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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101강. 그 날이 오면 (요 16:25-27)

by coroa 2022. 1. 7.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요 16:25-27=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101강. 그 날이 오면 (요 16:25-27)

-.정낙원 목사

 

 

 

그 날이 오면!

요한복음 14장 2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날”이란? 어느 정해진 특정한 날을 말합니다.

“그 날”이 언제인가 하면 오순절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성령이 불같이 임한 사건을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라고 하여 이미 예정이 된 그 날을 말해주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라는 말은 “예전에 정해진 그 날이 이르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성령이 오시기로 작정이 된 바로 그 날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시나리오대로 묵시에 속한 것들이 역사 속에서 펼쳐지게 됨을 보게 됩니다.

 

오순절은 유월절을 지나서 출애굽을 하고 난 후 50일째가 되는 날입니다.

이 날에 하나님이 시내 산에 강림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율법을 주십니다.

율법을 옛 언약이라고 합니다.

 

구약에서는 유월절 후 50일째 되는 날에 옛 언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의 실체가 되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난 후 50일째가 되는 오순절 날에 성령이 임하면서 새 언약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오순절은 언약을 받는 날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그 날이 바로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새 언약이 성도들 심령 속에 새겨지는 날입니다.

구약의 오순절에는 옛 언약이 돌 판에 새겨졌지만!

신약의 오순절에는 성도의 마음에 새 언약이 새겨집니다.

그러므로 그 날이란? 우리 안에 새로운 법이 새겨지는 날입니다.

 

“그 날”이란?

예수님이 죽고 다른 보혜사인 성령으로 성도 안에 오시는 날을 말합니다.

역사적으로 오순절 성령 강림 일을 말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성령으로 거듭나는 날을 말합니다.

이 날은 성도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날입니다.

 

쉽게 정리해서 말합니다.


“그 날”이란? ‘역사’ 속에 있던 자들이 ‘묵시’ 속으로 이사 가는 날입니다.

“그 날”이란? ‘아담 안’에 있던 자들이 ‘예수 안’으로 옮겨진 날입니다.

“그 날”이란? 죄로 인하여 ‘죽었던 자’가 예수님의 의로 ‘살아난 날’입니다.

 

“그 날”이란?

바로 창세전에 자기 백성이 예수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어진다고 언약을 하신 바로 “그 날”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를 하신 “그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성 여인을 찾아가서 말씀하시기를 “그 날이 오면” 네 속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가 솟아난다고 했습니다.

이는 성령의 임하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 그 날이 오면 신령과 진정으로 아버지께 예배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우리 안에서 성령이 임하면 이제부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대가 된다는 말입니다.

아버지께 예배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로 그 누구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숨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오면 그 동안 숨겨 왔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그 날이 오면” 아버지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 너희들이 직접 아버지께 구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젠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나아가서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 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 동안 죄로 가로 막혔던 담이 허물어져서 이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름하여 에덴의 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죄로 죽었던 어둡던 우리 마음에 생명의 빛이 비췬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오시면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한다고 하셨지요.

“그 날이 되면”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거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과 우리가 한 몸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한 몸이 되면 아버지와도 한 몸이 됩니다.

 

이건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불가입니다.

이론으로는 무슨 뜻인지를 알겠는데 실제로는 경험 할 수가 없어요.

인간들의 이성으로는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의 의식구조는 나와 타인은 한 몸일 수가 없습니다.

흔히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이지 실제로는 두 마음이고 두 몸입니다.

아무리 이론적으로 한 몸이라고 하여도 다름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기주의로 살아가는 죄인에게는 아무리 부부라 할지라도 동상이몽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죽고 못 살 것 같다가도 살다가 보면 서로 간에 차별을 느끼고 의견에 충돌이 일어나고 급기야는 이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은 결코 하나 될 수가 없어요.

모두가 독자적입니다.

너는 너이고 나는 나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면 하나 된다고 합니다.

예수가 내 안에 내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이는 성도와 예수님이 한 몸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젠 손으로 만진 바가 되고 눈으로 본 바가 되고 귀로 들은 바가 됩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경험된 하나님을 증거했었던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요한일서 1장 1절에서 하나님을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다고 했어요.

 

요일 1: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을 보고 듣고 만졌다고 합니다.

아니 어떻게 말씀을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가 있습니까?

이는 곧 말씀이 가현적으로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말씀이 실제로 보이는 분으로 나타나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이건 십자가 지시기 전의 예수님을 말씀하기도 하지만 더 광의적으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이 사도 요한 속에서 일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자신은 예수님을 경험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그 날이 사도 요한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삼년 반 동안 동거동락을 하였습니다.

흔히들 한 몸처럼 지냈습니다.

그러나 늘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서로가 꿈꾸는 세상이 달랐습니다.

 

자연히 서로의 관심사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이야기를 하는데, 제자들은 땅 이야기로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자고 하는데, 제자들은 이 세상에 정착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 것을 버리라고 하는데, 제자들은 움켜잡으려고 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 충분을 채우는 수단에 불과 했습니다.

베드로는 배를 버리고 예수를 택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베드로는 예수와 배를 맞 바꾼 것입니다.

요즘 말로 직장을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자 과거에 버렸던 배를 다시 찾아서 고기를 잡았던 것입니다.

 

제자들 모두가 예수를 이용해서 세상에서 등 따습고 배 부른 입신양명을 꿈꾸었습니다.

이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 우리도 예수를 이용하여서 세상에서의 보다 나은 삶을 꿈꾸고 있잖아요.

우리 마음도 예수님의 나라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내 나라뿐입니다.

나의 승승장구만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신앙에 현실입니다.

육신을 입고 있는 몸으로서는 아무리 복음을 안다고 하여도 이 범주를 벗어날 수가 없어요.

어느 시대이고 예수는 항상 인간들에게 있어 이용 대상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함께 동거를 하여도 늘 한 지붕 두 살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한 지붕 두 살림을 청산시켜 주시려고 오시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속으로 들어오신다고 합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동상이몽을 하나로 만들어 주신답니다.

두 몸을 한 몸으로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날이 오면”

성령이 너희 안에 오게 되면 내가 지금까지 한 말이 모두가 하늘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또한 너희들이 살아가는 삶에 가치관이 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와서 너희들 안에서 이 일을 하겠다고 합니다.

 

이성적으로는 둘이 한 몸이 된다는 이 불가능한 일을 하시려고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른 보혜사가 되어서 오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는 것은 하늘에 속한 몸으로 갈아입고 오시는 것입니다.

제자들 속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영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그 날이 오면” 내가 아버지에 대하여 알려주지 않아도 너희들 스스로가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아버지를 알려 주실 것이란 말입니다. 

“그 날이 오면” 모든 두려움이 다 사라지고 아버지와 화목 된 자로서 평강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가장 중요해요.

 

그 동안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어요.

구약에 보면 시낸 산에 강림하신 하나님은 죽이는 하나님이었어요.

그래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조차 겁이 나서 모세를 중보자로 세워서 말해 달라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려운 하나님이 이제는 자상한 아버지로서 우리를 대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놀라운 일이 있을까요.

지금까지는 아버지와 법적 관계 안에 있었지만 “그 날이 오면” 법적 관계에서 사랑의 관계 안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럼 아버지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고 사랑의 대상임을 알게 됩니다.

 

또한 “그 날이 오면” 너희가 이젠 아버지에게 내 이름으로 구하게 된다고 알려 주십니다.

그럼 아버지는 내 이름으로 너희에게 시행을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날”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그 날이 오면!”

 

그런데 이미 “그 날”이 온 성도도 있고!

아직 “그 날”이 오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 날”이 온 성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누릴 것입니다.

그럼 아버지와 안식을 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4장을 봅시다.

 

히 4:9-10=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이미 안식에 들어간 사람도 있고!

아직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도 있다고 증거하고 있지요.

무슨 말인가요?

 

안식에 들어간 것은 무엇이고,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함은 무엇인가요?

이는 법 아래 있는 자가 있고, 은혜 아래 있는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법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고 은혜는 쉼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종입니다.

종은 안식이 없어요.

항상 어깨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짊어져 있어요.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갈 4:1-1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유업을 이을 자란 말입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에는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는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서 교육을 받습니다.

정한 때란? 이미 확정적으로 정해진 어느 날이란 말입니다.

 

후견인과 청지기란? 율법을 말해요.

율법 아래서 신앙생활 하던 것을 말합니다.

비록 유업을 이을 아들이지만 어렸을 때는 율법아래서 태어나 종노릇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때가 차매 그 아들을 율법 아래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아들에 명분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잠시 후견인과 청지기에게 맡겨 두었던 자들에게 “아들에 영”을 보내 주셨습니다.

즉 성령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의 명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들에 명분을 얻게 해 주셨다는 것은 아들 노릇하게 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령이 오면 “종의 자리”에서 “아들의 자리”로 옮겨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종은 십자가에 죽이고, 성령으로 아들로 살려 놓은 것입니다.

아들의 자리로 옮겨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팔자 안으로 끌려들어갔다는 말입니다.

예수 안에서 나왔다가 다시 예수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이지요. 

우리의 옛적 자리가 어디인가요.

아들의 자리입니다.

은혜의 자리였어요.



그런데 죄가 종의 자리로 내려가게 하였어요.

법의 자리로 끌어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 아래서 종 노릇하고 살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가 있던 원래 그 자리로 옮겨 주신 것입니다.



