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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 33강. 한 사람 아담과 예수그리스도 (롬 5:12-21)

by coroa 2022. 9. 24.

 

33강. 한 사람 아담과 예수그리스도 (롬 5:12-21)

롬 5:12-21=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출처] 33강. 한 사람 아담과 예수그리스도 (롬 5:12-21)|작성자 길손

 

 

-.정낙원 목사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내가 사는 걸까요?

아니면 누군가가 나를 살게 하고 있는 걸까요?

 

이것은 주체(主體)의 문제입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냐!

아니면 내 주인이 따로 있느냐! 의 싸움이 됩니다.

 

내가 산다고 하면 어느 가수가 부른 노랫말처럼 내 인생은 나의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로 살게 하고 있다면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나로 살게 하신 분의 것이 됩니다.

 

만약에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고 내 인생의 주인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내가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은 내 인생의 주인에 것을 도적질하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살기 바빴지 내가 왜? 사는지에 대하여서는 물어보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나는 누구인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는 왜? 사는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하나님께서 물으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느냐!” 라고!

나는 누구입니까?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시편 90편을 보면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 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 인생들을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아니~ 어디로 돌아가라는 말인가요?

우리가 돌아 갈 곳이 있다고 합니다.

그럼 우리가 돌아 갈 곳은 어디인가요?

 

주께서 돌아가라는 말이 무슨 말인가요?

이는 주께서 우리더러 그만 살고 오라는 말입니다.

주(主)가 누구인데 우리더러 그만 살고 오라고 합니까?

그건 주가 우리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이 그만 살고 오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독자적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살게 하심으로서 사는 자라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생명이 뭡니까?

생명(生命)이라는 말을 누군가가 살으라고 명령을 하여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누가 살게 할까요?

그야 생명을 주신 분이지요.

생명을 누가 주셨나요?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숨을 불어 넣으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104:29-30절을 보면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죽은 자들에게 주의 영을 보내서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셨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이 생명을 거두어가니 흙으로 돌아가 죽은 자가 되었는데!

하나님이 죽은 자들에게 “주의 영(靈)”을 보내서 새롭게 창조를 하셨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봅니다.

 

고전 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려주는 영이라고 하지요.

살려주는 영이란? 생명을 주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생명을 가지고 와서 죽은 자들에게 주시기 위함입니다.

 

사도요한이 이를 증거해 주었어요.

요한복음 1장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합니다.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신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육신 속에 하늘에 생명이 담겨져 있습니다.

육신이 깨어지면 그 생명이 쏟아져 나옵니다.

 

육신을 입고 오신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이 십자가에서 깨어지자 생명이 나옵니다.

이 생명은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하늘에 생명이에요.

하늘에 생명을 자기 백성들에게 주십니다.

그러자 자기 백성들이 하늘에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생명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생명은 예수님이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으로서 우리의 생명을 관리하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살려주시는 이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로 살게 하시는 그에게 감사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성경을 통해서 이 사실을 이미 배웠고 지금 배우고 있으며 앞으로 배워가고 있습니다.

더 깊고 넓고 풍성하게 말이에요.

 

신앙이 뭐냐?

나의 생명은 예수님에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찬미(讚美)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언약의 책입니다.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약은 옛 언약이라고 하고, 신약은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언약에는 두 언약이 있어요.

 

옛 언약과 새 언약입니다.

옛 언약은 죽이는 언약이고, 새 언약은 살리는 언약이에요.

왜? 죽이는 언약이 먼저 주어지고 살리는 언약이 나중에 주어질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옛 언약은 율법입니다.

 

로마서 3장입니다.

 

롬 3: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은 죄를 고발하고 모든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가두는 일을 합니다.

그러니 옛 언약은 죽이는 언약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고 합니다.

 

율법이 범죄를 더 하게 한다는 말은 없는 죄를 더 짓게 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이는 그 안에 있는 죄를 드러나게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죄인인데 이 놈들이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어서 너희가 이렇게 틀린 인간이라고 고발을 하십니다.

율법이 미끼가 되어서 우리 속에 있는 죄를 들추어내는 일을 하세요.

그러니 율법이라는 옛 언약은 죄인인 옛 사람과 맺은 언약으로서 인간을 죄인으로 드러내서 죽이고자 하신 언약입니다.

 

아담은 옛 언약을 맺은 옛 사람을 대표하고 있어요.

그런데 언약이 옛 언약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새 언약도 있어요.

옛 언약과 새 언약은 서로를 반대하는 상대적인 언약이에요.

그러니까 옛 언약이 죽이는 언약이라고 한다면, 새 언약은 살리는 언약인 것입니다.

 

옛 언약은 옛 사람하고 맺은 언약이고!

새 언약은 새 사람하고 맺은 언약이에요.

그럼 누가 옛 사람이고, 누가 새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아담과 예수님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 아담은 옛 사람의 대표가 되고, 예수님은 새 사람의 대표가 되어요.

이러면 아담과 예수님 두 분은 두 대표가 되는 것입니다.

아담은 옛 사람의 대표이고, 예수님은 새 사람의 대표에요.

 

오늘 본문을 보면 “죄(罪)와 사망”을 불러온 아담이라는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리고 “의(義)와 생명”을 불러온 예수라는 “또 다른 한 사람”이 나옵니다.

여기서 한 사람이란 숫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대표성을 말합니다.

 

한 사람은 “죄(罪)의 조상이고!”

또 한 사람은 “의(義)에 조상”입니다.

아담 한 사람에 의해서는 죄(罪)가 들어왔고,

또 다른 한 사람인 예수그리스도에 의해서는 의(義)가 들어왔습니다.

 

“죄(罪)의 조상”은 아담이라고 하고!

“의(義)에 조상”은 예수그리스도 라고 합니다.

죄(罪)의 조상인 아담의 세계는 “사망의 세계” 라고 하고,

의(義)에 조상인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는 “생명의 세계” 라고 합니다.

 

정리하고 갑니다.

두 세계가 있습니다.

사망의 세계와, 생명의 세계가 있습니다.

 

두 조상이 있습니다.

죄(罪)의 조상과, 의(義)에 조상입니다.

아담은 죄(罪)의 조상이고, 예수님은 의(義)에 조상입니다.

 

이게 이 세상의 구조입니다.

세상은 이 두 구조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아담 안에 있는 자와, 예수 안에 있는 자가 있어요.

죄(罪) 아래 있는 자와, 의(義) 아래 있는 자가 있어요.

 

죄(罪)가 지배하는 나라는 사망의 나라이고, 의(義)가 지배하는 나라는 생명의 나라입니다.

사망의 나라를 일컬어 지옥이라고 하고, 생명의 나라를 일컬어 천국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망의 나라에 있고, 어떤 사람은 생명의 나라에 있습니다.

이건 우리더러 골라잡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는 이런 두 세상을 만들었다고 알려 주는 것입니다.

두 나라를 만드신 분이 두 나라 백성들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으로 창조를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두 부류로 섞여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걸 갈라내세요.

어떤 사람은 천국으로 집어넣고, 어떤 사람은 지옥으로 집어넣습니다.

