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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10강. 메시야가 하는 일 <요 1:35-42>

by coroa 2022. 8. 5.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0강. 메시야가 하는 일 <요 1:35-42>

요 1:35-42=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시쯤 되었더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정낙원 목사

 

성경 66권은 한권의 책입니다.

어떤 분은 시편이 5권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은 70권이라고도 합니다.

물론 그렇게도 볼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몇 권이냐 라는 것은 본질적인 면이 아니기 때문에 가타부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용입니다.

무엇을 증거 하느냐 입니다.

 

한권의 책이라 함은 한 주제를 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성경은 자신에게 한 말이라고 하여 성경의 중심사상을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이라 함은 아직 신약성경은 기록되어지기 전이니까 구약 성경을 말합니다.

 

그럼 제자들은 구약 성경을 가지고 예수님 이야기를 해 줘야 해요.

신약의 성도들은 신약과 구약 모든 성경으로 예수님 이야기로 말해야겠지요.

 

그런데 지금은 성경을 가지고 각 분야에서 자기들 뜻을 주장하기 위해서 인용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이 시대 성경말씀은 본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하여 부적처럼 사용되어지고 있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지난 시간 '피밭'이라는 설교를 했지요.

교회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세워진 곳이라고 살펴보았지요.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서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교회에서 이야기 되어지는 것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교회를 지키는 겁니다.

성령께서 누가 성경을 가지고 다른 소리를 하는지 눈에 불을 켜고 살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들을 보면 문화센터가 되었어요.

다양한 취미 활동을 하는 놀이터가 되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말할 수 없는 분위기로 만들어 버렸어요.

 

전부 가정의 행복과 사랑과 평화를 위하여 친목하고 있는데,

어떻게 여러분 교회는 예수님의 피가 서려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나그네들이 무덤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나라가 아니고 하늘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육신에 꿈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다 못 박으시고 구원받음에 감사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면 너나 잘하세요! 라고 비웃음을 당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어요.

 

교회의 위기는 사람이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가 증거되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에 위기 또한 열심과 정성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위기는 우리 속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가 무덤덤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덤덤해 지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의 즐거움은 사라지고 세상에 대한 근심 걱정이 생기게 됩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

노후준비는 어떻게 하여야 하지!

재테크는 어디다 해야 하지!

어느 샌가 마음속에 살아갈 염려가 먹구름같이 휩싸고 맙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여! 내게서 성신을 거두지 마옵소서!

내 안에 정한 마음을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은 주옵소서!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라고 탄원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마음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즐거움은 내가 죄인이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죄사함 받아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깨달아 질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은 날마다 성도를 하나님 말씀으로 해부시켜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용서 받았음을 알도록 일하시는 것입니다.

 

히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렇다면 그 어떤 성경을 이야기 하여도 중심 내용은 예수그리스도 이야기여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이야기 되어지는 곳엔 반드시 인간의 죄 문제도 함께 거론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인간의 죄 문제는 한 셋트에요.

마치 햄버거의 겉에 빵과 속에 고기가 한 셋트인 것처럼 말입니다.

 

창세기를 펴도 예수 이야기가 나와야 되고,

레위기를 펴도 예수 이야기가 나와야 되고,

잠언을 펴도 예수 이야기가 나와야 하고,

시편을 펴도 예수 이야기가 나와야 하고,

전도서를 펴도, 역대기를 펴도,

바울의 서신서를 펴도 예수 이야기가 나와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 이야기라 함은 곧 죄로부터 구원받는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이름 속에 이미 예수님과 관계된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즉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는 이야기 말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초지일관(初志一貫) 오직 하나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내신 예수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설교 또한 사람들마다 깨닫는 부분이 제한적이고 부족하여 증거하는 것에 한계성을 가져서 미진하더라도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 이야기 해 주어야 합니다.

 

설교는 설득하는 것이 아니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성경을 주신 것은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는 이런 일을 하였다” 라는 것을 성경을 통하여서 계시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남과 동시에 인간에겐 하나님을 아는 길이 차단이 되어졌습니다.  

