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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요한복음 강해) 17강. 하나님의 사랑 <요 3:16-18>

by coroa 2022. 8. 19.

(요한복음 강해) 17강. 하나님의 사랑 <요 3:16-18>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7강. 하나님의 사랑 <요 3:16-18>

요 3:16-1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

 

 

-.정낙원 목사

 

지난 시간 우리는 놋 뱀을 장대에 달아서 불 뱀에 물린 죄인들을 살려 내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살펴보았습니다.

인간의 마음으로는 자신에게 원망하고 대적하는 죄인을 위하여 죽여야 정상입니다.

그럼에도 놋 뱀을 장대에 달아 치료케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놋 뱀을 장대에 높이 단 것은 불 뱀에 물린 자들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장대에 달린 놋 뱀은 자신이 하나님을 원망한 죄인임을 아는 자만이 쳐다봅니다.

놋 뱀은 죄인에게만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로보건데 하나님은 죄인을 살리기 위하여 놋 뱀은 준비하신 것이 됩니다.

 

놋 뱀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장대에 달린 놋 뱀은 곧 자신이 십자가에 죽는 것으로 말해주셨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은 죄인을 위하여 죽으신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역설적인 일을 지금 예수님은 자칭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바리새인인 니고데모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난 너 같이 잘 난 놈들을 위해서 오지 않고 저기 못난 죄인들을 위해서 왔다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놋 뱀 이야기로 한다면 바리새인인 니고데모는 의인이라서 장대에 달린 놋 뱀을 쳐다 볼 이유가 없습니다.

그토록 의로운 사람들이 어찌 하나님께 원망할 수 있었겠습니까?

원망과 불평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당연이 놋 뱀과 같이 십자가에 달리실 예수님도 쳐다 볼 이유가 없겠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게 하신 것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의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밥 먹듯이 거역하는 세리와 창기들 같은 죄인들을 위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속은 죄인만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들에게 아무리 예수님을 믿으라고 해도 믿지를 않습니다.

워낙 잘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요.

 

그래서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들의 친구가 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의인을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지 않고 죄인을 위하여 보내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불순종하고 원망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게 하셨을까요?

 

마땅히 저주받아야 할 미운 죄인을 도리어 치료하고 살려 주신 것은 하나님 앞에 빚진 자로 남겨 두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빚진 자로 천국에 데려 가고자 하십니다.

못난 놈들을 천국에 데려 가시고자 함입니다.

 

그 이유는 천국에서 유구무언으로 만들어 일체의 자기 자랑을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천국엔 빚진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자기 자랑이 있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어린 양이게만 영광을 돌리는 자만이 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은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 자들을 철저히 배격하겠다는 뜻입니다.

복음은 “난 할 수 있어!” 가 아니라 “난 할 수 없어!” 로 만듭니다.

 

자기의 가능성을 믿는 자는 신자가 아닙니다.

신자는 철저하리만치 자기에겐 의가 없고 죄만 있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불쌍히 여겨 주시지 않으면 설 수가 없음을 아는 자가 신자입니다.

 

복음을 몰랐을 땐 괜찮은 인간인줄 알았는데!

복음을 알고 나니 자신이 형편없는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이게 은혜 받은 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은혜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은 증거는 내가 죄인 중에서도 괴수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 받는다는 것이 신령한 복임을 압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신 복이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 5:3-1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팔 복은 세상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팔 복은 오로지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에게만 복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지면 모든 것이 감사가 됩니다.

 

성도에겐 감사가 아닌 것이 아무도 없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깨닫는 성도에겐 범사가 감사입니다.

 

저 역시도 과거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땐, 내가 율법에 너무 충실하여 바리새인처럼 잘난 놈으로 있었을 땐 구약 이스라엘의 범죄를 보고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가 라며 배은망덕한 놈들이라고 비분강개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죄인임을 알고 난 후에는 구약 이스라엘의 범죄가 곧 나의 범죄로 보여 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나니 내가 바로 불 뱀에 물린 죄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범죄 현장에 내가 있음이 보이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과거엔 저런 인간들은 저주 받아 마땅하다고 했는데, 이젠 주여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라고 하게 됩니다.

