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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요한복음 강해)9강. 물세례와 성령세례 <요1:32-34>

by coroa 2022. 8. 2.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9강. 물세례와 성령세례 <요1:32-34>

요1:32-34=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정낙원 목사

 

요한복음은 기존의 선입견으로 보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수많은 강해서들을 보면 전부 제 각각이에요.

요한복음이 무엇을 증거하는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강해를 하여도 일관성이 없고 본문마다 다 달라요.

 

앞에선 믿음을 말하다가 뒤에선 행함을 말하고 있어요.

어떤 것은 복음적이다 하다가도 어느 순간은 불교식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언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언약을 모르면 요한복음이 어려워요.

소경이 코끼리 더듬기식이 됩니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 이야기로 보면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지요.

모든 성경은 나에 대하여 기록하였다고,,,,

그럼 모든 성경을 예수그리스도 중심으로 조망하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경부선 고속도로가 뻥 뚫리듯이 길이 하나 생기게 되요.

 

그 길이 바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다 하셨다는 새 언약으로 보시란 말입니다.

아무리 성경이 우리더러 이래라 저래라 명령을 한다고 하여도 난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만 다 하셨습니다” 라고 보면 틀림이 없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라고 하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그리스도는 성경을 여는 “마스터 키”라고 합니다.

 

마스터 키란? 모든 자물쇠를 다 여는 열쇠를 말하는 겁니다.

배를 타면 선장이 이 키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어느 선원의 방이든지 이 키로 다 열어요.

 

그럼에도 이 시대 많은 목사들은 예수님이 모든 성경은 나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했는데 무슨 심보인지 예수그리스도의 새 언약 이야기로 성경을 말하면 심드렁해 하는지 모르겠어요.  

교인들도 그저 열심히 하면 복 받고,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될 것이라고 말하면 아멘 아멘들을 하니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어요.

 

지금은 성경 말씀이 복 받는 부적이 되어 인용되고 있어요.

거짓 목사들이 성경 구절 하나씩 이야기 해주면 그것이 무슨 복(福)을 불러 오고 화(禍)를 막아주는 부적인줄 알잖아요.

집집마다 들어가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주여 종의 집에 복을 주옵소서” 라고 대문짝만한 부적을 부쳐놓았잖아요.

 

특히나 장사하는 가게에 가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라는 이 부적이 없는 집이 없어요.

이게 제일 잘 팔리는 부적이래요.  

내가 복 받을 인간인지 저주 받을 인간인지도 모르고 그져 좋다고 하면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너도 나도 따라 합니다.

 

과거에 미국의 존 스토트 목사님이 한국교회를 방문하고 하는 말이 무엇인줄 아세요.

한국교회는 개혁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개종(改宗)이 필요하대요.

이 말은 한국교회가 믿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외국 사람이 잠깐 왔다가 느낀 것이 이러해요.

 

이게 지금 한국 교회의 자화상이에요.

그럼에도 몰라요. 

그러니 이 시대 기독교는 예수를 믿는 기독교가 아니라 인간을 믿는 절간이 되고 말았어요.

 

절간이 뭔 줄 아세요.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곳이에요.

“지성이면 감천이다” 라는 곳이 절간이예요.

절에선 열심히 치성들이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 교회하고 뭐가 다릅니까?

교인들도 새벽마다 밤마다 와서 하나님께 복 달라고 예불 드리잖아요. 

이런 기회에 여러분들의 신앙도 점검 받아 보세요.

내가 과연 예수를 믿기는 믿는가?

내가 뭘 믿고 있는가?

 

그래서 바울은 너희 안에 믿음이 있는가 확증하라 그리스도가 없으면 버리운 자라고 하잖아요.

 

고후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예수님이 그 안에 계신 사람은 예수님이 다 하셨다는 것을 증거해요.

예수님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했다고 하고 하겠다고 합니다. 

아무리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를 말해도 그 속에 예수님이 없는 사람은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사람님! 제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요구를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예수님만 믿으세요! 라고 해도 안되요.

“아니요 제가 할게요” 라고 해요.

 

왜? 그러냐 하면 예수를 믿는 것이 인간의 본성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자기 주체에다 두어요.

