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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36강.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롬 6:3-11)

by coroa 2022. 10. 8.

36강.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롬 6:3-11) 롬 6:3-11=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36강.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롬 6:3-11)[출처] 36강.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롬 6:3-11)

 

 

-.정낙원 목사

 

오늘은 새 생명의 삶에 대하여 살펴볼까 합니다.

새 생명의 삶에 대한 세미나도 있습니다.

그만큼 성도들에게 관심이 가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이 부분을 오해하고 있어요.

특히 성화주의자들은 새 생명의 삶을 성화로 이해하고 있어요.

 그래서 성도들을 성화하여야 한다고 채근을 합니다.



성화란? 한마디로 예수님을 닮자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과 같아서는 되겠느냐?

달라야 하지 않겠느냐 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남다른 윤리와 도덕적 삶을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신자다워야지!

그 따위로 살아서 되겠느냐?

그래 가지고 천국에 가겠느냐! 라는 식으로 남다른 삶을 살도록 은근히 압력을 가합니다. 

그럼 교인들은 주눅이 들어요.



아! 어떻게 하지!

천국은 가고 싶고!

목사님들의 말씀에 비추어서 자기 꼬라지를 바라 보면 천국이 아니라 지옥 맨 밑바닥에 헤매고 있는 것만 같아요.

자기 신앙은 신앙도 아니고 신자도 아닌 것 같아요.

 

이 딜레마를 해결하지 않으면 우울증에 걸려요.

신앙적인 우울증에 걸리면 무서워요.

나는 선택을 입지 못하고 버림받고 지옥에 가야 하는 자처럼 느껴져서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이게 나중에 잘못 발전하면 광신자로 변해가요. 

자기 몸을 학대하면서 마음에 엄습하는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의 심리는 안 믿어질수록 믿고자 더욱 열심을 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광신적 신앙으로 변해가게 되는 것입니다.

남들이 볼 때는 믿음이 좋다고 해요.

하지만 자기 안은 무관 지옥이에요.

 

전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때 이 우울증에 걸려서 자살을 하고자 하였어요.

너무 괴롭고 힘이 드니까요.

진리에 대하여 갈급해 보지 않은 분은 이 말을 모를 겁니다.

이건 미쳐요.

 

예수를 믿기는 믿어야 하는데 믿어지지는 않고!

그렇다고 어려서부터 믿어온 습성이 있어서 안 믿을 수도 없고!

그러니 환장하는 겁니다.

 

남들 보기엔 신앙이 좋다고 하는데 정작 내 자신은 그게 아니었거든요.

이게 아닌데!

열심과 충성이라고 하면 엘리야 못지 않은데!

성화 한다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했어요.

한동안 집에 TV도 없애도 세상과 단절하고 살았어요.

그 좋아 하던 것들을 다 끊고 오로지 성경만 보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전도하고 교회에 살다시피 하면서 밤이슬 맞아 가면서 산 기도를 다니곤 했어요.

 

흔히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방언도 하고 환상도 보고 귀신도 좇아내고 병도 고쳐 보았어요.

짧은 기간이지만 해 볼 것은 다 해 보았어요.

두루 두루 경험을 했어요.

이단에도 빠져 보았으니까요.

산 넘고 물을 건너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성화도 했어요.

열심과 충성도 했어요.

그것도 미친 듯이 했어요.

성경도 많이 읽었어요.

 

그럼에도 이러한 것들이 내 안에 고민을 해결해 주지 않더란 말입니다.

두려움을 내어 좇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에게 하나님 내게 진리를 알게 해 주시지 않으려면 차라리 내 목숨을 거두어 가세요! 라고 한 달간 금식도 하면서 씨름을 했어요.

수없이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서 간섭해 가세요.

낮출 때까지 낮추시고선 빛을 주시더라고요.

아주 극한 상황에 몰아넣고서는 복음이 깨달아지도록 해 주시는 겁니다.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시는 겁니다.

 

믿어지게 해 주시면 그냥 확~ 믿어져요.

콱~ 믿어진다니까요.

이것 같이 쉬운게 없어요.

믿어지니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엔 그렇게 믿고자 해도 믿어지지 않던 예수가 어느 날 그냥 쑥 믿어져요.

예수님이 내다~! 하고 내 안에 쑤욱~ 들어오셔서 믿어지게 하시고!

성경이 깨달아지게 하시고!

하나님의 일하심들이 보여지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동안 조각난 말씀들이 하나 둘씩 퍼즐이 맞추어지듯이 맞추어지고 말씀이 달음질 하는 겁니다.

길을 갈 때도, 잠을 잘 때도, 일을 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말씀이 회돌이 치면서 그 동안 희미하던 것들이 환히 보이게 되더라구요.

은혜가 광풍처럼 몰아치고 말씀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거에요.

 

야! 이러한 것도 있구나!

희열을 맛보고 혼자 실실 거리면서 만유를 품에 안은 듯이 기쁘고 즐거운 겁니다.

아! 이게 성령의 감동이구나!

 

그동안 막연하게만 들렸던 그 성령의 감동하심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어요.

말씀이 살아서 꿈틀 거리는 것을 볼 때마다 야~! 말씀이 살아서 심령골수를 찔러 쪼개고 해부한다는 말씀이 그냥 글이 아니고 사실이고 생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더라구요.

 

그러니 과거에 두렵고 우울하던 것들이 일순간 다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를 믿는 것이구나!

실감이 나더군요.

왜? 이러한 말을 하는가 하면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실 때는 다 때가 있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자 함입니다.

 

어떤 분들은 메일로 자신의 답답함을 호소하는데 전 그 심정을 너무도 잘 알거든요.

그런데 제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어요.

그저 하나님께서 저를 다루어 오셨듯이 하루 빨리 저 분에게도 눈과 귀를 여시고 마음을 열어서 복음이 깨달아지고 예수가 믿어지기만을 기도할 뿐입니다.

 

사람마다 부르시는 때가 있어요.

그 때는 다 달라요.

마치 포도원 품꾼을 부르듯이 하나님이 정한 때에 맞추어서 자기 백성들을 간섭을 해 가시는 것입니다.

때와 기한은 하나님이 정하시니 우린 모르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는 반드시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십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되고 오직 여호와의 신(성령)으로만 가능해요.

그러니 여호와의 신(성령)이 터치 해 줄 때까지 기다리자구요.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새 생명의 삶에 대하여서입니다.



개혁주의자들은 새생명의 삶을 성화 신앙으로 이야기 합니다.

인간의 의지적 결단으로 변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화 신앙이 마음에 쉼을 주느냐 하면 그 반대에요.

도리어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 다가와요.

그래서 오늘은 새 생명의 삶이라는 이름으로 성화하여야 한다는 신앙의 허구성을 고발하고자 합니다.

 

성령께서 새 생명의 삶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해 주시길 기도하면서 살펴보기로 합시다.

 

로마서 6장은 많은 오해를 하는 장입니다.

