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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31강. 하나님과 안녕하신가요 (롬 5:1-11)

by coroa 2022. 9. 18.

롬 5:1-1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1강. 하나님과 안녕하신가요 (롬 5:1-11)

롬 5:1-1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정낙원 목사

 

여러분은 하나님과 안녕하신가요?

오늘 본문을 직역하면 당신은 하나님과 사이가 좋습니까?

예수 믿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십니까? 라는 말입니다.

 

난 과연 하나님과 화평한가?

하나님 앞에서 즐거운가?

스스로에게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예수님의 의(義)로 구원을 하십니다.

우리 의(義)가 아니고 예수님의 의(義)로서 입니다.

믿음이란? 예수님 의(義)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을 믿고 실제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자로서 정죄함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義)로 의로워졌다는 것을 믿는 것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어서 믿게 해 주셔야지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어주심으로 이루신 그 의(義)를 믿어지게 하십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게 됩니다.

이를 두고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여겨 주십니다.

 

성도는 의로운 자가 아니고 의롭다 여김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게 엄청 중요한 말입니다.

의로운 것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있습니다.

의로운 것은 독자적으로 의로운 것을 말합니다.

이건 죄가 없는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이런 사람을 의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실제로는 의롭지 않은데 외부에서 전가된 의를 뒤집어씌워서 의롭다고 인정을 해 주는 것입니다.

 

성경의 증거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이라는 죄인에게서 나왔습니다.

이는 인간 자체가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후천적(後天的)으로 뭘 잘못해서 죄인이 아니고,

선천적(先天的)으로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자기 행위와 상관없이 죄인인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본질 자체가 죄인입니다.

죄인에게는 특별한 죄가 없습니다.

모든게 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자체를 죄인으로 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를 가지고 너는 나쁜 짓을 많이 했으니 죄인이고,

너는 착하게 살았으니 의인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인간들 입장에서는 인간들이 행하는 것 속에 선과 악이 있지만 하나님 앞에선 모두가 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타고난 죄인인 인간에게서 나오는 선한 행실과 악한 행실은 무의미합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인간에게 의미를 두는 것이 하나님 앞에선 죄가 되는 것입니다.



죄인은 독자적으로 의인이 될 수 있는 길이 원천적으로 불가능 합니다.

죄인이 개과천선해도 그 행실로 의인이 되지 않습니다.

부정모혈로 태어난 사람은 그 어떤 짓을 하여도 죄인인 아담의 유전자를 바꿀 수가 없습니다.

죄 아래서 태어난 이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 한 죄인인 것입니다.

 

의인이 되려면 의인에게서 태어나야 합니다.

의인이 조상이라야 합니다.

의인의 유전자(遺傳子)를 가지고 태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엔 의인이 없습니다.

 

의인은 오직 하늘나라에만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오신 분만 의인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만 의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이 예수님의 의(義)를 입혀 주십니다.

이걸 의롭다 여겨 주신다고 합니다.

의롭다 여겨 주신다는 말은 의롭지 않기 때문에 의롭다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죄를 간과해 주신다고 합니다.

 

성도는 의인이 아니고 “의롭다 여겨 주심을 얻은 자”입니다.

 

의롭다 여겨 주심이 되려면 항상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바탕에 깔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난 죄인인데 예수님 때문에 의롭다 함을 입었어!” 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되어요.

예수님 안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의로움이 드러나면 안 되고 예수님의 의(義)가 드러나야 한단 말입니다.

 

이걸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讚美)한다고 합니다.

신앙고백이 나는 예수님의 의(義)를 입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니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에게는 항상 예수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신앙생활이란? 이 예수님의 의로우심으로 산다는 것을 증거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과 화평한 자라고 합니다.



화평이란? 죄인의 세계에는 없습니다.

죄가 없는 곳에만 있어요.

의인들이 누리는 것이 화평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의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건 우리더러 화평을 만들어 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소망을 만들어 내서 즐거워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에게는 예수로 말미암은 화평이 주어지고 소망으로 인한 즐거움이 본능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건 산상보훈의 팔 복과 같습니다.



팔 복은 우리더러 복을 따 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런 일을 하면 복을 주겠다는 뜻이 아니에요.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복(福)을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복을 받은 증거로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복을 탁 깨트리면 그 속에 팔 복이 들어가 있어요.

 

심령이 가난해 지고!

애통함이 일어나고!

온유해 지고!

의에 주리고 목 말라하고!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있고!

마음이 청결하고!

의(義)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담겨져 있습니다.

 

마치 흥부가 박을 타니 그 속에서 온갖 재물이 쏟아진 것과 같습니다.

복을 받으니 그 속에서 팔 복이 우르르 쏟아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팔 복은 복을 받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자연적인 현상인 것입니다.



여러분 보너스 받으면 기분이 좋지요.

기분이 좋으면 어찌 합니까?

인심이 후해지고 관대해지지요.



팔복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음 받으니까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긍휼이 나오고 화평이 나오고 예수 때문에 욕을 먹어도 기분이 좋은 겁니다.

팔 복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없어요.

오직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만 있습니다. 

이게 이방인과 성도 간에 차별성입니다.



이러한 것이 없는 자는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팔 복은 구원 받은 성도됨의 표식과 같아요.

구원을 받고 보니까 이런 성향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서 이러한 마음이 일어나게 하세요.



그렇다고 우리가 온전하게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린 온전하게 살지 못해요.

그래서 이 말씀이 우리의 실존을 늘 고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이 말씀 앞에 서서 우리의 죄가 고발당하고 그럼에도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함에도 주눅 들지 않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화평한 자로 사는 것입니다.

비록 죄인이지만 죄 없는 자처럼 의롭다 여기심을 얻고 용서 받은 것을 즐거워하며 그 은혜를 찬미(讚美)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의롭다 여김을 얻은 성도들이 믿음으로 사는 신앙생활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겨 주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의롭다 여김을 입은 반응들이 나타납니다.

그게 죄 아래 있으면서도 의로운 자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한 자로 사는 것입니다.

 

갓난아이라도 살아 있으면 뭔가 꼬물거립니다.

그 꼬물거림이 난 살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꼬물 꼬물 하면서 엄마 나 살아 있어요!

기억 하세요!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에요.

믿음이 예수의 생명을 토하여 내게 합니다.

믿음이 그 안에서 뭔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여기심을 입은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들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의롭다 여겨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의롭다 여겨 주심 속에는 우리가 행할 것은 없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만 들어 있어요.

그러므로 의롭다 여겨 주심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누리는 누림이지 우리가 무엇인가 하여야 하는 행함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예수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마음으로 사는지에 대하여 살펴볼까합니다.

즉 의롭다 하심을 얻는 성도는 그 의로움으로 주어지는 혜택을 어떻게 실제로 누리는지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의(義)란? 옳음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겨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을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의(義)가 왜? 필요한가요?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하고는 상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만 상종을 해요.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빛이 어둠과 함께할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할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에요.

의로운 분이에요.

그럼 하나님과 교제를 하려면 의로워야 합니다.

그런데 우린 죄 아래서 태어난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죄인에게 아들인 예수님의 의에 옷을 입혀 주시곤 의롭다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보여요.

우리는 예수님의 의에 옷을 입고 아버지 앞에 의로운 자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의로우신 예수님의 의(義)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수님의 의에 옷을 입고 온 성도를 의롭다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해 주면 하나님하고 사이가 좋아지게 됩니다.

하나님과 사이가 좋아진 상태를 오늘 본문에서는 화평(和平)이라고 합니다.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과연 나에게도 이런 화평과 즐거움이 있는지!

쉬운 말로 하나님과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오늘 본문을 가지고 저와 여러분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야! 정낙원이 너~ 나랑 사이가 좋으냐!

너~ 나랑 있는 것이 즐겁냐!

너~ 나하고 놀고 싶으냐!

너~ 내 앞에서 거리낌이 없이 떳떳하니! 라고 물어요.

 

여기에 제가 예! 전 하나님과 사이가 좋은 데요!

하나님 앞에 거리낌이 없는데요! 라고 하여야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뭔가 찜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기가 껄끄러우면 온전한 믿은 가운데 있지 않다는 증거가 되어요.

 

생각해 보세요.

우린 죄로 인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의롭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의롭게 되었다 함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건 누가 지어낸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고 실제에요.

예수님이 실제로 죽었고 실제로 살아났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구원도 실제인 겁니다.

구원을 실제로 믿게 하려고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는 실제로 하나님과 화평하고 살아갑니다.

 

이 사실이 진실로 믿어진다고 한다면 어떤 반응이 나타나겠습니까?

찬송이 저절로 나오고 어깨춤이 저절로 춰지지 않겠어요.

당연히 흥얼거려지고 기쁨이 충만하여서 즐거워하지 않겠느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 고맙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하지 않겠느냐 이 말이에요. 

