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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97강. 제자의 길 (요 15:26-16:4)

by coroa 2022. 1. 1.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97강. 제자의 길 (요 15:26-16:4)

-.정낙원 목사

 

요 15:26-16:4=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 하느니라 16: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치 않게 하려 함이니 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3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4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

 

며칠 전 동아 방송 개국특집으로 북극 탐험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북극의 눈밭을 약 2천km를 50일 동안 개 썰매로 종단하는 내용입니다.

얼마나 힘이든지 중간에 썰매 견 두 마리가 죽기도 했습니다.

 

개 십여 마리가 썰매를 끌고 가는데 썰매의 무게를 줄인다고 최소한의 식량으로 극한을 극복하는데 나중엔 개들에 먹을 양식이 없어서 밥을 안주니 자기가 싼 똥을 먹어요.

그것도 서로 먹겠다고 으르렁 거리고 싸웁니다.

그러다가 어느 놈 한 마리가 지쳐서 쓰러졌는데 서로 달려들어서 뜯어 먹는 것입니다.

 

전 그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화가 나는지 소리를 쳤습니다.

야! 이 놈들아! 개를 잡아먹지 말고 인간들을 잡아먹으라고!

왜? 자기 동료를 잡아먹느냐!

왜? 개 만도 못한 그 인간들을 잡아먹지 않느냐고 말이에요.

그 모습 속에선 인간이 개만도 못해요.

 

생각해 보세요.

썰매 무게가 약 5백kg 되는데 그걸 열 마리가 끌었으면 한 마리당 50kg을 담당하면 되잖아요.

처음 시작 할 때는 개들이 잘 먹어서 힘이 있었어요.

그런데 도중에 밥을 주지 않으니 힘이 점점 빠져 가는데 개 두 마리가 죽었어요.

그럼 나머지 8 마리가 그 무게를 담당해야 하잖아요.

 

그럼 더 힘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힘은 밥에서 나오는데 양식이 없다고 밥을 안 줍니다.

그러니 개들이 먹지 못해서 피골이 상접해서 지쳐서 쓰려지곤 하는 겁니다.

허기를 달랜다고 가죽으로 된 개 목줄을 핥아 먹다가 자기들이 싼 똥을 서로 먹겠다고 으르렁 거리다가 급기야는 힘없는 동료를 서로 달려들어서 잡아서 뜯어 먹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놈은 썰매를 타고 가면서 그 썰매를 끄는 개에겐 양식을 주지 않고 결국엔 살고자 자기 동료를 뜯어 먹는 일까지 발생하는 것입니다.

 

전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인간이 참으로 어리석고 잔인하다!

어쩜 저런 짓을 할까!

아니 그 눈길을 가서 깃발 하나 꼽으면 뭔가 대단 한 건가요?

얼마나 어리석어요.

헬리콥터 타고 가서 꼽으면 안 되고 개 썰매 타고 가서 꼽으면 뭔가 다른가요.

 

깃발 하나 꼽고 북극을 정복했대요.

아이고~! 지랄하고 있어요.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입니다.

아니 깃발 하나 꼽으면 북극이 정복당한 건가요.

 

북극이 뭐라고 하겠어요.

어이구~ 이 등신들아!

그 깃발 하나 꼽는다고 북극이 남극이 되냐!

북극은 요동치 않아요.

깃발이 아니라 깃발 할애비를 꼽아도 꿈쩍도 안 해요.

 

괜히 인간들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뿐이에요.

여기서 인간의 죄가 드러납니다.

인간은 자기가 한 일에 의미를 두어요.

그 의미를 기리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게 죄 거든요.

죄란?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리지 않는 거에요.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고 창조가 되었는데 자기 영광을 돌리고 있어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할 인간이 무엇을 해도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 영광을 챙기고자 한단 말입니다.

 

개 썰매를 타고 눈 밭을 지나온 것도 자기 영광으로 챙긴단 말입니다.

개야 죽든 말든 상관없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성취하면 되어요.

이게 바로 죄성이에요.

죄가 남이야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심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왜? 그 미친 짓을 해야 하는데요.

그 깃발 하나 꼽겠다고 그 지랄을 하고 있어요.

모두가 밥 쳐 먹고 할 일이 없으니 그 짓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루 벌어 하루 살도록 이마에 땀 흘리면서 한 끼 밥을 먹어야 정상이에요.

등 따습고 배부르고 시간 나면 지랄을 하기 때문입니다.

모두 배 불러서 할 짓이 없으니 그런 짓을 하는 것입니다.

 

정 하고 싶으면 인간들끼리 하다가 인간을 잡아먹든가 하지 왜? 애꿎은 개를 잡아먹게 하느냐 말입니다.

개에게 썰매를 끌게 하거들랑 먹이를 충분히 먹이고 썰매를 끌고 가게 하여야지 왜? 밥도 안 주고 굶기면서 서로 뜯어 먹게 하고 굶어 죽게 하느냐 이 말입니다.

 

개가 배가 고파서 자기 동료를 잡아서 뜯어 먹는 것을 보고선 내가 인간인 게 너무도 부끄러운 겁니다.

제가 개에게 미안하다고 했어요.

인간은 개만도 못한 자들이라고 말이에요.

 

거기에 보면 도중에 죽은 개를 묻으면서 인간이 하는 말이 압권입니다.

개야! 미안하다!

다음에는 개로 태어나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그 인간에게 야! 이놈아! 니가 다음에 태어나는 일이 있다고 하면 개로 태어나서 그 썰매를 끌으라고 했어요.

어찌나 화가 나는지!

개만도 못한 것이 개 보다 잘난 자라고 행세하는 것이 화가 나는 것입니다.

 

설교 초두에 왜? 이러한 말을 하는 줄 아세요.

 

오늘 본문이 이러한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을 모르면서도 하나님 이름을 들먹이면서 진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인다고 하잖아요.

가짜가 진짜를 죽인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개 만도 못한 인간들이 같잖은 영웅심 때문에 애꿎은 개들을 죽이는 것처럼 복음을 모르면서 정작 복음을 전하는 분들을 핍박을 한단 말입니다.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서 수많은 영혼들을 죽이고 있단 말이에요.

이러한 일이 교회에서 그대로 일어나고 있어요.

 

오늘 본문이 뭔가요.

예수님이 가시면 다른 보혜사인 성령을 보내 주신다고 합니다.

그럼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고 쫓겨나 급기야는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자칭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자들로부터 핍박을 당한다는 내용입니다.

지금도 어쭙잖게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자기하고 다르면 헐뜯고 죽이고 있잖아요.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것과 똑 같지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죽이잖아요.

죽이면서하는 말이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例) 라고 합니다.

예(例)라는 말은 법칙이란 뜻입니다.

 

이를 두고서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이는 저희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해서” 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모르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하나님으로 진짜 하나님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언어로 복음도 모르면서 복음을 말하고 있고!

예수도 모르면서 예수를 믿고 있으며!

십자가도 모르면서 십자가를 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건 껍데기를 붙잡고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런 것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헛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서 천사의 말을 하고!

사랑이 없으면서 구제를 하고!

사랑이 없으면서 순교를 하고!

사랑이 없으면서 충성하고 봉사한다고 했어요.

다른 말로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것을 일컬어 “의(義)와 인(仁)과 신(信)이 빠진 제사”라고 했어요.

그토록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들이 자랑하는 그 율법 신앙 속에는 정작 담겨 있어야 할 의와 인과 신이 빠졌다고 합니다.

이는 알맹이는 없고 빈 껍데기만 있다는 말입니다.

 

이걸 고린도전서 13장에선 사랑 없는 행함이라고 합니다.

의와 인과 신을 고린도전서 13장식으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구제도 순교도 섬김도 봉사도 말짱 도루묵이에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마음이에요.

마음에도 없는 것을 행하면 반드시 그 행한 것을 가지고 잘난 척 힘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신앙생활이란? 예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정형화되어 있지 않아요.

“어떻게”가 없어요.

