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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100강. 해산의 고통과 아들을 얻은 기쁨 (요 16:16-25)

by coroa 2022. 1. 6.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00강. 해산의 고통과 아들을 얻은 기쁨 (요 16:16-25)

-.정낙원 목사

 

요 16:16-25=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 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25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고진감래(苦盡甘來)란 말이 있습니다.

쉬운 말로 고생 뒤에 낙이 온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을 한다고 하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셨다가 성령으로 다시 오심을 여자가 해산(解産)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인이 아이를 낳는 것은 죽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낳은 아이를 품에 안는 것은 새 생명을 얻음과 같습니다.

아이를 낳기 까지는 두렵고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품에 안으면 그 어떤 것으로도 비교 할 수가 없이 기쁨으로 충만해 집니다.

 

만물은 예수님이 창조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의 이치 속에는 예수님이 하실 일이 예표적으로 담겨져 있습니다.

세상 만사 그 어느 것도 예수님과 연관되어 있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을 하는 것도 그렇고 아이를 낳는 것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천국에서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일은 이 세상에서만 있는 일입니다.

왜? 이 세상에서만 있을까요?

이는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 속에 예수님의 일하심에 비밀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만물의 존재 목적은 만물이 존재하는데 있지 않고 예수님의 주 되심을 드러내는데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드러내는 도구로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도 예수님을 드러내는 시청각 자료로 사용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아이를 해산하는 일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표상(表象)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을 가지고 예수님 자신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으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성도들의 구원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어미가 해산의 고통이라는 죽음을 통하여서 아이가 낳아지듯이 아담 안에서 낳아진 “나” 라는 옛 사람이 죽고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죽으심이 있고 우리는 그 예수님의 죽으심 안으로 끌어당겨짐을 맛보게 됩니다.

즉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으로서의 거듭남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아담 안에서 난 옛 사람은 어미와 같고, 예수 안에서 거듭난 새 사람은 아이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새 사람은 옛 사람으로부터 낳아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옛 사람의 죽음을 바탕으로 하여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옛 사람은 새 사람을 낳아준 어미와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잘 이해하고 들으세요.

 

하나님이 피조물 속에 담아 놓은 새로운 생명의 낳아짐의 비밀은 반드시 기존의 생명에 죽음을 통하여서 새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씨가 죽어서 나무를 내듯이 육에 속한 사람이 죽음으로서 영에 사람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무 한 그루가 살아났으면 씨 하나가 죽었다는 뜻입니다.

나무는 씨의 죽음을 통해서 낳아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도 반드시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구원 받았다고 하는 말은 예수님이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럼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것을 자랑 할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를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 한다고 합니다.

이 찬미를 하라고 구원을 해 주신 것입니다.

이걸 놓치면 안 되어요.

이걸 놓치게 되면 나 구원 받은 것을 자랑하게 되어요.

이건 구원의 목적에서 이탈된 악이에요.

 

많은 분들이 이걸 놓치고 있어요.

어떻게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까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예수 믿고 행복하게 살까를 궁리하고 있어요.

관심사가 자기에게 있어요.

이건 주객이 전도가 된 것입니다.

 

이건 기독교가 아니고 이방종교에요.

이방종교는 신앙의 바탕에 자기가 있어요.

나를 위한 신이지 신을 위한 내가 아니에요.

 

그러나 기독교는 신앙의 바탕에 예수님이 계세요.

예수님을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에요.

예수님이 있고 내가 있는 것입니다.

 

이걸 세례요한이 잘 보여주었어요.

나는 망하고 그리스도가 흥하여야 한다고 했잖아요.

이게 신앙이에요.

 

나는 망해도 좋아요.

이게 도구로서 창조가 된 피조물들이 살아가는 자세에요.

나는 예수를 드러내는 도구로 창조가 되었으니 내 몸에서 어찌하든지 예수님의 일하심만 증거되면 된다는 자세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내 삶에 목적이 내게 있지 않고 예수님에게 있어야 합니다.

 

재삼 강조하지만 신앙생활이란? 나 구원 받았다 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나로 살게 하신 예수님을 찬미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면 사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예수님이에요.

 

그러니 신앙생활의 포카스가 예수님의 죽으심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속에서 내가 산다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삶 속에서는 예수님의 살으심이 우리 몸에서 나타나게 하기 위하서 역설적으로 나는 날마다 부인당하고 죽임당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 몸에서 예수가 존귀케 되려면 나는 후패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나는 망하고 예수가 흥하여야 한다는 고백이 바로 이 고백인 것입니다.

이걸 제발 좀 잘 이해하세요.

 

죽음이란? 고통스럽습니다.

자기를 버려야 하는 것이므로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통하여 새 생명이 낳아 진 것을 보면 새로운 생명을 얻은 기쁨이 죽음이라는 고통을 다 잊게 해 줍니다.

 

여인이 아이를 낳기 까지는 두려움으로 고통스러워합니다.

하지만 낳아진 아이를 품에 안으면 그 어떤 기쁨과도 비교 될 수가 없이 영광스럽고 행복합니다.

여자에게 있어 아이란? 해산의 고통이라고 하는 사투(死鬪)를 통해서 얻어진 전리품과 같아요.

아이를 전리품이라 함은 해산이라는 전쟁을 치루고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를 낳은 여자는 그 아이를 통하여서 자신의 죽음을 보고 자신의 살아남을 봅니다.

어미에게 있어 아이란 자기의 모든 것입니다.

자신의 살점이고 자신의 생명입니다.

어미는 아이와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이는 자신의 죽음으로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 그러합니다.

아이 낳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은 여자가 아이를 낳는 아픔과 같은 것이지만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제자들 속으로 다시 오시는 것은 아이를 안은 기쁨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기쁨을 제자들에게도 함께 공유케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기쁨으로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 슬픔과 부활하심에 그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속으로 끌어 들여서 예수님의 운명과 동일시해 주겠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 속에 우리를 초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아픔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자기들을 떠나가신다는 것은 죽음과도 같이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과 함께 동거동락을 해 왔습니다.

예수님이 든든한 버팀목으로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그늘 아래 보호 받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분이 지금 떠나시겠다고 합니다.

이별을 고합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죽어서 자신들을 떠난다는 말은 자신들의 죽음과도 같이 슬픈 일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시고 나면 자신들은 고아처럼 버려짐을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자연히 근심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제자들의 마음을 다 아시고 위로를 하십니다.

얘들아! 너희들이 잠시 근심에 쌓이게 되지만 곧 기쁨으로 충만 해 질 것이라고 합니다.

마치 여자가 아이를 보고 기뻐하듯이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너희들을 영영히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잠시 후에는 내가 다시 와서 너희들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슬퍼하지 말라고 합니다.

 

죽음이란 슬픔이고 부활이란 기쁨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죽음과 부활은 한 셋트로 묶여져 있습니다.

고난 뒤에 영광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난을 복이라고 합니다.

 

고난이 주어진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증거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고난은 감추어진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참 믿음은 고난 속에서 증거가 되어 집니다.

 

이 원리를 우리 신앙의 삶에 적용해 보세요.

인간의 본능은 육신이 편해지고자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어느 인간도 몸뚱아리를 이길 장사는 없어요.

 

인간의 본능은 자기 육신 챙기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도 육신의 안락함을 얻고자 찾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등 따습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떠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신명기 31장을 봅시다.

 

신 31:20-22=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지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21 그들이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 22 모세가 당일에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쳤더라”

 

모세는 지금 이스라엘의 배도를 예언하고 있어요.

언제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가 하면 먹어 배부르고 살지면 다른 신을 섬긴다고 합니다.

바울은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오는데 사람들이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기 보다 더 한다고 했어요.

 

인간에게 있어 배부름은 타락의 지름길이에요.

인간은 배부름을 이기지 못해요.

등 따습고 배가 부르면 육신의 쾌락을 쫓아가게 되어 있어요.

본성이 그래요.

 

사람이 먹고 살기 바쁘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요.