참으로 인간이 간사스러운 것은 구약 이스라엘이 남이라고 생각할 땐 죽이라고 했는데,

내가 구약 이스라엘이라고 생각되어지니 주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라고 하게 됩니다.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남에 이야기가 되기도 하고 내 이야기가 되기도 합니다.

남의 이야기가 되면 법으로 대하지만 내 이야기로 보이면 은혜로 대하게 됩니다.

 

성경이 내 이야기가 될 때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고맙고 감사한 복음이 됩니다.

비로서 나의 주시고 나의 예수님이 됩니다.

이처럼 사람이 성경을 어떻게 보고 읽느냐에 따라서 그 말씀에 의미는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기독교 통계자료에 의하면 교인들이 가장 많이 암기하는 성경 구절이 요한복음 3:16절이라고 합니다.

 

요 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주일학교 때 필수적으로 암송하던 구절입니다.

그만큼 교인들이 오늘 분문 말씀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많은 선교단체들도 요한복음 3장 16절을 전도 구절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선교단체들이 전도하는 말을 들어보면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라고 합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어서 행복하라고 합니다.

이는 마치 “당신은 행복하셔야 합니다” 라는 말입니다.

 

선교단체들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해서 독생자를 보내 영생을 얻게 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합니다.

예수를 영접하기만 하면 당신은 하나님 자녀가 된다고 전도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들으면 너무도 다정다감한 듣기 좋은 말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가지고 전도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마치 인간은 당연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하는 자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사람들에게 지옥이니, 저주니, 멸망이니 라는 부정적인 말은 비 성경적인 말로 치부되어 버립니다.

오죽 했으면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데 어떻게 지옥을 만들 수 있느냐? 라고 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성경을 깊이 있게 살펴보면 이들이 말하는 전도 방법이 성경과 상반되는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아무나 예수를 믿을 수 없도록 해 놓았습니다.

인간이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조치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어요.

 

예수는 아무나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지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는 자만이 믿을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밀로 말하는 것은 누구나가 알아선 안 되기 때문입니다.

꼭 알 사람만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밀인 겁니다.

 

그럼에도 선교단체들은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인간 입장에서 문자적으로만 이해하여서 전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인간 입장에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인간이 예수를 믿을 수 없도록 조치 해 놓으신 하나님이 너무도 야속한 하나님이 되고 맙니다.

몰인정한 하나님입니다.

이런 현상은 모두가 성경을 아전인수(我田引水)식으로 자기 입맛에 맞도록 문자풀이 식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을 미리 아시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신 겁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케 한 것은 인간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을 금지키 위함입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하여야 합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케 해 주십니다.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를 아는 것입니다.

도대체 성경을 왜 주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주셨다는 것은 성경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 없이도 인간들이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었다면 구태여 성경을 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성경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신 것은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일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를 성경은 죄라고 합니다.

죄가 하나님 입장에서 판단하지 않고 인간 입장에서 판단하게 만들었습니다.

죄가 인간을 세상의 중심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죄의 눈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인간 중심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인간을 도와주고 행복하게 해 주는 신은 참 하나님이 되고 맙니다.

반대로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신은 마귀가 됩니다.

 

그래서 죄인들 세계에선 하나님과 마귀가 완전히 뒤 바뀌고 만 것입니다.

마귀를 하나님이라고 하고 하나님을 마귀라고 하고 있어요.

죄가 거짓 하나님 관을 심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성경 스스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성경이 자증하는 것이 무엇인가 알아야 올바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씀하고자 하는 핵심주제가 있습니다.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증거를 들어봅시다.

 

히 10: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예수님이 그럽니다.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내가 왔습니다!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대로 내가 왔나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루마리 책이란? 구약 성경을 말합니다.

