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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요 강해) 23강. 사마리아로 가신 이유 <요 4:1-9>

by coroa 2022. 9. 3.

요 4:1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3강. 사마리아로 가신 이유 <요 4:1-9>

요 4:1-10=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 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정낙원 목사

 

오늘본문은 예수님께서 자기백성을 찾아내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앞선 니고데모와 다른 모습입니다.

니고데모는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찾아 가십니다.



스스로 찾아간 니고데모는 율법신앙을 말하고, 예수님이 찾아간 사마리아 여인은 은혜를 말합니다.

구원이란? 니고데모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 여자처럼 예수님이 찾아가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은 율법과 은혜를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고자 함입니다.

찾아짐을 당하는 자는 구원을 받고, 찾아짐을 당하지 않는 자는 저주 아래 있게 됩니다.

이 일을 예수님이 만유의 주가 되어서 하십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은 만물 위에 계신 분이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만물 위에 계시다는 것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고 만물을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만물은 예수님이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창조하셨어요.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는 것은 이 세상은 예수님 중심으로 다스려진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중심에 예수님을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은 예수님을 드러내는 그림과 같습니다.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별들도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창조가 되었고!

땅에 있는 나무나 바람조차도 예수님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풍랑도 예수님 앞에 잠잠하였고!

무화과나무도 예수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귀신조차도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필요한 존재입니다.

인간 또한 예수님을 위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보이지 않는 것들과 모든 정사와 권세조차도 예수님을 위해서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 즉 티끌 하나도 다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가지고 예수님을 천하에 드러내시는 일을 하십니다.

마치 화가가 빈 도화지에 자기가 생각하고 구상한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하는 대하드라마를 세상에다 연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만물의 주”가 되시도록 일을 해 나가시는 겁니다.

“주(主)”란?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천지”의 주인이십니다.

즉 하늘과 땅의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천국”에서도 예수님은 “주”이고, “지옥”에서도 예수님은 “주”이십니다.

“신자”도 예수님이 “주”이고, “불신자”도 예수님이 “주”이십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시기 위해서는 “신자”도 필요하고, “불신자”도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셔서 갈라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서 혼돈된 세상을 정리정돈을 하라고 하신 겁니다.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天地)를 창조하시니라”

 

“천지”란? 문자적으로는 “하늘”과 “땅”입니다.

장소적으로 말하면 “천국”과 “지옥” 이에요.

영적으로 말하면 “영”과 “육” 이고!

은유적으로 말하면 “빛”과 “어둠” 입니다.

 

그런데 무슨 연고인지는 몰라도 “천지”중에서 “하늘”은 멀쩡한데,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합니다.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神)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은 분명히 질서의 하나님이신데 이처럼 땅을 어지럽게 창조하셨을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땅”에 무슨 연고가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천지에서 하늘인 “천(하늘)”은 질서정연하게 있는데, 유독 땅인 “지(땅)”가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땅”이 문제가 생긴 것을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그 힌트가 잠시 나옵니다.

 

계 12:7-9=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하늘에서 미가엘과 용의 전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미가엘은 하나님 편을 말하고 용은 마귀를 말합니다.

그런데 마귀가 전쟁에 패하고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났다고 합니다.

 

왜? 마귀가 하나님과 전쟁을 하고 땅으로 쫓겨났을까요?

그야 하나님께 반역하였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마귀는 피조물입니다.

 

그렇다면 피조물과 창조주 간에 전쟁이란 불가능합니다.

애당초 상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을 전쟁이라는 말로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도대체 마귀가 무슨 역모를 꾀하였기에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났을까요?

 

그 해답은 에스겔 28장을 보면 하늘에서 어떤 반역이 일어났는지 힌트가 나옵니다.

 

겔 28:11-19=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12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왔도다 13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14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15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16 네 무역이 풍성하므로 네 가운데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내었고 화광석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17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열왕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18 네가 죄악이 많고 무역이 불의하므로 네 모든 성소를 더럽혔음 이여 내가 네 가운데서 불을 내어 너를 사르게 하고 너를 목도하는 모든 자 앞에서 너로 땅 위에 재가 되게 하였도다 19 만민 중에 너를 아는 자가 너로 인하여 다 놀랄 것임이여 네가 경계거리가 되고 네가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하리로다 하셨다 하라”

 

두로 왕을 일컬어 완전한 “인(印)” 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지혜와 아름다움이 가득한 “인”이었다고 합니다.