종에서 아들로!

법에서 은혜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셨어요.

이게 구원이에요.

거듭남이에요.

 

그러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고 합니다.

종 노릇하지 말라고 합니다.

율법 아래 있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나옵니다.

누가 자꾸만 종 노릇 시키고자 한단 말입니다.

마귀가 율법 아래로 끌고 가려고 한단 말입니다.

 

자 보세요.

우린 죄 아래서 태어났어요.

율법 아래서 살았어요.

우리 몸은 율법에 적응이 되어 있어요.

죄 짓고 사는 일이 본능으로 작동을 해요.

너무도 쉽고 자연스러워요.

 

그래서 종의 자리에서 아들의 자리로 옮겨 놓아도 우리의 습성이 종노릇하던 것을 좀처럼 떨쳐 버리지를 못해요.

나면서부터 율법에 훈련을 받아 왔기 때문에 은혜가 낯설어요.

종으로 사는 것이 편하지 아들로 사는 것이 불편해요.

신앙생활이 행함이 편하지 믿음은 불편해요.

 

그래서 우리는 툭하면 율법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 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단 말이에요.

율법 식 제사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와요.

 

율법 식 제사가 바로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들입니다.

즉 우리의 행함이에요.

나의 근거로 나온단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나오지 않고 행함으로 나오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내가 한 일을 의지하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의지 할 수가 없어요.

말씀도 내가 지키고 살아야지 편하지 예수님이 지킨다고 하면 믿어지지가 않아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구원을 받는 것이 편하지 예수님에 의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실감이 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틈만 나면 우리 의를 만들고자 해요.

내가 말씀대로 살아서 당당해 지고 싶어진단 말이에요.

 

소경이 갑자기 눈을 뜨고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누가 눈을 기증하여서 눈을 뜨게 되었어요.

그런데 집을 찾아가지 못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 동안 눈을 감고 다니면서 익혀둔 감각으로 집을 찾아가는 것이 습성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눈을 뜨고 나니 그 감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저앉아서 울고 있었어요.

그 모습을 보고 지나가던 의사가 묻습니다.

자초지종을 듣고서는 의사가 내린 처방은 눈을 감고 집을 찾아 가라고 했어요.

그러자 그 사람은 집을 잘 찾아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뜻인가요.

소경은 소경으로 살 때가 편하단 말입니다.

눈을 뜨면 전혀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힘들어요.

우리 죄인들도 그래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어요.

이들은 애굽에서 태어나서 애굽에서 자라고 애굽에 삶에 방식으로 살았어요.

그런데 광야로 나와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라고 합니다.

그러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에요.

사사건건 부딪칩니다.

그래서 차라리 애굽에서 사는 것이 낫겠다고 합니다.

 

애굽에서의 삶에 방식은 한 달 치씩 곡간에 곡식을 쌓아두고 살아가는 방식이에요.

그러나 광야에서 알아진 하나님 나라 방식은 쌓아두지 않고 하루하루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살아가는 방식이에요.

쌓아 둔 것은 법이고!

하루하루 얻어먹는 것은 은혜에요.

 

애굽에서는 내가 농사를 지어서 곡간에 쌓아두고 먹었어요.

법으로 살았어요.

그런데 광야에서는 공짜로 주는 것을 얻어먹었어요.

은혜로 살았어요.

 

그러니 애굽에 방식으로 길들여진 백성들은 하루하루 주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고맙지가 않고 도리어 불편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명을 거역하고 애굽 식으로 이틀 치씩 모으기 시작을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두들겨 팹니다.

 

애굽에서는 내 맘대로 살았어요.

그런데 광야에서는 내 맘대로 살지 말라고 해요.

하나님 뜻대로 살라고 합니다.

내 몸은 내 맘대로 살도록 습관이 되어져 있는데 하나님 뜻대로 살라고 하니 매사에 충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애굽으로 보내달라고 데모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 호랑말코 같은 새끼들이 어디서 대드느냐고 하면서 지진으로 죽이고 불뱀으로 죽이고 염병으로 죽이고 이래 죽이고 저래 죽이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놈들을 다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애굽을 전혀 모르는 인간으로 탄생을 시킵니다.

이름하여 광야에서 태어난 2세들입니다.

 

하나님은 얘굽에서 태어난 옛 사람은 다 죽이고 광야에서 태어난 새 사람들을 가나안으로 데리고 들어갔어요.

이건 마치 아담 안에서 태어난 우리 옛 사람을 죽이고 성령으로 거듭난 새 사람을 천국으로 데리고 가는 것의 모형이에요.

 

애굽에서 난 1세들은 우리 옛 사람을 말해요.

우리 옛 사람은 죄 짓는 일이 너무도 편하고 쉬워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안으로 집어넣어줍니다.

 

예수 안은 예수의 방식으로 살아야 편해요.

은혜의 원리로 살아야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죄 아래서 태어난 행사머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법으로 살고자 합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이 늘 실수투성이고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야! 나는 너희들 정말 못 키우겠다고 하고 다시 마귀에게 율법 아래로 보내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보내주지 않고 달달 볶아 대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애굽으로 보내달라고 데모를 한 것같이 우리도 주제에 나 예수 안 믿을래! 라고 교회도 안 나오고 데모를 하고 있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이 놈에 종자들이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투자한 것이 얼마인데 하면서 몽둥이를 들고 두들겨 패기 시작을 합니다.

두들겨 팰 때마다 옛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입니다.

육신의 소욕들이 뚝뚝 나가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이 얼마나 고단하겠어요.

맞아요.

고단할 수밖에 없어요.

예수 안에서 산다는 것이 우리 본성과 반하고 너무도 생경하고 낯설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서는 내가 내 인생을 책임지는 식으로 살았어요.

그러나 은혜 아래는 내 인생이 없어요.

예수님의 인생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은 예수님에 것으로 살아가는 곳이에요.

 

예수님에 것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이 다 이루어 놓으신 것으로 산단 말입니다.

구원도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얻는 것이고!

영생도 예수님이 주신 것으로 받고!

천국도 예수님이 마련해 놓은 곳으로 들어가요.

 

우리가 구원을 따내고!

우리가 영생을 얻어내고!

우리가 천국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에요.

전부 무상으로 공급을 받아요.

 

그런데 마귀라는 놈이 우리로 하여금 자꾸만 종의 행사머리로 살게 한단 말입니다.

받지 말고 따내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럼 우리는 하던 습성이 있어서 또 종 노릇하는 겁니다.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는 것은 종의 멍에를 매게 하는 놈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놈이 바로 마귀에요.

교회 안에는 마귀의 종들이 우굴 우굴해요.

이 마귀의 종 놈들이 행함 신앙을 가르친단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간섭을 하세요.

야! 너~ 왜? 날 안 믿는데! 라고 툭툭 건들어요.

너~ 왜? 믿음으로 살지 않고, 행함으로 살고자 하는데!

너~ 왜? 은혜로 살지 않고, 법으로 살고자 하는데 라고 간섭을 하신단 말입니다.

 

그럼 성도는 그 간섭을 당하면 화들짝 놀라요.

맞아!

나는 종이 아니고!

아들이지!

나는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지!

조율을 당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일평생 이런 등신짓을 하고 살아요.

아들이 종 노릇하고 산단 말입니다.

은혜 아래서 법으로 산단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바보에요.

 

마귀는 우리를 종으로 데리고 가지 못해요.

다만 종 노릇 하게는 할 수 있어요.

우릴 꼬드낀단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하와처럼 뱀의 말에 넘어가요.

 

그래서 선악과를 따 먹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악과란? 율법을 말해요.

율법 신앙을 추구한단 말입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가려지지도 않는 수치를 가리는 일을 한단 말이에요.

평생 헛 짓거리를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성령이 우리 안에서 탄식을 하면서 기도합니다.

주여! 이 등신이 또 종 노릇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용서하소서! 라고 기도한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피로 하나님에게 탄원을 하신단 말이에요.

 

아버지 저 등신 같은 놈을 위해서 내가 죽었습니다!

그러니 내 죽음을 보시고 저 놈을 용서해 주소서! 라고 변호 한단 말입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용서 해 주시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나요.

 

아주 쉬운 말을 할게요.

우리는 평생 등신 짓거리를 하고 살아요.

반대로 예수님은 평생 우리 변호하세요.

그러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바탕엔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 사실을 깨닫게 해주세요.

그러니 그 안에 성령이 계신 성도는 늘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피를 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이란? 하면 할수록 예수님의 피에 가치를 더욱 더 귀하게 여기고 감사하게 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자기가 죄인이고 등신이라는 것을 더 깊이 알아가게 되겠지요.

 

내가 무슨 공로를 세우고 업적을 쌓아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바로 예수를 죽인 악당임을 깊이 깊이 더 많이 알아간단 말이에요.

그리하여 “주여 나는 죄인 중에도 괴수입니다” 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앎이 자기 자랑을 하지 못하게 하고 예수님만 자랑하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족속에게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더 많이 더 깊이 알아가기를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을 봅시다.

 

엡 3:14-19=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뭐라고 합니까?

제발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눈이 떠지기를 기도하지요.

하나님 은혜를 많아 알아가기를 바라지요.

바울이 하는 이 기도가 바로 예수님의 기도에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이런 기도를 하고 계세요.

 

우린 이런 기도를 하지 못해요.

하고 싶지도 않아요.

