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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102강. 평안과 환란 (요 16:28-33)

by coroa 2022. 1. 8.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02강. 평안과 환란 (요 16:28-33)

-.정낙원 목사

 

요 16:28-33=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29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사도 하지 아니하시니 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성경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 앞에서 우리 인간들은 어떤 존재들인지가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인자(人子)라고 합니다.

인자란? 참 사람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몸을 입고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참 인간의 모습이란 뜻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겨냥해서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처음 창조된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되 아직 그 속에 예수님의 생명이 없었습니다. 

아담에게 있어 예수님의 생명은 생명과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예수님의 생명을 담아서 아들의 나라인 영생의 나라에서 영생하며 살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아담은 생명과를 먹지 않고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나라로 추방을 당합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이 참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어서 참 인간을 만들어 영생의 나라로 데리고 가시고자 함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 앞에서 가짜라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마치 빛이 어둠을 비취자 어둠의 실상들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과 같습니다.

빛 앞에서 어둠에 속한 것들은 모두가 가짜라는 것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간 나라에서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예수님이 없을 땐 참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면서 꼴값을 떨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자 인간이 아니고 짐승임이 드러났습니다.

인간들이 자신들이 짐승이라는 것을 가추고자 창 인간은 예수님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게 이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참 사람으로 보내서 두 가지 일을 하십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나는 이런 인간을 창조했다고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은 참 사람은 이렇게 사는 자라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참 사람의 삶에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삶 앞에서 인간의 삶은 전부 가짜라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가짜 인간들을 참 인간으로 새롭게 창조하는 일을 하십니다.

이 과정이 먼저는 가짜 인간은 십자가에 죽이고 나중에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셔서 새로운 인간으로 창조 해 내는 방식입니다.

가짜 인간을 죽이고 예수 안에서 참 인간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 가지 일을 하십니다.

참 인간으로서 가짜 인간을 고발하는 고발자이면서!

가짜 인간을 심판하는 심판주이면서!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는 창조주로서 일을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앞에서 가짜 인간으로 고발당하고!

옛 사람이 죽는 심판을 당하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일을 당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는 항상 다름이 드러났습니다.

서로가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서로가 꿈꾸는 세상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밖에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 하시는데!

제자들은 보이는 이 세상 나라에 대하여 말해 달라고 합니다.

 

성경은 이 다름을 예수 안에서 어떻게 하나로 통일이 되어 가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다른 인간을 참 인간으로 만들어내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새롭게 만들어질 때마다 예수님의 일하심에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기게 됩니다.

그리하여 만들어지는 것마다 예수님의 영광만 오롯이 드러납니다.

모든 것이 예수 안에서 완성이 될 때 일곱째 날 안식의 세계가 주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아들의 나라 천국입니다.

 

아들의 나라는 아들이 다 만듭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아들이 다 합니다.

인간은 여기에 단 하나도 일조를 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그 나라에 사는 백성들은 아들만 찬양하게 됩니다.

그 나라가 바로 예수님의 나라인 천국입니다.

이렇게 아들이 홀로 다 만든 나라를 일컬어 은혜의 나라라고 합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이 담고 있는 아들의 나라에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그 나라의 백성들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이루고자 예수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만드는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화가 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인 자들에게 용서를 베풂으로서 그들 속에 은혜를 담아 놓습니다.

용서받은 자들은 은혜의 나라에서 예수님만 찬미하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창세전 언약이 완성이 됩니다.

 

유대인들의 사고는 모든 인간들의 사고입니다.

우리도 이 범주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이용하여 세상에서 이득을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늘 동상이몽입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닌 것도 예수님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루실 나라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보이지 않는 암투가 일어났었습니다.

누가 더 큰 자리를 차지할까 신경전을 벌렸습니다.

 

심지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에게 찾아와 청탁하기에 이릅니다.

예수의 나라가 임하면 자신의 두 아들을 국무총리도 시켜주고 장관도 시켜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씩씩 거립니다. 

씩씩 거린다는 것은 자기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결국 서로 마음속에 꿈꾸는 내용은 같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예수를 이용하여서 세상에서 왕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 세상에서 왕을 만들어 주고자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안락한 삶을 주시고자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이 세상을 떠나게 하고자 부르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심각한 동상이몽인가요?

 

예수님은 이 차이를 계속하여서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불행한 것은 세상 것을 얻지 못해서가 아니라 죄 문제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걸 모릅니다.



성령이 와야 알게 됩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죄 사함이 주어진다는 것이 믿어집니다.

그럼 진정한 마음에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이 평안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근거로 주어지는 죄사함의 평안인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죄사함이 주는 평안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관심사와 인간의 관심사가 얼마나 다른지를 고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좁혀지지 않아요.

그렇다면 계속하여서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제자들이 왜? 세상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자 할까요?

이는 세상에서 권세를 잡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보이는 것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 속에 인간의 행복이 있다고 여기고 쫓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보이는 것은 허상이라고 합니다.

너희 인생이 무엇이냐?

잠간 보이다가 살아질 안개 같다고 합니다.

보이는 이 세상은 잠시 잠깐 후면 철거가 될 것들이라고 합니다.

 

이건 제자들이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를 통해서 세상 영광을 얻고자 했습니다.

세상의 행복을 추구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생각은 자신들이 예수를 통해서 세상 영광을 얻으려면 예수님이 계속 세상에 남아서 자신들의 유익을 구해 주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꾸만 어디로 떠난다고 합니다.

제자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난다는 말은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떠나면 자기들은 뭐가 되느냐 입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만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빼내고자 하는데 제자들은 세상에 안주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것을 동상이몽이라고 합니다.

 

이 동상이몽을 깨트려져야 합니다.

이것이 안 깨어지면 우리의 꿈을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게 됩니다.

