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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34강.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롬 5:20-21)

by coroa 2022. 10. 2.

롬 5:20-21=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34강.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롬 5:20-21)

롬 5:20-21=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정낙원 목사

 

오늘 본문을 보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죄인에게 용서가 덮쳐 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모순처럼 들리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상식에 반(反)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은 죄가 받을 것은 형벌이지 은혜(용서)가 아닙니다.

세상에선 은혜는 착한 자에게 주어지고 죄인에겐 벌(罰)이 주어집니다.

 

뉴스를 보면 악행하는 자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 뉴스를 접할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법이 발동합니다.

그들을 정죄 합니다.

 

어떻게 정죄합니까?

벌(罰)을 주라고 합니다.

그 누구도 은혜를 베풀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와 반대로 하십니다.

예수님은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용서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돌을 들고 벌을 주려고 하는데 예수님은 은혜로 감싸 안고 살려주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합니다.

이는 너희도 죄인이란 말입니다.

너도 죄인인데 어찌 이 여자를 정죄하고 죽이라고 탄핵 할 수가 있느냐 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이 말씀은 간음한 여자를 통해서 우리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사고와 반(反)하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 하셨습니다.

이는 결국 이 세상이 하나님과 반(反)하는 모습으로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틀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창기들을 가지고 우리의 사고를 뒤집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사고가 틀렸다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착하게 살았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을 저주하시고!

이와 상대적으로 타락된 삶을 살았던 창기와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입니다.

 

이러면 성질 급한 사람은 그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 필요가 없겠네!

이젠 내 맘대로 살아도 되겠네!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이는 하나님은 인간의 행함을 근거로 죄다 의다 판단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선악 기준으로 일을 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가지고 너는 지옥으로 가고 너는 천국으로 가라고 하지 않아요.

이는 곧 하나님이 판단하는 기준이 따로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의 선악(善惡) 기준으로 보면 극과 극인 바리새인과 창기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창기는 시청각 교제로 불러진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이 둘을 가지고 세상에 알립니다.

 

하나님 앞에선 누가 의인이고, 누가 죄인인지 알려 주겠다고 합니다.

여기에 동원이 된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창기입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인간의 행함으로 죄다 의다 판단하는 자들이 지옥에 가고,

창기처럼 자기 의가 없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들이 천국에 간다고 알려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바리새인들의 기준이 왜? 틀렸는지 살펴봅시다.

 

바리새인은 당대의 의인들입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의인으로 인정했습니다.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을 의인이라고 할 때는 무슨 근거가 있겠지요.

그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바로 율법 지킴입니다.

그들의 삶이 기준이었어요.

그래서 이들의 율법 지킴이라는 행위를 가지고 의인이라고 간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지킴이라는 행위를 가지고 의인과 죄인으로 판단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었어요.

율법을 지키면 의인이고 율법을 안 지키면 죄인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 기준이 바로 하나님에게 저주 받을 기준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조건을 가지고 의인과 죄인을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 안이냐!”  “예수 안이냐!” 로 나누십니다.

아담 안은 무조건 죄인이고, 예수 안은 무조건 의인이에요.

이것이 하나님이 의인과 죄인을 나누는 기준입니다.

 

이건 마치 북한 사람은 무조건 공산주의자로 취급하고,

남한 사람은 무조건 민주주의자로 인정하는 것과 같아요.

이것을 구약 마당에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아브라함 후손은 무조건 언약 백성이고 그 외는 무조건 비 언약 백성이에요.

 

아브라함의 이러한 그림은 곧 예수님을 통하여서 생겨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모습이에요.

구약 마당에서의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모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보여 주셨어요.

 

이걸 아브라함 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 속에서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넌 내꺼!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여서 너는 내 것이라고 부르시듯이 생겨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렇게 하셨어요.

갈릴리 바닷가에는 수많은 어부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베드로에게만 야! 너 날 따라와! 그랬어요.

베드로는 아브라함처럼 얼떨결에 선택을 입은 겁니다.

물론 창세전에 구원 받기로 작정이 된 것이지만 말이에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나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르실 때에 아브라함이나 베드로의 조건을 보고 부르시지 않았어요.

그냥 일방적으로 부르셨어요.

성경은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아브라함 후손들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에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를 가지고 의인과 죄인을 나누었습니다.

율법을 지킨 자는 의인이라 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죄인이라고 해 놓았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은 자들을 율법적 행위로 나누어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적 기준으로 의인과 죄인으로 분류가 된 자가 바로 바리새인과 창기들입니다.

예수님 앞에 바리새인과 창기가 있습니다.

율법적 행위를 근거로 바리새인은 의인으로 서 있고, 창기는 죄인으로 서 있습니다.

 

혈통적으로 보면 바리새인이나 창기들은 모두가 한 민족입니다.

한 아브라함 후손들이에요.

바리새인도 아브라함 후손이고 창기도 아브라함 후손이에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바리새인과 창기는 나누어질 수가 없어요.

다 같이 아브라함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적 행함을 근거로 창기들에게 너희는 아니야 라고 했어요.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아브라함 후손 될 자격이 없어!

그러므로 너희는 아브라함 후손 하지마! 라고 했어요.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와 지키지 않는 자를 우리와 너희로 나누어 버린 겁니다.

속된 말로 하나님이 의롭다 한 자들을 자기들이 아니라고 한 겁니다.

아주 고약한하지요.

 

무슨 근거로 나누었나요?

율법 지킴이에요.

자신들의 행함으로 나누었어요.

 

누가 나누었나요?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잘난 자들이 그랬어요.

창기들이 나눈 것이 아니고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하는 바리새인들이 나누었어요.

 

이건 마치 집안에 똑똑한 놈이 어리숙한 동생을 '넌 내 동생 아니야' 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똑똑하다는 것이 어리숙한 것을 용납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는 내 동생이 아니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리숙한 동생을 통해서 똑똑한 자기 잘남에 손상이 간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는 부모는 똑똑한 놈을 집에서 내어 쫓아 버립니다.

부모는 자식의 조건으로 자식이다 아니다 를 판단하지 않아요.

똑똑함과 어리석음으로 판단하지 않아요.

그런데 자식들은 꼭 자기들 기준으로 구분을 해 버립니다.

 

똑똑함이 똑똑함으로 드러나는 것은 어리석음을 포용할 때입니다.

똑똑함이 어리석음을 포용 할 때는 생명에 흐름이 나타나지만,

똑똑함이 어리석음을 배척 할 때는 죽음으로 나타나요.

지금 바리새인들이 그 똑똑함으로 형제를 죽이는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꼭 탕자 비유에서 맏아들처럼 말이에요.

맏아들이 아버지가 하는 일에 반기를 들고 동생을 구박하는 것은 자기는 아버지 명(命)을 어기지 않았다고 하는 그 잘난 의(義) 때문입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은 것을 의(義)로 가지고 있었어요.

그 의(義)가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결국 자기 행함을 판단 근거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바리새인이고 맏아들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우리가 그런 짓을 하고 있어요.

여기에 벗어난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모든 인간은 다 동일해요.

우린 생래적으로 선악의 법이 그 안에서 작동을 하고 있어요.

 

성도는 이런 짓을 안 하는 자들이 아니고 이러한 것이 죄라는 것을 아는 자들이에요.

죄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금지하는 모습으로 살게 되는 거에요.

이게 하나님 앞에서 죄인 줄 알기 때문에 이러한 선악의 구조와 싸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우리 몸을 가지고 있는 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우리를 바리새인과 맏아들의 자리에 세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바리새인이고 맏아들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도 누구를 판단 할 때 항상 그 사람의 행실을 가지고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잘못하면 본능적으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라고 하잖아요.

