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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요.강해) 20강. 예수는 흥하고 나는 망하고 <요 3:28-30>

by coroa 2022. 8. 31.

요 3:28-30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 할 자는 너희니라

 

 

 

 

 

 

20강. 예수는 흥하고 나는 망하고 <요 3:28-30>

요 3:28-30=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 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 나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 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정낙원 목사

 

오늘은 지난 시간 못 다한 이야기를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 육에 속한 자들을 짐승으로 비유하였습니다.

짐승이라 함은 힘의 법칙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짐승은 본능대로 삽니다.

배고프면 먹고 배부르면 잡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정글의 왕 사자라 할지라도 먹고 배부르면 옆에 맛난 사슴이 놀아도 신경 쓰지 않아요.



그러나 배가 고프면 작은 토끼 새끼 한 마리라도 전력으로 질주하여 잡아먹습니다.

짐승은 먹고 사는 것이 삶에 목적이고 전부입니다. 

세상에선 힘없음은 곧 죽음입니다.

그래서 육에 속한 자들은 힘을 축척하는 일에 일생을 경주하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자는 무슨 일을 하여도 육신을 위하여서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육에 속한 자를 짐승으로 비유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능은 육신이 편하면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옛날에는 등 따습고 배부르면 태평성대라고 했습니다.

과거 먹고 살기 어려울 때는 부모님들께서는 논에 물들어가는 소리와 자식들 목구멍에 밥 넘어가는 소리와 잠자는 소리를 들으면 행복해 했어요.

지금이야 등 따습고 배부르고 쾌락을 주어야 행복하다고 느끼지만,,,,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런 육신의 편안함을 쫓아가는 자를 땅에 속한 자라고 하고 그들의 “신(神)은 배(腹部)”라고 했습니다.

즉 먹고 마시기 위해서 신을 찾는 자는 땅에 속한 짐승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배(腹部)를 위해서 신(神)을 찾는 자를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습니다.

 

빌 3:18-19=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짐승은 배만 부르면 땡입니다.

오죽했으면 오뉴월 개 팔자라고 했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자 자신들의 왕이 되어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인간들이 바라는 왕에 대한 인식(觀)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땅에 속한 인간에겐 떡 주는 자가 왕이란 말입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불어 닥치는 금융 불안으로 경제가 난리가 났습니다.

미국의 경제 대통령이라고 하는 FRP 전 회장이었던 그린스펀은 작금의 세계경제 정세를 100년 만에 닥치는 경제 쓰나미 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나라도 풍전등화(風前燈火)입니다.

사람들이 먹고 살기 힘들어지면 제일 먼저 누구를 원망하느냐 하면 대통령을 원망해요.

옛날에 왕을 원망했어요.

 

이는 사람들의 인식 속에 왕은 떡을 주는 자라는 것이 각인 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 아무리 잘해도 먹고 살기 힘들게 하면 다 잘못한 것이고 다른 것 다 못해도 먹고 사는 것 잘 해결해 주면 최고로 칩니다.

이게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상식을 뛰어 넘는 사건이 2000년 전에 유대 광야에서 발생하였어요.

마 4장에 보면 마귀가 40일을 주리신 예수님에게 찾아와 떡을 준다고 하지요.

마귀가 예수님도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찾아 온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절을 하라고 합니다.

떡을 주겠다고,,,,

그러자 예수님이 난 떡으로 안 살고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마귀는 별 희한 한 놈 다 보겠네! 하고 떠나갔어요.

 

모든 인간들은 떡을 주는 마귀를 왕으로 모시고 사는데, 예수님은 싫다고 한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마귀의 말에 거역한 인간이 없었어요.

떡을 싫다고 한 인간이 없었어요.

인간이 아닌 인간이 나타난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도 육인 줄 알고 덥석 물었는데 육이 아니고 영이었어요.

그래서 뱉어 버린 것입니다.

육에 속한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들처럼 육인 줄 알고 왕이 되어 달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싫다고 했습니다.

난 육이 아니고 영이라고 거절한 것입니다.

난 육신에 떡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주러 왔다고 하셨어요. 

