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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98강. 성령이 알게 해 주신 새로운 법 (요 16:5-12)

by coroa 2022. 1. 2.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98강. 성령이 알게 해 주신 새로운 법 (요 16:5-12)

-.정낙원 목사

 

요 16:5-12=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罪)에 대하여, 의(義)에 대하여, 심판(審判)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罪)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義)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審判)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審判)을 받았음이니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 부=

 

 

오늘은 장거리 여행을 떠나 볼까 합니다.

많은 말을 하여야 할 것 같아서 1-2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길다고 짜증내지 말고 넓은 마음으로 잘 따라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하면서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신다고 합니다.

다른 보혜사란? 성령을 말합니다.



보혜사란 돕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다른 보혜사로 오시는 성령은 예수님 대신 성도를 지켜 주시기 위하여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보내서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은 성도를 도우시려고 오시는 것입니다.

무얼 도우시는가 하면 하늘나라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도우십니다.

성령이 오시면 하늘나라의 새로운 법을 알려주신다고 합니다.

 

죄(罪)에 대하여!

의(義)에 대하여!

심판(審判)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들이 알고 있던 것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다는 말입니다. 

편의상 우리가 알고 있던 죄나 의나 심판을 원칙 또는 법이라고 합시다.

그럼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알고 있던 법체계를 완전히 뒤집어엎는 사태가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알고 있는 법이 있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법이 틀렸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법과 땅에 법은 다릅니다.

그러니 우리가 알고 있는 땅에 법은 하늘나라 법 앞에서 틀린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세상에 없는 다른 법을 알려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법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성도는 이 법으로 적용받게 됩니다.

 

우린 땅에서 났습니다.

그래서 땅에 법으로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하늘에 법을 가지고 오시는 겁니다.

 

성경은 하늘과 땅은 서로 대조하는 의미로 말을 합니다.



하늘을 천국이라고 하고!

땅을 지옥이라고 합니다.

 

“천국은 산 자”들이 가는 곳이고!

“지옥은 죽은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천국은 산 자들이 살기 때문에 “생명의 법”으로 다스려지고!

지옥은 죽은 자들이 살기 때문에 “죽음의 법”으로 다스려집니다.

 

“하늘에 법은 살리는 법”이고,

“땅에 법은 죽이는 법”이 됩니다.



하늘에 법과 세상에 법은 극(極)과 극(極)으로 다릅니다.



하늘은 “창조 세계”이고!

땅은 “피조 세계”입니다.

 

창조 세계는 스스로 살아가지만,

피조 세계는 창조 세계에서 공급해 주는 것으로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피조 세계는 창조 세계에 “종속적인 관계”로 놓여 있는 것입니다.

독자적으로 사는 세계가 아니고 하늘에서 살게 해 줌으로 사는 세계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생명이 아니고 하늘에서 주어지는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떠나 독자적으로 살고자 하면 그건 죽음입니다.

성경은 이걸 죄라고 합니다.

성령은 이 원칙을 알려 주십니다.

죄란? 이 원칙을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아담이 죄를 범한 이후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난 후로는 모든 인간들은 이러한 원칙으로 살고 있습니다.

창조주와 단절되어서 독자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산다고 하지만 사는 것이 아니고 죽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끈에서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꽃이 나무에서 떨어져서 화병에 꽂혀 있는 것과 같아요.

성경은 이러한 상태를 살았다 하나 실상은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걸 바울은 “산 영”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산 영”이라고 하고,

예수님을 “살려주는 영”이라고 합니다.

 

“산 영”이란? “살려주는 영”에서 떨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지만 실상은 죽어 있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이걸 모릅니다.

그래서 죄인을 어둠에 속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성령이 오셔서 이 사실을 폭로해 주십니다.

그래서 보혜사가 오시면 기존에 우리가 “산 영”으로 알고 있던 죄나, 의나, 심판과는 전혀 다른 “살려 주는 영”으로서의 새로운 법을 알려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새로운 법을 알려 준다는 것은 곧 그 법으로 다스린다는 말입니다.

“땅에 법”을 “옛 법” 즉 “옛 언약” 이라고 하고!

“하늘에 법”을 “새 법” 즉 “새 언약” 이라고 합니다.

그럼 성도는 땅에 법인 옛 언약이 아닌 하늘에 법인 새 언약으로 판단하겠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성도 안에서 하늘에 법으로 살아가도록 간섭을 하십니다.

 

성도는 성령으로 거듭난 하늘에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법을 적용받게 됩니다.

비록 몸은 땅에 몸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하늘에 법을 적용 받아요.

예수님이 그 하늘에 법을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서 알려주시겠다고 합니다.

 

새로운 것을 알려 준다고 하면 기존에 알고 있던 것은 틀린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새 것”이라 함은 반드시 “옛 것”을 덮으면서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새 것이 왔음에도 옛 것을 고집하게 되면 그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 것을 가리는 것이 되기 때문에 죄가 되어요.

 

이렇게 되면 자연히 성령이 오시면 “새 것”을 가지고 “옛 것”을 붙잡고 있는 것을 죄라고 고발하겠지요.

그래서 오늘본문에서 보혜사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한다고 합니다. 

책망이란? 꾸짖어서 바로 잡아 주신다는 말입니다.

기존에 알고 있던 것들이 틀렸다고 알려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건 돌이키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돌이키게 하는 것은 살리고자 하는 것이므로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풀이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모든 것이 틀린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알던 죄관이 틀렸고!

우리가 알던 의관이 틀렸고!

우리가 알고 있던 심판관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이건 엄청난 사건입니다.

땅 입장에서는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기존에 알고 있던 것을 고수한다고 하면 필경 싸움이 일어나게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기존에 알고 있던 것을 버리지 않는 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엄청 도발적인 말씀인 것입니다.

세상의 선악관과 가치관 자체를 뒤집어엎고 부정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인간 자체를 부정하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에 속한 자들과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 간에 일대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너희들은 틀렸어!”

“너희들은 아니야!” 라고 다가오는데 누가 가만있겠어요.

예수가 죽든지 인간들이 죽든지 싸워야지요.

그래서 발생된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알려주신 것을 말하다가 인간들에게 죽임을 당했어요.

그러니 십자가는 의인이 바른 말을 하다가 죄인들에게 죽임 당한 사건이에요.

이건 비진리가 진리를 잡아먹은 형국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를 역리라고 하고 반역이라고 합니다.

이게 이 세상이입니다.

 

세상의 본질은 비진리입니다.

그런데 이 비진리가 진리를 죽여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죄인의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역리적인 현상을 일으킨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세상을 추궁합니다.

너희들은 어둠에 속하였고 진짜를 죽인 악당들이라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이러한 사실을 알려 줍니다.

예수님의 안목으로 세상이 틀렸음을 고발하게 됩니다.

그럼 성령을 받은 성도들도 예수님처럼 미움받고 핍박받고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과 동일한 말을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세상은 예수를 죽였듯이 성도들을 죽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말씀입니다.

죽어야 한다고 하니 슬프지요.

우린 살고 싶은데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는 아무나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성도의 존재론에서부터 살펴봅시다.

 

성도를 일컬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고 하지요.

거듭남이란? 새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하늘로서 났다는 뜻입니다.

쉬운 말로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사람이란? 지금까지 살던 방식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존재론적으로 하늘에 양식으로 살아가게 된 사람이란 뜻이고!

신분론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인 의인이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하늘에 소속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올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땅 사람이 아니고 하늘에 사람인 것입니다.

비록 죄인의 몸을 입고 있지만 신분론적으로는 의인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간주해 주십니다.

 

이건 우리에게 아주 낯선 것입니다.

우리는 내게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믿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 쪽에서 변화된 것을 찾고자 합니다.

쉬운 말로 예수를 믿고서 사람이 천사처럼 달라진다거나!

아니면 거듭나자마자 하늘나라에 이사를 가서 살면서 지구로 출퇴근하는 식으로 내 주변에 변화가 일어나면 믿어지겠는데 그렇지 않단 말이에요.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이 땅에서 살고 있어요. 

그 인간 그대로입니다.



예수 믿기 전이나 믿고 난 후나 달라진 것이 없어요.

사는 것도 동일해요.

여전히 옛날에 살던 방식으로 그대로 살고 있습니다.

아무런 변화가 없어요.

 

그러니 이게 예수를 믿는 것이 맡기는 맞는가?

자꾸만 의심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러한 것은 신앙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신앙관은 예수를 믿으면 환경이 달라진다거나 아니면 내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신앙 속에는 초월적인 요소들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기적을 통해서 자기 변화를 인식하고자 합니다.

결국 인간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혀야 믿는다고 하는 속물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신앙생활이란? 환경을 변화시킨다거나 우리의 변화된 모습으로서의 삶을 말하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다른 존재로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하나님이 다른 존재로 대하세요.

더 이상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백성으로서 대하신단 말입니다.

성령을 보내서 이게 믿어지게 하세요.

 

그럼 성령을 받은 성도는 성령이 믿어지게 해 주는 것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버젓이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모습으로서 살지만 그 살아가는 가치관과 의미와 방식에서는 전혀 다르게 살아갑니다.

이걸 삶에 지향성과 경향성이 다르다고 합니다.

 

지향성이란? 하늘에 소망을 두고 나아가고자 하는 성향을 말해요.

땅에서 살지만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경향성이란? 땅에 속한 사람의 방식을 벗어버리고 하늘에 속한 사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을 말해요.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치관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누어서 대합니다.

 

“법으로” 대하는 사람이 있고!

“은혜로” 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으로 나누어서 대하십니다.

똑 같은 인간인데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를 달리 대하십니다.

사람의 조건을 가지고 나누는 것이 아니고

그냥 하나님이 “나는 네가 좋아!” 아니면 “난 네가 싫어!” 한단 말입니다.

아벨의 제사는 받고 가인의 제사는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건 미움을 받는 인간들 입장에선 불합리합니다.

내가 미운 짓을 해서 미움을 받으면 수용하겠는데,

난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미움을 받는다고 한다면 항의 하게 됩니다.

이게 죄입니다.

하나님의 처사를 받아 들이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죄란?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인간들 입장에서는 인간의 행동으로 착한 일과 나쁜 일을 구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걸 용인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인간 자체를 죄 덩어리로 보기 때문입니다.

죄인에게서는 하나님의 의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인간에게서 사랑 받을 조건과 미움 받을 조건을 찾고자 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 뜻을 거역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 입장에선 불공평하지만 말이에요.

불공평하다고 느낀다는 것은 자기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 기준에 어긋나니까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인간이 자기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피조물은 기준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도 자기 입장에서 판단하기 떄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이 수만 가지인데 모두들 자기 입장에서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면 서로 살아남지를 못해요.

 

자기에게 해로우면 다 죽일 것입니다.

그럼 나중엔 자기만 남게 되겠지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세상을 자기가 보기 좋았더라로 만들어 버리게 됩니다.

지금 인간들이 그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냥 자연 그대로 놔두면 되는데 자기들 좋은 대로 개발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 자연이 화가 나서 인간들에게 재앙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판단하는 기준을 허락하지 않았어요.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기준은 오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만 가지고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도록 창조했어요.

피조물이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에요.

이걸 잊지 마세요.

 

우리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도록 창조했어요.

나는 내가 좋으면 안 되어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아야 합니다.



