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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32강. 믿음 속에 담긴 선물들 (롬 5:1-11)

by coroa 2022. 9. 19.

32강. 믿음 속에 담긴 선물들 (롬 5:1-11) -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32강. 믿음 속에 담긴 선물들 (롬 5:1-11)

롬 5:1-1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정낙원 목사

 

믿음은 선물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 속에는 다양한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구원이나 영생이나 천국과 같은 하늘에 복도 들어가 있지만, 그와 반대 되는 땅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들도 담겨져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과 화평하는 것도 있지만 환란도 있다고 합니다.

 

예수 안에는 옛 사람의 죽음도 있고, 세상으로부터의 떠남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처럼 살아가야 하는 아픔도 담겨져 있습니다.

즉 세상에서 비 주류로 살아가야 하는 고난도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마냥 기쁜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구원 속에는 서로 상반된 것들이 한 세트로 들어가 있는 셈입니다.

마치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것은 축복이지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저주와도 같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떠나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은 죽는 것과 같은 아픔입니다.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모든 기득권을 다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자의 축복을 받자 아비 집으로부터 쫓겨남을 당합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이 아비의 사랑으로 채색 옷을 입자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버려짐을 당합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상대적으로 따라오는 아픔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입고 부르심을 입는다는 것은 기존의 것으로부터 빼내심을 입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기존으로부터 빼내심을 입는다는 것은 곧 기존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구원 속에는 평안도 있고 환란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평안도 창조하고 환란도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평안과 환란은 극과 극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자기 백성들을 다스려 가십니다.

 

시편 23편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목자이신 여호와께서 우리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도 인도하시지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도 인도하십니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는 평안이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환란입니다.

 

우리더러 선택을 하라고 하면 평안을 선택하고 환란은 피하고자 할 것입니다.

육신은 평안을 원하지 환란은 싫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그토록 싫어하고 피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믿음 속에 선물로 담아 놓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늘은 믿음 속에 담긴 선물에 대하여 살펴볼까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구원)이라는 택배를 보내 주셨어요.

우리는 하나님 고맙습니다! 라고 받았습니다.

그리고 택배 상자를 열어보니까 그 속에 두 가지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도 있고!

세상에서의 환란도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싫은 것도 있더란 말입니다.

 

이건 우리의 바램이 아니에요.

우린 평안은 좋아해도, 환란은 싫어해요.

믿음 속에 환란을 담아 놓은 것은 마치 흰 쌀 밥에 검정콩을 섞어 놓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마치 편식하는 아이들처럼 흰 쌀 밥만 먹고 싶은데 하나님은 밥 속에 콩을 섞어 넣고 먹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린 콩을 골라내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안 돼!

그것 먹어야 건강해져!

그런단 말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화평은 좋은 것이고 환란은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믿음 속에 환란이라는 콩을 섞어 둔 것은 편식하면 몸에 해로우니까 건강하게 하려고 섞어 두신 것입니다.

 

먼저 알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은 모두가 좋은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자식이 떡을 달라고 하면 돌을 줄 자가 누가 있으며!

생선을 달라고 하면 전갈을 줄 자가 누가 있겠느냐!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는 얼마나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들은 아버지가 자식에게 주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이란 말입니다.

믿음 속에 고난을 담아 놓았다면 그것 또한 필요해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에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선을 이룬다는 말은 모든 것이 우리의 신앙에 유익이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당함이 내게 유익이라고 했습니다.

어째서 고난당함이 유익일까요?

고난당하기 전에는 주의 율례와 법도를 몰랐었는데 고난을 통해서 주의 율례와 법도를 배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안목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마치 욥처럼 고난당하기 전에는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고난을 당하고 난 후에는 하나님을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가 되었다고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고난당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지식적으로만 알았는데, 고난당하고 난 후에는 실제로 하나님을 경험을 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손으로 만진 바처럼 경험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큰 복입니까.

 

이처럼 성도에게 있어 고난은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게 되는 좋은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어 있어요.

이 비밀을 알아야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입장에서 좋고 나쁨을 구분 합니다.

그것도 자기 육신 위주로 합니다.

몸이 편하면 좋다고 하고 몸이 불편하면 싫다고 합니다.

몸 중심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모든 일은 몸에 좋고 나쁨과 상관없이 다 좋은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 신앙에 다 필요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마치 농사를 짓는데 비도 와야 하고 햇빛도 있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비와 햇빛으로 농사를 짓습니다.

 

비는 환란과 같고, 햇빛은 은혜와 같아요.

환란을 통해서 하나님 은혜를 알아가고, 은혜를 알기 위해서 환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평안도 주시고 환란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합력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믿음 속에 담긴 좋은 것인 하나님과 화평하는 즐거움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과 상반된 믿음 속에 담겨 있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환란을 당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가 싫어하는 환란을 믿음 속에 포함을 해 놓았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3-4절을 봅시다.

 

3-4절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다만 이뿐 아니라” 고 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는 말은 앞에서 말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고 즐거워하는 것을 전제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 속에는 하나님 앞에서 화평하고 즐거워하는 것도 있지만 다른 것도 있다는 말입니다.

화평만 있는 것이 아니고 환란도 들어 있습니다.

왜? 환란을 넣어 놓았는가요?

이는 환란을 통해서 믿음이 더 견고해지고 천국을 소망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피로서 의롭다 하심을 얻어서 하나님과 화평 된 자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이 되었다는 것은 이젠 저주가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죄 아래 있을 땐 하나님이 두려웠지만 이젠 예수님의 피로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하나님과 화목이 된 것이 그렇게 좋은 것만 아니에요.

왜냐하면! 하나님과 가까워 졌지면 마귀하고는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느 편에 서 있느냐에 따라서 동지가 되기도 하고 원수가 되기도 해요.

  

우린 본래 마귀의 나라에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는 사랑을 받지만 마귀로부터는 공격 대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인간은 마귀의 종으로 살든지 아니면 하나님 종으로 살든지 해야 해요.

 

우린 죄 아래서 출생을 하였어요.

죄 아래서 출생을 하였다 함은 우린 원래 하나님과 원수 된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란 말입니다.

우린 하나님 앞에 저주의 대상이었어요.

태어나면서부터 마귀의 종으로 살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빼내 주셨어요.