왜? 오해를 하느냐 하면 “새 생명 가운데 행하라” 고 하는 말과 “너희 몸을 불의에 병기로 드리지 말고 의에 병기로 드리라” 는 말씀 때문입니다.

성화주의자들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여서 성도의 행함으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성화주의자들은 이러한 말씀을 근거로 새 생명의 삶을 살라고 합니다.

봐라! 새 생명 가운데 행하라고 하지 않느냐!

그리고 우리 몸을 “불의에 병기”로 드리지 말고 “의에 병기”로 드리라고 하지 않느냐!

그러니 성화해야 한다고 합니다.

 

결국 새 생명의 삶을 인간의 반듯한 삶으로 끌고 가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말에 교인들이 그럼 어떻게 살까요? 라고 물으면 여지없이 착하게 살라고 합니다.

그 착함이란? 교회에 충성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세상 사람들에게 욕 먹을 짓을 하지 말고 살라고 합니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아담 안에서 선이라고 하는 윤리 도덕이에요.

 

이게 얼마나 무지한 말인고 하니!

로마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의 주제는 우리가 어떻게 살까? 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에요.

도리어 그 반대로 율법 외에 다른 의(義)인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의(義)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요.

 

예전에 어떤 성화주의 목사와 논쟁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분은 이 부분을 해석하기를 이웃 집에 사는 가난한 과부가 생각나거든 살 한 됫박 퍼 주라고 해요.

이게 새 생명의 삶이래요.

 

이러한 것은 선악의 법 아래 있는 인간들에게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에요.

바울이 지금 로마서를 인간의 윤리와 도덕적 차원에서 쓰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에게서는 나올 수가 없는 의(義)를 말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뭐라고 한 적이 있어요.

대 부분의 성화주의자들이 새 생명의 삶을 반듯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해요.

그래서 교인들에게 윤리 도덕적으로 흠이 없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구제하고 봉사하고 충성하라고 가르쳐요.

 

이는 모두가 선악의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는 이 선악의 구조가 죄라고 지적을 하는데 말이죠.

하나님은 이 선악의 구조를 넘어서 은혜의 구조로 일을 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로마서에요.

 

선악의 구조는 우리의 행함으로 죄다 아니다 하는 구조에요.

이걸 율법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를 가지고 논해요.

이 시대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느냐! 안 살았느냐! 로 나타납니다.

이게 선악의 구조 아래 있는 성화주의자들의 해석법이거든요.

 

바울이 지금까지 뭐라고 하던가요.

율법 외에 다른 의(義)를 말하고 있잖아요.

율법으로 안 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된다고 하잖아요.

율법에 의(義) 말고, 믿음으로 난 의(義)를 말하고 있잖아요.

행함이 아니고 은혜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느냐 안 사느냐로 신앙을 접근하는 것은 선악의 법인 율법의 구조에요.

유대인들은 이 선악의 구조로 죄인과 의인을 구분했어요.

자신들은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의인과 죄인은 율법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라는 인간의 행함으로 구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 자체를 죄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죄인에게서 나오는 그 모두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죄인에게서는 하나님이 바라는 의(義)가 나올 수가 없어요.

하나님 바라는 선이 없어요.

 

율법을 지켜도 죄인이고 안 지켜도 죄인이에요.

왜냐하면! 죄인에게서 나온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의(義)는 죄인에게서 나온 행위 말고 의인에게서 나온 행위를 들고 오라는 겁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의인은 이 땅에 속한 분이 아니에요.

죄와 상관없는 나라에서 오신 세상 바깥에 있는 하늘나라에서 오신 분만 의인이에요.

 

성경은 세상 바깥에서 오신 그 분을 보라는 겁니다.

그 분을 믿음으로서 의롭게 된다고 하고 있어요.

죄와 상관이 없는 동네에서 오신 그 분이 너희를 구원하실 분이라고 합니다.

 

구원자가 왜? 세상 바깥에서 오셨는가 하면 세상 바깥에 있는 의(義)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의(義)를 주시고자 하늘에서 오신 거에요.

그럼 세상 바깥에서 오신 구원자가 누구인가요?

예수님입니다.

 

바울은 지금 하늘에서 오신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율법 지킨 것을 가지고 의(義)로 붙잡고 있어요.

이에 바울이 너희들이 율법을 오해 하였다고 합니다.

율법은 의(義)를 만들라고 준 것이 아니고 도리어 죄를 알려 주기 위하여 주었다는 거에요.

 

로마서 3장을 봅시다.

 

롬 3: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이 말을 합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라고 하지요.

법은 죄인을 위하여 있는 것이에요.

그럼 율법이 주어졌다는 말은 곧 너희는 죄인이란 말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을 주었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은 율법을 가지고 죄 아래 가두는 일을 하신 겁니다.

그리고 너희는 죽어야 할 놈이라고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자기가 죄인인줄 알아야 하는데 도리어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고 한단 말이에요.

 

하나님은 율법으로 죄 아래 가두고 다 죽이려고 주었는데 이들은 그 율법으로 나 착하지요 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바울이 그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나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나 동일해요.

 

바울의 주장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가 다 죄 아래서 난 자들이라는 겁니다.

죄 아래서 난 자들은 율법을 지키나 안 지키나 죄인이에요.

하나님은 죄를 인간의 행함을 가지고 말하지 않아요.

조상이 누구냐로 말해요.

죄인을 조상으로 둔 자들은 자기의 조건과 상관없이 죄인이에요.

 

알다시피 아담은 죄인의 조상입니다.

그럼 아담 안에서 난 자들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아담처럼 죄인인 겁니다.

죄인이라는 증거가 죽는 거에요.

 

왜? 죽느냐?

죄인이기 때문에 죽는 거에요.

해 아래서 난 인간 치고 안 죽는 인간이 없어요.

그러니까 성경은 아담 안에 있으면 율법을 지킨 자도 죄인이고 안 지킨 자도 죄인이라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의인 되는 길도 이와 같아요.

조상이 의인이면 그 사람의 행위와 상관없이 의인이에요.

의인의 조상이 누구인가요?

예수님이에요.



아담과 예수님은 두 조상이에요. 

그래서 로마서 5장에서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 왔고,

다른 한 사람으로 의가 세상에 주어졌다고 합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아담이고 예수님이에요. 

아담은 죄인의 조상이고, 예수님은 의인의 조상이에요.

그러므로 아담 안에 있는 자는 죄인이고,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의인이에요.

우리의 조건으로가 아니고 조상의 조건으로 에요.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원래 죄 아래서 태어났어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착함이나 악함과 상관없이 죄인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와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주셨습니다.

예수 안이라는 의(義)에 나라로 옮겨 주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의롭다 인정함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의 중심사상은 율법 외에 다른 의(義)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 외에 다른 의(義)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난 의(義)를 말합니다.

율법에 의(義)는 인간이 율법 지킴으로서 얻고자 하는 의(義)를 말하고!

율법 외에 다른 의(義)는 예수님이 만드신 의(義)를 말합니다.

 

율법에 의(義)는 인간이 만든 행함이고!

