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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아가서 강해

♣(성경강해)25강. 죽음으로도 끊어지지 않는 사랑 (아가 8:1-14)

by coroa 2022. 3. 1.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25강. 죽음으로도 끊어지지 않는 사랑 (아가 8:1-14)

-.정낙원 목사

 

아 8:1-14절. “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다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2.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미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웠겠고 3. 너는 왼손으론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론 나를 안았으리라 4.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지니라 5.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6.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7.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8.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 9. 그가 성벽일진대 우리는 은 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일진대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 10. 나는 성벽이요 나의 유방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 11.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두고 그들로 각기 그 실과를 인하여서 은 일천을 바치게 하였구나 12. 솔로몬 너는 일천을 얻겠고 실과 지키는 자도 이백을 얻으려니와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 13. 너 동산에 거한 자야 동무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나로 듣게 하려무나 14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

 

= 1 부 =

 

오늘로서 아가서 강의를 마칠까 합니다.

할 말이 좀 많을 것 같아서 1-2부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로 합니다.

 

1부에서는 언약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

2부에서는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볼까 합니다.

 

아가서는 그냥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야기가 아닙니다.

창세전 언약이 역사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펼쳐지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가서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존귀하신 하나님과 저주 받은 죄인의 사랑을 솔로몬이라는 왕과 천한 노예인 술람미라는 여인의 사랑을 통하여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왕이라는 자기의 신분을 버리고 노예를 사랑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비워 죄인의 모습으로 낮아지신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오신 것은 죄 아래 가두어진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창세전 언약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 있습니다.

창세전 언약 속에는 구약과 신약이 있습니다.

 

구약을 옛 언약이라 하고, 신약을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옛 언약은 율법이고, 새 언약은 은혜입니다.

율법은 죽이는 것이고, 은혜는 살리는 것입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은 충돌하게 되어 있어요.

아가서 속에서도 옛 언약에 속한 자와 새 언약에 속한 자간에 충돌이 일어납니다.

 

아가서에 나타난 두 언약에 속한 자들의 표상은 누구인가요?

예루살렘 여자들과 술람미에요.

예루살렘 여자들은 옛 언약에 속한 자들이고, 술람미는 새 언약이라는 은혜에 속하였어요.

그런데 이 둘은 항상 다툽니다.

아가서는 이를 통하여서 법이 어떻게 은혜를 공격하는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자와 술람미는 솔로몬이라는 왕을 가운데 두고 사랑 싸움을 벌립니다.

왕에게 사랑 받는 것은 구원 받는 것의 모형이에요.

예루살렘 여자들은 자기들 조건으로 왕의 사랑을 받아 내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율법지킴을 의로 삼고 있는 옛 언약식 신앙을 말합니다.

하지만 술람미는 자기 조건과 상관없이 왕의 일방적인 사랑을 받았어요.

이것은 인간의 조건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새 언약식 신앙을 말해요.

 

중요한 것은 왕은 자기 의로 나오는 자를 싫어해요.

왕은 자신의 긍휼이 필요한 술람미를 사랑해요.

그런데 자기 의가 있는 자들이 왕의 긍휼을 입은 자들을 핍박을 해요.

그래서 솔로몬 왕의 사랑을 입고 사는 술람미는 예루살렘 여자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술람미를 핍박하는 세력들을 통하여서 마귀가 어떤 식으로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는지의 모습도 읽을 수가 있습니다.

특히 오늘은 성도의 신앙을 방해하는 세력이 어떻게 이 시대에 나타나는지에 대하여서 심도 있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중요하여서 반복하여 말하는 것이 있어 글이 길더라도 잘 음미하면서 따라오시길 바랍니다.

 

모든 인간은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언약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언약의 후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아들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어떻게 언약의 후손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시는가 하면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의 죽음으로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언약의 후손을 자기백성이라고 합니다.

자기 백성이라는 말은 다른 백성도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 백성은 사랑하고 다른 백성은 사랑하지 않아요.

이를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 속에는 두 백성이 있습니다.

언약을 펼쳐 보이기 위해서 하나님은 두 민족으로 나누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이 세상엔 두 부류의 인간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라 함은 서로 하나 될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란 말입니다.

이 둘은 빛과 어둠처럼 하나 될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 될 수 없다는 것은 곧 다툼이 전제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둘은 항상 전쟁을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어서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속한 자를 여자의 후손이라고 하고, 마귀에게 속한 자를 뱀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 역할을 담당하고, 뱀의 후손은 마귀 역할을 담당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 역할을 맡았고, 어떤 사람은 마귀 역할을 맡았습니다.

야곱과 에서처럼 각자 맡은 역할로 살아가게 됩니다.

 

창세전 언약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이 마귀에게 죽임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은 죽임 당하는 모습으로 있고, 뱀에게 속한 자들은 예수에게 속한 자들을 죽이는 자로 서 있게 됩니다.

이는 곧 예수님에게 속한 성도는 약한 자로 드러나 있고, 마귀에게 속한 자들은 강한 자로 드러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은 예수님처럼 죽임 당하는 사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고,

마귀의 역할을 맡은 사람은 마귀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듯이 지금도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들을 죽이는 일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가서에도 보면 이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술람미는 예수님 편에 속하였고,

예루살렘 여자들은 마귀 편에 속하였습니다.

모두가 언약을 위하여 각자 맡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차 이 세상에서 언약이라는 드라마가 끝나면 각자 주어진 곳으로 가게 됩니다.

예수님에게 속한 자는 천국으로 가고, 마귀에게 속한 자는 지옥으로 갑니다.

이를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양과 염소를 각각의 우리에 둔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습을 교회 안에 축소판으로 담아 놓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두 부류의 교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아브라함의 한 집안에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는 목자가 양을 치는데 우리 속에 염소와 양을 함께 두고 방목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방목을 할 때는 함께 섞어 놓았지만 저녁이 되어 우리에 가둘 때는 양은 양의 우리로 염소는 염소의 우리로 각각 분리해서 가둡니다.

이는 장차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으로 분리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양과 염소의 방목 현장을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그대로 배치해 두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양으로 쓰임 받고 있고, 어떤 사람은 염소로 쓰임 받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언약을 펼쳐 보이시는 데에는 양과 염소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한 교회 안에는 양도 있고 염소가 함께 섞여 있는 것입니다.

 

이게 구약의 족장들의 가정사에 그대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이라는 아들과 이삭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이삭에겐 야곱이라는 아들과 에서라는 아들이 있었고!

야곱에겐 요셉이라는 아들과 그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이 둘은 서로가 갈등하는 구조로 놓여져 있습니다.

하나는 양으로서 하나는 염소로서 배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기능적으로 선택을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지고 두 세계에 속한 사람들로 구분을 해서 연극을 하고 있는 것과 같아요.

이스라엘 속에도 영에 속한 역할을 맡은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두 민족 즉 두 언약이 어떻게 충돌하고 어떤 현상을 남기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양과 염소는 각자 본성이 다릅니다.

각자 본성대로 살아갑니다

염소는 들이 받는 기질로 살고, 양은 맨 날 얻어터지는 모습으로 살아요.

 

쉬운 말로 때리는 놈은 끝까지 때리고 맞는 놈은 끝까지 맞아요.

염소는 양을 들이 받음으로서 넌 남을 들이 받는 못된 놈이라고 고발당하고 있고!

양은 염소에게 들이 받혀서 피 흘려 죽어가면서 넌 선한 놈이라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말없이 죽어줌으로서 양의 조상으로 드러내셨고,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임으로서 염소의 조상으로 드러냈습니다.

이게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나타나요.

양 같은 성도는 묵묵히 받은 은혜로 봉사하고 섬기는데, 염소들은 항상 으뜸 노릇하면서 남을 판단하고 가시 노릇을 해요.

 

이걸 아브라함의 집안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게 했어요.

이스마엘과 이삭으로 비유한다면 이스마엘은 이삭을 괴롭혔어요.

이삭은 괴롭힘을 당하였구요.

이를 두고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두 언약이라고 하였고 육체로 난 자가 성령으로 난 자를 핍박 하였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담의 아들 가운데서도 가인과 아벨을 통하여 말해주었어요.

가인은 아벨을 돌로 쳐 죽여야 하고, 아벨은 가인에게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아가서 이야기로 본다면 예루살렘 여자들은 열심히 술람미를 핍박하여야 하고, 술람미는 열심히 예루살렘 여자들로부터 핍박을 당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언약이 이루어져요.

 

이 역할은 우리 힘으로 벗어 날수가 없어요.

양으로 나게 하고 염소로 나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양과 염소의 특징을 가지고 누가 양이고 누가 염소인지 분별 하면 되어요.

싸우지 말고 양이면 교제하고 염소면 멀리 하면 됩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같은 종자(種子)끼리 모인다는 말입니다.

교회 안이나 어느 집단이나 끼리끼리 모여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어찌 그리 죽이 척척 맞는지 신기할 정도에요.

 

이는 같은 종자들끼리는 서로 통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종자들끼리 서로 끌어 당겨요.

그래서 인간들은 둘만 모이면 같은 색깔끼리 짝짓기를 시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색깔의 사람들은 모두 내어 쫓고자 합니다.

이건 교회이든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집단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요.

항상 염소들은 교회이든 조직이든 기득권층으로 강한 자가 되어서 자기들 사상에 동조하지 않으면 가차 없이 핍박을 가하여 쫓아 내 버려요.

왜냐하면! 자기들의 조직을 지키자면 자기들의 사상에 동조하지 않는 자를 두면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편만 남기고 다 밀어내는 것입니다.

여기에 쫓겨난 자들은 하나님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버린 돌이었어요.

하나님은 버려진 예수님을 모퉁이 돌로 하여서 예수 때문에 버림 당한 자들을 모아여 하늘에 신령한 집을 지어요.

교회 안이든 어떤 조직이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가서는 술람미와 예루살렘 여자들을 통하여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펼쳐 보이시고 계신 것입니다.

의미심장한 것은 왕이 사랑하는 술람미를 왕을 사랑한다고 하는 예루살렘 여자들이 핍박을 가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왕의 사랑을 위하여서라는 명분으로 말입니다.

진정으로 왕을 사랑한다고 한다면 왕이 사랑하는 여자를 사랑하여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 반대로 왕이 사랑하는 여자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십자가 십자가 하면서 십자가 정신과 반하는 짓을 행하고 있어요.

 

이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어리석음을 드러나는 일을 하게 되어 있어요.

자신은 자기의 옳음을 주장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자기 스스로의 치부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몰라요.

 

이건 마치 아담과 하와가 치마를 만들어 입고 있는 것과 같아요.

아담과 하와는 스스로 치마를 해 입음으로서 난 죄었습니다 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너 왜? 치마를 입었는데!

너 내가 먹지 말라고 한 것을 먹었구나! 그러는 거에요.

 

죄인은 스스로 자기가 하는 말이나 행동으로 난 죄인입니다 라고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요.

그러니 어리석은 자들은 자기들 힘으로 자기들의 사상을 지켜내려고 자꾸만 어리석은 짓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본인은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난 아니야! 라고 하면서 어리석게도 난 이런 자입니다! 라고 스스로 정체를 밝히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죄인을 들추어내는 방법입니다.

 

이걸 구원론으로 말하면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을 자기 힘으로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자들이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자들을 예수의 생명이 없는 자들이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복음으로 사는 자들을 복음을 안다고 하는 자들이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아벨을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자 하는 가인이 죽인 것과 같아요.

아비의 사랑을 입은 요셉을 아비의 사랑을 입고자 하는 형제들이 죽인 것과 같단 말입니다.

아비의 사랑을 받은 자를 아비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자들이 죽여요.

약속으로 난 자가 육으로 난 자들에게 죽임을 당한단 말입니다.

이게 무지하게 중요해요.

 

어느 시대고 가짜들이 진짜들을 핍박했어요.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이에요.

이 세상에서 전개되는 창세전 언약의 구조가 그렇게 짜여져 있어요.

 

재미있는 것은 가짜들은 항상 믿음이 최고인 것처럼 나타났고 진짜들은 믿음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혼자 다 아는 척, 혼자 믿음 있는 척 하면서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자들은 가짜일 확률이 높아요.

왜냐하면! 진짜 복음을 받은 자들은 복음으로 남을 핍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짜 복음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 사랑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술람미처럼 왕의 사랑을 입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남을 헐뜯고 핍박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진짜 복음을 아는 성도는 남을 비판하고 심판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들이 사랑을 받은 자를 반드시 시기하고 핍박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자신이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랑받은 자를 시기하는 것입니다.

요셉을 보세요.

요셉은 아비의 사랑을 받았어요.

그 형제들은 못 받았어요.

그러니 시기해서 죽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사랑을 입고 살아가면 반드시 사랑을 입지 못한 자들이 공격을 해요.

왜냐하면! 그들 속엔 사랑을 받지 않아서 심령이 메말라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처럼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음이 강팍해요.

마음에 받은 사랑이 없으니 심령이 강팍하고 미움이 나오고 시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가 따로 있어요.

그런데 사랑 받지 못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사랑하겠다고 덤벼요.

자기 쪽에서 사랑을 만들어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 사랑이 날 사랑해 주세요! 라고 한다고 해서 생겨나나요.

사랑은 본능적으로 일어나야 해요.

날 사랑해 주세요! 그런다고 사랑이 주어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예루살렘 여자들은 날 사랑해 주세요! 라고 쫓아 다녔어요.

 

술람미는 솔로몬으로부터 사랑을 입었어요.

술람미가 솔로몬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솔로몬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사랑을 받고 있어요.

그러나 예루살렘 여자들은 솔로몬이 사랑하지도 않는데 자기들이 솔로몬을 사랑한다고 해요.

나는 솔로몬을 사랑합니다! 라고 하면서 진짜로 솔로몬이 사랑하는 술람미를 핍박을 하더란 말입니다.

 

이걸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허구가 실제를 밀어낸단 말입니다.

이 세상은 허구에요.

실상은 하늘에 있어요.

그래서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은 하늘로서 난 자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가짜 사랑이 진짜 사랑을 죽인단 말입니다.

 

이게 무지 무지하게 중요해요.

제가 복음 안다고 잘난 척 남을 판단하고 나대지 말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복음을 진짜로 아는 사람은 자랑치 않고 나대지 않아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신 사람은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판단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진짜 십자가를 맛보았으면 그럴 수가 없어요.

십자가는 남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죽어서 남을 살려내는 것이에요.

예수님이나 그에게 속한 성도들은 죽어가면서도 자기를 찌르는 자들을 용서 했어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맛 본 사람은 절대로 그 십자가로 남을 정죄하거나 죽이지 않아요.

내가 죽고 남을 살리는 모습으로 살아가요.

 

이걸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해요.

바울은 이를 두고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어요.

내 안에 사망이 역사하고 너희 안엔 생명이 역사한다고 했어요.