예수님이 마귀 아래 있던 우리를 하나님 안으로 건져 주셨어요.

마귀의 종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입었어요.

 

마귀입장에서는 종 하나를 잃은 것입니다.

종 하나를 잃은 것에 그치지 않고 원수가 하나 늘어나고만 것입니다.

자기 수하에 있던 자들이 하나님의 수하로 들어가서 이젠 자기하고 싸우는 원수지간이 되었어요.

 

마귀 입장에선 엄청 손해인 것입니다.

성도를 가만 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목이 된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썩 좋은 것만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아픈 일이에요. 

이게 왜? 아픈 일인가 하면 우린 육신으로 죄와 싸우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마귀의 권세 아래 있어요.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이 세상을 넘겨주었어요.

그래서 성경은 마귀를 일컬어 세상 신이라고 합니다.

세상 신(神)이란? 세상을 다스리는 자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뱀에게 저주 하지요.

어떻게 저주 합니까?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고 저주 하셨지요.

 

흙은 곧 인간들이 살아갈 근본이에요.

인간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어요.

성경은 흙을 육(肉)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육을 넘겨 준 것입니다.

육이나 세상이나 동의어에요.

그래서 마귀는 세상에서 육에 속한 자들 위에서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4장을 봅시다.

 

눅 4:3-7=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십일을 주리실 때 마귀가 와서 시험을 합니다.

어떻게 시험 하는가 하면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이 떡 되게 하라” 고 합니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천하만국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차지하라” 고 합니다.

한마디로 세상에서 영웅호걸이 되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네가 만일 하나님 아들이거든” 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마귀의 주장은 하나님 아들이 이 세상에서 잘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 아들이 비실 비실 하면 하나님이 욕 먹는다는 거에요.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이지요.

이 시대 대 부분의 목사들이 이런 설교를 하고 있잖아요.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 살아야 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찾아온 마귀가 그러고 있어요.

야! 예수야!

네가 만약에 하나님 아들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굶고 있으면 되겠니!

그렇게 초라하게 있으면 하나님 망신시키는 일이잖아!

내가 망신시키지 않게 너를 도와주겠다고 합니다.

 

마귀가 세상에서 성공한 자로 만들어 주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만들어 주는가 하면 자기에게 절만 하면 그렇게 만들어 주겠다고 합니다.

세상에 모든 부귀영화와 권세를 다 주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인간들이 일평생 얻고자 하는 것들입니다.

 

이 시대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주겠다고 하는 말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것은 모두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넘겨 받은 것이라서 자기가 원하는 자들에게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주겠다고 하는 것을 일컬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해요.

그래서 성경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은 모두가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어요.

 

세상으로부터 왔다는 것은 마귀가 주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세상과 짝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고 이는 곧 간음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여기서 묻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과연 우리가 세상과 짝하지 아니고 살 수가 있느냐 입니다.

마귀가 준다고 하는 것을 거절 할 수가 있느냐 에요.

마귀가 준다고 하는 것은 육신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먼저 그에 나라와 그에 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아멘!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하지 마세요.

우리가 과연 이 말씀대로 살 수가 있는지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는 과연 입고 먹고 마실 것을 구하지 않고 살 수가 있느냐 입니다.

입고 먹고 마시는 것은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에겐 본능적인 것들입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본능적으로 구하고 찾게 되어 있는 것들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본능적인 것을 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육신을 모르고 하시는 말씀일까요?

아니에요.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말씀을 지키라는 말씀일까요?

아니면 우리의 실존을 알게 하려는 말씀일까요?

우리의 실존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린 이 말씀 앞에 우린 그렇게 못삽니다.

그렇게 살고 싶어도 이 몸뚱이가 그렇게 살아지지가 않습니다! 라고 고백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 순종을 끌어내고 우리의 각오를 다지게 하고 열심을 독려하고자 하신 말씀이 아니에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앞에 얼마나 무기력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없는 죄인인가를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은 땅에서 났어요.

땅은 육신을 끌어 당겨요.

우리 육신은 땅에서 낫기 때문에 땅이 편해요.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땅을 벗어 날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안에 하늘에 것을 심어 놓았어요.

성령의 소욕이 심겨져 있어요.

이것이 자꾸만 땅으로 끌려가는 것을 죄라고 고발을 해요.

차라리 모르면 마음이 편한데 알고 나니 마음이 괴로운 겁니다.

 

성령의 소욕이 자꾸만 육신의 소욕이 죄라고 고발을 한단 말입니다.

성령의 소욕이 우리의 관심사를 하늘에 것으로 끌어당긴단 말입니다.

우리 몸은 이 두 사이에 끼었어요.

그래서 고난인 것입니다.

 

바울이 그러지요.

자기 안에 두 법이 있다고 하지요.

한 법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법이고 또 다른 한 법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맘대로 살고자 하는 법이에요.

 

우린 원래 우리 맘대로 살고자 하는 법만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맘 속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법을 심어 놓은 겁니다.

그러니 말씀이 떨어지면 우리 안에서 두 법이 번번이 충돌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법이 자기 맘대로 살고자 하는 법을 못 이겨요.

그러니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는 탄식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 맘 속에 두 법을 두셨을까요?

예수를 믿고 나면 우리 맘을 싹 빼내고 예수님의 마음만 있게 해 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맘을 그대로 두고 예수님의 마음을 하나 쏙 심어 놓았단 말입니다.

 

예수님 마음을 심어 놓으려면 우리 맘을 제어하는 아주 강력한 놈으로 심어 놓던가 하지!

도리어 육신의 법에 굴복당하고 맨 날 얻어터지는 그런 것을 심어 놓고서 이렇게 고달프게 하느냐 이 말입니다.

 

이건 마치 가나안 전쟁과 같아요.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어요.

그런데 그 땅은 비어있는 땅이 아니고 거인족이라는 아주 강력한 놈들이 살고 있는 땅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앞에서 자신들을 메뚜기라고 비유했어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전쟁을 하게 하십니다.

여호수아는 신약식으로 말하면 성령과 같아요.

 

잘 보세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오기까지 두 지도자가 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입니다.

 

지도자를 신약식으로 말하면 보혜사에요.