그러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떡을 주지 않는 자는 필요 없다고 죽인 것입니다.


떡이란? 재물이고, 권력이고, 힘입니다.

부자 되게 해 주지 않고, 영웅 만들어 주지 않는 예수는 싫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맥(脈)은 이 시대도 그대로 교회 안에서 나타납니다.

교인들도 떡 안주면 언제든지 절간에 갈 준비가 되어 있어요.

 

제가 처음 교회를 개척하였을 때 일입니다.

어떤 부동산 하는 여 집사님이 약 일 년간 저희 교회에 출석했어요.

이 사람은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입니다.

당시는 IMF 여파로 부동산 경기가 파리를 날릴 때인데 공교롭게도 저희 교회에 오고 나서 매매 건수를 올리지 못하였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교회 터가 안 좋고 재수가 없어서 그렇다고 하면서 큰 교회로 옮겨 갔어요.

이는 목사가 능력이 없어서 부동산 건수를 못 올려 준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목사가 영력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떡 안주면 목사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한 교회 안에도 육적 신자와 영적 신자가 있습니다.

육적 신자는 떡을 구하고 힘을 구합니다.

그러나 영적 신자는 말씀을 구하고 은혜를 구합니다.

육적 신자는 힘을 쫓아다니고 영적 신자는 말씀을 쫓아다닙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을 통하여서 육에 속한 자들이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육에 속한 자들의 특징은 보이는 힘을 키우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힘이란 다름 아닌 사람의 숫자입니다.

 

교회 성장을 외치는 자들은 육에 속한 자들입니다.

사람의 숫자가 많으면 하나님도 어찌하지 못하는 줄 압니다.

저희 교회에 다니는 집사님 중에 친척이 큰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여럿이 있습니다.

집사님과 만나면 빨리 자기들 교회로 오라고 한 대요.

 

그래서 그 집사님은 교회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 곳이라고 했답니다.

십자가 피를 증거하지 않으면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고 말을 하니까 발끈하더랍니다.

그러면서 힐난하는 말이 그럼 너희 교회는 그렇게 복음을 잘 전하는데 왜? 그렇게 부흥되지 않느냐? 라고 하더랍니다.

 

이단이니 하나님께서 부흥시키지 않는다는 겁니다.

반대로 자기들 교회는 정통이니 부흥이 된다고 한답니다.

그러니 너희 교회는 이단이니 빨리 나와서 우리 큰 교회로 오라고 한답니다.

 

그들은 만나면 세상 살아갈 문제만 생각한대요.

복음을 말하면 시큰둥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기들은 새벽기도도 안 빠지고 열심히 랍니다.

좌우지간 한국교회는 새벽기도가 사람을 버려 놓았어요.

복음을 증거하면 발끈한다는 것은 십자가를 모른다는 뜻입니다.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예수를 믿고 있어요.

 

십자가 피를 전하지 않으면 다 이단이라고 하니 그러면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지옥에 간단 말이냐 라고 하더랍니다.

지옥엔 수가 적은 너희 이단 교회나 가지 우리같이 큰 교회는 지옥에 갈리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많은 사람들을 지옥에 보낼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많은 사람이 다 지옥에 간단 말이냐” 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숫자가 많으면 봐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숫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은 코로 호흡하는 자들은 수에 칠 가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사람 숫자가 가지고 논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숫자를 보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사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코로 호흡한다는 것은 육을 말하는데 이는 곧 짐승이라는 말입니다.

짐승이기 때문에 무가치하고 수로 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원하지 짐승을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사람이 가는 곳이지 짐승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사람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입니다.

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 인간 중에선 사람이 없어요.

아담의 후손은 모두가 짐승입니다.

하나님 앞에 사람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 형상을 입은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 인자라고 합니다.

인자란? 사람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참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사람이고,

예수 밖에 있는 자는 짐승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천국에서 살고,

예수 밖에 짐승들은 지옥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지난번 중국의 쓰촨성 지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매몰되어 죽었어요.

우리 인간들은 사람이 죽었다고 애석해 하고 안타까워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짐승의 죽음과 같아요.