 

이처럼 인간들은 자기 의(義)로 살고!

자기 의(義)로 판단하고!

자기 의(義) 때문에 죽어요.

 

우리는 우리가 옳다고 한 그것으로 심판 받고 우리가 그르다고 한 그것으로 심판을 받아요.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니고 책망을 받는단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지금 하는 그 말이 나중에는 부메랑이 되어서 내게로 돌아와서 내 목을 쳐요.

지금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나중에 내가 판단을 받게 되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함부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또 그러고 있어요.

죄인은 자기 마음도 자기 뜻대로 제어하지 못해요.

이게 죄가 몰고 온 저주입니다.

그러니 제가 지금부터 바리새인을 이야기하면 그가 곳 우리 자신이라고 이입하여서 보세요.

 

지금 저는 저에게 설교를 하고 있는 겁니다.

제 안에 성령이 나에게 설교하고 있는 거에요.

정낙원이 네가 바로 맏아들이고 바리새인이라고 책망하고 있어요.

 

저는 늘 설교를 하면서 제가 먼저 책망을 들어요.

이게 설교하는 목사가 받은 축복인 것 같아요.

설교를 하자만 성경을 보아야 하니까 성경을 보면 내 자신이 먼저 까발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를 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아요.

때론 펑펑 울기도 해요.

나의 악함이 드러나서 울고!

이런 악한 자가 용서 받고 있음에 울어요.

 

그래서 우리는 바리새인이 되었다가 창기가 되었다가 해요.

우리 모두가 바리새인들처럼 판단하는 법을 가지고 행사하다가 책망을 받고 또한 창기처럼 용서 받고 있어요.

이들은 모두가 우리의 자화상이고 우리를 보게 하는 거울인 것입니다.

 

그럼 바리새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십시다.

바리새인들은 지금 자기들 기준으로 의인과 죄인으로 판단을 합니다.

동일한 아브라함 후손인데 자신들이 정한 기준으로 구분하고 있어요.

율법 지키면 아브라함 후손이고, 율법 안 지키면 넌 우리 민족이 아니 라고 합니다.

 

마치 이 시대 우리들처럼 말이에요.

우리도 우리 교회에 나오면 우리 속에 포함 시켜서 우리 교인이라고 하고!

우리 교회에 안 나오면 우리 속에서 쫓아내고 넌 우리 교인이 아니야! 라고 하잖아요.

어제까지 우리 교회에 있다가 오늘 다른 교회로 가면 형제 아닌 것으로 간주하잖아요.

우리와 함께 하면 복음 아는 자이고, 함께 하지 않으면 복음 모르는 자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지금 이 짓을 하고 있어요.

지금 우리가 바리새인들이 하는 짓과 동일한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바리새인들을 욕할 수가 없어요.

누어서 침 뱉기에요.

 

바리새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이러한 모습을 보면 어떻게 할까요?

잘난 놈들을 집에서 내어 쫓지 않겠어요.

실제로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구박 할 때 집에서 내어 쫓아버렸잖아요.

 

지금 예수님이 아브라함 심정으로 바리새인들을 집에서 내어 쫓고 있는 겁니다.

에라이~ 이 독사 새끼들아!

너희 애비는 마귀라고 하면서 말이에요.

 

왜? 그랬습니까?

그들 속에 아브라함의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아브라함 후손이 아니고 뱀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은 율법 지킨 것을 나무라지 않았어요.

그들의 삶을 나무라지 않았어요.

다만 이들이 율법 지킨 것을 가지고 의(義)로 삼아서 잘난 척 하면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율법 지킨 것을 가지고 의인과 죄인으로 나누어 버린 그 행위를 저주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행함으로 의와 죄를 나누는 그 짓이 하나님께 저주 받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하나님께서 “나는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한다” 고 하니 제사를 안 지내도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건 그런 뜻이 아니에요.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제사를 왜? 지내는지 그 의미를 알라는 것이에요.

제사 속에 담긴 그 의미를 알고 제사를 지내도 지내라는 말이에요.

 

쉬운 예로 듭니다.

명절 때가 되면 형제들이 다 모입니다.

형제들이 많으면 반드시 그 중에 잘난 놈 못난 놈이 있어요.

부모를 돌본 놈이 있고 몰라라 한 놈이 있어요.

그러다가 술 한 잔 처먹고는 서로 잘났니 못났니 하면서 싸웁니다.

 

그럼 부모님이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은 다시 부모님 집에 오지 말라는 소리인가요?

아니지요.

형제끼리 싸울 것이라면 오지 말라는 말이잖아요.

 

이건 모이지 말란 말이 아니고 싸우지 말란 말이에요.

부모님이 오지 말라고 했으니 이제부터 난 안 가!

그러면 그 놈은 호적에서 파 내야해요.

흠씬 두들겨 패야 해요.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지금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너희들 제사 왜? 지내는데 라고 묻고 있는 거에요.

제사를 왜? 지내는지도 모르면서 제사를 지내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에요.

 

제사를 왜? 지냅니까?

죄 때문에 지내잖아요.

제사를 지냄으로서 죄를 용서 받잖아요.

그럼 제사 속에 어떤 마음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까?긍휼과 감사의 마음이 있어야 하겠지요.

 

야! 내가 죽어야 하는데 흠 없는 제물이 죽는구나!

하나님은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을 죽였구나!

이런 황감 할 때가 다 있나!

주여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마음으로 드려야 하겠지요.

제사 속에 감사가 담겨져 있어야 해요.

 

제사를 지낼 때마다 이러한 마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침 저녁으로 제사를 지내라고 한 것은 하루 종일 난 죽어야 하는데 제물의 희생으로 살고 있구나를 알라는 말입니다.

이걸 잊지 말라는 것이에요.

신앙생활을 이러한 마음으로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감사가 내용이고 제사는 껍데기에요.

내용이 있을 때 껍데기도 소중한 것이 되지만 내용이 없는 껍데기는 불살라 버릴 것이에요.

이건 저주 받은 무화과나무처럼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것이에요.

이건 속임이고 위선이고 외식으로서 저주 받아야 할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어요.

유대인이었다구요.

우리들이라구요.

 

예수님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는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했어요.

이는 제사만 지낼 줄 알았지 그 진의(眞意)를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제사 지냈다는 형식만 붙잡고 있었어요.

율법 지켰다는 형식만 붙잡고 있었어요.

율법에 의미를 모른채 그 껍데기를 가지고 의인 행세를 했단 말입니다.

 

진정으로 율법에 의미를 알았다면 율법 지킴을 자랑 할 것이 아니고 주여 이런 죄인이 하나님 은혜로 용서 받고 삽니다 라고 하여야 했어요.

이런 정신이 있었으면 창기들을 죄인이라고 배척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런 마음은 온데 간데 없고 율법 지킨 것을 가지고 도리어 편 가르기를 해 버린 것입니다.

의인과 죄인으로 구분해 버렸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런 제사라고 한다면 때려치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그런 제사를 지내라고 했느냐!

하나님은 그런 제사를 지내라고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은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에 적용해야 해요.

내가 교회에 오고 봉사를 하고 연보를 하는 일들이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 에요.

감사함으로 하지 않고 왜? 이러한 일을 하는지 그 감사함의 의미가 없고 이러한 일을 했다는 그 행위만 붙잡고 있으면 헛 제사만 지내는 꼴이 되고 말아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서 행하여지지 않는 행위는 반드시 그것이 힘이 되어서 남을 판단하게 되어 있어요.

