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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요한복음 강해) 16강. 놋 뱀과 예수님 십자가 <요 3:13-15>

by coroa 2022. 8. 18.

16강. 놋 뱀과 예수님 십자가 <요 3:13-15> :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4)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6강. 놋 뱀과 예수님 십자가 <요 3:13-15>

요 3:13-15=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정낙원 목사

 

하나님께서 벌리시는 일은 인간의 지혜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는 육으로는 알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시는 또 다른 이유는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져 있다는 것을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을 비켜가는 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 자체도 그래요.

인간들은 살고자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은 인간들을 죽이고자 찾아오십니다.

 

동상이몽이라 할 수가 있지요.

생각이 다른 상반된 만남이니까요.

서로의 만남이 극과 극으로서의 만남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충돌이 일어나겠지요.

맞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충돌이 일어난 현장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충돌한 곳입니다.

 

하나님은 살리려고 다가 왔는데 인간들은 죽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왔는데 유대인들은 허문다고 본 겁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은 인간 나라에선 저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진주로 비유하고 인간을 돼지로 비유하였습니다.

진주란 값지고 귀한 보물입니다.

그런데 그 귀하고 값진 보물을 돼지에게 주었는데 밟고 찢었다고 합니다.

돼지에겐 구정물이 보물이지 진주가 보물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선 분명히 인간들에게 예수라는 보물을 보내주셨는데 인간들은 죽여 버렸어요.

그럼 이 보물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겐 미움으로 보입니다.

 

지금 인간은 죄로 인하여 죽은 자들입니다.

인간은 죄라는 유전자를 안고 있기 때문에 죽습니다.

강건하면 7,80년을 살고 많이 잡아 100년을 산다고 하여도 결국엔 죽게 되어 있습니다.

죽음을 모르면 죽음이 두렵지가 않은데 죽음을 알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죽지 않을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어요.

이 영원한 생명을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기 원합니다.

인간들은 그 생명을 몰라요.

당장 눈에 보이는 생명만 생명인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생명은 거룩하기 때문에 죄인의 몸이 감당을 못합니다.

죽을 몸은 영생을 담지 못해요.

마치 새 술을 헌 부대가 감당하지 못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이 주어질 때는 새 몸을 만들어서 주세요.

이걸 거듭남이라고 해요.

새 몸은 헌 몸을 죽이고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영생을 받으면 겉 사람은 후패해 지게 되어요.

 

하나님이 뚜껍아! 뚜껍아! 새 집 줄게! 헌 집 다오! 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뚜껍이가 헌 집을 안주려고 해요.

헌 집이 날아가면 모든 게 끝장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강제적으로 헌집을 빼앗고 새 집을 주시는 일을 단행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쳐들어오시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면 지금까지의 인생은 종말을 맞게 됩니다.

 

이는 마치 “아브람”이라는 헌 집을 빼앗고,“아브라함”이라는 새 집을 주는 것과 같아요.

“야곱”이라는 헌 집을 빼앗고,“이스라엘”이라는 새 집을 주는 것과 같아요.

“사울”이라는 헌 집을 빼앗고,“바울”이라는 새 집을 준 것과 같습니다.

“시몬”이라는 헌 집을 빼앗고,“베드로”라는 새집을 준 것과 같아요.

 

이는 모두 “땅에 생명”을 빼앗고,“하늘에 생명”을 주시고자 함입니다.

 

죽은 자에게는 자신이 죽은 자라는 것을 모를 때는 산 자처럼 대하여 주면 안 되고 죽이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기가 죄인 인줄 모르고 기고만장하는 자에겐 죽임으로서 자신의 실체를 알려 주어야 합니다.

 

죄인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은 죄인의 본질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넌 죄인이고 죽을 놈이야!”

“넌 저주 받을 놈이야!” 라고 알려 주는 것입니다.

 

온 몸에 암덩이가 펴져서 죽어야 할 환자에겐 당신은 두 달 후에 죽습니다! 라고 알려 주는게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른 말을 하면 인정머리 없다고 해요.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인정머리 있는 분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다가 오실 때 십자가를 앞세우고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앞세우고 온다 함은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서 출애굽을 시킵니다.

