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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아가서 강해

♣ (아가서 강해) 2강. 지성소의 사랑 (아가 1:3-4)

by coroa 2022. 9. 15.

2강. 지성소의 사랑 (아가 1:3-4)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 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2강. 지성소의 사랑 (아가 1:3-4)

아 1:3-4절.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 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4.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정낙원 목사

 

지난 시간 아가서의 주제를 살펴보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여서 앞으로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지 걱정입니다

기대치가 크면 실망도 큰데!

주께서 시작 하셨으니 주께서 알아서 간섭하시겠지요.

 

아가서는 사랑이야기에요.

사랑이란? 아픔이에요.

특히 아가서가 말하는 사랑이란? 처음 사랑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어요.

이는 이미 경험된 그 사랑을 잊지 못하여서 사모하는 겁니다.

일종의 상사병입니다.

 

사랑은 마약과 같아요.

한번 맛보면 그 맛에 깊이 빠져들고 말아요.

연인들이 밤 새워가면서 이야기하고 하는 것도 사랑 속에는 서로가 서로를 잡아당기는 흡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것은 예수님과 연관이 되어 움직입니다.

해와 달도 예수님을 위해서 움직이고!

들에 나무와 풀도 예수님을 위하여 피고 지고!

하늘을 나는 새도 뛰어다니는 동물들도 예수님을 위해서 뛰어다니고 있으며!

하다못해 돌 하나라도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사람이야 말 할 것도 없지요.

 

그래서 아가서에는 삼라만상을 가지고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겁니다.

솔로몬과 술람미는 삼라만상을 가지고 서로를 말하고 있어요.

날은 날에게 말하고!

달은 달에게 말하듯이 만물을 가지고 서로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심미안이 떠져요.

전 과거에 표현력이 참 부족하고 무뚝뚝했어요.

그런데 은혜를 받고 보니 말이 많아지는 겁니다.

 

무엇이 그리 할 말이 많은지 길을 가면서도 혼자 주님과 말해요.

차를 타고 운전을 하면서도 그냥 하나님과 말해요.

그러면 하나님도 받아 줘요.

누가 보면 실성한 줄 알 겁니다.

 

미친 사람들을 보세요.

가만있지를 못하잖아요.

혼자 무엇을 그리 말하는지 궁시렁 거리잖아요.

그 사람들은 고민이 없어요.

늘 웃어요.

누구를 보아도 싱글벙글 해요.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술람미 여자가 그래요.

사랑에 미쳤어요.

그러니 자다가 말고 밖으로 뛰쳐나가 길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우리 신랑을 못 보았느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아 3:1-3절.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2.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3. 성중의 행순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얼마나 보고 싶고 그리움이 간절했으면 이러겠어요.

여러분 생각엔 정상적으로 안 보이지요.

무슨 여자가 사랑에 굶주린 것처럼 그러느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랑에 빠지면 이렇게 됩니다.

 

이런 술람미의 모습이 비정상적으로 보인다면 당신은 아직 예수를 만나지 못한 사람이에요.

예수님으로부터 입맞춤을 당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지나가는 예수를 그냥 구경만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설레임이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해 보셨나요?

누군가를 사모해 보셨나요?

사랑하고 사모하면 설레어요.

그냥 그 사람을 생각하면 가슴이 쿵쾅 거리고 호흡이 빨라지고 정신이 혼미해져요.

 

일본 아주머니들이 왜? 그렇게 욘사마를 좋아하는 줄 아세요.

배용준이가 그들에게 잠자던 사랑을 깨워 주었기 때문이에요.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온화한 미소에 그냥 사춘기 시절에 사랑하고픈 그 마음을 회복하여주었기 때문에 비싼 비행기 타고 그림자라도 잠깐 보고자 현해탄을 건너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욘사마가 그들을 사랑해 주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그냥 자기가 사랑해요.

사랑하다 보니 삶에 의욕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건 돈에 가치로 환산 할 수가 없어요.

 

누군가 짝사랑을 해 보셨나요.

상대가 알든 모르든 상관없어요.

학창 시절에 선생님을 혼자 끙끙거리고 사랑해 보았지요.

그냥 보면 좋잖아요.

 

그런데 말이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건 사건이고 사고에요.

 

제가 아가서를 쓰는 이유는 여러분들에게 사고를 치기 위함입니다.

주님을 향한 열정을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합니다.

그런데 함께 길을 가며 성경 이야기를 하면서도 예수님인줄 몰라요.

그러다가 식사를 하려고 떡을 가지고 축사를 하면서 예수님이 그들의 눈을 열어주신 겁니다.

 

그러자 그들 눈에 예수님이 보인 겁니다.

아니 어떻게 예수님과 같이 동행하면서 수많은 말을 하면서도 몰랐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걸 관념이라고 합니다.

죽었다고 생각하니 멀쩡히 살아서 동행하는 데에도 모르는 겁니다.

 

어쩌면 이 시대 교인들과 같아요.

이 시대 교인들도 예수님이 죽은 것으로 이해해요.

물론 말로는 주님은 살아계십니다 라고 하여도 실제로는 죽었어요.

그러니 주님과의 교제가 냉랭한 겁니다.

주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얼굴에 빛이 나요.

행복해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수심이 가득한 사람들은 의심을 해 보아야 해요.

그 사람은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와 같을 수 있어요.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야하는데 내려가면 우짭니까?

하늘에 기운을 받고 살아야 할 성도가 땅에 기운을 받고 사니 소금 맞은 배추같이 힘이 없지요.

 

암튼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난 죽은 것이 아니라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겁니다.

예수님이 성경을 풀어주시니 가슴이 뜨거워졌어요.

가슴이 뜨거워지자 예수님은 사라졌어요.

 

가슴이 뜨거워졌다는 것은 그 동안은 차갑게 죽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살았다 하나 실상은 죽어 있었던 겁니다.

그 죽었던 가슴이 예수님이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살아난 겁니다.

 

그런데 이런 사건이 그 때만 일어난 것이 아니에요.

지금도 일어나요.

어떤 말씀을 듣다가도 깨어나요.

지금 제 아내가 깨어났어요.

 

우리 집에 대형 사고가 터졌어요.

세상에 제 아내가 아가서를 벌써 네 번째 읽고 있어요.

아까 저녁 먹으로 들어갔는데 왠 사람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겁니다.

제가 들어가도 몰라요.

 

보통 때면 안방에서 TV를 보는데!

얼굴이 홍조가 뛰면서 웃는 겁니다.

그래서 당신 왜 그래!

그러니 고개로 컴퓨터를 가르키는 겁니다.

 

왜?

뭘 보는데!

가서 보니 아가서 인겁니다.

