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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아가서 강해

♣(성경강해)26강. 술람미로 살아가기 (부록 : 아가서 실제적용)

by coroa 2022. 3. 2.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26강. 술람미로 살아가기 (부록 : 아가서 실제적용)

-.정낙원 목사

 

 

 

모든 성경은 언약의 책입니다.

아가서 역시 언약의 책입니다.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야기가 아니고 언약 이야기인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열어보면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있습니다.

옛 언약은 법이고 새 언약은 은혜입니다.

아가서 속에서도 옛 언약에 속한 자와 새 언약에 속한 자가 있습니다.

이를 솔로몬 왕의 사랑을 받는 여자와 사랑 받지 못한 여자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은 다릅니다.

옛 언약은 죽이는 법이고,

새 언약은 살리는 법입니다.

그래서 충돌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가서 속에서도 옛 언약에 속한 자와 새 언약에 속한 자간에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옛 언약에 속한 자들은 죽이는 일을 하고,

새 언약에 속한 자들은 살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생명 안에 있는 자와 사망 안에 있는 자들은 그 삶으로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아가서에 나타난 두 언약에 속한 자들은 예루살렘 여자들과 술람미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옛 언약이라는 법에 속한 자들이고,

술람미는 새 언약이라는 은혜에 속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둘은 항상 다툽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술람미가 예루살렘 여자들로부터 일방적으로 핍박을 당하는 것입니다.

아가서는 이를 통하여서 법이 어떻게 은혜를 공격하는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술람미가 왕에게 사랑 받는 것은 성도가 구원 받는 것의 모형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자기들 조건으로 왕의 사랑을 받아 내겠다고 하여서 자기 힘으로 구원을 받아보겠다는 옛 언약식 신앙을 말합니다.

하지만 술람미는 자기 조건과 상관없이 왕의 일방적인 사랑이 덮쳐옴으로서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은혜로 구원을 받은 새 언약식 신앙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왕을 사랑하겠다고 하는 예루살렘 여자들이 왕이 거저 사랑해준 술람미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술람미를 핍박하는 예루살렘 여자들을 통하여서 마귀가 어떤 식으로 성도들을 공격하는지를 읽을 수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언약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아들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이라고 함은 다른 백성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언약을 펼쳐 보이기 위해서 두 민족으로 나누어 놓으신 것입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라 함은 서로 하나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둘은 빛과 어둠처럼 하나 될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둘은 항상 전쟁을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어서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예수님과 옛 뱀과의 싸움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속한 자를 여자의 후손이라고 하고, 마귀에게 속한 자를 뱀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 역할을 담당하고, 뱀의 후손은 마귀 역할을 담당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 역할을 맡았고, 어떤 사람은 마귀 역할을 맡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은 죽임 당하는 모습으로 있고,

뱀에게 속한 자들은 예수에게 속한 자들을 죽이는 자로 서 있게 됩니다.

이는 곧 예수님에게 속한 성도는 약한 자로 드러나 있고, 마귀에게 속한 자들은 강한 자로 드러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은 예수님처럼 죽임 당하는 사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고,

마귀의 역할을 맡은 사람은 마귀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듯이 지금도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들을 죽이는 일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가서에도 보면 이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술람미는 예수님 편에 속하였고,

예루살렘 여자들은 마귀 편에 속하였습니다.

 

술람미나 예루살렘 여자들이나 모두가 언약을 위하여 각자 맡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창세전 언약이라는 드라마가 끝이 나면 각자 주어진 곳으로 가게 됩니다.

예수님에게 속한 자는 천국으로 가고, 마귀에게 속한 자는 지옥으로 갑니다.

 

이를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양과 염소를 각각 우리에 둔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습을 교회 안에 축소판으로 담아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두 부류의 교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한 집안에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듯이 말입니다.

 

교회는 목자가 양을 치는데 우리 속에 염소와 양을 함께 두고 방목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방목을 할 때는 함께 섞어 놓았지만 저녁이 되어 우리에 가둘 때는 양은 양의 우리로 염소는 염소의 우리로 각각 분리해서 가두게 됩니다.

이는 장차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으로 분리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양과 염소의 방목 현장을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그대로 배치해 두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양으로 쓰임 받고 있고,

어떤 사람은 염소로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언약을 펼쳐 보이시는 데는 양과 염소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구조가 구약 시대 언약의 족장들 가정사에 그대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한 집안 속에 언약으로 난 자와 육으로 난 자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이라는 아들과 이삭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이삭에겐 야곱이라는 아들과 에서라는 아들이 있었고,

야곱에겐 요셉이라는 아들과 그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이 둘은 서로가 갈등하는 구조로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핍박을 받는 양으로서 있고,

다른 하나는 핍박을 하는 염소로서 배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기능적으로 선택을 입었습니다.

이스라엘 속에도 양에 역할을 맡은 사람과 염소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지고 두 부류로 나누어서 두 세계에 속한 사람들로 연극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양은 양의 본성으로 살고 염소는 염소의 본성으로 살아갑니다.

염소는 들이 받는 기질로 살고 양은 맨 날 얻어터지는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염소는 양을 들이 받음으로서 넌 남을 들이 받는 못된 염소라고 고발당하고 있고!

