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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요.강해) 19강. 무엇을 힘으로 삼고 사는가 <요 3:22-30>

by coroa 2022. 8. 30.

요 3:22-23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19강. 무엇을 힘으로 삼고 사는가 <요 3:22-30>

요 3:22-23=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 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 나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 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정낙원 목사

 

일전에 교회 앞 대단지 아파트 입주가 한창일 때 이야기입니다.

주변에 있는 교회들마다 앞 다투어가면서 새로 이사 오는 사람들을 자기들 교회로 데려오기 위해서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면서 전도한다고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그런데 저와 일면식이 조금 있는 부동산 하시는 분이 교회마다 경쟁적으로 전도하는 모습을 보시곤 저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교회라면 다 같은 곳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서로 자기 교회 오라고 저렇게 야단들입니까?

이 물음 속에는 왜? 교회가 장사하는 가게와 같으냐? 라는 비아냥거림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고 했습니다.

맞는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라고 한다면 모든 교회는 다 하나이기 때문에 경쟁할 필요가 없다는 뜻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틀리다는 말은 인간들이 세운 교회이기 때문에 경쟁을 하는 겁니다.

 

인간들이 세운 교회는 예수님과 상관없는 동호회 모임과 같은 종교 집단입니다.

집단이란? 하나의 조직입니다.

조직이라면 당연히 타 조직과 서로 비교하고 우열을 논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수많은 유형의 동호회가 있습니다.

조직은 회원으로 운영이 됩니다.

그럼 자연히 많은 회원을 보유한 동호회 일수록 영향력이 커 지는 겁니다.

 

지난번 대선 때 박근혜 팬클럽 회원들 보세요.

커다란 조직이 되어서 상대방을 압박하고 자기들 주장을 관철하려고 사람의 수를 동원해서 시위하곤 하잖아요.

 

민주주의사회에선 사람의 수는 곧 힘이고 권력입니다.

이러한 것이 교회라고 해서 다르지 않아요.

그 증거가 교회마다 교인수를 가지고 판단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교회들은 하나의 동호회 모임들과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교인들을 데려 가려고 쟁탈전을 벌리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세운 교회라고 한다면 경쟁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12제자들과 같은 목사들이 설교하는 교회라고 한다면 집 가까운 교회로 나가면 되요.

단 동일한 복음을 증거한다는 명제(命題) 하에서만 그렇습니다.

복음만 증거 된다면 어느 교회나 어느 목사이든지는 중요치 않아요.

 

모두가 동일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증거한다면 굳이 “네 교회” “내 교회”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끼리 경쟁을 한다는 것은 교회마다 다르다는 말입니다.

 

경쟁한다는 것은 복음엔 관심이 없고 돈에 관심이 있단 말입니다.

흔히들 그러잖아요.

염불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다고!

 

교인들이 전도하는 내용을 들어 보면 교회가 복음에 관심이 없음을 대번에 알 수가 있어요.

자기들 교회는 이러 이러하다는 식으로 프로그램들을 쭉 이야기 합니다.

롯데 캐슬 아파트 입구에 있는 교회에 이런 플랜카드를 걸어 놓았어요.

 

“우리 교회는 사랑이 많습니다”

“우리 교회는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이런 것을 걸어 놓는다는 것은 관심사가 인간에게 있어요.

이는 곧 우리 교회는 예수님과 상관없는 교회 라는 반증입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가 아니란 뜻입니다.

 

교회 꼭대기에 십자가를 세워 놓고도 그 십자가가 무슨 의미인지도 몰라요.

그렇기 때문에 교회됨을 인간들에게 달콤한 것으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교회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에요.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뭡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이 메시야이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다” 라는 말입니다.

 

메시야란 구원자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는 그리스도시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는 고백을 가진 성도들이 모인 교회라고 한다면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죄인이 구원을 받는 이야기가 흘러 나와야겠지요.

 

예수님의 피로서만 죄 사함 받는다는 이야기가 증거 되어야겠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오고 싫어하는 사람들은 안 올 것이 아닙니까?.

그래야 예수님의 교회다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싫은 사람은 오지 말라고 해야 진짜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이 모여야 하는 곳입니다.

