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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요한복음 강해)8강.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요1:29-32>

by coroa 2022. 7. 31.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8강.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요1:29-32>

요 1:29-34=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32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정낙원 목사

 

지난 시간 우리는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소리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소리란? 뜻을 전달하는 도구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소리라고 하였습니다.

소리란 나 라는 자아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모두가 소리로서 보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보내심을 입은 자들은 자신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보내신 분의 뜻을 위해서 사는 자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며 살아야 하는 자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성도의 존재론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예수로 말미암고!

예수에 의해서 창조가 되었고!

예수를 위해서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 교인들의 행태를 보면 정 반대 임을 보게 됩니다.

자기 유일을 위해 예수를 믿는 교인은 많은데,

예수님을 위해서 믿는 성도는 찾아보기 힘든 시대입니다.

이걸 아시고 예수님이 내가 다시 올 때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말씀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증거하라고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관심사는 온통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님에게만 있었습니다.

세례요한 속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증거로 가득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예수님을 세상에 알리라고 요단강에서 물세례를 베풀도록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자 갑자기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예수님에게 임하고 하늘에서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리스도가 바로 이 분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그리고 그 이튿날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보는 순간 놀라고 맙니다.

세례요한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죄인을 위하여 죽임을 당할 운명으로 오신 제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여러분 여기 메시야입니다! 라고 하지 않고,

여러분 여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오셨습니다” 라고 증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기다리지 않았어요.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어린 양이라면 이스라엘에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그리스도란 정치적인 메시야에요.

로마로부터 해방 시켜줄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생각이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로부터 해방 시켜줄 메시야를 보냈는데 이스라엘은 육신의 고통으로부터 해방 시켜줄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이를 두고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고 합니다.

 

이는 마치 이 시대 교인들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성도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다가오는데 교인들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나아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성도간의 만남 자체가 핀트가 틀리니 신앙생활이 다 틀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같다 바친다 하여도 바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데 그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서로 간에 꿍꿍이 속이 다른데 합일하지 않지요.

 

이러한 일들은 어제 오늘에 일어난 일이 아니고 이미 구약시대부터 늘 있어 왔던 일입니다.

결국 인간은 시대를 초월해서 한 통속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지의 입을 통하여서 이스라엘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 했어요.

 

이사야 1장을 봅시다.

 

사 1:2-3=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에다 울분을 토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너무도 억장이 무너지는 일을 당한 사람이 정신 줄을 놓고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내 말 좀 들어보소! 라고 통곡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내가 자식을 키웠는데!

글쎄! 이 놈이 지 애미 애비도 모른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짐승만도 못한 놈이 어디 있겠습니까? 라고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뱉어 내는 말씀을 들어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것을 알수가 있어요.

 

자기들 딴에는 정성을 다하고 열성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섬겼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한 번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면 서로가 환장할 노릇입니다.

한쪽은 드렸다고 하는데 한 쪽은 안 받았다고 하니 이를 어째야 합니까?

 

다시 11절부터 봅시다.

 

사 1:11-14=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간 시간마다 제물을 들고 와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리곤 자기 할 도리를 다 하였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갖다 바치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드리는 제사 때문에 미쳐 버릴 것 같다고 하십니다.

꼴도 보기 싫답니다.

제발 찾아오지 말라고 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주일 낮 예배다,

오후 예배다,

수요 예배다,

구역 예배다,

새벽 예배다,

철야 예배다,,,,,

 

시간 시간마다 헌금하고 봉사하고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싫다고 합니다.

그런 짓하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언제 그런 것을 달라고 했느냐?

제사 지낼 생각하지 말고 내 마음을 좀 헤아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그랬지요.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바란다고!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좀 배우라고 했잖아요.

 

이 시대 교인들이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지금도 이사야 시대와 똑 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목사들은 더 열심히 해야 하나님이 기뻐한다고 교인들을 들들 볶아댑니다.