그 큰 은혜를 하나님이 베풀어 주셨는데도 꿀 먹은 벙어리 마냥 가만있을 수 있겠느냐 에요.



기뻐하지 않고 즐거워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 것을 관념으로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가 알고 있다는 복음은 지식이에요.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하셨습니다.

어떤 왕이 일만 달란트 빚을 진 자를 불러서 다 탕감을 해 주었어요.

일만 달란트란 열 번 죽었다 깨어나도 다 갚을 수 없을 만큼 큰 액수에요.

엄청난 은혜를 입은 겁니다.

 

그럼 어떤 마음이 생기겠어요.

얼씨구나~ 절씨구나~

춤이 저절로 춰지지 않겠어요.

빚을 다 탕감 해준 왕에게 감사와 찬송을 드리겠지요.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 할 것이 아닙니까!

탕감 받음이 기쁨으로 나타나게 되겠지요.

 

그런데 이 종은 그런 기쁨이 없었습니다.

탕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나중에 형편이 되면 갚아야 할 것으로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 탕감 받음이 기쁘지 않는 겁니다.

이것이 자기에게 빚을 진 채무자를 대하는 모습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종은 금방 왕으로부터 엄청난 탕감을 받았어요.

그런데 자기에게 빚진 채무자를 만났어요.

그를 보자 화가 나서 너~ 왜? 내 돈 갚지 않느냐! 고 두들겨 팹니다.

이건 탕감 받은 자의 자세가 아니에요.

 

어쩌면 이 시대 많은 신자들이 탕감 받은 종처럼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요.

입술로는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았다고 하는데 용서 받았다는 것이 하나도 기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아요.

 

이건 예수님의 구원 이야기를 실제로 듣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신 예수가 아니고 신학(神學)으로 배운 예수여서 그래요.

그러니 신앙이 지식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은 반드시 잘난 값을 요구해요. 

안다고 하는 그 복음을 근거로 잘난 척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맨 날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싸울 줄만 알았지 감사하며 서로 사랑하며 이해하고 살아가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지식 속에서는 예수님의 마음이 나오지 않아요. 

듣고 배운 것이 지식이다 보니 신앙생활을 짐스러워하고 있어요.

신앙생활을 짐스러워 한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짐스러워한다는 것은 자유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 안 믿어진다는 말이에요. 

안 믿어지니 자기 쪽에서 화평 거리를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으로 이정도면 되겠다 하는 것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화이고 죽도록 충성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본인 스스로가 죽도록 충성하지 않으면 믿음 없는 것으로 느껴져서 불안하고 찜찜해요.

그래서 자기 몸을 학대하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마치 빚 갚는 식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채무를 지고 그 부채를 갚아야 한다는 식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하고 자기 행함으로 화평하고자 해요.

그러니 자기 행함으로 좋았다 나빴다 널뛰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령이 임하면 예수가 믿어지고!

예수가 믿어지면 하나님과 화평이 이루어지고 즐거워하게 되어있어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초대교회가 생깁니다.

이들은 구원 받음이 너무도 기뻐서 날마다 모였어요.

이건 누가 시키지 않았어요. 

그 안에서 일어나는 기쁨을 주체 할 수가 없어서 날마다 모이는 겁니다.



교회로 모여서 서로 교제 했어요.

서로 구원받은 그 은혜를 찬미했어요.

하나님께 감사했어요.

 

어~ 김 집사님도 구원 받았네!

저도 구원 받았어요!

아니~ 정 장로님도 구원을 받았네!

아니~ 저기 세리와 창기도 구원을 받았어!

세상에! 우째 이런 일이!

 

율법 아래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이 일어났네!

야! 이거 장난 아니네!

세상에 나 같은 죄인이 구원을 얻다니 놀랍고 놀라워!

집사님 장로님 권사님 성도님 우리 모두 즐거워해요!

 

이게 교회에요.

이 기쁨을 나누는 곳이 교회에요.

이러한 구원의 즐거움이 있는 사람은 교회에 날마다 모이게 된 것입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모여요.

 

교회는 일하러 모이는 곳이 아니에요.

한 성령 안에서 구원 얻음의 즐거움을 나누고 찬미하는 곳이에요.

잔치 하러 모인단 말입니다.

교회의 모임은 장차 천국에서의 모임을 미리 맛보는 것이에요.

 

그래서 저는 주일날 식사는 최고로 맛나게 준비하라고 합니다.

잔치 집에는 먹을 것이 풍성해야 합니다.

말씀도 풍성해야 하고 식사도 풍성해야 해요.

교회가 자꾸 오고 싶어져야 해요.

 

자주 모이고 싶어져야 해요.

서로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이야기 하고 싶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구원을 즐거워하고 하나님과 사이좋게 지내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도 화평을 이루어주셨지만 사람간의 관계에도 화평을 이루어 주셨어요.

세상적인 인간의 조건이라는 막힌 담을 헐어 주셨어요.

 

신분의 벽도 허물고!

학벌의 벽도 허물고!

빈부의 벽도 허물고!

인종의 벽도 허물었어요.

 

그런데 이 시대 교회는 허물어진 벽을 전부 다시 일으켜 세워서 만들었어요.



교회 안에 신분의 벽이 쌓이고!

학벌의 벽이 쌓이고!

빈부의 벽이 쌓이고!

인종의 벽이 쌓이고 있어요.

 

이건 마치 무너진 여리고 성을 다시 쌓는 것과 같아요.

여리고 성을 다시 쌓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아세요.

죽어요.

 

여호수아 6장을 봅시다.

 

수 6:26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

 

여리고 성이란? 세상을 말해요.

여리고 성을 쌓지 말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우리 안에 세상 가치를 쌓지 말라는 말입니다.

세상 가치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거에요.  

교회로 말하면 교회 안에 세상 가치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세상 가치로 성도를 차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는 목사들이 인간의 조건으로 차별하고 있어요.

교인들을 세상의 것으로 빈부(貧富)와 귀천(貴賤)으로 등급을 나누었어요.

고급과 저급으로 나누어졌어요.

돈으로 나누어 버렸어요.

믿음으로 판단하지 않고 돈으로 판단해고 있어요. 


세상에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게 교회 안에서는 “유전 직분자”, “무전 직분자 못됨” 이 되고 말았어요.

돈 있으면 장로 권사가 되어도 돈 없으면 될 수가 없어요.

많이 배운 사람은 기관장이 되어도 못 배운 사람은 될 수가 없어요.

결국 세상과 하나가 되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막힌 담을 헐었는데 교회가 담을 다시 쌓고 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무너뜨린 여리고 성을 목사들이 쌓고 말았어요.

여리고 성을 다시 쌓으면 장자가 죽고 계자가 죽는다고 하지요.

 

이는 영적으로 성도들의 신앙이 죽는다는 말입니다.

신앙이 죽는다는 것은 신앙이 관념이 되고 만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 죽으니 하나님과 사이가 멀어지고 즐거움도 없는 것입니다.

신앙이 외식으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가 권력집단이 되었어요.

그래서 교회 안에서 자기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 믿음이 없어도 믿음 있는 척 하고 마음이 즐겁지 않으면서도 즐거운 척 연기하는 것입니다.

체면 때문에 믿음 있는 척 하는 겁니다.



이걸 외식이라고 합니다. 

신앙이 외식으로 연기(演技)를 하다가 보니까 어떨 땐 믿음이 엄청 좋은 것 같다가도 어떨 땐 저 사람이 과연 예수를 믿기는 믿는가 할 정도로 의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자기 행함의 결과로 인하여 울었다 웃었다 미친 여자 널뛰듯이 하고 있어요.

 

이 모두가 죽은 말씀을 들어서 그래요.

유정란(有情卵)을 먹어야 하는데, 무정란(無情卵)을 먹어서 그래요.

성령으로 감동된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인간의 지식으로 알아진 학문적인 설교를 들어서 그래요.

 

신학이라는 학문으로 알아진 예수는 생명을 주지 못해요.

학문으로 알아진 예수를 믿게 되면 신앙생활이 관념으로 흐르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하고 즐거워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 신앙이 왜? 관념으로 흐르게 되었는지 잠간 살펴보고 갑시다.

어떻게 복음이 다른 복음으로 변질이 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잘 이해하시고 들으세요.

 

이 시대 설교들은 복음을 신학으로 담론(談論)화 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유명한 철학자인 ‘오쇼 라즈니쉬’ 라는 사람은 불교를 깨트려야 붓다가 보이고, 기독교를 깨트려야 예수가 보인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불교와 기독교라는 종교가 붓다와 예수님의 가르침에 본질을 가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붓다와 예수님의 가르침이 불교와 기독교라는 종교화가 되면서 변질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불교와 기독교가 붓다와 예수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붓다와 예수는 종교를 뛰어 넘어 계시는 분들인데 인간들이 그 분들의 가르침을 불교나 기독교라는 종교 속에 가두어서 화석화시켜 놓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붓다나 예수는 좋아해도 불교나 기독교는 반대한다고 했어요.