“어떻게 사랑할까요” 라고 묻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걸 믿음으로 응용해 보세요.

어떻게 믿을까요? 라고 묻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라는 틀을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종들이 주인에게 무슨 일을 할까요? 라고 묻는 것과 같아요.

 

무슨 일을 할까요? 라고 묻는 것은 일을 어디서 어디까지 구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주인이라면 일을 어디서 어디까지 구분하지 않아요.

모두가 다 내 일이에요.

그러므로 주인에겐 일이란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종에겐 어디서 어디까지 정해져 있어요.

이걸 법이라고 합니다.

 

법은 사랑의 반대입니다.

법은 어디서 어디까지 정해져 있지만 사랑은 어디서 어디까지 정해진 것이 없어요.

법으로 사랑하면 얼마큼 사랑 할까!

나 이만큼 했잖아!

난 할 만큼 했어! 라고 합니다.

 

하지만 사랑으로 사랑하면 얼마큼이라는 양이 없어요.

부족함을 느끼고!

좀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라고 합니다.

 

법은 타자로 보고 사랑은 한 몸으로 봅니다.

법은 남으로 생각하지만 사랑은 자신과 동일시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 그 무슨 일을 하여도 소용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자기 공적을 쌓아요.

이걸 종교 놀음이라고 합니다.

종교 놀음은 자기 의 쌓는 것이에요.

자기 의가 힘이 되어서 사람을 차별하고 판단하고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종교 놀음의 끝에는 반드시 힘에 균형이 생기고 자기 자랑이 난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 믿기에요.

내가 믿는 다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것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믿음이란? 아주 단순해요.

믿어지는 것을 믿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기에는 그 어떤 인간의 조건이나 노력이나 희생이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합니다.

그러니 예수 믿기에는 인간이 자랑할 것이 없어요.

 

예수 믿는 것을 자랑하거나!

복음 아는 것을 자랑하거나!

교회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을 자랑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지금 의와 인과 신이 빠진 종교 놀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많으면 많을수록 자기 힘만 커져가요.

이길 기화로 교회의 기득권층으로 자리 잡아 급기야 교회를 자기 색깔의 교회로 만들어 주인 노릇을 하게 됩니다.

믿음이 없으면 목사는 교인들을 이용하여 자기 탐욕을 채우고자 하고!

교인들은 유명하다는 목사를 이용하여 자기 욕구를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의인화 하면 예수님입니다.

그럼 사랑이 없는 일은 전부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예수님 사랑이 없는 예수 믿기는 전부 가짜란 말입니다.

빈껍데기란 말이에요.

빈껍데기 신앙은 믿는다는 흉내는 내는데 조화와 같이 향기를 토하지 못해요.

 

사람들이 착각하기를 내 쪽에서 예수님을 사랑 할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않으면 그 어떤 것으로도 사랑 할 수가 없어요.

 

흔히 목사님들이 잘 하는 착각입니다.

목사님들은 학문적으로 설교를 잘하면 성도들이 은혜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신학과 철학과 심리학과 같은 세상 학문을 총 망라하여서 성경을 해석합니다.

그러다 보니 설교가 논문 발표하듯이 하고 있어요.

 

원어를 동원하여서 성경의 낱말을 해박하게 풀이하면 그 속에서 사랑이 쏟아지고 은혜가 부어지고 생명이 나온다고 착각하고 있어요.

이건 오해에요.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담아 놓은 책입니다.

그 계시를 역사적 사실로 기술해 놓은 책이에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증거하고 있어요.

 

성경의 중심사상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일으킨 사건을 말하고 있어요.

사건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고 이성적이지도 않아요.

그냥 창조와 같이 일어난 것이에요.  

사건은 정형화 된 틀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에요.

틀을 벗어나 일어나는 것이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속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어떤 공식을 가지고 해석하면 안 되어요.

흔히들 말하는 육하원칙으로 해석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그건 피조물들이 해석하는 틀이에요.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였다는 말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성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것을 요구해요.

납득이 가게 해 달라는 겁니다.

납득을 하려면 내 생각에 맞아 떨어져야 합니다.

그러니 인간의 해석은 논리를 요구하고 합리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해석은 논리도 없고 합리도 없어요.

논리나 합리를 초월하고 있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이 형성 될 수가 없을 정도로 비 논리적이고 비 합리적이고 비 이성적이에요.

그래서 성경을 해석하는 일에는 세상 학문이 필요치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성경은 사건 중심을 기록하였습니다.

사건이란? 논리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의미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신 사건 속에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어요.

영적 의미는 성령이 깨닫게 해 주세요.

성령을 받은 성도는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요.

 

그래서 제가 목사님들을 만나면 드리는 말씀이 제발 설교 잘 하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유혹을 벗어나라고 합니다.

성경은 예수를 증거하는 책이에요.

그런데 많은 목사님들이 성경을 강해한다고 하면서 낱말 풀이를 하고 있어요.

그건 문자 풀이지 설교가 아니에요.

 

설교란? 예수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만난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 설교에요.

설교를 “케리그마” 라고 하는데 이는 “선포한다” 는 뜻입니다.

선포란? 우리의 동의를 원치 않아요.

난 이런 예수를 만났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난 이런 하나님을 만났다!”

“난 이렇게 은혜를 입었다!”

“내가 만난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라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시편 2편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에 포고령을 내렸어요.

 

누구든지 내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합니다.

이건 난 이런 식으로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게 “케리그마” 에요.

이건 일방적으로 통고하는 것이지 우리더러 동의해 달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게 선포이고 이 선포를 알려 주는 것이 설교에요.

 

그러니 설교하면서 사람의 반응을 살필 이유도 없습니다.

받으면 다행이고 안 받아도 어쩔 수 없어요.

어차피 설교는 갈라내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한 성령을 마신 성도는 알아들어요.

하나님께로 난 자는 들을 것이고 하나님께로 나지 않은 자는 안 들어요.

그러니 사람들이 안 듣는다고 짜증낼 필요가 없습니다.

실망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럼 선포를 하려면 자기가 본 것이 있어야지요.

설교는 선포라고 했으니 선포를 하려면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건 하나님께서 눈을 열고 귀를 열어주지 않으면 안 되어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깨닫는 마음을 주어야지만 성경 속에 기록된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읽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을 많이 묵상하라고 합니다.

묵상 하라고 하니까 책상머리에 앉아서 곰곰이 생각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마음속으로 읽고 또 읽으라는 말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고 또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말씀이 달음질을 해요.

말씀이 살아서 움직여요.

이것과 저것이 맞추어지고 저것과 이것이 맞추어지고 하나의 그림이 그려진단 말입니다.

아! 이걸 말씀 하시려고 이런 사건을 일으켰구나! 를 깨닫게 되어요.

 

저는 설교를 이렇게 합니다.

말하기가 참으로 조심스러운데 전 말씀이 머릿속으로 막 달음질을 해요.

길을 갈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운전을 할 때도 달음질을 해요.

그러면 성경이 보여요.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인단 말입니다.

그걸 증거하는 것입니다.

 

야! 이거 말해 놓고도 난감 한데!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직통 계시 받는 것이 아니니까요.

항상 24시간 그렇다는 말이 아니고 많은 시간들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학문에 깊이가 없고 신학적으로 해박하지 않아도 하나님 말씀을 깨닫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깨닫게 해 주시는 만큼만 이해하면 되어요.

어차피 성경은 계시이므로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어야지만 이해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억지로 머리 싸매고 성경을 알아야지 그러지 말란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세요.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잖아요.

하나님이 보여주시잖아요.

여기도 보게 하고, 저기도 보게 하고!

땅도 보게 하고, 하늘도 보게 하잖아요.

하나님이 보게 하여 주시니까 보는 것이지 사도요한이 자기가 억지로 본 것이 아니에요.

 

요한계시록 1장을 봅시다.

 

계 1:1-2=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계 1:9-20=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6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자 보세요.

예수그리스도에 계시라고 하지요.

