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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요한복음 강해) 18강. 빛에 속한 자와 어둠에 속한 자 <요 3:17-21>

by coroa 2022. 8. 29.

요한복음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5)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강. 빛에 속한 자와 어둠에 속한 자 <요 3:17-21>

요 3:17-21=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정낙원 목사

 

지난시간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서 죄 문제를 해결케 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임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서 죄 문제를 해결케 한 것은 하나님 자신의 거룩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두고서는 안식을 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안식을 하시려면 처음 창조 때처럼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처음 창조 상태가 되려면 인간도 죄와 상관없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구원이란? 처음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일을 예수님이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낸 것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고 구원키 위함이라고 합니다.

 

세상은 이미 심판을 받았어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이미 심판 받은 증거에요.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이미 심판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심판 당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는 심판 당한 세상 속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키 위함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범죄한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으로 모든 인간이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한 사람으로 모든 인간이 사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이걸 대표성이라고 합니다.

또는 조상이라고도 해요.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었듯이 이제 죄 없는 예수님 한 사람으로 인하여 죄 없는 자가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이제 예수 안에서 사는 길이 열린 겁니다.

처음 아담처럼 돌아 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아담 안이라는 죽음의 영역에서 예수 안이라는 생명의 세계로 이동을 시킨 겁니다.

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죄 없는 아담이 되었습니다.

 

죄인이냐 의인이냐는 누구 안에 있느냐로 판단이 됩니다.

아담에게 소속되어 있으면 죄인이고, 예수님에게 소속되어 있으면 의인입니다.

인간의 운명은 두목(頭木, 조상)이 누구냐에 따라서 결정이 됩니다.

 

제가 연일(迎日) 정씨(鄭氏)인데, 이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되었습니다.

조상이 연일(迎日) 정씨(鄭氏)이기 때문에 연일 정씨 후손으로 태어나고 만 것입니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조상이라고 하는데 난 그 사람을 몰라요.

 

이 사람은 1337년에서 1392년까지 산 사람인데 고려 말기 사람이예요.

이성계가 정권을 잡고 조선을 개국 할 때 이성계의 셋째아들인 이방원에 의해서 선죽교에서 죽임 당한 선비입니다.

 

그런데 지금 2008년도를 살아가고 있는 내 몸 속에 약 700년 전 사람인 정몽주(鄭夢周)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만약 5천년 후에 내 지손이 있다고 하면 그 아이에게도 연일(迎日) 정씨(鄭氏)라는 꼬리표는 붙게 되어 있습니다.

정몽주(鄭夢周)를 거스러 올라가면 아담이 나와요.

결국 정몽주(鄭夢周)도 죄인의 씨앗인 것입니다.

 

조상이란? 시간과 상관없어요.

이처럼 나라와 민족과 혈통을 떠나서 모든 인간의 몸속에는 아담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이러한 원리로 지금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이미 창세전에 예수 안에 있는 자가 되는 겁니다.

이미 창세전부터 예수 안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예수를 믿는다 하여도 난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있었어요.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그러지요.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라고 하지요.

이는 창세전 언약적인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중요한 것은 예수 안에 있다 함은 예수 밖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천년이 가고 만년이 가도 예수를 믿게 되어 있어요.

반대로 예수 밖에 있는 자는 예수를 믿을 수가 없어요.

 

이렇게 모든 인간을 조상으로 죄인과 의인으로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창세전 언약 때문에 그래요.

죄인이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 간에 맺은 약속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선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세상이란 모든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 영생주시기로 작정된 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창세전에 영생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을 구원을 한다고 합니다.

 

구원(救援)이란? 건져 낸다 또는 구출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구원할 자기 백성들이 어딘가에 갇혀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올무에 갇혀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요.

자기백성이 어딘가에 갇혀 있어요.

성경은 그것을 죄와 사망의 권세라고 합니다.

죄와 사망이 죄인들을 가두고 있다는 말입니다.