예수님이 각자 있어야 할 곳으로 갈라내시고 집어넣으세요.

마치 쓰리기 분리수거 하듯이 말이에요.

 

그럼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은 어떻게 나누어집니까?

인간의 조건으로 나누어지나요?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가고 나쁘게 살면 지옥에 가나요?

 

아니에요.

우리의 행위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 아래 있느냐로 구분이 되어요.

우리의 조건으로 따지지 않아요.

 

네 조상이 누구이냐?

조상으로 나누어집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죄인과 의인은 조상이 누구냐 로 판단을 합니다.

 

제가 정(鄭)씨입니다.

왜? 정(鄭)씨인가 하면 조상이 정(鄭)씨이기 때문입니다.

조상은 제가 결정할 수가 없어요.

부모는 내가 선택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내가 부모라는 조상으로부터 태어날 뿐이에요.

 

이렇게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는 것을 세상 말로 팔자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운명(運命)이라고도 합니다.

이 운명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에게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조상을 우리가 선택하고 고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 팔자를 고칠 수가 없어요.

사람들이 팔자를 고친다고 하는데 그건 고쳐지는 것이 아니고 팔자를 찾아 가는 것이에요.

각자 자기가 타고난 팔자로 찾아가는 것이에요.

 

마치 야곱과 에서처럼 말이에요.

야곱은 천국에 갈 팔자를 타고 태어났고, 에서는 지옥에 갈 팔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의 길로 갔어요.

 

이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하나님으로부터 각자의 운명을 받고 나옵니다.

각 사람마다 언약의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역할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 운명대로 살다가 갑니다.

 

어떤 사람은 긍휼의 그릇으로 사용되고,

어떤 사람은 진노의 그릇으로 사용이 되어집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는 언약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천국 가는 길이 있고, 지옥 가는 길이 있어요.

하나님이 두 길을 만들어 놓으셨어요.

천국 가는 길과 지옥으로 가는 길을 기차의 레일처럼 정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에 갈 자들은 천국의 레일에 올려놓고 등 떠밀고 가시고! 지옥에 갈 자들은 지옥에 가는 레일에 올려놓고 등 뒤에서 떠 밀어요.

그러므로 천국 백성은 천국 가는 길을 걸어가게 되어 있고, 지옥 백성은 지옥으로 가는 길을 걸어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누가 천국으로 갈 야곱이고 누가 지옥으로 갈 에서인줄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이 간섭을 하십니다.

마치 야곱과 에서처럼 하나님께 각 자의 길로 간섭하십니다.

 

야곱은 천국에 길로 간섭하고!

에서는 지옥에 길로 간섭을 하세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천국 가는 길과 지옥에 가는 길이 역설적으로 주어졌어요.

무슨 말인고 하니 천국에 가는 길로 간섭당하는 것은 지옥과 같이 좁고 험한 고난의 길로 있고, 지옥으로 가는 길로 간섭당하는 것은 천국과 같이 넓고 좋은 길로 있어요.

 

이처럼 천국 가는 길과 지옥 가는 길이 역설적으로 주어졌단 말입니다.

우리더러 선택을 하라고 하면 넓고 좋은 길을 선택을 합니다.

그런데 그 길을 따라가면 멸망이 기다려요.

우린 가만 두면 멸망으로 갈 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은 간섭을 하세요.

넓고 좋은 길로 가지 못하고, 좁고 협착한 길로 가도록 간섭을 하세요.

이렇게 간섭 당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댕댕 거립니다.

하나님 왜? 날 귀찮게 하느냐고 따져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 거기가 천국인 겁니다.

이런 놀라울 때가!

그래서 천국에 간 사람들은 세세토록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운명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기 때문에 후천적으로 바꿔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간섭으로 자기 운명대로 자기 자리로 찾아 가는 것일 뿐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팔자가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니에요.

팔자대로 사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를 보세요.

하나님의 간섭으로 장자와 차자가 바뀌잖아요.

에서는 장자로 태어나도 장자권을 빼앗기고 야곱은 차자로 태어나도 장자권을 차지하잖아요.

이는 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장자와 차자가 바뀌기로 작정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간섭을 하신 것입니다.

 

얼마 전에 TV에서 무당에 대하여 방영하는 것을 잠간 보았습니다.

거기에 보면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어떤 여자 분이 무당이 된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 분의 말을 빌리면 자신은 어려서부터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고 해요.

교회를 다녔다는 말은 자기 딴에는 예수를 믿었다는 말이겠지요.

 

그런데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고 살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을 했어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도 차도가 없는 겁니다.

의사가 진단을 해도 병명을 모르는 거에요.

 

너무 힘이 드니까 어떤 분이 점쟁이 한데 한번 가보라고 하더라는 거에요.

그래서 처음엔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인데 어떻게 점쟁이 한데 가느냐 라고 거절하였다고 해요.

그런데 갈수록 더 아프니까 견딜 수가 없어서 도대체 왜? 그런가 궁금해서 점쟁이를 찾아갔어요.

 

점쟁이가 하는 말이 신기(神氣)라고 하더랍니다.

무당이 될 팔자라고 하더래요.

하도 기가 막혀서 신경질을 내고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점쟁이 말이 귀에서 뱅뱅 울리는데 도무지 견디지 못하겠다는 거에요.

 

그래서 가족들과 상의를 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가족들은 펄쩍 뛰면서 반대했지요.

가족들은 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니까 당연히 반대를 하였어요.

그러나 반대만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우니까요.

 

그래서 남편에게 나중에 아이들이 엄마가 무당이라고 하면 어찌 되겠는가!

자기 때문에 아이들과 남편이 힘들어 하니까 남편에게 이혼을 하자고 했대요.

그러자 남편은 이혼을 하기 싫다고 하여서 결국 신(神)내림을 받아서 무당이 되었어요.

 

그럼 묻습니다.

이 분이 무당이 된 것은 자기의 원함인가요?

아니면 등 떠밀려서인가요?

등 떠밀려서 에요.

 

이 분은 예수 믿고 천국에 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열심히 예수를 믿었어요.

그런데 무당이 되었어요.

끝내 예수와 반대의 길로 가고 말았어요.

현재 나타난 모습으로 보면 그렇잖아요.

 

이 모두가 자기 뜻에 반하는 일들이에요.

자기의 원함과 상관이 없이 말이에요.

이 분은 마치 에서처럼 자기 팔자를 찾아 간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간섭을 하신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절간에서 중 노릇하다가 목사가 된 사람도 있어요.

무당 노릇 하다가 예수 믿는 사람도 있어요.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각자의 길로 간섭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게 우리 피조물의 운명이에요.

세상에는 이처럼 두 운명이 있어요.

 

그럼 다시 한 사람의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새 번역본으로 봅니다.

12절과 14절입니다.

 

롬 5:12-14=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 ~ 14 그러나 아담 시대로부터 모세 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죽음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모형이었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 왔다고 합니다.

여기서 한 사람이란 아담을 말합니다.

아담은 인류의 조상입니다.

 

아담은 이 세상을 대표하고 있어요.

이 세상의 대표가 죄를 지었어요.