한 신앙고백을 하는 자들이 모여서 예수님만을 찬양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한 성령을 마신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교회가 좋다느니! 은혜롭다느니!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세운 교회가 아니라 인간들이 모인 종교집단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을 분간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아니 없다고 하면 단정적 말이 되니 드물다고 해야겠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이야기 하면 본능적으로 싫어해요.

거부해요.

부모형제 친척이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이야기 하면 불쾌해 해요.

 

이게 복음이 갖는 특성 이예요.

육에 속한 사람은 예수님 피가 본능적으로 싫어요.

혈육으로는 도무지 예수님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혈육에 속한 자들은 교회에 오지 못하도록 예수님의 피만 증거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만 증거하는 사람이 성도이고 그런 복음이 증거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이런 것이 증거 되지 않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만약 교인들이 진정한 교회의 의미를 안다고 한다면 목사들이 이런 짓을 하지 못하겠지요.

사람을 꼬시려고 하는 사탕발림 소리를 못하겠지요.

이런 짓거리를 버젓이 백주대낮에 하고 있다는 것은 교인들이 까막눈이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소경이라는 말입니다.

 

교인들이 소경이기 때문에 목사들이 시키는대로 하는 겁니다.

이 시대 교회는 꽁 잡는게 매라고 풍토가 있어요.

사람만 많이 끌어 모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해요.

그러니 복음을 젖혀두고 사람 끌어 모으는 일을 하는 겁니다.

 

교인들이 소경이기 때문에 소경인 목사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유유상종이에요.

초록은 동색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어제 오늘에 있는 일이 아니고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세례요한이 제자들과 살렘 땅 에논이라는 곳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다른 곳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을 세례요한의 제자가 본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제자 중에 어떤 자가 세례요한에게 와서 다급하게 말합니다.

선생님 저기 예수라는 사람이 제자들과 함께 에논이라는 곳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다 그리로 가고 있어요.

한마디로 자기 조직에 있던 사람들이 다 빠져 나간다고 불만 섞인 소리로 말하는 겁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예수님 보다 앞선 분이라는 우열의식이 잠재되어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 스승이 예수보다 더 큰 분이신데 사람들이 몰라보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 몹시 서운하였던 것입니다.

 

자기편보다 예수님의 편에 사람이 더 많은 것을 보고 시기도 나고 불안하기도 한 마음으로 스승인 세례요한에게 말하는 겁니다.

이는 곧 앞으로는 사람들이 예수에게 가지 못하도록 어떤 대책을 좀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 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식으로 자기 교회 교인들이 다른 교회로 가지 못하게 단속 좀 하라는 말과 같아요.

아마도 지금 목사들 같으면 자기교회 교인이 옆 교회로 가면 대번에 이단이라고 가면 안 된다고 할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 풍토 속에선 남에 밥그릇을 빼앗으면 가만 안둡니다.

자기 밥그릇만 손 안 되면 가만있어요.

목사에게 밥그릇이란? 교인들이예요.

교인이 좋아서가 아니라 돈을 내기 때문에 챙기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그게 목사가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알아요.

돈 안 내 보세요.

관심이 없어요.

남 이목이 있으니 겉으론 냉정하게 대하지 못하지만 사무적으로 대해요.

하지만 마음은 돈에 가 있지 그 사람에게 가 있지 않아요.

아무리 인격이 고매해도 육신은 물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암튼 지금 세례요한의 제자는 예수님과 세례요한을 경쟁구도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사람을 많이 모으느냐에 따라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의 세력에 지각변동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 눈에는 주도권이 세례요한에게서 예수님에게로 넘어 간다고 본 것입니다.

자기 조직에 위기가 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아니 자기 가게에 오는 손님이 남에 가게로 가는데 그걸 눈뜨고 어찌 바라만 보고 있겠습니까?

앞 가게에서 “대 바겐세일”을 하면 우리 가게 손님을 안 빼앗기려면 나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초특가 대 바겐세일”로 맞불을 놓아야 해요.

 

그래야 자기 손님들을 안 빼앗겨요.

안하면 다 빼앗겨요.

옆 교회에서 “예수초청 큰잔치”하면서 연예인을 불러 오면 우리 교회에서도 해야 해요.

옆에 교회가 새 예배당 증축하고 주차장 늘리면 우리교회도 해야 해요.

