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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요 강해) 24강. 예수님이 주는 물 <요 4:1-19>

by coroa 2022. 9. 5.

(요 강해) 24강. 예수님이 주는 물 <요 4:1-19>//요 4:1-19=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24강. 예수님이 주는 물 <요 4:1-19>

요 4:1-19=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정낙원 목사

 

지난 시간 사마리아의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사마리아는 저주 받은 땅이며 사마리아 인들은 죽은 자들을 상징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죄를 범하자 에덴동산에서 쫓아내고 아담이 살아갈 땅을 저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저주의 땅인 사마리아는 이 세상을 상징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가신 것은 곧 저주 받은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죽은 자를 찾아 가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저주 받은 땅에 오신 것은 자기백성들에게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서 이 세상은 죽음 안에 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지금까지 생명이라고 여겨왔던 것은 생명이 아니고 죽음이라는 것이 들통 난 것입니다.

 

우리는 참 생명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야 알았습니다.

비로서 인간은 죄로 인하여 죽은 자이고 이 세상은 저주 받은 곳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에게 찾김당하고 난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구원을 예수님에게 찾김 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구원은 예수님에 의하여서 찾아냄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의 원함으로 찾아짐을 당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원함으로 찾아냄을 당한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몫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루실 몫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셨습니다.

계획에서부터 완성까지 예수님 홀로 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잃어버려진 채로 살아간 것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것은 자기백성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서부터 영생을 주시는 것까지 또한 천국에 앉히는 것까지 다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일컬어 “처음과 나중”이고,

“시작과 끝”이고,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십니다.



이는 곧 시작도 예수님이 하시고 마무리도 예수님께서 다 하신다는 말입니다.

자기 백성도 예수님이 정하시고 정해 놓은 그 백성을 찾아내는 일도 예수님이 하십니다.

예수님이 온 세상 구석구석 다니시면서 자기 백성들을 찾아내십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자기백성들의 구원을 추수로 비유하였는데 추수하는 곡식의 한 알갱이라도 다 찾아내신다고 하였습니다.

 

암 9:9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 체질하기를 곡식을 체질함 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알갱이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잊어버린바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안심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장차 재림을 하실 때면 천사들을 보내서 세계만방 구석 구석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하나라도 잊지 않고 다 찾아서 천국으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마 24:31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그러므로 성도는 난 구원 못 받으면 어쩔까 라는 근심은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다 찾아내시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구원 속에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담겨져 있을 뿐입니다.

 

성도란? 예수님의 흔적이 담겨져 있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하심이 담겨져 있는 것을 “영광”이라고 합니다.

“영광”이란? 구원의 꽃이 빛을 발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백성들에게 베푸신 은혜와 긍휼이라는 구원의 꽃이 밝히 드러나는 것을 일컬어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원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오고 오는 세대 속에서 찬미케 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엡 2:4-9=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하나님 자랑하라고 성도를 구원했다고 합니다.

이는 온 세계에 하나님 자랑만 남기고 싶다는 말입니다.

구원을 창조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창조된 모든 만물은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창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도요한이 밧모 섬에서 성령에 감동으로 만물이 어린양에게 찬양하는 천국을 보았습니다.

 

계 5:12-14=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찌어다 하니 14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자 보세요.

만물이 세세토록 찬양한다고 하지요.

이처럼 성도를 구원한 목적은 어린 양에게 찬양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가 구원을 자기 자랑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구원을 자기자랑으로 여기는 자는 도적놈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며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전도하는 것도 아니고!

봉사하는 것도 아니고!

착한 사람으로 개과천선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몸을 불사르듯이 고행하며 도를 닦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하심에 대하여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봉사와 충성이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본질이 아니란 뜻입니다.

구원해 주심이 너무도 감사하여서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 봉사이고 충성입니다.

이런 감사의 몸짓을 일이라 하지 않고 찬미라 하고 영광 돌리는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가 우리 속에서 새 포도주처럼 부글 부글 끓어서 어떤 액션을 취하도록 역사를 합니다.

그 액션이 때로는 형제 사랑으로 나타나고,

때로는 교회에 전도와 봉사와 충성으로 나타나고,

때로는 연보로 나타납니다.