그 중에 성도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짐승의 죽음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방인은 인정사정 보지 말고 죽이라고 합니다.

사울 왕에게 아말렉과 전쟁을 할 때 짐승까지 다 쓸어버리라고 했어요.

인간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너무 잔인하세요.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어떻게 사람을 싹쓸이를 합니까?

이는 인간과 짐승을 하나로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방나라는 짐승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좋은 것들을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남겨 두었어요.

사울 왕은 육적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울이 육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육으로 보았기 때문에 벌벌 떤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골리앗을 영적으로 짐승으로 보았어요.

짐승이기 때문에 칼과 창으로 싸우지 않고 물맷돌로 싸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 왕을 폐하고 다윗을 왕으로 세운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라고 한다면 보이는 힘을 가치를 둘 필요가 없습니다.

교인의 숫자가 많다고 자랑할 것이 못돼요.

 

새 언약을 모르면 다 짐승입니다.

이 시대 대 다수의 교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세운 새 언약을 모르면서 교회를 다니고 있어요.

 

교회를 다니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즉 “난 교회 다닌다” 고로 “난 예수 믿는다” 라고 합니다.

“교회 다님”이 곧 “예수 믿음”이 되었어요.

 

그러나 새 언약을 모르면 교회에 다니나 절에 다니나 다 똑 같습니다.

예수의 생명이 없으면 다 짐승들입니다.

그럼에도 교회들이 짐승들을 모아 놓고 전도했다고 희희낙락해요.

제일 바보가 교인 숫자가 많다고 흐뭇해하는 목사입니다.

 

교회의 힘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 있지 사람의 수에 있지 않습니다.

음부의 권세는 예수님의 피로서만 이길 수가 있어요.

사람의 숫자로는 음부의 권세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은 세상의 힘을 모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통용되는 힘을 모으고자 하는 것은 곧 세상에 소속된 증거입니다.

사람 많이 모인다고 자랑하는 자들은 허우대만 멀쩡한 골리앗과 같은 짐승들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땅에 속하였기 때문에 힘을 모으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하늘에 속하여서 힘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자신은 망하여도 괜찮다고 한 것입니다.

 

망하여도 괜찮다고 하는 세례요한의 말은 세례요한의 제자들로서는 도무지 수용할 수가 없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많이 쏠리면 자신들의 입지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세례요한은 모든 유대인들이 선지자라고 칭송하였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제자라는 것은 엄청난 영광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이 가는 곳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연호 했어요.

 

세례요한을 따르는 제자들 입장에선 신나는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세례요한의 조직에 속하였다는 것은 가문에 영광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했어요.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나면서 힘의 추가 기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을 따르던 제자들로서는 위기의식을 느끼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시선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승에게 어떻게 좀 해보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들 더 빼앗기기 전에 예수를 이단이라고 하든지 좀 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쏠리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승은 그럴 것 없다고 합니다.

다 하나님 뜻이라고 합니다.

이제 내 때가 다 되었다고 절망적인 말을 합니다.

나는 지는 해고, 예수님을 뜨는 해라고 합니다.

 

제자들 입장에선 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 말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제자들 입장에선 예수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습니다.

왜? 우리가 예수 때문에 망하여야 합니까? 라고 농성도 해 봅니다.

 

그러나 스승의 입장은 단호합니다.

난 망하게 되어 있다고,,,,

예수님 때문에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만 남기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도 좀 끼워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아요.

 

그 누구라도 자기를 남기고자 하는 자는 다 징벌의 대상입니다.

교회에선 모두가 머리되신 예수님 밑으로 들어가야 해요.

이를 세례요한은 나는 망하고 예수는 흥하여야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처럼 예수 때문에 망하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예수 때문에 망해도 된다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잘 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곧 예수가 힘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영웅이 되어서 자기 이름을 떨치려고 합니다.

예수님에게 자신을 세상에 영웅을 만들어 달라고 해요.

그래야 예수를 믿는 뽀대가 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뽀대 내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운명 속에는 이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 없습니다.

도리어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앞에 나와서 자기 환상을 이루어 달라고 합니다.