계시란? 열어서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사도 요한을 주의 날에 성령의 감동으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보여 주시고는 증거 하래요.

너 다 보았지!

그럼 가서 전해!

그러는 겁니다.

사도 요한은 자기가 본 것만 증거 하면 되어요.

 

자 보세요.

사도요한이 성령에 감동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았지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았잖아요.

 

그럼 그 성령이 지금 누구에게 감동을 합니까?

성도들에게 감동을 하시잖아요.

그럼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은 사도요한이 본 것처럼 보이겠지요.

성경이 깨달아진단 말입니다.

 

계시를 받는 것이 아니고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은 것을 깨닫게 된단 말입니다.

지금 성령은 성경을 깨달아지도록 감동을 하세요.

성경으로서 하나님의 계시는 종결 되었어요.

더 이상 계시가 필요 없어요.

 

이젠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이 된 성경을 깨닫도록 성령이 감동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은 성경이 이해가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을 해석하는데 인간의 조건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못 배웠다고 기죽지 마세요.

 

이제부터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설명합니다.

하도 가짜들이 많아서 그래요.

쥐뿔도 모르면서 아는 척 하는 자들이 진짜 복음 아는 사람들을 핍박을 하기 때문입니다.

제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하나님도 알지 못하는 것들이 하나님을 아는 자들을 핍박한다고 하잖아요.

 

증거란? 자기가 본 것을 증거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여준 것을 증언하는 거에요.

사도요한처럼 “난 이렇게 목격을 했습니다!”

“난 이렇게 들었습니다!” 라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본 것을 증언하는 데에는 기술이 필요가 없어요.

그냥 본 것만큼 증거 하면 되어요.

 

더하거나 뺄 것도 없어요.

자기가 보고 듣고 한 것만 전하면 되어요.

즉 하나님이 깨닫게 해 준 것만큼만 전하면 된단 말입니다.

가감할 필요가 없어요.

괜히 유식한 척 잘난 척 하면서 원어 풀이한다고 하다가 엉뚱한 말을 하게 되어요.

그럼 설교가 사건 증거가 되는 것이 아니고 논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건이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일으켜 주십니다.

그러니 많이 본 사람은 많이 증거하고 적게 본 사람은 적게 증거하면 됩니다.

두 달란트 받았으면 두 달란트만 남기면 되고 다섯 달란트 받았으면 다섯 달란트 남기면 되어요.

주인이 맡겨준 것 만큼만 하면 되어요.

그럼 충성된 종이라고 하여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케 하십니다.

이게 예수의 증인이에요.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하지요.

성령을 받으면 예수의 증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럼 성령 받은 사람은 예수를 증거하게 됩니다.

성령이 그렇게 하신다니까요.

 

자 중요한 말을 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내가 성경 속으로 끌려들어가요.

성경 속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과 만남이 이루어지고 스킨십이 되어져요.

“나 여기 있고 예수 저기 있다” 에서 내가 예수 안으로 빨려 들어간단 말입니다.

그럼 성경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로 이입이 되어요.

 

어~ 성경이 사실이네!

이 이야기가 곧 내 이야기네! 라고 느껴진단 말입니다.

그럼 성경이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지금 현실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나의 이야기로 풀어진단 말입니다.

 

내가 구약 이스라엘이고!

내가 룻이고!

내가 욥이고!

내가 다윗이고!

내가 사도들이고!

내가 예수를 죽인 무리라는 것이 깨달아진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속에 희노애락이 나의 희노애락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죽인 자이고!

내가 예수로 구원 받은 자라는 것이 믿어진단 말입니다

 

우린 성경을 보아도 성경 속에서 착한 사람만 자기에게 오버랩을 시키는 못된 습성이 있어요.

그래서 성경 속에서 복 받은 사람은 자기이고 저주 받은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내가 저주 받은 자이고, 내가 복 받은 자에요.

 

우린 예수를 죽이기도 하고, 예수님 피로 용서받아 구원을 받기도 해요.

이게 우리의 실존이에요.

우리 옛 사람은 예수를 싫어해요.

그러니 날마다 우리 옛 사람은 예수를 죽이고 있어요.

이런 저주 받은 자에게 예수님의 피 뿌리심으로 용서 받고 살아가는 새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 성경을 보면서 어이쿠~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하다가도!

금새 “주여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주와 축복의 소리가 우리 몸에서 늘 교차하면서 터져 나와요.

그러니 날마다 죽었다 살았다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 속에 예수님을 실제 속에서 경험을 한 것을 증거하는 것이 설교에요.

그러니 좋은 설교란? 자기가 만난 예수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렇게 경험된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생명이 꿈틀거리고 그렇게 감사하고 눈물이 나고 마음에 평안을 느껴요.

그런데 어떤 분들의 말이나 설교를 들으면 논문 몇 편을 보는 것 같은데도 뭔가 마음이 싸늘하고 공허해요.

 

이 모두가 자기가 경험된 것을 토해내느냐!

아니면 남에게 들어서 전달하는 것이냐의 차이에요.

자기가 경험한 것은 산 것이지만 남에게 들은 것은 지식이에요.

남에게 들은 것이 내 것이 되지 않으면 지식이 되어 연기하게 됩니다.

 

이게 무서워요.

이 연기에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 속는단 말입니다.

경험되지 않은 것을 실제인척 연기를 하려고 하니 자꾸만 현란한 말로 좋은 미사여구로 포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척 하는 자들이 이런 자들이에요.

자기가 경험된 하나님이 아니고 남에게 들은 지식으로 아는 하나님이에요.

마치 수학 공식 외우듯이 학습으로 알아진 것입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으로 진짜 하나님을 만난 종들을 핍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가짜는 진짜를 핍박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진짜 앞에 서면 가짜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가짜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진짜를 없애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산 자의 하나님이란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살았다는 말은 항상 현재에요.

어제는 죽은 것이에요.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은 초대교회사를 기술하고 있어요.

역사란 실제 일어난 사건이에요.

하지만 기록된 역사는 지금으로 보면 지나간 과거에요.

과거는 죽은 것이에요.

현재만 산 것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은 성경 속에 가두어져 있지 않고 지금 우리 안에서 살아서 역사하세요.

그러므로 성경 속에서 자기백성들을 간섭하신 그 하나님을 지금 현재 내가 만날 때 산 자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성도에요.

 

성령은 성경 속에 하나님을 지금 현재 우리 삶 속에서 만나게 해 주세요.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는 성경을 현재화 하여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 하나님의 백성들에 희노애락이 지금 내 삶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령이 오시면 너희가 나를 증거한다고 하신 겁니다.

이렇게 성령이 만나게 해 주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을 전도라고 하고 이렇게 사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제발 신앙생활을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평범함 속에서 하루 하루 일어나는 사건 사건마다 하나님의 간섭하심임을 알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신앙생활을 공장에서 제품을 찍어내듯이 틀에 박혀서 하지 마시고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사세요.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신 삶이라 생각하고 말이에요.

우리의 삶을 취사선택해서 이건 하나님 일이고 저건 내 일이고 하지 말고 모두가 하나님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밥 먹는 것도 하나님 일이고!

똥 싸는 것도 하나님 일이고!

직장 생활하는 것도 하나님 일이고!

집안에서 설거지 하는 것도 하나님 일이고!

자식 키우는 것도 하나님 일이고!

공부하는 것도 하나님 일이고!

노는 것도 하나님 일이에요.

 

우리는 하나님 손 바닥에서 살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사나 죽으니 다 하나님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독자적으로 사는 인생은 단 한명도 없어요.

다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 일을 따로 떼서 구분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살게 해 주셔서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삶이 다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었듯이 우리의 모든 삶도 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어요.

그러니 놀 때는 열심히 놀고 일할 때는 열심히 일하세요.

모든 것이 주의 은혜라고 생각하고 살면 됩니다.

 

이것 이상 좋은 신앙은 없어요.

그러니 어깨에 띠 뛰고 전도지 돌려야지만 하나님 일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구분하는 것은 종들이나 하는 것이에요.