이를 두고서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감사가 바탕에 깔리지 않은 봉사와 충성은 노동이고 수고입니다.

이런 일들을 백날 하여도 꽝입니다.

허당입니다.

 

신앙생활은 처음도 감사요 마지막도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진정 복음을 알고 구원을 안다고 하면서도 이러한 감사의 일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무슨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참된 구원이 아니던가?

시험에 든 것입니다.

 

그것도 아니면 철딱서니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심정으로 오고 오는 모든 세대가 이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찬미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엡 3:14-19=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성도를 구원하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성령을 부어 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묻습니다.

네가 죄인인줄 아느냐?

네 죄를 대신하여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을 아느냐? 라고 말입니다.

 

이 물음에 주여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사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였군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가 나와야 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오지 주님만 존귀케 되기를 바랍니다! 가 나와야 합니다.

 

여기에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그 은혜를 갚겠습니다! 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더 착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는 착한 사람이 되라고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담아 놓으려고 위해서 구원한 것입니다.

 

또한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왜? 날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왜? 날 행복하게 안 해 줍니까? 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구원 속에는 땅에 소원이 담겨 있지 않고 하늘에 소원들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 속에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담겨져 있지 않고, 의와 거룩과 진실이 담겨져 있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요구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니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모두가 예수님 홀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것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자기를 위한 구원으로 이해하는 것은 마귀가 주는 구원관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위한 것이지 개인 소장용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 수많은 교인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오로지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것은 마귀가 심어준 거짓 구원관에 미혹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하심에 대한 감사는 없고 온통 자기 소원을 들어달라고 하는 것뿐입니다.



사업을 벌렸으니 도와주어야 하고!

자식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하니 도와 달라고 하고!

세상에서 출세를 하여야겠으니 도와주어야 하고!

병들었으니 고쳐주어야 하고!

입만 열면 온통 도와 달라는 것뿐입니다.

 

그냥 도와 달라고 하기에 염치가 없으니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돈으로 때우고 몸으로 때웁니다.

내 가정 내 자식 하나 잘되는 일이라면 자기 몸을 희생하겠다고 합니다.

 

봉사와 충성도 구원하심에 대한 감사로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얻고자 하고 있습니다.

무당 같은 거짓 목사들이 열심히 하면 복을 준다고 하니 복을 따내기 위하여 노동을 하고 있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거래로 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은 이런 신앙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원한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원한 것이지 나를 위하여 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롬 1: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고전 3: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이 몸이 내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차압당한 몸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예수님의 인생을 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으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을 하신 것입니다.

 

빌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바울은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ㅇ이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뜻을 위해 죽기까지 복종한 것처럼 자기 몸을 주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내 것으로 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개인 용도로 이해하는 것은 전부가 다 사기이고 가짜입니다.

예수님 앞에 자기 소원으로 나아오는 것도 가짜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지 무엇을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영생을 받았으면 다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생을 받았으면 죽어도 괜찮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저 예수님이 하신 일에 박수만 칠뿐입니다.

예수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것을 일컬어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한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께서 혼자가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시곤 그 일에 만족하시는 것입니다.

피조물 속에는 창조주의 흔적이 담겨 있습니다.

즉 창조주의 일하심이 담겨져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이를 두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아! 참 잘 되었어!

그래 맞아 이것이야!

멋있어!

 

마치 어떤 사람이 화단을 아름답게 가꾸고 스스로 흐뭇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화단을 볼 때 마다 자신의 수고와 열정을 보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성도의 구원을 잃은 드라크마, 잃은 양을 찾는 것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여자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고서 기뻐하여 이웃을 초청하고 잔치를 벌인다고 합니다.

주인이 잃은 양을 찾고선 찾아낸 기쁨으로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야! 잃어버린 것을 드디어 찾았구나!

야! 기쁘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을 불러서 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기쁘지 않는데 오직 잃어버렸던 양을 찾은 주인만 기뻐하는 것입니다.

결국 구원이란? 하나님이 기쁘자고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는 것을 창조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하는데 피조물은 일말의 도움을 준 적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창조주가 다 하셨습니다.

피조물은 다만 창조주가 하신 일에 감탄하고 박수치고 감사하면 됩니다.