그리고 죽은 자가 되었어요.

 

조상이 죄인이면 그 후손들은 자동적으로 죄인이 됩니다.

그런데 그 죄가 죽음을 몰고 왔습니다.

죽음이 아담의 후손에게 쓰나미처럼 덮쳐왔습니다.

 

그래서 14절에서 아담 시대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아담과 같은 범죄를 지지르지 않았음에도 죽음에 지배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아담의 죄가 그 후손들에게 그대로 전이(轉移)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비의 유전자(遺傳子)를 자식이 그대로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죄로 인하여 죽었듯이 그 후손도 아담의 죄성을 그대로 물려받고 태어나기 때문에 아담처럼 죽는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스스로 아담처럼 죄를 짓지 않았다 할지라도 아비로부터 나온 자이기 때문에 그 아비의 죄를 그대로 물려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곧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범죄한 아담의 후손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죽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이에요.

그러므로 죽지 않는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죽는다는 것이 아담의 후손이란 증표에요.

 

인류의 조상이 죄인이므로 그 후손들은 자동적으로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 세상은 죄의 세상이 되고 죽은 자들이 살아가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있는 곳을 무덤이라고 해요.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을 죽은 자들이 사는 무덤이라고 합니다.

 

에스겔 28장을 보면 해골골짜기라고 합니다.

에스겔이 본 해골은 이스라엘을 상징하지만 광의적인 의미에서는 온 세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신약으로 오면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5장을 봅시다.

 

요 5:28-29=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다 그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지요.

여기서 “그” 란?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 하시자 두 가지 반응들이 나타납니다.

 

그의 음성이 들려지자 두 가지 부활로 나온다고 합니다.

하나는 생명의 부활로 나아오고, 다른 하나는 심판의 부활로 나옵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오고,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옵니다.

 

여기서 선한 일을 행하였다 혹은 악한 일을 행하였다는 것은 그 사람이 무슨 선한 일을 하고 악한 일을 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선(善)에 속하였고 악(惡)에 속하였다는 말이에요.

선(善)에 속하였다 함은 예수에게 속하였다는 말이고, 악(惡)에 속하였다 함은 마귀에게 속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선(善)에 속한 사람은 예수를 믿는 것으로 나아오고, 악(惡)에 속한 사람은 예수를 거부하는 것으로 나아온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선(善)에 속한 자나 악(惡)에 속한 자나 모두가 다 그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즉 신자나 불신자나 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단 말입니다.

이는 예수를 기준으로 판단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럼 두 가지 반응들이 나타나요.

 

선(善)에 속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아오고, 악(惡)에 속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와요.

생명의 부활은 예수를 영접하는 것을 말하고, 심판의 부활은 예수를 배척하는 것을 말해요.

그러니 예수님을 증거하면 예수를 영접하는 자와 배척하는 자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선한 일과 악한 일이란 우리의 행위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속한 자와 속하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하였잖아요.

그러므로 예수를 영접한 자는 선한 일을 행한 자이고, 예수를 배척한 자는 악한 일을 행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음성이 이 세상에서는 심판의 음성으로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선(善)에 속한 자와, 악(惡)에 속한 자를 구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선(善)에 속한 자와 악(惡)에 속한 자가 되는지 알아야겠지요.

 

이걸 오늘 본문에서 조상으로 한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범죄하여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고 하였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걸 역(逆)으로 의인되게 하는 방식으로 적용을 하십니다.

의인도 아담과 같은 대표 원리로 만드세요.

 

아담 한 사람 때문에 모두가 죄인이 되었듯이 이젠 반대로 의인 한 사람을 통해서 모두를 의인 만드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의인 되는 행위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의로운 조상으로 의인이 되어집니다.

결국 조상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아담이라는 한 사람과 예수라는 한 사람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는 모두가 죄인이 되고 예수 안에서는 모두가 의인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아담이나 예수님은 한 사람으로서 대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아담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대표가 되는 것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아담은 장차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표로서의 표상이에요.

 

지금부터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들으세요.

 

표상(表象)이란? 모형이란 뜻입니다.

그러니 아담은 장차 오실 자의 모형이에요.

오실 자라고 하였으니 이미 정해진 사람이 있다는 말이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을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자란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 정해진 사람을 알려주기 위해서 아담이 있는 것이에요.

아담을 가지고 장차 오실 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역(逆)으로 말해도 되어요.

아담은 이미 선제(先帝)해 계시는 분을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어졌어요.

이미 선제해 계시는 분이 나중에 오세요.

아담이 세상에 먼저 온 겁니다.

아담이 먼저 와서 이미 선제하신 분이 하시는 일을 모형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형으로 일해요!

실체가 아니고!

모형과 실체는 달라요.

 

그래서 아담은 장차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합니다.

표상이란? 그림자에요.

아담은 그림자이고 장차 오실 분이 실체에요.

 

그림자는 죽은 것이고, 실체가 살아 있는 것이에요.

아담은 그림자이니 죽은 자이고, 예수님은 실체로서 산 자에요.

아담은 죽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예수님은 살려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어요.

 

그러니 아담은 예수님을 보여주는 표상인데 어떤 표상인가 하면 역설적인 표상이에요.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려주는 실체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은 사람들을 죽이는 일을 하는 모습으로서의 그림자로서의 표상인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이렇게 되면 아담이 죽는 것은 정해진 수순에 의한 것입니다.

죽기 위해서 아담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장차 오실 실체를 보여주는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아파트 모델 하우스와 같아요.

모델하우스는 설계도에 의해서 장차 지어질 아파트를 보여주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철거되기 위하여 지어졌어요.

우리는 모델 하우스를 보고서 아파트를 봅니다.

이게 모형이에요.

 

모형 속엔 실체가 없어요.

모형이 아무리 정교하더라도 모형일 뿐입니다.

모형 속엔 생명이 없어요.

생명은 실체 속에만 있어요.

 

모형은 실체를 알려주기 위한 것이에요.

그러므로 모형은 모형으로서 있어야지 모형이 실체인 것처럼 하면 안 되어요.

왜냐하면! 장차 오실 자를 보여주기 위하여 창조가 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모형이에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어요.

무슨 뜻인고 하니 보이지 않는 것을 근거로 이 세상을 만들었단 말입니다.

 

이 말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실체이고 보이는 세계는 가짜란 말이에요.

그러니 이 세상 자체가 모조품이에요.

원본이 아니고 가짜란 말입니다.

실체는 숨겨져 있고 가짜가 보이는 거에요.

 

그러니 보이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은 모두가 모형으로서 가짜에요.

진짜는 보이지 않는 세상에 있어요.

저도 가짜이고 여러분도 가짜에요.

진짜는 하늘에 있어요.

 

바울이 이걸 보았어요.

삼층천에 가니까 거기에 진짜 바울이 있었어요.

역사 속에 있는 바울은 삼층천에 있는 바울의 복사본인 겁니다.

그러니 역사 속에 있는 바울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의 진짜는 천국에 있어요.

지금 우리는 천국에 있는 우리의 모형이에요.

그래서 이 역사에 사는 우리는 모형으로서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도 마찬가지에요.