낮 시간에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러면서 제게 다가오더니 안아 달래요.

왜! 그래!

그냥!

그래서 제가 안아주면서 칭찬을 해 주었어요.

 

야! 아가서가 사건을 일으켰구나!

제발 예수에게 미쳐라!

술람미처럼 미치라고 했어요.

당신이 그동안 덜 미쳐서 힘들었다고!

미치려면 완전히 미치라고!

미치면 행복하다고!

 

이런 일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났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하나님! 이건 우리 집에서만 일어날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한번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 했습니다.

 

우리도 한번 미쳐봅시다.

이왕이면 솔로몬과 술람미처럼 한번 찐한 사랑을 해 보자고요.

왜? 술람미만 그런 사랑을 해야 하는가요.

저와 여러분들도 한 성령을 받았으니 할 수 있어요.

이제 죽었던 심장을 말씀으로 깨워봅시다.

 

예수님과 사랑이 일어나면 설레어요.

말이 많아져요.

그냥 혼자서도 히~히~해요.

제가 예수를 만나고 난 후 나타난 것이 히~히~거린다는 겁니다.

그냥 좋아요.

항상 그렇다는 말은 아니에요.

그러나 과거 율법아래 있을 땐 맛보지 못한 기쁨이 일어난단 말입니다.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라는 두 사람의 사랑을 통하여서 예수님과 성도의 사랑이야기라고 하였습니다.

 

아가서는 한편의 은어로 된 시(詩)에요.

은어란? 모두가 다 알아선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가서는 알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다는 말이 되지요.

여러분이 성경이 이해가 되고 아가서가 이해가 된다면 예수님에게 찜 당한 술람미입니다.

 

그래요.

예수님은 아무나 알 수 없어요.

오직 창세전에 어린양의 신부로 예정을 입은 성도들만 알 수가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도 너희와 저희로 철저하게 구분하셨어요.

 

아가서도 그래요.

아가서엔 두 부류의 여자가 나와요.

술람미와 예루살렘 여자들이에요.

여기서 예루살렘 여자들이란 솔로몬의 사랑을 입지 못한 여자들을 말해요.

 

그러니 예루살렘 여자들은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한 은어들을 몰라요.

은어는 오직 술람미만 알아요.

그러니 아가서는 예루살렘 여자와 같은 예수님에게 선택을 입지 못한 교인들은 몰라요.

예루살렘 여자는 바리새인들과 같아요.

 

술람미는 본 부인이 아니에요.

본 부인은 예루살렘 여자에요.

신약식으로 말하면 본 부인은 유대인들과 같고 술람미는 이방인과 같아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나라의 본 자손들은 쫓겨나고 세리와 창기들이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했지요.

이렇게 되면 예루살렘 여자는 나라의 본 자손들이고 술람미는 창기와 세리란 말입니다.

 

그럼 솔로몬은 예수님을 예표하고 술람미는 성도를 예표하고 있으니 우리가 곧 세리와 창기들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세리와 창기란? 죄인을 말합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있던 자들이에요.

 

맞아요.

우린 원래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있던 자들이에요.

하나님께선 원래 아브라함 후손을 선택했어요.

이스라엘만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 중에 일부가 완악하여져서 짤려 나가 결원이 생겼어요.

그래서 이방인인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겁니다.

사도바울이 이를 잘 증거해 주었어요.

 

로마서 11장을 봅시다.

 

롬 11:1-7절.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3.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7.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롬 11:25-27절.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이 이방인 중에서 자기 백성을 채우려고 이스라엘 중에 일부를 완악하게 만든 겁니다.

이는 이방인 중에서 예정된 백성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이방인의 수(數)가 다 차면 다시 잘려나간 이스라엘에게 긍휼을 베풀어서 구원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언약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방인 구원을 남은 자로 보고 있는 겁니다.

 

엘리야 시대에 온 이스라엘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우상숭배를 했어요.

그래서 엘리야가 하나님에게 따집니다.

하나님 온 나라가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자기혼자만 남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 놈이! 아주 건방진 놈이네!

야! 임마!

니가 알지 못하는 칠천 명이 있어!

그러는 겁니다.

 

엘리야는 자기 혼자만 있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알아서 남겨 두었다는 겁니다.

이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알아서 만들어 낸다는 말이에요.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말이에요.

 

지금 바울이 이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도 은혜를 받고 보니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웠는지를 알았어요.

이는 이방인 중에 이스라엘의 결원이 생긴 빈자리를 채울 남은 자를 찾고자 함인 걸 알았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선택했어요.

그런데 그들이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 중에 잘려 나갈 자가 있는 겁니다.

이는 이방인 중에서 편입될 자들을 채우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7장에서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인(印)을 칠 때 단 지파가 빠지고 므낫세 지파가 들어갔어요.

알다시피 므낫세는 요셉의 아들이에요.

그러니 므낫세는 12 지파가 될 수 없어요.

 

아버지 요셉이 한 지파로 버젓이 있는데 그 아들이 끼면 요셉의 지파는 둘이 되는 거잖아요.

원칙대로라면 므낫세가 빠지고 단이 들어가야 해요.

그런데 단 지파는 야곱이 축복 할 때 이스라엘을 물어뜯는 축복을 받아요.

 

창 49:16-17절.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17.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은 “한 지파 같이” 된다는 겁니다.

단은 한 지파에요.

그런데 한 지파 “같이” 된다고 합니다.

 

이는 단(뱀) 사상을 가진 자들이 이스라엘 내부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그러니 유다지파 속에도 단(뱀) 사상을 가진 자가 있고 요셉지파 속에도 있어요.

이 놈들은 이스라엘을 배도하고 핍박하는 자로 활동해요.

 

그래서 단을 길의 뱀이고 첩경의 독사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넘어지게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뱀이란? 이스라엘로 넘어지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 놈들은 이스라엘 내부에서 우상숭배를 하고 반역을 하도록 선동을 해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고 성도들을 시험 들게 만들어요.

 

그러니 단 지파는 원래 구원받지 못할 지파로 선택이 된 겁니다.

그 자리에 므낫세 지파를 집어넣은 겁니다.

므낫세 지파는 덤으로 들어간 겁니다.

이걸 은혜라고 해요.

그러니 므낫세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넣어준 남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신약으로 오면 12제자로 나타나요.

12제자는 12지파를 대신하고 있어요.

구약에선 12지파였지만 신약에선 12제자가 되는 겁니다.

 

그럼 구약에 12지파 중에서 단 지파가 뱀이었으니 신약에도 단 지파처럼 뱀 노릇할 제자가 있어야 하겠지요.

그게 누구냐 하면 가룟 유다에요.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십자가 사건에 이용한 겁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을 팔아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게 되잖아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사건의 단서가 되어요.