기도를 하여도 날 좋게 해 주세요! 라고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좋으신 것이 뭡니까? 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린 그렇게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 생각이 중요치 않고 내 생각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날 좋게 해 주세요! 라고 아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바램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방식대로 처리합니다.

여기서부터 충돌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본능은 우리가 좋도록 살아가고자 해요.

그래서 항상 내 중심으로 살아가요.

죄가 그렇게 역사를 해요.

이에 하나님이 태클을 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하나님이 좋도록 자꾸만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너~ 왜? 니 뜻대로 살고자 하는데!

너는 너의 인생을 살지 말고 하나님을 위한 인생을 살라고 간섭을 합니다.

어떻게 간섭하는가 하면 우리가 좋은 것을 빼앗아가는 방식으로 간섭하세요.

왜냐하면! 우리 생각과 하나님 생각은 서로 충돌하는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죄라고 알려 줍니다.

너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는데!

너는 왜?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살지 않고 너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자 하느냐고 책망을 합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토기장이처럼 하나님의 필요에 의하여 그릇을 만들었어요.

어떤 그릇은 밥그릇으로 만들고!

어떤 그릇은 쓰레기 통으로 만들었어요.

주인의 필요에 따라 만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누구를 사랑하든지 누구를 미워하든지 우리 입장에서 아무런 할 말이 없어요.

그건 하나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의하고 순종하는 것이 신앙이에요.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라고 성령을 보내 주셨어요.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는 그냥 아멘! 하고 따라요.

죽으라고 하면 죽고!

살라고 하면 살고!

죽이고 살리는 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결정하시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성도는 죽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사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알고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것이므로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릇 주제에 왜? 나는 쓰레기 통으로 만들었습니까? 라고 말하면 안 되어요.

“난 왜? 쓰레기통입니까!”

“난 왜? 미움 받습니까!” 라고 하는 것은 “나” 라는 자기 주체가 살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난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느냐? 라고 따지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주체가 살아 있으면 항상 자기를 주장하게 되어요.

자기 생각으로 따지게 됩니다.

자기 생각이 개입이 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반발을 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죄에요.

 

죄인의 비극은 죄가 주체를 가지게 하면서부터 시작되었어요.

주체를 다른 말로 자아라고 합니다.

이 자아 라는 주체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항상 원망하고 불평하고 못 마땅하게 여기게 해요.

 

주체를 쉬운 말로 하면 “자기 생각”이에요.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생각을 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뜻을 말해주고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제 생각은 이러합니다!” 라고 말하면 안 되어요.



그건 하극상이에요.

그럼 하나님은 그 입 다물라!

주둥이 닫어! 그럽니다.

 

갓난아이일 때는 자기 생각이 없어요.

“나” 라는 자아가 없어요.

어렸을 땐 부모에게 종속이 되어 있어요.

부모의 생각에 전적으로 끌려 다녀요.

 

그런데 이 놈이 머리가 커지면서 자기 생각을 갖게 됩니다.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 간단 말입니다.

자아가 발달한단 말이에요.

이걸 “사춘기”라고 합니다.

 

사춘기라는 말이 “자기 생각이 싹이 튼다”는 의미에요.

참 재미있지요.

이걸 자아가 살아나고 주체가 확립이 된다고 합니다.

자아와 주체가 확립이 된다는 말은 내가 살아난단 말이에요.



내 생각이 생기기 시작하면 부모 생각을 밀어내요.

내 생각과 부모 생각이 충돌을 하게 됩니다.

그런 반항하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부모라고 할지라도 더 이상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춘기 시절엔 다 반항아가 되는 것입니다.

그 동안 부모 아래서 살던 놈이 이젠 독자적으로 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부모 소유물이 아니고 독립적인 존재로서 독자적으로 “나” 라는 겁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니 더이상 간섭하지 말고 내 버려두라는 것입니다.

 

사춘기가 되면 부모에게 간섭당하는 것을 그렇게 싫어해요.

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고!

매사에 반항이고!

뭐라고 하면 주둥이를 내밀면서 퉁퉁거리잖아요.

 

이게 죄인의 모습이에요.

우리 죄인들이 사춘기를 맞이한 아이들과 같아요.

하나님 앞에 내 인생을 간섭하지 마세요! 라고 한다니까요.



그럼 하나님은 몽둥이를 들고 두들겨 팹니다.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 않도록 자꾸만 간섭하는 겁니다.

내 계획대로 살아지지 않도록 흔들어요.

그럼 우린 죽겠다고 합니다.

 

사춘기 때는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아요.

날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청개구리처럼 엇나가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죄성에요.

그럼 부모는 잔소리하고 하다가 안 되면 두들겨 패잖아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래요.

신앙을 순종이라고 하고 불신앙을 불순종이라고 정의하는 것도 다 이 때문입니다.

주체가 있으면 반드시 불순종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좋도록 간섭해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좋도록 간섭을 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이게 구약 이스라엘의 광야 길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따라가면서 항상 퉁퉁거리지요.

왜? 이런 길로 인도하느냐!

왜? 먹을 것은 이런 것을 주느냐!

 

하나님께서 광야 길을 인도하는 것은 다 뜻이 있어서 그러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 뜻은 중요치 않아요.

자기들 뜻만 내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맨 날 반항하고 주둥이 내밀고 댕댕거리는 것입니다.

주면 주는 대로 먹을 일이지!

일도 안하고 공짜로 얻어 먹으면서도 맛이 있네! 없네! 하면서 댕댕거리잖아요.

 

그러자 하나님이 이 놈에 새끼들이 어디서 불평하고 주둥이 내미느냐고 다 죽여 버리잖아요.

광야에서 애굽에서 난 1 세대들이 다 죽었다는 것은 우리 옛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징벌 받아 죽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옛 사람 그대로 천국에 가면 또 반항 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 뜻에 반항하고자 하는 그 옛 사람을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살고자 하는 그 놈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고난인 것입니다.

달리 고난이 아니라 내 뜻이 꺾이기 때문에 고난인 것입니다.

 

피조물은 그냥 창조주가 만든 목적대로 살면 되어요.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진노 받을 죄 인 겁니다.

그런데 우린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죄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이도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한단 말이에요.

왜냐하면! 사랑하기로 작정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어요.



사랑 받는 사람이 있고!

미움 받는 사람이 있어요. 

법에 속한 사람이 있고!

은혜에 속한 사람이 있어요.

 

사랑 받는 사람은 은혜로 대하시고!

미움 받는 사람은 법으로 대하세요.  



“은혜는 무조건 용서”해 주는 것이고!

“법은 무조건 죽이는 것”이에요. 

“법에 속한 사람”은 그 사람이 잘났든지 못났든지 상관없이 지옥으로 가고!

“은혜에 속한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든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천국으로 가요.



하나님이 그렇게 해 놓으셨어요.

이러한 결정을 자아라는 주체 있는 사람은 받아들이기 어려워요.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말은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결국 자기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걸 죄라고 합니다.

 

우리들의 사고는 착한 사람은 천당으로 가고, 나쁜 사람은 지옥으로 간다고 배웠어요.

세상에서는 인간의 행동으로 선과 악은 판단해요.

우리는 세상에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배웠어요.

착한 짓을 하면 착한 사람이라고 하고 나쁜 짓을 하면 악한 사람이라고 배웠어요.

우린 태어나면서부터 이렇게 학습되어져 왔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행실을 가지고 착함과 악함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정한 기준으로 판단해요.

“법에 속하였느냐!”

“은혜에 속하였느냐!” 로 판단해요.

 

그러니 인간 입장에선 불합리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건 아니잖아요? 라고 따질 수가 있어요.

그럼 하나님이 니가 뭔데!

지음을 받은 인간이 내가 하는 일에 이의를 제기하느냐고 혼을 내요.

 

신앙이란? 자기 생각을 버리는 것이고 자기주장을 거두어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다 옳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난 이런 기준으로 판단한다고 합니다.

그럼 우린 예~ 라고 할 밖에! 어쩔 수 없어요.

이걸 순종이라고 합니다.

 

그럼 법에 속한 사람과 은혜에 속한 사람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살펴보아야겠지요.

 

내가 법에 속했는지!

은혜에 속하였는지!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건 아주 간단해요.

내가 법으로 살면 법에 속한 사람이고!

은혜로 살면 은혜에 속한 사람입니다.



내 안에서 법이 나오면 법이 나를 지배하고 있고!

은혜가 나오면 은혜가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은혜에 속한 사람은 은혜로 살고, 법에 속한 사람은 법으로 살아요.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것으로 말하고 살게 되어 있어요.

법 아래 있으면 그 속에 온통 정죄하고 판단하는 법이 자리 잡고 있어요.

그러면 토해지는 것이 정죄하고 판단하는 법이 나와요.

반면에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그 속에 은혜가 자리 잡고 있어서 은혜를 토해내요.

 

쉬운 말로 할게요.

법은 죽이는 거라고 했잖아요.

그럼 그 안에 법이 자리 잡고 있는 사람은 부정적이에요.

입만 열면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심판해요.

 

법에는 “죽이는 영”이 역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에 속한 사람은 예수를 믿어도 죽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예수는 마귀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가짜 예수에요.

그러니 입으로는 예수 예수하면서도 하는 짓은 마귀 짓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아주 교만하고, 무례하고, 독선적이고, 자기만 다 안다고 해요.

그래서 논쟁을 좋아하고 변론을 좋아하고 싸움을 좋아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이는 법 아래 있는 사람은 예수도 법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리는 복음을 가지고 남을 죽이는 법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법이 복음을 가지고 남을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하고 자기를 방어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 복음 하면서도 논쟁하고, 변론하고, 심판하는 일을 자행하는 것입니다.

이건 반복음적이에요.

 

하지만 본인은 이러한 일이 반복음적인 것이라는 것을 꿈에도 몰라요.

자기 입으로 예수를 말하고 복음적인 이야기를 하니까 예수 안에 있는 줄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예수 바깥에 있는 거에요.

그 안에 마귀가 자리 잡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복음으로 사람을 죽이는 법으로 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들을 일컬어 “자기도 다 알지 못하면서 거짓된 지식으로 진리를 망령되이 알아진 자” 들이라고 했어요.

이런 자들이 바로 법 아래 있는 자들이에요.

그러니 마귀 짓을 하는 것입니다.

 

법은 죽이는 일을 하지만 복음은 살리는 일을 해요.

복음을 생명으로 사는 성도는 복음 정신과 합한 모습으로서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덮어주면서 살리는 식으로 살아가요.

하지만 복음을 지식으로 소유한 사람은 복음 정신에 반하는 모습으로 살아가요.

복음 정신에 반하는 모습이 바로 논쟁하고, 변론하고, 비판하고, 정죄하고, 남을 헐뜯고 죽이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복음을 논쟁하고 변론한다는 자체가 곧 지식이란 말입니다.

 

지식으로 알아진 것이니까 논쟁을 하는 겁니다.

지식은 누가 누가 많이 소유하느냐로 경쟁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논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은사는 달라요.

자기가 노력해서 얻어낸 것이 아니고 공짜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자랑하지도 않고 논쟁하지도 않아요.

 

“은사로” 알아진 복음을 가진 성도는 논쟁하지 않아요.

신앙은 누가 많이 아느냐! 적게 아느냐! 의 싸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은사로 알아진 복음 안에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많이 깊이 알고 감사하고 사느냐의 문제로 나아가기 때문에 내가 너 보다 더 많이 안다는 식으로 나타나지 않아요.

