는 지금 자기 간증을 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술람미는 가족들로부터 천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오빠들이 술람미를 포도원으로 쫓아냈거든요.

 

오빠들이 왜, 술람미를 미워했을까요?

이는 친 동생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내 어미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건 술람미 엄마가 재혼을 했다는 겁니다.

기존에 아들들이 있는 과부가 신랑이 죽자 아들들과 먹고 살기 힘들어서 아이들을 데리고 시집을 가서 술람미를 낳은 겁니다.

오빠들과 술람미는 아빠가 달라요.

그러니 미워한 겁니다.

술람미는 누가 위로해 줄 사람이 없어요.

불쌍한 겁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값없는 은혜를 베푼 겁니다.

사랑을 베풀어 준 거예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고아와 같이 버려진 자기 백성들을 찾으러 오셨어요.

 

누가복음 15장에 잃은 양 비유를 아시지요.

한 마리 양이 무리들로부터 떨어져 있어요.

양은 습성상 무리지어 다녀요.

그런데 한 마리가 버려졌어요.

무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겁니다.

그래서 목자가 이 양을 찾아 나선 겁니다.

 

잃은 양 비유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마뜩치 않아서 비판 할 때 하신 비유에요.

그러니 잃어버려진 양이란 바로 예수님이 구원할 세리와 창기들과 같은 죄인들인 겁니다.

세리와 창기들은 어디 의지 할 때가 없는 버려진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목자가 되셔서 찾아 나선 겁니다.

 

여기서 의미심장한 것은 목자가 잃어버려진 양을 찾아서 집으로 돌아갔다는 겁니다.

잃어버려지지 않은 99 마리 양은 들에 버려둔 채로 말입니다.

목자 없는 양은 이리의 밥이에요.

결국 99 마리 양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마귀의 밥이 되고 만 겁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잃어버려졌다가 찾김 받은 것을 회개라고 해요.

잃어버려진 양을 찾고선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 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했어요.

 

지금 예수님은 잃은 양 비유를 하면서 바리새인들을 회개 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하고 있고 버려진 한 마리는 회개한 죄인으로 보는 겁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찾으러 오신 목자에요.

그러니 들에 벼려진 한 마리가 바로 술람미와 같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겁니다.

 

술람미를 괴롭힌 오빠들은 스스로 의롭다하여 회개 할 것이 없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이에요.

이 놈들이 세리와 창기들을 뿔로 들이받아서 다 쫓아낸 겁니다.

그러니 오빠들이 바리새인들처럼 술람미를 세리와 창기처럼 들이받아서 집에서 좇아낸 겁니다.

오빠들이 들에 버린 거예요.

그러니 불쌍하게 버려져서 홀로 들에 있는 술람미를 솔로몬 왕이 찾아가서 사랑을 준 것입니다.

 

구원이란? 잃어버려졌다가 다시 찾김 받는 겁니다.

술람미는 버려진 자에요.

버려진 그를 솔로몬이 목자가 되셔서 찾아내서 목자의 사랑을 담뿍 담아 놓은 겁니다.

그러니 술람미는 누르면 목자 되신 솔로몬의 사랑이 터져 나오는 겁니다.

 

술람미의 이 모습이 어찌도 저와 같은지 몰라요.

이건 제 이야기에요.

저도 술람미와 같이 이복형제들과 살았어요.

제 아버지가 아이들 넷이 달린 과부에게 장가를 가서 절 낳았어요.

그러니 전 위로 피가 다른 누나와 형이 있어요.

 

거긴 이씨고 나는 정씨에요.

제가 엄청 미움을 받고 자랐어요.

어쩜 술람미와 같은지 몰라요.

그러니 이 아가서를 쓰면서 술람미의 마음이 그대로 저에게 이입(移入)이 되는 겁니다.

 

술람미가 바로 저에요.

제가 바로 술람미인 겁니다.

한(恨) 많은 술람미에게 솔로몬 왕의 사랑이 임하였듯이,

한(恨) 많은 저에겐 예수님의 사랑이 임한 겁니다.

 

그러니 이 글을 쓰면서도 눈물이 나는 겁니다.

아, 하나님께서 이 글을 쓰게 하시려고 날 이렇게 다루어 오셨구나, 라는 생각이 드니 가슴이 미어지는 겁니다.

주님의 가슴 절절한 사랑을 맛보게 하시려고 그렇게 모질게 몰아쳤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렇게 아픔 가운데서 떠 밀려온 인생이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맺은 언약을 위하여 나에게 한(恨)을 주셔서 그 한(恨)을 주님의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이 가슴 절절한 주님의 사랑을 몰라요.

아리디 아린 이 아픔을 몰라요.

 

전 한(恨)이 많아요.