그럼 우리는 늘 시험에 들고 넘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분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의 소원을 거두어 가십니다.

피조물은 자기의 소원을 말할 자격이 없어요.

왜냐하면! 창조주의 필요에 의해서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가 주객을 전도 시켜놓았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이용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자기 소원을 이루고자 창조주를 이용한단 말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늘 하나님과 충돌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의 마음을 모르는 이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자 예수님을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피조물의 마음을 버리고 창조주의 마음을 갖도록 하십니다.

즉 자기 영광을 버리고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간섭을 하신단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평안과 환란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평안과 환란은 극과 극입니다.

서로 모순입니다.

그런데 이 극과 극인 두 가지를 예수님 때문에 겪게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평안도 얻고!

예수님 때문에 환란도 겪게 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약 주고 병 주는 이야기입니다.

이 무슨 말인가요?

 

어떤 평안이고 어떤 환란인가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된다고 하면서 이와는 정반대로 너희가 나 때문에 세상에서는 환란을 당한다고 합니다.

 

우린 평안을 원하고 환란은 싫어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평안을 위해서 믿습니다. 

만약에 우리보고 평안과 환란을 선택하라고 하면 평안을 선택하지 환란을 선택할 사람은 없습니다.

너희들 예수 믿으면 환란을 당한다고 한다면 다 도망을 갈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자 제자들이 다 도망을 갔습니다.

이는 인간의 실상을 잘 대변해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기에게 손해가 되면 다 떠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평안과 환란은 어떤 것을 말하는 걸까요?

어떤 평안이고!

어떤 환란이냐! 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이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평안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평안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죄사함으로부터 주어지는 평안입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는 평안입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는 평안입니다.

이 평안은 하나님 앞에서의 평안입니다.

 

둘째로는 이 세상을 떠나게 하는 평안입니다.

이 세상 가치로부터 초월하는 평안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로부터 자유하는 평안입니다.

이 평안은 세상에서의 평안입니다.

 

그럼 먼저 죄사함으로부터 주어지는 평안을 살펴봅시다.

 

예수님을 일컬어 화목 제물이라고 합니다.

화목 제물이란? 원수 관계를 풀어주는 제물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과 죄인은 원수관계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인간은 죄인입니다.

거룩하신 분과 죄인은 원수입니다.

그런데 이 원수지간을 예수님이 중간에 서서 화목 시켜 준다고 합니다.

 

어떻게 화목 시켜 주는가요?

자기의 죽음으로 자기백성들의 죄 값을 대신 치루어 주심으로서 화목케 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을 근거로 죄 없다고 간과해 주십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 안에서 평안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죄값을 다 치루었다는 것이 믿어집니다.

예수님이 옛 언약을 십자가에서 다 완성 하셨다는 것이 믿어집니다.

그럼 율법의 요구로부터 더 이상의 정죄함이 없습니다.

율법의 요구로부터 자유하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사망은 죄값으로 주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 값을 대신 속량해 주었습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대속했습니다.

 

그러니 성령이 오면 죄와 사망이 주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이 평안이 주어집니다.

더 이상 죄로 인하여 정죄당하지 않는 평안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과 화평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또 한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마귀와의 관계입니다.

죄인은 본래 하나님과는 원수였고 마귀와는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이 구조가 뒤바뀌어져 버렸습니다.



하나님과는 사귐이 되는데,

마귀와는 불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는 화목이 되었는데, 마귀하고는 원수가 되어 전쟁 상태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환란을 당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과의 평화이지만 마귀하고는 불화가 됩니다.

하나님과는 평화 모드가 조성이 되지만 마귀와는 전쟁 모드가 조성이 됩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과는 화해가 되고 마귀와는 원수가 됩니다.



우린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입니다.

마귀 아래서 태어난 자들입니다. 

그럼 우리는 본질상 하나님의 원수들입니다.

하나님과 전쟁모드에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반대로 마귀와는 화해 모드로 살았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난 후 이 관계가 역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는 화해가 되었고, 마귀와는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마귀와 멀어지고, 마귀와 가까우면 하나님과 멀어집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래 저래 어느 한 쪽과는 전쟁모드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하면 마귀로부터 공격을 받고 마귀와 화친하면 하나님으로부터 공격을 받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화해된 자로 살든지 아니면 마귀와 친구로 살든지 해야 합니다.

이게 인간의 실존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죄인된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을 평화케 하십니다.

구원이란? 하나님과 화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였던 자가 예수님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그럼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평안과 환란은 두 가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과는 평안이고!

마귀와는 환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는 화평이 되었는데!

마귀하고는 원수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평안한데!

마귀 나라에서는 환란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다시 오면 하나님과는 평화가 되는데 세상으로부터는 환란을 당하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마귀 아래 있다가 예수 안으로 빼내심을 입은 것입니다.

그러니 마귀는 자기 것을 빼앗겼다고 성도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너희를 사랑할 터인데!

너희는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은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담대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갔다가 다시 오시면 믿어집니다.

예수님은 이 평안을 아버지로부터 받아서 가지고 와서 성도들에게 주십니다. 

성령이 세상을 이기는 평안을 가지고 오십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평안도 주시지만 세상을 이기는 평안도 주십니다.

세상을 이기는 평안이란? 세상의 가치를 이기는 평안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주는 평안입니다.

 

예수님이 주신다고 하는 평안 속에는 이 두 가지가 모두 포함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된 평안도 있지만!