 

이건 예수님도 말씀하셨어요.

주의 전(殿)을 사모하는 열심이 주(主)를 삼켰다고 하셨어요.

바울은 너희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으로부터 모독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이 시대 버전으로 말하면 교회가 예수를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럼에도 성경의 가르침과 기독교를 보니 기독교는 예수를 믿지 않고 있더란 겁니다.

현존의 기독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틀을 깨부수어야 예수가 보인다고 설파한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이 불교나 기독교라는 종교 교리 속에서 죽어 버렸습니다.

종교가 붓다의 가르침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왜곡시켜 자기들의 종교에 유익이 되도록 편집하고 각색하여서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기독교를 폄훼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니 오해하지 말고 잘 들으세요.

예수님은 기독교를 만들지 않았어요.

인간들이 예수를 이용해서 기독교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기독교 속에다 예수를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기독교를 지키려고 하다가 보니까 예수님을 자기들이 만든 신학(神學)과 교리(敎理)라는 틀 속에다가 가두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독교가 만든 신학과 교리 속에 가두어 놓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신학(神學)이라는 학문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예수를 해석하고 있어요.

성경을 해석하는 틀을 학문화 하였단 말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신학이 해석당하여야 하는데 도리어 기독교가 만든 신학으로 예수님을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이라는 틀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아야 하는데 도리어 신학이라는 틀 속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이건 주객이 전도가 된 것입니다.

 

어제 안철수 교수가 “힐링캠프” 라는 TV 토크쇼에 나와서 이런 말을 했어요.

 

우리가 책을 보는 것은 내 사고의 틀린 점을 발견하고 수정하고자 보아야 하는데,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책 속에서 자기 생각을 긍정 받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책을 보아도 보다 넓은 사고와 세계관을 가지지 못하고 자기 안에 가두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자기 주변에 벽돌을 쌓아서 남이 침범하지 못하게 자기 성(城)을 구축하여 폐쇄적인 인간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이 모든 것은 이분법적(二分法的)으로 본다는 거예요.

이분법적으로 본다는 것은 흑백 논리로 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하고 다르면 배척한다는 것입니다.

 

무진장 중요한 이야기를 했어요.

제가 늘 주장하는 말을 그 분이 해 주었어요.

이건 목사나 교인들이 귀담아 들어야 해요.

 

전 이 말을 하나님의 은혜로 보는 사람과 법으로 보는 사람으로 비교하고 싶어요.

하나님의 은혜로 보는 사람들은 남을 통하여서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안목을 넓혀가고 고쳐가게 되어요.

 

그러나 법으로 보는 사람은 자기하고 비교하여 편 가르기를 해요.

법에 속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그 은혜를 보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깊이를 더 많이 더 넓게 더 깊게 알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기가 아는 것을 지키기에 급급해요.

그러다 보니 자기가 하는 것은 다 맞고 옳으며 남이 하는 것은 다 틀렸다고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자존심 지키기와 자기 방어에 급급하는 것입니다.

 

안철수 교수의 말을 이 시대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목사들이 성경을 보면서 자기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 들어야 하는데 이 시대 많은 목사들은 꺼꾸러 자기 생각을 성경으로 추인을 받고자 해요.

그러다 보니 성경이 교과서가 아니고 참고서가 되고 말았어요.

 

이건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어보는 것에도 마찬가지에요.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는 것은 비판하고자 듣지 말고 얻을 것이 있는 지로 들어야 해요.

혹시 내가 모르는 것을 저 목사님은 알고 있지 않을까!

내가 알지 못하는 은혜를 하나님께서 저 목사님에게는 주시지 않았을까!

 

다 틀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 속에서도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들이 있어요.

그래서 분별 할 수만 있으면 들으라고 합니다.

 

어떤 목사들은 자칭 자기 혼자만 복음 안다고 해요.

이런 사람들이 특징은 남의 말을 안 들어요.

이는 이미 자기 안에 고착화 된 신학이라는 틀을 가지고 있어서 그래요.

모든 것을 자기가 가진 그 틀 안에서 판단해요.

 

그러니 성경을 자기 맘대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의 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어떤 성경 강의를 해도 본문을 주해(註解)하지 않고 성경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인용하는데 사용해요.

왜? 그런가하면 자기 신학에 자기가 가두어져 있어서 그래요.

 

설령 자기주장이 틀렸다고 하여도 고치지 않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서라고 자기 합리화를 해요.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용납하지를 못해요.

잘못을 인정하면 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마치 다니엘서에 나오는 다리오 왕처럼 자기가 만든 법에 걸려서 옴짝 달싹 못하는 것과 같아요.

이게 어리석음이에요.

 

그러니 신앙이 아주 편협적이고 폐쇄적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이 와서 이야기를 해도 안 들어요.

자기 신학으로 벽돌을 쌓아서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게 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아요.

 

법에 속한 사람의 특징이 자기만 옳고 남은 다 틀렸다고 하면서 정죄와 심판을 일 삼아요.

상대를 부정함으로서 자기의 옳음을 증명하고자 해요.

자기 교회 자기 조직만 옳고 구원이 있다고 해요.

이단들이 다 이래요.

 

이런 사람들에게 배우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에요.

자기만 옳다고 해요.

성경을 보아도 자기가 추종하는 목사의 말을 가지고 해석을 하게 되어요.

성경으로 자기 목사가 맞는지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도리어 반대로 자기 목사의 어록(語錄)들을 가지고 성경을 보고 있어요.

 

그러니 이들에게는 성경은 보조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목사의 설교 집은 읽어도 성경은 안 보아요.

왜냐하면! 스스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성령이 감동케 하는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목사의 말이 하나님 말씀을 대신하고 있어요.

 

목사는 은연중에 교인들을 자기 종으로 삼아 버려요.

자기를 떠나면 죽는 줄 알게 만들어요.

그러니 여기에 중독이 된 사람들은 다른 목사님의 설교는 듣고자 하지 않는 겁니다.

끝내 그 집단의 올무에 가두어지고 마는 겁니다.

 

이런 목사들의 특징 중 하나가 현란한 말로 설교를 어렵게 하여서 철학적으로 담론화 해 버려요.

자기 설교는 유식한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처럼 고상한 말로 고급화하고 차별화 시켜 놓아요.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은 고급한 신자라고 착각을 하게 하여 스스로 엘리트 의식을 갖게 만들어요.

 

결국 스스로 자기가 만든 신학이라는 벽돌 속에 가두어져서 자기 말에 동의하지 않는 자는 다 이단으로 정죄하고 심판하는 마귀 짓을 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심판주의 자리에 앉아서 자기 신학으로 모든 사람들의 신앙을 판단해요.

이러한 일들은 어제 오늘 있는 일이 아니고 어느 시대이고 늘 있어 왔어요.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가 그랬어요.

유대교는 자기들 신학으로 예수를 판단했어요.

그런데 어찌 되었나요?

 

예수님이 그랬지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고 했지요.

화석화된 율법으로 가르치니 마음에도 없는 율법 지킴이 되고 만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신학이라는 화석화된 말씀을 가르치니 교인들이 신앙이 외식으로 흐르게 되는 겁니다.

입으로는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정하는 일들이 나타난단 말입니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되고 말았어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담론이 되어 버렸어요.

그냥 지나기면서 이야기하는 그저 그렇고 그런 이야기 거리가 되고 말았어요.

 

유대교는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들 신학으로 도저히 담아 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이단이라고 죽인 겁니다.

유대교 신학이 예수를 죽였듯이 이 시대도 신학이 예수를 죽이고 있어요.

이상한 괴물 신앙을 양산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쇼 라즈니쉬’ 처럼 기독교를 허물어야 예수가 보이고!

안철수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책을 보면서 자기 사고의 벽을 허물고 다른 사람이 보는 세계관을 볼 수 있는 안목을 넓혀야 한다는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성도는 성경을 보면서 늘 자기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고발당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절대로 성경에서 자기 신앙을 추인 받고자 하지 마세요.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를 의인의 자리에 앉히지 말란 말입니다.

우리가 앉아야 할 자리는 죄인의 자리에요.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개처럼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자리여야 해요.

 

제가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때 성경 속에서 나는 항상 옳은 자 편에 세워 놓고 보았어요.

그 땐 성화와 열심과 충성이 대단 했거든요.

그러니 내 행위를 근거로 나는 당연히 믿음이 있는 자라고 판단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서 불순종하는 자들을 보면 법이 동원 되어서 분개하여,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라고 하면서 나 같으면 저러지 않을 텐데 라고 하였어요.