그런데 두루마리 책에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이야기를 성경에 담아 놓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친히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고 증거해 주셨습니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도 구약 성경입니다.

구약은 장차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이런 분이 오실 것이다” 를 말하고 있다면!

신약은 “그 약속하신 분이 오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약속하신 분이 오셔서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것은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이야기가 성경의 중심사상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통해서 예수님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이야기 하지 않고 예수님을 이야기 하십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에게 모든 것은 맡기셨습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 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하여서만 드러내십니다.

왜? 하나님이 인간을 직접 상대하시지 않는 것입니까?

이는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면 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을 중보자로 세워서 인간을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말하는 하나님은 다 거짓 하나님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성경은 “하나님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중심사상을 놓치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놓치게 되고 대신 인간의 생각이 들어가게 됩니다.

 

베드로는 모든 성경이 성령에 감동으로 기록되어졌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억지로 풀지 말라고 했습니다.

즉 인간의 생각으로 이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망한 사람들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억지로 푼다는 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였다는 것은 하나님 입장에서 기록되어졌다는 말이고 예수님 입장에서 기록 되어졌다는 말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또한 그리스도 영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서는 올바른 성경해석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무슨 이야기라도 하나님 입장에서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를 상고하여야 합니다.

 

오늘 살펴 볼 본문 말씀도 하나님 입장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선교단체들이 말하듯이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라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알다시피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 속에서 거듭남의 이야기도 나왔고, 놋 뱀 이야기도 나왔고, 오늘 본문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중에 나온 말씀임을 간과치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 선교단체들의 주장대로 전도용으로 주신 말씀이 아니란 말입니다.

왜? 그런가요.

이는 거듭나지 않으면 예수님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에 핵심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게 본문을 이야기 하면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지 못해서 안달이 나신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제발 예수 좀 믿어 달라고 읍소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16절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는데 “이처럼” 사랑했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이라는 말은 앞서 어떤 내용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앞서 말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건 바로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불 뱀에 물린 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놋 뱀을 장대에 달게 한 사건입니다.

놋 뱀을 장대에 달았다는 것은 불 뱀을 죽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원망하는 자들을 죽이게 하려고 불 뱀을 보내 놓고선 그 불 뱀을 죽여서 하늘 높이 달아 놓고 쳐다보게 하여 살게 하셨습니다.

아니! 살려 줄 걸 왜? 죽도록 합니까?

불 뱀을 잡아 죽일 것을 왜? 보내서 물게 하십니까?

 

불 뱀 입장에서 보면 엄청 억울해요.

왜냐하면! 하나님 시키는 대로 하다가 죽임 당하였거든요.

하나님이 원망하는 놈들을 물어 죽이라고 해서 문 것입니다.

 

애당초 불 맴을 보내지 말던가?

불 뱀을 보내지 않았으면 장대에 달아서 쳐다보라고 할 일도 없었을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 뱀을 보내서 물게 하여 죽게 하고 불 뱀을 죽여서 장대에 달아 쳐다보게 한 것은 인간을 죽게 하는 실상을 폭로케 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을 문 불 뱀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을 거역케 한 마귀의 상징입니다.

즉 죄의 상징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범죄케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도록 하는 놈이 바로 마귀(불 뱀)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한 것도 다 마귀 짓입니다.

그래서 불 뱀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 놈을 죽이지 않으면 인간은 늘 하나님을 거역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인간 속에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한 것도 마귀가 그들을 가지고 놀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지고 노는 놈의 정체를 밝혀 준 것입니다.

그 불 뱀의 머리를 예수님이 박살내지 않으면 인간은 죽음에서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으로 불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게 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한번 해보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불 뱀 한 마리를 잡아서 달라고 하면 될 것을 왜? 하필이면 놋으로 뱀을 만들어 달라고 했는지 말입니다.