그러면 순진한 교인들은 프라이팬에 콩 볶이듯이 목사의 말에 순종한다고 새벽이고 밤이고 가리지 않고 산으로 들로 다니면서 난리를 칩니다.

 

쉽게 예를 듭니다.

 

어떤 집에 초대를 받고 갔는데 그 집에선 그 사람을 대접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 놓았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산을 떨며 정성껏 준비했습니다.

진짜 진심으로 준비 했습니다.

 

그런데 초대 받은 사람이 밥상에 앉으면서 이맛살을 찌푸립니다.

왜냐하면! 자기기 싫어하는 것들만 가득 차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삼겹살을 좋아하는 사람을 초대 해놓고 푸성귀만 잔뜩 차려놓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고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풀을 먹으라고 하는 것은 약 올리는 것입니다.

이럴 땐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런데 초대한 주인은 이 사람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곁에 서서 이것도 잡숫고 저것도 잡숫고 라고 하면 이건 대접이 아니라 고문을 하는 겁니다.

 

음식을 준비한 사람은 최고의 정상을 쏟아서 대접하였는데 초대 받은 사람은 먹을 것이 없어서 곤욕만 치르고 온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집에서 초대 하면 여러분 같으면 가겠습니까?

안 가겠지요.

 

근데 이걸 그 집 사람은 몰라요.

음식에 간이 맞지 않아서 그러나!

다음엔 더 신경 써서 해야지!

엉뚱한데 신경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정성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초대한 사람이 초대한 사람의 정성이 모자라서 음식을 안 먹은 것이 아니에요.

다만 자신이 먹어야 할 음식이 아니기 때문에 안 먹은 것뿐입니다.

그럼 초대한 사람은 초대하기 전에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 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또 초대하여선 지난번엔 정성이 부족해서 안 잡수셨는가 보다 라고 혼자만의 생각으로 이번에 목욕재계하고 음식을 만듭니다.

그래도 먹지 못하기는 매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열심의 문제도 아니고 정성의 문제도 아닙니다.

앎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제일 먼저입니다.

이 앎의 내용을 성경은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성도는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구약과 신약이라고 하지요.

구약은 옛 언약을 말하고, 신약은 새 언약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새 언약으로 나아오는데,

사람들은 옛 언약으로 나아옵니다.

그럼 만날 수가 없지요.

일 년을 기다려도 십 년을 기다려도 못 만나요.

기간의 문제가 아니고 장소 문제예요.

 

하나님은 옛 언약의 장소로 나가지 않고 새 언약의 장소로 나가서 기다려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얘들아! 내일 만나자! 라고 하면 그 만남의 광장이 어디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치장을 하든지 목욕을 하든지 해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디서 기다리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고서 만나러 가면 안돼요.

평생 가도 못 만납니다.

 

스데반이 성령의 감동으로 구약 이스라엘이 그랬다고 고발해 주고 있습니다.

 

행 7:41-42= “그 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42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드린 제사를 한 번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제사를 드렸어요.

이정도 되면 환장 하겠다는 말이 절로 나오겠지요.

이런 말을 보면 가슴이 섬뜩해요.

 

이 시대 우리들이 이런 짓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러고 있어요.

자기 딴에는 시간 시간 바리 바리 싸들고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난 받은 적이 없다고 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옥에 가는 사람들은 이빨을 가는 것입니다.

사기꾼 목사들에게 속았기 때문에 분해서 이빨 가는 겁니다.

속지 않은 사람은 이빨 갈 필요가 없어요.

 

지금 하나님이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싫다고 그만 하라고 하는데 이스라엘은 정성이 부족하다면서 또 다른 정성스러움이 무엇인지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세례요한의 말은 하나님의 취향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식성(食性)을 알려주고 있어요.

여러분! 하나님은 소나 양고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좋아하십니다.

 

이제 양고기 들고 나오지 말고 예수님 들고 나오세요! 라고 하는 겁니다. 

물론 이런 사실을 이스라엘이 알 턱이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를 통해서 성전 문을 닫으라고 합니다.