 

이 시대는 교회도 좋은 시설과 좋은 환경을 갖추지 않으면 교인들은 크고 사람 많이 모이는 곳으로 옮기게 되어 있어요.

결국 노름판처럼 밑천이 많은 놈만 남게 되고 싹쓸이 하는 겁니다.

 

옆에 대형교회 보세요.

수백억 들여서 맘모스처럼 건물 지어 놓으니 교인들이 그 쪽으로 다 쏠리잖아요.

주변에 개척교회 목사들은 잠이 안와요.

교인이 예배 한번만 빠져도 가슴이 철렁해요.

잠을 자면서도 자는게 아니고 기도하면서도 기도하는게 아닙니다.

 

교인을 안 빼앗기려면 개 발에 땀나듯이 열심히 심방가고 기도해주고 관심 가져 주어야 해요.

안 그러면 언제 떠날지 몰라요.

이건 복음 전하기 위해 목사하는게 아니라 교인 수발들기 위해 목사하고 있는 겁니다.

밤이고 낮이고 콜 하면 달려가서 가려운데 긁어주어야 해요.

이럴 땐 목사 된 것이 후회가 막급해요.

 

그래서 지금 세례요한의 제자가 세례요한에게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주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자기 제자의 심정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세례요한은 제자의 불평에 아랑곳 하지 않아요.

마치 알고 있는 듯이 말합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 뜻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예수님에게 보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작정하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니 막지 말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의 이 말은 예수를 믿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믿도록 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어요.

그러니 너희가 막아서 될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한술 더 떠서 “자신은 쇠하여야 하고 예수는 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사실들을 너희가 증거해야 할 자들인데 왜? 시기하고 질투하느냐! 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즉 너희들은 사람들을 예수님에게 보내는 역할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직을 키우려고 하지 말고 진짜 메시야인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소개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게 율법으로 온 세례요한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례요한과 그의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늘에 속한 자와 땅에 속한 자를 볼 수가 있어요.

영에 속한 자와 육에 속한 자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게 됩니다.

 

세례요한은 하늘에 속한 자의 모습이고, 제자들은 땅에 속한 자의 모습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알고 있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세례요한 보다 앞선 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 보다 세례요한의 세력을 키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보지 못하고 경쟁자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사람의 많고 적음을 곧 힘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에게서 사람들이 떠나가는 것을 몹시 불안해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세례요한에 제자들의 사상은 전형적으로 선악의 법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육에 속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에 이런 모습이 바로 짐승의 본성들입니다.

성경은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살았던 에덴동산을 “생명의 나라”라고 말하고!

인간이 범죄하고 난 후에 쫓겨난 세상 곧 땅을 일컬어 “죽음의 나라”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일컬어 죽음의 도시라는 뜻에서 장망성이라고 합니다.

생명의 나라에서 죽음의 나라인 땅으로 쫓겨난 아담의 후손들은 늘 죽음이라는 공포에 시달리며 살고 있습니다.

죽음의 나라에선 스스로가 자기 목숨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힘을 갖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다니엘에게 세상나라의 본질을 짐승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 저주 받은 죄인들을 일컬어 짐승이라고 하며 저주 받은 백성들이 살아가는 세상나라를 “짐승의 나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짐승으로 표현하는 것은 이 세상이 짐승의 법칙으로 다스려 진다는 말입니다.

짐승들 세계의 법칙은 약육강식의 법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고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인류역사는 힘을 가진 강한 자가 살아남은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법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힘을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힘이 있다는 것은 곧 사는 것이고, 힘이 없다는 것은 곧 죽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굳이 힘을 가지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힘이 없어도 죽을 염려가 없다고 생각하면 힘을 키우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지금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많은 사람들이 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자기들에게 힘이 빠져나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짐승의 본능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에게 쏠리는 힘을 막아보자고 스승인 세례요한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을 자기편에 많이 붙잡아 두고자 함입니다.

 

사람은 일평생 자기 안에 힘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힘이 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쌓고 또 쌓습니다.

지식이든 권력이든 명예이든 가리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이는 가족입니다.

자식이고 남편입니다.

아내들은 남편이나 자식을 힘으로 쌓고 있어요.