이런 놈들은 죽어도 싸다고 했어요.

그런데 은혜를 입고 보니 내가 바로 성경 속에서 불순종하던 그 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들 속에서 내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젠 성경 속에 불순종한 자들을 보면 주여! 제가 바로 이 놈입니다!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라는 고백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성경을 보아도 내 신앙 있음을 추인하는 식으로 보았는데 이제는 성경으로 내 신앙 없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니 옛 날에는 할 말이 많았는데,

이제는 할 말이 점점 줄어들고 입을 닫게 되는 것입니다.

옛 날엔 남을 엄청 정죄하거 비판하였는데 이젠 그러지 못하겠어요.

누가 다른 말을 하여도 이해하게 되어요.

그래서 저는 지금 누가 남을 비판하면 그러지 말고 그 사람이 예수를 부인하지 않는 한 참고 기다리자고 합니다.

 

나도 과거엔 저랬었는데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나를 여기까지 인도해 오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비록 누가 나와 다른 말을 하여도 성장통이려니 생각하고 참는 것입니다.

혹여 논쟁이 생겨도 다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전 이렇게 봅니다” 라고 말하는 것뿐이지 누굴 비판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왜냐하면! 주의 백성이라고 한다면 주님의 열심이 반드시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한 자로 만들어 가실 줄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바로 그 증인이에요.

내가 바로 비판하고 정죄하고 혼자 복음 다 안다고 나대던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주여 제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는 자리로 가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주의 일하심이에요.

 

이젠 누가 싸움을 걸어와도 참아요.

때리면 맞고!

욕하면 욕을 먹고!

제가 개과천선(改過遷善)이 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내 안에서 간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간다는 것이 삶으로 체휼되었고 실제로 여기까지 그래 왔기 때문입니다.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그 주님이 동일하게 자기 백성들도 반드시 신학이라는 틀을 벗어나 생명 가운데로 인도하실 줄을 믿기 때문에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어요.

여러분도 그렇게 간섭을 하세요.

지금까지 간섭해 오셨고 앞으로도 간섭해 가실 것입니다.

일을 시작하신 이가 끝 날까지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아요.

당신께서 언약 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 내고야 마세요.

그러니 안심하고 넉넉히 기다리세요.

 

누가 복음을 알고 예수를 안다고 하면서 말이 많아진다는 것은 뭔가 잘못 되었어요.

진정으로 복음을 알고 예수님을 깊이 알게 되면 말이 적어지고 입을 닫게 되어 있어요.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바로 만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면서 자기 입을 닫았어요.

 

인간들은 타고난 우상성을 가지고 있어요.

 

이건 본능에 속하였어요.

우상성이란? 신의 일하심을 고정화 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신의 일하심을 고정화 시키면 신의 일하심을 자기 수준으로 이해하고 단편적인 사고로 신을 판단해 버려요.

 

이런 사고로 하나님을 이해한 자들이 바로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던 유대인들이었어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유대교라는 틀 속에 가두었어요.

유대교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시간과 공간 속에 가두었어요.

안식일과 성전 속에 가두어 놓았어요.

율법에 가두어 버렸어요.

 

그러니 율법을 벗어나 일하시는 하나님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정해 놓은 율법에 틀을 벗어난 행동을 하니 자기들 신학으로는 도무지 용납 할 수가 없으니까 이단이라고 하여서 죽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이 시대 교회 안에서 그대로 일어나고 있어요.

 

전도서의 말씀처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예전에도 이미 있었던 일들이에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에요.

해 아랜 새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죄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옛날에 유대인들이 하던 짓들을 지금도 교회들이 똑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란 이처럼 돌고 돌아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해요.

그 어느 때의 인간도 죄를 이기지 못해요.

죄가 항상 인간을 장악하고 있는 한 동일한 죄성들은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역사는 지금 나의 자화상이고 나를 보게 하는 거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나타남은 역사를 가지고 정형화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생명은 역사를 뛰어 넘어 있어요.

고정되어 있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의 나타남을 한마디로 이렇다 라고 신학으로 이론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도 그래요.

성도의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각 사람마다 살아가는 삶의 환경에 따라서 모습도 다르게 나타나요.

또한 인간은 자기 몸의 컨디션에 따라서 신앙의 표현도 다양하게 나타나요.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안목도 다르고 표현하는 방법이 다 다르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이렇게 하세요 저렇게 하세요 라고 정형화 시킬 수 없단 말입니다.

각자 깨달아지는 대로 각자 받은 은혜대로 사세요 라고 하여야 합니다.

성령께서 살게 하신 삶 속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일하심이 묻어나게 되어 있어요.

우린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찬미하면 됩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의 생명에 움직임이에요.

예수님이 그 안에서 살아서 역사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어디에 가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형화 된 틀 속에 가두고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세요 라고 강요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교에서는 신앙생활을 율법이라는 틀을 만들어서 가르쳤어요.

율법이라는 틀에 가두어서 강요하였어요.

그러다보니 교인들의 신앙이 화석화 되어버린 것입니다.

기쁨이 없고 도리어 신앙생활이 슬픔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초림 당시 유대교인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 신앙생활을 하였어요.

 

유대교 신앙 모습은 지금 이 시대 교회들의 모습과 동일해요.

 

이 시대도 교인들의 신앙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었어요.

신앙은 구원의 즐거움을 감사하면서 누리는 누림인데 그 누림은 온데 간데 없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고 하는 강박감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만 덩그러니 어깨에 짊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의 촛점이 “무엇을 믿을까요” 는 없고 “무엇을 할까요” 에만 맞추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유대교처럼 자기들 신학으로 교인들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신학 무용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신학 절대주의를 비판하는 거에요.

교리가 필요해요.

하지만 신앙을 교리 속에 가두면 안 되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리를 넘어서 인간을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는 교리를 참고 하되 교리가 설교되어지면 안 되고 복음이 증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이 신학에 가두어지면 예수님의 이야기는 담론화 되어요.

담론(談論)이란? 이야기꺼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 예수님의 십자가 도가 담론이 되다가 보니 알면 좋고 못 알아도 아쉬울 것이 없는 그런 이야기가 되고 말았어요.

신앙생활이 누가 누가 예수에 대하여 많이 아는가 지식 쌓기로 경쟁하고 있어요.

지식 쌓기가 되다가 보니 변론하는 신앙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 모두가 신학이라는 틀로 예수를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학문으로 배운 예수이기 때문에 예수로 살아가는 삶은 없고 말만 무성한 것입니다.

십자가 도가 교인들의 삶 속에서 생명으로 나타나지 않고 이론이 되고 말았어요.

믿음이 지식이 되고 말았어요.

그러니 복음으로 변론을 일삼고 논쟁하고 파당을 짓고 분쟁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지식은 반드시 변론을 불러오고!

변론은 반드시 논쟁을 일으키고!

논쟁은 반드시 파당을 짓게 하고!

파당은 반드시 다툼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사도 바울은 이런 자들을 거짓말쟁이들이라고 했어요.

 

엊그제 어떤 분과 대화를 하였는데 이 분은 말끝마다 신학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루터가 무슨 말을 했고!

칼빈이 무슨 말을 하였고!

어떤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신학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했어요.

교파마다 신학이 다르고 심지어 같은 교파 안에서도 교단에 따라서 신학이 다른데 어떻게 신학으로 성경을 해석하고자 하느냐!

누가 어떤 말을 하느냐를 말하지 말고 목사님이 깨달은 것을 말해 보라고 했어요.

 

목사님이 만난 예수를 증거해 보아라!

목사님이 받은 은혜를 내어 보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끝까지 신학을 이야기 하길래 제 이야기를 목사님이 듣고자 하지 않고 저 역시 목사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으니 각자 믿어지는 대로 살자고 하면서 끊어 버렸습니다.

 

왜? 이런 짓을 하는 줄 아세요.

자기 신학이라는 틀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왜? 당신은 나와 다른 말을 하느냐 라고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안철수 교수의 말을 빌리면 제 설교를 통해서 자기의 부족함을 보고 성경을 보는 안목을 넓혀 가야하는데 도리어 자기 틀을 가지고 남의 설교를 평가하고 있어요.

 

아니~ 제가 받은 은혜를 왜? 자기가 검증을 하고자 합니까?

제가 왜? 그 사람 입맛에 맞는 설교를 해야 합니까?

우리의 신앙을 검증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어요.

 

저는 지금 이렇게 은혜를 받습니다! 라고 설교를 통해서 토해내고 있어요.

그럼 자기도 나는 이렇게 은혜를 받습니다! 라고 토해내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럼 각 사람들이 알아서 판단 할 것이잖아요.

성령이 알아서 분별하게 하세요.

그런데 자기 것은 내어 놓지 않고 남에 것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일만 하는 것입니다.

참 어리석어요.

