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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아가서 강해

♣(아가서 강해) 1강. 예수님의 사랑 노래

by coroa 2022. 8. 28.

아가 제1장
1   솔로몬의 아가라
2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1강. 예수님의 사랑 노래

아가 제1장 1 솔로몬의 아가라 2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정낙원 목사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였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케 하였다는 것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인간들 이야기가 아니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성경은 자신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어떤 성경이라 하여도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란 말이지요.

오늘 우리가 살펴볼 아가서도 예수님 이야기에요.

 

육적으로 보면 아가서는 참으로 어려운 내용입니다.

하지만 아가서도 성령이 기록케 하셨으니 동일한 성령을 마신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어려울 것도 없어요.

 

구약 성경 중에서 아가서는 가장 어려운 책입니다.

잘 설교가 되어지지 않는 책이기도 해요.

잘못 해석하면 외설로 전락할 수가 있어서 그래요.

왜냐하면! 남녀 간의 성적 묘사가 적나라하게 기록되어져 있기 때문이에요.

 

보통 보면 이단들이 아가서를 이용하여 비밀 교리를 만들어요.

특히 사이비 교주들이 이 아가서를 자기로 해석해서 교인들을 농락하는데 도용해요.

실제로 외국에선 이 아가서만 가지고 집단적으로 성애를 즐기는 집단도 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30세 이하는 못 읽도록 금서(禁書)로 정해 놓았어요.

기혼자에 한해서 읽을 수 있어요.

미혼자가 읽으면 육적으로 해석하여 음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습게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마음대로 읽을 수 없는 책이 아가서에요.

 

그러니 이단들이 이걸 이용해서 봐라,

이건 아무나 풀지 못한다,

내게 그리스도의 영이 임했기 때문에 푼다고 하면서 자기를 추종하도록 미혹하는 겁니다.

결국 자기를 그리스도 자리에 앉히는 겁니다.

이러면 재림 예수가 또 하나 탄생하는 겁니다.

그러니 그 안에 빛이 없는 사람은 다 넘어가게 되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기가 되면 다섯 개의 짧은 글들을 낭독합니다.

이걸 오축이라고 하는데 5개의 두루마리란 말입니다.

룻기와, 전도서와, 예레미야 애가와, 에스더와, 아가서에요.

이걸 절기마다 제사장이 백성들에게 낭독해 줍니다.

그럼 백성들은 아멘으로 화답을 해요.

 

룻기는 오순절에 낭독하였고,

전도서는 장막절에 하였고,

에스더는 부림절에 했고,

애가는 아빕월 9월 예루살렘 함락 일에 했고,

아가서는 유월절에 낭독 했는데 이는 해방의 기쁨을 사랑의 노래로 불렀던 겁니다.

 

모두가 그 절기에 의미와 연관이 되어 있어요.

특히 아가서가 유월절에 낭독이 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가 있어요.

유월절의 기쁨이 아가서의 노래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43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해방된 날이에요.

애굽에 종살이는 죽음과 같아요.

그래서 출애굽 하면서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서 죽음에서 해방한 것을 맛보게 한 겁니다.

 

출애굽이란? 그져 애굽에서 탈출 했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애굽이란?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된 겁니다.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살아났느냐 하면 어린양의 피로서 살아났어요.

 

그러니 얼마나 기쁘겠어요.

이 기쁨을 아가서를 통하여서 하나님께 사랑노래를 불러 드리는 겁니다.

결국 아가서는 어린양의 노래와 같은 것이에요.

어린 양에게 바쳐지는 기쁨의 노래이고,

사랑의 노래라고 할 수가 있어요.

 

물론 아가서의 노래들은 솔로몬과 술람미가 서로에게 사랑 노래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요.

하지만 술람미가 솔로몬에 노래 할 수 있는 것도 솔로몬 왕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메아리처럼 되돌려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가서는 솔로몬의 노래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아가서는 전부 은유(隱喩)적으로 말을 해서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워요.

이단들이 아가서로 교인들을 미혹하는 것도 은유를 자기마음대로 교묘하게 자기로 의인화 시켜서 해석을 하기 때문입니다.

상징을 전부 자기 입맛대로 풀이해요.

그래서 교인들이 자기를 사랑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그런 분위기로 몰고 가는 거예요.

 

그러니 진리의 영이 없는 교인들은 훅~하고 넘어가는 겁니다.

왜? 너무도 달콤하거든요.

특히 여성들은 감성적이기 때문에 잘 빠져들어요.

여기에 걸려들면 결국 몸 버리고 돈 빼앗기고 생체기를 당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놈들이 너무 많으니 속지 말아야지요.

아가서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성경을 가지고 자기를 따르게 하는 자는 다 거짓입니다.

속지 않으려면 내가 소경이 되지 말아야지요.

그럼 아가서를 해석하는 법을 알아야겠지요.

 

먼저 간단하게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를 살펴봅시다.

성경해석엔 3 가지 원리가 있어요.

이 원리는 모든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에요.

 

역사적 해석과,

문자적 해석과,

영(묵시)적 해석이 있어요.

 

역사적 해석이란?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그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선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신 사건이에요.

신약에선 교회에서 일어난 사건이구요.

동화나 신화가 아니고 사실이에요.

 

성경이 역사적인 사건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실제로 인간사 속에서 일을 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이게 너무도 중요한데 이 시대 교인들에겐 먼 나라 이웃나라 이야기처럼 듣고 있어요.

 

지금 여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세요.

내가 분명하게 존재 하듯이 하나님이 존재 하고 계세요.

구경하고 계신게 아니고 저와 여러분을 간섭하고 계신다구요.

제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리는가요?

제가 신비주의처럼 보이는가요?

 

이게 안 믿어지면 예수 믿지 마세요.

교회 다니지도 말고,

아니, 믿어지지도 않는 것을 왜? 믿는다고 합니까?

 

혹시나 하나님이 내 정성이 가상해서 복을 줄까봐서 입니까?

아마 한국교회 교인들 대다수가 이런 식으로 막연하게 믿고 있어요.



대다수라는 것은 제 생각이에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과 함께 계세요.

그럼 하나님이라고 불러 보세요.

이상한가요.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하는 제가 이상한 건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저를 이상하게 보는 여러분이 이상한건지,

암튼 둘 중에 하나는 이상하니 이상 한 대로 삽시다.

 

역사적 해석에 대해서 더 살펴봅시다.



출애굽과 같은 사건은 실제 일어난 사건이에요.

어린 양의 피로 죽음의 재앙에서 살아난 것도 실제 사건이고,

홍해를 건넌 것도 실제 사건이고,

만나 먹은 것도 실제 사건이고,

여리고가 무너진 것도 실제 사건이고,

요단강 물이 갈라진 것도 실제 사건이고,

가나안에 들어간 것도 실제 사건이에요.

 

오늘 동계올림픽에서 이상하 선수가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땄어요.

실제이지요.

그렇듯이 성경 속에서 말하는 구약 이스라엘에서 일어났던 것도 실제란 말입니다.

그러니 구약이든 신약이든 성경을 볼 땐 실제 사건으로 해석하면 되어요.

 

그런데 그 실제 사건은 모두가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맺은 언약을 이루어가는 차원에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실제 사건을 언약적인 관점에서 해석을 하여야 하는 겁니다.

언약의 실상은 예수님이니 예수님과 연관된 이야기로 해석을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으로만 해석하면 교훈이 되어요.



성경은 교훈이 아니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책이에요.

