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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요한복음 강해)6강. 은혜와 진리를 몰고 오신 예수님 <요 1:14-18>

by coroa 2022. 7. 29.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6강. 은혜와 진리를 몰고 오신 예수님 <요 1:14-18>

요 1:14-18=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정낙원 목사

 

내에덴동산의 두 가지 과실은 두 가지 생명의 세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생명과는 생명의 세계를 말하고 있으며 선악과는 죽음의 세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생명과를 먹으면 생명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고 선악과를 먹으면 선악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과 속에는 사는 법이 들어 있고,

선악과는 죽는 법이 들어 있습니다.

 

법이란? 반드시 그대로 될 수밖에 없는 변할 수 없는 법칙입니다.

즉 생명과를 먹으면 반드시 영생하여야 하고,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어야만 합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고 선악의 법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 죽음의 법칙에 따라서 반드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살고 싶어도 법이 죽게 만들어 버립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죽은 것을 어둠이라고 하고 육이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죽은 세상에 예수님께서 은혜와 진리를 몰고 왔다고 합니다.

 

이 세상엔 은혜와 진리가 없습니다.

세상 쪽에서 보면 아주 낯선 것이 침투해 들어 온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들에겐 은혜와 진리가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은혜의 반대를 법이라고 합니다.

육의 반대를 영이라고 하고 어둠의 반대를 빛이라고 하듯이,,,,

 

예수님께서 법이 지배하는 세상에 은혜로 오셨습니다.

아주 이질적 요소를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세상은 매사에 부딪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딪치는 것을 성경은 고난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고난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너희는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랍니다.

즉 세상의 가치관으로 사는 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미움 받는다고 합니다.

 

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성도는 은혜에 속한 사람이고 세상은 법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동종(同種)에겐 친근감을 표시하는데 이종(異種)에겐 거부감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익숙치 못하고 낯설어서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법에 동질감을 나타내고 은혜엔 이질감을 나타냅니다.

성도들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이질적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어울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법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의 잘못을 지적하고 구속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딤전 1:9-10절 “알 것은 이것이라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하는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

 

사도 바울은 불법한 자를 가두기 위해서 법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여러분 대답해 보세요.

천국엔 법이 필요할까요? 필요하지 않을까요?

필요가 없겠지요.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천국엔 불법한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불법한 자들이 있는 곳은 지옥입니다.

 

그럼 다시 묻습니다.

성도에겐 법이 필요할까요? 필요 없을까요?

필요가 없지요.

왜? 그런가요?

 

성도는 예수라는 은혜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단독자로 보지 않고 항상 예수 안에서 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만 영생으로 보시고 그 외는 모두 죽음으로 봅니다.

 

그래서 성도의 신앙을 누구 안에 있느냐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참 냉정합니다.

예수 안에 있느냐!

예수 밖에 있느냐! 로 산 자와 죽은 자로 나누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공자나 간디 같은 사람은 인간적으로 보면 대단한 성현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천국에 갔을까요?

지옥에 갔을까요?

당연히 지옥에 갔지요.

왜? 그렇습니까?

천국엔 예수 안에 있는 사람만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죄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무엇을 해도 죄가 되는 것입니다.

간디가 비폭력운동으로 인도를 독립시켰지만 하나님 앞에선 죄입니다.

왜요? 예수 밖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일컬어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은 자들인 인간들과는 상대하지 않고, 산 자이신 예수님과만 상대를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것만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법이 적용 될까요?

안 될까요?

당연히 안 되지요.

 

그럼 예수를 믿는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법이 적용됩니까?

안 됩니까?

안되지요.

왜? 그렇습니까?

이는 성도는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진리 안에서 자유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진리 안에서 자유자입니다.

즉 예수님 안에서만 자유자입니다.

 

진리 밖으로 나가면 어찌 될까요?

그럼 법이 따라와서 네 이놈! 너 죄인이지! 하고 잡아 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서 나무에서 떨어진 가지는 농부가 모아서 불태워 버린다고 한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아주 아주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귀 쫑끗 세우고 들으세요.

성도가 진리 즉 예수님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지요.

왜 그렇습니까?

이걸 답을 할 수 있어야 진짜 성도입니다.

 

그럼 이렇게 묻습니다.

여러분이 성도가 된 것은 여러분이 원해서 되었습니까?

아니지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에 의해서 된 것이지요.

 

지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인데 기억하실러나 모르겠네요...

예수님은 혈과 육으로 믿을 수 없다고 했지요.