 

죄인은 죄와 사망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구해주지 않으면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죄와 사망보다 힘이 센 분이 빼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죄인의 모습을 중풍병자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중풍병자는 몸과 마음이 따로 놉니다.

아무리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고자 하여도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중풍병자에겐 항상 보호자가 필요합니다.

곁에서 대행해 주어야 합니다.

보호자가 없으면 중풍병자는 스스로 밥도 먹을 수가 없는 죽은 목숨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죄가 몸을 사로잡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상태를 죄의 종이라고 합니다.

종이란? 주인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자란 말입니다.

죄가 몸을 가지고 마음대로 율법에 반하는 일들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날 좀 건져 줄 수 없을까! 라고 탄식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예수그리스도가 건져 주신다고 일러 주십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켜 주셨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낸 것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져내기 위함입니다.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약속한 영생주시기로 작정한 자들을 건져 내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자기백성들을 죄에서 건져내는 방법을 앞선 시간에 살펴 본대로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어주심으로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자기백성의 죄값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시고 성령으로 찾아왔어요.

자기 목숨을 사망을 잡은 자에게 넘겨주고 자기 백성을 찾아 온 겁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자신이 놋 뱀처럼 높이 달리면 자기 백성을 지옥에서 끄집어내어 하늘로 이끌겠다고 하십니다.

마치 자석이 쇠붙이를 강제로 이끌듯이 말입니다.

 

지금은 영적으로 죄의 권세 아래서 끄집어내세요.

실제 모습은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을 하실 때 실제적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호령과 천사장의 나팔 소리로 강림하시면 자기 백성들을 공중으로 끌어 올리십니다.

 

살전 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공중으로 끌어 올린다고 합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고기를 낚듯이 낚아챈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장차 주님의 재림 때 될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이와 같은 원리로 성령께서 성도를 죄에서 이끌어 내십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을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빠져 나오게 하십니다.

어떻게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이끌어내느냐 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을 가지고 끄집어내십니다.

 

예수님이 죽음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 속에 잡혀 있던 자기 백성들을 찾아오신 겁니다.

이건 영적인 일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영적인 일이 믿어지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믿게 하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시키십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자신의 죽음으로 믿어지게 하심으로서 죄에서 자유케 하십니다.

 

재림 땐 공중으로 끌어 올리지만 지금은 믿게 하십니다.

믿게 한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을 뛰어 넘어서 믿어지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효력이 있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믿음이란? 누군가가 나 대신 담당해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자기의 잘못은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해결이 되었다고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몸은 철저하게 사건중심으로 인지를 합니다.

낸 몸이 경험하여야 믿어져요.

내가 밥을 먹어야 배가 부르고, 내가 잠을 자야 잠을 자는 것입니다.

 

남이 아무리 법을 먹고 잠을 자 주어도 그것은 그 사람 것이지 내 것이 아니에요.

내 아픔을 남이 대신 할 수가 없습니다.

자식의 배고픔을 부모가 대신 먹어 준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아요.

 

아무리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다고 해도 자식의 아픔을 부모가 대신 할 수가 없습니다.

내 몸이 아픈데 부모가 대신 아파해 준다고 해서 내 아픔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효자라고 해도 부모의 늙고 병듦을 대신 짊어 질 수가 없습니다.

육신은 철저하게 “너는 너”“나는 나”로 구분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은 내 죄는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죄 값을 내가 치러야 치루어진 것으로 인식하고 개운해집니다.

내가 치루지 않고 남이 치루어 주었다고 해도 찜찜해요.

그래서 언젠가는 갚아야 할 부채로 늘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성은 아무리 예수님께서 내 대신 죽으셨다고 하여도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나는 나입니다.

나와 예수님은 다른 몸이지 한 몸일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성경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백성들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고 하여도 그건 어디까지나 성경의 이야기일 뿐이지 내 이야기는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내 대신이라는 것을 믿는 겁니다.

예수님과 나는 한 몸이라는 사실을 믿는게 믿음입니다.

이를 성령이 하게 해 주세요.

 

육신으로는 절대 불가능해요.