 

마귀가 이스라엘을 충동해서 예수님을 죽입니다.

마귀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배도하게 한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저주해서 구원권을 이방인에게 넘겨 버립니다.

이는 이방인 중에서 자기백성을 찾기 위함이에요.

 

그래서 이방인의 숫자가 다 차면 다시 이스라엘을 용서해 주세요.

중요한 것은 아방인도 이스라엘로 접붙임 당해서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방인도 이스라엘도 모두가 은혜로 구원이 된 남은 자가 되는 겁니다.

이런 자들로 천국을 채우면 천국엔 은혜로 된 자들로만 채워지는 겁니다.

 

그러니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위해서 악역으로 쓰임 받는 겁니다.

애초부터 가룟 유다는 버림 받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도 그걸 알고 선택했어요.

구약에 단 지파나 신약의 가룟 유다는 똑 같이 그 조상은 마귀에요.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언약을 보면 자기 백성들은 아들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한다고 했어요.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한다는 말은 비 거룩하고 흠이 있는 자를 구원한다는 말이잖아요.

그럼 누군가가 자기백성들을 비 거룩하고 흠이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해요.

 

그래야 창세전 언약대로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자기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로 구원을 해 내게 되는 겁니다.

그 일을 누가 하느냐 하면 구약에선 단 지파가 하고 신약에선 가룟 유다가 한 겁니다.

단 지파와 가룟 유다를 개인으로 보지 말고 그 배후에 마귀를 보세요.

다시 말해서 마귀의 종은 다 단 지파 계열이고 가룟 유다 계열이에요.

 

여러분이 구약이나 신약을 볼 때 누가 구원받았느냐는 신경 쓰지 마세요.

그건 우리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에요.

성경은 누가 구원받고 누가 구원 못 받고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고!

예수님이 어떤 식으로 자기백성들을 찾아내느냐를 말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일은 신경을 안 쓰고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만 신경 써요.

이게 죄란 말입니다.

이건 우리가 신경 안 써도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해요.

 

엘리야가 지금 우리처럼 하나님 누가 구원받습니까!

그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걸 니가 왜? 신경 쓰느냐고 타박을 하는 겁니다.

 

베드로도 그랬지요.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여 나타나서 베드로에게 넌 장차 꺼꾸러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것이다! 라고 하지요.

그러니 베드로가 곁에 있는 요한을 보면서 그럼 요한은 어떻게 되는데요! 라고 묻잖아요.

 

이에 예수님이 그걸 니가 왜? 신경 쓰냐!

요한은 내가 삶아 먹든 구워먹든 신경 끄고 너나 잘 하세요!

그러잖아요.

우리는 꼭 신경 쓸 것은 안 쓰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을 신경 써요.

하여튼 못 말리는 족속이에요.

 

그럼 아까 구약에선 단 지파 대신에 므낫세 지파가 은혜로 12지파 속에 들어갔다고 했잖아요.

그럼 신약에도 가룟 유다 대신에 누가 12 제자에 들어가야 할 것 아닙니까?

그 사람이 바로 바울이에요.

 

이러면 또 질문합니다.

목사님 맛디아가 가룟 유다 대신에 들어갔잖아요! 라고 물을 겁니다.

가룟 유다가 죽자 11제자들이 맛디아를 가룟 유다 대신에 채우지요.

 

예수님께서 승천 하실 때 약속하신 성령을 보낸다고 했지요.

그럼 이 성령은 새로운 이스라엘에게 부어지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면 새로운 이스라엘이 생깁니다.

이를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그럼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려면 12제자가 있어야 하잖아요.

구약의 12지파 대신 12제자가 있는 거니까요.

그런데 가룟 유다가 죽어서 1명이 결원이 생겼어요.

그럼 12지파의 맥(脈)을 잇지 못하는 것이 되지요.

11제자니까.

그래서 부랴부랴 맛디아를 채워서 12제자를 만든 겁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성령이 부어져요.

그럼 새로운 이스라엘이 생긴 거지요.

중요한 것은 새로운 이스라엘은 전부 예수님의 선택으로 세워져요.

그런데 맛디아는 인간들이 세웠어요.

인간들이 세우는 것은 새 언약에선 맞지 않아요.

 

새 언약에선 예수님이 선택해서 세우는 겁니다.

그래야 은혜의 공동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간이 세운 맛디아 자리에 바울을 선택해서 진짜 새 언약의 이스라엘로 만든 겁니다.

 

다시 설명합니다.

 

축구 시합을 하려면 양 팀이 11명씩이라야 하잖아요.

그런데 한 쪽 팀에 선수 한 명이 늦게 오는 겁니다.

시간은 되었고 그래서 옆에 있는 후보 선수로 일단 경기를 속개하고 나중에 후보 선수를 빼고 진짜 선수를 집어넣는 것과 같아요.

이제 확실히 이해되지요.

 

바울은 예수님 편에서 보면 원수에요.

바울은 율법 아래 있을 땐 예수쟁이들을 핍박하고 죽였잖아요.

스스로도 자기는 예수를 핍박한 포행자라고 했어요.

 

그런 놈에게 12 제자 자리를 주었어요.

이건 파격적이에요.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바울의 구원은 마치 세리와 창기가 천국 가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사용하는 겁니다.

그럼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에 편입이 될 자들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이미 이런 계획을 세웠어요.

이방인 중에서 구원받을 자는 모두가 덤으로 이스라엘에 편입이 되는 겁니다.

이 사람들은 은혜로 된 것이에요.

 

이걸 지금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중에 일부가 완악한 것은 이놈들을 잘라 내고 그 자리를 결원 시켜서 세리와 창기 같은 이방인을 채운 겁니다.

그러니 이방인인 우리들은 순전히 은혜로 구원이 된 겁니다.

이걸 남은 자라고 해요.

 

지금 우리가 바로 술람미와 같아요.

술람미도 은혜로 된 자이므로 남은 자인 겁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정실부인도 아닌 첩이에요.

그런데 솔로몬이 정실부인보다 첩을 애지중지 하고 있어요.

그러니 정실부인들이 뚜껑이 열리는 겁니다.

 

그래서 아가서를 보면 예루살렘 여자들이 술람미를 핍박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샘이 나잖아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형국이니 어찌 가만있겠어요.

갈궈야지요.

이제 뭔가 좀 이해가 됩니까?

 

그러니 신약에서 구원받은 성도는 할 말이 없어요.

자기 행위로 받은 것이 아니고 100%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눈만 뜨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 한다고요!

 

그런데 우리는 눈만 뜨면 돈 안준다고 지랄을 떨잖아요.

이게 얼마나 철딱서니가 없는 짓이에요.