먼저 에굽에서 빼내는 보혜사로는 모세가 있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고 전쟁을 하게 하는 보혜사로는 여호수아가 있었어요.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빼내는 일을 했어요.

모세는 광야에서 죽었어요.

모세는 죽으면서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웁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고 가나안 전쟁을 하면서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을 정착케 합니다.

 

이건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하실 일을 모형하고 있는 일들이에요.

그러니 모세와 여호수아는 그림자로서 일을 한 것입니다.

모세는 육체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여호수아는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것과 같아요.

 

그래서 모세는 죽을 때 장차 자기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면 너희는 그에 말을 들으라고 했던 것입니다.

모세가 장차 일어날 자기와 같은 선자자란 바로 예수님을 말해요.

 

이걸 신약적으로 풀어 봅시다.

애굽은 죄와 사망의 나라에요.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빼내 주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빼내 주셨어요.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알려 주십니다.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가 오신다고 했어요.

다른 보혜사란 성령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 마음이 곧 가나안 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아담 안에서 난 원주민들이 살고 있어요.

이름하여 우리 옛 사람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가나안 원주민들과 같은 거인 족들과 싸움을 합니다.

우리 옛 사람과 싸워요.

우리 옛 사람을 일컬어 육신의 소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가나안 전쟁을 하면서 가나안 원주민을 다 쫓아내지 않지요.

하나님께서 조금 남겨두셨다고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시험하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금 남겨둔 가나안 족속들을 못 이겨요.

그들의 꾐에 넘어가고 급기야 그들의 신을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자들이 가나안 신을 섬기고 있었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가나안에서 살려면 가나안 신을 섬겨야 행복하게 잘 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 입장에선 가나안 원주민들이 토박이들이고 이스라엘은 객이에요.

 

그 땅에 성질을 토박이들이 잘 알지 객들은 알 수가 없어요.

그러니 가나안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려면 가나안 사람들의 방식대로 살아야 잘 살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틈만 나면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 신을 섬겼던 것입니다.

이게 사사기의 내용이에요.

 

지금 우리 몸이 그래요.

우리 몸은 이 세상에서 났어요.

이 세상과 너무도 친숙해요.

그러니 이 세상에서 살려면 세상 방식으로 살아야 해요.

 

세상에서 하늘에 방식으로 살려고 하면 못 살아요.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말이에요.

그럼 우리 안에 성령이 너 왜? 그러는데 라고 탄식을 해요.

마음이 상하고 애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예수를 믿자 말자 곧 바로 천국으로 옮겨 가면 좋은데!

그렇지 않고 이 세상에 그대로 살아가게 한단 말입니다.

우리 몸을 하늘에 몸으로 확 바꿔 줘서 세상에 살게 하시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마귀 아래서 난 그 몸으로 마귀의 나라에서 살게 하신단 말입니다.

세상과 친할 수 밖에 없는 몸으로 살게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 우리는 머리로는 천국을 그리면서도 몸으로는 세상을 그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은 가만 두지 않고 징계를 가합니다.

왜? 세상 방식으로 사느냐고 닦달을 한단 말입니다.

 

마치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광야에 끄집어내어 놓고 애굽 방식으로 살고자 한다고 달달 볶아 댄단 말입니다.

그러니 우린 죽겠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이 하나도 재미가 없어요.

 

그러니 우리는 맨 날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우리를 애굽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라고 데모를 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데모 한다고 두들겨 팹니다.

어쩌란 말인가요.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얼마나 하나님 나라와 합당치 않은 인간들인지를 고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희들은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자들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에요.

그리하여 우리가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하십니다.

 

이 부분은 잠시 후에 더 살펴보기로 하고 신앙적으로는 어떤 싸움을 하고 있으며 누구로부터 왜? 미움을 받고 환란을 당하게 되는지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마귀 입장에선 성도는 미움의 대상이에요.

 

요한복음 15장을 봅시다.

 

요 15:18-20=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성도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과 다른 편이란 말이에요.

이 말은 곧 세상과 원수지간이란 말입니다.

 

어째서 원수지간입니까?

이는 세상 속에서 예수님에 것으로 택함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에 것으로 택함을 입은 고로 택함을 입지 못한 자들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역설적(逆說的)으로 말하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지 않는 자는 예수님으로부터 택함을 입은 자가 아니란 말이 되어요.

이를 정설(定說)로 말하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자가 예수님으로부터 택함을 입은 성도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은 곧 예수님에게 택함을 입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래요.

예수님에 것으로 택함을 입은 성도는 반드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 하리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을 미워하는 자들이 누구인가를 알아야겠지요.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은 고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고 했는데 그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겠지요.

여기서 세상이란? 우주적인 세상 즉 코스모스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세력을 말해요.

그러니 예수님이 말씀 하신 세상을 의인화(擬人化) 하여서 이해하여야 해요.

 

이건 예수님을 누가 미워했는지를 보면 알 수가 있어요.

예수님을 미워하는 자들이 세상이에요.

유대인들은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는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쫓는도다” 라고 하였어요.

그러니 성경은 큰 무리들을 세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은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하였으니 제자들을 미워하는 큰 무리들이 있겠지요.

어떤 권세가 있겠지요.

 

예수를 미워하는 자들이 누구였습니까?

크게는 마귀의 세력이지만 신앙적인 의미에서는 율법주의자들이었지요.

예수님은 자신을 공격하는 유대인들을 일컬어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했어요.

마귀가 유대인 속에서 예수님을 미워하게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미워합니까?

그들의 율법 신앙을 틀렸다고 고발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고발한 신앙이 뭔가요?

율법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어디서 빼냅니까?

율법 신앙으로부터 빼내지요.

옛 언약으로부터 빼내시잖아요.

 

그럼 옛 언약이 세상인 것입니다.

율법 이래 있는 자들이 바로 세상에 속한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성도를 핍박하는가 하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핍박을 해요.

 

예수님의 제자들을 누가 핍박하던가요?

유대인들이지요.

율법주의자들이었어요.

 

지금도 이 맥(脈)은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어요.

어디에서 이어지는가 하면 교회 안에서 에요. 

지금도 교회 안에는 세상에 속한 자들이 있어요.

육적 신자가 있어요.

율법주의자들이 있단 말입니다.