보이는 이 역사 속에 있는 예수님은 하늘에 있는 예수님의 모형이에요.

가짜란 말이에요.

가짜란 모형이란 말입니다.

그렇다고 예수가 가짜란 말이 아니에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모형이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부활하여 살아나신 예수님은 실체로서 지금 하늘에 계세요.

 

보이는 이 역사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모형이에요.

그러니 보이는 이 세상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이는 이 역사 세계에 계셨던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모형이므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세요.

본인이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엉뚱하게 정낙원 목사는 예수는 가짜라고 하더라고 말하지 말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지요.

천지 창조 이전에 하나님이 계셨어요.

하나님이 계시던 곳을 보이지 않는 세계라고 합니다.

이를 묵시라고 해요.

 

묵시란? 분명히 존재하는데 피조물에겐 감지되지 않는 곳을 말해요.

하나님은 묵시에 계세요.

우리가 감지 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감지 할 수가 없는 태초라는 묵시로부터 나왔어요.

이걸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보이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은 감지 할 수가 없는 묵시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천지(天地)가 만들어지기 전에 묵시라는 태초가 있었어요.

그 태초에 계시던 하나님이 무슨 일을 꾸미셨어요.

태초에 꾸미신 일을 일컬어 창세전 언약이라고 해요.

그러니 창세전 언약은 우리가 만들어지기 전에 세운 언약입니다.

 

그럼 묻습니다.

천지가 창조가 되기 전에 하나님이 언약을 하셨어요.

언약이란? 대상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럼 우리가 만들어지기 전에 언약을 했으니 누구랑 했을까요?

태초에 계신 분이 하셨겠지요.

태초에 누가 계셨나요.

 

요한복음 1장을 봅시다.

 

요 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태초에 말씀이 계셨어요.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어요.

그런데 이 말씀도 하나님이세요.

 

그러니까 태초에 말씀이신 하나님과 또 다른 하나님이 계셨어요.

말씀이신 하나님이 나중에 보니 육신을 입고 오십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을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럼 아들을 육신으로 보내신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겠지요.

 

이러면 태초에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이 되지요.

그럼 창세전에 맺은 언약은 아버지와 아들 간에 맺은 언약임이 밝혀지지요.

창세전 언약을 아버지와 아들이 했어요.

 

우리는 언약을 체결 할 때 아직 나지도 않았어요.

창조가 되지도 않았어요.

그러니 언약은 우리하고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언약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하나님끼리 지키는 것이에요.

여기서 언약을 하나님끼리 지키는 것이란 말은 아버지와 아들 간에 해결할 문제란 말입니다.

 

이 언약을 위해서 만물을 만들었어요.

그럼 만물 속에 포함이 된 우리는 그 언약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이서 우리를 가지고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세요.

그래서 우리는 창세전 언약을 위한 도구로 창조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잖아요.

그럼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왜? 오셨습니까?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에요.

 

이 세상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모형인 겁니다.

모형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사라져야 할 것들이에요.

사라진다는 것은 죽어야 할 것들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육신으로 모형이라는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죽으러 오신 것입니다.

반드시 죽어야 해요.

안 죽는 예수는 가짜에요.

 

베드로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다고 하자 안 된다고 말리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뭐라고 하던가요?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지요.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하잖아요.

 

왜? 그런가요?

예수님은 죽으로 왔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벗어 버리고 가야 해요.

그런데 베드로가 죽지 말라고 해요.

 

그러니 베드로가 사단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태초라는 실상에서 역사라는 모형 속으로 육신을 입고 왔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내가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얻기 위하여 버린다고 했어요.

 

무슨 말인가요.

버리는 목숨이 있고 얻을 목숨이 있다고 하잖아요.

버릴 목숨은 육신을 입은 목숨이고 얻을 목숨은 영의 목숨이에요.

여기서 영이란 육과 반대의 개념이에요.

 

보이는 세상을 육이라 하고 보이지 않는 세상을 영이라고 해요.

예수님은 지금 보이는 세상에 목숨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세상의 목숨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육신은 모형이고 영이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는지 모르겠네요.

 

이 세상은 창세전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모형으로 만들어졌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 창세전 언약을 위한 도구로 사용이 되어지다가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혹시 스님이 실수하여 여러분 가정에 시주 하러 오거든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사신다고 고생이 많습니다 라고 음료수 한잔이라도 대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스님은 이 사실을 모르지요.

아는 여러분이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대접을 하란 말입니다.

 

그분들을 모르고 여러분은 알잖아요.

아니까 좀 너그러우세요.

괜히 재수 없다고 하면서 소금뿌리지 말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 줄 아세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아는 자들이에요.

창세전에 있던 일들을 아는 자들이라구요.

흔한 말로 천기를 아는 자들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세상 밖에 모르는 사람들보다 속이 좁으면 어찌 합니까?

 

좀 넉넉하세요.

세상의 이치를 아는 데에는 성도는 고수에요.

눈 뜬 자에요.

세상 사람들은 하수이고 소경이에요.

 

여러분 소경하고 눈 뜬 사람이 길을 가다가 부딪쳤어요.

그럼 누가 사과하여야 할까요?

눈을 뜬 사람이 잘못했다고 사과하여야 해요.

어이쿠~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보았습니다 라고!

 

그러지 않고 소경더러 앞을 잘 보고 다니라고 하면 그건 등신이에요.

등신이니까 소경 보고 앞을 잘 보고 다니라고 하지요.

이런 사람은 소경만도 못한 사람이에요.

 

성도는 눈을 뜬 사람이고 세상 사람들은 소경이에요.

성도는 이 세상은 사라질 것들이라는 것을 알아요.

세상 사람들을 몰라요.

 

그러니 성도는 세상 사람들에게 세상 것을 양보하시고 손해를 보아야 해요.

악착같이 하지 말고!

그럼 등 뒤에 대고 욕을 해요.

예수 믿는 것들이 더 하다고 하면서 말이에요.

 

여러분이 잘못하면 그 욕이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요.

반대로 여러분이 잘하면 야~!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르네 라고 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요.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예수쟁이들은 자기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 우린 주둥이로만 나불거리지 살아가는 방식은 세상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고 도리어 그들보다 더 독종으로 살잖아요.

무슨 이런 개 같은 법이 있나요.

 

고수가 되어서 하수와 바둑을 두면서 죽기 살기로 하면 안 되어요.

적당하게 밀고 당길 줄 알아야 해요.

모두가 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우린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아는 자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너무 빡빡하게 살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큰 의미에서 모두가 길동무들이에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다시 언약 이야기를 합니다.

 

언약은 하나님이 하셨어요.

누구랑 했는가요?아버지하고 아들하고 하셨어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 것이에요.

 

언약을 하려면 언약의 대상자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 대상자가 바로 예수님에요.

그러니 언약을 지키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아들이세요.

예수님이세요.

 

언약을 지키실 대상자가 예수님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언약에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는 두 언약이 있어요.

이게 또 엄청 중요한 말이에요.

 

창세전 언약을 탁 깨 보니 그 안에 두 언약이 쌍둥이처럼 들어 있는 것입니다.