 

그러나 열심히 공부해서 지식으로 알아진 것은 항상 자기 잘난 것을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남과 차별성을 두고자 하고 서열화 하여서 항상 으뜸이 되고자 하고 남을 가르치고자 해요.

자기가 습득해서 배웠으니 잘난 척 써 먹어야 하잖아요. 

이처럼 학습으로 배워서 지식으로 알아진 것을 복음으로 소유한 사람은 비판적이고 나 외에 없다고 교만을 떨게 되는 것입니다.

나 보다 더 잘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봐! 교만을 떠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는 복음이 지식이니까 복음으로 자기 우월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국 복음으로 자기 세계를 넓혀가고 자기 영역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귀적인 것이에요.

 

초대교회 안에도 이런 자들이 무수히 많았어요.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공교하게 지은 말로 사람들을 미혹하였어요.

그리하여 교회 안에 분쟁을 일으키고 성도들의 삶을 방탕과 방종으로 방임하게 하여서 타락으로 끌고 갔어요.

사도들이 이런 자들과 싸웠어요..

 

바울이 고린도 교회 안에 이런 자들이 있어서 내가 가면 너희들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능력을 알아보겠다고 한 것입니다.

말이 아니라 능력을 알아보겠다는 것은 복음 안다고 따따부따 하는 것을 살펴보지 않고 그들의 삶을 살펴보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복음을 삶으로 토하여 내는지 달아보겠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이런 자들이 너무도 많아요.

복음 복음 하면서 반복음적으로 행하는 자들이 너무도 많아요.

특히 할례당 속에 많아요.

할례당이란? 지금 식으로 말하면 자칭 복음 전한다고 하는 집단이나 교회를 말해요.

그러니 눈 부릅뜨고 잘 구별하고 분별하세요.

 

복음은 머리로는 냉정하게 분별하시고 마음은 뜨거우셔야 합니다.

머리가 뜨겁고 마음이 차가우면 복음으로 사람을 죽이지만!

머리가 차갑고 마음이 뜨거우면 복음으로 사람을 살려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은혜와 법을 언약으로 말하면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옛 언약은 법이고!”

“새 언약은 은혜”입니다.

옛 언약은 아담 안에 있는 자들에게 적용하는 룰이고!

새 언약은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적용하는 룰이에요.

 

아담 안에 있는 사람과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살아가는 양식에 있어서도 달라요.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법으로 살고!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은 은혜로 살아가요.

원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원리에 준해서 판단 받게 되는 것입니다.

원리적으로 말한다면 성도는 은혜로 살아가야 하잖아요.

그런데 실상에선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어요.

법으로 살 때가 많아요.

은혜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실제는 그와 반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때가 많아요.



정답은 아는데 그 정답대로 살지 못하고 있어요. 

이게 우리에 한계이고 문제에요.

그러니 이 원리가 계속하여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 지적을 늘 받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늘 자기 죄를 깨닫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긍휼을 구하게 되고 회개하게 되어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누가 잘못을 하면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해 주라고 하지요.

 

이건 숫자적인 의미가 아니고 무한정으로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너희는 용서의 원리로 살아가라는 말이에요.

한 마디로 누가 어떤 범죄를 하여도 법으로 대하지 말고 은혜로 감싸 안으라는 말이에요.

너희는 용서하는 자리에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너희들은 용서하는 동네에 살고 있다는 말이에요.

정죄함이 없는 세계에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는 우리가 이렇게 용서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 받고 있으니 너희도 항상 용서하고 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린 용서하면서 살아가지 못하고 있어요.

우린 항상 용서 받고 살면서도 말이에요.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도적질하는 악당들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마치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고선 백 대나리온 빚진 자를 탕감해 주지 못하고 옥에 가두는 자와 같은 자들인 것입니다.

우린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에 비유를 보면서 아니~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라고 분개 했잖아요.

 

우리는 누가 잘못하면 정죄와 심판부터 먼저 나오잖아요.

그러면서 자신은 그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쏙~ 빠지잖아요.

나는 아니야! 라고 하면서 그 사람을 욕하잖아요.

 

그러나 그게 아니에요.

그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배은망덕하고 싸가지 없는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란 말입니다.

성경 속에 죄인을 통해서 자신으로 볼 줄 아는 자가 은혜 아래 있는 성도에요.

 

그런데도 우리는 그게 우리인줄 모르고 도리어 죽여! 죽여 하고 있어요.

자기 얼굴에 침을 뱉고 있어요.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의 비유처럼 우리를 대하셨으면 우린 벌써 지옥 맨 밑바닥에 들어가 튀김당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이 우리를 덮고 있어서 이렇게 살고 있어요.

그러니 앞으로 성경을 볼 때마다 내가 나쁜 인간들 속에 있다는 것으로 보세요.

그래서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 뜻을 거역한 바리새인들을 보고 에이! 나쁜 놈들이라고 하면 우리가 바로 그 바리새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살고 있어요.

솔직히 우리가 지금 복음 안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살고 있잖아요.

 

우린 솔직히 복음 안다고 하면서 복음 모르는 사람들을 얼마나 깔보고 무시합니까?

은근히 에이~ 복음도 모르는 것들이라고 하면서 쯔~ 쯔 하잖아요.

그러면서 저 교회는 복음도 모르는데 하면서 교회도 안가고 있잖아요.

참으로 목불인견입니다.

 

이런 자들을 요한계시록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가지고 말씀해 주셨어요.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이 어떤 줄 아세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고 했어요.

이는 곧 스스로 자만하고, 자족하고, 자고하고, 자긍한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기고만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교인들을 보고 뭐라고 한 줄 아세요.

먹을 수가 없어서 확 토해내고 싶다고 했어요.

한마디로 빛 좋은 개살구란 말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입으로는 복음이 뻔지르르 하는데 막상 그 삶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빛 좋은 개살구 같아서 먹지 못하고 확 토하여 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지금 우리식으로 말하면 복음 안다고 주접떨고 있다는 말입니다.

복음 안다는 것은 있는데 복음으로 살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오는 것이 은혜가 아니고 법이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러고 있잖아요.

 

복음을 먹었으면 은혜가 토해지고!

사랑이 유출되고!

따뜻함이 묻어 나오고!

섬김이 나오고!

생명의 기운이 나와야 하잖아요.

그런데 도리어 반대로 입만 열면 악독이 나오고 패역이 나오고 심판과 정죄가 나오고 있잖아요.

변론을 좋아하고 분쟁을 일삼고 있잖아요.

 

이 모두가 어디서 어쭙잖은 인간의 철학으로 만든 공교한 말을 복음으로 들어서 그래요.

그러니까 복음과 반하는 일들을 일삼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깡패 노릇을 하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바울은 이런 자들을 거짓된 지식으로 변론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어느 누가 복음을 듣고 깡패처럼 산 사람이 있는가요?

단 한 사람도 없어요.

모두가 복음으로 낮아지고 섬기고 살았어요.

성경 속에 성령을 받고 살았던 성도들의 삶을 기록해 놓은 것은 심심해서 그런 것이 아니에요.

 

이들을 본 받으라는 말이 아니고 복음이 이렇게 살게 하더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살 수 없는 것을 성령이 임하니 성령이 그렇게 끌고 가더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온전하게 일평생 그렇게 살았다는 뜻이 아니고 이러한 경향성이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삶에 지향성이 예수님이 가신 길을 좇아가고자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목사의 현란한 말에 속지 말고 성경 속에 나타난 성도들을 기준으로 삼으세요.

자아도취에 빠져서 철학으로 복음을 공교하게 둔갑시켜서 인간의 욕망을 합리화 시켜주는 인간의 가르침을 따르지 마세요.

성경을 보면 대번에 알 수가 있는데 성경은 안 보고 인간의 가르침을 받으니 성경 속에서 성령으로 살았던 믿음에 사람들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 안다고 하면서도 복음이 지향하는 것과 반하는 짓거리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누가 복음 안다고 하면 가슴이 철렁한다고 해요.

복음 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상하게 하나같이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입만 나불거리며 아무 것도 안하고 가시 노릇을 하면서 도리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시험 들게 한다고 해요.

자기 혼자 진짜이고 나머진 다 가짜라고 하면서 모든 사람들을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얼마나 성경을 잘못 보고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아세요.

성경을 보는 안목이 바뀌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린 계속해서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에 대한 열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면서 하나님 뜻을 왜곡하게 되어요.

 

복음을 받으면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어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이 자각되면 절대로 남을 정죄하거나 심판할 수가 없어요.

도리어 내가 그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일어나요.

그러니 누가 혐의가 있거든 그 사람이 곧 나의 “자화상”이라고 보셔야 합니다.

내가 죄인임을 알고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해서 인간 자체가 변한 것이 아니에요.

인간의 몸을 입고 있는 한 그 본성은 사라지지 않아요.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다만 삶에 지향성이 달라요.

가치관이 달라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안단 말이에요.

그러나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죄를 알고 아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런 죄인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에 감사가 되어요.

 

성도는 그 안에 “하늘에 법”과 “땅에 법” 두 법이 있어요.

 

성령이 하늘에 법을 몰고 와서 심어 놓았기 때문에 땅에 법과 자꾸만 충돌을 일으켜요.

성령이 땅에 법으로 살면 그것이 죄라고 알려주세요.

그럼 성도는 그 성령의 책망을 듣고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서 세상 사람들과 다른 존재 양식으로 살아가게 되는 지향성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저는 컴퓨터에 악성 바이러스가 감염된 것으로 비유하여 말을 합니다.

 

우린 예전에 성령이 없을 때에는 옛 사람의 본성대로 살아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어요.

마치 처음 산 컴퓨터처럼 죄를 먹고 마시면서도 전혀 부담감 없이 잘 돌아갔어요.

세상 사람으로서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먹고 마시고 춤추고 살던 것이 좋았어요.

재미있게 놀았어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고 나자 과거에 하던 짓들이 이상하게 싫어져요.

마치 악성 바이러스에 감염이 된 컴퓨터와 같아요.

성령이라는 악성 바이러스가 우리 안에 들어오면 잘 돌아가던 컴퓨터가 갑자기 버벅거리는 것과 같아진단 말입니다.

 

인간 입장에선 성령은 악성 바이러스와 같은 거에요.

왜냐하면! 우리 옛 사람과 충동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감염 되면 말을 잘 안 듣고 자기가 원치 않는 행동을 하게 되잖아요.

저절로 꺼진다거나!

랙에 걸려서 꼼짝하지 않는다거나!

아니면 버퍼링이 생겨서 잘 안 돌아가잖아요.

 

성령이 우리 안에 오면 꼭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과 같은 증상들이 나타나요.

예전 방식으로 살던 것이 이상하게 버벅거리고 도리어 구습대로 살면 마음이 찜찜해지고 아파진단 말이에요.

비록 예전처럼 살아도 어~ 이건 아닌데! 라는 마음이 들어서 나중엔 멀리하게 되어요.

죄를 안 짓고 산다는 말이 아니고 죄에 대하여 아파한단 말입니다.

죄를 멀리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단 말입니다.

이걸 죄를 미워하는 경향성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우리가 살아가는 경향성에 대하여 태클을 걸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성령이 임한 성도는 반드시 이러한 아픔과 갈등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성령의 법과 육신의 법이 충돌을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러한 것이 없다고 하면 그 사람은 성령을 받은 자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 속에는 반드시 옛 사람과 싸우는 성질이 들어가 있어요.