 

말 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이제 피곤하니 끝내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상대하지 않겠답니다.  

그래서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이스라엘에겐 400년 동안 선지자가 끊겨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선지자가 끊긴다는 것은 끝났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진 그래도 선지자들을 보내서 그때그때마다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게 했는데 이젠 그것마저도 안하겠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타난 선지자가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하나님이 세례요한을 보내서 다시 시작하자고 하시는 겁니다.

구약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하자고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제물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약에서 받으시는 제물은 예수라고 알려 줍니다.

그러니 옛 언약으로 나아오지 말고 새 언약으로 나아오라고 합니다.

양고기 가져 오지 말고 예수님을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제물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제사는 죄를 없이하기 위해서 지내는 것입니다.

죄 없는 사람은 제사 지낼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한 것은 너희는 죄인이라는 겁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간 시간마다 하나님께 제사를 지낸 것은 속죄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시간 시간마다 제사로 속죄합니까?

죄가 있으면 하나님이 만나 주시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이 만나 주시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될까요?

 

이는 사사 시대를 통해서 잘 보여 주었습니다.

사사 시대는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니 맨 날 개판 치다가 얻어터지고 사는 것이 일상사였습니다.

 

죄인이 자기 소견대로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기쁘게 할까요?

하나님을 속 터지게 할까요?

당연히 하나님을 속 터지게 하여 진노만 쌓게 되지요.

 

그러니 이스라엘에게 선지가가 없다는 것은 최고의 저주입니다.

엘리 제사장 시대를 일컬어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는 시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자식들을 개판치고 법궤마저 빼앗기고 말았지요.

이스라엘이 범궤를 빼앗겼다는 것은 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자에게 있어 말씀은 생명줄입니다.

말씀을 모르면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말씀이 간섭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교회를 다 떠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 교회 와서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엄청난 축복임을 알아야 해요.

여기가 복된 자리인지도 모르고 앉아 있으면 안돼요. 

암튼 400년 동안 숨어 계시던 하나님이 이제 세례요한을 통해서 얼굴을 내미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알려준 새로운 길이 엄청 이상해요.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알고 왔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요. 

 

하나님이 세례요한의 눈을 열어서 보여 준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오신 예수님이 제물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아니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제물로 보내신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속된 말로 까무러치고 맙니다.

아니 어떻게 하나님 아들을 죄인을 위한 제물로 보낼 수가 있단 말입니까?

 

유대인들에게 있어 아들이란? 아버지와 같은 레벨로 쳐 주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니 유대인들이 이게 어디 건방지게 하나님과 동급으로 놀려고 하느냐 라고 참람 죄로 죽인 것입니다.

물론 다른 죄목도 있지만 말입니다.

암튼 유대인에게 아들이란 이처럼 아버지와 같은 개념이었어요.

 

요단강에서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길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면서 이 아들이 세상 죄를 지고 죽어야 할 제물이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은 그 음성을 똑똑히 들었어요.

그러니 세례요한이 까무러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세례요한의 말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지만 당시 유대인에게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는 말입니다.

충격적인 말이에요.

 

구약시대 제물은 무엇이라고 했나요?

소나 양과 같은 짐승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이젠 하나님이 짐승을 안 받겠대요.

이제는 사람을 받겠답니다.

그것도 하나님 아들을!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을 하나님께서 벌리신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이런 말은 당시 유대인들에겐 궤변이었어요.

왜냐하면! 그들이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전통으로 유전으로 지내오던 것을 깡그리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사 제도는 하나님이 직접 하라고 주신 제도입니다.

이스라엘 자기들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이 외치는 그 순간에도 예루살렘 성전에선 양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께 드려질 어린 양이라고 하니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하고 놀랄 일입니까? 

좌우지간 세례요한의 이 말 한마디에 온 유대인들은 공황상태로 빠지고 만 것입니다.

당장 제사로 밥 먹고 살던 제사장들이 난리가 난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양을 안 받고 예수님을 받는다고 하면 누가 양을 가지고 제사를 지내려고 하겠습니까? 