그러므로 사건을 예수님과 연결하여서 보아야 하는 겁니다.

이걸 묵시적 해석이라고 해요.

흔히들 영적 해석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이 묵시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의 사건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것도 실제 사건이고,

바다 위를 걷고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한 것도 실제 사건이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실제 사건이고,

사흘 만에 죽음에서 부활한 것도 실제 사건이고,

구름타고 올라 간 것도 실제 사건이에요.

성령이 오신 것도 실제 사건이에요.

 

그럼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도 실제로 일어날 사실이겠지요.

전부 사실인데 예수님이 재림 한다는 것만 영적인 것일 순 없잖아요.

그렇잖아요.

 

예수님이 본 그대로 다시 오세요.

영적으로 오시지 않고 실제로 오신다구요.

어허~ 이거 안 믿는 눈치인데,

이게 믿어지셔야 합니다.

 

그럼 천국은 믿습니까?

여러분들이 천국에 간다는 것은 믿어지나요.

예수님이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려고 다시 와요.

우린 천국 가는 길을 몰라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데리고 가세요.

 

쉽게 말할게요.

스데반이 죽을 때 예수님을 봤지요.

이는 예수님이 마중 나온 겁니다.

스데반을 천국으로 인도하려고!

그냥 새겨서 들으세요.

괜히 목사님 예수님이 마중 나왔다는 것이 어디에 나와 있나요 묻지 말고,

 

그럼 우리가 죽을 때도 예수님이 마중 나오겠지요.

스데반에겐 마중 나오고 우리에겐 안 나오면 우리가 섭섭하잖아요.

그건 차별하는 거잖아요.

그러니 죽어도 걱정 마세요.

예수님이 마중 나올 거니까,

그러게 제가 하나님이 멀리 있지 않고 지금 여러분 곁에 계신다고 하잖아요.

제발 좀 믿으세요.

 

분명히 말하지만 예수님은 다시 오세요.

다른 분으로 오지 않고 예수님으로 오세요.

어떤 사람에게 에수의 영이 임하여 오지 않는다구요.

신천지에 이만희 라는 사람은 예수의 영이 자기에게 임하여서 자기가 재림 예수라고 해요.

그런데 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요.

 

다시 말합니다.

예수님은 가신 그대로 오세요.

다른 사람으로 오시지 않고 에수님 자신으로 오세요.

 

문선명이로 오지 않고,

이만희로 오지 않고,

안상홍이로 오지 않아요.

정명석이로 오지 않는다구요.

이들은 다 사단 영을 받은 적 그리스도들이에요.

 

아니 자기들 말대로 자기가 재림 예수라고 한다면 뭘 두려워합니까?

재림 예수는 세상을 작살내려고 오시는데 뭐가 두려워서 깍두기들을 호위병으로 둡니까?

예수님이 조폭보다 못합니까?

그럼 조폭을 믿지 뭣하러 예수를 믿어요.

재림 예수로 온 놈들이 뭐가 아쉬워서 돈을 밝힙니까?

예수님이 돈 가지고 뭐하게요.



땅 사서 뭘 하려고,

빌딩 지어서 임대 사업하려고요.

 

이건 영안이 안 열려도 알아요.

세상 사람들도 그 놈들 보고 미친놈이라고 해요.

그런데 수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믿고 따라요.

그것도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교수도 따르고, 의사도 따르고, 판사도 따르고, 자칭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따라요.

왜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미혹을 당하면 이렇게 되어요.

 

여러분들도 언제 훅하고 한방에 갈지 몰라요.

그 사람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저와 여러분보다 멍청해서 따르는 줄 아세요.

아니에요.

하나님이 따르게 허락했기 때문에 따르는 겁니다.

그러니 저와 여러분들은 감사해야 해요.

하나님, 미혹당하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라고요.

지금 그러세요.

주여, 미혹당하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님은 가신 그대로 오세요.

예수님은 그냥 예수님으로 와요.

성도들은 알아보아요.

그리고 재림 예수는 은밀하게 오지 않아요.

부활의 주님은 불신자를 볼 수가 없지만 재림 하시는 예수님은 모두가 보아요.

 

계 1:7.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보세요.

각인의 눈이 그를 본다고 하지요.

땅에 모든 족속이 본다고 하잖아요.

그를 찌른 자도 본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통곡한다고 한다고 했어요.

 

구름타고 오세요.

구름타고 온다고 하니 이걸 영적으로 풀어서 구름은 물이고 물은 말씀이니 말씀을 받으면 예수님이 재림 한 것이다.

그래서 말씀에 종은 재림 예수다 이따위 소리를 하는 겁니다.

이게 모두가 성경을 억지로 풀기 때문에 그래요.

 

재림 예수가 어디 한국 예수입니까?

과천에다 새 예루살렘을 짓게,

그럼 미국 사람은,

독일 사람은,

저기 아프리카 사람은 어떻하라구요.

마귀가 미혹하니 이런 말을 듣는 겁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예수님은 가신 그대로 재림하십니다.

예수님으로 오세요.

전 그렇게 믿고 살아요.

 

그리고 하나님을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우리와 같이 계세요.

우리와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고 우리와 희노애락을 함께 하세요.

 

전 하나님과 대화를 잘 해요.

그냥 하나님이 곁에 계신 것으로 알고 이야기해요.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그래요.

 

불만이 있으면 하나님 이거 너무 하는거 아닙니까? 라고 하면,

까불지 말고 일이나 해,

그래요.

그래도 불평하면,

그래 뭐가 불만인데,

그러면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해요.

그러고 나면 그래 할 말 다 했나, 그러세요.

예!

 

그러면 이런 저런 말씀들이 생각이 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궁시렁 거린 것이 다 틀린 거라는 것을 깨달아요.

결국 전부 내 잘못으로 돌아와요.

단 한 번도 하나님을 이긴 적이 없어요.

늘 설득당해요.

 

뭐가 이상한가요.

신비주의 같아 보입니까?

아니! 하나님이 살아 계시잖아요.

그러면 말해야지요.

왜?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있습니까?

달면 달다 쓰면 쓰다고 해야지요.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과 변론 하라고 하잖아요.

 

사 43:26.  “너는 나로 기억이 나게 하고 서로 변론하자 너는 네 일을 말하여 의를 나타내라”

 

보세요.

그래 뭐가 문젠지 이야기 좀 해보자고 하잖아요.

너는 너 주장을 펴고,

나는 내 주장을 펼 테니,

한번 이바구(변론) 해 보자는 겁니다.

 

기도가 뭡니까?

하나님과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도 이야기 해 줘요.

깨달음을 주신다고요.

 

하나님이 곁에 계세요.

그러니 무슨 일이든지 의논하세요.

뒷방 영감 취급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지금도 하나님은 실제로 일하고 계신단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실제 하듯이 하나님도 실제 해요.

하나님이 신화 속에 신이 아니에요.

 

구약 성경은 전부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기록하고 있어요.

이는 하나님께서 실제 인간 역사 속에 개입하여서 다스리고 계신단 말입니다.

그 실제하신 하나님이 지금 저와 여러분도 실제로 다스리고 계세요.

 

사람들은 말로는 안다고 하는데 실제론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아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도(道) 닦는 것이 되고 말았어요.

 

하지만 신앙생활은 삶이에요.

예수님과 함께 부대끼면서 사는 겁니다.

삶 속에서 예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면 그건 종교이지 신앙은 아니에요.