세상적으로도 한(恨)이 많고,

신앙적으로도 한(恨)이 많아요.

가정적으로는 피 다른 형제들 틈에서 구박을 받고 자라서 한(恨)이 많고,

신앙적으로는 40여 년간 율법 아래서 종노릇 하여서 한(恨)이 많아요.

 

그런데 이 한(恨) 많은 저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겁니다.

예수님이 절 찾아오신 겁니다.

마치 술람미에게 솔로몬이 찾아 온 것처럼 말이에요.

술람미가 한(恨)이 많아서 솔로몬의 사랑을 잊지 못하듯이,

저도 율법 아래서 종 노릇한 한(恨)이 많기 때문에 복음에 귀함을 알고 올인하고 사수하는 것입니다.

 

과거 복음을 몰랐을 땐 하나님이 그렇게 야속했어요.

그러나 복음을 알고 난 후 하나님께서 더 깊은 지성소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렇게 나를 몰아쳤다는 것을 알고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제가 설교를 간증적으로 풀어내는 이유도 막연한 하나님이 아니고 실제로 나와 함께 호흡하면서 동행하는 그 하나님을 증거하고 싶은 겁니다.

나처럼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는 수많은 주의 백성들이 있기 때문에 날 먼저 그들의 아픔을 맛보게 하셔서 그들을 위로하라고 하신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이러한 일들을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서 하셨어요.

 

사 40:1-11절.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찌니라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11. 그는 목자 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자 보세요.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있어요.

그래서 선지자를 세워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는 겁니다.

이는 장차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할 메시야를 말하려고 선지자들을 사용하고 있어요.

그러니 선지자들은 모두가 장차 오실 예수님의 아픔을 선취적으로 참여케 되는 겁니다.

 

이걸 신약적으로 풀어 봅시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세례를 베풀면서 이사야가 말씀 한 것을 인용하고 있어요.

예수님을 보시고 이사야가 예언하였던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사야가 뭐라고 합니까?

자기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지요.

 

왜 위로하라고 합니까?

어디에 갇혀 있다가 풀려난다고 하지요.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죄악의 사함을 받을 때가 되었다고 하지요.

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라고 합니다.

이제 죄로 인하여 고통 받는 때가 끝났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신 다는 겁니다.

 

세례 요한이 이걸 알리고 있는 겁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그분이다,

자기백성을 위로할 메시야가 왔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죄 아래 억눌린 자들을 건져 내시려고 오신 겁니다.

율법 아래서 신음하는 자들을 해방시키려고 오신 겁니다.

 

이걸 아가서에선 오빠들로부터 핍박 받는 술람미를 솔로몬 왕이 사랑으로 위로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오빠들은 신약적으로 말하면 율법으로 백성들을 신음으로 몰고 간 바리새인들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유대교라는 율법 신앙으로부터 자기 백성들을 빼내는 겁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잖아요.

그런데 그 죄를 율법이 고발하잖아요. .

율법은 죽음의 법이에요.

그러니 율법 아래가 사망의 그늘이 되는 겁니다.

이런 흑암이라는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췬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 아래서 죄인으로 취급당하며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던 세리와 창기들을 구원해 내는 겁니다.

마치 솔로몬이 오빠들로부터 구박을 받는 술람미에게 사랑을 베푸셨듯이 말이에요.

 

솔로몬은 오빠들로부터 학대를 받던 술람미를 불쌍히 여겨서 사랑해 준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겁니다.

이건 장차 예수님이 죄인을 사랑해 줄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어요.

 

예수님이 와 보니 자기 백성들이 율법 아래서 학대를 받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으로 자기들의 포도원에 강제로 들여보내서 일을 시키고 있는 겁니다.

강제 노역을 당하고 있는 자기백성들이 예수님 눈에는 술람미인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을 위로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부어주신 겁니다.

 

이 사랑을 받은 자가 세리와 창기들이고 일곱 귀신에게서 해방 받은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천한 사람들인 겁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술람미처럼 주님으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았어요.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는 술람미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누가 뭐라고 하여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놓칠 수가 없어요.

이게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성도의 모습이에요.

 

우린 모두가 막달라 마리아이고 술람미에요.

우린 모두가 죄 아래서 강제 노역을 당하고 신음했어요.

율법 아래서 종노릇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겁니다.

그 아들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되었다는 해방 소식을 알려 주신 겁니다.

술람미처럼 오빠들의 포도원에서 건짐 받았어요.

이젠 더 이상 오빠들의 공갈과 협박에 시달릴 필요가 없어요.

솔로몬 왕이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율법이라는 오빠들의 공갈과 협박에 시달릴 이유가 없어요.

