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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35강. 무슨 말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롬 6:1-2)

by coroa 2022. 10. 7.

35강. 무슨 말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롬 6:1-2)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5강. 무슨 말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롬 6:1-2)

롬 6:1-2=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정낙원 목사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예수님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천국에 모습이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구원받은 성도가 어린 양에게 세세토록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어린 양에게 세세토록 찬양한다는 것은 천국에 모든 중심에는 어린 양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걸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떠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는지를 알 수가 있어집니다.

이 세상은 하늘로부터 나왔어요.

역사는 천국을 모형하여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의 이야기가 역사 속에서도 그대로 증거가 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의 존재 목적은 역사를 위함이 아니고 어린 양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드러내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만물이 그를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물이 그를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는 말은 역사의 존재 목적이 주(主) 되신 예수님을 위한 것이란 말입니다.

천국도 예수님을 위한 곳이고 역사 또한 예수님을 위한 곳입니다.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골 1:16-17=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만물의 창조 목적이 나옵니다.

만물을 누가 창조 했나요?

예수님이지요.

 

왜? 창조 했나요?

예수님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만물을 예수님을 위해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이 창조한 것들이 무엇이 있나요?

하늘과, 땅에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보좌와 주관과 정사와 권세들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하늘 위에 있는 것이나,

하늘 아래 있는 것이나,

모두가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늘을 천국이라 하고 하늘 아래를 세상이라고 합니다.

그럼 하늘 위에 있는 천사들이나 하늘 아래서 일하는 마귀도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지요.

이 세상나라의 권세나 주권도 모두가 예수님을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왜? 창조가 되었는가요?

예수님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세요.

 

무슨 일을 하는가 하면?

주와 그리스도가 되는 일을 하세요.

어떻게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는가 하면 자신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해 내서 천국으로 인도하심으로 하시고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은 심판하여 지옥으로 보내는 것으로 하세요.

 

빌립보서 2장을 봅시다.

 

빌 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이세요.

그런데 하나님과 동등 됨을 버리고 이 세상에 종으로 오셨어요.

종으로 오셔서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서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왜? 죽었습니까?

이는 죽는 것이 아버지와 약속이기도 하고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기꺼이 죽음으로 아버지께 복종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에 있는 자나, 땅에 있는 자나, 땅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라고 고백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는 천국에 있는 자를 말하고, 땅 아래 있는 자는 지옥에 있는 자를 말해요.

그럼 천국에 있는 자도 예수를 주라 시인하게 되고, 지옥에 있는 자도 예수를 주라 시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국백성과 지옥백성을 심판하여서 각자가 있어야 할 곳으로 정리정돈을 하신 겁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양과 염소를 구분 할 때 창세로부터 예비 된 너희 나라로 가라고 하지요.

이는 각 자가 갈 곳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말입니다.

각 자가 갈 곳을 이미 정하고 왔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각 자가 가야할 곳으로 분리하신 겁니다.

그러니 하늘 위에 있는 자와 땅 아래 있는 자들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主)라고 시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처럼 지옥에 간 부자가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라고 부르듯이 지옥에 간 자들도 예수를 주여 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에 간 성도에겐 구원자로서 주(主)이시고, 지옥에 간 자들에겐 심판주로서의 주(主)에요.

그래서 예수님을 “만유의 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국이나 지옥 모두가 예수님의 주권 안에 있어요.

예수님의 구역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는 일에 천사도 사용하시고 마귀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바로도 사용하시고, 모세도 사용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도 사용하시고, 이방 나라도 사용하시는 거에요.

교회도 사용하시고, 절간도 사용하시고!

목사도 사용하고, 스님도 사용하시고 있어요.

 

우린 모두가 이 세상으로 올 때 야곱과 에서처럼 각 자가 맡은 배역을 안고 왔어요.

각 자 맡은 배역으로 살다가 가게 됩니다.

각 자 예비 된 나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믿어지고 깨달아진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엄청난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되어요.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처럼 야! 은혜에 거하려면 죄를 더 짓자! 라는 망발을 하는 것입니다.

철딱서니 없이!

 

주와 그리스도란? 한 마디로 구원자이고 심판주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구원하시는 일을 하시고, 심판하는 일을 하신단 말입니다.

자기 백성에겐 구원주이고, 자기 백성 아닌 자에겐 심판주인 겁니다.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려면 그 파트너인 인간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위해서 있어야 하잖아요.

그럼 예수님이 누구를 어디서 구원을 합니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을 하시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이 구원자로 일을 하시기 위해서 먼저 자기 백성을 죄 아래 가두어 놓은 것입니다.

 

로마서 11장을 봅시다.

 

롬 11:32-36=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잘 보세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어디에 가두었지요?

어디에 가두었나요?

불순종 가운데 가두었습니다.

 

불순종이란? 죄에요.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 가두어 놓았어요.

죄에 가두어 놓았다는 말은 죄 아래서 종노릇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걸 죄의 종이라고 해요.

 

우린 죄를 못 이겨요.

죄 아래서 난 우리 몸은 죄의 소욕을 못 이겨요.

왜? 그런 줄 아세요.

하나님이 가두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싶어 해요?

성도들 안에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원함이 있어요.

하나님이 주셨어요.

 

원함을 주신 이유는 우리를 절망케 하기 위함이에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게 하기 위함이에요.

이 원함이 원함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원치 않음으로 나아가는 자신을 보게 만들어요.

그러니 원하면 원할수록 원할 수 없는 자기 자신에게 절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 왜? 안 되지!

그래서 우리는 말씀 앞에 서면 “주여 도와주세요!”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하게 되는 겁니다.

긍휼을 구하게 된단 말입니다.

 

신앙이 뭔 줄 아세요.

날마다 주여 도와주세요! 라고 하는 거에요.

이걸 신앙이라고 합니다.

 

신앙이란? 주의 도우심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거에요.

예수를 바라보라는 것은 내 꼬라지를 보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를 바라보지 않고 내 꼬라지를 보고 낙심을 해요.

우리는 우리 꼬라지에게 눈이 가 있는 한 우리 마음은 지옥이 되어요.

감사함을 놓쳐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았을 땐 바다도 걸었어요.

그런데 자기 꼬라지를 보는 순간 빠져 버려요.

동일한 환경인데도 예수를 보면 이겨도 예수를 보지 않으면 져요.

우리가 이기고 지는 것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고 예수에게 달렸어요.

 

마치 여호수아가 산 아래서 전쟁을 하는데 모세가 산 위에서 손을 들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지는 것과 같아요.