세상의 가치를 이기는 평안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것을 알려 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알겠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그 동안 예수님과 동거동락을 하면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이 이제 자기들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간다고 하니 말은 그런가 보다 라고 하면서도 속 마음은 시큰둥해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시면 자기들과의 관계가 다 끝나는 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은 제자들과의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고 더 단단하게 결속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갔다가 오면 이젠 너희와 내가 한 몸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아버지와 하나인 것처럼 내가 아버지께로 갔다가 다시 오면 그 때는 내가 너희들 속에 들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먹을 턱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개의치 않고 잠시 후에 벌어지게 될 엄연한 사실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다 아십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신 것은 성령이 제자들에게 오셔야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오시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로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너희들 눈에는 내가 혼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함께 있다고 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나와 아버지가 함께 있는 것처럼 너희들과 나도 함께 있게 된다고 하십니다.

지금은 믿어지지 않겠지만 성령이 오시면 알게 된다고 합니다.

 

지금은 내가 나를 죽이는 자들의 손에 붙잡히면 너희들은 두려워서 다 나를 떠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너희들이 나 때문에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담대하라고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긴 것이 왜? 우리에게 평안이 되느냐 입니다.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를 열면 인류역사의 시작을 아담과 하와의 결혼 이야기로 운을 뗍니다.

그리고 성경의 마지막인 요한계시록을 보면 천국에서 어린양과 그 신부가 혼인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아담과 하와로 보여 주었고,

구약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으로 보여 주었으며,

신약에서는 예수님과 성도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세상 역사를 아담과 하와의 결혼으로 문(門)을 열고!

세상 끝을 어린 양과 그 신부가 혼인하는 것으로 문(門)을 닫습니다.

결혼으로 시작하여서 결혼으로 끝을 맺음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성경은 결혼이야기가 됩니다.

성도가 구원 받는 것은 곧 신랑 신부가 결혼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그러한가 살펴봅시다.

 

예수님과 성도는 원래 한 몸이었습니다.

한 몸이 잠시 분리가 되었다가 다시 한 몸이 됩니다.

이걸 주께로 나왔다가 주께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이건 마치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이었는데 잠시 분리되어 있다가 다시 한 몸이 된 것과 같습니다.



하와는 아담 안에 있던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담 안에서 하와를 빼냈습니다.

그리곤 잠시 떨어져 있다가 다시 한 몸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와가 아담과 한 몸이 되는 것이 구원이야기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가지고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를 표상 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가지고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와 예수님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습니다.

아들도 아버지 안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에게로 나와서 아버지께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성경에서는 한 몸이라고 합니다.

한 몸이란 몸뚱이가 하나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건 마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각각의 개체로 존재하지만 본질 면에서 하나인 것과 같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한 몸이란? 몸뚱이가 하나가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하나의 본질이란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은 몸뚱이가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에요.

한 본질을 공유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한 몸이 된다는 것도 동일해요.

몸뚱이가 하나가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천국에 가면 예수님은 신랑으로 성도는 신부로 있어요.

신랑과 신부는 두 몸뚱이지만 하나에요.

이걸 한 몸이라고 합니다.

 

죄가 없을 때는 하나님과 아담은 하나였습니다.



하나의 뜻과,

하나의 사상과,

하나의 사고를 가지고,

한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같았습니다.

하나의 눈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다스리라고 맡기신 것입니다.

아담이 죄를 짓기 전에는 하나님 마음으로 세상을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고 나서 하나님을 떠난 독자적 인간이 되고 만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아담은 하나님과 다른 마음이 생긴 겁니다.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니까 동상이몽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의 일을 가지고 서로 다른 생각으로 다르게 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마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도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서로 다른 마음이면 같이 살 수가 없어요.

함께 살려면 생각이 같아야 합니다.

같은 마음이라야 합니다.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자아가 생겼어요.

독자적인 눈을 갖게 되었습니다.

독자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럼 하나님과 사사건건 부딪쳐요.

하나님의 관점과 아담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원리가 아담이 볼 때는 동의가 안 되어요.

 

원래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만들었어요.

그리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셨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스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짐승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던 것입니다.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그들의 속성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아담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여서 보이는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과 같아요.

 

이걸 예수님이 오셔서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아들에게 다스리도록 하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 마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아버지 마음으로 다스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대신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와 자신은 하나 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이 곧 아버지 마음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영접하는 자는 곧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아버지의 마음으로 다스렸어요.

그리고 아버지 마음으로 세상을 다스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판단이 옳다고 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그래야 했단 말입니다.

그러라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아담에게 다스리라고 위임을 시켜 준 것입니다.

그럼 아담은 하나님 마음으로 세상을 다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자기 마음이 생긴 겁니다.

그러니 세상을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자기 마음으로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짓들을 하게 되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부랴부랴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쫓아 낸 것입니다.

그냥 두면 에덴동산을 자기 맘대로 뜯어고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아담의 나라가 되어요.

아담이 하나님이 된단 말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난 후 괴물이 되고 만 겁니다.

이걸 그냥 둘 순 없잖아요.

이런 놈은 죽여야지요.

죽이는 것이 복이고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의 세계에서 죽음의 세계로 쫓아낸 것입니다. 



죄인은 죽이는 것이 복이에요.

죄인으로 살려두면 계속하여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진노 받을 죄인은 죽이고 하나님과 화평한 자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아담과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도 다른 마음을 품고 따랐어요.

이런 놈을 살려두면 예수님의 원수노릇을 합니다.

 

예수님과 원수이고서야 어찌 평안 하겠습니까?

없습니다.

비록 예수님과 함께 동행한다고 하여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은 늘 불안 불안 한 것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에 의해서 수차례 마음이 들키고 말았어요.

예수님이 제자들의 속마음을 훤히 꿰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오로지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기 영화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마음은 버려지지가 않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강제로 버려지게 만드십니다.

 

어떻게 만드십니까?

예수를 이용하여 세상에서 잘 되고자 하는 옛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함께 십자가에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일을 지금 예수님이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 혼자 하세요.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일을 제자들이 한 일로 만들어 버립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과 제자들을 한 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럼 예수님이 하신 일이 제자들이 한 일로 됩니다.