환상을 이루는 신을 원합니다.

 

만약 세례요한과 같이 자신은 망하고 예수는 흥하는 길이라고 한다면 예수를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말은 인간의 이성과 역설적인 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흥하는 길을 택하지 망하는 길을 택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힘의 원리로 다스려지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들도 힘 모으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교회의 힘은 곧 사람의 숫자입니다.

 

한국교회에선 사람을 많이 모으면 정통이 됩니다.

그리고 교회를 성장케 하는 이론이 그 무엇이든지 진리가 됩니다.

이처럼 교회성장이 교회의 기준이 되다 보니 개척교회 목사들은 대형교회를 본을 삼습니다.

그래서 대형교회에서 하는 일을 자기교회에서도 행하는 것입니다.

 

교회 성장을 위한 세미나가 봇물처럼 행하여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목사들이 복음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과 같은 심정을 목사들이 가지고 있다면 교회 성장 세미나와 같은 곳에 쫓아다니지 않을 것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성령을 받지 않고 성경을 보니 인간적으로 이해하여서 왜곡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은 교회를 성장시키라는 말이 아니고 어느 곳에서든지 복음을 증거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증거하라고 했지 교회를 성장시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증인되라고 성령을 주셨지 교회 부흥시키라고 주시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성령께서 복음을 증거하면 교회가 당연히 부흥된다고 생각해요.

 

여러분 설교 잘하기로 한다면 예수님같이 잘하시는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낭떠러지에 데리고 가서 밀쳐 죽이려고 했어요.

예수님께서 한국의 대형 교회에 가서 설교하면 맞아 죽어요.

대번에 한국교회에선 이단으로 몰려요.

 

지금도 기도원이나 산에서 금식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은 성령 받아서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죽고자 하는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다 무당 같은 목사들이 금식 기도하다가 귀신에 씌어서 인간들 끌어 모으니 자신들도 그 성령으로 가장한 귀신에 씌어 교회를 부흥시키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전 아직까지 세례요한처럼 난 망해도 괜찮아! 라고 하는 목사를 만나 본 적이 없어요.

저도 그들 중에 한 사람이에요.

다 능력 받아 강자가 되어서 흥하고자 해요.

큰 교회를 꿰차고 싶어해요.

 

목사들이 교회 성장에 목을 매는 것은 교계에서나 세상에서나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대접을 받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강자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교회의 잘못은 예수님은 힘을 갖지 않았는데 교회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권력 집단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은 권력 집단이 되었어요.

 

교인들도 영웅이 되어서 세상에 힘을 갖기를 바랍니다.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 시켜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없어요.

모두가 주여 힘을 주소서! 라고 해요.

 

그래서 그 힘주면 뭐 할 건데! 라고 물으면 교회 부흥 시키겠대요.

교회 부흥은 핑계이고 큰 교회 당회장이 되어서 왕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 탐욕으로 기도하는 곳에 마귀가 광명의 천사로 위장해서 소원을 들어주어서 교회를 절간으로 만들게 해 버렸어요.

 

교회가 세상의 권력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추구하는 것과는 상반된 모습니다.

십자가 정신과 상반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정신은 죽는 것입니다. 

이 시대 목사가 세상에서 매력적인 직업군으로 랭크되어 있다는 것은 마귀가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목사는 구약식으로 말하면 선지자들입니다.

구약에 선지자들은 바른 말 하다가 맞아 죽는 사람들입니다.

그 어느 선지자도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 시대는 목사가 환영을 받아요.

 

여러분 같으면 누구를 환영합니까?

듣기 좋은 말하는 사람인가요?

듣기 싫은 말 하는 사람인가요?

당연히 저 부터도 듣기 좋은 말 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날 인정해 주고 내 입장을 들어주는 사람을 원해요.

그만큼 인간의 본능은 자기를 좋아해 주는 사람을 가까이 하고 싶어 해요.

 

결국 목사가 환영을 받는다는 것은 십자가 도를 증거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죄를 지적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선지가가 출현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이탈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 잘 들으면 선지자를 보내지 않아요.

그냥 제사장만 있어서 제사만 잘 지내면 되요.