여호수아의 전쟁은 모세에게 달렸어요.

여호와의 전쟁은 땅에 결과로 주어지지 않고 하늘에 결과로 주어져요.

 

우리도 여호수아처럼 지상에서 영적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 예수가 보이면 죄와 사망 권세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예수가 안 보이면 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눈을 예수님에게로 돌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 하셨다는 것을 보게 하세요.

 

요한계시록을 보면 “내가 보니” “내가 또 보매” “또 보니” “보라” 는 말씀들이 각 장마다 수없이 나와요.

이건 하나님이 요한의 눈을 열어서 천국을 보게 해 주신 거에요.

 

요한이 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게 해 주셨어요.

천국은 우리가 보고 싶다고 해서 볼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보여 주셔야지만 볼 수가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사도 요한에게 천국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보게 해 주셔서 천국을 보았더니 거기에 어린 양이 이긴 자로 떡하니 서 있는 겁니다.

만왕의 왕으로서 말이에요.

 

사도 요한이 인류의 시작과 끝을 보았는데!

그런데 그 시작과 끝이 어린 양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에요.

만물이 어린 양에 지시로 움직이더란 말입니다.

 

어린 양이 무슨 일을 하는가 보니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고 지키고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자기의 의(義)에 옷을 입혀주고 있더란 말입니다.

 

사도요한이 너무도 감격하여서 그만 천사에게 절을 하고 맙니다.

그러자 천사들이 자기에게 절하지 말고 저기 보이는 어린 양에게 하라고 하는 거에요.

요한은 자기 꼬라지를 볼 겨를이 없었어요.

 

어린 양이 자기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구원이란? 어린 양의 피로서 깨끗함을 입는 것이구나! 를 알게 된 것이에요.

이 사실을 지상의 교회들에게 알려주려고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럼 지금도 사도 요한처럼 눈이 열리면 천국을 보게 되어요.

아니지요.

사도 요한이 본 천국을 그가 보낸 편지를 통해서 본 것처럼 믿어져요.

우린 사도 요한이 쓴 요한 계시록을 통해서 이 사실을 알고 믿고 있어요.

 

이게 믿어지는 사람들은 자기 꼬라지를 볼 겨를이 없어요.

어린 양의 피로서 우리 죄가 정결케 되었다는 것이 믿어진단 말이에요.

우린 그 믿음으로 사는 거에요.

 

사도 요한의 눈에 천국이 보이니까 자기가 지금 밧모 섬에 유배되어서 죽어간다는 사실이 작게 보이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보니 인간이 세상에서 죽네! 사네!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 거에요.

그러니 세상을 이기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도 이러한 것이 믿어지니까 빈부에 처해도 덤덤하고 풍부에 처해도 덤덤하게 세상의 가치를 초월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삼층천을 보고 나선 살아도 주를 위한 것이고 죽어도 주를 위한 것이라고 했어요.

 

한 마디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자신이 천국에 가는 것 하고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더란 것입니다.

핍박이나 환란이나 심지어 자기 죽음마저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주께 맡기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했던 겁니다.

지금도 천국이 믿어지는 사람은 사도 요한이나 바울처럼 살아요.

성도는 세상에서 사도 요한이나 바울처럼 살아가는 자들이에요.

 

우리가 지금 밧모섬에 살고 있어요.

밧모섬은 뱀이 우굴거리는 섬이라고 해요.

뱀은 마귀를 상징하잖아요.

 

밧모섬은 지옥이에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밧모섬이에요.

우리가 지금 지옥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옥에서 천국을 보게 하세요.

고난 속에서 은혜를 주세요.

죄 가운데 던져 놓고서 은혜를 주세요.

 

요한이 누구입니까?

주의 사랑하는 제자에요.

그런 그가 뱀이 우굴거리는 밧모 섬에 유배당해서 살고 있어요.

그런데 그곳에서 하늘이 열렸어요.

 

성도가 누구입니까?

요한처럼 주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에요.

우리도 마귀의 세상에 살고 있어요.

이 세상이 밧모섬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눈을 열어서 천국을 보게 하세요.

마음을 열어서 예수가 믿어지게 하신단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밧모섬과 같이 뱀이 우굴거리는 곳에서 살고 있어요.

뱀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뱀의 머리를 깨트린 예수님을 바라 볼 때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우리는 순종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순종 할 수 없는데 가두어 놓았기 때문이에요.

하나님께서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신 것은 다 뜻이 있어서 그래요.

 

그 뜻이 뭐라고 하는가요?

왜? 불 순종가운데 가두어 놓았다고 합니까?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라고 하잖아요.

예수를 바라보라는 거에요.

 

긍휼이 뭔가요?

불쌍히 여기는 거에요.

용서 해 주는 거에요.

 

구원이 무엇인줄 아세요?

용서 받는 거에요.

불쌍히 여김을 입는 거에요.

 

바울이 성령의 충만을 입고 로마서를 씁니다.

성령이 바울을 감동케 하여서 로마서를 쓰고 있어요.

성령께서 알려줍니다.

 

야~! 바울아 하나님이 너희들을 왜? 죄 아래 가두어 두었는지 아니!

그건 너희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보이고자 함이야!

“나는 이렇게 자비로운 분이다” 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란다!

그래서 너희들이 죄 아래서 태어났고 죄에게 종노릇하고 사는 거야!

 

이에 바울이 놀랍니다.

야! 누가 하나님의 이런 깊디 깊은 마음을 헤아릴 수가 있겠느냐!

도대체 누가 이걸 알 수가 있겠느냐!

그러니 우리가 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고서 긍휼을 베푸는 것을 다른 말로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죄를 가지고 은혜를 드러내는 일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에요.

그런데 이 은혜는 은혜의 나라에서는 드러낼 방법이 없어요.

은혜는 그와 반대 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이건 마치 흰색은 흰색으로 드러낼 수가 없고 검은색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 나라는 은혜의 나라에요.

은혜를 알려면 은혜와 반대되는 것에 있어야 알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은혜의 나라와 반대되는 죄의 나라를 만든 겁니다.

지난 시간에 천국을 위하여 지옥을 만들었다는 것을 살펴보았지요.

하나님은 빛을 알려주는데 어둠을 가지고 알려 주신다고 했지요.

 

이 역사 자체가 묵시를 드러내기 위하여 만들어졌어요.

묵시는 실상이고 역사는 허상이에요.

그림자란 말이에요.

 

그림자에겐 생명이 없어요.

그림자는 실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해요.

그럼 우리는 역사라는 그림자에서 천국이라는 실상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묵시가 은혜의 나라에요.