이게 믿어집니다.

이게 믿어질 때 비로서 예수 안에서 평안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평안을 누리도록 해 주시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만들어 놓은 평안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평안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평안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주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평안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평안은 십자가에서 만드셨어요.

자기 피로 만들었어요.

 

이걸 구약시대 출애굽 할 때 보여 주셨어요.

하나님께서 애굽의 전역에 장자들을 죽이는 재앙을 단행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날 길을 알려주십니다.

 

이스라엘 대신 어린 양을 죽이라고 합니다.

어린 양을 죽이고 그 피를 문(門)에다 발라 놓으라고 합니다.

그럼 천사들이 집집이 장자를 죽이러 들어가다가 그 피를 보고는 아! 이 집은 이미 죽었구나! 하고선 넘어 갈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죽지 않았어요.

이스라엘 대신 어린 양이 죽었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대신 어린 양의 죽음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어린 양의 죽음을 이스라엘에게 적용을 시켜버립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방식입니다.

이건 이미 창세전 언약에 담아 놓았어요.

하나님은 창세전에 나는 이런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한다고 하셨어요.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죄 값을 치루는 것을 원치 않아요.

우리가 만약에 우리 죄 값을 치룬다고 하면 하나님 앞에서 모가지를 바짝 세워요.

자기 의로 기고만장 한단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 나라가 은혜의 나라가 아니고 인간의 의를 자랑하는 나라가 되고 말아요.

 

하나님은 이런 나라를 만들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만드신 아들의 나라는 아들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는 그런 나라입니다.

그 나라 백성은 모두가 예수님이 대신 죄값을 치루어주는 자들만 있어요.

이런 나라를 은혜의 나라라고 합니다.

 

아들의 나라는 아들의 의만 자랑 되어지는 나라에요.

하나님은 창세전에 이런 나라를 만드시기로 언약 하셨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죄 값을 치루는 것을 원치 않고 우리 죄를 예수님이 대신 갚아 주는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가 죄값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악한 죄가 되어요.

 

이게 아주 중요해요.

자기가 죄값을 갚고자 하는 것은 성경은 불의라고 합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죄값을 대신 갚아주는 것을 의라고 합니다.

 

자기가 죄값을 갚고자 하는 것을 율법에 의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의를 고집하였어요.

이 의를 근거로 하는 자는 지옥으로 가요.

 

신앙생활이란?

내가 잘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가 잘나야 합니다.

내 치적을 쌓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치적을 하사품으로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고 오로지 예수님의 것으로만 둘둘 말아 치장이 되어 있어야 해요.

내 것이 보이면 안 되고 예수님의 것만 보여야 해요.

이걸 예수의 의로 옷 입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에겐 독자적으로 의를 만들지 못하게 하세요.

그러니 우리를 잘난 자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못난 자로 드러나게 하신단 말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산다는 것으로 드러나게 하십니다.

 

성화주의자들처럼 성령 충만으로 스스로 의를 만들어 가는 자가 아니고 반대로 의가 없다는 것을 깊이 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치장해 주지 않아요.

도리어 발가벗겨서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세요.

그리하여 예수님의 의로 둘둘 말아서 우리 것이 안 보이게 한단 말입니다.

 

신앙은 예수 안에서 예수님의 것으로 사는 것이지 독자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의를 날마다 덧 입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로 우리의 머리카락조차도 보이지 않게 꽁꽁 감싸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하시려고 예수님이 오셨어요.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려고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서 죽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을 가지고 자기 백성들에게 적용을 시키십니다.

성령이 이것이 믿어지게 하세요.

그러니 세상에서 심판을 당해도 너희는 안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이러한 사실이 믿어지게 됩니다.

성령이 믿음을 가지고 와서 믿어지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담대해 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봐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으니 너희도 세상을 이기게 된다고 합니다.

비록 세상에서 환란을 당할지라도 그건 너희들이 예수님에게 속한 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차원에서 주어지는 것이므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성도는 이 믿음으로 삽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었다는 것이 믿어질 때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었다는 것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었다는 뜻입니다.

마귀는 죄와 사망으로 죄인들을 겁박했습니다.

인간들은 이 겁박으로 일평생 마귀에게 종노릇하면서 두려움으로 살았습니다.

마귀가 너희들 죽을래,

그러면 살려주세요! 라고 벌벌 떨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마귀에게 벌벌 떠는 죽음에 종노릇하는 그 놈을 십자가에 죽이고 죄와 상관이 없는 놈으로 살려내십니다.

죽음이 이기지 못하는 놈으로 만드십니다.

그러할 때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이 됩니다.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이 되어야 비로서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이 평안을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갔다가 다시 오시면 주시겠다고 합니다.

 

평안의 반대는 불안입니다.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본능에 속한 것입니다.

 

이건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납니다.

죄 때문입니다.

죄가 두려움을 몰고 왔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인간의 힘으로 죄 문제를 해결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 쪽에서는 해결할 방법이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죄 없는 분이 해결을 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걸 해결해 주셨어요.

하나님은 애초부터 죄 문제는 예수님이 대신 처리해 주시는 것으로 언약을 했어요.

 

하지만 인간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죄로 인하여 창세전에 맺은 하나님과 예수님 간에 맺은 언약을 몰라요.

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경은 죄인을 일컬어 영적 소경이라고 합니다.

영적 소경이라는 말은 영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존재란 말입니다.

영의 나라란?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영의 나라에서는 영의 방법으로 다스려져요.

영의 방법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대신 책임져 주는 방식이에요.

의인이 죄인의 죄를 대신 담당하는 방식으로 다스려져요.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란?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낮은 자는 높은 자가 주는 것으로 살아가요.