교회 안에는 알곡과 가라지처럼 예수님으로부터 택하심을 입은 자들과 택함을 입지 못한 자들이 있어요.  

이러한 그림은 믿음에 조상인 아브라함 가문에서도 있었어요.

육으로 난 자와 하나님의 약속으로 난 자가 있었어요.

이 둘은 항상 다투었어요.

 

이것을 구약 시대 모세 사건으로 살펴봅시다.

 

구약 시대에 모세가 태어났을 때 애굽에 왕 바로가 남자 아이는 다 죽이라고 했어요.

애굽에 왕 바로는 마귀를 상징해요.

이 때 모세의 부모는 믿음으로 모세를 죽이지 않고 살립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으로 모세의 부모는 임금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세를 석 달 동안 숨겼다고 합니다.

 

바로의 명(命)을 어겼다는 것은 죽음을 불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의 부모는 믿음으로 자기 목숨을 버리고 모세를 지켜내었어요.

자신들의 목숨과 모세의 목숨을 맞 바꾼 것이에요.

 

모세의 부모에게 믿음이 임하니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모세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일을 하지요.

자기 목숨보다 모세의 생명을 더 귀하게 여기지요.

 

모세가 누구인가요?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자입니다.

출애굽이란?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해요.

마귀의 권세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해요.

 

신약에서 마귀의 권세로부터 빼내 주시는 분이 누구신가요?

예수님이지요.

그럼 모세는 누구의 모형입니까?

예수님의 모형이지요.

예수님은 모세처럼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출애굽을 시켰어요.

 

잘 보세요.

구약의 모세 시대에는 누가 이스라엘을 종살이 시켰습니까?

바로가 이스라엘을 종살이 시켰지요.

그럼 신약의 예수님 시대에는 누가 백성들을 종살이 시키고 있었나요?

유대교가 백성들을 율법으로 종살이 시키고 있었지요.

 

이렇게 되면 유대교가 바로 애굽에 왕과 같아지지요.

유대교가 바로 애굽이고 마귀인 겁니다.

그러니 유대교가 율법으로 백성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종노릇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주의자들을 보고 독사의 새끼라고 했어요.

너희 애비는 마귀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건져내셨지요.

예수님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건져 내니 누가 반발을 합니까?

율법주의자들이지요.

 

차근 차근 다시 설명합니다.

믿음이 모세의 부모에게 임하자 자기 목숨을 내어 놓고 모세를 살리지요.

모세는 예수님의 모형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모세의 부모는 믿음으로 자기 목숨은 버리고 예수님을 살린 것이 되지요.

이걸 신약식으로 말하면 모세의 부모는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 놓은 것입니다.

 

모세의 부모를 성도라고 한다면 성도가 자기 목숨을 버려서라도 지켜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들이 목숨 걸고 지킨 것이 뭡니까?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다는 새 언약이에요.

한마디로 행함이 아니고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대 십자가 피로 맺은 새 언약을 증거하지 못하게 하는 세력이 바로 애굽 왕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애굽에 왕이라고요.

새 언약을 증거하지 못하게 하는 세력입니다.

 

새 언약이 뭔가요?

예수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의롭다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새 언약 속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이 없단 말입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피로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믿는 믿음만 있어요.

 

그럼 묻습니다.

누가 십자가 피로 맺은 새 언약을 증거하지 못하게 합니까?

절간에 스님들입니까?

세상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목사들입니까?

 

목사들이지요.

육적 목사들이에요.

세상 사람들이나 절간에 스님들은 예수님의 피에 관심이 없어요.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 십자가 피 전한다고 성질 내지 않아요.

그들은 십자가 피를 전하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아요.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전하지 못하게 하는 세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교회 안에 있는 목사들이에요.

바울이 그랬지요.

거짓 선지자들이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파 한다고,,,

 

거짓 선지자들이 교회 밖에 있습니까?

교회 안에 있습니까?

교회 안에 있지요.

왜? 교회 안에 거짓 선지자들이 있을까요?

 

이건 구약서부터 거짓선지자들이 뭘 했는지 보면 압니다.

에스겔 34장을 보면 거짓 선지자들을 일컬어 양 털을 깎아서 자기 배를 불리고 양을 잡아먹는 놈들이라고 했어요.

 

그럼 이 시대 교인들을 통해서 이익을 챙기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삯을 바라고 일하는 목사들이지요.

육에 속한 목사들이 교인들을 통해서 자기 이익을 챙기고 있어요.

 

성도는 양이고 육적 목사는 양 잡아먹는 이리에요.

그럼 이 시대 교회 안에 거짓 선지자가 누구인지 드러났습니다.

거짓 목사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짓 목사를 삯꾼이라고 했습니다.

삯을 바라고 하는 자가 바로 거짓 선지자이고, 모세 시대로 말하면 애굽에 바로 왕입니다.

교회를 먹고 사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목사가 바로 예수님 십자가 피를 가리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세상이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율법의 요구 때문이지요.

율법이 죄를 지적하지요.

 

죄의 삯은 무엇입니까?

사망이지요.

그럼 율법의 요구란? 죄인은 죽으라는 것입니다.

 

왜? 죄인이 죽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자기 백성들 때문에 죽은 겁니다.

그러니 자기백성이라고 한다면 내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못해서 죽어야 하는데 내 대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믿겠지요.

 

성령을 자기 백성들에게 보내 주신 것은 이 사실을 믿어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자기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요.

예수님이 죽을 때 자기도 죽었다는 것이 믿어져요.

 

이젠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죽었기 때문에 율법에 요구를 다 이룬 것입니다.

아까 율법의 요구가 뭐라고 했나요.

죽음이라고 했지요.

 

그럼 율법의 요구로 죽은 놈에게 율법을 들이대며 지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없겠지요.

이미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심으로서 율법이 요구하는 죄 값을 다 치렀잖아요. 

그러니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을 믿는 성도는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이 됩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이젠 더 이상 율법적 요구를 더 지키고 자시고 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자기 백성들 속에 오셔서 이 사실이 믿어지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이 믿어진다는 것은 성령이 와 있다는 증거입니다.

처음으로 이 사실을 맛 본 사람들이 바로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12제자들과 성도들입니다.

12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나니 메뚜기 뛰듯이 온 동네 다니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증거하지요.