인간들은 각각의 지식에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을 동일한데도 내용을 들여다보면 각각의 하나님이 다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는 이렇다!” 라고 스스로 나타내셨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이 알고 있는 하나님 만 참 하나님이고, 나머지는 모두가 가짜 하나님이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인간들은 받아들이지 않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너는 앞으로 이런 인간이 될 것이다!” 라고 약속을 주시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이름으로 바꿔 주셨습니다.

이미 아브라함이라는 이름 속에 아브라함의 앞길이 정해져 버렸어요.

이제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에 걸맞도록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이름을 바꿔주셨다는 것은 넌 이제 다른 인간으로 출생하였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이름은 출생 시에 부모가 지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새로 출생 되어진 자입니다.

 

이제부터 아브라함의 부모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주시고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에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도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선택함으로 세상은 아브라함 쪽과, 다른 쪽으로 나누이게 되었습니다.

인간 세상은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심으로서 세상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누어지게 되었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한 동네에서 형님 동생 하면서 우리는 한 식솔이다! 라고 살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넌 내꺼! 라고 선택하자 다른 사람들은 졸지에 마귀 것으로 분류가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겐 좋은 일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 입장에서 굉장히 불쾌해요.

하나님 자기가 뭔데 사람을 차별하고 구분하느냐 라고 항의 할 수 있어요.

다 똑 같은 모습으로 다 똑 같은 땅에서 따 똑 같이 사는데 왜?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데모를 해도 아랑곳 하지 않아요.

암튼 아브라함에게 속한 사람은 참 하나님을 섬기는 부류가 되어 복을 받고, 아브라함과 뜻을 달리 하는 사람들은 거짓 하나님을 섬기는 부류가 되어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길 네 자손이 하늘에 별과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자손들은 이삭처럼 하나님의 약속으로 날 것을 알려 주십니다.

이삭처럼 “없는데서 있게 하는” 방식으로 나타날 것임을 이삭을 통하여서 알려 주셨습니다.

 

이삭은 원래 없었는데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났어요.

그러므로 이삭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예수님도 이 맥(脈)을 따라서 오셨습니다.

 

마리아는 원래 예수님이 없었어요.

갑자기 천사가 찾아 와서 하나님의 약속을 마리아 속에 심어 놓았어요.

그래서 마리아는 없던 예수님을 하나님 약속 때문에 낳은 것입니다.

 

앞으로 예수님도 성도들도 이런 방식으로 생겨 날 것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에 의하여 찜 당하면 그날로 천국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세상을 둘로 나누는 일부터 단행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다니시면서 없는데서 있게 하시듯이 각 사람을 선택하여 불러내십니다.

그리곤 철저하게 “너희”와 “저희”로 갈라서 대접을 하였습니다. 

마 13장에 여러 가지 천국 비유를 하시면서 천국은 이 땅에 비밀로 와있다고 하셨습니다.

비밀로 와 있다는 것은 천국은 오직 하나님의 백성만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내용을 알 턱이 없는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모든 사람이 다 알아먹도록 이야기 해주면 안 되느냐 고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천국에 비밀은 너희에게는 허락이 되었지만 저희에게는 감추어져 있다고 합니다.

 

마 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너희란? 예수님의 선택에 의하여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고,

저희란? 제자들이 이외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을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파견하실 때부터 이미 예견되어진 일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 라는 뜻이잖아요.

결국 하나님은 오로지 자기 백성만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라는 이름을 주셔서 보낸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를 “메시야” 또는 “그리스도” 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메시야” 라고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메시야는 심판하는 분입니다.

“너희”와 “저희”를 갈라내시는 분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보고 제자들에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이라고 가리켰습니다. 

그러자 제자 중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로 갔는데 그 중에 한사람이 안드레였습니다.

안드레는 세례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안드레는 자기 형인 시몬에게 예수님을 메시야 라고 소개합니다.

“메시야”란 말은 “그리스도”란 말인데 이는 “기름발리운 자” 란 뜻입니다.

기름을 발리웠다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된 자란 뜻입니다.

 

구약시대에 기름이란? 거룩을 상징하고 구별됨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의 고기와 기름을 철저히 분리시켜서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제물을 잡으면 제사장은 고기와 기름을 분리하여 고기는 제사를 지내고, 그 남은 것들은 제사장들의 분깃으로 주어서 먹게 했어요.