그러니 성도의 삶은 늘 도살당하는 양처럼 죽임 당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바로 마신 사람들은 하나 같이 용서를 토해내고 살았어요.

 

스데반이 그랬고!

12 제자들이 그렇게 살았고!

사도 바울이 그렇게 살았어요.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살았어요.

지금도 진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신 성도들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께 받은 사랑을 토해내면서 살아가요.

 

십자가 피 속엔 죄사함의 능력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 속엔 예수의 생명이 담겨져 있어요.

십자가 피를 마신 사람들은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베드로는 성도를 일컬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고 구원을 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벧후 1:1-10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보세요.

너희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라고 하지요.

이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셨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안에 들어온 자들에게 편지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신의 아들이 아니냐!

그러니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하려고 보배로운 믿음을 준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기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하잖아요.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은 우리가 행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행하게 하여 주겠다는 말씀이에요.

입었다는 말은 입혀주겠다는 뜻이에요.

우린 그냥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알아서 일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부르심을 입었나요?

신의 성품에 참예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하지요.

신의 성품이란? 예수님의 마음이에요.

 

이걸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했어요.

품으란 말은 이미 와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와 계시단 말입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서 마치 병아리가 알에서 부화되어 나오듯이 나타나게 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신의 성품에 누가 참예하게 하십니까.

하나님이 하게 하세요.

빌립보서를 봅시다.

 

빌 2:13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 안에 누가 있다고 합니까?

하나님이지요.

왜 계십니까?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와 계십니다.

오셔서 뭘 합니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살도록 소원을 두고 행하시게 하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이건 우리가 행하여야 할 행함이 아니고 성령이 행하게 하실 일들이에요.

이걸 베드로는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했어요.

그러니 우 안에서 성령이 알아서 툭툭 간섭하세요.

그러면 나도 모르게 신의 성품에 속한 것들이 툭툭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만약에 너희 안에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고 어둠에 있는 자라고 했어요.

어둠에 있다는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예수 밖에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 속에 예수의 생명이 없으니까 예수님의 성품이나 속성들이 안 나타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건 이렇게 가게 되어 있다는 방향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되도록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맛본 성도들은 연약한 자들을 보면 아파하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섬기고 봉사하며 살아갔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인도 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늘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하는 모습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온전하게 살았다는 말이 아니고 이런 정신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한다는 것은 그건 십자가를 지식으로만 알고 있고 정작 십자가의 피를 마시지 않았다는 반증이에요.

진짜로 예수의 살과 피를 마신 사람들은 남을 공격하는 자가 아니라 긍휼히 여기는 자들이에요.

 

이건 술람미와 예루살렘 여자들 간에 나타나는 차이를 보면 대번에 알 수가 있어요.

술람미는 왕의 사랑을 입었기 때문에 절대로 예루살렘 여자들을 핍박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자칭 왕을 사랑한다고 하는 예루살렘 여자들은 술람미를 핍박했어요.

왕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였기에 왕에 사랑을 받는 자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마치 가인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아벨을 죽이는 것입니다.

가인이 자기 제사가 거부되고 하나님이 아벨을 제사를 열납하자 하나님이 기뻐하는 아벨이 미워서 돌로 쳐 죽였어요.

예루살렘 여자들이 가인처럼 술람미를 핍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이 인류 역사 전반에 흐르고 있어요.

지금도 교회 안에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드러나고 있어요.

꼭 일하지 않는 것들이 일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들이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자들을 핍박해요.

염소처럼 들이 받는단 말입니다.

 

성도가 은혜 받아서 섬기고 봉사하고 충성하면 감사하고 기뻐하여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요.

괜히 입을 삐쭉 거리고 시기하고 그래요.

그 이유는 단 하나 자기 안에는 이런 은사 받은 것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남들이 일을 하면 자기 믿음 없음이 드러나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태를 빛이 어둠에 비취니 어둠이 자기 악함이 드러나자 빛을 미워한다고 하셨어요.

못하게 하여야 자기 믿음 없음이 감추어지잖아요.

 

요한 삼서에 보면 디오드레베가 그랬어요.

 

요삼 1:9-11절.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10.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는도다 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 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보세요.

자기는 하지도 않으면서 하는 사람들을 좇아낸다고 하잖아요.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뵌 적이 없어요.

본 척 하는 것뿐이에요.

성령을 받지 않았단 말입니다.

성령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을 행위라고 몰아붙여서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교회 안에서 늘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또 중요한 말을 하니 잘 들으세요.

 

예루살렘 여자들이 왜 술람미를 핍박한 줄 아세요.

그건 예루살렘 여자들은 자기들 방식으로 왕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에게는 자기들만의 사랑 받는 방식이 정해져 있었어요.

그래서 자기들 방식으로 왕에게 나아가면 왕이 사랑해 줄 것이라고 믿었어요.

 

그러니 자기 조건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정도 되면 왕이 사랑해 줄 것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법이고 우상성이에요.

 

예루살렘 여자들은 왕이 술람미를 사랑하는 것을 자기들 방식으로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자기들 기준에는 왕후가 되려면 가문도 좋고 교양도 있고 품격이 있어야 해요.

왕후의 자격이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술람미는 이 조건에 하나도 충족하지 않아요.

자기들 기준으로 판단하니 술람미는 왕후 자격도 안 되고 왕의 사랑을 받아선 안 되어요.

왕후가 되려면 최소한도 자신들과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왕이 천한 노예를 사랑하니 이건 궁궐의 법도에 어긋난다고 시위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어느 조직에 가입 하려면 그 심사 기준에 통과하여야만 한다고 하는 것과 같아요.

술람미는 그 심사 기준에 미달이에요.

왕이 그런 여자를 사랑하면 안 되어요.

왕실의 체통에 흠이 가요.

 

그런데 솔로몬은 왕실의 체통에 흠이 가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이 왕족들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술람미를 넌 왕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핍박을 가한 것입니다.

정작 왕은 술람미를 사랑하고 있는데 말이죠.

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한국교회 안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요.

큰 교회들은 자기들만의 교육시스템이 있어요.

다른 교회에서 오는 사람은 무조건 4주 교육을 이수하여야 그 교회의 일원으로 활동할 수가 있는 자격을 주어요.

 

자기들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복음도 모르는 것들이라고 거드름 피우면서 끼워주지 않잖아요.

이게 무슨 은혜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모임입니까?!

사단의 회이지!

 

이 시대 교회는 마치 예루살렘 여자들과 같아요.

예루살렘 여자들은 자기들 방식으로 왕을 사랑 한 것이 결국엔 왕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을 죽이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만 것입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주를 삼켰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이 솔로몬의 사랑을 받고 있는 술람미를 핍박한 것은 곧 솔로몬 왕을 죽이는 것과 동일해요.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와서 보니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자신들이야 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집단이라고 믿었어요.

자기들만 복음 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영적 교만에 빠져 자기들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세리와 창기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죄인들이라고 정죄하여서 상종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신앙 기준과 복음의 기준과 심판 기준을 가지고 있었어요.

자기들이 정해 놓은 교리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자기들 기준대로 심판 하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이걸 우상성이라고 합니다.

 

우상성이란? 어떤 것을 형식화하여 고정화시키고 신봉하는 것을 말해요.

어떤 사상을 틀처럼 정형화시키고 그걸 진리로 믿는단 말입니다.

이처럼 우상성이란? 하나님의 일하심을 자기들 사고에 가두어서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자신들이 예측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걸 법이라고 합니다.

법은 고정화 되어 있습니다.

틀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 틀 속에 들어가면 인정받고 틀리면 쫓겨나요.

 

법은 반드시 그 정한 규정에 따라서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되면 복 받을 짓을 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복을 주어야 하고,

반대로 저주 받을 짓을 하면 반드시 저주를 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이런 법아래서 태어나고 법아래서 살아가고 있어요.

이게 우리들 본성이에요.

그러니 예수를 믿어도 복음을 법으로 바꿔치기 해서 소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소유하였다고 하면 그 때부터 그 복음이 힘으로 작용해요.

십자가 피를 안다고 하는 것을 자기 소유로 삼게 되면 그 때부터 그 십자가 피는 남을 판단하고 죽이는 도구로 활용이 되어요.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이 소유한 복음은 은혜에 속한 것이 아니고 법에 속한 것이 되고 말아요.

법에 속하였으니 그 복음으로 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법은 반드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게 되어 있어요.

그 사람에겐 십자가가 자기 안에서 법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그 때부터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쪽으로 일하지 않고 죽이는 쪽으로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 십자가 하면서 십자가를 가리는 십자가의 원수 노릇을 하게 되어요.

이건 십자가 피를 마신 사람과 지식으로 십자가를 아는 사람을 구별하는 시금석이에요.

아주 중요한 말을 했으니 귀에 담아놓으세요.

 

이건 마치 유대인들이 좋은 율법을 가지고 악하게 사용한 것과 같아요.

율법도 선한 것이고 복음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의 실상을 깨닫게 하여 하나님의 은혜 아래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에 의미를 알았다면 세리와 창기들을 핍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알았다면 예수그리스도에게 나아갔어야 했어요.

주여 불쌍히 여겨 주세요! 라고 하여야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율법을 법으로 가지고 있어서 예수를 죽이는데 사용하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고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정한 법에 따라 자신들은 천국에 간다고 굳게 믿었어요.

그래서 자기들과 다른 세리와 창기들은 당연히 지옥에 가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누구라도 이 법칙에 벗어나면 그는 이단으로서 죽임 당하여야 할 자라고 정죄하였여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법칙을 깨트려 버리십니다.

자신들이 조상대대로 전통적으로 믿어 왔던 방식을 깨트렸습니다.

당연히 자신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여 천국에 간다고 믿던 자들을 지옥으로 보내고 마땅히 저주 받아 지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던 세리와 창기들을 천국으로 보냅니다.

 

그러니 일대 혼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기들 신앙을 송두리째 뒤집어엎어 버리는 사태가 일어난 것입니다.

자신들이 예측 가능하였던 신앙관이 일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만 것입니다.

자기들이 알고 있는 방식이 무너져 내리자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소리칩니다.

저 놈 죽여라!

우리와 다른 말을 하는 놈은 죽여야 한다고 해서 죽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발생 한 것입니다.

 

지금도 그러잖아요.

교회나 조직에서 다른 말을 하면 이단이라고 매도하고 핍박하잖아요.

다른 말 하지 말고 자기들과 같은 말을 하라고 하잖아요.

이건 곧 자기들이 정한 기준으로 하라는 거에요.

결국 법으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법에 가두어지면 다른 말을 용납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자기 안에 가두어서 판단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린 법을 좋아해요.

그래서 교회이든 조직이든 자기들이 정한 법대로 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럼 그 조직에서 살아남고자 하면 어떻게 할지를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당신들이 원하는 말을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라는 말은 당신들이 원하는 법을 달라는 말입니다.

방법론을 알려 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하나님의 일하심을 자가 안에 가둔 우상성이라고 하고 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우상성을 죄라고 고발하기 위해서 인간들이 알고 있는 방식을 비껴서 일을 하십니다.

이를 법이 은혜를 담아내지를 못한다고 해요.

묵시가 하는 일은 역사가 포착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면 알아듣는 사람도 있고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럼 누가 복음을 못 알아들으면 아~ 하나님께서 못 알아듣게 하는가 보다! 라고 생각하고 그냥 기다리면 되어요.

그런데도 간섭하려고 하고 자기들 소리를 하라고 강요를 해요.

이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 사상을 전하는 것이에요.

그러니 자기들 말에 동조하는 사람들만 남기고 모두 쫓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가 은혜입니다.

은혜란? 거저 주어지는 것을 말해요.

어떤 조건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을 말해요.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어떻게 라는 방법이 필요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은혜 줄 자에겐 은혜를 주세요.

 

그냥 공짜에요.

복 받을 자격이 없는데 복이 임하였습니다.

술람미에게 사랑이 임하였듯이 그냥 아무조건 없이 임하여요.

그래서 은혜인 것입니다.

사랑받지 못할 자인데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 앞에 서면 황감 한 것입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저절로 나와요.

 

술람미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요.

그런데 왕이 사랑을 했어요.

그래서 은혜인 것입니다.

술람미는 아무 조건 없이 왕에게 사랑을 받고 보니 어떻게 하든지 왕에게 사랑을 받아 보겠다고 하는 예루살렘 여자들이 불쌍하고 그들이 자신을 핍박을 해도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랑 받지 못하고 자신은 사랑받고 있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미안합니까?

그래서 때리면 맞고 욕하면 욕을 들어 먹는 것입니다.

자신은 이미 왕의 사랑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에요.

 

바울이 그랬잖아요.

죄인 중에 괴수가 은혜를 받으니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고자 달려드는 자들을 뭐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때리면 맞고 욕하면 욕을 먹는 것입니다.

복음에 빚진 자로서 긍휼의 마음으로 다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누가 시켜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그냥 마음속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때리고 감옥에 가둔 자들이 자살을 하려고 하자 그들을 말리면서 복음을 전하잖아요.

이게 주님께 사랑을 받은 자들의 모습이에요.

 

우리들도 내가 복음을 안다고 한다면 그건 하나님의 은혜에요.

그럼 나 복음 안다고 자랑하면서 남을 판단 할 것이 아니라 받은 복음으로 남을 섬겨야지요.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러지 않고 복음도 모르는 것들이 하면서 조소하잖아요.

얼마나 바울과 다릅니까!

 

바울은 과거 법 아래 있을 땐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죽여라 죽여라 했어요.

그러다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시고 난 후에 참아주고 이해하고 다가갔어요.

절대로 복음을 모른다고 남을 무시하거나 자기하고 다르다고 내치지 않았어요.

우린 바울을 말하면서 바울과 다른 복음의 모습들을 토해내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가 안다고 하는 십자가는 우상일 수가 있고 내가 안다고 하는 그 복음은 지식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세리와 창기들이 구원을 받았어요.

그럼 구원 받은 그것으로 구원 받지 못한 다른 창기들을 깔보고 비웃었겠어요.

아니겠지요.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이 예수님에게 용서 받았어요.

그럼 진정으로 용서 받음을 알면 다른 여자가 간음한다고 하여서 정죄 할 수가 있겠느냐입니다.

못하겠지요.

이게 용서 받은 자들의 모습이에요.

 

세리와 창기들은 당연히 지옥에 간다고 생각했는데 천국이 주어졌습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한마디로 헐~ 입니다.

유구무언입니다.

그러니 누구를 판단하거나 정죄 할 수가 없어요.

 

난 예수 믿어서 구원 받았다,

그러면 그건 은혜가 아니에요.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예수 믿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선물로 주어진 믿음으로 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와서 예수가 믿어져서 가는 것이에요.

그러니 예수 믿는다는 것을 잘난 척 자랑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복음 안다고 자랑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복음 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복음을 조건으로 가지고 있다는 증거에요.