일단 목구멍에 풀칠부터 해 놓고 나야 다른 것을 생각을 해도 하게 됩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그 말이에요.

아무리 금강산이 아름답고 보기 좋아서 구경을 하고 싶어도 배가 불러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이 쾌락을 추구한다고 하여도 먼저는 배가 불러야 합니다.

물질의 부유함은 반드시 쾌락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인류 역사는 먹고 배부를 때 인간의 추악함들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죄악이 관영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로마를 비롯하여 제국의 멸망도 배부름으로 기인되었어요.

 

지금 우리나라도 망하는 길에 들어섰어요.

교회가 그 상징이에요.

교회의 타락은 그 사회의 타락상을 계시하고 있어요.

교회나 교인들이 물질적 가치에 푹 빠져서 허덕이고 있어요.

이건 타락입니다.

 

이 시대 배가 부르니 각양의 타락한 모습들이 사회적으로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교회도 돈이 넘치니까 세속적 가치가 진리처럼 증거되고 있어요.

한마디로 돈 지랄들을 하고 있어요.

돈이 있으니 몸뚱이를 즐겁게 하려고 쾌락을 찾아서 쫓아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이든지 세상 인간들의 역사이든지 항상 배부름은 반드시 타락을 몰고 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육신의 편안함을 허락하지 않아요.

육신의 소욕대로 살아지지 않도록 달달 볶는 겁니다.

 

우리는 달달 볶임 속에서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어요.

힘들어야 찾아요.

이를 알고 시편 기자는 고난당함이 내게 유익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주의 율례와 법도를 배우게 되었다고 했어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고난은 하나님과 가까이 하게 하고 배부름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고난으로 집어넣고 함께 동행하시고자 해요.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뉘라서 이 깊디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까요?

 

그러므로 고난이 없는 신앙은 가짜일수가 있어요.

참 신앙은 반드시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이 가신다고 하니 슬퍼하는 이유는 뭘까요?

지금까지 누리던 영화를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가히 상상 할 수 없는 일들을 겪었어요.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우쭐했어요.

잘난 척 했어요.

제자들은 지금까지 예수님 때문에 고통당하지 않았어요.

아픔이 없었어요.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으로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샀어요.

 

그러니 제자들 입장에선 예수님이 계속 남아서 갖가지 기적을 베풀어 주기를 바랐어요.

그래야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부러운 일들이 다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죽고 없으면 닭 좇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어찌 슬프지 않겠어요.

 

제자들은 모두가 예수님을 통해서 육적인 안락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은 곧 우리들의 모습이에요.

우리도 예수를 이용하여 육신의 안락함을 추구하고 있잖아요.

신앙을 핑계로 행복하고자 하잖아요.

그러니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허상(虛想)인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게 되어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예수님을 본 받게 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 받는다는 말은 우리가 예수님을 닮은 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가신 그 발자취를 따라 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답습하게 되어 있다는 말이에요.

 

성화주의자들은 예수님을 본 받으라고 하니 마치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앙을 행함으로 몰아갑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예수님을 본받으라는 그 말의 뜻은 그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운명 속으로 등 떠밀려서 가게 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발자취를 따라가게 되어 있어요.

이걸 예수님을 본 받는다고 합니다.

 

물론 성도는 예수님의 성품을 닮도록 성령의 간섭하심이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처럼 완전하고 온전한 것이 아니에요.

원함은 예수님처럼 온전하고 싶지만 우리 몸이 그렇지가 못해요.

그러니 늘 마음에 원함이 우리의 육신의 연약함을 고발하고 죄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으로 살고 있음을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예수님 몸과 달라요.

예수님의 몸은 죄가 없는 몸이지만 우리 몸은 죄의 몸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 몸으로 예수님의 삶을 온전하게 살아 낼 수도 없을뿐더러 예수님처럼 완전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 할 수도 없어요.

 

성화주의자들이 오해하기를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온전하게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삶에 변화도 있어요.

부분적이긴 하지만 말이에요.

그러나 온전치는 않아요.

우리 몸은 성령이 와도 육신의 본능과 본성은 변하지 않아요.

도리어 변할 수 없다는 것을 더 뼈저리게 알게 되어요.

 

그래서 “아! 나는 안 되는구나!”

“이래서 내가 죄인이구나!”

“나라는 인간은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을 수 밖에 없는 자이구나!” 를 알게 되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본성과 반하는 역설적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구요.

그래서 이런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새 언약을 믿음으로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본성은 예수를 믿기 전이나 믿고 난 후나 동일해요.

굳이 달라졌다고 한다면 예수를 믿기 전에는 내 가능성으로 살았는데!

예수를 믿고 난 후에는 내 가능성을 포기하게 된 것이 달라졌다고 한다면 달라진 것입니다.

성령이 오기 전에는 내가 죄인임을 모르고 내가 죄 앞에 무기력한 것을 몰랐는데 성령이 오시고 난 후로는 내가 무능하고 무기력한 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나는 죄를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을 안다는 것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자기 가능성을 점점 포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예수님을 더욱 더 믿게 되어 있어요.

이게 성령 충만이에요.

 

성령 충만이란? 자기의 연약함을 알고 예수를 잘 믿는 것이에요.

 

성령이 충만하면 성화주의자들처럼 말씀대로 살아서 자신을 반듯하게 포장하여서 의인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주여 난 죄인입니다!”

“내 안에 선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됩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어 있어요.

상한 심령이 일어난다구요.

 

“난 할 수 있어!” 가 아니고!

도리어 절망을 하고 “나는 이래서 안 되는구나!”

“예수님이 홀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구나!” 를 알게 됩니다.

“이래서 예수를 믿음으로서만 의롭게 되는구나!”를 알게 되어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성화주의자들처럼 성령 충만으로 하나님 뜻대로 살아서 자기 가치 챙기기를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 시대 인간의 가능성을 부추기는 성화주의자들이 바로 예수님 초림 때 바리새인들이어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는 것으로 신앙 속에 자기 영광으로 가득했어요.

 

이게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러지요.

아버지여 난 저기 저 세리와 창기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구제도 했습니다.

 

자신은 저들과 다르다고 합니다.

상대와 비교하지요.

이걸 “비교적 우월성” 또는 “상대적 우월성” 이라고 합니다.

무엇으로 비교하고 다르다고 합니까?

자기 행함을 근거로 비교하고 차별성을 두고 있지요.

지금 이런 짓을 성화주의자들이 하고 있어요.

 

그래서 나는 저 세리와 창기들하고 다르다고 하잖아요.

저기 저 세리와 창기들은 맨 날 죄만 짓고 살았지만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니 나 칭찬해 주세요! 라고 했어요.

이에 예수님이 에라이~ 이 독사 새끼들아!

지옥으로 가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저주 한 것은 그들의 삶이 나빠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 뿐이에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삶을 근거로 하나님의 은혜에 거하지 않고 착하게 살았다는 법에 거하였어요.

법에 거하면 저주에요.

 

법은 자기 행함을 근거로 역사를 합니다.

자기의 착한 행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게 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어요.

자기들이 너무도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가 철철 흘러 넘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가 필요치가 않아요.

예수 믿을 필요가 없어요.

도리어 인간에겐 의가 없다고 하는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자신들의 가치를 부정하는 예수를 두고 볼 수가 없으니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를 잘 알고 있어요.

잠시 후면 바리새인들의 손에 죽임 당할 것을 알고 있었어요.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서 율법주의자들의 손에 죽임 당하고 부활하심으로서 그들의 신앙이 틀렸음을 알리고자 합니다.

또한 율법주의 신앙에 허구성을 알리고 그들의 율법 신앙을 깨트리고자 하심입니다.

 

그래서 떠나기 전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에 의미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 의미를 모르고 불안해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근심이 가득 찬 제자들에게 슬퍼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슬픈 일이 아니고 기쁜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을 여자가 아이를 해산하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해산의 고통과 낳은 아이를 품에 안음은 극과 극입니다.