그럼 이 은혜를 설명하려면 은혜와 반대 되는 것이 있어야 해요.

은혜의 반대가 죄에요.

이 세상은 죄 아래 있잖아요.

그러니 죄 아래서 은혜를 보아야 한단 말입니다.

 

이 세상이 지옥이에요.

천국을 알려 주려고 지옥을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라는 지옥을 가지고 묵시의 나라인 천국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생명인 영생을 역사에 속한 죽음을 가지고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복을 알려면 저주를 알아야 해요.

복은 저주를 통해서 드러나요.

복과 저주는 쌍둥이에요.

어떤 쌍둥인가 하면 서로를 드러내 주는 쌍둥이에요.

실상과 그림자로서 쌍둥이에요.

 

그러니 우리는 죄의 나라에서 은혜의 나라를 배우는 거에요.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알게 되는 겁니다.

보이는 이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담고 있는 그릇과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야 해요.

육에 속한 사람은 보이는 것만 보지만 영에 속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요.

그러니 바울의 고백처럼 죄 아래서 은혜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하지요.

이는 율법이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율법을 보아서는 안 되고 율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단 말입니다.

즉 율법을 통해서 은혜를 보아야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놓았어요.

살리기 위해서 죽음에 던져놓았어요.

생명과를 주시기 위해서 선악과를 먹고 죽게 하신 겁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이게 창세전 언약이에요.

창세전 언약이 뭔가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거잖아요.

죄에서 구원을 하려면 먼저 죄에 가두어져 있어야 하잖아요.

 

이 죄와 사망에 가두는 일을 누군가가 해 주어야 하잖아요.

여기에 마귀가 동원이 되었어요.

마귀가 아담을 선악과로 죽여 놓았어요.

 

안 죽으면 안 되어요.

그럼 살아남이 없어요.

영생은 죽음에서 주어지는 것이에요.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서 죽이잖아요.

이걸 사랑이라고 해요.

그래서 그냥 나사로라 하지 않고 사랑하는 나사로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나사로를 사랑해서 죽음에 넘겼어요.

그리고 살려 냈어요.

 

우리도 사랑하는 나사로들이에요.

시편 기자는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 라고 했어요.

여기서 잠이란 죽음을 말해요.

그러므로 주 안에서 죽은 자는 복 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보신다고 하는 거에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죽음을 맛보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지옥 같은 세상에 보낸 것입니다.

우리는 지옥에서 천국을 보게 되어요.

우리는 지옥 같은 세상에서 주여 우리를 구원해 주세요! 라고 해야 한단 말입니다.

 

자 보세요.

묵시(黙示)가 있어요.

이 묵시를 일컬어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라 라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보이는 것을 상대하는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나라의 상대적인 나라를 만드셨는데 이 나라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보이는 나라에요.

보이지 않는 나라란? 없다는 말이 아니고 이 세상과 다른 나라란 말이에요.

 

그러니 보이는 나라는 보이지 않는 나라의 그림자와 같아요.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서 보이는 나라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역사에 속한 것은 전부 실상을 보여주기 위한 허상들인 거에요.

 

저와 여러분도 허상이에요.

우리의 실상이 하늘에 있어요.

이걸 바울이 보았어요.

 

바울이 삼층천에 가 보니까 거기에 진짜 바울이 있는 것을 보았어요.

사도 요한도 보았어요.

자기의 실상을 본 겁니다.

바울이 이걸 보고 나서 하나님에게 하나님 빨리 날 좀 데리고 가 주세요 라고 했어요.

그러니 역사에 있는 바울은 묵시에 있는 바울을 보고 있는 겁니다.

 

죄와 은혜도 이와 같아요.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 죄가 있는 것입니다.

은혜와 죄는 서로를 드러내는 짝이에요.

그래서 바울이 죄가 더한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오해하여서 그럼 은혜를 더 드러내기 위해서라면 우리가 죄를 더 지어도 되겠네! 라고 하는 자들이 일어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아니~ 바울은 죄 아래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려고 하는데 이 놈들은 야~ 죄 더 짓자! 그러고 있어요.

 

이건 핀트가 엇 나갔어요.

사태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죄에요.

 

오늘 죄가 어떤 식으로 발호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어쩌면 우리가 평생 싸워야 하는 복음에 대한 사고의 틀이에요.

마귀는 항상 이러한 틀을 가지고 우리 안에 비집고 들어와요.

그럼 마귀가 어떻게 비집고 들어오는지 살펴봅시다.

 

사도 바울은 지금 예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하잖아요.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진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의롭게 된 것이라고 초지일관 증거하고 있어요.

 

우리가 엄청난 혜택을 입게 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보라는 겁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난 죄인이다!

이런 죄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왔다!

이를 “죄가 더한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쳤다” 고 합니다.

 

바울은 지금 죄로 인하여 마땅히 저주받아야 할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셨다고 말해주고 있어요.

이렇게 죄가 더 한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증거해 주고 있어요.

 

그럼 아이고~ 하나님 우째 이런 은혜가 다 있습니까!

정말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반응이 나와야 하잖아요.

 

그런데 인간들이 한다는 말이 그럼 우리 맘대로 살아도 되겠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더 빛이 날 것이 아니냐!

우리 죄를 더 지읍시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예수님이 이런 일을 하셨습니다!” 라고 말을 하는데!

이 웬수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가지고 자기들이 어떻게 이용할까 궁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죄에요.

죄는 항상 예수를 이용하여서 자기 사욕을 챙기도록 역사를 해요.

 

바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는데 이 원수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에는 관심도 없고 나 죄짓고 살아도 되겠네! 라고 한단 말입니다.

자기들 쾌락을 쫓아가고 있단 말입니다.

 

이건 마치 부모가 뼈 빠지게 돈을 벌어서 학비를 해 주었더니 공부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술 처먹고 허랑방탕하게 사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은 지금 우리를 죄에서 빼내고자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었는데 우리는 그 피를 이용해서 야~ 죄 더 짓고 살자! 그러고 있어요.

 

이게 죄에요.

죄가 뭐냐?

예수를 안 보고 자기 살 궁리를 하는 것입니다.

이걸 어찌 복음을 안다고 할 수가 있겠어요.

그래서 바울은 그럴 수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상고할 말씀이 뭔가요?

은혜를 더 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이에 바울은 무슨 소리를 하느냐!

절대로 그럴 수 없다! 라는 이야기잖아요.