그러니 교만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알면 입을 닫아야 하는데 도리어 남을 판단하고 심판자 노릇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 그 십자가는 우상이지요.

 

예수님은 믿음이 좋다고 잘난 척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던 바리새인들은 지옥으로 보냈어요.

바리새인들은 천국을 따 논 당상이라고 여겼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지옥에 가라고 하셨어요.

반대로 예수님은 우리가 마땅히 지옥에 가야 한다고 하던 세리와 창기들을 천국에 보냈어요.

이게 은혜에요.

 

바리새인들이나 세리와 창기들은 모두가 자기 조건으로 이미 판단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기 조건으로 결과를 가지고 있던 것을 역으로 일을 하셨어요.

전혀 자기들 조건과 상관없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은혜가 툭툭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선 상상도 하지 못하던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돌발 사태가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라는 돌발 사태가 임하면 반드시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역설적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솔로몬이 지금 그런 역설적인 사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하실 그런 사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자신들의 신분이나 품격으로 보면 당연히 왕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야만 해요.

지금까지 왕후는 그렇게 정해져 왔어요.

 

그런데 술로몬은 어떤 취향이 있는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왕후로서의 자격을 다 갖춘 여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천한 검둥이 노예를 사랑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황당합니까.

그래서 예루살렘 여자들이 길길이 날뛰는 것입니다.

이럴 순 없어!

이건 반칙이야! 라고 하면서 말이에요.

 

예루살렘 여자들은 유대교 아래 있는 율법 신앙자들을 상징해요.

예루살렘 여자라고 지칭하여 부르는 것은 예루살렘이 유대교의 본산이고 율법 신앙으로 다스려져 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같아요.

아가서가 예루살렘 여자들은 희고 아름답다고 표현하고 술람미는 검고 추하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종교적 의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이 희고 아름답다는 것은 자기 의(義)가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술람미는 검고 추하다는 것은 자기 의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처럼 자신의 품격으로 왕 앞에 당당히 나아가고자 했어요.

그래서 왕을 사랑하겠다고 한단 말입니다.

반면에 술람미는 아무 것도 내 세울 것이 없는 천한 노예에요.

세리와 창기들과 같은 여자에요.

자기 조건으로서는 도무지 왕 앞에 나아갈 수가 없어요.

왕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어요.

 

그런데 느닷없이 왕의 사랑을 입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몸 둘 바를 모르겠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미안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뭐라고 하여도 아무 소리 못하고 당하고만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몸 둘 바를 몰라요.

어찌 나 같은 것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단 말인가!

어떻게 이런 악당이 용서를 받는단 말인가!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은혜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일을 하신단 말이에요.

우리 모두 그런 은혜를 받았어요.

 

자기들은 당연히 왕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던 자들에게는 왕의 사랑이 거부가 되고,

에이~ 어떻게 나같이 천한 것이 왕의 사랑을 받을 수 있나! 라고 생각지도 않던 자에게 왕의 사랑이 덮쳐온 것입니다.

인간들 상식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느냐!

그러니 놀라기도 하지만 반발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들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낯설고 기분 나쁜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고 은혜가 증거되는 곳에는 육에 속한 자들의 극심한 반발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일하시는가 하면 인간들이 죄를 고발하고 우상성을 깨트리기 위함입니다.

우상성으로 예수를 믿으면 반드시 이런 돌발 사태가 발생해요.

가짜가 진짜를 구축하게 되어 있어요.

 

십자가를 우상성으로 가지고 있으면 십자가를 모른다고 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심판하고 핍박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십자가를 안다는 것이 틀이 되고 고정화되어 자기 기준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피로 구원하세요.

맞아요.

그러나 그 십자가 피가 생명으로 역사하는 것은 고정화 되어 정해져 있지 않아요.

다양하게 나타나요.

그러니 십자가 피가 역사하는 일을 정형화 된 것으로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일하심을 훼방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구원 할 자를 구원하십니다.

십자가 피를 아는 자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피를 마신 자들을 구원하세요.

은혜가 임하면 십자가 안에로 밀어 넣어져요.

은혜로 십자가 안으로 밀어 넣어진 자들은 나 십자가 피 안다고 자랑하며 나대지 않아요.

아니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십자가 앞에 서면 자신이 죄인임을 알아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자신은 나쁜 인간인 것을 알게 되는데 어찌 남을 판단 한단 말입니까.

빛이 비취면 자신은 지극히 미미한 벌레란 것을 알아요.

흙이고 안개이고 풀인 줄 알게 되어요.

자신이 벌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을 판단 할 수가 없지요.

이게 은혜 안에 있는 성도들이 특징이에요.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지극히 한 부분이라는 것이 깨달아지기 때문에 남을 판단 할 수가 없어져요.

 

바울이 로마서 11장에서 그러잖아요.

감람나무 비유를 하면서 잘난 척하던 유대인은 잘라내고 잘려나간 그 자리에 이방인을 접붙인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보이기 위함이라고!

그런데 나중에 이방인 중에서 또 유대인들처럼 잘난 척 하는 자들을 잘라내고 그 자리에 잘려져 나갔던 유대인을 접붙인다는 것을 알고 기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고 엄위에 거하지 말라고 경고하잖아요.

까불다가 짤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깊고도 높아서 인간은 감히 측량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감히 하나님의 일하심은 가타부타 논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입을 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울보다 더 신앙이 좋아서 그런지 다 판단하잖아요.

자기가 다 심판해 버리잖아요.

이 얼마나 교만한 짓입니까.

이는 모두가 하나님을 못 만났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아는 척 하는 것입니다.

 

욥이 그랬잖아요.

자신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다 안다고 하나님을 논했어요.

자기 정당성을 주장 했어요.

정당성을 주장한다는 것은 자기가 아는 것이 있기 때문에 주장하는 것입니다.

난 잘못이 없어!

그러는 것은 자신이 정한 기준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반응이에요.

 

욥이나 욥에 친구들은 모두가 자기들 기준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판단했어요.

하나님은 이렇게 일을 하시는 분이란 것을 정형화시켜서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 자신에게 일어나니 따지는 것입니다.

 

욥은 자기가 예측한 것대로라면 자신은 이런 저주를 받으면 안 되어요.

경건하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살았거든요.

요즘 식으로 십자가 피를 알거든요.

그러니 하나님께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진짜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주둥이를 닫아 버립니다.

주여~ 내가 개뿔도 모르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나댔습니다! 라고 회개합니다.

 

왜 주둥이를 닫습니까?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젠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는 이러쿵저러쿵 논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판단치 않겠다는 뜻입니다.

 

아니 생각을 해 보세요.

우린 피조물이에요.

피조물이 어찌 창조주가 하는 일을 다 알 수가 있겠습니까?

없어요.

 

피조물은 창조주를 제한적으로 밖에 알 수가 없어요.

자기 수준으로 밖에 알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우리 속에 가둘 수도 없거니와 가두어지지도 않아요.

우린 티끌이에요.

그런 놈들이 만유를 다스리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어찌 다 안다고 할 수가 있겠어요.

없어요.

안다고 하면 그건 가짜에요.

 

아니~ 나는 은혜 줄 자에겐 은혜를 주신다고 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은혜 주는 자를 안단 말입니까?

은혜란 우리의 생각 밖에서 펼쳐지는데 어찌 감지한단 말입니까?

못해요.

그런데도 우린 안다고 나대고 있어요.

모두를 판단하고 있다구요.

이 얼마나 교만한 일입니까.

 

이건 복음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안다고 하는 복음도 지극히 한 부분이에요.

십자가를 안다고 하여도 한 부분이에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신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지 다 알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피 속에는 죄사함도 들어가 있지만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능력도 있어요.

그러니 죄사함 받는다는 것으로 증거 될 수도 있고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모습으로 증거 될 수도 있어요.

 

누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복음이 증거 될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건 하나님만이 아실 수가 있어요.

그 누구도 그 사람이 복음을 다 안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저 사람은 진짜 복음을 알어! 라고 말할 순 없단 말입니다.

 

그 사람이 진짜로 예수의 살과 피를 마시고 전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식으로 전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통하여서도 얼마든지 복음을 전하게 하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안 받아도 지식으로도 얼마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어요.

 

바울이 그랬어요.

고린도전서 13장을 봅시다.

 

고전 13:1-3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이에요.

예수님의 사랑을 말해요.

사랑이라는 말은 곧 예수님과 동의어에요.

그런데 사랑이 없이도 종교적인 일들을 행할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랑이 없이도 천사의 말을 할 수가 있고!

사랑이 없이도 예언할 수가 있고!

사랑이 없이도 모든 비밀을 말할 수가 있고!

사랑이 없이도 모든 지식을 알 수가 있고!

사랑이 없이도 능력을 행할 수가 있고!

사랑이 없이도 자신을 불사르는데 내어 줄 수 있다고 하잖아요.

 

여기서 사랑이란? 예수님을 말해요.

그러니 예수 안 믿어도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거짓 선지자들도 얼마든지 복음 전할 수 있어요.

가룟 유다도 파송을 받아서 복음 전했어요.

발람처럼 예수 안 믿어도 얼마든지 복음 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서 우리가 선지자 노릇하고 병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고 능력을 행하였다고 하잖아요.

이들은 실제로 이런 일을 했어요.

모두가 예수님 이름으로 일하고 영광을 받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난 너희들 모르는데 라고 하잖아요.

이 놈들은 전부 예수 이름 팔아서 자기 영광을 챙긴 놈들이에요.

어느 시대고 거짓 선지자들이 특징은 돈을 밝히는 것으로 나타나요.

 

구약이든 신약이든 거짓 선지자들은 삯을 위하여 일을 하였어요.

그러니 거짓선지자들이 다니는 곳엔 반드시 돈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이단들을 보세요.

모두가 복음을 돈 벌이 하는 수단으로 이용하였단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누구의 말을 듣지 말고 그 사람의 행실을 보라고 한 것입니다.

 

히 13:7절.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 받으라”

 

저희 행실을 주의해서 보라고 하잖아요.

복음 안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그 복음이 지향하는 삶을 살게 되어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건 죽은 복음이에요.

 

귀신의 믿음이에요.

마귀의 사자들도 얼마든지 광명의 찬사로 위장해서 복음의 사역자로 일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행실이 전하는 복음과 연합한 것이 아니면 가짜라는 것입니다.

잘 살펴서 주의해서 보라고 하잖아요.

잘 살펴서 주의하고 보라는 것은 말과 행동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 속에 예수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명이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매로 나무를 알라고 하신 이유가 다 이런 것 때문이에요.

삶이란? 그 안에 있는 것으로 풀어내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포도나무에선 포도가 맺히고 사과나무에선 사과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 속에 예수의 피가 흐르면 예수의 삶이 토해져 나오고 예수의 피가 흐르지 않으면 마귀적인 삶이 토해져 나오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우리 안에 계신 분이 그렇게 몰아가세요.

그래서 성령의 열매를 일컬어 금지 할 수 없는 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이끄시기 때문에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마음들이 삶에서 툭툭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건 삶에 온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가는 정신을 말해요.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판단 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 우린 분별만 할 뿐이지 판단하고 심판 할 수는 없어요.

그러므로 드러내 놓고 누구를 판단하지는 마세요.

혹여라도 내 판단이 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절대로 누굴 판단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타인의 신앙은 우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제발 우리는 서로 남의 신앙을 판단하지 말자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믿음 있다 없다!

누가 복음을 안다! 모른다!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왜 그렇게 점쟁이와 도사들이 많은지 몰라요.

다 안다고 하는 자들이 많은지 모르겠어요.

어디서 그런 도사들이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그렇게 통달했는지 모르겠어요.

전 세계에서 복음 아는 사람이 자기 밖에 없다는 식으로 다 판단하잖아요.

가만히 들으면 자기가 아는 십자가만 진짜이고 나머진 다 가짜에요.

복음을 은혜로 알게 된 자의 모습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고자 하여도 볼 수가 없어요.

 

바울의 기도를 들어보세요.

 

엡 3:14-19절.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기를 구하지요.

이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궁무진 하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너무도 커서 우리 지식으로는 다 담아 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좀 더 넓게!

좀 더 길게!

좀 더 높이!

좀 더 깊이 알아가기를 기도하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성경을 보면 늘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되지요.

동일한 말씀이라도 오늘 볼 때에 깨닫는 은혜가 다르고 내일 깨닫는 은혜가 달라요.

이는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측량할 수 없이 깊고 넓고 많다는 뜻입니다.

 

오늘 알았다고 그것이 다 안 것이라고 자긍하지 말란 말입니다.

오늘 만큼만 안 것이에요.

내일은 또 내일 알아야 할 은혜가 있어요.

이는 곧 내가 아는 복음의 깊이도 내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아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린 하나님이 일하심을 다 판단하고 있어요.

자기 이외는 십자가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해요.

심지어 성경도 자기가 해석하는 것이 맞고 남이 하는 것은 다 틀렸다고 해요.

자기 교회 이외는 복음 전하는 교회가 없다고 하고 있어요.

 

이걸 엘리야이즘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온 이스라엘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자기 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요즘 식으로 자기만 복음 안다고 했어요.

하나님께 나만 남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웃기고 있네!

야~ 이 놈아! 네가 모르는 칠천 명이 있어!

꼴값 떨지 말고 찌그러져 있어!

그랬다구요.

 

칠천 명이란? 숫자적으로 칠천 명이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작정한 모든 사람을 말해요.

그러나 그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몰라요.

엘리야 눈에 다 하나님을 떠났다고 생각하였지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고 있잖아요.

그런데도 엘리야는 자기만 남았다고 꼴값을 떨고 있어요.

 

우린 이런 말씀 앞에 부끄러워하여야 하는데 도리어 엘리야처럼 하고 있어요.

우리도 엘리야처럼 나만 복음 안다고 꼴값 떨고 있다구요.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하나님을 엘리야를 가지고 지금 우리를 책망하고 있는데 우린 그 책망을 듣고 있지 않아요.

 

그러니 엘리야와 똑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우리 밖에 복음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잖아요.

하나님은 엘리야가 아는 식으로만 일하시지 않아요.

하나님은 엘리야의 눈으로는 포착이 될 수가 없게 일을 하셨어요.

 

엘리야는 자기 식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판단하였기 때문에 자기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자기 눈에는 다 이단으로 보인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자기 안에 가두고 법으로 판단해 버리는 우상성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복음 전하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고 주접을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초대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 나타났어요.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분파가 형성되는 식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바울파다!

게바파다!

아볼로파다!

그리스도파다!

그리스도의 몸을 전부 쪼개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분파로 나누어졌다는 말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그 사람만 복음을 안다는 뜻이에요.

그러니 자기 선생을 추종하는 팬클럽이 형성이 되고 그 사람의 사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면서 싸우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만히 들으니 가관인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그리스도가 나뉘었느냐!