 

종교는 신(神)과 교제 하는 것이 아니고 섬기는 거예요.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에 끌어들여서 희노애락(喜怒哀樂)을 함께 하는 겁니다. 

암튼 하나님이 실제로 사건을 일으킨 것을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역사적 해석이에요.

 

문자적 해석은 하나님의 명령을 문자 그대로 보는 겁니다.



하라고 하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아요.

율법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겁니다.

 

율법은 문자적으로 양을 잡으라고 하면 양을 잡았어요.

도적질 하지 말라고 했으면 도적질 하지 말아야 해요.

안식일 지키라고 했으면 안식일을 지켜야 해요.

이처럼 문자대로 하라고 하면 하고, 하자 말라고 하면 하지 않는 겁니다.

 

그 다음에 영적인 해석이 있어요.

이건 모든 사건이나 문자 속에 담긴 의미에요.

그 의미를 찾는 겁니다.

예수님과 연관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죽음에서 구원 받았다.

그러면 이걸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았다는 이야기로 해석을 하는 겁니다.

이처럼 영적 해석이란?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 이야기로 해석하는 거예요.

 

구약의 율법은 전부가 다 문자적 해석을 하여야 하지만 거기에 머물면 안 되고 반드시 영적 해석을 하여야 해요.

영적 해석을 하라는 것은 예수님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하라는 겁니다.

율법을 예수님으로 해석한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어요.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했어요.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엔 율법을 전부 영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어요.

신약에서 구약을 꺼꾸러 훑어가는 식으로 해석했어요.

그러니 구약의 모든 성경이 예수님 이야기로 풀어지는 겁니다.

 

바울은 구약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전부 재조명을 한 사도에요.

히브리서 같은 것은 결정판이에요.

율법을 전부 새 언약 차원에서 해석을 하잖아요.

 

그러니 율법 속에서 복음이 튀어 나오는 겁니다.

결국 모든 성경은 창세전에 언약인 새 언약으로서의 영적 해석을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로 풀어져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왜, 아가서를 말하기 전에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이게 바탕에 깔리지 않으면 아가서를 해석할 수가 없어요.

이걸 모르고 해석하면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요.

 

자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역사는 묵시를 그려내는 도화지와 같아요.

알다시피 이 세상은 하나님과 아들 간에 창세전 약속을 그려내기 위해서 창조가 되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언약을 세상에 사건화 시켜요.

언약을 보여주는 어떤 일들이 일어난단 말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묵시에 속한 겁니다.

그런데 그 묵시에 속한 언약이 이 세상에서 그려질 땐 어떤 사건으로 나타나요.

역사 속에서 어떤 일들이 툭툭 터져 나와요. 



어떤 식으로 터져 나오는가 하면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으로 터져 나와요.



아브라함이 선택을 입은 것도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이고,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것도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이고,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나는 것도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이고,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도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이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도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이에요.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언약을 보여주기 위한 사건이에요.



천재지변도 언약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고,

제가 목사가 된 것도 언약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고,

여러분이 예수 믿는 것도 언약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에요.

 

지금 제가 아가서를 설교하는 것도 주께서 간섭하신 사건이에요.

 

성경에 모든 이야기들은 다 예수님과 연관된 이야기에요.

사건이든,

인물이든,

비유이든,

은유이든,

그러니 모든 성경은 예수님 이야기로 증거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오늘부터 살펴볼 아가서도 전부 예수님 이야기로 풀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가서에는 각종 동물이나 식물이나 광물들이 많이 나와요.

솔로몬하고 술람미가 이런 것으로 둘만이 아는 은어로 말한 거예요.

지금말로 이러한 것들의 특성을 가지고 예수님과 성도 간에 사랑이야기를 나누는 겁니다.

 

그러니 아가서는 문자적 해석을 금지해요.

문자적 해석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외설로 흘러요.

그 어떤 성경도 인간들의 사랑이야기를 말하고 있지 않아요.

 

모두가 예수님과 성도의 사랑이야기에요.

아가서 솔로몬과 술람미의 애틋한 사랑을 통하여서 예수님과 성도간의 신앙을 계시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그럼 아가서의 서론적 의미를 살펴봅시다.



아가서는 솔로몬 왕이 썼어요.

솔로몬은 잠언과 전도서와 아가서 이 세 가지 지혜서를 썼어요. 

잠언은 지혜를 통하여서 예수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어요.

참된 지혜는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해주고 있어요.



전도서는 인간 세상의 덧없음을 말해주고 있어요.

인생이란? 아무리 화려하게 살아도 허무한 것이라고 합니다.

 

아가서는 허무한 인생을 변화시키는 것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면 인생이 변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변하느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생긴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성도에게 주어지면 성도는 어떤 반응으로 살아가게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어요.

술람미가 솔로몬을 향한 사랑으로 인하여 그 어떤 고난도 굴하지 않고 결국 그 사랑을 차지한다는 것은 성도가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만 받았다면 그 어떤 난관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겁니다.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기에 그 어려운 환경을 이긴 겁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니 아가서는 술람미 여인을 통하여서 성도가 세상을 어떤 자세로 이겨 나갈지를 말해주고 있어요.

술람미(성도)가 세상을 이기는 힘이 바로 솔로몬(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겁니다. 

이건 예외적인 것인데 참고적으로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한 사람의 일생을 세 시기로 구분하여 말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요일 2:12-14=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사도요한이 그럽니다.



아이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 그러지요.

 

사도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하는 말이에요.

아이와 청년과 아비가 있다는 말이 아니고 이는 한 사람의 신앙의 모습들을 말해주고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아느냐의 차이성으로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약속을 줍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는 겁니다.

약속의 실체는 예수그리스도에요.

 

그런데 그 약속의 실체인 예수그리스도를 받으면 그 속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어요.

이 모두가 하나이지만 셋이에요.

 

사도요한이 지금 제자들에게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어요.

다른 말로 예수님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어요.

그러면서 아이들과 청년들과 아비를 구분하고 있어요.

이를 개인에게 적용하면 한 사람의 다른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아이와 같은 때가 있고,

청년과 같은 때가 있고,

아비와 같은 때가 있다는 말이에요.

이건 성화론자들의 주장처럼 차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깨달음을 말해요.

예수님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 라는 것으로 말하고 있어요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우리가 어린아이 때는 어린아이와 같이 생각하고 말하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 어린아이 일을 버렸다고 하잖아요.

이는 어린아이와 같이 예수를 알 때가 있고 어른처럼 알 때가 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깨닫는 차이를 말해요.

등급이 아니고 깨닫는 차이에요.

등급이 생기면 구원도 등급에 생겨요.

그러니 성화주의자들은 천국에서도 등급이 있다고 가르치는 겁니다.

그래서 자식이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면 주의 종이 된다고 좋아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 몸의 지체라고 하지요.

몸에 지체가 등급이 있나요?

없지요.

다 각자가 맡은 역할이 있기 때문에 소중한 겁니다.

몸을 등급으로 매기는 것은 보험회사에서나 해요.

 

교회 안에 직분도 지체와 같아요.

목사는 높고 집사는 낮은 것이 아니에요.

목사는 목사로서 할 일이 있고 집사는 집사로서 할 일이 있어요.

목사와 집사는 서열이 아니에요.

각각 주께 받은 직분이에요.

 

이처럼 사도요한이 아이들아, 청년들아, 아비들아, 하는 것도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의 차이성으로 말하는 겁니다.

아이들에겐 예수님이 누구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신앙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있어요.