 

이걸 우리 식으로 말하면 야~ 예수님이 우리 죄를 용서 해 주셨으니까 이제부터 죄를 마음껏 지어도 괜찮겠네!

이제부터 막 살아도 되겠네! 라는 말입니다.

그러자 바울이 미친 소리 하지 말라고 합니다.

 

복음을 전해 보면 꼭 이런 말들을 하는 자들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하여서는 우리가 할 일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라고 하면!

 

그럼 우리는 아무 것도 안 해도 되겠네요!

예수님이 다 했다고 한다면 우리가 할 것이 없잖아요!

그러면서 안 해요.

 

교회에 다닐 필요도 없고!

전도 할 필요도 없고!

헌금도 할 필요가 없고!

막 살아도 되겠네! 라고 해요.

 

그래서 실제로 막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무 것도 안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복음을 알기 때문에 이젠 교회에 갈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실제로 교회에 안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설령 교회에 나와도 아무 것도 안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봉사도 안 하고, 헌금도 안 하고, 기도도 안 하고, 성경도 안 보아요.

이젠 할 필요가 없다는 거에요.

 

그럼 뭐하느냐 하면 놀아요.

육신의 쾌락을 쫓아다녀요.

여행 다니고, 등산 다니고, 놀러 다니고 빈둥거려요.

이방인들과 똑 같은 사고로 살아가요.

한마디로 자기 몸뚱이 편한 대로 행하고 있어요.

 

복음을 모를 땐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사람도 복음을 알고 난 후에는 안 가요.

교회 갈 필요가 없다고 해요.

복음을 알면 더 가야 하잖아요.

그런데 안 가요.

 

복음 핑계대고 농땡이 쳐요.

복음 전하는 교회마다 이런 자들이 꼭 끼어 있어요.

교회나 사람에게 거치는 자로 있어요.

 

이게 모두가 복음을 곡해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복음 속에 있는 내용은 먹지 않고 복음이라는 껍데기만 지식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복음 안다고 하면서 복음 정신에 반하는 복음을 자기 유익으로 이용하고 있는 거에요.

전 개인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예수 안에 있는 자가 아니라고 보고 싶어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그러잖아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하잖아요.

무슨 그런 망발을 하느냐 라고 하잖아요.

 

어떻게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느냐! 라고 하고 있잖아요.

바울의 “그럴 수 없느니라” 라는 말은 복음 속에는 그러한 것이 들어 있지 않다는 말이에요.

복음 속에는 내 맘대로 사는 것이 없어요.

그건 복음을 오해하였기 때문이에요.

 

복음이 떨어지면 반드시 두 반응이 일어나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과 두 부류의 사람으로서 나타나는 반응이 있어요.

 

먼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봅시다.

 

우리 안에 옛 사람이 있어요.

우리 옛 사람은 복음을 들으면 자기 유리한 쪽으로 끌어 당겨요.

육체의 소욕을 쫓는 대로 끌어 당겨요.

 

“이젠 율법으로부터 자유 하였으니 내 맘대로 살아도 되겠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여도 되겠네!” 라고 반응해요.

이러면 복음을 자기 사욕을 쫓는데 이용하게 되어요.

 

그런데 우리 안에 새 사람이 또 가만있지 않아요.

새 사람이 성령의 소욕으로 끌어 당겨요.

“무슨 말을 하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라고 하는 반응으로 나타나요.

 

복음이 떨어지면 우리 안에 두 법이 충돌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내 맘대로 살고자 하는 법과 그래선 안 된다는 법이 충돌을 해요.

그럼 우리는 두 사이에 끼어서 탄식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이 탄식을 하잖아요.

 

성도는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늘 이 두 싸움을 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말씀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발당하게 되어 있어요.

그리하여 상한 심령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상한 심령이 우리로 하여금 주의 긍휼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 라고 하면서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진 구원에 더욱 더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번엔 복음이 증거 되는 현장에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타나는 두 반응을 봅시다.

 

복음을 증거 해 보면 복음에 합(合)한 자와, 복음에 반(反)하는 자들로 나타나요.

이는 복음이 예수에게 속한 자와 속하지 않은 자를 갈라내기 때문이에요.

복음이 예수에게 속한 자는 복음 안으로 끌어당기고, 예수에게 속하지 않는 자는 복음 바깥으로 밀어내요.

 

그럼 반응이 달리 나타납니다.

예수에게 속한 자는 복음에 합한 모습으로서 살고자 하는 경향성이 나타나고,

예수에게 속하지 않는 자는 복음에 반하는 모습으로서 살고자 하는 경향성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건 자신의 생명에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 생명의 지향성을 말해요.

자기 안에 속성을 드러낸단 말입니다.

예수에게 속한 자는 예수의 속성을 드러내고, 마귀에 속한 자는 마귀의 속성을 드러내요.

 

창세기 1장을 보면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혼돈과 공허한 세상에 하나님 말씀이 떨어지자 빛과 어둠으로 갈라지는 일들이 일어나지요.

말씀이 떨어지기 전에는 모두가 하나로 있었어요.

그런데 말씀이 떨어지자 둘로 갈라지기 시작을 합니다.

 

이는 결국 이 세상에는 두 부류가 섞여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말씀이신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두 부류로 갈라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심판자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자 마치 홍해 바다가 두 쪽으로 갈라지듯이 사람들도 두 부류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자들과 배척하는 자들로 말이에요.

 

이러한 것이 복음이 증거되는 현장에서도 일어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와 거부하는 자들로 나타납니다.

복음에 합한 자와 복음에 반하는 자들로 구분이 됩니다.

 

복음에 합한 자들은 복음이 함유하고 있는 모습으로서의 삶이 나타나고!

복음에 반하는 자들은 복음이 함유한 정신과 상관없는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즉 복음에 대한 반응이 다르게 나타난단 말입니다.

 

한 쪽은 복음에 자기 자신이 함몰 당하는 모습으로 반응을 나타내고!

다른 한 쪽에서는 복음을 자기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이 모두가 복음이 자기 정체성을 폭로하게 만드는 것이에요.

 

바울이 1절과 15절에서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럴 수 없느니라” 고 말하는 것은 강하게 강조하는 말이에요.

 

야~! 이 미친 놈아!

넌 죄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잖아!

그럼 은혜의 종으로 살고자 해야지!

어떻게 죄의 종이 되어서 죄를 더 짓자! 라고 말을 할 수가 있느냐! 에요.

 

이건 우리가 죄를 안 짓는다는 말이 아니에요.

죄 짓지 말라는 소리도 아니에요.

우리의 신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정체성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에요.