좀 부끄러운 줄 아세요.

 

어저께 어느 집사님을 만났어요.

딸 아이가 올해 고 3 인데 00대학교를 지망을 한다고 합니다.

거긴 기독교 대학이라서 신앙생활을 잘 할 수가 있다고 거길 간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거긴 점수가 좀 높다고 하던데,,, 라고 하면서 말끝을 흐렸어요.

 

그러니 집사님이 하는 말이 꿈은 부모가 꾸고 이루시는 것은 아버지가 다 한다고 해요.

전 첨엔 그 말이 무슨 말인가 몰라서 그게 무슨 말이냐! 라고 물으니!

자기가 딸이 대학가는 꿈을 꾸고 있으면 하나님이 알아서 다 이루어 준다고 하는 겁니다.

아마 기도원에 어떤 무당 놈이 와서 그런 말을 한 것 같아요.

늘 기도원을 쫓아다니니 거기서 들었겠지요.

 

그래서 제가 성경엔 그런 약속이 없다고 했어요.

그건 무당들이 하는 말이라고 했지요.

하나님은 우리 소원을 들어 주는 분이 아닙니다! 라고 하니 그만 또 삐져가지고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의 신앙이 그래요.

내가 지금 어떤 복을 받았는지 모르니까

맨 날 돈 돈 돈 하면서 징징거리고 있는 겁니다.

그냥 주둥이를 국방색 실로 확 꿰매고 싶어요.

 

우린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 온 겁니다.

술람미처럼 거지같은 죄인이 구원을 받았어요.

그것도 솔로몬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어요.

 

왜?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는지 아세요.

술람미에게는 솔로몬의 은혜만 가득 담겨져 있어서 그래요.

예루살렘 여자들은 은혜가 없어요.

전부 자기 잘났다고 뻐기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왕이 꼴 보기 싫은 겁니다.

 

구원이란? 구원해 주신 분의 공로만 남아 있어야 해요.

솔로몬은 술람미를 보면 예뻐 죽겠어요.

왜냐하면! 술람미에게는 자기 것만 보이기 때문이에요.

마치 엄마가 딸아이 머리에 예쁜 리본을 꽂고 단장을 하고 나선 아이 이뻐라!

그러는 것과 같아요.

 

전 제가 입고 싶은 옷을 못 입어요.

아내가 골라줘요.

옷도 없으면서!

난 그냥 모델이에요.

이것 입으세요!

그러면 예!

오늘은 이 넥타이 매세요!

그러면 알았어!

 

제가 먼저 옷이라도 입고 나서면 아니 왜? 그렇게 했냐고 자기가 골라주는 것으로 입으래요.

그러면 전 짜증을 내지요.

아니 왜? 나는 맨 날 당신이 입혀주는 옷만 입어야 하는데!

그럼 아내의 말이 압권입니다.

당신을 보면 내가 기분이 좋아야 한 대요.

전 그 말에 엄청 은혜를 받았어요.

 

야! 맞다!

우리도 예수님이 입혀준 것을 입고 있어야 예수님이 기뻐하겠네!

야! 이거 복음이네!

 

성도에게는 예수님의 공로만 가득 담겨 있어야 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예수님이 우리를 보면 기분이 좋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린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할 자격이 없어요.

오로지 우리를 자기 피로 거룩케 해 주신 예수님의 기분만 좋으면 되어요.

 

지금 술람미가 그래요.

솔로몬 왕이 보면 예뻐 죽겠어요.

여길 봐도 솔로몬 왕이 준 것이고!

저길 보아도 솔로몬 왕이 준거에요.

 

솔로몬이 술라미를 보고 빙빙 돌면서 그래요.

 

여기를 보아도 내~사랑!

저기를 보아도 내~사랑!

어화~ 둥~둥~ 내 사랑이로다~

사랑~사랑~ 내 사랑이로다!

좀 느껴지세요.

 

솔로몬은 술람미를 보고 감상하는 거예요.

야! 멋지다!

여기다간 이걸 그리고!

저기다간 저걸 그리고!

하나씩 그려 놓고선 흐뭇해하는 겁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이 그려주는 대로 가만히 있어요.

 

예수님께서 왜? 바리새인들은 저주하고 세리와 창기들을 사랑했는지 아시겠지요.

세리와 창기들에게는 자기 자랑이 없어요.

오로지 자기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만 자랑해요.

 

천국엔 자기 자랑이 있는 자는 단 한 사람도 못가요.

거긴 전부 예수님만 자랑하는 사람이 가요.

그래서 세세토록 어린양에게만 찬양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이를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본문을 다시 한 번 봅시다.

 

3절.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 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지금 이 노래는 술람미가 솔로몬에게 하는 노래에요.

난 당신이 이래서 좋아요!

그러는 겁니다.

 

네 기름이 향기롭다고 하지요.

네 이름이 쏟는 향 기름 같다고 합니다.

 

술람미는 솔로몬 왕의 향에 흠뻑 취했어요.

솔로몬의 냄새에 취한 겁니다.

어디서 님의 향기가 솔솔 나는 거예요.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의 냄새는 코에 딱 입력이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은 감람나무에서 기름을 짜서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했어요.

향수로도 사용했어요.

솔로몬 왕은 감람나무로 만든 향수를 뿌린 겁니다.

 

술람미는 그 냄새에 취한 겁니다.

아! 우리 신랑 냄새 좋다!

그러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냄새를 풍기고 다니셨어요.

무슨 냄새입니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지요.

 

술람미는 자기와 같은 천한 것을 사랑해 준 그 은혜를 못 있어요.

어떻게 잊겠어요.

그러니 그 냄새가 그리운 겁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무시하고 조롱했지만 솔로몬은 사랑해 주었어요.

 

술람미는 피부가 검다고 합니다.

이런 검둥이를 솔로몬 왕이 사랑해 주셨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솔로몬 왕이 자기를 비웠기 때문에 가능한 사랑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온 것과 같아요.

왜?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오셨나요?

종으로 있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서 종의 형체로 와서 종인 우리와 한 몸이 되었어요.

그렇다면 솔로몬이 술람미와 한 몸이 될 수 있는 것도 솔로몬이 자기를 비웠다는 말입니다.

술람미가 받은 사랑 속엔 솔로몬 왕의 자기 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그러니 아가서는 가장 고귀한 왕이 가장 천한 죄인과 사랑한 구원 이야기인 겁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솔로몬 속에 들어가서 천하디 천한 검둥이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검다는 것은 죄를 상징합니다.

이런 죄인을 예수님이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린 죄인이에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에요.

그냥 이름 없이 살다가 지옥으로 갈 자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 주신 겁니다.

이 놀라울 때가 어디 있겠어요.