 

성도는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에 것으로 찾김 받았다는 사실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성도는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 이외에 할 일이 없습니다.

예수를 자랑하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구원 받음이 너무도 고맙고 감사하여서 봉사도 하고 헌신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의 구원 속에는 인간의 공로는 전혀 개입할 틈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순전히 예수님 홀로 찾아내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그 찾아냄의 첫 케이스가 바로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찾아냄을 당한 사람에게 어떤 일을 벌리시는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앞서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난 사람은 마치 바람이 스치고 가듯이 어떤 떨림이 나타난다고 했지요.

 

그러니 예수님에 의하여서 찾김 받고 구원을 받은 성도에겐 어떤 반응이 나타난단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가지고 자기백성들의 구원에 대한 반응을 보이고 계신 것입니다.

 

앞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가신 것은 죽음의 땅에 생명이 찾아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생명을 빛이라 하고, 죽음을 어둠이라 합니다.

생명을 영이라 하고, 죽음을 육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생명이고, 빛이고, 영입니다.

반대로 사마리아 여인은 죽음이고, 어둠이고, 육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은 영과, 육의 만남이 됩니다.

둘의 대화는 곧 영과, 육의 대화가 되는 셈입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통해서 영과, 육의 차이를 보게 됩니다.

 

영과, 육은 본질이 다릅니다.

본질이 다르다는 것은 곧 가치관도 다르고 지향하는 바도 다르다는 뜻입니다.  

하늘과 땅의 대화는 동문서답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하늘에 사람과 땅에 사람의 관심사가 어떻게 다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땅에 사람은 땅에 것을 달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하늘에 것을 주시고자 합니다.

 

육은 땅에 것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땅 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육에겐 하늘은 없는 세계입니다.

하늘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늘에 것에 대한 갈증이 없습니다.

갈증이란? 그것에 대하여 의식이 살아 있을 때 나타납니다.

돈을 알아야 돈에 대한 갈증이 생깁니다.

 

어린아이들은 돈에 대한 갈증이 없습니다.

돈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린아이들은 돈 없어도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장난감 안 사준다고 자살하는 아이는 있을 수 있어도 돈 없다고 자살하는 어린아이는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지금 세계적으로 금융시장의 불안으로 경기가 좋지 않아서 살기가 어렵다고 해 보세요.

그러면 우린 그런거 몰라요.

난 그딴거 관심 없어요! 라고 합니다.

 

그러나 돈을 아는 어른들은 돈에 대한 갈증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세상을 알면 알수록 갈증을 동반합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어야 세상에 대한 갈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었으니 세상에 평가를 신경 쓰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에게 찾김당하고 나서는 세상에 대하여 죽은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세상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반응이 나타난 겁니다.

한마디로 사람 눈치 안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삶이 고달픈 것은 모두가 타인의 시선 때문입니다.

누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온 일생을 허비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의 척도도 타인을 통하여서 결정이 됩니다.

타인에게 인정받으면 행복해 하고 외면당하면 불행해 합니다.



남 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아지고 났다고 생각하면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남보다 없고 낮고 못하다고 생각하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들도 구원 얻음 하나만 생각하면 행복한데 이웃교회와 비교하면 금새 우울해 집니다.

옆에 교회는 날로 부흥하는데 왜? 우리교회는 부흥이 안 되는가? 라고 우울해집니다.

주변에 환경을 보는 순간 우울해 집니다.

이게 육의 본성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키워도 남에게 기죽지 말라고 자식에겐 온갖 좋은 것으로 치장해 줍니다.

기죽지 말라는 말은 남에게 꿀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당당하게 어깨를 맞대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남에 자식이 영어 학원에 다니면 내 자식도 다녀야 합니다.

자식의 소질과 상관없이 경쟁이고 기 싸움이기 때문에 대추나무 연 걸리듯이 이 학원 저 학원으로 걸어 놓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남이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면 나도 들고 다녀야 하고,

남이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 나도 좋은 차를 타고 다녀야 합니다.

남이 지펠 냉장고를 사면 나도 사야 합니다.



남이 에어컨을 들이면 나도 들여 놓아야 합니다.