“인”이란? 하나님과 동일하게 완전하고 아름다운 존재였단 말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성령을 “인”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두로 왕은 영적 존재인 마귀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동산에서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처럼 온갖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기름부음을 받은 특혜도 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천사들을 수종 들게 하고 불 속을 거닐게 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에게 오케스트라도 만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다른 천사들보다도 대단한 은혜를 받은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놈이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이 많은 것을 보고 마음이 교만하여 불의를 드러내어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혔다고 합니다.

성소를 더럽혔다는 것은 주인행세를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땅으로 내어 쫓아 내버렸다고 합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보면 에스겔이 두로 왕에게 한 말로 해석하기에 너무도 무리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이 두로 왕을 마귀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저 역시도 에스겔은 두로 왕을 가지고 사단의 반역을 말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땅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 위에 처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반역한 마귀가 땅에 살기 때문입니다.

마귀를 일컬어 “어둠에 신”이라고들 합니다.

또는 “죽음에 사자” 라고도 합니다.

 

어둠이다! 죽음이다! 라는 말은 창세기 1장 2절의 말씀을 빌리면 혼동과 공허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단이 지배하는 혼돈과 공허한 세상을 손 좀 보기 시작하셨습니다.

사단이 내어 쫓긴 땅도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말씀으로 갈라내는 일들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창 1:3-10=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6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9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가라사대” 란 “말씀” 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것을 갈라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하는 일이 뭔가 하면 혼돈과 공허를 질서와 채움으로 바로 잡는 일입니다.

혼돈과 공허란? 죽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말씀이신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하시는 분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말씀이 빛과 어둠을 갈라내고!

땅과 바다를 갈라내고!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로 갈라내는 일을 하십니다.

 

잘 보세요.

창조하였다고 하지 않고 이미 만들어져서 섞여 있는 것을 갈라낸다고 하지요.

만들어진 것이 무슨 연고인줄을 몰라도 분리수거하기전의 쓰레기처럼 뒤죽박죽되어 있지요.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창조는 무엇을 만들었다는 것으로 말하지 않고, 갈라내고 구분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말씀이신 하나님이 분리수거를 하시는 겁니다.

 

분리수거를 다른 말로 “심판”이라고 합니다.

또는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이란? 섞여 있던 것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심판이란? 어린아이가 온 방안을 어지럽혀 놓은 것을 어머니가 제자리로 정리 정돈하는 것과 같습니다.

책은 책꽂이에 정리하고 장난감은 장난감 바구니에 제자리로 두는 것과 같습니다.

 

“빛은 빛의 영역”으로 집어넣고!

“어둠은 어둠의 영역”으로 집어넣어 정리하는 것입니다.



이를 구원 이야기로 말하면 “천국에 갈 자”와, “지옥에 갈 자”로 갈라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에서 이렇게 갈라내는 일을 말씀이 하신다고 했지요.

그래서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을 열면서 태초에 아버지 하나님과, 말씀이신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고 했습니다.

 

요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말씀이신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했지요.

요한복은 첫 시간 강의에 살펴보았는데 기억나시지요.

 

말씀이신 하나님인 예수님이 땅에 오신 것은 창세기 1장을 구현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갈라내시려고 오셨다는 말입니다.

심판하러 오셨어요.

 

구약에선 말씀으로 계셨고!

신약에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천국에 갈 자는 천국으로 인도하시고, 지옥에 갈 자는 지옥으로 보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리하는 것을 성경은 “심판”이라고 하고, 심판하시는 분을 “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냥 “주”라고 하지 않고“심판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심판 주”란? 심판하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시는 곳엔 반드시 인간들이 갈라지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너희와 저희로 갈라집니다.

한 집안 식구 중에서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갈라져요.

 

물과 기름처럼 이상하게 갈라져요.

자기 소속으로 분리가 되고 자기 영역으로 돌아가는 일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구원과 심판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 된 자는 찾아냄을 당하여 천국으로 인도되고, 나머진 그대로 땅(지옥)에 둡니다.

예수님께서 “만물 위에 계신 주”가 되셔서 갈라내시는 겁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부터 예수님께서 “심판 주”로서 하는 일들이 본격적으로 공개가 됩니다.

