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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요한복음 강해)4강.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 <요 1:9-13>

by coroa 2022. 6. 27.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4강.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 <요 1:9-13>

-.정낙원 목사

 

요 1:9-13=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지난 시간 우리는 이 세상은 어둠이라고 살펴보았습니다.

깜깜해서 어두운 것이 아니고 진짜 생명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어둠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는 다 소경인 셈입니다.

 

10절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

 

세상이란?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인데 막상 예수님이 세상에 오자 세상은 몰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기 부모도 알아먹지 못하는 패역한 놈들입니다.

이런 나쁜 것들이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을 어둠이고 소경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모를뿐더러 예수님이 하시는 일도 모릅니다.

하나님 말씀엔 관심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19-21절에서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만물 가운데 있는데도 인간들은 애써 하나님을 외면하고 감사치도 않고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있다” 라고 하며 세상이 악에 빠져 있음을 고발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의 지적처럼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하여서도 천국에 대하여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란 오로지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잘 살아 볼 것인가!

자기 관심뿐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은혜를 모르는 자를 일컬어 배은망덕한 자 또는 금수만도 못한 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정작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금수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마귀를 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외면하는 유대인들을 일컬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독사란? 원래 살모사를 말하는데 살모사는 자기를 낳아준 자를 잡아먹는 자란 뜻입니다.

맞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을 창조한 창조주를 죽인 살모사 새끼들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세상을 짐승의 나라 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예수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몰라보는 자는 모두가 뱀 새끼들입니다.  

세례요한은 이런 영적무지를 어두움이라고 합니다.

이런 어두운 세상에 빛이 비추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상은 그 빛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으니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빛 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선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빛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하고선 만약에 그 빛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합니다.  

아니 세상은 영적으로 소경이라서 예수님을 몰라본다고 해 놓고선 혹시라도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합니다.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몰라보는 것이 정상인데 예수님을 알아본다는 것은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빛을 알아본다는 것은 빛을 알아보는 생명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알아보는 자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컴퓨터에 CD를 넣으면 컴퓨터 안에 이미 CD를 인식할 프로그램이 내장 되어 있기 때문에 작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다는 것은 빛을 알아보는 생명을 가진 사람을 찾아내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하였는데 이는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요 6:44-45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믿게 되는 것은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예수님을 알아본다고 합니다.  

아니 우리가 언제 하나님께 듣고 배웠습니까?

 

이는 창조시에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창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창조 이야기를 구원이야기로 말하는 것은 다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 했다는 것은 천국과 지옥을 창조하셨다는 말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창조했다는 것은 곧 천국백성과 지옥백성도 아울러 창조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창조가 되었다는 말은 이미 만들어 졌다는 것입니다.

이미 확정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영접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의 자녀로 작정 된 자가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창세전에 영생 얻기로 작정 된 자들을 가서 불러낼 뿐입니다.

 

요 10:27절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의 음성을 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르면 예! 하고 따른다고 합니다.  

마치 무덤 속에 있는 나사로를 불어 내듯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사람들의 이름을 각각 불러냅니다.

 

나사로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무덤에서 나왔다는 말은 죽은 것이 아니고 잠자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나사로가 잠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영접하는 사람들을 13절에서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 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알아보는 빛을 성도들의 마음에 비추셨다고 합니다.

 

고후 4:6절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마음에 비취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알아보는 빛을 하나님의 자녀들에 마음속에 비추어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예수님을 알고 영접한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참 우스운 이야기이지요.

어쩌면 불신자들 입장에선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도가 짜고 치는 고스톱과 같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성도의 구원은 삼위하나님과 성도가 짜고 치는 고스톱입니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 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이심이다” 라는 뜻입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이름이 담고 있는 것대로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고 오셨다는 말은 곧 세상 속에 이미 자기 백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마치 비오는 날 학교에 간 아이가 우산을 가지고 가지 않아서 엄마가 자기 아이를 찾으러 간 것과 같습니다.

엄마가 운동장에서 자기 아이 이름을 부르면 자기 새끼는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 오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자녀인지는 예수님을 보내보면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반드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를 찾아내는 일을 전도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믿지 않는 자를 믿게 하려고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복음은 믿는 자를 찾아내기 위하여 선포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외치면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혈과 육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고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두 가지 반응들이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나누이게 됩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고 믿지 않는 자는 마귀의 자녀이기 때문에 안 믿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 속에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갈라내는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믿음은 자랑거리가 아니라 감사거리입니다.

자랑을 하려면 예수님을 알아보고 믿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여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게 하시려고 구원을 했다고 합니다.

 

엡 1:4-6절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거져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2:8-9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너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므로 누구든지 자랑 할 수가 없는 것이라”

 

구원 받은 사람의 특징은 자기 자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뭔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를 일컬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새 사람이란 말입니다.

성도가 새 사람 된 것은 자기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하는 모든 일은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됩니다.  

봉사이든 충성이든 전도이든 헌금이든 심지어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는 것조차도 자기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성도들에게 고지해 주었습니다.

 

벧전 4:9-11절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면전에서 부인하고 저주한 사람입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인간적으로 가룟유다 보다도 더 나쁜 인간입니다.