이 성질 때문에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 라고 탄식을 하였던 것입니다.

다른 성질이 들어오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는 자각이 생기고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 라고 탄식 할 때가 가장 성령이 충만 할 때에요.

로마서를 쓸 때였으니까요.

 

성도는 땅에 가치로 살지 않고 하늘에 가치로 살아가는 자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여기서 “살아가야 하는 자로 부르심을 입었다” 라는 말을 기억하세요.

우린 모두가 하늘에 가치관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래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 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이걸 기억하여야 우리가 엄청난 은혜를 입고 산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린 법대로 하면 저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은혜로 대하심을 받기 때문에 그렇게 살지 못하여도 이렇게 버젓이 용서 받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잘 이해하세요.

 

거듭난 성도는 신분적인 면에서도 다른 신분이에요.

 

죄인의 신분에서 의인의 신분으로 달라졌습니다.

이걸 통상적으로 말하면 땅 사람에서 하늘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렇습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하고 엄청난 축복인줄 아세요.

 

알다시피 땅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속한 사람은 다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곧 죽음입니다.

그러니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은 곧 죽는다는 말입니다.

 

땅에선 살 길이 없어요.

땅에서 나오는 것에는 생명이 없어요.

그 어떤 것으로도 살 길이 없습니다.

다 죽음이에요.

왜냐하면! 땅 자체가 저주의 기운을 품어 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살아갈 근거인 땅을 저주하셨다는 것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는 다 징벌 대상이란 말입니다.

이게 세상에 내려진 법이에요.

 

이 땅은 이 죽음의 법으로 다스려져요.

법은 죽이는 것이에요.

법에게서는 생명이 나오지 않아요.

왜냐하면! 법은 범법한 자를 정죄하고 구속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법은 죄를 겨냥하고 있어요.

법이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서 감옥에 가두고자 하는 것이 법이 하는 역할이에요.

그러니 법 아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 아래 있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법 아래서 태어났고 법에 지배당하면서 살고 있어요.

저주를 피할 길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법 아래서 건져 주셨습니다.

땅에 속한 사람을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비록 몸은 땅에 몸을 입고 살지만 적용은 하늘에 원리를 적용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은 법이 없어요.

법이 없다는 것은 죽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저주가 없다는 말이에요.

하늘에는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빛의 나라” 라고 합니다.

 

하늘은 은혜의 나라에요.

하늘이란? 땅의 반대에요.

땅이 법이라고 했으면, 하늘은 은혜에요.

땅이 죽음이라고 했으면, 하늘은 영생하는 곳이에요.

 

은혜란? 무조건 사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서는 죽음이 없어요.

용서만 통용이 되어요.

성도를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 주셨다는 것은 살려주겠다는 말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죽지 않게 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은혜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근거가 있어요.

예수님의 대신 죽어주심 때문에 용서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걸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럼 감사가 사라져요.

 

하나님은 공의에 하나님입니다.

공의에 하나님이란 말은 죄인은 반드시 징벌을 하는 분이란 말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거룩성으로 비거룩을 징벌하세요.

그럼 죄 아래서 난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서 비거룩한 자로서 징벌대상이에요.

다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징벌할 것을 예수님에게 하셨어요.

우리 대신 예수님을 징벌하신 것입니다.

이걸 대속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물어야 할 죄값을 예수님에게 대신 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하시되 예수 안에서만 용서 해 주시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죄인을 예수님 보고 용서 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백성들을 치마폭에 폭 감싸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진노를 퍼 붓는데 예수님이 다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죽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이걸 잊으면 안 되어요.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죽음과 상관없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 났기 때문에 더 이상 이 땅에 죽음의 법에 지배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그 무엇이든지 은혜로 적용 받아요.

그러므로 성도의 구원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시민권이란? 그 나라 백성에게 주는 권리입니다.

그럼 이젠 땅에 사람이 아니고 하늘에 사람이란 말입니다.

하늘에 시민권을 받게 되면 하늘나라의 법에 따라 판단 받게 됩니다.

하늘나라의 원리에 따라 적용받게 되어요.

그래서 성도는 하늘나라에 원칙인 은혜로 살려주는 생명의 법을 적용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전혀 새로운 것을 알려 준다고 합니다.

하늘에 법을 알려 준다는 것은 하늘에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것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일이 일어난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예전에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하게 됩니다.

 

쉬운 말로 너희가 거듭났으니 거듭난 가치관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거듭나기 전에는 아담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담에게 적용하던 법으로 우리도 적용을 당했습니다.

아담 안에서는 선악의 법으로 다스림을 받아요.

선악의 법 아래서는 자신의 행위 속에서 선 악으로 구분했어요.

인간들이 정한 선과 악이 있단 말입니다.

 

이 선과 악은 인간 중심에서 판단되는 선과 악이에요.

아담의 세계는 인간중심의 나라에요.

그러니 아담 안에선 인간이 주체에요.

인간이 주체이기 때문에 인간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두어요.

 

그러므로 선과 악도 인간 중심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인간에게 유익을 주면 선으로 여기고 인간에게 피해를 입히면 악으로 규정합니다.

그래서 인류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은 성자라 일컬어 그 업적을 기리고 숭상했어요.

반대로 인류에 해를 주는 사람은 악인으로 규정하여 격리하거나 죽였습니다.

이처럼 세상에선 인간의 행함으로 선과 악을 구분했어요.

 

그러나 거듭 난 성도는 예수에게 속하였습니다.

하늘나라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주체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뿐이에요.

 

만물이 예수 안에서 존재하고!

만물이 예수 안에서 통일이 되어요.

하나님 나라에서는 우리는 예수님에게 종속이 되어요.

우리 주체가 없는 것입니다.

이걸 종이라고 합니다.  

종은 독자적 인생이 없는 자를 말해요.

종은 주인의 희노애락을 함께 하는 자에요.

주인이 기쁘면 종도 기쁘고, 주인이 슬프면 종도 슬퍼요.

이런 관계를 한 몸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예수님과 한 몸입니다.

그러니 선과 악도 예수님을 근거로 해서 판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을 기준으로 한 죄관과 의관과 심판관을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이 예수님을 기준으로 하여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준으로 살다가 보면 세상의 기준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이는 세상의 선악에 가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판단하는 주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 주체를 예수 안으로 귀속시켜 버려요.

그럼 예수님을 가치의 기준으로 인정하게 되어요.

 

성령이 제시한 기준은 예수님 밖은 모두 죽은 자로 봅니다.

죽은 자에게서 나오는 것은 전부 죽음이에요.

썩은 것이란 말입니다.

 

이걸 바울은 배설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선 인간의 착함도 똥이고 인간의 악함도 똥이라는 것입니다.

이걸 인간들이 받아들이겠어요?

못 받아들입니다.

 

아니~ 안 받아들입니다.

이걸 받아들이면 자기가 틀렸다는 것으로 드러나는데 어떻게 받아들인단 말입니까?

인간들의 본성은 수치를 가려서 떳떳해지고자 하는 자들인데 어찌 자기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겠습니까?

못해요.

안 돼요.

 

제일 먼저 우리 자신이 여기에 반발을 해요.

우리의 몸은 우리에게서 발생된 행위를 가치로 붙잡고자 하는 습성이 있어요.

내가 행한 것에 의미를 부여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면 나 예수 믿었잖아요!

나 복음 전했잖아요! 라고 하는 겁니다.

복음 전한 것을 자기가 한 것으로 붙잡고 있으니까 이런 말을 서슴치 않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한 것은 근거로 “나 뭐 했잖아요!” 라고 하면서 모가지를 세우는 것입니다.

 

나~ 예수 믿어요!

나~ 복음 전했어요!

나~ 헌금 했어요!

나~ 봉사 했어요!

나~ 착하게 살았어요!

그럼 성령은 그 “나” 를 앞세우고 나오는 것을 죄라고 고발해 버립니다.

 

잠시 커피 한 잔 마시고 2부에서 중요한 것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2부=

 

 

예수 안에서는 난 “없는 자” 입니다.

이런 상태를 예수 안에서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죄가 “나”를 예수 안에서도 “나 있는 자”로 살게 만들어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나 있는 자”로 살게 해요.

 

왜? 그런가 하면 죄가 왕 노릇하라고 내 주체를 살리기 때문입니다.

내 주체가 살아나면 내가 영광을 받아야 해요.

그러니 하는 일마다 내가 자랑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은 이걸 못 버려요.

내가 부인되고 부정당하는 꼴을 못 보아요.

 

이렇게 되면 결국 예수는 내 영광을 챙기고자 하는 수단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를 이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것을 우상성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이 우상성을 본성으로 가지고 있어요.

 

우상성은 예수를 믿어도 사라지지 않아요.

예수를 이용해서 내가 살고자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는 내가 살기 위해서 믿어주는 이용 대상이 됩니다.

 

이걸 이미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과 이 싸움을 하셨어요.

구약 이스라엘은 알다시피 아브라함 후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입어서 하나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이용하고자 선택을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도리어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계속하여서 충돌을 합니다.

충돌 할 때마다 하나님의 이름이 손상을 입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앞세워서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데!

아브라함은 자꾸만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한단 말입니다.

자기 마누라를 두 번씩이나 팔아먹은 것도 다 자기는 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식을 주겠다고 하여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여종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은 것도 자기 영역을 넓혀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영광을 가리는 일만 하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 이름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방인에게 망신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꼭 이 시대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개독교 라고 비난을 받는 것과 같아요.

세상 사람들이 교인들이 하는 짓을 보고 하나님을 욕하잖아요.

 

지금부터 헷갈릴 수 있는 말을 하니까 잘 생각하고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 땅에서 하나님이 일해 가는 방식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세상방식으로서 자기를 세상에서 드러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없음에서” ~ “있음으로” 창조의 일을 하고자 하는데!

아브라함은 “있음에서” ~ “있음으로” 나아가고자 하였어요.

 

“없음에서”~ “있음이” 되려면 기존에 아브라함에게서 있는 것이 나오면 안 되잖아요.

아브라함에게 없는 것이 나와야 하잖아요.

그래야 “없음에서”~ “있음이” 되지요.

이게 하나님의 창조의 방법이거든요.

 

하나님은 창조하는 일을 하세요.

그래서 “없음에서”~ “있음으로” 일을 하십니다.

 

창세기 1장에서 창조의 모습이 어둠에서 빛으로 불러내는 일을 하시지요.

어둠은 죽음이고 타락을 상징해요.

그리고 빛은 생명이고 의를 상징해요.

그러니 창세기 1장의 창조 사역은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하시는 것의 모형이에요.

 

창조가 되려면 “없음”이라는 바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야 “없음에서”~ “있음이라” 는 창조적 사건이 일어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창조 사역을 보면 흑암과 공허와 혼돈이 먼저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흑암이니 혼돈이니 공허는 죽음이란 말이에요.

없음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 ‘없음에서’~ ‘있음으로’ 일을 하십니다.

죽음에서 생명을 낳는 일을 하세요.

이게 창조거든요.

이 창조 사건 속에는 성도를 구원하는 모습이 담겨져 있어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러한 식으로 구원을 해 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창조 사건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는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은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하나님을 힘입어 자식을 낳고자 했어요.

이건 자기 가능성으로 낳겠다는 뜻입니다.