바로가 하나님께 대적하자 하나님은 온 애굽엔 재앙을 내리면서도 이스라엘이 사는 고센 땅은 재앙 없이 평온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런 광경을 목도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은“참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따라 출애굽을 합니다.



 기쁘게 모세를 따라 애굽을 나왔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시내산에 당도 할 때까지“야! 우리 하나님 참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좋으신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었다고 마음이 설렜습니다.

 

그런데 시내산에 나타난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이 생각하던 하나님이 아닙니다.

시내산에 강림하신 하나님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겁을 합니다.



애굽에 바로를 징벌하던 그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무서우니 모세가 중간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해 달라고 합니다.

 

출 20:18-19= “뭇 백성이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19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시내산에서 나타난 하나님은 애굽을 열 가지 재앙으로 징벌하시면서 이스라엘은 보호해 주셨던 그 좋으신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마치 바로를 죽이듯이 이스라엘을 죽이려고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자신들을 지켜 주실 때는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야! 저런 하나님이라면 내 인생을 맡겨도 좋겠구나!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따라 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에 나와서 알게 된 하나님은 자신들을 죽이는 무서운 하나님입니다.

저런 하나님을 따라가다간 죽을 것이 뻔하다는 생각을 하고 급기야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데모를 합니다.

 

하나님에게 속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라면 애당초 따라 나오지 않았을 것이며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바로를 섬기는 것이 더 좋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돌을 던지며 항의를 합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여기에 인도했느냐고 아우성입니다.

애굽이 그립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불평과 원망의 연속이었습니다.

 

애굽에 음식을 안 준다고 불평하고,

왜? 고기를 안 주느냐고 불평하고,

물이 없다고 불평하고,

길이 힘들다고 불평하고,

더우면 덥다고 불평하고,

추우면 춥다고 불평하고 좌우지간 이래도 불평 저래도 불평이었습니다.

 

인간이란? 뭘 해도 불평하는 존재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 곳이 광야입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가 광야에서 낱낱이 다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은 자기 몸이 힘들면 하나님도 필요가 없어요.

누구든지 자기를 괴롭히면 죽이겠다고 덤빕니다.

 

마치 바로가 여호와가 누군데! 라고 했듯이,

지금 이스라엘이 그러합니다.

자신들을 불행하게 하는 자라면 그가 누구이든지 원망의 대상일 뿐입니다.

반대로 자신들에게 잘 해주면 최고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행동은 죄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 관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 신이 누구이든지 오로지 자기 등 따습고 배불리게 해 주면 됩니다.

내 가정, 내 가족, 내 직장, 내 나라만 지켜주면 되요.

오로지 나! 나! 뿐입니다.

 

그게 부처이든 마귀이든 예수이든은 중요하지 않아요.

무당이면 어떻고,

중이면 어떻습니까? 나만 행복하게 된다면,,,,,

이게 죄인의 신관(神觀)입니다.

 

마치 이 시대 교인들과 같습니다.

이 시대 교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새 언약이 무엇이고 옛 언약이 무엇인지 몰라도 돼요.

십자가는 몰라도 되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왜? 죽었는지 관심 없어요.

 

오직 한 가지 자기 몸 편하게 해주면 되요.

오로지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면 됩니다.

그 예수가 옳은 예수이든지 다른 예수이든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육신적으로 행복하면 그것으로 땡입니다.

마치 배부르면 행복해 하는 돼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시대와 환경을 초월하여서 인간의 본성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과거 이스라엘도 배부르게 해주면 만사 오케이였고,

지금도 배부르게 해 주면 만사 오케이입니다.

 

지옥 갈 백성이야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떻겠습니까? 마는 천국 갈 백성이 만약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면 고쳐 주어야 하겠지요.

이런 정신으로 천국엔 데리고 갈 순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나는 없고 오직 예수님만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이야 돼지처럼 잔치 날 바베큐 파티하기 위해 살만 찌우면 되지만,

자기 백성들은 불고기 파티 할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어린양의 신부가 되어서 살아야 하니 생각을 고쳐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에게 시비를 겁니다.