자기 주체에다 둔다는 것은 남에게 배제되는 것은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인간들은 항상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야 직성이 풀려요.

 

신앙생활도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해야지 직성이 풀리지 예수님께서 다 하셨으니 믿으세요! 라고 하면 자기는 뒷전으로 밀려나기 때문에 싫어해요. 

그래서 예수는 아무나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어야만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줄을 몰라요.

말씀이 믿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일인 줄 몰라요.

아무나 다 믿을 수 있고 아무나 다 알아 들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다 보니 예수 믿는 것이 감흥이 없어요.

소 닭 보듯이 무덤덤해요.

 

예수를 믿어도 어떤 사람은 순간 순간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살아요.

희열을 맛보고 기뻐하면서 행복해 하고 감사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마지못해서 믿는 것 같이 재미를 모르고 믿는 사람이 있어요. 

이는 성경을 통하여서 감동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진짜 성도라고 한다면 언젠가는 감동 될 때가 있겠지만 말이죠.

 

여하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실력으로는 안 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는 사람은 항상 예수님을 앞세우고 자신은 그 뒤를 쫄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 놓은 것을 따 먹기만 합니다.

 

이래도 고맙습니다.

저래도 고맙습니다.

살려줘도 고맙고,

죽여도 고맙다고 해요.

 

이런 사람을 앞서 앞선 시간에 “소리” 라고 했지요.

다시 복습하는 의미에서 소리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소리” 는 자아가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불행은 모두가 “나 있음” 때문에 온다고 했지요.

“나 있음” 을 지켜 내려니 누가 뭐라고 하면 뿔따구가 나고 남이 가진 것은 다 가지고 싶고 남이 누리는 것은 다 누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 일평생 상대방과 비교하면서 웃었다 울었다 하면서 살고 있는 겁니다.

평생 만족하지 못하고 불만으로 사는 겁니다.

 

그런데 “나 없음” 으로 살면 두려울 것이 없어요.

세상이 두 쪽이 나든지 말든지 광우병 걸린 소고기가 들어오든지 말든지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든 말든 신경 안 써요.

 

이렇게 사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세례요한이고, 바울이고, 초대교회 성령 받은 성도들이었어요.

이 사람들은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사람 아닌 것으로 살았어요.

왜냐하면! 모두가 “나 없음” 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왜? 서두에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오늘 본문이 그걸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세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 세례 다 받았습니까?

아마도 한국교회의 풍토 속에서 자란 사람들은 다 세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저도 세례를 받았으니까요.

세례 안 받으면 목사 할 수가 없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세례 안 받으면 성찬식에 참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성찬식을 집례 해야 하는데 세례 안 받으면 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교회가 요구하는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는 세례 속에 담긴 참 의미를 모르고 받았어요.

 

세례 속에 담긴 참 의미를 알면 지금 교회에서 행하는 세례식이라는 것이 순 엉터리라는 것을 알게 되요.

세례는 의식이 아니고 신앙고백이예요. 

그런데 이 시대는 세례교인 만들기 위해 세례를 의식으로 주어요.  



군대에서 집단 세례 받는다는 것은 아마 한국교회에서만 가능한 일일 겁니다.

어차피 의미 없으니 전시효과를 노리는 것일 뿐입니다.

세례가 희화화 되어 버렸어요.

 

그럼 오늘 세례 속에 담긴 참 의미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물 세례를 받았다고 하지요.

우리 상식으로는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할 것 같은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죄인인 인간에게 세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뭔가 꺼꾸러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세례요한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마 3:13-14=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14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이건 경우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세례를 안주려고 했어요.

아니 상식으로 생각해 보세요.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에 알리려고 보내심을 받은 자이잖아요.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감히 자기가 증거 할 분에게 세례를 준다는 것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건방진 결례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안 됩니다!

주님 왜? 이러십니까?

지금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어디 제가 건방지게 주님에게 세례를 준단 말입니까?

 

내가 주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아야지요! 라고 극구 사양을 했습니다.