물론 돈도 힘으로 쌓여져 있어요.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어느 순간 날아가 버리면 허전해집니다.

삶에 의미가 사라져 버려요.

갑자기 세상사는게 싫어지고 짜증이 납니다.

우울해지고 불쌍해집니다.

이걸 이기지 못하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살 하는 것은 자기 안에 허전함을 달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기분이 좋아서 자살하는 사람은 없어요.

야! 기분이 좋네!

죽어야 하겠다! 라고 하는 사람은 없어요.

 

아무도 자기 짐을 대신 져 줄 수 없고 자기 혼자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무인도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살하는 겁니다.

 

주부들이 40대를 지나면서 정신적으로 공황상태를 겪는 이유들입니다.

보통 이때가 되면 자식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자기 인생을 산다고 바쁜 때입니다.

금이야 옥이야 키워 왔는데 어느 순간 자식들이 떠나는 것을 느껴요.

허전해 집니다.

특히 한국의 엄마들은 남편 보다 자식을 더 마음에 쌓아두고 있어요.

그런데 자식을 키워 놓았더니 서서히 거리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자식들은 자식들 나름대로 바빠요.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에게 예전처럼 살갑지 않게 대해요.

요즘 같이 직장생활하기 힘든 때가 없어요.

 

이 시대를 살아간다는 자체가 전쟁입니다.

그런데 언제 부모님 챙길 틈이 있습니까?

잘못하면 직장에서 짤리는데,,,

또 연애도 해야 하고 결혼도 해야 하고 바쁩니다.

 

그러나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자식 키워 놓아봐야 다 소용 없다고 해요.

엄마는 자식은 항상 자기 품안에 있는 줄 알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식이 자기 말을 안 들어요.

인생 헛살았다고 느껴져요.

그러면 허전함이 엄습해요.

 

곁에 있는 남편을 쳐다보면 이젠 머리카락도 듬성듬성하고 그 머리카락마저도 파뿌리가 다 돼서 초라하고 볼 것 없어요.

그런데 남편이라는 작자가 자기 심정은 전혀 헤아려주지 않고 나이가 들어가는 것만큼 잔소리만 늘어가니 이젠 귀찮아요.

 

그러다 문득 거울 앞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면 돌아가신 할머니가 그 속에 있어요.

피부는 늘어지고 주름은 쪼글쪼글하고 머리는 염색을 해야 하고,,,

TV에 나오는 아가씨들과 비교하면 갑자기 서글퍼집니다.

 

그래서 노래교실이다!

무슨 모임이다!

쫓아다니면서 자기 인생을 산다고 해요.

지금까진 콩나물 값 깎아가면서 악다구니 쓰면서 아등바등 살아왔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돈에 씀씀이가 헤퍼져요.

 

옛날 자식을 키울 땐 화장품도 샘플을 얻어서 바르곤 했는데 이젠 달라요.

돈이 중요하지 않고 자기 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몸에 좋다고 하면 돈 아까운줄 모르고 펑펑 써요.

비싼 화장품에 비싼 옷에 보석을 치렁치렁 감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지나간 청춘은 돌아오지 않아요.

 

지금까지 남편이나 자식들 뒷바라지 한다고 죽을 둥 살 둥 살아왔는데 이게 뭔가?

내 인생은 무엇이었던가?

‘엄마가 뿔났다’ 라는 드라마에 보면 급기야 엄마라는 것을 포기하고 가출을 하잖아요.

 

김수현 작가가 이 시대 엄마들의 애환을 드라마로 항의하고 있는 겁니다.

자식이고 남편이고 시아버지고 다 귀찮아요.

내 코가 석자인데 남 돌볼 겨를이 없어요.

윤리고 도덕이고 내가 더 급해요.

슬픔과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서 술도 마시고 합니다.

그러나 뻥 뚫린 마음속에 공허함은 채우지 못해요.

 

그래서 사람은 나이가 늙으면 어린아이처럼 남에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본능대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남의 이목을 끌어당기기 위해서 돌출행동이라는 자해를 합니다.

 

할머니들 보세요.

도로를 무단횡단하면서도 자동차가 빵빵 거려도 눈을 흘기면서 알아서 잡놈들아! 궁시렁 거리면서 유유자작하면서 다녀요.