양은 들이 받혀 피 흘려 죽어가면서 넌 양이라고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말없이 죽어줌으로서 양의 조상으로 드러내셨고,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임으로서 염소의 조상으로 드러냈습니다.

이게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양 같은 성도는 묵묵히 받은 은혜로 봉사하고 섬기는데,

염소들은 항상 으뜸 노릇하면서 남을 판단하고 가시 노릇을 합니다.

 

이 모습은 아브라함의 집안에서도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이스마엘은 이삭을 괴롭혔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에서 육체로 난 자가 성령으로 난 자를 핍박 하였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아가서의 이야기로 본다면 예루살렘 여자들은 열심히 술람미를 핍박하여야 하고 술람미는 열심히 예루살렘 여자들로부터 핍박을 당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역할은 우리 힘으로 벗어 날수가 없습니다.

양으로 나게 하고 염소로 나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같은 종자(種子)끼리 모인다는 말입니다.

교회 안이나 어느 집단이나 끼리끼리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같은 종자는 서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서로 통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둘만 모이면 같은 색깔 맞추기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다른 색깔의 사람들은 모두 내어 쫓고자 합니다.

이건 교회이든 어느 집단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항상 염소들은 교회이든 조직이든 기득권층으로 강한 자가 되어서 자기들 사상에 동조하지 않으면 가차 없이 핍박을 가하여 쫓아 내 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조직을 지키자면 자기들의 사상에 동조하지 않는 자를 두면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편만 남기고 다 밀어내는 것입니다.

여기에 쫓겨난 자들은 하나님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버림당한 1호 돌입니다.

하나님은 버려진 예수님을 모퉁이 돌로 하여서 예수님처럼 버림당한 자들을 모아여 하늘에 신령한 집을 짓는 것입니다.

 

아가서에서는 술람미와 예루살렘 여자들을 통하여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펼쳐 보이시고 계신 것입니다.

중요 한 것은 왕의 사랑을 받는 자들을 왕을 사랑한다고 하는 자들이 핍박을 가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왕의 사랑을 위하여서라는 명분으로 말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십자가를 말하면서 십자가 정신과 반하는 짓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것이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죽이는 짓인 줄 몰라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말하면서 십자가 정신에 반하는 짓들을 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어리석음을 드러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자기의 옳음을 주장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자기 스스로의 치부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아담과 하와가 치마를 만들어 입고서는 “난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라고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스스로 치마를 해 입음으로서 ‘난 죄었습니다’ 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치마를 입은 아담을 보고서 하나님이 너 왜? 치마를 입었는데!

너 죄 지었니!

너 내가 먹지 말라고 한 것을 먹었구나!

그러는 것입니다.

 

죄인은 스스로 자기가 하는 말이나 행동으로 난 죄인입니다 라는 것을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간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리석은 자들은 자기들 힘으로 자기들의 사상을 지켜내려고 자꾸만 어리석은 짓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난 아니야! 라고 하면서 어리석게도 난 이런 자입니다! 라고 스스로 정체를 밝히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예수를 말하는데 하는 행동들은 마귀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행동은 곧 그 사람의 신앙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죄인을 들추어내는 방법입니다.

 

이걸 구원론으로 말하면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을 자기 힘으로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자들이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자들을 예수의 생명이 없는 자들이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아벨을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자 하는 가인이 죽인 것과 같습니다.

아비의 사랑을 입은 요셉을 아비의 사랑을 입고자 하는 형제들이 죽인 것과 같습니다.

어느 시대고 가짜들이 진짜들을 핍박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전개되는 창세전 언약의 구조가 그렇게 짜여 있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가짜들은 항상 믿음이 최고인 것처럼 나타났고 진짜들은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혼자 다 아는 척, 혼자 믿음 있는 척 하면서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자들은 가짜일 확률이 높은 것입니다.

 

복음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 사랑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술람미처럼 왕의 사랑을 입은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남을 헐뜯고 핍박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짜 복음을 아는 성도는 남을 비판하고 심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을 시기하고 핍박을 하였습니다.

자기는 사랑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랑받은 자를 시기하는 것입니다.

 

요셉을 보세요.

요셉은 아비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형제들은 사랑을 못 받았어요.

그러니 시기해서 죽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주님의 사랑을 입고 살아가면 반드시 사랑을 입지 못한 자들로부터 공격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속엔 사랑을 받지 않아서 심령이 메말라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처럼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음이 강퍅한 것입니다.

마음에 받은 사랑이 없으니 심령이 강퍅하고 미움이 나오고 시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가 따로 있어요.

그런데 사랑 받지 못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사랑하겠다고 덤비는 것입니다.

자기 쪽에서 사랑을 만들어 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 사랑이 날 사랑해 주세요! 라고 한다고 해서 생겨나는가요?

사랑은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날 사랑해 주세요! 라고 한다고 사랑이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술람미와 예루살렘 여자로 비유할게요.

술람미는 솔로몬으로부터 사랑을 입었습니다.