날마다 싸움을 겁니다.

너 그따위로 생각할래!

 

자신들이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 어떤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에서 감사하며 살게 됩니다.

은혜를 알려면 처절한 실패를 맛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부르심이 감사가 되려면 자신들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로 빼낸 것은 예수님의 신부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신부가 되려면 예수님의 고마움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고마움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고마움을 모르고서는 아버지 집에서 살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에 빼내서 너희들은 이런 놈들이라고 알려줍니다.

자신들이 애굽의 바로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종자들이라고 알려 준 것입니다.

바로와 같다면 이미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이 내릴 때 같이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죽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광야에 나와서는 자신들이 산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고 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 원망과 불평은 언제 나옵니까?

자기 생각대로 안 될 때 터져 나오지요.

지금 이스라엘이 자기 주제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한 약속대로라면 이스라엘은 이미 죽었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지킬 수 있느냐 라고 물어 보라고 했습니다.

 

만약 율법을 지키면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죽이겠다고 했어요.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모세에게 율법을 지키겠다고 하나님과 계약을 맺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양푼이에 피를 담아서 이스라엘에게 뿌리면서 피의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는 누구든지 약속을 어기면 죽임을 당한다는 계약입니다.

계약을 맺고 모세가 하나님께 보고 하러 시내산에 올라가서 계약한 내용을 돌판에 적어서 내려 왔는데 산 아래서는 이미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섬겨 하나님과 한 약속은 파기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약대로 죽이기 시작 합니다.

모세가 혼비백산하여 자기 생명을 담보로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범케이스로 삼천 명만 죽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죽임을 유보당한 채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이미 죽은 목숨들입니다.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죄인들이 적반하장으로 기고만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주제도 모르고 찬밥 더운밥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매사에 불평하고 원망하며 사사건건 하나님께 대적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에게 난 행복하게 잘 살아야 되는데 왜?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 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모세에게 다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하면서 돌을 던집니다.

이는 마치 부모를 폭행하는 패륜아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원망하는 이스라엘에게 불 뱀을 보내서 물어 죽게 하셨습니다.

 

민 21:4-9=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 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6 여호와께서 불 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 본 즉 살더라”

 

이스라엘이 불 뱀에게 물려 죽은 사건은 하나님께서 애굽을 징벌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살려 달라고 합니다.

모세에게 잘못했으니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불(놋) 뱀을 장대에 달아서 쳐다보라고 합니다.

놋 뱀을 쳐다보는 자는 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늘나라 백성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를 하면서 이 놋 뱀 사건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뜬금없이 광야의 놋 뱀 이야기를 하시면서 예수님도 놋 뱀처럼 죽임당하여 장대에 매 달릴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놋 뱀처럼 높이 달리면 자기 백성들을 하늘로 이끈다고 합니다.

 

니고데모 입장에선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아니 이스라엘의 패역함과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무슨 의미가 있길래,

놋 뱀과 예수님의 죽으심을 연관시켜서 말씀하시고 계신 것인지 궁금하지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구약에선 불 뱀에 물린 자들을 놋 뱀을 쳐다보게 하여서 살려주었듯이 ,

신약에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심으로서 죄인을 살려 내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난시간 우리는 하늘에 일은 땅의 지혜로는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어리석어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철저하게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 찾아내기 위함이라고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는 미련하게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미련하게 보여야 육에 속한 자들이 안 따라 와요.

 

그럼 구약의 놋 뱀 사건이 발생한 시간으로 돌아가 봅시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뱀에 물리면 독을 제거하기 위해서 치료를 해야 합니다.

뱀에 물렸으면 빨리 독을 없애거나 해독제를 먹게 하는게 급선무입니다.

 

이스라엘을 문 불 뱀은 가장 강력한 독을 가진 뱀입니다.

너무 독이 강하기 때문에 물리면 기절하고 심장이 마비가 되어서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불 뱀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보내서 죽도록 하고 계십니다.

 

애굽에 재앙에서도 살았고!

홍해 바다에서도 살았는데!

이제 불 뱀에 물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세에게 빨리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급하긴 급했나 봅니다.