본능이 남보다 떨어지고 남보다 소유하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실제론 불행하지 않음에도 본인이 타인을 통해서 결핍을 느끼고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살면 잘 살수록 더 바빠지고 더 수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이 주는 문명의 혜택을 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엔 휴대폰이나 컴퓨터가 없어도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못삽니다.

시대에 뒤떨어지게 됩니다.

시대가 제공하는 정보에 어두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보가 어두우면 손해를 보고 불편함을 겪어야 합니다.

 

그래서 눈만 뜨면 남과 비교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남이 가진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하고,

남보다 돈을 더 벌자니 남 놀 때 일을 해야 합니다.

남들 놀 때 같이 놀아서는 남보다 더 나은 것을 얻지를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 살수록 수고를 더 많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국민 소득이 높아질수록 편해 지는게 아니고 더 수고롭습니다.

시대가 주는 혜택을 누리자면 더 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잘 산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노동을 댓가로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등 떠밀려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만원 지하철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떠 밀려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육은 이 거대한 세상의 흐름을 이겨 낼 수가 없습니다.

과학과 문명은 급속도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합니다.

오늘 신형이라고 기뻐하던 것도 금새 구형이 되어 버립니다.

 

신형이라고 할 때는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구형이 되면 불행해 집니다.

나도 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갖고 말테야! 라고 좇아가게 됩니다.

세상 것은 다 변해요.



손에 잡았다 싶으면 날아가고,,,,

또 잡았다 싶으면 또 날아가고,,,,

끝이 없습니다.

마치 파도가 밀려오듯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끊임없이 밀려옵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바다라고 합니다.

바닷물은 먹을수록 갈증을 유발합니다.

마귀는 이 바닷물로 인간을 사로잡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속한 육은 늘 목마른 것입니다.

그 목마름의 상징을 오늘 본문에선 우물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우물을 찾은 것은 물을 긷기 위함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목마르기 때문입니다.

목마르지 않으면 물 길러 올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물물을 가지고 인생이 목마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이 왜? 목마르느냐 하면 만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옥을 일컬어 “무저갱”이라고 합니다.



“무저갱”이란? 바닥이 없는 굴이란 말입니다.

한마디로 밑 빠진 단지입니다.

인간 속에 밑 빠진 탐욕이라는 단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심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평생 죽도록 움켜잡고자 하여도 잡지 못하고 그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죽습니다.

모두가 죄가 몰고 온 저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은 항상 외부에서 본능이 원하는 것을 채워 주어야 합니다.

떨어지면 또 외부에서 충당해야 하고 또 떨어지면 충당해 주어야 합니다.

마치 자동차에 기름이 떨어지면 주유소에서 주유를 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은 육신이 필요로 하는 물을 길러 온 것입니다.

어제도 길었고, 오늘도 길어야 하고, 내일도 길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육신이 요구하는 갈증을 해갈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육이라는 놈은 이젠 되었어! 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항상 다고! 다고! 합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인간을 거머리로 표현한 것입니다.

 

잠 30:15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고 다고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거머리는 배가 터져도 그만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먹어도 먹어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결국 먹다가 죽습니다.

 

지금 사마리아 여자가 얻고자 하는 물이 그렇습니다.

채워도 채워도 그만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항상 다고 다고 합니다.

육의 결핍을 채우고 또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육신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아주 생소한 물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육신이 단 한 번도 필요로 느끼지 못한 아주 생소한 물을 주시겠답니다.

 

예수님은 물을 얻어먹기 위해서 물을 달라고 한 것이 아니고,

그 물을 기화로 예수님이 주는 물이 있음을 알려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땅에 물을 가지고 하늘에 물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당초 접점이 없고 상종할 수없는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여자는 대뜸 어째서 유대인이 개 같은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네가 하나님을 알고 너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네가 도리어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였을 것이다” 라고 합니다.

그랬으면 내가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에 여자는 아니 이 우물이 얼마나 깊은데 당신은 두레박도 없으면서 어떻게 이 물을 긷는단 말입니까?

사람 놀리지 말고 말 같지 않은 소리 하지 말고 가던 길이나 가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은 우물에서 긷는 물이 아니고 뱃속에서 솟아나는 물이라고 합니다.

점입가경입니다.