우린 기도하면 맨날 다고 다고 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대신 기도하라고 예수님을 우리 안에 파송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얼마나 속이 터지겠습니까?

맞아요.

우리는 무던히도 예수님 말을 안 들어 처먹는 족속들이에요.

아주 지독한 종자들이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버림당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피가 발라져 있기 때문입니다.

속된 말로 예수님이 이 인간 같지 않은 거챙이를 낳고 미역국을 잡수셨단 말입니다.

거챙이란 경상도 말로 꼴통이란 말입니다.

 

중요하니 반복합니다.

 

우린 모두가 법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법 아래란 죄 아래란 말입니다.

우리는 태어나자 말자 죄에게 종 노릇하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서 우리로 하여금 죄(罪) 아래서 의(義) 아래로 불러 주셨습니다.

율법 아래서 은혜 아래로 옮겨 주었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일을 하던 종의 자리에서 모든 것은 내려놓고 평안히 쉼을 얻는 아들의 자리로 옮겨 주셨습니다.

 

누가요?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언제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서 말이에요.

 

예수님이 오신 날이 바로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그 날”이에요.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는 “그 날” 말이에요.

때가 차매 예수님이 우리를 종에서 아들로 옮겨주는 “그 날” 이에요.

법 아래서 두려워하던 것을 평안의 나라로 옮겨 주는 “그 날” 말이에요.

 

그런데 이 “그 날”이 사람마다 다르게 임해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때와 기한에 맞추어서 일을 하세요.

마치 포도원 품꾼의 비유처럼 말입니다.

어떤 품꾼은 일찍 부르심을 입었고!

어떤 품꾼은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부르심을 입었고!

어떤 품꾼은 해가 뉘엿뉘엿 져 갈 때 부르심을 입습니다.

 

쉬운 말로 세례요한처럼 모태로부터 부르심을 입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바울처럼 율법 아래서 열심과 특심으로 종 노릇하다가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 있고!

십자가에 달린 우편 강도처럼 마지막 순간에 부르심을 입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부르심은 하나님이 정하세요.

 

모두가 부르심으로 된 것이므로 은혜인 것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안식을 합니다.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어요.

법 아래 있는 자를 은혜 아래로 옮겨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가셨다가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이미 예수님이 오신 성도가 있고, 아직 오시지 않은 교인들이 있어요.

“그 날”이 이미 임한 사람은 성도이고,

“그 날”이 아직 임하지 않은 사람은 교인이에요.

예수님이 그 안에 오신 성도는 은혜로 살고, 예수님이 아직 오시지 않은 교인들은 법으로 삽니다.

 

그럼 오늘 이 말씀 앞에서 나는 과연 “그 날”이 이미 임하여서 여호와의 안식에 들어간 사람인가 아닌가를 확증 받아 보세요.

어떻게 확증을 합니까?

이는 자기 안에 있는 믿음이에요.

 

바울이 그러지요.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스스로 확증하라고 하지요.

다른 말로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줄 아느냐!

만약에 그리스도 없다고 하면 버리운 자라고 했어요.

 

이게 엄청 중요한 이야기인데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고 자기 자신을 확인해 보세요.

믿음은 남에게 속일 이유가 없어요.

믿어지면 믿어지는 것으로 살면 되고, 안 믿어지면 안 믿어지는 것으로 살면 되어요.

괜히 믿어지지도 않는 것을 억지로 남에 눈치 때문에 믿는 척 하지 말란 말입니다.

 

믿어지지도 않는 것을 믿는 척 하게 되면 우울증에 걸려요.

예수 믿는 것이 스트레스에요.

많은 사람들이 믿음이라는 우울증에 걸려 있어요.

신앙생활을 짜증스러워 하고 있어요.

이 모두가 마음에도 없는 것을 억지 춘향이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어리석어서 자기까지도 속이고자 해요.

자기 믿음 까지도 속이고자 해요.

그래서 성경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했어요.

유대인들이 그랬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유대인들이 신앙을 한 마디로 정의하시길 외식이라고 했어요.

외식이란? 마음에도 없는 것을 한다는 말입니다.

이걸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마음으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하는 척 한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 버전으로 예수가 믿어지지도 않으면서 믿는 척 한단 말입니다.

 

왜? 믿어지지도 않는 것을 믿는 척 할까요?

이는 믿는 척 하여야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나 어떤 조직에서나 믿음 있는 척 하여야 남에게 인정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믿음 있는 척 믿음이 좋은 척 외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외식은 목사들이 도사에요.

교인들도 마찬가지에요.

어떻게 외식하는지 아세요.

그게 바로 열심과 충성이에요.

 

어떤 목사는 40일 금식기도 몇 번을 했다는 것을 명함에 새겨서 갖고 다니는 목사도 있어요.

어떤 목사는 일 년 365일 철야기도 한다고 자랑하는 목사도 있어요.

왜? 이러한 것을 자랑 할까요.

이것으로 힘을 삼고 교인들 위에 군림하고자 함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교인들에게 힘으로 통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못을 하나 쳐 놓고 갑시다.

성도에게는 열심과 충성이 있어요.

예수님을 만나면 반드시 이러한 것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그 안에서 행하게 하는 열심과 충성은 감사와 기쁨으로 나타나요.

자기 자랑이 나타나지 않아요.

 

하지만 자기가 행한 열심과 충성은 반드시 그것을 의지하고 힘으로 사용해요.

믿음이 없으면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가 그 안에서 행하게 한 것이 아니므로 자기가 한 것을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이 자랑이 곧 힘으로 작용을 합니다.

이 힘으로 으뜸이 되고자 하고 상좌에 앉고자 하고 남에게 선생노릇을 하고자 해요.

 

좌우지간 자기의 조건으로 힘을 사용한다는 것은 다 그 안에 예수가 없다는 반증이에요.

예수가 없기 때문에 자기가 하였다고 하고!

자기가 하였기 때문에 자기를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 예수가 없는 사람은 짐승이에요.

짐승은 힘으로 살아가요.

본능이 그렇게 움직여요.

 

아무리 복음을 청산유수처럼 줄줄 꾀어도 그 안에 예수가 없는 사람은 지식으로 교만해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복음 안다는 것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자는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지 않고는 못 배겨요.

 

바울은 지식은 교만케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했던 것입니다.

 

지식은 자기 실력이고 사랑은 예수님 능력이에요.

지식으로 알아진 복음은 교만케 해요.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깨달아진 복음은 덕으로 나타나요.

이것은 교인과 성도를 판단하는 하나의 시금석이 될 수가 있어요.

 

왜? 사람들이 외식한다고 했나요?

외식을 통하여서 힘을 얻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이 복음을 알고 믿음 있다는 것이 힘이 안 된다고 하면 사람들이 복음 아는 것이나 믿음 있는 척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랑한다는 것은 그것이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에요.

안 믿어져도 믿는 척 하여야 하는 것은 믿음이 있어야 교회에서 발언권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누가 발언권을 가지던가요?

믿음 있다고 하는 자들이지요.

그런데 그들이 무엇으로 믿음 있는 것으로 내어 놓던가요?

 

열심과 충성이지요.

자기 행함이지요.

교회이든 조직이든 열심과 충성이 없으면 발언하지 못해요.

그 안에 법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이 법칙을 벗어 날 수가 없어요.

 

법은 지킴에서 힘이 생겨요.

법이란? 하라, 하지 말라 에요.

하라고 한 것을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으면 힘이 생겨요.

 

엊그제 전라도 지역에 성경공부 모임이 있어서 다녀왔어요.

거기에 참석하신 권사님이 자기 교회에서 성전 건축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항존직들은 의무적으로 건축헌금을 하라고 한다는 겁니다.

 

권사님에게는 5백만 원이 책정이 되었데요.

이걸 해야 하나 안해야 하나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의 장단에 춤을 춰주면 고민거리가 아닌데 권사님은 복음을 아시니까 하기 싫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안하기도 그렇다는 겁니다.

곁에 계신 분이 대신 말하는 것이 다 하는데 혼자 안하면 두고 두고 씹힌다는 거에요.

 

결국 하면 발언권이라는 힘이 생기고 안하면 힘이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씹히기 싫으면 하시고, 씹히고 싶으면 하지 말라고 했어요.

권사님 마음이 허락하는 데로 하라고 했어요.

이게 아니다 싶으면 하지 말고! 그 대신 핍박 받을 각오는 하셔야지요.

제 생각에는 안 하는 것이 좋다고 했어요.

 

돈 아깝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그럼에도 알토란 같은 돈을 교회에 내야 하는 것은 그것이 힘으로 상승작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얼굴을 세워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믿음이 없으면서도 믿음 있는 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이든 세상이든 인간이 모인 곳에서는 속여야 살 수가 있어요.

하나님도 속이고 사람도 속여야 살 수가 있어요.

교회 안에서도 속여야 살아요.



그래서 교회 안에 믿음 있는 척 하는 자들이 많은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 있는 척 한다는 말은 자기 열심과 충성을 믿음으로 내어 놓는 것을 말합니다. 

항상 어느 시대이고 믿고자 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믿는 사람은 작았어요.

스스로 예수를 믿고자 따라는 사람은 많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게 해 주는 사람은 적었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말합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믿게 주셔야지만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 일에는 우리가 애쓰고 노력할 일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 이 그 안에 오시면 저절로 생겨요.

 

“그 날”이 임한 성도는 믿어져요.