그리스도의 의(義)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걸 행함이냐!

아니면 믿음이냐! 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의(義)는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따 내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종교적 노력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에요.

이건 창세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찾아가서 거저 주세요.

그래서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은혜를 입은 자로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고자 다메섹으로 가는데 예수님이 바울을 찾아가서 율법에서 은혜로 빼내 주셨어요.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러다가 은혜로 예수님의 의(義)안으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자신이 바리새인으로 있을 땐 율법을 지킴으로서 의롭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포카스를 율법 지킴에 두었습니다.

열심히 율법을 지키는데 올인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율법 지킴이 예수를 죽이는 원수임을 알게 되고 화들짝 놀라게 됩니다.

 

율법 지킴 속에서는 하나님이 바라는 의(義)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오직 예수님 안에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율법 신앙을 깨트리는 일에 선봉을 섭니다.

자기 동족들에게 율법에 의(義)는 하나님 앞에 원수라고 알려 줍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합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인간의 실존과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 왔습니다.

쉬운 말로 인간은 이런 자인데 “하나님은 이렇게 일을 하신다!” 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건 비단 로마서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 전체가 이 주제를 바탕으로 하여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이 시대 많은 분들이 로마서를 곡해 하여 어떨 땐 믿음이라고 하였다가 어떨 땐 행함이라고 하고 있어요.

일관성이 없어요.

 

처음엔 믿음으로 시작하였다가 나중에 보면 행함으로 귀결 나요.

특히 오늘 본문과 같은 “새 생명 가운데 행하라” “너희 몸을 불의에 병기로 드리지 말로 의에 병기로 드리라”는 말씀을 보면 여지없이 행함으로 해석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새 생명이 어떤 것인가요? 

새 생명이라고 하면 옛 생명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지요.

옛 생명은 아담 안에 생명이고, 새 생명은 예수 안에 생명이지요.

옛 생명은 율법 아래 생명이고, 새 생명은 은혜 아래 생명이지요.

 

지난 시간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더 넘쳤다고 했습니다.

죄의 반대로 은혜를 말하고 있지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것은 죄 아래 있는 자를 은혜 아래 옮겨 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죄 아래 있을 땐 율법으로 살았어요.

율법은 우리 몸을 근거로 역사를 해요.

그래서 우리는 율법 아래 있을 땐 항상 우리 몸에 행실을 근거로 선과 악을 구분했어요.

 

우리 안엔 인간의 행함을 근거로 하는 선과 악이 있어요.

율법은 선을 장려하고 악을 억제하라고 해요.

그래서 우리는 법 아래 있을 땐 선을 행하고자 애를 쓰고 악은 멀리하고자 싸우면서 살았어요.

법 아래선 착하게 산 사람들은 상(賞)을 주고, 악하게 산 사람들에게 벌(罰)을 주었어요.

 

이게 옛 사람이 살아가는 생명이었어요.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살아간 옛 사람의 삶을 아담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알다시피 아담은 죄인입니다.

아담에게서 나온 모든 것은 죄에요.

 

그럼 아담에게서 나온 윤리와 도덕을 가지고 새 생명의 삶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아담에게서 나온 것은 새 생명의 삶이 될 수가 없어요.

아담에게서 나온 삶은 모두가 옛 생명의 삶이에요.

 

새 생명의 삶이 되려면 예수 안에서 나온 것이라야 해요.

새 생명은 예수 안의 생명이라고 했잖아요.

아담 안과 예수 안의 차이는 법과 은혜에요.

아담의 생명은 법을 동반하여서 나오고, 예수님의 생명은 은혜를 동반하고 나와요.

 

오늘 분문을 보면 연합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연합이란? 하나 됨을 말합니다.

마치 강력 본드로 붙여놓은 것을 말해요.

 

이건 떨어질 수가 없어요.

떨어지면 둘 다 상함을 입어요.

그래서 떨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아니~ 떨어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떨어지면 둘 다 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예수님과 연합을 시키신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자진해서 연합을 했나요?

아니면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연합을 시키셨나요?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하셨지요.

 

그럼 그 연합을 예수님이 떨어지지 않게 보호하시겠지요.

만약에 우리가 싫다고 해서 떨어져 나가면 누가 손해를 봅니까?

누가 망신을 당합니까?

 

예수님이 손해보고 예수님이 망신을 당하겠지요.

그럼 예수님이 자신이 손해보고 망신당하실 일을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당연히 안하지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의 되면 그것으로 끝이에요.

완성이고 완료이고 종결이에요.

번복 되지 않아요.

 

우리가 나 천국 안가고 지옥 갈래!

그래도 예수님이 안 돼 라고 해요.

나 예수 안 믿을래!

그래도 예수님이 안 돼!

너는 예수 믿어야 돼! 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가 믿어지도록 하시고 예수님이 우리를 천국으로 데리고 가세요.

그래서 완성이고 완료이고 종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중도에 우리의 조건으로 취소가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운명을 결정할 권한이 없어요.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피로 우리를 샀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예수님 뜻대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진다고 하면 두려울 것이 없겠지요.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아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이 이 사실이 믿어지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너희가 죽인 이 예수가 바로 주와 그리스도이다 라고 외쳤어요.

 

유대인들이 너희들 그런 말 하면 이단이고 죽인다 하여도!

그래 너희들이 이단이라 하든지 삼단이라 하든지 개의치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죽이려면 죽이라고 했어요.

 

이걸 사도 요한은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좆는다고 했어요.

이 온전한 사랑을 받은 성도는 두려움이 없어요.

세상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아요.

세상에 판단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세상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아담 안에서 난 옛 사람은 예수와 함께 죽었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새 사람으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성도 안에서 이 사실을 알게 해 주세요.

믿어지게 해 주신단 말입니다.

 

제가 왜? 쥐뿔도 없으면서 큰 소리 치는 줄 아세요.

이 믿음을 받았거든요.

누가 이단이라 하여도 주께서 나를 알고 내가 주를 아는데 너희들이 이단이라고 한들 그게 무슨 대수냐 라고 넘겨버려요.



온전한 사랑 안에 거하거든요.

 그러니 거침이 없어요.

누가 목사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면 되지요.

목사 안 한다고 구원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아니 예수님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연합을 시켜 놓았는데 내가 목사 안한다고 예수님이 취소시키진 않을 것이잖아요.

예수님이 나를 자신과 연합을 시킬 때 야! 너 목사 그만 두면 취소한다고 하지 않았잖아요.

그러니 내가 목사를 하든 안하든 내 구원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어요.

 

그러니 목사직에 목숨 걸 이유가 없지요.

하라고 하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면 되어요.

복음 듣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안 하면 되어요.

이게 연합된 자가 살아가는 자세에요.

 

3절에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주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하지요.

세례를 뭐라고 합니까?

죽음이라고 하잖아요.

 

여기서 죽음이란? 아담 안에서 난 자의 죽음을 말합니다.

그럼 아담 안을 법이라고 했으니 법에 속한 사람이 죽은 것이 되지요.