이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이 사용하는 사역자들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밭가는 일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씨 뿌리는 일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물 주는 일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풀 뽑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각자 맡은 일을 하고 있는데 왜 각자의 일을 가지고 맞다 틀리다 를 판단하느냐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각자의 포지션에서 보면 다 이단으로 보여요.

밭을 가는 사람들은 밭가는 사람 입장에서만 보니 밭가는 것만이 복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반대로 물을 주는 사람 입장에선 물 주는 것만이 복음이라고 생각해요.

씨 뿌리는 사람 입장에서도 씨 뿌리는 것만 복음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사고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게 되면 자기 식으로 일하지 않고 자기와 다른 사람들은 전부 복음도 모르는 이단으로 보여요.

그러니 편당을 지어서 남을 용납하지 못하고 자기만 옳다고 싸우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그랬어요.

지금은 오죽 하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화딱지가 나서 욕을 해 대는 것입니다.

야! 이 놈들아!

니들이 뭔데 남을 판단하느냐!

너희도 판단 받아야 할 놈들인데 누가 누굴 판단하느냐! 라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내가 가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합니다.

 

에덴동산에 보면 네 강이 흐르지요.

 

창 2:10-14절.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12.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14. 세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네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잘 보세요.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서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서 네 근원이 되었지요.

중요하니 잘 들으세요.

 

에덴동산에서 흐르던 강물이 에스겔 47장을 보면 성전 문지방에서 나오는 물로 나타나요.

그리곤 요한계시록 22장에서는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로 나타나요.

이 생명수가 예수님께선 수가성 여인에게 말씀 하실 때는 그 뱃속에서 솟아난다고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생명수를 성령이라고 했어요.

그럼 에덴동산에서 흐르던 강물은 곧 성령이라는 말입니다.

 

강물이 가는 곳마다 생명을 살려내지요.

이는 성령이 역사하는 곳마다 생명이 살아난단 말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에요.

그럼 성령이 역사하면 예수님을 알아가는 사람들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성령으로 복음이 증거되는 현장에는 은혜 받는 사람들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에덴동산에서 흘러내리는 강물은 에덴동산에서는 한 줄기인데 이게 세상으로 나타날 땐 네 줄기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중요해요.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각각의 이름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이름으로 흐르지만 이 물이 가는 곳마다 보석들을 생산해 내지요.

이는 성도를 보석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을 보면 하늘 예루살렘 성을 보석으로 지어졌어요.

이 보석들로 지어진 성곽에는 12 문이 있는데 그 문에 12지파 이름이 적혀 있어요.

그리고 그 성곽의 기초석은 12 사도의 기초석으로 지어졌어요.

이는 구원 받은 모든 성도들을 말해요.

그러니 성도가 보석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기초석이 전부 다른 이름을 가진 보석들이라는 거에요.

 

계 21:19-20절.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세째는 옥수요 네째는 녹보석이요 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 한째는 청옥이요 열 둘째는 자정이라”

 

보석이 전부 다르지요.

이 보석이 어디서 만들어졌나요.

에덴동산에서 흐르던 강물들이 생산해 냈지요.

에덴동산의 강물은 성령이라고 했지요.

그럼 성령이 각양의 보석을 생산해 내지요.

보석이 각양의 모습으로 다르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은사적인 의미도 있지만 사역적인 의미도 있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이나 에스겔서에 보면 성령을 네 생물이라고도 하고 스가랴서나 다니엘서에 보면 네 병거 또는 네 바람이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이 다양한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그러니 나와 다른 보석이라고 이단이라고 내다 버리면 안 되겠지요.

그런데 우린 나와 다른 보석은 이단이라고 내다버리고 있잖아요.

 

에덴동산에서 흐르던 물이 네 근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근원이란? ‘로쉬’ 라고 하는데 이는 머리, 우두머리, 족장, 두목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어졌어요.

그럼 물은 의인화하고 있지요.

이는 곧 한 성령 안에서 다양한 사역자들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한 성령 안에서 12 제자들처럼 각각의 사역자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아론이 입은 흉패에 보면 12 가지 보석들이 달려 있어요.

이는 아론은 대 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그에게 달린 보석은 12 지파 또는 12 제자들을 상징해요.

12 지파나 12 제자는 또한 모든 성도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모두가 한 예수님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한 성령을 마신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성령이 에스겔 1장이나 요한계시록을 4장을 보면 성령이 네 생물로 나타나고,

다니엘 7장이나 스가랴 6장에선 네 병거 또는 네 바람으로 나타난다고 했지요.

그러니 에덴동산에서 흐르던 네 강은 천상에선 네 생물로 나타나고 이 세상에선 네 병거 또는 네 바람으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성령이 이 땅에서 일하시는 모습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흐르던 물이 세상에서 나타날 때는 각각의 이름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이름으로 흐른다는 것은 각양의 모습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12 제자들처럼 각각의 모습으로 복음을 증거한단 말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말한 것처럼 각자의 사역을 감당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씨 뿌리는 모습으로 일하고!

어떤 사람은 물 주는 모습으로 일하고!

어떤 사람은 밭 가는 모습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와 다르다고 배척하지 말란 말입니다.

 

에덴동산에 강이 네 근원으로 갈라지면서 각각의 이름을 받습니다.

 

첫째 강은 비손이라는 이름으로 흐르고!

둘째 강은 기혼이라는 이름으로 흐르고!

셋째강은 힛데겔이라는 이름으로 흐르고!

넷째강은 유브라데라는 이름으로 흘러요.

 

각각의 이름으로 흐른다는 말은 각각의 이름이 주는 사명 즉 사역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럼 비손이라는 강물을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어느 날 기혼이나 힛데겔이나 유브라데 강가에 살던 사람들이 마실을 왔다가 자기 동네에 흐르는 것과 같은 강물을 보고 각각 자기 동네의 강 이름으로 야! 여기도 기혼 강이 흐르네! 힛데겔 강이 흐르네! 유브라데 강이 흐르네 라고 하였다고 합시다.

다 다르게 부르지요.

그럼 서로가 이름이 틀리다고 다투겠지요.

 

비손이라는 강물이라고만 알고 있던 사람은 뭐라고 하겠어요.

무슨 말이야 이건 비손 강물이야!

이에 기혼에서 온 사람은 아닌데 기혼 강인데 라고 할 것 아닙니까?

이렇게 되면 서로가 서로를 이단이라고 싸우겠지요.

왜 싸웁니까?

이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에덴이라는 원천에서 바라보면 싸울 일이 아니고 아~ 하나님께서 이렇게도 일하시는구나! 라고 하면서 서로 용납하겠지요.

그런데 자기들 동네의 강물로 판단하니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이걸 법이라고 하고 우상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지금 우리에게 적용해 보세요.

우린 각각 받은 은혜들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비손 강물의 은혜를 받았고!

어떤 사람은 기혼 강물의 은혜를 받았고!

어떤 사람은 힛데겔 강물의 은혜를 받았고!

어떤 사람은 유브라데 강물의 은혜를 받았어요.

 

다른 말로 어떤 사람은 베드로 식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어떤 사람은 바울 식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어떤 사람은 아볼로 식으로 복음을 증거하겠지요.

각각 받은 은혜로 주님을 증거하겠지요.

 

각각 받은 은혜가 있으니 그 은혜가 동일하게 나타나진 않겠지요.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 아닙니까?

그럼 우리는 서로의 모습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예수를 부인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면 아~ 하나님께서 저 사람은 저렇게 다루시고 계시는구나! 라고 하여야 해요.

그렇잖아요.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다 동일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강물 이름이 다르다고 서로 이단이라고 하면서 싸우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제발 지향하는 바가 같으면 판단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같은 색깔로 맞추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각각 받은 은혜가 다른데 같은 말을 하라고 하느냐!

십자가를 부정하지만 않으면 그냥 두고 보자는 것입니다.

나와 좀 다르더라도 예수를 부인하지만 않으면 참아 보자는 거에요.

왜?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다 아는 것처럼 판단하느냐에요.

 

그 사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하나님께 맡기고 각자 받은 은혜로 주어진 곳에서 복음을 전하자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말을 하더라도 예수를 저주하고 부인하지 않으면 판단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린 그러지를 못하고 있어요.

죽어도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하면서 기어코 돌로 쳐 죽이고 말아요.

 

어느 설교든지 생각이 다르면 안 들으면 되어요.

자기 입맛에 맞는 설교를 들으면 돼요.

다른 사람들이 은혜 잘 받고 있잖아요.

맛나게 잘 먹고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자기 입맛에 안 맞다고 남의 집에 불을 지르려고 해요.

 

어느 음식점이든지 그 집 주방장의 음식 맛이 자기 입맛에 안 맞으면 자기 입맛에 맞는 주방장을 찾아가서 먹으면 되어요.

그런데도 자기가 뜯어 고치겠대요.

아니 하나님이 그 주방장을 잘 사용하고 있는데 왜? 우리가 나서서 주방장을 갈려고 합니까.

 

왜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는가 하면 죄 때문이에요.

죄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자기 안에 가두고자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에요.

이걸 우상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하나님을 형상화하여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시면서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고정화시키지 말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고정 될 수가 없는 분이에요.

 

비손 강물도 돌보고,

기혼 강물도 돌보고,

힛데겔 강물도 돌보고,

유브라데 강물도 돌보아야 해요.

 

한국교회도 돌보고!

미국교회도 돌보고!

중국교회도 돌보고!

아프리카 교회도 돌보아야 해요.

 

모두가 우리 수준과 같지 않아요.

어떤 사람은 어린아이이고 어떤 사람은 어른이고 그래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느 동네에 가두어져서 고정화되어 있으면 안 되어요.

그러니 “나”의 하나님으로 가두지 말고 “우리” 하나님으로 두세요.

 

“나”를 “우리” 안에 집어넣고 해체시키세요.

나로 살면 끝까지 우상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어 있어요.

나의 하나님은 없어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우리 하나님만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일을 하실 땐 우리 생각을 비껴가시면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 가두어지지 않게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깨트리면서 일을 하세요.

우리가 만들어 놓은 하나님은 이렇게 일을 하신다 라는 그 틀을 깨면서 일을 하세요.

그런데 우린 늘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상화 하려고 해요.

그래야 우리가 편하거든요.

 

우리는 낯선 하나님은 싫어요.

예측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불안한 것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틀 박에서 일하는 하나님이 낯설어서 싫어요.

그래서 진짜 하나님은 구축하고 자기가 아는 하나님만 섬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하나님도 자기 안에 가두고자 해요.

천국도 자기가 그려요.

마치 화가가 풍경을 캔버스에 담는 것처럼 담아 놓고자 합니다.

인간들이 왜? 풍경을 보고서 야! 그림 같다고 합니까?

이는 풍경은 너무도 광대하여서 부담스러워요.

그래서 그림 속으로 그 풍경을 일 부분으로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가두어 두어야 예측이 가능하고 안심이 되거든요.

 

이를 유사가 본질을 구축한다고 해요.

허상이 실상을 배척한다고 합니다.

그림은 허상이고 풍경은 실상이에요.

그림은 유사이고 풍경이 본질이에요.

 

우린 허상이고 유사인 그림을 돈을 주고 집안에다 걸어 놓고 야~ 멋지다 하고 있어요.

밖에 나가면 실상인 풍경이 장엄하게 펼쳐져서 압도하는데 우린 그걸 바라보기 보단 실상을 허상으로 만들어 놓은 그림만 쳐다보면서 좋다고 감상하고 있어요.

그림 속에 가두어진 단풍을 보고서 마치 모든 단풍을 다 본 것처럼 말하고 있어요.

 

자기가 아는 한 부분의 하나님으로 마치 다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구요.

하나님은 풍경처럼 너무도 광대하여서 가둘 수가 없는데도 우린 한 부분의 하나님만 자기 생각에 가두고선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교만을 떨고 있단 말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상성으로 복음을 소유하게 되면 의처증 환자들처럼 되어요.

그래서 신앙생활을 의처증 환자들처럼 하고 있어요.

의처증 환자들은 배우자의 일거수일투족을 훤히 들여다보아야 안심을 해요.

자기가 다 알고 있어야 안심이 되어요.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요.

 

그래서 심지어 그 사람의 생각까지도 알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수시로 전화하거나 미행하고 감찰하는 것입니다.

함께 있어도 저 인간이 혹시 누구를 만나는 것은 아닌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불안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도 자기만 전해야 되요.

남들이 하는 것은 못 믿어요.

불안해요.

그러니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하는 것입니다.

이건 그만큼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지 않고 있다는 증거에요.

하나님을 자기 속에 가두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하고 다르면 다 이단이라고 배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의 신앙 속에도 그대로 녹아져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일하심도 자기가 다 아는 것처럼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곤 그 안다고 하는 것으로 모두를 판단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갖지 아니하면 복음 모르는 자로 치부해 버리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성경을 각각 받은 은혜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였어요.

그런데 사도들의 서신서들을 따로 따로 하나씩 쪽 복음으로 나누어서 보면 다 달라요.

루터 같은 사람도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했어요.

그 유명한 사람이 말이에요.

그러나 야고보서도 하나로 종합하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고 있어요.

귀한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그러므로 믿음 속에는 이런 행함들이 나타납니다! 라고 하면 복음으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가 왜? 믿음을 말하면서 행함이 없는 것은 죽은 믿음이다 라고 하는지 아세요.

야고보서 2장을 보면 교회 안에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이 왔는데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자들이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깔보고 무시하더란 말입니다.

요즘말로 복음 모른다고 깔보는 것과 같아요.

외모로 판단한다는 것은 자기들의 기준으로 판단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법으로 판단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야~! 이 사람들아! 예수의 피를 마신 사람들이 왜? 그러느냐!

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느냐!

왜 하나님께 부르신 자들을 너희 기준으로 판단하느냐!

하나님도 우리를 외모로 판단치 않고 구원을 해 주셨는데 우린 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느냐!

네가 정녕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이 왔을지라도 형제의 사랑으로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안 나오면 가짜라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은 귀신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건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진짜 십자가를 알면 남을 판단 할 수가 없어요.

그 앞에 서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입을 닫을 수 밖에 없어요.

자기 꼬라지가 너무도 추해서 남을 판단할 수가 없어진다구요.

내가 개차반인데 어떻게 남을 판단 한단 말입니까.

남을 판단하는 십자가는 가짜에요.

그런 십자가는 없어요.

그건 관념이고 지식으로 아는 십자가에요.

 

우리가 아는 복음은 우리 것이 아니에요.

선물이고 은사에요.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랑치 못하고 판단치 못하는 것입니다.

그저 받은 은혜로 감사하며 살게 되어 있어요.

남을 판단 할 것이 아니고 유구무언으로 살게 되어요.

 

복음을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나도 저랬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깨닫게 되었으니 저 사람에게도 깨닫는 은혜가 임하였으면 좋겠다는 긍휼의 마음이 일어난다구요.