결국 자기가 한 그 행위로 인하여 마귀 짓을 하고 죽게 되어요.

 

바리새인의 신앙이 지금도 교회 안에 만연해 있어요.

특히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이 심해요.

복음 안다는 것이 율법 지킴처럼 의(義)가 되고 말았어요.

그러니 복음 안다는 것으로 힘을 삼아서 맏아들처럼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았으면 복음을 모르는 분들을 보면 긍휼의 마음이 나와야 해요.

깔 보고 업신여기는 마음이 나오면 안 되어요.

그건 복음이 주는 마음이 아니에요.

마귀가 주는 마음이에요.

 

우리가 복음을 아는 것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서에요.

복음을 모르는 분들은 아직까지 은혜를 입지 못하여서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입었고 그들은 못 입었을 뿐이에요.

은혜를 받기 싫어서 못 입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그들을 보면서 오 주여 어쩌자고 저에게 이런 은혜를 주셨나이까?

감사합니다!

저들에게도 복음이 깨달아지는 은혜를 주옵소서 라고 하여야지요.

 

그런데 우리는 마치 자기가 복음을 깨달은 것처럼 우쭐하고 교만하여 남을 무시하고 깔보고 있잖아요.

은혜를 법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이건 은혜로 깨달아진 복음을 아는 자들의 자세가 아니에요.

 

행여 복음 안다는 것을 자랑하고 교만하여 남을 무시하고 깔본다고 한다면 그가 안다고 하는 복음은 학습으로 알아진 지식일 수가 있어요.

이런 사람은 차라리 복음을 모르는 것만 못해요.

이들은 십자가라는 작대기를 들고 이 동내 저 동네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두들겨 패고 있어요.

 

복음은 덕으로 나타나지 교만으로 나타나지 않아요.

그래서 성령의 은사로 알아진 복음을 가진 성도는 절대로 복음 안다는 것으로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아요.

성령이 이를 허락하지 않아요.

 

하지만 마귀는 복음을 자기 의(義) 챙기는데 이용하게 해요.

여기에 걸려들면 복음 안다는 것이 의(義)가 되고 그 의(義)가 힘으로 작용을 하여서 복음 모르는 것들은 꺼져!

그런단 말이에요.

마치 바리새인들이 율법 지킨 것을 가지고 율법 지키지 않는 놈들은 꺼져! 라고 한 것처럼 말이에요.

 

복음을 그릇되이 알면 반드시 복음에 반(反)하는 짓들을 하게 되어 있어요.

복음을 지식으로 알면 복음에 내용은 없고 껍데기만 알아요.

그러니까 야~ 예수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는데 이젠 할 것 없어!

교회 갈 필요가 없어!

그래서 교회도 안 나오고 교회에 와서도 아무 것도 안하고 빈둥거리고 조폭 노릇을 하는 겁니다.

 

봉사를 합니까!

섬기기를 합니까!

연보를 합니까!

꼭 생나무를 태우면 나는 연기처럼 사람들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고 있어요.

교회에나 사람에게 거치는 자 노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둥이로만 예수 믿어요.

바울은 이런 자들을 일컬어 입으로는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라고 했어요.

거짓말쟁이라고 했어요.

 

이러한 것을 일컬어 복음을 자기 이익의 재료로 삼는다고 해요.

결국 복음 복음 하면서도 복음에 진의를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복음을 지식으로만 들으니 입만 나불거리지 손과 발이 안 움직이는 겁니다.

 

이들에겐 복음이 독(毒)이에요.

스스로도 죽이고 남도 죽이고 있어요.

그러니 복음을 알면 알수록 점점 더 패역해지고 마음이 싸늘한 겁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있어서 복음을 그림의 떡이에요.

먹지 못하고 구경만 하고 있는 겁니다.

복음을 수집하는 데에만 바빴지 먹지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복음으로 배부름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배부르면 사람이 넉넉해져요.

내가 용서 받은 자라는 것을 알아보세요.

관대함이 나오고 용서가 나와요.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토해 내게 되어 있어요.

내 안에 은혜가 있으면 은혜를 토해내고 내 안에 법이 있으면 법이 나와요.

 

복음은 양식이에요.

은혜의 배부름을 주는 양식이에요.

복음을 양식으로 먹어야 손발이 움직이는데 먹진 않고 지식으로 수집만 해 놓았으니 머리만 굵어 가지고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판단하는 일에만 몰두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향기를 토하지 않고 죽음에 향기만 토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믿음과 함께 일을 해요.

복음은 마치 음식 재료와 같고 믿음은 맛을 내는 양념과 같아요.

그러므로 복음이 믿음과 화합을 일으키면 예수의 맛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맛을 성령의 열매라고 해요.

 

그런데 그 속에 믿음이 없는 자는 복음이라는 재료만 가지고 있고 그 복음을 버무릴 믿음이라는 양념이 없으니 맛을 내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 복음에 반(反)하는 짓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마치 양념이 배지 않는 제사 음식처럼 맛대가리가 없어요.

이러한 것을 맛을 잃은 소금이라고 해요.

그러니 복음을 가지고서도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양식으로 먹으면 그 양식의 힘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나는 가만히 있고 싶은데 그 복음이 우리 안에서 어떤 일들을 자꾸만 벌린단 말이에요.

복음이 얼마나 강력한지 우리 몸을 소화를 시켜요.

우리 몸으로 복음이 함유한 맛을 토하여 내게 한단 말입니다.

 

그 소화시킴을 행함이라고 해요.

이러한 행함이 없는 것은 가짜에요.

귀신의 믿음이에요.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또 오해해서 행합시다 라고 하면 안 되어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라는 말은 우리더러 행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의지와 각오를 다져서 어금니 깨물고 행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이러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나타나지 않는 자는 그 속에 믿음이 없다는 말이에요.

 

성도의 행함은 천주교에서 내 탓입니다 라는 식으로 캠페인 하듯이 우리가 행하자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에요.

행함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복음이 하세요.

예수님이 하신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몸을 가지고 당신의 그림들을 그려 내신단 말이에요.

 

행함이란? 예수님의 일하심의 결과물이지 우리가 한 것이 아니에요.

이걸 뿌리가 진액을 공급하여서 가지가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가지가 뿌리로부터 제대로 진액을 공급을 받으면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어요.

 

열매를 안 맺는다는 것은 뿌리에서 진액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진액을 공급받지 못한다는 것은 뿌리와 단절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건 가짜에요.

농부는 이런 가지들을 모아서 나중에 단으로 묶어 불 살라 버려요.

 

바리새인들이 율법이라는 복음을 받았어요.

율법도 복음이에요.

어째서 율법이 복음인가 하면 예수를 만나게 해 주는 지도와 같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하였어요.

 

율법을 따라가면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있어요.

예수를 만나면 살아나요.

그러니 율법도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율법을 잘못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율법으로 자기가 죽고 남을 살려야 하는데 도리어 반대로 자기가 살고 남을 죽이는데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생명의 냄새를 풍기지 않고 사망의 냄새를 풍기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들은 사람들에게 뱀에 독을 먹여서 죽이는 자들이라고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저주하신 거에요.

 

복음을 증거 해보면 반드시 두 부류로 나타나게 되는 것을 보게 되어요.

복음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 내는 일을 하세요.

그러니까 복음이 증거 되는 현장에는 반드시 복음에 합당한 자와 합당치 않는 자들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섭기도 하고 신기해요.

어떤 이들은 복음으로 자기 부인이 일어나요.