법은 무엇을 근거로 역사 한다고 했나요?

우리 몸에서 행한 행실을 근거로 역사 한다고 했지요.

 

그러니 우리가 예수와 함께 연합하여 십자가에 죽었다는 말은 우리 몸으로 행한 행실을 가지고 죄다 아니다 라고 판단 받던 것이 죽었단 말입니다.

한마디로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자기 행실로 인하여 판단을 받지 않는단 말이에요.

하나님은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을 그들의 행실을 가지고 죄인과 의인으로 구분하지 않아요.

 

예수 안은 의(義)에 세계에요.

은혜가 지배해요.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는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해도 다 의인이에요.

예수님의 의(義)로 의롭다 인정을 해 주세요.

우리는 의롭다 함을 입은 자이지 의로운 자가 아니에요.

 

히브리서 2장을 봅시다.

 

히 2:11-12=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가 나오지요.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누굽니까?

예수님이지요.

그럼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는 누구인가요?

자기 백성들이에요.

 

거룩함을 입는 것은 의롭다 함을 입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입었다” 는 것입니다.

입었다는 말은 마치 겉 옷을 입혀주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죄인인 우리에게 당신의 의(義)에 옷을 입혀 주셨어요.

거룩을 입혀 주셨어요.

우리가 비 거룩하기 때문에 거룩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감싸고 계신 겁니다.

 

이게 에덴동산에서 가죽옷으로 나타났어요.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죽옷으로 가려주잖아요.

수치는 우리가 가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가려 주세요.

 

이사야 43장을 봅시다.

 

사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고 네 죄를 기억지 않는다고 하지요.

여기서 “나” 는 하나님 자신을 말합니다.

“너” 는 이스라엘을 말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도말하고 기억치 않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에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에요.

죄를 두고 볼 순 없어요.

그래서 죄를 가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아이가 방바닥에 똥이나 오줌을 싸 놓으면 엄마가 그걸 치우지요.

왜? 치우는가요?

아이를 위해서입니까?

엄마 자신을 위해서입니까?

엄마 자신을 위해서에요.

 

엄마는 성격이 깔끔해서 지저분한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아이들 방을 청소하고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엄마의 깔끔한 성격 때문에 깨끗한 환경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그래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어요.

그 죄를 두면 하나님이 불편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죄를 없애 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 때문에 죄를 도말 당하는 혜택을 입은 것입니다.

이 혜택을 입은 자들이 천국에 가는 자들이에요.

 

우리가 독자적으로 거룩하면 예수님이 거룩함을 입혀 줄 필요가 없어요.

우리 독자적인 거룩으로 나아가면 되니까요.

우리가 독자적으로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거룩을 입혀 주어서 거룩하다고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결국 우린 우리 독자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폭 감싸서 하나님 앞에 서는 거에요.

이걸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해요.

우리 독자적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로 구원을 받는 겁니다.

 

신앙이란? 예수님으로부터 수치를 가려 주심을 입는 것이지 우리가 가리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가리는 것을 행함이라고 하고!

예수님이 가려 주시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또는 은혜라고 하지요.

 

우리 그냥 가만 있으면 됩니다.

마치 쇼윈도에 마네킹처럼 우리의 코디네이터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아름답게 코디를 해 주세요.

마치 솔로몬이 검둥이인 술람미에게 자기의 것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갖 코디를 다 해 주시듯이 말이에요.

 

우린 예수님이 기뻐하도록 서 있는 기쁨조에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기의 모든 것은 쏟아 부어 주셔서 치장을 하세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말이에요.

우린 예수님께서 해 주신 것을 자랑하면 되어요.

 

난~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것 받았다!

이 옷 예수님이 해 주셨어!

이 귀걸이 예수님이 주신 거야!

이 목걸이도 예수님이 주셨다!

 

술람미가 솔로몬이 준 것으로 온 몸에 치장을 하였듯이 우리도 예수님이 주신 것으로 온 몸에 치장을 해요.

술람미의 몸에 걸쳐진 장신구가 지금식으로 말하면 성령의 열매들이에요.

봉사하고 충성하고 헌신하는 것들이에요.

 

그러니 우리는 봉사를 하면서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헌금을 하여도 예수님이 주셔서 한 것이다!

구제를 하여도 예수님이 하게 해 주셔서 한 것이다!

교회에 온 것도 예수님이 오게 해 주셔서 온 것이다! 라고 해야 해요.

 

이걸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합니다.

우린 이 힘으로 살아요.

우린 예수님의 것으로 사는 자들이에요.

 

우리 것이 있으면 안 되어요.

우리 것이 보여서도 안 되어요.

하나님 눈엔 온통 예수님의 것만 보여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내 것은 삭제하고 예수님에 것을 채우는 것이에요.

예수님의 것만 의(義)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실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아요.

 

이는 아버지와 아들 간에 맺은 언약 때문이에요.

아버지와 아들 간에 맺으신 언약이 뭔고 하니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들의 피를 뿌려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해 주는 것이에요.

 

이걸 대속(代贖)이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대신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에 의한 계산이 완료 되었어요.

법적으로 죄에서 해방이 되었어요.

이걸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럼 새 생명의 삶이 어떤 것인지 살펴봅시다.

 

새 생명의 삶이란? 새 언약으로 사는 거에요.

새 언약 정신으로 사는 것이에요.

새 언약 정신으로서의 삶이 바로 우리 행함으로 살지 않고 예수님의 행함으로 사는 것입니다.

 

새 생명의 삶이란? 죄를 질질 흘리고 다니는 죄인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면서 사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 삶을 갈고 닦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육신의 소욕대로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의 행함에 의미를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얻은 구원이 너무도 귀하기 때문에 육신의 소욕을 멀리하고자 하는 싸움을 하며 살게 되는 것이에요.

이는 우리 의(義)를 쌓고자 함이 아니라 예수님이 피 흘려서 우리의 수치를 가려 주신 것에 너무도 감사하여서 그러는 겁니다.

 

새 생명의 삶이란? 아이러니 하게도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고 자기를 믿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고 탄식하고 주여 도와주소서!

주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성화하는게 새 생명의 삶이 아니고 자기가 죄를 이길 수 없는 죄인임을 깊이 깊이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 안으로 더 파고드는 거예요.

주여! 날 내치지 말아 주세요!

주님 품에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제발 나아지려는 것에 신앙의 포카스를 맞추지 말고 예수 믿음에 두세요.

나는 죄인 중에서도 괴수라는 것을 알아 가세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면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하세요.

야~! 내가 사는 것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이구나 를 아세요.

 

제일 꼴불견이 죄인인 주제에 자기가 괜찮은 사람으로 변하고자 하는 겁니다.

자기에게 무슨 선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착한 것이 있다고 믿는 겁니다.

 

많은 분들이 물어요.

목사님 구원 이후의 삶은 어떤 것입니까!

이렇게 묻는 것은 신자의 삶이 따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교회의 정서로는 성도의 새 생명의 삶을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지 않고 착하게 사는 것으로 각인 되어 있어요.