인간의 의식구조는 나는 나고 예수는 예수에요.

그래서 아무리 예수님이 나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믿으라고 해도 안 되어요.

예수를 믿는 것은 인간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믿어지게 해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치 쇠붙이가 자석에 자기의지와 상관없이 착 달라붙는 것과 같이 뭔가 끌어 당겨 주어야만 가능해요.

자석처럼 불가항력적으로 예수를 믿게 해 주어야만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만 성령을 보내서 믿어지게 하십니다.

 

이렇게 믿어지는 예수는 자기 능력으로 떼어 낼 수도 없어요.

나 예수 안 믿을래 하여도 안 되어요.

저리 가라고 해도 안 되어요.

그림자처럼 항상 붙어서 다녀요.

 

그래야 그 믿음이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서 탈락되지 않습니다.

만약 믿음을 인간이 관리하라고 하면 천국에 갈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기분에 따라서 수시로 붙었다 떨어졌다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우리가 관리하면 육신의 컨디션에 따라서 왔다 갔다 해요.

 

그러므로 예수를 믿게 하는 믿음을 성도에게 맡겨두지 않고 예수님이 관리하는 것입니다.

중도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내 대신 죽으셨다는 것이 믿어지는 그 믿음을 성도가 가지고 있지 않고 예수님이 가지고 계셔야만 취소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분문에서 이런 이야기를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믿는 자는 구원을 받았고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믿어지고!

심판 받았기 때문에 안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쇠붙이니 자석에 붙고 흙이니 자석에 안 붙는 것과 같아요.

 

사람들은 창조시에 이미 각자의 운명을 타고 납니다.

창조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확정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을 자와 믿지 않을 자로 창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를 본문에선 빛에 속한 자와 어둠에 속한 자라고 합니다.

속했다는 말은 이미 결정 되었다는 말입니다.

소속이 이미 정해졌다는 뜻입니다.

야곱과 에서처럼 이미 태어나기 전에 결정 났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빛에 속한 자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어둠에 속한 자로 태어납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에서 빛을 예수님이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빛에 속한 자는 예수님을 믿게 되어 있고,

어둠에 속한 자는 예수님을 거부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즉 빛에 속한 자는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심이 믿어지고, 어둠에 속한 자는 안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빛에 속한 자는 예수 안에 있는 자이고, 어둠에 속한 자는 예수 밖에 있는 자입니다.

누가 예수 안이고 누가 예수 밖인지를 십자가로 구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준으로 구원받은 강도와 멸망 받은 강도가 나누어져 있는 겁니다.

이건 하나의 예표적인 사건이에요.

 

성령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예수님께 속한 자와 마귀에게 속한 자로 갈라내십니다.

예수님께 속한 자는 예수님 말을 알아먹고 예수님께 속하지 않은 자는 못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놋뱀 이야기로 심판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심판이란? 갈라지는 것입니다.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무엇으로 갈라지느냐 하면 예수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갈라집니다.

죽고 난 후에 갈라지는 것이 아니고 지금 갈라진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나중에 죽으면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이미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졌다고 합니다.

벌써 심판이 끝났다고 합니다.

넌 천국! 이쪽으로 예수 안으로 들어가!

넌 지옥! 저쪽 예수 밖으로 나가 있어!

 

천국으로 갈 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하십니다.

지옥에 갈 자는 절대로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해서 지옥에 가도록 하십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내 뜻대로 안되고, 예수를 안 믿는 것도 내 뜻대로 안 됩니다.

 

결국 구원받은 성도나 지옥에 가는 인간은 예수님을 심판주라는 것을 드러내주는 도구로 사용되는 겁니다.

한 쪽은 예수 때문에 천국에 갔고, 다른 한 쪽은 예수 때문에 지옥에 갔어요.

예수님이 심판주가 되려면 반드시 갈라지는 일이 일어나야 해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자 두 민족으로 나누이게 된 것입니다.

세상은 졸지에 예수님 때문에 두 쪽으로 분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원함과 상관없이 분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모두가 한 통속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고 나니 두 족속이라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이미 구약시대에 보여 주셨어요.