이러한 사람들은 복음에 감사함으로 살아요.

그 삶이 교회 안에서 섬김으로 나타나요.

 

그러나 어떤 이들은 아무 것도 안하는 것으로 나아가요.

자기 사욕을 쫓아가요.

자기 맘대로 살아요.

교회나 사람들에게 거치는 자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니 동일한 복음인데도 어떤 이에겐 생명의 냄새로 나타나고,

어떤 이에겐 사망의 냄새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복음으로 살아나고,

어떤 이는 복음으로 죽어요.

 

복음은 양날 가진 검과 같아요.

믿음에 화합을 일으키면 생명을 살리는 쪽으로 사용이 되지만,

믿음에 화합이 일어나지 않으면 죽이는 쪽으로 사용이 되어요.

결국 어떤 사람들은 복음으로 살고, 어떤 사람들은 복음으로 죽는 겁니다.

 

복음은 마치 물과 같아요.

물은 산 나무에게 주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지만, 죽은 나무에게 주면 더 썩어버려요.

물은 살게도 하고 죽게도 해요.

그러니 어떤 사람은 복음으로 생명의 냄새를 풍기고, 어떤 사람은 복음으로 죽음의 냄새를 풍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왜? 복음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한 줄 아세요.

합당하게 행하지 않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왜? 모이라고 한 줄 아세요.

안 모이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이건 이렇게 하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 안에 이러한 것들이 있는지 보라고 것입니다.

모이고 싶은 마음이 있는 자들은 모이게 된다는 말이에요.

결국 바울이 복음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이 말씀이 곧 율법이 되어서 우리 죄를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는 반드시 두 편으로 나누어져요.

복음에 합한 자와 복음에 반하는 자로 나누어져요.

동일한 예수인데도 어떤 사람에겐 생명의 주가 되고, 어떤 사람에겐 심판의 주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 주는 짝이 되는 겁니다.

어떤 짝인고 하니 상대적인 짝이에요.

마치 빛과 어둠처럼 말이에요.

빛을 통해서 어둠으로 드러나고 어둠을 통해서 빛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니 서로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으로서의 짝인 것입니다.

 

성경을 열면 첫 마디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천지(天地)란? 문자적으로 하면 하늘과 땅입니다.

이를 영적으로 말하면 천국과 지옥입니다.

 

하늘과 땅이나 천국과 지옥은 성질이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이 둘은 서로 하나 될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 두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이 둘을 가지고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시고자 함입니다.

왜냐하면! 창조 자체가 창세전 언약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뭡니까?

자기 백성을 아들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는 것이잖아요.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먼저 “자기 백성” 이라는 말입니다.

자기 백성이라고 할 때는 상대적으로 자기 백성 아닌 자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자기란? 누구를 말하는가요?

하나님이지요.

그러니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광의적인 의미에서 모든 사람이 다 자기 백성이에요.

그러나 성경은 언약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언약 백성과 비 언약 백성으로 구분하고 있어요.

언약 안에 있는 자를 자기 백성이라고 합니다.

 

모두가 자기 백성이라고 한다면 굳이 자기 백성이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어요.

모든 백성이라고 쓰지!

그런데 분명하게 자기 백성이라고 합니다.

 

모든 백성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한다면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시면 안 되어요.

예수 라는 이름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라는 뜻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모든 백성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면 예수라는 이름 말고 모든 백성을 죄에서 건질 자라는 의미의 다른 이름으로 오셔야 합니다.

그냥 하나님이라고 하면 되어요.

 

그런데 묵시 속에서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이 역사에 오실 때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셨어요.

아버지로부터 너는 예수야!

너는 역사에서 예수로서의 일을 하고 와! 라고 파송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로서 역사 속에서 하시는 일이 바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자기 백성이라고 할 때는 반드시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을 바탕에 깔고서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이란? 예수님의 백성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백성이라 함은 예수님의 나라가 있음이 전제 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나라 백성을 찾으러 오신 겁니다.

아무리 바빠도 자기 나라 백성이 어떤 자들인지 살펴보고 갑시다.

 

마태복음 25장을 봅시다.

 

마 25:31-46=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 하는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장차 예수님이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모든 민족을 심판을 하십니다.

모든 민족이 양과 염소에요.

두 민족이란 말입니다.

 

양들에겐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염소들에게도 예비 된 불 속에 들어가라고 합니다.

양은 영생의 나라로 가고 염소는 영벌의 나라로 갑니다.

 

영생의 나라는 천국이고 영벌의 나라는 지옥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천국과 지옥이 창세전에 이미 준비가 되었어요.

여기에 들어갈 자들도 창조가 되었어요.

각자 가야할 곳이 정해져서 이 세상에 보내어진 겁니다.

 

그런데 세상 속에서 이 둘이 한군데 섞여 있어요.

누군가가 갈라내야 합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을 만드신 그 주인인 예수님이 오셔서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을 갈라내는 일을 하시는 거에요.

 

누가 천국백성이고 누가 지옥백성인가 하면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느냐로 가늠이 되어요.

천국백성은 예수를 알아보고 지옥 백성을 몰라보아요.

어떻게 알아보고!

어떻게 몰라보는가! 하면 서로의 기준으로 보아요.

 

양은 “언약의 눈”으로서 보아요.

 

언약에 눈으로 본 메시야는 자기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는 모습으로 보여요.

그래서 예수에게 속한 자기 백성들은 지극히 작은 형제가 복음 전하다가 헐벗고 옥에 갇히고 매를 맞는 모습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돌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염소들은 세상 눈으로 봅니다.

 

세상의 눈은 철저히 힘에 논리로 보아요.

그러니 염소들은 강한 자는 대접하고 힘없는 자는 배척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눈에는 복음으로 인하여 핍박받고 유리걸식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수치스러워요.

그래서 외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왕족이나 고관대작의 자제분으로 오시지 않고 허름한 목수의 아들로 오신 것도 언약 백성만 예수를 알아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허름한 목수의 아들로 오신 분이 메시야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눈을 받은 언약의 후손들만이 알아보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눈은 봄으로 복이 있도다” 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에 예수를 알아보는 눈을 주어서 보냈어요.

이 눈을 받은 자들은 자기들을 구원하는 메시야는 강한 자로 오시는 것이 아니고 자신들을 대신하여 죽어주실 분으로 오신다는 것을 알아요.

창세전 언약을 알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엔 누가 가느냐?

아들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들이 갑니다.

천국은 아들의 피 뿌림을 입은 자들이 가는 곳이에요.

 

그렇다고 한다면 자기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요?

창세전 언약이 아들의 피로 자기 백성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한다고 했으니 이 세상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모습으로 있을 것이겠지요.

하나님이 그렇게 두셨어요.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한다고 했으니 거룩과 흠의 반대가 어떤 상태인가요?

이는 죄의 상태입니다.

죽음입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한다는 것은 죄의 상태에서 의에 상태로 만들어 주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비거룩을 가지고 거룩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은 땅을 가지고 하늘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하늘을 설명하기 위해서 땅을 만드셨어요.

그러니 땅은 하늘을 설명하기 위한 짝이에요.

하나님은 땅에다 하늘에 정보를 알려 주세요.

 

그럼 하늘에 속한 성도는 알아보아요.

그러니 하늘에 속한 성도는 땅에서 하늘에 것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땅에 가치가 아닌 하늘에 가치로 살아요.

 

이걸 아담으로 비유해 봅시다.

 

아담은 에덴동산에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하지요.

아담은 에덴동산에 있다가 쫓겨났어요.