 

신앙생활이 감사로 점철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무조건 적인 용서를 받았고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용서해 주셨어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어요.

그러니 감사하고 살아야지요.

 

솔로몬에겐 천하 각국으로부터 온 절세미인들인 궁녀가 수두룩하게 있었어요.

솔로몬은 천명의 궁녀를 거느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많은 궁녀들 중에서 검둥이인 술람미를 사랑했어요.

검둥이에게 노래 중에 최고의 노래를 선사 했다구요.

 

궁녀들 간엔 솔로몬 왕에 대한 불만이 빗발쳤어요.

왕이 미치지 않고선 어떻게 저런 하잘 것 없는 검둥이를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어떻게 저런 검둥이가 사랑을 받는단 말인가?

 

중신들도 전하(殿下)!

아니 되옵니다!

이건 법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거두어 주시옵소서!

연일 연좌농성을 벌렸다고요.

(이건 성경에 없는 말인데 글과 글의 행간(行間)을 읽으면 보여요.)

 

이런 일은 일찍이 모세가 했어요.

마치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자 미리암과 아론이 길길이 날뛴 것과 같아요.

 

민 12:1.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구스 여자는 검둥이에요.

모세가 뭐가 아쉬워서 검둥이를 아내로 맞이했겠어요.

모세는 지금 애굽에 있던 자기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성도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과 같아요.

 

알다시피 애굽은 죄의 땅이에요.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 있었다는 것은 죄 아래 있었다는 겁니다.

죄를 일컬어 어둠의 세력이라고 합니다.

 

모세가 검둥이를 아내로 맞이한 것은 솔로몬이 술람미를 아내로 맞이한 것과 동일해요.

물론 신약에선 예수님이 죄인을 사랑한 것과 같아요.

모세는 지금 예표적으로 장차 예수님이 하실 일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미리암은 몰라요.

육적으로 보고 따지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미리암을 죄의 상징인 문둥병을 걸리게 만든 겁니다.

야! 이 년아!

넌 문둥이야!

넌 검둥이보다도 더 못한 문둥이란 말이야! 라고 알려주는 겁니다.

 

신약에 오면 이 미리암의 짓을 누가 하는가 하면 바리새인들이 해요.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리니 어떻게 저런 인간들과 어울릴 수가 있느냐고 했어요.

바리새인들은 잘난 체하고 거드름을 피웠지만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어요.

죄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주셨어요.

정죄하지 않고 도리어 용서해 주셨어요.

 

신앙생활은 자기 잘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는 겁니다.

제발 남과 비교하지 마세요.

남을 판단하지 마세요.

 

우린 누구를 판단하고 자시고 할 자격이 없어요.

우린 문둥이와 같은 자에요.

그런 자가 용서 받고 있다구요.

그런데 누가 누굴 판단하고 정죄합니까!

 

복음 안다고 나대지 마세요.

전 그런 사람을 보면 끔찍해요.

알면 얼마나 안다고 저러는지 소름이 끼쳐요.

나댄다는 것은 복음이 뭔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 이런 사람이야! 라고 나대는 겁니다.

 

좀 깊어지세요.

좀 느긋해 지세요.

좀 관대해 지세요.

왜? 용서받음에 대한 감사가 안 나옵니까?

우린 복음 아는 것으로 구원받지 않아요.

모두가 용서 받고 구원받았어요.

 

너나 나나 모두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받았어요.

그렇다면 우리 안에선 예수님의 피 흘려주심에 대한 감사가 나와야지요.

그런데 이런 것은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고 바리새인마냥 자기자랑만 난무해요

왜? 예수님의 냄새는 안 풍기고 똥냄새만 풍기고 다닙니까?

부끄러운 줄 아세요.

 

솔로몬처럼 검둥이를 사랑해준 그런 냄새를 좀 풍기세요.

솔로몬이 감람유 향기를 풍기는 것은 자기를 낮춘 것을 상징해요.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오신 것과 같아요.

 

감람유는 감람나무가 짓이겨져서 나온 기름이에요.

자기가 깨어지고 만들어진 기름이에요.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우고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한 것은 마치 감람유가 되기 위해 짓이겨진 것과 같아요.

 

그리스도의 냄새는 내가 십자가 안에서 죽어야 나요.

나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 때 풍겨져요.

그러니 예수의 냄새는 십자가 안에서만 나오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고 산다는 것을 토하면 그 사람은 그 순간 십자가 안에 있는 겁니다.

십자가 안에 있으면 자기 자랑이 안 나오고 예수님이 하신 일이 나와요.

이를 일컬어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그럼 네 이름이 쏟는 향을 살펴봅시다.

 

3절 “네 이름이 쏟은 향 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지금 술람미는 솔로몬왕의 이름이 향기를 쏟아 낸다고 합니다.

이름 속에는 그 사람의 속성이 담겨져 있어요.

 

예수라는 이름이 뭡니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이지요.

예수님은 자기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죄인의 모습으로 오신 겁니다.

 

천국엔 예수라는 이름이 없어요.

거기선 말씀으로 계세요.

요한계시록에선 어린양으로 말하고 있어요.

 

예수라는 이름은 죄인이 있는 곳에서만 필요한 이름이에요.

왜냐하면! 죄인을 구원하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없는 분이 이름을 갖고 오셨다는 것은 그 이름 속에 종속이 되는 겁니다.

그 이름이 가지고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이름을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으로 보낸 것은 창세전 언약 때문이에요.

창세전 언약을 보면 자기 피로 자기백성을 구속한다고 했거든요.

자기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신 겁니다.

가서 죽으라고!

죽어서 자기백성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라고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신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자기를 비우는 겁니다.

 

이름을 받았다는 것은 피조물로 전락했다는 말이에요.

창조주는 이름이 없어요.

예수님은 창조주세요.

그런데 이 땅에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셨어요.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고 말이에요.

 

지금 솔로몬도 그래요.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평강 또는 평화라는 뜻입니다.

술람미라는 이름도 평화에요.

 

평화란? 서로가 하나가 될 때 나타나요.

상대와 내가 차등이 없어야 얻어지는 겁니다.

평화를 아가서에서는 사랑이라고 해요.

 

천국을 일컬어 사자와 어린양이 같이 논다고 하지요.

이건 세상에선 불가능해요.

양은 사자의 먹잇감이잖아요.

그런데 천국에선 같이 놀아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하면 천국엔 평화의 나라이기 때문에 그래요.

서로 사랑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 안에는 차별이 없어요.

모두가 예수님의 피로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신이 교회 안에 있어야 하고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목사나 집사나 차등이 없는 곳이어야 해요.

 

이렇게 되려면 목사나 집사가 십자가 안에서 죽어야지요.