아이를 낳는 일은 두렵고 아픈 일이지만 아이를 품속에 안는 일은 감사와 기쁨과 영광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제자들 입장에서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하늘에 것을 가득 안고 오십니다.

하늘에 신령한 복들을 듬뿍 안고 오십니다.

 

죄사함을 안고 오시고!

부활을 안고 오시고!

영생을 안고 오시고!

천국을 안고 오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면 여자가 아이를 안는 것과 같은 기쁨으로 충만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십시다.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근심 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역설이면서도 또한 반전입니다.

 

만남과 헤어짐이나 슬픔과 기쁨은 극과 극입니다.

마치 천국과 지옥과 같습니다.

만남이 천국이라고 한다면, 헤어짐은 지옥입니다.

헤어짐은 잃는 것이라고 한다면, 만남은 얻음이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다보면 만남과 헤어짐이 늘 반복하여 일어납니다.

 

가까이는 가족으로부터 만남과 헤어짐이 일어나고!

사랑하는 연인과의 만남과 헤어짐이 있고!

친구와 직장 동료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이 있고!

이웃과 만남과 헤어짐 있고!

교회 안에서 교우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이 있습니다.

 

만남은 기쁨이지만, 헤어짐은 슬픔입니다.

물론 헤어짐이 슬픔은 사랑하는 사이에 한해서입니다.

미운 사람일 것 같으면 헤어짐이 기쁨이 되지만 사랑하는 사람일 것 같으면 가슴 아픈 일입니다.

 

헤어짐을 이별이라고 합니다.

이별이란? “떼 놓을 이(離)”에, “나눌 별(別)”입니다.

이건 강제로 떼어 놓는다는 뜻입니다.

 

이별은 나의 원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외부의 힘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헤어지고 싶지 않은데 타의로 인해서 떨어지는 것이므로 가슴 아픈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별은 슬프고 아픈 것입니다.

 

자의에 의해서 헤어진다고 하면 슬픈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헤어지고 싶지 않은데 타의에 의하여 헤어지게 되면 그 이별의 아픔은 가슴 속에 깊은 상처가 되어서 한(恨)으로 남게 됩니다.

그 한을 품고서 사랑하는 님을 평생 그리워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이별을 싫어하고 헤어짐을 고통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별(離別)이 뭐냐?

갈라지기 싫은데 갈라져야 하는 아픔이에요.

슬픔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별이 싫은 겁니다.

 

지금 제자들도 예수님과 이별을 앞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슬픈 겁니다.

그런데 말이죠.

참고적으로 말을 합니다.

 

신앙이란? 기존으로부터의 이별을 전제하고 있어요.

떠남을 강요받게 되어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감을 입게 된단 말입니다.

 

구원이란? 기존으로부터 빼내심을 입는 겁니다.

그러니 세상으로부터의 이별이지요.

아픔인 겁니다.

 

믿음에 조상인 아브라함을 보세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와서 하신 첫 마디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합니다.

이건 생이별을 시키는 것입니다.

육신의 부모로부터 떠남이란? 죽음을 상징해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러한 이별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집단 속에서 안위를 받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간은 가족을 이루고,

이웃을 만들고,

마을을 이루고,

국가를 이루고 살아갑니다.

 

이처럼 집단 속에서 안위를 받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에요.

바벨탑을 쌓을 때도 헤어짐을 면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야속하게도 이러한 인간의 아픔도 모른 채 아브라함을 부모 친척 고향으로부터 떠나라고 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야속합니까.

 

이처럼 아프고 눈물 나는 이별은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찾아옵니다.

특히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성도들에게 필수 코스처럼 다가와요.

그러므로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수많은 사람과의 만남과 헤어짐이 일어납니다.

자의에 의하여서도 일어나지만 타의에 의하여서도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강제로 만나게도 하시지만 또한 강제로 헤어지게도 하세요.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과 헤어지는 것도 타의에 의한 이별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른 이별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의 헤어짐을 인간들이 알고 있는 헤어짐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 슬픈 겁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우리는 슬픔에 익숙지 않아요.

그래서 슬픈 일을 닥치면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왜? 예수님과의 헤어짐이 아프고 눈물이 날까요?

이는 예수님이 없음이 자기들에게 해(害)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계산 하면서 살아가는 동물이에요.

인간은 산수(算數)로 살아가요.

무엇을 하든지 이것이 자기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 를 따집니다.

그래서 계산된 행동을 합니다.

 

감탄고토(甘呑苦吐)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나에게 유익이 되면 만나고 해가 되면 안 만납니다.

얻을 것이 있으면 찾아 가고, 잃을 것이 있으면 숨어 버립니다.

인간 세상에서의 만남과 헤어짐은 철저하게 자기 손익계산으로 일어납니다.

 

하지만 신앙에 만남과 헤어짐은 다릅니다.

나의 유리와 불리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만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쓰임 받는 삶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유리와 불리를 따지지 않아요.

다만 언약을 이루어 가는데 쓰고 계실 뿐이에요.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유리와 불리와 상관치 않고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겐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은 엄청난 손해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아픔입니다.

 

아브라함을 일컬어 믿음에 조상이라고 하지요.

그럼 믿음으로 사는 성도는 아브라함처럼 다스림을 받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브라함처럼 다루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의 인생사도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만나고 헤어짐을 당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유리와 불리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저도 수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여 왔어요.

처음엔 속상하고 아프고 힘들었는데 이젠 그러려니 해요.

그만큼 맷집이 생긴 겁니다.

맷집이 생기다 보니 이젠 헤어짐이 예전처럼 아프지 않아요.

 

“아! 또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만나게 하시나 보다!” 라고 덤덤하게 생각을 해요.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지하고자 하는 나의 연약함을 아시고 강하게 하시고자 훈련을 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하시는 훈련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훈련을 받게 되어 있어요.

 

사도행전을 보면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고 난 후 하나님께서 빌립을 전도자로 사용을 하십니다.

빌립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만남과 헤어짐을 당합니다.

만났다 싶으면 헤어집니다.

하나님이 빌립을 강권적으로 움직이십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에요.

 

예수 안에서 만났으니 서로 오래 사귈 만도 한데 하나님은 그걸 허락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각자 하나님께서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반갑게 만나게 하다가도 싸우고 헤어지게도 하십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 안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사소한 일로 싸웁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고 헤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둘을 각각 전도자로 사용 하십니다.

바울도 한 몫을 담당하고 바나바도 한 몫을 담당합니다.

결국 하나님께 유익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갈라놓고자 하십니다.

 

새로운 일을 꾸미시고자 하심입니다.

예수님 대신 제자들을 사용하시고자 하심입니다.

그래서 갈라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세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떠난다고 합니다.

아버지께로 갔다가 다시 온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습니다.

 

“가신다는 것”은 무엇이고!

“또 다시 오신다”는 것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떠나가심”을 “죽음”이라고 한다면!

“다시 오심”은 “살아나심”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죽었다 살아난다는 말입니다.

이건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가신다는 것은 죽음으로 이해를 했어요.

그래서 가신다고 하니 근심하고 슬퍼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또 다시 오신다는 것은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이야 모든 인간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라서 이해가 되지만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것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자신에게 닥칠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장차 일어날 일들을 이야기 해 줍니다.

이것은 잠시 후이면 너희들 속에서 현실로 일어날 일들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엄연한 사실이라는 겁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사실이고 현실이듯이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도 사실이고 현실로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아이를 밴 여자가 해산하는 것으로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조금 있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까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조금 있으면 나를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본다는 말입니까?

보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인간적으로는 도통 알아먹을 수 없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어법(語法) 파괴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조금 있으면” 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우리 선생이 왜? 저러느냐고 웅성거립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예수님이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만 하고 있으니까요.

그 많은 기적을 베풀고 능력을 행하시는 분이 죽긴 왜? 죽습니까?

죽지 말고 영화를 누려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예수님은 세상에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죽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죽는다고 하니 제자들이 난감 한 겁니다.

그럼 우리는 어쩌란 말이냐?