자기 가능성은 ‘있음’이에요.

그러니 아브라함이 젊어서 아들을 낳고자 한 것은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낳은 것이 되기 때문에 ‘있음’의 연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없음에서’~ ‘있음으로’ 일하는 하나님의 창조를 보여주고자 선택을 하셨어요.

그러자면 아브라함이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없음’의 상태가 되어야 해요.

“없음에서”~ “있음이” 되려면 아브라함의 힘으로 자식을 낳을 수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라가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드디어 사라의 경수가 끊어집니다.

경수가 끊어진다는 것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생산 불가” 상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없음이’ 된 것입니다.

‘죽은 자’가 된 것이에요.

 

인간의 생식법으로는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만나야 생명이 잉태가 되어요.

생명이 어떻게 잉태하는가 하면 정자가 난자 속에서 핵분열을 일으키면서 일어나요.

쉬운 말로 정자가 난자에게 잡아먹히면서 일어나요.

아이가 잉태하는 것 속에는 구원의 비밀이 담겨져 있어요.

 

정자가 난자 속에서 죽는 것은 씨앗이 흙 속에서 자기를 죽이는 것과 같아요.

자기가 죽으면서 새로운 생명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새로운 생명의 낳아짐 속에는 반드시 먼저 생명을 가진 자의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생명은 다른 생명의 죽음을 통해서 낳아진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이 성도의 구원에 모습이에요.

우리도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에 살아난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먹혀주심으로서 우리가 살아난 것입니다.

 

사라가 난자를 생산할 수 없는 경수가 끊어졌다는 것은 죽은 여자란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씨를 주어도 그 씨를 받아 낼 밭이 없는 것입니다.

씨는 밭이 있어야 싹을 내요.

씨를 책상 위에 둬 보세요.

일년이 가도,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그대로에요.

씨가 싹을 내려면 책상 위가 아니고 흙이 필요해요.

 

이처럼 씨가 아무리 싹을 틔우고자 하여도 땅이 없으면 못해요.

왜냐하면! 생명은 반드시 씨가 흙 속에서 자기를 버리는 죽음을 통해서 낳아지기 때문입니다.

씨가 죽으려면 흙이 있어야 하잖아요.

 

정자라는 씨를 죽이는 그 흙 역할을 여자의 난자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라에겐 경수가 끊어져서 그 난자를 생산 할 수가 없어요.

아브라함이 아무리 씨를 사라에게 주어도 그 씨를 받아 줄 난자라는 밭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식을 생산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낳아진 자식이라야 하나님의 창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없음에서’~ ‘있음이’ 되려면 사라가 죽어야 합니다.

아이를 낳는 여자로서의 기능을 상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진 언약의 후손이 인간의 공로가 전혀 없는 ‘없음에서’~ ‘있음으로’ 낳아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걸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는 이야기로 해 봅시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죄인을 구원하려고 오셨지요.

그래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온 것이잖아요.

그럼 예수님이 구원을 해 내려면 자기 백성들이 죽어 있어야 하겠지요.

죄와 사망 가운데 갇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살려 낼 것이 아닙니까?

 

죽어 있다는 것은 ‘없음’이란 말입니다.

이 ‘없음’에 ‘있음’이라는 예수님이 들어 온 것입니다.

‘없음’ 속에 들어와서 ‘있음’이라는 자기 자신을 죽였어요.

죽은 우리들에게 생명이 들어왔단 말입니다.

 

그럼 ‘없음’이라는 죽은 우리들이 예수라는 ‘있음’을 통해서 ‘없음에서’~ ‘있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었던 자가 살아나는 것 즉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아오는 과정에 예수님의 죽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린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살아났어요.

그러니 ‘없음’이었던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있음’이 된 것입니다.

 

이게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어요.

 

사라의 경수가 끊어지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찾아가지요.

가서 자식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나 사라는 자신들의 근거로 비웃어 버립니다.

왜? 비웃습니까?

자기 꼬라지를 보고 비웃지요.

 

사라는 씨를 주어도 받아 낼 수가 없는 죽은 자잖아요.

‘없음’이잖아요.

그러니 하나님이 아들을 낳게 해 준다고 하니 속으로 비웃으면서 헛소리 하지 말라고 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없음에서’~ ‘있음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 수준으로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웃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아들을 준다고 하자!

속으로 웃기고 있네!

당신이 아무리 자식을 낳아 준다고 해봐라!

여자가 경수가 끊어져서 죽은 몸인데 어찌 임신이 된단 말인가!

그러면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서로 쳐다보면서 비아냥거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여호와의 사자가 자꾸만 헛소리를 하니까 짜증을 내면서 웃기지 말고 밥을 먹었으면 그만 빨리 가라고 합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가 내년 이맘 때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일러 주고 갑니다.

이건 반드시 이렇게 해 주겠다는 일방적인 통고(通告)에요.

너희들이 믿든지 말든지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으로” 사라가 이삭을 낳았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서’ 낳은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낳았어요.

‘믿어서’ 낳은 것이 아니고 ‘믿음이’ 낳았다니까요.

 

창세기에서 보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지 않았어요.

하나님 말씀을 안 믿고 비웃었잖아요.

비웃었다는 것은 인 믿었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과 사라를 찾아와서 내 년 이맘 때 아들을 준다는 약속을 합니다.

그리곤 19장에 소돔 고모라고 멸망하고 20장에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자기 마누라를 팔아먹습니다.

그리고 21장에 보면 이삭이 태어나요.

그럼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라를 이비멜렉에게 팔아먹을 때는 사라의 뱃 속에 이삭이 잉태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기 하나 살고자 임신한 아내를 팔아먹었어요.

이건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자기 뱃속에 이삭이 임신 된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누라가 임신 했는데도 남에게 팔아먹지요.

세상에 이런 등신들이 어디 있나요.

그러니 아브라함이나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안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어서 이삭을 낳았다고 하지 않고 ‘믿음으로’ 사라는 잉태 할 수없는 상황 속에서도 이삭을 낳았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어서’ 낳은 것이 아니고 ‘믿음이’ 낳게 한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으로’ 라는 말은 “믿음이 주체”가 되어서 활동하였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안 믿으니까 ‘믿음이’ 이리와 하고서는 사라 뱃속에 아식을 확 집어넣어 준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과 사라는 안 믿었는데 ‘믿음으로’ 이삭을 낳았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라는 말은 하나님이 라는 말과 같아요.

성령이라고 해도 되고!

예수님이라고 해도 되어요.

다 같은 의미에요.

 

이렇게 되면 창세기에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지 않았다는 것이 맞지요.

맞아요.

이들이 믿지 않아야 되어요.

만약에 믿었으면 “믿음으로” 낳은 것이 아니고 “믿어서” 낳은 것이 되고 말아요.

 

“믿음으로”와 “믿어서” 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요.

‘믿음으로’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믿어서’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한 일이 되어요.



‘믿어서’ 낳게 되면 그건 아브라함과 사라가 낳은 것이 되어요.

이렇게 되면 ‘있음에서’~ ‘있음으로’ 낳아진 것이 되고 말아요.

 

‘믿음으로’ 낳아지려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지 말아야 해요.

그래서 다행스럽게도 아브라함과 사라가 안 믿었어요.

비웃었어요.

비웃었다는 것은 ‘없음’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일 년 후 이삭을 낳습니다.

 

‘없음에서’~ ‘있음이’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지 않았음에도 낳아진 ‘없음에서’ 낳아진 자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으로’ 잉태 할 수 없는 사라가 아들을 낳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낳아주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사라가 자식을 생산 할 수 없으니 죽은 자와 같은 것이지요.

죽은 자란 ‘없음’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죽은 자와 같은 ‘없음’ 이라는 사라의 몸에서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씨를 주어서 ‘있음’ 이라는 이삭을 낳아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속에 들어가서 자신의 생명을 심어주어서 끄집어 낸 것입니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누가 죽은 사라의 몸에서 생명을 끄집어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러니 이삭은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아진 자식인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낳는 방식인 것입니다.

모든 하늘나라 백성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에 방법으로 낳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 백성들은 ‘없음에서’~ ‘있음으로’ 낳아진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가지고 이걸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을 “믿음에 조상”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일을 하려고 아브라함을 선택했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일하심에 비밀을 모르고, 자기 ‘있음에서’ 하나님을 이용하여서 ‘더 있음으로’ 나아가고자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의 세계만 확장이 되는 것입니다.

죄인의 영역만 넓혀진단 말이에요.

이러한 것은 모든 죄인들이 꿈꾸는 바에요.

 

죄인은 신을 이용해서 자기 세계를 확장하고자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요.

계속하여서 “나 있음”을 유지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나로 남고 싶어 한단 말입니다.

영원불멸하고자 한단 말이에요.

죄인이 죽지 않고 영원불멸로 계속하여서 ‘나 있음으로’ 유지하게 되면 이 세상은 죄인의 세상으로 가득 차게 되어 있어요.

 

이러면 하나님은 죄인을 팽창시켜주는 촉매처럼 수단으로 이용당하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하나님은 용납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바라는 것을 철저히 깨부수는 방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어떤 식으로 깨부수는가 하면 아브라함의 소원을 빼앗아 가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힘으로 낳는 것은 전부 하나님께 원수가 되는 방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여기서 나타난 것이 이스마엘이에요.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자기 힘으로 낳은 자식이에요.

“있음에서”~ “있음으로” 낳아진 자에요.

이 놈이 나중에 “없음에서”~ “있음으로” 낳아진 이삭을 핍박하잖아요.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하는 것을 보고 큰 근심을 하지요.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고자 “육으로 낳은 자식”이 결국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낳아진 “언약의 후손” 을 공격하더라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큰 근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 내가 하나님 원수 노릇을 했구나! 탄식한 것입니다.

 

이런 맥이 계속하여서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속에 두 민족이 서로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있음으로’ 낳아진 표면적 이스라엘과, ‘없음에서’ 낳아진 이면적 이스라엘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표면적 이스라엘”이란? 육에 속한 혈통적 이스라엘을 말하고!

“이면적 이스라엘”이란? 영에 속한 언약으로 낳아진 자들을 말해요.

그래서 언약으로 낳아진 자들은 항상 자식을 낳지 못하는 석녀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자식이 낳아지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라와 라헬은 석녀에요.

 

아브라함에게는 하갈과 사라가 있지요.

하갈은 혈통으로 이스마엘을 낳고, 사라는 약속으로 이삭을 낳습니다.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이 나오지요.

레아는 혈통으로 쑥쑥 낳아요.

 

하지만 라헬은 자식을 낳지 못해요.

그러다가 라헬은 합환채를 먹고서 요셉을 낳습니다.

합환채는 신약에 오면 성령을 상징해요.

“합환채”에 대하여서는 “아가서”를 보면 잘 설명해 놓았으니 참고 하세요.

그러니 요셉은 신약 식으로 말하면 성령으로 낳아진 성도들과 같은 자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둘이 항상 싸우지요.

혈통으로 낳아진 자들이 약속으로 낳아진 자들을 죽이지요.

이게 또 신비에요.

 

레아가 낳은 자식들은 육에 속한 자를 상징하고!

라헬이 낳은 요셉은 영에 속한 자들 상징해요.

그런데 레아의 후손들이 라헬이 낳은 요셉을 죽이지요.

애굽에 팔아먹은 것은 곧 죽인 것과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나중에 보면 요셉이 형제들을 살리지요.