 

하늘 나라는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겨요.

낮은 자는 높은 자가 주시는 것을 받아먹음으로서 감사와 찬송을 돌리게 되어 있어요.

이게 영의 나라에서 사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 영의 나라에 원리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높은 자가 되셔서 낮은 자인 제자들을 대신 담당하고 일방적으로 주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세상의 가치를 이기는 평안을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들 때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를 근거로 만들었습니다.

근거란? 실상이고 원형이란 말입니다.

하늘나라가 실상이고 원형이고,

이 세상은 허상이고 모형입니다.

 

하나님은 모형을 통하여서 원형을 말해주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는 원형은 안 보입니다.

원형이 안 보이니까 원형이 없는 줄 알고 살아갑니다.

이 모두가 마귀가 눈을 가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세상에 파송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세상 나라로 파송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 나라 속에 하늘나라 백성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세상 방식이 아닌 하늘에 방식으로 일려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책임져 주는 방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예수님과 다니면서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누리고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이걸 몰라요.

아직까지 그들 속에는 세상 방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 방식을 읽어내는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찾아가서 눈을 뜨게 합니다.

영적 눈을 뜨게 하십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이 눈을 떴어요.

눈에 비늘이 떨어지고 나니 영의 나라를 보는 눈이 떠진 것입니다.

 

바울이 뜬 눈은 보이지 않는 나라를 보게 하는 눈입니다.

세상 밖에 있는 삼층천을 보는 눈이에요.

그러니 이제부터 삼층천을 향하여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모든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성도는 반드시 이 눈을 뜨게 되어 있어요.

눈을 뜬 자들은 그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허상이고 실상은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또한 육신의 생명은 허구이고 영적 생명이 실상이라는 것을 알아요.

그러니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쫓아낸다고 해서 쫓아내지지 않아요.

영적 생명이 주어지면 자연히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예수님의 생명이 주어지면 땅의 생명이 죽는다 하여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평안이 두려움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의 환란을 이기고 담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눈을 뜬 사람들은 이제 보이지 않던 하늘나라가 보입니다.

보인다는 것은 믿어진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눈을 뜬 사람은 자연히 이 세상은 허상이고 실상이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럼 삶에 지향성이 바뀝니다.

성전미문의 앉은뱅이는 은과 금을 구했어요.

성전에 와서도 땅에 것을 구했어요.

그런데 베드로를 통해 예수를 만나고 난 후 달라졌어요.

 

예수를 만나면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삶에 지향성이 달라집니다.

보이지 않는 나라를 위하여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이 세상은 허상이라는 사실을 폭로하게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을 살펴봅시다.

 

최초에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진 에녹이 있습니다.

에녹은 365년을 이 세상에 있다가 하늘로 옮기어진 사람입니다.

365년을 1년이라고 보세요.

1년은 인간의 전 일생을 축약하고 있어요.

 

성경은 의도적으로 에녹의 일생을 두 가지로 구분 하여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성도들의 두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아담 안에서 태어난 인생과 예수 안에서 거듭난 새 인생이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 태어난 인생은 자기 육신을 위하여 세상을 바라보고 삽니다.

하지만 예수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인생은 하늘나라를 소망하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에녹의 두 인생을 구분하는 것도 다 이러한 것을 알게 해주시고자 함입니다.

 

창세기 5장을 봅시다.

 

창 5:21-24절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23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다고 합니다.

므두셀라를 낳고 난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고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은 므두셀라를 낳기 전에는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에녹의 인생은 하나의 계시와 같기 때문에 성경은 일부러 의도적으로 에녹의 일생을 두 구분으로 나누어서 구분해 놓은 것입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기 전에는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어요.

 

한마디로 하나님을 모르는 소경으로 살았단 말입니다.

하늘나라가 있는 줄 모르고 땅 강아지 마냥 땅만 바라보고 살았어요.

그런데 므두셀라를 낳고 난 후 하나님을 보는 눈이 떠진 겁니다.

 

하나님이 믿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마치 바울이 삼층천을 본 것처럼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게 된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걸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에녹이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을 했나요?

신약에 예수님의 동생인 유다가 성령의 감동으로 에녹을 보았어요.

 

유다서를 봅시다.

 

유 1:14-15절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고 눈이 떠졌습니다.

어떤 눈이 떠졌는가 하면 이 세상에 심판이 임한다는 눈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장차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한다고 소리치면서 살았습니다.

 

“므두셀라” 라는 이름이 “그가 죽으면 세상에 심판이 임하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 는 뜻이에요.

하나님께서 므두셀라 라는 이름 속에 장차 일어날 사건을 계시로 담아 놓은 것입니다.

에녹은 눈이 떠지자 므두셀라 속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를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므두셀라를 낳고 난 후 세상에 종말을 알리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게 영적 눈을 뜬 자들의 삶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본 자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입니다.

 

노아를 봅시다.

 

창세기 6장입니다.

 

창 6:1-14절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10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11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14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노아의 때가 어땠는가요?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 패괴함이라고 합니다.

패괴함이란? 다 무너지고 깨어졌다는 말입니다.

 

기존에 신앙을 다 버렸다는 뜻이에요.

그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네피림을 낳았다고 합니다.

이는 성도가 세상과 짝하고 산 것을 말하는데 이걸 신약의 야고보 사도는 간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지음을 한탄하실 정도였으니 알만 하겠지요.

그런데 노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노아에게만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자 노아가 어떻게 되었나요?

방주 짓는 삶으로 바뀌지요.

은혜를 입기 전에는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았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자 달라진 것입니다.

 

어떻게 달라졌는가요?

이 세상을 떠나는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심판 속에서 살아나는 일을 하였어요.