즉 불 뱀 중에 큰 놈을 한 마리 잡아서 장대에 달라고 하면 될 텐데 왜? 번거롭고 복잡하게 놋으로 뱀을 만들어 달라고 했을까요?

 

성경을 행간 읽기로 한번 상상을 해 보세요.

옆에선 불 뱀에 물려서 죽어가는데 모세는 놋을 불에 달궈서 망치로 두들겨 패서 뱀 형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의 이런 모습을 보고서 뭐라고 했을 것 같습니까?

아마도 십중팔구 이 영감탱이가 지금 뭐하고 있느냐?

사람이 죽어가는데 무슨 대장장이 놀이를 하고 있는가? 라고 힐난하였을 것입니다.

 

놋은 휘어지지 않고 부러져요.

놋은 너무 강해서 불에 달구지 않으면 부러집니다.

그래서 그냥 두들겨 패지 않고 불에 넣어 발갛게 달궈서 망치로 두들겨서 형상을 만듭니다.

망치로 두들겨 맞았다는 것은 심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누구 때문에 심판을 받았습니까?

바로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놋 뱀을 심판 하신 것입니다.

죄인에게 쏟아 부어야 할 심판을 놋 뱀에게 하신 것입니다.

놋 뱀을 장대에 달았다는 것은 죄인을 대신하여 심판을 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뱀이 아니라 놋 뱀이란 것입니다.

놋은 주석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을 놋으로 또는 주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니엘과 사도 요한은 성령에 감동으로 예수님을 보았는데 모두가 놋과 주석으로 된 발을 가지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단 10:4-6= “정월 이십 사 일에 내가 힛데겔이라 하는 큰 강가에 있었는데 5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정금 띠를 띠었고 6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계 1:13-16=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예수님께서 놋과 주석의 발을 같고 계신다는 것은 심판주라는 뜻입니다.

과거엔 십자가에서 죄인을 대신하여 심판을 당하셨지만, 재림 때에는 심판 주로 오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금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는 그 심판 당한 놋 뱀을 예수님 자신의 이야기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불 뱀에 물린 자들을 살리기 위해서 불 속에 들어가 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예수님께서 처절한 심판을 당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대신하여서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원망하는 이스라엘과 같은 죄인(성도)들을 위해서 예수님을 심판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의 감동으로 이 사실을 증거해 주었습니다.

 

사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께선 성도의 잘못을 예수님에게 뒤집어 씌웠다고 합니다.

성도가 맞아야 할 매를 예수님이 대신 맞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에 채찍에 맞으시고 살을 찢기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것입니다.

 

마치 놋 뱀이 망치에 두들겨 맞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가장 잔인하고 처참하게 죽이셨습니다.

얼마나 죄가 미웠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해도 빛을 잃고 하나님도 예수님을 외면 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아들로 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사라지고 없어져야 할 원수요 죄인으로 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마음에 이입하셔서 범죄한 백성들을 두들겨 패야하는 것을 놋을 두들겨 패면서 분을 삭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쏟아 부을 분노를 예수님에게 다 쏟아 부었다는 뜻입니다.

즉 본문이 말하는“이처럼” 이란? 모세가 뱀을 장대에 달게 한 것과 같이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게 하는 사건을 말합니다.

 

뱀을 장대에 달았다는 말은 뱀을 죽였다는 말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았다는 말은 예수님을 죽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미우니까 죽인 것입니다.

이쁜 사람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핵심은 죄를 인간이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대신 해결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선 죄가 얼마나 싫었으면 독생자를 보내서 처리케 하셨을까요.

이는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해서가 아니고 죄를 미워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죄를 처리하는데 있는 것이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걸 모르면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신다고 생각하게 되고 결국에는 성경을 인간 중심에서 해석하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계시하시기를 나는 거룩한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죄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전체의 사상은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서 죄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기 때문에 자연히 죄인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싫은 것이 아니라 인간 속에 죄가 싫은 것입니다.