예를 들어서 술 담배를 먹던 사람이 끊는다거나 사회에 모범이 되고 교회 생활 잘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사는 것으로 말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본받자고 합니다.

 

전 이러한 것에 시비를 걸고자 하지 않아요.

이건 신앙을 떠나서 성도라고 한다면 누구 나가 살고자 하는 마음이에요.

사람들에게 욕 먹지 말고 잘 살아야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이 과연 이러한 것을 새 생명의 삶이라고 하느냐 에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과연 이러한 삶을 새 생명의 삶이라고 하느냐 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이건 아니에요.

바울이 지금 우리더라 착하게 사세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내용이 좋다고 해서 옳은 것이 아닙니다.

듣기 좋다고 해서 복음이 아니란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옳다고 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이고 하나님의 뜻일 순 없어요.

 

모두가 옳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겁니다.

한국교회가 다 인정을 하여도 예수님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에요.

마치 예수님이 오셔서 온 유대 민족이 다 율법 지킴을 신앙 있음이라고 내어 놓았지만 예수님은 인정하지 않았어요.

도리어 율법 지킴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던 자들을 저주하셨어요.

 

그럼 지금도 이러한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옳다고 한 것이 예수님께선 악이라고 할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이 시대 교회가 만든 전통이나 교리로서 새 생명의 삶은 이러한 것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 유대인들이 이것이 신앙이다! 라고 내어 놓은 것과 같을 수 있단 말입니다.

 

마태복음 7장을 봅시다.

 

마 7:21-29=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나 더러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고 하잖아요.

주님이 모른다고 하잖아요. 

이걸 지금 식으로 말하면 주여 주여 했다는 것은 자기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했다는 말입니다.

복음도 알고 예수도 믿고 교회에 열심히 다녔단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모른대요.

이런 낭패가 어디에 있나요.

 

우린 이러한 말씀 앞에 내 자신의 신앙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믿는 예수가 과연 성경이 말하는 그 예수가 맞는가!

내가 안다고 하는 복음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복음인가!

내가 지금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것인가!

달아 보아야 해요.

 

사돈이 장에 간다고 해서 거름지고 장에 따라 가면 안 되어요.

사돈은 분명하게 장에 가서 사 올 물건이 있어서 가는데!

난 아무 것도 살 것이 없으면서 사돈이 간다고 해서 따라 갈 순 없다는 말입니다.

 

남들이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니까 나도 그들과 같이 하여야 한다고 하면 안 되어요.

극단적으로 아무리 한국교회가 이것이 새 생명의 삶입니다 라고 하여도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따르지 말아야 한단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산상보훈의 결론을 집 짓는 비유로 하고 있습니다.

산상보훈은 구약의 율법과 같아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옛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하였으니 나는 이렇게 말한다 라고 하잖아요.

이는 너희가 율법을 이렇게 해석을 하였지만 나는 이렇게 해석을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구약의 율법을 재 해석을 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에게 적용해 보세요.

우리는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는 관(觀)이 있어요.

우린 그 관(觀)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을 해요.

그런데 그 관(觀)이 만약에 틀렸다고 한다면 우리의 성경 해석은 다 틀려지는 것입니다.

 

관(觀)이란? 눈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는 눈이 있어요.

그 눈은 교회에서 배웠어요.

교회가 가르치는 눈으로 성경을 보고 해석을 해요.

 

그런데 예수님이 신약의 율법이라고 할 수 있는 산상보훈의 결론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라고 해서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집을 지었다고 해서 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집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럼 우리가 짓는 집이 틀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여 주여 부르는 그 주(主)가 다른 주(主)일 수 있다는 말이에요.

모든 사람들이 그 길을 간다고 해서 그 길이 생명의 길 일수가 없어요.

멸망으로 가는 길 일수 있단 말입니다. 

그럼 주여 주여 부르기에 앞서 내가 부르는 그 주님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주님이 맞는가 살펴보아야지요.

내가 짓고 있는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집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집인가 따져 보아야지요.

 

그럼 집 짓는 비유를 봅시다.

두 사람이 집을 짓습니다.

한 사람은 모래 위에 짓고 한 사람은 반석 위에 짓습니다.

모래와 반석을 주초(柱礎)라고 합니다.

 

이건 터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너희들 어느 터에 집을 지었느냐 를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를 보내서 시험을 합니다.

평상시에 몰랐는데 홍수가 나고 보니 모래는 다 쓸려 내려가고 반석만 남았습니다.

 

모래가 물에 다 쓸려가니까 결국 그 모래 위에 집도 허물어지고 만 겁니다.

그러나 반석은 홍수에 쓸려 가지 않았어요.

반석 위에 지은 집은 그대로 있는 겁니다.

 

성경은 반석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고 모래는 인간을 상징해요.

그러니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는 말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고, 모래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자기 행위를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이걸 로마서 식으로 표현을 합니다.

로마서를 보면 두 의(義)가 나옵니다.

율법에 의(義)와 율법 외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義)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의(義)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義)에요.

그럼 율법에 의(義)는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義)는 반석 위에 지은 집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다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새 생명의 삶으로 살펴봅니다.

새 생명의 삶이라 함은 옛 생명의 삶을 전제하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옛 생명의 삶과 반대가 새 생명의 삶이에요.

 

그럼 옛 생명의 삶은 무엇인가요?

옛 사람의 삶이지요.

옛 사람의 삶이 어떤 삶인가요?

율법 지킴이라는 삶이에요.

우리의 행함이에요.

 

그럼 새 생명의 삶은 무엇인가요?

새 사람의 삶이지요.

새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 안에 있는 자이지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요?

믿음으로 살지요.

그럼 새 생명의 삶이란? 믿음으로 사는 것을 말하겠지요.

 

그럼 묻습니다.

여러분은 무얼 믿습니까?

믿음으로 사는 것이 새 생명의 삶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 줄 알아야 하잖아요.

막연하게 믿음으로 삽니다 라고 하면 안 되어요.

그건 사돈이 장에 가면 거름지고 장에 가는 것과 같아요.

 

우리가 믿는 것이 있잖아요.

무엇을 믿습니까?

예수를 믿지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 죄를 대신하여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니까 예수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잖아요.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었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서 천국에 가면 되니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 죄 때문이에요.

 

그럼 새 생명의 삶이란? 우리가 반듯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착함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내가 살고 있다는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이 새 생명의 삶이에요.

 

이걸 아는 성도라고 한다면 성경을 어떻게 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지켜서 성화하는 것으로 볼까요?

아니면 그 말씀 앞에 자기의 죄가 발각당하고 그 죄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셨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게 될까요?

당연히 감사하겠지요.

 

말씀 앞에서 자기 죄가 폭로당하고 하나님 앞에 긍휼을 구하겠지요.

주여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겠지요.

주여 내가 성화 하겠습니다! 라고 하지 않고 주여 내가 죄인입니다!

이 죄인을 예수님의 피 뿌리심으로 용서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라고 할 것이겠지요.

