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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요 강해) 21강. 만물 위에 계신 분 <요 3:31-34>

by coroa 2022. 9. 1.

 

요 3:31-36=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21강. 만물 위에 계신 분 <요 3:31-34>

요 3:31-36=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32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 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33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 쳤느니라 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정낙원 목사

 

지난 시간 세례요한과 그 제자들을 통하여서 영(靈)에 속한 자와 육(肉)에 속한 자의 특성을 살펴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쏠리는 것을 보고 불안하였습니다.

이는 자기들 조직이 약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세레요한과 예수님을 경쟁자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에게 사람들이 예수에게 쏠리는 것을 방지 할 대책을 강구하라고 조른 겁니다.

이게 육의 속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사람의 수(數)를 힘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자신은 쇠하여야 하고 예수님은 흥하여야 한다는 합니다.

한마디로 자신은 사라지고 예수님만 남으면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앞세운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입장에선 세례요한의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겁니다.

 

자기 부인은 자신의 무가치함을 알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큰 잘못을 저지르면 나 같은 인간은 인간도 아니야!

난 살 자격이 없어! 라고 하지요.

자기 부족을 알 때 자기 부인이 가능해 집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자기변명을 늘어놓고 합당함을 내 세워서 피해나갈 구멍을 찾고자 합니다.

 

정치인들을 보세요.

지금 민주당의 김민석이라는 친구가 4억을 뇌물을 받아먹고는 자기는 억울하다고 하잖아요.

수억 원씩 받아 쳐 먹고도 댓가성 없는 돈이라고 해요.

자기보다 더 많이 받아먹은 놈이 수두룩한데 왜? 나만 가지고 그러느냐고 따지는 겁니다.

 

아니 어느 인간이 댓가 없이 정치인에게 돈다발을 갖다 바칩니까?

정치인에게 돈을 갖다 바치는 사람은 전부가 다 장사꾼입니다.

장사꾼은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아요.

이익 볼 일이 없으면 정치인에게 돈 갖다 바칠 이유가 없어요.

 

정치인들을 보면 인간 군상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요.

우리는 그들을 손가락질 하고 욕을 하면서도 그 짓을 하고 있어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든 인간은 거기서 거기에요.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해요.

왜냐하면! 다 육이라는 한 통속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어느 인간도 자기는 망해도 괜찮다고 하는 사람이 없어요.

 

자기는 죽어야 할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길은 오직 성령이 임해야만 합니다.

세례요한은 모테로부터 성령의 충만을 입었어요.

엄마 뱃속에서부터 예수님을 알아보았어요.

자신은 예수님 길을 예비하는 자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니 자기를 부인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처럼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것은 영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영에 속하였기 때문에 자신은 쇠하여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자기가 쇠하여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영에 속한 자만이 알아요.

영에 속한 자는 자신은 망해도 좋다고 하고, 육에 속한 자들은 망할 수 없다고 합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망하는게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고,

육에 속한 제자들은 자기 조직이 흥하는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영에 속한 자는 자신이 망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고,

육에 속한 자는 자신이 흥하여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신에게 힘을 달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영웅이 되게 해 달라고 합니다.

만물을 지으신 분 앞에 와서 자기 주제도 모르고 세상에서 영웅이 되어서 하나님을 영광 돌리겠다고 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자신이 한 일로 영광을 누리는 것이지 피조물들이 한 일로 영광 받지 않아요.

하나님이 영광 받도록 창조를 했는데 무슨 피조물이 한 일로 영광 받을게 있겠어요.

 

여러분이 만약 로봇을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 로봇에게 이미 자기가 입력해 놓은 것들이 있어요.

로봇은 주인이 입력해 놓은 것대로 움직여요.

그러면 주인은 로봇이 자기가 입력한 대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아! 참 잘 만들었다고 영광스러워 하는 겁니다.

로봇의 행동 때문이 아니라 로봇을 만든 자기의 능력 때문입니다.

 

그러니 피조물이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 저에게 힘을 주시면 내가 세상에 영웅호걸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라고 하면 뭐 이런 놈이 있어! 라고 해서 걷어 차버려요.

이 놈이 고장이 나도 단단히 낫구나! 라고 생각해서 두들겨 팹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자기가 고장 난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 부흥 시켜서 영광 돌리고!

착한 일해서 영광 돌리고!

성화 되어서 영광 돌린다고 해요.

반면에 영에 속한 자들은 자기는 고장 난 제품이라서 자기 안에 선이 없을 깨닫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긍휼이 여겨 달라고 나아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세리를 들어서 비유하였습니다.

스스로 부족함이 없다고 여기는 바리새인은 육에 속한 자이고,

모든게 죄 투성이고 자기에겐 선이 없다는 것을 아는 세리와 창기는 영에 속한 자의 모습입니다.

세리와 창기가 영에 속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영에 속한 자는 세리와 창기와 같이 자신은 죄인이라는 고백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신앙을 세상에서 강자로 살아남기 위한 도구로 이용을 합니다.

이들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로 내 세웁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육에 속한 목사나 교인들은 항상 자기 교회가 부흥되고 자기가 하는 일이 만사가 형통 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고 자랑을 합니다.

이걸 간증하고 다녀요.

 

구약에 사무엘상 1장에 보면 브닌나와 한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브닌나는 자식이 많고 한나는 무자(無子)하였습니다.

옛날엔 여자가 자식을 못 낳으면 저주 받은 악한 자로 취급당하여서 집안에서 쫓겨났습니다.

가문(家門)에 문을 닫을 재수 없는 여자로 취급당했어요.

 

여자에게 있어 자식은 곧 힘이고 능력입니다.