그것이 방주를 짓는 삶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는 방주를 지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노아가 방주를 지은 것은 곧 신약식으로 말하면 예수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에녹이나 노아는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지향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삶을 의로운 것이라 하고 완전한 삶이라고 합니다.

의롭고 완전한 삶이란? 옳은 행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에녹이나 노아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에녹은 심판을 알리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에녹이 알린 심판을 노아는 직접 경험했어요.

에녹의 예언대로 므두셀라가 죽자 그 해에 홍수가 쏟아지고 온 세상이 심판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입니다

 

항상 기억할 것은 종말은 극심한 타락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 때의 모습을 노아의 때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는 이 시대도 노아의 때와 같이 성도들이 세상에 푹 빠져서 하나님을 잊고 산다는 말입니다.

보이는 것에 붙잡혀서 하늘나라를 잊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노아가 방주를 짓는 삶은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 누구도 이 세상이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러므로 노아의 삶은 자연히 그 시대를 고발하는 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노아는 이 세상을 전부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겐 이단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초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로지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이 되어 부국강성한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이 오셔서 하늘나라 이야기를 합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자기 백성들에게 보내서 세상의 멸망 소식을 전하게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예수를 이단이라고 하여 죽였습니다.

 

죄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유의치 않는 것입니다.

 

에스겔 33장을 봅시다.

 

겔 33:30-33절 “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를 의논하며 각각 그 형제로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보자 하고 31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利慾)을 좇음이라 32 그들이 너를 음악을 잘하며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준행치 아니하거니와 33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던 줄을 알리라”

 

사람들이 선지자를 찾습니다.

선지자 앞에 나와서 무슨 말을 하는가 살핍니다.

이건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듣겠다는 말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하여도 그 속에는 자기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것으로 가득찹니다.

에스겔에게 나와서 좋은 소리를 들려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망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보내서 증거로 삼습니다.

내가 그 때 내 종을 보내서 분명하게 경고하였다는 증거자로 삼아 버립니다.

그러니 에스겔은 망한다는 말을 하는 증거자로 세움을 입은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선지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이러한 말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듣고자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기들 생각에 맞는 말을 해 달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종말에 고통당하는 때라고 했습니다.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쫓을 스승을 많이 둔다고 했습니다.

이는 자기에게 좋은 말을 해 주는 목사들을 따라 다닌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자기편을 들어주는 목사의 말을 진리로 믿는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자 하는 말만 들어요.

그러므로 자기를 긍정해 주는 사람을 따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 신앙을 옳다고 해 주는 목사를 좋아해요.

옳고 그르냐가 중요치 않고 자기 편을 들어주는 것을 원해요.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노아 시대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가 노아의 때와 같았습니다.

물론 지금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자기들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왜? 오셨을까요?

근본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태초에 일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미가 5장을 봅시다.

 

미가 5: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유다 족속 중에서 가장 작은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난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이 감지 할 수 없는 모습으로 오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임금이에요.

 

그 임금이 누군고 하니 근본이라고 합니다.

근본이란? 존재케 하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그의 근본이 상고에 있던 태초라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바로 만물의 근본이신 태초에 계신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태초에 계시던 근본이신 하나님이 왜? 허상인 모형의 세계에 오셨을까요?

 

이는 이 세상의 본질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근본을 알려주시고자 함입니다.

허상을 실상인줄 알고 있는 소경들에 눈을 뜨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을 찾아가서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눈을 뜨고 보니 근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태초가 믿어지기 시작합니다.

 

이 세상이 허상이고 모형이라는 것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가야 할 곳이 따로 있다는 것이 믿어져요.

신자가 누구냐?

이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신앙이란? 모형 속에서 실상으로 사는 것입니다.

역사라는 유한한 세계에서 묵시라는 영원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걸 한 마디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서의 삶이라고 합니다.

 

이 삶을 산 사람들이 선지자들입니다.

에녹이 그러하였고!

노아가 그러하였습니다.  

믿음에 조상인 아브라함도 그러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자기가 가야할 곳이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아들과 손자와 더불어 장막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늘에 있는 본향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장막에서 살아가는 삶이 가나안에서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을 자연히 고발하고 있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세상 가치를 초월하고 살면 그 자체가 고발입니다.

성도는 고발자의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고발자로서의 모습이 그 시대의 가치관으로 살지 않고 하늘의 가치관으로 사는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아브라함에게 당신들은 왜? 집을 짓고 살지 않고 장막을 치고 삽니까? 라고 물으니 아브라함은 우리가 가야할 곳은 하늘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가나안 사람들이 이단이라고 합니다.

 

모으고 또 모으면서 살아가는 가나안 사람들의 눈에는 하루 하루 장막 속에서 살아가는 아브라함 일가의 삶은 어리석어 보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아브라함의 이런 삶을 복 받은 삶이라고 합니다.

뉘라서 이것을 복이라고 할까요?

 

죄란? 예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에 무관심 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를 모르는 것이 죄가 되는가요?

이는 예수가 나를 존재케 하는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예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만물을 존재케 하는 근본입니다.

예수님을 모른다는 것은 자기의 근본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진 자가 예수님을 모른다는 것은 패역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모르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걸 더 확대하면 하늘나라를 생각지 않고 사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역사라는 이 세상은 하늘나라를 보여주기 위하여 한시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한시적인 곳에서, 한시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시작과 끝이 있는 유한의 세계에서 영원으로 삽니다.

 

지혜로움이란? 이 세상이 영원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영원한 곳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걸 안다면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처럼 살아선 안 됩니다.

이 세상은 잠간 보이다가 사라질 안개 같은 곳이라는 곳을 알고 영원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지자로 세워서 고발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늘나라 백성은 이 세상에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잠간 있다가 영원한 본향인 하늘나라에 돌아가는 것으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선지자가 되어서 이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장막생활을 하면서 고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 세상을 한마디로 풀의 꽃과 같이 잠시 있다 사라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40장을 봅시다.