 

종의 영을 받았으니 자신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아들은 자신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구분하지 않아요.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들의 영을 받은 성도는 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알기 때문에 기뻐도 슬퍼도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가요.

그러니 아들에 영을 받은 성도는 성경에 이야기를 실제화 시키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경 속에 하나님이 지금 현재 내 삶 속에서 내 안에서 어떻게 살아서 일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읽어내야 합니다.

성경의 이야기들이 지금 내 삶 속에서 내 안에서 일어나야 해요.

 

이스라엘이 만난 하나님을 지금 내가 만나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만난 그 예수님을 지금 내가 만나야 한단 말입니다.

그 만난 예수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게 예수 믿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 속에는 반드시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믿음에 선진들의 삶에 모습들이 나에게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 육신으로 가시화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몸을 가지고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그려낸단 말입니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간섭을 받았던 성도들이 고생을 했으면 우리도 고생하게 되어 있어요.

그들이 걸었던 그 길을 우리도 걸어요.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했으면 우리도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어 있어요.

그들이 매를 맞았으면 나도 매를 맞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그들과 우리는 한 성령 안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앞서서 살았고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것 뿐입니다.

시대만 다를 뿐 인간은 동일합니다.

그 인간이 그 인간이에요.

그러니 살아가는 삶에 모습은 다 동일한 것입니다.



그들이 죄를 지었으면 우리도 죄를 지어요.

그들이 용서 받았으면 우리도 용서 받아요.

그래서 그들을 일컬어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예수님이 걸어 가셨던 그 길을 걸어가게 되어 있어요.

이건 마치 컨베어 벨트에 올려진 운명과 같아요.

우린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컨베어 벨트에 올려져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당한 그 모습으로서의 삶이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를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을 증거하게 되는데 그럼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쫓겨나게 되고 급기야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신다고 합니다.

내가 미리 말했다고 하잖아요.

그 때가 당하면 당황하지 말고 아! 이런 일이구나! 라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의 말씀대로 지식으로 관념으로 예수를 믿는 자들이 삶으로 예수를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으로 알아진 예수가 힘이 되어서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의 꿈처럼 파리한 소들이 살찐 소들을 죽이고 있어요.

 

파리하다는 말은 패역하다는 말입니다.

강포하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깡패란 말이에요.

굶주린 들개처럼 사나워요.

배가 고프니 입만 열면 악독이 나오고 부정이 나오고 비판과 정죄와 심판이 나오는 것입니다.

 

왜? 파리합니까?

예수를 먹지 못해서입니다.

공갈 젓꼭지를 빨아서 그래요.

지식으로 알아진 예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먹어야 하는데 복음을 지식으로 알고 있어서 그래요.

복음을 먹고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하는데 복음을 먹지 않고 지식으로 쌓고 있으니 속사람은 핍절하고 옛 사람만 강건해져서 복음을 힘으로 삼아 복음에 반(反)하는 짓을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나를 부인하게 하고!

힘을 버리게 하고!

섬기게 해요.

복음에 알맹이를 먹으면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나요.

 

그러나 알맹이가 없는 빈껍데기 복음을 가지고 있으면 반(反) 복음 적인 현상이 나타납니다.

복음으로 자기를 자랑하고!

복음으로 세력을 불리고 힘을 쌓고!

복음 안다는 것으로 으뜸이 되어 대접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난 너희들과 달라” 라는 식으로 교만을 떨면서 특권층으로 행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복음으로 복음을 가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죽인단 말입니다.

관념이 실제를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관념은 신앙이 아니에요.

그건 지식이에요.

지식이니까 복음 안다는 것으로 잘난 척 하면서 남을 무시하고 업신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거짓이에요.

 

제가 왜? 복음 복음하면서 남을 판단하는 자들을 소리 높여 가짜라고 하는 줄 아세요.

이건 바로 예수님 초림 당시에 유대인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정신을 모르고 율법 지킨 것으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였어요.

예수님이 지금 제자들에게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이 바로 율법을 관념으로 알고 있는 표면적 유대인들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표면적 유대인이 누군가 하면 복음을 지식으로 알고 신앙생활을 관념으로 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항상 거짓이 진짜 행세를 하면서 진짜들을 핍박했어요.

 

거짓 종들을 분별하는 방법을 알려 드릴게요.

 

거짓 종들의 특징 중 하나가 교회를 아주 비판해요.

이건 교회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고 교회를 비판하면서 자기를 열외로 둔다는 말입니다.

자신은 마치 그 치외법권에 있는 것처럼 말을 해요.

그 사람 말을 들으면 그 사람만 진짜고 나머진 다 가짜처럼 들려요.

그럼 믿음이 없는 교인들은 훅하고 넘어갑니다.

 

엊그제 성경 공부를 하면서 어떤 분이 그러는 겁니다.

금이빨 만들어준다는 기적을 행하는 그 목사가 그렇게 한국교회를 비판한다는 겁니다.

한국교회는 다 썩었다는 거에요.

맞아요.

 

저도 공감해요.

그런데 자기만 안 썩은 것처럼 말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그 말에 속아서 한 동안 그 목사를 따랐다고 합니다.

 

교인들은 한국교회를 비판하고 목사들을 비판하면 그렇게 좋아해요.

이건 자기가 욕하고 싶은데 잘못하면 하나님께 저주 받을까봐 겁이 나서 못하는 것을 목사가 대신 해 주니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심리를 잘 아는 목사들은 한국교회를 아주 신랄하게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쏙 빠지고 말이에요.

 

그러곤 하는 짓이 그렇게 욕을 하는 한국교회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요.

헌금을 강요하고 교회를 키우고 각 지역마다 지 교회라는 이름으로 체인점을 개설하고 왕국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속을 들여다보면 그 놈이 그 놈이에요.

 

제 주변에 이러한 사람들이 있어요.

한국교회는 다 틀렸다고 하면서 자기는 또 다른 한국교회를 만들고 있어요.

이런 말이 있지요.

욕하면서 배운다고!

 

한국교회는 다 타락하고 썩었다고 욕을 하면서 자기도 한국교회가 하는 행사 머리를 그대로 하고 있어요.

비판하면서도 흉내를 그대로 내고 있어요.

다른 교회를 비판하면서 자신은 뭔가 다른 교회를 만들고자 해요.

그래 보아야 결국 또 다른 교회일 뿐이에요.

 

이런 목사들의 특징은 자기 교회에 다니는 것을 교인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어요.

그럼 교인들은 다른 교회는 복음 몰라!

우리 교회만 복음 알아!

교인들은 그렇게 쇠뇌 되어 가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교인들은 자기 교회만 타락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엘리트화 되어가요.

결국 또 다른 교회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신선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나물에 그 밥이에요.

 

다른 교회를 지향한다는 것 자체가 복음을 모르고 있다는 반증이에요.

그러니 복음으로 다른 교회를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국 관심사는 복음이 아니고 교회에요.

그러니 복음을 핑계 삼아 교회를 차별화 하는 것입니다.

차별화 하여도 결국 초록은 동색일 뿐입니다.

 

목사가 복음을 이용하기 시작하면 그 복음으로 꾀를 도모하게 되어요.

무슨 꾀를 도모 할까요?

이는 복음으로 자기 영역을 넓히고 자기 아성을 구축한단 말입니다.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묶어서 교주노릇하게 되어요.

자신만 복음 전하는 신령한 자로 행세한단 말입니다.

 

이러한 목사들은 항상 자신은 다른 목사와 다름으로 남기고자 해요.

이게 교인들을 끌어당기는 미끼인 겁니다.

교인들 눈에 그 목사는 다른 목사들과 뭔가 다르다고 생각되면 추종하게 되어 있어요.

목사를 신성시하게 된단 말입니다.

 

교인들 눈에 목사가 안 보이고 예수님만 보이게 하여야 할 자가 교묘하게 교인들 눈에 목사가 보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복음으로 말이에요.

이걸 광명의 천사라고 합니다. 