마치 한 엄마 뱃속에 야곱과 에서처럼 쌍둥이로 있는 거에요.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지만 그들의 운명은 천지(天地) 차이에요.

하나는 천국가고 하나는 지옥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창세전 언약이 그래요.

두 언약이 있는데 서로 극과 극인 것으로 있어요.

하나는 죽이는 언약이고, 하나는 살리는 언약인 것입니다.

죽이는 언약을 옛 언약이라고 하고, 살리는 언약을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아까 언약은 누가 지킨다고 했나요.

예수님이 지킨다고 했지요.

그럼 언약이 두 개이면 두 예수가 있다는 말이 되지요.

하나는 죽이는 예수이고, 하나는 살리는 예수에요.

중요하니 잘 들으세요.

 

아니~ 창세전 언약 속을 탁 까보니까 그 속에 죽이는 언약과 살리는 언약 두 개가 있다고 했잖아요.

그럼 언약을 지킬 대상도 둘이어야 하잖아요.

죽이는 언약은 죽는 예수가 지키고, 살리는 언약은 산 예수가 지킬 것이 아니에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자 이렇게 생각하세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언약을 세우실 때 죽이는 예수가 있고 살리는 예수가 있어요.

죽이는 예수는 옛 언약이라는 죽이는 일을 담당하시고, 살리는 예수는 새 언약이라는 살리는 일을 담당을 하세요.

 

그래서 예수도 이 세상에 와서 죽는 예수가 있고, 부활해서 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가신 산 예수가 있어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있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예수가 있단 말입니다.

예수가 둘이란 말이 아니고, 예수의 두 사역이 있단 말이에요.

 

이를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를 죽이는 예수가 있고, 우리를 살리는 예수가 있어요.

그럼 누가 우리를 죽였나요?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안고 십자가에 죽었잖아요.

그럼 누가 우리를 살립니까?부활을 하여서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이잖아요.

 

왜? 그런가요.

자기 백성도 죽여야 할 자가 있고 살려야 할 자가 있기 때문이에요.

아담 안에서 난 자는 모형으로서 죽어야 해요.

 

그래서 예수님도 육신을 입고 역사라는 모형 속에 오셔서 역사 속에서 난 자기 백성들을 죽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성령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셔서 하늘에 사람으로 살려 내세요.

이해가 되시지요.

 

아까 모형 속에서는 실체가 안 나온다고 했지요.

모형은 모형일 뿐이라고 했지요.

맞아요.

 

모형에서는 모형이 나와요.

실체는 오직 실체에서만 나옵니다.

모형이 죽어야 실체가 나와요.

모형은 마치 씨와 같아요.

 

사과나무 씨가 죽어야 사과나무가 나와요.

씨를 아무리 잘 관리해도 사과나무가 나오지 않아요.

사과나무는 씨가 죽으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우리 몸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몸은 모형이에요.

씨와 같아요.

우리 몸이 죽어야 실체가 나와요.

 

우리의 실체는 하늘에 있어요.

하늘에 있는 실체는 땅에 모형이 죽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모형을 죽이고 실체를 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육신으로 있는 자기 백성들을 죽이기 위해서에요.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기 위해서에요.

그러니까 모형이 모형을 안고 죽는 겁니다.

 

그리고 실체가 와서 실체로 살려내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는가요.

 

또 어려운 말을 합니다.

옛 언약은 누구랑 맺고 새 언약은 누구랑 맺나요?

옛 언약은 옛 사람과의 언약이고, 새 언약은 새 사람과의 언약이지요.

 

그럼 옛 사람으로서의 예수가 있고, 새 사람으로서의 예수가 있겠지요.

옛 사람으로서의 예수는 옛 언약을 지키는 분이고, 새 사람으로서의 예수는 새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 되겠지요.

 

예수님을 사람의 몸으로 비유한다고 하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옛 사람의 몸으로서 옛 언약을 담당하셨고,

부활하여 승천하시고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는 새 사람으로서 새 언약을 담당하세요.

 

옛 사람은 땅에서 났고, 새 사람은 성령으로 납니다.

옛 사람을 육(肉)이라 하고, 새 사람을 영(靈)이라고 합니다.

그럼 옛 사람으로서 육에 속한 예수가 있고, 새 사람으로서의 영에 속한 예수가 있겠지요.

육체로 오신 예수가 있고, 성령으로 오신 예수가 있다는 말이 되지요.

 

육체로 오신 예수는 옛 사람으로서 옛 언약을 이루실 대상자에요.

옛 언약은 죽이는 언약이라고 했잖아요.

그렇다면 육체로 오신 예수는 옛 언약을 위하여 죽겠지요.

그래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옛 언약인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어요.

 

예수님 속에는 자기 백성들이 속해 있다고 했지요.

그러니 예수님이 죽을 때 그 속에 포함이 된 자기 백성들도 몽땅 다 죽은 것이 되겠지요.

예수님이 혼자 죽었지만 대표로 죽은 것이기 때문에 그 속에 딸린 자기 백성들도 다 죽은 것이 되어요.

 

그런데 십자가에 죽었던 예수님이 성령으로 부활하셨어요.

이는 육을 벗어나 영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영이란? 육의 반대로서 말하는 것이에요.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이세요.

영이신 예수님이 새 언약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새 언약이 뭐라고 했나요?

살리는 언약이라고 했지요.

죽은 자를 살리는 언약이라고 했잖아요.

 

어떤 자를 살립니까?

옛 언약으로 죽인 자들을 살리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자기 백성을 몽땅 안고 죽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부활하셨어요.

 

그럼 예수님이 부활 하실 때 그 속에 있던 자기 백성들도 몽땅 부활했지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기하고 죽었던 자들을 몽땅 살리세요.

그 살리는 일을 새 언약이라고 해요.

 

그래서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자기하고 함께 죽었던 자들 속으로 오셔서 새 언약을 적용시키는 일을 하세요.

살리는 일을 하세요.

이해됩니까?

 

성령으로 오신 예수는 새 사람으로서 새 언약의 대상자에요.

새 언약은 살리는 언약이라고 했잖아요.

그렇다면 성령으로 오신 예수는 새 언약을 위하여 살리는 일을 하시겠지요.

그래서 부활하여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은 새 언약인 생명을 주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속에는 자기 백성들이 속해 있다고 했지요.

그러니 예수님이 부활 하실 때 그 속에 포함이 된 자기 백성들도 몽땅 다 살아나는 겁니다.

예수님이 혼자 부활 하셨지만 대표로 부활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 속에 딸린 자기 백성들도 다 부활을 한 것이 되어요.

 

중요하니 다시 정리합시다.

언약에는 두 언약이 있습니다.

하나는 죽이는 언약이고, 하나는 살리는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언약의 대상이 예수라고 했으니 죽이는 언약의 대상으로서의 예수가 있고, 살리는 언약의 대상으로서의 예수가 있겠지요.

옛 언약을 담당할 예수가 있고, 새 언약을 담당할 예수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럼 죽이는 언약인 옛 언약을 담당할 예수는 어떤 예수인가요?

육체로 오신 예수이지요.