예수를 믿고자 한다는 것은 아직 그 날이 오지 않았고 믿음을 받지 못하였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이 자기 열심으로 믿음을 보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안 믿어질수록 믿고자 애를 써요.

그러니 믿음과 자기 열심을 비례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어지는 성도는 누가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감사함으로 하는데 반면에 믿어지지 않는 사람은 사람들이 알아주는 일이라면 생색내는 일에 열심을 내게 되어 있어요.

 

그러다보니 아이러니하게도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는 진짜로 예수를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은 믿음 없는 것처럼 보이고, 예수를 믿고자 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좋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거짓이 참처럼 보이고 참이 거짓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이 시대는 인간의 행함이 믿음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었어요.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안에 없는 것을 있다고 감추고자 합니다.

그러니 믿음이 없을수록 믿는다고 큰 소리 친다는 말이에요.

못 난 사람일수록 잘난 척 한단 말이에요.

속이 텅 빈 사람일수록 속이 찬 것처럼 행세를 합니다.

이 모두가 그 속에 허 한 것을 감추고 싶어서입니다.

 

빈 깡통이 요란하다는 말이 있지요.

예수가 안 믿어지는 사람일수록 믿는 척 요란을 떨어요.

믿음이 없을수록 믿음이 좋은 척 설쳐요.

 

진짜 믿음이 좋은 사람은 나대지 않아요.

하지만 반대로 믿음이 없는 사람이 믿음이 좋은 척을 해요.

믿음이 없을수록 온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열성으로 믿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한단 말입니다.

그 믿는 척 하는 것이 바로 열심과 충성이에요.

과도한 충성으로 믿음 없음을 숨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단에 속한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보게 되지요.

서울 하나 교회 위층에 가보면 신천지가 있어요.

하나 교회는 지하에 있고 2,3,4층이 신천지에요.

여기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보면 열심이 특심해요.

 

이들의 특징이 어떻던가요?

전부 광신자들이에요.

열심과 특심이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왜? 열심과 특심이 많을까요.

그것이 믿음 있음이라고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열심과 특심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자기 안에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증거가 없으니 조직에서 원하는 믿음을 좇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열심과 특심으로 자기 안에 믿음 없음으로 오는 두려움을 내어좇고자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을수록 갈멜산의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처럼 자기 몸을 학대하면서 열심과 충성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믿음이라는 미명으로 비 이성적이 되어 버려요.

그것이 삶으로 나타나요.

그 삶이 바로 극단적 염세주의로 세상과 격리하여 집단적 생활을 하거나 비 윤리성과 비 도덕성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가정도 팽개치고 자식도 팽개치고 부모형제와 이웃과의 관계도 단절을 서슴치 않는 행동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로지 자기 조직에만 올인을 합니다.

집단적 폐쇄성을 갖게 되어요.

이게 이단의 특징이에요.

 

집단적 폐쇄성을 갖는다는 말은 집단 밖으로 나가면 그만큼 불안하다는 말입니다.

그 불안함을 자기들끼리 모여서 집단 최면에 빠져서 잠시 잊게 만드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이러한 폐쇄성을 지적하면 화를 냅니다.

그냥 자기들끼리 놀게 내버려두라고 해요.

 

그래서 자기들을 비판하면 다 쫓아내고 자기 조직에 유익을 주는 사람들만 남겨두고 그들을 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관리하는가 하면 은근히 공갈과 협박을 해요.

자기들하고 교제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다고 해 버립니다.

 

그럼 자기 안에 하나님의 증거가 없는 사람은 그들의 말을 따르게 되어 있어요.

그들의 주장에 동조함으로서 믿음 있음으로 포장을 한단 말이에요.

그래야 거기서 살아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들의 믿음 없다는 공갈을 들으면 조직에서 왕따를 당한다는 그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하여 충성맹세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면 불안해해요.

우울증이 오고 대인 기피증에 시달리게 되어요.

이단에 속한 사람들은 다 이런 증상에 시달려요.

 

이 모두가 자기 안에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그 날”이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 안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조직으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말로는 예수 예수하지만 실상은 그 안에 예수가 없어요.

예수가 없을수록 예수 이야기를 과도하게 많이 하는 것입니다.

습관처럼 주술적으로 한단 말입니다.

그건 두려움을 내어 좇기 위한 공허한 소리에요.

그래서 더 믿음 있는 척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성령 받기 전에 제자들과 같아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지켜준다고 큰 소리치지요.

그래 놓고선 하루도 못 넘기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지요.

이게 믿는 척 하는 신앙이에요.

 

오순절 성령을 받기 전에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항해를 하면서도 풍랑이 일어나니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지요.

왜? 아우성을 칩니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한 몸이었다고 한다면 예수님과 함께 풍랑 속에서 잠을 잤을 거에요.

 

그러나 제자들은 그러지 못하였어요.

예수님과 한 배를 타고 있었지만 말이에요.

예수 따로 제자들 따로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제자들이 돌변합니다.

이젠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유대인들이 뭐라고 하든지 개의치 않습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세상 사람들과 격리하여서 자기들끼리 모여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고 나자 이젠 세상 속으로 들어갑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세상을 이기는 예수님이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세상을 이기게 하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보세요.

제자들은 세상과 담을 쌓지 않았어요.

폐쇄적이지 않았어요.

도리어 세상이 제자들을 밀어냈어요.

세상이 밀어내기 때문에 세상과 구별되게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세상 속에 들어가셨어요.

율법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어요.

그러자 율법이 예수가 싫다고 밀어낸 것입니다.

 

이걸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자기 행위가 악함으로 빛을 미워하더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척을 지지 않았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예수님 안에는 아버지의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속된 말로 실력이 있는 사람은 선수를 구분하지 않아요.

바울처럼 말이에요.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하지 않았어요.

 

이방인에겐 이방인처럼 대하고 유대인에겐 유대인처럼 대하였어요.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겐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대하였어요.

그래서 바울은 율법의 규례를 지켰어요.

 

바울은 이미 율법을 넘어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서도 율법에 갇히지 않고 천국에 서기관처럼 옛 것과 새 것을 그때 그때 유효적절하게 잘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성도가 율법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상고해 보고 갑시다.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오해하고 있어요.

마치 예수 믿으면 율법이 필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어요.

이는 천지가 존재하는 한 율법이 해 주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천지를 의인화 하면 우리 육신을 말해요.

 

우리 몸뚱이가 있는 한 율법은 살아서 죄를 지적하는 역할을 해 주어야 해요.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얻은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감사라는 것으로 드러나게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법과 은혜는 짝이에요.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 주는 짝이란 말입니다.

어느 것 하나가 없으면 병신이에요.

 

이건 마치 빛과 어둠과 같아요.

어둠이 있는 한 빛은 존재해 주어야 해요.

그래야 계속해서 어둠이 빛에 의해서 어둠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둠이 어둠으로 드러나려면 반드시 빛이 있어야 합니다.

 

율법과 은혜도 이와 같아요.

둘이 같이 동행하면서 서로를 드러내 주어요.

그래서 성경은 율법도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복음을 복음으로 드러나게 해 주기 때문에 율법도 귀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 믿으면 하나님 말씀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이건 하나님 말씀이 담고 있는 의미를 몰라서 그래요.

하나님 말씀은 법이에요.

율법 역할을 한단 말입니다.

 

율법이 왜? 필요한가요?

우리의 죄를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서 우리로 하여금 죽음의 자리로 내려가게 만들어요.

 

로마서 7장을 봅시다.

 

롬 7:7-1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잘 보세요.

율법이 없을 때는 죄를 몰랐다고 하지요.

그렇다고 죄가 없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죄가 있어도 그것이 죄라고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죄로 규정하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떨어지니까 죄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주어지니까 이상하게 우리 안에서 그 율법에 반하는 것들이 튀어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탐심하지 말라고 떨어지니까 내 속에 탐심이 봇물 터지듯이 나오더란 것입니다.

결국 율법이 우리 속에 있는 탐심을 끄집어내는 미끼 역할을 한 것입니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죽은 것이에요.

왜냐하면! 죄를 죄라고 고발해 주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오기 전에는 내가 죄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에 내가 살았었어요.

그런데 율법이 오고 난 후로는 죄를 알게 되어서 내가 죽은 자가 되고 말았어요.

 

중요한 것은 율법이 오고 나니까 내 안에는 각양의 죄들이 터져 나와서 나를 죽음으로 이끌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나는 산 자라고 생각했는데 율법이 와서 아니야 넌 죽은 자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죄에 팔렸다는 것을 자각시켜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살리려고 주신 신령하고 좋은 율법이 도리어 나를 죽음으로 끌고 가더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 말씀이에요.

 

알다시피 하나님 말씀은 생명이에요.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우리를 살리려고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역사를 할 때는 반대로 우리를 죽이는 것으로 일을 해요.

이게 하나님 말씀이 담고 있는 역설(逆說)이고 비밀(秘密)이에요.

그런데 이 역설이 재 역설을 일으켜요.

 

무슨 말인고 하니 원래 하나님 말씀은 생명이에요.

우리에게 생명으로 주어졌어요.

그런데 그 생명이신 하나님 말씀이 죄인이게 떨어지니까 죄인을 살리는 자리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죽이는 자리로 끌고 가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죽음이 자리에 가 보니 거기에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라는 의원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죄인을 다 죽여 놓았는데 그 죽음 속에서 예수님이 생명으로 창조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 말씀이 살았다고 생각하는 우리를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고 고발을 하더란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모르면 죄를 몰라요.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죄가 있었지만 그것이 죄라는 것을 몰랐어요.