그래서 브닌나는 자식 많음을 가지고 자식이 없는 한나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브닌나는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한다고 믿었습니다.

자식을 많이 낳았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만큼 복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한나가 자식이 없는 것은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여겼어요.

브닌나는 하나님이 자기편이라고 생각하여서 한나를 핍박한 것입니다.

 

이건 이 시대로 비유하면 큰 교회가 작은 교회를 깔보는 것과 같아요.

부자가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는 것과 같아요.

세상의 힘에 가치로 약한 자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나가 자식을 생산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태(胎)를 닫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안 주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생각과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간섭을 했기 때문에 자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나가 무자(無子)하여 내 세울 힘이 없고 망한 것이 하나님이 간섭한 증거입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컬합니까?

 

제 이야기로 하면 야! 우리 울산 목양교회가 부흥 안되는 것이 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면 타 교회 교인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저 양반 목회 하더니 이젠 돌아버렸구나! 라고 할 것입니다.

일전에 제가 말했지요.

복음을 몰랐을 땐 벌떼 같이 구름떼 같이 사람들이 몰려오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고,,,

그 기도를 안 들어 주어서 망정이지 들어 주셨다면 전 지금쯤 그리스도 밖에서 마귀와 친구하면서 바둑 두고 있을 겁니다.

 

교회는 부흥 되었을 진 몰라도 내 마음은 어둠으로 가득차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십중팔구 사람들 눈치나 보면서 목회를 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전 내 기도를 안 들어 준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 증거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은 내 뜻대로 안 되도록 교회를 간섭해 가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복음을 안다고 해도 육신의 본능은 복음을 핑계 삼아 육신의 힘을 추구하는 쪽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육적으로는 고달플 일만 남은 것입니다.

교인이 없으니 제일 어려운 것이 뭔 줄 아세요.

먹고 사는 일입니다.

 

그래서 속으론 늘 그래요.

하나님 많은 욕심은 안 부릴게요.

그져 교회 집세 내고 아르바이트 안하고 먹고 살만하게 끔만 해달라고 해요.

이게 죄인 줄 알면서도 그래요.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육신의 한계이고 현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뜻대로 일하시지 않고 원치 않는 길로 인도하세요.

그러면 전 또 반발을 하겠지요.

참으로 너무 하십니다 라고,,,,,,

일평생 이 안에서 터져 나오는 죄를 보면서 아이구 이 인간아! 라고 탄식하겠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육은 이해를 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식 없고 핍박당하는 것이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 누가 하나님이 함께 하기를 바라겠습니까?

차라리 하나님이 간섭하지 말기를 바라지요.

 

구약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게 하고선 내가 지금 너희에게 하는 일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고 합니다.

아니 지금 포로생활을 하면서 죽겠는데 이를 어찌 재앙이 아니고 평안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초달하면서 사랑해서 그런다고 하는 것과 같아요.

매를 맞는 자식 입장에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나중에 자기가 자식을 낳아 키워 보면 알게 되어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간의 생각을 비껴가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것은 영에 속한 자와 육에 속한 자를 철저하게 구별하기 위함입니다.

육에 속한 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해요.

육에 속한 자에겐 하나님을 믿으라고 해도 믿지 않아요.

왜냐하면! 인간은 힘을 주지 않는 신(神)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한나와 브닌나의 이야기는 한 가정사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는 계시사인 것입니다.

한나는 영에 속한 자의 모습이고, 브닌나는 육에 속한 자의 모습입니다.

 

성경 전체에 흐르는 맥은 영에 속한 자는 자식이 없어서 고통을 당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그러했고!

야곱의 아내 라헬이 그러했습니다.

사라나 라헬은 모두가 영에 속한 교회의 표상들입니다.

한나 역시 그 계보에 속하여 있습니다.

 

반대로 하갈이나 레아나 브닌나는 육에 속한 교회의 표상입니다.

육적 교회는 교인이 쑥쑥 잘 낳아지는데, 영적 교회는 낳아지지가 않아요.

교인 하나가 낳아져도 죽을 산고를 거치고 낳아집니다.

 

그런데 고통 속에서 낳아진 자식이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는 자로 세움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 속에서 얻어진 자식들이 모두가 자식을 많이 낳은 자로부터 핍박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영에 속한 자들이 육에 속한 자들로부터 핍박을 당하는 구조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는 구조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을 공격함으로서 장치 오실 메시야가 세상으로부터 핍박당할 것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당한 것도 다 이런 맥(脈)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육(肉)이 영(靈)을 핍박함으로서 세상은 어둠에 속하였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내를 두 언약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라와 하갈의 자식을 가지고 육으로 난 자가 성령으로 난 자를 핍박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갈 4:22-31=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내를 “두 언약(言約)”이라고 하였습니다.

언약(言約)이란 말은 말씀 언(言) 자에 묶을 약(約)자를 쓰는데 이는 말씀으로 꽉 붙들어 묶었다는 뜻입니다.

추호도 흔들림이 없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세상이 요동치고 인간들이 반항하여도 하나님께서 뱉으신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 말씀이 갖는 능력이고 특징입니다.

두 언약이라 함은 “옛 언약인 율법”과! “새 언약인 믿음”을 말합니다.

“율법은 육(肉)이고”!

“믿음은 영(靈)”입니다.

 

그런데 하갈이 낳은 자식은 육체를 따라 났고, 사라가 낳은 자식은 성령을 따라 났다고 합니다.

즉 이스마엘은 육(肉)이고, 이삭은 영(靈)이란 말입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을 가지고 두 언약이라 함은 곧 두 언약은 서로 충돌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충돌을 하는데 육(肉)이 영(靈)을 핍박하는 것으로 충돌을 일으킵니다.