그러니 교인들 눈에 목사가 보이니 교인들은 그 목사에게서 뭔가 신령한 것이 나온다고 믿고 추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그 교인에겐 그 목사는 중보자가 되는 것입니다.

신(神)이 되는 거에요.

 

그 목사와 함께 하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한다고 착각하게 되어요.

여기에 미혹당하면 그 목사만 목사이고 다른 목사는 목사로 보이지 않아요.

그러니 다른 목사님들을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 시대 목사를 추종하는 교인들이 다 이런 부류에요.

예수를 안 믿고 목사를 믿는 것입니다.

그 속에 예수가 없기 때문에 사람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증거가 없으면 유명하다고 하는 사람을 쫓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풍조에 따라 쏠리게 되어 있어요.

 

시편 기자는 이런 자들을 일컬어 “바람에 나는 겨” 라고 했어요.

그 속에 예수라는 알맹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 귀는 커져서 지식적으로 알고는 있지만 그 예수가 죽은 예수이기 때문에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겨를 먹었기 때문에 이리 저리 사람 따라 쫓아다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영혼의 닻과 같아요.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더 이상 이리 저리 누구를 쫓아다니지 않아요.

예수님 안에서 살아요.

예수님을 만난 성도는 갈급해하지 않아요.

그냥 믿어지는 것으로 살아요.

누가 뭐라고 하여도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에게 닻을 내리고 감사하며 산단 말입니다.

 

사람을 따라 이리저리 요동을 친다는 것은 아직 닻을 내리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사람을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람은 불안하면 그 불안을 해소키 위하여 힘을 좇아가게 되어 있어요.

남의 힘을 빌려서라도 자기 안에 불안을 해소코자 합니다.

그래서 유명하다고 하는 목사에게 기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불안은 누구에게 기댄다고 사라지지 않아요.

마음에 불안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사라져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사라집니다.

그래서 사랑 안에 있는 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일 4:18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자 보세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고 하지요.

사랑은 예수님이에요.

그러니 그 안에 예수님이 있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어요.

두려움을 다른 말로 갈급함이에요.

목마름이에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나를 믿는 자는 그 안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난다고!

이는 자기 안에 성령의 증거를 가진 성도는 목마름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니까 예수님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지요.

 

수가성 여인처럼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여섯 남편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 길러 온 물동이를 내 던지고 나 예수 만났다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물동이를 내 던졌다는 것은 이젠 목마름을 해갈하고자 찾아다니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가 자기가 만난 예수가 있는 사람은 예수를 찾아다니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증거가 있는 사람은 다른 곳에서 증거를 구하지 않아요.

그러니 누가 유명하다 하여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누가 유명하다고 그를 추종하고 따르는 자들은 아직 예수를 만나지 않은 자들이에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목사에게 말씀을 들으면 뭔가 다 얻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그 사고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목사에게서만 복음이 나온다고 믿는 그 사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사람을 추종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그 안에 성령이 거하는 성도는 절대로 사람을 따르지 않아요.

 

전 이러한 일들을 많이 경험을 하였어요.

감사하게도 그 때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빼내 주셔서 이러한 집단이나 이러한 세력들의 노림수를 너무도 잘 알아요.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좌우지간 어떤 특정한 집단이나 특별한 사람에게 가야 된다고 하는 것은 사단의 역사입니다.

그것이 교회이든 목사이든 미혹이에요.

 

마태복음 24장을 봅시다.

 

마 24:23-28=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26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7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28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찌니라”

 

지금 예수님께서 이 시대 영적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위의 본문은 넓은 의미에서는 어느 시대이고 적용되는 말씀이지만 좁게는 예수님이 재림을 하실 때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어요.

제자들이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어떤 징조가 있습니까! 라고 물으니 이러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종말의 징조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후로부터 종말입니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끝이잖아요.

그러니 예수님이 승천하셨으니 이제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이렇게 깨어 있는 삶을 종말론적 삶이라고 해요.

 

지금은 이미 종말 모드에 돌입이 되었어요.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니 종말 모드인 겁니다.

이제 예수님이 오시면 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종말에 모습을 가짜 그리스도가 우후죽순처럼 일어난다고 했어요.

가짜 그리스도란? 그리스도로 행세하는 모든 자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들의 특징이 바로 사람을 몰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마치 밀교 형식으로 사람을 끌어 당겨요.

 

밀교(密敎)란? 비밀을 알려준다는 말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나만 복음 안다!

그 목사만 복음 전한다! 라는 식으로 미혹하는 것입니다.

어느 특정한 목사를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광야 있다고 하여도 나가지 말고 골방에 있다고 하여도 믿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는 자기 안에 있기 때문에 찾으러 다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그 안에 예수가 있는 성도는 여기저기 찾으러 다니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어느 사람을 추종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예수님께서 광야에도 나가지 말고 골방에 있다고 해도 믿지 말라는 것은 예수는 내가 쫓아다닌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자기가 예수를 찾아 다녀서 예수를 믿은 사람은 없어요.

예수님은 우리가 열심히 찾아다닌다고 해서 만나 주시는 분이 아니에요.

 

그리고 어느 특정한 목사의 말을 듣는다고 해서 예수가 믿어지는 것도 아니에요.

예수님은 우리의 노력에 결과로 믿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믿게 해 주셔야지만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 믿고자 애쓰지 말란 말입니다.

 

우리는 법 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인과율을 가지고 있어요.

인과율이란? 원인에 의한 결과를 도출해 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예수도 내가 열심히 찾고 찾으면 이게 원인이 되어서 예수를 만나는 결과를 얻어 낼 수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자 이리저리 쫓아다니는 것입니다.

백 날 쫓아다녀 보세요.

만나지는가!

못 만나요!

 

내가 열심히 쫓아다녀서 예수를 믿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예수 믿음은 내 열심의 결과물이이지 은혜 일 수가 없습니다.

그건 가짜 예수에요.

이런 가짜 예수가 진짜 예수를 죽인단 말입니다.

위에 말씀이 이를 말해주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광야로 골방으로 예수 믿으려고 쫓아다니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 믿게 해 주겠다는 사람을 따라 다니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가 신령하다고 따라 다니지 말란 말입니다.

설령 그 목사가 신령하다고 하여도 거기서 믿음이 나오지 않아요.

 

믿음은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시는 것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사람을 추종하지 말란 말입니다.

어느 목사에게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란 말이에요.

말씀은 듣되 신봉하지는 말란 말입니다.

 

목사에게 말씀을 들어서 믿음이 생길 것 같으면 울산목양교회 성도들은 다 믿음이 살아서 펄펄 날아다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전 아직도 저희 교회 성도들을 보면 저 사람이 진짜 성도가 맞나!

아니면 마당만 밟고 다니는 교인인가!

어떨 땐 엄청 믿음이 좋은 것 같다가도!

어떨 땐 영 아닌 것 같기도 해요.

 

모르겠어요.

알고 싶지도 않아요.

그전엔 내가 알고자 했는데 이젠 알고 싶지 않아요.

방관한다는 말이 아니고 그건 내 소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든지 말든지 주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주께서 믿을 사람은 오늘 하루 말씀을 들어도 믿게 할 것이고 못 믿을 사람은 수십 년 말씀 들어도 못 알아먹게 할 것이니까요.

 

한 사람이 일어서고 앉고 하는 것은 주께서 하시는 일이지 목사가 할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냥 전 말씀만 증거하면 되어요.

제가 증거하는 것이 복음이라고 여겨지면 가라고 등 떠밀어도 남아서 들을 것이고 아니라고 하면 붙잡아도 떠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시지 않으면 예수님하고 같이 다녀도 예수를 못 믿어요.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동행했어요.

예수님과 같이 말하면서도 예수를 몰라보았어요.

이걸 역(逆)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시면 어디에 있어도 믿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어디에 누구에게 가야 한다는 것을 버리세요.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면 성경 속에 예수님이 살아서 내 안으로 들어와 계신 것을 알아요.

이런 사람은 예수님을 찾아다니지 않아요.