 

이 때 사울이라는 바울이 율법에 미쳐 있을 때입니다.

사울은 입에 게 거품을 물고 어떤 놈들이 조상 대대로 지켜 오던 율법을 없이 한단 말인가?

그래서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섭니다.

율법 신앙을 허무는 자는 이단으로 간주하여서 핍박을 했어요.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이 사울을 찾아 가십니다.

그리곤 율법신앙을 깨트려버리십니다.

예수를 만나고 나고 보니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음으로서 의로워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 신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율법 신앙이 도리어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가리는 것이란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젠 반대로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놈들과 싸우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피로서만 된다고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제사를 지내서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서만 죄가 사해진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증서를 다 도말 하였다고 합니다.

의문에 쓴 증서란 율법입니다.

그러니 이젠 율법 식으로 하나님을 섬길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율법 신앙 속에는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와 월삭과 제사가 들어가 있어요.

즉 날을 지키고 성전을 지키고 하나님께 뭘 갖다 바쳐야 하는 것이에요.

안식일을 지키고!

성전을 고수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에요.

 

그런데 바울은 이제 이러한 것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가지 말고 오직 예수님의 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인간들의 열심과 정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가만히 듣고 보니 기가 칠 노릇인 겁니다.

저런 놈을 가만히 두었다간 자기들이 굶어 죽게 생겼어요.

그래서 바울을 죽이기로 작당을 합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고자 한 것은 율법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진다고 배워 왔는데 바울의 말대로 율법을 지켜도 의롭게 되지 못한다고 한다면 누가 율법을 지키겠습니까?

 

백성들이 율법을 안 지키면 손해 보는 것은 율법 때문에 이익을 보던 자들입니다.

율법 때문에 이익을 보던 자들이 누구들입니까?

제사장들입니다.

 

이렇게 되면 제사장들이 모세 시대로 말하면 애굽에 임금이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임금처럼 백성들에게 율법으로 종살이를 시키고 있잖아요.

제사장들은 율법 지키라고 했어요.

율법을 지키면 의롭게 된다고 가르쳤어요.

 

왜? 율법을 지키라고 할까요?

이는 율법 속에는 갖가지 제사와 헌물들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와 헌물이란? 지금 식으로 말하면 돈입니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성전에 와서 제사를 지내 줘야 먹고 살아요.

율법대로 십일조도 바치고 제물을 가지고 와서 제사를 지내 주어야 해요.

제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제사장들의 주머니가 두둑하게 채워져요.

 

그런데 바울은 제사 지낼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가만 두어서는 안 되겠지요.

백성들이 바울의 말을 들으면 자기들 밥줄이 끊어지게 생겼어요.

그러니 바울을 핍박하고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왜? 제사장들이 율법을 고수하는지 알겠지요.

율법 지킴이 곧 그들의 밥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 시대 바울과 같은 설교를 하면 누가 제일 싫어하겠습니까?

바로 교회라는 직장에서 월급 받아먹고 사는 목사들이겠지요.

바울은 이런 자들을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어요.

 

빌립보서 3장을 봅니다.

 

빌 3:18-19=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바울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원수로 행한다고 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기 배(腹)를 채운다고 합니다.

 

그들의 신은 배(腹)라고 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목사 노릇 한다는 말입니다.

교인들로 말하면 먹고 살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 제사장들은 제물에 관심이 있었지 실제로 군중들 신앙엔 관심이 없었어요.

그 증거가 자기들도 지키지 못할 법들을 만들어서 지키라고 했거든요.

자기들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면서도 율법을 지키라고 한 것은 백성들이 율법을 어겨야 제물을 갖다 바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나타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놈들을 내어 좇고 상을 뒤집어엎으면서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하니 뚜껑이 열린 겁니다.

예수를 그대로 두었다간 자기들 밥줄이 다 끊기게 생겼어요.

그래서 작당을 한 것이 이단이라고 하여 십자가에 죽인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권주의자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면 길길이 날 뛰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안식일도 폐하고, 성전도 폐하고, 제사도 폐하였다고 하니 화가 나는 것입니다.

다른 건 다 양보해도 교회를 건들거나 십일조와 주일 성수 건들면 용서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게 밥줄이거든요.

 

이들은 세상에서 잘못하는 것은 육신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이해 해 줍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예수의 피로 용서 받는다고 그래요.

그러면서도 주일성수 십일조는 절대로 빼 먹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건 하나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 되니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린다고 공갈을 칩니다.

 

그런데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 목사들이 그건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을 다 이루셨다고 합니다.

법으로 바치던 시대는 지나갔다고 합니다.

그러자 교인들이 술렁거립니다.

 

그럼 답은 하나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놈들을 이단이라고 하여 교계에서 추방시키는 겁니다.

마치 애굽에 바로 왕이 남자가 나면 다 죽이라고 하듯이 복음 아는 자들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정통 신앙에 어긋난다는 핑계로 이단이라고 정죄하여서 교단에서 제명하고 쫓아내는 겁니다.

 

노골적으로 십자가 피를 전하는 것을 이단이라고 하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내 놓은 이론이 십자가 피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 이후의 성화된 삶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갈라디아 지역에 다니면서 다른 복음을 전하던 거짓 선지자들처럼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지키는 행함도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행함은 강요할 것이 아니에요.

교회 오고 싶어 하는 사람에겐 교회에 오라고 강요할 필요가 없어요.

이것 해라!

저것해라!

 

강요하는 것은 하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하기 싫은 사람을 왜? 강요합니까?

속된 말로 예수 믿기 싫다는데 왜? 예수 믿게 하려고 하느냐 이 말입니다.

 

믿음을 받은 사람은 그 믿음이 알아서 움직이게 합니다.

믿음을 받은 성도는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해요.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합니다.

 

교회와도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오고!

헌금을 해도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하고!

봉사를 해도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해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엔 억지가 없어요.

억지는 믿음이 아닙니다.

강요하고 하라고 가르친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럼에도 행함을 가르치는 것은 교인들로부터 뜯어내야 할 돈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금 받아 내야 하듯이 뭔가 받아 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이래라 저래라 시키는 겁니다.

결국 예수의 피가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행함으로 예수님의 피를 가리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믿음을 가리는 것입니다.