이건 세례요한이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난 이렇게 예의가 바른 사람이라고 겸양떠는게 아니고 사실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럼 우리 같으면 내가 예수님이라면 그럼 그렇지 어디 건방지게 인간이 하나님을 세례 준다고 까부느냐 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맙다고 하진 않고 “시끄럽다!

그만하고 빨리 하나님 시키는 대로 해라!

시간 없다” 라고 합니다.

그러자 세례요한이 마지못해서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마 3: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빨리 세례를 베풀라고 하시면서 하신 말씀 중에 의미심장한 말씀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면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라” 고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義)를 이룬다” 는 말입니다.

 

“의란? 옳음” 이라는 뜻입니다.

“의”가 왜? 중요하느냐 하면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가 있으면 하나님도 어쩌지 못해요.

왜요? 옳으니까!

 

그럼 “의”에 반대를 “불의”라고 하지요.

“불의” 는 하나님 앞에 서겠어요.

못 서겠어요.

못 서지요.

 

하나님은 불의한 자를 죽여 버리니까요?

하나님은 의롭고 거룩한 분인데 불의한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선단 말입니까?

그래서 성경은 “의”를 그렇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보시다가 어려우면 그 반대말을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의외로 쉬어요. 

즉 “주 예수를 믿어라” 라고 하면,

그 반대말은 “널 믿지 말라” 는 뜻이지요.

 

누구를 믿으라는 말은 자신을 믿지 말라는 뜻입니다.

“너 믿지 말고 예수 믿으라” 는 말이잖아요.

“너 보지 말고 예수님만 보라” 는 말입니다.

맞아요.

그게 믿음이에요.

 

내 꼬라지가 어떻더라도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예수님만 바라보고 믿으세요.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만 믿으면 되요.

그럼 자고 나면 천당에 가 있을 겁니다.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것은 자기 꼬라지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맨 날 회개 한다는 것이 자기 반성하는 것이에요.

이렇게 살았으니 앞으로 그렇게 살지 않겠습니다.

 

오늘은 기도 안했는데 내일은 할게요.

오늘은 회사에서 회식한다고 빠질 수가 없어서 부득불 신자가 되어서 술을 먹지 말아야 하는데도 술을 먹었습니다.

앞으로는 회식자리 가면 술을 안 먹고 사이다만 먹겠습니다.

지금까진 노래방에 가서 찬송가를 부르지 않고 유행가를 불렀습니다.

앞으론 찬송가를 부르겠습니다.

 

여러분도 그러지요.

웃는 걸 보니 그렇다는 말인지 아니란 말인지 헷갈리네요.

참으로 웃기는 짬뽕들이예요.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눈으로 보면 한국교회는 교인들은 코미디하고 있어요.

신앙생활 하는게 아니고 개그 콘서트 하고 있어요.

 

좌우지간 믿음이란 날 안 보는 거에요.

그러니 교회 올 때 자기 꼬라지 들고 오지 마세요.

자기 것 들고 오지 말고 예수님 것 들고 오세요.

하나님 약속 들고 오세요.

 

하나님 예수 안에서 다 용서 해 준다고 했잖아요.

그것 앞세우고 오세요.

지난시간에 말했잖아요.

하나님은 우리 것 안 받고 예수님 것만 받는다고,,,,

 

다시 의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의” 라는 말은 항상 “불의” 를 고발하면서 다가옵니다.

그래야 “의”가 “의”로 드러나요.

“불의”가 있어야 “의”가 드러난다 이 말입니다.

 

만약에 이 세상이 다 의로우면 예수님의 “의”가 필요 있겠어요?

없겠어요?

필요 없겠지요.

왜요?

이미 “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의”로 세상에 보내셨다고 하면 이 세상이 의롭다는 말입니까?

불의하다는 말입니까?

불의하다는 말이지요. 

불의한 세상에 예수님이 “의”로 오신 이유는, 세상에 “의”를 주기 위해섭니다.

 

왜? “의”를 주어야 합니까?

의가 없으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어요.

죄인이라는 말은 불의 한 자란 뜻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의”를 주어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물론 만세전에 영생 주기로 작정된 자기 백성에 한해서지요. 