돌을 던지고 원망할 때는 언제이고 도와달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좌우지간 인간의 간사함과 자기 몸뚱아리 끌어안고자 하는 죄의 본성이 그대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 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 달아서 뱀에 물린 자들에게 쳐다보면 살게 된다고 알려 주라고 했습니다.

 

이건 인간의 상식으로는 유치하고 저급한 코미디 같은 못 믿을 내용입니다.

제 정신 가진 사람이라면 모세의 말에 예! 라고 대답 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어느 인간이 뱀에 물렸는데 장대에다 뱀 모양을 만들고 쳐다보면 산다고 하겠습니까?

이건 인간의 상식이나 머리로서는 나올 수 없는 치료법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웃지 못 할 코미디 같은 일을 순종한 사람은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민 놋 뱀을 장대에 단 사건은 인간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사건입니다.

아니 이 말 같지 않은 일이 능력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지금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보니 그렇다고 이해를 한다지만 그 당시 상황이 지금 벌어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우리도 하나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라고 항의 할 것이 뻔합니다.

왜냐하면! 그 조상의 그 자손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모양은 다르지만 이러한 방법으로 일을 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눈이 어두워서 알아보지 못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불 뱀을 보내서 물게 하는데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들 상식으로는 하나님이 하는 일을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인간 생각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을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상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가 가능하다면 성령으로 거듭날 필요가 없습니다.

 

앞선 시간에 거듭나는 것을 물 세례와 성령 세례로 살펴보았습니다.

물 세례는 죽음이고,

성령 세례는 부활이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이 먼저임을 잊지 마십시오.

 

아까 제가 뭐라고 했지요.

죄인은 죽이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지요.

죄인이 죽지 않으면 자기 생각을 꺾지 않아요.

죽지 않은 자에게 하나님이 일하면 자꾸만 죄인의 생각으로 판단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죽이는 일을 먼저 해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끄집어 낸 것은 죽이고자 함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살려 준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니 사사건건 충돌이 일어나는 겁니다.

아니 물도 없고 양식도 없는 곳을 끄집어 내 놓은 것은 죽으라는 것이지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왜? 원망했습니까?

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니 왜? 떡을 안 주느냐! 물을 안 주느냐! 힘들게 하느냐! 라고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아야 된다고 하면 만사가 불평이 될 수 밖에 없어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하나님은 가시와 엉겅퀴를 나게 했습니다.

이는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고통을 원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고통스럽게 하셨고, 인간은 고통스러워하지 않으려니 원망할 수 밖에 없어요.

 

광야로 몰고 가신 것은 하나님을 원망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저주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넌 죽어야 하는 자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이 가장 죄인다운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아니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성상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본성과 거스리는 방법으로 인간을 다스려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거짓말을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니 너희들은 날 사랑하지 않고 원망하여야 하는 존재들이라고 몰아갑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죽도록 미워하여야 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과 원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본질을 토해 내라고 이스라엘을 광야 길을 뺑뺑이 돌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 바다를 건너고 나서 마라의 쓴 물 사건을 만나지요.

 

출 15:22-26=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쌔 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마라의 쓴물을 주는 것은 속에 든 것을 토해 내라는 것입니다.

죽으라고 준 물입니다.

그래서 죽겠다고 모세를 원망하자 한 나무를 가지고 단물로 만들어 주었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마라의 쓴 물 사건으로 법도와 율례를 정하셨다고 합니다.

 

율례와 법도란? 앞으로 이런 방식으로 일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쓴 물을 주어서 토해내게 하시고 난 후에 단물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즉 죽이고 살려 내는 방식으로 일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시내산에 당도하여 율법을 주십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너희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라는 것을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본성과 거스리는 것들로만 채워져 있어요.

인간들이 하기 싫은 것은 하라고 하고,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은 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러분 인간이 가장 쉽고 재미있어 하는 게 무엇인줄 아세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하는 것이 무엇인줄 아세요.

그건 죄 짓는 일입니다.

 

인간은 죄 짓는 일은 몇 날 며칠을 밤새워 가면서 해도 지겨워하지 않아요.