갈수록 알아먹지 못하는 소리만 합니다.

 

예수님이 주신다고 하는 물은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인간들 속에서 공장이 차려져서 주야장창 샘물처럼 펑펑 솟아난다고 합니다.

무슨 물이 마음속에서 솟아난다고 합니다.

 

세상에선 볼 수 없는 참 희한한 물입니다.

사마리아 여자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낯선 물입니다.

아니 세상에 어디에 그런 물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여인은 예수님에게 그런 물이 있으면 얼른 달라고 합니다.

다시는 물을 길러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합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이 어떤 것이기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합니까?

 

예수님이 주시겠다고 하는 물은 다름 아닌 성령입니다.

예수님이 주는 물이 성령이라고 했으면 세상의 물은 세상의 영이란 뜻입니다.

세상의 영이란? 마귀의 영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마귀는 사람으로 하여금 목마르게 한다는 말이 됩니다.

마귀는 인간의 육을 볼모로 잡고 인간을 괴롭힙니다.

 

마귀의 영은 세상의 영입니다.

마귀는 세상의 것으로 끝없이 갈증을 유발시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로 사람들을 목마르게 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일평생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하여 종처럼 수고와 슬픔으로 살게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도대체 어떤 것이기에 세상 것으로부터 목마르지 않게 해 준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성령이 사람을 죽이고 살려내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사람을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나게 합니다.

세상 것으로 목말라 하는 육을 죽이고,

세상 것과 전혀 상관없는 하늘에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사람은 땅에 것을 목말라 하지 않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시는 말은 내가 너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땅에 가치관으로 사는 인간은 십자가로 끌고 가서 죽이고,

하늘에 가치관으로 사는 인간으로 만들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그 물을 달라고 하니 뜬금없이 세상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신 겁니다.

아니 예수님이 주시는 물인 성령과 남편이 무슨 상관이 있길래 불러 오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여자는 난 남편이 없다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아니 넌 남편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남편은 여섯 번째가 아니냐 라고 하시면서 그래 네 말이 맞다 지금 있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라고 합니다.

분명히 남편이 있다고 하시면서 남편이 아니라고 합니다.

여자 입장에선 도무지 무슨 말인지를 모릅니다.

 

이쯤 되면 예수님이 무슨 의도로 사마리아 여인에게 접근하셨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남편을 바꿔주시기 위하여서입니다.

알다시피 사마리아 여인은 육신의 갈함을 해결하려고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혼에 갈함을 해결해 주는 물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앞서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거듭난다는 뜻입니다.

하늘에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늘에 사람이 되면 육에 것으로 목말라 하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세상의 것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던 것은 하늘에 생명이 작동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생명은 땅에 것으로 목말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시는 말씀은 네가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 것으로 목말라 한다는 것입니다.

너는 육신이 요구하는 갈증만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갈증은 마음으로부터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여인에게 영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를 바꿔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모든 죄인들을 표상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마리라 여인같이 육적인 문제를 해결 받으면 시원함을(행복하리라) 얻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은 영혼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육적인 조건이 좋다고 하여도 목마름을 해결할 수가 없고 마음에 쉼을 누릴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죄인은 죄 문제를 해결 받고 영생을 받아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먹고 마실 것을 구하지 말고 먼저 그에 나라와 그에 의를 구하라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먹을 것 마실 것이 해결되어도 죽음에 문제를 해결 받지 않으면 인생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죄 문제를 해결 받지 않으면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날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하여서 이 사실을 잘 알려 주셨습니다.

부자는 세상 것을 많이 모아두면 불안을 해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쌓아도 쌓아도 심연 깊숙이 부터 밀려오는 불안함은 해소하지를 못하였습니다.

 

결국 어리석은 부자는 세상 것이 부족해서 불안해 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 것으로도 해결 할 수 없는 마음속에서부터 밀려오는 원초적인 생사문제 때문에 번민한 것입니다.

지금 사마리아 여인도 어리석은 부자와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물에 물을 길러 온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에게 원초적인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과 화목 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으로도 마음으로부터 밀려오는 불안을 해소 할 수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죄인은 죄와 사망의 문제가 해결 되지 않고서는 곤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백성들이 일평생 죽음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들을 풀어 주려고 오셨습니다.