예수 안에서 너와 나가 아닌 우리가 되어야지요.

우리는 한 성령 안에서만 가능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 성령이 계신 사람은 성도를 대할 때 자기 지위로 대하지 않아요.

그냥 한 형제로 대해요.

 

사랑이란? 서로가 서로를 비우는 겁니다.

나도 없고 너도 없는 우리가 될 때 사랑이 되어요.

부부간에 사랑을 할 때 왜? 발가벗습니까?

이는 세상이 주는 신분을 버린다는 말입니다.

 

옷을 입고 사랑하는 사람은 없어요.

옷은 신분을 나타내요.

솔로몬이 만약 자기 신분으로 나왔다면 술람미는 가까이 할 수가 없어요.

어느 면전이라고!

교회 안에서는 성도끼리 세상 신분을 가지고 만나면 사랑이 안 되어요.

 

솔로몬은 술람미와 평화하기 위해서 자기 신분을 버렸어요.

평화란 사랑이에요.

검둥이를 맞이하려고 왕이라는 신분을 버렸다고요.

 

왕이 아니란 말이 아니고 왕으로서 사랑하지 않았어요.

왕으로서 사랑을 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고 겁간(劫姦)이에요.

자기 지위로 겁탈(劫奪)한 것이라구요.

겁탈은 사랑이 아니에요.

폭력이지!

 

예수님이 만약 죄인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 하나님 본래의 모습으로 왔다면 우린 사랑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으로 와서 너희들 날 섬겨!

그러면 힘에 굴복하는 겁니다.

그건 섬김이 아니고 복종하는 거예요.

복종은 억압이지 평화가 아니에요.

 

평화란? 자기를 비우는 겁니다.

그래서 술람미는 자기를 비워서 사랑해준 그 이름에 감사하는 겁니다.

왕이 아니라 신랑으로서 감사하는 겁니다.

그러니 그 사랑을 어찌 잊겠어요.

못 잊지요.

 

그래서 신분을 버리고 발가벗고 사랑을 나누는 그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하는 겁니다.

 

4절.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아! 또 가슴이 벌렁거리네요.

지금 술람미가 그래요.

왕이시여!

나를 침궁으로 데리고 가세요!

 

자 여기서 침궁을 살펴봅시다.

이건 성막을 이해하여야 알 수가 있어요.

성막을 보면 바깥에서 보면 뜰과 성막 두 구조이고 안에서 보면 뜰과 성소와 지성소 이렇게 세 구조로 되어 있어요.

 

울타리 안에 성막을 쳐요.

그러면 성막과 마당으로 구분이 됩니다.

그리고 집 안에 들어가면 거실과 안방처럼 구분이 되었어요.

이를 성소와 지성소라고 합니다.

 

성소는 거실과 같고 지성소는 안방과 같아요.

그러니 지금 술람미가 지성소로 데려가 달라는 겁니다.

이게 무지하게 중요해요.

 

자! 정신 바짝 차리고 들으세요.

지성소는 아무나 들어가지 못해요.

오직 대 제사장만 들어가요.

그것도 일 년에 딱 한번 7월 10일 속죄일에 들어가요.

 

이 때 대 제사장은 온 민족을 대표해서 하나님을 만나러 들어가요.

대 제사장은 어린 양의 피를 앞세우고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겁니다.

바울은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이 자기 피를 앞세우고 단번에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고 했어요.

 

히브리서 9장을 봅시다.

 

히 9:11-12절.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보세요.

예수님이 창조에 속하지 않은 성소에 들어갔다고 하지요.

이는 천국을 말해요.

 

이렇게 되면 성막에서 성소는 땅에 속한 곳이고!

지성소는 하늘에 속한 곳이 되어요.

술람미가 지금 지성소에 데려가 달라는 것은 천국으로 인도해 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님 이라고 하지 않고 왕(王)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입성 할 땐 주(主)가 되어서 입성해요.

왕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술람미가 왕비가 되겠지요.

 

자 보세요.

이거 제가 흥분이 되어서 말을 잘 못하겠네요.

술람미가 지금 솔로몬 왕을 그리워하고 있지요.

 

지난 시간 두 번 입맞춤에 대해서 살펴보았잖아요.

한번만 읽지 말고 읽고 또 읽으세요.

연애편지 보듯이 자주 보세요.

그래서 그 감동을 유지하세요.

 

지금 술람미가 처음 키스를 받아보고 혼절을 했어요.

너무도 달콤해서!

그래서 다시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지금은 우리는 성령 안에서 맛보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실제는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루어져요.

 

다시 신랑이 온다는 것은 재림을 말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다시 온다고 했지요.

우린 지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어요.

예수님이 재림을 하실 때는 비천한 모습이 아니고 만왕의 왕으로 오세요.

 

요한계시록 19장을 봅시다.

 

계 19:7-8절.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으로 인류 맨 마지막 장면을 보고 있는 겁니다.

거기를 보니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때가 되었다고 준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신부가 될 성도들에게 하얀 세마포로 된 웨딩드레스를 입혀주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세마포를 입혀주는 겁니다.

우리가 만들어 입는 것이 아니에요.

 

성화주의자들은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고 하니 이걸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우리의 행실이라고 하는데 아니에요.

기껏 만든 행실이라야 윤리 도덕이고 충성 봉사에요.

이건 하나님 앞에 개차반이에요.

 

여기서 말하는 행실이란? 인간의 윤리도덕 충성 봉사가 아니고 예수를 믿는 믿음이에요.

아까 말했지요.

구원받은 자에겐 구원하는 분의 것만 담겨져 있어야 한다고!

 

그러니 하나님이 어린양의 신부에게 입혀주는 것은 예수님의 피로 구속받은 대속의 옷인 겁니다.

우리행실이 아니고 예수님의 공로를 입혀주는 거예요.

마치 리브가가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받으러 들어갈 때 염소 털로 다 가려주는 것과 같아요.

지금 술람미는 이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남편은 하늘이고, 아내는 땅이에요.

땅은 하늘에서 내리는 것으로 산물을 내요.

남편의 것을 사모하고 받는 것이 여자에요.

 

받으면서 감사합니다! 신랑님!

고맙습니다! 신랑님!

그럴 때 남편의 사랑을 받아요.

 

여자가 드세 보세요.

못삽니다.

애교도 있고!

좀 콧소리도 하고 그러세요.

장작개비 같이 무뚝뚝하면 가까이 오면 도망가요.

옛 말에 여우하고는 살아도 곰하고는 못산다고 했어요.

 

원리적인 면을 말하는 겁니다.

이 시대 이혼율이 많은 것은 여자가 경제적으로 독립이 되니까 그러는 겁니다.