그래서 율법이 가입한 것은 죄를 들추어내고자 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없을 땐 죄인인줄 몰랐는데 율법이 가입하고 나니까 내가 죄인으로 드러나더란 말입니다.

 

그럼 이 사실을 아는 성도라고 한다면 난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을 거야!

내 맘대로 살거야! 라고 할 수가 있겠어요.

아니 그럴 수 없어요.

 

그런데 이 시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담고 있는 비밀을 모르는 자들이 있어요.

예수가 죄인을 구원 한다고 하니 내가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예수님의 의가 더 드러난다고 하는 자들이 있어요.

 

그래서 아! 막사는 이 재미!

꼴리는 대로 사는거야! 라고 하는 것입니다.

막 사는 것이 마치 믿음으로 사는 것인 냥 주접을 떨어요.

 

실제로 이렇게 가르치는 자들이 있어요.

이건 괴악한 누룩이에요.

뱀의 독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십자가 도를 가지고 자꾸만 어떤 논리로 개발해요.

이성에 맞도록 학문화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괴변을 늘어놓고 자신들만의 언어로 어렵게 만들어요.

혼자 독점적으로 아는 것처럼 한단 말이에요.

그래야 선생 노릇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들으면 그럴듯해요.

하지만 그 속에 성도의 신앙을 반 복음적으로 행하게 하는 뱀의 독이 들어가 있어요.

그래서 그러한 말을 계속하여 듣다 보면 죄에 대한 감각을 상실해요.

중요한 것은 이러한 논리 속을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일하심이 없어요.

현재 예수님이 성도 안에서 일하는 것이 없어요.

예수가 죽었어요.

 

그러므로 이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죄에 대한 감각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아픔이 없어요.

죄가 육신의 기회를 타서 역사하는 것과의 싸움이 없어요.

도리어 죄인이 죄 짓는 것이 당연한데 뭐! 라고 하면서 방탕과 방종으로 일삼아요.

이걸 영지주의 사상이라고 해요.

 

이러한 자들이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어요.

바울은 이러한 자들을 철학으로 공교하게 지은 말로 복음을 가리는 자들이라고 했어요.

이단이라고 했단 말입니다.

 

왜? 복음 복음하면서 방탕하는 자들이 일어나는가 하면 모두가 복음이라는 경건을 자기 이익의 재로로 사용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쉬운 말로 율법 아래서는 죄를 지으면 양심상 찜찜했는데 예수 피만 믿으면 무슨 짓을 해도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니 얼씨구나 하고 자기 몸을 방탕과 방종으로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이젠 죄에 대한 아픔이 없어요.

 

예수의 피가 찜찜한 것을 해소케 하는 면죄부를 주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아! 죄 짓는 이 기쁨!

막사는 이 자유함!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문둥병자들처럼 자기 살이 썩어 가는데도 아픔을 모르듯이 죄에 대하여 아파함이 없어요.

그러지 않아도 죄 짓고 싶었는데 그 동안 율법이 죄라고 하니 참고 있다가 예수 믿으면 그 어떤 것으로도 정죄당하지 않는다고 하니 야호~ 하는 것입니다.

아 좋아!

그런다니까요.

 

이건 복음을 자기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는데 면피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자기 죄 짓고 찜찜한 것을 해소화 시켜 주는 일에 합리화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가르침을 받은 자들 속에서 복음 복음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육신의 쾌락을 좇아가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심지어 술 처먹고 자기 마누라를 두들겨 패면서 하는 말이 죄인이 죄 짓는 것이 당연하지 뭐! 라고 하는 자들도 있어요.

아니 이걸 아파해야지 어찌 자랑한단 말입니까?

 

십자가를 말하면서 죄를 경시하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단편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만 있어서 그래요.

부활하셔서 성도들 안에 오신 예수가 없어서 그래요.

예수님이 성도들 안에 오셔서 예수님의 그림을 그려내는 삶이 있다는 것을 몰라서 그래요.

한 마디로 “그 날”이 없는 자들이에요.

 

이건 예수님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이에요.

예수님의 역사성이란? 예수님이 성령으로 성도 안에 오셔서 성도의 몸을 가지고 역사 속에서 언약을 이루어가는 일하심을 말해요.

역사 속에는 우리도 있어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 안에는 십자가에 죽으심만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음에서 부활하여 성도들 가운데 오셔서 일하시는 것도 있어요.

예수님이 성도의 몸을 가지고 뭔가를 살아내는 것들이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같이 옛날에 살던 방식에서 돌이키는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옛날엔 육신의 소욕대로 살았지만 성령이 임하고 난 후로는 육신의 소욕과 싸우는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성도 안에서 구습을 버리고 땅에 지체를 죽이는 싸움을 하도록 간섭을 하셨어요.

 

이건 성도는 죄 짓지 말고 온전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육신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그 안에 성령이 거하는 성도는 육신의 소욕을 멀리하고자 하는 경향성이 일어나요.

죄에 대하여 아파해요.

제가 말하는 것은 죄에 대하여 상하고 통회하는 그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를 바라보는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진짜 죄에서 건짐을 받은 성도라고 한다면 육신의 소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경향성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 없는 자는 그 안에 예수님이 없는 자에요.

 

예수님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리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했어요.

그럼 그 여인은 다시는 간음하지 않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어야 합니다.

이게 용서 받은 자의 자세에요.

 

물론 살다가 보면 또 다시 간음하였을 것이에요.

우리 몸은 그럴 수 밖에 없어요.

하지만 비록 또 다시 간음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이제는 예수님이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신 그 말씀이 자기 안에서 법으로 작동을 하여서 간음에 대하여 아파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된단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 난 용서 받았으니 내 맘대로 간음하고 살거야! 라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용서해 주심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맘대로 살으라고 십자가에 죽지 않았어요.

도리어 우리 맘대로 살던 놈을 죽인 거에요.

우리가 죄를 이기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맘대로 죄짓고 살라는 말은 더더욱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 하고!

난 어차피 죄인인데 뭘!

나는 내 마음대로 막 살거야! 라고 하는 것은 달라요.

 

그건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와 계신 이유를 모르고 있는 것이에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은 우리를 간섭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살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성도는 막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막 살아지지가 않는 거에요.

내 맘대로 살거야! 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너 왜? 의에 병기로 부르심을 입은 몸으로 창기의 몸으로 사느냐고 간섭을 하신단 말입니다.

왜? 내 몸으로 너 맘대로 사는데 라고 책망해요.

 

이러한 말을 해도 우리는 또 내 맘대로 살거야! 라고 해요.

우리 몸은 정답을 알려주어도 정답대로 살아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간섭하심이 바로 징계에요.

그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물론 또 그 짓을 하지만 말이에요.

 

그래서 이 징계가 없는 자는 참 아들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참 아들은 반드시 징계가 따라 다녀요.

그러니 우리는 늘 우리 맘대로 살아지지가 않도록 간섭이라는 징계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야곱처럼 얻어맞아서 지팡이 하나 의지하고 살아가는 병신들이에요.

 

죄인에게 율법이 없으면 안 되어요.

율법이 시퍼렇게 살아서 계속하여서 죄를 고발해 주어야 해요.

율법에 고발당하면 당할수록 은혜가 더욱 더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은혜로 드러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율법이 필요해요.

무(無)율법주의나 반(反)율법주의는 옳은 신앙이 아니에요.

율법주의가 되라는 말이 아니고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복음을 더 귀하게 여기란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다시 “그 날이 오면”을 살펴봅시다.

 

“그 날이 오면”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였지요.

예수님이 내 안에 오신 것은 어둠 속에 빛이 비친 것과 같아요.

빛이 왔다는 것은 내 안에 어둠이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어둠이란? 죄이고 사망 권세이고 두려움이에요.

예수님이 그러셨어요.

너희는 빛 안에 있기 때문에 어둠에 다니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이는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죄에 대한 두려움과 사망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져요.

이건 죄를 안 짖는다는 말이 아니고 죄가 주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말이에요.

예수님이 성도 안에 오신 것도 죄가 주는 두려움을 없애기 위함입니다.

 

죄가 주는 두려움이란? 저주이고 죽음이에요.

이러다가 저주 받으면 어쩌지!

저러다가 지옥 가는 것이 아니야! 라는 두려움이에요.

 

그러나 예수가 그 안에 있는 성도는 죄와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이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 믿어지기 때문이에요.

이는 믿음이 사단의 참소를 막아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두려움이 언제 왔는가요?

 

아담과 하와를 거슬러 올라가서 추적을 해 봅시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난 후 갑자기 하나님이 두려워졌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자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라고 묻지요.

 

“누가” 라고 하는 말은 곧 어떤 놈이 아담에게 두려움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누가”를 찾지요.

“누가”가 누구냐!

너에게 수치를 알게 해 준 그 “누가” 라는 놈이 누구야!

이리 나와! 그러는 겁니다.

 

그 놈이 누구입니까?

바로 죄에요.

마귀란 말입니다.

 

죄가 무엇으로 두려움을 줍니까?

인간의 발가벗은 모습이지요.

인간의 몸에 조건으로 두려움을 안겨 주었어요. 

이걸 기억하세요.

 

마귀는 항상 인간의 몸에 조건을 가지고 참소해요.