자신의 반듯한 삶을 새 생명의 삶으로 내어 놓지 않겠지요.

 

이건 아주 중요한 말이에요. 

이 시대 개혁주의 성화주의자들이 내어 놓는 새 생명의 삶이 어떤 것들인가요?

착하게 살라는 거잖아요.

열심히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고 세상에 지탄을 받지 않도록 착하게 살라고 하잖아요.

말씀들을 지켜서 윤리 도덕적으로 반듯하게 살라고 가르치잖아요.

이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말이에요.

 

새 생명의 삶이라고 하면서 내어 놓는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옛 생명의 삶을 내어 놓고 있어요.

옛 사람이 지키던 율법 신앙을 내어 놓고 있단 말입니다.

이걸 개가 토하였던 것을 다시 먹는다고 하고 돼지가 씻었다가 도로 눕는다고 해요.

 

율법 신앙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자기 행함을 근거하면 율법신앙이에요.

나는 무엇을 의지합니까?

자기 행함입니까?

예수 믿음입니까?

 

물론 예수 믿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대 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막상 내어 놓고 의지하는 것은 자기 행함이에요.

 

속된 말로 성경 꼬박 꼬박 보고 기도하고 봉사 잘하고 헌금 듬뿍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고 하면 고무도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오는데 그렇지 않고 나쁜 짓을 하거나 교회가 교육하는 것대로 살지 못하면 찜찜해서 얼굴 들고 나오지 못하잖아요.

결국 자기 행함으로 희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면 성경을 다이렉트로 받아서 그래요.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지킬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만이 지켜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이 지켜 내시겠다는 말씀이에요.

하나님은 약속을 하나님 자신에게 하셨어요.

약속의 대상이 하나님이에요.

 

아브라함의 예로 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에 조상을 만들어 주겠다고 합니다.

이건 아브라함더러 복에 조상이 되라는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복에 조상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말이에요.

누가 만들어 줍니까?

하나님이 만들어 주세요.

 

그럼 아브라함이 복에 조상이 된 것이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것이라는 것으로 드러나려면 아브라함이 잘난 자로 있어야 할까요?

못난 자로 있어야 할까요?

못난 자로 있어야 하겠지요.

그래야 하나님이 하신 것으로 드러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순종을 바탕으로 약속의 아들인 이삭을 주신 것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낳은 자식이에요.

하나님이 죽은 사라의 몸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이루어 내신 겁니다.

 

그래서 약속의 아들 앞에서는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자로 서 있는 거에요.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고발하고 있어요.

엄마 아빠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나를 준다고 약속 한 것을 하나님이 이루어 내셨다고 말이에요.

 

어느 때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지켜내세요.

하나님 말씀을 지켜 내시는 하나님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이에요.

예수님만이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가 있어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죄인으로 드러나요.

인간을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시려고 하나님 말씀을 주셨어요.

 

히브리서 4장을 봅시다.

 

히 4:12-16=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나님 말씀이 무슨 일을 하지요.

무슨 일을 하는가요? 

인간의 속과 겉을 낱낱이 해부(解剖)하지요.

마음속에서부터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까지 사그리 다 발가벗기잖아요.

발가벗긴다는 말은 죄를 드러나게 한다는 말입니다.

 

왜? 발가벗깁니까?

누굴 바라보게 하려고 그러지요.

누구신가요?

대 제사장 되신 예수그리스도에요.

 

말씀이 누구 앞으로 인도합니까?

예수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지요.

이러면 퍼뜩 생각나는 말씀이 있지요.

무슨 말씀인가요?

 

율법은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는 말씀이지요.

 

히브리서에서 말씀이 무얼 한다고 하나요?

대 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다고 하잖아요.

예수님의 무얼 바라봅니까?

대속(代贖)이지요.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죽어주신 그 은혜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라고 하잖아요.

무슨 보좌라고요?

은혜의 보좌에요.

 

이걸 잊지 마세요.

말씀이 지금 우리로 하여금 어디로 나아가게 한다구요?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게 하세요.

 

은혜란 법의 반대에요.

율법의 반대가 은혜에요.

행함의 반대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하나님 말씀을 자기가 다이렉트로 받지 않고 예수님을 거쳐서 받게 되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쳐서 받게 된다구요.

예수님이 나 대신 말씀을 지켜 주셨구나로 받게 된단 말입니다.

여기에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이 사운드로 깔려서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럼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을 툭 던져 주면서 너 이 말씀대로 살어! 라고 하면 아버지 이건 우리가 지킬 수가 없어서 예수님이 우리 대신 지켜주셨는데요!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이걸 새 언약이라고 하고 믿음으로 산다고 해요.

이렇게 믿음으로 사는 것을 새 생명의 삶이라고 해요.

 

그렇지 않고 성화주의자들처럼 예!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라고 하면 벼락을 맞아요.

이건 헌 생명의 삶이란 말입니다.

이건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받아서 그래요.

그러니 자기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겠다고 나대는 것입니다.

 

이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다는 증거에요.

아직 율법 아래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율법으로 받아서 자기가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산상보훈에서 예수님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 내게서 떠나가라는 말을 들을 자들이에요.

 

이런 말을 하면 꼭 묻는 말이 있어요.

그럼 성도가 되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말아야 합니까?

막 살아도 된단 말인가요?

 

이게 뭘 놓치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 말씀이 하는 일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말씀을 떠날 수가 없어요.

탯줄처럼 연결이 되어 있어요.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와 연결을 시켜 주어요.

 

우리는 말씀 앞에서 늘 우리의 한계성을 깨닫게 되어요.

우리 육신이 하나님 말씀을 담아 낼 수가 없는 몸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어요.

마치 사도 바울이 하나님 말씀 앞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고백을 한 것처럼 말이에요.

 

바울이 어떻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토설을 합니까?

하나님 말씀을 져 버리고 내 맘대로 살거야!~

막 살다가 토설을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하다가 토설을 합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하다가 토설을 하잖아요.

 

우린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작아져요.

마치 김수희가 부른 애모라는 노랫말처럼 말이에요.

 

♬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

 

우린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죄인으로 발각을 당하여 작아져요.

고개를 숙인단 말입니다.

“주여 내가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어 있어요.

 

우린 본능적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애를 씁니다.

그러나 우리의 원함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이러면 난 막 살아도 되겠네!

하나님 말씀대로 살 필요가 없겠네! 라는 말을 할 수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겠지요.

 

그래서 제가 그러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한번 살아 보아라!

최선을 다해서 살아 봐라!

그리고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알고 죄를 깨달으라고!

내가 얼마나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라고 말이에요.

 

성령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원함을 주세요.

그러나 우린 말씀 앞에 맞닥뜨리면 거대한 벽에 부딪쳐서 내가 죄인임을 드러나게 되어요.

난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없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된단 말입니다.

그럼 성령이 우리 눈을 예수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세요.

 

저기 봐라!

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너희 죄 때문에 죽으셨잖아요!