반면에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라고 멍석을 깔아 놓아도 안해요.

재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너희 들은 청개구리 같은 놈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자는 지옥에 가고!

율법을 못 지킵니다! 라고 하는 자는 천국에 가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자는 지옥에 가고!

하나님을 사랑 할 수 없다고 하는 자가 천국에 가요.

 

이스라엘에게 있어 광야란 그 속에 있는 것들을 다 토해 내라는 곳입니다.

즉 인간 속에 있는 것들을 다 드러내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분냄과 악함과 원망과 불평을 다 쏟아내라고 합니다.

 

성도가 살아가는 세상이 광야와 같은 곳입니다.

늘 우리는 불평하고 원망할 일들만 일어나요.

 

하나님을 사랑해야지 하는 것은 마음뿐이지 실제로는 하나님을 싫어해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화를 내실까봐서 립 서비스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안 속습니다.

뭐! 너희가 날 사랑한다고 웃기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너는 너 밖에 모르는 자”라고 성질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라고 실토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놋 뱀을 쳐다보라는 것은 넌 날 싫어하고 불평하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넌 나에게 돌을 던진 놈이라는 것입니다.

놋 뱀을 쳐다보라는 것은 살고자 하지 말고 죽으라는 소리입니다.

 

죄인이 살겠다고 하는 것이 염치없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느냐 라는 말입니다.

놋 뱀을 쳐다보면서 자기가 죽어야 할 자라는 것을 아는 자가 놋 뱀을 쳐다보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아는 자가 됩니다.

 

놋 뱀을 쳐다보면서“살려 주세요”라고 하는 자는 아직도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는 악당입니다.

 

여러분 진짜 자기가 죄인인줄 알면“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해야 해요.

“주님 날 구원해 주세요” 라고 하는 자는 천국가면 안 되어요.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라고 하는 자가 천국엘 가야해요.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가는 사람의 차이는

천국에 가는 사람은 어떻게 나 같은 죄인이 천국엘 가 난 지옥에 가야 맞지 라고 하고,

지옥에 가는 사람은 나 같은 사람이 천국에 안가면 누가 가느냐 라고 해요.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난 살아야지” 가 아니라 “난 죽어야 해” 라고 해요.

“난 살아야지” 라는 자는 죽어야 할 자이고,

“난 죽어야 해” 라고 하는 자가 살아야 할 자입니다.

 

“마귀는 넌 살아야 돼!” 라고 하고,

“성령은 넌 죽어야 돼!” 라고 해요.

 

성도를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끌고 가는 것은 속에 있는 것을 다 토해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압박을 가해서 우리 속에 죄성을 드러내라고 합니다.

죄를 토해내게 하시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은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고 틀어지게 만드세요.

 

죽음 앞에서 베드로처럼 주를 저주하는 게 인간다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베드로가 저주하도록 환경을 조성하신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닭소리만 들으면 회개 하였다고 합니다.

어이쿠! 난 예수님을 저주한 놈이야!

이런 인간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꼴값을 떨고 있으니 이 은혜를 어찌 감당하겠느냐고 감사하고 감격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을 소개 할 때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한 것은 자기를 비하하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하여 하는 말입니다.

 

성도가 신앙생활 하면서 넘어지고 깨어진 흔적들을 없애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 앞에는 여호수아처럼 더러운 옷을 입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저주한 흔적을 없애려 하지 마세요.

탕자로 살아야지 맏아들로 살아선 안 돼요.

탕자는 천국에 가지만 맏아들은 지옥에 갑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은혜를 알지만 맏아들은 아버지의 은혜를 몰라요.

그러니 맏아들은 아버지 집에 살아도 감사가 안 나오는 겁니다.

그러나 탕자는 아버지 집에 산다는 것 자체가 감사거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면 안 됩니다.

 

놋 뱀을 쳐다보라는 것은 넌 누구냐?

넌 널 아느냐? 라고 물으시는 겁니다.

 

넌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고백을 하게 하시는 분이 참 하나님이십니다.