법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은혜가 나와요.

이건 이렇게 살라는 것이 아니에요.

주의 은혜가 이런 모습으로 나타내게 한다는 뜻이에요.

이건 우리 마음의 지향성을 말해요.

 

한 사람의 일어섬과 넘어짐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내가 이러퉁 저러쿵 말하지 못한단 말입니다.

저 사람은 복음을 아네! 모르네!

저 사람은 성령을 받았네! 안 받았네!

그러지 못한단 말입니다.

 

성령은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고 내 꼬라지를 보고 하나님 앞에서 유구무언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율법으로 정죄하여 하나님 앞에 입을 닫게 만들어요.

자기 죄가 너무도 극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할 말이 없어요.

내가 저 사람보다 더 형편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그러니 남을 판단할 수가 없어요.

내가 저 보다 더 큰 악당인데 어찌 남을 판단하겠어요.

못해요.

 

남을 판단한다는 것은 아직까지 자기 꼬라지가 어떤 줄 모르고 있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할 말이 없어져요.

남들이 나 보다 다 나은 것 같아요.

내가 더 쓰레기라는 것이 보여져요.

그러니 누가 어떤 일을 하여도 주여~ 긍휼을 베푸소서! 라는 말 밖에 할 말이 없어요.

 

우린 십자가 앞에 서면 입을 닫게 되어 있어요.

복음이 임하면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린 왜 그렇게 복음 안다고 하면서 입만 열면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죽이는지 몰라요.

이게 전부 복음을 자기 안에 가두어 우상성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바리새인들이 이런 법으로 고착화 된 우상성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어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들을 사랑하자 자신들의 신앙으로 예수님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좋다고 사랑하는데 왜 자기들이 그들을 사랑하면 안 된다고 난리를 칩니까.

이건 예수님도 자기 손아귀에서 조종하겠다는 거에요.

 

이걸 지금 우리들이 하고 있어요.

누가 남을 판단하든 말든 개의치 않으면 되는데!

구태여 그건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니 똑 같은 짓을 하고 있는 셈인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누구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간섭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그 사람을 간섭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각자 받은 은혜로 살고 각자 받은 것을 토해내면 되어요.

 

우린 복음을 알고 나면 복음 아는 것으로 엘리트로 살고 싶어해요.

복음 안다는 것으로 특권층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복음으로 울타리를 쳐요.

복음 모르는 다른 놈들은 들어오지마!

그런다구요.

 

이렇게 되면 복음을 안다는 것이 힘으로 작용해요.

이 힘이 곧 권력이 되어요.

그러니 복음 안다는 것을 힘으로 시용하여서 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를 우상성으로 변질시켜서 붙잡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십자가 피가 우상성이 되면 복음을 자기 틀로 고정화 시켜 놓게 되어요.

고정화 되면 그 고정화 된 것과 맞지 않으면 다 이단이라고 매도하게 되어 있어요.

우린 이런 일에 너무도 쉽게 빠져 들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 안엔 우상성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린 법아래서 태어났어요.

그렇기 때문에 법이 항상 우리 안에서 꿈틀 거려요.

자기만의 복음을 만들라고 해요.

법은 고정화 형식화 된 것을 선호한다고 했어요.

우린 법 아래 있기 때문에 자기 생각에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을 좋아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같은 교회 안에서도 나와 다른 생각을 하거나 다른 말을 하는 인간들이 있으면 싫은 것입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에요.

이건 복음을 아느냐 모르느냐와 상관없어요.

그래서 우린 서로가 서로에게 돌질을 하면서 상대를 죽이기도 하고 또한 죽임 당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둘 다 예수를 죽인 자들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부르신 자들을 자기하고 안 맞는다고 다 죽였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상대방에겐 예수의 증인으로 서 있으면서도 나 또한 예수를 죽이는 원수로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죄인들에게 예수님의 피를 뿌려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선 할 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주둥이 닫고 세세토록 어린 양만 찬양 할 수 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바로 예수 죽인 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분쟁을 어떻게 책망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롬 14:1-23절.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5.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15.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19.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20.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제일 먼저 믿음이 연약한 자를 비판하지 말라고 하지요.

이건 믿음이 크다 작다 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깨닫는 것과 적게 깨닫는 것을 말해요.

교회 안에는 아이도 있고 청년도 있고 아비들도 있어요.

사도 요한이 그러지요.

이건 어린 아이나 청년이나 어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차이를 말해요.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차이들이 천차만별인 사람들이 모여 있어요.

 

이걸 바울은 먹을 만한 사람과 먹지 못할 사람으로 구분해서 먹고 마시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로 적용해 봅시다.

어떤 사람은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전혀 개의치 않아요.

그러나 어떤 사람은 찜찜해 해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술로 생각해 봅시다.

한국교회에선 술 담배를 신앙의 척도로 삼고 있으니 비유로 살펴봅시다.

어떤 사람은 술을 먹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술 먹으면 안 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어요.

신앙이란? 술을 먹느냐 안 먹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고 산다는 것을 아는 것이에요.

술을 먹느냐 안 먹느냐의 문제는 건덕상의 문제이지 신앙의 본질이 아니에요.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신앙의 본질이 아니에요.

신앙의 본질은 우리에겐 의(義)가 없고 오직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서만 의(義)가 된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신앙은 자기 꼬라지를 보지 말고 예수님의 피를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 이런 것을 가지고 믿음이 있다 없다 복음을 안다 모른다 라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건 그 사람이 복음을 이해하는 깊이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술을 먹지만 나중에 안 먹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 술을 먹었다 안 먹었다 라는 것으로 신앙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날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요.

날이란? 각종 절기와 안식일을 말해요.

지금식으로 말하면 교회에 오는 날을 말하겠지요.

이는 더 폭 넓게 적용할 수 있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에 적용할 수가 있어요.

 

주일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교회 왔느냐! 안 왔느냐!

십일조 했느냐! 안 했느냐!

교회에 봉사 했느냐! 안했느냐!

이런 것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했느냐 안 했느냐는 신앙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우리가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했느냐 안 했느냐로 신앙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각자 받은 은혜에 따라서 하기도 하고 못하기도 하는 문제들이에요.

하는 사람도 있고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남과 비교할 이유가 없어요.

 

은혜를 많이 깨달은 사람은 남이 하든 안 하든 상관치 말고 하면 되어요.

내가 헌금 한다고 해서 왜? 너는 헌금 안하는데 그러면 안 되어요.

내가 교회 나온다고 해서 왜? 넌 교회 안 오는데 그러지 말란 말입니다.

그건 각자 믿음에 분량에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지요.

막달라 마리아가 깨트린 옥합을 가지고 탕감 받은 것으로 말씀하시지요.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했어요.

예수님은 모두 동일하게 탕감해 주었어요.

누군 많이 해주고 누군 적게 해주고 그러지 않았어요.

그러니 이건 탕감 받은 것을 얼마나 깊이 깨닫느냐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깨닫는 만큼 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은 이걸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 반드시 같이 증거하도록 했어요.

왜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 막달라 마리아 사건을 증거하라고 하셨겠어요.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깨닫는 만큼 주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에 가치를 깊이 알면 많이 사랑하게 되어 있고 모르면 적게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이건 강요할 문제가 아니에요.

본인이 깨닫는 문제인데 어찌 이래라 저래라 강요합니까.

 

그럼에도 우린 교회 안에서 이런 문제를 훨씬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교회라는 조직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몸담고 있는 조직을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그 조직에서 안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그늘에서 왕 노릇하고 싶기 때문이에요.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울타리 안에서 안주하고 싶어해요.

그래서 사람이 모이면 조직을 만들고 성을 쌓는 일을 해요.

그 속에서 안정을 찾고 싶은 것입니다.

이러한 습성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자기 조직을 위하여 얼마나 충성하고 봉사하고 돈을 많이 내느냐 라는 것으로 신앙이 좋다 나쁘다 라는 것으로 판단하게 되어요.

 

그래서 나는 헌금을 열심히 하는데 안하는 인간이 있으면 화가 나는 것입니다.

나는 하는데 너는 왜 안하느냐 에요.

왜 교회에 무관심 하느냐!

그러려면 다른데 가라고 밀쳐내요.

결국 자신이 헌금을 하고 봉사하고 충성을 행한 것이 남을 탄핵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왜 그런 것으로 판단하고 싸우느냐!

왜?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을 너희들의 그 알량한 행함으로 믿음이 있다 없다 라고 판단하느냐 라고 강하게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일어서고 앉게 하는 것은 다 주께서 하시는데 왜? 너희가 판단하느냐 에요.

내가 저들을 위하여 죽었는데 왜 너희가 밀쳐 내려고 하느냐!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서 각 사람을 관리하고 있는데 왜 너희가 나서서 지랄을 떠느냐고 예수님의 입장에서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누가 누구를 판단하지 말자고 하는 이유도 이와 같아요.

왜 당신이 남에 신앙을 검증하고 판단하려고 하느냐!

주께서 어떻게 간섭하시는지 좀 두고 봐라!

홍해는 내가 가르려고 하지 말고 주님이 가르도록 구경 좀 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복음을 안 것이 아니에요.

우리도 다 율법 아래서 부르심을 입었어요.

지금도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도 우리를 불러내 주셨듯이 하나님께서 불러내세요.

 

그럼 하나님이 어떻게 빼내는지 인내하고 기다려 보자구요.

지금은 비록 모른다 하여도 아는 우리가 참아주고 이해해 주자구요.

그 사람에게 복음을 알게 하고 안하고는 하나님에게 맡기고 우린 다만 복음에 빚진 자로서 행하면 되어요.

주님 피를 바라보면서 주여 오늘도 이 죄인이 주의 은혜로 삽니다 라고 감사하면 되어요.

 

신앙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고 아는 것을 삶으로 풀어내고 살아가는 삶이에요.

은혜 받은 자로서 감사하면서 사는 것이에요.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세요.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 사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죄와 사망 가운데 있던 자들은 십자가의 피로 구원을 해 준 것은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가라고 구원해 주신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양식이 되어서 우리에게 먹혀주신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삶으로 나타날 때는 자기를 부인하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죄가 남을 해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의(義)는 자기를 부인하고 남을 살리는 모습으로 나타나요.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을 받고 살아난 성도들은 하나 같이 예수의 생명으로 살다가 예수님처럼 죽임 당하였어요.

이 사람들이 행위주의자들인가요.

아니에요.

 

모두가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예수의 생명으로 산 사람들이에요.

그냥 나 예수의 피 믿고 용서 받았어 그러지 않았어요.

그 용서 받음을 삶으로 풀어냈어요.

성령이 그렇게 살게 하셨어요.

그래서 모두가 도살할 양처럼 살았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어디 믿음이 없어서 내가 이 복음 전하고 버림 당할까 조심한다고 한 줄 아세요.

바울이 어디 확신이 없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한 줄 아세요.

신앙은 은사라서 자랑하고 장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이건 두려워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장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장담은 자기가 소유하였다고 생각할 때 나타나요.

그러나 복음은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에요.

은사로 주어지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복음을 진짜로 받은 성도는 복음 아는 것을 자랑 할 수가 없어요.

남을 비판하고 판단할 수도 없어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아요.

 

복음을 소유화 하면 지금 복음 안다고 하다가 내일에 난 예수 모른다고 할 수가 있어요.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소유하고 산 것이 아니고 도리어 복음에 장악당하고 살았어요.

그러니 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복음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알아 갈수록 나는 점점 더 작아짐을 느끼게 됩니다.

나 라는 존재는 그냥 티끌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집니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티끌 같은 존재가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알 때 비로서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고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사라는 것을 알게 되고 감사가 되어집니다.

이러한 은혜를 알게 하시려고 죄와 사망의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을 그 아들의 피로 구속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제발 싸우지 말고 믿음으로 살라고 합니다.

 

나도 예수의 피로 구원받았고!

너도 예수의 피로 구원받았으니 우리 모두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자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곳이므로 받은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에 정신으로 살면 하나님께 기뻐함을 받고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듣는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서로 화평하고 누가 열심히 하면 박수쳐주고!

누가 안한다고 해서 믿음이 있네! 없네! 복음을 아네! 모르네! 라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로 교회를 시끄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린 다 같은 죄인이에요.

바퀴벌레에요.

어느 바퀴벌레가 좋고 나쁘고가 없어요.

하나님이 보시기엔 다 불태워 버릴 쓰레기란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쓰레기 주제에 자기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쓰레기 같은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지금 우리가 예루살렘 여자들처럼 그러고 있어요.

예루살렘 여자들을 욕을 하면서 그 짓을 하고 있다니까요.

그러니 자기들 기준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성도들을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시 쉬었다 술람미의 사랑이 어떻게 지켜지는지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 2부 =

 

 

성경은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시작을 알리는 창세기를 열면 아담과 하와의 혼인 이야기로 시작이 된 것이 요한계시록에선 어린 양과 신부로서 끝을 맺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럼 아담에게 일어난 사건도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는 모든 성경이 곧 신랑과 신부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표상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고 제일 먼저 하신 일이 아담의 배필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곤 인류의 역사가 전개가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한 몸이 되어 부부로 에덴동산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범죄로 인하여 인간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지옥 같은 아비규환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서 자기백성들을 죄에서 건져내십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라는 부부가 요한계시록에선 어린 양과 성도가 부부로 끝이 납니다.

이게 성경 전체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예수님과 그 신부의 사랑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류의 역사는 예수님께서 자기 신부를 찾아내는 스토리로 구성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성경 속에는 사랑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아가서는 신랑과 신부이야기입니다.

아가서 8장은 아가서 전체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신랑과 신부의 사랑이야기가 시작부터 끝까지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8장에서는 예수님의 재림까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8장의 핵심 키워드는 사랑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술람미는 자신이 솔로몬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속성을 가지고 말해주고 있어요.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랑을 정의하기를 죽음 보다 강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죽음으로도 갈라 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사랑을 갈라낼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를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증거했어요.

 

롬 8:34-39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성도가 그 어떤 것으로도 정죄 당하지 않는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께서 간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을 근거로 자기 백성들이 그 어떤 것으로도 정죄 당하지 않도록 간구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성도는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버려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술람미가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말하는 것은 곧 사도 바울이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어떻게 이런 사랑이 가능할까요?

 

이런 사랑은 인간은 할 수가 없는 사랑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야기는 예수님과 성도간의 사랑이야기에요.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야기는 천상에 사랑을 지상에서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가서는 1장 1절에서 솔로몬의 아가라고 운을 뗍니다.

아가란 문자적인 의미로 보면 맑은 노래란 뜻입니다.

누구의 맑은 노래인가요?

솔로몬의 맑은 노래입니다.

 

여기서 “맑다” 라는 말은 흠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물질이 전혀 없는 순백한 상태를 말해요.