죽음에서 풀려나면 그 어떤 것으로도 두렵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죽음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죽음은 한 셋트입니다.

그러니 죄가 없어지면 죽음도 없어집니다.

 

그러나 마귀는 사람들에게 죽음의 원인이 죄라는 것을 감추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사람이 죽는 것은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태어났다는 것은 곧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만물은 다 죽는 다는 것입니다.

인간도 만물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서러워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능은 죽음을 거부합니다.

본능이 죽음을 거부한다는 것은 곧 죽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무엇과 같은고? 하니 먹을 것이 있기 때문에 배고픔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두셨다는 것은 곧 배고픔을 전제로 두신 것입니다.

만약 배고픔을 모른다면 먹을 것이 필요치가 않습니다.

그래서 먹거리가 있기 때문에 배고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배고프기 때문에 먹거리를 찾는 것입니다.

이 둘을 서로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 죽기 싫어한다는 것은 죽지 않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종교들이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라고 하여도 인간들은 끊임없이 불노장생하려고 쉼 없이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의 삯으로 죽음을 주었습니다.

이는 죽음은 죄 때문에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노장생 할 의약품을 개발할 것이 아니라 죄 문제를 해결하여야 합니다.

관심을 약 개발에 두지 말고 죄 문제를 해결할 것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귀가 마음을 혼미케 하여서 죄 때문에 죽는다는 것을 가려 놓았습니다.

그래서 마귀 아래 있는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서는 소경인 것입니다.

죄가 있는 줄도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인줄 모르는 겁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는 자는 죄 문제를 해결해야할 필요성도 또한 그 의미도 모릅니다.

 

구원이 복음이 되려면 먼저 죄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가 숨기고자 하는 죄의 수치를 폭로하여 인간 실존을 고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니 물 좀 얻어 마십시다! 라고 해 놓고선 왜? 남의 사생활을 까발리십니까?

무슨 취향이 그렇습니까?

 

사마리아 여자 입장에선 예수님이 하는 말이 해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냥 물이나 마시고 갈 일이지 왜? 남의 일에 간섭하느냐 말입니다.

왜? 감추고 싶은 남의 과거사를 들추어내느냔 말입니다.

기분 나쁘게,,,

수치를 감추고 싶어서 아무도 오지 않는 정오 시간에 물을 길러 온 것인데,,,

 

제가 과거 회사 생활을 할 때에 중동 지역에서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은 한 낮엔 너무 더워서 장사하는 상점들도 문을 닫습니다.

저희들도 정오부터 2시까지 그 시간엔 일하지 않고 오침을 했습니다.

그 시간에 일하면 너무 뜨거워서 열사병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자연히 여인들도 그 시간엔 물을 길러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자는 가장 뜨거운 낮 12시에 물을 길러 왔습니다.

왜? 남들이 쉬고 아무도 없는 그 시간에 물을 길러 왔을까요?

이는 사람을 만나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아무도 없는 그 시간에 물을 길러 온 것입니다.

 

결국 사마리아 여자가 낮 12시에 물을 길러 왔다는 말은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인데 이는 자기를 숨기기 위하여 아무도 없는 시간에 온 것입니다.

사람의 눈을 피하고자 함은 곧 자신이 수치스러운 여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남들에게 감추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수치가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사람은 수치가 많을수록 사람 만나는 것을 싫어합니다.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두문불출하는 이유가 창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선악의 법으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책을 잡힐 수치스러운 일은 곧 남들로부터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에게 치부를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것입니다.

 

수치란? 죄입니다.

죄의 특성은 감추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드러나면 세상이 자신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제일먼저 한 것이 숨는 것이었습니다.

왜? 숨습니까?

벌거벗은 것이 수치스러웠고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교인들도 수치스러운 일이 있으면 교회를 안 나옵니다.

행여 집안이나 개인 신상에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있으면 창피하다고 교회에 안 옵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을 당하면 여지없이 숨어 버립니다.



급기야는 자기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교회를 옮깁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감추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수치 없는 자처럼 행세를 합니다.

그만큼 인간들은 수치가 드러나는 일을 극도로 경계를 합니다.