술람미가 솔로몬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솔로몬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여자들은 솔로몬이 사랑하지도 않는데 자기들이 솔로몬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나는 솔로몬을 사랑합니다! 라고 하면서 정작 솔로몬이 사랑하는 술람미를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이걸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합니다.

허구가 실제를 밀어낸다고 합니다.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허구인 것입니다.

실상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허구이잖아요.

그래서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은 하늘로서 난 자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가짜 사랑이 진짜 사랑을 받은 자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복음을 진짜로 아는 사람은 남을 죽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신 사람은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진짜 십자가를 맛보았으면 그럴 수가 없어요.

 

십자가는 남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죽어서 남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나 그에게 속한 성도들은 죽어가면서도 자기를 찌르는 자들을 용서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맛 본 사람은 절대로 그 십자가로 남을 정죄하거나 죽이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남을 살리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 피를 바로 마신 사람들은 하나 같이 용서를 토해내고 살았습니다.

 

스데반이 그랬고!

12 제자들이 그렇게 살았고!

사도 바울이 그렇게 살았어요.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어는 시대이고 진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신 성도들은 주님께 받은 사랑을 토해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 피 속에는 예수의 생명이 담겨져 있습니다.

십자가 피를 마신 사람들은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도를 일컬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고 구원을 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벧후 1:1-10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셨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십자가 안에 들어온 자들에게 편지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신의 아들이 아니냐,

그러니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하려고 보배로운 믿음을 준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기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합니다.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은 우리가 행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행하게 하여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입었다는 말은 입혀주겠다는 뜻입니다.

우린 그냥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알아서 일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부르심을 입었나요?

신의 성품에 참예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합니다.

신의 성품이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걸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품으란 말은 이미 와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와 계시다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서 마치 병아리가 알에서 부화되어 나오듯이 나타나게 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럼 신의 성품에 누가 참예하게 합니까?

하나님이 하십니다.

 

빌립보서를 봅시다.

 

빌 2:13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 안에 누가 계십니까?

하나님입니다.

왜, 계십니까?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와 계시는 것입니다.

오셔서 뭘 합니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살도록 소원을 두고 행하시게 하고자 함입니다.

 

이건 우리가 행하여야 할 행함이 아니고 성령이 행하게 하실 일들입니다.

이걸 베드로는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했습니다.

우린 가만히 있어도 성령이 툭툭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신의 성품에 속한 것들이 툭툭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되도록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이건 온전하게 살았다는 말이 아니고 이런 정신으로 살았단 말입니다.

이렇게 가게 되어 있다는 방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만약에 너희 안에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고 어둠에 있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둠에 있다는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예수 밖에 있는 자란 말입니다.

그 속에 예수의 생명이 없으니까 예수님의 성품이나 속성들이 안 나타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진짜로 예수의 살과 피를 마신 사람들은 남을 공격하는 자가 아니라 긍휼이 여기는 자들입니다.

이건 술람미와 예루살렘 여자들 간에 나타나는 차이를 보면 대번에 알 수가 있습니다.

술람미는 왕의 사랑을 입었기 때문에 절대로 예루살렘 여자들을 핍박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왕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였기에 왕에 사랑을 받은 술람미를 핍박한 겁니다.

 

이런 사상은 인류 역사 전반에 흐르고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꼭 일하지 않는 자들이 일하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은혜 받아서 섬기고 봉사하고 충성하면 감사하고 기뻐하여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 것입니다.

괜히 시기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남들이 일을 하면 자기 믿음 없음이 드러나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태를 빛이 어둠에 비취니 어둠이 자기들이 하는 일이 악함으로 드러나니까 빛을 미워한다고 하셨습니다.

 

요한 삼서에 보면 디오드레베가 그랬습니다.

 

요삼 1:9-11절.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10.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는도다 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 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디오드레베는 자기는 하지도 않으면서 하는 사람들을 좇아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뵌 적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 척 하는 것뿐인 것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교회 안에서 늘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이 술람미를 왜 핍박했나요?

그건 자기들 방식으로 왕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에게는 자기들만의 사랑 받는 방식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자기들 방식으로 왕에게 나아가면 왕이 사랑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정도 되면 왕이 사랑해 줄 것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법이고 우상성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왕이 술람미를 사랑하는 것을 자기들 방식으로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자기들 기준으로 왕후가 되려면 가문도 좋고 교양도 있고 품격이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잘나야 왕후의 자격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술람미는 이 조건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의 기준으로 보면 술람미는 왕후 자격도 안 되고 왕의 사랑을 받아선 안 되어요.

왕후가 되려면 최소한도 자신들과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왕이 천한 노예를 사랑하니 이건 궁궐의 법도에 어긋난다고 탄핵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어느 조직에 가입 하려면 그 심사 기준에 통과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술람미는 그 심사 기준에 미달입니다.

에루살렘 여자들 입장에서는 왕이 그런 여자를 사랑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왕실의 체통에 흠이 가는 것입니다.

 

그럼 왕이 자기들의 신분에 먹칠을 가하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술람미를 넌 왕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정작 왕은 술람미를 사랑하고 있는데 말이죠.