너 알겠니! 라고,,,

 

바울이 하나님 말씀 앞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고 탄식을 하자 성령이 바울의 눈을 예수그리스도에게로 돌려주잖아요.

아! 나의 이러한 연약함을 대신하여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지!

그래서 그리스도를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새 생명의 삶이에요.

 

저는 예수를 본받자고 하는데 시비 걸지 않아요.

예수님 본받자고 하는데 박수를 쳐 주어야지요.

그러나 그것을 신앙의 본질로 내어 놓는 것은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본질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義)를 내어 놓는 것이지 바리새인들처럼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본받았습니다! 라는 것을 내어 놓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본받자고 하는데서야 그 누가 시비를 걸겠습니까?

신자라면 당연히 예수처럼 살고 싶어 해야지요.

그런데 문제는 인간은 예수님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인데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이에요.

 

죄가 뭔가?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에요.

그럼 죄인은 생래적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추상같이 닦달한다고 할지라도 죄인에게는 소귀에 경(經) 읽기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소 보다도 못한 죄인들에게 말씀을 주셨어요.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죄인에게 말씀을 주셨다는 것은 다른 의도가 있다는 말입니다.

 

무슨 의도 인가요?

우리를 죄인 되게 하시려는 의도에요.

우리를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여서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을 거울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을 성경에 비춰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하는 인간과 현재 자기 꼬라지를 보라는 거에요.

니가 인간이 맞냐!

아니라는 겁니다.

뭐가 잘못 되었는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라는 말은 온전한 인간이 되라는 말이 아니에요.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라는 말은 우리가 독자적으로 구원을 따낼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점점 더 나아지라는 것도 아니에요.

천사로 변하는 것도 아니에요.

 

너희는 내가 바라는 인간이 아니란 것을 말해주려고 성경을 주셨어요.

그런데 인간들이 오해하기를 이렇게 살라고 주신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방인들은 못 살아도 하나님 백성들은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러한 사고가 바로 바리새인들이 사고에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을 따로 규정해 놓았어요.

바로 율법지킴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라고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지키며 살았어요.

그 누구도 바리새인들의 신앙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어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따랐어요.

모두가 조상들로부터 배워온 전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대로 사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이라고 생각하였어요.

 

이런 사상이 이 시대 교회 안에 그대로 자리 잡고 있어요.

성도라고 한다면 당연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서신이 모두가 명령법들로 되어 있으니 그 명령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교인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상식적으로 맞고 당연하니까요?

 

이들은 성경은 성도에게 주어진 말씀이고!

성령을 주신 것은 우리 힘으로 안 되니까 주셨다는 거에요.

이젠 성령을 받았으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들으면 그럴싸해요.

 

봐라! 성경이 다 이것은 해라!

저것은 하지 말라는 것으로 되어 있지 않느냐!

사도 바울이 심심해서 이런 말을 했겠느냐?

사도들이 농담한 줄 아느냐!

 

이러면 교인들은 주눅이 들어요.

성경이 그러하다는 데서야 어찌 항변 한단 말입니까?

상식적으로 봐도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잖아요.

 

상식이 다 버려 놓았어요.

상식으로 성경을 보니 상식적인 해석을 내어 놓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문자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으로 강조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게 바로 바리새인들의 사고에요.

이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가 지옥에 간 자들이에요.

예수님이 독사의 새끼라고 하면서 지옥에 가라고 했잖아요.

바리새인들은 왜?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가 지옥에 갔는가요?

이는 죄인의 상식으로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백성은 당연히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인 줄 알았어요.

하나님이 왜? 율법을 주었겠느냐!

그건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냐!

 

자기들은 하나님의 선민이기 때문에 충분히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조상대대로 율법지킴을 신앙의 근본으로 삼았어요.

그리하여 자식들에게 가르쳤고 지켜져 왔어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말씀대로 살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아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이젠 성령의 능력으로 새 생명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이는 유대인들이 하나님 백성이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과 똑 같아요.

 

그래서 내어 놓은 것이 구원 이후의 삶 곧 새 생명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인들에게 가르치기를 새 생명의 삶이란? 한마디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예수님을 본받고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다!

예수를 닮아야 한다고 합니다.

 

어느 개그 프로의 구호처럼 “신자가 신자다워야 신자지!” 라고 침 튀겨 가면서 강조합니다.

다 옳은 말이에요.

맞아요.

신자가 신자다워야 신자이지요.

 

그런데 그 신자다움이 무엇이냐 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신자다움이 뭐냐에요.

하나님이 신자다움을 요구하는 것과 같아야 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바라는 것과 다르면 아니에요.

우리가 아무리 난 신자답게 살았습니다! 라고 하여도 하나님은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쓰레기 취급을 해요.

 

가인의 제사가 정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쉬운 말로 하나님은 푸성귀는 싫대요.

하나님은 양고기가 좋대요.

하나님은 양고기에만 손이 가고 푸성귀에는 손이 안가요.

 

하나님 앞에 제사하기 전에 먼저 알 것은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 하는지를 아는 것이 급선무에요.

이걸 간과하면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모르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 차려 놓아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 잔뜩 상을 차려 놓고 왜? 안 잡수십니까!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서도 잡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안 먹으면 화를 내잖아요.

무엇을 근거로 회를 냅니까?

왜? 내 정성을 무시하느냐 라고 하면서 말이에요.

우린 가인처럼 꼭 자기 정성을 들고 나와요.

그리고 그것이 부정당하면 뿔따구가 나서 삐지잖아요.

 

신앙은 정성의 문제가 아니고 정답의 문제에요.

집을 짓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디에다 짓느냐가 중요해요.

괜히 모래 위에 지어놓고 홍수가 나서 떠내려가는 것을 가지고 원망하면 안 되지요.

하나님에게 사람의 성의를 보아서도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라고 하면 안 되어요.

홍수는 사람의 수고와 성의를 안 보아요.

 

장차 하나님은 의(義)로 심판 하세요.

무슨 의(義)에 거하는지 판단하세요.

율법에 의(義)인지 율법 외에 다른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義)인지 확인하세요.

행함이냐! 믿음이냐!

확인을 한단 말입니다.

 

행함은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다 무너지고 믿음은 반석 위에 지은 집처럼 남아 있어요.

그럼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요?

행함이 아니고 믿음이지요.

 

내 의(義)를 의지 하지 말고 예수그리스도의 의(義)를 의지하여야겠지요.

그런데 예수그리스도의 의(義)는 누가 의지한다고 했나요?

죄인이 의지 한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요.

 

알다시피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납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이 사실을 몰라요.

인간 자체가 죄 덩어리인줄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착하게 산 것을 선이라고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난 이렇게 착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복을 주세요! 라고 한단 말입니다.

착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당연히 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해요.

 

죄 아래서 태어난다 함은 모든 것이 죄란 말입니다.

죄인에게서 딱히 뭐가 죄입니까? 라는 말이 성립이 안 되어요.

살인을 해도 죄인이고, 살인을 안 해도 죄인이에요.

도적질해도 죄인이고, 도적질 안 해도 죄인이에요.