유대인들은 노골적으로 핍박을 하고!

예수님은 떠난다고 하니 불안하고 근심이 밀려옵니다.

 

사람이 불안을 느끼고 두려운 것은 죽음 때문 입니다.

 

죽음이 두려움을 주고 불안케 합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본능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우리의 본능을 우리 스스로가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내 마음을 내 뜻대로 컨트롤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보다 강한 자를 의지하고자 합니다.

강한 자를 의지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신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신을 찾는 것입니다.

신을 찾아서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두려움과 불안을 해소하고자 합니다.

 

인간에게 두려움과 불안을 안겨다 주는 죽음은 어떻게 왔습니까?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가 죽음을 불러들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난 후 하나님이 두렵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려움이 없었어요.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나자 갑자기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지고 두렵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이 발가벗고 있음이 하나님 앞에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여겨진 것입니다.

죄가 발가벗음이 수치라 여겨지게 하여서 두려움을 몰고 온 것입니다.

두렵기 시작하면 본능적으로 그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합니다.

 

그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 자기 식으로서의 믿음을 만들어내고자 합니다.

아담은 두려움을 치마로 해소하고자 하였습니다.

아담은 치마를 해 입으면 두려움이 사라지는 줄 알았어요.

그건 아담의 착각이에요.

 

착각이지만 아담의 후손들은 이 아담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담의 방법으로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합니다.

이건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본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됩니다.

 

아담에게 있어 치마란 자기 행함입니다.

모든 아담의 후손들은 이 방법으로 두려움을 좇아내고자 합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자기 행함으로 수치라는 두려움을 없애고자 합니다.

하지만 두려움은 본능에서 오는 것이므로 우리 행함으로 몰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믿음을 받으면 두려움이 저절로 사라집니다.

이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가시는 것입니다.

갔다가 믿음을 가지고 다시 오십니다.

그러니 지금은 근심이 되지만 잠시 후에는 그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제자들은 모릅니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차 일어날 사실에 대하여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잠시 후에 이러한 일들이 너희들 삶 속에서 사건화 되어서 현실로 일어날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일들이 실제 사건화 되어서 일어나게 되면 마치 여자가 해산하여 아이를 품에 안은 것처럼 기뻐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 때는 너희의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여자가 아이를 해산 할 때는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면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지만 잠시 후에 아이를 낳고 나면 그 고통은 다 사라지고 아이를 얻은 기쁨만 충만해 집니다.

아이가 그 고통을 다 잊게 해 줍니다.

 

그래서 엄마들은 아이를 낳을 때를 생각하면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하다가도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그 행복이 너무도 크고 기쁘기 때문에 아이 낳을 때의 고통을 다 잊고 몇 명이고 또 다시 낳게 된다고 합니다.

 

여자에게 있어 아이란? 자기의 면류관이에요.

자기를 들여다보게 하는 거울이에요.

보면 볼수록 예뻐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아이를 낳는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여 영광중에 거할 때는 그 고통은 다 사라집니다.

기쁨이 너무도 크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아픔도 그러합니다.

잠시 예수님과 이별하는 아픔은 아이를 해산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시면 우리는 아이를 품에 안은 여인처럼 기쁨으로 충만해 집니다.

성령이 천국을 몰고 오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기쁨을 몰고 오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영광은 이 땅에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하늘에 영광을 맛 보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건 세상에 없는 것들입니다.

하늘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지게 하실 것입니다.

 

그 때는 지금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이 다 이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 더 이상 누구에게 물을 필요도 없어집니다.

 

이젠 눈으로 본 바가 되고!

손으로 만진 바가 되고!

귀로 들은 바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심이 믿어지게 됩니다.

그러니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성도는 다른 증거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안에 성령이 믿어지게 해 주는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안 믿어지는 것은 믿고자 노력 한다고 해서 믿어지지 않아요.

믿어지는 사람은 믿고자 노력하지 않아요.

그냥 믿어지는 것으로 안심하고 살아요.

 

사람들을 착각하기를 열심히 하면 믿음이 생긴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열심과 충성으로 믿음을 만들고자 합니다.

하지만 믿음은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어지지 않아요.

믿음은 우리의 열심과 상관이 없어요.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시면 노력하지 않아도 그냥 저절로 술술 믿어져요.

이 믿음이 없으면 인간의 열심으로 대체해요.

그러나 그것은 믿고자 노력하는 것이지 믿음이 아니에요.

믿음은 믿어야지!

믿어야 돼! 라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믿어지는 것입니다.

믿어지는 사람은 믿어지는 것을 믿음으로 살아요.

이 믿음이 증거에요.

 

자기 안에 증거가 없으면 그 증거를 찾고자 여기저기 헤매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해요.

자기가 속한 교회나 조직이나 집단에서 인정을 받고자 합니다.

자기를 알아주면 거기 머물게 되어요.

이 모두가 두려움을 사람들 숲에서 숨고자 하는 범죄한 아담의 본성 때문입니다.

 

자기 믿음을 누구에게 인정받고자 하지 마세요.

왜? 내 믿음을 남에게 인정받고자 합니까?

이 세상에 그 누구도 남의 믿음을 판단해 줄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 사람에게 판단 받고자 하지 말란 말입니다.

남에게 믿음을 인정받고 싶어한다는 것은 안 믿어진다는 반증(反證)입니다.

그러니 남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믿어지면 누가 나를 어떻게 판단을 하여도 신경 쓰지 않아요.

남들의 판단에 흔들리지도 않아요.

그냥 믿어지는 것으로 살아요.

그러므로 자기 안에 증거가 있는 성도는 남에게 자기 믿음을 확인 받고자 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그러지요.

너희 안에 믿음이 있는지 스스로 확증해 보라고 하지요.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지 아니하면 너희는 버리운 자라고 했어요.

 

이 말씀을 근거로 믿음을 확인하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스스로 점검해 보세요.

 

사람이 자기 안에 믿음이 없으면 불안을 느끼게 되어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없으면 불안을 느낍니다.

두려움을 이기게 하는 권세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 안에 두려움이 엄습하면 본능적으로 그 두려움이라는 불안을 해소하고자 어떤 행동을 하게 됩니다.

두려움을 주는 근거를 해소코자 해요.

 

지금 제자들을 가지고서 말을 해 봅시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가신다고 하니 두려운 겁니다.

죽음이 엄습하기 때문입니다.

 

왜? 두려워합니까?

그리고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유대교라는 조직입니다.

 

왜? 유대교가 두렵습니까?

이는 자신들이 유대교에 속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에 속하였으면 두렵지가 않아요.

 

자신들이 유대교에 속하지 않고 그들과 반대편에 있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교의 반대편에 있었어요.

그러자 제자들도 유대인들과는 적대적(敵對的) 관계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 두려움을 어떻게 해소할까요?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하나는 유대교 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든가!

아니면 유대교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들과 같은 편으로 합류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버리고 유대교로 다시 돌아갔어요.

이는 자신을 핍박하는 그 세력과 하나 됨으로서 핍박을 면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니 자기 안에 유대교를 넘어설 믿음이 없으면 유대교가 두렵고 그들과 하나 되어서 그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것이 이 시대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어느 집단에 속하여 있다고 합시다.

그럼 그 집단으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합니다.

그 집단에 목사의 말을 따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그들과 함께 하다가 어떤 연유로 그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졌어요.

그들의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고!

그들과의 교제도 하지 못하였어요.

과거에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믿음이 있네! 없네! 라고 하면서 비아냥거립니다.

은근히 따돌리기 시작을 합니다.

 

그럼 우울해져요.

불안해져요.

그 조직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은 불행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그럼 그들과 관계 회복에 나섭니다.

 

그들의 모임에 참석하고 그 조직의 목사에게 얼굴 도장을 찍습니다.

이는 잃어버린 신뢰 회복을 이루고자 합니다.

그 목사의 말을 들음으로서 그 목사로부터 자기 믿음을 확인받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럼 그 목사는 그 사람의 심리를 이미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적당히 밀고 당기기를 합니다.