 

에덴동산을 묵시라고 하고 아담이 쫓겨난 곳을 역사라고 합시다.

이러면 묵시에 속한 아담이 역사로 쫓겨난 것이 되지요.

에덴동산을 천국이라고 하고 아담이 쫓겨나 사는 곳을 지옥이라고 합시다.

그럼 아담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좇겨난 것이 됩니다.

 

이걸 우리에게 적용해 보세요.

우리도 아담처럼 이미 묵시 속에 있었던 자들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냈어요.

마치 에덴동산에 있던 아담을 세상에 내어 보낸 것처럼 말이에요.

 

세상으로 쫓김 받은 아담은 세상에서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기약으로 살겠지요.

아담은 세상에서 에덴동산이 얼마나 살기가 좋은 곳인 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천국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 줄 알게 하시려고 지옥으로 던진 겁니다.

죽으라고 던진 것이 아니고 살리고자 던진 것이에요.

 

그래서 여자의 후손을 보내 준다는 약속을 하시고 에덴동산에서 내어 쫓은 겁니다.

약속을 하고 내어 보냈다는 것은 살려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죽음을 통과시켜서 생명으로 불러들이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죽음을 모르는 아담을 죽음에 던진 겁니다.

죽음 속에서 생명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생명은 반드시 죽음 속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이에요.

창세전 언약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져지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이 방법을 근거로 일을 하세요.

죽였다 살리는 방식으로 말이에요.

 

흑암에서 빛으로!

혼돈에서 질서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불러내는 일을 하세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지기 위해서 죽음에 가두어버린 것입니다.

살리기 위해서 죽이는 것입니다.

아주 역설적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하리라고 하였어요.

현제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가 없다고 했어요.

고난과 영광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고난이 많을수록 영광이 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을 환란 속에 던진 것은 장차 천국에서 더 많은 영광을 누리라는 배려이고 사랑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배려하심이 아담을 천국에서 지옥으로 던진 겁니다.

 

그럼 에덴동산에서 좇겨 난 것을 아는 아담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까요?

죄의 몸을 끌어안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죄의 몸을 벗을 날을 사모하며 살겠지요.

세상에서 에덴동산을 바라보고 살아가게 되겠지요.

다시 돌아갈 고향을 그리며 살겠지요.

 

그러니 이미 천국에서 존재 하던 자는 이 세상에서 천국을 지향하며 살게 되어 있어요.

이들을 일컬어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묵시에서 역사로 보내 놓고 역사에서 묵시를 지향하며 살게 하신 것입니다.

 

지옥에 던져 놓고 천국을 소망하고 살게 하셨어요.

죽음의 나라에 던져 놓고 영생의 나라를 사모하며 살게 하신 겁니다.

비거룩에 집어넣고 거룩을 지향하게 하는 겁니다.

이걸 오른 분문식으로 말하면 죄가 더한 곳에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더 넘친다고 합니다.

 

지옥을 모르면 천국도 몰라요.

천국은 천국에서 드러나지 않고 반드시 그 상대인 지옥에서 드러나요.

아담은 천국에서 살 자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지옥으로 던진 겁니다.

 

이게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의 신앙생활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겐 이 세상 분깃을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의지 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에요.

 

죽음이란? 생명을 전재하는 말입니다.

생명을 모르면 죽음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에 가두어 놓고 생명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죄에 던져 놓고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오늘 분문이 이를 잘 증거해 주고 있어요.

 

오늘 본문을 보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해주고 있지요.

죄는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하고!

은혜는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서 우리를 영생에 이르게 한다고 하지요.

 

죄와 은혜는 성질이 전혀 다릅니다.

그러나 둘 중에 하나가 없으면 안 되어요.

왜냐하면! 서로를 드러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와 은혜는 사진을 그려내는 명암(明暗)과 같아요.

명암(明暗)이란? 빛과 어둠이에요.

색으로 말하면 흰색과 검은색이에요.

사진이나 그림은 명암으로 사물의 실체를 드러내고 있어요.

 

우리가 흔히 쓰는 글을 보세요.

흰 종이에 검은 색으로 글씨를 쓰잖아요.

흰 색과 검은 색은 서로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이처럼 죄와 은혜는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는 일을 합니다.

정죄함이 있음으로 용서가 동반이 되는 것입니다.

죄가 있음으로 은혜가 드러나고 이 은혜는 죄를 바탕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러한 구도(構圖)가 창조 속에 그대로 있어요.

 

하나님이 창조 하신 세계는 보이는 나라와 보이지 않는 나라가 있습니다.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보이지 않는 나라를 일컬어 하늘 나라 라고 하고 보이는 나라를 세상이라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나라를 묵시라고 하고, 보이는 나라를 역사라고도 합니다.

이 둘은 서로를 말해주고자 있습니다.

 

천국을 말해주기 위해서 지옥을 만드셨고!

빛을 드러내기 위하여 어둠을 창조 하셨고!

은혜를 베풀기 위하여 죄 아래 가두게 두셨고!

구원을 위하여 타락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죽음이 주어진 것입니다.

 

로마서 11장을 보고 갑시다.

 

롬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었다고 합니다.

가두었다는 것은 독자적으로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에요.

불 순종 가운데 가두었다고 하였으니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순종이 안 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 말씀대로 살수가 없는가?

이는 하나님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없게 하셨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순종 할 수 없게 해 놓았어요.

 

마귀는 항상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식으로 일을 합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마귀라고 한다면 어떻게 가르칠까요.

하나님은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놓았어요.

그럼 마귀는 순종하라고 가르치겠지요.

순종 할 수 있다고 하겠지요.

 

그럼 이 시대 마귀의 종들이 누구인가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하는 자들이지요.

이들이 누구인가요?

성화주의자들이에요.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성화주의자들을 이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바리새인들처럼 인간의 행함을 가지고 신앙을 판단해요.

 

하나님 말씀 앞에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긍휼을 구하지 않고 예 하겠습니다!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의지와 각오를 다져요.

그러니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은 있어도 말씀 앞에서 상한 심령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긍휼의 마음이 없어요.

 

하나님이 왜? 불 순종 가운데 가두어 놓았다고 했나요?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입니다.

긍휼을 베푼다는 말은 불쌍히 여겨 준다는 말입니다.

일방적으로 용서 해 준다는 말이에요.

 

신앙생활이 무엇인줄 아세요.

곡언법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니 오해하지 말고 잘 이해 하세요.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사는 것이에요.

예수를 죽이는 거에요. 

이는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어길 수 밖에 없다는 말이에요.

우리는 예수를 죽일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여야 해요.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전 이단이 되어요.

야! 정낙원 목사는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살아도 된다고 하더라 라고 말을 하고 돌아 다녀요.

 

제가 언제 하나님 말씀을 어겨도 된다고 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어길 수 밖에 없는 자라고 했지!

전 지금 인간의 실존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다는 말은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일컬어 시온의 거치는 반석으로 오셨다고 하지요.

거치는 반석으로 오셨다는 것은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체로 오신 예수는 좋을 수가 없어요.

육체로 오신 예수는 우리 죄를 고발 하는 일을 하세요.

우리를 죄 아래 가두는 일을 하세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폭로하세요.

그래서 미워요.

 

두 예수가 있어요.

이건 예수가 둘 이란 말이 아니고 두 사역을 말해요.

옛 언약에 속한 예수와 새 언약에 속한 예수가 있어요.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은 육신에 속한 자들을 구원키 위함이에요.

어디서 구원을 하는가 하면 죄에서 구원을 하세요.