성도를 고난으로 몰아넣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실토케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장대에 달린 놋 뱀처럼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하늘로 이끄신다는 것은 자신이 예수를 죽인 자라는 것을 아는 자를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는 말입니다.

 

지금부터 아주 아주 중요한 이야기이니 집중해서 들으세요.

 

예수님께서 지금 이 놋 뱀 이야기를 바리새인인 니고데모에게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죄인인 줄 몰라요.

하나님 말씀을 너무나도 잘 지켰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인줄 몰라요.

마치 탕자 비유에서 맏아들처럼 아버지의 명을 어김없이 다 행하였기 때문에 효자 중에 효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즉 놋 뱀을 쳐다 볼 이유도 없지요. 

놋 뱀은 자기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돌을 던진 자라는 것을 아는 자만이 쳐다 볼 수가 있어요.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누가 불 뱀에 물렸습니까?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입니까?

하나님께 원망하고 돌을 던진 사람입니까?

하나님께 원망하고 돌을 던진 죄인들이지요.

 

그럼 놋 뱀을 장대에 매단 것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죄인들이지요.

하나님을 원망한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놋 뱀을 장대에 매 단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만 쳐다보라고 한 것입니다.



참 이상하지요.

아니 죽여도 시원치 않을 인간들을 위해서 놋 뱀을 매 단 것입니다.

 

놋 뱀을 쳐다보고 나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감사하겠지요.

그럼 불 뱀에 물리지 않은 사람들은 감사할까요?

안 할까요?

 

당연히 감사할 이유가 없지요.

도리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혀를 찰 것입니다.

아마도 놀고 있네! 라고 비아냥거릴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고 하니 웃기고 있네! 라고 하면서 비웃은 것과 같아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참으로 재미있지요.

무섭지요.

 

인간들 같으면 누구를 살리겠습니까?

원망한 놈들을 살릴까요?

말 잘 듣는 놈들을 살릴까요?

당연히 말 잘 듣는 놈을 살리지요.

 

여러분 같으면 누구를 좋아합니까?

말 잘 듣는 사람입니까?

말 안 듣는 사람입니까?

당연히 말 잘 듣는 사람이지요.

 

자식도 말 잘 듣는 자식을 좋아 합니까?

말 안 듣고 사고만치는 자식을 좋아합니까?

부모 자식 간에도 자기를 귀찮게 하는 놈은 싫어요.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입니다.

미운 놈은 있는 것도 빼앗아서 말 잘 듣는 놈 주고 싶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패륜아 같은 놈들을 위해 놋 뱀을 매 달았어요.

이게 인간과 하나님의 차이입니다.

천국엔 누구를 데리고 가느냐! 하면 못난 놈들만 데리고 가요.

잘난 놈들은 전부 지옥으로 보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잘난 놈들은 자기가 죄인임에도 죄인인 줄 모르고 잘난 척하기 때문입니다.

잘난 척 하는 놈들을 천국에 집어넣으면 감사하지 않고 자기 자랑만 해요.

그러면 아들의 영광이 침해를 받게 되요.

 

천국은 어린양이신 아들만 영광을 받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아들만 영광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 죄인들만 천국으로 끌어들이시는 것입니다.

넌 내 아들을 죽인 놈인데!

살려 준 거야! 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연히 주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가 나와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마음속으로부터 자동으로 나와요.

 

그럼 놋 뱀을 장대에 단 것은 누구를 살리기 위함입니까?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죄인이지요.

 

탕자입니까?

맏아들입니까?

탕자이지요.

 

바리새인들입니까?

세리와 창기들입니까?

세리와 창기들이지요.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는 자는 절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쳐다보지 않아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들만 쳐다보게 되어 있어요.

 

불 뱀에 물리지 않으면 장대에 매단 놋 뱀이 고맙지가 않아요.

불 뱀에 물렸다는 것은 하나님 뜻에 거역하였다는 것입니다.

죄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얻어터진 겁니다.

불 뱀에 물린 것은 말 안 듣다가 얻어터진 흔적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았기에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한 겁니다.