당연히 안 바치지요.

그러면 백성들이 양을 안 가지고 오면 제사장들은 굶어 죽어야 해요.

제사장들은 성전에 바쳐지는 제물로 먹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헌금을 안 받고 예수님을 받습니다” 라는 말 이예요. 

이런 설교를 들으면 누가 교회에다 헌금을 하겠습니까?

당연히 안하지요.

교인들이 헌금을 안하면 누가 가장 타격을 받습니까?

당연히 헌금으로 먹고 사는 목사들이지요.

 

그럼 지금 제가 세례요한처럼 여러분 하나님은 헌금을 받지 않고 예수님만 받습니다! 라고 하면 누가 제일 신경질을 내겠습니까?

바로 목사들이지요.

 

그래서 목사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면 신경질 적으로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벌떼처럼 달라붙어 이단이라고 몰아붙이는 거예요.

교단에서 축출하고 목사 면직시키고 기독교에서 퇴출시키려고 해요.

세상에서 가장 비열하고 무서운 곳이 종교판입니다.

여기는 한번 찍히면 인정사정없어요.

 

어제까지 호형호제 하던 사람도 교단에서 이단이라 찍으면 어울릴 수가 없어요.

불이익을 당하게 되요.

좌우지간 가장 더러운 곳이 교회의 목사들 세계예요.

 

우리가 하나님은 인간의 돈을 받지 않고 예수님만 받습니다! 라고 하니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서 내어 놓은 것이 천국 상급론입니다.

내용인즉 구원은 예수 피로 받지만 상급은 행함으로 받는다는 이론입니다.

 

잘 들으세요. 

상급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차등이 무엇입니까?

 

상급이란? 상이에요.

즉 올림픽 때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이 있듯이,,

잘 한 놈은 금메달을 주고,

조금 못한 놈은 은메달을 주고,

그보다 조금 못한 놈은 동메달 준다고 하는 것이에요.

 

이건 세상에서 다스려지는 법칙이에요.

세상은 힘의 논리로 다스려지기 때문에 상하와 우열이 있어요.

그래서 무슨 일이든지 차등이 있어요.

사람도 우열이 있어요.

 

그러니 목사들이 상식으로 천국도 그렇다고 가르치는 겁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 충성하지 않으면 천국에서 개털 모자 쓰고 다닌데요.

여러분도 천국에서 개털 모자 안 쓰려면 열심히 헌금하고 봉사하세요?

 

자 보세요.

천국상급론을 말하는 놈들이 얼마나 엉터리인가? 

천국엔 누가 갑니까?

내가 갑니까?

그리스도의 몸으로 갑니까?

조금 어렵지요.

 

그럼 쉽게 말합니다.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이 자기 독단적으로 받습니까?

아니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받습니까? 

예수 안에서 받지요.

앞에서 공부했으니까 이건 알지요.

 

성도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 밖에는 성도가 없어요.

하나님은 성도를 단독자로 보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대합니다.

 

성도를 개별자로 대하면 우리는 1초도 못살고 죽어요.

왜 그런가요?

예수 밖은 죄인이기 때문이지요.

예수 안에서 의인이지, 예수 밖은 무조건 죄인이고 저주의 대상입니다.

 

우리 힘으로 예수 안에 들어 갈 수 없듯이 우리 힘으로 예수 밖으로 나올 수도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 안에 집어넣고 빼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한번 예수라는 나무에 접붙임으로 붙여 놓으면 잘려 나가지 않아요.

그 누구도 잘라내지 못해요.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천국에도 단독자로 가지 않고 예수 안에서 예수의 몸으로 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들입니다.

 

고전 12장 18-27=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 ~ ~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몸은 하나이지만 지체는 여럿이라고 하지요.

성도를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들이라고 하지요.

성도는 모두가 그리스도에게 붙은 사람들이예요.

 

그럼 예수그리스도의 몸이 차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눈하고 귀하고 어느 것이 더 귀합니까? 라는 말이 됩니까?