죽이려면 죽여라! 이 놈들아!

 

이게 인생입니다.

이게 땅에 속한 인간들의 모습들입니다.

저도 그렇게 흘러가고 여러분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생을 풀이고 꽃이라고 했어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금새 시들어요.

 

그러나 인간들은 몰라요.

모르기 때문에 일평생 움켜잡으려고 사는 겁니다.

움켜잡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늙고 병들어 죽게 되어서 그때서야 알게 되요.

인생이란 신기루이고 다 허망한 것이라고,,,,

 

하지만 젊어서는 몰라요.

젊어서는 자신에겐 늙음이 안온다고 생각해요.

젊음이 영원할 것 같아요.

자기 힘을 모으기에 올인합니다.

하지만 세월을 화살처럼 금새 날아갑니다.

 

지금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그래요.

어찌하든지 자기 조직이 강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같은 사상으로 교회에 다니는 자들이 많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같은 사고로 교회에 다니는 자들은 힘을 키우려고 애를 씁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교인들을 표상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전도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키우기 위해 동분서주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의 힘이란? 곧 사람의 숫자이고 교회가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본문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을 통해서 육에 속한 교인들을 고발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힘으로 삼지 않고 사람의 숫자를 힘으로 삼고 돈을 힘으로 삼기 때문에 사람이 많이 모이고 돈이 많은 교회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몸담고 있는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큰 교회에 다니면 우쭐해 하고 적은 교회에 다니면 기가 죽어 버립니다.

적은 교회는 빨리 크고자 하고 큰 교회는 더 커지려고 해요.

모두가 힘을 근거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교회 큰 것을 자랑합니다.

 

이러한 사고를 가진 목사와 교인들은 큰 교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여 교회키우는데 급급합니다.

이 시대 교회가 알고 있는 예수 믿는 것이란? 교회 부흥시키는 일입니다.

 

교회만 부흥되면 예수를 믿는 것으로 생각해요.

교인들도 그렇게 생각해요.

새 언약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난 그런 건 몰라도 전도 열심히 한다고 해요.

목사들이 전도하는 것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라고 가르쳐 놓아서 그래요.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을 기뻐하세요.

전도하면 하나님이 영광 받는다고 하는 것은 목사들이 큰 교회를 만들어 왕 노릇하고 싶어하는 자기 속에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사기 치는 것입니다.

 

전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신앙의 본질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하지 못해서는 안타까워해도 예수 믿지 않는 것엔 안타까워하지 않아요.

새 언약을 모르면 예수 헛 믿는 겁니다.

새 언약을 모르면 신앙생활이라는게 고작하여서 평생 힘 모으는데 진력하게 됩니다.

새 언약을 모르는 목사들은 큰 교회 만드는게 목회 목적입니다.

 

전도란?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 숫자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전도를 숫자 채우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복음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는 사람을 설득하고자하는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뜻만 전하면 되요.

사람들이 알아주건 안 알아주건 그건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알아먹는 사람도 있고 알아먹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나님 이야기를 하면 그 말씀이 스스로 알아서 하늘에 사람들을 찾아내요.

 

이처럼 전도는 오로지 하늘 백성을 찾아내는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교회 키우고 힘을 모으는 일하곤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전하면 하늘백성은 믿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세례요한은 하늘로서 주지 않으면 아무라도 받을 수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정확히 알고 있어요.

예수님이 흥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있었어요.

예수님이 흥한다는 것은 교회가 부흥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가 흥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시대가 도래 되었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젠 옛 언약의 시대가 아니라 새 언약의 시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이니 막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4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겠다고 따라오자 그들에게 너희가 나를 따르는 것은 너희들이 따르고 싶다고 해서 따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돌아가라고 하였습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게 해 주지 않는 자는 모두가 믿다가 중간에 포기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부께서 심지 않은 것은 모두 뽑힌다고 말씀하셨어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은 자들은 길가 밭이나, 가시 밭이나, 돌작 밭에 떨어진 씨들처럼 잠깐 동안 싹이 나다가 죽습니다.

 

잠간 믿는척하다가 재리의 유혹을 받거나 시험이 오면 예수를 떠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농부가 그들을 지켜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오직 좋은 밭에 뿌려진 씨앗만 관리를 하지 길가나 돌이나 가시떨기에 떨어진 것은 관리하지를 않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농부는 자기 것만 농사를 짓는다는 비유입니다.