즉 율법이 믿음을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함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도 육체로 난 자들이 성령으로 난 자들로부터 핍박한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함을 주장하는 자들이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을 핍박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사라를 “홀로 사는 여자”라고 하고,

하갈은 “남편 있는 여자” 라고 합니다.

 

하갈의 남편은 아브람입니다.

하갈은 아브람과 동침하여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렇게 낳아진 자식을 육체를 따라 낳았다고 합니다.

결국 여기서 아브람은 육이란 말입니다.

아브람이 하갈을 통해서 낳아지는 자식은 모두가 육(肉)이란 말입니다.

 

반대로 사라는 남편 없는 여자라고 합니다.

세상적으로 과부란 말입니다.

분명히 아브라함이 사라의 남편임에도 성경은 사라는 남편 없는 여자라고 합니다.

이는 곧 아브라함은 사라의 남편이 아니란 말입니다.

사라의 남편은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그 남편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사라는 성령을 통하여서 이삭을 낳은 것입니다.

사라가 낳은 이삭은 하나님 자식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식입니다.

이삭은 육(肉)이 아니고 영(靈)입니다.

왜? 이삭이 영(靈)인가 하면 그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영(靈) 속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삭을 일컬어 약속의 자녀라고 합니다.

영(靈)에 속한 자들만 하나님의 족보에 올라갑니다.

반대로 육(肉)에 속한 자들은 전부 내어 쫓으라고 했어요.

지옥 보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족보에 올라간다는 것은 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영(靈)에 속한 자는 사람이고, 육(肉)에 속한 자는 짐승입니다.

이삭은 사람이고 이스마엘은 짐승입니다.

 

그래서 홀로 사는 여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여자의 자녀 보다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육(肉)이 아무리 많은 자식을 낳아도 하나님 앞에선 짐승이므로 수에 치지를 않습니다.

장차 심판 할 때가되면 노아의 홍수처럼 방주(예수) 밖에 있는 것들은 모조리 다 불에 태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영(靈)이 낳은 자식은 사람이므로 단 한 사람이라도 그를 통하여 낳아진 자식만이 사람으로 인정받기 때문에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肉)은 이런 사실을 몰라요.

그냥 숫자만 많으면 좋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많으면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숫자 많은 것으로 하나님이 자기편이라고 건방을 떱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이러한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큰 교회는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작은 교회는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이 작은 교회 다니는 교인들을 깔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부산 해운대에서 제일 큰 교회 근처에서 목회를 합니다.

교인들이 한 2-30명 정도 모인다고 해요.

그 교회는 수만 명이 모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 교인들이 꼭 주일만 되면 자기 교회 앞에서 자기 교회에 오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전도를 한 대요.

개척교회 앞에서 전도를 한다는 것은 먹어치우겠다는 뜻입니다.

작은 교회는 문 닫으라는 말입니다.

교인들에게 다른 곳에 가서 하라고 하면 콧방귀를 킨다고 해요.

 

그래서 그 동네에서 회자되는 말이 개척교회 목사는 그 교회 집사만도 못하다고 한답니다.

목사와 집사를 등급하는 것이 아니라 우습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자기 교회 목사는 하나님처럼 떠받들지만 개척교회 목사는 졸(卒)로 여겨요.

큰 교회 다니는 교인들은 교회를 부흥시키지 못하는 목사는 목사 취급을 하지 않아요.

완전히 숫자 힘으로 밀어 붙이는 것입니다.

약 15여 년 전에 일인데 지금도 그러는지를 모르겠어요.

 

사람의 숫자가 많다는 이유로 개척교회 목사를 우습게 여기는 교인들이나 사람의 숫자가 적다고 한탄하는 목사나 다 똑 같이 육(肉)입니다.

그래서 숫자에 목을 매는 겁니다.

짐승입니다.

그러니 한 쪽에선 힘(교인)이 있다고 희희낙락하고,

다른 한 쪽에선 힘(교인)이 없다고 울고불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땐 저도 복음을 몰랐으니 제가 아는 그 목사님도 복음을 몰라요.

저 역시도 그 땐 그 목사님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목회를 했습니다.

복음을 모르면 교회 부흥시키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 교회성장 세미나란 세미나는 다 쫓아다녀요.

저도 참 많이 쫓아 다녔습니다.

 

그만큼 개척교회 목사들에겐 교인 수가 적은게 한(恨)으로 남아 있어요.

물론 지금은 덜하지만 늘 그래요.

당시엔 큰 교회들이 그렇게 질투가 나고 시기가 날 수 없어요.

겉으론 내색을 안 하지만 속으론 나도 언제 저런 큰 교회를 해보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연락이 두절 된지가 오래 되어서 지금도 거기서 목회를 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만 아마도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지 싶어요.

복음을 알고 난 후로는 옛 친구들과는 다 단절이 되었어요.

인간적으로 만나서 교제를 해도 대화가 안 돼요.

그러니 만나는 것이 뜸하게 되고 이젠 연락조차 안하고 지내게 됐어요.

육과 영은 하나 될 수 없는 원리 때문에 자연히 멀어지게 된 것 같아요.

친구든 가족이든 형제이든 영과 육은 사귐이 안되요.

 

암튼 육에 속한 사람들의 본능은 크고 화려함을 쫓아가지 힘없는 곳은 찾지를 않아요.

옆에 백화점 같이 시설 좋고 분위기 좋은 대형 교회가 있는데 누가 냄새 나고 분위기가 어수선한 구멍가게 같은 개척교회에 오겠어요.