너희가 어떤 자들인지 아느냐! 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은혜 아래 있어요.

의(義)에 종이에요.

이건 우리의 영역이 이동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의(義)에 동네에 와 있어요.

의(義)에 동네에서 어떻게 죄를 짓자 그럴 수 있느냐! 에요.

 

쉬운 말로 말할게요.

예수님이 우리더러 죄 지어도 괜찮게 해 주려고 십자가에 죽은 것이 아니에요.

물론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죄 지어도 용서를 받아요.

정죄당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우리 맘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은 우리 맘대로 죄 지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니에요.

이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셔야 해요.

 

오늘 분문을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의 죽음을 옳게 안다고 하면 어떻게 죄 지어도 되겠네! 라는 말을 할 수가 있느냐! 에요.

어떻게 복음 안다고 하면서 막 살아도 되겠네! 라고 하느냐 에요.

 

복음을 받은 성도는 죄를 멀리하고자 하는 경향성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이건 죄를 안 짓는다는 말이 아니에요.

죄에 대한 반응을 말해요.

복음이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한 반응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죄는 죄에 대한 반응이 있고, 복음은 복음에 대한 반응이 있어요.

죄에 대한 반응은 육신의 소욕을 멀리하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복음에 대한 반응은 성령의 소욕을 좇아가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나요.

 

복음을 받으면 한마디로 우리가 옛날에 예수를 모를 때 살던 방식으로서의 삶을 멀리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난단 말입니다.

 

“죄에서 자유케 되었다” 라는 말은 우리 맘대로 살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런데 육에 속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우리를 자유케 해 주셨다고 하니까 우리 맘대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을 해요.

 

자유를 내 맘대로 사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유를 우리 맘대로 사는 것으로 말하지 않아요.

도리어 이와 반대로 말하고 있어요.

예수님에게 붙잡혀 사는 것으로 말하고 있어요.

 

성경은 우리 인간을 종이라고 해요.

마귀의 종이든 예수의 종이든 우리는 종에 신분을 벗어 날 수가 없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인간의 창조 목적이 예수 안에 복속 되는 존재로 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우린 죄 아래서 태어납니다.

이걸 죄의 종이라고 해요.

그러다가 예수님에 의해서 죄에서 해방이 됩니다.

 

어디로 해방이 되는가 하면 의(義)에 종으로 해방이 되었어요.

쉬운 말로 마귀에게 머슴 노릇 하던 자를 예수님이 사 온 겁니다.

이제 예수님의 머슴이 된 것입니다.

이걸 의(義)에 종이라고 해요.

전에는 죄에게 종 노릇 했는데, 이제는 의(義)에게 종노릇하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자유란? 내 자유가 차압당하는 것이에요.

내 맘대로 살거야? 가 차압을 당해요.

너 왜 니 맘대로 살어!

예수의 종으로 살아야지! 그래요.

 

내 맘대로 살거야! 하는 것은 내가 주인이란 말이에요.

성도는 내가 없어요.

예수 안에서 나에요.

그러니 내가 아니라 예수님의 것으로 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내 맘대로 살거야 가 성립이 되지 않아요.

내 맘대로 살고자 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태클을 걸어요.

 

그러니 진짜 구원을 받아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내 맘대로 살거야 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내 맘대로 살거야 라고 하는 자는 예수 밖에 있는 자에요.

이런 사람은 복음을 지식으로 알고 있는 자라고 밖에 볼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복음에 반하는 내 맘대로 살거야 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것입니다.

 

우린 원래 죄의 종이었어요.

마귀의 종이었다구요.

그런데 예수님이 마귀로부터 빼내 주셨어요.

죄로부터 자유케 해 주셨어요.

 

누가 그랬나요?

예수님이 그랬어요!

어떻게요?

자기 죽음으로 그랬어요!

 

마귀에게 있던 자를 예수 안으로 빼내 주셨어요.

죄에서 의(義)로 불러내 주셨어요.

전에는 죄의 종이었는데 이제는 의(義)에 종이 된 것입니다.

 

그럼 이젠 예수 안에서 의(義)에 종으로 살고자 하는 경향성이 일어난단 말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간섭을 하세요.

그래서 죄의 종에서 의(義)에 종으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과거엔 마귀 아래서 죄의 종으로 살았는데!

이제는 예수 아래서 의(義)에 종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죄 아래 있을 때에는 마귀가 죄의 종으로 살라고 간섭을 했다고 하면, 의(義) 아래 있으면 성령이 의(義)에 종으로 살라고 간섭을 하세요.

 

우리는 종이에요.

죄(罪)의 종이든지!

의(義)에 종이든지!

 

인간은 종으로 태어난 자들이에요.

마귀 아래 있어도 종이고, 예수 안에 있어도 종이에요.

이건 우리는 어디에 있어도 종이란 말입니다.

 

종이란? 주인의 간섭을 받는단 말입니다.

독자적으로 살지 않고 주인의 권세 아래서 산다는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마귀의 권세 아래 살든지 예수님의 권세 아래 살든지 둘 중에 하나에요.

이걸 아담 안이냐! 예수 안이냐! 라고 합니다.

 

그럼 죄의 종으로 사는 것과 의(義)에 종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겠지요.

죄의 종으로 사는 것과 의(義)에 종으로 사는 것과, 죄 아래 거하는 것과 은혜 아래 거하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영적인 의미와 육적인 의미가 있어요.

 

먼저 영적인 의미부터 살펴봅니다.

 

갈라디아서 5장을 봅시다.

전체를 다 보아야 하는데 먼저 전체 중에서 앞 부분을 먼저 봅니다.

뒷 부분은 이어서 볼게요.

 

갈 5:1-12=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7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8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

 

잘 보세요.

1절에서 12절까지는 영적인 자유를 말하고 있어요.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고 하지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디에서 해방 시켜주셨습니까?

율법으로부터 해방 시켜 주셨지요.

 

그래서 2절에서 12절까지 율법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1절에서 말하는 자유는 율법으로의 자유에요.

율법 아래서 은혜 아래로 불러주신 것을 말해요.

 

예전에는 율법 신앙에 가두어져서 종노릇했어요.

율법 신앙이란?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려고 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여기에 가두어지면 자기 행함으로부터 벗어 날 수가 없어요.

 

율법 아래서는 내 행함으로 신앙을 가늠 당했어요.

내가 율법을 지키면 신앙 있음이 되고 안 지키면 신앙 없음이 되었어요.

내가 신앙 있음이 되려면 열심히 율법을 지켜야 했어요.

안 지키면 대번에 너 죄인이지 라고 참소가 들어와요.