그래서 자신은 오직 십자가만 쳐다보고 자랑한다고 한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고맙지가 않아요.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그만큼 십자가의 가치와 의미를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십자가만 자랑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저는 과거에 율법에 특심 할 때는 내가 죄인인줄 몰랐어요.

왜냐하면! 그땐 맏아들처럼 아버지 명을 순순히 받들었거든요.

 

교회 충성 잘하지요.

헌금 잘하지요.

전도 잘하지요.

기도 잘하지요.

성경 많이 알지요.

맨 날 좋은 생각만 하고 살지요.

내가 얼마나 기특한지 몰라요.

 

그러니 누가 죄인이라고 하면 기분 나빠요.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는 교인이기 때문에 상투적으로 하는 이야기일 뿐이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보다 내가 한 일이 더 자랑스러웠어요.

 

그런데 복음을 알고 난 후에 내가 그렇게 큰 죄인인줄 몰랐어요.

아주 나쁜 인간이라는 것을 비로서 알게 되었어요.

내가 사기꾼이고 위선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 보이기 시작하니 예수님이 달리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과거엔 십자가가 추상적으로 느껴졌는데 이젠 실제로 다가와요.

십자가가 자랑스럽고 고마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내 입술에서 십자가가 증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자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젠 누가 십자가를 우습게 여기면 화가 나요.

아내도 자식도 십자가를 모르면 화가 나요.

이젠 십자가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십자가만 자랑하면 비웃은 인간들이 있어요.

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십자가를 이야기 하느냐 라고 해요.

 

성경엔 십자가만 있는 것이 아니고 부활도 있고 성도의 삶도 있대요.

구원 이후의 삶을 가르쳐야 된대요.

성도들을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살도록 해야 한다고 해요.

그래서 지금은 교회를 개혁하고 성화를 가르쳐야 할 때라고 해요.

지역사회에서 교회가 인정받도록 해야 한다고 해요.

그래야 교회가 부흥 된대요.

 

이 사람들은 교회가 사람 끌어 모으는 곳인 줄 알아요.

사람만 많이 모이면 하나님이 영광 받는대요. 


말이야 맞이요.

그런데 그게 어떤 삶이냐입니다.

윤리 도덕이냐?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냐? 입니다.

 

며칠 전에 극동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어요.

무너진 기독교 위상을 회복하자는 토론회를 개최한다고 와 달래요.

교회의 권위가 땅 바닥에 떨어졌대요.

 

그래서 교회가 부흥이 안 된대요.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떨어진 기독교의 권위를 회복 할 수 있는지 토론의 장을 마련하였대요.

그래서 참석하셔서 고견을 말해 달래요.

 

이 사람들은 정신이 딴데 가 있어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냥 예수 이름 팔아서 먹고 사는 더러운 창녀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 기독교를 망신시키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몰라요.

하나님이 일부러 장로 대통령을 세우고 기독교를 망신시키는 줄을 몰라요.

 

성도의 구원 이후의 삶이란 바르게 사는 게 아니에요.

구원 이후의 삶이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서만 구원의 능력이 나온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피를 증거하라고 성도를 세상에 둔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 것이고,

성도의 존재 목적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제발 부탁 하건데 탕자의 비유에서 맏아들이 되려고 하지 마세요.

탕자로서 아버지에게 빚진 자로서 사세요.

하루 하루를 감사하며 사세요.

 

보리밥을 주던지 라면을 주던지 감사하며 사세요.

먹을 것 입을 것 족한 줄 알고 사세요.

찬 밥 더운 밥 따지면 탕자가 아니라 맏아들입니다.

자신이 탕자라는 것을 알면 그 무엇이든지 감사가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불평이 쑥 들어갑니다.

십자가를 잊는 순간 불평이 쏟아져 나오고,

십자가를 기억하는 순간 감사가 쏟아져 나옵니다.

 

감사와 원망은 한 끝 차이입니다.

성령께서 왜? 초지일관 고집스럽게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게 하는지 그 이유를 아시기 바랍니다.

 

그 속에 당신의 행복이 있습니다.

십자가 이외에 다른 행복을 찾고자 한다면 당신은 가짜입니다.

누구든지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부디 장대에 달린 놋 뱀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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