 

자신과 함께 하면 복음을 아는 자로 간주하고 자기와 함께 하지 않으면 복음 모르는 자로 치부해 버리는 것으로 말을 합니다.

한마디로 자기와 함께 하지 않는 것은 복음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해 버립니다.

믿음이 없다고 해 버려요.

 

그럼 자기 안에 증거가 없는 사람은 자기 믿음 없음을 감추기 위해서 더 적극적으로 충성경쟁을 하게 됩니다.

그 조직에 주류로 편입하고자 과도하게 애를 쓰게 되어요.

마치 아담처럼 자기 안에 두려움을 무화과나무로 치마를 만들어서 가리는 것처럼 한단 말입니다.

 

그런다고 자기 안에 없는 증거가 생기는 것이 아니에요.

믿음은 그 목사의 말을 듣는다고 해서 생기지 않아요.

자기 안에 증거는 성령이 주세요.

성령의 증거를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성도는 이러한 공갈에 넘어가지 않아요.

그들의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아요.

그러나 자기 안에 성령의 증거가 없으면 두려워요.

 

분명히 말합니다.

자기 안에 성령의 증거가 없는 교인들은 목사에게 먹힘 당하게 되어 있어요.

교인은 목사하고의 수(數) 싸움에서 밀리게 되어 있어요.

목사들을 갖가지 지식으로 인간의 심리 상태를 다 꿰뚫어보고 있어요.

 

철학을 하면 인간의 심리는 다 알아요.

철학을 적당히 성경에 섞어서 가르치면 교인들은 몰라요.

초대교회 안에 거짓 종들이 이러한 철학으로 교인들을 미혹하였어요.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철학으로 공교하게 만든 복음을 다른 복음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뱀의 독이라고 했어요.

 

표상학적으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마귀를 뱀으로 묘사한 것은 뱀이 가지고 있는 많은 특성이 마귀와 같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뱀의 특징을 가지고 마귀의 특성으로 이해하는 것을 표상학이라고 해요.

신학의 한 분야입니다.

 

뱀은 혀가 둘이에요.

실제로는 하나이지만 두 갈래로 갈라져 있어요.

혀가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는 것은 두 말을 한다는 말입니다.

마치 한 샘에서 쓴물과 단물을 내고 있는 것과 같아요.

이건 미혹이에요.

 

실제로 뱀은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꼬실 때 두 말을 가지고 꼬셨어요.

하나님 말씀에다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한 말을 가지고 미혹했어요.

그러니 하와는 단박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뱀은 하나님도 알지만 인간도 알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말과 섞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럼 너무도 교묘하여서 그 안에 “진리의 영”이 없는 사람은 다 넘어가요.

 

뱀을 일컬어 간교하다고 하지요.

 

창 3: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개역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고 되어 있어요.

“간교하다” 는 말의 어감은 꼭 “간사스러운 사기꾼 같다” 또는 “비열하고 얍삽한 놈” 과 같은 뜻으로 들립니다.

꼭 카바레에서 유부녀들을 등 쳐먹는 제비족 같은 기분이 들지요.

 

그러나 “간교하다” 는 원문의 뜻은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나쁘게 표현되지 않았어요.

“간교하다” 는 말은 히브리어 원문으로는 “아룸” 이라는 말을 씁니다.

히브리어의 “아룸” 이라는 말을 신약의 헬라어 70인 역에서는 “프로니모스(frovnimos)” 라고 번역하였어요.

 

이 말은 원래 “교활” 이나 “간교하다” 라는 의미가 아니에요.

이 말은 오히려 “지혜롭다” 는 뜻이고 “슬기롭다” 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개역 성경에서도 역시 “슬기롭다”, “사려깊다”, “신중하다” 라는 의미로 사용하였어요.

 

우리말 개역 성경도 이 “아룸” 이라는 단어를 사람을 대상으로 쓰여 질 때는 “간교”나 “교활”의 의미로 번역하지 않았어요.

“지혜”와 “슬기”로 표현했어요.

그것은 몇 가지 성경을 보시면 알 수가 있습니다.

 

잠 12:16=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잠 13:16= “무릇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행하여도 미련한 자는 자기의 미련한 것을 나타내느니라”

잠 14:8= “슬기로운 자의 지혜는 자기의 길을 아는 것이라도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니라”

 

잠언에서 사용하는 “슬기롭다” 라는 말은 창세기 3장 1절의 “아룸” 과 일점일획도 다르지 않아요.

이처럼 “아룸”을 사람에게 사용 할 때는 “슬기롭다” 고 하면서,

유독 뱀에게는 “간교하다”고 사용하고 있어요.

그렇게 번역을 했어요.

 

왜? 동일한 단어를 가지고 뱀에게는 나쁜 의도로 사용하고, 인간에겐 좋은 의도로 사용할까요.

왜? 성경을 번역하는 학자들이 인간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지혜롭더라” 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이는 우리의 편견(偏見) 때문입니다.

뱀은 나쁜 놈이고!

인간은 좋은 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편견이 생기면 마음속에 상대방을 깔보고 무시하는 심정이 들어가요.

 

그럼 상대방의 지혜로움을 간교하다고 하고 상대방의 슬기를 교활하다고 합니다.

이걸 속된 말로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로맨스는 아름다움이지만 불륜은 나쁜 것입니다.

 

동일한 것을 자기가 하면 아름다움이고 남이 하면 나쁜 것입니다.

이게 인간의 의식구조에요.

이렇게 자기중심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은 모두가 죄가 인간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뱀을 어떻게 보았을까요?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예수님께서는 뱀을 인간들처럼 편견으로 보시지 않았어요.

예수님은 뱀을 편견으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지혜로움으로 보았어요.

그래서 12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오히려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뱀의 지혜를 배우라고 하셨어요.

예수님께서 뱀처럼 지혜로우라는 단어가 구약 히브리어로는 “아룸” 이에요.

신약 헬라어로는 “프로니모스(frovnimos)” 에요.

 

만약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프로니모스(frovnimos)” 하라는 말씀을 지금 개역성경의 창세기 식으로 번역을 하면 “너희들은 교활하라” “간사스러워라” 가 되어요.

과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야비하고, 얍삽하고, 교활하고, 사기꾼처럼 간사스럽게” 행동하라고 하였겠어요?

이건 아니겠지요.

 

그러니 뱀에게 “간교” 하다는 말은 지혜롭다는 말입니다.

이 간교(奸巧)라는 그 뜻을 풀이하면 “간통할 간(奸)” 자에다가 “공교하고 아름답다는 교(巧)” 자를 써서 아름다운 말로 포장을 하였다는 말이에요.

쉬운 말로 그럴 듯 한 말로 간통한다는 말이에요.

 

한마디로 거짓 종들은 뱀의 말과 하나님의 말을 섞어서 진리를 간음케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다가 인간의 말을 섞어서 타락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게 해요.

이걸 성경에서는 “어그러진 말”이라고 합니다.

 

거짓 종들이 이 어그러진 말로 미혹을 했어요.

여기에 미혹 당하면 방탕과 방종과 방임으로 흘러요.

그래서 바울은 이런 자들을 사단의 종이라고 하여서 그렇게 싸웠던 것입니다.

두 마음을 품은 저주 받을 자들이라고 하고 진리를 훼방하는 자들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지으신 짐승 중에서 뱀이 가장 간교하다고 하지요.

여기에 인간도 포함 되어 있어요.

뱀이 인간보다 더 간교해요.

지혜롭다는 말입니다.

뱀이 인간보다 고수(高手)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뱀의 지혜를 따라 갈수가 없어요.

이 말은 인간은 뱀의 말을 이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 이길 수 없는가 하면 뱀의 종들은 인간의 마음을 훤히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다 인간의 심리를 바탕으로 한 철학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정교해서 성령이 없는 성도는 다 넘어가요.

 

왜?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면 반(反) 이성적이 되는 줄 아세요.