복음에 관심이 없는 육에 속한 자들은 가난 할 땐 개척교회에 다니다가도 조금 산다 싶어지면 다 큰 교회로 옮겨요.

 

자기 존재를 알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업이 망하면 지금까지 쌓아온 습관이니 아주 교회를 안 나갈 수는 없으니 자기를 숨기기 위해서 작은 교회에 다닙니다.

그러다가 다시 회복하면 큰 교회로 떠납니다.

 

요즘 교인들이 어디 복음에 관심이나 있나요?

없어요.

자기가 기댈 힘을 쫓아다녀요.

장사하는 사람은 큰 교회 가야 장사가 돼요.

이게 육이 지향하는 법칙이고 순리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이용해서라도 힘을 모아서 자기를 고수하고자 합니다.

난 살아남아야 돼!

난 성공해야 돼!

 

이처럼 육은 본능적으로 자기를 확장하고 지키고 고수하고자 합니다.

본능이 큰 것을 차지하라고 해요.

본능이 강자가 되라고 해요.

강자가 되어서 이름을 내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라고 해요.

자기를 지키려면 힘이 있어야 하니 힘을 모으려고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바로 그런 육(肉)에 속한 죄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조직에 힘이 빠져 나가는 것을 막고자 세례요한에게 막아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직의 보스인 세례요한은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도리어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예수에게 가라고 합니다.

 

이제 세례요한의 계보는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직의 문을 닫으라고 합니다.

그것이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이제 그 당위성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왜?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고 자신은 쇠하여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셨고, 자신은 땅에서 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세례요한은 자신의 한계성을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셨기 때문에 하늘에 말을 하고 자신은 땅에서 났기 때문에 땅에 말을 한다고 합니다.

하늘이란 생명이고, 땅이란 죽음입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말은 진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자신은 기껏해야 흙이라는 것입니다.

어둠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자기를 따르면 안 된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영에 속한 자의 특징입니다.

그 안에 빛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망하여야 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실상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자기를 지키려고 하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에 속한 자는 사람들이 예수에게 갈까봐 걱정해요.

진리를 알까봐 두려워해요.

육에 속한 목사들은 교인들이 성경을 아는 것을 원치 않아요.

성경엔 무식한 것을 좋아해요.

 

그래야 목사의 말에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육에 속한 목사들은 교인들이 어디 돌아다니면서 성경공부 하는 것을 제일 싫어해요.

노골적으로 말하면 반발하니까 교묘하게 막습니다.

그 이유는 요즘 하도 이단들이 설치기 때문에 어디를 가도 자기에게 말하고 가라고 합니다.

자기가 이단인지 삼단인지 분별해 주겠다고 합니다.

이는 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을 자기에게 붙들어 매어서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합니다.

 

자기 이름 남기고 싶어 하는 것은 육의 본능입니다.

산에 가면 큰 바위에다가 이름을 새겨 놓는 것도 다 자기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인간들이 본능 때문입니다.

나 여기 왔다 갔다!

꼭 개들이 전봇대에다 오줌을 싸서 자기 영역 표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는 내 “나와바리(구역)” 라고 표시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이 육에 속한 자인데 그는 전쟁을 하면 꼭 자기 전적비를 세웁니다.

자기 힘으로 전쟁에 승리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업적을 기리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사람이 몇 명이라도 자신을 따르면 조직을 만들고 자기의 계보를 형성하고 머리가 되고자 합니다.

세례요한 역시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기 계보를 남길 수가 있었습니다.

당시엔 유명하다고 하면 자기 문하생(門下生)들을 두었습니다.

 

그럼에도 세례요한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냈습니다.

이는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라 땅에 속한 자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난 땅에 속하였고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분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신발 끈을 매는 것도 합당치 못한 죄인이라고 했어요.

 

성령의 지혜로움이란? 이처럼 자기 주제를 분명하게 알고 자기를 부인하고 사람들을 예수님 안으로 귀의(歸依)케 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보시고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늘나라를 몰고 온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통하여서 하늘나라가 확장되기를 바랐습니다.

하늘나라가 확장된다는 것은 영토적 의미가 아니고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많은 사람이 알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바랐습니다.

세례요한에게 있어 기쁨이란? 예수님이 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에 속한 자신은 쇠하고 예수님은 흥하여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또 자기는 쇠하고 예수님이 흥하여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은 만물 위에 계시는 분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만물 위에 계시다는 것은 만물에 속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피조물이 아니고 창조주란 말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은 만물에 속하였고, 예수님은 만물에 속하지 않은 분이라고 합니다.

만물에 속한 자신은 당연히 만물 위에 계신 분 안으로 흡수되어야 살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만물은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의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생명(生命)이라는 말은 “날 생(生), 명할 명(命)”이라고 합니다.

생명(生命)이란?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命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살라고 명령하면 살게 되고 죽으라고 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피조물의 운명입니다.

 

모든 피조물의 생명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살아가라는 명령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죽으라고 하면 죽을 수밖에 없어요.

흔히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저승사자가 데리러 온다고 하지요.

데리러 온다는 것은 생명을 회수하겠다는 것입니다.

회수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생명을 회수하는 것은 주인 마음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 마음대로입니다.

모든 피조물의 생명은 하나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랬지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풀 한포기 새 한마리라도 다 하나님이 기르시고 입히신다고 했어요.

하나님이 주인이기 때문에 기르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키우고 입힌 적이 없어요.

새 한 마리 풀 한 포기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어요.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다 같아요.

다 주인이 하나님이세요.

절에 다니는 사람도 석가모니가 키우지 않고 하나님이 기르시고 있어요.

그래서 교회 다니는 사람이나 절에 다는 사람의 생명도 다 하나님이 알아서 회수해 가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다가 심장이 멎게 해서 회수하시고!