그럼 구원을 받아야 할 자기 백성들은 죄에 가두어져 있어야 해요.

 

그런데 자기 백성들이 자기가 죄인인줄 몰라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시는 일을 합니다.

어떤 식으로 알려 주는가 하면 자기 백성들을 넘어지게 하여서 알게 합니다.

 

어떻게 죄인으로 넘어지게 하는가 하면 예수를 죽이도록 하여서 넘어지게 하세요.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의 죄를 고발하는 일을 하십니다.

율법 역할을 한단 말입니다.

 

율법이 뭔가요?

죄를 고발하는 거잖아요.

우리를 죽음 안에 가두는 거잖아요.

예수님이 지금 이런 일을 하시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화딱지가 나서 예수를 죽여요.

사람이 제일 기분 나쁜게 무엇인줄 아세요.

자기가 부정당하는 거에요.

 

인간은 자기애(自己愛)로 살아요.

자기 사랑으로 산단 말입니다.

그래서 어디에 가든지 자기가 인정받고자 해요.

 

우리는 사귐을 가질 때는 반드시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들과 사귐을 갖게 되어 있어요.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사귀지 않아요.

우리 주변을 둘러보세요.

 

교회에서든지 직장에서든지 친구들이든지 친척이든지 모두가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들하고만 사귀고 있잖아요.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과는 얼굴도 안 쳐다보잖아요.

예수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이러한 자기사랑을 묵사발을 내는 겁니다.

우리를 죄인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화가 나서 예수를 미워하고 죽여요.

결국 우리는 예수 때문에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설교를 들으면 기분이 좋던가요?

아니지요.

기분 나쁘지요.

얼굴 색깔이 대번에 달라지잖아요.

목사를 죽이고 싶잖아요.

 

우리는 자기가 부정당하면 본능적으로 적개심이 들어요.

그 적개심이 곧 예수를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는 사랑 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지고 이 사실을 알려 주셨어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면전에서 부인하고 저주하지요.

이건 우리 모두의 모습이에요.

우리는 내가 살기 위해서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하고 죽일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결국 우리는 예수 앞에서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용서가 부어지는 것입니다.

은혜가 부어진단 말이에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자기 백성들에게 보내서 죄인 되게 하시고 용서 하는 방식으로 일을 하세요.

그래서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어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요?

 

이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어길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란 말이에요.

순종하고 싶어도 순종이 안 되는 인간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에요.

자 쉽게 설명할게요.

 

하나님이 죄인에게 말씀을 주셨어요.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 만 지킬 수가 있어요.

피조물은 지켜 낼 수가 없어요.

이걸 성경에서는 의인이라야 하나님 말씀에 순종을 한다고 하는 겁니다.

 

알다시피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죄 아래서 태어나요.

죄인으로 태어난단 말입니다.

죄인이라 함은 하나님 뜻에 순종이 안 되는 인간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을 주었어요.

 

이건 중풍병자에게 축구하라는 말과 같아요.

하나님이 야! 너 왜? 가만히 있어!

그라운드에 나가서 뛰어!

축구를 하란 말이야!

 

여기에 자기가 중풍병자라는 것을 아는 자라고 한다면 하나님 지금 장난 합니까?

내 꼬라지를 몰라서 그런 말을 합니까!

저 중풍병자에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요!

 

제가 만약 건강한 몸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시키지 않아도 합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해도 한단 말입니다!

누굴 바보로 아나! 라고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중풍병자임을 모르는 자는 예~ 하나님 알겠습니다!

노력해 볼게요!

최선을 다해서 해 볼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라고 합니다.

 

이 시대 성화 주의자들이 그러잖아요.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하잖아요.

성경은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주셨는데 이 사람들은 하겠다고 하고 있어요.

 

이게 모두가 성경을 법으로 받아서 그래요.

성경을 법으로 받으면 내가 그 말씀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신앙하게 되어요.

성화주의자들이 이들이에요.

 

그러나 성경은 법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받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지킬 수가 있어요.

은혜로 받으면 모든 말씀을 내 대신 예수님이 지켰다는 것으로 보여요.

그러니 말씀 앞에서 내가 보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보이는 겁니다.

최선을 다 할게요 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고맙습니다” 가 나온다구요.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만이 지킬 수가 있어요.

피조물은 그것을 지켜 낼 수가 없어요.

 

그러니 말씀이 우리에게 떨어 졌다는 것은 이 말씀을 지킬 분이 온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에요.

너희는 그를 믿으라는 거에요.

말씀을 지킬 분을 영접 하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신앙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인거에요.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이 말씀을 지키실 분에게로 나아가야 해요.

이게 말씀을 주신 목적이에요.

그래서 순종하고 싶어도 순종이 안 되는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놓고는 순종하라는 말씀을 던져 주신 거에요.

은혜를 더하게 하시려고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순종이 안 되는 죄인에게 순종하라고 하고 있어요.

이건 불 순종 가운데 가두기 위해서에요.

불 순종 가운데 가두어 놓고 너는 순종 안 되는 인간이라고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순종을 이끌어 내고자 순종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는 불순종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고발하기 위해서 순종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말씀 앞에서 왜? 안 될까!

이 왜? 안 될까! 를 찾아야 해요.

하나님은 이 왜? 안 될까! 라는 놈을 폭로하고 그 놈을 죽이기 위해서 순종이 안 되는 죄인의 몸을 사용하시는 거에요.

 

순종이 안 되게 하는 그 놈이 누군가 하면 바로 죄에요.

마귀란 말이에요.

사도 바울이 이 고백을 로마서에서 했어요.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말년에 쓴 책이에요.

말년이라 함은 가장 신앙이 좋을 때에요.

성령이 충만 할 때 썼어요.

 

로마서 7장을 봅시다.

 

롬 7:15-2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은 지금 자기 안에 두 법이 있다고 합니다.

한 법은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법이고!

다른 한 법은 그와 반대로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자 하는 법이에요.

서로 다른 두 법이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법이 싸우면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자 하는 법이 이겨요.

그러니 바울이 미치겠는 거에요.

자기 마음으로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싶어요.

이건 진심이에요.

그런데 안 된단 말입니다.

 

로마서 7장은 바울의 통절한 자기 실존에 대한 고백이에요.,

이건 성령 충만 한 자만이 고백 할 수가 있는 고백이에요.

자기가 죽은 자라는 것을 아는 자 만이 토해내는 고백이에요.

 

이건 성경 구절은 주문 외우듯이 흉내 내는 것이 아니에요.

마음 속 심연(深淵) 깊숙이 서부터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 인간의 의지나 각오로 토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어쭙잖게 흉내 내려고 하지 마세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는 고백은 죄에 대하여 아파해 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할 수 없는 고백이에요.

괜히 자기 멋대로 살다가 아~ 나는 곤고하다~ 그런 것이 아니란 말이에요.

진짜 곤고한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아 나는 곤고하다 라고 하지 않아요.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죽음에 자기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울어요.

 

성경은 우리더러 흉내 내라고 주신 것이 아니에요.

우리를 낱낱이 해부하고 죽이기 위해서 주어진 말씀이에요.

그러니 진짜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말씀 앞에서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걸 또 만들어내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을 윈치 않아요.

하나님은 우리가 만든 것은 받지 않아요.

하나님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만 받아요.

하나님이 그 안에서 이러한 고백을 토설하게 하세요.

 

지금 바울이 그러잖아요.

마음으로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싶다!

그런데 안 된다!

몸뚱이가 말을 안 들어 쳐 먹는다!

그러니 환장 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누가 날 좀 도와 줄 수 없겠습니까!