 

누구든지 남을 비판하기는 쉬워요.

그러나 비판이 능사가 아니에요.

비판하기보다 나는 이렇게 은혜를 받았습니다!

난 이런 주님을 만났습니다! 라고 나타내 보이세요.

자기가 만난 예수를 증거하란 말입니다.

 

그러니 누구의 설교를 들어도 동의가 되면 듣고 동의가 안 되면 아! 저렇게 성경을 보는 분도 있구나! 하고 옳고 그름은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 일이나 잘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꼭 남에 앞가림을 하고자 나댄단 말입니다.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나대는 것은 다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옳고 남을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이게 바로 자기 틀 안에 가두어진 소경입니다.

 

하나님께서 동일한 은혜를 주어도 각자 믿음에 분량만큼만 깨달아요.

 

동일한 설교를 들어도 깨닫는 것이 다 다를 수 있어요.

설교도 마찬가지에요.

각자 깨닫는 만큼 표현을 하기 때문에 표현하는 방법이 다를 수가 있단 말입니다.

자기 분량에 따라서 말이에요.

 

예수님도 그랬잖아요.

많이 탕감 받은 자가 있고 적게 탕감 받은 자들이 있다고!

이건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해서 탕감 해 주었다는 말이 아니에요.

각 사람마다 받은 은혜의 폭이 다르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누가 어떤 말을 하는지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잘 하세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당부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무슨 내용인가 하면 변론을 좋아하고 논쟁을 좋아하는 자들과 상대하지 말라고 했어요.

변론과 논쟁을 좋아하는 자들은 스스로 선생 노릇하고 싶어하는 자들인데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다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이들로부터 돌아서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가 담론화 되면 복음은 논쟁의 도구로 사용되어져요.

그럼 서로 변론하고 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변론을 좋아하고 논쟁을 일으키는 자들은 진리를 모르는 자들이니 그런 자들과는 사귀지 말고 돌아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시대 복음 복음하면서 복음을 담론하 하는 자들이 너무도 많아요.

특히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 중에 많아요.

복음을 철학이나 심리학과 같은 것으로 공교하게 섞어서 해석을 하여 교인들의 신앙을 사변적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그러니 아는 것은 많은데 그 앎이 삶과 동 떨어진 이원론으로 흐르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무슨 도(道)를 닦는 것이 되고 말았어요.

복음이 철학처럼 사색하는 것이 되고 말았어요.

복음을 안다는 것으로 자기 우월성을 드러내고 자기 가치 챙기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 이만큼 복음을 아니까 알아 달라는 겁니다.

 

복음이 사색하는 것이 되면 복음이 삶으로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아요.

자기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해요.

아는 것 따로 사는 것 따로가 되어요.

 

만약에 여러분이 머릿속으로는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손발이 꼼짝하지 않고 교회에 봉사와 충성과 연보와 같은 일들을 아무 것도 안하고자 한다면 여러분이 안다고 하는 그 복음은 지식이고 죽은 것이에요. 

사도 바울은 이런 자들을 일컬어 “입으로는 시인하나 행위로 부인하는 자” 라고 하였어요.



무슨 말인가요?

아는 것은 많은데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가 안다고 하는 복음은 지식이고 죽은 복음인 겁니다.

그러니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일컬어 영지주의라고 합니다.

초대교회 때 사도들이 영지주의자들을 그토록 경계시켰어요.

말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이방인과 똑 같은 삶을 사는 겁니다.

이 시대도 복음 복음하면서도 영지주의자들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이 너무도 많아요.

 

믿음은 생명의 능력이에요.

 

생명은 반드시 그 안에 있는 것을 겉으로 토해내게 되어 있어요.

이걸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라고 합니다.

야고보서는 행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에요.

믿음이 살아서 생명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에요.

 

믿음은 실체가 없어요.

그런데 동사(動詞)로서 움직이는 생명이에요.

믿음이 살아서 움직이면 행함이 나타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은 믿음을 귀신의 믿음이라고 해요.

 

믿음이 죽었다는 것이 뭔가요?

생명으로 나타나지 않는단 말입니다.

쉬운 말로 주둥이로만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에요.

말은 청산유수인데 하는 짓거리는 이방인과 하나도 다르지 않아요.

이런 자들이 바로 예수를 가리는 자들이에요.

 

성경은 이런 자들을 일컬어 차라리 소경이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죄가 여전히 있느니 라고 했어요.

차라리 복음을 모른다고 했으면 예수를 가리지나 않지요.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반(反) 예수 짓을 하고 있으니 이런 자들로부터 예수님이 모독을 당하는 것입니다.

 

제발 그 어쭙잖은 것으로 변론하고 논쟁하고 남을 정죄하지 마세요.

어디서 쬐금 들은 것을 가지고 선생 노릇을 하고자 하지 마세요.

진정으로 복음을 아는 성도는 말은 적어지고 손발이 바빠져야 해요.

입은 닫고 몸으로 표현하세요.

 

예수를 믿는 것은 변론이나 논쟁으로 믿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복음은 인간의 지식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변론이나 논쟁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는 것은 믿음을 선물로 받아야지만 가능한 일이에요.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들은 복음으로 논쟁하거나 변론하지 않아요.

 

그러니 누가 복음을 가지고 변론하거나 논쟁을 즐기는 자가 있으면 그는 말쟁이라고 보고 상종하지 마세요.

신앙은 논쟁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 생명으로 사는 것이에요.

예수님의 생명은 정형화 시킬 수가 없고 가둘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일하심을 신학으로 가둘 수가 없어요.

그러니 신학으로 믿음으로 행하여지는 일들을 판단하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에요.

 

그럼에도 이 시대 일부 몰지각한 목사들은 신학으로 성도의 신앙을 재단하고 있어요.

목사들이 신학을 앞세우는 것은 교단의 눈치를 보기 때문입니다.

혹시 교단에 신학과 다른 말을 하면 제명 당할까봐 그래요.

이들은 구약 시대 궁중 선지자들과 같은 자들이에요.

 

궁중 선지자들은 왕과 백성들의 비위를 맞추었어요.

 

예전에 “파스타” 라는 드라마가 있었어요.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제가 엄청 난 은혜를 받은 대사가 있습니다.

 

일류 주방장이 자기 애인에게 하는 말이 요리사는 손님의 입맛을 맞추어서 요리를 하여야지 사장님의 말에 맞추어 요리를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음식을 먹는 손님들 입맛을 따라가야지 이윤(利潤)을 추구하는 주인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손님은 좋은 재료를 가지고 만든 양질의 음식을 먹고자 해요.

그래서 돈을 내고 음식을 사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장은 이윤을 생각하고 값싼 재료를 사용하여 음식을 만들라고 해요. 

요리사는 이러한 사장의 말을 들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좋은 요리사는 사장의 세치 혀 바닥에 놀아나면 안 되고 손님들의 입맛에 맞는 요리를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걸 선지자들에게 적용해 보세요.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입맛에 맞추어야지 자기에게 월급을 주는 왕의 말에 입맛을 맞추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즉 사람을 기쁘게 할래!

하나님을 기쁘게 할래! 입니다.

 

목사도 선지자적 역할을 하여야 해요.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가감(加減)없이 전해야 합니다.

어떤 불이익이 돌아오더라도 말이에요.

 

목사는 설교를 교인들 입맛에 맞추면 안 되어요.

이 시대 교인들은 교회의 주인이에요.

교인들 손에 의해서 목사가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잖아요.



이 시대 목사들은 교인들이 주는 월급을 받는 월급쟁이에요.

 그러니 목사에게 있어서는 교인들이 교회의 주인인 셈입니다.

원리대로 라고 하면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는 교인들이 교회의 주인으로 행사하고 하나님은 손님이 되고 말았어요.

주객이 전도가 되고 만 것입니다.

 

목사에게 있어 교회는 직장이에요.

이 시대 교회 안에서 목사의 모습이 그래요.

교인이 교회의 주인이다 보니 하나님은 교회에 손님이 되고 말았어요.

예수님은 손님이에요.

교인들이 이렇게 교회를 만들어 놓았어요.

 

그렇다고 한다면 목사는 좋은 요리사처럼 교회의 주인이라고 자처하는 교인들의 비위를 맞추지 말고 손님이신 하나님의 입맛에 맞는 설교를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한단 말입니다.

교인들이 듣고자 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되어요.

 

이걸 확대해서 말하면 교단의 비위를 맞추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 눈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조직이 보이고 교회가 보이면 조직의 앵무새 노릇을 해야 해요.

그럼 신학을 벗어나지 못해요.

바울은 이런 자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했어요.

 

이 시대 기독교 안에는 예수가 없어요.

극단적으로 말한다고 하면 교회 안에 예수가 없단 말입니다.

교회를 넘어서야 예수님이 보여요.