그런데도 무식한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마음에 가시를 뽑고 돌을 뽑고 옥토를 만들라고 해요.

옥토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따로 있어요.

하나님께로 난 자가 바로 옥토예요.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농부가 되셔서 예수라는 씨를 키우기 때문에 반드시 결실을 맺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씨 뿌리는 비유는 하나님께서 관리해 주지 않는 자들은 믿는척하다가 중간에 다 떨어져 나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시대 마귀적 사상으로 목회하는 목사들은 아무라도 교회에 불러들이면 되는 줄 알고 예수 초청 큰 잔치다 뭐다하면서 연예인들을 불러서 간증을 한답시고 또한 갖가지 경품으로 사람들을 꼬시려고 호객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어지간해서 춤 추지 않으니 이젠 동남아 관광 상품권까지 걸어 놓고 전도에 열심을 내라고 경쟁을 시킵니다.

자동차, 지펠 냉장고, 드럼세탁기, TV 등등 갖가지 미끼를 경품으로 걸어 놓고 꼬셔요.

 

마치 창기들이 화려한 조명 아래서 지나가는 술객들을 호객행위하는 것과 같습니다.

잠언 7장에서 말하는 음녀가 이 시대 교회들이고 영적 창기들입니다.

 

주변에 교회들을 한번 둘러보세요.

너 나 할 것 없이 교회들이 마치 할인마트 경쟁하듯 하고 있어요.

교회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들의 모임을 말하는데 단 한사람이라도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자가 있으면 그가 곧 교회입니다.

 

교회는 크고 작은 개념이 없습니다.

크다 작다 라는 것은 짐승의 세계에서나 있는 말입니다.

짐승은 무게를 따져서 팔아요.

소고기 돼지고기는 무게로 따져요.

무게 많이 나가는 큰 놈은 비싸고 작은 놈은 싸요.

그러나 사람은 근으로 팔지 않아요.

무게로 값을 매기지 않아요.

 

사람은 그 사람이 무엇을 담고 있는냐! 어떤 사람이냐! 로 평가해요.

대 기업의 회장인지, 중소기업의 사장인지, 대학교수인지, 의사인지, 노동자인지, 실업자인지로 판단을 해요.

교통사고 나 보세요.

보상이 엄청나게 다릅니다.

 

이처럼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로 평가가 달라져요.

아무리 최홍만이 같이 덩치가 큰 사람도 실업자이면 교통사고로 죽으면 몇푼 안 나와요.

하지만 키가 160이 안되어도 유명한 사람이면 값이 비싸요.

 

여기서 짐승은 세상 사람이고, 사람은 성도(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교회이잖아요.

그러니 교회가 크다 작다 라고 하면 안 됩니다.

단 한 성도라도 있으면 예수님의 지체이기 때문에 엄청 귀해요.

이처럼 천국에는 크다 작다 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크다 작다 로 판단하는 그 사람은 성도가 아니고 짐승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속한 자들은 자기 힘을 키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한 하늘에 속한 성도들은 생명을 자기가 지키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갑니다.

생명을 내가 지키면 힘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이 지킨다는 것을 안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아! 난 이미 예수님의 생명 안에 있는 자이지! 라고 믿어지면 두렵지가 않아요.

내 생명은 예수님 안에서 이미 영생을 받았다고 믿어지면 든든해요.

세상에서 망해도, 병들어 죽게 되어도, 두렵지가 않아요.

그래서 세상을 이기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반드시 세상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께로 난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난자를 씨 뿌리는 비유에서 좋은 밭이라고 합니다.

또한 천부께서 심은 자 라고 합니다.

 

이렇게 천부께서 심기운 자 라는 것을 믿어지게 하시려고 성령이 성도 안에 오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성도는 이 사실이 믿어져요.

이렇게 믿어지는 것을 온전한 사랑이라고 합니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부부간에 살면서 서로 믿지 못하면 불안해서 못살아요.

저 사람은 날 사랑한다고 믿어야 안심이 되요.

믿지 못하고 의처증이나 의부증 같이 되면 같이 있어도 불안해요.