 

그러니 아이란 것은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믿음”에 해당되는 것이에요.

이건 마치 솔로몬 이 쓴 세 가지 지혜서 중에 “잠언”과 같아요.

잠언은 참된 지혜는 예수그리스도라고 말해주고 있잖아요.

 

그리고 청년들은 뭔가 투쟁하고 싸우는 모습으로 말해주고 있어요.

이는 믿음을 받은 성도가 하늘에 부르심의 소망을 위해서 비 진리와 싸우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청년이란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소망”에 해당이 되어요.

솔로몬의 세 지혜서를 비유하면 “전도서”와 같아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비가 있어요.

아비는 모든 것을 다 통달한 사람이에요.

아비는 예수를 사랑하며 사는 신앙을 말해요.

 

바울이 그러지요.

자기는 복음 안에서 아비라고,

내가 너희를 낳았다고 하잖아요.

이는 바울이 아비와 같이 예수님을 안다는 겁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거했어요.

아비란? 바울처럼 실제로 예수 안에서 주어진 믿음을 바탕으로 견고하게 서서 하늘에 소망을 품고 예수님과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신앙을 말해요.

그러니 아비란?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사랑”에 해당이 되어요.

이는 솔로몬의 세 지혜서 중에 “아가서”에 해당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가서는 사랑이야기라서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은 사람이라야 이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걸 성막으로 비유하면 “뜰”이 있고 “성소”가 있고 “지성소”로도 비유할 수가 있어요.



“뜰”은 천지 분간 못하고 나대는 아이들 수준이고,

“성소”는 열심히 일하는 청년 수준이고,

“지성소”는 사랑을 나누는 아비 수준인 겁니다.



또 다시 말하지만 이건 등급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교제에 깊이를 말하는 것이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괜히 자기가 깨닫지 못하고선 정낙원 목사는 세 가지 신앙이 있다고 말하더라고 하지 말고,

하도 말귀를 못 알아먹고 나대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래요.

 

그러니 아가서는 아비들과 같은 성도가 이해를 할 수가 있어요.

아이나 청년과 같은 미성년자는 해석하면 안 되어요.

미성년자가 해석하면 육적으로 풀어서 인간 사랑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제 해석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에요.

전 다만 이렇게 이해하고 은혜를 받아요.

그렇게 깨닫고 보는 겁니다.

앞으로 더 좋은 해석이 나온다면 고칠게요.

더 좋은 해석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중요한건 그 어떤 성경을 말하더라도 예수님의 구원이야기로 풀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럼 솔로몬이 왜? 예수님의 표상인지 살펴봅시다.

 

솔로몬은 인간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어요.

 

왕상 4:30-34. "솔로몬의 지혜가 동양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저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워서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 나으므로 그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 저가 잠언 삼천을 말하였고 그 노래는 일천다섯이며 저가 또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저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한지라 모든 민족 중에서 솔로몬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 중에서 그 지혜를 들으러 왔더라"

 

솔로몬은 창조세계를 논할 정도로 지혜로웠어요.

그래서 천하 모든 사람들이 솔로몬에게 지혜를 들으러 왔어요.

창조 세계를 논했다는 것은 창조주의 지혜를 가졌다는 뜻입니다.

 

영적인 의미로 창조주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창조주시니 다른 말로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에요.

예수님 속엔 하나님의 각종 지혜가 담겨져 있어요.

그러니 솔로몬은 예수님을 계시하는 예표의 사람인 겁니다.

 

다윗 언약에 의하면 솔로몬은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삼하 7:12-17.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3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17 나단이 이 모든 말씀과 이 모든 묵시대로 다윗에게 고하니라"

 

다윗이 성전을 짓겠다고 하자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말합니다.

성전은 네 자식이 지을 거라고 합니다.

여기서 자식이란 솔로몬을 말해요.

 

그러면서 그 솔로몬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는 거지요.

그래서 솔로몬 속에는 예수님의 모습이 담겨져 있는 겁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짓지요.

이는 장차 예수님이 성전을 지을 일을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솔로몬의 아가란 말은 “예수님의 노래” 란 말입니다.

지금까지 한 말이 다 이해되지요.

 

그럼 이제부터 아가서를 살펴봅시다.

 

1절 “솔로몬의 아가(雅歌)라”

 

아가란? “맑은” 아(雅)와, “노래” 가(歌)를 써요.

합하면 맑은 노래란 말입니다.

맑은 노래란 영혼을 울리는 천상의 노래란 뜻입니다.

 

영혼을 소성케 하는 노래란 말입니다.

영혼을 소성케 한다는 말은 죽은 자를 살린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이 노래는 생명의 노래인 겁니다.

산 자들이 부르는 노래인 겁니다.

 

그럼 생명을 살리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야기에요.

십자가의 사랑 이야기만이 영혼을 살리는 천상의 이야기에요.

그러므로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결한 사랑 이야기인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는 생명이 가득 담겨져 있잖아요.

 

그러니 솔로몬의 아가라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라는 뜻인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노래하는 겁니다.

누구를 위한 노래입니까?

자기 백성들을 위한 노래이지요.

 

여기선 자기 백성이 술람미 라는 한 피부가 검은 여인이에요.

아주 못난 여인인데 세상에 천하를 호령하는 왕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어요.

세상에~ 이건 불가사의한 사랑이 어디에 있겠어요.

이건 다음 시간에 살펴볼 겁니다.

 

암튼 솔로몬이 술람미를 위하여 최고의 노래를 헌사(獻詞)한 겁니다.

난 너를 이렇게 사랑했노라고,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고 계신 겁니다.

꼴 갖지 않은 이런 못난이를 위하여 말이에요.

 

솔로몬은 일천 궁녀를 거느리고 살았어요.

술람미는 그 중에서 가장 사랑을 받은 여인이에요.

아가서는 술람미에게 한 노래에요.

그래서 "노래 중에 노래"라고 하는 겁니다.

 

아마도 그 당시엔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러준 모양입니다.

일천 궁녀를 거느리고 있었으니 각 궁녀에게 노래를 지어줬던 모양이에요.

솔로몬은 1005개의 노래를 지었어요.

그 중에서 아가서는 노래 중에 노래에요.

그런 노래를 술람미에게 바쳤어요.

 

솔로몬이 왜? 술람미를 사랑했을까요?

최고의 노래를 헌사 했을까요?

그건 솔로몬의 마음이 술람미에게 빠져 있다는 것이에요.

 

사랑은 내가 원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해서 주님이 날 사랑하지 않아요.

주님이 날 사랑해야 해요.

 

사도 요한이 그러지요.

사랑은 여기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은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한 것이라고,

그래요.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우리의 원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원함에서 주어진 겁니다.

 

여러분도 그렇지요.

내가 사랑해야 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야 행복해요.

 

사람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자기가 바라는 것을 소유하였을 때입니다.

옷을 입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옷을 입어야 행복해요.

음식도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어야 행복해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소유해 보세요.

저절로 노래가 나옵니다.

그러니 내가 사랑하면 세레나데를 부른다니까요.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이 사랑해서 이루어진 겁니다.

우린 구원 받을 필요성도 모르고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주님의 찾아와서 우리 실존을 알려주고 구원해 주셨어요.

그것도 주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서예요.

 

아가서는 서로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노래하고 있어요.

그러니 둘이서 밀고 당기면서 사랑 놀음을 하는 겁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원리가 하나 있어요.

 

먼저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했어요.