즉 인간의 행함을 근거로 참소한단 말입니다.

쉬운 말로 너 그렇게 살아서 되겠느냐! 라는 식으로 참소 한단 말입니다.

 

이 참소에 걸려들면 자기 행함을 관리하게 되어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이 참소에 걸려들었어요.

그래서 자기 몸에 치장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발가벗음이 수치로 여겨지면 가리지 않고서는 본인들이 두려워서 못살아요.

그러니 자기들 방식으로 가리는 일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수치를 가리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담은 그것으로 가리면 두려움이 사라진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걸 가린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옷을 해 입고서도 숨은 것입니다.

이건 옷을 해 입어도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더란 말입니다.

 

이게 중요해요.

수치는 가린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아요.

도리어 가린 것이 벗겨 질까봐서 더 두려워하게 되어요.

그래서 더욱 더 감추고자 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악순환이에요.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것은 신약 식으로 말하면 자기 행함으로 죄를 이기고자 하는 것과 같아요.

아담과 하와가 자기들의 방식으로 수치를 가렸어도 두려움이 가시질 않았듯이 우리의 행함으로 두려움을 내어 좇을 수가 없어요.

즉 죄인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도 의가 되지 않으며 두려움을 내어 좇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죄인들은 이걸 몰라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두려움이 사라진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자기 행동으로 자기 안에 두려움을 내어 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이름하여 행함입니다.

 

그래서 제가 앞서서 믿음이 없을수록 믿음 있는 척 오버 액션을 취하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더 열심과 충성을 하게 된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단들의 특징을 보면 자가당착에 빠져 있어요.

그들의 신앙이 모순이라는 것이 대번에 드러나요.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모든 이단들이 특징 중에 공히 나타나는 것은 자기들만이 특별하다고 한다는 것이 상통해요.

자기들만 복음 안다고 해요.

그래서 조직원들에게 특별의식을 심어 놓아요.

 

아주 그릇된 이단도 있지만 복음을 교묘하게 변질한 이단들도 있어요.

이단들은 복음을 말하고 믿음을 말하면서도 도리어 믿음에 반하는 행함을 추구해요.

그것이 바로 자기들의 말을 따르느냐 아니냐로 믿음을 판단하는 것으로 나타나요.

이들은 누가 자기들 모임에 참석하지 않으면 시험이 들었다거나 믿음이 없다고 해요.

 

무얼 근거로 그런 말을 하나요.

바로 자기들 모임에 참석하여야 한다는 행함이에요.

그 사람의 행함으로 믿음이 있다 없다 판단하고 있어요.

 

이 사람들은 말로는 믿음을 말해도 실상에선 정 반대로 행해요.

믿음은 인간이 관리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믿지 않아요.

그러니 자기들 모임에 참석하지 않으면 믿음이 있네 없네 하면서 공갈을 치는 것입니다.

얼마나 웃기는가 하면 자기들 모임에 참석하지 않으면 가라지들을 갈라낸다고 해요.

 

자기들만 곡식이래요.

이게 이단성이에요.

그러니까 자기들만 복음 안다고 하고 다른 데는 복음 없다고 하는 아주 폐쇄적인 집단이 되고 만 것입니다.

 

믿음은 주께서 간섭하는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어떤 사람이 자기 조직에 협조하지 않으면 그냥 두어야 하잖아요.

협조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협조 하면 믿음 있다고 하고 협조하지 않으면 믿음 없다고 공갈을 쳐요.

자기들 조직에 호의적이지 않으면 믿음 없다고 매도한단 말이에요.

 

자기 안에 믿음이 없는 사람은 믿음 없음을 드러내기 싫어서 자기 조직에 더 충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임에 더 적극적이 되어서 믿음 있음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이게 결국 둘 다 믿음이 없다는 증거에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믿음이 있는 사람은 사람의 평가에 신경 쓰지 않아요.

누가 자기 조직에 유익을 주든지 안 주든지 상관치 않아요.

어차피 주께서 각 사람을 간섭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조직 관리를 한다는 것은 주께서 일하심을 믿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복음 복음 하면서도 회원 관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걸려든 사람들은 그들의 모임에 빠지지 않고자 더욱 더 적극적이 되는 것입니다.

 

아니 자기 안에 예수가 있으면 왜? 그들의 평가에 두려워하는데요.

사람의 평가에 두려워 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흔들리는 것입니다.

우울해지는 겁니다.

 

요한일서 4장을 봅니다.

 

요일 4:13-18=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에게는 성령을 주셨다고 하지요.

그래서 성령을 받은 성도는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고 이제는 예수 안에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 안에 거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이걸 온전한 사랑이라고 해요.

 

그러므로 이 온전한 사랑 안에 있는 자는 두려움이 없다고 하잖아요.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좇는다고 하잖아요.

그럼 이 온전한 사랑 안에 있는 성도는 그 누구의 평가나 판단에 흔들리지 않겠지요.

 

이 온전한 사랑을 저는 노름판에서 장땡이로 비유를 합니다.

복음을 노름으로 비유하여서 죄송합니다.

노름판은 끗발 싸움입니다.

끗발 중에서 제일 큰 끗발이 장땡이에요.

장땡이만 가지면 두려움이 없어요.

그 누가 공갈을 치고 협박을 하여도 흔들림이 없어요.

 

온전한 사랑이 이와 같아요.

이 사랑을 바로 성령이 주세요.

그 날이 임한 성도는 이 사랑이 그 안에서 작동을 해요.

그래서 사람들의 판단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을 의인화하면 예수님이세요.

 

그러므로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신 성도는 그 누구의 판단에도 흔들리지 않아요.

두려워하지 않아요.

누가 나를 믿음 없다고 하거나 이단이라고 하여도 요동치 않아요.

이게 믿음이에요.

 

그 날이 임한 성도는 이 온전한 사랑 안에 있어요.

그래서 어느 집단이나 교회로부터 자기 신앙을 확인받고자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남에게 믿음 있음을 확인받고자 한다는 것은 그 안에 예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가 없으니 자기 안에 하나님의 증거가 없는 것입니다.

 

막말로 교회나 조직 속에 있으면 믿음이 생기고 벗어나면 믿음이 사라지는가요?

아니 모임에 참석하면 복음적이고 참석하지 않으면 비 복음적인가요.

복음이 어느 집단에 가면 맞고 안 가면 틀린 것인가요.

그 속에 가면 예수가 있고 안 가면 예수가 없는가요.

그럼에도 참석하면 안심이 되고 참석하지 않으면 불안해요.

 

이 모두가 자기 안에 예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자기가 만난 예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직 그 날이 아직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조직 속에 숨고 싶어하고 사람들 속에 숨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믿음이 없으면 불안감을 해소키 위해서 사람들 숲에 숨게 되어 있어요.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안심이 되어요.

특히 자기가 속한 교회나 조직의 목사로부터 인정을 받으면 금상첨화에요.

그러나 그건 착각이에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두려움이 엄습하지요.

그래서 자기 몸을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서 치장을 합니다.

그리곤 어디에 숨어 버립니다.

 

창세기 3장을 봅시다.

 

창 3:8-10=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어디에 숨었나요?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지요.

나무사이란 나무들 속이란 말이에요.

왜? 나무들 사이에 숨는가요?

이는 자기 안에 두려움을 떨쳐보고자 숨은 것입니다.

나무들이 가려줄 것이라고 숨은 것입니다.

 

숨는다고 두려움이 사라지던가요.

아니지요.

자기 안에 예수가 없는 사람은 어디에 가서도 두려움을 해소하지 못해요.

다만 해소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뿐이에요.

 

반면에 자기 안에 예수님이 있는 성도는 어디에 있어도 안심이 되어요.

두려워함이 없어요.

교회나 조직에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요.

사람들의 평가에 신경을 쓰지 않아요.

 

그러나 자기 안에 예수가 없으면 집단을 떠날 수가 없어요.

거기를 떠나면 여전히 또 두려워요.

그럼 그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또 다시 환자가 몰핀을 맞고 아픔을 달래듯이 그들의 모임에 참석을 해서 믿음 없다고 판단하는 그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 속에 숨어서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나무사이에 숨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나무란? 영적으로 하면 사람을 지칭합니다.

성경에서는 나무를 의인화하여 말을 하는 곳이 많아요.

에덴동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여러 가지 다른 나무들이 있었습니다.

 

나무들을 의인화 하여서 봅시다.

먼저 생명나무입니다.

생명나무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럼 먹으면 죽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누구일까요?

죽이는 자가 누구입니까?

그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마귀를 상징하겠지요.

 

그럼 다른 나무들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잖아요.

무화과나무 치마는 인간의 행함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아담과 하와가 나무 사이에 숨었다는 것은 사람들 숲에 숨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두려워서 나무 사이에 숨었다는 것은 인간들 숲에 숨었다는 말입니다.

왜? 인간들 숲에 숨었을까요?

이는 죄인은 인간의 힘으로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 속에 있으면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죄는 항상 집단의 힘을 근거로 합니다.

그리고는 그 힘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나타나요.

진리를 대적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요.

그러므로 죄인들은 집단을 이루어 인간의 힘을 축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힘으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것이 바로 바벨탑 사건입니다.

 

바벨탑은 인간의 흩어짐을 면함을 위하여 만든 것이에요.

왜? 흩어짐을 면하고자 할까요?