신학을 버려야 예수님이 보여요.

교회라는 제도에서 나와야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어요.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에게 그러지요.

수가성 여인은 하나님을 그리심산이나 예루살렘 성전에 가두어진 하나님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에게 어느 장소에 가야 참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런 곳에 갈 필요가 없다고 했어요.

때가 이르면 네 속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네가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그 때가 언제인가 하면 성령이 너희 안에 오실 때라고 합니다.

 

그러니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성도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아요.

하나님을 예수님이라고 해 보세요.

동일한 의미로 보세요.

 

그럼 성령을 받은 성도는 기독교에서 예수를 찾지 않아요.

교회에서 예수님을 찾지 않아요.

신학에서 예수를 찾지 않아요.

성령이 알게 해 주신 그 예수와 함께 살아가요.

 

예수님과 함께 사는 성도는 어느 조직이나 틀에 가두어지지 않아요.

 

어저께 어떤 분이 전화를 해서 교회를 찾는데 소속이 어디냐고 물어요.

자기는 고신이나 합동측 교회를 찾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교단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복음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어느 소속이냐를 찾지 말고 어디에 복음이 증거 되는지를 찾아보라고 했어요.

 

이 분이 마치 수가성 여인과 같아요.

교회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에게 교회라는 틀을 깨어 버리잖아요.

이 분도 그 틀이 깨어 졌으면 얼마나 줗을까요.

 

교회라는 틀을 깨고 산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이에요.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유대교 속에서 하나님을 찾았어요.

유대교가 말하는 하나님을 배웠고 그 하나님을 말했어요.

누구든지 자기들이 만든 그 틀을 벗어난 자들은 이단이라고 하였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유대교라는 틀에서 나왔어요.

유대교를 뛰어 넘어 버렸어요.

예수님은 유대교 속에 가두어지는 분이 아니란 것을 알았어요.

다른 말로 하나님은 유대교에 가두어지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단 말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기독교에 가두어지지 않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누구에게도 예수를 아는 일에 담을 쌓지 않았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예수님이기도 하지만!

이방인의 예수님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가리지 않고 만났던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은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밖에 있는 자나 인간의 조건을 넘어서 일을 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증거하였어요.

이런 신앙으로 예수를 믿는 자들이 모인 곳이 교회에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인간이 만든 틀에서 완전히 벗어난 교회가 탄생했어요.

 

예수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하나님과 화평이 이루어지고 구원의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이 일어났어요.

이들은 신분의 벽을 허물고 빈부의 벽을 허물고 예수 안에서 하나 되어 날마다 모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고 하나님과 사이좋게 지내고 사람들과도 사이좋게 지냈어요.

 

오늘 본문에서 누가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냐?

하나님과 화평하며 환란 중에서도 감사하며 사는 자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우리의 신앙이 과연 그러한가 달아보아야 합니다.

난 지금 하나님과 화평한 자로 살고 있는가?

스스로의 믿음을 확인받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화평이라는 것은 사이가 좋은 것을 말합니다.

이걸 다른 말로 “보시기에 좋았더라” 고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언제 입니까?

창세기 1장에서 무질서한 세계가 하나님 말씀대로 자기 자리를 찾아 갈 때이지요.

 

하나님 말씀에 순종된 모습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입니다.

그럼 화평이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무엇을 순종하는가요?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새 언약을 믿는 것입니다.

새 언약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지요.

천지와 하나님 사이에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 말씀은 하나님과 천지를 만나게 해 주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육신으로 오셨어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 시켜주는 가교입니다.

이를 중보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보시고 화해해 주셨어요.

이걸 믿으라는 겁니다.

이걸 믿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되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자고 하는 것입니다.

“말미암아” 란 말은 그 안에서란 말이에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니까 예수 안에서 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화해하십니다.

그럼 우리는 예수님을 앞세우고 나아가야지요.

이렇게 예수님을 앞세우고 나가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해요.

믿음에는 반드시 무엇을 믿느냐 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믿으라고 하신 것이 있어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자기 피로 세우신 새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으로 일을 하세요.

언약은 우리가 세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통고 합니다.

 

난 이런 언약을 세웠으니 믿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통고하신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자기 백성이 의롭게 된다는 언약입니다.

이걸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이 뭐냐?

새 언약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을 실제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관념이 아닌 실제로 말이에요.

 

그림에 떡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실제로 배부르게 못하는 떡이란 말입니다.

떡은 구경하는 것이 아니고 먹는 것입니다.

 

떡은 먹어야 하는 양식입니다.

구경만 하면 떡 맛을 몰라요.

실제로 먹어 보아야 맛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생한다고 합니다.

영생이란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아요.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영생이란 죽음 없이 영원토록 사는 것이 맞아요.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이란 오래 산다는 개념보다는 예수님과 한 몸이라는 개념으로 사용을 합니다.

 

요한복음 17장을 보면 영생은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였어요.

 

“안다”는 것은 마치 떡을 먹어서 떡 맛을 알듯이 예수님과 한 몸이 되어서 아는 것을 말해요.

그래서 성경에서 “안다” 라고 하는 말은 부부간에 잠자리를 통해서 서로를 경험적으로 아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자신이 경험하여서 알아진 것을 말해요.

 

성령을 받은 성도는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어요.

이걸 저는 자기가 만난 예수라고 합니다.

자기가 만난 예수가 있는 사람은 누구에게 묻지 않아요.

자기 안에 성령이 알게 해 주시는 예수님이 있어요.

그 예수님으로 즐거워해요.

 

그러나 자기가 만난 예수가 없는 사람은 누구에게 물어요.

누구에게 묻는다는 것은 자기가 만난 예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남에게 묻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남에게 물어서 알아진 예수는 자기 신랑이 아니고 남에 신랑이에요.

 

남에 신랑에 대하여 아무리 많이 알면 무엇 합니까.

남에 신랑은 나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 시대 많은 교인들이 남에 신랑을 자기 신랑인줄 착각하고 있어요.

그러니 신랑과의 살아가는 삶은 없고 남에 신랑을 자기 신랑이었으면 하고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잖아요.

이 말은 “너 예수를 경험했느냐” 라는 말과 같아요.

“너 예수를 만났어!”

“너 예수를 먹어 봤어!”

부부 간에 이야기로 노골적으로 말하면 “너 예수와 하룻밤 잤느냐!” 라는 말과 같아요.

 

오늘 본문은 예수를 맛 본 자는 이런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맛본 자들은 하나님과 사이좋게 지내고 그 앞에서 즐거워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보고도 즐겁지 않는 자는 그건 예수와 잠을 자 보지 못한 자라는 거에요.

그냥 구경만 한 자이지 잠 자리를 함께 하지 않은 자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라고 하면 반드시 하나님과 사이가 좋아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은 우리더러 화평하라는 말이 아니고 너 하나님과 사이가 좋니! 라고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들은 이런 자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4장의 마지막 25절에서 “예수는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 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는 우리 죄 때문에 죽었다가 우리를 의롭게 하려고 살아났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우리 죄 때문이고!

예수님의 살아나심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죽고 사는 것 속에는 우리의 죄 값을 청산하는 것도 들어가 있지만,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는 것도 들어가 있어요.

즉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아남도 있어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죄인으로서의 죽음도 있고, 의롭게 된 자로서의 삶도 있습니다.

쉬운 말로 죄 용서 받은 것도 있지만, 죄를 용서 받은 자로서의 당당함으로 살아가는 삶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걸 간과하지 마세요.

 

십자가에 죽은 예수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예수가 부활하여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를 아는 것이 아니고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관념이 아니고 실제에요.

지식이 아니고 삶이에요.

 

흔히들 신앙생활 잘 하느냐고 묻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당신이 믿는 것을 삶으로 살아가느냐 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신앙과 생활을 합한 말입니다.

 

신앙이란? 믿는 것을 말하고!

생활이란? 삶을 말해요.

그러니 신앙생활 잘 하느냐? 라고 묻는 말은 너 예수를 삶으로 살아가고 있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믿는 것은 예수님 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자신이 믿는 것이 삶으로 나타나야 해요.

그래야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러잖아요.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고 하잖아요.

 

본문을 축약하면 “얻었으면”~ “누리자” 에요.

 

“얻었으면”은 과거(過去)이고~ “누리자”는 현재(現在)에요.

“얻었으면”은 “앎”이라고 하면~ “누리자”는 “삶”이에요.

 

그러니 오늘 본문 속에 두 가지 말에 귀를 기우리십시오.

 

첫째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입니다.

 

이는 너 의로운 자가 되었니!

너 안에 성령이 있니!

너 믿음 받았니! 라고 묻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자” 는 것입니다.

 

이걸 직역하면 야! 너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면서!

그럼 하나님과 화평하냐!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느냐!

즐거움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니! 라고 묻는 겁니다.