창세전에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들이 찾아냄을 당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마치 모래 속에서 바늘을 찾듯이 자기 백성들을 찾아내십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듯이 찾아내십니다.

 

안타깝게도 하늘 백성들은 자기가 잃어버려짐을 당하였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에 의해서 찾아짐을 당하고 난 다음에야 자신이 잃어버려진 자임을 알게 됩니다.

아! 내가 만세 전에 예수 안에서 구원 받기로 작정 된 자인데 잠깐 잃어버린 자로 있었구나! 를 알게 됩니다.

 

“구원”이란? 건져내는 것을 말합니다.

건져냄을 당한다는 것은 어딘가에 빠져 있다는 뜻입니다.

빠져 있다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한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죄 아래 빠져 있다는 말입니다.

죄에 갇혀 있다는 뜻입니다.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건져주어야만 나올 수가 있어요.

죄는 우리가 이길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죄 안에 갇혀서 출생하였기 때문입니다.

 

죄에서 건져 준다면 당연히 건져주는 분은 죄 밖에 있는 분이라야 하겠지요.

만물 밖에 계신 분이라야만 죄에 빠진 인간을 건져 줄 수 있어요.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만물 위에 계신 분이라고 증거한 것은 하늘 위에서 건져 주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인간들 중에서 구원자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당연히 없습니다.

인간 속에선 건져 줄 자가 없습니다.

 

왜? 인간 중에선 구원자가 없습니까?

이는 동일하게 죄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영웅호걸도 죄에서 빠져 나올 수도 없거니와 건저 주지도 못합니다.

 

건져주지 못한다는 것은 믿을 구원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구원자가 아니면 믿을 대상이 아니지요.

그러니 인간은 믿으면 안 되어요.

 

문선명이도 안 되고!

석가모니도 안 되고!

마호메트도 안 되고!

공자도 안 됩니다.

 

모두가 죄 아래서 태어난 죄인들이에요.

우리와 같은 영역에 갇혀 있는 자들이에요.

같이 죄라는 우물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어찌 건진단 말입니까?

같이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에게 구원해 달라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인간들이 만들어 낸 세상 종교는 모두가 사기인 것입니다.

문선명이도 사기이고!

석가모니도 사기이고!

마호메트도 사기이고!

공자도 사기이고!

교황도 사기입니다.

 

교황의 발에 입을 맞춘다고 죄가 씻어지지 않습니다.

세상엔 그 어떤 인간도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목사도 아니고!

신부도 아니고!

스님도 아니고!

교황도 아닙니다.

다 동일한 죄인일 뿐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실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만물 밖에서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구원 속에는 외부에서 빼내 주었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세상 밖에서 오신 것입니다.

죄에 빠져 있는 자기 백성들을 건져내려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라고 했지요.

자기 백성이라 함은 구원 받을 자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만 죄에서 건져 주시는 겁니다.

 

히 2:14-16=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자기 백성들이 육신에 속하여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육신은 사망의 세력에 붙잡혀 있어요.

 

누가 누구를 붙잡고 있습니까?

마귀가 사망으로 성도를 붙잡고 있다고 하지요.

사망이 육신을 붙잡고 있으니 자연히 죽음에 질질 끌려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능은 죽기 싫어합니다.

 

그러니 마귀가 사망을 가지고 너 죽을래 하면 인간은 꼼짝없이 덜덜 떨게 되어 있어요.

마귀가 밉고 사망이 싫지만 인간으로서는 이길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 일평생 탄식 속에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죽음의 세력을 없애 주시지 않으면 일평생 두려움에 떨며 살 수 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육신은 죄 아래 있기 때문에 죽음을 이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죄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야만 합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나요.

자연히 인간 중에선 죽음에 문제를 해결해 줄 자가 없는 것입니다.

죽음과 상관없는 분이 오셔서 구원을 해 주셔야만 합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 주셨어요.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마귀가 지배하는 죽은 세상에 가서 생명책에 녹명된 자들을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구출하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아버지 명을 받고 구원자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를 구원하지 않고 오직 아브라함의 후손만 구원한다고 합니다.

구원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 백성들에게만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아브라함 언약 안에 있는 자를 말합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특징이 뭡니까?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불쑥 찾아 와서 “너는 내 것”이라고 찜해 버렸어요.