예수님으로 살아요.

자신의 삶 모두가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살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고 감사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새 언약에 속한 성도에요.

 

그럼 성도가 예수 때문에 왜? 핍박을 받는지에 대하여 상고해 봅시다.

 

인간들은 왜? 신을 찾을까요?

신이 좋아서가 아니라 자기 소원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소원이란? 탐욕이에요.

 

인간이 바라고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힘입니다.

왜? 힘을 갖고자 합니까?

그 속에 힘에 원리가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 세상은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으로 다스려져 갑니다.

그러므로 인간 세상에선 힘이 곧 생명입니다.

인간이 신을 찾는 이유도 다 힘을 얻어서 살아남고자 함 입니다.

죽고자 신을 찾을 인간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살고자 찾습니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인간은 일평생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욕심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불신자도 욕심이 있고 신자도 욕심이 있습니다.

교인도 욕심이 있고 목사도 욕심이 있습니다.

욕심을 이루고자 서로가 서로를 이용합니다.

 

욕심을 자기 힘으로 얻지 못하니 신의 도움으로 얻고자 합니다.

여기에 인간의 정성과 열심이 동반이 됩니다.

인간의 사고는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고 정성을 다하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신앙심은 항상 열심과 충성을 바탕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펴면 아주 역설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이 그럽니다.

너희들 나 때문에 죽임 당한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버려짐을 당한다고 합니다.

이건 우리를 아주 당황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우린 예수를 믿기 때문에 세상에서 잘 되고자 합니다.

예수를 이용하여서 힘을 키우고자 합니다.

자아 확장을 꿈꾼단 말입니다.

내가 버려지고 죽어지는 것이 아니라 승승장구하고 싶어 한단 말입니다.

 

이건 우리가 복음을 알아도 마찬가지에요.

복음으로 잘난 사람으로 대우를 받고 싶어 합니다.

복음을 알기 때문에 어디 가서도 항상 상좌에 앉고 싶어 한단 말입니다.

복음 속엔 자기 부인과 버려짐이 있는데 우린 도리어 복음을 알기 때문에 남에게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복음을 알기 때문에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복음 아는 것으로 마치 정치판처럼 끼리끼리 당(黨)을 짓고 패거리정치 하듯이 세 불리기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조직을 만들지 못해서 한이 맺힌 줄 알고 모이면 조직을 만들고자 하고 세력을 키우고자 하고 또 다른 반목과 갈등을 유발시키고 있어요.

 

자칭 복음 안다고 하면서 말이에요.

그러니 얼마나 이율배반적입니까.

이렇게 되면 복음이 도리어 우리 때문에 가려지게 됩니다.

복음으로 교회나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거치는 것이 되어 해악을 끼치고 있어요.

 

과거에는 유대인들이 하나님 하나님하면서 하나님 영광을 가렸듯이!

지금은 복음 복음하면서 도리어 복음을 가리는 짓을 하고 있어요.

복음 아는 것으로 잘난 척 유세를 떨고 있단 말입니다.

왜? 복음 안다는 것으로 또 다른 특권층을 형성하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건 복음을 이용해서 자기 탐욕을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복음 속에 담긴 십자가 정신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에요.

그러니 복음으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 반대 현상을 추구하고 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타나는 것이 예수와 제자들의 모습이 아니고 도리어 반대로 예수와 제자들을 핍박하고 죽인 유대인들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왜? 예수 믿는 것을 남이 알아주기를 바랍니까?

왜? 복음 아는 것을 남에게 자랑하고 싶어 합니까?

이건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 복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 옛 사람으로서 복음을 받으면 나를 살게 하는 도구로서 복음을 이용하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내가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복음으로 날마다 옛 사람을 죽여요.

내가 죽고 예수로 살게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주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어요.

그냥 범사에 용서 받은 자로서 감사하며 살면 되어요.

아니~ 주님이 알아주면 되잖아요!

내가 주를 알고 주가 날 안다고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까.

 

사람의 판단은 중요치 않아요.

아무리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아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면 소용없어요.

천국은 하나님의 인정하면 끝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의 증거를 가지고 있으면 끄떡없어요.

이 증거가 없으면 복음을 앞 세워서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뭔가 자꾸만 꼼수를 쓴단 말입니다.

안 그런 척 하면서 호박씨 까고 있어요.

 

예수가 믿어지십니까!

그럼 그냥 감사하며 사세요.

하나님께 용서 받았잖아요.

용서 받은 자로서 감사하며 살란 말입니다.

 

가정에서이든지!

직장에서이든지!

이웃에게 구원받은 자로서 넉넉함으로 관대하게 다정다감하세요.

 

“코람데오” 란 말 알잖아요.

“코람데오” 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에요.

하나님이 지금 날 보고 있다고 의식하고 사세요.

사람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것이 “코람데오” 정신입니다.

 

이렇게 산 사람들이 달란트 비유에서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종입니다.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종들은 항상 주인이 있다는 자세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시키지 않아도 자기에게 맡겨진 것에 충실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이들은 주인이 항상 곁에 있다는 자세로 살았어요.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이 멀리 떠났으니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니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게으름을 피운 겁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달란트를 남겨야 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주인이 있느냐 없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넌 주인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없다고 생각하느냐!

주인이 있다고 생각하면 충성된 종들처럼 범사에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요.

가정이든 직장이든 그 어디든 주님이 거기 계신다 생각하고 살아요.

그러나 주인이 없다고 생각하면 게을러져요.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에서 우리에게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 뒤에도 주님이 서 계신 것을 보고!”

“아내 뒤에도 주님이 서 계신 것을 보고!”

“자식들 뒤에도 주님이 서서 간섭하고 있음을 보고!”

“이웃 뒤에도 주님이 서서 다스리고 있음을 보시고!”



환란이든 평안이든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 믿으시고 내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곧 하나님께서 일으킨 것이라 생각하고 살란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 다니는 것을 신앙생활의 전부처럼 생각하는데 그건 아니에요.

하나님은 교회에만 계시지 않아요.



직장에도 계시고!

가정에도 계시고!

교회에도 계세요.

 

그러니 직장생활이나 교회에 오는 것을 성(聖)과 속(俗)으로 구분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 있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느냐가 중요해요.

주일날 직장에서도 주님을 의식하고 근무하면 예배하는 것이에요.

반대로 주일날 교회에 와서 주님을 의식하지 못하면 예배드린 것이 아니에요.

 

예배란? 하나님을 의식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지 어느 특정한 장소에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들어야 예배가 아니에요.

그건 구약식 예배에요.

 

예배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교제는 때와 장소가 필요 없어요.

무시로 어디서든지 가능해요.

어걸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이런 예배가 가능해져요.

 

성령이 오면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가 되어요.

주일날 교회에 모이는 것은 한 주간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한 것을 성도들과 서로 함께 간증하고 나누면서 교제하기 위함입니다.

한 주간 하나님을 잊고 살다가 주일날 교회와서 하나님 안녕하세요! 하는 것이 예배가 아니에요.

그건 교회에 온 것이지요.

 

제발 신앙을 이원론으로 구분하지 마세요.

범사에 하나님을 의식하고 감사하면서 사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예배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교회로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교회와 가정과 직장이 성과 속으로 구분이 되지 않고 하나로 이어진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을 보세요.

 

롬 12:1-3=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예배란?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그 피 뿌림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로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가치에 함몰당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면 예배인 것입니다. 

또한 신앙생활이란? 우리가 거창하게 뭘 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산을 옮기고!

홍해 바다를 가르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에요.

그건 주님이 하실 일이에요.

우린 다만 구경만 하고 아! 주께서 이러한 일들을 일으키셨구나! 받아들이란 말입니다.

 

우리 삶 속에는 갖가지 사건과 사고들이 일어나요.

성경은 이 세상을 고해(苦海)라고 합니다.

고생의 바다란 말입니다.

고생의 바다이기 때문에 늘 크고 작은 고생이라는 파도가 밀려와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홍해 바다 같은 사건도 일어나고!