그러니 율법 아래 있으면 늘 자기 행함에 의하여 울다가 웃다가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법 아래서 은혜 아래로 빼내 주셨어요.

내가 내 행위로 의로움을 지켜내는 곳에서 내 행위와 상관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곳으로 빼내심을 입었어요.

 

이젠 내 행위로 인한 정죄를 당하지 않게 되었어요.

은혜 아래서는 내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이 보존이 되어요.

내가 말씀대로 살든 안 살든 상관없이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이 유지 되어요.

 

우린 율법 아래서 은혜의 영역으로 이동이 되었어요.

그러니 이젠 율법대로 살았느냐 안 살았느냐 라는 것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는 종에 멍에를 매지 말라”고 합니다.

종에 멍에에 매이지 말란 말은 “율법에 매이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게 영적 자유에요.

영적 자유는 우리의 존재론적(存在論的) 자유에요.

마귀에게서 예수 안으로 옮겨진 것이므로 이젠 마귀로부터의 자유가 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어요.

성령이 그 안에 거하는 성도는 이 자유함으로 살아요.

 

마귀가 너 왜?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아! 라고 하여도 하나님은 그걸 가지고 우리를 너 왜? 말씀 지키지 않았어! 라고 정죄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지옥가고 천국가는 정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해결을 하셨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해결을 하시고 우리는 예수 안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예수 안은 법이 활동하지 못해요.

예수 안에서는 법은 죽은 거에요.

오직 은혜만 있어요.

그래서 예수 안에는 은혜가 왕 노릇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우리의 왕이에요.

마귀가 법을 들고 와도 은혜가 덮어 버려요.

그래서 성도는 더 이상 행위로 인하여 정죄함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정죄함은 의(義)에 관한 정죄함이에요.

 

율법에서 은혜 안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로부터의 자유케 된 것입니다.

이젠 하나님 말씀을 안 지킨다고 지옥 가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안 살았다고 해서 지옥 보낼 일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율법에 요구를 다 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증서를 다 도말하였다”고 합니다.

의문에 쓴 증서란? 율법에 요구를 말해요.

그러니 이제는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진다고 하는 식의 신앙을 버리라는 거에요.

만약에 “행함으로 의로워지려고 하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 라고 합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처음엔 바울의 이러한 십자가 복음을 듣고 은혜 가운데서 살았어요.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이 출몰을 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는 일을 하였어요.

어떻게 가리는가 하면 예수도 믿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예수만 믿어서는 안 되고 할례도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꼭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과 같아요.

 

여기에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바울은 내가 만약에 이런 것을 말했으면 율법주의자들인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단호하게 의(義)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지금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져야 한다는 그 사고를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義)에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가 할 일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 것하고, 의롭게 사는 것 하고는 다른 문제에요.

의롭다 인정을 받는 것은 법적인 것으로 존재론적인 문제라고 한다면, 의롭게 사는 것은 의롭다 인정을 받은 자로서 살아가는 삶에 문제에요.

비유적으로 말하면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 것은 국적(國籍)의 문제라고 한다면, 의롭게 사는 것은 국민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말해요.

 

천국 백성이 되는 길과 천국백성으로서의 삶은 달라요.

지금 바울은 1절에서 12절까지 천국 백성이 어떻게 되느냐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천국백성이 어떻게 되느냐? 라는 말이 어떻게 의롭게 되느냐 라는 말과 같아요.

 

유대교의 거짓 선지자들은 예수도 믿고 율법을 지켜야 의로워진다고 하니까!

바울은 무슨 말을 하느냐!

의로워지는 것은 예수를 믿음으로서만 주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의(義)는 예수를 믿음으로서 완벽하게 주어지는 것이므로 예수 믿음에다가 율법을 지켜서 보탤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율법을 지켜서 의(義)를 추가 한다고 하면 그것은 행위 구원이 되고 은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뭘 하여서 의롭게 된다고 하면 예수님이 헛 죽은 것이 되고 말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 아니고 모자람이 되고 말아요.

그러나 분명하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공표하셨어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케 하심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음을 확증시켜 주셨어요.

 

그러니 예수 믿음에다 율법을 지켜야 온전한 구원이 된다고 하는 것은 비 복음인 것입니다.

예수 믿음에다 율법을 지켜야 온전한 구원이 된다고 하는 것은 요즘 식으로 예수도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온전해 진다고 하는 것과 같아요.

 

온전이란? 우리의 행실에 대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온전하신 분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해요.

온전하신 분은 예수님이에요.

그러니 온전하라는 말은 예수 안에 거하라는 말이에요.

우리보고 착하게 살란 말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은 온전을 우리의 행위 차원으로 이해하고 있어요

그러니 자신을 갈고 닦는 일에 치중하는 것입니다.

고작하여 말씀대로 살고 열심과 충성을 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결국 율법 신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이 이러한 갈라디안식 신앙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려는 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했어요.

이런 말을 하는 자는 자신을 비롯해서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으라고 했어요.

 

바울은 지금 성도는 정죄 받지 않으니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도리어 그 반대에요.

바울은 지금 인간의 행함에서 의(義)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義) 차원에서 말하는 거에요.

 

그러자 어떤 이들이 바울의 복음을 곡해하여 그럼 막 살아도 되겠네! 라고 하면서 자기 맘대로 사는 자들이 일어나기 시작을 합니다.

그럼 말씀대로 살 필요가 없네! 라고 하면서 무 율법주의자들이 일어나기 시작을 한 거에요.

 

이에 바울은 13절부터 단호하게 말합니다.

 

갈 5:13-25=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13절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고 하지요.

 

무슨 말인가요?

자유한 자가 되었지만 그 자유함이 육체의 소욕을 쫓아가는 자유가 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럼 어디로 향하는 자유가 되어야 하는가 하면 도리어 사랑으로 종 노릇하는 자유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자유가 되었다고 해서 내 육신을 위하여 내 맘대로 막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에요.

 

우리가 막 살아도 되겠네!

내 맘대로 살아도 되겠네!

죄 지어도 되겠네! 라고 하는 그 말의 바탕에는 육체의 소욕대로 살아도 되겠네! 라는 것이 깔려져 있어요.

 

그래서 바울은 그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한 자가 되었다고 해서 육신이 이끄는대로 살아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 몸을 가지고 뭔가 하실 일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13절부터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이 뭔가요?

한마디로 하면 육신의 쾌락이고 방탕과 방종이에요.

 

바울은 이걸 그리스도 밖의 이방인의 삶이라고 해요.

