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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요 강해) 22강. 하나님께 인(印) 맞은 자 <요 3:31-36>

by coroa 2022. 9. 2.

요 3:31-36=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22강. 하나님께 인(印) 맞은 자 <요 3:31-36>

요 3:31-36=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32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33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印)쳤느니라 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정낙원 목사

 

앞선 시간 우리는 세례요한이 자신은 쇠하고 예수님은 흥하여야 할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만물 위에 계시고!

자신은 만물 중에 속한 자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만물 위에 계신다 함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만물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자신도 만물 위에 계신 예수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에게도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라고 보냈습니다.

왜?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고 하였느냐 하면 그 속에만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은 생명이고 예수님 밖은 모두가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죽은 세상에 생명이 온 것입니다.

 

이 세상은 출애굽 때 죽음의 재앙이 임한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이나 애굽인이나 모두 죽어야 하는 세상에 하나님께서 살길을 제시해 줍니다.

어린 양의 피 안이 생명의 세계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지금 예수님이 바로 출애굽 때 피 흘린 유월절 어린 양이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이 이렇게 예수님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영(靈)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선 육으로는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없도록 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영에 속한 자가 아니면 예수님을 알아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육신으로 보낸 것은 육에겐 함정입니다.

일부러 육은 모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천사처럼 오셨으면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거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알고 있는 영은 천사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천사처럼 초월적인 존재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불가사의(不可思議) 한 일들을 하면 안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분명하게 인간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영과 육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 버립니다.

육으로도 얼마든지 예수를 하나님이라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인간과 똑같은 육신을 입게 해서 보내셨습니다.

 

그리곤 하나님이라고 믿으라고 합니다.

인간 입장에선 믿기 싫어서가 아니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모로 보나 인간과 똑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똑같이 태어 낳고!

우리와 똑같이 일을 하고!

우리와 똑같이 밥을 먹고!

우리와 똑같이 잠을 자고!

우리와 똑같이 살았습니다.

 

화장실도 다니고!

밥을 먹고 나면 트림도 하고!

피고하면 자고!

배고프면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아요.

 

아무리 뜯어 봐도 하나님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믿어주고 싶어도 우리와 너무도 똑 같아서 믿을 수가 없어요.

한 가지 다르다면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사단에 속한 애굽에 술사들도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초월적인 사건을 일으켰어요.

인간들 눈에는 예수님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큰 능력을 행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니 기적을 행하였다는 것만으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나사렛에서 예수님과 함께 자란 동무들이 있을 것 아닙니까?

예수님 형제들도 있구요.

같이 뛰어 놀면서 30년 동안 컸어요.

발가벗고 갈릴리 바다에서 멱 감으면서 자랐어요.

 

그런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이라고 믿겠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친척이나 형제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하자 미쳤다고 했어요.

예수님과 함께 자란 사람들이 못 믿는 것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예수님을 뻔히 아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안 믿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아무리 말해도 믿는 우리가 비정상이고 안 믿는 그들이 지극히 정상입니다.

 

당시 상황에서는 예수를 믿는 자들이 이단 일 수밖에 없어요.

아니 이단 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니고 이단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겐 이단입니다.

그러니 누가 이단이라는 말을 한다고 해서 성질낼 필요가 없어요.

 

아무튼 세례요한은 지금 이단적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도 사람들이 수군거릴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사실인 것을 어찌합니까?

이건 믿어 달라는 말이 아니고 사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도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안 믿을 것이라는 것도 알았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늘에 것을 증거 하자 그 증거를 받는 자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32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 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증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증거를 받지 않는 것은 육이기 때문입니다.

육과 영은 다른 세계에요.

영은 창조주의 세게이고 육은 피조물의 세계에요.

서로 달라요.

 

다르다는 말은 그냥 다른 것이 아니고 본질이 다른 겁니다.

빛과 어둠처럼 본질이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 어둠은 빛을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를 못해요.

 

육은 육의 바깥세상은 몰라요.

육에겐 영은 없는 세상과 같아요.

왜냐하면! 육으로서는 영을 감지(感知)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감지하지 못하니 없는 세계와 같은 겁니다.

육의 영역 안에선 영이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없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육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이해시킬 수가 없어요.

감지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육에게 이해하고 설득해서 예수님을 믿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이해하려면 예수님과 같은 나라 사람이라야 합니다.