난공불락과 같이 한숨짓게 하는 여리고 성과 같은 암담한 일도 일어나요.

골리앗처럼 거대한 놈이 우리 인생의 문젯거리로 앞을 가로막고 있을 수도 있어요.

때론 풍랑으로 배에 물이 들어와 금방이라도 침몰할 것 같은 급박한 일도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주께서 허락하여서 일어난 것이란 것을 잊지 마세요.

그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간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는 문제만 보이지 하나님은 보이지 않아요.

 

그러니 그 문제로 주저앉아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쉬고 울고 있는 겁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허락 하여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욥을 보세요.

사업이 망하고 자식이 죽고 마누라가 도망가는 일들이 어디 욥이 원해서 일어난 일인가요.

욥은 도리어 이러한 일이 안 일어나기를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했어요.

그런데 고약하게도 하나님이 욥이 바라지 않던 일들을 파도처럼 일으킵니다.

자기의 원함과 반대로 숨 쉴 틈 없이 사건이 일어났어요.

 

모두가 하나님께서 일으킨 사건이에요.

성경에 왜? 욥에 이야기를 하고 있나요.

그럼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욥기를 보라고 합니까?

이는 욥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욥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욥처럼 다스려 간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욥기를 보면서 욥에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 보아야 합니다.

욥이 만난 하나님을 만나야 해요.

그래야 욥기를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욥을 결말을 보았잖아요.

처음 욥보다 나중의 욥이 다 창대 했잖아요.

처음 욥은 우리 옛 사람을 상징하고 나중 욥은 우리 새 사람을 상징해요.

처음 욥은 우리 겉 사람을 상징하고 나중 욥은 우리 속 사람을 상징해요.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고 있어요.

 

고린도전서 15장을 보세요.

 

고전 15:36-44=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하나님은 씨를 주셨습니다.

우리 몸에 씨가 있어요.

엄밀히 말해서 우리 안에 예수라는 하늘에 생명이 있어요.

예수님의 생명은 우리가 죽을 때 나타나요.

 

이 씨를 발아(發芽)하여 형체를 찾게 하려고 씨를 죽인다고 하잖아요.

육에 몸으로 심어서 신령한 몸으로 살린다고 합니다.

이 육신은 땅에서 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육신 속에 하늘에 생명을 담아 놓았어요.

 

하늘에 생명은 육신이 죽어야 터져 나와요.

육신은 거름과 같이 후패하여지고 새 사람이라는 생명이 싹을 내고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육신은 씨와 같이 죽어야 할 것들이에요.

씨가 죽어야 씨 속에 있는 새 생명을 틔워요.

씨앗의 죽음 속에서 새 생명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겉 사람도 영광을 주고 속 사람도 영광을 주고 하시지 않아요.

그건 우리 탐욕입니다.

“나” 라는 겉 사람이 죽어야 예수라는 속 사람이 살아나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겉 사람을 날마다 죽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걸 로마서 12장에서 산 제물이라고 하고 이런 삶을 영적예배라고 하였어요.

 

그런데 우린 복음을 핑계대고 우리 겉 사람을 치장하고자 합니다.

겉 사람을 화려하게 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북극 탐험 한다고 나대는 인간들처럼 애꿎은 개만 죽이고 있는 것이잖아요.

우리가 잘난 척 나대면 나댈수록 남에게 상처만 주고 더러운 냄새만 풍깁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까 하는 일마다 내 자랑이 남고!

내 의가 쌓이고!

급기야 그 의로 남을 차별하고 깔보고 상처를 주는 일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들을 이런 짓을 하지 않았어요.

복음 때문에 버려지는 아픔을 당했어요.

 

바울의 증거를 들어봅시다.

 

고전 4:9-13=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먼저 말합니다.

이건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이렇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을 취사선택해서 살아갈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이끌림에 끌려 갈 뿐입니다.

하루 하루 살아가면서 이 사실을 더 깊이 더 많이 알아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아!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이구나! 를 깨닫고 하나님에게 맡겨 가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깨달아져야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감사하며 살아갈 수가 있어요.

 

원망하고 불평한다고 달라지지 않아요.

성경이 말하는 것은 고난은 피하는 것이 아니고 지나가는 것이라고 해요.

피할 고난이라면 애초부터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어요.

 

고난을 주실 때에는 다 필요하고 생각이 있어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주는 것은 환란이 아니라 평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지나고 나면 다 감사해요.

 

전 지금까지 수많은 일들을 겪어 왔어요.

환경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지만 사람에게도 수많은 아픔을 당하였어요.

때론 위로하는 동무를 만날 때도 있었고!

때론 심장을 도려낼 정도로 아프게 한 사람들도 있었어요.

 

신앙적인 면에서도 지독한 율법 아래 종노릇도 하였고!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각양의 은사도 맛 보았어요.

한 고비 한 고비 지나 올 때 마다 참으로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저주스러웠어요.

 

자살도 생각해 보았고!

목회도 수없이 포기하고자 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런데 말이죠.

한 고비 한 고비 넘겨 올 때마다 맷집이 생겨요.

예전에 악악거리고 거품을 물고 씨~씨하며 분을 품던 일도 이젠 씨익~ 웃어요.

 

중요한 것은 한 고비 한 고비 넘어 올 때마다 나를 포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작아 보이고! 세상이 작아 보여요.

가정이 작아 보이고! 자식이 작아 보여요.

교회가 작아 보이고! 교인들이 작아 보여요.

작아 보인다는 말은 큰 의미가 사라진단 말입니다.

 

과거엔 없으면 죽을 것 같았는데 이젠 없어도 허! 허 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만큼 내 자신의 영광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둔감해 졌다는 말입니다.

옛날엔 누가 나를 음해하고 욕을 하면 당장이라도 쫓아가서 요절을 내고 싶었지만 이젠 그러려니 해요.

 

마치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쫓겨 갈 때에 시므이가 돌을 던지면서 저주하고 쌩욕을 할 때 신하들이 저 놈을 당장 요절을 내겠다고 하자 다윗이 그냥 둬라! 저것도 다 하나님이 시켜서 하는 일이니 그만 두라고 하는 것과 같이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여겨진단 말입니다.

그러니 때리면 맞고 욕하면 욕 들어 먹는 것입니다.

 

과거엔 울화가 치밀었지만 이젠 견딜만 해요.

그냥 하늘 한번 쳐다보고 하나님에게 시부렁거려요.

하나님 꼭 이렇게 하여야 했나요?

속이 시원하십니까?

 

이건 내가 신앙이 깊어서가 아니라 내가 악악거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에 포기하는 것입니다.

늘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마음들이 시시때때로 생긴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조금 볼 수 있고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러니 쬐끔 산전수전 겪어 온 세월이 이젠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힘들고 어려울 때 가장 큰 위로를 받은 말씀이 벧세메스로 가는 소 이야기입니다.

제 모습이 바로 법궤를 싣고 가는 암소인 겁니다.

암소는 울면서 결국 하나님이 정한 곳에 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울면서도 가게하세요.

 

운다고 그만 두게 하시지 않아요.

그리고 어깨에 진 짐을 내려 주지도 않아요.

우리에게 법궤를 지워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길을 인도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세요.

법궤가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리곤 결국 제물로 바쳐집니다.

 

이게 성도들의 길이에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야 하는 이 길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치 않아도 하나님은 진짜 자기 백성들은 예수님이 걸어갔고 사도들이 걸어갔던 그 길을 걷게 하십니다.

 

이 길을 먼저 예수님이 가셨어요.

우린 그 뒤를 따라갑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라는 컨베어벨트에 올려져 가게 되어 있어요.

예수 믿는 자들은 다 그 컨베어벨트에 올려져요.

하나님이 올려놓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사도라고 하면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고 인기를 누리면서 대접을 잘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바울의 증거는 정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이기 때문에 만물의 찌끼같이 두셨다고 합니다.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두었다고 합니다.

이건 우리의 생각을 비껴가도 한참을 비껴가는 말씀이에요.