오직 하나님께서 믿게 주셔야만 믿을 수 있다고 배웠지요.

 

그럼 여러분의 의지로 예수를 믿지 않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당연히 없지요.

왜냐하면! 성도를 예수 안에 넣고 빼고는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예수를 안 믿을 권리조차도 없습니다.

 

천국가기 싫어도 가야만 되는 운명으로 태어난 자들입니다.

마치 야곱과 같아요.

야곱은 이미 엄마 뱃속에서부터 천국가기로 찜이 되었어요.

그래서 사기꾼인 야곱이 천국에 간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하나님이 변덕만 부리지 않으면 예수를 안 믿을 권리조차 없습니다.

즉 하나님이 변덕을 부리지 않으면 성도의 구원은 취소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성경은 하나님은 변덕을 부리시는 분이라고 합니까?

아니라고 합니까?

 

민수기의 이야기로 대신 답을 드리겠습니다.

 

민수기 23장 19절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헛소리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즉 한번 결정 했으면 번복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결정을 후회하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번복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항상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하나님의 법이라고 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원한 것은 온전할 때입니까?

아니면 죄인이었을 때입니까?

 

바울의 말로 확인합시다.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구원을 해 주셔서 사랑을 확인시켜 주셨다고 합니다.

 

그럼 성도가 죄를 짓는다고 하나님이 나 너 구원 취소할래! 라는 말이 될까요?

안될까요?

당연히 안되지요.

아니 죄인을 구원시켜 놓고서 죄 짓는다고 쫓아내면 하나님은 실수 한 것이 되고 거짓말쟁이가 되잖아요.

 

바울은 하나님은 거짓말 할 수가 없는 분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저는 바울로 봅니다.

그래서 바울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6장 18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다면 성도의 구원은 성도의 조건에 따라서 빼앗길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당연히 없지요.

왜? 성도의 구원은 성도의 조건을 보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와 사랑으로 되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어진다면 마귀가 아무리 너 그러면 지옥 간다! 라고 하여도 그 말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즉 거짓 목사들이 당신 그따위로 예수 믿어서 천국에 가겠어? 라고 협박하고 공갈을 치면 미친 놈 지랄하고 있네! 라고 맞받아 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도입니다.

객기가 아니고 실제라야 합니다.

괜히 쪽 팔려서 자존심 세운다고 그런 척하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고 주져 주져 하면서 이러쿵 저러쿵 밍기적 거리면 그 사람은 가짜일 확률이 높습니다.

자기 안에 증거가 없기 때문에 그런 거짓 목사들 한데 쩔쩔 매는 것입니다.

믿음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항상 자기 행위로 믿음을 판단하기 때문에 천국과 지옥이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좀 착하게 살았다 싶으면 그때 예수님이 재림하면 천국에 갈 것 같은데,

술쳐먹고 나쁜 짓하고 교회도 빠지고 농땡이 칠 때 예수님이 오시면 지옥 갈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불교 신앙이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말이 한참 본문에서 비껴갔는데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말해 봅시다.

 

다시한번 정리하는 차원에서 살짝 집고 넘어 갑시다.

 

예수님이 무엇을 몰고 왔다고 했습니까?

은혜와 진리라 했지요.

은혜의 반대가 법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은혜를 몰고 왔다고 하니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이 세상은 어디에 놓여 있었습니까?

법이지요.

그럼 법은 왜? 주어졌다고요.

불법한 자들 즉 죄인을 위해 주어졌다고 했습니다.

 

율법은 죄인들을 가두기 위하여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주었다는 것은 바울의 말대로 유대인들이 죄인이고 망령된 자이고 아비를 치는 자란 말입니다.

 

아까 디모데전서에서 살펴보았지요.

 

다시 봅시다.

 

딤전 1:9-10절 “알 것은 이것이라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하는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

 

유대인은 율법을 받음으로서 어떤 자라고 증명이 되었습니까?

그야 하나님의 뜻에 복종치 않고, 경건치 않은 죄인이고, 망령되고, 부모를 치고, 음행하고, 살인하고, 거짓말 하는 자라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넌 죽일 놈들이야! 라고 율법을 줬는데 유대인들은 그걸 자랑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등신 같은 짓입니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자기 꼬라지를 보라고 줬는데 자랑하고 있었으니,,,,

참으로 눈뜨고 못 볼 가관입니다.

 

유대인들은 모든 인간을 대표하여 있기 때문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고 악한 자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선한 사람은 하나도 없고 악한 자들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에 예수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그것도 은혜와 진리를 충만하게 대동하고 말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지요.