영에 속하여야만 알 수 있어요.

예수님과 같은 동네 사람이면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전혀 어렵지가 않아요.

도리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상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육에겐 이해를 시킬 수가 없습니다.

이해시킬 방법이 없어요.

아무리 설명해도 육으로 밖에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설령 육이 이해해서 믿는다고 하여도 그것은 육으로 아는 것이므로 여전히 육입니다.

 

육에겐 육으로서 이해하는 사고가 있어요.

육으로서 보고 듣고 깨닫는 것으로 이해를 해요.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설득하고 이해를 시켜도 육의 사고로만 이해를 합니다.

 

육은 하늘에 말을 들려주면 땅에 사고로 이해를 합니다.

땅에 사고는 자기 입장에서 이해를 해요.

항상 자기 육신을 살리는 쪽으로 움직여요.

 

육의 사고로 이해된 하나님은 육의 하나님이지 영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육의 하나님을 “다른 신” 곧 “우상”이라고 합니다.

육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가짜이고 거짓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죽이는 쪽으로 다가오는데 인간은 육신을 살려 달라고 마중을 나와요.

결국 육은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육은 자기 사랑으로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이용하는 것입니다.

 

죄인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나요.

영과 육은 합일점이 없어요.

죽은 세상에 산 생명이 오신 겁니다.

죽음 쪽에선 생명은 낯설어요.

 

이 다르고 낯선 세계가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고발하시려고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인간과 똑 같은 육신을 입고 있지만 다른 분입니다.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류의 사대(四大) 성인으로 봅니다.

하나님으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면 믿어야 되지만, 성인으로 보이면 본받으면 됩니다.

본 받아야 된다고 하면 자기와 동류(同類)가 됩니다.

그러면 자기에게도 가능성이 열려져 있어져요.

 

예수님이 한 일도 우리가 할 수가 있어져요.

성화론자들이 이런 사고로 에수를 믿고 있어요.

나도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예수님처럼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러면 예수님은 메시야가 아니라 선생이 되는 겁니다.

메시야는 믿을 분이지 본받을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믿을 분이지 본받을 수가 없어요,

 

어떻게 피조물이 창조주를 본 받습니까?

본질이 같아야 본을 받지요.

본질이 다르면 본 받을 수가 없어요.

 

여러분 예수님의 12 제자들 중에서 예수를 판 가룟유다를 알지요.

가룟유다는 항상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했어요.

왜? 가룟유다는 12제자이면서도 다른 제자들과 같이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지 못하고 선생이라고 했을까요?

 

이는 육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가룟유다를 마귀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도 예수님을 본받자 라고 하는 자들은 다 육인 겁니다.

 

육은 예수님은 믿어야 할 분이라고 하면 격이 달라지니까 부담스러워집니다.

가까이 할 수 없는 분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하면 싫어하고 인간이기를 고집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인간의 가능성으로 이해가 가능하고 접근이 가능해 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육에 묶어 두면 예수님이 한 것을 육도 할 수 있다는 원리가 생깁니다.

하나님 앞에서 봐라!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인데 예수님이 했다는 것은 곧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증거가 아니냐! 라고 교만을 떨게 됩니다.

 

바벨탑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닿게 하려고 대를 쌓았다는 것은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다는 뜻입니다.

대를 하늘에 닿게 쌓았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천국에 가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인간이 신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 없이도 인간만으로 모든 것을 할 수가 있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고 만물을 마음대로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했으니 인간도 할 수 있는 것이 되지요.

 

그래서 인간들은 예수님을 육에 묶어 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 이런 사상이 교회 안에서 횡행하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를 닮자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안 되니 성령을 주셨다는 겁니다.

성도가 예수님처럼 살지 못하는 것은 다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성령 달라고 밤낮으로 아우성을 칩니다.

성령만 주시면 자기들이 알아서 다 하겠대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멋지게 건설해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는 짓거리가 성시화 운동이니 또는 국가 복음화 운동이니 하는 것들입니다.

온 나라의 기독교화. 온 민족의 복음화가 그것입니다.

지역마다 도시마다 성시화하겠다고 난리들입니다.

한국을 그리스도의 품으로 라고 하며 하나님 나라를 만들자고 하는 것입니다.