 

그러나 기름은 사람이 먹지 말고 모두 태워서 하나님께 드리도록 했습니다.

이는 기름은 하나님께 바쳐지는 하나님의 분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제물의 기름을 기쁘게 흠향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것으로 선택을 입은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가 기름을 발라서 구별케 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에게 기름 발리우게 하셔서 구별을 시켰습니다.

 

백성 중에서 기름발리움을 입게 되면 그 때로부터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하도록 선택을 입은 자들이라고 하여 일반 백성들과 다른 삶을 살도록 요구받게 되었습니다.  

일단 기름 발리움을 입게 되면 자기 삶은 없어지고 이제부터는 철저히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기름발린 자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간주하여 백성들로부터 지켜주셨습니다.

 

이들의 죽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이 알아서 처리해 주셔서 일반 백성들로부터 치외법권(治外法權)에 두셨던 것입니다.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는 모두가 장차 오실 기름발리운 자 곧 메시야가 하실 일들을 표상적으로 하였습니다.

 

이들이 하는 일 속에 메시야가 할 일을 담아 놓은 것입니다.

 

제사장이란?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중보자로서의 일을 하는 자이고,

선지자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는 메신저 일을 하시는 자이고,

왕이란? 백성들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일을 하는 자입니다.

 

이러한 제도가 다윗에게 와서는 다윗이라는 왕에게 통합됩니다.

다윗은 선지자이면서 제사장이면서 왕으로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성령에 감동을 입어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은 다만 장차 오실 메시야를 계시하는 인물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장차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고 즐거워하면서 그를 기다리는 소망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푸는데 하늘에서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예수님이 바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셨던 기름발리운 자 곧 메시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식민지 생활을 하면서 자신들을 로마제국에서 해방시켜 줄 다윗과 같은 왕을 기다렸는데 선지자 세례요한이 예수님이 바로 그분이라고 하지 백성들은 좋아라 하고 기뻐했습니다.

 

아! 이제 그 지긋 지긋하던 로마 놈들의 압제 아래서 벗어나는가!

이스라엘이 술렁거리기 시작했어요. 

당시 모든 백성은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믿었으니,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증거 했으니 다 믿을 수 밖에 없지요.

 

실제로 세례요한도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독립 시켜줄 메시야 인줄 알았어요.

그래서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도대체 당신이 오시리라고 한 그 메시야가 맞느냐고 예수에게 물어 보라고 하였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공표하심으로서 예수님이 바로 이스라엘의 메시야임을 백성들에게 공개적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세우신 제사장이고, 선지자이고, 왕이라고 하시곤 너희들은 그에 말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의 관심은 예수님에게 쏠리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보고 듣고 알게 된 안드레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자기 형 시몬에게 내가 메시야를 만났으니 함께 가자고 형을 이끌고 예수님에게로 왔던 것입니다.

 

혹시 압니까?

예수님이 진짜 로마를 물리치고 정권을 잡으면 장관 자리 하나 차지 할지 누가 압니까?

아마도 계산 빠른 안드레의 머리로서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음이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안드레의 손에 이끌려 온 시몬을 보시고는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인데 이제부터는 “시몬”이라고 하지 말고 “게바”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이는 곧 넌 이제부터 요한의 아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어요.

 

이름 속에 부모가 그 아이에게 한 축복이 다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으면 제일먼저 이름을 붙여 줍니다.

그러면 그 이름은 죽을 때까지 그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식의 이름을 지을 때 즉흥적으로 짖지 않고 심사숙고하여 짓는 것입니다.

시몬이라는 이름도 그렇게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척 보면서 야! 너 이제부터 게바야!

이제부터 게바라고 불러! 알았지!

안드레와 베드로 : 오잉 ???

 

게바가 뭔데요.

베드로인데 반석, 돌맹이라는 뜻이야!

아니 뭐라고요!

돌맹이라고요!

 

아무리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하지만 돌맹이가 뭡니까?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남에 이름을 함부로 바꾸고 말입니다.

 

야! 시끄러워!

이제부터 내가 너를 돌맹이처럼 사용 할 테니 그리 알아!