 

그러나 선지자가 떴다는 것은 다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지자로 택함 받은 자는 성신이 뒤집어 씌워서 안면몰수하고 죄를 지적하다가 미움 받고 죽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환영 받을 수가 없어요.

반드시 미움이 따라 다녀요.

심지어 자기 가족들로부터 이단이라고 미움 받아요.

 

이 세상에선 하나님은 이단입니다.

이 세상을 어둠이라고 하고 하나님을 빛이라고 합니다.

서로가 다르지요.

다르다는 것은 이단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이라는 어둠 입장에서 하나님이라는 빛은 이단입니다.

당연히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선지자는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가 환영받는다는 것은 사람의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 대 다수의 목사들은 교인들 비위 맞추기에 급급해요.

교인들이 기분 상하는 말을 하지 않아요.

부정적인 말은 안하고 긍정적인 말만 해요.

희망을 주어요.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해요.

 

이런 것이 구약에 거짓 선지자들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들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항상 평강을 외쳤어요.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했어요.

그러니 무슨 회개가 일어나고 애통함이 일어나겠습니까?

서로 만나면 자기 자랑하기에 바쁘지,,,

 

목사들 가운 보세요.

자랑하고자 목사 가운에 박사 표시를 해 넣는 것을 보세요.

난 이만큼 공부했다!

난 이만큼 안다!

자기 잘난 것을 자랑하기에 급급해요.

 

누구든지 날 따라 올 테면 따라와 보라고 하는 것 같아요.

예수님을 증거하지 않아요.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 입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 이야기가 나오겠어요?

안 나옵니다.

 

목사가 박사가 되면 무슨 박사가 되어야 합니까?

예수 박사가 되어야겠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가장 잘 증거하는 박사가 되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목사가 박사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 대해서는 무지해요.

새 언약에 대해서 소경이에요.

그 비싼 돈 들여가면서 외국에 나가서 그 아까운 시간에 뭘 하다가 왔는지 모르겠어요.

기껏해야 나 유학 갔다 왔다 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유학 안가도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면 알 수 있어요.

예수님의 새 언약은 성령께서 알려 주시지 유학 가서 배우는 게 아닙니다.

물론 외국에 나가서 공부하는 것 필요하기도 해요.

하지만 설교 시간에 세상 지식이 나오면 안되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나와야 해요.

 

사도 바울을 보세요.

바울은 당대 최고의 학문을 배운 사람입니다.

가말리엘 문하생이라면 최고였어요.

그런데 거기서 배운 학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나고 나니 다 헛것임을 알게 되었어요.

인간의 학문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나오지 않아요.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모르는 학문은 모두 똥으로 여겼어요.

십자가 피를 모르는 학문은 모두가 “똥 떵 어 리” 라구요.

지금은 교회마다 누구 “똥~ 떵~ 어~ 리”가 더 큰가 시합하고 있어요.

 

그러니 교인들이 십자가에 대하여서는 까막눈인 겁니다.

교인들에게 십자가 피를 이야기 하면 벙어리가 되어요.

세상 이야기 할 때는 누가 질세라 입에 침을 튀면서 말해요.

하지만 새 언약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요.

 

이는 교회에서 목사들에게 듣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설교를 들어보면 대 부분 세상이야기 뿐입니다.

성경을 말해도 세상 이야기를 하는데 인용하는 정도입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설교가 판을 쳐요.

그래서 목사들이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에서 죽으라는 말입니다.

넌 살 가치가 없는 놈이라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너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고 해요.

십자가는 인간이 듣기엔 아주 기분 나쁜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난 망해도 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서 난 살아야 돼?

난 행복해야 돼?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다른 십자가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나를 무장해제 시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도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들을 수가 없는 비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히 세상의 힘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건너온 성도 역시 세상의 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시대 교회들은 세상에 속하여서 힘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7-18장에선 이런 교회를 음녀라고 합니다.

음녀란 몸을 파는 창기란 말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기둥서방이 되어서 짝짝쿵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복음은 교회 성장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과 복음이 증거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복음은 오히려 하나님께로 나지 않은 자들은 알아듣지 못하도록 합니다.