여자가 돈을 벌면 남자 알기를 우습게 알아져요.

돈의 위력이 그렇게 만들어요.

 

지난번 중국에서는 잘난 여자는 시집을 못 간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남편을 우습게 여긴다는 겁니다.

남편보다 나으니 고분고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걸 신앙적으로 이해 해보세요.

예수님은 의(義)를 주고 싶어서 안달인데!

바리새인처럼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만들어서 구원 받겠습니다!

그러고 있는 겁니다.

 

아주 중요한 말을 한 할게요.

지옥엔 누가 가느냐!

잘난 놈들이 가요.

그럼 반대로 천국엔 누가 가느냐!

못난 사람들이 가요.

잘난 놈이란 바리새인처럼 인간의 의를 내세우는 자들을 말해요.

못난 사람이란? 자기 의가 없고 오직 예수님의 의로 옷 입은 자를 말해요.

 

술람미에게는 솔로몬의 의가 주렁주렁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솔로몬의 의로 단장을 했어요.

그러나 예루살렘 여자들에겐 솔로몬의 의가 없어요.

전부 자기 의뿐이에요.

 

솔로몬의 사랑을 누가 받느냐!

술람미 같이 못난 여자가 받아요.

예루살렘 여자들 같이 잘난 여자들은 국물도 없어요.

도리어 저주의 대상이에요.

남편 말을 안 듣거든요.

 

가정에서도 여자가 드세면 그 집안은 불행해요.

남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드센 여자에요.

그런 여자는 품고 싶지 않아요.

솔로몬이 지금 그런 겁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을 품기 싫어요.

댕댕 거리거든요.

 

그러나 술람미는 애절한 마음으로 코맹맹이 소리하면서 서방님! 안아주세요!

교태를 부리고 있는 겁니다.

전 서방님 없으면 못살아요!

절 떠나지 마세요!

난 당신이 최고에요!

 

사랑에 목말라고 하고 있어요.

그러니 어찌 사랑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어요.

남자는 여자의 눈물에 약해요.

남자들은 약한 여자를 보호하고 싶어 해요.

그게 남자의 자존심이거든요.

 

지금 솔로몬은 한 남자로서 술람미를 사랑하고 있는 겁니다.

무조건 보호해 주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술람미처럼 예수님에 것으로 치장한 성도를 데리러 오는 겁니다.

예수님의 의 즉 예수님의 피 뿌림을 입고 있는 자를 하늘에 있는 침궁으로 데리러 오시는 겁니다.

 

예수님도 백마를 타고 오는데 피 뿌린 옷을 입고 오는 겁니다.

 

계 19:11-16절.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자 보세요.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이 피 뿌린 옷을 입고 오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땅에 있는 성도에게 예수님의 피가 뿌려진 세마포 옷을 입혀주고 신랑을 기다리게 하는 겁니다.

 

신랑이 피 뿌린 옷을 입고 오는데 신부는 무슨 옷을 입고 있어야 합니까?

신랑하고 같은 옷을 입고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신랑이 피 뿌린 옷을 입고 오는데 신부가 다른 옷을 입고 있으면 안 되겠지요.

 

성도가 입고 있을 피 뿌린 옷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용서받은 옷이에요.

성도의 성화된 행실이 아니고!

성도는 자기 행실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되어요.

예수님의 행실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구약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을 보면 신랑이 아내가 될 사람에게 빙폐물을 주어요.

그럼 아내는 신랑이 준 빙폐물로 단장을 합니다.

신랑은 자기가 준 것을 찾아가는 거예요.

신부는 몸만 가면 되요.

 

우리는 신부에요.

예수님이 신랑이에요.

그럼 예수님이 성도에게 준 것이 뭡니까?

예수님 피 안에서 거저 주는 구원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잖아요.

모두가 예수님 거예요.

우리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예복은 신랑 쪽에서 다 준비해요.

그래서 제가 제발 성화해야 한다고 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예수 믿는 게 최고의 성화에요.

아니~ 하나님이 옷을 입혀주고 계시잖아요.

안 믿어집니까?

성화론자들은 이게 안 믿어지니 자기가 옷을 만들겠다고 지랄을 떠는 겁니다.

 

대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피를 들고 가지요.

하나님은 피 안에서 만나주세요.

그러니 술람미도 피를 들고 가야지요.

 

술람미는 왕의 침궁에 왕비의 자격으로 들어가요.

그 침궁에는 신랑의 피로 들어가요.

그러니 술람미는 피 묻은 옷을 입고 기다리는 겁니다.

 

술람미는 처음 키스를 당하고 두 번째 키스를 해 달라고 하지요.

그러면서 어디로 데려가 달라고 합니까?

왕의 침궁으로 데려가 달라고 하잖아요.

왕의 침궁은 하늘에 있어요.

한마디로 천국에 데리고 가 달라는 말이에요.

 

아니 신자가 되어서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했으면 기다려야지요.

기다리는 것이 힘이 드니 먼저 황홀하게 키스해 주고 갔잖아요.

키스는 생명의 교류라고 했지요.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주셨잖아요.

그럼 성령을 받은 성도는 당연히 신랑을 기다려야지요.

어떻게 기다리느냐 하면 항상 신랑을 의식하고 기다려요.

입맞춤의 그 황홀함과 짜릿함으로 생각하고 기다리는 겁니다.

 

이게 마태복음 25장에서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에요.

열 처녀 비유에서 두 부류가 나오지요.

기름을 준비한 처녀와 준비하지 못한 처녀가 있잖아요.

기름을 준비했다는 것은 신랑을 항상 의식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술람미처럼 신랑으로부터 한번 입맞춤을 당하였기 때문에 꽃단장하고 기다리는 겁니다.

그런데 입맞춤을 당하지 않은 처녀들은 기름도 없이 기다려요.

그러다가 신랑이 온다는 소리에 기름 준비한다고 난리를 치잖아요.

이건 속된 말로 신랑의 맛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설레임이 없는 겁니다.

 

달란트 비유도 마찬가지에요.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달란트를 주지요.

다 주었어요.

안 받은 종이 없어요.

그리곤 주인이 떠납니다.

 

주인이 떠나고 나니 두 쪽으로 쫙 나누어지는 겁니다.

주인이 있을 때와 같이 열심히 일하는 종과 빈둥거리고 노는 종으로 나누이지요.

빈둥거리는 종은 야호! 주인이 없다!

이제부터 자유다!

놀자! 그러지요.

 

주인이 집을 비워 보아야 그들의 충성을 알 수가 있어요.

주인이 있으면 눈치보고 해요.

그러나 주인이 없어 보면 딱 드러나요.

억지로 하는 놈과 진심으로 하는 놈으로 구분이 되어요.