이제 그 예수님이 가지고 온 “의”가 어떻게 죄인들에게 주어지는지를 세례를 통하여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하여 의를 이룬다” 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란 말은 의로우신 예수님이 죄인인 인간에게 세례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즉 내가 너처럼 죄인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세례란? 하나 되는 연합을 말합니다.

세례를 받는 사람이 세례를 베푸는 사람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에요.

 

사도바울의 증거를 봅시다.

 

롬 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세례를 뭐라고 합니까?

“합하여 지는 것” 이라고 하지요.

“합하여 진다” 는 말은 “한 몸”

또는 “한 운명” 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럼 지금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서 세례요한에게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세례요한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에요. 

다시 말해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잡아먹은 것이 되요.

역으로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잡아먹힌 것이 되요.

 

요즘 자동차 선전을 보면 빨간 자동차 하나가 서 있는 하얀 자동차를 들이 받고 잡아먹는 것 나오지요.

흰 차가 빨간 차 속으로 들어갔지요.

못 보았습니까?

 

TV 좀 보세요.

TV도 안보고 뭐하고 사세요.

맨 날 성경만 보고 기도만 하고 산다고요.

대~단 하십니다.

어째 아직도 천당에 안가고 계신가 모르겠네요!^ ^ ^

 

암튼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잡아 먹혔어요.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잡아 먹혔으니 이제 예수님의 몸은 의인에 몸입니까?

죄인의 몸입니까?

죄인의 몸이겠지요.

 

편의상 먹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이해를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이끌어 낼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한 비유이니 의미를 잘 듣고 건지세요.

 

아주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잘 들으셔야 해요.

 

그럼 의로우신 예수님을 잡아먹은 세례요한은 의로운 몸입니까?

죄인입니까?

의인이겠지요.

 

자! 보세요!

죄인인 세례요한이 의로우신 예수님 먹었어요.

반대로 의로우신 예수님은 죄인에게 먹혔어요.

서로 뒤 바뀐 것이지요.

 

그럼 예수님은 죄인이 되었고 세례요한은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인 세례요한이 의로우신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어서 빨리 세례를 베풀어서 모든 의를 이루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시지요.

 

자! 보세요.

지금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죄인인 내가 어떻게 의로우신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겠습니까?

제가 오히려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아야지요! 라고 했어요.


그러자 주님이 야! 이 놈아! 네가 나에게 세례를 안 베풀면 넌 죄인으로 죽어!

그러니 빨리 내게 세례를 베풀어서 내가 네 속으로 들어가도록 하란 말이야!

그래야 네가 살어! 라고 하는 것이에요.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의로운 분이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의인이 되는 것은 없어요.

우리 스스로 의인이 되라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고 불교예요.

세상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세상 종교는 인간이 의를 만들어 내요.

물론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도 아니지만,,

 

그러나 기독교는 스스로 의로워 지지 않고 의로운 분이 들어 와서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여전히 죄인인데 그 속에 의로운 어떤 분 즉 예수님이 들어와서 의롭다고 간주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의로운 것”과 “의롭다 간주해 주는 것”은 엄청나게 달라요.

의로운 것은 독자적으로 의를 만들어서 의로워지는 것을 말하고!

의롭다 간주해 주는 것은 실제는 불의한데 의로운 분 안에 있으면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에요.

 

성도는 의인이 아니라 의롭다 인정함을 받은 자입니다.

누구 안에서 의롭다 인정을 받는가요?

예수님 안에서이지요.

 

그래서 제가 입만 열면 예수 안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안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 줄 알겠습니까? 

하나님은 “예수 안에 있는 자” 만 의롭다고 합니다.

예수 밖에 있는 자는 아무리 착해도 불의한 자로 봐요.

왜요?

 

인간 자체가 불의한 조상으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의로우신 예수님을 불의한 나라에 보내신 것입니다.

왜요? 자기 백성들을 의롭다 함을 얻게 해서 천국으로 데려 가려고요.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하늘로서 온 “생명의 떡”이라고 한 것입니다.

 

요 6:51-55=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 ~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생명의 떡이란? 생명을 주는 떡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생명의 떡만 먹으면 살아나요.