날 좀 도와 주세요! 라고 도움에 손길을 청하는 거에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는 것과 같아요.

 

이건 마치 중풍병자가 축구를 하고 싶은 것과 같아요.

마음은 축구를 하는데 몸이 말을 안 듣는 겁니다.

그러니 중풍병자는 자기 안에 있는 축구를 하고픈 소원으로 자기가 중풍병자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축구만 보면 중풍병자는 자기 신세에 한숨만 나오는 겁니다.

 

바울은 지금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의 무능함을 보고 있는 겁니다.

이 사실을 직시한 사람은 하나님에게 탄원할 것입니다.

하나님 이 몸뚱이 좀 고쳐 주세요! 라고 하든지!

아니면 하나님 이 몸 말고 다른 몸 주세요! 라고 하든지 말이에요.

 

이걸 또 곡해해서 몸뚱이 고쳐준다고 합니다.

이게 성화주의자들이에요.

성화주의자들은 우리 몸이 안 되니까 성령이 와서 해 주겠다고 가르쳐요.

끝까지 자기를 포기하지 않아요.

이게 육에 속한 자들 보는 안목이에요.

 

이게 모두가 언약 중심으로 성경을 보지 않고 자기 존재 중심으로 보기 때문이에요.

자기 존재 중심으로 보니까 자기 가능성을 자꾸만 찾게 되는 것입니다.

언약 중심으로 보면 야! 이 몸뚱이는 죽어야 하는 것이구나! 를 알게 되어서 자기에게 의미를 두지 않게 되어요.

자기 가능성을 포기하고 자기 부인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왜? 자기 백성들을 불 순종 가운데 가두었나요?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잖아요.

긍휼을 베풀려면 순종이 되면 안 되어요.

그럼 긍휼을 베풀 수가 없어요.

긍휼은 죄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긍휼의 언약이에요.

그러니 이 언약을 위해서는 불 순종 가운데 가두어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불 순종의 바탕에 오셨어요.

 

그래서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가지고 일을 하세요.

쉽게 말해서 죄인은 예수님이 일을 하는데 있어서 파트너에요.

 

그래서 우리 몸이 순종이 안 되는 겁니다.

순종하고자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순종이 안 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어요.

이걸 느끼는 사람은 주여 도와 달라고 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을 바라보게 된단 말입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살려 주는 영”으로 오셨어요.

살려 주는 일을 하려면 죽은 자가 있어야지요.

하나님이 인간을 왜 만든 줄 아세요.

예수님이 살려주는 영으로서 일을 하기 위해서 만들었어요.

 

예수님과 인간은 상대적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산 자이고 우리는 죽은 자에요.

자신이 죽은 자라는 것을 아는 자는 자기에게 기대하지 않아요.

자기를 보지 않아요.

예수님을 보아요.

 

예수님이 실상이고 사람은 허상이에요.

구원이란? 허상이 실상 안에서 연합이 되어서 실상으로 살아가는 것이에요.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면 예수님에 것으로 살아가요.

 

창조주이신 예수님이 피조물인 우리 안에 오셨다는 것은 자기 비움이에요.

이걸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사는 겁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고 했어요.

한마디로 바울로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로 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영이고, 사람은 육이에요.

예수님은 하늘에서 났고, 사람은 땅에서 났어요.

예수님은 생명이고, 사람은 죽음이에요.

 

육이고 땅이고 죽음인 우리가 예수님으로 산다고 하면 우리 삶 속에서 어떤 것들이 나타날까요?

예수님의 것이 나타나겠지요.

예수님이 일을 하신 흔적들이 있겠지요.

예수님이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님에 것을 나타내는 것이 있어요.

 

사도 바울은 이걸 자기 몸에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다고 했어요.

자기 몸으로서는 도저히 감당 할 수 없는 것들을 예수님이 드러내셨어요.

그러니 태장을 맞고 감옥에 갇히면서도 찬송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극심한 고난과 주리고 목마르고 욕 먹어 가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겨쌈을 당해도 낙망하지 않고 꺼꾸러뜨림을 당해도 넘어지지 않고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건 바울의 실력이 아니고 예수님이 바울 안에서 행하셨기 때문이에요.

이러한 일들은 바울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성도에게 일어나요.

우린 모두가 이러한 흔적들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가 이 시간 여기까지 이렇게 온 것은 우리의 실력이 아니고 모두가 주께서 우리 안에서 강권하셨기 때문이에요.

주님이 끌고 왔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모두가 크고 작은 아픔들이 있어요.

 

우리는 죄 아래서 은혜로 살아가고 있어요.

우리의 죄가 밝히 드러날 때마다 주의 은혜는 더 크게 덮쳐와요.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가면 갈수록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 보다 내가 더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 많이 깊이 깨닫고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죄를 깨닫는 것을 비례로 하여서 더 많이 더 깊이 알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더 넘치는 것입니다.

그냥 넘치는 것이 아니고 더욱 더 넘쳐요.

 

은혜가 “더욱 더 넘친다” 는 말은 죄가 1 이라고 한다면 은혜는 100 이란 말이에요.

이건 무엇과 같은 고하니 우리는 부모님을 1 을 사랑했는데 부모님은 우리를 100 으로 사랑하는 것과 같아요.

100 이란 완전을 말해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식으로 더욱 더 넘치게 주셨는가요?

이는 우리의 죄에 몸을 멸하시고 죄와 상관없는 몸으로 주시는 은혜에요.

세상에서 승승장구하게 하여서 살리는 것이 아니고 죽이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철거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40장을 봅시다.

 

사 40:1-9=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 ~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잘 보세요.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우리에게 보내서 위로하라고 했으니 우리 몸에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올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바라는 것과는 정 반대의 것을 가지고 와요.

우리의 기대를 완전히 박살내는 것으로 가지고 온단 말입니다.

 

“말씀하시는 자가 이르노니 너는 가서 외치라” 고 합니다.

 

그러자 이사야가 묻습니다.

하나님 “내가 무엇이라고 외칠까요!”

 

이에 하나님이 말합니다.

“너희는 풀이고”

“풀은 마르고 시든다”

왜 그런 줄 아니~ 이는 너희들 위에 여호와의 기운(氣運)이 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게 중요해요.

이겨서 여호와의 기운이란 죽음의 기운이에요.

죽음이 기운이 뜨거운 바람처럼 우리의 풀 같은 인생을 말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지금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요.

그런데 그 위로 뜨거운 바람이 부는 겁니다.

마치 머리를 감고 난 후 드라이로 머리를 말리듯이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풀이라고 하고 있어요.

우리 보고 풀이래요.

그러면서 내가 너희들을 다 말라 죽일 거라고 합니다.

세상에!

 

그런데 이걸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해요.

복음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아니 어째서 죽이는 것을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합니까?

 

아름다운 소식이란? 복음이에요.

그런데 복음의 내용이 뭐라고요.

죽인다고 하잖아요.

망하게 한다고 하잖아요.

 

아니! 망하게 하고 죽이는 것이 어째서 아름다운 소식인가요?

이는 죄 아래서 난 자를 죽이고 죄와 상관없는 몸으로 살려 내기 때문입니다.

마치 중풍으로 시달리는 몸을 죽이고 새로운 몸으로 살려 주신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너희는 “하나님을 보라” 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새로운 몸을 가지고 오니까 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몸을 가지고 와요.

예수님이 하늘에 새 몸을 주시기 위해서 땅에 헌 몸을 거두어 가시려고 오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복역의 때가 끝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복역이란? 죄의 몸으로 죄 값으로 옥살이하는 것이에요.