 

이걸 확인하기 위해서 주인이 잠시 집을 떠난 겁니다.

예수님이 왜? 승천했느냐 하면 어느 놈이 진짜이고 어느 놈이 가짜인지 가려내기 위함이에요.

성령을 받은 종은 예수님이 다시 온다는 약속을 믿고 열심히 일하면서 기다리는 겁니다.

술람미처럼 신랑을 오매불망 기다리며 살아요.

 

그러나 성령을 받지 않은 놈들은 눈치나 살살 보고 안 해요.

그래서 제가 교인들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그냥 복음만 전하면 그 속에 성령이 계신 성도는 감사하고!

주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도 귀하기 때문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해요.

 

하지만 성령이 없는 놈들은 종교 생활하는 겁니다.

단골손님처럼 심심하면 왔다가 바쁘면 안 나오고 그래요.

신앙생활을 취미생활 하듯해요.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겁니다,

이름만 성도에요.

성도다운 맛이 없어요.

주둥이만 살아서 나불거리고!

 

나 복음 다 아는데 뭐!

그러면서 빈둥거려요.

어차피 예수님 피로 구원 받는데!

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면 어때!

이런 놈들은 예수님이 왜? 구원해 주었는지를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육신 편한 대로 사는 겁니다.

성화하라는 말이 아니고 정신머리가 틀렸단 말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정신머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교회도 관심 없고!

교회 안 다니는 게 무슨 좋은 신앙이라도 되는 줄 알아요.

안 하는 게 신앙인 줄 알아요.

 

교회를 안 나오니 뭘 하겠어요.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쳐 먹고 노는 겁니다.

집구석에 놀면서 무슨 형제 사랑이 있으며!

무슨 충성이 있으며!

무슨 봉사가 있으며!

무슨 연보를 하겠어요.

 

그런데 이런 인간들은 평상시엔 빤질거리다가도 어디 놀러 간다고 하면 새벽같이 나와요.

이게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이고 한 달란트 받은 종들이에요.

그러면서도 천국에 갈 거라고 꿈도 야무져요.

 

어떤 놈들은~ 나 복음 아는데 하면서 자기 마누라 두들겨 패는 인간이 없나!

어떤 놈들은~ 나 복음 아는데 하면서 맨 날 술 쳐 먹으러 다니지 않나!

어떤 놈들은~ 믿음으로 구원 받는데 교회 다닐 필요가 뭐 있어! 그래요.

 

전 개인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성도라고 보지 않아요.

복음을 안다고 해서 구원 받은 자가 아니에요.

복음으로 사는 자가 구원받은 자에요.

복음을 아는 자가 되지 말고 복음으로 사는 자가 되세요.

 

제가 지금 윤리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라는 게 아니에요.

정신 자세를 말하고 있는 거예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고 하잖아요.

그럼 정신을 차려야지요.

 

술람미처럼 사랑하는 님으로부터 입맞춤을 당해본 사람이라고 한다면 정신 자세가 늘 신랑을 생각하고 살게 되어 있어요.

열 처녀 비유에서 보세요.

기름 준비한 처녀들이 완벽하게 항상 깨어 있었다는 게 아니에요.

다 졸았어요.

그런데 기름을 준비하고 졸았어요.

 

예수 믿으면서 육신의 즐거움을 즐길 수 있어요.

육을 가지고 사는데 어떻게 육신의 소욕을 없애고 살아요.

그건 불가능해요.

하나님은 육신의 소욕대로 살았다고 나무라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피에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나무라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어떤 존재인지는 알고나 즐기란 말입니다.

나를 위해서 신랑이 어떤 수욕을 당하셨는지 알라구요.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살 수가 없어요.

 

아가서가 심심해서 있는 게 아니에요.

솔로몬하고 술람미가 심심해서 연애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이 사람들 연애 이야기 하려고 성령의 감동으로 아가서를 기록하게 하지 않았어요.

다 예수님과 성도 이야기이기 때문에 써 놓은 거라구요.

 

천국 갈 사람은 이 땅에서 천국생활을 해요.

요한계시록 4장에서 구원받은 성도가 천국에서 뭘 하고 있습니까?

어린양에게 찬양하고 있지요.

그럼 자기 안에 천국이 임한 성도는 예수님 자랑하고 살아요.

술람미처럼 신랑이 준 그 첫 번째 입맞춤의 그 기쁨으로 사는 거예요.

신랑의 체취를 느끼면서 사모하고 살아요.

 

여러분 시집살이가 맵다고 하여도 신랑 사랑만 있으면 다 이겨내요.

아내는 남편의 사랑을 먹고 살아요.

성도는 예수님 사랑으로 살아요.

이 사랑을 맛본 사람은 그 사랑을 추구하지 아니 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으로부터 입맞춤을 당하셨나요.

그러면 그 사랑에 목말라 하세요.

님이시여!

언제 오시렵니까!

님에 사랑이 그립습니다!

님에 체취가 내 코를 자극하나이다!

아! 님의 품이 그리워요!

 

연애하는 기분으로 사세요.

아니~ 어떻게 세상을 삭막하게 사세요.

그러니 짜증만 나지요.

연애 좀 하세요.

그러면 흥얼거려져요.

 

십오야~ 밝은 둥근 달이~

둥실둥실 떠가고~

설레는 마음~ 아가씨 마음~

흔들흔들 흔들거려요~

 

왜? 그 좋은 신랑을 놔두고 그렇게 재밋대가리 없이 삽니까?

설레게 하려고 예수님이 잠시 떠나 있잖아요.

기다리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살라고!

주말 부부처럼 설레임으로 살라고!

설레임으로 만날 날을 사모하면서!

 

이 그리움이 세상을 이기게 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해요.

우린 모두가 이 죽음도 이기는 사랑을 받았다구요.

그러니 위풍당당하게 사세요.

 

돈 없다고 기죽지 말고!

삶이 조금 어렵다고 징징거리지 말고!

술람미처럼 님을 기다리면서 설레이는 마음으로 사세요.

 

사랑을 하면 예뻐져요.

비싼 돈 들여서 화장품 사 바르려고 하지 말고 사랑을 해 보세요.

그러면 호르몬이 왕성하게 활동해서 얼굴에 윤기가 돌아요.

 

주여!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사랑의 화살을 쏴 주세요.

그래서 전부 술람미처럼 자다가 말고 신랑 찾으러 다니는 미친 여자로 만들어 주세요.

우리 모두 예수에게 미칩시다.

 

부디 이 주님의 사랑을 목말라 하시면서 사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술람미가 왕의 침궁으로 데려감을 당할 것을 사모하며 살았듯이 우리에게도 주님에 대한 사모함이 불같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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