 

알다시피 사마리아 여자는 창기입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선악의 잣대(윤리, 도덕)로 본다면 형편없이 타락한 여자입니다.

스스로가 수치가 많은 여자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아무도 없는 낮 시간에 물을 길러 온 것입니다.

 

결국 사마리아 여자가 사람을 만나기 싫어하는 이유는 다섯 남편을 거쳐 온 자기의 과거 때문입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진정으로 시원해지려면 자신의 수치가 가려져야 합니다.

과거가 다 날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살면서 과거는 성처의 흔적처럼 없어지지 않고 따라다닙니다.

과거를 지우려면 죽고 다른 사람으로 살아나야만 합니다.

한마디로 죄인의 몸이 죽어야만 비로서 죄라는 수치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 여인이 목말라 하는 것은 물이 아니라 자기의 추한 모습 때문입니다.

과거의 추한 모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자신의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않고서는 목마름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자신의 수치를 감추고 숨어서 지낸다는 것은 보통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가 진정으로 자유로워 질 수 있게 하려고 들추고 싶지 않은 그의 과거를 끄집어내도록 한 것입니다.

즉 죄 문제를 들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부러 사마리아 여자를 찾아가서 넌 창기이고 죄인이라고 각인시키는 겁니다.

너는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의 과거를 들춰 낸 것은 정죄키 위함이 아니라 자유케 하려는 것입니다.

죄는 숨기려고 하면 할수록 고통은 더해집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니 두려움이 엄습하였고 수치를 가리려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로 치마를 만들어 입고서도 불안해서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찾으신 것은 수치를 가려 줄 옷을 입히기 위함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의 수치를 드러내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것을 감추어주기 위함입니다.

수치를 없애 주려고 수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지요.

 

이는 마치 살리기 위해서 죽인다는 말과 같습니다.

인간들이 생각엔 수치를 없애주려면 수치를 드러내지 말고 가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방법은 수치를 없애려고 수치를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방법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렇다면 죄는 죽음으로서만 해결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죽지 않고 죄 문제를 해결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죽지 않고 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여야만 한 것은 죄는 죽음으로서만 해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넌 죄인이고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더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숨기고 살고 싶은 사람에게 넌 이런 죄인이라고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피하고자 아무도 오지 않는 시간에 물을 길러 왔는데 상종하지도 않는 사람이 찾아와서 너는 창기라고 지적하고 있으니 예수님은 참으로 야속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남에 허물을 들추어내서 묵사발을 만들어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분입니다.

세상 말로 싸이코입니다.

예수님께선 성격이 괴팍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숨겨서 없애지는 것이 아니라 드러남으로서 없애집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할 때 죄는 사라집니다.

 

하나님은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

“아니야 넌 의인이야” 라고 하고,

“주여 난 의인입니다” 라고 하면 “아니야 넌 죄인이야” 라고 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자는 의인이고, 죄를 모르는 자는 죄인입니다.

죄 사함이란? 죄를 아는 자에게만 기쁜 소식이지,

죄를 모르는 자에겐 우이독경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죄사함이 복음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성도가 받은 복이란? 죄를 지적해 주시는 분이 있고 죄를 안다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받은 복은 죄를 고발하는 율법을 받은 것입니다.

율법을 통하여서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에겐 율법은 복음입니다.

죄를 지적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을 죄를 지적하는 율법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니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에게 죄를 지적하는 일들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지금 사마리아 여자는 복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죄를 지적하는 예수님이 찾아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감추고 싶은 남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섯 남편이 있었다고,,,,

이혼을 다섯 번 하였거나 아니면 속된 말로 남편 다섯을 잡아먹었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지지리도 복이 없는 재수 없는 여자입니까?

 

사람들마다 저 여잔 남편 다섯이나 잡아먹은 여자야! 라고 수군거리는 말이 귓전에 쟁쟁하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남편 이야기만 하면 경끼를 하고 귀가 번쩍 뜨일 것입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처음 본 사람이 부채도사 같이 여자의 과거사를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여자는 대뜸 예수님을 보고 선지자라고 합니다.

선지자가 아니고서는 이렇게 말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자의 반응을 보면 구약의 선지자들이 무슨 일을 하였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타락하면 선지자들을 보내서 그들이 죄를 지적하도록 했습니다.