예수님이 생명의 떡으로 오신 것은 성도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를 먹으면 죽어도 다시 산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양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성도 안에서 능력이 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밥을 먹었지요.

안 먹은 사람은 없지요.

그럼 묻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힘으로 삽니까?

밥 힘으로 삽니까?

저와 여러분은 밥 힘으로 살지 여러분 힘으로 살지 않아요.

그 어느 인간도 밥 안 먹으면 죽어요.

 

이와 똑 같은 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도에게 먹혀 줌으로서 이제 예수님이 그 성도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를 먹은 사람들은 자기가 산다고 하지 않고 예수 안에서 산다고 해요.

 

예수님의 생명을 주는 방법이 양식이 되어서 밥처럼 성도에게 먹혀 주는 것입니다.

이를 “세례” 라고 하고,

“연합” 이라고 하고,

“한 몸” 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을 먹었기 때문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 힘으로 사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의 살을 먹은 사람 속에 “거한다” 고 했습니다.

 

요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거한다” 는 게 무슨 말입니까?

“산다”는 말입니다.

함께 동거한다는 말이에요.

 

바울도 이 사실을 알았어요.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자기 안에 누가 산다고 합니까?

예수님이 산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지금 바울은 예수님을 먹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울 안에서 이래라 저래라 조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지금 예수님이 조정해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야외로 놀러 갔을 것입니다.

 

그러니 전 여러분에게 감사하지 않아요.

여러분 속에 계신 예수님에게 감사하지요.

제가 여러분에게 고맙습니다! 라고 하는 말은 여러분에게 한 말이 아니고 여러분 속에 예수님 보고 한 것임을 명심하세요.

 

이걸 모르면 원님 태운 나귀같이 되요.

원님 태운 나귀가 무슨 뜻이냐 하면!

어느 날 고을에 원님이 나귀를 타고 마실을 나갔습니다.

그러자 지나가는 사람마다 그 앞에서 절을 꾸뻑 꾸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귀가 어라~ 이 인간들이 나 보고 절을 하네!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귀가 원님도 안 태운채 마실을 나갔어요.

그런데 어느 사람도 절하지 않아요.

이 놈은 사람들이 원님에게 절한 것인데도 자기에게 절한 줄 알았어요.

 

그래서 나귀가 화가 나서 사람을 들이 받았어요.

왜? 내게 절하지 않느냐고,,,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겠어요.

사람들이 잡아서 몸 보신 해 먹어버렸지요.

 

그러니 여러분도 건방떨지 말라는 말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제 안에 안 계시면 설교 할 수 없어요.

예수님이 제 입술을 사용해서 설교를 한 것이에요.

 

그러니 설교를 잘하든 못하든 개의치 않고 떠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속에 안 계시면 어느 귀신이 잡아 가는 줄도 모르게 낚아채 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시면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 14:16-20=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게 무슨 말인지 성령을 받지 않으면 절대로 이해가 안돼요.

성령 안 받으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한다고 합니다.

말 같지 않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런 말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려고 하지 마세요.

이해 할 인간도 없거니와 이해시킬 수도 없어요.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만 알지 받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알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세상에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예수 잘 믿을 수 있습니까요? 라고 물으면 그냥 씩 웃고 마세요.

믿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지 마세요.

믿음은 논리적으로 설명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주 예수를 믿으세요.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다 담당해 주셨습니다! 라고 하면 알아먹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을 만나거든 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구나 라고 짜장면도 먹고 함께 노십시오.

 

그럼에도 따라 오면서 그게 뭔데요!

어떻게 하면 예수 믿을 수 있어요! 라고 하면

아! 나 지금 무진장 바쁘거든요!

지금 하나님 만나야 할 시간이거든요 하고 피하세요.

괜히 말해줬다가 욕 먹습니다.

 

인간이란 묘해서 자기가 무식해서 못 알아먹은 것을 꼭 남에게 탓합니다.

꼭 일 못하는 놈이 연장 나무라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성경은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했어요.

도리어 밥을 안주고 이런 돌맹이 준다고 달려들어서 물어 버립니다.