법에 반대는 은혜라고요.

법과 은혜는 반대라 하였으니 법이 죽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은혜는 살리는 것이 되겠지요.

 

예수님께서 법으로 죽이는 세상에 은혜를 몰고 오신 것은 살리기 위함입니다.

누구를요.

그야 당연히 아버지와 약속된 자기백성들이지요.

 

그래서 세례요한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온 것이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합니다.

즉 은혜와 진리를 율법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율법이고, 예수님은 은혜라고 합니다.

 

율법이라는 죽음의 법과 은혜라는 생명의 법을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바라본 세상은 온통 정죄하고 죽이는 세상뿐 이였습니다.  

특히나 유대인들에게 있어 율법이란? 그들의 삶과 신앙에 기준으로서 절대적 진리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무슨 일이든지 온통 율법으로 판단하여서 정죄하고 심판하여 잘라내고 죽이는 일들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모습은 선악의 법에 매여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인간들은 온통 법에 갇혀 있습니다.

두 사람만 모여도 법을 만듭니다.

법으로 서로를 견제하고 구속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법이 난무합니다.

행여 봉사라도 하고 전도라도 하면 기고만장 합니다.

 

반대로 전도하지 않는 사람은 기가 죽어요.

이게 법이 주는 압박감이예요.

그래서 성화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행함 신앙은 사람을 죽이는 겁니다.

교인들을 등급을 매겨서 차별하고 경쟁시켜서 얽어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자고 나면 새로운 법을 만듭니다.

예를 들어 법 아래 있는 사람들은 어제는 성경을 석장 보았는데 오늘은 넉장을 보아야지! 라고 새로운 법을 만듭니다.

어제는 기도를 5분 했는데,

오늘은 10분을 할꺼야! 라는 식으로 스스로 법에 가두는 것입니다.

이제는 술을 끊을꺼야! 라고 법을 만들어요.

지키지도 못하면서,,,,

 

다니엘 시대 다리오 왕처럼 자기가 만든 법에 매여서 옴짝달싹을 못합니다.

이게 인간들입니다.

한국교회 교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있는 곳에는 생명의 숨 쉼이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이 은혜와 진리를 몰고 오셔서 숨통을 터주고 계신 것입니다.

마치 꽉 막혀 썩어가고 있는 수로에 물꼬를 터서 생명의 흐름이 넘실거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서 세상은 비로서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은혜의 물결이 출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구원받기로 작정 된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에 한해서입니다.

예수 밖은 여전히 율법이 숨통을 꽉 죄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간음 중에 붙잡힌 여자를 정죄하고 죽이라고 아우성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인을 은혜와 용서로 대하고 있습니다.

정죄하고 죽이는 유대인들의 율법적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생소한 일이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법에 매인 사람에겐 은혜는 낯선 것입니다.

용서와 자비는 어색합니다.

차라리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죽여라! 죽여라! 하는 것이 편합니다.

도리어 용서하고 살려 주세요! 라는 것은 어색하고 낯이 섭니다.

 

유대인(모든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상선벌악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는 자신들이 알고 있는 율법의 눈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라는 전혀 낯선 하나님이 나타났습니다.

죄인을 용서하는 전혀 낯선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라면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향해 아니 어떻게 저런 인간을 용서하고 살려 둔단 말인가?

저런 인간은 일벌백계하여서 이스라엘의 본을 삼아야 돼!

그래야 하나님 나라로 똑 바로 설 수가 있어! 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생각처럼 죄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유대인들의 말처럼 인간은 용서해서 될 종자들이 아니고 두들겨 패야 말을 듣는 종자들입니다.

멀리서 찾지 말고 여러분들 자식들을 보세요.

아니 자기 자신을 보세요.

 

좋은 말로 하면 듣습니까?

안 듣잖아요.

인간은 말로 해선 안되요.

두들겨 패야합니다.

 

인간들 세계에 정의가 바로 서고 공평이 바로 서려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로 대하여야 된다는 것이 수천 년 역사를 통해서 배운 진리입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분이 지금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용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일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세상에 전혀 낯선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 낯선 하나님을 받아들이면 수 천년 동안 내려오던 인류보편의 가치가 무너지게 됩니다.

지금까지 조상들이 다 율법으로 판단하고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전통을 깨트리려고 합니다.

 

그러니 어쩝니까?