 

화평이란? 터 놓고 스스럼없이 교제하는 것을 말해요.

쉬운 말로 사이좋게 친하게 지내는 것을 말해요.

이는 의롭다 함을 얻은 자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는 사이란 말입니다.

 

이걸 직설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바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라는 말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는 뜻입니다.

누가 믿는 자냐?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입니다.

 

그럼 묻습니다.

하나님과 화평합니까?

하나님과 친하십니까?

하나님과 터 놓고 사이 좋게 지냅니까?

하나님에게 할 말을 다 하고 삽니까?

하나님 앞에 찜찜함이 없습니까?

 

여기에 예! 라고 대답을 할 수가 있어야 의롭다 여기심을 입은 자에요.

뭔가 주저하면 그 사람은 예수를 그림의 떡으로 먹은 사람입니다.

예수를 구경만 하였지 예수하고 하룻밤 자지 않은 사람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을 구경만 하고 따로 따로 노니까 예수님이 의롭게 해 주신 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이 지식이므로 신앙이 관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이루어 주신 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세요.

그걸 주셨어요.

그럼 성도는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것을 받아서 누리면 되어요.

 

누림은 떳떳함에서 나와요.

떳떳하면 거리낌이 없어요. 

그러나 뭔가 떳떳치 못한 일이 있으면 가운데 뭔가 가로막혀 있어서 불편해요.

떳떳치 못하면 서로 눈치를 살핀단 말입니다.

뭔가 옳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면 본성적으로 하나님이 두려워요.

 

의(義)란? 옳음입니다.

떳떳함입니다.

의롭게 되었다는 말은 좋은 관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좋은 관계가 되었다는 말은 좋지 않은 관계로 있었다는 말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맞아요.

우리는 하나님과 좋지 않은 관계로 있었어요.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어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 막혀 있던 죄를 치워주셨어요.

이제 좋지 않던 관계가 좋은 관계로 회복이 되었어요.

예수님 때문입니다.

 

이걸 믿느냐 에요.

너~ 예수의 피로 모든 죄에서 사함을 받았다는 것이 믿어지니!

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 없이 살고 있니!

 

죄 문제가 해결 된 것으로 사느냐!

결코 정죄함 없이 사느냐!

그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과 화목한 자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로 하여금 화평을 만들어 내라는 말이 아니에요.

너희는 화평한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을 다시 한 번 확인 시켜 주는 내용입니다.

넌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라고 알려 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에 이르면서 성령이 오실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하신 일이 믿어지게 된다고 했어요.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과 화평이 된 것이 믿어져요.

그 믿음으로 하나님과 사이좋게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죄인은 그 앞에 설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자기 안에 정죄함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그 앞에 나아갈 수가 없어요.

이건 본능적으로 일어나요.

 

그런데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의 피로서 정죄함으로부터 해방을 시켜 주세요.

예수님의 피로 내 죄가 사해졌다는 것이 믿어져요.

그러니 성령이 그 안에 거하는 성도는 자기 안에 정죄함이 없는 겁니다.

 

사단이 야! 너 죄 지었잖아! 라고 참소하면,

응~ 그래 나 죄지었어!

그런데 우리 주님이 다 갚아 주셨어!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다 용서 했어!

 

이러한 믿음이 있어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그 어떤 것으로도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 믿어진단 말입니다.

믿어지니 믿는 거에요.

믿어지기 때문에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뻔뻔스럽게 친하게 지내는 거에요.

 

이걸 온전한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 안엔 두려움이 없습니다.

법은 두려움을 주지만 사랑은 평화를 주어요.

성도는 사랑 안에 있는 자에요.

 

성령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하세요.

그러므로 성령이 그 안에 임한 성도는 그 어떤 사단의 참소가 있더라도 예수님의 의(義)를 힘입고 아버지 앞에 나가서 아버지 저 왔어요! 라고 한단 말입니다.

 

사랑은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집니다.

사랑 안에 있는 성도는 자기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과 화친하고!

법 아래 있는 자는 자기 행위로 가까이 하기도 하고 멀리 하기도 해요.

 

오늘 본문이 이 말을 묻고 있는 겁니다.

야! 너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받았느냐!

받았으면 나랑 놀자!

그럼 그 사랑을 받은 성도는 예! 하고 나와요.

 

이게 됩니까?

하나님과 놀자가 되면 사랑 안에 있는 성도이고!

안 되면 법 아래 있는 교인이에요.

만들려고 하지 말고 점검해 보세요.

나는 누굴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의(義)라는 나무를 심었습니다.

의(義) 라는 나무에서 맺혀지는 열매가 화평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화평의 반대가 불화입니다.

전쟁입니다.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이 왜? 왔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죄가 하나님과의 화평을 불화로 만들어 버렸어요.

죄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을 몰고 왔습니다.

 

원래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했습니다.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에덴동산은 장차 우리가 돌아갈 우리의 본래의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들었습니다.

아담은 우리 모든 인간의 대표입니다.

그러니 아담 속에는 저와 여러분이 들어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하나님과 화평하였습니다.

화평이란? 친하게 지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무 거리낌 없이 지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걸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표현을 합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아담은 하나님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 친하게 지내던 것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 불화하고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죄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깨트려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은 싫다고 하면서 에덴동산에서 나가라고 했습니다.

난 죄인하고 친하게 지낼 마음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미운 관계가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은 꼴도 보기 싫다고 하면서 문을 걸어 잠가 버렸어요.

그리곤 에덴동산을 인간들 눈에 안 보이도록 감추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 미셨어요.

예수를 보내서 화목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이에요.

이건 우리의 원함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셨어요.

하나님이 의롭다 해 주셨으니 우린 그 의로우심을 얻은 자로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의롭다 해 주신 것에 대한 화답을 하는 것이 되어요.

쉬운 말로 하나님이 반갑다 친구야! 라고 악수를 청했는데 우리가 거절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그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義)를 우리에게 던져 주셨어요.

그럼 우린 그 의(義)를 받고 하나님 앞에 고맙습니다! 하고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쁘다고 춤을 추어야지요.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냐!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피리를 불면 춤을 추라는 말입니다.

그냥 멀뚱이 있지 말고! 

생명이 살아 있으면 뭔가 반응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너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면서!

그럼 기쁘지 않니!

기쁘면 기쁘다고 해라!

꿀 먹은 벙어리 마냥 가만있지 말고!

 

하나님 고맙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밥상을 차려 놓았으면 하나님 잘 먹을게요! 하란 말이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지요.

영광(榮光)이 뭔 줄 아세요.

받은 것을 토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치 우리를 화분에 물을 주고 기르는 것과 같아요.

정성을 다 해서 길렀어요.

그럼 그 화초가 꽃을 피워서 물을 주는 분을 기분 좋게 해 주어야 한단 말입니다.

화초가 꽃을 피우는 것을 가지고 주인께 영광을 돌린다고 해요.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죄 용서 하는 일을 행하셨어요.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서 우리 죄를 다 탕감해 주셨어요.

그러니 예수님의 피로 죄를 탕감 받은 성도는 거기에 대한 화답을 하여야 해합니다.

화답이 죄사함 받은 자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케 하려고 그 아들을 보내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와 사망의 문제를 다 해결케 하셨어요.

이에 예수님은 아버지 명을 따라서 십자가에서 이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리곤 이 사실들을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다 알려 주고 믿어지게 하었습니다.

 

그럼 성령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되고 믿어지는 성도라고 한다면 더 이상 죄와 사망의 권세에 질질 끌려 다니면 안 되어요.

비록 죄를 짓고 살아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믿음으로 살아야 한단 말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살아야 한단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부자에게 변변치 못한 아들이 있습니다.

이 놈이 남의 차에 흠집을 냈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아이를 데리고 차 주인에게 가서 차 값을 다 변상 해주고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왔어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저 아저씨에게 네가 차에 흠집을 낸 것에 대한 값을 다 치루어 주었으니 그렇게 알고 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 놈이 그 차 주인만 보면 숨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너 왜? 그래 라고 물으니 차 값을 달라고 할까봐서 숨는다는 겁니다.

그럼 아버지는 속이 뒤 짚어져요.

아버지는 그 차 주인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고 자식에게 화를 내요.

 

야! 이 놈아!

내가 차 값을 다 갚아 주었는데 왜? 숨고 지랄이야!

앞으로 떳떳하게 다니란 말이야!

아저씨를 보아도 아저씨 안녕하세요!

차 잘 타고 다니지요! 라고 하란 말이야!

 

지금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래요.

야! 너 예수 때문에 죄 용서 해 준다!

의롭다고 인정 한다!

그러니 더 이상 내 앞에서 주눅 들지 말고 당당히 살어!

그럼 제가 예! 하고 하나님 앞에 주눅 들지 말고 살아야 해요.