그래서 웅이 아빠는 돌맹이가 되었습니다. (시몬의 아들이 웅이입니다. ^^^)

 

아니! 예수님이 누구시길래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을 맘대로 바꿔 주십니까?

시몬 입장에선 황당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속으로 아니 자기가 뭔데 남의 이름을 함부로 바꾸느냐! 라고 욕을 할 수도 있습니다.

 

알다시피 오늘본문은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메시야로서의 첫 사역입니다.

그 첫 사역이 남에 이름을 바꿔주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왜? 메시야로서의 첫 사역을 이름을 바꿔주는 일을 하게 된 것일까요?

여기에는 메시야로서의 엄청난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이 땅에서 메시야 로서 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름을 바꿔 준다는 것은 사람을 창조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이름이란? 출생되어질 때 부모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시몬이라는 이름은 육적 부모로부터 출생될 때 받은 이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을 버리시고 예수님 자신이 이름을 주시고 계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베드로를 낳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넌 내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3절에서 예수님을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서 자신이 창조주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육으로 태어난 땅에 사람 시몬을 하늘에 사람 베드로로 창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담의 혈통아래서 죄인으로 출생한 인간을 죄와 상관이 없는 하늘에 사람으로 창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물의 창조는 곧 죄인 구원을 보여주는 시청각 교제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안에서 거듭난 상태를 가지고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지음 받은 자란 뜻입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새 사람으로 창조하시는 메시야로 오신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으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 아래서 출생한 자들을 예수님을 통해서 죄와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살리시고 계신 것입니다.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지금 예수님 앞에 나온 죄인 요한이 낳은 시몬이라는 옛 인간을, 예수님께서 창조주가 되셔서 베드로라는 새로운 인간으로 창조한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온 자는 죽고 살아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옛 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납니다.

새롭게 출생이 되어지면서 새 이름을 지어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제부터 부모가 하나님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너희 아비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부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하려고 구원을 입은 성도들에게 아들에 영을 보내주셔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 것입니다.  

아들에 영을 다른 말로 성령이라고 하는데 이를 일컬어 성령에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구별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어졌다는 말입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는 세상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람을 창조하는 일을 예수님이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 어떠한 인간도 예수님이 찾아가면 새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변화 되는게 아니고 새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변화란? 뜯어고치고 바뀌는 것이지만 창조는 새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변화되어가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흔히들 새로 창조된 사람을 속사람이라고 합니다.

속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창조가 되었기 때문에 서서히 변화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단번에 성령에 기름부음으로 거룩한 사람으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성화주의의 잘못을 집고 넘어가 봅시다.

성화론은 점점 더 거룩해 지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 거룩해 지라는 것은 고작하여 겉 사람을 변화시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과거에는 강패로 살았는데1

이제는 착한 사람으로 산다거나,

술 먹던 사람이 술을 끊었다든가,

사기 치던 사람이 착한 사람이 되었다든가,

불같은 사람이 온순해졌다든가,

게으르던 사람이 부지런한 사람으로 바뀌었다든가,

성경 안보고 기도 안하던 사람이 이젠 성경도 보고 기도도 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든가,

열심히 없던 사람이 열심히 봉사한다든가,,,,라는 등등의 것으로 성화되었다고 합니다.

 

이건 육체에 화장을 한 것뿐입니다.

이건 거룩이 아니고 잠시 거룩한 척 흉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을 가지고 거룩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거룩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하나님께만 사용하는 말입니다.

 

하나님 이외는 거룩한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죄인은 아무리 개과천선 한다고 하여도 죄인일 뿐입니다.

그 본질은 바뀌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흙으로 난 것은 흙으로 돌아 보내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난 자들입니다.

원래 없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약속이 뚝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생겨났어요.

 

이 약속을 육신이라는 몸에다가 속 사람을 심어 놓았어요.

이걸 쪼개서 구분하려고 하지 마세요.

겉 사람 따로 속사람 따로 구분하지 마세요.

마치 골뱅이가 갑각(甲殼) 속에 살고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세요.

골뱅이 살을 따로 갑각(甲殼)에서 빼내면 죽어요.