복음은 나를 행복하게 해 준다고 하지 않아요.

 

성도는 어떤 가치관과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가치관에 따라서 삶에 자세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가치관에 따라서 동일한 환경 속에서도 감사와 불평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먼저 성경적인 성공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세상적인 성공의 개념과 신앙적인 성공의 개념은 다르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어리석은 부자는 세상적으로는 성공한 사람 이였으나 신앙적으로는 실패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세상에서 가난해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살아가는 의미와 목적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냐?

아니면 가이사의 화상이 새겨져 있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성경은 부와 가난을 가지고 좋다 나쁘다 를 말하지 않고 부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하나님과의 어떤 관계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 비유에서 보듯이 세상 적으로는 부족한 것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져 있으면 그는 실패한 인생입니다.

 

믿음 없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 살아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실패한 인생이고

반면에 믿음을 가졌으면 세상에서 아무리 가난하게 산다하여도 성공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과 바울은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본다면 모두가 실패한 삶을 살았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이야말로 신앙적으로는 성공한 사람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도들을 세상의 찌끼와 구경거리로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고전 4:9-13=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로 두셨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와 목사와 교인들은 예수님을 이용하여서 세상에서 영웅이 되고 영광된 자리에 앉으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과 정면으로 반(反)하는 일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세상에서는 버려진 삶을 산 자들입니다.

믿음이 이들을 세상 밖으로 인도 했어요.

성경은 이들의 삶이야말로 하나님께 영광된 삶을 살았노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세상에 찌끼와 구경거리로 두셨다고 했어요.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대요.

넌 천국이 확정 되었으니 마음껏 조롱당하다가 오라고 해 놓은 겁니다.

사람들이 비웃고 조롱한다고 해서 격분하지 말고 그냥 씩 웃으라고 합니다.

환란 속에서 씩 웃을 수 있는 것이 신자의 능력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평가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평가를 두려워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 많은 교회와 성도들은 믿는 사람들이 못 사니까 전도가 안 된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덕이 안 된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가난하게 살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가난한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 되어 버렸고

믿음이 없는 것으로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전혀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상을 오히려 마귀적 사상이라고 하여 정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들이 어려울 때는 하나님과 가까이 하였는데

항상 부요해지면 타락하였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타락이란? 하나님을 떠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것을 악한 삶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데 인간이 힘을 갖게 되면

하나님을 힘으로 삼지 않게 되어 결국에는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택함을 입은 자들에게는 세상적인 힘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세례요한과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도 가치관의 차이를 볼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힘을 믿고 살아가려는 제자들의 모습과 하나님을 힘으로 믿고 살아가는 세례요한의 모습을 통해서 진정한 신앙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자기가 속해 있는 조직이 크고 힘이 있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다른 집단보다 자기들의 집단이 힘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예수에게 많은 사람들이 쏠리는 것을 막아야 된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생각은 자기 조직은 망해야 하고 예수의 조직이 흥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은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망하는 길을 가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태평스럽게 나는 망해야 하고 그는 흥해야 한다고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세례요한도 예수 안에 포함 되어 있기 때문에 나오는 고백입니다.

세례요한은 지금 자기 자신도 예수님 안으로 빨려 들어가야 하는 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세례요한이 망해야 한다는 것은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도 모두 예수님에게 가야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식으로 표현한다면 우리교회보다 더 진리를 잘 전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리로 성도를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나 보다 복음을 더 잘 전하는 목사가 곁에 있다고

그리로 가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례 요한의 이런 모습은 감히 우리가 흉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저도 복음을 전한다고 하지만 장담할 수 없는 대목입니다.

우리 교회에 온 성도를 주변에 있는 목사님에게 보낸다는 것은 한 교회를 담당하고 있는 목사로서는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목사가 탐욕이 죽고 오직 진리만 절대 가치로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세례요한이 저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 정 목사 너 복음 전한다고 웃기지 말라고 합니다.

니가 무슨 목사냐! 지나가는 소가 웃는다고 합니다.