가정도 팽개치고 비윤리적으로 변하고 비도덕적으로 변하는지 아세요.

이는 인간의 욕망을 복음으로 합법화 시켜주기 때문이에요.

죄 짓는 일을 합리화 시켜주고 죄 짓고 사는 것에 면죄부를 주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하나 같이 반(反) 사회적 행동을 서슴치 않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공교한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공교(工巧) 하다는 말은 장인이 정성스럽게 아름답게 가공을 한다는 말입니다.

최고의 기술자가 교묘하게 짝퉁 복음을 만든단 말입니다.

 

그러니 그 안에 진리의 성령이 없는 사람은 그것이 복음인줄 알고 다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으로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자기 조직의 목사의 말 이외는 모두가 비 진리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이단들을 보세요.

모두가 이런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어요.

이 모두가 뱀의 두 혀로 만든 공교하게 지은 복음이라는 뱀의 독을 마셔서 진리를 분별하는 이성이 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판단하는 능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뱀의 말은 항상 논리가 정연하고 빈틈이 없어요.

그래서 공교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듯한 논리로 말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뱀에 종들은 공교하게 지은 것으로 변론을 즐기고 논쟁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역사 이래로 이단들은 항상 변론을 즐겼고 논쟁을 일삼고 삶이 반(反) 복음적으로 나타났어요.

자기들만 복음을 알고 자신들의 집단만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집단이라는 식으로 교인들을 미혹하고 유혹하였어요.

자신들만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폐쇄적인 집단화를 하였어요.

여기에 빠져 들면 특별 의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자기들만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고 착각을 하게 되어요.

이걸 엘리아즘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복음 복음하면서 이러한 짓을 하는 집단들이 도처에 있어요.

자기들과 함께 하다가도 자기들의 사상에 동조하지 않으면 들개처럼 물어뜯어요.

그러니 이러한 자들의 논리를 뛰어 넘는 자기 안에 성령의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이들을 이길 수가 없어요.

쉬운 말로 자기가 만난 예수님이 없으면 그들의 말에 반박을 하지 못해요.

 

그러므로 자기 안에 증거가 없는 사람들은 그 조직으로부터 내침을 당할까 두려워서 그들의 사상에 동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조직의 우두머리인 목사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쓰고 또한 그 조직원들과 어울려서 자신의 믿음 있음을 증명 받고자 한단 말입니다.

감사하게도 제가 이러한 집단을 거쳐 온 것만 해도 몇 군데가 되어요.

그래서 이들의 생리를 너무도 잘 알아요.

 

좌우지간 혼자 복음 다 아는 척 하면서 자아도취에 빠져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자들을 경계하세요.

이런 자들은 영적 나르시즘에 빠져 있는 자들이에요.

그리고 복음을 빙자하여서 자기 집단의 이익을 도모하는 자들을 경계하세요.

또한 철학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도 경계하세요.

현란한 말에 속지 마세요.

어느 시대이고 뱀은 항상 철학으로 복음을 현란하게 담론화 하여서 변질을 시켰어요.

 

암튼 자기의 믿음을 그 조직의 목사로부터 인정받고자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안에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성령의 증거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증거를 붙잡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기 위해서 그들의 모임에 참석하게 되고 그 일원이 된 것으로 안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나 교인이나 자기 안에 성령의 증거가 없으면 불안을 느껴요.

두려워요.

그래서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모두가 자기 안에 증거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어요.

 

예수님은 자기 안에 아버지의 증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의 증거를 필요치 않는다고 했어요.

한마디로 유대인들이 예수를 이단이라고 하여도 동요하지 않았어요.

자기 안에 성령의 증거를 가진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증거가 있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하여도 흔들리지 않아요.

 

우리를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지 목사가 아니에요.

어느 교회도 아니고 어느 집단도 아니에요.

여러분의 신앙은 오직 하나님만 판단하세요.

그러니 사람의 판단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물론 이 말도 자기 안에 증거가 없는 사람에게 소귀에 경 읽기입니다.

두려움을 좇아내지 못하겠는데 어찌 하겠어요.

그럼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자기만의 방법으로 몸부림을 쳐야지요.

아무리 입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복음을 안다고 하여도 두려워 한다는 것은 그 믿음은 지식입니다.

사람이나 집단 속에서 안위 받고자 한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야고보는 이러한 믿음을 귀신의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귀신도 예수를 알아요.

귀신도 복음을 알아요.

귀신도 예수 안에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알아요.

귀신의 믿음을 가지면 아는 것은 다 알아요.

 

그러나 그 앎이 믿음으로 합하여지지 않아요.

지식으로 남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있는데 그 앎이 삶으로 나타나지 않아요.

이걸 이원론(二元論)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복음을 지식으로만 가지고 있어서 그래요.

지식이기 때문에 삶 속에서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지식이기 때문에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하고 영생 받았다고 하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지식이기 때문에 자기 안에 예수가 있다고 하면서도 조직에서 출회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두려우니 그들의 눈치를 살피고 비위를 맞추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곳을 벗어나지 못해요.

그 조직으로부터 이탈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해요.

 

그 조직을 벗어 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조직의 사상을 이길 수 있는 진리를 가지고 있어야만 가능 합니다.

그들의 이론을 혁파 할 수 있는 진리 안에 있어야만 가능해요.

그들의 증거를 넘어서는 증거가 있어야 해요.

이 증거가 곧 성령이 주시는 믿음인 것입니다.

성령이 만나게 해 주신 내가 만난 예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증거를 주시기 위해서 가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기껏 율법 안 지키면 죽는다는 무기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영으로서 제자들 속에 오게 되면 이 죽음을 이기는 무기를 갖게 됩니다.

그게 바로 영생이고 부활신앙인 것입니다.

부활의 영이신 성령이 오시면 제자들을 부활의 세계로 끌어당깁니다.

그럼 유대인들의 율법주의 사상을 이기고 그들의 판단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지금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들 속에 유대교를 이길 힘이 없어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삼년이나 따라다녔지만 자기 안에 증거가 없었어요.

아직 성령이 그 안에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두려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다고 하니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는 그것을 이기게 하는 증거를 주시고자 가신다고 합니다.

갔다가 다시 외서 제자들 속에다가 유대인들을 이길 수 있는 증거를 심어 주시겠다고 합니다.

그럼 지금의 두려움이 변하여 담대함이 생기고 기쁨이 충만해 질 것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처럼 자기 안에 아버지와 함께 한다는 담대한 증거가 생깁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 안에는 반드시 이 증거가 있어요.

이 증거가 없는 사람은 스스로 속고 있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 척 하는 것이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에요.

 

믿는 척 하는 것으로서는 뱀의 공교한 말을 이기지 못해요.

뱀의 공교한 말은 믿음으로만 이길 수가 있어요.

이 믿음을 성령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처럼 사람의 증거를 구하지 않아요.

 

예수님은 늘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셨어요.

그러니 사람의 증거를 취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다 예수가 이단이라고 틀렸다고 하여도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자기 안에 아버지와 함께 하는 성령의 증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늘 아버지와 함께 동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가셔서 다시 오신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이 아버지와 함께 늘 동행케 하는 믿음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아버지가 함께 하신다는 증거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 속에 성령의 증거가 생겼습니다.

성령 받기 전에는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방문을 잠그고 있었어요.

죽음이 두려웠어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자 술 취한 사람처럼 담대함이 생깁니다.

죽음이 두렵지가 않았어요.

유대인들의 율법주의 사상을 이길 부활의 도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죽일 테면 죽이라고 합니다.

 

예수 때문에 핍박 받는 것을 합당하게 기쁨으로 여겼어요.

이건 성령을 받기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성령 받기 전에는 두려움으로 벌벌 떨었는데 성령이 임하고 나자 힘이 솟고 기쁨이 충만해 진 것입니다.

 

이 모두가 성령이 오심으로서 제자들 속에 예수님의 증거를 심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유대교를 이기는 증거가 생겼어요.