옛 언약은 죽이는 언약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니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는 죽으러 오신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살리는 언약인 새 언약을 담당하실 예수는 어떤 예수인가요?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오신 예수이지요.

새 언약은 살리는 언약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니 성령으로 오신 예수는 살리러 오신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육신으로 오신 예수는 성령으로 오신 예수의 모형이 됩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는 첫 아담과 같고 성령으로 오신 예수는 마지막 아담과 같은 것입니다.

첫 아담 안에서 모든 자들이 죽었듯이 육체로 오신 예수 안에서는 모두가 죽고!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 안에서는 모두가 살듯이 성령으로 오신 예수 안에서는 모두가 살아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육신으로 오신 예수는 성령으로 오실 예수의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형이라고 하는 것은 대표성으로서의 모형입니다.

죽이는 예수로서의 대표성과, 살리는 예수로서의 대표성입니다.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을 몽땅 안고 죽으시는 것으로서의 대표성이고!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여 자기 백성들을 몽땅 부활하시는 것으로서의 대표성입니다.

 

대표라고 하면 그 속에 속한 자들이 있을 것이지요.

대표란 많은 사람들을 으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대표 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럼 죽이는 예수 안에도 자기 백성이 있고, 살리는 예수 안에도 자기 백성이 있겠지요.

예수 안에는 수 많은 자기 백성들이 있어요.

겉으로는 예수님 한 분으로 보이지만 그 속을 탁 깨보면 자기 백성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요.

 

이렇게 되면 언약의 대상자가 예수님이기도 하고 자기 백성들이 되기도 하겠지요.

큰 의미에서는 언약의 대상자가 예수님 한 분이지만 작은 의미로는 우리들이 되어요.

그렇다면 언약의 대상도 두 가지 의미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일차적(一次的)으로는 예수님에게 적용을 하여야 하고,

이차적(二次的)으로는 우리 성도에게 적용하여야 해요.

우리와 예수님은 한 몸이기 때문에 동시에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을 아담과 예수님으로 살펴봅시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하였지요.

표상이란?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실체가 산 것이라고 한다면 그림자는 죽은 것이에요.

 

아담이 죽은 자의 조상이라고 한다면 장차 오실 자는 산 자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림자는 실체와 반대에요.

그럼 장차 오실 자는 아담의 일을 반전(反轉) 시키실 분이란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아담이 그림자로서 죽인 것을 장차 첫 아담의 실체로 오실 마지막 아담은 살리러 오신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담은 장차 오실 자의 일에 반대 되는 일을 하여야겠지요.

장차 오실 자는 실체로서 살리는 분으로 오시잖아요.

그럼 아담은 모형으로서 죽이는 일을 하여야겠지요.

 

아까 모형은 가짜라고 했잖아요.

가짜는 죽은 것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니 아담은 장차 오실 자의 모형으로서 가짜이고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이는 일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모든 자를 죽음으로 가두어야 해요.

그래야 실체로 오시는 예수님이 살려 내지요.

아담은 죽이는 조상으로 일을 하고, 예수님은 살리는 조상으로 일을 하세요.

 

그러니 아담은 죽이는 자의 조상으로 일을 하여야 해요.

왜냐하면! 장차 자신의 실체로 오실 분이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하시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장차 오실 분의 표상으로 모든 인간을 죽음에 가두는 일에 사용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죽고 사는 길을 알려 주셨어요.

특별히 선악과의 정보를 상세하게 알려 주십니다.

너 저것 먹으면 죽는다!

 

그런데 아담은 죽음이 무언인지를 몰라요.

죽음을 맞이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담은 죽음을 관념적으로 알고 있었던 겁니다.

죽음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어요.

 

무엇을 보면 알 수가 있는가 하면 아담은 하와가 뱀에게 꼬임을 당하여 선악과를 먹고 자기에게 주니까 주저함 없이 홀라당 먹어버렸어요.

만약에 죽음을 알았다고 한다면 하와에게도 신신당부를 하였어야 했고 설령 하와가 먹었다 하여도 자신은 먹지 말아야 했어요.

그런데 아담은 아무 주저함 없이 먹어 버립니다.

이는 죽음을 몰랐다는 뜻이에요.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것을 다 아시고 그렇게 하신 겁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죽지 않게 하고자 하셨다면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을 겁니다.

설령 만들었다 하여도 맛이 없어 보이도록 만들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악과를 보면 먹지 않고서는 못 배길 정도로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게 만드셨어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고 입에 살살 녹도록 만드셨어요.

 

상대적으로 생명과는 맛이 없어 보이게 만드셨어요.

그러니 먹으라고 하는 생명과는 안 먹고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은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셨는가 하면 모두가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먼저 죽는 언약이 주어지거든요.

자기 백성들이 먼저 비 거룩하고 흠 있는 모습으로 있어야 해요.

그래야 예수님이 자신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어지는 것은 새 언약이지요.

그럼 비거룩하고 흠 있는 것은 옛 언약이 되겠지요.

새 언약과 옛 언약은 서로를 드러내는 짝이니까요.

 

이건 선악과와 생명과가 짝인 것과 같아요.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죽은 것은 창세전 언약의 한 수순인 것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은 선악과를 두신 것은 창세전 언약을 위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죽이기 위해서 선악과를 만드셨고!

죽이기 위해서 뱀을 투입 시킨 것입니다.

왜? 죽입니까?

살리기 위해서에요.

 

왜? 살립니까?

이는 창세전 언약을 위한 것이고 살려 주신 분의 생명으로 살게 하기 위함이에요.

이걸 예수 안에서 산다고 해요.

 

그럼 죽은 자를 누가 살려 줍니까?마지막 아담으로서 오실 살려 주는 영으로 오시는 분이 살려 주시지요.

살려주는 영으로 오신 분이 누구인가요?

예수님이에요.

 

그럼 살리심을 받은 사람은 예수의 생명으로 살겠지요.

예수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어지겠지요.

창세전 언약이 이걸 겨냥하고 주어졌어요.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엡 1:3-10=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經綸)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눈여겨보아야 할 말씀이 “그리스도 안” 이라는 말이에요.

창세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 에서 택하셨다고 하지요.

“그리스도 안” 에서 하늘에 신령한 복을 준다고 하지요.

“그리스도 안” 에서 그 피로 구속을 받게 하였다고 하지요.

“그리스도 안” 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지요.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되게 하신다고 하잖아요.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복을 주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서게 하세요.

 

이게 창세전 언약이에요.

우리가 만들어지기 전에 세운 언약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이 언약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어요.

그러니 우리의 일생은 철저하게 이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가는 것으로 다스림 받게되는 것입니다.

 

이 창세전 언약은 귀에 딱지가 않도록 담아 두어야 할 말씀이에요.

우리가 사귐을 가지려면 이 창세전 언약을 알아야 해요.

우리는 이 창세전 언약을 증거하기 위해서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어요.

그래서 저는 시간 시간마다 창세전 언약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우리를 존재케 하는 근원(根源)이기 때문이에요.

창세전 언약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기 때문이에요.

이건 묻고 또 물어야 해요.

내 스스로에게 평생 묻고 또 물어야 할 질문이에요.