안 되지요.

짐승은 부위별로 달라요.

하지만 예수님은 짐승이 아니고 하나님이세요.

 

그럼 예수님께 붙은 성도가 차별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지요.

그렇다면 천국의 상급에 차등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당연히 없지요.

 

그런데 썩어빠진 사기꾼 목사들이 성경에도 없는 상급론을 만들어서 천국에서 상급이 다 다르다고 사기를 치는 것이에요.

이 미친 놈들은 성경에 보면 무슨 면류관이다 무슨 면류관이다 라는 말이 있으니 그게 차별인 줄 알아요.

좌우지간 무식한 놈에게는 말이 안 통해서 그져 쥐어박아야해요.

 

가장 쉽게 설명할게요.

 

누가 여러분의 몸을 부위별로 차별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 이쪽은 궁뎅이 살 5천원짜리,

아! 이곳은 갈비살 8천원짜리,

아! 여기는 발바닥 살 2천원짜리,,,,

 

이런 식으로 말하면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안된다고 생각합니까?

안된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목사들이 천국 상급론을 말하면 고개를 끄떡거리고 장단에 맞추어 놀아나고 있어요.

교인들 끼리 열심히 해서 천국에서 더 좋은 상급을 받겠다고 경쟁입니다. 

야! 이걸 어찌해야 될까요.

 

제가 하나님께 물으니 그런 놈들은 짐승이기 때문에 부위별로 가격이 다르다고 말하라고 합니다.

목사는 대가리이니 만원이고,

장로는 모가지니까 8천원이고,

집사는 가슴살이니 6천원이고,

권사는 뱃살이니 4천원이고,

권찰은 허벅지 살이니 2천원이고,

평신도는 발바닥이니 5백원 이라고 가르쳐 주래요.

그래서 가격이 다르데요.

지옥에 가면 그렇게 팔린 데요.

 

계시 받은게 아니고 제가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런 식으로 가르치니 모두가 목사가 되겠다고 신학교로 가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장로가 되겠다고 야단들입니다.

 

어쩌다 이리로 빠졌는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어디까지 했더라!

 

아! 하나님은 양을 안 받고 예수님만 받는다고 했지요.

그럼 여기서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제물로 받으시는가를 살펴보아야 해요.

 

자! 정신 가다듬고 들읍시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지요.

이는 이 세상은 지금 어떤 상태란 말입니까?

죄에 떨어진 상태란 말이지요.

그러니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하지요.

 

여러분 제사는 왜? 지냅니까?

물어 봅시다.

천국에 가면 제사를 지낼까요?

안 지낼까요?

 

안지내지요.

왜? 천국에선 제사를 안 지냅니까?

그야 죄가 없으니 그렇지요.

 

그럼 답이 나왔네요.

제사는 죄 때문에 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는 인간이 지었는데 왜? 양이나 소 같은 제물로 제사를 지냅니까?

하나님이 죄 지은 놈은 그냥 죽여 버리면 될 텐데!

죄인 대신에 제물로 제사를 지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살려주기 위함이지요.

그 인간을 살려 주려고 그 인간 대신 제물로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는 내가 만약 율법이 금하는 어떤 잘못을 저질렀어요.

그러면 율법에 의해서 난 죽어야 해요.

그런데 율법엔 흠 없는 양을 제물로 바치면 죄인도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어요.

그게 제사 제도예요.

 

그래서 율법이 시키는 대로 내가 범죄하면 흠 없는 양을 제사장에게로 끌고 갑니다.

그럼 제사장이 묻지요.

왜 왔는데!

아! 예! 어제 도적질 하고 사기치고 간음하고 좌우지간 나쁜 짓을 했습니다.

그래!

 

그럼 니가 끌고 온 양을 가지고 이 앞으로 나와!

그리고 그 양의 머리에 니 손을 얹어!

그리고 따라해!

하나님 난 어제 흉악한 죄를 지었습니다.