이는 인간의 사고가 사람의 숫자에서 힘이 나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더 많이 모으고자 하는 것입니다.

많이 모아지면 그것을 힘으로 삼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의 힘에 근거인 모임을 흩어 버립니다.

바벨탑을 헐어버립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의지할 것은 오직 하나님 한분으로만 만족하도록 하십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인간의 모임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초대교회를 보세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하루 아침에 대형교회가 탄생 한 것입니다.

그래서 조직을 만들고자 일곱 집사를 뽑아서 교회를 관리합니다.

이제 사람의 수가 힘이 되었어요.

 

교회가 힘을 가지게 되면 반드시 그 힘으로 하나님 일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인간의 힘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인간의 힘을 도리어 하나님의 일하심을 가리는 것이 되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초대교회를 흩어버리는 일을 벌리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큰 환란을 일으켜서 산지사방으로 다 흩어버리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을 흩으신 것이에요.

하나님은 애굽에 힘을 의지하는 자는 반드시 무너뜨려요.

 

이사야 31장을 봅시다.

 

사 31:1-3=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 진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2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 말을 변치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 3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애굽이란 세상을 지칭합니다.

그러니 애굽에 병거와 마병을 의지한다는 것은 인간의 힘을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힘은 어디에서 나온다 했나요.

숫자에서 나온다고 했지요.

 

애굽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신이 아니고 육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짐승이란 말입니다.

짐승이기 때문에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힘을 갖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을 떠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보이는 것을 붙잡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에게는 힘을 빼앗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힘이 빼앗길수록 하나님을 가까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사단의 가시를 빼 달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를 하여도 하나님께서 거절하신 것은 바울이 약할 때 곧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러 있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곧 인간이 힘을 갖게 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성도는 고립 당함으로 이끌려가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밧모섬이고 광야에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역설적으로 말하면 마귀는 인간의 힘을 모으는 일을 하고자 하는 식으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창세 이래로 창궐해온 이단들의 특징들은 하나 같이 인간의 숫자를 힘으로 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으로 보면 이 시대 교회들이 대형화가 된다는 것은 불 신앙적이라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대형 교회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대형 교회를 힘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대형 교회를 선호한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에요.

 

그럼 묻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왜? 교인들이 큰 교회를 선호할까요?

바로 두려움 때문입니다.

본능적으로 밀려오는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고자 많은 사람들 숲에 숨어서 안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두려움이 해소가 됩니까?

아닙니다.

두려움은 본능에 속한 것입니다.

이 본능은 죄가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죄 문제가 해소 되지 않고서는 백약이 무효합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두려움을 쫓아낼 수가 없어요.

이건 마치 어둠으로 어둠을 퍼 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어둠은 오로지 빛으로만 좇아낼 수가 있습니다.

이건 죄는 오직 의로서만 좇아낼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죽음은 생명만이 이길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걸 죄가 주는 두려움을 해소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보면 그 두려움은 사람들 숲에 숨는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자기 안에 예수가 없는 사람은 교회라는 집단 속에 숨는다고 해서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걸 반대로 말한다면 자기 안에 예수가 있는 성도는 집단 속에 있지 않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무슨 뜻인가요?

자기 안에 하나님의 증거가 있는 성도는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증거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온전한 사랑이라고 했어요.

 

제자들이 왜? 예수님이 떠나신다고 하니 두려워합니까?

이는 예수님을 의지하였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의지하는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자신들의 눈 앞에 보이는 능력을 행하는 예수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사라진다고 하니 두려운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 속에 아직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두려운 것입니다.

 

이 믿음은 성령이 오셔야지만 주어집니다.

성령이 오시면 믿음이 생기고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예수가 눈에 안 보여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이 가셨다가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자 그럼 이 일을 우리 개인의 신앙에 적용하여 봅시다.

 

오늘 본문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지금까지 비유로 너희들에게 말을 했지만 이젠 비유로 말을 하지 않아도 될 때가 온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제부터 기적이나 표적을 보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시면 아버지를 만나게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날이 오면” 너희가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그 날”이 언제인가 하면 바로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갔다가 다시 오시는 날입니다.

즉 성령으로 오시는 날입니다.

 

너희들이 지금은 내가 떠난다고 하니 두렵지만 이것은 마치 여인이 아이를 낳기까지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도 잠시라고 합니다.

이건 마치 여인이 아이를 낳기 전에 두려워하던 것이 막상 아이를 해산하고 나면 그 아이를 낳은 기쁨이 그 동안의 모든 두려움을 다 떨쳐내게 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이 다 해결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도 해결이 되고!

죄사함도 해결이 되고!

구원도 해결이 되어집니다.

 

믿음이나 구원과 같은 영적인 일들은 우리 인간들이 해결 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영적인 것들은 하나님이 공짜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예수를 믿는 일도 영적인 일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 것은 싸울 일이 아니에요.

싸워서 믿어지는 일일 것 같으면 밤새도록 싸워야지요.

그러나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이건 가만히 있으면 주어져요.

창세전에 영생주시기로 작정이 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에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낳아 주세요.

우리가 애쓴다고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자 일체의 노력을 할 필요가 없겠지요.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믿음을 선물로 받게 되어 있어요.

 

그 믿음이 오면 예수를 믿는 것이 전혀 어렵지가 않아요.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에게 자기 믿음을 증명 받고자 하지 않아요.

자기 안에 하나님의 증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애쓰지 않아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주세요.

그래서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도 주시고!

영생도 주시고!

믿음도 주시고!

천국도 선물로 주세요.

 

그래서 영적인 일들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은 하나님이 결정을 합니다.

우리의 노력이나 애씀이나 정성으로 결정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나 이러다가 지옥가면 어쩔까! 라고 고민하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감사하는 것이에요.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에요.

우린 자꾸만 뭘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이건 인간의 본능이 자기 쪽에서 한 것을 믿음으로 붙잡고자 하는 성향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믿어요.

자기가 한 것을 믿음으로 내어 놓아요.

외부에서 일어난 것을 믿을 수가 없어요.

인간의 본성 자체가 이를 용인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믿음이 오면 예수님이 믿어져요.

예수님이 하신 일이 자기 것으로 믿어진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예수님에 것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자기 것을 내어 놓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것을 내어 놓아요.

이걸 예수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으라고 할 필요가 없어요.

“믿음으로 사세요” 라고 닦달할 일이 아니에요.

믿음을 받은 사람은 믿음으로 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믿음으로 살라고 하여도 살 수가 없어요.

 

아니 그 안에 믿음이 없는데 어찌 믿음으로 산단 말입니까?

아무리 믿음으로 살라고 하여도 안 되어요.

그래서 자기 행함으로 믿음을 대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없는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에요.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으라고 소리칠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자식에게도 안 되고 부부간에도 안 되어요.

다만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

믿음은 이런 것이다! 라고만 하면 됩니다.

설득이 아니라 증거하면 되어요.

 

증거란? 경험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경험하게 해 준 것을 말하면 되어요.

“그 날이 오면” 이 경험을 하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 경험하게 해 준 것을 증거하는 데에는 싸울 이유가 없지요.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증거를 받을 것이고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그 증거를 안 받아요.

 

중요한 이야기 하나 더 합니다.

 

성경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고 하지요.

이건 우리더러 예수를 믿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구원을 받은 사람은 예수를 믿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데 예수를 믿게 하는 방식으로 한다는 말이에요.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자기 백성을 찾아내려는 뜻에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거기 구원 받은 사람 누구 없소!” 라는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자기 백성들은 예수가 믿어진다고 고백을 하게 되어 있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하나님의 말씀이 다 이래요.

역설적이란 말입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말씀 자체가 인간의 죄를 고발하는 형식을 담고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기 위해서 순종을 요구하는 형식으로 주어진단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어!

그러면 넌 예수 믿을 수가 없어!

그 말이에요.

 

하나님을 사랑해!

그러면 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야!

그 뜻이에요.

 

도적질 하지 마!

그러면 너는 도적놈이야! 라는 말이에요.

 

간음하지 마!

그러면 너는 간음 할 수밖에 없는 자야!

그 뜻이란 말입니다.

 

십계명의 내용은 우리 죄를 고발하는 내용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그걸 지키고자 덤빈단 말입니다.

그래서 죄인인 겁니다.

하나님은 넌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말씀을 하시는데 인간들은 자기가 어떤 주제인지도 모른채 주여 말씀만 하세요.

그럼 제가 지키겠습니다 라고 하고 있단 말이에요.

 

죄인은 하나님 말씀을 항상 반대로 들어요.

곡해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자들을 성경은 하나님께 불의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옥에 누가 가느냐 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하던 자들이 가요.

반대로 천국엔 우린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자들이 가요.

아주 아이러니 하지요.

 

성도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하되 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에요.

그러니 하나님 말씀대로 안 산다는 것이 아니고 살고자 하나 살 수 없음을 알고 예수를 믿게 된다는 말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면서도 순종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아가니까 점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겠어요.

말씀 앞에서 감사가 나와요.

이처럼 성도는 하나님 말씀을 받는 태도가 전혀 달라요.

 

육에 속한 사람들은 이 말을 못 알아들어요.

육은 항상 자기 쪽에서 가능성으로 듣기 때문입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말씀을 듣고자 하지 않고 지키고자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듣는 것이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이게 또 어려운데!

 

하나님 말씀은 의인이라야 지킬 수가 있어요.

그러니 인간에게는 그림에 떡인 겁니다.