이제 그 때가 끝났다고 하니 이제 출소하게 되었다는 말이에요.

죄와 사망이라는 감옥에서 출소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육신의 죽음으로서 복역의 때를 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인들이 어디에 가두어져 있었나요?

백성들은 율법 아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탄식하고 살았어요.

율법이라는 감옥 속에 가두어져 있었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 아래서 난 자들을 살려 내는 일을 하는데 어떻게 하는가 하면 율법 아래 난 자들을 죽이는 방법으로 하세요.

율법에 사람을 죽임으로서 율법에서 해방시켜 주세요.

그리고는 율법과 상관없는 자로 살려 내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을 봅시다.

 

롬 7:1-6=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바울은 지금 율법을 남편으로 말하고, 우리를 아내로 말을 합니다.

우리는 율법이라는 남편 아래서 종살이 했어요.

여기서 벗어 날 수가 있는 길을 오직 하나 남편이 죽든지 아내가 죽든지 하는 길 밖에 없어요.

그런데 율법이라는 남편은 죽지 않아요.

 

예수님이 오셔서 보니까

율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 닦달을 하고 있는 거에요.

예수님이 율법에게 야! 내가 그 여자 대신 네 요구를 들어 줄게 라고 합니다.

 

그러자 율법이 내 요구는 이 여자를 정죄하고 죽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그래!

그럼 내가 대신 정죄 당하고 죽어 줄게!

예수님이 우리를 안고 십자가에 죽어 버렸어요.

 

그리고 예수님이 사흘 만에 살아 나셨어요.

예수님이 살아 나셔서 우리에게 하는 말이 내가 너희들 대신 율법이라는 남편의 요구를 다 들어 주고 너희를 사 왔으니 이젠 내 아내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너희의 남편은 나 예수이니까 내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율법이라는 남편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성령이 오셔서 이 사실을 알려주고 믿어지게 하십니다.

이걸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너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알려 주세요.

 

이게 믿어지는 사람은 율법이라는 옛 남편의 말을 듣지 않겠지요.

도리어 율법이라는 옛 남편에게 보란 듯이 새 남편에게 팔짱을 끼고 살 것이 아니에요.

이걸 은혜로 산다고 합니다.

은혜 아래서 법에서 벗어난 자로서 살게 되지 않겠어요.

 

과거 야인시대 라는 드라마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김두환 일당이 일제 식민지 속에서 엄청난 고통을 당하였어요.

식민지 때에는 일본 순사들에게 쩔쩔 맸어요.

 

그러다가 일본이 패망하여 식민지에서 해방이 되었어요.

이 사실을 안 김두환 일당은 그때부터 일본 순사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두들겨 패고 큰소리칩니다.

이게 해방을 누리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해방을 시켜 주셨어요.

그러니 이젠 율법으로부터 정죄당하지 않아요.

율법의 정죄 앞에서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죄 앞에서 은혜로 살아야 한단 말입니다.

죄 지었다고 징징거리지 말고!

그래서 제가 믿음은 뻔뻔스러움이라고 했던 겁니다.

 

이 뻔뻔스러움은 법 아래 있는 자들에겐 용납이 안 되어요.

그 안에 법이 자리 잡고 있는 사람은 뻔뻔스러우라고 해도 안 되어요.

자기 안에 법이 그걸 용납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걸 또 오해해서 막살지 마세요.

 

새로운 남편은 이젠 옛날 방식으로 살지 말고 새로운 방식으로 살라고 합니다.

 

옛날 방식은 내가 책임지는 방식이에요.

하지만 새로운 방식은 예수님이 책임져 주는 방식이에요.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는 법으로 살지 않고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 사실을 알려 주세요.

예수그리스도가 “죄(罪)와 사망(死亡)의 법”에 있는 자들을 자신의 죽음으로 “의(義)와 생명(生命)의 법”으로 해방시켜 주었다고 알려 주세요.

이러한 사실을 알려 주심을 입은 성도는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하면서 살아요.

이걸 의(義) 안에서 왕 노릇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의(義)와 생명(生命)의 법” 아래 있는 성도는 예수님 피로 우리 죄가 사해졌다는 그 새 언약을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놀라운 은혜를 더 깊이 알게 하시려고 죄를 가지고 일을 하세요.

죄를 가지고 우리를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시고 은혜로 덮어 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더 넘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외침처럼 율법 아래 있던 자들이 율법 아래서 행하던 그 복역을 마치고 은혜 아래서 자유하며 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호와의 기운으로 풀을 마르게 하여서 죽이듯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이는 것이 아름다운 소식인 것입니다.

 

이제 율법이 범죄를 더하게 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잠시 살펴보고 마칩시다.

 

어떻게 죄가 더하여지는 것입니까?

이는 없는 죄를 만든단 말이 아니에요.

분명히 죄가 맞는데 그것을 아직 죄라고 지적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이들이 죄인 줄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으로 그것이 죄라고 지적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들이 하는 것마다 죄로 폭로가 되어집니다.

율법이 오기 전에는 죄로 여기지 않았던 것도 이젠 죄로 밝히 드러나게 되었어요.

죄인이 풀썩 거릴 때마다 죄가 푹푹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마치 포대기에 싸 놓은 똥이 포대기가 풀썩 거릴 때마다 냄새를 진동하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은 율법을 가지고 감추어져서 있는 죄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껍데기에 나타나는 죄를 고발했다고 하면, 신약에서는 속에 있는 죄의 근원을 고발하고 있는 거에요.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통해서 인간의 내면에 숨어져 있는 죄를 끌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하였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고 하면서 죄는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이라고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죄를 생산하는 공장이라고 알려 주시는 거에요.

 

너희는 죄 덩어리라고 합니다.

인간 자체가 죄에요.

그러니 인간에게서 죄다 아니다 판단하는 그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있어도 죄라고 하지 않았어요.

죄라고 하려면 그것을 금지하는 법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을 준 것입니다.

율법이 가입하지 않았으면 죄이면서도 죄로 판단하지 않던 것을 이젠 율법을 주어서 그것이 죄라고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법은 틀린 자를 위하여 주어진 것이에요.

틀린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법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너희에겐 의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율법을 주셨는데 유대인들은 반대로 이해한 거에요.

도리어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려고 했단 말입니다.

 

율법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상을 주기 위함도 아니고!

복을 주기 위함도 아니고!

오직 범죄를 더하게 하기 위해서에요.

그러니 율법을 지켰다고 자랑 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언제 가장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감사합니까?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많이 알 때이지요.

죄 앞에서 무기력 할 때잖아요.

 

내가 약하고 초라 할 때 주님의 은혜는 더 크게 다가와서 나를 감싸 안아요.

위로가 넘쳐요.

은혜가 내 안에서 나로 하여금 의(義)로 왕 노릇하게 하세요.

그럼 또 다시 힘을 얻어요.

 

여러분 신앙이란 큰 업적을 내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잉여분으로 받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예수님께서 이루신 그 의(義)로 인하여 죄인이면서도 의(義)로 왕 노릇하면서 사는 것이에요.

 

우리는 이 바탕에서 교회에도 모이고, 형제를 섬기기도 하고, 봉사도 하고, 연보도 하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 주어지는 전리품들이에요.

그래서 성도의 삶을 은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꼬라지를 보지 말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보세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이 말씀이 사실로 믿어져서 실제로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날마다 우리의 눈을 여서서 주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이 보여지게 하옵소서. 마음을 열어서 믿어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정죄함을 넉넉하게 이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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