 

성도들도 갑각(甲殼) 속에 골뱅이가 있듯이 겉 사람 속에 속사람이 있어요

이는 마치 시몬 속에 게바가 있는 것과 같아요.

아브람 속에 아브라함을 담고 있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은 시몬과 아브람 상대하지 않고 게바와 아브라함을 상대해요.

시몬과 아브람은 다만 게바와 아브라함을 담고 있는 그릇에 불과해요. 

그러니 시몬과 아브람이 개판 쳐도 하나님은 끝까지 붙잡고 가는 거에요.

시몬과 아브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속에 게바와 아브라함 때문이예요.

 

하나님은 시몬과 아브람에게 너 앞으로 착하게 살으라고 하지 않아요.

그 놈은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껍데기라서 불태워버릴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살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하고 부인해도 약속을 취소하지 않은 것은 그 껍데기하고 한 것이 아니라 그 속사람하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약속으로 난 속 사람은 개과천선 할 필요가 없어요.

성화할 필요가 없이 완벽해요. 

하나님은 이 속사람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 속사람은 죄가 주관하지 못해요.

그렇기 때문에 육신이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았기에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있는 속사람이 육신의 장막이 무너져도 그 속사람을 담을 하늘에 장막이 있다고 합니다.

 

고후 5:1-9=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 ~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바울은 하늘에 준비된 영원힌 집이 따로 있으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살든지 죽든지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이 이게 믿어져요.

성화주의자들은 이게 안 믿어지기 때문에 끝까지 껍데기를 치장하려고 하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날마다 새로운 사람으로 카멜레온처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변화되지 않아요.

다만 참고 있을 뿐입니다.

속으론 죽이고 싶도록 미움이 북받쳐 오르는데도 참으라고 배웠기 때문에 입술을 깨물고 참는 것뿐입니다.

 

여러분 거룩한 척 하는 목사에게 갑자기 쌍욕을 하고 이놈 저놈 해 보세요.

본능적으로 화기 분출해 나와요.

마치 경상도나 전라도 사람이 서울 가 살면서 평상시엔 서울 말 사용하다가 싸우거나 갑자기 급박한 일을 당하면 자기도 모르게 전라도 말과 경상도 말이 튀어나오는 것과 같아요.

 

죄는 인간의 본성 속에 자리 잡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죄가 분출될 환경만 조성 되면 여지없이 머리를 내 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평토장한 무덤이라고 했어요.

사람들은 잔디가 덮인 무덤가에서 도시락도 먹고 뒹굴어요.

하지만 그 속에 해골바가지가 있다고 하면 가까이 하지 않아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 의 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했어요.

바리새인의 의(義)를 인간들 중에서 최고의 의(義)로 인정해 주셨어요.

하지만 천국엔 그 바리새인의 의(義) 가지고 안된다고 합니다.

 

그 보다 “더 나은 의(義)” 라야 된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義)는 인간이 만들 수 없어요.

바리새인 보다 더 나은 의(義)는 하나님과 예수님만이 가기고 계세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인간의 행실로 거룩을 만들어 내려고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거룩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화론 자들은 거룩을 만들려고 해요.

이게 사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러니 교인들끼리 등급이 매겨져서 꼴값들을 떠는 거에요.

목사, 장로, 안수집사, 서리집사, 권찰, 평신도,,,,,,, 

평신도는 권찰 따라 잡으려고 하고,

권찰은 서리집사 따라 잡으려고 하고,

서리집사는 안수집사 따라 잡으려고 하고,

안수집사는 장로 따라 잡으려고 하고,

장로는 목사 따라잡으려고 해요.

 

교회를 경영하는 이사(당회)들이 장로서부터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다 등급을 매겨서 한 등급씩 업그레이드 시켜 주면 무식한 인간들은 좋다고 헌금을 내고 의기양양합니다.

앞으로 더 잘해서 더 높아질꺼야! 라고 일평생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교회라는 주식회사를 위해서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언제 예수님께서 주신 안식을 맛보겠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 맛을 언제 보겠습니까?

 

얼마나 엉터리이면 회식자리 가서 사이다만 마시고 오겠습니까?