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런데 이런 일들이 그대로 교회나 어느 조직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큰 교회들은 자기들만의 교육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교회에서 오는 사람은 무조건 자신들이 정한 교육을 이수하여야 그 교회의 일원으로 활동할 수가 있는 자격을 주는 것입니다.

 

대형 교회들 안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복음도 모르는 것들이라고 거드름 피우면서 끼워주지 않아요.

이게 무슨 은혜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모임입니까?

사단의 회이지,

 

이 시대 교회는 마치 예루살렘 여자들과 같습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자기들 방식으로 왕을 사랑 한 것이 결국엔 왕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을 죽이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만 것입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주를 삼켰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이 솔로몬의 사랑을 받고 있는 술람미를 핍박한 것은 곧 솔로몬 왕을 죽이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와서 보니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자신들이야 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집단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영적 교만에 빠져 자기들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세리와 창기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죄인들이라고 정죄하여서 상종도 하지 않고 핍박을 가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 생각의 신앙 기준과 복음에 기준과 심판 기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정해 놓은 교리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자기들 기준대로 심판 하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이걸 우상성이라고 합니다.

 

우상성이란? 어떤 것을 형식화하여 고정화시키고 신봉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상을 틀처럼 정형화시키고 그걸 진리로 믿는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자기들 사고에 가두어서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걸 법이라고 합니다.

 

법은 고정화 되어 있습니다.

틀이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 틀 속에 들어가면 인정받고 틀리면 쫓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법은 반드시 그 정한 규정에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복 받을 짓을 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복을 주어야 합니다.

반대로 저주 받을 짓을 하면 반드시 저주를 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피를 안다고 하는 것을 자기 소유로 삼게 되면 그 때부터 그 십자가 피는 남을 판단하고 죽이는 도구로 활용이 됩니다.

이런 십자가는 우상입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 십자가하면서 십자가를 가리는 십자가의 원수 노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유대인들이 율법을 가지고 악하게 사용한 것과 같습니다.

율법도 선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실상을 깨닫게 하여 하나님의 은혜 아래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에 의미를 알았다면 세리와 창기들을 핍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정한 법에 따라 자신들은 천국에 간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과 다른 세리와 창기들은 당연히 지옥에 가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누구라도 이 법칙에 벗어나면 그는 이단으로서 죽임 당하여야 할 자라고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법칙을 깨트려 버리십니다.

자신들이 조상대대로 전통적으로 믿어 왔던 방식을 깨트렸습니다.

당연히 자신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여 천국에 간다고 믿던 자들을 지옥으로 보내고 마땅히 저주 받아 지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던 세리와 창기들을 천국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대 혼란이 일어나는 겁니다.

자기들 신앙을 송두리째 뒤집어엎어 버리는 사태가 일어난 것입니다.

자신들이 예측 가능하였던 신앙관이 일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만 것입니다.

자기들이 알고 있는 방식이 무너져 내리자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소리칩니다.

저 놈 죽여라,

우리와 다른 말을 하는 놈은 죽여야 한다고 해서 죽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발생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가 은혜입니다.

은혜란? 거저 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조건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어떻게 라는 방법이 필요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은혜 줄 자에게는 은혜를 주십니다.

복 받을 자격이 없는데 복이 임하였습니다.

술람미에게 사랑이 임하였듯이 그냥 아무조건 없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인 것입니다.

 

사랑받지 못할 자인데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 앞에 서면 황감 한 겁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술람미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왕이 사랑을 했어요.

그래서 은혜인 겁니다.

 

술람미는 아무 조건 없이 왕에게 사랑을 받고 보니 어떻게 하든지 왕에게 사랑을 받아 보겠다고 하는 예루살렘 여자들이 불쌍하고 그들이 자신을 핍박을 해도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잘난 자들은 사랑 받지 못하고 못난 자신은 사랑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미안합니까?

그래서 때리면 맞고 욕하면 욕을 들어 먹는 것입니다.

자신은 이미 왕의 사랑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가 은혜를 받으니 할 말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 때리면 맞고 욕하면 욕을 먹는 겁니다.

복음에 빚진 자로서 긍휼의 마음으로 다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누가 시켜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그냥 마음속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때리고 감옥에 가둔 자들이 자살을 하고자 하자 말리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이게 주님께 사랑을 받은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복음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럼 나 복음 안다고 자랑하면서 남을 판단 할 것이 아니라 받은 복음으로 남을 섬겨야지요.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지 않고 자기 우월감에 빠져서 복음도 모르는 것들이라고 무시하면서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바울과 다릅니까.

 

바울은 과거 법 아래 있을 땐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죽여라 죽여라 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시고 난 후에 참아주고 이해하고 다가갔습니다.

절대로 복음을 모른다고 남을 무시하거나 자기하고 다르다고 내치지 않았습니다.

우린 바울을 말하면서 바울과 다른 복음의 모습들을 토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안다고 하는 십자가는 우상일 수가 있고 내가 안다고 하는 그 복음은 지식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리와 창기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럼 그들이 구원 받은 그것으로 구원 받지 못한 다른 창기들을 깔보고 비웃었을까요?.

아니겠지요.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이 예수님에게 용서 받았습니다.