 

과거 이00 대통령이 서울 시장으로 있을 때처럼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고 정신 나간 소리를 하게 되어요.

아니 만유가 하나님 것인데 자기가 뭔데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합니까!

이런 일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는 것은 목사들이 다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에요.

 

지난번에 과거 노회에서 같이 있던 목사님이 전화를 했어요.

난 잊고 있었는데 전화를 하여서 울산 성시화를 위한 기도회를 하는데 참석해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겁니다.

아마 그 목사님은 무슨 감투를 쓴 것 같아요.

성시화는 핑계이고 감투 쓴 것을 자랑하고 싶은 겁니다.

그러니 서로 이단이라고 싸우고서도 전화를 하는 것입니다.

나 이런 사람이야! 라고 자랑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제가 울산을 성시화 하지 않고 있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 했어요.

대번에 소리 소리 지르며 이단이라고 하며 욕을 바가지로 먹었어요.

이 사람들은 사람들을 예수를 못 믿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몰라요.

하나님이 그럴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못 믿게 하는 것은 마귀가 하는 짓이지 하나님이 하는 일이라고 믿지를 못해요.

이 사랑들은 에서를 지옥으로 보내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어요.

 

이들은 불신자를 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몰라요.

아벨을 죽인 가인을 살려두는 이유를 몰라요.

왜? 이삭만 두지 않고 이스마엘의 후손들을 번성하게 하는지를 몰라요.

이들이 있어야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간에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들이 없으면 여자의 후손이 핍박을 받을 대상이 없어져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서 반드시 뱀의 후손들이 있어야 해요.

하나님께서 뱀의 후손을 창대케 하는 것은 여자의 후손을 괴롭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온 민족을 그리스도의 품으로 라고 민족 복음화 운동을 하는 자들은 육에 속한 자들인 것입니다.

 

복음화는 이벤트 하듯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복음화는 다름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세상이 있다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마도 욕을 바가지로 먹겠지요.

기독교는 편협한 종교라고 몰아세우겠지요.

기독교는 자기 밖에 모른다고 해야 진정한 기독교입니다.

이기주의가 묻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서로 하나라고 하면 안 돼요.

예수님은 분명하게 너희와 저희로 갈라 버렸어요.

내 나라와 세상 나라를 구분했어요.

 

우리와 너희는 다르다고 했어요.

예수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고 죽은 겁니다.

그래서 내가 가는 곳엔 너희는 오지 못한다고 한 겁니다.

이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시대 교회들이 세상과 우리 친구 아니냐! 라고 하면서 화합하자고 해요.

그래서 스님을 교회 강단에 세우고, 목사를 절에 가서 강론을 하는 것입니다.

 

지난번 조00 목사가 동국대학교에서 한 강연에서 불교나 기독교나 지향하는 것은 다 하나라고 했어요.

자신은 은퇴를 하면 종교 교류 운동을 하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중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박수를 받았어요.

스님들로부터 참으로 깨어 있는 목사라고 찬사를 받고 왔어요.

굉장히 인기 끌었습니다.

 

조00 목사는 육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육으로 이해를 하여서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도 십자가도 축복과 저주도 모두가 육으로 이해했어요.

그래서 땅에서 잘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외치고 다닌 겁니다.

 

그러니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겁니다.

육이 잘된다고 하는데 어느 인간이 싫다고 하겠어요.

가난한 나라에 가서 잘 살게 해 주겠다는데 어느 국가에서 환영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가는 나라마다 국가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이는 곧 육이 육을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대를 초월하여서 육은 항상 육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에 속한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예수님처럼 살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어떤 놈들은 예수님은 믿을 필요가 없고 성도가 예수라고 해요.

예수는 처음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 필요하고 그 다음엔 성령을 받아서 예수처럼 사는 것이 신앙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안 되니 성령을 받아야 한데요.

 

그래서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처럼 살면 된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대속을 가리는 엄청난 마귀의 궤계인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대로 라면 예수는 믿을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성도가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공연히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쓸데없는 짓을 한 겁니다.

예수님을 죽이지 않고 곧장 성령을 보내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인간보다 못한 멍청한 짓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까?

참 웃기지요.

그러니 육에 속한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코메디인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하늘로서 온 하나님입니다.

만물 위에 계신 분이 만물 속으로 뛰어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육신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신 사건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롬 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죄인의 몸이 되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곤 인간이 죽은 것으로 정해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었다고 합니다.