 

육에 속한 자들이 영에 속한 자를 죽였어요.

그런데 영에 속한 자가 육에 속한 자들을 용서하는 식으로 살려 냅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이 육에 속한 자기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가 나중에 자기를 죽인 유대인들을 살려내는 것의 모형이에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런 식으로 구원을 해 내신다는 것을 요셉과 그 형제들을 통해서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이란 반드시 죽임 당한 자가 죽인 자들을 용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약속으로 낳아진 자들은 씨와 같아요.

하나님의 생명이 그 속에 담겨져 있어요.

그리고 혈육으로 낳아진 자들은 밭과 같아요.

하나님은 이 둘을 가지고 “없음에서 있음이라는” 창조의 일을 하세요.

 

아까 씨는 반드시 밭이 있어야 싹을 틔운다고 했지요.

어떻게 싹을 내는가 하면 ‘없음에서’~ ‘있음으로’ 내어요.

죽은 자를 통해서 생명을 낳는단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혈통으로 낳아진 자들을 밭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혈통으로 낳아진 자들은 표면적 이스라엘로서 죽은 자들이에요.

그러니 약속으로 낳아진 자들이 이들 속에서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놈들이 약속으로 낳아진 자들을 잡아먹는 것입니다.

 

약속으로 낳아진 자들이 혈통으로 낳아진 자들 속에서 죽는 것은 그 놈들을 밭처럼 사용해서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낳기 위함입니다.

이건 마치 밭이 씨를 품는 것과 같아요.

아주 신비롭지요.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들은 이야기입니다.

두꺼비가 알을 낳고자 뱀에게 잡아먹힌다고 해요.

뱀이 두꺼비를 잡아먹으면 두꺼비 속에 있는 독이 뱀을 죽인다고 합니다.

그럼 두꺼비는 자기가 죽으면서 뱀 속에서 산란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꺼비는 새끼를 낳기 위해서 뱀에게 먹혀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꺼비가 산란 할 때 쯤 되면 뱀에게 가서 깐족거린다고 합니다.

뱀은 안 잡아먹으려고 한대요.

그런데 두꺼비가 하도 깐족거리니까 신경질이 나서 확 잡아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두꺼비는 뱀 속에 산란을 하고 그 죽은 뱀 속에서 두꺼비 알은 부화가 되는 것입니다.

 

전 이 이야기를 생각하면 꼭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깐족거리다가 죽임 당한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두꺼비처럼 자기 안에 생명을 토해내야 하는데 자기가 죽어야 할 밭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밭을 자기 백성들인 유대인들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건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에요.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 손에 죽임 당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성경에 보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일 생각이 없었어요.

그럼 안 되어요.

유대인들이 반드시 예수를 죽여주어야 해요.

그래야 예수님이 그들 속에서 생명을 낳아 구원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깐족거리는 것입니다.

율법을 폐하는 식으로 행동하고!

너희들은 독사 새끼라고 하고!

아주 염장을 지르는 말만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하도 예수님이 눈 앞에서 깐족거리니까 확 죽여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옳거니 하고 그들 속에서 산란을 해 버린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니 아이고 우리가 예수를 죽인 놈들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통곡을 하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예수를 죽은 자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이걸 ‘없음에서’~ ‘있음으로’ 낳아진 것이라고 합니다.

아주 놀랍지요.

그래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너무도 높고 깊어서 인간의 지혜로는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에 비밀들을 알려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면 성도들을 아하! 이게 그 뜻이구나! 를 알고 감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자 그 실체로 확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약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혈통으로 난 자들에게 잡아먹히지요.

이걸 묵시가 역사에게 잡아먹힌다고 합니다.

 

묵시는 “없음이고”, 역사는 “있음”이에요.

묵시는 “씨”이고, 역사는 “밭”이에요.

예수님은 묵시에요.

씨에요.

죽기 위해서 씨가 밭을 찾아서 오신 것입니다.

 

그 씨가 역사라는 밭에 떨어진 것입니다.

유대인이라는 밭에게 잡아먹힙니다.

죽은 줄 알았는데 거기서 새로운 생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드디어 ‘있음이’~ ‘없음’ 속에 들어가서 ‘없음을’~ ‘있음으로’ 창조를 해 낸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어요.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혈통으로 난 자들에게 잡아먹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묵시에 속한 예수라는 ‘있음’이라는 씨를 ‘없음’이라는 역사에 속한 혈통적 유대인들에게 심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곤 혈통 속에서는 없는 것을 ‘있음’이라는 열매로 맺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없음에서’~ ‘있음으로’ 일을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위하여 유대인들을 밭으로 사용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은 이 유대인들의 역할을 누가 하는가 하면 우리가 해요.

우리도 예수를 잡아먹고 있어요.

내가 예수를 죽인 자이어야 해요.

그래야 예수님이 우리 몸에서 ‘없음을’ 가지고 자신의 ‘있음을’ 보여주는 일을 하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예수님의 것이 ‘있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가 우리 삶에서도 그대로 적용이 되어요.

 

우리는 예수를 이용하여서 ‘나 있음’으로 나아가고자 하는데 하나님은 역으로 우리의 ‘있음을’~ ‘없음으로’ 바꿔치기 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은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가 않고 반대로 우리가 원치 않는 인생살이로 살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용하여서 내 이름을 내고자 하는데!

하나님은 도리어 우리 이름을 없애고 하나님 이름을 내고자 하세요.

그러니 우린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가고자 하는데!

하나님은 “나 있음”이라는 것을 “없음으로” 만들어서 “그 없음에서” 다시 하나님의 “있음으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비로서 없는데서 있게 하는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내가 약할 때가 가장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러 있는 강함이 된다고 하였어요.

 

이런 말씀을 들으면 가슴이 벌렁 거려야 하는데!!!!

소 닭 보듯이 하면 안 되어요.

이런 말씀 앞에서 세상이 시시하게 보여야 한단 말입니다.

좀 말씀 앞에서 감동이 되세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입이 쩍 벌어져야 해요.

놀라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이 작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성경을 볼 때마다 내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서 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뜻대로 산 자가 아니고 도리어 대적한 자란 말입니다.

우리는 눈만 뜨면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해요.

우리 삶에 이용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예수를 이용해서 사업에 성공하고 싶어하고!

예수를 이용해서 무병장수하여서 오라 살고 싶어하고!

예수를 이용하여서 등 따습고 배부르게 살고 싶어해요.

표면적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철저히 이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이용하여서 이 세상에서 자기 세계를 확장시키고자 한단 말입니다.

이게 이 시대 부흥신학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부흥신학’이 낳은 것이 ‘기복신앙’이고 ‘고지론’이에요.

고지론이 뭔고 하니 이 땅에서 성공하고 높아져서 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건 마치 마귀가 예수님에게 말한 것처럼 마귀에게 절을 해서 천하만국의 영광과 권세를 차지하라는 것과 같아요.

이걸 지금 기독교 방송이 ‘캐치프레이즈’ 로 내 걸고 선교 헌금하라고 미혹하고 있잖아요.

모든 교회들이 너도 나도 이리로 쫓아가고 있잖아요.

그러니 교회가 세워질 때마다 우상의 전당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호세아 10장을 봅시다.

 

호 10:1-2=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2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죄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치시며 그 주상을 헐으시리라”

 

호세아가 뭐라고 외칩니까?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인데!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이 많아지고!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한다고 하지요.

 

무슨 말입니까?

교회가 부흥 할수록 우상이 가득해 진단 말입니다.

이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두 마음을 품어서 그래요.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다는 뜻이 뭡니까?

하나님 이름 부르면서 세상에서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 이름을 이용해서 자기 나라를 건설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이걸 바벨탑이라고 합니다.

 

아주 무섭지요.

맞아요.

무식하면 이렇게 용감해져요.

이 시대 교회와 교인들이 아주 무식해요.

그리고 엄청 용감해요.

그러니 수천억씩 들여서 교회라는 신전을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회가 아니고 바알과 아세라 신전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 제단들을 깨트리는 일을 하신다고 하지요.

이 주상을 허물고 제단을 깨트리는 일을 누가 하는가 하면 선지자들이 해요.

이 선지자들이 요한계시록 10장에 보면 작은 책을 먹은 “두 증인”들이라고 합니다.

두 증인들이 교회라는 신전에 들어가서 야! 이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 배를 채우는 도적놈들아! 회개 하라고 하다가 죽임을 당해요.

 

이 시대 이런 하나님의 비밀을 모르는 교회가 신전이에요.

이런 신전에 두 증인들이 들어갑니다.

가서 죽어요.

가서 이들이 가졌다고 하는 ‘있음을’ 그것은 죽은 것이라는 ‘없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교회를 신전으로 만들어 놓은 자들은 하나님을 이용하여서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꿈꾸잖아요.

이건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증인들이 가서 이렇게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죄라고 고발을 합니다.

 

‘있음을’~ ‘없음으로’ 돌리는 일을 합니다.

보이는 성전을 깨트리는 일을 한단 말입니다.

보이는 성전을 깨트리고 성도들 속에 보이지 않는 성전을 짓게 해요.

그래야 성신이 짓는 보이지 않던 성전인 ‘없음에 속한 것이’ 성도 안에서 ‘있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 라는 보이는 존재 속에 ‘없음’이라는 예수님이 성전으로 와 계시게 된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 라는 ‘없음’ 속에서 ‘있음’이라는 예수님의 성전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없음’ 속에서 ‘있음’이라는 예수님의 성전이 세워진 성도는 더 이상 보이는 성전을 성전으로 섬기지 않게 되어요.

 

비로서 성령이 성도들 안에서 ‘나 있음’을 죽여서 ‘나 없음’으로 만들고!

그 ‘없음’ 안에서 예수님이 ‘있음’이라는 창조를 일으켜요.

비로서 우리 안에서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가는 하늘나라의 창조에 사건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없음’에서 ‘있음’이 된 성도들은 이제부터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관심을 돌리게 된단 말입니다.

그럼 ‘없음’에서 ‘있음’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세요.

야! 어렵다!

 

그래서 하나님이 두 증인들에게 작은 책이라는 새 언약을 먼저 먹이시고 가짜 성전에 보내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요.

복음을 받은 종들이 핍박을 당하고 죽임당하는 모습으로 있어요.

 

새 언약은 생명이에요.

“예수의 씨” 에요.

새 언약 속에 예수님 생명이 담겨져 있으니 씨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증인이 먼저 새 언약이라는 씨를 먹지요.

그럼 두 증인은 예수의 씨로 밭에 죽으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 증인들을 씨가 되게 하여서 가짜 성전이라는 밭에 뿌려서 죽게 만든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은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가서 잡아먹히라는 것입니다.

씨처럼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두 증인들의 죽음을 통해서 죽었던 성전 속에서 또 다른 생명을 낳게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죽었던 성전 속에서 죽은 자들이 산 자로 살아나는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을 하나님이 두 증인들을 통해서 복습하는 것이에요.

예수님이 죽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죽잖아요.

그리곤 그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살려내잖아요.

우리 모두가 이렇게 살아났어요.

 

이걸 이젠 우리들을 가지고 복기를 하세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서 복음을 깨닫게 하시고는 복음 모르는 교회 안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두 증인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럼 복음 모르는 교회는 복음을 받은 성도를 죽이겠지요.