그러니 이제부터 유대인들이 두렵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의 이론을 파하는 강력한 능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제자들의 근심은 사라지고 기쁨으로 충만 했습니다.

이건 마치 여자가 아이를 낳고 품에 안은 것과 같습니다.

기쁨과 능력이 충만해 졌습니다.

이젠 유대교가 두렵지 않습니다.

세상이 두렵지가 않아요.

죽음이 두렵지가 않은 겁니다.

 

그러니 그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지요.

그들과 타협할 이유도 없어요.

그들보다 더 강한 능력을 자기 안에 증거로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너희 근심을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과 오시고 난 후 가치관이 달라지고 존재양식도 달라집니다.

 

사람마다 각자의 가치관이 다릅니다.

가치관이 다르면 존재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또한 삶에 기쁨도 달라요.

 

그 안에 성령이 임한 성도와 성령이 없는 교인은 존재양식이 달라요.

성령이 임한 성도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니 자연히 세상 사람과 다른 존재양식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성도는 영(靈)에 속하였고 성령이 없는 교인은 육(肉)에 속하였어요.,

영과 육은 소속이 달라요.

영은 하늘에 소속이고 육은 땅에 소속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영과 육은 삶에 가치관도 다르게 되어 있어요.

신자는 하늘에 가치관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기쁨의 원인도 영적인 것에 두어요.

하지만 불신자는 땅에 가치관으로 살기 때문에 기쁨도 이 세상의 육적인 것이 둡니다.

 

이처럼 신자의 기쁨과 불신자의 기쁨이 엄연히 다릅니다.

성도는 이 다름을 전제로 하여 세상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하늘에 가치관과 기쁨으로 살아가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 역시 예수님처럼 하늘에 가치관과 기쁨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과 같은 정신자세로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임하면 세상의 판단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이란? 신앙적으로 유대교와 같은 인간의 행함을 근거로 하는 율법주의를 말해요.

인간의 행함을 근거로 한다는 것은 나로부터 출발한다는 뜻입니다.

율법주의 바탕엔 내가 있어요.

율법 신앙은 내가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해요.

말씀을 지킬 주체가 “나”에요.

 

이게 철학과 상통해요.

철학은 “나” 로부터 출발을 해요.

철학을 인문학이라고 하는데 이는 인간을 탐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자기주체로부터 출발해요.

그래서 철학에선 끝없이 물으라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자기 주체를 찾아 가는 것입니다.

 

철학을 하면 할수록 자기 주체가 강해지는 것입니다.

철학은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시작이 되었어요.

이 욕망이 내가 바라고 궁구하는 것을 끊임없이 추구해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복음에 혼합하면 복음으로 자기 가치 챙기기를 하게 되어요.

복음 아는 것을 힘으로 사용하게 되어요.

이 힘을 근거로 변론을 하고 논쟁을 즐기고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일을 일삼게 되는 겁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을 말쟁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복음 안다는 것으로 남과 차별성을 두고 잘난 척 꼴값을 떠는 자들은 지식이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논쟁하고 변론하고 다투는 것은 복음이 주는 은혜성을 정면으로 대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깨닫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요.

은사로 주어진 것이란 말입니다.

공짜로 받은 것이에요.

 

공짜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복음 안다고 자랑 할 수가 없어요.

더 더군다나 남을 무시하고 깔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겸손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빚진 자로서 복음 모르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지식이 되면 담론화 해요.

변론과 논쟁으로 치닫는단 말입니다.

그럼 신앙이 사변적으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담론으로 흐르게 되어요.

 

담론이란? 말씀을 논한다는 말이에요.

이게 신학이에요.

신학이란? 하나님을 학문으로 연구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에 대해서 연구하고!

십자가에 대해서 연구하고!

예수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에 관해서!

예수에 관해서!

십자가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설교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고!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고!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이에요.

 

증거란? 사건으로 만난 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자기 말이 들어갈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신앙생활을 예수의 증인으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증인은 본 것만 증거하면 되어요.

성령이 그 안에 오면 보여주는 것이 있어요.

깨닫게 해 주시고 믿어지게 해 주시는 것이 있어요.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령의 증거가 없으면 복음이 담론으로 흐르고 신앙이 관념으로 흐르게 되어요.

관념으로 흐르는 것을 종교 생활이라고 합니다.

종교 생활은 이치를 깨달아가는 거에요.

이걸 득도 해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것은 득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와 하나 되어서 사는 것입니다.

삶은 담론하는 것이 아니에요.

희노애락을 나누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식으로 알아진 복음이면 종교생활을 하게 되어요.

많은 것을 깨닫는 것이 신앙이라고 착각을 하게 되어요.

그러니 귀만 커져서 오늘은 무슨 말을 하는가 듣고자 하는 겁니다.

늘 하는 소리를 하면 식상해 하고 또 다른 귀를 즐겁게 해 주는 스승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이건 지적 유희를 즐기는 거에요.

 

복음은 생명입니다.

생명이란? 다양한 사건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양한 모습으로서의 움직임으로 나타나요.

그러므로 복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생활은 고정화 되어 있지 않아요.

그 안에 성령이 거하는 성도는 신앙생활이 어떤 틀 속에 가두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걸 진리 안에서 자유라고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살았어요.

바울은 누구를 만나든지 마음은 하나였어요.

오로지 한 사람에게도 복음이 증거되는 일에 전념했어요.

설득하고자 함이 아니고 자기가 만난 예수를 증거했어요.

그러다 보니 사람들과도 척을 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즉 니편 내 편으로 편 가르기를 하지 않았단 말입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눈 높이에 맞추어서 복음을 전했고!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의 눈 높이에 맞추어서 복음을 전했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모습으로 복음을 전했고!

은혜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은혜 아래 있는 모습으로 복음을 전했어요.

 

바울은 이들을 설득하고자 하지 않았어요.

예수를 전했고!

십자가를 전했고!

새 언약을 증거했어요.

복음을 가지고 변론이나 논쟁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았어요.

 

이 시대 우리들처럼 복음으로 자기 잘난 척하지 않았단 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얕잡아 보고 무시하고 아는 척 하지 않았단 말입니다.

지식은 교만케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은사로 주어진 복음은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모습으로 나타나요.

 

복음 안다는 것으로 사랑으로 덕으로 나타나지 않고 자기 우월감을 드러낸다고 한다면 그건 뱀의 독이 섞인 다른 복음이에요.

그러니 교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뱀은 항상 두 말을 섞어요.

그러니 신앙이 이원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이 다르게 나타나는 겁니다.

입으로는 복음을 말하지만 삶은 반 복음적인 법으로 행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뱀에 독을 마시면 반드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고 죽이는 것으로 나타나요.

은혜가 나오지 않고 법이 나옵니다.

복음은 은혜에요.

법이 아니에요.

복음은 살리지만 법은 정죄하고 판단하고 죽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안에 잘난 척 하면서 파당을 짓고 분쟁을 일으키고 선생 노릇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그들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을 알아본다고 했던 것입니다.

능력을 알아본다는 것은 그들의 삶을 보겠다는 것입니다.

이건 행함 차원의 말이 아니에요.

복음이 어떻게 그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지를 알아보겠다는 말입니다.

 

복음에 사로잡힌바 된 사람은 복음이 함유하고 있는 은혜와 사랑과 긍휼과 섬김이라는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으로서의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복음이 그렇게 하세요.

복음이 그 사람을 움직인단 말입니다.

마치 복음이라는 물결에 휩싸여서 흘러 다니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걸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살았다는 말은 믿음이 성도를 개 목줄처럼 붙잡고 이리 저리로 이끌었다는 말입니다.

믿음에 먹힘 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삶이 그 사람이 어떤 신앙을 소유하고 있는지의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법으로 사용하면 법에 속한 자이고!

복음을 은혜로 사용하면 은혜에 속한 자입니다.

그 안에 법이 있으면 법이 나오고!

그 안에 은혜가 있으면 은혜가 나와요.

이건 속일 수가 없어요.