끊임없이 의심하고 확인하고 자기 손바닥에 가두려고 해요.

곁에 있어도 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염려가 사라지지 않아요.

결국 폭력을 행사하게 되고 온전한 가정생활이 안되고 파경으로 치닫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자기 안에 믿음이 우려져 나와야지 안심이 되요.

믿음이 없으면 믿는다고 해도 늘 불안해요.

믿는 것인지 안 믿는 것인지 본인도 헷갈려요.

믿음이 없으면 자꾸만 믿음을 만들고자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늘에서 뚝 떨어져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느 날 믿어지는 겁니다.

아하! 그렇구나! 라고 믿어져요.

 

이는 성령께서 믿게 해 주세요.

성령께서 믿게 해 주시면 성경이 그냥 술술 믿어져요.

예수도 믿어지고, 십자가도 믿어지고, 대속도 믿어지고, 천국도 믿어지고, 부활도 믿어지고, 영생도 믿어져요.

 

믿어지기 때문에 믿는 것이지, 믿어야지 각오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어디 가서 믿음을 만들려고 하지 마세요.

죽었다 깨어나도 믿음은 만들어지지 않아요.

이 세상에 그 어떤 인간도 믿음을 줄 수가 없어요.

 

믿음은 목사가 주지 못해요.

부모도 주지 못해요.

친구도 주지 못해요.

내가 만들지도 못해요.

오로지 하나님께서 믿게해 주셔야만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요한 일서 4장 18절에서는 온전한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은 그 사랑으로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아요.

세상이 요동쳐도 그까잇거! 뭐! 대충,,,,해요

누가 당신을 이단이라고 하는데요! 라고 해도

아! 그래요.

그럼 이단이겠지요! 라고 하며 살아요.

애써 이단 아니라고 증명할 필요도 없어요.

내가 아무리 이단이 아니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이단이라고 하면 이단이 되는 것이고, 사람들이 아무리 이단이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이단이 아니라고 하면 이단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중요하지 인간의 판단을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그러니 사람들 눈치 볼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부모가 뭐라든, 형제가 뭐라든, 친구가 뭐라든, 이웃이 뭐라든 내 안에 믿음만 있다면 개의치 마세요.

그들이 심판주가 아니고 또한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내가 어디에 있는냐 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누구를 믿고 있느냐가 중요 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받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큰 교회에 다니고 돈이 많다고 하여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으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있다고 불안이 사라지고 집에 있다고 불안이 엄습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안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몰려와요.

그러니 큰 교회에 다닌다거나, 작은 교회에 다닌다거나, 내가 목사이고, 집사라는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불안은 외부에서 쫓아내지를 못합니다.

안에서 밀려와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밀려와서 자리를 마음 속에 떡허니 차지하고 있어요.

이 두려움은 쫓아내도 가지 않아요.

쫓아 낼 수도 없어요.

 

세상 종교는 쫓아내라고 해요.

사기 치는 것입니다.

불교에선 모든 두려움은 마음에서 오니까 마음을 정화하라고 해요.

마음을 비우면 된데요.

그게 바로 “무아사상”이에요.

즉 “나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러나 “나 없다” 라고 해서 난 없어지지가 않아요.

여전히 난 있어요.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난 없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일평생 백팔번뇌를 쫓아낸다고 염주 돌리고 염불하고 있는 겁니다.

스스로 최면에 빠지는 겁니다.

 

지금 조계종 스님들을 보세요.

권력을 행사하잖아요.

고급차 타고 다니면서 즐길 것 다 즐기면서 살아요.

그러면서 부처가 되었데요.

해탈했데요.

그런 사람들이 돈은 더 밝혀요.

다 사기 치는 것입니다.

 

목사는 더해요.

목사들이나 중들이나 돈 밝히기는 매 일반입니다.

복음을 모르면 그 놈이 그 놈들입니다.

예수를 모르는 자는 목사나 중이나 이름만 다르지 다 지옥 갈 놈들이에요.

하나는 절이 있고 하나는 교회에 있다는 것 뿐이예요.

하나는 산 속에 있고 하나는 번잡한 도시 속에 있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니 동일한 짓거리를 하면서 살아가요.

가치관이 땅을 벗어나지 못해요.