어떤 사람은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일어나서 회수당하고!

어떤 사람은 직장에서 일하다가 사고로 회수당하고!

어떤 사람은 외국에 놀러 갔다가 쓰나미로 회수당합니다.

 

시 104:28-29=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 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29 주께서 낯을 숨기신 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 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보세요.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니 있었고, 호흡을 취하니 본래 흙으로 돌아간다고 하잖아요.

호흡을 취한다는 것은 호흡을 찾아간다는 말입니다.

회수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숨을 불어 넣으셨다고 하지요.

우리가 호흡하는 것은 심장이 튼튼해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 넣어 주셔서 움직이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호흡을 취하여 가신대요.

그러면 인간은 흙덩어리가 되요.

티끌이 되는 겁니다.

 

티끌이 뭔 줄 알지요.

먼지예요.

먼지!

옆 사람보고 인사하세요.

먼지 씨 반가워요.

당신은 먼지입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자기가 먼지 라는 것도 모르고 까불어요.

먼지 속에 세상 것이 조금 들어 있다고 까불어요.

돈이 있다고 까불고!

권력이 있다고 까불고!

지식이 있다고 까불고!

명예가 있다고 까불어요.

 

또 어떤 인간들은 왜? 먼지에게 채워주지 않느냐고 하나님께 악악대요.

아니 먼지가 알면 얼마나 알고 담고 있으면 얼마나 담고 있겠어요.

뛰어 봤자 벼룩이라고 하듯이 자랑해 봐야 먼지에요.

 

자신이 먼지인 줄 알면 까불지 못해요.

겸손은 자신이 먼지인 줄 알 때 자연히 나타나요.

겸손해라! 겸손해라! 할 필요가 없어요.

겸손은 마음속으로부터 아! 나는 먼지에 불과하구나! 를 알면 자연히 나타납니다.

 

성령이 임하면 아 나는 풀이고 안개이구나 를 알아요.

이렇게 알게 되면 자기를 포기하게 됩니다.

세상에 무심해 져요.

점점 도사가 되어가는 겁니다.

 

이처럼 피조물은 창조주께서 살으라고 하니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그만 살고 가자” 그러면 가야돼요.

난 더 살고 싶은데요! 라고 해도 안 되어요.

흔히 사람마다 천수(天壽)를 타고 태어난다고 하지요.

즉 사람의 명줄은 하늘에 달렸다고 하잖아요.

맞아요.

하나님이 주신 수(數) 만큼 살다가 가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복중에서 데려가고!

어떤 사람은 10년을 살다가 데려가고!

어떤 사람은 30년을 살다가 데려가고!

어떤 사람은 80년을 살다가 데려가고!

어떤 사람은 100년을 살다가 데려감을 당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 데려감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예외가 없어요.

창세기에 보면 500년을 살았다!

700년을 살았다!

900년을 살았다! 하여도 결국엔 죽었다고 합니다.

 

인간의 욕심은 불로장생하고 싶지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는 항상 오래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예외 없이 다 죽었습니다.

왜? 인간의 원함과 상관없이 죽는가요?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목숨은 다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생명이 우리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인이기 때문에 우리 원함과 상관없이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왜? 거두어 가십니까? 라고 하면 안돼요.

거두어 가시면 “그 동안 잘 살았습니다! 고마웠습니다!” 라고 해야 해요.

 

땅은 하늘에서 주시는 것으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땅은 스스로 생명을 틔우지 못합니다.

반드시 하늘에서 우로(雨露)를 주어야만 생명을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흙이 내는 생명은 흙에 것이 아니라 하늘에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흙 속에 생명을 취하시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세례요한이 그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 오셨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정확한 증거입니까?

 

그러므로 인간이 영생 할 수 있는 길은 만물 위에 계신 분 안으로 들어가야만 됩니다.

지금 세례요한은 그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것입니다.

나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고 너희도 예수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점방 문 닫고, 예수님 가게로 가자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이제 날 좀 편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 맡기고 싶다는 것입니다.

나도 너희를 관리하려면 힘이 드니 이제 너희들을 예수님의 관리 하에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세례요한이 이런 모습을 통하여서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맞아!

목회란? 성도들을 예수님에게 맡기는 것이야!

복음을 알고 나니 교인은 내가 관리할 대상이 아니고 주인(하나님)이 관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목사가 교인들을 관리하려면 힘들어요.

목사가 교인을 관리하면 자기 똘마니 만들지 예수님 제자 안 만들어요.

목사가 교인들이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열 받는 것은 자기 똘마니가 안 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아는 신자는 하나님의 관리 안에서 살려고 하지 인간의 관리 안에 있고자 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아는 신자들은 목사의 관리를 받고 싶어 하지 않아요.

목사가 관리를 하고자 하면 반발해요.

그러나 교인들이 복음을 모르면 목사가 관리해 주면 좋아해요.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줄을 몰라요.

 

이는 마치 수능시험 보는 아이가 공부하는 것이 힘들고 시험보기 두렵다고 과외 선생이 대신 시험 봐 주길 바라는 것과 같아요.

학생이 수능시험을 보는 것은 대학은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그 대학에 들어가서 수학할 능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대학에 가서 교수들이 가르치는 것을 이해하지도 못할 사람이 들어가면 견뎌내지 못해요.

그래서 과외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공부하기 싫다고 과외 선생에게 돈을 주고 대신 시험 쳐 달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대학에 가선 알 될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어리석은 짓을 지금 교인들이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자기는 기도하지 않고 목사가 대신 기도해 주는 것을 좋아해요.