예수님의 피가 율법의 요구를 완성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젠 우리를 강제할 그 어떤 것도 없어요.

그 누구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이건 너무 귀한 말씀이니 찾아봅시다.

 

롬 8:1-2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라고 하지요.

‘그러므로’ 란 앞에 이야기를 뒤집어엎는 말이에요.

그럼 앞에서 무슨 말을 했습니까?

로마서 7장은 바울의 탄식하는 내용이에요.

 

바울이 구원을 받고 보니 너무도 감사한 겁니다.

그래서 구원받음에 감사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했어요.

마치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처럼 성화하고자 했어요.

 

열심히 하나님 뜻대로 살고자 하니 마음먹은 대로 잘 안 되는 거예요.

왜 그런가 보니 자기 안에 또 다른 놈이 있는 겁니다.

이 놈은 율법 아래서 난 죄인이에요.

 

이 놈은 자꾸만 바울이 마음먹은 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요즘 식으로 기도해서 성령 충만 받아서 지켜보려고 했어요.

주여, 저에게 능력을 주소서, 라고 해도 안 되어요.

이 놈은 도저히 육신은 이길 수가 없어요.

 

그래도 명색이 사도이고 성경을 기록할 정도로 유명한 바울인데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니 죽겠는 겁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죄를 이기지 못하는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줄 분이 없느냐’, 라고 탄식을 합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바울의 뒤통수를 탁 치면서,

‘야, 이놈아’,

‘그래서 예수가 십자가에 죽었잖아’,

그러는 겁니다.

 

‘네가 죄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너 대신 죽었잖아’,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네 죄를 예수님이 다 갚아 주었으니 그 어떤 놈이 와서 너 왜? 말씀대로 살지 않느냐고 공갈을 치고 협박을 하더라도 예수님이 다 했다고 하면서 기죽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이건 마치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니네 오빠가 와서 널 공갈치고 협박을 해도 날 믿고 꿈쩍하지 말라고 한 것과 같아요.

 

그래서 바울이 소리치는 겁니다.

난 자유인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정죄당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겁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는 이게 믿어져요.

이게 믿어지면 자기 꼬라지로부터 해방이 되어요.

 

야, 내가 이렇게 살다가 짤리면 어떻게 하지,

야,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다가 저주 받으면 어떻게 하지,

야, 내가 술 먹었는데 하나님에게 매 맞으면 어쩌지,

야, 난 성화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하지,

이러한 것으로부터 자유해요.

 

이런 것이 걱정이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은 지금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이에요.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걱정이 안 되어요.

마치 술람미가 솔로몬의 사랑이 믿어지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산 것과 같아요.

그래서 바울은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한 겁니다.

 

이 본문만 살펴보고 마칩시다.

 

롬 8:33-39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자 보세요.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 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는데 어떤 놈이 불의하다고 하느냐 에요.

그 어떤 놈도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는 것을 돌릴 수 없다는 겁니다.

그 누구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지요.

 

이걸 오늘 본문식으로 말합니다.

오늘 본문 제목이 뭡니까?

 

‘콩깍지 사랑’ 이지요.

 

그 누가 술람미를 검둥이라고 놀려도 꿈쩍하지 말라고 하지요.

왜 그런가요?

솔로몬이 검둥이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눈엔 콩까지가 씌어서 술람미가 세상에서 최고로 예뻐요.

솔로몬이 최고로 이쁘다고 하면 이쁜 겁니다.

 

그러니 누가 뭐라고 하면 우리 신랑이 날 제일 이쁘다고 했다,

너희들이 뭐라고 해도 우리 신랑은 내가 최고래,

용용 죽겠지,

그러세요.

 

누가 너 그 따위로 신앙생활 할래,

그러면 예수님의 피가 다 사해 줬거든,

예수님이 괜찮다고 했거든,

예수님이 날 천국으로 데리고 간다고 했거든, 그러세요.

 

여러분 속에 술람미가 솔로몬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같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믿음이 있습니까?

그러면 안심하고 사세요.

신랑 자랑하고 사세요.

우리 신랑 눈에는 콩깍지가 씌워서 우리가 제일 예쁘데요.

 

비록 게달의 장막과 같이 너덜거리는 몰골이지만 예수님의 우리를 하늘에 천사보다 더 거룩하다고 합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게 하려고 성령을 보내 주신 겁니다.

 

성령이 여러분들이 마음에서 이 사실이 믿어지게 해 주실 겁니다.

그러면 믿어지는 것으로 사세요.

부디 이 사실이 믿어지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마음에 눈을 밝히시사 예수님이 나를 최고로 이쁘다고 하는 것이 믿어지게 하옵소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 믿어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제부터 그 어떤 율법적인 참소로부터 자유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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