죄인에겐 하나님 말씀은 그 자체가 넌 죄인이야 라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실 분이 따로 있어요.

그 분은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이에요.

 

예수님만이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가 있어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떨어진 하나님 말씀을 우리 대신 지켜 주시고자 오셨어요.

그 날이 이루어진 성도는 이게 믿어져요.

 

그래서 하나님 말씀이 떨어지면 그 안에 예수님이 와 계신 성도는 예수님이 지킨 것을 들고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예수님 안으로 가두어지게 됩니다.

내가 예수 안에서 나는 없음이 되고 맙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고 했어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했어요.

 

이렇게 예수님 안에서 사는 자들이 성도에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은 자기 가능성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불 가능성을 알게 됩니다.

 

말씀 앞에서 “주여 난 안 됩니다!” 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그 어떤 말씀 앞에 서도 자신이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점점 하나님 앞에서 내가 부인되어지고 유구무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곤 예수님의 대신 죽어 주심 안에서 용서받은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모든 말씀 앞에 예수님을 앞세워요.

예수님에게 미루어요.

예수님 도와주세요! 라고 한다구요.

 

예! 제가 하겠습니다! 라고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예! 제가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 사람은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이에요.

 

예수 바깥에 있다는 것은 독자적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독자적으로 산다는 말은 자기 가능성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도 자기가 믿는다고 합니다.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하면 예! 믿겠습니다! 라고 해요.

하나님 말씀을 지키겠다고 해요.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어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받은 성도는 자기 가능성으로 나오지 않아요.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나와요.

이걸 구약에서 제사장들이 피를 앞세우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습으로 보여주셨어요.

 

사람은 없을수록 있는 척해요.

그래서 없음을 감추고자 합니다.

믿음이 없을수록 믿고자 해요.

안 믿어지기 때문에 믿고자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을수록 믿는다고 하고, 모를수록 아는 척해요.

 

옛날에 어떤 임금이 백성들의 진실성을 증명해 보이고자 백성들에게 꽃씨를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꽃을 피워 오라고 했습니다.

꽃을 피워오면 큰 상을 주고!

꽃을 피워오지 않으면 벌을 내린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꽃씨를 심어서 꽃을 피우고자 합니다.

정성껏 씨를 심고 물도 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싹이 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얼른 다른 씨를 사 가지고 와서 심어서 싹을 내고 꽃들을 피웠어요.

 

이제 임금에게 각자가 피운 꽃들을 들고 나갑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아이가 빈 화분을 들고 온 겁니다.

다른 사람들의 화분에는 다 꽃이 피어 있는데 한 아이의 화분만 꽃이 없는 것입니다.

꽃을 피운 사람들은 상을 받을 것이라 기분이 들떠 있었고!

빈 화분을 들고 온 아이는 걱정이 태산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드디어 임금이 각자의 화분을 살펴봅니다.

그리고는 꽃을 피워온 사람들은 전부 벌을 내리고 빈 화분으로 온 아이에게 큰 상을 베풀었어요.

그러자 꽃을 피워온 사람들이 웅성거리면서 임금에게 항의합니다.

아니 어째서 임금의 말에 순종한 자기들은 벌을 내리고 임금의 말에 불 순종한 저 아이에게 상을 주느냐고 따집니다.

 

이에 임금이 말합니다.

너희들은 다 임금을 속이는 자이고 저 아이만 속이지 않고 그대로 나온 자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어째서 그러느냐고 물으니!

 

내가 애당초 너희들에게 준 씨는 죽은 씨를 주었다고 합니다.

너희들의 정직함을 시험하려고 삶은 씨앗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내가 준 씨를 심었으면 꽃이 없는 화분으로 나와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너희들은 전부 꽃을 피워왔으니 나를 속인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저기 저 아이만 정직하게 나를 속이지 않은 자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랬어요.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고발하고자 말씀을 지키라고 주셨어요.

그런데 인간들이 말씀을 지켜서 자기를 감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죄인으로 항복 하라고 하였더니 말씀대로 살아서 우린 죄인 아닌데요! 라고 하고 있는 겁니다.

이걸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이 그랬어요.

 

이러한 짓을 지금 우리가 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너희는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해 준다고 했어요.

그런데 인간들이 거짓 백성들처럼 전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여 난 벌을 받아야 할 자이네요! 라고 나와야 하는데!

주여 나 상 주세요! 라고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거짓으로 태어나요.

거짓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거짓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짓을 들추어내고자 참 것을 주었는데 죄인은 거짓을 감추려고 참으로 나온단 말이에요.

 

인간은 죄인이에요.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감추고자 하는 본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죄 없음을 증명해 보이고자 애를 쓰는 것입니다.

증명해 보이고자 하면 할수록 죄는 밝히 더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인간들이 이걸 몰라요.

 

예수님이 그러셨어요.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으로 나오지 않고 도리어 숨는다고 하지요.

숨어서 자신의 어둠을 감추고 싶은 겁니다.

 

이걸 표상적으로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 여자들의 화장이에요.

성경은 남자와 여자를 말을 할 때는 여자를 교회로 표상하고 남자는 예수님을 표상해요.

재미있는 것은 남자는 화장을 하지 않는데 여자는 왜? 화장을 할까요?

이는 예수님은 감출 필요가 없는데 교회는 죄인이라서 감추고 싶어하는 것 때문입니다

표상이라고 했어요.

 

그럼 여자는 왜? 화장을 합니까?

자신의 수치를 감추기 위해서에요.

못남을 숨기고자 화장으로 위장을 하는 것입니다.

 

화장을 해 보세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잖아요.

얼마나 화장술이 발달을 했으면 부모도 화장을 하고 나면 몰라본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남자들이 결혼을 하고 나면 화장 빨에 속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성형 빨에 속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형 빨에 속아서 결혼을 하고 난 후 아이를 낳고는 화들짝 놀라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아이가 태어났거든요.

엄마가 성형으로 인조인간을 만들었으니 당연하지요.

그러니 아이가 엄마와 전혀 다른 외계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엄마를 닮지 않은 아이가 태어난단 말이에요.

 

이 시대 복음이 전부 변질이 되었어요.

마귀가 복음에 뱀의 독을 섞어 놓았어요.

철학이나 심리학과 같은 인문학을 성경에 섞어서 가르치고 있어요.

그러니 영지주의 신앙들이 난무하는 것입니다.

 

철학으로 공교하게 지은 말로 가르침을 받기 때문에 성도들의 삶에 모습들이 성경에서 성령을 받고 살았던 믿음에 사람들과 전부 다른 모습으로서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성경이 나와 있는 믿음으로 살았던 성도들은 우리의 표상이에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에 사람들을 일컬어 구름같이 허다하게 둘러싼 증인들이라고 했어요.

그 증인의 대표가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라고 하고 있어요.

이건 믿음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고 믿음이 성도를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우리의 신앙을 가늠하는 하나의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아요.

우리는 이들의 모습과 비교하여야 해요.

왜냐하면! 그들이 받았던 성령을 우리도 동일하게 받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에 사람들은 모두가 믿음으로 이끌림을 받은 성도들이에요.

 

그렇다고 하면 동일한 믿음이 이 시대 성도들도 끌고 다녀요.

이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길을 걸었어요.

그럼 우리도 그 길을 걷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믿음으로 이렇게 살았다 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이 된 성도들의 삶과 다른 삶이 나온다고 한다면 그건 다른 성령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다른 복음을 들었기 때문에 전혀 다른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시대 속이는 자들 중에 자칭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이 많아요.

마치 초대교회 당시에 할례당 속에 거짓말 하는 자들이 많았던 것과 같아요.

역사는 늘 반복해 왔어요.

 

그러니 베뢰아 교인들처럼 성경을 좀 상고하세요.

제 말도 믿지 마시고 성경을 믿으세요.

성경이 뭐라고 하는지 좀 보시란 말이에요.

어느 목사의 말을 하나님 말씀으로 삼지 말고 성경을 보세요.

 

어느 목사를 추종하게 되면 그 목사의 말로 성경을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어요.

그럼 목사의 설교가 성경을 대신하게 되어요.

그래서 뭐라고 하면 우리 목사님이 그러는데! 라는 식으로 목사의 말을 진리로 내어놓게 된단 말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집단들이 있어요.

 

오늘 본문이 뭐라고 하나요.

너희가 아버지를 만날 때가 온다고 하지요.

그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진바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는 누구에게 물을 필요가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가셨다가 다시 오는 것을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으로 말씀하셨잖아요.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여자가 아이를 품에 안은 것처럼 기쁨이 충만해지고!

아이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듯이 너희도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진 바가 된다고 하셨어요.

 

신앙은 만남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에요.

만남은 우리의 원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원함에서 이루어져요.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만나게 되어요.

 

만남 사람은 남에게 묻지 않아요.

남의 평가에 신경 쓰지 않아요.

누가 나를 이단이라고 하여도 괘념치 않아요.

아니 하나님이 나를 안다고 하면 되잖아요.

그럼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쓸 이유가 없어요.

 

그 날이 자기 안에서 이루어진 사람은 예수를 만난 경험을 가지고 있어요.

경험은 능력이에요.

그 날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경험하게 되는 그 날인 것입니다.

그 날이 모두에게 이루어지기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 날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셨사오니 여기까지 인도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끝 날까지 주께서 내 곁에 서서 악한 자의 입에서 건져내시고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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