아브라함은 졸지에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습니다.

언약이라고 해도 쌍방 간에 약속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께 한 약속입니다.

이제부터 아브람 네 자손은 전부 하나님 것으로 인정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곤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땅 가지고 싸우고 있지요.

왜? 그런지 아세요.

이스라엘이 살고 있는 땅이 원래 팔레스타인 사람들 땅입니다.

팔레스타인들이 가나안 인들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있어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땅을 내 놓으라고 하니 못 주겠다고 합니다.

왜? 못 주냐고 따지니 하나님이 주었데요.

 

이건 순전히 억지입니다.

남의 땅에다 줄 그어 놓고 이제부터 내 땅 이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성경 이야기가 이성으로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늘 이렇기 때문입니다.

 

한 뱃속에 있는 똑 같은 인간을 가지고도 “넌 천국”“너 지옥”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갈라내는 겁니다.

야곱과 에서가 그렇잖아요.

똑 같은 인간인데 야곱은 사랑받고 에서는 미움 받는 겁니다.

갈라지는 인간 입장에선 굉장히 화가 나요.

 

그러니 잘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 입장에선 말이 안 되어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었다고 하는 말을 용납 할 수가 없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으니 자기들 땅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땅을 하나님이 만들었어요.

하늘도 하나님 것이고!

땅도 하나님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땅 가지고 경계와 거주를 정하셨어요.

넌 여기 살고, 넌 저기 살으라고 했어요.

 

하지만 이것도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 할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입장에선 이스라엘이 하는 짓거리는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평생 전쟁하는 것입니다.

 

암튼 이스라엘이 하는 행사머리가 꼭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것과 똑 같아요.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와서 “넌 이제부터 내꺼다” 라고 한 것이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자기들 땅이라고 우기는 것과 똑 같습니다.

 

그 아비에 그 자식입니다.

인간 입장에선 하나님은 폭군입니다.

경우도 없고 상식도 없고 막무가내에요.

무조건이고 일방적입니다.

 

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일하시는지 아십니까?

모든 게 하나님이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것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겁니다.

 

주인으로서 행사할 뿐입니다.

그러니 폭군이 아니지요.

다만 인간 입장에서 하나님은 폭군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팔 걷어붙이고 주인 노릇을 하니까 인간들이 반발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주인인줄 자기 마음대로 살았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불쑥 찾아와서 내가 주인이다! 라고 하니 당황스럽고 놀라는 겁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자기 뜻대로 인생이 살아지지 않으면 원망하잖아요.

내 뜻대로 인생이 살아지지 않는다는 것은 누군가가 간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가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이지요.

 

우리는 천국도 모르고 지옥도 모르고 잘 살아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불쑥 찾아와서 천국과 지옥이 믿어지게 만들어서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어 버렸어요.

모르고 살 땐 괜찮았는데 알고 나니 찜찜한 겁니다.

 

옛날엔 하나님이란 내 마음 속에서 없던 존재였는데 어느 날부터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의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식이 되니 이만 저만 불편한게 아닙니다.

 

에이! 내 마음대로 살아야지? 라고 해도!

마음속엔 에이! 이건 아니지? 라는 또 다른 분이 말하고 있어요.

그래서 나오는 말이 와! 미치겠네!

돌아버리겠네! 입니다.

 

우리는 일평생 불평만 하다가 천국으로 질질 끌려서 가는 자들입니다.

단 한 사람도 기분 좋게 천국에 가는 사람이 없어요.

다 불평하면서 울면서 가는 겁니다.

마음은 잠시 잠간 기쁨이 생기지만 육신은 안 그래요.

육신은 불편하고 힘들고 미치겠어요.

 

신앙생활이란? 어쩌면 주권 이양 싸움입니다.

주체 싸움이에요.

내가 주인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 살 것인가의 싸움입니다.

 

우리의 인생사가 여러분 뜻대로 안 살아지는 것도 다 하나님이 주인으로서 행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한다는 것이 신앙적으로는 엄청 기쁜 일임에도 실제는 그렇지가 않아요.

 

인간은 답을 알아도 그 답대로 살아 내지를 못하는 존재에요.

성도는 자신은 답대로 살지 못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에겐 없는 상함 심령이 있고 애통함이 묻어 나오는 겁니다.