 

육신의 모양으로 보냈다는 것은 육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육신이면 육신의 모양으로 보낸다는 말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육에 속한 분이 아니기 때문에 육신에 모양으로 보내어 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에 속하였기 때문에 육신의 모양을 입고 온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온 것입니다.

그리곤 죽었습니다.

왜? 예수님이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서 죽어야만 했습니까?

그건 자기백성이 죄 문제를 해결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는 죄인이 해결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피해자입니다.

인간은 가해잡니다.

 

그런데 피해자의 피해는 가해자가 해결 할 수가 없어요.

피해자가 괜찮다고 해야 죄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 방법으로 하신 것입니다.

 

그 방법이 곧 하나님이 죄인을 위하여 대신 죽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백성들의 죄가 없어진 것으로 “정하셨다”고 합니다.

“정하사” 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을 자기백성이 한 것으로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한다고 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은 곧 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데 누가 토를 단단 말입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하면 안 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라는 말은 인간의 기준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안 된다고 하는 겁니다.

아니 인간이 뭔데 자기가 정합니까?

죄인 주제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반기를 든다는 것은 자기에게도 옳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주 건방지죠.

맞아요.

 

죄인의 특징은 건방져요.

죄인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진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진다는 것을 수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패하면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가룟유다가 자살 한 것도 자기 생각이 틀렸기 때문이었어요.

가룟유다는 열심당 출신입니다.

쉽게 말하면 독립군과 같아요.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을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조직입니다.

그래서 메시야가 오면 로마에서 해방시킨다고 믿은 겁니다.

열심당에서 기다린 메시야는 다윗 같은 영웅입니다.

 

그런데 갑자가 혜성처럼 예수님이 나타난 겁니다.

나타나서 갖가지 기적을 행하므로서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니 아! 이사람이구나? 했어요.

드디어 유대민족이 로마로부터 해방 할 때가 되었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하나님이 드디어 다윗 왕과 같은 영웅을 보내 주셨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3년이나 쫓아다닌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고 이상한 소리만 합니다.

죄 문제를 말하고 율법에 반하는 일을 하고 도리어 민족을 편 가르기를 하였습니다.

도무지 로마와 싸울 생각을 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가룟유다가 생각하기를 사람이 죽음에 직면하면 자기 본색을 드러내는데 예수도 죽는다고 하면 죽지 않기 위해서 봉기하지 않겠느냐고 하여서 은 삼십에 팔아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반항도 하지 않고 맥없이 죽어 버린 겁니다.

 

가룟유다의 계산대로라면 이건 아니었어요.

그래서 애꿎은 한 청년을 판단 착오로 죽게 하였구나! 라고 생각하여 양심에 가책을 받아서 자살 한 겁니다.

육은 회개가 안돼요.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해요.

 

여러분 베드로하고 가룟유다 하고 누가 더 나쁜 놈인 것 같습니까?

베드로예요.

베드로는 양심도 없는 놈입니다.

가룟유다는 양심이 있어서 뉘우치고 자기 잘못을 죽음으로 대신했어요.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면전에 대고 저주하고 욕을 하고도 죽지 않았어요.

베드로는 일평생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한 놈이라는 주홍글씨를 가슴에 달고 살았어요.

인간적으로 얼마나 쪽 팔리겠어요.

베드로가 죽지 않고 수치를 그대로 안고 산 것은 영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일평생 예수님의 대속하심의 용서해 주신 은혜로 산다는 것을 증거하며 산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본받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예수님이 우리 죄는 대신 담당해 주신 주님이라고 증거하며 살았어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말하면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일컬어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을 누가 듣겠습니까?

 

아니 30년 동안 예수가 누구인지를 속속들이 다 아는데,,,,

그런데 하나님이라고요.

이걸 믿으라고요.

차라리 내가 하나님이라고 해라!

예수야! 네가 하나님이면 난 하나님 아버지 다 라고 조롱했어요.

 

인간들을 그렇게 비아냥 거렸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인간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한번 내려와 봐라!

그러면 우리가 믿어 줄게! 라고 조롱했어요.

 

그러니 누가 세례요한의 말을 듣겠습니까?

사람이 세례요한의 말을 믿는다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입니다.