 

사 40:6-9=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이까 ?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그리고는 가서 외치라고 합니다.

이사야가 무엇이라 외칠까요? 라고 물으니 육체는 풀이라고 외치라고 합니다.

 

육체의 아름다움이란 들의 꽃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풀의 꽃과 같다는 말은 영원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이란 말입니다.

 

영원한 것은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만 영원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영원한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합니다.

 

이걸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합니다.

이 소식을 시온에 전하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에 전하라고 합니다.

시온이나 예루살렘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이고 성도들입니다.

 

이상합니다.

아니 자기 백성들이면 당연히 하나님 말씀만 영원하고 이 세상은 잠간 보이다가 사라질 것이란 것을 알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마귀가 보이는 세상 것으로 미혹을 하여서 영원한 것을 가려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서 마귀의 미혹으로 하늘나라를 잊고 사는 자들에게 하늘나라 소식을 전하라고 합니다.

큰 소리로 외치라고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전하라고 합니다.

 

어째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까?

이는 반발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반발을 할까요?

땅에 속한 자들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왜? 땅을 부정하느냐고 반발을 합니다.

 

복음이 뭐냐?

기쁜 소식입니다.

이사야 식으로 말하면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이 아름다운 소식을 어디다 전하라고 합니까?

유다 성읍 예루살렘에 전하라고 합니다.

지금 자기 백성들이 전부 하늘나라를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서 깨우라고 합니다.

 

복음이란? 세상이 망한다는 것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망한다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말입니다.

 

이는 죽음을 끝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죽음이 영원한 하늘나라 라는 새로운 세상으로 가기 위한 옷을 갈아입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고 한다면 슬퍼하지 않을 것입니다.

도리어 기뻐할 것입니다.

 

바울은 그럽니다.

죽음을 하늘에 있는 옷을 갈아입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을 봅시다.

 

고후 5:1-8=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땅에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로부터 오는 장막을 덧 입는다고 합니다.

이는 죄 아래서 태어난 육신이 죽으면 하늘에 있는 죄와 상관없는 몸이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겐 하늘에 영원한 몸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 죽음은 슬퍼할 일이 아니고 기뻐할 일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하려고 성령이 보증으로 와 계십니다.

성령이 오셔서 죽음 너머의 세계를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차라리 이 육신의 장막을 벗고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소망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성도는 사나 죽으나 하나님 안에 있으므로 범사에 감사하며 살면 된다고 합니다.

 

이 사실이 깨달아지는 자는 이미 영원 안에 들어가 있는 거에요.

성도는 살아도 주를 위한 것이고 죽어도 주를 위한 것이에요.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하나님 앞에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에녹도 이 정체성으로 살았습니다.

노아도 이 정체성으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장막 생활을 하면서 이 정체성으로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후손인 성도들도 이 정체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정체성으로 살면 육에 속한 자들이 자기들과의 다름으로 인하여 반발을 해요.

그럴지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미 영생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영생 안에 있기 때문에 영생 바깥에 있는 자들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면 환란을 당한다고 하십니다.

이 세상이 망한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겐 세상에서의 삶이 고난일 수밖에 없어요.

 

답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중에서 누가 안타까워합니까?

아는 자입니다.

알기 때문에 아픕니다.

 

복음은 성도로 하여금 현실을 바라보는 안목을 주었습니다.

복음을 몰랐을 땐 이 세상이 영원한 줄 알았는데 복음을 받고 보니 없어질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세계는 이 세상이 아니고 하늘에 있음을 안 것입니다.

 

세상의 결과를 알고 산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속에 믿음에 사람들은 이 세상을 잠시 거쳐 지나가는 정거장과 같은 곳임을 알고 살았던 것입니다.

 

복음 속에는 이 세상을 이기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환경이든지 적응하는 능력이 있어요.

바울은 형편 따라 살았습니다.

 

빌립보서 4장을 봅시다.

 

빌 4:12-13=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

 

풍부나 빈곤이나 지나가는 과정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러니 개의치 않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때론 풍부해 질수도 있고 때론 비천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에겐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갑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성도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만유보다 크시매 그 누구도 아버지 손에서 성도를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가난도 핍박도 아픔도 구원을 빼앗지 못합니다.

외부적인 조건으로 끊어질 수가 없어요.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왜? 예수님의 떠나심을 두려워합니까?

이는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가셨다가 다시 오셔서 죽음 너머에 있는 세계를 알려주시겠다고 합니다.

그럼 너희들 속에 평안이 일어나게 된다고 합니다.

그 평안이 세상의 환란을 이기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본질적인 평안은 하나님과의 화목 된 평안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결코 정죄함이 없는 평안입니다.

더 이상 죄로부터 추궁당하지 않는 평안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국한 되지 않고 더 큰 평안도 누리게 됩니다.

세상을 이기는 평안입니다.

 

복음을 아는 자는 세상에 대해서 크게 기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결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용도가 다하면 없어져야 할 모델하우스와 같은 임시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여도 그것은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잠시 후면 불타 없어질 장난감과 같은 이 세상에 목을 맬 필요가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마귀는 항상 화려함을 앞세워서 미혹을 합니다.

이 세상에 속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이 선악과처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게 보입니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자들은 미혹을 받아서 넘어지게 됩니다.

마귀에게 속아서 신앙생활을 화려함으로 하려고 하면 실족합니다.

소경이었을 때는 이 세상이 전부였으니까 세상에서 성공하여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눈을 떴습니다.

이 세상은 허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복음을 통해서 영적 눈을 뜨고 난 후 세상의 실상을 알고 나서는 초월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란? 감추어진 천국의 실상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실상은 아무나 보지 못하고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자들만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신자는 이 세상 것을 쫓아가지 않고 하늘에 것을 쫓아가며 사는 것입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게 됩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봅시다.