요즈음 말로 아주 싸가지 없고 의리도 없는 비열한 인간입니다.

 

그런 그가 성령이 임하자 부인하고 저주 하였던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라고 증거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고백적 차원에서 자신의 모든 일이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능력으로 한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역시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진정 거듭난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과는 뭔가 달라도 한참 다르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베드로와 바울과 이 시대 자기 자랑하기에 바쁜 목사나 교인들과 비교해서 뭐가 다를까요? 

이는 베드로와 바울은 진짜 성령을 받았고 이 시대 자기 자랑하기에 바쁜 사람들은 가짜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런 가짜들을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믿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자기 힘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자기 힘으로 한 것이 없으니 자랑도 없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조차도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믿음을 얻기 위해서 인간 쪽에선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믿음을 위해서 또는 구원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면 그는 이단입니다.

그 가르침을 받는 사람도 이단입니다.

 

성경은 믿음을 만들라고도 하지 않고 또한 구원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 예수를 믿으라고만 합니다.  

예수님은 천부께서 심지 않은 것은 모두 뽑힐 것이라고 말하면서 반대로 하나님이 심은 것은 한 알갱이라도 버리지 않고 다 찾아내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선물로 받은 진짜 성도는 어떤 환경에서도 믿음을 져버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구원을 자기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께서 모든 악한 것에서 건져 내셔서 천국으로 인도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딤후 4:18절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 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빌 1:6절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믿음이란? 이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감옥에서도 찬송하고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들도 이러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환경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께 대한 믿음을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처럼 말입니다.

이들이 세상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0:39절에서는 “성도는 믿음을 가진 자이기 때문에 뒤로 물러나 침륜에 빠질 수가 없다” 라고 한 것입니다.

 

또 로마서 8:35-39절에선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는 환란이나 곤고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것으로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 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믿음을 빼앗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외부적인 조건에 의하여서 빼앗길 믿음은 자기가 만들고 자기가 붙들고 있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은 하나님이 관리를 하시기 때문에 그 어떤 것으로도 빼앗겨지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만유보다 크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를 빼앗기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요 10:28-29절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 손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취소 될 수도 빼앗겨 질 수도 없습니다.  

만약 성도가 구원에 대하여 불안해 한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다 지옥가면 어쩌지!

이래 가지고 천국에 가겠는가? 라는 식의 말들은 모두가 거짓 목사들이 거짓 신자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불안해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아니고 자기 믿음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은 가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는 믿음은 진짜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좋은 밭과 나쁜 밭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좋은 밭과 나쁜 밭의 차이는 농부가 관리를 하느냐 안하느냐로 결정이 됩니다.

결실치 못하는 밭은 농부가 관리하지 않기 때문에 새가 와서 쪼아 먹고 가시가 기운을 막고 사람이 밟고 다닙니다.

 

그러니 좋은 밭은 농부가 철을 따라 김도 매주고 물도 주고 새도 쫓아주고 사람이 다니지 못하도록 막아 줍니다.

그래서 좋은 밭은 반드시 결실을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진짜 믿음과 가짜 믿음은 환란에 던져 보면 금방 표가 납니다.

자기가 믿는 믿음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믿음을 포기하지만,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신 믿음은 믿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포기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히 11장에 기록된 믿음에 선진들이며 신약에선 사도들이며 스데반 집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에 시련을 닥치게 하는 이유는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같은 시험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간섭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앞날을 미리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져 하루 하루를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하시며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머리털 하나도 검게나 희게 할 수 없으면서 무슨 걱정을 그리도 많이 하십니까?

근심 걱정 한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라지지 않을 근심 걱정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사십시오.

 

풍랑 속에서도 편안하게 주무시던 예수님처럼 생명은 아버지께 맡기고 함께 주무십시오.

괜히 물 퍼낸다고 호들갑 떨지 마시고,,,

그렇다고 물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아니 풍랑이 거세게 몰아치는 바다에 조각배에 물을 퍼 낸다고 퍼내집니까?

그러니 예수님께서 물 퍼낸다고 호들갑 떠는 인간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자는 것은 고난이고 물을 퍼낸다고 하는 것은 생고생입니다.

고생하지 마시고 고난을 받으세요.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에선 예수님이 당하셨던 것처럼 고난을 당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은 피한다고 해서 피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당하는 필수 코스입니다.

천국 백성이 지옥(이 세상)에서도 편히 살려고 하는 것은 도적놈 심보입니다.

단언하지만 복음과 함께 고난 받는 그 재미도 꽤나 쏠쏠합니다.

 

어떤 환경이든지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하느냐의 차이입니다.

믿음에 눈으로 바라보면 신 나는 일이 되지만 육에 눈으로 바라보면 죽을 맛입니다.  

동일한 환경인데도 어떤 사람은 덤덤하게 지내고 어떤 사람은 울고불고 난리를 칩니다.

어쩌겠습니까? 자기 믿음이 거기까지인데,,,,

 

부디 그리스도의 고난을 즐기실 수 있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십시오.

자라가라는 말은 성화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안목이 깊어지시고 넓어지시고 높아지시고 길어지십시오.

 

바울의 기도로 마치겠습니다.

 

에베소서 3장 14-19=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날을 기약하면서,,,,,,,,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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