사랑을 함에 있어서 어떤 조건이나 반대급부를 바라는 것이 전혀 없는 상태 즉 순수하다는 뜻입니다.

 

사랑으로 말하면 일방적으로 사랑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조건 없이 사랑했기 때문에 우리의 조건에 의해서 사라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걸 산상보훈의 팔 복에서 마음이 청결하다고 할 때의 그 상태를 말해요.

전혀 불순물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걸 또 다른 말로 “거룩”이라고도 해요.

그러니 아가는 거룩한 노래인 것입니다.

 

그럼 솔로몬의 아가라고 했으니 솔로몬의 흠 없는 노래란 말이 되지요.

솔로몬의 흠 없는 사랑이야기란 뜻입니다.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를 사랑한 사랑이야기에요.

 

사랑의 주체가 솔로몬이에요.

술람미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어요.

솔로몬이 이끄는 대로 따라 가면 됩니다.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준 사랑은 맑은 노래처럼 순수하고 거룩하고 흠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베풀어 준 사랑이에요.

이 사랑은 술람미의 조건에 의하여 취소되지도 않아요.

술람미의 잘나고 못나 고와는 상관없이 끝까지 지켜져요.

솔로몬이 지켜내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이 지켜 내시는 것과 같아요.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이 지키시니까 취소되지도 않고 포기 되지도 않아요.

그래서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은 죽음으로도 갈라 낼 수가 없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베푼 사랑은 인간의 사랑이 아니에요.

땅에 사랑이 아니고 하늘에 사랑이에요.

인간들의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이야기인 것입니다.

 

흠 없는 예수님이 죄인인 우리를 사랑한 것을 만왕의 왕이신 솔로몬이 천하디 천한 검둥이 노예인 술람미를 사랑한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술람미의 아가가 아니고 솔로몬의 아가에요.

이걸 잊지 마세요.

술람미의 사랑이야기가 아니고 솔로몬의 사랑이야기에요.

기억하세요.

 

이게 무지 무지하게 중요하니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누구의 아가라고 했나요?

솔로몬의 아가라고 했지요.

그럼 솔로몬의 사랑이야기이란 말이지요.

 

성경을 보면 죄인이 구원 받는 일을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을 하나님을 찬미하는 삶이라고 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한 것은 하나님께 찬미케 하기 위함입니다.

 

찬미를 다른 말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께 받은 그 은혜를 감사하며 찬미하는 것입니다.

감사나 찬미나 같은 뜻이에요.

 

요한계시록을 보면 구원을 받은 성도가 천국에서 어린 양의 신부로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 양의 신부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보니 어린 양을 세세토록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래란? 기쁨의 표현입니다.

사람이 기쁘면 자기 안에 기쁨이 노래로 표출이 됩니다.

기분 좋은 일이 생기면 자기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남녀 간의 사랑이 이루어지면 아주 맑고 고운 노래가 터져 나와요.

 

아주 오래 전에 보았던 피아노라는 영화이야기입니다.

어느 여인이 딸 아이 하나를 낳고 살다가 남편이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하여서 죽었어요.

그러자 여인은 그 쇼크로 귀머거리가 됩니다.

 

이 여인이 아픔을 피아노를 치면서 달래고 살았어요.

그러다가 어느 귀족에게 팔려 후처로 들어가게 됩니다.

돈에 팔려 간 결혼이라서 둘은 사랑하지 않았어요.

귀족은 어떻게 하든지 이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하였지만 여인이 귀족에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아요.

 

사랑은 마음이 허락하지 않으면 안 되어요.

그런데 그 귀족의 집 근처에 건장한 청년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청년이 피아노를 치는 것입니다.

그러자 여인은 그 청년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려고 들락거리게 되다가 그만 둘이 사랑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 동안 남자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하여서 몸이 굳어버린 석녀인 것입니다.

그런 석녀가 남자의 손길에 따라서 서서히 사랑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남자의 손길에 따라서 여인의 몸이 춤을 추는 것입니다.

 

이 때 피아노 소리가 맑게 울려 퍼집니다.

때론 격정적으로 때론 잔잔한 물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남녀 간의 사랑이 피아노 소리로서 울림이 되어서 노래로 토해져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니 몸이 악기가 되어서 노래를 토해내는 것입니다.

사랑과 노래가 하모니가 되어서 맑은 가락으로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맑고 청아한 노래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끝내 이 여인은 사랑이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자기에게 찾아온 사랑을 목숨을 버리면서 지켰어요.

결국 이 여인에겐 사랑이란 죽음 보다 강한 것으로 남긴 것입니다.

 

비유가 적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 하모니가 되어서 맑은 노래를 세상에 토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 어떤 인간도 할 수 없는 그런 사랑을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숭고한 하늘에 사랑이 술람미에게 퍼부어지자 술람미에게서 감사와 찬양이 울려나는 것입니다.

 

몸이 받은 사랑을 표현해 내는 악기에요.

사랑이 사람으로 하여금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면 저절로 춤을 추게 되고 노래가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면 마음이 평안해져요.

이런 상태를 천국이라고 해요.

마음이 천국이 되면 저절로 흥얼거려져요.

 

흔히들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고 하지요.

맞아요.

우리 몸에는 좋은 호르몬과 나쁜 호르몬이 있어요.

좋은 호르몬은 기분이 좋을 때 분비가 되고 나쁜 호르몬은 기분이 나쁠 때 분비가 되어요.

 

좋은 호르몬이 분비가 되면 피부가 생기가 돌고 노화가 방지가 되어서 탱탱해져서 예뻐진다고 합니다.

반대로 나쁜 호르몬이 분비가 되면 피부가 죽어가 노화가 빨리 오고 피부가 탄력이 없어지고 늘어져서 미워진다고 합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사랑을 하게 되면 우리 몸속에 좋은 호르몬이 왕성하게 분비가 되어 활발하게 활동을 하게 되면 세포들이 춤을 추어서 피부가 부드러워지고 생동감을 띠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인들이 사랑을 하면 얼굴에 화색이 돌고 예뻐지는 것입니다.

 

얼굴에 윤기가 돌고!

눈은 초롱초롱 빛이 나고!

피부가 탄력을 받아 춤을 추고!

목소리도 은 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듯이 맑고 청아하게 나오는 것은 몸속에 좋은 호르몬이 왕성하게 분비가 되어서 몸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예뻐지려고 돈 들여서 성형수술 하지 말고 사랑을 하세요.

그럼 예뻐집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성형 수술을 하여도 몇 달 지나면 또 다시 원래 그대로가 되어요.

성형수술로 예뻐지려고 하는 사람은 평생 동안 얼굴에 돈을 바르고 살아가야 해요.

돈 떨어지면 쪼그랑 방탱이가 되어요.

 

술람미는 천하디 천한 노예입니다.

그냥 이름 없이 잠시 살다가 사라져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런 천한 노예가 왕의 사랑을 입었어요.

 

인간들의 상식으로는 왕과 노예는 신분의 차이로 사랑을 할 수가 없어요.

세상에 드러내 놓고 사랑할 그런 처지가 아닙니다.

술람미는 이런 처지가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솔로몬이 자신의 오라비였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아 8:1-3절. “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다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2.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미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웠겠고 3. 너는 왼손으론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론 나를 안았으리라”

 

솔로몬이 자신의 오리비였다면 밖에서도 마음껏 입맞춤을 가져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그 당시의 시회적인 관습 때문입니다.

 

술람미는 먼저 자신의 처지를 분명하게 말합니다.

자신은 너무도 비천한 사람이라서 감히 솔로몬 왕을 사랑한다고 말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는 신분의 차이 때문입니다.

 

자신은 천하디 천한 노예인데 솔로몬은 왕입니다.

왕과 노에가 사랑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그 불가능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신분의 벽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가슴이 아픈 것입니다.

 

마치 아~ 이 남자가 내 남자다! 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세상의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감히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술람미는 자신과 솔로몬이 한 형제였으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합니다.

당신과 내가 한 어미 아래서 태어난 오누이였다고 한다면 내가 밖에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마음껏 입맞춤을 할 수가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 사회적 배경은 한 형제가 아니고서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 입맞춤을 할 수가 없었어요.

비록 부부라 할지라도 공개적인 장소에서 입맞춤은 금했어요.

오직 한 형제에게만 허락이 되었어요.

 

그래서 술람미가 솔로몬에게 우리가 서로 한 어미의 젖을 먹고 자란 오누이라고 한다면 공개적으로 마음 놓고 사랑을 하여도 누가 나를 업신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랬으면 당신의 품에 안기어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엔 엄청난 구원의 비밀이 있어요.

구원은 한 어미의 태에서 나온 자만이 받을 수가 있어요.

다른 말로 예수 안에서 나온 자만이 예수를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만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쉬운 예로 말합니다.

사람의 생명과 짐승의 생명을 다릅니다.

사람의 생명과 짐승의 생명은 유전자가 다르기 때문에 공유할 수가 없어요.

사람은 사람끼리 짝짓기를 하고 짐승은 짐승끼리 짝짓기를 합니다.

 

입맞춤은 생명의 나눔입니다.

입맞춤은 한 생명에서 나온 자만이 할 수가 있어요.

생명은 같은 식구라야 주고받을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한 식구라야 동질성의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한 혈통이에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가 한 형제에요.

이건 장차 모든 성도는 예수 안에서 한 형제가 될 것을 기능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도는 한 형제에요.

 

히 2:11절.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났어요.

그래서 한 형제라고 합니다.

한 형제이기 때문에 부끄럽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 형제는 같은 사랑 안에 있어요.

여러분 부부보다 형제가 더 가깝다는 것을 아세요.

부부는 조건으로 만나기 때문에 조건이 사라지만 헤어져요.

그러나 형제는 그 어떤 조건 속에서도 끊어지지가 않아요.

그러니 형제에겐 그 어떤 것도 흠이 없어요.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감싸고 용서할 수가 있어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형제라고 하지요.

이는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 질수가 없는 관계란 말입니다.

아버지가 낳아준 관계이기 때문에 끊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형제란?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이에요.

은혜 안에 있다 함은 그 어떤 것으로도 정죄 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형제는 한 몸이기 때문이에요.

 

너의 허물이 나의 허물이고 너의 온전함이 나의 온전함이에요.

법이 없는 세계가 형제에요.

부부는 법으로 만났지만 형제는 은혜로 낳아져요.

그러므로 형제끼리는 사랑하는 행위를 보여도 허물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한 형제에요.

하나에서 났어요.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겐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흠이 되지 않아요.

흠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흠으로 여기지 않는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타인과 나는 법으로 만나요.

다른 몸이기 때문입니다.

법은 항상 옳고 그름으로 나누어요.

 

법은 외적 조건으로 사람의 신분을 구별하고 나누었어요.

그러니 법 아래 있는 남과는 순전한 사랑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순전한 사랑이 되지 않으니까 드러내 놓고 마음대로 입맞춤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람미는 자신과 솔로몬이 한 어미에게서 난 한 형제였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부부를 아담과 하와로 말하는 것은 부부란 한 몸에서 나온 자라는 것을 말해주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장차 예수님 안에서 나온 자가 어린 양의 신부가 될 것을 말해주고자 함입니다.

한 몸에서 나왔으니 한 형제가 되고 한 몸이기 때문에 사랑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술람미는 솔로몬과 법이 지배하는 곳에서 만났어요.

술람미는 솔로몬과 왕과 노예라는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을 지닌채 타인으로 만났어요.

그래서 예루살렘 여자들로부터 극심한 저항을 받고 핍박을 받았어요.

예루살렘 여자들이 술람미를 업신여기면서 네까짓 게 어떻게 솔로몬과 사랑 할 수가 있느냐 라고 하면서 온갖 조롱과 멸시를 하였어요.

 

그런데 이러한 법을 솔로몬이 깨트려 주었어요.

당시의 법은 왕과 노예가 사랑을 한다는 것은 신분의 차이 때문에 불가능했어요.

이건 마치 조선시대 양반집 아들이 노비를 사랑하는 것과 같아요.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해요.

 

이걸 인정받으려면 양반이 노비로 내려가는 것 밖에 없어요.

노비가 양반이 될 수는 없어요.

그러니 양반과 노비가 사회적으로 결혼을 하려면 양반이라는 신분을 버리고 노비가 될 때만 가능했어요.

 

지금 왕과 노예는 양반과 노비와 같아요.

그러니 공개적으로 사랑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이 자기 체면이라는 지위를 버리고 노예의 자리로 내려간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과 같아요.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율법 아래 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속량하기 위함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감히 예수님과 사랑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자기를 비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비웠다는 것은 희생하고 죽었다는 말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한 것도 자기를 비웠다는 말입니다.

이제 술람미는 솔로몬이 자기 수준으로 낮아짐으로서 당당하게 한 형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술람미는 거친 들에서 솔로몬을 의지하고 올라오는 것입니다.

 

아 8:4-5절.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지니라 5.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辛苦)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거친 들이란 비천한 곳이란 말입니다.

거친 들에서 올라온다는 것은 존귀한 자리로 나아온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나아오는가 하면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나아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왕의 빽으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왕의 빽으로 나아오는가 하면 왕이 자기를 비움으로서 신분이라는 벽을 깨트렸기 때문입니다.

 

이걸 어미가 사과나무 아래서 산고(産苦)를 통하여서 너를 낳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과나무를 은유적으로 에덴동산에서의 선악과 나무 라고 합니다.

선악과는 선악의 법을 말하는데 곧 율법을 말해요.

그러니 사과나무 아래서 산고를 통해서 나았다는 것은 율법 아래서 죽임 당하였다는 말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로 죽임 당하신 것과 같아요.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죄인이라는 신분에서 의인이라는 신분으로 바뀌었어요.

우리가 의인 된 것의 바탕에는 예수님의 죽음이 깔려 있습니다.

 

솔로몬 왕이 당시의 궁궐의 법도를 무시하고 천한 노예를 왕비로 간택한 것은 자신이 그 당시의 법에 죽임 당한 것과 같아요.

스스로 자기 안에 있는 법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왕이 자기를 비운 것은 자신을 죽이는 것과도 같아요.

솔로몬이 죽음의 자리로 내려간 것은 술람미를 얻기 위해서 입니다.

 

솔로몬은 긍휼로 술람미를 사랑했고, 술람미는 긍휼로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면 동등하게 긍휼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긍휼 안에서 동등한 처지가 된 것입니다.

이러면 형제가 됩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낮아짐으로서 이제 한 어미 아래서 난 자와 같이 된 것입니다.

이제 누구 앞에서도 입을 맞출 수가 있게 되었어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솔로몬이 자기를 비워서 술람미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사랑을 나누어도 깨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술람미는 엄청난 사랑을 받았어요.

솔로몬이 자기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을 알았어요.

이제 이 믿음으로 솔로몬에게 담대하게 말합니다.

 

그럼 믿음이 어떻게 담대함으로 나타나는지를 봅시다.