한 사람이 온 인류의 법통을 지키고 인간세상의 안녕을 위해서라면 죽어줘야지,,,,,

그래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만약에 예수님도 유대인들처럼 죄인은 죽여야 돼!

저런 인간은 죽어도 싸! 라고 했다면 십자가에 죽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반대 되는 일을 하심으로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 너만 잘났냐!

그럼 우리는 뭐냐!

에라 죽어라!

그래서 예수님이 유대인들 손에 죽었습니다.

 

은혜로 오신 예수님과 법에 유대인들이 충돌한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은 빛이 세상을 악하다고 하니 어둠이 빛을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죽였다고 합니다.  

암튼 정죄하고 죽이는 세상 속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생명을 살리는 새로운 창조의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죽음의 세상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의 기운이 넘실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은혜를 알고 긍휼을 아는 생명의 사람으로 창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 5:17-21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예수님은 법 아래서 죽은 자들을 은혜로 살리면서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대신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숨어계시던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서 일하시는 모습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난 너희들을 이렇게 대하여 왔다고 알려 주십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서 잘못 알고 있던 하나님 관을 수정해야 했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법으로 대하여 온 것이 아니라 은혜로 대하여 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조상들이 불순종 하였음에도 망하지 않고 여기까지 이스라엘이 끈질기게 유지되어 왔구나! 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율법대로 살아서 유지되어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긍휼히 여기심으로 유지되어 왔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용서해 주신 것은 곧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용서해 주신 것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 뿐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은혜로 살고 있음을 모릅니다.

 

죄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제 정리합시다

 

예수님께서 법이 지배하는 세상에 은혜와 진리를 몰고 오심으로서 죄인이 구원을 받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개벽입니다.

 

흑암에 사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비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 그 빛으로 죽은 자들이 살아 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은혜와 진리로 살려 내십니다.

 

마치 에스겔 37장의 골짜기의 해골들에게 생기가 불어짐으로 마른 해골들을 살려내는 것과 같은 일을 예수님이 하십니다.

 

이제 예수님과 접촉되는 사람들은 생명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비록 흉악한 강도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만나면 용서 받고 은혜와 긍휼의 사람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정죄하고 심판하던 사람에서 생명의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법! 법! 하던 사람이 은혜의 사람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옆구리를 찌르면 은혜와 감사가 튀어 나와야 합니다.

법이 나오면 안됩니다.

법이 나온다는 것은 법 아래 있다는 증거입니다.

 

율법에 매여 있던 사람이 은혜를 말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전혀 다른 사람으로 거듭난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율법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율법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지킬 수도 없는 말씀을 붙들고 유대인들은 숨 막히게 살아왔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율법 외에 다른 의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켜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대신 지켜주는 것으로 의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은혜와 진리를 몰고 오신 구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진리란?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요구하지 않겠답니다.

왜요? 예수님께서 중보자가 되셔서 하나님을 상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하나님과 상대하는 것을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구약시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자랑스럽게 감격스럽게 예수님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세상에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왜?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정죄함이 없는가요?

이는 예수님께서 은혜와 진리로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오심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성도란? 이런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들입니다.

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법에서 해방된 자로서 그리스도의 삶을 대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먼저는 예수님만이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세상에 증거하여야 하고,

나중엔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은혜와 긍휼을 보여주는 삶으로 증거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이런 자유로운 생명을 주셨다고 증거해 주어야 합니다.  

나는 본래 은혜와 긍휼을 모르는 사람이였는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긍휼을 알게 되었다고 증거해 주어야 합니다.

 

변화된 자기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 안에 은혜와 사랑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여야 합니다.

이런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증거하며 산 자가 12제자와 성도들이였습니다.  

제자들을 통해서 나타난 은혜와 긍휼은 제자들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변화된 자기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은혜와 긍휼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며 사는 것입니다.

 

나 같은 악당도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에 용서받았다고 증거하여야 합니다.

바울은 이 감격을 알았기에 죄인 중에 괴수인 내가 용서 받았다고 그 모진 핍박 속에서도 원망하지 않고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음을 더 많이, 더 깊이, 더 넓게, 더 높게 알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하여 내 모든 삶의 끝자락에 주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이 나타나야 하고 감사되어져야 하고 자랑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온 세계 족속들이 알기를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엡 3:14-19=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나 같은 죄인을 은혜와 진리로 찾아오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감사가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부디 이 변할 수 없는 복음에 취하여서 감격하고 감사하고 주님을 찬양하며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여! 그 지긋 지긋한 율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도합시다.용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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