전 이런 조소를 그대로 들을 수 밖에 없어요.

맞습니다.

전 육신의 소욕을 이겨 낼 수가 없는 죄인일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성령께서 주장하면 잠깐은 그런 마음을 가질 수가 있어요.

 

하지만 늘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복음을 전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셔서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내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유구무언일 뿐입니다.

 

세례요한의 고백은 자신은 예수님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잘되는 일이라면 자신은 망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은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지금식으로 표현한다면 나는 믿음을 위해서라면 망해도 좋다는 말인데

이 시대 가치관으로서는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망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같이 다 성공하여 흥하길 원합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한마디로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라고 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세상에서 망하는 길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증거는 인간들의 생각과는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는 아무나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므로

억지로 예수님을 믿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척 한다고 해서 믿음 있는 자로 인정해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이라는 선물을 받지 않고서는

절대로 믿을 수가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는 아무나 천국에 들어 갈 수가 없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천국은 오직 선택을 입은 자들만 들어가게 되어있습니다.

선택을 입은 자들이 누구냐 하면 세례요한과 같은 사상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부인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든지 자기라는 존재를 알리고자 합니다.

나는 망해도 좋다는 말은 곧 자기라는 존재를 부인하는 말입니다.

이런 마음은 성령께서 주장하지 않으면 가질 수가 없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본문에선 신랑을 신부에게 소개시켜 주는 친구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을 보면 양가 부모들이 서로의 혼처(婚處)를 결정해 놓습니다.

남편이나 아내는 자기가 선택하지 않고 부모가 선택을 해요.

부모가 정해준 배필과 살게 되어 있어요.

우리나라도 과거 조선시대는 그랬어요.

 

그러다가 결혼 적령기가 되어서 혼인 할 때가 되면

신랑의 아버지가 신랑의 친구를 신부에게 보냅니다.

이 때 신랑 친구는 신랑이 신부에게 주는 예물을 준비해 가서 줍니다.

신부 될 사람은 그 신랑 친구가 준 예물로 단장을 해요.

나중에 결혼 때가 되면 신부는 들러리를 세우고 신랑을 영접합니다.

 

그러면 신랑은 자기가 친구에게 주어서 보낸 예물로 단장한 여인을 찾아가서 합방을 해요.

그렇기 때문에 신랑의 친구는 신부에게 신랑에 대해서 상세하게 이야기 해 줍니다.

어떻게 생겼으며!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으며!

신랑에 대한 정보를 세세한 것까지 다 알려 줍니다.

 

신부는 신랑이 보낸 친구가 주는 정보로 신랑에 대하여 알게 됩니다.

신랑친구가 시키는 대로 단장을 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신부는 오로지 신랑을 위하여 존재하는 자로 꾸며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부는 신랑이 좋아하는 것으로 준비합니다.

 

마 25장 열 처녀 비유가 다 이런 바탕을 깔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신부가 될 자들에게 세례요한을 보내서 신랑에 대해서 알려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례요한을 6개월 먼저 보낸 것은 예수님의 신부들을 준비하라고 보낸 것입니다.

이를 성경에선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서 세상에다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 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세례요한을 따르면 안 되고, 세례요한이 증거하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신랑이 아니라 예수님이 신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조차도 예수라는 신랑에게 가서 만나야 합니다.

자기에게 속하였던 자들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예수에게로 가는 것이 세례요한의 기쁨 이였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자기를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가자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신랑이 신부를 취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례요한의 모습은 이 시대 성도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세례요한처럼 신랑의 친구가 되어서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성도는 신랑 되신 예수님을 세상에 소개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 증거로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는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를 전하는 나를 바라보지 않고 예수님을 만나게 하여야 합니다.

마치 달을 가르치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도록 해야 합니다.

 

철저하게 자기는 빠져야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서운해 해서도 안됩니다.

그건 신랑을 소개하는 친구의 모습이 아닙니다.

 

친구가 드러나면 안 되고 오직 신랑이 드러나야만 합니다.

나는 망하고 오직 예수만 흥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나는 망하여야 하고 예수님은 흥하여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도움이 될까해서 인터넷에서 퍼온 글을 그대로 옮겨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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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식을 거행할 예정이다.