 

그럼 사도란 어떤 자인가를 살펴보고 마칩시다.

 

사도란? 보내심을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선 여호와의 사자라는 말과 동일합니다.

구약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요.

여호와의 사자란? 여호와로부터 보내심을 입은 자란 뜻입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자로 오셨습니다.

이를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하여 보내심을 입고 오셨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 입장에서 세상을 판단하고 심판을 해 버립니다.

 

여기서 세상이란? 좁게는 유대인을 말하고 넓게는 모든 인간을 말합니다.

유대인이란? 인간의 행함을 근거로 하고 있는 모든 신앙을 말해요.

그러니 예수님은 지금 율법 신앙 아래 있는 자들에게 일갈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율법을 지켰다고!

그건 하나님 앞에 악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은 인간을 이렇게 본다고 말해 줍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모두 죄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합니다.

 

인간을 죄인이라 함은 인간에게선 하나님의 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조건으로 나오는 것은 전부 이단입니다.

인간의 행함에 가치를 두는 것도 이단입니다.

이렇게 되면 율법 지킴을 신앙으로 들고 나아온 유대교는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자로서 유대인들에게 고발합니다.

너희 신앙은 이단이라고!

너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가짜라고!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합니다.

 

이걸 유대인들이 받아들일까요?

아닙니다.

누가 뭐라고 하여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신앙이야말로 정통신앙이라고 자부했습니다.

유대교 신앙은 조상 대대로 유전되어 지켜 온 전통적인 신앙입니다.

그래서 자긍심이 대단했습니다.

자신들의 신앙만이 옳고 그 이외는 모두가 틀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완전히 유대인들의 자긍심을 깨트려 버립니다.

너희가 바로 이단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말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미쳤다고 하고 예수님의 말을 수용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이단이라고 하여서 죽여 버립니다.

이게 여호와 사자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도로 보내심을 입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세상에서 예수님과 동일한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 하실 때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신다고 했습니다.

이건 아주 고약한 운명으로의 초대입니다.

 

알다시피 양은 이리의 먹잇감입니다.

서로 싸우는 대상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먹고 먹히는 관계입니다.

양은 싸우지 못해요.

공격 능력이 없어요.

 

이리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이 양입니다.

얼마나 미련한가 하면 이리가 뜯어 먹는데도 가만히 있어요.

이게 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도를 양이라고 합니다.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은 싸우라고 보내는 것이 아니고 먹힘 당하라고 보내는 것입니다.

가서 힘없이 죽으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양처럼 오셔서 죽임을 당하였어요.

우린 이리처럼 예수라는 양을 잡아먹었어요.

그런데 그 양 때문에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을 살리려고 예수라는 양을 먹잇감으로 주어서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양을 이리에게 보낸다는 것을 사용 할 수가 없어요.

이건 인간의 본성과 정 반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남을 죽이고 내가 살고자 합니다.

인간은 자기 밖에 몰라요.

무엇을 하든지 내가 살고자 움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본성에 반하는 일을 하게 하십니다.

이건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제 정신으로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제 정신으로 못하니 성령을 주어서 제 정신머리를 죽이는 것입니다.

 

미치게 하여서 죽을 자리로 밀어 넣습니다.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예수 따르기 입니다.

이게 제자의 길입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예수 이야기를 하다가 죽임 당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말을 다 해도 좋으니 제발 예수 이야기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럼 살려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다른 말은 다 안 해도 좋으니 꼭 예수 이야기만 하겠다고 합니다.

 

무슨 놈에 심보입니까?

예수 이야기만 안하면 팔자를 고치는데!

예수 이야기를 해서 팔자를 버려 버립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마귀는 백 가지 다 해도 좋은데 예수만 믿지 말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백 가지 다 안 해도 되니 예수만 믿으라고 합니다.

이러면 접점이 없습니다.

대화가 안 됩니다.

 

유대인들은 제자들에게 그 예수 이야기 하나만 안하면 안 되느냐고 하는데!

제자들은 그 예수 이야기 하나만은 꼭 해야 되겠다고 합니다.

도대체 예수가 뭐 길래!

그 예수가 누구 길래!

죽는 줄 뻔히 알면서도 하여야 하는 건가요.

 

아니 성령을 받아 놓고 눈치껏 하면 안 됩니까?

상황 봐 가면서!

눈치 봐 가면서 적당히 하면 안 되느냐 이 말입니다.

목숨을 버려 가면서까지 꼭 예수 이야기를 하여야 하느냐 이 말이에요.

사람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말을 꼭 하여야 하느냐 입니다.

좀 융통성이 있어야지요.

 

그런데 이게 안 되어요.

융통성이 없어요.

복음이라는 것이 눈치 봐 가면서 전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복음은 우리 안위를 생각하지 않아요.

 

복음을 받으면 가만있지를 못해요.

누룩처럼 부글부글 끓어요.

불의를 보고 가만있지를 못해요.

죄를 고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하지요.

사랑이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안에 있는 성도는 불의를 보고 가만있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면 어떻게 된다는 계산을 하지 않고 그냥 내 놓고선 감당을 못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이렇게 산 사람이 있어요.

누구냐 하면 예레미야 라는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를 일컬어 눈물의 선지자라고 합니다.

 

이 말은 울면서 선지자 노릇을 했다는 말입니다.

얻어맞아 가면서 하나님 말씀을 증거 했어요.

사람들이 미워하고 때리면 안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 미워하는 소리를 하다가 얻어 터졌어요.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예레미야 속에서 살살 꼬드겼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가 하도 미움을 받으니 나~ 이제부터 하나님 말씀 안 전할래!

그러면서 삐집니다.

 

예레미야 20장을 봅시다.

 

렘 20:8-10=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 붙는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없나이다 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예레미야가 하도 바른 소리를 하니까 친구들도 미워합니다.

그래서 미움을 받고 따돌림을 당합니다.

그래서 이젠 다시는 바른 소리 안 하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눈 찔끔 감고 모르는 체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보고 있자니 속에서 열이 채는 것입니다.

하는 짓거리들을 보면 울화통이 치미는 것입니다.

그래서 옜다 모르겠다고 하고선 내 뱉어 버립니다.

 

야! 이 놈들아~

그것도 신앙생활이라고 하고 있느냐!

그것도 교회라고 하느냐!

그건 교회가 아니고 절간이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여지없이 돌이 날아옵니다.

넌 뭐냐!

네가 뭔데!

신앙생활 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틀렸다고 하느냐!

교회가 잘 돌아가고 있는데 왜? 지랄이냐 라고 하면서 두들겨 팹니다.

 

예레미야는 흠씬 두들겨 맞고 난 후 하나님께 따집니다.

내 이럴 줄 알고 안 한다고 했잖아요.

안 한다! 안 한다! 하는데 왜? 날 꼬셔가지고 이런 억울함을 당하게 하느냐고 하소연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가 널 이러려고 선택을 했다고 합니다.

 

이러면 대책이 없습니다.

돌아 버립니다.

하나님을 이길 수 없으니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신자의 팔자입니다.

모든 성도는 울면서 벧세메스로 가는 두 마리 암소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눈물로 씨를 뿌리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이를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눈물 흘릴 일이 생기더라도 실족하지 말라고 합니다.

애들아! 너희들이 나 때문에 교회에서 미움을 받고 쫓겨나고 욕을 먹고 끝내는 이단이라고 정죄당하여 교회로부터 죽임을 당하여도 섭섭해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모두는 다 나 때문에 당하는 것이니 참작하라고 합니다.

그게 다 내가 걸어 온 길이라고 합니다.

내 미리 일러 주었으니 그런 일을 당하면 놀라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 뜻대로 인생이 살아지지 않는다고 해서 낙망하지 마세요.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범사가 다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감사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간섭하심을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간섭하심이 때론 아픔으로 다기오지만 그 아픔조차도 하나님의 사랑임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옵소서. 그리하여 범사가 하나님의 동행하심이라는 것을 깨닫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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