그럼 술람미는 거기에 대한 반응이 나타나요.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사랑을 그리워하는 형태로 나타나요.

이게 신약에선 예수님의 의(義)로 죄사함 받은 자유함으로 나타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해갈되는 자유를 맛보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도 믿음을 받은 성도만이 알 수가 있듯이,

아가서는 예수님에게 사랑을 받은 성도만이 느낄 수가 있어요.

술람미가 솔로몬의 사랑을 받고 상사병(相思病)이 났어요.

그럼 성도도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면 상사병이 나요.

이럴 때 비로소 아가서가 내 이야기로 들려져요.

 

아가서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전반부에는 솔로몬과 술람미의 옛 사랑을 추억하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중반부에는 만남과 헤어짐이 이루어져요.

후반부는 이별 후 다시 만나는 내용입니다.

 

아가서의 결론은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겁니다.

사랑은 얼마나 강한지 바닷물로도 끄지 못하고 홍수라도 엄몰치 못한다고 합니다.

사랑은 죽음조차도 갈라놓지 못해요.

어디 이런 사랑 한번 해 보실래요.

 

그럼 이제부터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 속으로 빠져 봅시다.

솔로몬은 예수님이고 술람미는 우리 죄인이에요.

이 사고로 보셔야 해요.

그래야 아가서가 우리 구원 이야기로 풀어져요.

 

그럼 우리 구원 이야기로 2절을 상고해 봅시다.

 

2절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아가서의 시작은 입맞춤으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왜 입맞춤으로 운을 뗄까요.

이는 사랑의 본질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뭐냐?

입맞춤입니다.

입맞춤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입맞춤은 생명과 생명의 나눔이에요.

같은 생명이 아니고서는 나눔이 되지 않아요.

그러므로 입맞춤을 한다는 것은 너와 나는 한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둘이 아니라 하나란 말입니다.

 

하나란? 생명의 근원(根源)이 같다는 말입니다.



최초에 아담과 하와가 이런 사랑을 했어요.

아담이 하와를 보고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한 것은 자기 몸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와가 자기가 나왔던 그 아담의 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사랑이라고 해요.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요.

 

구원이 뭐냐?

자기가 나왔던 몸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이를 일컬어 만물이 주께로 나오고 주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자기 몸으로부터 나온 자들을 찾으러 왔어요.

이걸 에덴동산에선 하와가 아담의 몸으로부터 나와서 아담의 몸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부부이고 사랑이거든요.

그래서 성도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자기 몸에서 나온 신부 찾으러 왔어요.

창세전에 예수의 몸 안에 있던 자들은 예수님이 지나가면 척척 달라붙어요.

마치 예수님은 자석처럼 지나가면 자기 백성은 척 알아보고 영접을 하게 되어 있어요.

이걸 세상 말로 필이 꽂혔다,

또는 한눈에 뿅~ 간다고 하는 겁니다.

눈에 콩깍지가 씌운다고 해요.

 

성경은 이걸 일컬어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하는 겁니다.

끌려요.

예수님이 끌어당기는 힘에 끌려가는 겁니다.

그리곤 예수님에게 난 창세전에 이미 당신의 여자랍니다! 라고 고백한다고요.

이를 영접이라고 해요

영접이라는 말은 한 몸이 된다는 말이에요.

잘 이해하세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는 모두가 예수님과 성도 간의 사랑이야기를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이걸 깨닫는 사람이 성도이고 못 깨닫는 사람은 불신자에요.

그래서 바울은 남편과 아내를 예수님과 성도로 해석한 겁니다.

 

그러니 바울이 얼마나 똑똑 합니까?

성령이 깨닫게 하시면 우리도 바울처럼 성경을 보는 눈이 열리고,

세상의 모든 사랑이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모형이라는 것으로 바라보는 안목이 깊어져요.

 

그러니 아내를 예수님이 성도를 사랑하듯이 사랑하세요.

남편 또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사세요.

물론 죄인이라서 안 되지만 말이에요.

그러나 부부간에 원리는 예수님과 성도의 사랑이야기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그래서 아가서는 부부만이 볼 수가 있고 느낄 수가 있고 알 수가 있는 은어들을 많이 사용하는 겁니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광물이든 모두가 둘만이 알 수 있는 은어에요.

은어가 뭔지 알지요.

둘 만이 아는 은밀한 말이에요.

 

제가 만약에 제 아내를 꽃 사슴이라고 부른다고 합시다.

그럼 꽃 사슴은 저와 아내만이 아는 은어에요.

다른 사람은 몰라요.

보통 애인을 부를 때 은어를 쓰잖아요.

애칭이라고도 해요.

이와 같이 솔로몬과 술람미 만이 아는 은어가 때로는 꽃으로, 때로는 동물로, 때로는 보석으로 애칭이 되는 겁니다.

 

이 은어를 알아먹는 사람이 바로 솔로몬에게 사랑을 받은 술람미에요.

그러니 솔로몬이 부른 사랑 노래는 술람미만 알아먹어요.

다른 예루살렘 여자들은 몰라요.

 

십자가 복음이 그래요.

아무리 오픈해서 말해도 택한 자가 아니면 몰라요.

복음은 은폐시킬 이유가 없어요.

오직 예수님의 신부들만 알아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말하면 다 알아들을 것 같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십자가를 말해줘도 몰라요.

성화주의자들이 그래요.

그러니 저와 여러분이 십자가 복음이 들려진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놀라야 한단 말입니다.

에이구~ 이 샤방 샤방님들아!

 

다시 입맞춤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입맞춤이란? 생명의 기운과 기운의 교류에요.

마치 컴퓨터에 자료를 서로 다운로드하는 것과 같아요.

구약에 보면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어요.

 

엘리사 시대로 가 봅시다.

 

왕하 4:32-34.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33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34 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엘리사가 어느 날 수넴이라는 동네를 지나갔는데 한 여인이 엘리사를 간권(諫勸)하여 자기 집에 유숙(留宿)하고 가라고 했어요.

참고로 말하면 술람미가 수넴여자에요.

보통 보면 안동에서 시집오면 안동댁!

강릉에서 시집오면 강릉댁 그러는 것과 같아요.

 

암튼 수넴 여인이 엘리사가 지나가다 피곤하면 잠시 쉬었다 가라고 하면서 방 한 칸을 마련해 주었어요.

이건 마치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아요.

엘리사가 그 정성이 고마워서 유숙하면서 사환에게 이 집에 혹시 도움이라도 줄게 없나 알아보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 집엔 아들이 없는 겁니다.

가문에 아들이 없다는 것은 소망이 없다는 말입니다.

 

남편은 나이가 들어 늙었고 자식을 생산할 능력이 희박한 겁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내년 이 맘 때가 되면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합니다.

마치 천사들이 아브람과 사래를 찾아와서 이삭을 낳을 것이란 것을 알려준 것과 같지요.

맞아요.

그 일과 같아요.

지금 엘리사는 여호와의 사자로 그 집에 임할 하나님의 축복을 말해준 겁니다.

 

엘리사의 예언대로 그 이듬해 여인이 아들을 낳았어요.

여인이 늘그막에 자식을 얻었다는 것은 새 생명을 얻은 것과 같아요.

그러니 얼마나 기쁘겠어요.

 

그런데 이 아이가 어느 날 두통으로 죽고 맙니다.

그러자 수넴 여인은 그 아이를 엘리사가 기숙(寄宿)하던 다락방에 엘리사의 침상에 눕히고 남편에게 엘리사를 불러오라고 합니다.