육신을 벗어나지 못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르는 목사들은 중들과 똑 같아요.

 

혼자 믿음 있는 것처럼 해도 교인들 빠져 나가 보세요.

환장합니다.

인품이고 거룩이고 없어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난리를 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는 자기교회 교인이 옆 교회로 가니 예배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자기교회 교인이 간다는 그 교회 정문에 서서 기다리다가 데리고 가는 인간도 있어요.

교인이 자기 소유물이에요.

 

제가 전에 교육전도사로 있던 교회 목사는 교회 재정으로 무슨 옥돌사업을 한답시고 또 복지 시설을 한답시고 정부 보조금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이 되어 교도소에서 6개월이나 살았어요.

자기 마누라는 복지시설 이사장으로 앉히고 다 해 먹었어요.

그러다 교회에서 수억원을 퇴직금으로 받고 교회에서 쫓겨났어요.

 

그런데 그 인간이 옆 동네에다가 교회를 개척했어요.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으면 창피해서라도 그런 짓을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짐승들은 창피함을 몰라요.

본능이 움직이는대로 해요.

 

육신의 본능이란? 먹고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먹고 사는 일이고 돈이 되는 일이라면 안면몰수입니다.

인면수심이 되요.

 

그리곤 야금야금 전에 있던 교회 교인들을 꼬드겨서 빼내가요.

지금 수백명이 모인데요.

우리 동네를 운행하는 버스 기사가 우리 집사람에게 자조 섞인 말을 하길래 물었더니 그 교회라고 합니다.

마누라가 아침밥만 쳐 먹으면 교회로 가서 저녁에 온대요.

 

교회가 가정 파괴집단이라는 겁니다.

무슨 놈의 교회가 매일 사람을 불러낸대요.

그 목사 놈을 죽이고 싶데요.

미치겠대요.

오라고 하는 목사나 목사가 오라고 한다고 해서 가는 그 인간도 다 똑같이 육에 속한 짐승들이고 예수 안 믿기는 매 일반입니다.

절간에 쫓아다니는 보살이나 교회에 쫓아다니는 집사나 다 짐승입니다.

 

이런 일은 모두가 예수를 안 믿고 다 보이는 것을 힘으로 삼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그러나 믿음만 있으면 어디에서도 두려움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생명을 맡기는 것입니다.

 

세례요한 보세요.

나는 망하여야 하고 예수님은 흥하여야 한다고 하잖아요.

물론 나중에 가서 세례요한도 실족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실족에 의미는 그 때 가서 살펴봅시다.

 

아무튼 성도는 세상에 힘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믿을 수없는 환경이 닥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참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 달아보기 위해서 믿을 수 없는 환경으로 몰아 부치는 것입니다.

 

광야로 몰고 나가 봐야 믿는지 안 믿는지 나타나요.

좋은 환경 주면 다 믿는다고 하지 안 믿는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러나 광야 같은 곳으로 몰고 나가면 가짜 믿음은 다 떨어져 나가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목숨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믿을 수 없는 일들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다는 것 조치도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지켜 주신 것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 사실이 깨달아지고 믿어질 때 비로서 바울과 같이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라는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내 주변에 사람을 떠나게 하는 것은 내 믿음을 시험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세요.

 

절대로 성도의 구원은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가 않습니다.

 

롬 8:35-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만약에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서 끊어지는 믿음이라면 애당초 가짜 믿음입니다.

그러나 진짜로 하나님께 난 믿음이라면 바울의 고백처럼 환란이나 곤고나 가난이나 굶주림이나 주변의 시선이나 병이나 실패나 죽음까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갈라내지를 못합니다.

 

이 고래심줄 보다도 더 질기디 질긴 믿음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았어요.

이 믿음은 그 누구도 빼앗지 못해요.

없어지지도 않아요.

 

그 증거가 지금 우리가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런 설교를 듣고 아멘이라고 하면서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이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있다면 부디 세상의 안목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담대하게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받은 믿음은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질 수 없는 믿음임을 이 시간 알았습니다. 이 앎이 세상 살아가는 날 동안 순간 순간 생각나게 하셔서 그 어떤 것에서도 믿음으로 이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하늘빛사랑 blog https://blog.daum.net/day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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