율법대로 하면 난 죽어야 하는데 나 대신 여기 이 양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니 이 양이 내 대신 희생이 됩니다.

그리곤 난 죄가 탕감 받습니다.

나는 이 양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앞으로 내 대신 죽은 양을 기억하고 살겠습니다. 아멘

 

그리고 제사장은 그 인간보고 성막 밖에 나가 양을 잡는 곳에서 양을 잡아 오라고 합니다.

그럼 그 사람은 양을 잡아서 제사장에게 갖다 드리면 제사장은 그 인간을 대신하여 이 양을 바친다고 기도하면서 태워버립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죄가 없는 것처럼 살게 됩니다.

 

이런 제물의 희생으로 드려지는 제사도 한시적인 것입니다.

양은 장차 이 양같이 희생당하실 분이 온다는 것을 예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장치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라고 합니다.

참 형상이 아니래요.

 

히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럼 참 형상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짐승 제물이 아니고 한 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한 몸을 준비해 놓은 신 겁니다.

 

히 10:5-9=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 ~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첫 것을 폐하시고 둘째 것을 세운다고 하였습니다.

첫 것이란? 양으로 제물 삼는 것이고,

둘째 것은 예수님으로 제물 삼는 것입니다.

첫 것을 폐하고 둘째 것을 세운다고 하지요.

 

지금 세례요한이 그걸 말해주고 있는 것이에요.

우리는 지금 히브리서를 보니까 아! 율법은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한 표상이구나! 를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약에서는 이걸 알 수가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율법 속에 힌트를 담아 놓았어요.

그 힌트를 살펴봅시다.

 

출 21:23-25=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면서 알려 준 것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으로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달리 말해서 짐승의 생명은 짐승으로 갚고, 사람의 생명은 사람으로 갚으라는 말입니다.

그럼 위의 말씀대로 하면 사람이 잘못했으면 사람으로 감당해야 해요.

 

그런데 사람이 죽으면 안 되잖아요.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의 잘못을 사람이 갚는다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 죽어야 하는데 죽는 놈이 무슨 제사가 필요 합니까?

그냥 죄 값으로 죽으면 되는데,,,

 

그러니 눈에는 눈으로 갚으라고 하는 율법의 요구를 제사에 적용하면 사람의 죄를 사람으로 갚아야 한다는 것을 짐승으로 대신하여 상징화 한 것입니다.

그러니 죄인 대신 죽는 짐승은 사람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럼 이제 답이 풀립니다.

율법대로 라면 인간의 죄를 탕감 받으려면 짐승이 죽어야 합니까?

인간이 죽어야 합니까?

당연히 인간이 죽어야지요.

 

만약 어떤 놈이 여러분의 아들을 죽여 놓고 양 한 마리 가지고 와서 나 변상 했으니 되었지요! 라고 하면 그걸 받겠습니까?

어떻게 사람 목숨하고 짐승 목숨하고 같습니까?

당연히 사람 목숨 내 놓으라고 하지요.

 

하나님이 지금 그렇게 말씀하시고 계세요.

사람의 목숨을 사람으로 대속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 대신 짐승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 목숨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럼 내 대신 다른 인간 목숨 주면 안 됩니까?

그러면 돈 많은 부자가 자기 대신 가난한 사람을 돈 주고 사서 대신 죽게 하고 그 집에 평생 먹고 살 돈을 주면 사람의 생명을 사람의 생명으로 대신 갚을 수가 있어지겠지요.

부자들은 그렇게 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돈 없는 가난한 사람은 그림의 떡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요구는 죄인의 목숨을 죄인에 것으로 받지 않겠대요.

왜냐하면! 헌 것 말고 새 것을 내어 놓으래요.

 

자 보세요.

제사는 왜? 지낸다고요.

죄 지었으니까 지내지요.

 

그럼 죄란 남에게 피해를 입힌 것이지요.

피해를 당한 사람은 멀쩡히 있다가 피해를 입은 거예요.