 

이미 세례 받은 사람이나 그날 세례 받을 사람이나 앞으로 세례 받을 사람이나 세례식을 진행해야 될 본인이나 모두가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리되어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신앙인의 특징은 한결같이 고난 받았다.(히 11:35-38)

고난 받았다는 말은 일상적인 용어를 말해서 손해 봤다이다.

예수 때문에 손해보고 사는 삶을 말한다.

 

예수 때문에 낭패를 보았고 재산이 날아갔고 친구 친척들이 등 돌리고 떠났고 주위에 정붙이고 살 사람들 사랑하고 싶은 자마저 모두 예수 때문에 원수지간으로 돌변한 상태를 뜻한다.

 

이로서 수명이 단축되고. 건강도 좋지 않고.

남들이 가지 않으려는 질 낮은 직장으로 밀려야 하고 비좁은 주거환경으로 전락되고 교회 유지의 부담은 더욱 가중된 것을 뜻한다.

 

날이 갈수록 허전해지고 신세 처량해지는 것이 고난이다.

이게 다 예수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런 인생을 살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영광스러운 입장이냐는 것이다.

 

아무나 이런 영광스러운 신분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예수 때문에 고난을 받음은 하늘의 천사들도 부러워할 처지라는 것이다.

참 성도이기에 예수 때문에 이런 수난을 받고 또 받으니 이것이야말로 복 중의 복이라는 것이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 때문에 이런 좁은 길을 함께 가게 된 것을 너무너무 감격스럽고 황송스럽고 영광스럽게 여기는 마음으로 달라진 자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자는 세례자로서 자격이 없다.

 

즉 예수 믿고 난 뒤 얼마나 내 수입이 늘어나게 되는가,

내가 얼마나 윤택하고 건강해지고,

주변에서 나에게 정을 주고 나를 인정해주고 반겨줄 것인가 또는 예수 믿고 난 뒤,

내 가정이 얼마나 화목하고 내가 벌려놓은 사업이나 목회나 교회가 얼마나 번창하고 부흥하게 될 것인가 그 실적과 결과를 따져보겠다는 심보를 가진 자 이런 자는 이미 악령의 세례를 받은 자이다.

 

예수와 함께 고난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결탁해서 예수를 이용하고 교회를 이용해서 세상적인 영광을 탐내는 자는 심령이 전혀 달라진 적이 없는 자로서 멸망의 길인 넓은 길을 유유히 휘파람불면서 살아가는 자이다.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자신은 예수마저 자기 행복에 이용했고 교회마저 나의 즐거움에 이용해 먹었다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사는 자이다.

 

계산하고 따지고 손해되는 점과 이익 되는 점을 잊지를 않고 염두에 두고 자신의 인기와 명예를 늘 측정하고 자신의 팬들을 관리하고 자신이 우월함을 챙겨보는 것으로 삶의 즐거움과 누리는 자들, 이들은 전혀 달라진 적이 없는 자들이다.

 

이런 뻔뻔스러운 자들 앞에서 목사는 무어라고 설교할 수 있을 것인가?

다음과 같은 설교뿐이다.

여러분들은 예수 때문에 얼마나 손해보고 있습니까?

자존심이나 가정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금전적으로 얼마나 손해보고 사십니까?

이렇게 손해 봐도 견딜 수 있습니까?

 

예수를 그만 믿고 교회를 그만 출석해야 될 시점에 도달된 것 아닙니까?

더 있다가는 더 손해날 일이 생겨도 좋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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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일부러 더 손해나고 손해 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과연 당신은 누구십니까? 를 묻는 물음입니다.

세례식은 다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세례는 한마디로 나는 망하고 예수님을 흥하게 하는 길입니다.

세례란? 나라는 존재를 십자가에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나입니다.

 

고로 세례란? 나는 망하고 예수는 흥하는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세례는 단회적 사건으로 둘 것이 아니라 날마다 이루어져야 할 사건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는 쇠하여야 하고 예수님은 흥하여야 한다는 세례요한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으로 늘 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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