 

이에 엘리사가 기별을 받고 와 보니 아이는 이미 죽은 상태입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에게 내가 언제 아들을 달라고 했느냐,

차라리 아들을 주지나 말지,

왜 주어가지고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느냐고 원망을 합니다.

 

이에 엘리사가 다 내 보내고 죽은 아이 몸에다 자기 몸을 합체(合體) 합니다.

입과 입을 맞대고,

눈과 눈을 맞대고,

손과 손을 맞잡고 자기 생명을 죽은 아이에게 다운로드 시켜줍니다.

그러자 죽었던 아이가 살아났어요.

 

이처럼 입맞춤이란? 생명의 기운에 소통이 되는 거예요.

지금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솔로몬의 생명을 준 겁니다.

저와 여러분이 구원을 얻은 것은 예수님에게 입맞춤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시편 2편 12절에 뭐라고 합니까?

누구든지 그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않으면 죽인다고 하지요.

지금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으로부터 입맞춤을 당하여서 예수의 생명을 다운로드 받은 겁니다.

이해되세요.

 

가슴이 뜨겁지 않나요.

전 황홀한데,

도대체 뭘 말해야 황홀합니까?

돈을 주어야 합니까?

아이구! 이 하나님께 복을 받을 사람들아,

 

입맞춤은 부부간에만 행하여지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한 몸이 된 자들의 사랑표현이에요.

아가서를 들었다고 아무나 붙잡고 입 맞추자고 하지 마세요.

이런 인간이 있으면 주둥이에다 아주 강력한 빨래집게로 찝어 주세요.

다시는 주둥이 내 밀지 못하게,

 

입맞춤은 부부간에만 하는 겁니다.

이는 생명의 활동이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생명이 잉태되는 것은 몸이 하나가 될 때 일어나지요.

남자와 여자가 하나 되어 남자가 여자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남편과 아내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라고 한 겁니다.

 

사랑이 뭐냐?

예수님과의 하나 됨입니다.

한 몸이란 말입니다.

 

아가서 식으로 좀 과한 표현을 합니다.

구원이 뭐냐?

예수님과 하룻밤 자는 겁니다.

예수님과 한 몸이 되어서 사랑을 나눈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어요.

 

솔로몬이 술람미와 하룻밤을 잔 것과 같이 말이에요.

그러니 술람미는 그 황홀함을 잊지 못하는 겁니다.

그 황홀함은 그 어떤 포도주보다도 낫다고 하는 겁니다.

 

포도주란? 기쁨의 상징이에요.

포도주는 사람에게 쾌락을 주어요.

하지만 솔로몬의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본문이 말하는 포도주는 세상이 주는 기쁨인 겁니다

세상에 그 어떤 기쁨도 구원의 기쁨과는 비교 할 수가 없어요.

 

신약적인 의미에서 보면 포도주가 주는 기쁨보다 솔로몬의 입맞춤이 더 황홀하다는 것은 율법적인 의보다 예수님이 주는 의가 더 황홀하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은 포도주가 주는 기쁨이에요.

그러나 솔로몬의 입맞춤은 값없이 주는 예수님에 의에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이 의야말로 이 세상에 그 어떤 의보다 귀하다는 말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보지 못한 사람은 이 의에 기쁨을 몰라요.

 

전 과거에 율법 아래서 의를 만들어 왔어요.

그러나 끝내 의에 이르지 못하였어요.

그러나 어느 날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주어지는 의를 선물로 받았어요.

이 의는 내가 만든 의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신 의에요.

공짜로 주어진 의에요.

 

마치 솔로몬 왕이 술람미를 사랑한 것 같아요.

성경은 온통 의이야기에요.

죄인이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구원 받는다는 이야기에요.

인간의 의로는 이를 수 없는 구원을 하나님께서 거져 주셨다는 겁니다.

이런 기쁨이 또 어디에 있겠어요.

 

사람들이 예수를 믿음으로서 주어지는 의를 너무도 몰라요.

지금 한국교회는 전부 바리새인들처럼 자기 의를 만들고자 동분서주하고 있어요.

열심과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종처럼 개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고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해요.

 

예수 믿는 것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어요.

예수를 믿으나 기쁨이 없어요.

천국을 말하나 소망이 없어요.

왜? 그런가 하면 전부 인간이 의를 만들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에 의미를 몰라요.

그저 관념이에요.

예수의 피가 너희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한다는 것을 관념으로 알고 있어요.

그러니 성화를 한다고 난리를 치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 안 믿어지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이 안 믿어지기 때문에 뭔가 행하여야 한다는 겁니다.

이건 포도주로 얻는 기쁨이에요.

 

그러나 술람미는 일하지 않는 자를 의롭다 해 주시는 그런 의를 받은 겁니다.

솔로몬 왕이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는 그런 사랑을 받은 겁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지 아니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 감사가 아가서에선 사랑노래로 승화되어 불러지는 겁니다.

지금 아가서는 이 의를 사랑노래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단 말입니다.

 

술람미는 거져 주는 의를 입맞춤으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사랑으로 말하고 있는 거예요.

솔로몬과의 사랑이 너무도 황홀해서 그 어떤 것으로도 비교 할 수가 없어요.

그 맛이 너무도 강하여서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을 누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 때 그 황홀함을 다시 달라고 애원하는 겁니다.

 

원문은 “입맞춤들의 입으로 입 맞추게 하옵소서” 라고 합니다.

영어 성경은 “키스 미 키스 (Let him kiss me with the kisses of his mouth)” 라고 했어요.

한마디로 두 번 키스를 해 달라는 말입니다.

 

또 한 번 그 입맞춤을 해 달라는 겁니다.

이미 경험된 키스이기 때문에 또 해달라고 하는 거예요.

이미 맛을 보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해 달라는 거예요.

 

이게 무지 무지하게 중요해요.

 

술람미는 솔로몬에게 한번 입맞춤 당하고 나서 정신을 잃었어요.

그 사랑이 너무도 황홀해서 잊을 수가 없어요.

그 짜릿함,

그 황홀함,

그 기쁨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리움은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에요.

그리움을 다른 말로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사랑이 없는 사람은 죽었어요.

그만큼 그리움이나 사랑은 살아가는 원동력인 겁니다.

그러나 성도에겐 사랑이 없는 것은 죽은 것이에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겁니다.

그것이 부모이든 자식이든 애인이든 상관없어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나로 살게 하는 에너지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부모든 자식이든 남편이든 아내든 애인이든 사랑하세요.

짝 사랑이라도 하세요.


사랑은 나로 살게 하는 에너지가 되어요.

살아 있다는 것은 에너지가 활동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에너지가 사랑에서 나와요.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 왕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살아가게 하는 에너지였어요.

솔로몬 왕에 대한 사랑이 살아가는 목적이었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술람미에겐 삶의 의미였어요.

한 번 맛 본 그 사랑이 너무도 황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 인생을 다 걸고 그 사랑을 그리워하는 겁니다.

 

사랑은 항상 완료이면서 미완료로 남아야 해요.

이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이미 경험된 것을 그리워 한다는 말입니다.

현재 진행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은 그리움이에요.

보고픔이에요.

 

술람미는 이미 경험된 그 사랑을 지금 그리워하고 있는 겁니다.

이미 맛을 보았기 때문에 잊을 수가 없는 겁니다.

차라리 모르면 생각나지 않아요.