목사님이 우리 가정을 위해서 기도해 준대! 라고 자랑하고 있어요.

이 말을 들은 옆집에 사는 집사는 시기가 나서 목사님에게 심방 좀 해 달라고 하고 돈 봉투 주면서 목사님 우리 집에 무슨 문제가 있는데 기도 좀 해 주세요! 라고 해요.

 

자기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몰라요.

삯꾼 같은 목사도 기도해 주겠다고 설쳐대요.

참으로 가관입니다.

옛날 말로 유유상종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은 자기는 예수님을 몰라도 되는 줄 알아요.

목사의 믿음이 곧 자기 믿음인줄 알아요.

목사가 알고 있는 예수를 자기도 안다고 생각해요.

물론 가짜 믿음이고 가짜 예수이지만,,,

아마도 목사의 것이 자기에게 다운로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 얼마나 슬프고도 우스운 이야기 입니까?

그런데 이게 이 시대 교인들에겐 먹히고 통합니다.

 

목사가 자기 가정을 위해서 기도 해 준다고 하면 좋아해요.

아니 예수님이 언제 기도를 목사에게 부탁하라고 했습니까?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라고 했잖아요.

 

기도는 남이 대신 해 주는 게 아니고 내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교제를 하여야지 목사보고 대신 교제하라고 하면 안되요.

내 몸이 더러우면 내가 목욕탕에 가서 때를 밀어야 해요.

목사를 목욕탕에 보내서 때를 밀고 오라고 하면 안 되잖아요.

내가 하나님과 부딪쳐서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목사가 기도했기 때문에 원수 마귀는 이제 자기 집에 안 온대요.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간대요.

참으로 믿음이 좋지요?

이 얼마나 편리합니까?.

자기는 쿨쿨 자도 목사가 수호신처럼 기도해 주는데 무슨 걱정을 합니까?

믿음이 좋은 건지 무식한 건지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도 이처럼 자기 집을 지켜주는 세퍼트와 같은 목사 한 마리 키울 생각 없습니까?

생각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 주세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접수해 드릴께요?

제가 푸닥거리 잘하는 용한 무당을 알고 있거든요?

제가 해줄 용의도 있습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목사에게 관리 받고자 하는 교인은 지옥 갑니다.

기도해도 여러분이 하시고!

얻어 터져도 여러분이 터지시고!

아파도 여러분이 아프세요.

 

하나님하고 여러분이 씨름을 하여야지 목사가 대신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내가 만난 하나님!

내가 만난 예수님!

내가 깨달은 복음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시험이 어렵다고 해도 과외선생을 대신 수능시험 보게 하지 마세요.

복음을 아는 목사는 대신 짐을 져주려고 하지 않아요.

구워먹든지 삶아 먹든지 본인이 하도록 합니다.

 

신앙의 생명이란? 수많은 부대낌 속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아파도 내가 아파야 하고, 깨어져도 내가 깨어져야 합니다.

생명은 아픔 속에서 자랍니다.

깨어짐 속에서 단단해져 갑니다.

내가 넘어지고 깨어지고 아파진 만큼 예수님을 더 많이 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부러 시비를 거는 겁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지를 알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살고자 마누라를 두 번씩이나 팔아먹은 아브람을 이삭을 바칠 수 있는데 까지 몰아갑니다.

스데반처럼 죽으면서도 웃을 수 있는 사람으로 간섭해 가십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한번 되돌아보세요.

옛날 보단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조금은 더 알겠지요.

그래도 조금 나아진 것을 느끼겠지요.

옛날엔 조그마한 일에도 울고불고 했는데 이젠 그렇지가 않지요.

그만큼 면역성이 생기고 하나님을 아는 배짱이 생긴 것입니다.

나중엔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합니다.

 

누가 그러대요.

아주 영악한 아이가 있는데 엄마가 두들겨 패더래요.

보통 보면 엄마가 때리면 안 맞겠다고 난리를 치잖아요.

그런데 이놈은 맞으면서 하는 말이 죽여라! 죽여!

자기 아들 죽지 내 아들 죽나! 라고 하더랍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배짱입니까?

아이가 이러면 엄마는 항복해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이삭을 달라고 하니 그랬어요.

가져가세요.

이 아이가 내 아이입니까? 하나님 아이지 라고 주었어요.

그러지 하나님이 야! 너 많이 컸다! 라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날이 올 겁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조금씩 있겠지만,,,

 

하나님과 부대끼다 보면 맷집이 생깁니다.

저도 과거엔 교인 하나가 떠나면 가슴이 아렸어요.

배신감도 들고 해서 밤잠을 설치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하도 많이 겪다가 보니 이젠 만성이 되었어요.

 

하나님이 믿음 없는 목사를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고 훈련시키려고 교인들을 이리 저리로 옮겨 다니게 하는 것입니다.

가면 가는가 보다!

오면 오는가 보다! 라고 해요.

점점 교인들을 보는 것이 소 닭 보듯이 무덤덤해져 가고 있어요.

이젠 오면 저 사람은 얼마나 있을란가? 합니다.

 

과거엔 붙잡고 정착시키려고 듣기 좋은 말을 했는데 이젠 저 인간이 언제 튈지 모르니까 있는 날에 복음이나 실컷 전하자 라고 합니다.

붙어 있으면 기적이고 떠나면 그 동안 잘 놀았어요! 라고 해요.

성도들에게도 그러라고 해요.

심심하니 잠간 보냈다가 하나님이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생각하라고 해요.

 

그렇게 해서 알아진 예수님이고 십자가여야지 능력이 되지 내가 해야 할 신앙을 목사가 대신 해 주면 나는 알맹이 없는 빈 껍데기이가 됩니다.