 

아 8:6-7절.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7.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술람미는 솔로몬에게 당신이 나를 사랑한 것은 당신을 비워서 사랑한 것이 아니냐!

즉 당신의 죽음을 근거로 한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당신의 그 사랑으로 나를 마음에 인처럼 품고 보호해 달라고 합니다.

 

당신이 낳아져서 얻은 사랑이니까 이 사랑이 깨어지면 당신이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냐!

이 사랑은 당신의 희생으로 맺어진 사랑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목숨 걸고 지켜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당신이 지켜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믿음이지요.

 

이게 얼마나 담대한 믿음인 줄 아세요.

의역해서 말을 하면 당신은 이미 내가 비천한 여자인 것을 알고 사랑해 주었기 때문에 내 모습이 그 어떻게 초라해 질지라도 당신은 그 사랑을 지켜주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당신의 사랑으로 나를 보호해 달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향한 사랑이 죽음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내가 당신을 실망 시키는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지켜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내가 만약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당신의 그 사랑이 질투심이 되어서 나를 지켜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질투심이 지옥에까지 가서라도 나를 이끌어 내고!

홍수 속에서도 구해내고!

불 속에서도 건져주고!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나를 지켜 달라는 말입니다.

 

신약식으로 내가 그 어떤 죄를 범한다 할지라도 당신의 그 피로 인하여 결코 정죄함을 당하지 않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엄청난 믿음이지요.

 

당신이 나에게 주신 그 사랑은 세상에 그 어떤 재물로서도 살 수가 없는 사랑이잖아요.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그 사랑을 내게 주셨잖아요.

그러니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나를 지켜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짓을 한다고 할지라도 질투심을 발동해서라도 나를 당신의 여자로 지켜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랑의 강력함을 질투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질투가 없는 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은 질투와 중량이 같아요.

 

사랑이 강할수록 질투도 강하게 일어나요.

질투를 많이 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을 많이 하고 있다는 증거에요.

그래서 질투가 살인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투가 그래요.

자기 백성들을 타락케 하는 자들을 응징을 하잖아요.

하나님은 성도가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는 간음케 한 이 세상을 불 태워 버리는 것입니다.

 

약 4:4-5절.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5.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성도가 세상을 사랑하면 성령이 시기하세요.

성도가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으면 인생에 태클을 걸어요.

이걸 징계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이 취소 될 수 없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질투 때문입니다.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고 하지요.

시기하심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자존심이 담겨 있어요.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가 발려져 있어요.

그래서 포기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두들겨 패서라도 기어코 약속의 땅으로 밀어 넣고야 마는 것입니다.

 

언약 속에는 축복과 저주가 함께 포함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가 된 것도 다 언약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도에게는 실패도 곧 축복인 것입니다.

잘라내는 저주가 아니라 언약 안에서 징계로 일어나는 저주이기 때문에 축복인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우리 행함과 상관없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행함과 상관없이 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징계를 가해서라도 구원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백성들이 불순종을 하자 하나님에게 하나님의 자존심을 생각해서라도 이 인간들을 가나안까지 데리고 가야 한다고 했어요.

 

우린 우리 꼬라지를 보아선 안 됩니다.

술람미처럼 내 꼬라지가 어떠할지라도 당신의 그 희생을 기억해서라도 날 기어코 지켜달라고 하여야 합니다.

이게 믿음이에요.

 

믿음을 받은 자는 담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랑 안에 있는 자는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보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를 보기 때문에 마귀의 참소를 이겨내는 것입니다.

우린 우리를 보는 순간 미끄러져요.

내 꼬라지를 보지 말고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결코 정죄하지 않기 때문에 어디에 있을지라도 다 찾아내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시편 기자는 내가 하늘 꼭대기에 올라가 별과 별 사이에 깃들지라도 거기서 끌어 내리겠고 바다 깊은 곳에 숨을지라도 거기서 찾아내겠다고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사랑하는 자들은 하늘이나 바다 끝에 있다 할지라도 다 찾아내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건 포기 할 수 없는 예수님의 자기백성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사랑을 하십니까?

이는 성도들 속에는 예수님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죽음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죽어도 못 보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널 어떻게 잊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못 잊고 못 보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이에요.

 

예수님과 성도는 한 몸입니다.

예수님은 성도를 대신하여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어찌 포기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절대로 포기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어떤 댓가를 치르고서라도 찾아내십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을 내어줄지라도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목숨을 버려 구원해 주셨는데 죄를 짓는다고 해서 잘라낸다고 한다면 그건 하나님이 얼마나 손해를 보는 겁니까?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짓더라도 잘라내지는 않고 두들겨 패서라도 그 죄에서 돌이키게 하고 구원을 지켜내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는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였어요.

 

롬 8:33-39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구원은 어미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아요.

어미는 자식을 그 어떤 것으로부터 지켜내요.

아무리 자식에게 흠이 많다고 할지라도 당신의 사랑으로 춤어 주세요.

자식은 어미를 버릴 수는 있어도 어미는 자식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 어미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피 흘려서 우리를 낳아주셨어요.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어미에요.

 

바울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런 죄인도 용서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디에 있다 할지라도 찾아내시는 것입니다.

 

‘근초고왕’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여구’ 라는 백제의 왕자가 ‘여화’ 라는 여자를 사랑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구와 여화는 이복 오누이로서 어려서부터 사랑했어요.

그런데 여화가 고구려와 백제 간의 동맹으로 황실 간의 정략결혼으로 고구려의 왕에게 시집을 가게 됩니다.

이 때 여구 왕자가 예전에 여화가 정표로 주었던 옷고름에다가 “여화! 네가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너는 내 여자다!” 라는 글을 써줍니다.

 

내가 지금은 비록 힘이 없어 너를 보내지만 나중에 자신이 왕이 되면 반드시 널 데리고 오겠다고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 왕이 되어서 찾아옵니다.

멋지지요.

 

“여화! 네가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너는 내 여자다!”

 

이 얼마나 든든한 말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넣어서 사용해 보세요.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귓전에서 왕왕 거려야 해요.

마치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여울이 일어나 온 호수로 펴져 나가듯이 “여화! 네가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너는 내 여자다!” 라는 울림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해요.

 

여구 왕자의 이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내는 것으로 보았어요.

예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자기 여자는 반드시 네가 어디에 있든지 누구에게 있든지 너는 내 여자라고 하면서 찾아 주십니다.

 

이런 사랑은 구약에선 호세아의 아내 고멜을 통하여서 보여주셨어요.

고멜은 틈만 나면 외간 남자에게 바람을 피웁니다.

그럼 호세아는 값을 지불하고 다시 찾아옵니다.

그런 고멜은 또 바람피우러 나갑니다.

그럼 호세아는 또 값을 주고 찾아옵니다.

 

고멜 속에는 바람기가 있어요.

그러니 틈만 나면 다른 남자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발 길이 외간 남자를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의 죄성을 말하고 있어요.

우리 몸은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멀리하고 세상을 사랑해요.

 

호세아와 고멜은 구약에선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어요.

신약에선 예수님과 성도를 보여주고 있어요.

고멜은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고멜처럼 틈만 나면 예수를 떠나 세상과 간음해요.

왜냐하면! 우리 태생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멜처럼 세상과 짝하고 살 수 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 육신은 세상과 친할 수밖에 없어요.

육신은 세상을 이길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줄 알고 사랑했어요.

하나님은 세상을 사랄 할 수 밖에 없는 우리 몸에 성령을 보내 주셨어요.

성령을 보내서 우리가 세상과 간음하면 시기하게 하셔서 간섭하세요.

 

약 4:4-5절.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5.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이건 우리더러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에요.

우리는 세상을 사랑 할 수밖에 없는 존재에요.

이는 우린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원수일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원수이면 마땅히 죽임 당하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죽임 당하지 않는 것은 우리 안에 성령이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왜 오셨는가 하면 하나님의 질투를 촉발시키기 위함입니다.

 

질투란 사랑의 반대말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질투도 없어요.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하는 것입니다.

질투는 사랑의 또 다른 면인 것입니다.

 

이건 마치 언약 속에 축복과 저주가 들어 있는 것과 같아요.

언약 속에는 축복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저주도 들어 있어요.

여기서 말하는 저주란 잘라 낸다는 뜻이 아니고 징계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가 된 것은 언약 속에 담겨진 저주 때문이에요.

그러니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어도 여전히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해방이 되어 고토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망할 수가 없어요.

그 어떤 죄를 지어도 짤려 나갈 수가 없어요.

이는 성도의 구원은 예수님의 피로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조건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조건으로 인하여 취소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술람미가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하면서 투기를 말하고 있지요.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고 홍수라도 엄몰치 못한다고 하지요.

이건 이러한 질투심으로 나를 지켜 달라는 말이에요.

 

내가 비록 당신을 떠난다 할지라도 그냥 두지 말고 그 질투심이 발동을 하여서라고 내가 어느 곳이 있든지 누구 품에 있든지 반드시 찾아 내 달라는 말이에요.

이 얼마나 대단한 믿음 입니까?

 

술람미는 솔로몬이 자신을 사랑한 것이 이 정도로 확고한 것이란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솔로몬의 사랑은 변할 수 없다는 그 사랑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알기에 술람미는 그 누가 뭐라고 하여도 기죽지 않고 나는 왕의 여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구원하려고 십자가에 죽으셨어요.

자기 목숨을 버리고 구원했어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십자가에 죽었어요.

죄인 되었을 때 죽었는데 그럼 지금은 얼마나 더 지켜주시겠어요.

그러므로 우리가 그 어떤 모습일지라도 예수님은 포기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멜처럼 떠나간다 할지라도 두들겨 패서라도 반드시 구원을 이루어내고야 마세요.

 

질투는 반드시 징계를 동반하고 나타나요.

그래서 아들은 반드시 징계가 따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징계가 따른다는 것은 아들이라는 신분은 취소시킬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버릴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두들겨 패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징계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로 보낸 것이 사랑이라고 했어요.

그러니 슬퍼하지 말고 포로로 잡혀가는 일에 순순히 응하라고 했어요.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이를 모르고 포로로 가면 안 된다고 했어요.

거짓 선지자들은 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포로가 저주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망하는 것은 사랑이에요.

하나님의 축복이에요.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 복이 아니라 세상에서 망하는 것이 복이에요.

성도의 마음속에서 세상 것이 점점 더 빠져 나가야지 채워지면 안 되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들을 세상에서 자꾸만 망하는 쪽으로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망하게 함으로서 하늘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늘에 것으로부터 나왔어요.

그러므로 이 세상 것들은 모두가 허상이에요.

실상은 하늘에 있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땅이라는 허상을 버리게 하고 하늘에 실상인 영적인 복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이미 하늘에 신령한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어요.

 

엡 1:3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보세요.

하늘에 있는 신령한 복을 주셨다고 하잖아요.

그 신령한 복이 무언가 하니 그리스도 안에서 그 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복은 거룩이에요.

그 거룩은 오직 예수님의 피로서만 주어져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날마다 예수님의 피 뿌림 안으로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피 뿌림 안으로 불러들인다 함은 우리를 날마다 죽인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은 날마다 겉 사람은 후패하고 속사람이 새로워진다고 했어요.

이는 마음속에 세상 것을 뽑아내고 하늘에 것으로 채워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신앙이 깊어질수록 세상적으로는 후패해져 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볼품이 없는 자들이에요.

이를 술람미의 빈약한 몸를 가지고 말해주고 있어요.

 

이복 오빠들은 술람미에게 너는 아직 유방이 없다고 비아냥거렸어요.

 

아가 8:8-10절.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 9. 그가 성벽일진대 우리는 은 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일진대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 10. 나는 성벽이요 나의 유방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

 

우리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다고 합니다.

여자에게 있어 유방은 매력의 상징입니다.

유방이 없다는 것은 여자로서의 매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술람미의 가슴은 절벽입니다.

그런 못난 것으로 어떻게 왕을 사랑한다고 하느냐 라고 비웃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리는 것입니다.

 

야~ 네 꼬라지를 좀 봐라!

너 같이 매력도 없는 여자를 누가 좋아하겠느냐!

왕이 미쳤다고 너 같이 유방도 없는 여자를 좋아하겠느냐!

그러니 우리가 성형 수술 좀 해 줄까! 라고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판단을 합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보면 성도들은 볼품이 없어요.

12 사도들을 보면 하나같이 실패자들의 모습이에요.

누가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겠어요.

도리어 저주 받았다고 합니다.

 

육적 가치관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물질적 가치로 판단을 해요.

잘 살면 복 받았다고 합니다.

교회가 크고 사람이 많이 모이면 부흥 되었다고 합니다.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물질의 풍요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해요.

그러나 주님 보시기엔 곤고하고 가련하고 벌거벗고 소경이고 귀머거리라고 합니다.

 

술람미는 육적 가치로 볼 때 자랑 거리가 없어요.

술람미는 도리어 자신에게 세상 적인 매력이 없는 것이 바로 솔로몬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근거라고 말하고 있어요.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한 것은 불쌍해서 사랑했어요.

너무도 불쌍해서 긍휼을 베푼 것입니다.

너무도 불쌍해서 아무런 조건도 없이 일방적으로 사랑을 해 준 것입니다.

 

그래서 술람미는 자신을 조롱하는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무슨 말이냐 내가 매력이 없기 때문에 솔로몬이 사랑을 해 주었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술람미에게 예루살렘 여자들처럼 매력이 있었다면 솔로몬이 사랑해 주지 않았어요.

 

세상의 매력이란? 인간의 의(義)에요.

인간의 의는 인간들의 잘남이에요.

세상 가치로 보았을 때 풍요로운 인생을 말해요.

 

예루살렘 여자들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표상이에요.

이들은 자기 의로 가득했어요.

너무도 잘났어요.

그러니 왕 앞에 나와도 순종함이 없는 것입니다.

 

율법 신앙은 선악과에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워요.

나를 영화롭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나를 으뜸 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지키면 지킬수록 자기 영광이 쌓여요.

율법의 의를 가진 자에게는 예수님의 의가 들어갈 틈이 없어요.

은혜가 필요 없어요.

예수님의 사랑이 들어갈 틈이 없어요.

 

바리새인들이 예루살렘 여자들이에요.

세리와 창기들은 술람미에요.

예수님께서 자기 의로 가득한 바리새인들은 지옥으로 보내고 자기 의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볼 수가 없는 세리와 창기들을 천국으로 인도한 것은 천국은 인간의 의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은혜의 나라에요.

은혜란? 자기 의(義)가 없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약하고 천한 자들을 택하셨어요.

이는 인간의 의를 배척하기 위함입니다.

순수하게 하나님의 의만 담겨져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선 인간의 잘남은 곧 악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잘난 자가 가는 것이 아니고 못난 자가 가요.

예수님의 의만 오롯이 담겨져 있는 사람만 갈 수가 있어요.