 

법에 속한 사람은 복음을 학문으로 연구하였기 때문에 변론과 논쟁과 다툼으로 나타나지만!

은혜에 속한 성도는 복음을 먹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명의 흐름으로 토해 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는 연구하는 분이 아니고 먹어야 할 양식이에요.

예수를 먹은 성도는 예수를 삶으로 증거해요.

예수로 산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양식으로 먹은 성도에게서는 예수님의 삶이 묻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것들이 툭툭 터져 나온단 말입니다.

이걸 빛을 말 속에 가둘 수 없고 등경 위에 둔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숨어 계시지 않고 우리를 빛에 도구로 삼아서 드러나게 하신단 말입니다.

 

우리 안에서 예수님이 예수님의 행함을 우리 몸으로 토해내게 하신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행함이 토해질 때마다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자기가 부인되어지고 나의 나 됨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으로 드러내게 되어요.

성도는 자기 몸을 제물이 되면서 예수를 증거하게 되어 있어요.

 

이걸 산 제물이라고 하고 이러한 삶을 일컬어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이러한 영적 예배가 드려질 때마다 우리 몸은 후패해집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십자가 정신으로 산다!

혹은 예수로 산다! 고 합니다.

 

이걸 사도 요한은 말씀을 경험하였다고 했어요.

눈으로 본 바요!

귀로 들은 바요!

손으로 만진 바! 라고 했어요.

 

요한일서 1장을 봅시다.

 

요일 1:1-4=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한의 증거를 보세요.

뭐라고 하나요?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을 자기는 경험하였다고 하지요.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바 되었다고 하잖아요.

이건 경험했다는 말이에요.

 

어떻게 말씀을 경험으로 감각할 수가 있습니까?

이는 말씀이 자기 삶으로 육신화 되었다는 말입니다.

말씀이 삶 속에서 경험 된바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기가 경험된 그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경험된 예수를 증거하는 것은 우리와 사귐을 갖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성도는 자기처럼 예수를 경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걸 사귐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임한 성도는 예수님이 자기 안에서 행한 것들이 있어요.

 

그걸 증거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예수의 증인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증인이란? 사건을 직접 본 것을 증거하는 자입니다.

자기가 만들어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목격한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께서 일으킨 사건을 목격하도록 해 주세요.

예수님을 경험하게 된단 말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예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경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경험하는가요?

이는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야고보서에서는 믿음이 일으킨 행함이라고 해요.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함이란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일으킨 사건을 말해요.

그러니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행함인 것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일으킨 사건을 경험한 성도는 신앙이 삶화 되어 나타나게 됩니다.

삶으로 예수를 증거하게 되어요.

이걸 흔히 예수 믿고 사람이 변했다고 합니다.

은혜를 받고 사람이 변했다고 해요.

복음을 알더니 사람이 달라졌다고 해요.

 

성도에겐 반드시 이 변화가 있어요.

없으면 가짜에요.

그 속에 성령이 안 계신단 말입니다.

예수 믿고 옛 사람 그대로 산다고 한다면 그것은 가짜에요.

귀신의 믿음이고 죽은 믿음이에요.

이런 사람들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믿는 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폼으로 와 있지 않아요.

우리 몸을 사용하시려고 오셨어요,.

예수님께서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님의 그림을 그려내신단 말입니다.

우리 몸이 찬지 만물이에요.

이 천지만물 속에 예수님이 창조를 하세요.

예수님이 자기 삶을 그림으로 그리신다는 말입니다.

이걸 예수의 흔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그 안에 임한 성도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그려내는 삶들이 툭툭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예전에 안 하던 짓들을 하게 하신단 말입니다.

어떤 짓들입니까?

죄인의 본성에 반하는 짓들을 합니다.

이런 경향성이 나타난단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복음을 자기 유익의 재료로 사용하지 않아요.

자기 잘난 척 변론하거나 논쟁하지 않아요.

복음으로 봉사하고 예수님 정신으로 섬기면서 살아요.

십자가에 관해서 말하지 않고 십자가 정신으로 살아요.

 

이러한 삶은 예전에는 맛보지 못한 삶이에요.

예수님이 그 안에서 행하게 하시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의 행함이 곧 그 사람의 신앙을 증거해 주는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이건 성화가 아니에요.

그냥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화는 내 의지로 변화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예수님이 함께 하는 삶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터져 나와요.

내 안에서 나 보다 강하신 어떤 분이 나로 하여금 행하게 하세요.

 

그 안에 성령이 계신 성도는 이걸 알아요.

그래서 무슨 일을 하여도 자기가 하였다고 하지 않아요.

주께서 하셨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대로 살자! 라고 구호를 외치지 않아요.

“사랑하자” 가 아니고 사랑해요!

“섬기자” 가 아니고 섬겨요!

“말씀대로 살자” 라고 하지 않고 말씀으로 살아요!

그냥 말씀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에 이끌림 당하여 살아가는 삶을 일컬어 십자가 정신으로서 산다고 합니다.

 

바울이 이런 삶을 살았어요.

그러니까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삶을 계획을 세우고 자기 의지로 살지 않았어요.

순간 순간 하나님의 간섭하심에 그냥 끌려 다니면서 살았어요.

 

때론 감옥에 가두어지기도 했고!

때론 욕을 먹고 매를 맞을 때도 있었고!

때론 쫓겨 다니기도 하고 이단이라고 정죄 당하기도 하고!

때론 비천에 처하기도 하였고!

때론 풍부에 처하기도 했어요.

 

예수님이 사도 바울 안에서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그 발자취로 끌고 다닌 것입니다.

바울은 끌려 다니면서 이건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예수가 한 것이라고 예수를 증거했어요.

삶으로 말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있는지 스스로 확증해 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만약이 이러한 것이 없으면 버리운 자라고 했어요.

가짜란 말입니다.

 

항상 교회 안에는 진짜와 가짜가 섞여 있어요.

그런데 가짜들이 진짜 행세를 하고 진짜들을 밀어냅니다.

그러니 진짜들은 항상 힘이 없이 핍박당하는 모습으로 있는 것입니다.

가짜들이 항상 울리는 꽹과리와 같이 목소리가 컸어요.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담론화 하고 있어요.

지식 놀음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복음 안다는 것으로 남을 판단하고 변론과 논쟁과 파당을 짓는 일들을 일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나 사람들에게 거치는 자로 있는 겁니다.

 

입으로는 복음 복음하면서 하는 짓들은 반 복음적으로 심판하는 짓들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 짓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복음으로 분쟁을 일으키고 변론을 즐기고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일들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은 입으로는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가증한 자들이라고 했어요.

경건을 자기 이익의 재료로 삼는 자라고 했어요.

복음 안다는 것으로 남을 넘어지게 하는 힘으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 있지 않고 능력이에요.

이는 자기 안에 천국이 임한 성도는 입으로 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존재양식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천국에 존재양식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에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섬기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를 십자가 정신으로 산다고 합니다.

 

십자가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없다는 것은 자기 안에 예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 안에 예수님이 있으면 예수님의 마음이 나옵니다.

그 안에 예수님이 있으면 본 것이 있고 만진 것이 있고 들은 것이 있어요.

그럼 그걸 증거하고 살게 됩니다.

이걸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새 언약을 믿는 것입니다.

새 언약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새 언약을 믿는 믿음 속에는 믿는 도리(道理)도 담겨 있지만 도리(道理)가 주체가 되어서 살아서 행하게 되는 삶이 있어요.

 

새 언약이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새 언약으로서의 삶이 바로 용서 받은 자로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 받은 자이기 때문에 은혜의 종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자신의 죄를 죄 용서 받은 자이기 때문에 남을 판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 은혜가 왕 노릇하기 때문에 은혜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더 깊이 알아 가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는 눈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손으로 만진 바 되고 하나님의 음성을 귀로 들은바 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보게 해 주셔서 보았고 듣게 해 주셔서 들었고 만지게 해 주셔서 만졌나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오직 보게 하시고 듣게 하시고 만진바 된 것만을 증거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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