이미 맛보았기 때문에 도무지 잊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눈만 뜨면 그 사랑을 그리워하는 겁니다.

그래서 "한 번 더 사랑해 주세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참으로 이기주의에요.

줘 놓고 갈급하게 만들어요.

마치 사랑이라는 큐피트의 화살을 쏴 놓고 따라 오게 만드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성도는 그 사랑을 쫓아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은 마치 메아리와 같아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면 우리는 그 사랑을 소망하는 것으로 되 돌려주는 겁니다.

이쪽에서 외치면 상대편에선 여울처럼 울림으로 다가와요.

 

옛날에 코카콜라가 아프리카에 진출을 할 때 공짜를 풀었다고 합니다.

한번 맛을 보면 그 맛을 찾게 된다는 것을 이용한 거지요.

그 상술이 맞아 떨어 졌어요.

공짜로 주니 날름날름 받아먹다가 중독이 된 겁니다.

그 다음에 안 주고 돈 주고 사 먹으라고 합니다.

 

지금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그런 사랑을 했어요.

먼저 사랑을 주었어요.

맛을 보게 했어요.

그리곤 떠나 간 겁니다.

 

그러니 술람미가 환장하는 겁니다.

그 사랑을 못 있어 이젠 찾아 나서게 만든 겁니다. 

사랑이란 단회적인 것이 아니고 반복 또 반복되는 것이에요.

사랑은 해도 해도 끝이 없어요.

만족함이 없는 것이 사랑이에요.

 

사랑은 하면 할수록 그 깊이가 깊어지고 농도가 짙어져요.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한(恨)이라고 표현해요.

한번 맛보게 한 후 그 사랑을 잊지 못하도록 평생 쫓아가도록 하는 한(恨)이라고 생각해요.

 

영화 서편제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와요.

소리꾼인 아버지가 양악(洋樂) 문화에 사라져 가는 우리 판소리를 보존하고자 딸을 소리꾼으로 키웁니다.

아버지가 딸에게 소리를 전수하지만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딸에게 한(恨)을 심어줍니다.

소리는 사람의 한(恨)으로 토하여져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딸을 한약에 부자를 섞어 소경을 만들어 버려요.

소경인 딸은 가슴에 한(恨)을 품게 됩니다.

동생도 집을 나가고 부모도 죽고 소경으로 살면서 한(恨)이 한 켜 한 켜 쌓여가는 겁니다.

 

소경으로 살면서 얼마나 힘이 들었겠어요.

얼마나 한(恨)이 쌓였겠어요.

그러니 사는게 모두가 한(恨)이 되는 겁니다.

결국 그 모질게 쌓인 한(恨)이 소리로서 토해내서 득음(得音)의 경지에 이르게 되어요.



서편제는 한(恨)의 소리에요.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절절이 후벼 파고드는 겁니다.

가슴 절절이 한(恨) 맺힌 것이 소리로 토해질 때 듣는 이로 하여금 그 속에 한(恨)을 토해지게 하여서 한(恨)과 한(恨)이 소리로 어우러져 사랑으로 승화되는 것이에요.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전 그 영화를 보면서 마치 주께서 나를 다루어 오신 것처럼 느껴져서 많이 울었어요.

마치 제 이야기처럼 들렸거든요.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봄부터 그렇게 울었나 보다 라는 시(詩)처럼,

하나님께서 절 복음 하나 붙잡게 하려고 그 오랜 세월동안 지긋 지긋한 그 율법 아래서 종노릇 하게 하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전 신앙적으로 보면 한(恨)이 많아요.

복음에 대한 한(恨) 말이에요.

율법 아래서 너무도 심한 종노릇을 하였거든요.

진리에 대한 갈급함이 너무도 심해서 죽고자 했으니까요.

 

그런데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이 저에게 사랑을 주신 겁니다.

이젠 그 한(恨)이 복음을 풀어내는데 사용되고 있어요.

그것이 한(恨)이 되어서 이젠 복음만 사수하는 진돗개가 되고 말았어요.

누구든지 예수의 피를 훼손하는 자는 물고 싶은 겁니다.

제가 성화주의자들을 호되게 질책하는 이유도 복음에 대한 한(恨)이 서려 있기 때문이에요.

 

이는 하나님은 저에게 신앙의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게 하시고 복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안에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면서 켜켜이 쌓인 한(恨)을 복음으로 토해내고 있는 겁니다.

너무도 예수님의 피가 주는 의가 너무도 귀하기 때문에 그 피만 증거하게 되는 거예요.

그 피가 바로 아가서에서 불려지는 사랑노래인 겁니다.

그래서 전 아가서가 절절이 이해가 되는 겁니다.

앞으로 어떻게 풀어질지 저도 흥분이 되어요.

 

전 서편제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저렇게 다루신다고 생각했어요.

구약 이스라엘은 한(恨)이 맺힌 민족이에요.

하나님께 붙잡힌 사람치고 한(恨)이 없는 사람이 없어요

다 하나님께서 한(恨)을 그 속에 심어 놓았어요.

 

예수님도 12제자들에게 한(恨)을 심어 놓았어요.

초대교회 성도들도 지하 카타콤에서 한(恨)으로 살았어요.

기독교는 한(恨)의 종교에요.

 

그 한(恨)이 천국을 사모하게 하는 겁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삶을 하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입은 성도는 다 한(恨)이 맺힌 삶을 살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세요.

이게 사랑이에요.

땅에서 행복하게 잘사는 것이 복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복이에요.

 

하나님은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한 한(恨)을 품게 만들어요.

그게 바로 사랑이에요.

이걸 아셔야 해요.

자기 아들이 십자가에 죽어가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한(恨) 맺힌 마음을 아셔야 해요.

 

이 한(恨)이 하늘에 신령한 복인 겁니다.

뉘라서 이 복을 복으로 알까요?

그러나 하나님께 사랑을 입은 성도는 알아요.

술람미 같이 주께 사랑을 입은 성도는 안다구요.

술람미는 솔로몬의 사랑이 한(恨)이었어요.

그 한(恨)이 님을 더 사모하게 하고 간절하게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만 세상에서 맛 볼 수 없는 그 사랑을 주시고 세상 그 어느 것으로도 만족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겁니다.

그러니 성도는 세상에서 그 사랑을 맛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외로운 겁니다.

그 사랑이 그리운 겁니다.

 

바울이 그러지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하지요.

이는 주님으로부터 사랑받지 않은 자는 저주 받은 자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사랑은 혼자 하는게 아니기 때문이에요.

 

입맞춤을 혼자 할 수 없잖아요.

상대가 있어야 할 수 있어요.

우리는 주를 사랑 할 수가 없어요.

주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했어요.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주님에 대한 사랑을 심어놓았어요.

 

마치 큐피트의 화살처럼 우리 심장에 자기 사랑을 박아 놓았어요.

예수님이 화살처럼 박아 놓은 이 사랑이 있는 성도는 주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사랑에 목말라 하게 되어 있어요.

 

지금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이 사랑의 화살을 박아 놓으셨어요.

마치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이 사랑의 화살을 박아 놓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이 화살이 박힌 성도는 예수님의 사랑을 갈구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다른 말로 은혜를 사모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것은 먼저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가서에선 그 사랑이 너무도 황홀하고 달콤했기 때문에 못 잊고 사랑노래를 부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술람미는 바로 구원받은 성도를 말해요.

 

저와 여러분이 술람미에요.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입었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겁니다.