성도는 예수님의 의로 사는 자들이에요.

마치 탕자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버지가 준 것으로 치장하고 살아가는 자들이에요.

성도가 망할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의 것으로 치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위하여 오셨어요.

자기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죄인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인의 모습으로 오셔서 그들의 아픔을 체휼하시고 자기 몸을 드려서 그들을 속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죄인의 모습이 약하고 천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약하고 천하므로 사람들이 알아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알아볼 수 없도록 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다가 광야로 나아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늘에 신령한 양식을 줍니다.

이름하여 만나에요.

만나는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양식이에요.

 

양식이란? 먹는 음식의 개념이 아니고 생명을 살게 하는 것을 말해요.

이건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 그런 음식이 아니에요.

반드시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보고서 박한 식물이라고 폄훼하였어요.

 

오죽 했으면 만나를 “이것이 무엇이냐” 라고 조소했겠습니까.

만나의 이름이 “이것이 무엇이냐” 에요.

인간들이 그렇게 불렀다구요.

 

“이것이 무엇이냐” 라는 말은 조롱하는 말이에요.

“뭐 이런 것을 주느냐” 라는 비아냥거림인 것입니다.

물론 모른다는 의미도 있어요.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하찮은 것으로 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고 스스로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합니다.

이는 구약의 이스라엘에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를 빗대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만나가 하늘로 내려온 산 떡이에요.

 

산 떡이란? 생명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만나를 자기 몸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그 안에 영생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 영생을 주시러 오신 예수님은 만나처럼 ‘이것이 무엇이냐’ 라는 식으로 조롱을 당하는 모습으로 오셨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인간들이 그 아래서 조롱하지요.

야! 예수야!

네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한다면 한 번 내려와 봐라!

 

이건 마귀가 광야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 와서도 그랬어요.

야! 예수야!

네가 만약에 하나님 아들이라고 한다면 성전 꼭대기에서 한 번 뛰어 내려 보아라!

그럼 내 믿어 줄게!

그랬다구요.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신들도 몰라보았다고 합니다.

 

사 53:1-3절.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을 말하고 있어요.

어떤 모습이라고 합니까.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귀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은 그냥 걸레처럼 발로 쓱 밀어서 구석으로 쳐 박아 놓았다는 말과 같아요.

 

에이! 더러워!

넌 누구야! 저리가!

어디 감히 이런데 오고 그래!

넌 여기 낄 자격이 못 돼!

어디 감히 우리하고 놀려고 그래!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꼭 술람미 같지요.

술람미는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술람미 속에 담아 놓은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 눈에는 술람미는 촌닭과 같이 흠모 할 만한 것이 없어요.

창피하게 생각했어요.

 

자기들 틈에 끼이는 것을 용납 할 수가 없어요.

그럼 자기들 품격이 떨어지잖아요.

술람미는 외면당하고 버림당하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육적인 외모로 남을 판단하는 것을 악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 4:3-5=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우린 모두가 판단 받을 자들이지 남을 판단 할 자들이 아니에요.

남을 판단한다는 것은 하나님 자리에 앉았단 말입니다.

지금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그런 짓을 하고 있어요.

은사 받은 것으로 남을 다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사가 어디 한 가지 뿐인가요.

각양의 모습으로 나타났잖아요.

그럼에도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자기가 받은 은사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 중심으로 나는 바울파다! 게바파다! 아볼로파다! 라고 파당을 짓고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니들이 뭔데 남을 판단하느냐!

네가 하나님이야!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하는데!

왜 네가 나서서 맞네! 아니네!

판단하고 있느냐 라고 합니다.

 

베드로도 이런 짓을 하다가 혼이 났어요.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보내서 복음을 증거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상징으로 베드로가 기도 할 때 하늘에서 보자기 하나를 내려 보낸 준 것입니다.

그 보자기를 풀어보니 그 속에 각종 더러운 것들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율법에 보면 정한 것과 속된 것들이 있어요.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들을 정해 놓았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려준 보자기 속에는 먹지 못할 것들로만 가득한 것입니다.

이건 이방인 고넬료를 상징해요.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걸 잡아먹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기겁을 하면서 싫다고 합니다.

이건 한마디로 율법이 금하는 것들이므로 하나님의 법도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복음적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야~ 이 놈아 내가 깨끗다고 하는데 네가 왜? 더럽다고 하느냐!

당장 잡아먹어! 그러는 것입니다.

이건 한마디로 우리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거에요.

그 사람이 복음을 알든 모르든 그건 신경 쓰지 말고 너나 하나님께 받은 은혜로 감사하고 살라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간단해요.

그냥 범사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려니 하고 감사하고 살면 되어요.

이 사람 만나면 아!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 주셨구나 하고 교제하고!

저 사람 만나면 아! 하나님께서 오늘은 저 사람을 만나게 하셨구나 하고 자기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로 섬기고 살면 되어요.

너 복음 알어! 몰라 하면서 내치지 말고!

그 사람이 예수님인지 어떻게 압니까!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양과 염소가 나오지요.

아주 중요한 말이니 잘 들으세요.

양과 염소의 차이를 말합니다.

 

양은 사람은 선별하지 않았어요.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지 않았다는 것은 기준이 없었다는 말이에요.

기준이 없으니 그냥 그 때 그 때 자기 앞에 보이는 사람은 대접하고 섬겼어요.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도 귀하니 그냥 고마워서 섬긴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사람을 가리지 않고 대접하였어요.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이 양들에게 내가 그 때 대접을 잘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양들이 우린 주님을 섬긴 적이 없는데요.

언제 주님이 우리에게 오셨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야! 그 때 내가 병든 자로 때론 헐벗은 자로 때론 옥에 갇힌 자로 널 만났잖아,

너희들이 그 때 섬겼던 그들이 바로 나였어,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염소들에게는 에이! 나쁜 놈들아! 지옥으로 가라고 합니다.

너희들은 날 무시하고 돌보지 않았어! 그럽니다.

그러자 염소들이 펄쩍 뛰면서 언제 주님이 우리에게 왔습니까.

주님이 오셨다고 한다면 우리가 그렇게 보낼 리가 없습니다.

대접을 했지요!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야~ 이 놈들아!

내가 그때 병들고 옥에 갇히고 헐벗고 그랬잖아,

그 때 너희들이 재수 없다고 하면서 날 쫓아냈잖아,

그러자 염소들이 에이~ 그건 죄인들이지 어디 예수님이었습니까.

그건 아니지요 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그 때 그들이 바로 나라고 합니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염소들은 자기들이 정해 놓은 기준이 있어요.

주님은 이런 분이다! 라고 정한 기준이 있었어요.

그러니 그 기준으로 주님을 판단한 것입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이 정한 기준으로 남의 신앙을 판단하였듯이 염소들도 자기들이 정형화 시켜 놓은 그 틀 속에서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이걸 제가 앞서서 우상성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지금도 계속하여서 일어나고 있어요.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하면 교회 안에서 특히 복음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 속에서 일어나요.

자기들의 기준이 우상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기준에 따라 일하시지 않고 역설적으로 일을 하시거든요.

왜냐하면! 인간은 잡았다하면 그것을 기준으로 만들어 버리는 우상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그땐 맞았어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이 맞아요.

맞으니까 그걸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리곤 그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 일이다 아니다로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그 기준에 가두어져 버려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 기준을 깨는 방식으로 전혀 낯선 모습으로 나타나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날마다 달라요.

오늘 알았던 하나님은 내일이면 가짜가 되어요.

내일은 내일의 방식대로 하나님이 일을 하세요.

 

하나님은 만나처럼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부어주세요.

그래서 성도의 삶은 날마다 은사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야! 오늘은 만나를 이틀 치 거두어서 내일에 먹어야지 하면 그 만나는 썩어버려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인줄 모르고 그냥 배부르게 먹어야 할 세상 양식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저축을 했다가 내일에 먹어야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 저축한 만나를 썩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렇게 해서 은혜 받았다고 해서 내일도 그 방식대로 나아오면 하나님은 다른 방식으로 일을 하세요.

왜냐하면! 성도의 삶이 항상 하나님의 은혜로 남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전혀 예상치 못하는 방식으로 인도하시고 또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장을 보면 여호와는 인간을 롤러코스트로 인도하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삼상 2:6-7절.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세요.

가난케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세요.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세요.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도록 간섭하신다는 말입니다.

죽이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살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요.

가난케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부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요.

낮추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높이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요.

 

쉽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 기준으로 가지고 있어요.

이런 것이라야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야~! 기도 했더니 병이 나았다!

그럼 그 때부터 이 사람은 기도하면 병이 낫는다는 하나님께 은혜 받는 공식을 가지게 되어요.

 

이러면 병이 나서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응답을 해 주어야 해요.

하나님은 이 사람의 방식대로 움직여 주어야만 합니다.

이 사람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에요.

이걸 우상이라고 하거든요.

 

하나님은 이런 우상성을 깨트리기 위해서 이 사람이 기도하면 병이 낫는다는 공식으로 나아오면 이번에 죽이는 방식으로 일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럼 놀라는 거에요.

전에는 이렇게 해 주었는데 지금은 왜 그렇게 해 주지 않습니까? 라고 따지게 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내 마음이다! 라고 합니다.

넌 왜 나를 네 속에 가두고자 하느냐고 책망을 합니다.

네가 내 속에 가두어져야지 내가 네 속에 가두어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속에 가두어져야지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속에 가두어져야지 하늘에 것을 얻게 되어요.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을 가두면 우린 세상 것으로 가득 채워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은 하나님 안으로 가두는 일을 날마다 벌리시는 것입니다.

가두는 방법이 세상에서 실패케 하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에 보면 하나님과 성도를 목자와 양으로 비유하고 있어요.

그런데 목자가 양을 담금질을 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어요.

때론 푸른 풀밭 잔잔한 시냇물가로 인도하시기도 하고!

때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세요.

 

이건 극과 극이에요.

죽였다 살렸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양은 죽을 지경인 거에요.

오늘은 어디로 인도할지 예측이 안 되어요.

그냥 목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 갈 수밖에 없어요.

 

이게 성도의 운명이고 삶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우리더러 계획을 세우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백날 계획을 세워도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날마다 나만 바라보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게 가나안 땅에 삶이에요.

가나안 땅은 하늘에 물을 저축할 수가 없어서 농사를 짓고 살려면 하늘만 쳐다보고 살아야 해요.

애굽에서는 저수지에 물을 가두어서 자기 필요에 따라서 빼내서 농사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계획도 세우고 예측이 가능해요.

그런데 가나안은 계획이나 예측을 할 수가 없어요.

하늘에서 비를 주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하늘만 쳐다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비를 주면 살고 안 주면 죽어요.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 손에 달린 것입니다.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성도는 그날그날 부어주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어느 인간이 하늘만 쳐다보고 삽니까?

불안해서 못살아요.

인간의 속성은 예측이 가능해야 안심을 해요.

자기 손안에 잡고 있어야 안심을 해요.

그래서 뭐든지 틀 속에 가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든!

은혜든!

복음이든!

 

자기가 아는 것으로 붙들고 있어야 안심을 해요.

우리는 날마다 우상을 만들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박살을 내려고 어떤 사건들을 자꾸만 발생시켜서 우리의 예측을 빗나가게 하시는 일을 벌리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하나님이 밉다고 아우성을 치는 것입니다.

왜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느냐고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네 마네,

예수를 믿네 마네 하면서 말이에요.

 

성령을 받은 성도는 자기가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아요.

그러니 날마다 상한 심령일 수밖에 없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어떻게 남의 신앙을 맞다 틀리다 판단 한단 말입니까.

그러지 못해요.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보니 점점 입에 쟈크를 채우게 되어요.

예전엔 온갖 비판을 다 했어요.

온 세계 교회를 다 비판하고 모든 목사들을 다 판단 했어요.

옛날에 설교를 들어보면 들을 수가 없어요.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어요.

교만이 목구멍까지 차 있었어요.

 

그 땐 에스겔 성전에서 나오는 물이 내 발목 정도에 차인 것 같아요.

그러니 천지 분간을 못하고 나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젠 남을 판단한다는 것이 두려워요.

아마도 물이 허리춤까지 찬 것 같아요.

 

그러니 안하려고 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뜻을 전부 담아내지를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안다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하심에 광대하심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일 부분이기 때문에 옳다 그르다 판단 할 수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욥처럼 입을 닫을 수밖에 없어져요.

신앙이 깊어지고 좋아져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가세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게 하시니 할 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린 점점 유구무언이 되어 가야 합니다.

우리가 원치 않아도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남에 신앙을 간섭하려고 하지도 알려고도 하지 마세요.

 

그냥 주께서 알아서 간섭하시겠지 하고 가만 두세요.

하나님께서 다 다루고 계신다고 믿고 그냥 구경이나 합시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제발 자기 안에 가두지 마세요.

예루살렘 여자들처럼 자기들 기준으로 하나님(왕)의 사랑을 판단하지 마세요.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 오실 때에는 나는 은혜 줄 자에게는 은혜를 주고 벌을 줄 자에게는 벌을 준다고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마음대로라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 가타부타 남에 신앙을 판단하지 말란 말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어느 시대이고 자칭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죽였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면 자칭 사도라고 하고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자들이 많이 일어나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칭 복음 잘 안다고 하면서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을 사단의 회라고 했어요.

이 말을 역으로 하면 마귀는 복음으로 문제를 일으키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사단의 회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사단의 회이기 때문에 자기가 아는 복음을 기준으로 가지고 남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우상성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심판하는 행위를 일삼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안다고 하면 그 때부터 그 앎은 사람을 죽이는 무기로 사용이 되어져요.

안다는 그것으로 기준을 삼아서 심판을 행사하고 남을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하였고!

무엇이든지 다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아직도 다 알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교만을 악으로 들추어내기 위해서 우리가 포착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일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예수에게 속한 사람들은 그 시대 안다고 하는 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무시당하는 모습으로 남겨져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만물의 찌끼 같고 사람들의 구경거리라고 했어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들은 이 세상에 실패자의 모습으로 두셨어요.

예수님도 이 세상에 약하고 천한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종의 모습으로 오신 거예요.

 

술람미는 이 비밀을 안 것입니다.

그러니 친구들이 유방이 없다고 조롱을 하자 내 님은 나에게 유방이 없기 때문에 사랑하고 있다고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이런 안목으로 살아야 합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의 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술람미를 조롱하던 자들의 길에 서지 않게 됩니다.

 

우린 술람미입니다.

매력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죄인입니다.

죄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그냥 입을 닫고 하루 하루 주님이 주신 은혜로 감사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곧 오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까지 아가서를 통하여서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부디 이 깨달음이 지식으로 남지 말게 하시고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삶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항상 술람미처럼 신랑의 손이 이끌림 받으며 신랑의 사랑을 사모하며 흠모하여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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