시원한 맥주 한잔을 왜? 못 마십니까?

어디 천국에 음주측정 한답니까?

맥주 먹은 놈은 탈락 시키고, 사이다 먹은 놈은 넣어 준답니까?

노래방 가서 찬송가 부르면 천국 넣어주고 유행가 부르면 탈락시킵니까?

 

무슨 그런 천국이 있고 그런 약속이 있습니까?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이 법이 통합니다.

회식자리에서 맥주 먹은 사람은 안수집사 장로에서 탈락해요.

사이다만 먹어야 해요.

노래방 가서도 “천부여 의지 없어서” 를 불러야지 “옥경이”나 “짠짜라” 같은 것을 부르면 큰일 납니다.

그래서 “난 유행가 안 불렀다”,

“난 사이다만 마셨다” 라고 해요.

이걸 신앙이라고 자랑하고 있어요.

 

아주 웃겨요.

여러분이 생각해도 우습지요.

지금 웃지만 밖에 나가 저런 사람들 만나면 여러분도 이미지 관리한다고 그래요.

 

신앙생활이란? 날 아름답게 가꾸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겁니다.

하나님이 넌 천국 백성이야! 라고 하면 그대로 예! 하고 사는 겁니다.

 

여러분! 넘 3 라는 영화 보았지요.

거기 보면 송강호가 조폭 두목으로 나오는데,,

한번은 수하들 앞에서 옛날 라면 먹고 아시안 게임에서 육상 금메달을 딴 사람이 현정화라고 해요.

그러자 수하 중에 똑똑한 놈이 형님 그게 아니고 임춘애 인데요 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송강호가 수하를 두들겨 패면서 하는 신앙적으로 유명한 말이 있어요. 

야! 이 자식아! 내가 현정화! 라고 하면 현정화야!

내가 현정화! 라고 하면 현정화야!

알았어!

 

물론 수하의 말이 맞아요.

임춘애 선수가 맞습니다.

그럼에도 임춘애가 될 수 없는 것은 그 조직에선 두목의 말이 법이기 때문입니다.

거기는 상식이 통하지 않아요.

오로지 두목의 말이 상식이고 법이예요.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시몬을 보고 게바라고 하면 게바인 것입니다.

분명히 시몬이 맞아도, 예수님이 게바라고 하면 게바가 되는 겁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예수님은 창조주시고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보다 강한 분이시기 때문에 시몬 보고 게바라고 하면 게바가 되는 것입니다.

 

우린 분명이 죄인이고 형편없는 놈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넌 의인이라고 합니다.

넌 천국백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 라고 해야 해요.

 

그게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꼬라지로 자기를 판단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 꼬라지로 판단하지 않고 예수님이 불러준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 같지 않은 것이 믿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이 우리 안에서 상주하여 거하는 겁니다.

그 약속이 믿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성령이 거하는 성도는 이 말이 믿어져요.

 

여러분!

우리는 시몬이 아니고 게바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불러요.

버젓이 시몬의 아버지 요한이 시퍼렇게 살아 있어도

예수님은 야! 게바 이리와봐! 라고 불러요.

 

그럼 요한이 시몬에게 묻지요.

야! 임마!

너 시몬이잖아!

 

그런데 왜? 예수가 널 보고 게바라고 부르니 쪼르르 쫓아가는 거야!

예! 아부지!

저 분이 창조주 하나님인데요.

저 분이 날 보고 넌 이제부터 천국백성이니 게바라고 했어요.

 

난 이제부터 저 분의 말을 들어야 해요.

그러니 아부지 조금 섭섭하더라도 이해하세요.

저 분이 어떤 분인가 하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에요.

아부지도 저 분 말을 들어야 해요.

 

이 자슥이 미쳤나!  

맞습니다.

웅이 아빠 시몬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로 미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도 바울을 보고서 너 미쳤구나! 라고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미친 사람의 말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하는 이 말이 이해가 된다면 당신도 미친 사람입니다.

미친 사람만이 미친 사람의 말을 이해 할 수가 있거든요.

 

당신이 미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세상에서 온전한 정신으로 살면 단 하루도 뿔따구가 나서 살수가 없는데 날 미치게 만들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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