그럼 다른 여자가 간음한다고 해서 죽여라 죽여라 했겠느냐 말입니다.

못하겠지요.

이게 은혜 받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복음 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복음을 조건으로 가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교만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알면 입을 닫아야 하는데 도리어 남을 판단하고 심판자 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십자가는 우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좋다고 잘난 척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던 바리새인들은 지옥으로 보냈어요.

바리새인들은 천국을 따 논 당상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옥에 갔어요.

반대로 예수님은 우리가 마땅히 지옥에 가야 한다고 하던 세리와 창기들을 천국에 보냈어요.

이게 은혜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세리와 창기들은 모두가 자기 조건으로 이미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기 조건으로 결과를 가지고 있던 것을 역으로 일을 하십니다.

전혀 자기들 조건과 상관없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은혜가 툭툭 터져 나오는 겁니다.

율법 아래서는 상상도 하지 못하던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돌발 사태가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은혜라는 돌발 사태가 임하면 반드시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역설적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솔로몬이 지금 그런 역설적인 사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하실 그런 사랑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자신들의 신분이나 품격으로 보면 당연히 왕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왕후의 자격은 그렇게 정해져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술로몬이 지금까지 왕후로서의 자격을 다 갖춘 여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천한 검둥이 노예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황당합니까.

그래서 이럴 순 없어, 이건 반칙이야! 라고 하면서 길길이 날뛰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유대교 아래 있는 율법주의자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여자라고 지칭하여 부르는 것은 예루살렘이 유대교의 본산이고 율법 신앙으로 세워져 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같는 것입니다.

 

아가서가 예루살렘 여자들은 희고 아름답다고 표현하고 술람미는 검고 추하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종교적 의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이 희고 아름답다는 것은 자기 의가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술람미는 검고 추하다는 것은 자기 의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처럼 자신의 품격으로 왕 앞에 당당히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왕을 사랑하겠다고 한단 말입니다.

반면에 술람미는 아무 것도 내 세울 것이 없는 천한 노예입니다.

세리와 창기들과 같은 여자인 것입니다.

자기 조건으로서는 도무지 왕 앞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왕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왕의 사랑을 입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몸 둘 바를 모르겠는 겁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미안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뭐라고 하여도 아무 소리 못하고 당하고만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몸 둘 바를 몰라요.

어찌 나 같은 것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단 말인가!

어떻게 이런 악당이 용서를 받는단 말인가!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자기들은 당연히 왕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던 자들에게는 왕의 사랑이 거부되고,

나같이 천한 것이 어떻게 왕의 사랑을 받을 수 있나! 라고 생각지도 않던 자에게 왕의 사랑이 덮쳐온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들 입장에서 어떻게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느냐,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기쁨인데 은혜 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기분 나쁜 일인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던 자들은 은혜가 와도 당연히 자기에게 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정 반대 현상이 일어나니까 당황스럽기도 하고 반발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고 은혜가 증거 되는 곳에는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던 육에 속한 자들의 극심한 반발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일하시는가 하면 인간들이 죄를 고발하고 우상성을 깨트리기 위함입니다.

우상성이란? 자기 생각으로 신의 일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우린 의로워서 복 받을 거야, 라는 생각으로 나아오는 것이 우상성인 것입니다.

우상성으로 예수를 믿으면 반드시 이런 돌발 사태가 발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짜가 진짜를 구축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서면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남을 판단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게 은혜 안에 있는 성도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11장에서 그럽니다.

참 감람나무 접붙임의 비유를 하면서 잘난 척하던 유대인은 잘라내고,

잘려나간 그 자리에 이방인을 접붙인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보이기 위함이라고,

 

그런데 나중에 이방인 중에서 또 유대인들처럼 잘난 척 하는 자들을 잘라내고 그 자리에 잘려져 나갔던 유대인을 접붙인다는 것을 알고 기겁을 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고 엄위에 거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깊고도 높아서 인간은 감히 측량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감히 하나님의 일하심은 가타부타 논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입을 닫게 되는 것입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다 안다고 하나님을 논했습니다.

자기 정당성을 주장 했습니다.

정당성을 주장한다는 것은 자기가 아는 것이 있기 때문에 주장하는 것입니다.

난 잘못이 없어, 그러는 것은 자신이 정한 기준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반응인 것입니다.

 

욥이나 욥에 친구들은 모두가 자기들 기준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판단했어요.

하나님은 이렇게 일을 하시는 분이란 것을 정형화시켜서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 자신에게 일어나니 따지는 것입니다.

 

욥은 자기가 예측한 것대로라면 자신은 이런 저주를 받으면 안 되어요.

경건하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살았거든요.

요즘 식으로 십자가 피를 알거든요.

그러니 하나님께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진짜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입을 닫아 버립니다.

주여, 내가 개뿔도 모르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나댔습니다, 라고 회개합니다.

왜 입을 닫습니까?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젠 할 말이 없다는 겁니다.

다시는 이러쿵저러쿵 논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판단치 않겠다는 뜻입니다.

 

우린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 어찌 창조주가 하는 일을 다 알 수가 있겠습니까?