그래야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 받은 자에요.

이미 용서를 받았고!

지금 용서 받고 있으며!

장차 용서 받을 거에요.

 

용서가 필요한 것은 우린 용서 받아야하는 모습으로 있기 때문이에요.

한마디로 죄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는 성도는 천사처럼 죄 안 짓고 산다고 하는 겁니다.

 

아니에요.

우린 천사가 아니에요.

우리 몸뚱이는 죄 아래 팔렸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죄 안 짓는 천사가 되면 예수는 더 이상 나의 구세주가 될 필요가 없어요.

예수는 죄인에게만 필요하지 천사에겐 필요치 않아요.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우릴 천사로 만들어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흔적들을 남기고자 함이에요.

 

우리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은 자로 남게 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어도 우리 몸을 천사의 몸으로 바꿔주지 않고 죄인의 몸 그대로 두신 것이에요.

그러니 우리 몸은 항상 예수님의 의(義)를 입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끊임없이 죄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그럼에도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에 감사하여야 해요.

 

성도는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지만 죄에 대한 정죄함으로부터는 자유로워야 해요.

 

죄를 맘대로 지어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죄를 지어도 마귀가 참소하는 그 정죄로부터 자유하라는 말입니다.

죄는 미워하고 아파하여야 하지만 죄와 사망의 권세를 두려워하고 질질 끌려가면 안 되어요.

그럼 예수님의 죽으심이 헛되게 되어요.

그러므로 성도는 비록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에 보좌 앞에 예수님의 피를 앞세우고 당당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마치 야곱처럼 에서의 옷을 입고 리브가가 만들어 준 별미를 들고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 로소이다 라고 당당하게 나아가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내 꼬라지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피를 앞세우고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별미(別味)에요.

그러니 우리는 예수의 옷을 입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새 언약이라는 별미를 들고 아버지께 당당히 나아가서 “아버지의 맏아들 예수로소이다”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이게 믿음이에요.

 

그러라고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녀석 믿음이 좋네!

야~ 그 놈 내 아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구먼! 이라고 해요.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화목케 하려고 십자가에서 화목 제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서먹 서먹하게 지내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모독하는 것이에요.

하나님과 서먹 서먹하면 예수님이 화를 내요.

 

야~! 임마!

내가 너를 아버지와 친하게 지내게 하려고 십자가에 죽어서 네 죄값을 다 청산해 주었어!

다 용서해 주었어!

그런데 너는 왜? 눈치만 살살 살피고 있는 거야!

너~ 왜? 니 꼬리지를 보고 있어!

니 꼬라지를 보지 말고 내 피를 보란 말이야!

 

너~ 내 죽음을 개 죽음으로 만들거야!

너~ 믿음 어디다 팔아먹었어!

눈치 보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뭔 말을 좀 하란 말이야!

가만있지 말고 뭐가 문제인지 이바구(이야기) 좀 해 보란 말이야!

그런단 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들어 봅시다.

 

사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여호와께서 오라고 합니다.

누굴 보고 오라고 합니까?

자기 백성들이에요.

왜? 오라고 할까요?

이 놈들이 하나님 눈치를 살살 살핀단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부르는 겁니다.



야! 이리 와봐!

와서 이야기 좀 해 보자고 합니다.

그래 뭐가 문제인지 변론 좀 해 보자!

너 왜? 그래!

 

네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네 죄가 먹장 같이 검을 지라도!

이야기 좀 해 보자!

뭐가 문제인지!

 

이건 마치 부모가 기가 죽어 있는 자식에게 안타까워서 채근하는 모습이에요.

아이가 방 안에 쿡 처 박혀서 나오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으면 부모의 속이 터지는 것과 같아요.

 

그럼 부모는 그러잖아요.

야! 이 놈아!

뭐가 문제인지 말을 좀 해 보라고 하잖아요.

그래 방구석에 처 박혀 있지만 말고 나와서 말을 하란 말이야!

말을!

 

지금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그러고 있어요.

야! 무엇이 문제인지 탁 까놓고 말을 하라는 거에요.

너희들이 왜? 성전 마당만 밟고 다니고 헛된 제물을 가지고 오는지!

누가 제물 갖다 바치는 것이 신앙이라고 가르치더냐!

 

요즘 식으로 넌 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기쁘지 않느냐!

넌 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정죄당하고 살어!

너~ 왜? 신앙생활을 미친년 널뛰듯이 하는데!

넌 도대체 뭘 믿고 있는거야?

왜? 엉터리로 신앙생활을 하는지 좀 따져 보자는 거에요.

 

의(義)로 여겨주신다 함은 의롭지 않은 자를 의롭다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성도는 의롭다 여겨 주셔서 의인이지, 의로워서 의인이 된 것은 아니에요.

그러니 성도는 자기 행위로 “의(義)”다, “불의(不義)”다 판단하고자 해서는 안 되어요.

성도는 끝까지 믿음의 법으로 살아야 해요.

 

신앙생활의 근본은 내가 죄인이다!

나에겐 의(義)가 없다! 라는 사실을 깔고 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불의한 자를 의롭다 여겨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어요.

사람들이 의롭다 해 주신 것을 기뻐하지 않는 것은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선 인간의 착함이나 악함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하나님은 예수의 피를 보시고 화평하시지 우리의 행실을 보고 화평한 것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살으란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 행위와 언약을 맺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 언약을 맺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과 맺은 그 계약서를 들고 오라는 겁니다.

그럼 친하게 지내도록 해 주겠다고 합니다.

 

8-9절을 보세요.

 

8-9=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었어요.

우린 그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을 처리 하셨어요.

이게 하나님 사랑이에요.

 

이 사랑을 알게 하시려고 성령을 우리 가운데 부어 주셨어요.

그럼 성령이 그 안에 부은바 된 성도는 무얼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겠습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앞세우고 나아가야 하겠지요.

 

그럼 하나님께서 버선발로 뛰어 나와서 어이쿠~ 내 새끼 어서 와라! 라고 하면서 덥석 안아 주신단 말입니다.

이걸 화평이라고 해요.

예수님 때문에 친하게 된 것을 화평이라 한단 말입니다.

 

주일학교 다닐 때 이런 찬송가를 많이 불렀잖아요.

 

♪♬♪~

힘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벼슬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

 

우린 어렸을 때 이런 찬송을 불렀어요.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는 이런 찬송가를 다 엿 바꿔 먹었어요.

목사가 되어서는 쓰레기통에 버렸어요.

 

어른이 되어서는 우린 지금 이렇게 부르고 있어요.

 

♪♬♪~

열심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충성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헌금해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

 

어렸을 때는 이런 것으로 하늘나라를 못 간다고 했는데!

어른이 되어서는 이런 것으로 가게 된다고 하고 있어요.

교회에서 오래 배우면 배울수록 믿음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고 없어져요.

 

이 모두가 목사들이 신학이라는 뱀에 독으로 성경을 요리해서 교인들에게 먹였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가감(加減) 없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들어야 하는데 신학으로 각색이 되고 철학이나 심리학으로 양념이 된 물이 섞인 포도주를 마셔서 그래요.

마치 화학조미료로 요리가 된 이 시대 음식점들의 음식들과 같이 각종 신학으로 비빔밥이 된 것을 복음이라고 들어서 그래요.

 

그러니 예수를 믿는 것이 즐겁지 않은 것입니다.

복음이 기쁘지 않은 거에요.

머릿속에는 예수에 대하여 아는 것은 어린아이 때보다 일천배가 많은데 그것을 믿는 믿음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안에서는 이상하게도 예수를 오래 믿을수록 믿음이 없어요.

 

이건 우수게 소리에요.

목사가 제일 믿음이 없고!

그 다음이 장로 권사이고!

그 다음이 집사이고!

그 다음이 일반 성도들이에요.

 

이상하게 교회에 적게 다닌 사람들이 믿음이 좋고 오래 다닐수록 믿음이 없어요.

직분이 낮을수록 믿음이 좋고 직분이 높을수록 믿음이 없어요.

왜? 그럴까요?

신학이라는 때가 덜 묻어서 그래요.

 

왜? 신앙이 오래 될수록 예수를 안 믿을까요?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아무 것도 안하는 말쟁이들이 될까요?

모두가 지식적인 설교를 들어서 그래요.

성령의 감동으로 증거되는 말씀을 못 들어서 그래요.

 

그러니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오지 않고 행위로 나오는 겁니다.

교인들이 충성과 봉사라는 열심을 들고 나와서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자고 오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로 하나님 우리 친하게 지내요 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 피 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예수님이 만드신 그 의(義)를 들고 오라고 해요.

나는 무엇을 들고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값없이 주신 그 구원을 우리는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서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구원을 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그 구원이 우리의 즐거움과 기쁨이 되고 하옵소서! 우리 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선물을 들고 아버지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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