그러니 율법의 정죄함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해서 우리 몸을 육체의 소욕대로 사는데 사용하지 말고 성령의 소욕으로 사는데 사용하라고 합니다.

 

1절부터 12절까지가 법으로부터 벗어나 은혜 아래 있는 영적인 자유를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13절부터는 우리 몸으로 예수의 종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자유라고 해요.

 

영적인 자유란? 율법의 참소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라고 한다면!

육적인 자유란? 육체의 소욕으로부터의 벗어나 성령의 소욕으로 살아가는 자유를 말해요.

잘 이해하세요.

 

그럼 육적인 자유에 의미의 살펴봅시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자기 안에 두 법이 있다고 하지요.

한 법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법이고!

다른 한 법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치 말고 자기 맘대로 살게 하는 법이에요.

 

두 법을 편의상 두 주인이라고 합시다.

우리 몸은 두 주인이 있어요.

예전엔 마귀가 홀로 주인으로 있었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새로운 주인으로 들어 오셨어요.

 

이걸 제가 예전에 비유적으로 악성 바이러스에 걸린 컴퓨터로 이야기 했습니다.

컴퓨터가 공장에서 출하(出荷) 될 때는 바이러스가 없이 출하가 되었어요.

그러니 잘 돌아갔어요.

 

그런데 어느 날 컴퓨터 안에 악성 바이러스가 심겨졌어요.

이 놈이 자꾸만 기존에 프로그램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버벅 거리기 시작을 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컴퓨터가 움직이지 않아요.

바이러스가 내가 원치 않는 사건들을 컴퓨터에서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에게 적용합니다.

우린 죄 아래서 태어났어요.

마치 컴퓨터가 공장에서 출하하듯이 우리 몸은 죄 라는 공장에서 출하가 되었어요.

마귀 아래서 출생을 하면서 죄 짓는 일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잘 살았어요.

우리 맘대로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예수라는 분이 우리 몸에 들어오셨어요.

마치 컴퓨터에 악성 바이러스처럼 말이에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가 그동안 우리 맘대로 살던 것으로부터 태클을 거는 겁니다.

자꾸만 충돌을 일으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전에 죄 짓고 살아도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고 난 후로부터는 우리 맘대로 살지 못하게 간섭을 하면서 트러블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걸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싸운다고 해요.

 

전에는 육체가 이끄는대로 살아도 전혀 부담이 없었는데 이젠 찜찜 한단 말이에요.

성령이 찜찜하게 하세요.

예를 들어서 예전엔 육신의 쾌락을 즐기는데 전혀 부담이 없었는데 어느 때부터 성령이 우리 안에서 그래 재미있냐!

죄 짓는게 그렇게 좋냐!

그런단 말이에요.

 

꼭 시어머니처럼 잔소리 한단 말이에요.

이젠 재미가 없는 거에요.

옛날처럼 재미도 없고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소욕대로 살고자 하지 않으려는 지향성이 생긴단 말입니다.

육신의 소욕대로 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고 이를 멀리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단 말이에요.

그래서 안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간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컴퓨터가 바이러스로 인하여 이상 작동을 일으키듯이 우리도 성령이 이상 작동을 일으켜요.

그럼 우리 몸에서 예전에 안하던 짓들을 하게 되어요.

이름하여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몸은 두 법이 싸우는 전쟁터에요.

두 주인이 우리 몸을 가지고 자신의 그림을 그려내요.

우리 몸은 도화지에요.

 

죄(罪)에 그림을 그려내든지 의(義)에 그림을 그려내든지 해요.

죄가 그려내는 그림은 몸에 사욕을 쫓아가는 그림을 그리고!

의(義)가 그려내는 그림은 몸에 사욕을 금지하는 식으로 그려요.

 

이걸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싸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겠지요.

 

먼저 육체의 소욕을 살펴봅시다.

 

우린 원래 죄 아래서 났어요.

죄 아래서 난 자에게는 성령의 소욕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죄 아래 있을 땐 육체가 이끄는 대로 살았어요.

전혀 거리낌 없이 말이에요.

 

이걸 죄의 종이라고 합니다.

죄가 우리 몸을 가지고 죄를 발현(發現)시켰어요.

죄가 발현 시킨 현상들이 바로 육체의 소욕들이에요.

육체의 소욕에 모습을 19-21절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갈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육체의 일은 현저(顯著)하니 라고 하지요.

현저(顯著) 하니 라는 말은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마치 나무에서 열매가 열리듯이 육체의 열매들이 분명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한 마디로 말하면 내 맘대로 사는 거에요.

내 유익을 위해서 남을 헤치면서 사는 것이에요.

죄는 항상 내 몸 중심으로 움직여요.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헤치는 모습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마귀 아래서 죄의 종으로 살 때는 내 맘대로 사는 것이 허락이 되었어요.

죄가 우리 몸을 가지고 자기 사욕을 쫓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이 습성이 우리 몸에 배여 있어요.

그래서 우린 예수를 믿어도 우리 맘대로 살고자 하는 본성이 수시로 일어나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 사람이 완전히 변한다고 해요.

죄 안 짓는다고 해요.

제가 예전에 이런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어요.

전화도 받았구요.

 

이 사람들은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이들은 죄를 윤리 도덕으로 이해하는 거에요.

이들이 죄 안 짓고 산다는 말은 자기들은 윤리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산다는 말이에요.

깨끗하다고 하여도 기껏하여서 겉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에요.

 

이건 선악의 법 아래서의 죄관이에요.

이런 죄관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죄관이었어요.

인간의 행함을 기준으로 하는 죄관이에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죄관은 인간의 행동을 가지고 논하지 않아요.

윤리 도덕으로 판단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인간 자체를 죄인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죄라고 해요.

인간이 선이라고 내어 놓는 것도 하나님 앞에선 죄이고 악이라고 내어 놓는 것도 죄에요.

 

하지만 이들은 인간의 행함 속에서 선과 악을 구분해요.

그래서 선을 장려하고 악을 억제 시키는 겁니다.

이에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이 장려하는 선을 행하면 나는 죄 안 짓는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이런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죄인데 말이죠.

그러나 이들은 이걸 몰라요.

왜냐하면! 선악의 법 아래 가두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선악의 법 아래 가두어져 있기 때문에 율법적 죄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율법에서 빠져 나와 은혜 아래 들어 온 거에요.

 

은혜 아래 들어오면 은혜 아래서의 죄관이 따로 있어요.

은혜 아래서 죄관은 우리 행함으로 따지지 않아요.