야! 난 참으로 나쁜 놈이구나! 를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암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인간들은 반발하면 안 돼요.

반발한다는 것이 인간들이 잘못 알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주인인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그렇게 만들어 놓았어요.

 

죄가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가르쳐 놓았어요.

그래서 자기 인생에 태클을 거는 자는 하나님이라도 용서하지 않아요.

이 얼마나 건방진 놈들입니까?

 

앞선 시간에 말했지요.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 것이라고,,,

지옥도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이고 천국도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심판이란? 영역을 구분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펼쳐 가는데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약속에는 천국과 지옥이 있어요.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였잖아요.

하늘과 땅을 창조했잖아요.

하늘과 땅은 천국과 지옥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 곳에 살 백성도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를 토기장이로 비유하셨어요.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이 있다고 했어요.

또한 바로와 모세를 가지고서도 말했어요.

모세는 긍휼의 그릇으로 택하였고, 바로는 진노의 그릇으로 택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를 믿으면 안 되어요.

천지창조의 원리에 근거해서도 반드시 예수를 안 믿는 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게 하나님의 약속에 담겨져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 약속을 칼로 딱 쪼개면 천국과 지옥이 나와요.

자연히 천국백성도 나오고 지옥백성도 나오는 겁니다.

언약 속에 구원과 저주가 나오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쫓아내 버렸지요.

에덴동산은 천국의 모형이고 범죄하고 쫓겨난 아담이 살아가는 곳은 지옥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지옥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옥에서 살고 있는 아브라함을 찾아가서 “너 내꺼!” 라고 했어요.

즉 “너 천국에 가!” 라고 했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넌 이제부터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은 넌 천국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백성이 되는 근거가 인간에겐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서만 될 수가 있습니다.

그게 아브라함 언약 속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은 것은 앞으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이런 선택의 방식으로 만들어 가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예수님의 족보에 아브라함이 올라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말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언약에 따라서 오셨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만물의 주관자로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구원해내시는지 살펴봅시다.

 

오늘본문은 요한복음에선 예수님께서 자기백성을 구원하는 첫 케이스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의미심장한 것은 저주 받은 사마리아 땅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본문을 봅시다.

 

3-4절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쌔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그 이유는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는 뿌리 깊은 갈등 때문입니다.

그들이 상종하지 않는 이유를 잠시 살펴보기로 합시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가신 사건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엄청난 사건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남쪽에 위치한 유대지방에서 북쪽에 위치한 갈릴리로 가고자 하였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알겠지만 이스라일을 우리나라와 같이 길게 늘어져 있어요.

남쪽 유대를 부산이라고 한다면, 북쪽 갈릴리는 서울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 중간 지점에 사마리아가 위치해 있어요.

 

당시에는 걸어서 가는 길이라 한 걸음이라도 단축해 가고자 지름길을 이용하였습니다.

사마리아가 그 지름길이에요.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지나가지 않고 빙 둘러서 다녔어요.

사마리아로 가면 사흘길이고 빙 둘러서 가면 엿새길이에요.

 

그럼에도 지름길을 마다하고 빙 둘러서 다닌 것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사마리아로 가신 겁니다.

이건 엄청난 사건이에요.

 

구약 이스라엘은 솔로몬 왕이 죽고 난 후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에 의하여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분열이 되고 맙니다.

마치 우리나라가 남한과 북한으로 나누어진 것과 같습니다.

 

솔로몬이 죽으면서 르호보암에게 왕권을 넘겼습니다.

그러자 솔로몬을 따르던 신하들이 르호보암에게 와서 백성들 위에서 군림하지 말고 종이 되어서 섬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싫다고 하면서 자신은 부왕(父王)보다 더 엄하게 다스리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신하들이 반발을 하고 역모를 획책합니다.

역심을 품은 자들이 여로보암을 왕으로 추대하여 나라를 두 쪽으로 나누게 됩니다.

르호보암을 따르는 자들은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가 따랐고, 여로보암은 10지파가 따랐습니다.

 

그래서 르호보암이 다스리는 남쪽을 유다라고 하고, 여로보암이 다스리는 북쪽을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에 의하여서 일 년에 세 차례(유월절, 칠칠절, 초막절)는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순례를 하여야 합니다.