 

밥 먹으면서 묻고!

일하면서도 묻고!

아파도 묻고!

건강해도 물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지?

나는 왜? 살지?

내가 왜? 이런 일을 하여야 하지?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어떤 의미이지?

묻고 또 물어야 해요.

 

그럼 성령이 알려 주세요.

야~! 임마!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일어나는 일이야!

그러므로 내가 사나 죽으나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는 것이라고 알려 주세요.

 

살기 힘이 듭니까?

그럼 하나님께 물으세요.

하나님 왜? 내 인생이 이 모양 이 꼴입니까?

 

아프십니까?

그럼 하나님께 따지세요.

하나님 왜? 날 이렇게 아프게 합니까?

 

사업이 망했습니까?

그럼 하나님께 덤비세요.

하나님 왜? 내 사업이 망해야 합니까?

 

자식이 속을 썩입니까?

남편이나 아내가 속을 썩입니까?

이상한 일들이 발생을 합니까?

모두가 주께서 일으킨 사건이에요.

 

아니 하나님께서 내 전후(前後)를 살피시고 안수하셨다고 하잖아요.

멀리서도 나를 통촉하시고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신다고 하잖아요.

이런 말씀은 성경퀴즈 하려고 외우는 것이 아니에요.

살아서 우리의 심령 골수를 찔러 쪼개는 하나님 말씀이에요.

 

그럼 내게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다는 말이잖아요.

그러니 원망만 하지 말고 물으세요.

하나님 왜? 그러냐고!

왜? 날 가만 두지 않고 달달 볶아 대느냐고 따지세요!

 

하나님이 따지라고 하잖아요.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고 하잖아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변론하자고 하잖아요.

따져 보세요.

 

그럼 하나님이 친절한 금자씨처럼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알려 주세요.

왜? 하나님을 성경 책 속에 가두어 두십니까?

왜? 하나님을 뒷방 영감님처럼 없는 듯 취급을 하십니까?

 

하나님을 일하게 하세요.

아니지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배우세요.

하나님이 지금 나를 어떻게 간섭하고 있는지 아시란 말입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에 사용을 하십니다.

우리의 행복과 불행을 가지고서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사용을 하세요.

 

하나님은 빛도 짓고 어둠도 지었어요.

평안도 짓고 환란도 지었습니다.

이 두 가지로 자기 백성을 다루어 가세요.

 

내가 흥하는 것도 창세전 언약을 위한 것이고!

내가 쇠하는 것도 창세전 언약을 위한 것이고!

내가 사는 것도 창세전 언약을 위한 것이고!

내가 죽는 것도 창세전 언약을 위한 것이에요.

 

이렇게 산 사람이 바울이에요.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알았다고 하였어요.

내가 사는 것도 주를 위한 것이고 죽는 것도 주를 위한 것이라고 하였어요.

사나 죽으나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케 된다고 했어요.

 

창세전 언약이 그렇게 중요해요.

전 이걸 깨닫고 엉엉 울었어요.

아! 내가 이 시대 말에 태어난 것도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이구나!

 

하나님이 나를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그 늙으신 부모님 아래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구나!

아버지가 58세에 어머니가 47세에 저를 낳았어요.

그러니 전 없어야 할 자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이삭처럼 태어났어요.

왜? 날 나게 하셨을까?

목사가 되고 복음을 알고 나니 이해가 되더라고요.

 

아~ 모두가 창세전 언약 때문이구나!

내가 목사가 된 것도 창세전 언약을 위한 것이고!

지독한 율법주의자였던 저를 은혜 아래로 빼내시고 복음을 증거하게 된 것도 창세전 언약을 위한 것이고!

울산목양교회를 섬기게 하신 것도 창세전 언약 때문이구나!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니 인생살이가 가벼워져요.

조급해지지 않고 허~허~ 하면서 웃게 되어요.

물론 삶은 고달프고 아파요.

그것도 아주 많이!

하지만 왜? 이렇게 내 삶이 고달프고 아픈지를 알고 나니 그렇게 쫓기지 않게 되더란 말입니다.

 

누가 욕을 하면 아! 내가 까부니까 교만치 말라고 주께서 그렇게 하셨나 보다!

누가 위로하면 아! 내가 낙심하고 있으니 주께서 저 사람을 통해서 나를 위로케 하시는구나!

누구를 만나도 아! 내 가는 길에 길동무 하라고 붙여 주셨나 보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전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요.

하나님에게 시시콜콜하게 이야기해요.

많이 따져요.

 

누가 나를 욕을 하고 아프게 하면 하나님 저 사람이 날 아프게 한다고 일러바치고!

누가 저를 위로하면 하나님 저 분이 날 위로하니 저 사람에게 은혜 많이 주세요! 라고 해요.

이상한가요.

 

저는 저의 전후좌우(前後左右)를 두르시고 진치고 안수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요.

저를 찾아와 주시고 저를 만나 주신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하나님과 사귀고 있어요.

많은 산전수전(山戰水戰)을 겪으면서 이런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욥이 고난을 통해서 알아진 하나님이 바로 이런 하나님이었어요.

그 동안 하나님을 귀로만 들었는데 고난을 겪으면서 알게 된 하나님은 멀리 있는 하나님이 아니고 나의 삶 밑바탕에서부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욥은 고난 후에 내가 그동안 하나님을 귀로만 들었는데 이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바가 된다고 하였어요.

비로서 관념에 하나님이 실상으로 만나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그렇게 핍박하던 자들을 위하여 기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 믿음으로 살았던 믿음에 선진들이 세상을 초월하고 살 수 있었던 것도 모두가 자기 삶 속에서 동고동락(同苦同樂)하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고난 속에서도 믿음으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두가 주께서 이들을 간섭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간섭 당하고 사는 것을 일컬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산다고 해요.

이 모두가 예수그리스도가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감싸면 자기가 책임질 인생이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상대하지 않고 우리를 감싸고 계신 예수그리스도하고만 상대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우리를 대하신다는 말은 우리하고는 상대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보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예수만 보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나의 대표가 되어서 나를 책임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그리스도는 아담처럼 한 사람인 거에요.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아담을 일컬어 예수님의 표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아담과 다른 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인 거에요.

아담과 다른 또 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아담이 어떤 사건을 일으켰듯이 예수님에 의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알다시피 아담 한 사람으로서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죽음이 들어오게 되었잖아요.

그럼 예수님도 아담처럼 뭔가를 들어오게 하고 가지고 오실 것입니다.

아담의 반대 되는 것을 몰고 오고 가지고 오시겠지요.

예수님이 몰고 오고 가지고 온 것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17절에서 19절을 봅시다.

 

롬 5:17-19= “아담 한 사람의 범죄 때문에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왕노릇 하게 되었다면, 넘치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더 확실합니다. 18) 그러니 한 사람의 범죄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판정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으로 판정을 받을 것입니다.”

 

아담 한 사람이 죄와 죽음을 몰고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한 사람은 의와 생명을 몰고 왔습니다.

아담이 몰고 온 것과 정 반대의 것을 몰고 오셨어요.