예수그리스도를 기준으로 따져요.

믿음에 법으로 따져요.

 

우린 율법 아래서 태어났어요.

죄 아래서 났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죄 아래서 은혜 아래로 빼내 주셨어요.

 

너는 이제부터 은혜 아래 있다는 증거로 우리 가운데 성령을 부어 주셨어요.

죄가 지배하는 곳에 은혜가 부어진 것입니다.

이건 마치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이 침투해 들어간 것과 같아요.

 

우리 몸은 가나안 땅과 같아요.

예수님이 우리 몸에 오셨어요.

그러자 우리 몸에서 가나안 전쟁이 일어나기 시작을 하게 된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에 싸움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몸에는 옛 사람이라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살고 있어요.

이 놈들은 가나안의 거인 족과 같이 아주 강한 놈들이에요.

우리 몸에는 옛 사람이 거인 족처럼 떡하니 버티고 있어요.

 

그런데 거기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에 침공한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셨어요.

육체의 소욕으로만 살던 우리에게 이와 정 반대의 성향을 가진 성령의 소욕을 가지고 들어온 것입니다.

마치 컴퓨터에 심겨진 바이러스처럼 성령의 소욕을 우리 몸에 심어 놓았어요.

 

22-24=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성령의 소욕은 육체의 소욕과 반대에요.

그러니 우리 몸에서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 맘대로 못살게 한단 말이에요.

 

여기에 우리 옛 사람의 반발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전혀 낯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반발을 하는 것과 같아요.

 

우리가 반발을 할 때마다 죄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 안에 성령의 소욕을 주어서 우리 안에서 죄를 끄집어내는 일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내 맘대로 사는 것이 익숙한데 성령이 태클을 걸기 시작을 합니다.

야!~ 임마! 너는 죄의 종이 아니고 의(義)에 종인데 왜? 죄에게 종 노릇하면서 살고자 하느냐! 라고 하면서 말이에요.

 

육체의 소욕이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해치는 것이라고 하면 성령의 소욕은 남을 위해서 내가 죽는 거에요.

이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합니다.

자기부인이라고 해요.

 

우린 자기 부인이 서툴러요.

성령의 소욕으로 사는 것보다 육체의 소욕으로 사는 것이 쉽고 편해요.

우린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도 성령의 소욕으로 살기 보다는 육체의 소욕으로 사는 것이 훨씬 많아요.

 

우리 몸은 성령의 소욕대로 온전히 살아 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 옛 사람이라는 가나안 칠 족속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놈들이 우리를 육신의 소욕으로 유혹한단 말입니다.

 

사사기 3장을 봅시다.

 

삿 3:1-7=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2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하사 남겨 두신 열국은 3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바알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이라 4 남겨두신 이 열국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로 그들의 열조에게 명하신 명령들을 청종하나 알고자 하셨더라 5 이스라엘 자손은 마침내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 사이에 거하여 6 그들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며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 하면서 가나안 원주민들을 다 쫓아내지 않고 조금 남겨두지요.

다 쫓아 낼 수가 있음에도 다 좇아내지 않고 조금 남겨두었어요.

왜? 남겨 둘까요?

 

이는 이들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시험하기 위함이에요.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는 일을 하게 하세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육신을 위하여 가나안 족속들의 신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힌트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만약에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게 하려면 가나안 족속을 조금 남겨둘 필요가 없이 다 진멸하여야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일부러 가나안 족속을 남겨 두셨어요.

왜? 남겨 두었다고 합니까?

이스라엘을 시험하기 위함입니다.

즉 이스라엘 속에 죄를 끄집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이걸 우리에게 적용해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죄를 안 짓게 하고자 하셨다면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면 죄 안 짓는 몸으로 바꾸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몸은 옛날 몸 그대로에요.

마귀 아래서 난 그 몸이에요.

죄 아래 팔린 그 몸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 할 수 없는 몸이란 말이에요.

 

그런 몸에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살라고 합니다.

이는 순종하라는 그것으로 우리가 불순종하는 자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함이에요.

마치 가나안 족속을 남겨두고서 이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시험하는 것과 같아요.

 

왜? 이렇게 하셨는가 하면 우리를 불순종가운데 가두어놓고서는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에요.

왜냐하면! 창세전 언약이 긍휼의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창세전에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언약이 우리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갚아주어서 의롭게 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에는 가나안 족속을 조금 남겨두고서 이스라엘을 시험하듯이 신약에선 우리가 육신의 소욕을 이길 수 없는 몸으로 두어서 우리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는가요.

잘 이해하세요.

 

가나안 신은 육신의 소욕을 채워주는 신이에요.

그러니 이스라엘은 틈만 나면 여호와를 버리고 가나안 신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징계를 합니다.

 

이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어요.

이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인 겁니다.

우리 안에 가나안 원주민들처럼 옛 사람이 있어요.

이 놈들이 우리로 하여금 육체의 소욕을 쫓도록 해요.

 

성령의 소욕이 결국 우리의 육체의 소욕이 죄라는 것을 드러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소욕으로 우리는 자기 죄를 알게 되어요.

그럼에도 정죄당하지 않고 사는 것은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알게 하세요.

이걸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가늠합시다.

 

신앙생활이란? 날마다 내가 삭제 당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나를 잠식해 가요.

잠식당할 때마다 우리 안에 있는 죄가 드러나게 되어요.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적용해 보세요.

우리 안에도 복음을 빌미로 자기 사욕을 쫓고자 하는 습성이 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을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죄가 우리 안에서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자기 사욕을 쫓는데 이용하라고 유혹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아는 성도는 늘 상한 심령일 수 밖에 없어요.

징징 거린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 육신이 죄 앞에 무기력한 것을 알고 주의 긍휼을 구하게 된단 말입니다.

 

신앙은 장담하는 것이 아니에요.

현란하게 말하는 것도 아니에요.

복음에 대하여 지적 동의를구하는 것도 아니에요.

 

신앙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아가는 것이에요.

그리하여 주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에요.

그러니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자기 힘이 빠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한 고백이 뭔가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이잖아요.

결국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천국에 가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역사 속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힘입고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의 나 된 것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하게 되어 있어요.

 

우린 지금도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살고 있어요.

이 사실을 알아야 해요.

그리하여야 범사에 자족하며 감사하게 되어요.

날마다 이러한 은혜 속에 강한 자로 감사하며 사시길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주 받아 마땅한 자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값없이 의롭다 해 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그 큰 은혜를 많이 알아가게 하소서. 우리 안에 일어나는 악함들을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덮으시고 용서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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