 

북쪽을 다스리던 여로보암 왕이 이를 잘 알고 있는 터라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변심을 할까봐서 술수를 씁니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못하게 하려고 벧엘에 제단을 만들어서 제사를 지내도록 한 것입니다.

일명 종교적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남쪽 유다 입장에선 기절초풍할 일입니다.

 

그러다가 북쪽 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앗수르 왕은 북쪽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면서 지도층 대부분과 상류층 남자들을 앗수르로 끌고 가 살게 하였어요.

 

그리곤 북쪽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엔 앗수르가 지배하던 다른 민족들을 역으로 유배를 시키는 정책을 폅니다.

일종의 인구분산 정책을 쓴 겁니다.

 

이 때 이방민족들은 자기 신들을 가지고 이스라엘에 들어오게 됩니다.

앗수르 왕이 종교적 충돌을 막기 위해서 이방인과 이스라엘 간에 혼혈 정책을 편 것입니다.

결국 사마리아에 사는 사람들은 종교와 혈통의 혼합이 이루어지고 만 것입니다.

이걸 남쪽 유다 사람들에겐 도저히 용납 할 수가 없어요.

종교적 배도(背道)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 후 남쪽의 유다도 북쪽 이스라엘이 망한지 약 100여년 후인 BC 605년에 바벨론의 침공으로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벨론은 유다 자치구를 허락하여서 종교적 순수성을 유지하게 됩니다.

또한 민족적인 혈통도 유지합니다.

 

그러다가 고레스 왕 때에 유다는 예루살렘으로 귀환을 하게 됩니다.

고레스 왕은 바벨론에 패망할 때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라는 허가를 해 주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성전이란?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을 건축하라고 하니 얼마나 감격하였겠어요.

 

이 때 북쪽 이스라엘에게 속하였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신들도 성전을 건축하는데 돕겠다고 모금을 해 가지고 왔어요.

그러자 남쪽 유대인들이 혼혈족의 돈은 부정한 돈이라고 해서 거부해 버립니다.

이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격분하여서 성전건축을 방해하는 일들을 자행하게 됩니다.

 

그 후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헬라제국이 이스라엘을 장악하면서 사마리아의 그리심산에 예루살렘 성전을 본 딴 성전을 건축하여서 사마리아 인들로 하여금 종교적인 행사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기절할 일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혼혈족이라고 개 같은 이방인이라고 취급하는 것입니다.

상종도 하지 않을 뿐더러 그 땅을 통행하지도 않았어요.

남쪽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는 저주받은 땅이고 사마리아 인들은 저주 받은 재수 없는 인간들이라고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에 가는 것 자체를 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사마리아는 꼴도 보기 싫은 저주 받은 죽음의 땅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저주받아 더러운 죽음의 땅인 사마리아로 예수님이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부정함의 대명사인 창기를 만납니다.

이건 유대인으로서는 도무지 이해 할 수도 이해되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속된 말로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정서를 고려한다면 최소한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의 입장은 고려치 않고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차근차근 이루어 가시는 수순을 밟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사마리아로 가셨을까요?

 

이는 예수님이 세상에서 하실 일을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영적인 의미로 사마리아는 죽은 땅이고!

사마리아인들은 죽은 자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죽었다”라는 의미는 죄 안에 갇혀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죄와 사망이라는 세력 안에 갇혀 있는 자들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누군가가 사망의 권세에서 꺼내주지 않으면 일평생 사망 안에 갇혀서 살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모든 인간을 표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겠지요.

왜냐하면! 사마리아 사람들만 일평생 사망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사마리아는 온 세상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가신 것은 곧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이 세상에 오신 것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사마리아에서 구원의 일을 해 나가시는 것을 통해서 지금 이 시대 어떻게 구원의 일을 해 나가시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앞서서 죄에서 건짐 받은 것을 구원이라고 했지요.

구원받은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영생을 얻었다 라는 말입니다.

영생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영생을 가지고 오셨다는 말은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죽은 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들이 죽은 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가지신 예수님이 죽음의 땅에 갔다는 것은 죽은 자들을 살려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죽음의 세상이 생명의 세계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뀌게 되고 예수님이 찾아가는 자마다 죽은 자에서 산 자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신다고 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 속에 자기 백성들이 섞여 있다는 말입니다.

 

마 15장을 보면 누가 자기 백성인지를 알 수 있는 사건이 있습니다.