피조물은 창조주를 제한적으로 밖에 알 수가 없습니다.

자기 수준으로 밖에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은혜 줄 자에겐 은혜를 주신다고 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은혜 주는 자를 안단 말입니까?

은혜란 우리의 생각 밖에서 펼쳐지는데 어찌 감지한단 말입니까?

못합니다.

 

바울의 기도를 들어봅시다.

 

엡 3:14-19절.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온 세계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궁무진 하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너무도 커서 우리 지식으로는 다 담아 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좀 더 넓게! 좀 더 길게! 좀 더 높이! 좀 더 깊이 알아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늘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됩니다.

동일한 말씀이라도 오늘 깨닫는 은혜가 다르고 내일 깨닫는 은혜가 다릅니다.

이는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측량할 수 없이 깊고 넓고 많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오늘 알았다고 그것이 다 안 것이라고 자긍하지 말란 말입니다.

 

오늘 만큼만 안 것입니다.

내일은 또 내일 알아야 할 은혜가 있습니다.

이는 곧 내가 아는 복음의 깊이도 내 수준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아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린 하나님의 일하심을 다 안다고 합니다.

이걸 엘리야이즘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온 이스라엘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자기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나만 남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네가 모르는 칠천 명이 있다고 합니다.

 

칠천 명이란? 숫자적으로 칠천 명이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숨겨 놓은 모든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엘리야는 자기만 남았다고 꼴값을 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이런 말씀 앞에 부끄러워하여야 하는데 도리어 엘리야처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엘리야처럼 나만 복음 안다고 꼴값 떨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하나님을 엘리야를 가지고 지금 우리를 책망하고 있는데 우린 그 책망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엘리야와 똑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눈으로는 포착이 될 수가 없게 일을 하셨습니다.

엘리야는 자기 식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판단하였기 때문에 자기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자기 눈에는 다 이단으로 보인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자기 안에 가두고 법으로 판단해 버리는 우상성인 것입니다.

 

이게 고린도교회 안에서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분파가 형성되는 식으로 나타난 겁니다.

바울파다, 게바파다, 아볼로파다, 그리스도파다, 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을 전부 쪼개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분파로 나누어졌다는 말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그 사람만 정통이고 복음을 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자기 선생을 추종하는 팬클럽이 형성이 되고 그 사람의 사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면서 싸우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만히 들으니 가관인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그리스도가 나뉘었느냐,

이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이 사용하는 사역자들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밭가는 일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씨 뿌리는 일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물 주는 일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풀 뽑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각자 맡은 일을 하고 있는데,

왜 각자의 일을 가지고 맞다 틀리다를 판단하느냐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포지션에서 고착화 하여서 판단하게 되면 자기와 다르면 다 이단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밭을 가는 사람들은 밭가는 사람 입장에서만 보니 밭가는 것만이 복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물을 주는 사람 입장에선 물 주는 것만이 복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 입장에서도 씨 뿌리는 것만 복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편당을 지어서 남을 용납하지 못하고 자기만 옳다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화가 나서 책망을 하는 겁니다.

야! 이 놈들아!

니들이 뭔데 남을 판단하느냐,

너희도 판단 받아야 할 놈들인데 누가 누굴 판단하느냐, 라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내가 가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합니다.

 

에덴동산에 보면 네 강이 흐릅니다.

 

창 2:10-14절.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12.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14. 세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네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에덴에서 강이 하나 발원을 합니다.

물의 출처가 에덴입니다.

이 물이 동산을 적시고 네 근원이 되어서 흐르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흐르던 물은 이름이 없는데 동산을 적시고 난 후에는 각자의 이름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흐르던 강물이 에스겔 47장을 보면 성전 문지방에서 나오는 물로 나타납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서는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선 수가성 여인에게 말씀 하실 때는 생수가 그 뱃속에서 솟아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생명수를 성령이라고 합니다.

그럼 에덴동산에서 흐르던 강물은 곧 성령이라는 뜻입니다.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서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서 네 근원이 됩니다.

강물이 가는 곳마다 생명을 살려냅니다.

이는 성령이 역사하는 곳마다 생명이 살아난단 말입니다.

성령으로 복음이 증거되는 현장에는 은혜 받는 사람들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에덴동산에서 흘러내리는 강물은 에덴동산에서는 한 줄기인데 이게 세상으로 나타날 땐 네 줄기로 나타나고 있다는 겁니다.

각각의 이름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이름으로 흐르지만 이 물이 가는 곳마다 보석들을 생산해 냅니다.

이는 성도를 보석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을 보면 하늘 예루살렘 성을 보석으로 지어졌습니다.

이 보석들로 지어진 성곽에는 12 문이 있는데 그 문에 12지파 이름이 적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곽의 기초석은 12 사도의 기초석으로 지어졌습니다.

이는 구원 받은 모든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러니 성도가 보석인 겁니다.

 

그 보석이 전부 다른 이름을 가진 보석들이라는 것입니다.

 

계 21:19-20절.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세째는 옥수요 네째는 녹보석이요 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 한째는 청옥이요 열 둘째는 자정이라”

 

이 보석이 어디서 만들어졌나요.