 

아브라함의 아들 중에도 이삭과 이스마엘로 갈라졌어요.

이삭의 자식도 역시 야곱과 에서로 갈라졌어요.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네 뱃속엔 두 민족이 있다고 했습니다.

 

두 민족이란? 다른 종족이란 말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누가 봐도 한 형제입니다.

그것도 부인 할 수 없는 쌍둥이 형제입니다.

인간의 육안으로는 도무지 두 민족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두 민족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는 빛에 속한 천국 백성이고, 하나는 어둠에 지옥 백성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에게 속한 자이고, 하나는 마귀에게 속한 자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자신들이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하나는 천국가기로, 하나는 지옥가기로 선택되었습니다.

지옥으로 가는 에서 입장에선 불공평하다고 반항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항 할 수가 없는 것은 원래 없었던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냥 흙이었는데 에서로 만들었기 때문에 없는 것 보단 낫습니다.

그러므로 불평 할 수가 없습니다.

에서나 야곱이나 원래 없던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만들어진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하나는 빛에 속한 자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는 어둠에 속한 자로 지음을 받은 것뿐입니다.

 

빛에 속한 자는 빛이 좋은 속성으로 지음을 받았고,

어둠에 속한 자들은 어둠이 좋은 속성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속성이란? 본능이란 말입니다.

본능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자기 조상을 찾아가요.

빛에 속한 자는 예수 안으로 들어가고, 어둠에 속한 자는 예수 밖으로 도망가요.

 

하늘에 사람은 하늘에 속성으로 살고, 땅 사람은 땅 속성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각자 지음 받은 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지옥에 갈 자는 반드시 지옥으로 가야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지옥에 갈자가 천국에 턱하니 들어가 있으면 하나님이 머리 아파요.

그래서 천국 문에 서서 천사들이 철저하게 검증하는 겁니다.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속성대로 살다가 자기에게 가장 적합한 곳으로 가면 됩니다.

 

빛에 속한 자는 천국에 가야 좋고, 어둠에 속한 자는 지옥에 가야 좋습니다.

빛에 속한 자 입장에선 어둠이 불편하다고 생각하지만,

어둠에 속한 자는 어둠이 전혀 불편하지가 않아요.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은 보지 못하는 것이 전혀 불편하지가 않습니다.

지옥에 갈 사람은 지옥에 속성대로 살아야 편하고,

천국에 갈 사람은 천국에 속성대로 살아야 편합니다.

 

그래서 야곱과 에서 두 사람의 삶에 가치관이 다른 모습으로 산 것입니다.

야곱은 팥죽보다 장자권이 중요했고, 에서는 장자권보다 팥죽이 더 중요했어요.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았다는 것은 먹고 사는 것이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야곱은 팥죽을 주고 장자권을 산 것은 먹고 사는 일보다 장자권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야곱은 장자권을 위해 살았고, 에서는 떡을 위해 살았습니다.

이게 야곱과 에서의 속성이고 가치관입니다.

 

야곱과 에서에게 물어 보십시오.

야곱아! 너는 왜? 떡을 택하지 않고 장자권을 택하였느냐?

장자권이 떡보다 좋아서요!

에서야! 너는 왜? 장자권을 택하지 않고 떡을 택하였느냐?

떡이 장자권보다 좋아서요!

 

둘 다 대답은 하나입니다.

각자 그게 좋아서 택하였다고 합니다.

그게 왜? 좋은데? 라고 물으면 몰라요! 그냥 좋아요! 라고 대답합니다.

 

사람들마다 이상형이 다 달라요.

어떤 사람은 키 큰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키 작은 사람을 좋아해요.

어떤 사람은 마른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뚱뚱한 사람을 좋아해요.

 

제 아내는 탤런트 박신양이를 무척 좋아해요.

난 싫어요.

전 송강호를 좋아해요.

 

제 마음엔 박신양이를 보면 말도 좀 어눌한 것 같고 남자로선 영 아니올시인데도 아내는 그게 그렇게 매력적이래요.