 

그럼 하나님은 그들의 죽음을 통해서 또 다른 생명을 낳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스데반을 죽이고 바울을 살려낸 것과 같아요.

지금 복음 받은 우리가 두 증인에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율법 아래 있었어요.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복음이 우리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두 증인에게 작은 책을 먹여 주셨듯이 우리에게 먹여 주셨어요.

깨닫게 해 주셨단 말입니다.

 

그러니 누가 복음 모른다고 해서 너 왜? 복음 몰라 그럴 수 없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안 것이 우리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실력일 것 같으면 채근 할 수가 있어요.

“너 왜? 몰라!”

“더 열심히 공부하란 말이야!

“더 분발하란 말이야! 라고 족칠 수가 있어요.

 

열심을 내고 노력하고 분발해서 배울 수 있는 복음일 것 같으면 당연히 닦달을 하여야지요.

그러나 복음은 인간이 노력하고 분발한다고 해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여시고 귀를 열어 주셔야지만 깨달을 수가 있어요.

그러니 우린 인내하면서 먼저 깨달은 자로서 모르는 자들을 섬겨야 한단 말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세요.

욕 먹어가면서 저들이 몰라서 그러는 것이라 생각하고 안타까움으로 섬기잖아요.

주께서 저들에게도 눈을 열고 귀를 열어서 새 언약이 믿어지게 해 주실 것이라는 마음으로 섬기잖아요.

 

바울은 나는 모든 자에게 빚진 자라고 하는 것도 예수쟁이들을 잡아 죽이는데 앞장섰던 자신을 하나님의 일방적인 부르심으로 그 지독한 율법주의에서 빼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을 죽일 놈! 살릴 놈! 하지 않았어요.

도리어 내 하나 지옥가고 저들은 다 천국으로 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어요.

이게 복음을 깨달은 사람들의 마음 자세에요.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있어요.

이 분은 제법 큰 교회에 다니는데 그곳에서 이 복음으로 섬겨요.

잘난 척 하지 않고 교회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묵묵히 하면서 말이에요.

우리 블로그에 있는 설교를 프린트해서 가까운 분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한번 읽어보라고 한다는 거에요.

 

그것도 조심스럽게 말이에요.

행여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게 배려하면서 말이에요.

이게 복음을 은혜로 깨달은 것을 아는 두 증인의 자세에요.

어떤 사람이 복음을 알고 모르고는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가 처한 곳에서 자신이 받은 은혜로 섬기는 것이 복음을 깨달은 종들의 올바른 자세에요.

이렇게 섬기는 것을 성경은 죽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서 때려 부수고!

잘라내는 것이 아니고!

함께 아파하고 남 몰래 울면서 기도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참으로 복음으로 합당하게 살아가는 분이에요.

 

너무도 귀하고 고마워서 실명을 말했어요.

바울도 서신서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면서 그들을 알아주라고 하잖아요.

이런 분들이 많이 일어나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제 설교를 듣고 자기가 잘못 생각하였다는 것을 깨닫고 그동안 교회가 복음 안 전한다는 핑계로 교회에 가지 않고 집에서 놀았는데 이제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 다시 교회에 가서 섬긴다고 하는 분들이 종종 있어서 연락이 와요.

말씀을 듣고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면 돌이키면 되어요.

그게 말씀이 그 사람들 안에서 살아서 심령골수를 찔러 쪼개는 역사를 하고 있다는 증거에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도 많은 분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 있어요.

여전히 복음 안다는 것으로 자기 유익을 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실제로 우리들이 복음 안다고 잘난 척이나 하였지 섬기지는 않고 있잖아요.

심지어 가족들에게도 그러고 있잖아요.

이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신 것은 모르는 사람 앞에서 잘난 척 뻐기고 그들을 업신여기고 무시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에요.

그들을 위하여 죽으라고 준 것이에요.

섬기라고 준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이 시대 자칭 복음 안다고 하면서 복음 없는 교회에 갈 필요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복음을 곡해하고 있는지를 알겠지요.

어떤 목사하고 교인들은 저 보고 교회가라고 한다고 신경질을 내는 사람이 있어요.

자기 스승은 내가 교회이니 교회 안 가도 된다고 하는데 왜? 나는 교회 가라고 하느냐고 따져요.

하도 기가 차고 코가 막혀서 할 말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그것은 사람의 귀를 기쁘게 해 주는 사람의 말이고 지식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들의 이러한 사고는 두 증인들과 달라요.

그러므로 이들이 알고 있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고 사람의 가르침을 쫓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두 증인과 비교하면 거짓 복음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과 비교해 보세요.

다르잖아요.

그러니 미혹인 것입니다.

 

이들은 쉬운 말로 “무정란 복음”을 들어서 그래요.

철학으로 공교하게 지은 말을 복음이라고 둔갑해서 들어서 그래요.

이건 인간의 말이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에요.

죽은 말이에요.

그러니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결국 복음으로 자기 가치 챙기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 복음하면서 자기 ‘있음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무정란 복음이니까 복음 안다고 잘난 척 하는 복음 안다고 하는 “나” 만 있지, 그 복음으로 씨처럼 죽어지는 예수님이 없는 겁니다.

지식이기 때문에 자기 부인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이 지식이니까 관념적으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나 없음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도리어 복음 안다는 것으로 자기 우월성을 자랑하고 자기 ‘있음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짓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발 좀 깨달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분별하고 미혹당하지 마세요.

 

이 시대 복음으로 자기 잘남으로 치장하는 사람들이나 예수를 이용해서 자기 집단이나 교세 확장을 꿈꾸는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고 바알과 아세라 신전이에요.

그러니 그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전부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주여 주시옵소서!” 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저 복 달라고 불철주야로 떼를 쓰고 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은 이렇게 되지 않도록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는 것을 철저히 배척하는 방식으로 말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의 간섭을 받고 있는 교회나 성도는 하는 일이 잘 되는 것이 아니고 하는 일마다 안 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자꾸만 지진을 일으켜서 흔들어버려요.

흔들지 않으면 ‘있음으로’ 나아가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땅에 코를 박고 있음이 되어서 땅에 기운으로 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땅에 기운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땅에서 자꾸만 떠나도록 ‘없음으로’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미워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이에요.

그런데 우린 이걸 사랑으로 받지 않고 너무합니다! 라고 받아요.

우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브라함처럼!

그 후손인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이용하여서 “나 있음” 으로 살고자 한단 말입니다.

 

“난 없는 자입니다!”

“하나님만 있으면 됩니다!” 라는 자세로 살아야 하는데!

우린 아브라함처럼 반대로 “하나님은 없어도 되니 나만 있게 해 주세요!” 라고 하나님을 이용한단 말입니다.

이게 죄에요.

 

성령이 와서 이러한 것을 죄라고 고발을 해요.

그러니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은 좋은 교회 만들자고 하는 개혁주의나 성화주의 같은 교회 부흥신학이 죄라고 하면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요.

왜? 정낙원 목사는 교회가 개혁되고 성화되고 교회가 부흥되는 것을 싫어하느냐! 라고 해요.

 

제가 성도가 성화되고 교회가 개혁되고 부흥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고 그 바닥에 깔려 있는 복음을 이용하여서 자기 가치를 챙겨서 “나” “있음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그 감추어진 우상성을 죄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름을 부르면서 두 마음을 품고 있는 그것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난 없어도 괜찮습니다!”

“예수님만 있으면 됩니다!” 라고 한다면 구태여 교회 부흥에 신경 쓸 이유가 없잖아요.

예수만 있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우린 예수로만 만족 할 수가 없어요.

보이는 것이 있어야 안심을 해요.

 

그래서 부흥을 외치는 것입니다.

잘 살게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건 우리의 본성이 손에 안 잡히고 눈에 안 보이면 불안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불안감을 해소키 위하여 보이는 것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 속아요.

 

저도 복음을 핑계로 늘 땅에서 잘 되는 것을 꿈꾸어요.

그래서 달라고 합니다.

그것도 복음을 핑계로 말입니다.

하나님이 속을 것 같습니까?

안 속아요.

 

하나님이 그럽니다.

야! 이 놈아!

웃기지 마라!

내가 니 속을 모를 줄 아느냐! 라고 하면서 안 주세요.

 

제가 하나님 교회 부흥 안 시켜 주려면 로또복권이라도 딱 한번만 맞게 해 주세요!

그래야 노후라도 걱정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그럼 하나님이 안 돼!

그거 맞으면 너는 날 안 믿고 돈을 믿어!

그건 쥐약이야!

너 그거 맞으면 죽어!

그러면서 안 주세요.

 

그럼 전 아닙니다!

한번 줘 보고 그런 말 하세요.

전 진짜 잘 할 수 있어요!

 

그럼 하나님이 웃기지 말라!

니 조상들이 다 그랬어!

너는 다른 인간인줄 아느냐!

다 똑 같은 인간이야!

 

너희는 등 따습고 배부르면 다 날 떠나게 되어 있어!

그래서 미리 알고 안 주는거야!

지금 고생스러운 것이 다 복인 줄 알고 살어! 그래요.

그럼 난 하나님이 야속하다고 하지요.

 

그러니 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용하고 있는 죄인인 것입니다.

이 죄가 날마다 폭로가 되니 죽을 지경인 것입니다.

이해가 되는가요.

이러한 것이 다 성령이 내 안에 오셔서 알게 해 준 죄관이에요.

 

조금만 더 성령이 알게 해 주시는 의와 죄와 심판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의란? 옳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셔서 의에 대하여 증거해 준다고 하지요.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는 다른 것이라고 알려준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의는 의가 아니라고 말해준단 말이에요.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의가 있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의는 어떤 의인가요?

의란? 옳음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인간들이 옳다고 하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이러 이러한 사람은 옳은 자라고 인정하는 기준이 있잖아요.

 

예를 들어서 일본 교토 지하철에서 철로에 떨어진 승객을 구하고 자신은 죽은 이수현씨와 같은 살신성인으로 산 사람을 의인이라고 인정을 하잖아요.

교과서에 나오는 강재구 소령처럼 부하가 잘못 던진 수류탄을 자기 몸으로 막아서 부하들의 생명을 구한 것과 같은 것을 의로운 행위라고 칭송을 하잖아요.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의 선행을 기리려고 교과서에 실어서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쳐서 닮게 하고 이러한 정신을 남기기 위해서 기념사업 재단을 만들어서 그 얼을 유지하고자 하잖아요.

 

이러한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의 의로운 행위를 옳음으로 인정하지 않아요.

분명히 인간 입장에선 의로운 행위임에도 하나님은 그걸 불의라고 한단 말입니다.

불의란? 딱히 나쁜 일을 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를 가리는 것이기 때문에 불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표준 새 번역을 보면 더 정확하게 번역을 해 놓았어요.

 

“그가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 잡아 주실 것이다, 나를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을 말씀해 주실 것이며,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므로 너희가 나를 더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임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세상에 통치자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심판 받을 자가 누구인지를 말씀해 주실 것이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의 그릇된 생각을 바로 잡아 준다고 하지요.

어떻게 바로 잡아 주시는가 하면 예수님을 기준으로 바로잡아 주세요.

 

죄에 대하여 바로 잡아 주시는데 어떻게 잡아 주시나요?

성령이 오셔서 하는 말씀이 예수를 안 믿는 것이 죄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신약에선 예수 안 믿는 것이 죄에요.

 

죄가 뭐냐?