에덴동산에서 흐르던 강물들이 생산해 냈습니다.

에덴동산의 강물은 성령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각양의 보석을 생산해 내는 것입니다.

 

보석이 각양의 모습으로 다르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나와 다른 보석이라고 이단이라고 내다 버리면 안 되겠지요.

그런데 우린 나와 다른 보석은 이단이라고 내다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흐르던 물이 네 근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근원이란? “로쉬” 라고 하는데 이는 머리, 우두머리, 족장, 두목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물의 근원을 의인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한 성령 안에서 다양한 사역자들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한 성령 안에서 12 제자들처럼 각각의 사역자들이 나타나는 겁니다.

 

구약에 보면 아론이 입은 흉패에 보면 12 가지 보석들이 달려 있습니다.

이는 아론은 대 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그에게 달린 보석은 12 지파 또는 12 제자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12 지파나 12 제자는 또한 모든 성도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모두가 한 예수님 속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니 모든 성도는 한 성령을 마신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이 에스겔 1장이나 요한계시록을 4장을 보면 성령이 네 생물로 나타나고,

다니엘 7장이나 스가랴 6장에선 네 병거 또는 네 바람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에덴동산에서 흐르던 네 강은 천상에선 네 생물로 나타나고

이 세상에선 네 병거 또는 네 바람으로도 나타나는 겁니다.

이는 모두가 성령이 이 땅에서 일하시는 모습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씨 뿌리는 모습으로 일하고,

어떤 사람은 물 주는 모습으로 일하고,

어떤 사람은 밭 가는 모습으로 일하는 겁니다.

 

에덴동산에 강이 각각의 이름으로 흐릅니다.

 

첫째 강은 비손이라는 이름으로 흐르고,

둘째 강은 기혼이라는 이름으로 흐르고,

셋째강은 힛데겔이라는 이름으로 흐르고,

넷째강은 유브라데라는 이름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각각의 이름으로 흐른다는 말은 각각의 이름이 주는 사명 즉 사역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이름이 다르다는 말은 사역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각자의 사역이 다른 것으로 다투지 말라는 것입니다.

에덴이라는 원천에서 바라보면 싸울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걸 지금 우리에게 적용해 보세요.

우린 각각 받은 은혜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비손 강물의 은혜를 받았고,

어떤 사람은 기혼 강물의 은혜를 받았고,

어떤 사람은 힛데겔 강물의 은혜를 받았고,

어떤 사람은 유브라데 강물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다른 말로 어떤 사람은 베드로 식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어떤 사람은 바울 식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어떤 사람은 아볼로 식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각각 받은 은혜로 주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각각 받은 은혜가 있으니 그 은혜가 동일하게 나타나진 않겠지요.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 아닙니까?

그럼 우리는 서로의 모습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예수를 부인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면 아~ 하나님께서 저 사람은 저렇게 다루시고 계시는구나! 라고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시면서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고정화시키지 말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고정 될 수가 없는 분이에요.

 

비손 강물도 돌보고,

기혼 강물도 돌보고,

힛데겔 강물도 돌보고,

유브라데 강물도 돌보아야 합니다.

 

한국교회도 돌보고,

미국교회도 돌보고,

중국교회도 돌보고,

아프리카 교회도 돌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느 동네에 가두어져서 고정화되어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으로 가두지 말고 “우리” 하나님으로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우리” 안에 집어넣고 해체시켜야 합니다.

나로 살면 끝까지 우상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의 하나님은 없어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우리 하나님만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일을 하실 땐 우리 생각을 비껴가시면서 일을 하시는 겁니다.

우리 생각에 가두어지지 않게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깨트리면서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우린 늘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상화 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편하거든요.

 

우리는 낯선 하나님은 싫어합니다.

예측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불안한 것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틀 밖에서 일하는 하나님이 낯설어서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은 구축하고 자기가 아는 하나님만 섬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하나님도 자기 안에 가두고자 합니다.

천국도 자기 생각으로 그리는 것입니다.

마치 화가가 풍경을 캔버스에 담는 것처럼 담아 놓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왜 풍경을 보고서 야! 그림 같다고 합니까?

이는 풍경은 너무도 광대하여서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림 속으로 그 풍경의 한 부분을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가두어 두어야 예측이 가능하고 안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유사가 본질을 구축한다고 합니다.

허상이 실상을 배척한다고 합니다.

그림은 허상이고 풍경은 실상입니다.

그림은 유사이고 풍경이 본질입니다.

 

그런데 우린 허상이고 유사인 그림을 돈을 주고 집안에다 걸어 놓고 야~ 멋지다고 합니다.

밖에 나가면 실상인 풍경이 장엄하게 펼쳐져서 압도하는데 우린 그걸 바라보기 보단 실상을 허상으로 만들어 놓은 그림만 쳐다보면서 좋다고 감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림 속에 가두어진 단풍을 보고서 마치 모든 단풍을 다 본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는 한 부분의 하나님으로 마치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풍경처럼 너무도 광대하여서 가둘 수가 없는데도 우린 한 부분의 하나님만 자기 생각에 가두고선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교만을 떨고 있단 말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사도들이 성경을 각각 받은 은혜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서신서들을 따로 따로 하나씩 쪽 복음으로 나누어서 보면 다 다릅니다.