모태 신앙이면 뭘 하고 50년 교회 다닌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장로면 뭣하고!

집사면 뭣합니까?

자기가 만난 예수가 없는데,,,,

 

그러니 맨 날 남이 만난 예수를 물어 보는 겁니다.

그래 기도하니 뭐라고 하더냐? 라고 물어요.

예수님이 어떻게 생겼던데?

이런 사람들은 복음을 말하면 우리 목사님이 그러는데 그건 이렇고 거건 저렇대 라고 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데 라고 하면 자기 생각은 없어요.

몰라요.

온통 우리 목사님이 그러던데 만 있어요.

 

우리나라 학생들이 외국에 나가면 꼭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한답니다.

미국의 유명한 교수가 한국학생들 꼬집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옛날에 들었어요.

한국학생들은 논문을 쓰면 교수가 시키는대로만 쓴대요.

 

그래서 불러서 왜? 이렇게 썼느냐? 라고 물으면 교수님이 시킨대로 했다고 한답니다.

그럼 교수는 그런대요.

그건 내 생각이고!

네 생각은 무엇이냐! 라고 하면 없대요.

시험을 치면 점수는 많이 받는데 실력이 없어요.

 

꼭 우리나라 교인들 같아요.

목사가 가르쳐준 예수는 잘 아는데 자기가 만난 예수가 없어요.

그러니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 신자들이 다 목사가 말해준 예수만 내어 놓는 겁니다.

 

그러니 조금만 어려움이 생기면 푹 쓰러져요.

스스로 일어나지 못해요.

스스로 해결하지 못해요.

꼭 목사가 가서 기도해주고 위로해주고 도닥거려 주어야 교회에 옵니다.

전부 유치원 아이로 만들어 놓았어요.

 

왜? 남에 예수를 가지고 있습니까?

남이 예수를 백번 만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가 만난 예수라야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을 직접 만나라고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르쳐 주는 예수 말고 너희들이 예수를 만나라고 합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만난 예수를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은 제자들을 자기가 관리하지 않고 예수님이 관리하도록 이첩을 시키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날 따르지 말고 예수님에게 가라고 하는 겁니다.

 

영에 속한 목사라면 세례요한처럼 성도들을 예수님에게 직접 만나라고 합니다.

이런 것을 중매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중매만 시켜 놓으면 교인들을 신경 쓰지 않아요.

교회에 오든지 말든지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다 주님이 머리가 되셔서 알아서 다스려가니까요.

이게 안 믿어지면 간섭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얼마나 간사스러운가 하면 간섭 안하면 목사가 사랑이 없다고 해요.

무관심하다고 해요.

간섭하려고 하면 도망가면서도 막상 간섭하지 않으면 왜? 관심 갖지 않느냐고 해요.

 

그러니 목사는 간섭 아닌 간섭을 하게 되는 겁니다.

왜? 교회에 안 오느냐?

왜? 기도하지 않느냐?

왜? 성경공부 안하느냐?

요즈음 어떻게 지내느냐?

관심 아닌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간섭한다고 해서 없는 믿음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간섭 안한다고 해서 있는 믿음이 날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다 하나님이 알아서 먹이시고 입히시고 자라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지금 이러한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저 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분이라고 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만물 위에 계시다는 말은 인간과 본질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자신과 예수님은 본질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이라고 하고 자신은 땅이라고 합니다.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 다르다고 합니다.

위로부터 온 자는 위에 말을 하고 땅에서 난 자는 땅에 말을 한다고 합니다.

위에 말이란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은 그 말씀이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모두가 생명의 말씀입니다.

땅에 속한 말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은 무슨 말이든지 생명의 말씀이 되지만 인간이 하는 말은 그 어떤 말이라도 죽음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 그 어떤 지혜자가 한 말이라도 죽은 말입니다.

생명을 주지 못해요.

석가모니의 깨달음도 공자의 깨달음도 생명을 줄 수 없어요.

죽은 말입니다.

 

그 어떤 고상하고 유명한 종교인이 하는 말이라도 죽은 말입니다.

교황의 말도 죽은 말이고, 스님의 말도 죽은 말이고, 목사의 말도 죽은 말입니다.

생명은 오직 예수님의 말씀 속에만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선생이라 자칭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가 있느냐 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 12:34절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즉 죄인에게서 생명의 말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은 오직 예수님만이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죽으라는 말씀도 생명의 말씀이 되지만 인간의 지혜자가 살라고 하는 말도 죽은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종교에서 생명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은 모두가 땅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의 말이 아무리 심오하다고 하여도 죽은 말입니다.

마호메트의 말이 아무리 고상하여도 죽은 말입니다.

공자의 말이나 맹자의 말이나 아무리 깨달은 말이라 하여도 영생을 줄 수가 없어요.

석가모니나 마호메트나 공자나 맹자의 깨달음으로 영생을 얻을 수가 없어요.

세상을 살아가는데 지혜는 될 수 있어도 생명은 아닙니다.

 

엄밀히 말해서 세상 종교는 하나의 철학이지 진리가 아닙니다.

철학이란? 인간이 살아가는 도리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은 죽이는 것이고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예수님의 말씀이 곧 영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다 좋은 말이고, 인간의 말을 다 나쁜 말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땅에 말을 하지 않고 하늘에 말을 하십니다.

 

땅에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 중심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생각하는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기분이나 생각을 고려해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아요.

 

복음 속에도 당연히 인간 입장을 고려하는 것이 들어가 있지 않아요.

그러니 예수님 앞에 나와서 내 입장 좀 생각해 달라고 하지 마세요.

예수님 생각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세요.