 

마 15:21-28=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 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한번은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역을 순회하시는데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 앞을 가로막습니다.

그리곤 귀신들린 자기 딸을 살려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너 같은 이방인은 상종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러시면서 자녀들이 먹을 떡을 개들에게 주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합니다.

가나안 여인을 개라고 하는 겁니다.

이건 아주 모욕적인 말이에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녀들이 먹을 떡이란? 영생 곧 구원을 말합니다.

구원은 만세전에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녀들에게만 허락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지금 잃어버려짐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난 그 잃어버려진 자를 찾으러 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가나안 여인을 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개라는 말은 넌 짐승이란 말입니다.

즉 넌 인간이 아니란 말입니다.

죽은 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여인은 맞습니다!

나는 개같이 죽은 자 라고 합니다.

이건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간청을 지금 식으로 말하면 난 예수님의 생명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나는 지금 예수 당신의 생명이 필요하오니 생명을 가진 당신이 좀 살려 주십시오 라고 애원하였던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이 영생을 주실 구원자라는 것을 알았을까요?

그건 예수님이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는 믿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백케 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예수님을 가나안 여인은 알아 본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 여인을 보시고 “네 믿음이 크도다” 라고 칭찬하시면서 그의 딸을 살려주셨습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라는 말은 “야! 네가 날 알아보는 것을 보니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받은 자구나” 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을 칭찬하지 않고 그 여인의 믿음이 있음을 칭찬하고 계신 겁니다.

믿음이 예수님이 영생을 주시는 분임을 알게 해 주셨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의 이러한 행동은 유대인들의 행동과는 대조적임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영생을 주겠다고 다가가자 그들은 스스로를 우리는 이미 영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주는 생명은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거절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여인은 자신은 죽은 자이기 때문에 생명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생명이 있다고 하는 유대인들에게는 구원을 주시지 않고 생명이 없다고 하는 가나안 여인에겐 구원을 주셨습니다.

 

한 쪽은 살았다고 하고 한 쪽은 죽었다고 합니다.

가나안 여인은 십자가 안에서 자기를 바라보았고, 유대인은 십자가 밖에서 바로 보았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바라보면 족은 자로 보이고, 십자가 밖에서 바라보면 산 자로 보입니다.

 

그래서 살았다고 생각한 유대인은 예수를 거부하였고!

자신은 죽었다고 생각한 믿음을 받은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과 가나안 여인의 차이입니다.

유대인에게는 예수님에게 영생이 있다는 믿음이 없었고!

가나안 여인에겐 예수님에게 영생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믿음에 선물을 받지 못하였고 가나안 여인은 믿음에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에게 믿음에 선물을 주셨습니다.

 

유대인이 자기 백성이 아니고 믿음을 받은 자가 자기 백성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 누구든지 믿음에 선물을 받은 자는 자기백성이고 받지 못한 자는 자기백성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유대인과 가나안 여인을 통해서 누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가 있어집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란? 가나안 여인과 같이 자신에게 생명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가 잃어버려진 경험이 없는 자는 구원되지를 못합니다.

눅 15장에 보면 예수님은 죄인의 구원을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것과, 잃은 양을 찾는 것과, 잃어버려졌다가 돌아온 탕자에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구원이란? 잃어버려졌다가 찾김 받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자들을 하나님이 찾아낸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려졌다는 말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생명을 만들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은 외면하시고 스스로 생명을 만들 수 없다고 여기는 자들을 찾아가셔서 생명을 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죽음의 땅 사마리아에 가신 이유입니다.

그곳에 잃어버려진 채로 살아가는 한 여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한 여인이 온 집안을 샅샅이 다 뒤져서 찾아내시는 것과 같이 온 세상 구석구석을 다 다니면서 한 알갱이라도 버려짐이 없이 다 찾아내실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찾김 당한 자들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찬양할 일이 아닙니까?

우리도 잃어버려진 자들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에 의하여 찾김을 받았어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사마리아 여인이 바로 우리들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 같듯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시고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냥 버리지 같이 이름 없이 버려진 채로 살다가 지옥에 가야할 자들을 예수님께서 찾아 주심으로 천국에 갈 수 밖에 없는 자가 된 것을 감사합니다. 부디 이 기쁨을 안고 세상을 이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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