 

지금까지 물세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세례가 물세례만 있는게 아니고 성령세례도 있어요.

참 복잡하지요.

 

하지만 어쩝니까?

속지 않으려면 알아야지요.

하도 사기꾼들이 많으니 속지 않기 위해서도 배워야지요.

 

여러분 기독교 방송 틀어보세요.

거룩한 사기꾼들이 광명의 천사처럼 위장해서 모습들은 전부 부처님 닮아 가지고 허여 멀게 가지고 얼마나 달변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지 육적 신자는 그냥 뽕하고 넘어 가게 되어 있어요.

울렸다 웃겼다 얼마나 잘합니까?

복음을 안다는 나도 야! 어쩌면 저렇게 잘할까? 탄복이 나옵니다.

 

여러분 원래 하나님께서는 먹고 살아갈 양식이 되는 유실수들은 못생겼어요.

과실을 맺는 나무들을 한 번 보세요.

하나같이 과실을 안 맺으면 만고에 쓸모가 없어요.

땔감 밖에 쓰지 못해요.

 

포도나무를 보세요,

사과나무를 보세요,

배나무를 보세요,

복숭아나무를 보세요,,,,,,

이런 나무는 과실이 없으면 어디다 쓰겠습니까?

 

그런데 양식이 되지 않는 관상수들을 보세요.

멋있지요.

하나 같이 쭉쭉 뻗어서 시원시원 하지요.

 

그런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지 못해요.

먹고 배부르게 하지도 못하는 것들이 쭉쭉빵빵으로 사기를 쳐요.

거짓 목사들이 그래요.

 

여러분 가정사로 한번 말해 볼까요.

여러분의 어머니를 한번 보세요.

자식들을 키우고 살림한다고 가꾸지 못해요.

 

손도 엉망이고 얼굴도 엉망이예요. 

새벽부터 일어나 가족들 건강 챙긴다고 고생고생 합니다.

고생하는데 무슨 매력이 있겠어요.

 

그런데 바깥에 유흥가 아가씨들을 보세요.

곱지요.

화려하지요.

예쁘고 멋있지요.

 

한마디로 샤방 샤방입니다.

샤방 샤방이 뭔 말인 모르겠지만,,

집에서 몸빼 입고 사는 마누라만 보다가 술집에 가서 아가씨들을 보면 눈이 홱 돌아갑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자기 마누라를 위해서는 짠돌이처럼 살지만 술집 아가씨들 한데는 얼마나 후하고 관대합니까?

마누라가 선물 하나 사달라면 지랄 지랄하면서도 술집여자가 사달라면 얼씨구 하고 사줘요.

이 등신들이,,,

 

나도 남자지만 죽일 놈들입니다.

남자들은 다 등신들이예요.

하나 같이 속물들이에요.

 

이게 다 그 속에 어둠이 가득하기 때문에 그래요.

어둠에 특징이 생명을 주는 것을 천대해요.

이게 다 죄때문 입니다.

죄가 눈을 가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생명의 떡으로 오신 우리 예수님도 볼품이 없어요.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아요.

반대로 바리새인들은 멋있어요.

옷도 거룩한 제사장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해 보세요.

사람들의 시선을 하나로 사로잡아 버려요.

 

그런데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로 삼십년을 살아서 손도 투박하고 얼굴도 험상 굳고 인간의 매력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에게선 생명이 나왔고 바리새인들에겐 죽음이 나왔어요.

 

하나님은 어느 시대나 이렇게 일하세요.

생명은 항상 천하디 천한 모습으로 와 있습니다.

인간의 상식을 비껴가는 방식으로 와 있어요.

왜요?

인간들이 알아먹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에덴동산에 선악과 보세요.

얼마나 멋있었으면 하와가 보는 순간 뽕하고 빠지고 말았겠어요.

보임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다는 것은 매력이란 매력은 다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죽이는 나무에요.

 

여러분 신앙을 매력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생명은 아스팔트에서 자라지 못해요.

생명은 거름더미에서 자랍니다.

 

좋은 말 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마세요.

생명의 말씀은 아프고 쓰라려요.