 

목회를 먹고 사는 직업으로 생각하는 삯꾼들은 모든 말씀을 행함 쪽으로 설교를 해요.

그런데 이 때 모세의 부모와 같이 믿음을 받은 자들이 일어납니다.

목숨 아까운줄 모르고 겁 없이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왜? 예수의 피를 가리느냐고 하면서 그들의 죄를 고발합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현대판 모세의 부모들입니다.

 

예수의 피 하나 사수하려고 자기 신앙의 목숨을 건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돌아오는 것이 바로 핍박이고 고난입니다.

환란입니다.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 당하는 환란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신앙으로 살아가면서 당하는 아픔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합니다.

 

성도는 비 진리와 싸워야하지만 또한 세상 가치로부터 벗어나는 싸움을 하게 되어 있어요.

 

이 세상 입장에서 성도는 이방인들이에요.

알다시피 이 세상 신은 마귀입니다.

마귀 입장에선 성도는 자기 백성이 아니에요.

그러니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기 전에는 마귀 아래서 종노릇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마귀의 손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마귀의 말에 순종하고 살았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마귀의 손에서 빼내고 난 후로는 마귀의 말을 안 들어요.

왜냐하면!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마귀 입장에선 가만 둘 수가 없지요.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은 기쁨보다는 슬픔이 훨씬 많아요.

그래서 시편 기자는 눈물 골자기로 통행한다고 했어요.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고 했어요.

천국에 가면 하나님이 우리의 눈물을 닦아 준다고 하셨어요.

이 말은 천국백성은 이 세상에서 눈물을 흘리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눈물이 납니까?

사람은 두 가지 경우에 눈물이 나요.

너무 기쁘면 눈물이 나고!

너무 슬프면 눈물이 나요.

 

성도는 어떤 눈물을 흘리느냐 하면 두 가지 다 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으면 눈물이 납니다.

또한 고난당하면 눈물이 납니다.

 

이 눈물은 다 흘려 보았을 겁니다.

또 지금도 흘리고 있고!

앞으로도 흘릴 것입니다.

 

전도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생을 두 가지로 다스린다고 했어요.

 

전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전 3:1-1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 찢을 때가 있고, 꿰멜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 할 때가 있느니라 9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10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두 가지 일을 병행하신다고 합니다.

형통(亨通)한 날이 있고,

곤고(困苦)한 날이 있다고 하지요.

극(極)과 극(極)인 일들을 때를 따라서 일으키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는 말은 이러한 일들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편식하는 아이처럼 좋은 일만 있고 나쁜 일을 없었으면 해요.

예수를 믿어도 좋은 일만 있기 위해서 믿어요.

 

사람이 자기 인생을 계획하면 어떤 인생으로 계획을 할까요.

평안한 인생이겠지요.

흔한 말로 돈 많이 벌어서 자기 맘대로 행복하게 살고자 할 것입니다.

 

행복하고 평안한 인생이 되려면 고난이 없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고난이 없게 해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죽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도리어 정과 욕심을 채우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천국의 반대라고 했습니다.

천국의 반대는 지옥입니다.

맞아요.

이 세상이 지옥이에요.

 

우린 지금 지옥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왜? 지옥에 살게 하는가요?

이는 장차 천국으로 빼내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도 천국으로 살고 죽어서도 천국에 가고자 해요.

그러나 이런 천국은 없어요.

하나님은 천국을 복음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지옥을 경험한 자들에게 주시려고 유업으로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게 무엇과 같은고 하니!

성도에겐 두 목숨이 있는 것과 같아요.

하늘에 목숨이 있고 땅에 목숨이 있어요.

하늘에 목숨은 땅에 목숨을 버려야지만 주어져요.

 

그런데 우리는 땅에 목숨에다가 하늘에 목숨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줄 수가 없어요.

땅에 목숨은 하늘에 목숨을 담아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땅에 목숨을 죽이고 난 후에 하늘에 목숨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새로운 건물을 지으려고 헌 건물을 헐어 버리는 것과 같아요.

우린 헌 건물을 헐지 말고 거기다 새 건물을 지어 달라고 합니다.

헌 건물을 헐지 않고서는 새 건물을 지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새 건물을 짓고자 헌 것을 헐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그래요.

땅에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로부터 오는 장막을 입게 되어요.

이것을 아는 성도는 땅에 장막이 무너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아요.

즉 천국 백성은 이 세상에서 지옥으로 사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과 화평한 자는 환란 속에서도 하늘에 소망을 가지고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천국백성은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 우리 몸이 이 세상에서의 안락함을 원해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눈에는 이 세상에서의 안락한 삶이 너무도 행복하게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마치 선악과처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게 보여요.

 

여러분! 세상 방식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 줄 아세요.

죄 짓고 사는 것이 얼마나 달콤한 줄 아세요.

너무도 달콤하기 때문에 우린 육체의 소욕을 멀리하지 않고 즐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이 달콤함을 멀리하지 못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가시와 담을 막아서 못 가게 합니다.

가시와 담이 바로 환란이고 고난인 겁니다.

가시와 담이 아픔이에요.

우리에겐 환란이고 고난인 거에요.

 

중요한 원리이니 잘 이해 하세요.

하나님 나라가 있어요.

이름하여 천국입니다.

 

천국이 어떤 곳인가 하니 사망이나 애통함이나 고통이 없는 곳이에요.

눈물이 없는 곳이에요.

성도가 장차 어디로 갑니까?

천국에 가지요.

 

천국엔 어디에 있는 사람이 갑니까?

천국에 있는 사람이 천국에 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천국에 가려면 천국의 반대편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천국에 상대적 나라를 세상을 만들었어요.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하지요.

보이지 않는 나라는 천국이에요.

보이는 나라는 이 세상이구요.

 

그러니 이 세상은 천국의 상대적인 나라에요.

천국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세상을 만들었어요.

이 세상은 천국의 상대적인 나라에요.

 

천국과 지옥은 상대적인 거에요.

천국이 천국 되려면 반드시 지옥이 있어야 해요.

지옥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천국을 몰라요.

 

지옥을 모르면 천국을 몰라요.

고난을 모르면 평안을 몰라요.

슬픔을 모르면 기쁨을 몰라요.

불행을 모르면 행복을 몰라요.