나누어서 보니까 루터 같은 사람도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서도 하나로 종합하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믿음 속에는 이런 행함들이 나타납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가 왜 믿음을 말하면서 행함이 없는 것은 죽은 믿음이다 라고 할까요?

야고보서 2장을 보면 교회 안에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이 왔는데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자들이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깔보고 무시하더란 말입니다.

외모로 판단한다는 것은 자기들의 기준으로 판단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법으로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야~! 이 사람들아!

예수의 피를 마신 사람들이 왜 그러느냐!

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느냐!

왜 하나님께 부르신 자들을 너희 기준으로 판단하느냐!

하나님도 우리를 외모로 판단치 않고 구원을 해 주셨는데 우린 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느냐!

네가 정녕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이 왔을지라도 형제의 사랑으로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안 나오면 가짜라는 겁니다.

그런 믿음은 귀신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겁니다.

 

진짜 십자가를 알면 남을 판단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앞에 서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입을 닫을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 꼬라지가 너무도 추해서 남을 판단할 수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 할 것이 아니고 유구무언이 되어 버립니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나도 저랬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깨닫게 되었으니 저 사람에게도 깨닫는 은혜가 임하였으면 좋겠다는 긍휼의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법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은혜가 나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일어섬과 넘어짐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내가 이러쿵 저러쿵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고 내 꼬라지를 보고 하나님 앞에서 유구무언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율법으로 정죄하여 하나님 앞에 입을 닫게 만들어버립니다.

자기 죄가 너무도 극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할 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더 형편없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남을 판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저 보다 더 큰 악당인데 어찌 남을 판단하겠습니까.

남을 판단한다는 것은 아직까지 자기 꼬라지가 어떤 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할 말이 없어지게 됩니다.

우린 십자가 앞에 서면 입을 닫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이런 죄인들에게 예수님의 피를 뿌려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할 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입을 닫고 세세토록 어린 양만 찬양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예수 죽인 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분쟁을 어떻게 책망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롬 14:1-23절.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5.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15.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19.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20.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제일 먼저 믿음이 연약한 자를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건 믿음이 크다 작다 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깨닫는 것과 적게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 안에는 아이도 있고 청년도 있고 아비들도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차이들이 천차만별인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걸 바울은 먹을 만한 사람과 먹지 못할 사람으로 구분해서 먹고 마시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로 적용해 봅시다.

어떤 사람은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하여 찜찜해 하는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술 담배로 생각해 봅시다.

한국교회에선 술 담배를 신앙의 척도로 삼고 있으니 비유로 살펴봅시다.

어떤 사람은 술을 먹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술 먹으면 안 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이란? 술을 먹어도 되느냐 안 먹어야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고 산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술을 먹느냐 안 먹느냐의 문제는 건덕상의 문제이지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은 우리에겐 의가 없고 오직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서만 의가 된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것을 가지고 믿음이 있다 없다 복음을 안다 모른다 라고 판단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건 그 사람이 복음을 이해하는 깊이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술을 먹지만 나중에 안 먹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 술을 먹었다 안 먹었다 라는 것으로 신앙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우리가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깨달은 사람은 남이 하든 안 하든 상관치 말고 하면 됩니다.

내가 헌금 한다고 해서 왜, 너는 헌금 안하는데 그러면 안 되어요.

내가 교회 나온다고 해서 왜, 넌 교회 안 오는데 그러지 말란 말입니다.

그건 각자 믿음에 분량에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가 깨트린 옥합을 가지고 탕감 받은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모두 동일하게 탕감해 주었습니다.

누군 많이 해주고 누군 적게 해주고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걸 깨닫는 것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많이 깨달으면 많이 사랑하고 적게 깨달으면 적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많이 깨달았기 때문에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씻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신앙을 칭찬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증거 되는 곳에 반드시 마리아의 사건을 같이 증거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복음이 증거 되는 곳에 마리아 사건을 증거 하라고 하셨을까요?

올바른 깨달음은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에 가치를 깊이 알면 많이 사랑하게 되어 있고 모르면 적게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은 강요할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알아 갈수록 나는 점점 더 작아짐을 느끼게 됩니다.

은혜를 받으면 ‘나’ 라는 존재는 그냥 티끌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집니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티끌 같은 존재가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알 때 비로소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고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사라는 것을 알게 되고 감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알게 하시려고 죄와 사망의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을 그 아들의 피로 구속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발 싸우지 말고 믿음으로 살라고 합니다.

 

나도 예수의 피로 구원받았고!

너도 예수의 피로 구원받았으니 우리 모두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자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곳이므로 받은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라는 겁니다.

 

야고보는 말씀을 듣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약 1:22절.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속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스스로 속지 말라고 합니다.

 

아가서의 결론은 너 사랑 받았잖아,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보다도 강한 것이니까

그 사랑의 힘으로 감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부디 그 사랑 가운데서 평강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가서의 술람미의 신앙이 우리의 삶으로 풀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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