근데 왜? 하나님한데 제사를 지내야 합니까?

그 사람에게 지내야지!

그렇잖아요.

 

그런데 하나님 한데 지내라고 합니다.

이는 그 사람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 주인이 하나님 이예요.

그래서 무슨 죄를 지었든 다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금방 현대자동차에서 에쿠스 한 대 뽑아가지고 가는데 뒤에서 누가 쾅하고 들이 박아 버렸어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새 것을 달라고 하겠어요!

헌 것으로 달라고 하겠어요!

당연히 새 것 내 놓으라고 하지요.

마찬가지예요.

 

인간이 죄를 지었다는 것은 하나님께 피해를 입힌 거예요.

에덴동산에서 죄라는 놈이 죄 없는 아담을 죽였으니까요.

아담이 무엇 때문에 죽었습니까?

죄 때문에 죽었지요.

 

그럼 아담의 생명을 대신 할 생명은 죄 있는 생명이라야 합니까?

아니면 죄 없는 생명이라야 합니까?

죄 없는 생명이어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이 세상 인간들 중에 죄 없는 인간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럼 이 세상엔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어 줄 생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죄가 없는 분을 하늘에서 보내 준 것입니다.

이해됩니까?

하나님은 흠 없는 새 것만 받아요.

 

힘들고 어렵지요.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죄 없는 인간을 제물로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도를 죄 없는 자로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죄인을 제물로 받고,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어 주면 하나님이 손해 보잖아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예수님을 죄인대신 제물로 받으시고 죄인인 성도들을 의인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의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죄 없으신 의로우신 예수님이 제물로 드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도가 의인된 배경에는 항상 흠 없으신 예수님의 죽으심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이걸 대신 죽어 주셨다는 의미에서 대속(代贖)이라고 합니다.

 

지금 세례요한이 그것을 본 겁니다.

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대속(代贖)제물로 보내셨구나! 를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만 하고 마칠게요.

 

구약시대 속죄일이 되면 대 제사장이 제물이 될 두 마리 염소를 준비합니다.

한 마리는 잡아서 피를 뿌리고 한 마리는 산 것을 광야로 보냅니다. 

이 때 대 제사장은 그 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대신 전가하는 의식을 행한 후에 붉은 천을 묶어서 무인지경인 광야로 산채로 보냅니다.

 

레 16:21=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맞겨 광야로 보낼지니”

 

광야로 보내지는 그 염소를 “아사셀”을 위한 염소라고 합니다.

이 염소는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가는 대속 제물입니다. 

아사셀이라는 말은 “악령”, 또는 “귀신” 곧 “사단”을 말합니다.

아사셀을 위하여 보내진 염소는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사단에게 내어준 것입니다.

 

이는 곧 신약의 성도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성도의 죄값을 짊어지워서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의 모형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단에게 내어 주고 성도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값 주고 샀다고 하지요.

아니 하나님이 누구에게 값을 주고 삽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죄인을 누구 손에 붙여 놓았습니까?

마귀에게 줬지요.

성도도 인간이기에 죄인입니다.

 

그래서 성도도 마귀가 가지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도 이걸 인정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마귀에게 있는 성도를 빼내기 위해 예수님을 준 것입니다.

 

그러니 난 구원 받았다고 좋아 할 것이 아니라 내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구나를 알아야 해요.

그러니 잘난 척하지 말고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교회를 일컬어 피로 값 주고 산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다 예수님의 대속을 근거로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정리해 봅시다.

 

세례요한은 지금 예수님을 구약의 아사셀을 위하여 보내지는 제물임을 알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짐승의 피로서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던 시대는 지났고 이제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게 되는 시대가 열렸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이 대속제물임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죄 값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꼬라지 보지 말고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죽으신 예수님을 보세요.

그리고 감사하세요.

감사는 믿음을 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러니 환경 탓하지 말고 구원 받음에 감사하고 사십시오.

 

 

기도 합시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하늘빛사랑 blog https://blog.daum.net/day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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