우리의 아픈 곳을 푹푹 쑤시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의 죄를 고발하면서 다가오기 때문에 아파요.

 

생명은 하루아침에 쑥 크지 않아요.

많은 비바람에 시달리면서 조금씩 조금씩 자라가기 때문에 인내가 필요하고 힘이 드는 것입니다. 

공산품은 공장에서 완제품으로 콱 찍어서 단번에 생산해 냅니다.

 

하지만 생명은 씨에서 싹으로,

싹에서 잎으로,

잎에서 나무로,

나무에서 꽃으로,

꽃에서 열매로 자라가는 과정이 길어요.

 

그래서 신앙생활이 힘이 든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세례를 살펴봅시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분이라고 합니다.

 

마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받은 물세례는 의인이 죄인에게 연합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서 죄인이 되어 죽음으로 뛰어든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의 죄 값을 치르려고 뛰어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어야 했어요.

만약에 예수님이 안 죽었으면 성도가 구원을 받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죄 값을 치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반드시 죽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걸 모르는 베드로는 멋진 신앙고백을 하고 예수님에게 칭찬을 듣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는다고 하니 극구로 말렸지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고맙다 베드로야 너 참 의리 있다 라고 하지 않고 대번에 사단이라고 합니다.

 

마 16:22-23=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왜?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죽지 않게 하겠다고 하는 것을 사단이라고 합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죽지 않으면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해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책망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온 족속에게 아버지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교회들이 성도들에게 세례를 베풀잖아요.

그 세례의 의미가 곧 “넌 죽은 자” 라는 뜻입니다.

“넌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죽은 놈” 이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잡아다가 예수 안에 집어넣어서 죽이라는 말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자기화 시켜야 되요.

왜냐하면! 성도는 예수님과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함께 죽은 것입니다.

 

골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 하셨어요.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을 하셨습니다.

성령이 죽은 자를 살려내시는 겁니다.

 

이제 예수님을 부활시킨 그 성령을 보내서 성도를 살려내는 일을 하십니다.

 

시 104:29-30=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30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범죄하자 죽여 버렸지요.

그런데 그 죽은 자들을 주의 영을 보내서 창조하신다고 합니다. 

이는 곧 성도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이시고 성령을 보내서 살려내는 일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분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 세례를 베풀게 되면 그 성령 세례를 받은 자들은 예수님의 생명 안으로 빨려 들어가서 살아나게 됩니다. 

아까 세례를 “하나가 되는 연합” 이라고 했지요.

그럼 성령 세례 또한 역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성령이 인간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성령 세례입니다.

성령이 쳐 들어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것으로 살아납니다.

그러면 이제부턴 성령에 붙잡혀서 살아가게 됩니다.

 

살아난 그 사람은 이제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살아 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속에는 예수님이 들어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령은 아무나에게 주어지지 않아요.

오직 자기백성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다 볼 수 있었어요.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아무나 볼 수 없어요.

오직 성령을 받은 사람만 볼 수가 있어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님 안으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세례라고 합니다. 

성도에게 성령이 임함으로서 성도는 성령 안으로 끌려 들어간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보내 주신 분이므로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푼 것이나 동일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보고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분이라고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을 보면 오순절날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자 조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돌변해 버리지요.

성령이 암하기 전에는 겁에 질려서 문을 잠그고 죽을까봐 벌벌 떨었어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고 나자 갑자기 담대해져서 죽음도 불사하고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고 증거합니다.

이는 그들 속에 부활의 능력이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긴 예수님이 그들 속에 들어와 계셨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성도는 그 속에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이 들어와 계시기 때문에 죽음이 삼켜도 소화시키지 못하고 뱉어 내게 되어 있어요. 

마귀가 의로우신 예수님을 감당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무덤에 붙잡아 두지 못하고 토해 낸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런 일이 성령의 세례로 성도에게 주어졌습니다. 

성령이 죽었던 예수님을 살려 냈듯이 성도도 살려 내실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나 없음” 으로 살면 세상이 주는 두려움은 사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울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으로 남기 소원하면서 바울의 간증으로 오늘 설교를 마칩시다.

 

고후 6:9-10=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기도합시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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