참 별 희한한 매력도 다 있지요.

 

여기에 태클 걸면 안되요.

그게 그 사람 취향이니까?

그냥 많이 좋아하게 내벼려 두어야 해요.

 

자기가 좋다는데 누가 말릴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도 못 말려요.

취향가지고 다투면 밥 얻어먹기 힘들어요.

 

마귀와 예수님의 대화에서 두 민족의 속성을 잘 드러나 있어요.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 할 때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마귀는 사람은 떡으로 산다고 하고,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고 합니다.

 

여러분 누구 말이 맞습니까?

인간 입장에서 판단하면 예수님이 틀리고, 마귀 말이 맞아요.

 

그럼 인간들은 누구 말을 듣겠습니까?

당연히 마귀 말이지요.

반면에 예수님 말 듣는 인간들은 미친놈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했어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많겠어요?

적겠어요?

적지요.

 

예수님처럼 말하면 교회가 부흥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되지요.

 

그런데 한국교회는 엄청 부흥됐어요.

뭔가 잘못되었어요.

교회가 아니란 반증입니다.

기독교 연감을 보면 기독교인들이 천이 백만 명이래요

엘리야 시대로 비교한다면 이들은 모두가 바알을 믿는 자들이에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은 정신병자이고 과대망상증 환자입니다.

아니 누가 뭐래도 사람이 떡으로 살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지 않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하면 나중에 형편이 좀 나아지면 믿겠다고 합니다.

지금은 사는게 바빠서 안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다 먹고 산 다음에 예수를 믿어도 믿지, 굶어 죽게 되었는데 예수는 무슨 예수냐 라고 합니다.

예수를 안 믿겠다는 말이 아니고 나중에 살기 좋아지면 그때 가서 믿겠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언제든지 자기 마음만 먹으면 예수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말하는 예수 믿는다는 것은 교회 다닌다는 말입니다.

앞으로 형편이 나아지면 교회에 오겠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예수 믿는 것과 교회 다니는 것을 동일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 다니는 것하고, 예수 믿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가치관의 변화를 말합니다.

즉 세계관이 달라진 것을 말합니다.

 

성도는 이 세상은 인간 중심으로 다스려지지 않고 예수님 중심으로 다스려 진다는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내 중심으로 살지 않고 예수님 중심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산다는 겁니다.

 

예수를 몰랐을 땐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예수를 알고 나선 이 세상보다 더 중요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를 몰랐을 땐 이 세상에서 실패하면 모든 게 끝장인줄 알았는데!

예수를 믿고 나선 이미 예수 안에 있으면 성공한 인생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세상에서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지기 때문에 세상이 두렵지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고 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난 다른 나라 사람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처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다고 믿고 사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으나 세상에 있으나 예수님과 한 운명으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가치관이 달라지지 않고 교회에 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교회란 다른 세상을 뜻합니다.

만약 세상 가치관으로 교회에 온다면 교회가 세상입니다.

장소가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교회 다니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달라진 가치관으로 사는게 신앙입니다.

그러니 교회 다니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이 교회를 다니는 것입니다.

 

이 말이 굉장히 어렵지요.

이와 같이 빛에 속한 자와 어둠에 속한 자들도 살아가는 자세가 다릅니다.

삶에 의미와 가치관이 다릅니다.

 

야곱처럼 장자권을 위해 떡을 포기하는 사람과 떡을 위해서 장자권을 버리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다릅니다.

 

장자권이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즉 구원권을 말합니다.

 

그러니 야곱은 하나님 아들 되는 것이 먹고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하였고, 에서는 하나님 아들 되는 것보다 먹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하였습니다.

성경은 장자권을 경홀히 여긴 에서를 음행하는 망령된 자라고 합니다.

 

히 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음행이란? 간음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망령된 자란? 마귀 자식이란 말입니다.

성경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하고!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에서는 어둠에 속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보다 못하게 여긴 것입니다.