 

죄를 지적하는 이유는 사람은 죄를 품고서는 절대로 마음에 쉼을 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에게 선지자를 세워 죄를 폭로케 하는 것은 죄에서 놓임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다른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역설적으로 복음은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언제 기분이 나쁩니까?

나를 무시하고 잘못을 지적 할 때입니다.

나의 존재 가치가 부정당할 때입니다.

 

세상의 영은 인간을 긍정하지만 성령은 인간을 부정합니다.

성령은 인간에겐 선이 없다고 정죄합니다.

너는 누에고치에서 실이 뽑혀 나오듯이 일평생 죄만 토해낸다고 합니다.

 

지금은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선지자 역할을 감당케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아시아 7교회에게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하여 각 교회마다 책망하고 쉴 길을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곪은 것을 짤 때는 고통스럽지만 짜고 나면 시원한 것 같이 성도들도 죄를 찔림 받을 땐 아프지만 회개하고 토설하면 시원함을 얻습니다.

아! 내가 이런 존재였구나! 를 알면 자기에게 기대를 걸지 않기 때문에 편해집니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말씀을 가지고 성도의 죄가 무엇인지를 고발해 주어야 합니다.

 

히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겁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래서 예수님은 목마르지 않고 시원케 해줄 생수를 남편 문제로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자의 남편들은 모두가 여자를 목마르게 하는 것들이였습니다.

작게는 자기 수치를 가리는 일이고, 크게는 세상 것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자의 여섯 남자들을 보고 네 남편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여자를 진정 평안케 해주는 진정한 남편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생수를 줄 남편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수를 주기 전에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여 남편과의 단절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진정 자유로워지려면 세상 것에 목말라하는 옛 사람의 죽음입니다.

옛 사람이란? 세상을 지향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성도는 세상과 단절하지 않고서는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구원이란? 과거로부터의 심판을 전제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십자가로 주어지는 것은 옛 사람의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성도를 십자가로 데리고 가서 넌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같이 죽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믿어지게 합니다.

 

인간은 세상에 대한 탐욕이 죽지 않는 한 시원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옛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새사람으로 살려 내는 것입니다.

결국 성령은 성도를 십자가 사건을 일으켜서 세상에 대한 목마름으로부터 해방시키십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임으로서 자유를 주십니다.

 

12제자들이 이 물을 마셨고, 사도바울이 이 물을 마셨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 물을 마셔서 세상 것으로부터 초월된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니 지금까지 쌓아 두었던 재물을 교회에 바쳤다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죽고 하늘에 대하여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이처럼 사람 속에서 불가능한 일들을 벌리십니다.

 

지금도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신 성도들은 세상 것으로부터 목말라 하지를 않습니다.

불가능 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물론 생수가 펑펑 솟아 날 때만 가능해지지만 말입니다.

잘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늘 상한 마음으로 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실패케 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분명하게 알게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럼에도 네가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 때문에 용서 받았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선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살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은 여전히 죄 아래 팔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간헐적이나마 육이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은 예수님이 주신 생수의 샘이 그 속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실력이 아니고 주님이 내가 너희 속에 살았다는 것을 알리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예수 안에서란? 세상 밖에서라는 뜻입니다.

즉 난 이미 예수님과 죽은 자라는 것을 알 때 란 말입니다.

십자가 안에선 세상을 이길 수 있지만, 십자가 밖에선 번번이 깨어집니다.

예수님 뜻대로 못 산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육신을 못이기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와 긍휼과 용서로서 구원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라는 놈은 성도들 속에서 그 샘물이 솟아나지 못하도록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세상 것으로 우물의 아구를 막고자 합니다.

마치 구약 아브라함의 우물을 블레셋 원수들이 막아 버리듯이 말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야곱이 라헬을 만날 때 우물에 아구를 돌로 막은 것을 야곱이 옮겨주어서 라헬의 양떼를 먹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야곱처럼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동네에 있는 야곱의 우물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늘에 물을 먹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들을 지금도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서 행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를 보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세운 새 언약을 믿고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오직 믿음뿐임을 알게 하옵소서. 날마다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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