의는 죄와 반대이고, 생명과 죽음은 반대에요.

 

그러니 아담은 죽이는 조상이었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아담이 죽여 놓은 자들을 살리는 조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살려주는 영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아담 안에 있는 자는 다 죽은 자가 되는데!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다 사는 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아담이 죽인 자들을 살려 내는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아담이 몰고 온 것과 예수님이 몰고 온 것이 무엇인지 우리 삶에 적용해 봅시다.

 

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한 사람의 범죄로 사망이 왔다고 하지요.

그러니 아담은 죽이는 것들을 몽땅 가지고 온 것입니다.

이름하여 마귀적인 것들이에요.

 

아담은 죽이는 것을 가지고 왔어요.

그래서 아담 안에 있는 자는 자신도 죽지만 남도 죽이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보세요.

십계명 속에는 아담이 가지고 온 것들이 가득 들어 있어요.

모두가 남을 헤치고 죽이는 것들이에요.

 

아담이 죄를 불러 왔고 죄가 사망을 몰고 왔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아담이 몰고 온 택배 속에는 죽이는 것들만 가득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 있는 자들에게서는 생명이 나오지 않고 죽음만 나오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육체의 소욕들이에요.

육체의 소욕은 죽이는 것들이에요.

그럼 육체의 소욕들이 어떤 것들인지 살펴봅시다.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갈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육체의 일은 현저(顯著)하니 라고 하지요.

이건 밝히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마치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나는 것과 같아요.

 

어떤 것들입니까?

죄는 항상 비 도덕과 비 윤리성을 뛰고 나타나요.

이는 죄가 남을 헤치고 자기 유익을 구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와 반대의 것들을 가지고 왔어요.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은 서로 상반된 것을 가지고 왔다고 했지요.

첫 아담은 죽이는 것을 가지고 왔는데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은 살리는 것을 가지고 왔어요.

 

그럼 예수님이 가지고 온 것이 어떤 것인지 살펴봅시다.

 

갈 5:22-25=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예수님이 가지고 온 것은 하늘에 생명이에요.

하늘에 생명 속에는 하늘에 갖가지 풍성한 은혜들이 담겨져 있어요.

이름하여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생명을 살리는 것들이에요.

육체의 소욕은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죽이는 것인데!

성령의 소욕은 남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는 것이에요.

육체의 소욕은 나를 위한 것이지만 성령의 소욕은 남을 위한 것이에요.

 

그러니 예수로 살아나서 그 속에 예수의 생명이 있는 성도들은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도록 간섭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 속에 예수의 생명이 없는 자들은 자기 맘대로 살도록 유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열매로 나무를 알라고 하셨어요.

아담 안에 있는 자는 죽이는 것들만 토해내고!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살리는 것을 토해내게 되어 있어요.

이는 그 안에 있는 것들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죄가 삶 속에서 비 도덕과 비윤리성을 띠고 있다면 의는 그 반대의 것을 띠고 있겠지요.

도덕과 윤리는 남을 위하여 사는 것이고!

비도덕과 비윤리는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이에요.

그러니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비도덕성과 비윤리성으로 살지만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도덕성과 윤리성을 지향(指向)하게 되어 있어요.

 

제가 지금 지향(指向)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성도 안에서 이러한 지향성(指向性)을 갖도록 하세요.

죄인이 지향하는 것과 반대로 지향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주께서 반(反) 아담적인 성향으로 살도록 간섭을 하신단 말입니다.

 

아담의 성향은 남을 해치고 죽이는 성향이에요.

그런데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은 아담의 반대 성향을 가지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는 아담의 반대 성향인 살리는 일을 하는 것으로 지향(指向)하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 아담의 성향을 좇아가면 죄라고 지적해요.

너 왜? 그리로 가느냐고 책망해요.

너 왜? 죽이는 일을 하느냐고 책망해요.

 

그럼 성도는 돌이킵니다.

물론 잠시 후면 육신의 본성이 또 그리로 지향하지만 말이에요.

그럼 성령이 또 책망합니다.

이게 성도가 육신으로 사는 한 평생 싸워야 하는 싸움이에요.

 

성도의 몸은 아담의 몸이에요.

그런데 성령이 반(反) 아담의 성향으로 살라고 해요.

여기에 필연적인 우리 안에서 두 싸움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우리 몸에서 아담의 성향이 나타나면 탄식이 나오고, 예수님의 성향이 나타나면 기뻐요.

 

우린 이 싸움에서 우리의 실존을 알게 됩니다.

우리 몸으로서는 성령의 소욕대로 살아낼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아담 안에서 태어난 이 몸뚱이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그래서 성도는 말씀 앞에서 상한 심령과 애통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함에도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에 감사가 나와요.

이 몸으로 사는 한 예수님의 피 뿌리심으로 용서받고 산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어요.

 

내가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용서 받음으로 살고 있음을 알게 되어요.

이 사실이 깨달아질 때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너무도 귀한 복음으로 들려지는 것입니다.

그 복음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시다.

 

하나님은 두 사람을 준비하셨습니다.

한 사람은 죽이는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살리는 사람입니다.

먼저 죽이는 사람을 주어서 모든 인간들을 죽음에 가두어버립니다.

그런데 나중에 살리는 분이 오셔서 죽음에 가두어진 자기 백성들을 살려내십니다.

 

우리는 죽음에 항아리 속에 있다가 생명의 항아리 속으로 옮겨졌습니다.

우리가 옮겨간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옮겨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자는 생명의 항아리로 옮겨 주신 주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제 항아리의 주인이 항아리 속에 있는 자들을 주인으로서 간섭을 하십니다.

 

가난케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십니다!

아프게도 하시고 싸매기도 하십니다!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십니다!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십니다!

 

가난하십니까? 주께서 간섭하셨습니다!

부하십니까? 주께서 간섭하셨습니다!

아프십니까? 주께서 간섭하셨습니다!

나으셨습니까? 주께서 간섭하셨습니다!

높아지셨습니까? 주께서 간섭하셨습니다!

낮아지셨습니까? 주께서 간섭하셨습니다!

잘 살고 있습니까? 주께서 간섭하셨습니다!

죽으십니까? 주께서 간섭하셨습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우리는 우리 맘대로 살 수 있는 인생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이렇게 서 있고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모두가 주께서 우리의 주인이 되셔서 간섭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우리의 주인으로 우리 삶을 간섭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의 주인으로 간섭하시기 때문에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바다와 같이 늘 크고 작은 파도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파도가 넘나듭니다.

 

개었다 흐렸다 합니다.

울 일과 웃을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삶은 롤러코스트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구원하신 주께서 우리를 책임지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식언치 않고 거짓말 하실 수 없는 분이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주께서 내가 너를 복 주고 반드시 복을 주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구원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우리를 악한 자의 입에서 건져 내시고 또한 반드시 천국에 넣어 주십니다.

이 약속이 믿어지는 은혜가 임하길 바라며 그 은혜로 세상을 담대하게 사시길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조상이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시작하셨으니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고 끝 날까지 지켜 주실 것을 믿고 그 믿음으로 감사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하늘빛사랑 blog https://blog.daum.net/day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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