이성적으로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제 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증거를 받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이건 육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육에 속하지 않았으면 영에 속하였다는 말입니다.

즉 세상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과 한 통속인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또 나타납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라고 따랐던 세례요한의 입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말을 하는데 이를 어찌 거짓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니 유대인들이 발칵 뒤집어 진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일대 혼란이 일어난 겁니다.

 

한마디로 세상은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만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을 하나님이라는 하는 것도 머리 아픈 일인데!

그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는 자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세상은 두 쪽으로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믿는 영에 속한 사람과, 예수님은 하나님일 수가 없다는 육에 속한 사람으로 확연하게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단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은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이 됩니다.

수가 많으냐? 적으냐? 는 의미가 없습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것이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믿는 자와 믿지 못하는 자간에 갈들이 생깁니다.

예수님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간에 치열한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민족과 민족이 나라와 나라가 싸운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믿는 자는 여자의 후손이 되고, 아니라고 하는 자는 뱀의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유대인들 사이에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세상에 전쟁을 몰고 온 것입니다.

 

아무튼 세상의 기대와는 달리 세례요한처럼 예수님이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출현하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세례요한은 하나님께서 “인(印)을 친 자” 라고 합니다.

 

33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 쳤느니라”

 

누가 예수를 알아보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印)을 친 자” 입니다.

“인(印)이란?” 도장을 말합니다.

“인(印)을 쳤다”는 것은 도장을 찍었다는 말입니다.

도장을 찍는다는 것은 하나님 것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고 도장을 꽉 찍은 것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가 자녀가 출생 되면 자녀의 출생신고서에 부모의 도장을 찍어서 호적에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호적에 한 번 오르면 변개 되지가 않습니다.

이미 확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설령 사람들이 지운다 하여도 변하지지가 않습니다.

 

요즘 최0실씨와 조0민씨 이야기가 장안의 화제입니다.

둘 사이에서 출생한 자녀의 성(姓)을 아버지 성(姓)에서 어머니의 성(姓)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법률적으로 서류상으로는 조씨가 최씨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성씨는 조상대대로 아버지 성(姓)을 받습니다.

이 관행을 불변의 법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조씨를 최씨로 변경하였다 하여도 그것은 서류상일 뿐이지 실제는 조씨인 것입니다.

성(姓)을 만약 피라고 한다면 조씨 피는 세월과 상관없이 조씨 일 수밖에 없습니다.

서류상에 최씨 피라고 해도 본질은 조씨 피입니다.

 

피를 받으면 그 피는 변하지 않아요.

그 피를 인(印)이라고 해 보세요.

하나님이 너는 내 것이라고 도장을 꽉 찍었으면 피처럼 변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印)을 인간의 성(姓)으로 말한 것은 이해를 돕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알아보는 성도는 이미 하나님의 인(印) 을 맞고 이 세상으로 보내어진 자들입니다.

하나님 것으로 보내어 진 것입니다.

하나님(예수님)이 오시면 도킹(만남)을 하라고 보내어진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이 사실을 밧모섬에서 천국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천국에 가 있는 성도들의 이마에 모두가 어린 양의 도장이 찍혀 있다고 합니다.

 

계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어린 양이 성도의 이마에 인(印)을 쳐 놓은 것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고 말입니다.

천국은 이미 있었던 곳이지 장차 만들어질 곳이 아닙니다.

 

사도요한이 본 천국은 미래에 있을 것이 아니고 이미 있는 곳입니다.

다만 그곳에 구원 받은 성도들이 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이름이 적혀 있기 때문에 찾아서 구원을 시킨 것입니다.

 

피는 못 속여요.

피가 피를 알아봐요.

이건 본능입니다.

 

그래서 인(印) 맞은 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해도 전혀 부담 없이 아멘하고 받아 들여요.

성도는 예수님의 것입니다.

이렇게 인을 맞은 성도를 예수님이 끝 날까지 지켜 주십니다.

 

요 17: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예수님이 기도하는 이유는 아버지의 것만을 위하여서입니다.

아버지의 도장이 찍힌 성도만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도장 때문에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야곱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어미 뱃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너는 내 것이라고 도장을 찍어 놓아 버렸습니다.

야곱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신의 아비는 이삭인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장자가 되어서 아버지를 모시고 그 유업을 이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장자권을 팥죽으로 산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장자권의 축복을 이삭으로부터 받자마자 곧장 아버지 집으로부터 쫓겨나도록 하였습니다.