 

히 11:13-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믿음에 사람들은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성도의 삶이 세상 사람들보다 곤궁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겐 이 세상 것을 분깃으로 주지 않았어요.

 

하늘에 것을 주었어요.

그러므로 진정으로 하늘에 복을 받은 성도는 세상에서의 흥함과 패함을 크게 연연하지 않아요.

사도 바울처럼 풍부이든 비천이든 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뜻이려니 생각하고 자족하며 삽니다.

 

돈은 반드시 우환거리를 몰고 옵니다.

돈의 성격이 일만 악의 뿌리에요.

돈 자체는 좋고 나쁨이 없지만 그 돈이 발휘하는 능력이 일만 가지 근심걱정 거리들을 몰고 다닌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돈이 많고 잘 살수록 근심걱정거리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돈을 번다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은 하루 세끼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해요.

그러니 스트레스를 받고 그것을 푼다고 술집에서 짐승 짓을 하는 것입니다.

 

왜? 돈을 버나요?

먹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돈 번다고 먹지 못하고 있어요.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이게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상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세상의 영광을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해치는 것이기 때문에 안 주시는 거에요.

우리 스스로가 이 일을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 알아서 교통정리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근심걱정거리를 없애고자 세상에 부와 귀를 움켜쥐고자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세상에 부와 귀는 움켜잡을수록 근심이 더해지고 걱정이 더해져요.

옛 말에 천석꾼은 천 가지 걱정을 하고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을 한다고 했습니다.

 

부자는 잠을 달게 자지 못하여도 가난한 사람은 잠을 달게 자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거지에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이 세상에 나그네로 살게 하신 것이 복인 겁니다.

 

나그네에겐 하루 만큼만의 근심걱정거리가 있어요.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가요.

하나님이 성도를 세상에서 나그네로 두신 것은 그냥 하루 하루 감사하며 살라고 하신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탐욕이 이 나그네 인생을 벗어나고자 한단 말입니다.

하늘나라를 소망한다고 하면서도 땅에 것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고자 한단 말입니다.

나그네 길에 어깨에 짐을 잔뜩 지고 힘들어 한단 말이에요.

이게 우리의 어리석음입니다.

 

사람은 없을 때 가장 근심걱정거리가 없어요.

물질 문명이 발달한 선진국 일수록 행복 지수가 낮고 물질 문명이 발달치 않은 미개인일수록 행복지수가 높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보세요.

발가벗고 살아도 희희낙락하잖아요.

 

사람이 산다는 것은 하루 하루 자족하며 살 때가 가장 행복해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면 감사해요.

예수님이 지금 제자들에게 이렇게 하나님께 인생을 맡기는 마음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가서 세상 가치를 초월하는 그 평안을 가지고 오겠다고 합니다.

 

지금도 성령 안에서 살면 물질적 가치를 뛰어 넘어서 살아요.

그러니 예수님 말씀대로 평안인 것입니다.

이 평안을 받은 성도는 이 세상에서의 이별을 크게 아쉬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왔다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28=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은 곧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슬퍼할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쉬운 말로 이제 세상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세상에서의 수고와 슬픔을 다 마치고 안식의 세계로 간다는 말이에요.

이제 그 세계로 제자들을 초대하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성도의 모든 인생사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도 같이 주셨습니다.

너희는 이미 천국을 받았으니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더라도 슬퍼하지 말고 담대하라고 합니다.

 

성도가 받는 고난은 마치 새 생명을 낳는 해산하는 여인과 같은 것이라고 했어요.

여인이 생명을 낳기 위해 필연적으로 산고가 오듯이 성도에게도 고난이 닥친다고 합니다.

성도에게 있어 고난은 애벌레가 나비로 부화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문을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찢기심으로 여셨습니다.

이걸 세상을 이기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들도 십자가의 길을 감으로서 세상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담대하라고 합니다.

담대함이란? 믿음을 말합니다.

모든 것을 잃었다 하여도 슬퍼하지 말고, 얻었다 하여도 기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잃고 얻음은 모두가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기 때문입니다.

 

시편 90편을 봅시다.

 

시 90:3-12=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 임이니이다 5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사람은 티끌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대로 모든 사람은 다 돌아가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인생은 날아가는 화살과 같다고 합니다.

이것을 알고 사는 것이 지혜라고 하였어요.

역사라는 시간 속에 갇혀 사는 인간에겐 일평생이지만 영원을 사는 하나님 앞에선 한 순간에 불과한 것입니다.

 

한평생의 성공한 화려함도 한 순간이고!

복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도 한 순간입니다.

그러니 성도가 잠시 받는 환란은 장차 올 영광과는 족히 비교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평안을 받으신 분입니다.

평안을 받았기 때문에 환란도 옵션으로 따라 다니는 것입니다.

 

비밀을 하나 알려 드릴게요.

세상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면 죽음이고 저주스러운 것이지만!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이 지옥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요.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십자가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행복하게 잘 살고자 하니 고난이 저주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천국을 유업으로 받았으니 잠간 고난당하지 라고 하면 그것도 견뎌 낼만 해요.

고난의 쓴 나물도 좀 드셔보세요.

인생에 고난이 없으면 너무 밋밋해요.

 

잠시 잠간 후면 주님이 곧 오십니다.

너희가 이스라엘을 다 돌지 않아서 주님이 오신다고 했어요.

세상 잠간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이 주신 그 평안으로 세상을 담대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떠나심도 사실이고 주님이 다시 오심도 사실이라는 것이 믿어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도 받았습니다. 그러니 주님 때문에 세상에서 잠시 환란도 당하지만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믿음으로 넉넉히 이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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