야곱은 빛에 속하였기 때문에 팥죽을 주고 장자권은 산 것입니다.

팥죽 한 그릇 속에 야곱과 에서의 속성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치관이 다른 것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즉 이미 갈라짐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빛이 왔는데도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고 합니다.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해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인간의 행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은 악에 속하였기 때문에 빛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본능적으로 예수가 싫다는 것입니다.

이유 없이 싫어요.

이는 자기 본성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 있지요.

또 어떤 사람은 받는 것 없어도 좋은 사람이 있어요.

미운 사람은 이유가 없어요.

그냥 미워요.

꼴 보기 싫어요.

 

빛과 어둠은 본성이 다르기 때문에 싫어 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악에 속한 자들은 빛을 미워하고 빛에게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자기 행위가 드러난다는 것은 자기 본질이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싫어함으로서 하나님의 원수임이 드러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어둠에 속한 자들은 자기는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요.

다만 속이고 있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무덤가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지요.

그 때 귀신들이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왜? 우리 때가 아직 안 되었는데 왔느냐고?

귀신들도 예수님이 심판주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 마지막 불 못에 들어갈 심판 때가 안 되었는데 이렇게 일찍 와 가지고 괴롭게 하느냐 라고 따집니다.

그래서 불 못엔 넣지 말고 저기 있는 돼지에게 라도 들어가게 해 달라고 합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알아요.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안하는지?

예수님을 믿는지 안 믿는지 알아요.

다만 남에게 노출하기 싫어서 스스로 속일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혼자 있으면 곤고하기 때문에 믿음을 만들려고 분주하게 움직여요.

열심들이 대단해요.

난 믿음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최면에 빠지는 거에요.

엄청 믿음이 좋은 것처럼 행동을 해요.

이는 안 믿어지기 때문에 외부에서 믿음을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고정화 시키려고 해요.

자기가 정해 놓은 법에 따라서 그 법에 준하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못하면 믿음 없는 것으로 스스로 자책해요.

 

그래서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끌어 올리려고 더욱 더 열심을 내게 됩니다.

마치 방학숙제 안다가가 개학 때가 되어 하룻밤에 몰아서 하듯이 합니다.



특별 작정기도하고,

작정하여 성경을 보고,

작정을 하여 전도를 하곤 합니다.


좌우지간 특별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이벤트성 신앙생활을 좋아해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 싫어해요.

 

마치 종들에게 일하지 말라고 하면 불안해하는 것과 같아요.

종들은 일할 때 기쁘지 일하지 말고 놀라고 하면 두려워해요.

종의 본성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다 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에 속한 자들의 특징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싫어해요.

왜?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싫어하느냐 하면 십자가가 인간을 부정하면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본능은 남에게 인정받는 것을 좋아해요.

그런데 십자가는 인간을 죄인으로 몰아붙여요.

그러니 기분 나쁜 겁니다.

왜?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느냐? 라고 반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배척당한 것은 그들을 죄인이라고 몰아 세웠기 때문입니다.

자신들과 세리와 창기들을 한 묶음으로 대하는게 기분 나쁘다는 겁니다.

이렇게 예수를 싫어하고 자기 행위를 자랑하는 것은 모두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진리에 속한 자는 빛으로 나아온다고 합니다.

즉 예수님 앞으로 나온다는 말입니다.

 

21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입니다.

 

예수 앞에 나아오는 이유는 자신이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이 믿게 해 주신 것을 증거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런 믿음이 하나님께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영접하게 한 것이 하나님이라고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로라는 것을 증거하려고 해요.

이는 어둠에 속한 자들과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어둠에 속한 자는 자가 자랑하기에 바쁜데,

빛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렇게 대조적인 모습의 삶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결과로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빛에 속한 자는 예수님을 자랑하고, 어둠에 속한 자는 자기를 자랑합니다.

예수를 자랑하는 그대가 신앙의 챔피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믿게 해 주신 그 은혜를 찬미합니다. 세상 끝날까지 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예수님을 자랑하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하늘빛사랑 blog https://blog.daum.net/day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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