예수를 떠나서 독자적으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 밖이 죄에요.

 

예수 안은 무조건 생명이고!

예수 밖은 무조건 죽음이에요.

하나님 앞에서는 죽음은 무조건 죄에요.

그럼 예수 안 믿는 것은 죽은 것이니 예수 안 믿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에 대하여 알려줍니다.

의란? 예수님이 하나님에게로 가신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의롭다고 인정해 준 결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이야 말로 하나님에게 옳다고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일만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 알려 줍니다.

심판이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서 예수를 죽인 세력이 심판을 당한 꼴이 되고 말았어요.

마귀가 예수를 죽였는데!

예수님이 그 죽음을 뚫고 부활하셨어요.

하나님이 예수님 손을 들어준 것입니다.

마귀에게 넌 졌어!

그러는 거에요.

 

마귀는 예수를 죽이면 이긴 것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마귀가 죽인 예수를 부활케 하심으로서 마귀 넌 예수에게 졌다고 합니다.

그러니 마귀가 예수님에게 진 것이지요.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누가 심판을 받아야 할 자인지를 알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마귀에게 속한 자들은 몽땅 심판 받아야 할 자들이라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한마디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가지고 판단하신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그러니 위에서 언급한 강재구 소령이나 이수현씨와 같은 사람들을 의인이라고 하는 우리 인간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들은 죄인으로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불의가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정의감이 투철한 바퀴벌레 한 마리가 동료를 위하여 죽은 것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의로운 죽음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아요.

인간 앞에선 바퀴벌레는 그 자체가 사라져 버려야 할 악(惡)의 존재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은 바퀴벌레 세계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것도 의로운 일이라고 인정하지 않아요.

그러므로 바퀴 벌레가 오해를 하여서 인간들 앞에 나와서 바퀴벌레 세계에서의 의를 가지고 의라고 인정해 주세요! 그러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럼 인간들이 화를 내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바퀴벌레와 같아요.

그러니 인간의 의를 가지고 인정해 달라고 하면 혼나요.

하나님 앞에선 숨는 것이 장땡이에요.

괜히 어쭙잖은 행함 가지고 얼씬 거리다간 죽어요.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에게만 있어요.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어요.

오직이란? “유일”하다는 뜻입니다.

하늘이나 땅에서 오직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한 사람” 이란 말이에요.

 

예수님 이외는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만 사람이고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서 다 짐승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는 오직 참 사람이신 예수님에게만 있어요.

우리는 이 예수님의 의로 사람으로 간주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이 땅은 아담이 범죄하자 하나님이 저주를 하셨어요.

아담이 살아갈 근본인 땅을 저주해 버렸어요.

여기서 땅이란? 인간 세상을 말해요.

 

그럼 저주 받은 땅에서 나오는 것에는 하나님 앞에 옳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옳은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강재구 소령도 이수현씨도 옳은 자가 아니에요.

아담 안에서 난 저주 받은 죄인이에요.

 

이걸 우리의 신앙에 적용하면 우리의 그 어떤 행함 속에도 의가 없다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처럼 내가 천사의 말을 하더라도 의가 아니고!

내가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의가 아니고!

내 것을 다 털어서 구제하고 밥 퍼주는 사랑을 하여도 의가 아니에요.

 

‘슈바이처’ 같이 아프리카에 가서 의술을 베풀어도 의가 아니고!

‘간디’처럼 산상보훈을 기치로 내세워서 비폭력 운동을 하여도 의가 아니고!

‘테레사’ 수녀처럼 빈민가에서 고아와 병자들을 돌보아도 의가 아니고!

노숙자들에게 밥 퍼주는 것도 의가 아니고!

내가 목사 노릇을 하고 복음을 전해도 의가 되지 않아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지요.

그 사랑을 의인화 하면 예수님이에요.

그러니 예수님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란 말입니다.

왜? 예수님이 없으면 말짱 헛것인가요?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땅에서 나지 않고 하늘에서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예수님의 것을 들고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은 저주 받은 곳이에요.

불의의 세계에요.

하늘만 의의 세계에요.

하나님 앞에 옳음은 하늘에만 있어요.

왜냐하면! 하늘은 죄가 없는 곳이거든요.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옳은 자는 이 땅에서 난 자가 아니고 하늘로부터 와야 된다는 말입니다.

하늘로서 오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 앞에 옳은 분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서 왔기 때문에 죄가 없어요.

그러니까 죄 없는 예수님이 하신 일만 다 의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내가 산을 옮기는 것도 아니고!

내 몸을 사회 정의를 위해서 불사르는데 내어 주는 것도 아니고!

노숙자들에게 밥 퍼주는 것도 아니고!

복음 전하는 목사 노릇하는 것도 아니에요.

이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것들 속에 하나님의 의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의가 없으니 이러한 것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으면 안 되어요.

 

신앙은 예수 믿는 것이에요.

복음 전하면서 난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의는 오직 예수님 안에만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예수 믿어야 해요.

우리가 하는 일에 정신을 빼앗기면 안 되어요.

 

그럼 마태복음 7장 21-23절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좇아내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복음 전했습니다! 라고 한단 말이에요.

이러한 일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는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들고 오는 것이지 내가 예수 믿고 행한 업적을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들을 모른다고 한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 업적을 들고 나왔기 때문에 불법을 행한 자들이라고 하면서 지옥으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하세요.

 

우리가 최종적으로 믿고 내어 놓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의입니다.

모든 신앙생활이 이 바탕에서 비롯되어져야 합니다.

이걸 아까 “나는 없고 예수님만 있습니다!” 라고 했어요.

 

그럼 여기에 누가 반발을 하겠습니까?

자기 행위에 의미를 두는 자들입니다.

자신의 종교적인 일들을 선한 것이라고 의미를 두는 자들이 반발을 하겠지요.

 

제가 성화주의와 개혁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성화와 개혁이 나빠서가 아니에요.

그건 의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의가 아니기 때문에 성도들을 거기에 정신을 팔리게 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럼 미혹이 되어요.

이 의미를 모르니 정낙원 목사는 성화를 부정한다! 고 곡해하는 것입니다.

 

전 성화를 부정하지 않아요.

다만 성화가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화 하세요.

세상 사람들보다도 특히 절간에 다니는 사람들보다도 더 착하게 성화 하셔야지요.

그러나 성화 한 것을 신앙으로 내어 놓지 말란 말입니다.

그럼 마태복음 7장에서처럼 하나님이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고 외면당할 수가 있어집니다.

 

성화를 신앙으로 나오는 것은 옛 언약 아래 있을 때입니다.

옛 언약은 예수가 오시기 전이에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종교적인 일을 하면 의라고 인정을 해 주었어요.

인간의 착함이나 선행을 의라고 인정해 주었어요.

구제하고 봉사하고 섬기는 것을 의라고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이러한 것이 모두가 불의라고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걸 배설물이라고 했어요.

바울의 말대로 율법에 흠이 없게 산 것도 다 똥이란 말입니다.

성령이 오시자 하나님 말씀대로 열심히 산 것도 다 똥이라는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 속에 의가 없다는 뜻에서 똥이라고 합니다.

 

이제 정리해 봅시다.

 

예수님은 성령이 오셔서 새로운 죄관과 의관과 심판에 대하여 알려 주신다고 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것이 다 틀렸다고 알려 주신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너 자체가 틀린 놈이라고 알려 준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 쪽에서 보면 폭력적으로 보여요.

폭력적이란? 다른 말로 일방적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일방적입니다.

말이 은혜이지 우리 인간들에겐 강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곳에는 반드시 인간들의 반발성이라는 죄성이 터져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순순히 응하지 않고 반발을 하기 때문입니다.

반발한다는 것은 자기 기준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반발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이걸 수용하지 못합니다.

 

이걸 수용하면 인간 자체가 부정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세상 중심의 선악관을 가지고 있는데 성령이 오면 예수님 중심의 전혀 다르고 새로운 선악관을 주신다고 하니 누가 받겠어요.

 

그럼 하나의 결과가 나옵니다.

둘 간에 충돌입니다.

싸움입니다.

여기서 발생된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물론 선악의 법으로 정한 기준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십니다.

오셔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선악의 기준을 죄라고 규정해 버립니다.

 

우린 순순히 받아 들일수가 없습니다.

이걸 받아들이는 순간 나라는 존재는 죄인으로 전락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령이 제시한 기준을 죽입니다.

결국 우린 예수를 죽인 자로서 남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걸 노리고 성령을 우리 가운데 주신 겁니다.

너희가 예수를 죽인 자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내가 예수를 죽인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하나님의 용서가 은혜로 부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를 남기고자 일을 하십니다.

 

스가랴서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은총과 간구의 영” 을 부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슥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하나님이 부어주시겠다고 하는 “은총과 간구의 영” 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이 오시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본다고 합니다.

그리곤 애통하고 통곡을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 찌른바 “그” 란?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러니 성령이 부어지면 내가 예수를 죽인 자라는 것이 깨달아진다는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은총과 간구의 영을 부어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넌 예수를 죽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죄인 만들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모든 무릎을 예수에게 꿇고 그를 주라 시인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스가랴의 예언대로 은총과 간구의 영을 부어줍니다.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외칩니다.

 

베드로가 성령에 충만을 입고 외칩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를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죽인 그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이는 여러분들이 틀렸고 예수가 맞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잘못을 자복하고 회개 하십시오!

 

그러자 여기저기서 “어찌 할꼬” 하는 통곡들이 터져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은총과 간구의 영을 그들 속에 부어준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들이 예수를 죽인 자라는 것을 알게 되고 “어찌 할꼬” 애통이 일어나고 통곡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게 되면 자신이 예수를 죽인 죄인이라는 것이 깨달아집니다.

 

신앙생활이란? 여기서부터 출발을 합니다.

모든 삶에 바탕에 난 예수를 죽인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깔고 시작하여야 합니다.

 

가난해도 난 예수를 죽인 하나님의 원수야!

병들어도 난 예수를 죽인 하나님의 원수야!

성공해도 실패해도 난 예수를 죽인 하나님의 원수야!

복음 전하는 목사 노릇을 해도 난 예수를 죽인 하나님의 원수야!

 

헌금하고 봉사하고 충성을 하여도 난 예수를 죽인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깔고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사는 바탕에 하나님의 용서하심으로 살고 있다는 은혜가 묻어나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고백이 되어집니다.

 

내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 줄지라도 주님 사랑입니다!

내가 모든 비밀한 것을 안다고 하여도 모든 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내가 산을 옮길 만한 엄청난 일을 하여도 모든 것이 주님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예수 믿음이고 신앙생활인 겁니다.

이 모든 바탕엔 내가 예수를 죽인 죄인이라는 것이 깔려 있어야 합니다.

그리 할 때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됩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더 깊이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고 선물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걸 알게 하시려고 성령을 부어 주셨어요.

 

성령을 받은 사람은 무슨 엄청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날마다 부인당하는 없음의 자리로 내려가고 예수님이 하신 있음만 증거하게 되어요.

예수님이 하신 일만이 진리라고 증거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면 예수의 증인이 된다고 한 것입니다.

우린 두 증인들이에요.

그러니 예수를 만난 증거자로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성령을 주셔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리의 성령이 우리 안에서 스승이 되셔서 사람의 계명을 따르지 말게 하시고 참과 거짓을 분별케 하옵소서. 오직 예수님의 의만 부여잡고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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