 

기쁨은 슬픔을 경험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이에요.

행복은 불행을 경험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이에요.

평안은 고난을 경험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이에요.

천국도 지옥을 경험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 속에 환란을 담아 놓고 자기 백성들에게 이 세상에서 지옥을 경험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게 하고!

애통하게 하고!

곡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곤 천국에서 이 세상이라는 지옥에서 흘린 눈물들을 닦아 주십니다.

그래 얼마나 고생 했나!

이제부터 푹 쉬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한 운명 속에 포함 되었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예수님과 한 몸이므로 예수님이 마셨던 쓴 잔을 마시도록 되어 있어요.

십자가에 정과 욕심을 죽이는 아픔을 경험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과 화목되는 축복도 있지만, 세상으로부터 미움당하는 고난도 있어요.

 

십자가를 깨트려 보면 그 속엔 죽음도 있고 부활도 있어요.

구원 속에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것도 있지만, 세상으로부터 버려짐도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화평과 환란은 햄버거처럼 고기와 빵을 한 셋트 그대로 받는 것이지 골라서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니에요.

 

왜? 성도에게 고난이 필수 코스로 주어지는 것인가요?

성도를 고난으로 밀어 넣는 이유는 죄인들이 알고 있는 천국관을 깨트리기 위함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기중심의 천국 관을 만들어요.

자기가 만든 천국은 예수님을 이용하여 자기육신의 편안함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알다시피 성도는 예수님의 몸으로 구원이 되었어요.

자기 몸을 위하여 구원된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죄가 자기 몸을 위하여 살라고 역사를 합니다.

 

이게 죄성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은 환란으로 우리의 죄성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고발하는 것은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함이에요.

죄가 고발당할 때마다 우리에게는 환란으로 다가와요.

 

그러니까 성도가 예수님의 몸으로서 당하는 환란은 고난이 아니라 축복인 것입니다.

겉으론 고난이지만 속을 깨트려 보면 그 속에 영생의 축복이 들어 있어요.

죄 사함의 은총이 들어가 있어요.

 

우리 육신이 죽는 것도 동일해요.

우리 육신은 죄를 품고 있어요.

죄가 마치 암 덩이처럼 우리 몸에 기생하고 있어요.

 

우리 몸에 영생도 담겨져 있고 죄도 담겨져 있어요.

영생은 우리 몸이 죽으면 부화(孵化)하고, 죄는 우리 몸이 죽으면 같이 죽어요.

그러니 우리 몸이 죽으면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영생은 부화가 되고 죄는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죽음에 넘기워 주는 것입니다.

환란 속에 던져 넣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고난당함이 내게 유익이라는 것도 다 이러한 이치 때문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배워가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죽음이란? 죄는 멸하고 하늘에 생명을 낳게 하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버려지는 죽음이 축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선 환란은 소망을 이루어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실이 믿어져야 환란 속에서도 기뻐할 수가 있어요.

믿음으로 당하는 고난은 반드시 소망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제가 복음을 알고 제일 감사하는 것이 죽음 너머의 세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 너머가 보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비밀이에요.

 

육으로 보면 십자가는 저주에요.

그런데 영안으로 십자가 너머를 보니까 거긴 부활의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다니엘의 세 친구가 불 가운데서 바라본 세계와 같아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이쪽에 있을 땐 불 속에 던져지는 것은 저주이고 죽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불 속에 예수님이 계신 겁니다.

예수님이 죽음 너머에서 영생으로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바벨론 왕은 죽으라고 불 속에 던져 놓았는데 그 죽음 너머가 영생의 세계였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이쪽에선 보면 죽음이지만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이 죽음이에요.

성도가 죽음을 기뻐하는 것은 영생의 세계에서 죽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환란을 십자가라고 생각해 보세요.

예수 때문에 환란을 당하잖아요.

그렇다면 환란은 곧 예수 안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럼 예수 안에서 환란을 보면 내가 지금 영생 안에 있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것이므로 즐거운 것이고 소망을 주는 것이 되는 겁니다.

 

복음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은 겉으론 아픔이지만 속으론 기쁨이 있어요.

성령이 고난 속에서 소망을 갖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에 선진들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면서도 낙심치 않았던 것입니다.

믿음이 고난 속에서도 하늘에 있는 본향을 바라보도록 이끄셨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는 고난이 심할수록 천국에 대한 소망이 더욱 강하게 일어납니다.

 

실제로 그렇잖아요.

여러분들은 언제 하나님을 찾습니까?

어려울 때이지요.

우리 인간은 본성상 편하면 하나님을 찾지 않아요.

어렵고 힘이 들어야 찾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를 환란 속에 밀어 넣고 하나님을 찾게 하시는 겁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평안 할 때 하나님과 멀어져 있고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과 가장 가까워져요.

이게 우리의 실존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나를 인하여 고난을 받으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어요.

어느 시대이고 예수님에게 속한 자는 다 고난을 받았으니 한 통속이라 생각하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인하여 고난 받음은 곧 하늘에 소속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복음으로 인한 고난이 없으면 이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으로 믿는 자들을 골라내는 것입니다.

고난은 복 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거 하나만 살펴보고 마칩시다.

 

9-10절입니다.

 

9-10절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우리가 그 피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었다고 하지요.

더욱 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지요.

이건 우리더러 구원을 끝까지 잘 지켜서 얻어야 하기 때문에 열심을 내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 반대에요.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이 죽어서 마련한 구원을 예수님이 살아서 지켜낸다는 말씀입니다.

환란 속에서도 지켜 낸다는 말씀이에요.

그러니 환란이 오더라도 안심하라는 겁니다.

 

왜? 이런 말은 합니까?성도가 구원 받은 자로서 세상을 사는 것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보면 필연적으로 환란을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그 어떤 시험이나 환란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구원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으니 안심 하라는 말씀이에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분이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자존심을 걸고 자기 백성들의 구원을 지켜내십니다.

그러니까 마음 푹 놓고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해서 부어지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8장을 봅시다.

 

롬 8:15-18=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33-39=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아들에 영을 받았어요.

종은 법으로 대하지만 아들은 사랑으로 대하세요.

우리가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으로 대하세요.

 

사랑으로 대한다는 말은 정죄하고 심판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우리 행위로 인하여 잘라내는 일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 어떤 것으로도 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가 않아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느냐?