 

마치 아브람을 찾아와서 집을 떠나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운명이 야곱에게 전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약속이 야곱에게 흐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집을 떠나게 한 것은 부정모혈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곤 벧엘 광야에 하나님이 찾아와서 야곱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고,,,

어디를 가든지 함께 동행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동행 하겠다는 것은 야곱이 하나님의 족보에 올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태어나기 전에 도장을 꾹 찍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키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야곱이라는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 버립니다.

 

야곱은 이삭으로부터 받은 이름이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름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버지란 뜻입니다.

아버지 것이기 때문에 지키는 것입니다.

 

아들에 운명은 아들에게 있지 않고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도들의 구원에 확실성을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기 때문에 그 누구도 아버지 손에서 성도를 빼앗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인(印)을 맞으면 하나님이 자신의 명예 때문에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존심이 걸려 있는 자들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다 죽게 되었을 때 뭐라고 한 줄 아세요!

하나님 이 백성들을 여기서 다 죽이면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인도하지 못하고 다 죽였다고 할 것이 아니냐! 라고 하여서 살아난 것입니다.

야곱이 망할 수 없는 이유는 야곱에겐 하나님의 명예와 자존심이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지켜 준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것으로 인(印)을 맞은 사람은 절대로 망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구약의 에스겔에서나 신약의 요한 계시록을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인(印) 맞지 않는 자들은 모두가 해를 당하게 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겔 9:1-6= “그가 또 큰 소리로 내 귀에 외쳐 가라사대 이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로 각기 살륙하는 기계를 손에 들고 나아오게 하라 하시더라 2 내가 본즉 여섯 사람이 북향한 윗 문 길로 좇아오는데 각 사람의 손에 살륙하는 기계를 잡았고 그 중에 한 사람은 가는 베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찼더라 그들이 들어 와서 놋 제단 곁에 서더라 3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올라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4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5 나의 듣는데 또 그 남은 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 뒤를 좇아 성읍 중에 순행하며 아껴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6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에스겔 선지자는 성전에서부터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마에 인(印)을 맞지 않은 자들을 심판당한다고 합니다.

죽음의 집행하는 천사는 하나님의 인(印)을 보고서 집행을 합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온 애굽에 죽음의 재앙이 닥칠 때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문에 바른 집만이 살아난 것과 같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는 곧 인(印) 과 같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인(印)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유월절이 신약에서도 예표되어 있습니다.

 

계 7:1-4=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2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3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4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

 

마지막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기 전에 자기 백성들을 구별하는 인(印)치는 역사가 있다고 합니다.

인(印)맞은 자는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보호 받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마귀도 이런 흉내를 낸다는 것입니다.

 

계 13:16-18=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육이니라”

 

마귀도 자기 백성들의 이마에 인(印)을 치는데 먹고 사는 문제를 위하여 표시를 한다고 합니다.

이는 곧 땅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육신에 속한 자는 반드시 마귀의 인(印)을 맞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누구 도장을 찍혀 있느냐로 소속이 결정되고 운명이 결정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세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을 인(印)을 치셔서 이 세상에 보내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영접하도록 해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한 그들에게 확실하게 깨닫도록 성령을 보내서 마음속에 인(印)을 쳐 놓으셨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인(印)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알아보는 것은 성령의 인(印)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아들에 영입니다.

성도는 예수님과 동일한 영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한 몸이라고 하고 한 형제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성령 안에서 한 몸이 된 자는 자연히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아들에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의 말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본다는 것은 곧 그 속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보는 생명을 곧 영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알아본다는 것은 곧 영생을 얻었다는 증거입니다.

 

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보세요.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라고 하잖아요.

“영생이 있고” 라는 말은 이미 소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보는 자는 영생이 있는 자이고, 알아보지 못하는 자는 영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알아보느냐 알아보지 못하느냐로 영생을 받은 자인지 받지 못한 자인지 판명이 납니다.

이는 그 안에 영생이 있는 자는 예수를 반드시 믿게 되어 있고, 영생이 없는 자는 아무리 예수를 믿고자 하여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이 있지요.

같은 종(種)끼리는 알아보고 모인다는 말입니다.

하늘에 생명이 하늘에 생명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성도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님을 알아보도록 하신 겁니다.