 

우리의 행실로 죄인의 굴레를 벗어 날 수가 없어요.

인간들이 이걸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을 하셨어요.

자기 백성들에게 말이에요.

 

여기에 선택된 민족이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지고 넌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을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폭로당하기 위하여 선택이 된 자들이에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지고 인간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는 일을 하세요.

 

그럼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의 죄를 어떻게 끄집어내는지를 봅시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에요.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말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입은 자란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행위와 상관없이 아브라함 언약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어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애굽에서 태어났어요.

이건 마치 성도가 죄 아래 태어나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은 애굽에서 태어난 자들을 광야로 빼내십니다.

그리곤 그들에게 율법을 줍니다.

이건 교회에 온 성도에게 하나님 말씀을 주신 것과 같아요.

 

왜?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하라 하지 말라고 하는 명령으로 가득찬 율법을 주셨을까요?

이는 율법을 가지고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죄인인가 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으로 하라 하지 말라 명령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명령이 인간의 본성과 반하는 명령들이에요.

인간들이 하고 싶은 것은 못하게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라고 합니다.

 

알다시피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하여 진 것이에요.

무슨 말인고 하니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란 말입니다.

죄를 안 지었으면 율법이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은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깔고 주어진 것이에요.

예를 들어서 율법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잖아요.

이는 역설적으로 너희는 하나님을 떠나 있는 자들이고 이웃을 해치는 자들이란 말이에요.

 

도적질 하지 말라는 말은 너희는 도적놈이란 말이에요.

간음하지 말라는 말은 너희는 간음하는 자들이란 말이에요.

살인하지 말라는 말은 너희는 살인자란 말이에요.

 

살인하지 말고, 도덕질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너희는 이런 자라는 말입니다.

너희가 지금 그러한 짓들을 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고 있으니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하여 준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죄 아래로 가두는 일을 하신 겁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구원 받은 자에게 율법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걸 유념하세요.

 

왜? 구원받은 자에게 율법을 주었는가요?

죄를 고발하여 하나님의 선택으로 되어진 구원이 은혜에 속한 것임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율법의 끝에는 이런 죄인이 용서 받고 산다는 것에 감사가 나와야 하는 것이에요.

나 율법 잘 지켰는데요! 라고 나오면 이건 틀린 것이에요.

그건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고 어긴 것이 되어요.

 

율법의 정답은 “나는 죄인입니다” 에요.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에요.

예수님의 의(義)를 붙잡는 것이에요.

 

신약의 모든 성경은 율법과 같아요.

구약에는 아브라함 후손에게 율법을 주었듯이 신약에서도 성도들에게 성경을 주었어요.

이렇게 되면 구약의 율법이나 신약의 성경이나 모두가 율법과 같은 위치에 있게 되어요.

모두가 구원 받은 자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니 구약의 율법이나 신약의 성경이나 동일하게 죄를 고발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에요.

죄를 고발하는 이유는 은혜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너희가 이런 죄인인데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하나님 말씀으로 자기가 죄인임을 알아야 해요.

이런 죄인이 용서받고 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우린 성경을 보면서 놀라야 해요.

세상에 하나님이 내 죄를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대요!

우째 이런 일이 있나요!

여기에 감사하면서 예수님의 그 피 흘리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걸 새 언약으로 사는 새 생명의 삶이라고 해요.

 

내가 죄값으로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주셨어요.

이런 놀라울 때가 있나요!

우린 성경을 통해서 이 사실을 알게 되어요.

그러니 성경 말씀이 십자가의 은혜를 더욱 더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성경도 구약의 율법처럼 인간의 본성과 반하는 것들로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죄를 깨닫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으면 안 되어요.

 

나 구원받았다는 것에 눈을 두지 말고!

내가 죄에서 구원을 받는데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알아야 해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던 자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은혜 아래 있음을 알아야 해요.

 

신앙생활이란? 어느 영역 아래 있느냐의 문제이지 내가 얼마나 변했느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아담 아래 있느냐!

예수 아래 있느냐! 에요.

 

아담 안에 있으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 하여도 지옥에 가고!

예수 안에 있으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해도 천국에 가요.

그 이유는 천국과 지옥은 예수 안이냐 밖이냐 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괜찮은가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누구의 혜택으로 살고 있는지 아는 것이에요.

나를 감싸고 있는 능력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감싸고 있는 것이 아브라함 언약이듯이,

신약의 성도를 감싸고 있는 것도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에요.

 

그러므로 새 생명의 삶이란? 내가 얼마나 하나님 말씀대로 사느냐가 아니고!

내가 악한 죄인임에도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고 산다는 것을 깊이 알아가는 것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로 용서받고 산다는 것이 자랑되어져야 해요.

성령은 예수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을 죄라고 고발을 해요.

 

죄란? 예수님의 대속을 잊는 것이에요.

 

성령은 날마다 우리의 눈을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세요.

내가 맞아야 할 그 매를 예수님이 대신 맞으셨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피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게 하세요.

이것이 구원 후의 삶이고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삶이에요.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옛 생명의 삶이지 새 생명의 삶이 아니에요.

새 생명의 삶이란? 말씀대로 삽시다! 가 아니라 예수 믿읍시다! 가 나와야 해요.

그래야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새 생명의 삶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우리 옛 사람을 죽이기 위함입니다.

옛 사람은 율법이 주장을 해요.

그러니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어요.

 

율법에 의하여 더 이상 정죄당하지 않아요.

우리가 사는 동네가 달라요.

과거엔 율법이라는 동네에 살았지만 이젠 은혜라는 동네에서 살아요.

 

은혜 라는 동네에서 사는 것을 새 생명의 삶이라고 해요.

그러니 새 생명의 삶에는 은혜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는 죄를 가리기 위해서 주어졌어요.

그러니 은혜 아래서는 죄는 죽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보면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고 하지요.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산 자로 여길지어다 라고 하지요.

 

여기란 말은 믿으란 말입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으라고 하는 거에요.

 

이렇게 이기고 사는 것이 새 생명의 삶이에요.

마지막으로 당부 합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지 마세요.

우리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설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우린 장차 에덴동산으로 돌아갑니다.

 

돌아갈 때 하나님이 입혀 주신 옷을 입고 가야 해요.

우리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대신 죽어주신 희생 제물의 가죽 옷이에요.

그 가죽 옷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의(義)에 옷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신부들에게 이 옷을 입혀 주세요.

이름하여 세마포입니다.

세마포란 베옷이에요.

 

베옷은 누가 입는지 아세요.

죽은 자들이 입는 옷이에요.

죽은 자에겐 자기 행실이 없어요.

 

오직 죽은 자 안에서 사신 분의 행실만 있어요.

우리 안에서 사신 분이 누구입니까?예수님이에요.

 

우리는 예수님의 행실을 입고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그 행실을 의지하여 사세요.

그것이 새 생명의 삶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 안에서 살고 있음을 증거하는 새 생명의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를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제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로서 새 생명 가운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하늘빛사랑 blog https://blog.daum.net/day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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