없다고 하잖아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로서도 끊을 수 없다고 하잖아요.

 

왜? 이러한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는 줄 아세요.

이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을 이겨내신 분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것을 모두 이겨내셨어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을 이겨내신 그 아들에 영을 우리 가운데 부어주셨다고 하잖아요.

아들에 영이 부어졌다는 것은 아들이 우리 가운데 와 계신단 말입니다.

 

우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없이 믿음을 팽개치고 싶었어요.

예수 믿는 것을 미친년 널뛰듯이 하였어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이 자리에 있어요.

예수를 믿고 있다구요.

 

이는 모두가 우리 보다 강하신 분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치 않는 길인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이리저리 간섭하고 끌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린 수 없이 믿음을 팽개치고 싶은 환란을 당하였고 핍박을 당하였고 조롱을 당해 왔어요.

여러분들은 어떨는지 몰라도 저는 엄청난 아픔을 겪어 왔어요.

수많은 조롱을 당하였고!

수 없이 모멸감을 맛 보았고!

수 없이 욕을 먹었어요.

 

때론 일가친척으로부터 당하고!

때론 친구로부터 당하고!

때론 이웃으로부터 당하고!

때론 교인들로부터 당하고!

때론 목사들로부터 당하고!

수 없이 배신도 당하고 억울함도 당하였어요.

 

당할 때마다 얼마나 서글픈 줄 아세요.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아세요.

한마디로 억장이 무너지는 것처럼 아파요.

 

그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예수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어요.

그런데 결국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나의 나 됨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나 보다 더 강하신 분이 나를 붙잡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나 보다 강하신 그 분이 내 안에서 하늘에 소망을 주시고 이겨내게 하셨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여기 서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에요.

나는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내 조건과 상관없이 주께서 내 곁에 서서 악한 자의 입에서도 건져 내시고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지켜내는 것이 아니에요.

구원은 구원을 하신 분이 지켜내세요.

그러니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애를 쓴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애를 안 쓴다고 해서 잘려나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을 지켜 주시는 분이 따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환란 중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소망을 잃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 어떤 환란도 예수님이 만들어준 구원은 끊어지지 않으니 환란 속에서도 소망을 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왜 살아 나셨습니까?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 나셨잖아요.

의롭다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계속해서 자기 피를 근거로 우리를 의롭다고 변호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요한일서 2장을 봅시다.

 

요일 2:1-2=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지금 아버지가 우리에게 나의 자녀들이라고 합니다.

얘들아!

너희들이 죄 가운데서 살고 있지만 그러나 안심 할 수 있는 것은 너희를 위하여 예수님이 밤낮으로 대언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대언이란? 변호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와 우리 중간에 서서 자기 피로 화목케 하는 일을 하시고 계세요.

그러니 주눅 들지 말고 살라고 합니다.

누가 너희를 참소하더라도 예수님이 자기 피로 변호를 하고 있기 때문에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서 살아도 예수님이 간구해 주신다구요.

예수님이 우리를 간구하시려고 살아나셨어요.

우리가 범죄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도록 예수님이 일을 하세요.

그래서 우리가 밥 먹듯이 죄를 짓고 있지만 이렇게 버젓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다 하세요.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일은 예수님이 하실 몫이에요.

한번 화목케 해주고 예수님이 그 다음부터는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고 하시지 않아요.

계속해서 예수님이 화목케 하는 일을 하시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환란 중에서도 즐거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환란 속에서도 인내 할 수가 있고!

소망 중에 즐거워 할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시작 했으면 예수님이 끝까지 책임을 지시고 완성을 하십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언제 구원해 달라고 했습니까?

우린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았어요.

그냥 죄 아래서 나서 죄 아래서 살다가 죄 아래서 죽어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찾아 와서 구원을 해 주셨습니다.

그것도 우리와 한마디 상의도 하지 않고 말이에요.

예수님 홀로 일방적으로 하셨어요.

 

쉬운 말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 놓고서는 얘들아~ 내가 너희를 어떻게 구원을 했고!

어떻게 지켜내는지 볼래!

그러면서 예수님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시는 겁니다.

 

우린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박수만 치면 되어요.

와~! 우리 예수님 짱이에요!

예수님 최고에요!

 

이걸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즐거워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환란 속에서 징징 거리고 있으면 예수님이 그래요.

 

야~ 임마!

뭘 그런 걸 가지고 징징거려!

저기 앞에 있는 것이 안 보이냐!

저기 저 천국이 안 보이느냐구!

 

환란당하는 스데반의 눈을 열어서 하늘을 보게 한 것처럼 우리 눈을 열어서 하늘을 보게 하세요.

그래서 환란 속에서도 즐거워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기 환란 가운데 징징거리고 있으면 주님이 우리 안에 소리쳐요.

 

야~ 뭐 그딴 것 가지고 죽네 사네 하느냐!

날 봐라!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않았느냐!

네 눈에는 내가 안 보이냐!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 눈에 비늘을 벗겨 주세요.

세상만 바라보는 눈을 하늘을 바라 볼 수 있는 눈으로 만들어 주세요.

보이지 않는 곳을 바라보게 우리 눈에 안약을 발라서 보게 하세요.

 

우린 눈을 뜬 자들입니다.

그러니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보고 사세요.

우리 주님 곧 오십니다.

 

세상이 말해주고 있잖아요.

온 세상이 망한다고 갖가지 징조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잖아요.

지구가 몸살을 앓으면서 이제 그만 끝내자고 탄식하고 있잖아요.

 

주님이 지구를 가지고 말해주잖아요.

얘들아! 이런 곳에 오래 살고 싶니!

이 찜통 같은 곳이 그렇게도 좋으니!

 

일어나 머리를 들라고 하십니다.

너희 구속이 가까웠다고 하시면서 말이에요.

천재지변(天災地變)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환란 속에서도 인내하고 소망으로 즐거워하며 사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현재의 고난은 장차올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가 없다고 하셨는데 이 사실이 믿어지게 하옵소서.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 낼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서 담대함으로 살게 하옵소서. 또한 주님 오실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것을 천기를 가지고 분별할 수 있는 지혜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하늘빛사랑 blog https://blog.daum.net/day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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