같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영생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생이 있다” 라는 말은 “이미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영생이 있기 때문에 영생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즉 같은 종(種)이고 같은 생명(生命)이기 때문에 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영생이 예수님의 영생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성도 안에 있는 생명을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놋뱀 사건으로 살펴보았지요.

 

인자가 놋뱀처럼 들리면 자기 백성들을 하늘로 이끄신다고 했지요.

장차 예수님이 재림을 하실 때에도 공중에서 이끌어 올린다고 하였지요.

예수님이 자석처럼 자기 백성들을 끌어당기는 겁니다.

 

노아의 심판 때처럼 하나님이 강제로 방주 속으로 밀어 넣어 버립니다.

이 얼마나 안심되는 말입니까?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은 뭐가 두려울까요?

 

12제자나 바울이나 초대교회 성령을 받은 성도들이 다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세상을 세피하게 보고 당당하게 주눅 들지 않고 살았던 것입니다.

12제자가 받은 성령이나 지금 우리가 받은 성령이나 동일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성령 받은 성도들은 세상의 판단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 안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영생을 이미 받은 자”들입니다.

영생은 앞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받았습니다.

이미 천국에 예수님이 우리 명단을 가지고 올라가셨습니다.

그 명단을 어린양의 생명책이라고 합니다.

 

이제 그 생명책을 가지고 때가 되면 불러들일 것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절대로 지옥에 갈 염려가 없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시고 이미 천국에 가 있는 것으로 사시면 됩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감사하여야 합니다.

성도가 행하는 능력은 모두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기로 작정이 되어서 보내어졌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납득하기 어렵지요.

그래서 성경은 영생 주시기로 작정 된 자는 다 믿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영생 주시기로 작정 되지 않은 자는 절대로 예수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선 영생 주시기로 작정 된 자는 반드시 예수를 믿도록 일하시고, 영생 주시기로 작정 되지 않은 자는 절대로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일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는 아무나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印) 맞은 자들만 믿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마치 야곱이 어미 뱃속에서 이미 천국백성으로 인(약속印)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엄마 뱃속에서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기로 하고 태어났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사랑이 야곱을 끝까지 따라다니면서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이 무슨 짓을 해도 사랑으로 감싸는 것입니다.

반대로 에서는 미움 받기로 작정되어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미움 받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선 야곱이나 에서의 행동으로 사랑하고 미워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 자체가 죄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서 태어납니다.

하나님의 약속 속에는 두 노선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사랑 받는 노선이 있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 미움 받는 노선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사랑받기로 한 약속으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미움 받기로 한 약속으로 태어납니다.

 

사랑받기로 한 약속으로 태어나는 자는 예수님에게 속한 자이고!

미움 받기로 한 약속으로 태어나는 자는 예수를 핍박하는 자 편에 속하였습니다.

야곱은 예수님에게 속한 자로 태어났고!

에서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편에 속한 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한 뱃속에서 극과 극인 원수의 운명을 가진 야곱과 에서가 태어난 것입니다.

이 둘은 하나는 여자의 후손에 계보에 속하였고!

다른 하나는 뱀의 후손에 계보에 속하여 있습니다.

그래서 뱃속에서부터 다툰 것입니다.

 

하나님이 뱀에 속한 자가 여자의 후손을 공격하는 것으로 해놓았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에게 속하였다는 것으로 세상에 속한 자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요 15:19-20=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미움 받는 것이 정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미움 받는다고 당황하지 마세요.

지극히 정상이니까?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사랑받으면 이상한 겁니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세상에 속하였다는 뜻이 됩니다.

 

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세상은 자기 것을 사랑하지 예수님에 것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예수를 죽였어요.

그런데 어떻게 예수에 것을 사랑하겠습니까?

 

그러니 복음 전하다가 미움 받으면 아! 나는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하고 감사하여야 합니다.

여기서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의 차별이 나타납니다.

 

육에 속한 자는 세상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영에 속한 자는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는 것입니다.

영생을 받았기 때문에 영생이 없는 자들이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상보훈에서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으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넌 내 것이라는 하나님의 싸인입니다.

이 싸인이 없으면 당신은 가짜일 확률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을 맞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서 자유하시고 안식하시며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있는 눈과 귀를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고 인을 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는 구원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감사함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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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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