주님을 사모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을 받지 않은 사람이에요.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은 반드시 주신 분에게로 향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중요해요.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를 사랑하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사랑을 주셨어요.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는 마치 해바라기가 햇빛을 따라 살듯이 주님을 향하여 살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들도 누구를 사랑하면 그 사랑을 돌려받고자 하잖아요.

나는 사랑하는데 상대방은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지요.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은 그도 나를 사랑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혼자 할 수가 없고 둘이 하는 겁니다.

 

술람미도 솔로몬하고 둘이 사랑했어요.

술람미가 솔로몬에게 사랑을 받지 않았다면 이처럼 상사병이 나지 않았어요.

예루살렘 여자들은 상사병이 없어요.

왜냐하면!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오로지 술람미만 사랑했어요.

그러니 술람미 혼자만 상사병이 난 겁니다.

 

임금님의 성은(聖恩)은 아무나 입지 않아요.

임금이 찜한 사람만 입어요.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찜을 당하여 성은을 입은 겁니다.

 

임금님의 이 성은이 세상에선 그리움이라는 한이 되어서 사무치게 만드는 겁니다.

이처럼 주님의 사랑을 한번 맛본 사람은 그 사랑을 찾아다녀요.

결국 주님의 사랑이 한을 품게 만든 겁니다.

천국에 대한 한을 품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란? 어쩌면 한(恨)을 쌓는 일이에요.

주님에 대한 가슴 시린 사랑을 하는 거예요. 

마치 조개가 아픔을 이기려고 진액을 토하여 아픈 상처를 감싸서 진주(眞珠)를 만들듯이!

성도 또한 그리스도를 향한 간절한 그리움이 세상 속에서 당하는 아픔을 이기게 하여 진주로 만드는 겁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진주가 하늘 예루살렘 성전의 보석으로 새겨지는 것입니다.

뭐를 알고나 예수를 믿으세요.

자기 신분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고 믿지 말고, 

진주같은 보석 신앙은 한(恨)으로 만들어져요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한(恨)을 자꾸만 쌓이게 하는 겁니다.



저도 복음 때문에 한이 많이 쌓였어요.

또 쌓여가고 있어요.

한(恨)이 왜 생깁니까?

간절한 아픔 때문에 생겨요.

그리스도의 사랑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아픔 말이에요.

 

만약 솔로몬이 곁에 있다면 그리웁지가 않아요.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사무치도록 그리운 겁니다.

그 사무침이 가슴 절절한 노래로 토해지는 겁니다.

그러니 솔로몬 왕은 자기 색시 술람미에게 한(恨)을 심어주고 떠난 겁니다.

 

그러니 술람미는 밤마다 그리워하는 겁니다.



님이시여,

너무도 그립습니다,



님이시여,

그날 밤 그 사랑을 하고 싶답니다,



님이시여,

언제 오시렵니까.

 

지금 술람미가 그러고 있어요.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솔로몬 왕을 그리고 있어요.



사랑하는 님이시여,

어디 계시나요,

날 좀 사랑해 주세요.

그 때 날 안아 주었듯이 날 사랑해 주세요, 라고 님을 간절히 찾고 있는 겁니다.

 

꼬마 인형이라는 노래를 아시나요.

그 가사가 꼭 술람미가 솔로몬을 사모하는 가사를 담아 놓은 것 같아요.

그래서 전 참 좋아해요.

 

꼬마 인형 (최진희)

 

1절

그날 밤 황홀한 시간을 난 잊을 수가 없어요.

세상에 태어나서 맨 처음 당신을 알고 말았죠.

말없이 흐르던 눈물을 난 감출 수가 없었네.

창문에 부딪치는 빗방울을 하나 둘 세고 있었죠.

늦어도 그날까지 약속만을 남겨둔 채로

밤이 지나고 새벽 먼 길을 떠나갈 사람이여

부서지는 모래성을 쌓으며 또 쌓으며

꼬마인형을 가슴에 안고 나는 기다릴래요.

 

 

2절

늦어도 그날까지 약속만을 남겨둔 채로

밤이 지나고 새벽 먼 길을 떠나갈 사람이여

부서지는 모래성을 쌓으며 또 쌓으며

꼬마인형을 가슴에 안고 나는 기다릴래요.

꼬마인형을 가슴에 안고 나는 기다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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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술람미가 그날 밤 그 황홀함을 잊지 못하는 겁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너무도 기뻐서 우는 겁니다.

 

그런데 님이 약속만 남겨둔 채로 먼 길을 떠났어요.

님이 떠난 자리가 너무도 휑한 겁니다.

옆구리가 시려요.

그래서 밤마다 그 사랑을 못 잊어 모래성을 쌓고 또 쌓아요.

그러나 그 사랑을 채울 수가 없어서 꼬마 인형을 꼬옥 안고 자는 겁니다.

 

전 이 경험을 가지고 있어요.

제가 과거에 율법 아래서 종노릇 하다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알고 난 후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복음이 주는 자유함과 그 황홀함에 엄청 많이 울었어요.

너무너무 행복했거든요.

지금도 행복하지만 그때의 그 기분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 때 이 꼬마 인형을 엄청 불렀어요.

여러분도 한번 불러 보세요.

아가서를 알고 부르면 더 가슴에 와 닿을 겁니다.

 

이제 말씀을 가름합시다. 



아가서의 전체 흐름은 사랑은 한번 맛본 사람이 그 황홀함을 잊지 못해서 다시 찾아 나선다는 겁니다. 

사랑은 둘이 주고받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술람미에게 사랑을 주면 술람미는 메아리처럼 화답을 합니다.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주었기 때문에 술람미에게서 화답이 오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돌려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너희를 사랑했으니 너희도 나를 사랑하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너희에게 목숨까지 버려서 사랑했다는 것을 아느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결국 주님은 당신이 준 사랑을 찾아가는 겁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손해를 보는 분이 아니에요.

반드시 준 것만큼 찾아 가세요.

 

그래서 예수님도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한 겁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 전 재산과 같은 향유든 옥합을 깨트려서 예수님 발을 씻겨 드렸겠어요.

그런데 등신 같은 제자들은 그걸 돈으로 환산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등신들에게 성령이 임하니 자기 목숨까지 던져 드리더군요.

천국은 자기가 받은 면류관을 어린양에게 돌려드리는 곳이에요.

이 말을 깊이 깊이 음미하세요.

 

여러분 안에 천국이 임했다면 메아리로 화답을 하세요.

주님, 보고 싶어요,

주님의 사랑이 그리워요,

주님 절 좀 어떻게 해 주세요,

그러면서 주님이 보내주신 성경이라는 연애편지를 읽으세요.

 

신앙은 강요가 아니에요.

 

여러분은 주님으로부터 어떤 사랑을 받았나요?

이제 여러분이 메아리로 화답을 할 때입니다.

주여, 이런 죄인도 용서 받았군요!

주여, 감사합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세요.

나는 과연 술람미처럼 만 왕의 왕께 받은 사랑이 있는지?

나는 과연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합니다.

 

부디 예수님을 가슴 시리도록 사랑하는 그 마음이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불일듯 일어나서 계속하여 머물러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 나의 사랑이 되게 하옵소서! 술람미가 솔로몬의 사랑을 사모하듯이 우리 안에도 그런 주님에 대한 사랑이 사무치도록 일어나게 하옵소서! 주님! 주님의 사랑이 고픕니다. 절 사랑해 주세요. 처음 사랑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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