죄가 싫으니까 자기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아담일지라도 죄를 지으니 에덴동산에서 좇아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털끝만한 죄를 곁에 두고서는 안식하지 못하십니다.

죄는 마치 눈에 티와 같이 그냥 두고서는 편히 쉬지를 못하게 하는 놈입니다.

그래서 눈에 티를 빼듯이 반드시 하나님의 세상에선 죄를 뽑아내야 합니다.

죄를 두고선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안 됩니다.

 

그래서 아들을 보내서 대신 죄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 자신의 안식을 위해서 죄를 없애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의 감동으로 알았습니다.

 

사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죄를 도말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 때문에 죄를 치워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없이 하시는 것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더러운 것을 용납하지 않는 부모와 같습니다.

자식이 방안을 어지럽혀 놓은 것을 보고선 부모가 편하게 쉴 수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편하게 쉬기 위해 깨끗하게 치워놓은 것과 같습니다.

방안에 똥 오줌을 싼 요강단지를 두고선 쉴 수 없어서 치운 것입니다.

 

더럽고 어지럽혀진 집안을 치우는 것은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모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이런 부모의 깨끗한 성품 때문에 자식이 깨끗한 환경에서 살게 되는 혜택을 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죄를 싫어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에서 죄를 없애는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죄를 없애고자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일컬어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말은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신다”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거룩(사랑)한 성품 때문에 죄인들이 죄사함이라는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죄문제를 해결하라는 지시를 받고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빼내라고 보내심을 입은 것입니다.

 

마귀에게 얻어터진 자기 백성들을 온전하게 만들어서 아버지 앞으로 데리고 가서 아버지가 편히 쉬도록 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을 만신창이로 만든 뱀의 머리도 박살냈습니다.

 

그래서 죄가 없는 깨끗한 나라를 아버지께 바치려고 오셨습니다.

 

고전 15: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하나님이 안식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서 청소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안식하실 수 있게 자기백성들을 깨끗하게 치료하려고 십자가에 놋 뱀처럼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들을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쉼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위해서 오신 것이지 인간을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단지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일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죄인들이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죽는 일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죄를 해결하시는 분이지 내 죄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예수님이 죄를 없애준 것에 따른 덕을 보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오해를 하게 됩니다.

 

마치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이라고 착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착각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의 거룩 성에서 눈을 떼게 되고 자기 구원함에만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해 주어야 하고 나를 구원해 주어야만 하는 분이라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마치 자기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존재하는 분으로 오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인간들을 버릴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서 죄인을 구원해 주셨다고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유대인들을 통해서 잘 나타나 있었는데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세례요한을 보내서 너희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랑을 하는데 하나님은 여기 있는 돌덩이로도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만들 수 있다고 까불지 말라고 했던 겁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회개하지 아니하면 도끼로 찍힘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죄 있는 자는 다 찍어내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서 죄를 없애는 일을 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용납하지 않는 거룩한 성품이 죄인에겐 곧 사랑인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거룩하지 않고 죄를 용납하시는 분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영원히 죄와 사망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괴롭힌 불 뱀을 장대에 달아서 죽였듯이 인간을 괴롭히는 죄를 예수님에게 몽땅 뒤집어 씌워서 십자가에 달아서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으로 죽어가면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부르짖음에도 하나님은 외면하셨던 것입니다.

난 죄가 싫다고 외면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죄 문제를 예수님이 직접 해결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죄의 무서움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는 것을 보면서 야! 하나님은 죄를 저렇게도 싫어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 볼 때마다 죄의 끔찍함을 깨닫고 죄를 멀리하고 죄와 싸우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싫어하기 때문에 당연히 성도도 죄를 싫어해야 합니다.

 

죄란? 뱀에 물린 자들을 위하여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예수님을 놋 뱀처럼 장대에 달아서 자기 백성들이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바탕에 예수님의 죽음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은혜를 깊이 아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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