 

그럼에도 우리는 늘 우리 사정을 헤아려 달라고 해요.

왜? 우리를 돌아보지 않느냐 라고 원망해요.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항상 어그러진 길로만 가려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아요.

오로지 우리 생각만 해요.

 

이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하나님 생각만 하시지 인간들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이야기를 하려고 오셨어요.

하나님 말씀은 “죄인은 죽었어”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교회 와서 우리 생각을 말하지 말고 하나님 생각이 무엇인지를 신경써야 해요.

왜냐하면! 하나님 생각만이 그 속에 생명이 묻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인간의 편을 들어주는 말씀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을 죽이려는 말씀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개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시려고 왔다고 한 것입니다.

칼이란?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이는 말을 하라고 성령을 한량없이 주셨다고 합니다.

 

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참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이 시대 성령 운동하는 자들이 들으면 까무러칠 말씀입니다.

이 시대 성령 운동하는 자들은 사람을 죽이려고 하지 않고 살리려고 해요.

하나님은 죄인을 죽이라고 성령을 주셨는데, 목사들은 성령을 운운하면서 살리려고 해요.

 

이는 마치 옛날에 임금이 죽으라고 사약을 주었는데, 임금님 하사품을 받았다고 좋아하는 것과 같아요.

 

성령으로 죄를 깨닫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데, 성령 받아서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하고 있어요.

성령은 육을 죽이지 육을 살리는 성령은 없어요.

 

그런데 지금은 목사들이 성령 운운하면서 교인들에게 세상에서 성공하라고 해요.

육이 더욱더 풍성해 지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자기 이름을 내라고 합니다.

 

뭔가 이상하지요.

이상 할 것이 없어요.

다른 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가장한 거짓 영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운동을 한다면서 죄인을 죽이지 않고 살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을 다 믿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뭐가 다른 영이냐? 하면 죄를 고발하지 않는 영은 다 거짓 영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했어요.

 

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여기에 굉장히 중요한 원리가 들어가 있어요.

일단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기쁘게 하는 자는 성령 받은 자가 아닙니다.

죄를 지적하지 않는 자는 성령 받은 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반대로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말을 하면 그는 삯꾼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삯꾼은 목자가 아니라고 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죄를 지적하지 않는 목사를 좋아해요.

일부러 그런 목사를 찾아 다녀요,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다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딤후 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귀가 가려워 자기 사역을 쫓을 스승을 구한다고 하지요.

자기에게 좋은 말만 하는 목사를 따른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부흥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에게 좋은 말을 한다는 증거입니다.

 

그럼 누가 성령을 받은 사람인가 하면 죄를 지적하고 죄인을 긍정해 주지 않는 사람이 성령을 받은 주의 종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들의 특징은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환심을 사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사람들 비위를 맞추려고 하지 않아요.

 

그러니 따르는 사람들이 없지요.

죄를 지적하니 당연히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 받은 주의 종 곁에 사람이 모이겠습니까?

안 모이겠습니까?

당연히 안모이지요.

 

성령을 받으면 인생 종 쳤어요.

왕따 당하게 되어 있어요.

성령으로 목회를 하면 교회 부흥은 이미 물 건너갔어요.

그래서 복음을 아는 목사님들은 교회부흥을 생각하지 않아요.

 

이처럼 하나님이 보낸 성령은 죄인을 살려두지 않아요.

하나님 말씀으로 너는 죄인이라고 사정없이 고발하여서 죽이는 일을 해요.

하나님 말씀은 죄인에게 칼처럼 다가와요.

 

히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보세요.

하나님 말씀이 인간을 난도질 한다고 하지요.

혼과 영이란? 마음과 뜻이란 말이고. 관절과 골수란? 행실을 말합니다.

그러니 안과 밖을 모조리 죄라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가 죄 덩어리라고 고발한다는 뜻입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죄인에게선 선(善)이 나올 수가 없어요.

의(義)가 생산되지 않아요.

 

죄인이 하는 모든 것이 죄예요.

성령은 니 생각, 니 마음, 니 행동 모두가 죄라고 지적을 해요.

이처럼 죄인을 옴짝달싹을 할 수 없도록 하는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죄인은 무엇을 해도 살고자 하는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든지 죄인을 죽이고자 합니다.

 

이제 말씀을 가름합시다.

 

만물 위에 계신 예수님을 우리가 지금 모시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만물 위로 끌고 가십니다.

위로 올라가려면 당연히 땅에 지체를 죽여야겠지요.

땅에 것이 발목을 잡으면 올라가기 힘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주변을 교통정리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뜻대로 인생이 살아지지 않으면 아 그 분이 나를 간섭하시고 계시는구나! 라고 생각하세요.

 

그래서 인생에 풍랑이 일어나고 삶에 물이 들어와서 인생을 침몰시킨다 하여도 예수님하고 같이 배에 고물을 배고 주무십시오.

아까 말한 영악한 아이같이 그래 죽여라 죽여! 천당 밖에 더 가겠느냐 라고 배짱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물론 잘 안되겠지만 그래도 하나님과 부대끼십시오.

 

하나님께서 감당할 수 없는 시험지는 주시지 않습니다.

다 감당 할 만하니 주신 겁니다.

 

쩨쩨하게 돈 때문에 울고불고 자식들 공부못한다고 울고불고 하는 시험지 받지 말고 스데반처럼 죽이십시오! 라는 시험지를 받는 그날이 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여기까지 간섭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천국 갈 때까지 간섭해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합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셨듯이 저희들도 하나님의 뜻대로 만들어 가실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그릇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아픔들을 잘 이겨 내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하늘빛사랑 blog https://blog.daum.net/day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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